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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당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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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 ㅣ | ㅣ | 청향각 | 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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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풍각 | ┏ | ㅗ | ㅡ | 융경헌 | 대조전 | 흥복헌 | ┛ | ㅣ | |||||||||||||||||||||||||||||||
ㅣ | ㅣ | 수랏간 | 관리합 | ㅣ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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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ㅡ | 요휘문 | 경극문 | ㅣ | 창경궁 | |||||||||||||||||||||||||||||||
경추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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ㅏ | 선평문 | 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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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춘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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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 ㅣ | ㅣ | ㅣ | 함양문 | 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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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북 진설청
내재실 선원전 서남 진설청 동남 진설청 |
만수문 | ┏ | ㅡ | 건중문 | ㅡ | ㅡ | ㅗ | ㅡ | ㅓ | 희정당 | 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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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 양지당 | 만안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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ㅓ | 선정전 | ㅣ | ㅣ | ㅣ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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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 책고 | 인정전 | ㅣ | ㅣ | ㅣ | ㄴ | ㅡ | ┛ | 관물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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ㄱ | |||||||||||||||||||||||||||||
ㅣ | 봉모당 | 억석루 | 연경문 | 만복문 | 향실 | ㅏ | ㅡ | 선정문 | ㅡ | ㅓ | 성정각 보춘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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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분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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ㅣ | 운한문 | 영의사 | 예문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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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시문 | 삼삼와 | 승화루 | 한정당 | 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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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현문 | 전의사 | 취운정 | 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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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문원 | 검서청 | 약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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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범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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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선재 | ㅜ | 석복헌 | ㅣ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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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 | ㅡ | ㅡ | ㄱ | 홍문관 | ㅣ | ㅏ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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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장락문 | ㅓ | 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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ㅏ | ㅡ | 인정문 | ㅡ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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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교 | 진선문 | 숙장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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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호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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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병조 (창덕궁관리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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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청 (어차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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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화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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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의원 | 치미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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ㄴ | ㅡ | ㅡ | ㅡ | ㅗ | 단봉문 | ㅡ | ㅡ | ㅡ | ㅡ | ㅡ | ↓ | 종묘 | ㅡ | ㅡ | ㅡ | ㅡ | ㅡ | ㅡ | ㅡ | ㅡ | ㅡ | ㅡ | ㅡ | ㅡ | ㅡ | ㅡ | ㅡ | ㅡ | 북신문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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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대조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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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보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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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희정당 | 창덕궁 대조전 | 창덕궁 선원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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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대조전[1] |
대한민국 보물 제816호 | |
창덕궁 대조전 昌德宮 大造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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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
분류 | 유적건조물 / 정치국방 / 궁궐·관아 / 궁궐 |
수량 | 1동 |
지정연도 | 1985년 1월 8일 |
제작시기 |
조선 시대,
1405년 (창건) 1608년 (중건) 1647년 (중건) 1835년 (중건) 1920년 (중건) |
[clearfix]
1. 개요
창덕궁의 침전이다. 편전인 희정당의 북쪽에 있다. 건물 동쪽으로 흥복헌, 서쪽으로 융경헌이 바로 붙어 있고, 서북쪽엔 경훈각이 복도로 이어져 있다.현판은 순조의 친필이다.
2. 용도
흔히 희정당을 왕의 침전, 대조전을 왕비의 처소로만 생각하는데, 이는 오류이다. 일단 희정당은 정식 침전이 아니다. 이에 대해서는 희정당의 용도를 참조.물론 대조전에서 왕비가 살았던 것은 맞다. 《궁궐지(宮闕志)》에서도 대조전을 '대내곤전정당(大內坤殿正堂)'이라 소개하고 있고.[2] 그러나 실제로는 왕비만 머문 것이 아닌, 왕도 같이 거주했던 것으로 봐야한다.
