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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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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기원
1.1. 바렐위 운동1.2. 데오반드 운동
2. 파키스탄 자치령3. 건국 이후4. 21세기
파키스탄 역사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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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모헨조다로 파키스탄.jpg
모헨조다로 유적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1947년에 인도와는 별개의 자치령으로 지정되어 파키스탄 자치령이라는 이름으로 독립했다. 현대 이전의 역사는 북인도/아프간의 역사와 상당수 겹친다. 오히려 고대에 인도(Indos)라 하면 인도 아대륙이 아니라 인도스(인더스)강 유역, 곧 파키스탄 일대를 가리켰다.[1] 인도/역사, 아프가니스탄/역사 참조. 국가 정체성 차원에서 무굴 제국 시대나, 고대 인더스 문명 등을 교육과정에서 많이 강조한다고 한다. 상고 인도의 역사가 시작된 인더스 강 유역 대부분이 현재는 파키스탄 영역이기 때문이다. 인도에서는 인더스 문명이 왜 파키스탄 역사냐고 키배를 벌이는 중이다. 그러나 파키스탄과 북인도 지역은 오랫동안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여있었기 때문에 인도와 파키스탄의 역사를 자로 재듯 나누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2] 인도-파키스탄-방글라데시 관계 문서 및 인도-아프가니스탄-파키스탄 관계 문서 참조.

1. 기원

인도와 파키스탄이 별개의 국가로 독립한데는 과거 무굴 제국의 지배층이던 무슬림 엘리트들이 인도 독립 이후 소수자로 전락하여 권력을 상실할 것이라는 우려가 컸다. 영국의 식민 지배 이전 인도에서는 중앙아시아 출신 무슬림 정복자들이 현지 힌두교 사회와 융화돼서 지내는 편이었는데, 이는 특별히 이들이 오늘날의 무슬림들보다 더 관용적이라서라기보다는 그 편이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중세부터 근세까지의 인도는 카스트 제도에 바탕을 준 정교하게 분업화된 경제 구조를 가지고 있었는데, 전성기 당시 무굴 제국의 경제는 전 세계 경제의 25%를 차지할 정도로 (전근대 기준으로는) 매우 효율적으로 작동하였다. 무굴 제국의 황제들은 힌두 브라흐민 지주들이 무슬림 소작농들이나 소상인들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일에 별다른 불만을 제기하는 일조차 없었다. 오늘날의 무슬림 사회라면 상상하기 힘든 상황이었다. 무굴 제국 이외에도 남인도의 마이소르 왕국, 하이데라바드 니잠국 등등은 무슬림 통치자들이 현지인 힌두교도 토후들과 협력하여 국가를 운영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인도아대륙이 영국의 식민지로 예속되고, 영국인들이 19세기 초반 자국 내 면화 산업을 증진시킬 목적으로 다카 마드라스 등지의 전통적인 인도 내 면방직 산업을 정책적으로 초토화시키면서 무슬림 엘리트층 입장에서 힌두 카스트 시스템을 실리적인 목적으로 용인해야 할 필요가 사라졌다. 설상가상으로 영국은 서서히 인도의 기득권을 차지하던 무슬림들의 권리를 축소시키고 인구 수가 더 많았던 힌두교도들의 편의를 늘려나가기 시작했다.

1875년 힌두교계에서 기독교 선교사들과 무슬림들의 부흥 운동에 영향을 받은 힌두교 부흥운동 아리야 사마지(Arya Samaj) 운동이 일어난 것을 계기로 영국 정부는 관청에서 페르시아 문자 대신 무슬림들이 읽지 못하는 데바나가리 문자를 사용하도록 지침을 변경하였다. 힌두교 신문, 잡지 발행부수가 급증하는 힌디어 르네상스가 시작되면서, 사이드 아흐마드 칸을 비롯한 무슬림 지식인들은 인도 무슬림들이 인도에서 고립된 소수자로 전락할 수 있다는 커다란 위기의식을 느끼고 우르두어의 현대화 작업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아흐마드 칸은 우르두어가 힌디어에 뒤쳐지지 않도록 서구 과학 기술 서적을 우르두어로 번역하도록 지원하는 사업을 벌였으며, 인도 각지에 대학에서 우르두어 강의도 이루어지도록 노력을 기울였다.

1930년 인도의 유명한 우르두어 문학가이자 법학자였던 무함마드 이크발 영국령 인도 제국 북서부의 무슬림 거주지역을 묶어서 무슬림만의 독립된 국가를 건설해야 한다는 주장을 했고, 여기에 무슬림 엘리트들이 동조하면서 별개의 자치령으로 독립하게 되었다. 원래 영국령 인도 제국에서 관료로 일하기 위해 영국과 독일에서 법학을 전공했던 이크발은 법학보다는 문학과 철학에 깊이 빠져들었으며, 귀국 이후 우르두어 문학 부흥에 투신하였다. 다만 법학을 완전 내팽개친 것은 아니라 법전 번역에도 관여하였다. 그의 사상의 영향을 받은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샤리아법이 아닌 서구 법을 따르는 이슬람 민주주의 공화국으로 방향을 잡고 파키스탄 국체의 토대를 마련했다.

