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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6 18:44:42

측천무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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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측천황후
추존
제성제 · 시조 · 예조 · 엄조 · 숙조 · 열조 · 현조 · 태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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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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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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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ece5b6> 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고조 태종 고종 중종
<rowcolor=#ece5b6> 제5대 무주 제4대 복위 제5대 복위
예종 측천황후 중종 예종
<rowcolor=#ece5b6> 제6대 제7대 제8대 제9대
현종 숙종 대종 덕종
<rowcolor=#ece5b6> 제10대 제11대 제12대 제13대
순종 헌종 목종 경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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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종 무종 선종 의종
<rowcolor=#ece5b6> 제18대 제19대 제20대
희종 소종 애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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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태상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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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ece5b6> 태종조 중종조 현종조
고조 측천황후 예종
<rowcolor=#ece5b6> 숙종조 헌종조 덕왕조
현종 순종 소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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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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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식 재위
<rowcolor=#ece5b6> 태종 후 고종 후 중종 후
문덕황후 폐후 왕씨 측천황후 폐후 위씨
<rowcolor=#ece5b6> 예종 후 현종 후 숙종 후 덕종 후
숙명황후 폐후 왕씨 폐후 장씨 소덕황후
<rowcolor=#ece5b6> 무종 후 소종 후
황후 정씨 적선황후
추존 재위
<rowcolor=#ece5b6> 선천태상황 후 헌조 후 의조 후 태조 후
선천태후 선헌황후 광의황후 경렬황후
<rowcolor=#ece5b6> 세조 후 고조 후 의종 후 중종 후
원정황후 태목황후 경애황후 화사황후
<rowcolor=#ece5b6> 예종 후 양황제 후 현종 후
소성황후 양공황후 정순황후 원헌황후
<rowcolor=#ece5b6> 봉천제 후 숙종 후 승천제 후 대종 후
공응황후 장경황후 공순황후 예진황후
<rowcolor=#ece5b6> 대종 후 순종 후 헌종 후
정의황후 장헌황후 의안황후 효명황후
<rowcolor=#ece5b6> 목종 후 선종 후
공희황후 정헌황후 선의황후 원소황후
<rowcolor=#ece5b6> 의종 후 소종 후 비정통
혜안황후 공헌황후 선목황후 황후 육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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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0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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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552 ~ 583)
돌궐 제국
이리가한 을식기가한 묵한가한 타발가한
동돌궐
(583 ~ 630)
사발략가한 막하가한 도람가한 보가가한
의리진두계민가한 시필가한 처라가한 힐리가한
서돌궐
(583 ~ 657)
달두가한 아파가한 이리가한 이궐처라가한
사궤가한 통엽호가한 을비발라사엽호가한 해리필돌육가한
사발라질리실가한 을굴리실을비가한 을비사발라엽호가한 을비돌륙가한
을비사궤가한 사발라가한
당 황제의 가한 겸직
(630 ~ 782)
태종 고종 중종 예종
측천황후 중종 상제 예종
현종 숙종 대종 덕종
돌궐 제2제국 | 동돌궐
(682 ~ 745)
힐질리시가한 묵철가한 부구가한 비가가한
이연가한 등리가한 판궐특근 오소미시가한
백미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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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 선정 세계의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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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ack,#white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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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9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은 세계사에 이름을 남긴 여성들을 선정했다.
긍정적 영향을 미친 여성들뿐 아니라 '세계사에 족적을 남긴 여성들'을 뽑았기 때문에 부정적인 인물들 혹은 논란 있는 인물들도 있다.
성인들
성모 마리아 예수의 테레사 마더 테레사
지도자들
앙겔라 메르켈 베나지르 부토 예카테리나 2세 캐시 프리먼 서태후
클레오파트라 코라손 아키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달리아 그리바우스카이테 다이애나 스펜서
지우마 호세프 에디트 크레송 엘레오노르 다키텐 엘리너 루스벨트 엘리자베스 1세
엘리자베스 2세 엘런 존슨 설리프 에바 페론 골다 메이어 그로 할렘 브룬틀란
한나 수호츠카 하트셉수트 인디라 간디 이사벨 1세 제니 시플리
줄리아 길라드 칼레다 지아 킴 캠벨 마거릿 대처 마리 앙투아네트
메리 로빈슨 메가와티 수카르노푸트리 미첼 바첼레트 미셸 오바마 박근혜
잔 다르크 시리마보 반다라나이케 쑹메이링 탄수 칠레르 테오도라
바이라 비케프레이베르가 빅토리아 여왕 비그디스 핀보가도티르 비올레타 차모로 측천무후
잉락 친나왓
발견자들
에이다 러브레이스 어밀리아 에어하트 바버라 매클린톡 캐롤라인 허셜 도러시 호지킨
엘리자베스 블랙웰 플로렌스 나이팅게일 히파티아 제인 구달 캐서린 존슨
리제 마이트너 마거릿 미드 마리아 미첼 마리 퀴리 마리암 미르자하니
레이첼 카슨 로잘린드 프랭클린 사카자위아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예술가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코코 샤넬 도로시아 랭 프리다 칼로 카라 워커
메리 카사트 쿠사마 야요이 자하 하디드
사회운동가들
앨리스 워커 앤절라 데이비스 앤 로이페 아얀 히르시 알리 치마만다 응고지 아디치에
엘프리데 옐리네크 그레타 툰베리 제인 폰다 주디 시카고 리마 보위
나오미 클라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수잔 팔루디 타우왁쿨 카르만 와리스 디리
말랄라 유사프자이 마거릿 생어 마리아 몬테소리 해리엇 터브먼 캐롤리 슈니먼
로자 파크스 시린 에바디 왕가리 마타이 에멀린 팽크허스트 글로리아 스타이넘
작가들
에밀리 디킨슨 제인 오스틴 사포 버지니아 울프 마거릿 애트우드
가브리엘라 미스트랄 헬렌 켈러 J. K. 롤링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무라사키 시키부
시몬 드 보부아르 안네 프랑크 토니 모리슨
운동선수들
베이브 디드릭슨 빌리 진 킹 파니 블랑커스쿤 재키 조이너커시 미아 햄
나디아 코마네치 세레나 윌리엄스
퍼포머들
비욘세 엘라 피츠제럴드 캐서린 헵번 마돈나 메릴 스트립
미리엄 마케바 오프라 윈프리 사라 베르나르 움 쿨숨
정치인들
에이미 클로버샤 바바라 조던 캐롤 모즐리 브라운 엘리자베스 워런 프랜시스 퍼킨스
제럴딘 페라로 해티 캐러웨이 힐러리 클린턴 저넷 랭킨 매들린 올브라이트
낸시 펠로시 넬리 테일로 로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셜리 치점 빅토리아 우드훌
참정권주의자들
앨리스 폴 앨리스 스톤 블랙웰 캐리 채프먼 카트 크리스타벨 팽크허스트 도리아 샤픽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프랜시스 하퍼 프랜시스 윌러드 해리엇 스탠턴 블래치 헤르타 아일톤
후다 샤아라위 아이다 벨 웰스 제인 애덤스 줄리아 워드 하우 케이트 셰퍼드
루크레티아 모트 루시 번스 루시 스톤 메리 처치 테렐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메이 라이트 슈 밀리센트 포셋 소저너 트루스 수전 앤서니 버지니아 루이자 마이너
출처 }}}}}}}}}}}}

