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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7년 2월 21일~ 1945년 8월 15일 (58세)
1. 개요
아나미 고레치카는 일본 제국의 육군 대장, 일본 제국 제54대 육군대신.2. 생애
1887년 일본 오이타현 타케타시에서 태어나 1905년에 육군사관학교, 1918년에는 육군대학을 졸업하여 군생활을 시작하였다.이후 야전에 종사하다가 1925년 주재무관의 자격으로 프랑스에 파견되었다. 이후 일본으로 돌아온 그는 1929년 황궁에서 근무를 시작하였는데, 이때 훗날 총리가 되는 스즈키 간타로 시종장의 아래에서 시종무관을 지냈다.아나미는 육군 내에서 평가가 좋아 처음부터 장차관급 엘리트로 키워지고 있었다. 1938년 중일전쟁에 참전하여 사단장을 잠깐 역임함으로서 전선근무 경력까지 쌓아올리고 1939년 말 차관에 임명되어 도쿄로 금의환향하여 해군 출신으로 육군과 사사건건 마찰을 빚던 요나이 내각의 실각을 주도하는 등 육군성 내의 핵심권력을 장악한다. 이때 요나이를 뒤이은 고노에 내각의 조각 과정에서 아나미는 도조 히데키를 차기 육군대신으로 밀었고, 도조의 임명을 주저하는 참모차장에게 아나미 자신의 사임까지 거론하며 압박하여 도조의 육군대신 임명동의를 받아내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도조는 임명된 직후 인사권을 휘두르며 스기야마 하지메를 참모총장에 앉히고 다나카 신이치를 작전부장에 앉히는 등 철저하게 자기 계파 위주로 인사를 했으며 아나미 차관의 반발은 계급과 직책으로 찍어눌렀다. 그 절정은 아나미(육사 18기, 육군대학교 30기)의 육군대학교 동기이던 이시와라 간지(육사 21기, 육군대학교 30기)의 군복을 벗긴 사태인데 친한 사이는 아니었으나 동기생의 구명에 적극적으로 나섰던 아나미는 체면을 구길대로 구긴체 1941년 차관을 그만두고 중국전선으로 돌아가야 했다.
중국으로 돌아간 아나미는 제11군을 지휘하였고, 오합지졸로 유명한 오사카 제4사단을 창사 전투에 투입하는 실책을 저지르기도 했다.
태평양 전쟁 시에는 뉴기니 전선을 총괄하였다. 일본군이 수세로 돌아서게 되고 보급마저 끊긴 상황에서, 정신력제일주의로 예하 부대에 절망적인 작전을 강요하여 많은 희생자가 발생하였는데, 특히 아다치 하타조 중장이 이끄는 18군의 경우 15만에 달했던 병력 중 12만 7600명이 사망하는 참극에 내몰렸다. # 패전 직전이었던 1945년 4월 스즈키 간타로 내각이 출범하자 육군대신으로 입각하였다.
아나미가 입각했던 당시 일본의 상황은 매우 좋지 않았는데, 유럽의 동맹이었던 이탈리아 왕국과 나치 독일이 차례로 연합국에 항복하였고, 일본은 미국과 소련, 영국 등 막강한 연합국을 상대로 홀로 맞서야 하는 처지에 놓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1945년 7월 26일 미국과 영국, 중국은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요구하는 포츠담 선언을 발표하여 일본 정부를 압박하였다.
이에 내각과 군의 수뇌부에서는 포츠담 선언을 받아들이는 문제를 가지고 논쟁이 벌어졌다. 스즈키 간타로 총리나 요나이 해군대신 등은 이를 수용하는 것이 불가피함을 역설하였지만, 육군을 대변하던 아나미는 무조건 항복에 격렬히 반대하였다. 결국 이들은 포츠담 선언에 대해 무시하기로 결정하였고, 이는 얼마 뒤 미군에 의해 화려했던 두 도시가 잿더미로 변해버린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아나미는 원폭의 위력을 보고도 항복을 반대하며, 오히려 조금이라도 유리한 종전조건을 이끌어내기 위해 본토결전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은 이미 몰락의 길을 걷고 있었기 때문에, 이같은 주장은 허울만 좋은 낭설에 불과하였다. 결국 쇼와 덴노가 연합국에 무조건 항복을 할 것을 결정하자, 아나미를 비롯한 강경파 군인들도 이에 굴복할 수 밖에 없었다.