근거는 많다. 아래 설명하겠지만 대조전의 옛 이름은 양의전(兩儀殿)인데, 양의전을 정전(正殿)이라 일컬은 기록이 있다. 여기서 정전은 으뜸가는 전각을 말하며 이는 당연히 임금이 주로 머무는 집을 뜻한다. 또한 왕 5명[3]이 이 곳에서 승하했으며, 순조는 대조전을 대전(大殿)의 침전, 즉 임금이 머무는 침전이라 했다. #
그리고 후술하겠지만, 동 침실과 서 침실의 이름을 각각 따로 '전(殿)'을 붙여 지은 것도 근거가 될 수 있다. 왜냐하면 같이 살지 않는데 굳이 한 건물의 방 이름을, 그것도 '전(殿)'으로 구분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미루어 볼 때 대조전은 왕과 왕비의 공용 침전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3. 역사
1405년( 태종 5년) 창덕궁 창건 때 지은 것으로 추정한다. 1461년( 세조 7년) 12월에 이름을 양의전(兩儀殿)으로 짓고, 동 침실을 여일전(麗日殿), 서 침실을 정월전(淨月殿)으로 정했다. # 이후 1467년(세조 13년) 5월 경에 건물 전체의 이름을 대조전(大造殿)으로 고쳤다.임진왜란 때 불탄 것을 1608년( 광해군 원년)에 복구했으나, 인조반정 때 다시 화재를 입어 1647년( 인조 25년)에 인경궁 경수전(慶壽殿)을 옮겨 재건했다. 이후 순조 때 소실된 것을 1835년( 헌종 1년)에 다시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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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1917년 화재 직후 대조전의 잔해 |
1917년 화재로 소실되기 전의 창덕궁 대조전 흑백사진(영상)
1926년 4월에 대한제국 마지막 황제 순종이 여기서 승하했고, 순정효황후 윤씨는 낙선재로 거처를 옮겼다. 이후 명목상 순종이 가지던 이왕 위를 물려받은 의민태자와 이방자가 가끔 조선에 올 때 머물렀으며, 일제강점기 중 마지막으로 들른 1939년 10월 이후엔 아무도 살지 않는 전각이 되어 오늘에 이른다.
4. 구조
4.1. 조선시대 대조전의 모습
-
<colbgcolor=#bf1400> 〈동궐도〉에서 묘사한 대조전
〈 동궐도〉에 따르면 대조전을 중심으로 동북쪽에 집상전(集祥殿), 서북쪽에 경훈각(景薰閣)이 복도로 통했고, 부속 건물로 흥복헌(興福軒) · 융경헌(隆慶軒) · 양심각(養心閣) · 관리각(觀理閣) 등이 행각 형태로 대조전을 감쌌다.
- 대조전 건물 자체를 보면, 정면 9칸, 측면 4칸의 1층[4]으로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다른 궁궐의 침전과는 다르게 솟을지붕으로 세웠다.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고, 장대석을 높게 쌓은 4단의 기단 위에 주춧돌을 놓은 다음 그 위에 네모난 기둥을 세운 뒤, 쇠서[5] 2개에 이익공 공포를 놓고 공포 사이마다 장화반(長花盤)을 놓아 침전 건물 특유의 정갈하면서도 화려한 아름다움을 선보였다. 지붕의 합각마루와 추녀마루는 양성 바름을 하고 용두와 7개의 잡상으로 장식했으며 9칸 중 가운데 3칸은 건물로 드나들 수 있게끔 툇마루를 밖으로 돌출시켰다. 그리고 대청의 문은 분합문으로 달았다.
- 강녕전처럼 중앙에 월대를 놓았다. 이는 침전의 위엄을 나타내는 동시에 왕실 행사가 있을 때, 공간을 넓게 활용하기 위함이었다. 월대 동, 서쪽에 삼태극 소맷돌을, 남쪽엔 서수 해치의 얼굴을 단 계단을 세웠으며, 월대 가장자리에 나무 난간을 세우고 계단과 통하는 곳에 나무 문을 달았다. 창은, 밑 부분에 머름을 달고 그 위에 전면 창호를 달았는데 창살은 흔히 볼 수 있는 띠살이 아닌 정자(井) 형으로 만들었으며 창호 위엔 빗살교창을 달았다. 창 앞에는 돌기둥을 세워 마치 누각처럼 보이게 했고, 이 돌기둥 위에 쪽마루를 대청 툇마루와 연결시켜 건물 밖에서도 신을 신지 않고 주변 행각으로 통행할 수 있게 했다. 창 쪽 쪽마루엔 추락 방지를 위해 나무 난간을 설치했으며 대청 툇마루와의 사이엔 월대처럼 나무 문을 두었다.