<colbgcolor=#313131><colcolor=#fff>
무주 초대 황제
측천무후 | 則天武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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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제17대 가한
당 고종의 계후
측천황후 | 則天皇后
당 중종 · 예종조 황태후
황태후 무씨 | 皇太后 武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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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cdn.playbuzz.com/1691d896-c604-4bf0-b4d1-3517a0db9d14.jpg
출생 624년 2월 17일
이주
(現 쓰촨성 광위안시)
즉위 690년 10월 16일
장안 상양궁 전조당
(現 산시성 시안시)
사망 705년 12월 16일 (향년 81세)
장안 상양궁 선거전
(現 산시성 시안시)
능묘 건릉(乾陵)[1]
재위기간 당의 황후
655년 10월 13일 ~ 683년 12월 27일
당의 황태후
683년 12월 27일 ~ 690년 10월 16일
무주 초대 황제
제17대 가한
690년 10월 16일 ~ 705년 2월 22일
당의 태상황
705년 2월 22일 ~ 705년 12월 16일[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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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313131><colcolor=#fff> 성씨 무(武)
조(曌)[3]
부모 부황 태조 고황제
모후 효명고황후
형제자매 2남 3녀 중 2녀[4]
배우자 태종 문황제 (초혼 및 사별)
고종 홍황제 (재혼 및 사별)
자녀 4남 2녀
종교 불교
신장 167cm[5]
아명 미랑(媚娘)
작호 재인(才人) → 소의(昭儀)
→ 황후(皇后) → 황태후(皇太后)
→ 황제(皇帝) → 태상황(太上皇)
별호 천후(天后)[6]
존호 무주: 천책금륜성신황제[주]
(天策金輪聖神皇帝)
: 측천대성황제[당]
(則天大聖皇帝)
시호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9]
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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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수(天授, 690년 ~ 692년)
여의(如意, 692년)
장수(長壽, 692년 ~ 694년)
연재(延載, 694년)
증성(證聖, 695년)
천책(天冊, 695년)
등봉(登封, 695년 ~ 696년)
통천(通天, 696년 ~ 697년)
신공(神功, 697년)
성력(聖歷, 698년 ~ 700년)
구시(久視, 700년 ~ 701년)
대족(大足, 701년)
장안(長安, 701년 ~ 705년)
신룡(神龍, 70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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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sinaimg.cn/40602_1156337_505284.jpg
<무후행종도>(武后行從圖), 장훤(張萱), 당나라
1. 개요2. 생애
2.1. 초기2.2. 당나라의 황후가 되다2.3. 무주의 황제가 되다(무주혁명)2.4. 공포정치 외척정치 속의 안정된 내치(무주지치)2.5. 거란, 토번, 돌궐 등과의 대외관계2.6. 신룡정변과 퇴위
3. 평가
3.1. 긍정3.2. 비판
4. 가계5. 여담6. 대중매체에서7. 같이보기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당고종 계후이자 무주 왕조의 유일한 황제로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한 여황제이다.[10]

중국뿐만 아니라 세계사를 통틀어 보더라도 손꼽히는 여걸이자 여군주였지만 유교 사상을 가진 후대 역사가들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다. 허나 최초니 유일이니 하는 수사를 생략하더라도 당시까지 이만한 권력의 자리에서 이토록 오랜 기간 권력을 휘두른 여자는 극히 드물었기 때문에 통치에 대한 평가는 차치하고서라도 중국사에 길이 남을 군주라는 점에는 아무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다.

