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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2-13 21:37:01

굴부딘 헤크마티아르

파일:afghanistan.jpg
<colbgcolor=#ce0000> 아프가니스탄의 무자헤딘, 범죄자
본명 <colbgcolor=#ffffff,#292929>굴부딘 헤크마티아르
(영어:Gulbuddin Hekmatyar)
(파슈토어:گلبدین حکمتیار)
출생 1947년 6월 26일 ([age(1947-06-26)]세)
아프가니스탄 왕국 쿤두즈 주 이맘 사히브 구
국적 아프가니스탄 파일:아프가니스탄 국기.svg
부족 파슈툰족
학력 카불 대학교
직업 정치인, 무자헤딘 지도자
종교 수니파 이슬람
정당 헤즈비 이슬라미 굴부딘[1]
참여한 전쟁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아프가니스탄 내전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1. 개요2. 생애
2.1.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제1차 아프가니스탄 내전(1989년~1992년)2.2. 제2차 아프가니스탄 내전(1992년~1996년)2.3. 탈레반과 손을 잡다2.4. IS지지를 선언하다.2.5. 정부와의 휴전2.6.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
3. 여담4. 같이 보기

1. 개요

아프가니스탄 원리주의 성향의 무자헤딘 학살자 테러리스트. 탈레반과 협력을 하기도 했고, IS 지지를 선언하기도 했다. 그런데 이슬람 원리주의자라고 보기에도 애매하다. 본인의 권력을 독차지하기 위해서라면 동료 이슬람주의자들을 소련 공산주의 세력에게 팔아넘기는(...) 등 권력을 위해 여기 붙었다 저기 붙었다 하는 박쥐 같은 행적을 보여왔기 때문이다.

2. 생애

1947년 6월 26일 파슈툰족 가정에서 출생하였으나 정확하지는 않다. 1944년이라는 설도 있고, 1948년이라는 설도 있다. 1968년에는 군사학교에 입학하나, 정치적 견해로 인해 2년 뒤에 퇴학당한다. 그 후에는 카불 대학교에 입학을 하나 마오주의자 학생을 살해한 혐의로 1972년 체포된다. 그러나 1973년 다우드 칸 총리가 쿠데타를 성공하고 특별사면을 받아 1973년에는 감옥을 나오게 된다. 출소 후에는 무슬림 청년회에 가입을 하게 되는데 그곳에서 아흐마드 샤 마수드를 만난다. 그러나 그곳에서도 둘은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둘다 이슬람 근본주의 사상을 지닌 인물들이었어도 마수드는 온건 이슬람주의자였는데 비해 헤크마티아르가 과격 이슬람주의자였기 때문이었다. 계속되는 대립에 헤크마티아르는 파키스탄의 도움을 받아 3년 동안 2번이나 마수드를 죽일려고 했으나 전부 실패한다. 그 후 아프가니스탄의 이슬람 사회는 마수드와 라바니의 온건파와 굴부딘의 과격파로 분리된다. 마수드, 라바니 세력은 '자미아티 이슬라미'가 되고, 굴부딘 세력은 '헤즈비 이슬라미'가 된다.

2.1.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제1차 아프가니스탄 내전(1989년~1992년)

파일:gulbuddin-hekmatyar-afghanistan.jpg
연설하는 굴부딘. 과격파 무슬림이었던 그에게
전란기는 세를 불릴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헤크마티아르는 전쟁 이전부터 파키스탄과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 당시 헤크마티아르는 민족주의자였던 아흐마드 샤 마수드를 죽이려고 했고, 이는 아프가니스탄에 지속적인 혼란을 만들어 자신의 영향력 아래에 두려고 했던 파키스탄의 뜻과도 일치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으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하자, 헤크마티아르는 파키스탄의 집중적인 지원을 받았다. 게다가 미국과 사우디에서 오는 지원금과 물자가 모두 파키스탄을 경유하였기 때문에, 서방권의 지원물자를 거의 독차지하다시피 하였다. 이때 헤크마티아르는 서방세계를 찬양하였으며, 심지어 영국으로 날아가서 당시 총리였던 마거릿 대처를 비밀리에 만나기도 하였으며 이러한 서방국가들과 사우디의 지원 하에 1980년대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과 1989년 소련 철수 이후에 일어난 아프가니스탄 내전에서 소련군과 소련의 지원을 받는 친소 아프간 정부군과 싸웠다.

그런데 헤크마티아르는 서방의 원조를 소련과 소련의 지원을 받는 친소 아프간 정부[2]에게 대적하는 것뿐만 아니라 다른 무자헤딘 파벌들을 공격하여 살해하는 등 본인의 권력을 불리는 것에 더 집중했다. 오죽하면 보다 못해 파키스탄의 당시 지도자였던 지아 울-하크 장군은 ISI의 작전 지시를 따르지 않으면 제거해버리겠다고 경고했을 정도였다. 당시 동료 무자헤딘들에게 헤크마티아르는 아주 평판이 좋지 않았지만, 그가 외부로부터의 지원 물자를 워낙 독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앞에서는 설설 기었다.

2.2. 제2차 아프가니스탄 내전(1992년~1996년)

파일:Stellungen_Kabul_1992.png
1992년의 카불. 당시 헤크마티아르파는 아프간 최대의 세력이었다.
1992년 나지불라 정권은 몰락했고 그 마침표는 수도 카불이었다. 당연히 카불에는 전국의 무자헤딘 군벌이 몰려왔고, 주요 5개의 군벌들이 카불을 포위했다. 전투는1992년 4월 25일에 시작되었다. 전투가 한창이던 5월 25일 굴부딘은 마수드와 만나 임시정부의 국무총리직을 제안받게되고 이를 수락하며 전투가 중단되나 싶었으나, 5월 29일 과거 굴부딘이 모자데디 대통령의 비행기에 RPG를 발사한 사건으로 기소를 당하자 협상은 무효가 됐고 전투는 재개되었다.