- 시각적으로 다른 건물과 비교했을 때 눈에 띄는 차이점이 있는데 바로 지붕에 용마루가 없는 것이다. 이 것을 일컬어 '무량각(無樑閣)' 이라고 하는데, 대조전 뿐 아니라 다른 궁궐의 왕과 왕비의 정식 침전은 다 이렇다. 이유로 여러 가지 가설이 있다. 가장 유명한 것은 왕비의 침전의 경우 새로운 용이 만들어지기에 한 건물에 두 용이 있어선 안 되어서 만들지 않았다는 이야기이고, 또 다른 설은 당시 동아시아 최선진국이었던 중국의 건축 양식을 모방했으나 조선에 익숙하지 않은 양식을 모든 건물에 적용하긴 어려웠기 때문에[6] 가장 존귀한 왕과 왕비의 집에만 선진 건축 기술을 적용했다는 설이다. 사실 용마루와 용과 관련 된 전통 기록은 하나도 없으며, 당장 중국만 가도 자금성의 황제와 황후 침전엔 용마루가 있고, 일반 서민 가옥들에 용마루가 없는 집들이 많은 것으로 보아 후자의 설이 좀 더 설득력이 있다. 서양 문물이 들어오면서 중국 문물에 대한 인식이 상대적으로 떨어진 대한제국기에 지은 경운궁의 침전 함녕전은 용마루가 있다.[7]
-
<colbgcolor=#bf1400> 조선 말기 대조전 <colbgcolor=#bf1400> 1912년 경 대조전[8]
왼쪽 사진은 주변이 황폐화되어 있는 것을 보아 순종이 창덕궁으로 이어[9]하기 전에 찍은 듯 하나 정확한 촬영일자는 불명이다. 오른쪽은 1912년 일제강점기에 촬영한 것이다. 순종 이어 전 찍은 사진은 전체적으로 《 동궐도》의 묘사와 비슷하나, 창 앞에 세운 앞면 돌 기둥과 그 틈새를 나무판자로 가려놓았다. 다만, 가운데 칸 밑엔 문이 달렸는데 아마 아궁이로 들어가는 문인 듯 하다.
오른쪽 사진을 보면 순종이 머문 후 개조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우선 창과 문의 창호지를 떼어 유리로 바꾸어 달았고, 가운데 지붕 양 끝에 피뢰침을 설치했다. 또 앞면 돌기둥들 사이가 전통 벽돌 장식으로 메꾸었고, 한 가운데엔 무늬로 형상화 된 한자를 새겼으며 월대 남쪽의 양 가장자리에는 큰 전등을 세워놓았다.
4.2. 1920년 이후 재건된 대조전의 모습
<colbgcolor=#bf1400> 교태전을 옮겨온 대조전 본채 |
- 위에 언급했듯, 경복궁 교태전을 옮겨 온 것이기 때문에 건물의 전체적인 구조는 교태전과 같다. 희정당에 비해 변화가 크진 않지만[10], 그래도 예전의 모습을 많이 잃었다. 가장 크게 바뀐 것은 솟을지붕이 평지붕이 되고, 누각처럼 보이게 했던 돌기둥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 내부도 상당히 변하여 대청을 거실로 삼고 거실 천장에 샹들리에를 설치했다. 그리고 원래 우물마루였던 대청 바닥을 쪽널마루로 바꾸었으며 온돌방의 문을 제외하고는 전부 창호지를 떼고 유리를 달았으며 문 틀엔 커튼 박스까지 달았다. 단, 외관의 유리는 훗날 창호지를 붙인 문으로 복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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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일월오악도〉 병풍이 펴져있는 대조전 대청[11] <colbgcolor=#bf1400> 동 측면에서 바라본 대조전 대청
거실엔 거울을 세워놓았고[12] 정중앙엔 대형 자개[13] 의자를 놓았으며 자개의자를 중심으로 양 옆에 나무 의자가 두 개가 있다. 거실과 침실 사이에는 8짝의 불발기문[14]을 달아 공간을 구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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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창덕궁 대조전 서온돌[15] <colbgcolor=#bf1400> 창덕궁 대조전 동온돌[16]
침실인 온돌방은 동, 서 모두 정면 3칸, 측면 2칸인데 교태전과 달리 내부를 구분하지 않고 한 칸으로 터 보다 넓게 사용할 수 있게 했으며 침실 측면과 후면에는 작은 방을 두어 시중드는 사람들의 처소로 삼았다. 벽지는 문양이 그려진 능화지로 발랐고 천장엔 전등 조명을 달았다. 동온돌 남쪽 창호엔 한시(漢詩)를 써 붙였다. 시의 내용에 대해선 이 곳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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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대조전 침대, 의자, 탁자
서온돌(왕비의 침실)에는, 길이 224cm, 폭 154cm, 높이 113.5cm의 뼈대 전체를 용으로 조각하여 굉장히 화려한 서양식 침대 및 탁자와 2인용 의자를 설치했다. 순종 사후 방치되어 있다가 1988년에 일부를 보수했다. 그러나 매트리스 중앙부가 함몰되고 덮개천도 부분적으로 훼손되어 2008년 10월부터 2009년 6월까지 에이스침대에서 원형에 가까운 모습으로 수리, 복원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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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 대조전 화계의 봄 모습[17] <colbgcolor=#bf1400> 대조전 화계의 여름 모습[18]
대조전 화계의 겨울 모습[19] 대조전 화계의 가을 모습[20]
건물 뒤뜰에는 화계가 있다. 화계는 계단을 층층이 쌓고 각 단마다 나무나 화초를 심어 아름답게 만든 구조물로, 쉽게 말해 계단식 정원이다. 사계절 내내 아름다운 풍광을 자랑한다.