중국에서 나라를 주무른 여자들은 찾아보면 의외로 많았지만 본인이 스스로 황제로 즉위한 사람은 측천무후가 유일무이했다. 여자가 황제로 즉위했는데도 노쇠할 때까지 아무도 들고 일어나지 못했으며 신하들의 거사, 일명 신룡정변이 성공한 다음에도 그들의 뜻을 따라 유일의 여자 태상황제로서 천수를 다 누렸다는 점에서 측천무후의 능력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중국 역대 황제들 중 67살의 최고령으로 제위에 오른 황제이기도 하다. 30살에 황후가 되어 80살에 죽을 때까지 무려 50여 년을 권력의 정상에 있었던 것으로, 당대 기준으로는 어마어마하게 오래 살았다.

이름은 무조(武照)이고, 로마자 표기를 할 경우 무측천(Wu Zetian[11])으로 쓴다. 황제 즉위 후 照와 발음이 같은 曌로 개명했다.[12] 시호는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 제명은 측천금륜대성신황제(則天金輪大聖神皇帝), 약칭 성신황제(聖神皇帝)이다. 그러나 후세의 사가들은 황제로 인정하지 않아 의도적으로 무측천(武則天), 측천무후 등의 명칭을 사용하면서 이러한 명칭이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졌다. [13]

2. 생애

2.1. 초기

당고조 이연을 도운 개국공신이었던 태원군공 무사확 차녀로 태어나서 637년 당태종 이세민의 후궁으로 입궁하게 되었다. 당시 후궁으로서 받은 지위는 정5품에 해당하는 재인(才人)이었으며,[14] 태종에게서 별명을 받아 이후 본명[15]보다는 거의 무미랑(武媚娘)[16]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러나 당시 황제의 총애를 받지 못했는데 그 이유에 대해 성격을 이유로 드는 학설이 많다. 당시 성격을 잘 드러내는 유명한 일화가 있다. 자치통감에 따르면 태종이 당시 궁궐에 새로 들여온 이 하도 사나워서 대장군인 울지경덕이 몇 번이고 말에서 떨어지자 무재인이 나서서 자신이 저 말을 길들여보겠다고 했다. 태종이 어떻게 어린 소녀인 네가 할 수 있느냐고 방법을 묻자 무재인은 대답했다.
"먼저 철편[17]을 휘둘러서 기를 죽이고, 그렇게 해서 안 되면 철추로 내려칩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비수로 목을 따면 됩니다."
"그러다가는 말이 죽을 텐데 아무리 사나운 말이라도 죽이는 것은 지나치지 않으냐?"
"폐하의 장수들은 모두 폐하와 생사고락을 함께 한 충신들입니다. 말이 멋대로 날뛰면서 대장군을 다치게 했는데 어찌 말 한 마리를 아끼겠습니까?"

이러한 무재인의 대답은 태종이 울지경덕을 가볍게 웃음거리로 만들었음을 은연 중에 비판한 것으로, 태종은 크게 감탄하며 무재인을 존중하게 되었다. 그러나 총애하게 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훗날 고종은 아버지가 이 때문에 무재인을 처녀로 남겨두었다고 주장하며, 이것을 무재인과의 결혼을 합리화하는 이유로 내세웠다.

태종이 붕어한 이후에는 황실의 관습에 따라 장안 인근의 감업사(感業寺)로 출가해서 비구니로 지내게 되었지만, 태종의 9남인 고종 이치의 명령으로 정2품 소의(昭儀)[18]로 복귀되어 651년에 황궁으로 금의환향했다. 당태종 후궁이었다가 그 아들 당고종의 부인이 된 것이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이유는 당나라 황실이 원래 선비족 한족 혼혈이라 북방 유목 민족의 풍습에 익숙했기 때문으로 해석한다. 유목민족들 사이에서는 아들이 아버지 사후에 자기 생모를 뺀 나머지 들을 자기 부인으로 삼거나 형사취수제를 하는 것이 일상적인 풍속이었다. 사마천은 《 사기》 < 흉노 열전>에서 중항열의 입을 빌어 " 전쟁으로 먹고 사는 종족이다 보니 집안의 계통이 끊어지는 것을 막기 위한 선택"이라고 설명했다.

북방 유목민족의 이러한 풍습은 여성들이 남편에게 시집오면서 가지고 오는 재산 때문이었다. 중국과는 다르게 여성의 재혼이 가능하기에 가지고 온 재산을 다시 내놔야 했으므로 이러한 불이익을 막기 위하여 생긴 일이었다.비슷한 예로 칭기즈칸은 정실 보르테를 제외하고는 대체로 정복된 부족 여성들을 첩으로 삼았는데 칭기즈칸 붕어 후 이들 중 일부에게 약간의 재산을 상속해주었을 뿐, 칭기즈칸의 아들들은 이들을 첩으로 삼았다는 말이 없다. 예시로 백등산 전투에서 위기에 처한 한고조 유방에게, 흉노의 묵돌 선우는 여자에 약하다며 묵돌의 연지(부인)를 설득하자는 주장이 나왔는데, 정작 묵돌은 자기 애첩도 거리낌없이 죽여버린 인간이었다. [19]

2.2. 당나라의 황후가 되다

이 무렵 고종의 정후(正后)인 황후 왕씨[20]와 후궁인 숙비 소씨의 사이에 암투가 있었는데, 왕황후는 소숙비를 제거하기 위해서 당시 고종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있었던 무소의를 이용했다. 그러나 그녀는 오히려 왕황후와 소숙비를 모두 제거하고 655년 새로운 황후로 즉위하게 된다.