결국 1996년 5월에 굴부딘은 라바니와의 협상에 성공해 내각의 국무총리직에 임명된다. 그러나 그의 원리주의적 성향, 카불에서 학살을 벌이는 등, 많은 전쟁범죄를 저지른 굴부딘을 관리로 임명한 일은 라바니 내각에서도 많은 반발과 논란들을 불러왔고 이미 탈레반은 수도 카불을 공격하고 있었다. 결국 그해 탈레반이 카불을 점령하며 라바니-굴부딘의 연합내각은 공중분해되고 만다.

2.3. 탈레반과 손을 잡다

2001년에는 아예 아프가니스탄에 진군한 미군에게 탈레반과 연합하여 대항할 것이라고 지하드를 선포했다. 기사

헤크마티아르는 본래 탈레반을 적대했다. 그런데 헤크마티아르가 생전에 저지른 민간인 학살 등 온갖 전쟁 범죄 행위로 인해 파슈툰족들은 헤크마티아르의 무장단체 대신 탈레반을 지지하였다. 파키스탄 입장에서도 민심을 잃은 헤크마티아르보다는 지지를 받고 있는 탈레반을 지원하는 것이 더 나았다. 이에 헤크마티아르의 지지 세력들 대부분이 탈레반으로 이탈하였다. 결국 헤크마티아르는 세력을 잃고 이란으로 피신하게 된다. 그런데 미국이 쳐들어온 이후 뭔가 권력의 냄새를 맡았던 것인지 그동안의 앙금을 버리고 탈레반을 지지하면서 어그로를 끌기 시작했다. 탈레반에 반항하다가 정말 모든 영향력을 잃고 뒷방 늙은이 신세가 되느니 탈레반과 협력하여 그 내부에서 영향력을 확보하겠다는 심산이었다.

그 계산은 어느정도 먹혀 들어가 이전에 이탈했던 세력을 이끌고 반미 전선에 중요한 역할을 차지하게 된다. 2007~2008년쯤 되면 수도 카불에 대규모 폭탄 공격을 전개하고 대통령인 하미드 카르자이를 암살하려 하고 할 정도[3]로 예전의 위용을 대부분 회복했다.

2.4. IS지지를 선언하다.

기사

사실 이것은 당시 IS가 탈레반을 누르고 아프가니스탄의 새로운 패자로 떠오를 가능성이 제기되자, 그 박쥐같은 심성을 발휘하여 재빨리 줄을 갈아탄 것. 그러나 2010년대 말 IS의 본거지였던 시리아 이라크에서 IS가 미국, 서방 주도의 국제동맹군과 러시아군의 공세로 거점지역들을 모두 잃고 몰락하게 되자 헤크마티아르는 또 줄을 바꿔탈 준비를 하게 된다.

2.5. 정부와의 휴전

파일:Former-Afghan-warlord-Butcher-of-Kabul-returns-to-capital.jpg
2017년에는 20년만에 자신이 학살을 저질렀던 카불에 돌아왔다.
놀랍게도 옆의 인물은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이다.
정부와의 모든 연결고리를 끊고 싸웠던 탈레반과는 달리, 헤크마티아르는 싸울때마저도 아프가니스탄 정부와 어느정도의 연락선을 구축해놓고 있었다. 심심하면 평화협상 의지를 내보이며 갈아탈 자리를 봐두었던 것. 2016년 헤크마티아르는 지지했었던 IS의 세력이 영 시원찮자 완전한 사면을 조건으로 아프가니스탄 정부에 협력하게 되었다. 이로서 헤즈비 이슬라미의 모든 단원들은 사면되었고, 헤즈비 이슬라미는 아프가니스탄의 합법 정당으로서 활동하게 되었다. 헤크마티아르는 현행 아프가니스탄 헌법을 인정하고 지지하며, 아프간 정부는 그 댓가로 미국 정부의 테러리스트 지정을 해제해줄 것을 요청하기로 하였다.[4] 당장에 왕정 폐지 이후로 오랜 내전과 전쟁으로 취약할때로 취약해진 아프간 정부 입장에선 미국이 언제 떠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하나라도 더 우군을 확보하여 탈레반으로부터 현 정권을 지키는 것이 필수이기에, 사상과 과거를 따지지 않고 헤크마티아르를 위시한 반란군에 속해있던 군벌 세력들과의 모든 협력은 다 수용하고 있는 상황이다.

2019년 대선에 대통령 후보로 출마했으나 과거 살아생전에 이 자가 저지른 학살 등 악명으로 인해 낙선했다.

2.6. 2021년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공세

2021년 아프간 정부가 탈레반의 공격으로 붕괴되고 가니 대통령이 도주하자 전 대통령 카르자이 등과 함께 탈레반에게 권력을 넘기기 위한 과도위원회를 구성하여 탈레반의 카불 입성에 맞춰 열리는 탈레반과의 협상에 참여했다. 가니는 극히 인기 없는 지도자였다고 비난하며 탈레반의 승리는 당연한 일이었다고 경고하는 한편, 미국이 개입할 때만큼이나 무모하게 철수하였다고 비난하는가 하면, 인도와 파키스탄의 내정간섭에 대해 경고했다.

3. 여담

4. 같이 보기


[1] 이름만 정당이지, 사실상 굴부딘의 파벌. [2] 카르말, 나지불라 정권 [3] 물론 미수로 그쳤다. [4] 물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