4.2.1. 대조전 벽화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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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희정당 금강산만물초승경도 | 창덕궁 대조전 봉황도 | 창덕궁 대조전 백학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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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덕궁 대조전 봉황도 | 창덕궁 대조전 백학도 | 경훈각 조일선관도 |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242호 | ||
창덕궁 대조전 봉황도 昌德宮 大造殿 鳳凰圖 Bonghwangdo (Phoenixes) in Daejojeon Hall of Changdeokgung Pala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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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12 ( 세종로, 국립고궁박물관) | |
분류 | 등록문화재 / 기타 / 동산(미술품) | |
수량 / 면적 | 1점 | |
지정연도 | 2006년 3월 2일 | |
시대 | 1920년 경) | |
소유자 (소유단체) |
문화재청 | |
관리자 (관리단체) |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 |
대한민국의 국가등록문화재 제243호 | ||
창덕궁 대조전 백학도 昌德宮 大造殿 白鶴圖 Baekhakdo (White Cranes) in Daejojeon Hall of Changdeokgung Palac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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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효자로 12 ( 세종로, 국립고궁박물관) | |
분류 | 등록문화재 / 기타 / 동산(미술품) | |
수량 / 면적 | 1점 | |
지정연도 | 2006년 3월 2일 | |
시대 | 1920년 경) | |
소유자 (소유단체) |
문화재청 | |
관리자 (관리단체) |
문화재청 국립고궁박물관 |
<colbgcolor=#bf1400> 위는 〈봉황도(鳳凰圖)〉, 아래는 〈백학도(白鶴圖)〉이다. |
대조전을 완공한 그 해 가을, 거실 쪽 불발기문과 천장 사이 벽에 순종의 명으로 동편엔 〈봉황도(鳳凰圖)〉가, 서편엔 〈백학도(白鶴圖)〉가 각각 그려졌다. 둘 다 폭 5.78m, 높이 2.14m 크기로, 〈봉황도〉는 오일영(吳一英, 1890 ~ 1960)과 이용우(李用雨, 1904 ~1952)가, 그리고 〈백학도〉는 김은호(金殷鎬, 1892 ~ 1979)가 그렸다. 문화재청에서는 2006년 《봉황도》를 국가등록문화재 242호, 〈백학도〉를 243호에 각각 지정했다.
안전한 보존 관리를 위해 지난 2013년 벽화를 떼어 내 보존처리하고 대조전에는 모사본을 제작, 부착했으며 보존처리가 완료된 원본은 국립고궁박물관에서 보관한다.
원래 이왕직에서는 작업을 담당할 화가로 일본인을 투입하려고 했지만, 순종이 내전[21]의 그림만큼은 무조건 조선인 화가에게 맡기겠다고 반대했다. 그래서 1911년에 창설된 서화미술회[22]와 서화연구회 소속 조선인 화가들이 각각 대조전과 경훈각의 벽화 4폭, 희정당 벽화 2폭을 맡아 그렸다. 그런데 희정당 벽화 2폭을 맡은 서화연구회 소속 화가 김규진이 윤필료[23][24]를 챙길 속셈으로 희정당 벽화 작업을 독차지했다는 의심을 샀고, 김은호는 "윤필료를 500원밖에 받지 못했다"며 제작을 거부하기도 했다. 이후에 어찌어찌 사태가 수습돼서 서화미술회에서 중진화가 강필주와 고희동 대신 강습소 출신의 당시로써는 신진 화가였던 이상범과 김은호, 노수현, 이용우, 오일영 등 5명 그리고 해강 김규진까지 총 6명에게 벽화를 맡기기로 결론이 났다.