고종이 왕황후를 쫓아내고 무후를 황후로 삼은 결정적인 이유는 무후의 어린 딸 안정공주가 황후에게 살해당했기 때문이었다. 과연 왕황후가 정말로 안정공주를 죽였는가에 대해서는 대체로 무후가 황후를 몰아내기 위해 모함했다는 것이 중론이다. 안정공주는 단순히 유아 돌연사했을 뿐이고, 그 시기가 하필 왕황후의 방문 시기와 맞아떨어져 황후가 누명을 썼다는 주장이다. 자치통감에서는 무후가 직접 갓난 안정공주를 목 졸라 죽이고 황후에게 덮어씌웠다고 기록되어 있다.[21]

권력에서 밀려난 왕황후와 소숙비를 제거하는 과정은 상당히 잔혹했다. 구당서의 기록에 따르면 무후는 먼저 곤장 100대를 내렸고, 피부가 터져 나간 두 사람의 사지를 잘라냈다. 그리고 빈사 상태의 그들을 술독에 담궈 천천히 며칠 동안 죽어가게 방치했다고 한다. 소숙비는 죽기 전에 "나는 다시 태어난다면 고양이로 태어나겠다. 그래서 로 다시 태어난 너를 물어 죽여주마!"라고 무후에게 저주를 퍼부었다. 이때 아무 이유 없이 쥐로 환생할 거라고 하지는 않았을 것이라 추측하는 일부 역사가들은, 무후의 생년을 쥐띠 해에 맞춰 628년으로 계산하기도 한다. 그 때문인지 측천무후가 살아있을 때는 고양이를 황실에서 키우지 않았다고 한다.

숙청 공작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황후가 되는 과정에서 자신의 친정이 한미한 것을 탓하며 반대했던 장손무기 저수량 등의 쟁쟁한 원로 대신들을 정치 공작을 통해 모조리 죽이거나 귀양보내며 그 정치적인 능력을 드러내기도 했다. 장손무기와 저수량 등은 선제였던 태종을 따라 국난을 수차례 해결하고 황제 못지 않은 권력을 쥐었던 무서운 인물들이었다. 게다가 나약한 고종이 즉위한 이후에는 그 위세가 가히 황실을 쥐고 흔들 정도였다고 한다. 그러한 자들과 정치적인 대결을 벌여 제거해버렸으니, 측천무후의 무서운 정치적 역량을 엿볼 수 있다.

정사에 정력적이지 못한 유약한 황제가 장손무기 등의 원로대신을 처리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니 당태종의 후궁으로 오래 황실에 몸 담았던 점, 왕황후와 소숙비의 암투 속에서 황후 자리를 쟁취한 점 등을 보아 황제보다는 무황후가 원로대신을 처리했다고 봐야 한다. 무씨 일족의 대두 역시 아버지 무사확은 이미 사망했고, 이들을 중용한 것은 고종이었다. 그리고 무삼사 등의 능력은 제법 유능했기에 이들의 임용에 대해서 별다른 반발이 있지도 않았다.

정치적으로 정력적인 편이 아니었다는 고종은 무후에게 많이 의존했다고 한다.[22] 고종의 신임을 얻어 정치적인 힘을 얻게 된 무후는 자신에게 위협이 되었던 대신 장손무기, 저수량, 우지녕 등을 죽이고 권력을 장악했다. 공신 가운데 살아남은 건 이세적 정도였다. 이세적은 농민 출신으로 장손무기와 저수량, 우지녕 등의 관롱귀족이거나 고위문신들에게 배척받았던 사람으로 무측천의 정권 장악에 오히려 적극적으로 지원하던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죽은 뒤엔 유골이 분쇄되어 바람에 날려지는 형벌을 받지만 이건 손자인 이경업이 측천무후에 대항하여 모반을 꾸몄다가 진압당했기 때문이다.

2.3. 무주의 황제가 되다(무주혁명)

656년 측천무후는 황태자(皇太子) 이충(李忠, 643~664)을 폐위시키고, 자신의 장남인 이홍을 황태자로 앉혔으나, 그 역시 곧 죽었다. 《 십팔사략》에서는 소숙비의 장녀 의양공주(義陽公主)와 차녀 선성공주(宣城公主)가 유폐되어 시집을 못 간 것을 이홍이 주선하여 보내겠다고 하자, 그것이 측천무후의 심기를 건드려 독살당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이홍의 사후, 당고종과 무후는 크게 슬퍼하며 이홍을 ' 의종(義宗) 효경황제(孝敬皇帝)'로 추존했다. 아들이 부모를 추존하는 일은 흔하지만 부모가 아들을 추존하는 일은 손에 꼽을 정도로 보기 드문 일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황태자가 된 뒤 과로사했다는 해석도 만만치 않다.[23]

그후 자신의 차남인 이현(李賢)을 황태자로 세웠다. 《십팔사략》의 기록에 따르면 고종과 한국부인(무후의 언니)의 불륜에서 태어난 아들이라고 한다. 그리고 680년 명숭엄이 살해된 사건의 배후자로 의심을 받아 태자 자리에서 쫓겨난다. 무후는 3남 이현(李顯)을 황태자로 세웠는데 그가 바로 훗날의 당중종이다. 이 와중에 672년 당고종이 병으로 인해 정사를 보지 못하게 되자 본격적으로 대신 정치를 했으며, 675년엔 아예 수렴청정을 선언했다. 다만 이때까지도 어디까지나 최종 결재권자는 고종이었다. 무측천이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면 반대파가 재상직까지 올라오는 꼴을 놔뒀을 리가 없기 때문이다.