옥음방송이 발표되기 전날인 8월 14일, 그는 쇼와 덴노의 서명이 담긴 종전 조서에 다른 각료들과 함께 서명하였고, 다음날인 8월 15일 새벽 5시경, 궁성사건이 한창 진행 중인 상황에서 자신에게 쿠데타 동참을 권유하러 온 이다 마다사카 중좌를 술잔을 기울이며 잘 타일러 돌려보낸 뒤 '나는 천황 폐하께 죽음으로써 사죄한다.'라는 유언을 남긴 뒤 할복자살로 생을 마감하였다.[1] 일부 장교들이 스즈키 간타로 일본국 내각총리대신을 비롯한 각료 상당수를 살해하려 하고 궁성을 장악한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킨 상황에서 이를 진압하려 하지 않은 것을 보아 심정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육군대신으로서 동참할 수는 없었던 것 같다. 주모자 하타나카 켄지 소좌는 그의 의동생이라 할 정도로 친한 사이었다.
사후 그의 시신은 도쿄 타마레이엔(多磨霊園)[2]에 안장되었다. 아나미가 할복할 때 입었던 피묻은 제복과 유언장은 현재 야스쿠니 신사의 군사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2015년작 일본영화 일본 패망 하루전에서는 중심 인물로 등장한다. 배우는 야쿠쇼 코지. 항복에 반대하는 입장이지만 존황주의자이기 때문에 천황의 결정에 복종하고, 본토결전을 주장하는 강경파 장교들을 저지하고자 하다 마지막에는 패전의 책임을 지고 할복자살한다. 극중 묘사된 아나미의 인간적인 면에 대한 비판도 있는데, 무능과는 별개로 실제 사료에 기술되었고 왜곡될 여지도 별로 없는 부분이라 자결 전의 온후한 모습까지 비판하기는 어렵다.[3] 부부간 금슬도 좋았는지 당시 군인들이 흔히 첩을 두던 것과 다르게 아내 한 사람에게만 충실해서 '한구멍 거사'라는 별명도 얻었다.
3. 평가
정치 및 이념적으로는 전형적인 일본 육군의 극우 군인으로, 뉴기니 전선의 전황을 보듯 군사적으로 유능하다고 볼 여지가 없는 인물이다. 하지만 항복 시점 및 궁성사건에서의 의연한 대처만큼은 높게 평가받으며 이거 하나 때문에 사후 평가가 좋은 편이다.아나미 고레치카는 항복 시점에서 일본제국 정부 육군대신이었다. 군부대신은 오직 현역 무관만 입각할 수 있었고, 아나미 고레치카는 항복문서에 서명하느니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고 서명을 거부한 후 사직하여 도조 등의 육군 주류 의견을 받아들여 후임을 추천하지 않음으로서 내각을 붕괴시킬 수 있었다. 실제 몇 차례 일어났던 일이고, 스즈키 총리 역시 이 가능성을 매우 두려워했다. 그러나 아나미는 끝내 사직하지 않고 항복문서에 서명하여 스즈키 내각을 붕괴시키지 않았다.[4] 아울러 궁성사건 당시 반역에 찬동하지 않고, 오히려 반역 동참을 설득하러 온 이다 중좌를 역으로 설득시킨 점, 그 이다 중좌가 아나미를 따라 할복하겠다고 하자 뜯어말린 점[5]은 마지막 미담으로 남아있다.
[1]
무조건 항복 이후 일본 전체가 한번 싹 갈아엎어졌다 보니 종종 그의 할복이 일본사 마지막 할복으로 오해되곤 하는데, 불행히도 아니다. 전후에도
미시마 유키오를 비롯해 극우 세력의 최종 발악기로 자주 활용되곤 한다(...).
[2]
도고 헤이하치로,
야마모토 이소로쿠 등 유명한 군인과 각료들이 묻혀있는 곳이다.
[3]
할복 전 총리를 만나
육군의 입장을 대표해서 강경발언을 해서 폐를 끼쳐드렸다고 사과하며 선물을 전달한 부분이나 부하들과 작별 술판을 벌이는 모습이 주로 비판받는데 실제로 있었던 부분이다.
[4]
엄밀히 말해서 쓰기는 썼다. 다만, 유서와 함께 남겨둔 사직서로 사직일지는 8월 14일이라 적혀 있었다. 즉, 항복문서까지는 본인의 책임으로 서명하고 이후 패전 책임으로 사직 및 할복한 것.
[5]
이다가 아나미를 따라 할복하겠다고 하자 바로 이다에게 싸대기(...)를 갈군 다음에 패전은 우리들의 책임이다. 귀관들같은 젊은이들은 살아서 일본의 부흥에 노력해야 한다!고 일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