1.1. 바렐위 운동

사이드 아흐마드 칸이 우르두어 진흥 운동에 엄청난 기여를 한 것은 사실이지만, 유물론까지 포용하려던 그의 급진주의적 주장은 당시 무슬림 지식인들 사이에서만 호소력이 있었다. 무슬림 일반 대중들 입장에서 좀 더 호소력이 있던 것은 19세기 등장한 바렐위 운동과 데오반드 운동이었다.

1786년 태어난 아흐마드 바렐위는 수피 근본주의자로서 라자스탄의 통크 지역의 나와브 아미르 칸의 군대에서 7년을 복무하였다. 그러나 통크의 나와브가 영국과 동맹을 맺자 그는 여기에 불만을 느끼고 군대를 떠나 수피 교단 개혁 운동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1818년부터 1819년 사이 바렐위와 그의 제자들은 인도 북부 각지를 순회하는 대규모 선교 여행을 시행하였고 이를 통해 지지자들을 끌어모은 후 1824년 반(反) 시크교 민병대를 조직하였다. 바렐위의 목표는 영국과 시크교 세력을 몰아내고 인도 내 무슬림 지배세력을 회복하는 일이었다. 우선 그는 펀자브 지방의 시크교도들을 몰아낼 계획을 세우고 시크 왕국의 란지트 싱에게 선전포고를 한다. 바렐위는 자신의 스승 아버지였던 샤 왈리울라가 마라타 동맹의 침공에 맞서 아프가니스탄의 두라니 왕조 군대에게 요청을 하여 파니파트 전투에서 마라타 군대를 격파하도록 한 일을 떠올리고, 페샤와르 일대의 파슈툰족 지도자들과 동맹을 맺은 후 제자들과 함께 시크교도 군대를 공격하여 1826년 시크 왕국 군대에 맞서 비록 작은 규모이지만 승리를 거두었다. 무적의 군대로 알려진 시크교도들을 격파한 것을 계기로 바렐위는 아미룰 무미닌(신앙인들의 사령관)이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이후 1831년 바렐위의 군대는 당시 시크 왕국의 영토이던 카슈미르로 이동하여 그곳의 시크교도들과 전투를 벌였으나 패배하고 제자 600여 명과 함께 전사하였다. 카슈미르에서 시크교도와 싸우다 전사한 바렐위는 남아시아의 수피들 사이에서 순교자로 추앙을 받기 시작했다.

바렐위가 본격적으로 남아시아 수피들의 아이콘으로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은 1900년대 초였다. 영국의 기독교 선교의 맞선 힌두교 부흥 운동 단체 아리아 사마지는 펀자브 지역에서 무슬림들을 힌두교도로 개종시키는 선교 운동을 전개하였다. 아리아 사마지 선교사들은 “ 베다 우파니샤드에 나온데로 힌두교 역시 유일신 신앙의 일종이며, 펀자브인들은 아랍인의 종교가 아니라 펀자브인 조상들의 종교를 따라야 한다”는 캐치프레이즈를 통해 무슬림들에게 힌두교를 선교하였다. 펀자브 지방의 수피들은 인도의 이슬람은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브파의 그것과 다른 고유의 수피즘이라며 아리아 사마지의 슬로건을 반박하면서 이슬람 부흥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1925년 펀자브 지역을 중심으로 한 순니파 수피들은 "전 인도 순니파 회의(All India Sunni Conference; آل انڈیا سنی کانفرنس)"라 불리는 단체를 조직했다. 정작 바렐위의 스승 샤 왈리울라가 와하브파의 시조 무함마드 빈 압둘 와하브와 동창으로, 와하브파와 비슷한 견해를 가졌던 것과 대조적으로, 전 인도 순니파 회의 멤버들은 이들은 시대적인 이유로 당시 사우디아라비아의 와하브파와 선을 그으며 남아시아 수피 전통을 보호하는 운동을 전개하였다. 새로 바렐위파라는 이름으로 보인 북인도의 수피 무슬림들은 인도 무슬림연맹을 지지하였다. 바렐위파는 파키스탄이 분리독립하고 힌두교도들과의 분쟁이 일단락된 이후 따로 "자미아트 울라마이 파키스탄"이라는 단체를 조직하며, 반 수피 성향의 데오반드파와 대립하게 된다.