고종이 붕어한(683년) 이후 황태자 이현(李顯)이 중종으로 제위에 올랐으나 중종의 아내 위황후와 그녀의 친정 아버지 위현정이 정권을 장악하려고 했다. 이때 중종이 위황후의 친정아버지 위현정을 시중으로 삼으려다가 신하들이 반대하자 홧김에 "내가 천자인데 천자 자리를 준다 한들 누가 뭐라고 하겠는가!"라는 망언을 내뱉는 바람에 폐위당했다. 이때도 무측천이 자기 아들을 나서서 끌어내린 것은 아니고, 재상 배염이 태후인 무측천에게 황제의 폐위를 먼저 거론하고 이를 추진하는 절차를 거쳤다.(684)[24]

무후는 4남인 상왕 이단, 즉 당예종을 즉위시킨 이후 계속해서 일어나는 반대파들의 저항과 반란을 진압하고 권력을 강화했다. 대표적인 것이 684년, 이세적의 손자인 이경업(서경업)이 일으킨 반란이다.[25]

그리하여 690년, 무후는 예종에게서 제위를 넘겨받아[26] 국호를 주(周)로 고치고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그래서 이 시대를 무주시대, 즉위를 무주 혁명으로 부르기도 한다. 측천무후는 주왕이 정무를 보던 명당(明堂)을 다시 만들어 세우는 등 고대 주나라와의 연관성을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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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가 지냈던 궁궐 만상신궁(萬象神宮)의 명당(중앙)과 천당(좌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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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는 수·당시대 황궁 재현 단지 내에 이렇게 재현되어있다.

이로써 남성 중심의 중화제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성 황제의 시대가 개막한 것이었다.

2.4. 공포정치 외척정치 속의 안정된 내치(무주지치)

무후는 반대파를 매우 엄격히 감시하고 통제했는데, 사궤(四軌)라는 투서함과 불량배, 건달들을 중심으로 한 비밀경찰혹리(酷吏)들을 바탕으로, 상대의 비리를 먼저 고발하는 사람이 빠르게 승진하는 밀고 정치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게 신하들 입장에서는 마녀사냥이 열리는 수준이라 조정에 출근할 때면 가족들과 작별의 인사를 나누고, 무사히 퇴근해 집에 돌아오면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온 양 크게 기뻐했다고 할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지나친 고발로 인해 자신의 인기가 떨어질 것을 우려한 무후는 정적들이 거의 제거되고 제위를 차지하자 사냥개 역할을 하던 내준신과 삭원례 등의 혹리들을 차례로 없애 이들에 대한 원성이 자자하던 백성들에게 환호를 받는다. 그야말로 토사구팽이었다.

친정 가문인 무씨들은 그야말로 세도를 누렸다. 이런 일이 일어난 건 전한 여후 이래 최초였을 정도였다. 측천무후가 조카 무승사 무삼사에게 제위를 넘겨주려고 말은 했지만 '조카가 당신 제사를 안 지내줄 텐데? 믿을 건 아들뿐'이라는 신료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27]

그러나 상대적으로 백성들의 생활은 안정되었다고 한다(무주의 치). 혹자는 무후가 다스린 시기의 내치는 당태종의 정관의 치에 버금가며 이후 현종때 맞이한 개원의 치를 불러오는 기초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하기도 한다. 북주(北周)-(隋) 제국 관롱집단들보다는 넒어졌지만, 여전히 협소한 범위의 문벌귀족 집단으로 정계의 고위직을 독점하던 현상을 해소하고, 수나라 시기 시범적으로 도입되던 과거 제도를 점차 확대시행하여 당나라 후기에 이르면 과거 급제 출신들이 주류를 차기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당나라의 도자기가 그 특징을 확립한 것도 바로 이 시기의 일이었다. 심지어
일처다부제가 실시되기도 했었는데, 거대 제국들 중에서 이런 사례는 유례를 찾기 힘들다.

또한 인재를 아끼는 모습이 보이는데, 무후 시절 '초당 4걸'에 들 정도로 걸출한 문인 낙빈왕이 <토무조격>(討武曌檄)이라는 격문을 지어 이경업 거병의 정당성을 피력하고 무후를 혹독하게 비판한 글을 읽고 이 글을 누가 지었느냐고 물어보았다. 낙빈왕이 썼다는 말을 듣자 재상에게 "왜 진작에 이 사람을 나에게 추천해 주지 않았나? 이런 인재를 내가 기용해 주지 않았으니 반란이 일어나는 것도 당연하지!"라며 낙빈왕의 재능을 아까워했다고 하며, 낙빈왕이 죽은 뒤에도 그의 작품을 모아 엮도록 했다. 즉위 후에도 적인걸, 장간지 같은 뛰어난 재상들이 등용되기도 했다.