5. 부속 건물
5.1. 선평문
자세한 내용은 창덕궁 선평문 문서 참고하십시오.5.2. 흥복헌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
<colbgcolor=#bf1400> 창덕궁 흥복헌 昌德宮 興福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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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 |
건축시기 |
1405년 (창건) 1608년 (중건) 1647년 (중건) 1835년 (중건) 1920년 (중건) |
<colbgcolor=#bf1400> 흥복헌[25] |
대조전의 동쪽 익각(翼閣)[A]이다. 역사는 대조전과 같다.
182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 동궐도》와 1907년 ~ 1908년에 제작 된 《동궐도형》을 보면, 내부는 본채를 기준으로 대청은 대조전 쪽에 1칸, 동행각 쪽으로 2칸, 이렇게 3칸이었고 그 사이에 온돌방이 2칸 있었으며 건물 앞, 뒤로 툇간을 놓았다. 그리고 청향각 방향으로 온돌방 3칸을, 동행각 쪽으로 온돌방 2칸을 더 놓았고 건물 앞에만 툇간을 놓았다. 외부는 대조전 쪽 1칸의 벽면의 창을 작게 만들고 그 위를 벽으로 막은 뒤 중간에 작은 교창을 내었으며 나머지 칸은 전면 창호로 내었다. 그리고 건물 앞 쪽에 쪽마루를 설치해서 대조전 실내에서는 물론 건물 밖에서도 신발을 벗고 이동하기 편하게 만들었다. 기단의 높이가 대조전보다 한 단 낮아 서열이 대조전보다 아래임을 뚜렷하게 보여주고 있다.
1920년에 재건한 후엔 꽤 달라졌는데 대조전 본채 자체가 경복궁 교태전을 옮겨 지은 거라서 교태전의 동익각인 원길헌과 구조가 같아졌다. 원길헌의 구조는 여기 참조. 다만, 동행각에 달린 문이 사라지고, 밖으로 돌출된 툇마루가 아예 실내로 들어갔으며, 밖에서 볼 때 문선과 중방 사이에 창문을 낸 3칸만 드러나 있는 등 세부적인 부분은 많이 달라졌다. 내부 역시 이발실이 설치되는 등 많이 바뀌었다.
특이하게 내전의 건물임에도 임금이 신하들을 자주 접견하는 공간으로도 쓰였으며 #, 1910년 8월 22일 한일병합조약의 체결을 결정한 조선 왕조의 마지막 어전회의가 열린 슬픈 역사의 장소가 바로 이 곳이다. 흥복헌(興福軒) 이름이 '복(福)을 불러 일으킨다(興)' 는 뜻인데, 정반대로 여기서 비극적인 일제강점기가 시작되었다는 게 굉장한 아이러니.
5.3. 융경헌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
<colbgcolor=#bf1400> 창덕궁 융경헌 昌德宮 隆慶軒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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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 |
건축시기 |
1405년 (창건) 1608년 (중건) 1647년 (중건) 1835년 (중건) 1920년 (중건) |
<colbgcolor=#bf1400> 융경헌[27] |
대조전의 서쪽 익각(翼閣)[A]으로 역사는 대조전과 같다. 이름은 '경사(慶)가 융성(隆)하라' 는 의미이다.
182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 동궐도》와 1907년 ~ 1908년에 제작 된 《동궐도형》을 보면, 내부는 본채를 기준으로 대청은 대조전 쪽에 1칸, 서행각 쪽으로 2칸, 이렇게 3칸이었고 그 사이에 온돌방이 2칸 있었으며 건물 앞에만 툇간을 놓았는데 이는 뒷면에도 툇간이 있던 흥복헌과는 다른 점이다. 그리고 융경헌 서쪽에 문을 두어 경훈각을 드나들 수 있게 했으며 서행각 쪽으로 온돌방 5칸을 더 놓았는데 서행각의 방들은 동행각의 방들보단 규모가 조금 작았다. 외부는 문선과 중방 사이에 창문을 내었고 건물 앞 쪽에 쪽마루를 설치해서 대조전 실내에서는 물론 건물 밖에서도 신발을 벗고 이동하기 편하게 만들었다. 기단의 높이가 대조전보다 한 단 낮아 서열이 대조전보다 아래임을 명확하게 나타내고 있다.