1.2. 데오반드 운동

19세기 중반 세포이 항쟁이 실패한 것을 계기로 영국은 인도를 직접 통치로 방식으로 전환하고 꼭두각시 노릇을 하던 무굴 제국의 황제 바하두르 샤 2세를 폐위시켜 미얀마로 귀양을 보냈다. 영국령 인도 제국의 시작이었다. 이후 총독에 의한 통치를 지나 1877년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이 인도의 황제 자리에 올라 황제를 칭하고 식민지 인도 제국이 세워진다.

세포이 운동을 지하드로 여겼던 인도 무슬림들은 좌절감과 위기감을 느끼고 이슬람 개혁 운동을 준비하기 위해 우타르프라데시의 데오반드라는 조그만 도시에 근대화된 신학교를 건설한다.[3] 우타르프라데시는 힌디어 우르두어가 보편적으로 사용되던 지역에다 인구도 많았던 이유로 데오반드 대학에서 수학한 학자들의 의견이 남아시아 일대에 폭 넓게 전파될 수 있었고 인쇄술의 보급으로 다수의 대중을 상대로 한 포교가 가능해졌다. 출판, 교통, 통신의 발달 덕분에 데오반드 대학의 영향력은 남아시아 전역으로 폭 넓게 전파되면서 데오반드 학파는 남아시아의 순니파+하나피파+반수피 신학 사조의 대명사가 되었다.

데오반드 학파 무슬림들은 인도의 무슬림들이 영국 여왕에게 충성하는 대신 당시 칼리파에 해당하던 오스만 제국 술탄에게 충성을 바쳐야 마땅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오스만 제국과 활발한 교류를 시도하였다.[4] 그러나 당시 오스만 제국은 19세기 이후 유럽의 환자 소리나 듣던 상황이라 인도 무슬림들을 보살필 여건이 안 되는 데다 인도 무슬림들을 도와 줄 수 있는 여력이 없었고, 1922~3년부로 터키가 술탄/ 칼리파 제도를 폐지하자 데오반드 학파 운동가들은 멘붕을 겪게 되었다. 대의명분을 상실한 이들은 이집트와 레바논/시리아 일대의 아랍인 살라프파 운동에 영향을 받게 되었다. 데오반드 학파는 처음부터 반수피 성향을 띈 것은 아니었지만 칼리파 폐지 이후 충격을 받은 학자들 상당수가 무슬림들이 방향을 잃고 몰락한 이유가 바로 수피즘이 초창기 이슬람으로부터 어긋났기 때문이라는 살라프파의 주장을 이어받아 다른 수피들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데오반드 운동가들이 멘붕을 겪기 한참 이전부터 이슬람 신비주의에 해당하는 수피즘은 점차 살라프파에게 자리를 내주던 상황이었다. 수피들은 이교도들에 맞서 무슬림들을 적극적으로 방어하지 못하고 하루종일 어디 숨어서 예배만 한다고 비난을 받았다. 이러한 배경 하에서 발전한 데오반드파는 자연스레 반 수피 성향을 띄게 되었다. 오스만 칼리파가 폐지된 이후 데오반드 학파 중 온건파들은 타블리기 자마트라는 이슬람 운동 단체를 만들었으며 이후 강경파들은 자마아티 이슬라미라는 이슬람 근본주의 정당으로 흡수되었다.

2. 파키스탄 자치령

자치령으로 분리독립하면서 파키스탄은 세 가지 위기에 봉착하였다.

첫 번째로 파키스탄이 실질적인 준비 없이 갑자기 분리독립하는 과정에서 대규모 유혈 사태를 동반한 인구 이동이 일어나고 제1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일어났다. 분리 독립 과정에서 충분한 논의나 토의 없이 국경선이 그어졌는데, 무슬림 인구가 대다수였던 카슈미르가 인도 영토로 넘어감과 동시에 무슬림과 힌두교도, 시크교도들이 섞여 살던 펀자브 지역이 갑자기 국경선으로 나뉘었다. 펀자브 서부에 거주하던 힌두교도와 시크교도는 동부로 이주하고 무슬림들은 동부에서 서부로 이주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파키스탄 전체 인구의 10%가 인도에서 이주해 온 난민으로 채워졌다.

두 번째로 한 때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지방 중 하나였던 비옥한 펀자브 지방은 영국의 식민 지배를 겪는동안 인구만 넘치는 빈곤 지역으로 전락했다는 점이다. 19세기 초반 산업 혁명 과정에서 영국의 수탈 및 1870년대 대규모 기근 이후 펀자브의 신드 지역의 전통적인 경공업은 박살이 난 상황이었고, 기초적인 생필품조차 자급하기 힘든 상황이 되었다. 파키스탄 자치령이 독립하던 시점에서는 파키스탄 영내에 조폐소조차 없었다.