한국과의 관계를 보면 신라의 제31대 신문왕이 《예기》(禮記)와 더불어 문장으로 본받아 쓸 만한 것을 요청하자 담당 관청에게 명령하여 《길흉요례》(吉凶要禮)의 사본을 제작하고, 《문관사림》(文舘詞林) 가운데 모범으로 삼을 만한 글들을 골라 뽑아 50권으로 엮어서 보내주었다고 한다. 신라에서 온 왕자 김인문이 694년에 사망했을 때는 부음을 듣고 수의와 관작을 보낸 뒤 김인문에게 관직을 추증하고 그의 영구를 신라로 호송하도록 명령했으며, 또한 702년 제32대 효소왕이 붕어한 것을 전해듣고 애도 차원에서 2일 동안 조회를 열지 않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효소왕의 왕제로 뒤를 이어 즉위한 왕자 김융기[28]에게 효소왕의 계승을 승인한 것도 측천무후였다.

2.5. 거란, 토번, 돌궐 등과의 대외관계

696년 거란족의 송막도독 이진충이 처남 귀성주자사 손만영과 함께 영주에서 반란을 일으켜 도독 조문홰를 주살하고 숭주에서 토격부사 허흠적을 사로잡아 기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이를 들은 무측천은 조인사, 장현우, 마인절, 이다조 등 28명의 장수들로 하여금 거란을 토벌하라고 지시하였고 무측천의 조카인 양왕 무삼사를 유관도안무대사, 납언 요숙을 부사로 삼았다. 그러나 696년 8월 서협석곡의 황장곡에서 선봉 조인사, 장현우, 마인절의 군대가 거란군의 기만전술에 휘말려 전군이 몰살당하고 조인사, 장현우, 마인절이 사로잡힌다. 거란군은 포로로 잡은 장현우 등의 서명을 얻어 총관 연비석, 종회창의 군에게 조서를 보냈는데 이를 본 연비석과 종회창의 군대는 급속행군하다가 거란군의 매복에 의해 전군이 몰살당한다. 이를 들은 무삼사는 황급히 장안으로 도주하였고 패배를 접한 무측천은 건안왕 무유의를 중심으로 2차 토벌대를 모집하였는데 범죄자들 중 용력있는 자들을 병사로 모집했다. 이진충 사후 손만영이 가한 자리에 오르자 손만영은 기주를 함락하여 자사 육보적을 죽이고 수천명을 도륙한다. 그리고 손만영은 이씨를 지지하는 명분을 내세운다.
무엇 때문에 우리 여릉왕을 폐했는가?
이후 손만영은 배후를 안정시키기 위해 신성의 안동도호부를 공격하면서 이전에 포로로 잡은 허흠적으로 하여금 안동도호부에 투항을 권하나 허흠적이 다음과 같이 말한다.
“미친 도적에게는 반드시 화가 닥칠 것이오. 그러니 끝까지 싸우시오!”
이에 손만영이 허흠적을 죽이고 안동도호부를 공격하지만 요동주도독 고구수와 도호부사 배현규에게 저지당하였다. 697년 청변도총관 왕효걸과 소굉휘가 이끄는 17만 군대가 거란군을 공격하나 거란군에 패하고 왕효걸은 자결하였다. 무유의의 군대는 유주를 공격하나 거란군에 가로막히고 말았는데 이에 무측천은 하내왕 무의종, 누사덕, 사타충의로 하여금 거란을 토벌하라고 지시한다. 그러나 무의종은 조주에서 낙무정이 이끄는 거란군을 보고 크게 놀라 대경실색하여 싸우지도 않고 상주로 도주했다. 이에 거란군은 조주에서 대학살을 행하였으나 양현기, 누사덕, 사타충의가 군을 수습하고 맞서 싸웠다. 손만영은 돌궐의 습격을 대비해 유성 서북쪽 400리에 성을 지으면서 당의 단주를 포위공격하는데 후방의 해족들이 배반하여 잠시 철군한다. 6월에 우려대로 돌궐이 거란의 후방을 습격해 후방에 있던 거란인 가족들을 모두 사로잡자 손만영과 하북 전방에 나와 있던 거란군이 동요하고 결국 와해되고 만다. 당도 이에 맞춰 4차 공세를 보내고 장구절의 군대에 의해 손만영이 패한 뒤 신병도행군의 무의종과 양현기에 의해 결국 하아소가 사로잡히고 이해고 낙무정은 항복했으며[29] 손만영은 도주 중에 노수 동쪽 인근에서 가노에게 피살당하여 남은 무리들은 돌궐에 투항하고 난이 종결된다. 700년 이해고와 낙무정이 이진충의 잔당들을 토벌하고 장안으로 개선한다.

또한 무측천 시기는 왕방익이 숙청당하면서 토번에 왕방익이 겨우 찾은 안서사진 지역을 빼앗기고 가르친링에게 연패하는 등 토번과의 관계에서 열세인 상황이었다. 그러나 692년 강족 추장 갈소가 당에 투항하자 이를 틈타 왕효걸을 기용하여 안서사진을 수복한다. 그러나 696년 왕효걸과 누사덕은 소라한산에서 토번의 명장 가르친링에게 패하고 만다. 이후 가르친링이 안서사진 지역에서 철수하고, 서돌궐 지역을 분할하는 것이 어떠하냐고 제의하자, 무측천은 가르 가문의 권세가 약화되었다는 것을 눈치채고 이를 거절한다. 이후 699년 치둑송첸이 가르 일가를 숙청하자[30], 당은 토번에 우세를 점한다.