1920년에 재건한 후엔 꽤 달라졌는데 대조전 본채 자체가 경복궁 교태전을 옮겨 지은 거라서 교태전의 서익각인 함홍각과 구조가 같아졌다. 함홍각의 구조는 여기 참조. 다만 밖으로 돌출된 툇마루가 아예 실내로 들어갔으며 외부 모습이 전면 창호로 바뀌는 등 세부적인 부분은 많이 달라졌다.
흥복헌과 달리 현판은 붙어있지 않다.
5.4. 함원전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
<colbgcolor=#bf1400> 창덕궁 함원전 昌德宮 含元殿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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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 |
건축시기 | 1920년 (창건) |
|
<colbgcolor=#bf1400> 함원전 |
대조전 동북쪽에 위치한 부속 전각으로 대조전과는 한 몸체로 붙어있다. 1820년대 후반에 만들어진 《 동궐도》와 1907년 ~ 1908년에 제작 된 《동궐도형》에는 모습이 보이지 않으며 건물의 위치나 형태 등을 볼 때, 1920년에 창덕궁 내전 일곽을 재건할 때 경복궁 교태전에 딸린 건순각이 함원전이 된 것으로 보인다. 물론 그대로 옮긴 것이 아니라 기둥의 간격 등 약간의 변화를 주었다. 교태전 옆에 이름이 같은 함원전이 있는데 건물명은 거기서 따온 것으로 추측한다. 건물의 위치와 구조 상 정면은 동쪽이다.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북쪽 가장자리 칸에 정면 2칸, 측면 2칸의 누마루가 동쪽을 향해 있다. 이익공 공포에 겹처마 양식으로 지었으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5.5. 청향각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
<colbgcolor=#bf1400> 창덕궁 청향각 昌德宮 淸香閣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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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 |
건축시기 |
창건연대 미상 1835년 (중건) 1920년 (중건) |
<colbgcolor=#bf1400> 청향각[29] |
흥복헌 동북쪽에 위치한 부속 전각으로 이름은 '맑고 깨끗한 향기(淸香)' 란 뜻이다. 1907년 ~ 1908년에 제작된 《동궐도형》을 보면 흥복헌 방향에 대청 2칸, 그리고 그 북쪽으로 온돌방 2칸이 있었다.
5.6. 경훈각
자세한 내용은 창덕궁 경훈각 문서 참고하십시오.5.7. 양관
<colbgcolor=#bf1400> 1916년에 설계된 대조전 양관 응접실 투시도 |
그러나 1917년 11월 대조전 일대의 대화재로 인해 내전 일대가 모조리 파괴되면서 양관 건립 계획 역시 백지화되었고, 양관 건립을 위해 구입한 철근 콘크리트와 벽돌, 시멘트 등은 창덕궁 내전 일곽 재건축에 사용했다. 만약 정상적으로 건립되었더라면 이곳이 내전의 역할을 대체했을 것이며, 궁궐 내 양관들 중 유일하게 내전 역할을 했던 건물이 되었을 가능성이 높다.[34]
5.8. 지금은 사라진 건물
5.8.1. 집상전
자세한 내용은 창덕궁 집상전 문서 참고하십시오.5.8.2. 양심합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
<colbgcolor=#bf1400> 창덕궁 양심합 昌德宮 養心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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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 |
건축시기 |
창건연대 미상 1917년 (소실) |
<colbgcolor=#bf1400> 양심합 |
대조전을 두른 '口' 자형 행각 중 동남쪽에 있다. 희정당과 가깝고, 장순문[35]을 통해 드나들 수 있어서 임금이 주로 사용했다.
그 중에서도 단연 현종과 관련한 기록이 가장 많다. 여기서 현종은 조정 대신들을 인견하고 경연을 했으며[36], 내의원 의원을 불러 침을 맞기도 했다.[37] 1669년(현종 10)에는 현종이 양심합에서 침을 맞고 뜸을 뜨는 기록이 계속해서 보인다. 결국 현종은 모후 인선왕후의 상을 치르던 중에 양심합에서 승하했다.
현종의 아들 숙종은 양심합을 잘 사용하지 않았다. 다만 《 숙종실록》에 따르면, 인현왕후가 왕비로 복위하던 날에 침실로 삼은 곳이 양심합이었다.
임금이 먼저 가면서 상궁(尙宮)에게 하교(下敎)하기를, "중전(中殿)을 시위(侍衛)하여 침전(寢殿)으로 돌아오지 못하면, 상궁에게 중죄가 있을 것이다." 하니, 궁인(宮人)이 좌우에서 시위하고 전후에서 부축하여 양심합(養心閤)에 침장(寢帳)을 마련했다.