세 번째는 동파키스탄 문제였다. 원래 파키스탄(Pakistan) 국명은 펀자브(Punjab), 아프간(Afghan), 카슈미르(Kashmir), 신드(Sindh), 발루치스탄(Baluchistan)에서 비롯된 것에서 볼 수 있듯이 무함마드 알리 진나, 무함마드 이크발 등등 파키스탄 건국 운동가들은 동벵골 지역을 편입시킬 의지가 없었다. 동벵골과 인도 제국 서북부는 서로 수 천km 이상 떨어져 있었는데 이를 파키스탄의 적대국인 인도가 가로막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이들 지역의 주민들은 종교만 같지 그 외에는 사실상 남남이나 다름없었고, 현실적으로 파키스탄에서 동벵골 지역을 다스리는 것이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서파키스탄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의도하지도 않았는데 영국에 의해 동벵골 지역이 영토로 주어지자, 영국령 인도 제국 식민지 관료로 일하던 습관 그대로 동벵골 지역을 식민지로 취급하였고 이는 나중에 엄청난 유혈 사태로 번진다.
출범 당시 파키스탄이 안고 있던 가장 중요한 문제는 새로 국민 정체성을 만들어내서, 민족·언어·이데올로기·종교의 차이가 다양한 여러 주민들이 함께 동의할 수 있는 안정적인 정권을 수립하는 일이었다. 파키스탄은 무슬림들이 자신들만의 국가가 필요하다는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탄생한 나라였다. 그러나 일단 국가가 수립되자 이슬람에 대한 호소 하나만으로는 다양한 종교적 정체성·지역적 민족적 충성심·계급간의 적대감 등에서 비롯되는 갈등을 제어할 수 없었다. 세속주의를 내세운 터키의 엘리트들과 달리 파키스탄의 엘리트들은 이슬람 내셔널리즘을 표방했다. 인도의 힌두교도들과의 경쟁과 무슬림 내부의 뿌리 깊은 분파적·민족적·지역적 분열로 인해 파키스탄을 통합할 수 있는 유의미한 상징은 이슬람뿐이었던 것이다.
이슬람의 세계사 / 아이라 라피두스

이러한 혼란의 와중에 국부로서 구심점 역할을 하면서 초대 총독으로 재임하던 무함마드 알리 진나는 임기 중인 1948년 9월 11일 결핵 폐암으로 사망하였다.

빈곤한 경제 및 사회적인 상황을 물려받은 파키스탄은 파키스탄 자치령 시절 1953년 아직 영국 군주를 모시고 있을 때 독립국인 자국의 군주로서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의 대관식에 사절단을 파견하기도 했다. 이곳의 28:16대목에서 파키스탄의 이름이 언급된다.

1956년년에 개헌을 실시하여 1956년 3월 23일부터 공화국으로 국체를 변경하여 파키스탄 대통령을 뽑고 영국 국왕을 더 이상 섬기지 않는 파키스탄 이슬람 공화국이 되었다.

3. 건국 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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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 독립을 기념해 라호르에 세워진 미나르 에 파키스탄

건국 초기에는 이슬람 민주주의를 내세웠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PML과 PPP로 대표되는 민정 정부와 쿠데타로 인한 군사 정부가 약 10년 단위로 돌아가면서 정권을 차지하였다. 1956년 건국 직후에는 모하마드 진나가 설한 파키스탄 무슬림 동맹(PML; Pakistan Muslim League)이 정국을 이끌었으나 1958년 10월 27일 아유브 칸의 쿠데타로 인하여 1971년 12월 20일까지 파키스탄군가 정권을 차지했었다. 독립 이후 인도가 독자적인 제3세계 노선을 추구하며 소련과 교류한 것과 유사한 맥락에서 쿠데타로 집권한 아유브 칸은 미국 및 중국과 밀당을 벌였는데, 아유브 칸 정권은 1959년부로 미국에 페샤와르 공군 기지를 임대하였으며,[5] 친중 외교를 통해 인도를 견제하였다. 1962년 중인전쟁 이후 인도와 사이가 틀어졌던 중국은 1965년 제2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이 발발하자 파키스탄에 6천만 달러에 가까운 원조금을 지원하였다.[6] 전쟁 자체는 국력 차이로 파키스탄이 인도에 밀리던 양상이었으나, 당시 이미 핵무기를 보유했던 중국이 파키스탄을 지지하자, 소련이 인도와 파키스탄을 중재하였고[7] 결국 파키스탄은 전쟁 패배에도 불구하고 별다른 타격을 입지 않았다.