돌궐 제2제국의 초대 가한 쿠틀룩이 당의 변방을 노략질하자 정명진의 아들이자 당의 명장인 정무정이 돌궐족에 연전연승하지만, 서경업의 난에 연좌되었다는 무고를 받고 군중에서 처형당한다. 이후 돌궐족들은 출전할 때마다 그의 사당에 기도를 드리고 출전한다. 그럼으로써 당의 돌궐 방어선이 와해되고 만다. 쿠틀룩 사후 묵철이 가한 자리에 오르자, 묵철은 당을 지속적으로 노략질한다. 이후 696년 거란족의 영주 반란에 무주군이 고전하자 무측천은 돌궐족과 동맹을 맺어 이진충의 난을 진압한다. 그러나 묵철은 이후 자신의 사위가 당 황족인 이씨가 아니라는 이유로 무승사의 아들인 무연수를 억류한 뒤 당나라와의 동맹을 파기한다. 무측천은 이다조, 장인원, 사타충의 등을 내보내지만 사타충의 등은 두려워서 나가지도 못했고 적인걸만이 돌궐족을 추격했다.

이처럼 무측천 시기는 거란, 돌궐, 토번 등의 이민족들에게 시달리는 시기였다.[31][32]

2.6. 신룡정변과 퇴위

하지만 699년 이후 장역지, 장창종 등 측근 관리에 실패해 폐단이 발생했으며, 705년 말년에 측천무후가 병으로 건강이 악화되자 당 황실의 충성파들이 신룡정변을 일으켜 그만 자리에서 물러나라는 압박을 넣게 된다. 이에 무후는 당시 황태자로 있었던 아들 이현(중종)에게 양위했고, 무주는 1대만에 멸망하며, 당나라 농서 이씨 황실이 복벽했다.

당장 당나라 황실 직계 후손들이 모두 당고종과 측천무후와의 후손이였기 때문에 아무리 정변에 성공했어도 장간지 일파는 함부로 무후를 건드릴 수 없었다. 당장 반란 세력의 주축인 당중종만 하더라도 당고종과 측천무후의 적자였다.[33] 그렇기에 무후는 양위 이후에도 중국에서 유일한 여자 태상황으로 말년을 대우 받으며 편하게 보낼 수 있었다.[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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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후의 예로서 장례를 치르고, 묘비에 한 자도 새기지 말라."
측천무후의 유언[35]

무소불위의 권력을 누리다 권좌에서 쫓겨났다는 충격이 컸는지 그해 말 붕어했다고 한다. 측천무후가 왜 자신의 비석에 아무런 글을 새기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는지를 두고 '내 삶에 대한 평가를 모두 훗날의 역사에 맡긴다.'는 겸허함으로 보는 해석과 '내 공적은 너무도 커서 이런 작은 비석 따위에 다 새기기도 모자란다.'는 오만함으로 보는 두 가지 상반된 해석이 있다.[36]

붕어하기 전에 자신이 모함해 죽인 폐후 왕씨 일가를 복권시켜 줄 것을 태자에게 간청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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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평가

치세와 난세는 시세요, 존재와 멸망은 형세이다. 만일 걸주(桀紂)가 임금의 자리에 있다면 아무리 요임금(堯)이 10명 있다고 하여도 능히 다스리지 못하고, 만일 요순(堯舜)이 임금의 자리에 있다면 비록 걸왕이 10명 있다고 하여도 능히 어지럽히지 못한다. 여자가 겁이 많은 사내를 부리고, 적당한 때를 타서 세력을 얻고, 또한 백성의 생명을 가볍게 다스리기에 족하여, 방종하게 불의의 위세를 행사하였다. 무릇 무씨가 칭제한 해를 보고 있자면, 탁월한 재주를 지닌 자가 많았고, 가족과 헤어짐에 괴로워하지 않는 이들이 없었으며, 조정의 위기에 분하여 주먹을 쥐었지만, 선제의 은혜에 능히 보은하지 못하며 임금의 자식을 지켰다. 이윽고 무고한 이들이 모함을 당하고 목을 내밀어 주륙되었으며, 천지를 삼태기로 삼았으니, 과거가 어찌 편안하였는가? 슬프구나! 옛날 여자의 참언은 옛날에 해악을 칭했고, 짐승과 같은 이의 독은 대대로 재앙을 낳는다. 무후는 적자의 지위를 빼앗을 때, 목구멍을 바짝 조르고 갓난아이들의 숨통을 끊었으며, 죄인의 시체를 젓갈에 담그고 후비의 뼈를 잘게 부수었으니, 그 부도덕함이 매우 심하였고, 또한 간사한 자가 여자의 상태를 강샘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이치에 바른 언론이 널리 퍼지고 그 시대의 올바른 인물이 나왔다. 처음에는 비록 부인이 전권을 맡았지만, 종국에는 능히 아들에게 정권을 돌려주고, 세간에 떠도는 말이 위원충의 죄를 바로잡았고, 교묘한 언사가 적인걸의 마음을 위로하였고, 시헌을 높이고 총신을 억누르며, 충언을 듣고 혹리를 주벌하였다. 임금의 뜻이 있었구나, 임금의 뜻이 있었구나!
나라와 백성에 재앙을 끼치는 여자가 얼굴을 바꾸고, 태자궁에 태자가 창성하였다. 어찌 창천이 되어, 이런 기허(夔魖)를 낳았는가? 제위를 강탈하고, 황거를 더럽혔다. 요사스러운 흰 머리가 다하니, 어떻게 아랫사람의 형편을 굽어 살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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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긍정