《 숙종실록》 숙종 20년 4월 12일.
《 숙종실록》 숙종 20년 4월 12일.
이 때부터는 주로 왕실 여성들의 거처로 쓰인 듯 하다. 정조의 후궁 원빈 홍씨가 양심합에서 종기에 시달리다 세상을 떠났고, 순조대왕행장에는 " 수빈이 항상 양심합에 거처하고 있었는데 이는 순조의 처소와 가깝기 때문이었다"는 말이 나온다. 이후 철종 대에는 당시 대왕대비였던 순원왕후가 양심합에서 승하했다.
1917년 11월 창덕궁 화재로 대조전을 비롯한 내전이 모두 불탔고, 3년 뒤 재건했다. 그러나 경복궁 내전 건물을 옮겨왔기 때문에 옛 모습을 잃어버렸다.
5.8.3. 관리합
대한민국 사적 제122호 창덕궁 | ||
<colbgcolor=#bf1400> 창덕궁 관리합 昌德宮 觀理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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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와룡동 2-71번지) | |
건축시기 |
창건연대 미상 1917년 (소실) |
대조전 서쪽 행각에 있었다. 이곳에서 영조의 왕비 정성왕후가 승하했다.[38]
관리합의 정확한 위치에 대해서는 기록마다 다르다. 먼저, 사도세자의 문집 《능허관만고(凌虛關漫稿)》 6권 〈추감록소지(追感錄小識)〉에서는 " 정성왕후께서 관리합에서 승하하셨는데 관리합은 대조전의 서쪽 익각(翼閣)[A]" 이라고 썼고, 《궁궐지》에서는 대조전의 서행각은 10칸으로 구성되었고, 이 안에 관리합이 있고, 관리합 남쪽에 경극문이 있다고 썼다. 어쨌든 대조전 서편에 있었던 것은 일치한다.
한편, 《궁궐지》에는 관리합 대신 '관리각(觀理閣)'이라고 적혀 있는데 건물 이름은 숙종이 지었다고 한다.
내가 이미 관리(觀理)로 각의 이름을 짓고, 또 고훈(古訓)을 모아 벽에 써 붙인 것은 우연이 아니다. 언젠가 내가 노했을 적에 그 일을 잠시 중단하고 밤새도록 연구해 보았더니 마음이 자연히 가라앉았다. 실로 사색의 유익함을 깨달았다.
〈관리각벽서하방소지(觀理閣壁書下方小識)〉[40]
그러나 1917년 창덕궁 화재로 대조전과 함께 불타 사라졌고, 현재는 찾아볼 수 없다.〈관리각벽서하방소지(觀理閣壁書下方小識)〉[40]
6. 대중매체에서
1980년대 초까지는 조선을 배경으로 한 사극에서 중궁전으로 많이 나왔다. 다만, 월대에 전등이 세워져 있는 등 서구화 된 부분들도 많이 보였는데, 당시엔 야외 세트장을 짓는 것은 방송사 예산 상 거의 생각조차 못할 일이었고, 일제의 훼손 등으로 그나마 당시 남아있는 조선 궁궐의 침전 건물은 대조전 일대 밖에 없었기 때문에[41] 울며 겨자먹기(...) 식으로 촬영했다.이후 1990년대 들어 경복궁을 비롯한 다른 궁궐의 침전들이 복원되면서 나오는 빈도가 줄었지만, 그래도 조선 후기를 다룬 사극에선 여전히 많이 나왔다. 그러나 창덕궁 내전을 배경으로 한 장면을 촬영할 때, 서양 풍이 나는 실제 창덕궁 대신 갓 복원하여 서구적 느낌이 하나도 없는 경복궁에서 찍은 경우가 많았다. 그래서 경복궁 교태전 건물에서 교태전 현판을 뗀 뒤 대조전 현판을 대신 걸고 촬영한 경우도 있었다.(...)[42]
<colbgcolor=#bf1400> 〈 명성황후〉 8화에 나온 대조전. 교태전에서 촬영했다. |
<colbgcolor=#bf1400> 〈대장금〉 52화에 나온 청향각 마당 |
[1]
첫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곤(坤)' 은 땅을 의미하며 전통적으로 여성을 상징했다. 그래서 곤전은 중궁전을 가리킨다. [3] 성종, 인조, 효종, 철종, 순종. [4]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 [5] 소 혀 모양의 부재. [6] 실제로 전통 가옥을 용마루 없이 지으면, 서까래를 고정하기 어려워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 [7] 사실 함녕전은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였던 만화당(萬和堂)
이거 아니다을 옮겨 지은 것이다. 그래도
황제의 침전인데 용마루를 그대로 냅둔 것을 봐서는 무량각에 그렇게 크게 신경을 쓰지 않은 게 맞는 것 같다.