한편 아유브 칸은 1969년 3월 25일 파키스탄 육군 육군총사령관이었던 야히아 칸에게 대통령 자리를 이양했는데 새로 대통령이 된 야히아 칸은 계엄령으로 민주화 여론을 탄압하려 했으나 전국에서 민주화 요구가 빗발쳤다. 결국 여론에 굴복한 야히아 칸은 민정 이양을 약속하고 자유 선거를 치르기로 하였는데, 1970년 12월 민주화 이후 최초로 치러진 총선에서 민정 이양 이후 총선에서 동파키스탄의 자치를 주장하는 지역주의 정당인 아와미 연맹(Awami League)이 313석 중 167석을 석권하여 단독으로 과반을 차지하는 이변이 일어났다. 이는 독립 직후부터 서파키스탄 출신 위주로 돌아가는 파키스탄 정부가 동파키스탄을 말 그대로 식민지 취급하며 차별대우한 것에 대한 강한 반감, 결정적으로 총선 1달 전 사이클론 볼라(Bhola)가 동파키스탄을 강타해 5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직후 정부의 차별적인 대응에 분노한 동파키스탄의 벵골인들이 대거 아와미 연맹에 몰표를 던진 까닭이었다. 이 총선 결과에 경악한 야히아 칸 대통령은 즉각 동파키스탄 총선 결과를 무효화하는 소탐대실적인 일을 벌였고 결국 폭발한 동파키스탄은 1971년 3월 26일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했다. 뒤이어 방글라데시 독립군과 서파키스탄 진압군, 그리고 방글라데시 독립군을 지원해 인도군까지 개입한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끝에 파키스탄은 전쟁에서 패배하고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인정했다. 야히아 칸은 전쟁 패배의 책임을 지고 1971년 12월 20일 대통령 자리에서 물러났으며 PPP를 이끌던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대통령이 되었다. 이후 부토는 1973년 내각책임제로 헌법이 바뀌자 총리로 취임한다. 이슬람 사회주의를 표방하던 알리 부토는 1977년 7월 5일 파키스탄 육군 육군참모총장 무함마드 지아울하크가 주도하여 일어난 군부의 쿠데타 때문에 실각하고, 이후 1979년 4월 4일에 부패와 살인죄 혐의로 사형당하고 만다.

인도 인디라 간디 총리가 비상사태를 선포한 1970년대 중반을 제외하면 민주주의 체제가 유지되고 있다.[8] 반면 파키스탄은 아불 알라 마우두디 같은 이슬람주의자들의 선동을 바탕으로 상당 기간 군사독재를 받았다. 아불 알라 마우두디는 지아울하크가 정권을 잡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뉴욕에서 죽었지만, 대신 그가 창설한 정당 파키스탄 이슬람 회의가 지아울하크 정권의 실세가 되었다. 당원들은 내각 장관직을 포함하여 정부 고위 관직을 차지했다. 해당 정당의 견해는 당시 파키스탄 정부 계획에 반영되었다. 이들은 국가 정책을 실현하는 데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담당했으며, 특히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에 대한 정책이나 지방 민족 문제에 적극 개입하였다. 다시 말해서 이들이 파슈툰족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것을 계기로 결국 아프가니스탄에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세력이 힘을 얻었다.[9] 현대 파키스탄의 혼란상과 낙후성은, 군사독재 정권기 이슬람주의 정당이 우민화 정책에 협력하고, 이 와중에 발전소나 학교 같은 인프라에 투자되어야 할 자본들이 부패로 유출된 것과 연관이 있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 파키스탄은 비교하자면 한국전쟁 당시 일본이 누렸던 경제 특수나 베트남 전쟁 당시 한국이 받았던 경제 특수 못지않은 엄청난 액수의 원조금을 미국으로부터 증여받았으나 이를 국가 발전에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부패로 낭비하였다. 자마아티 이슬라미가 몰락한 이후에야 한 때 파키스탄 국가 예산의 60% 이상 #에 달하던 국방비 비중 역시 정상적인 비중으로 돌아갔다. # 이렇게 국방비로 투자된 돈은 대부분 파키스탄 장성들의 개인 호주머니 속으로 들어가고 다시 이 돈은 영국, 아일랜드, 미국 등에 거주하는 파키스탄 장성들의 친척들의 재산으로 빼돌려졌음은 물론이다.

줄피카르 알리 부토의 딸인 베나지르 부토는 망명 중에 아버지의 뒤를 이어 PPP(파키스탄 인민당)의 당수가 되었고, 아버지를 죽인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비행기 사고로 죽은 뒤 3개월 뒤인 1988년 11월 16일에 치러진 총선거를 승리로 이끌고 1988년 12월 2일부터 내각을 구성하고 총리가 되어서 민간정부가 들어서게 된다. 1990년 10월 24일에는 펀자브의 사업가 출신인 나와즈 샤리프(Nawaz Sharif)가 이끄는 PML의 분파인 PML -N이 승리하여 1990년 11월 6일부터 내각을 이끌었으며, 다시 3년 후인 1993년 10월 6일에 치러진 총선거에서는 베나지르 부토가 이끄는 파키스탄 인민당이 승리하여 1993년 10월 18일부터 내각을 이끌었으나, 여러 비리와 부패혐의로 인해 파르크 레가리 대통령에 의해 1996년 11월 5일에 해임되었다. 물론 그 부패 혐의에는 어느 정도는 논란이 있다. 1999년 10월 12일 파키스탄 육군 육군참모총장 페르베즈 무샤라프의 주도 하에 또다시 쿠데타가 발발하여 페르베즈 무샤라프 2001년 6월 20일부터 2008년 8월 18일까지 파키스탄 대통령으로 재임하면서 군사 독재 정치를 펼치게 되었다. 이후 2008년 야당의 압력으로 총선을 치러서 파키스탄 인민당이 정권을 차지했고 2013년에는 이전에 물러난 PML-N의 나와즈 샤리프가 다시 총리에 취임하게 되었다.

