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정치인에 대한 내용은 김응선(1964) 문서 참고하십시오.
일본군의 장성급 장교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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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 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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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應善
1881년 ~ 1932년
1. 개요
구한말과 일제강점기의 군인, 친일반민족행위자. 최종계급은 일본군 소장이었다. 본관은 금화(金化). # 독립운동가 김응선과는 동명이인이다.2. 생애
1881년 평안남도 안주군 동면에서 태어났다. 1896년 청일전쟁 당시에 우쓰노미야 다로[1]가 그를 발탁해 그해 5월 일본에 유학을 가서 도쿄 아카사카구 나카노 정(仲之町) 소학교와 세이조(成城)학교를 졸업하고 1902년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병과는 보병.[2]1903년 일본육군사관학교 15기로 졸업해 견습사관으로 근무했다.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일본군 소속으로 참전했다. 그후에 대한제국군으로 소속을 옮겨 육군무관학교 학도대의 육군유년학교[3] 교장을 지냈다. 일본 정부는 대한제국의 군부에 일본 유학파 출신의 친일 군인을 주로 배치했고 그도 그 중 하나였다.
1907년 군대 해산 당시 계급은 보병참령( 소령)이었다. 군 해산 후에 황태자궁의 배종무관으로 임명됐다. 1910년에 그나마 잔존하던 조선군 병력이 완전히 일본군 소속으로 바뀌면서 그는 조선군주차사령부로 근무지를 옮겼다. 그 후에 이은의 왕세자궁 무관으로 근무했고 1923년에 대좌로 진급했다.[4] 1931년에는 육군소장으로 진급했고 같은 해에 28년의 군생활을 마치고 퇴역했다.
1932년에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