[8]
사진 출처 - 서울역사아카이브.
[9]
移御.
임금이 거처를 옮기는 것. 쉽게 말해
왕이
이사가는 것이다.
[10]
기본 구조 정면 9칸, 측면 4칸은 전과 같다.
[11]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12]
정 중앙에 있을 때도, 구석에 있을 때도 있다.
[13]
금조개 껍데기를 썰어 낸
조각.
[14]
창호문의 위 아래를
벽지로 바르고, 그 한가운데에 교자창이나 완자창을 낸 문.
[15]
사진 출처 - 서울문화in.
[16]
사진 출처.
[17]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18]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19]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0]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1]
창덕궁 대조전과 희정당,
경훈각.
[22]
형식상이라지만 회장은
이완용이었다. 총무는 소호 김응원.
[23]
제작비. 화가 한 사람당 1,500원 정도였다고 한다. 많은 건가?
[24]
2020년 화폐기준으로 약 1,200만원 정도이다.
[25]
사진 출처 - 네이버 지도.
[A]
가장 메인이 되는 집채의 좌, 우편에
날개(翼)처럼 딸려 있는 전각(閣).
[27]
사진 출처 -
카카오맵.
[A]
가장 메인이 되는 집채의 좌, 우편에
날개(翼)처럼 딸려 있는 전각(閣).
[29]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궁궐의 현판과 주련-창덕궁_대조전 권역》.
[30]
순종은 즉위 직후에도 서양식 건물인
덕수궁 돈덕전으로 이어하고 싶다는 의사를 밝힌적이 있다. 그만큼 이미 덕수궁의 서양식 건물인 환벽정에 살면서 서양식 생활 방식에 익숙해졌으며, 서양식 건물에 거주하는 것을 더 선호했던 것으로 보인다.
희정당과 대조전 역시 대화재 이전부터 이미 전각 내부의 상당 부분이 서양식으로 변형된 상황이었다.
[31]
사실
경복궁과
덕수궁,
사동궁,
운현궁에는 이미 양관이 건립되어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창덕궁에 양관이 들어서는 것이 딱히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32]
당시 순종의 취미가
당구였기 때문에 당구대가 설치된 방을 따로 만들려고 한것으로 보인다.
[33]
비서실
[34]
경복궁이나
덕수궁에도 양관 건물이 있었지만, 서재나 외빈들을 접견하는 용도로 사용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35]
희정당 북쪽 담장의 문.
[36]
《
현종실록》 9권, 현종 5년 10월 13일 신미 1번째기사.
#
[37]
《현종실록》 14권, 현종 9년 3월 29일 정묘 1번째기사.
#
[38]
《영조실록》 89권, 영조 33년 2월 15일 정축 1번째기사.
#
[A]
가장 메인이 되는 집채의 좌, 우편에
날개(翼)처럼 딸려 있는 전각(閣).
[40]
숙종이 쓴 글로 《궁궐지》에 실려있다.
[41]
창경궁도 내전 건물이 남아있긴 했지만, 말 그대로 진짜 달랑 건물만 놓여있는 상황이었고, 무엇보다 1983년까지는
놀이공원
창경원이었기 때문에(...) 촬영이 힘들었다.
[42]
물론 경복궁관리소의 허락을 받고 임시로 교체한 것이고 이 때 걸었던 대조전 현판도 당연히
방송사에서 별도로 제작한 것이다.
두 번째 사진 출처 -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2] '곤(坤)' 은 땅을 의미하며 전통적으로 여성을 상징했다. 그래서 곤전은 중궁전을 가리킨다. [3] 성종, 인조, 효종, 철종, 순종. [4] 보통 한옥의 경우 단층(單層)이라 표현한다. [5] 소 혀 모양의 부재. [6] 실제로 전통 가옥을 용마루 없이 지으면, 서까래를 고정하기 어려워 굉장히 힘들다고 한다. [7] 사실 함녕전은 경복궁의 침전 중 하나였던 만화당(萬和堂)