인도 핵무기를 개발하자 따라서 핵무기를 개발했다. 당시 동파키스탄(현 방글라데시)이 떨어져나가서 외교적으로나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받은 걸 생각한다면 삽질이라고 생각할수도 있으나, 파키스탄의 주적인 인도가 핵을 개발했으니 파키스탄이 이에 대항하기 위해서 핵을 개발하는 것이 당연했는데[10] 당시 지도자였던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UN에서 했던 발언은 오늘날까지도 회자되고 있다.[11]

하지만 실제로 파키스탄의 핵개발은 부토보다는 군부 시대에 주도되어 1998년 첫 지하 핵실험이 이루어졌고, 그로 인해 2001년까지 경제적으로 봉쇄되었다가 9.11 테러 이후, 내륙국인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려는 미국에게 영공 통과와 군사 기지들을 임대하는 등 협력하는 대가로 해제되었다.

4. 21세기

이후에도 쿠데타와 민정 이양이 반복되었다. 이슬람주의자인 나와즈 샤리프 총리에게 반대해 일으킨 1999년의 쿠데타로 2001년부터 2008년까지 집권한 페르베즈 무샤라프 대통령이 군사독재 정치를 펼쳤으나 야당의 압력으로 선거를 치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2001년 911 테러를 계기로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하는데, 이를 계기로 파키스탄은 핵개발로 인한 경제제재가 풀린 것은 물론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당시와 마찬가지로 미국의 원조에 의한 경제 특수를 누리게 되었다.

미국 입장에서는 탈레반 연계 파키스탄이 못 미더웠지만, 불행히도 아프가니스탄의 국경을 접해있는 나라들 중에서 그나마 협조를 기대할 수 있는 나라가 파키스탄 하나밖에 없었다. 이란은 대표적인 반미 국가이고 북쪽의 투르크메니스탄 니야조프로 대표되는 독재 국가였으며, 우즈베키스탄 타지키스탄은 경제가 러시아에 잡혀있던 상황이었다.[12] 이러한 상황을 파악한 파키스탄은 미국과 탈레반 사이에서 밀당을 시도하고, 미국은 울며 겨자먹기로 파키스탄의 탈레반 지원을 눈 뜨고 봐주는 상황이 이어졌다.

상당수의 NGO 단체들이 무샤라프가 독재자이기는 하지만 전임자들에 비해서는 일은 잘했다고 평가한다. 이번에도 미국의 원조금을 고위층들이 거의 다 떼먹은 것만 빼면, 정상적으로 국가를 운영하였다. 일단 공무원 비리와 복지부동을 상당수 혁파했고 아프간 난민과 빈민들을 위한 정책을 폈다. 그리고 경찰까지 썩어서 비리 적발이 힘들자 헌병을 동원해서 비리 색출을 했다고. 지아울하크 정권 시절 악화되었던 여성 인권 문제도 다시 원상복귀시켰다. #1 #2 지아울하크 정권 당시 이슬람 근본주의화되던 파키스탄을 다시 세속화시킨 데는 그의 공로도 없지 않았다. 물론 아프가니스탄과 인접한 카이베르파크툰크와가 탈레반의 온상이 되어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막지는 못했지만, 나라 전체가 탈레반/자마아티 이슬라미 콤보한테 먹히지 않게 한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그러나 유력한 주자로 부각되던 부토가 2007년 12월 27일, 2008년 1월에 있을 총선을 2주 앞두고 폭탄 테러 암살되었다. 부토의 파키스탄 인민당은 이 비극을 도리어 버프 삼아 압승을 거두며 정권을 되찾았고, 반대로 군부의 후신 정당은 역관광당했다. 무샤라프는 더욱 이미지가 나빠져 야당의 탄핵소추 끝에 사임과 함께 즉각 망명을 택해야 했다(돌아오면 코렁탕이다). 이후 그럭저럭 견제와 균형으로 민주주의가 굴러가고 있다.

부토의 남편인 아시프 알리 자르다리가 대통령에 취임했으나, 민주주의 체제로 돌아왔다고 해도 대통령 자르다리가 미스터 10%라고[13] 불릴 만큼 국가 전반적인 부정부패가 심각한 데다 군부와 원리주의자 세력들의 권력이 너무 강력하여, 나라 자체가 막장이라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 자세한 형국 이슬람과 펀자브 지방을 중심으로 한 야당(PML-N)이 군부와 적당히 손을 잡은 자르다리를 군부를 구실로 까는 분위기다. 결국 2010년 대통령 권한을 대폭 축소하는 의원내각제 개헌을 통과시켰다. 자르다리는 임기 중반에 자신의 권력을 뺏기는 수모를 당한 셈이다. 다만 자신의 정당 PPP의 당수직은 유지하여, 총리를 통해 간접적으로 권한을 행사하게 된다. 2013년, 자르다리는 차기 대선 및 총선 불출마를 선언했다. 그래도 그가 집권한 이래 파키스탄이 중앙정부의 통치가 미치는 구역 한정이긴 해도 절차적 민주주의가 그럭저럭 굴러가는 국가가 된 건 사실이다.

그리고 PML-N으로 2013년 정권이 넘어가게 된다. 건국 66년 만의 최초의 평화적 정권 교체라고 한다. 2013년 9월에 선출된 대통령은 맘눈 후세인이지만, 위에 언급했다시피 2010년 이후 대통령 권한이 대폭 축소된지라 실권자는 현재 총리인 나와즈 샤리프이다. 미국 워싱턴포스트는 10년 안에 파키스탄이 미국, 러시아 다음으로 세계 3대 핵 보유국이 될 것이라는 보고서가 나왔다고 밝혔다. # 2016년 1월 19일에 핵탄두를 실어 나를 수 있는 순항미사일 실험이 성공을 하면서 핵개발이 가속 중이다. # 하지만 샤리프 총리가 대법원에 의해 파나마 페이퍼 혐의로 해임되면서 파키스탄의 정세에 영향을 끼칠 우려를 낳고 있다. #

2017년 8월에 새 총리로 현 집권 여당인 파키스탄 무슬림리그 소속인 샤히드 하칸 압바시가 새로운 총리로 선출되었다. # 하지만 임시 총리이기에 2018년 총선 때 다시 총리가 결정된다. 해임된 샤리프 총리도 2018년 선거에 도전하겠다고 선언했다. # 그러나 파키스탄 법원은 샤리프 총리에게 구속영장을 발부했다. # 그리고 나와즈 샤리프 총리와 장녀 미리암 샤리프는 영국에서 파키스탄으로 귀국하자마자 체포되었고 파나마 페이퍼스 명단으로 탈세혐의가 확인되면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 그리고 2018년 총선에서는 나와즈 샤리프의 동생인 펀자브 주지사인 셰바즈 샤리프가 PML-N을 이끌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나와즈 샤리프의 딸인 미리암 샤리프가 법원에 제출한 문서가 화제가 되었다. 나와즈 샤리프의 유력한 후계자로 주목받던 미리암 샤리프는 파나마 페이퍼와 연관되어서 자신은 이미 자신의 재산 운용에 대한 권리를 모두 사업가로 일하던 동생에게 2006년에 양도했다며 자신이 사인한 권리 양도 문서를 대법원에 제출하였다. 문제는 이 문서에 쓰인 Calibri 폰트는 2007년에 되어서야 사용되기 시작했다는 것. 이로 인하여 이 사건은 파키스탄에서 fontgate라고 불리며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2018년 7월 25일에 이루어진 총선거에서 임란 칸이 이끄는 PTI가 예상을 뛰어넘는 압승[14]을 거둠으로써 여당이 됨과 동시에, 건국 이후 수십 년 동안 파키스탄 인민당, 파키스탄 무슬림 동맹, 그리고 파키스탄 군부가 돌아가면서 차지하던 파키스탄 정치의 순환 고리를 마침내 깨고 임란 칸이 새로운 총리로 취임하였다. 2020년 9월 파키스탄의 야당 지도자들이 2020년 10월로 예정된 반정부 시위를 앞두고 잇따라 체포되거나 기소됐다. #

언론의 상황도 매우 나쁘다. 특히 언론자유지수에서 파키스탄은 157위를 할 정도로 매우 낮다. 게다가 파키스탄의 언론들과 기자들은 정부와 이슬람 극단주의자들, 군부에 의해 탄압당하는 일이 흔하게 나오고 있어 언론 자유가 위협받는 상황이다. # 2020년에 파키스탄의 저명한 반체제 성향 언론인이 12시간 동안 납치됐다가 풀려났다고 돈 등 현지 언론과 외신이 보도했다. # 2021년에도 파키스탄의 유명 앵커가 군부를 비판하다가 프로그램에서 퇴출됐다. #

2022년엔 기후변화의 영향으로 벌어진 2022년 파키스탄 폭우 사태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최소 400억 달러 가량으로 추정되는 재정 손실은 물론 국토의 1/3 - 1/4 가량이 물에 잠겨 농사도 완전히 망해버렸다. 파키스탄 정부는 전 세계로부터 구호기금을 받아 복구에 힘쓰고 있지만, 워낙 인프라가 부실하고 국가 재정도 넉넉하지 않아 지지부진하다.

2024년 1월 16일 이란이 파키스탄과의 국경지역에서 활동하는 수니파 분리주의 무장단체를 소탕하기 위해 탄도미사일과 드론 6발을 발사했다. 파키스탄 외무부는 격노하며 이란의 공습을 강하게 비난했다. 이 공습으로 어린이 2명이 죽고 6명이 다쳤다.[15] # # 이틀 후인 1월 18일 파키스탄도 이란과의 국경지역을 보복 공습하면서 갈등의 파장이 커지는 듯했지만, # 불행 중 다행히도 바로 하루 뒤인 1월 19일 이란과 파키스탄이 긴장 완화에 합의하면서 양국간 분쟁은 짧은 막을 내렸다. #


[1] 비슷한 사례로, 카르타고 일대를 가리키는 말이다가 대륙 전체로 확장된 아프리카, 소아시아를 일컫다가 대륙 전체로 확장된 아시아가 있다. [2] 파키스탄과 북인도의 차이보다 오히려 데칸 고원 아래의 남인도와 북인도의 차이가 더 컸다. [3] 교과과정에 쿠란, 하디스, 샤리아 외에도 논리학, 철학, 과학을 추가하였다. [4] 1909년 데오반드 대학의 학장이 오스만 제국과 직접 접촉하여, 오스만 제국이 아프가니스탄과 힘을 합쳐 영국을 인도에서 몰아내달라는 부탁을 시도했던 적도 있다. [5] 당시 우즈베키스탄, 투르메니스탄 등이 소련으로부터 독립하기 이전으로 튀르키스탄 일대는 소련 영토였다. 미국 입장에서는 소련의 중앙아시아 군사 기지들을 타격할 목적으로 비교적 가까운 파키스탄 공군 기지를 임대했던 것. [6] 다만 파키스탄은 중국의 군사 원조 자체는 미국의 원조금 중단 및 냉전의 확대로 연결될 수 있다는 판단 하에서 거절하였다. [7] 양국은 소련의 주선 하에 당시 소련 영토였던 타슈켄트에서 평화 협정에 서명하였다. [8] 나렌드라 모디 시기에도 민주주의가 후퇴했다는 말이 많지만 민주주의의 기본은 유지되고 있다. [9] 이후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서는 이를 흡수한 탈레반이 들어섰다. [10] 인도와 전쟁을 여러 번 했기 때문에 또다시 전쟁이 일어나면 인도가 핵을 쓸지도 모르며, 핵우산을 대신 씌워줄 동맹도 없기 때문이다. [11] "인도가 핵무기를 개발하면 우린 풀과 나뭇잎만 뜯어먹다가 굶어죽는 한이 있어도 핵무기를 확보할 것이다. 우리에겐 선택의 여지가 없다." [12] 중국도 아프가니스탄과 국경을 접하고 있기는 하지만 당연히 미국한테 협조하기를 기대하기 힘들 뿐더러, 설령 미국이 9.11테러의 분노를 내비치거나 중국이 자진해서 미국을 도와준다고 해도 중국 아프가니스탄 국경 와칸 회랑이 워낙 협소하고 국경까지 가는데 상당히 많은 노력과 시간이 소비되며 교통이 불편한 이유로 큰 도움을 주기 힘들었다. 이러니 미국 입장에서는 차라리 파키스탄을 자기편으로 만드는데 빨랐다. [13] 사업을 진행하는 예산의 10%를 기본으로 떼먹고 시작해서라고 한다. 그러나 현지인들에게 물어보면 20%에서 30%라고 한다. [14] 기존 여론 조사 및 언론사 예측으로는 60-90석 정도를 차지함으로써 근소한 차이로 PML-N을 지치고 제1당이 될 것으로 예측했으나 선거 결과는 110석을 넘는 압도적인 표를 차지하였다. 2018년 기준 파키스탄의 총 의석 수는 342석이며 이 중 272석을 선거를 통하여 뽑는다. 나머지 의석 중 60석과 10석은 각각 여성과 취약계층을 위한 예비 의석이다. 한국으로 치면 비례대표와 유사. [15] 참고로 이란은 전날인 15일 이라크 쿠르디스탄 지역에 있는 이스라엘 정보기관 모사드의 첩보시설을 탄도미사일로 공격해 이라크 민간인 4명이 사망했다. 같은 날 케르만 폭탄 테러의 보복으로 시리아의 IS 근거지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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