사실 측천무후 역시 몇몇 여성 지도자들처럼 붕어한 후 반대 세력이 정권을 잡으면서 긍정적인 면은 거의 감춰지고 부정적인 면이 부각되었다는 평가가 많다. 특히 무후에 대해서는 영 부정적인 인상이 매우 강하다. 가장 큰 이유는 잔인한 숙청 공포정치 때문이었다. 그러나 관롱집단의 위력을 강조하는 이들에 따르면 무후의 잔인함은 자신의 성격보다도 당시 시대 상황이 무후의 성향과 맞물린 선택이었다는 주장도 상당하다. 그러나 약 50년의 기간동안 중국의 실권을 잡았으며 종국엔 유일무이한 여제로서 있었으면서도 그 권위를 잃은적이 없기에 길고도 긴 중국사를 넘어 세계사에서도 손에 꼽히는 여걸임은 분명하다.[37]

관롱 세력의 위협을 강조하는 이들에 따르면, 애초에 남북조시대부터 이어져온 거대 세족들의 힘은 상상을 초월했고, 당나라는 모양새만 한족 국가인 사실상의 호한 연합 정권[38]으로서 세워진 것이었다. 애초에 당 나라의 전신이었던 수나라가 허망하게 무너진 결정적인 이유가 당나라를 건국한 이연을 위시로 한 거대 세족들의 반발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세족을 숙청하는 일은 당나라의 흥망이 걸린 중대사였다. 정관의 치라고 추앙받는 태종 이세민의 시기에도 장손무기 등을 위시로 한 세족들의 힘은 여전히 강력했다. 이들을 속칭 무천진 군벌이라고 부르는데, 명신으로 칭송받는 위징조차 그런 세력들과 인척을 맺으며 신경을 쓸 정도였다. 태종 말년부터 당나라의 정치 체계가 문란해지기 시작했으며, 정관의 치에도 불구하고 중원은 여전히 혼란스러웠으며, 생산력 또한 수문제 시절의 개황성세에는 한참이나 부족한 면이 있었다. 이건 당태종이 잘못한 게 아니라, 수양제가 워낙 제대로 말아먹은 탓에 수습이 안 된 것이었다. 게다가 고종 또한 강인한 성격이 못되어, 측천무후에게 숙청과 부패의 척결은 반드시 필요한 일이었다는 지적이 있다. 숙청이 피비린내난다고 하지만 제왕에게 요구되는 점에는 비정함 또한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개국 이후 수성에 있어 왕조의 안정을 위한 질서를 다잡아야 한다는 걸 상기하자면 결국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이었고, 그 시점에 강인한 성격의 측천무후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어찌보면 결국 더러운 일을 자기가 다 맡아쓴 셈이다.[39]

무엇보다도 이 과정에서의 고종의 역할에 대해서 재평가를 하는 이들도 많다. 실제로 고종이 체력적으로 약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아무런 세력도 없는 측천무후가 고종의 협력관계 내지는 동조없이 무천진 군벌을 등에 업은 황후 왕씨를 몰아내는 것은 사실상 무리였다는 것 때문에 측천무후가 고종을 쥐고 흔든 것이 아니라 고종 입장에서 무천진 군벌 정리를 위해서 측천무후를 기용한 것으로 보는 것이다. 실제로 무천진 군벌 축출은 측천무후의 입궐과 거의 동시에 이뤄지기 시작하는데, 이때는 측천무후가 자기 앞가림하기 바빴던 시절이다. 그리고 고종이 살아 있는 동안 측천무후는 절대 주도적으로 나선 적이 없는 것도 분명하다. 다만 고종의 경우는 워낙 체력이 약해서 수시로 쓰러졌기 때문에 사실상 고종과 측천무후의 협치에 가까웠는데, 사실 이것도 수문제가 보여준 장면이었다. 수와 당 초기처럼 북방 계통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 있을 때나 종종 보이는 모습이다. 이후 고종이 상관의를 통해 무후를 폐위시키려고 했지만 결국 상관의가 잘리고 무후가 고종을 협박했다는 대목이 있는데, 이것도 고종이 무후의 목줄을 부여잡은 것이지 어디까지나 최고 권력은 고종에게 있었다. 더욱이 고종이 그 당시 골골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황권의 진공 상태를 고려한 조치일 수도 있는 것이다. 무후는 이후 고종에게 한동안 허리를 굽혔다. 게다가 고종 시기에도 측천무후의 포지션은 어디까지나 현명한 황후이자 보조자에 불과했던 탓에 고종의 첩들을 자신이 화가 난다고 죽일 만한 세력이 아니었으며, 결정적으로 죽였다는 첩들 외에도 고종에게는 여러 첩들이 존재했다.[40] 고종 사후에야 여러 남첩들을 들였으나 그들이 정국을 쥐고 흔들만한 권력을 소유했다는 증거는 그다지 없다. 다만 무측천 재위 말년에 통치력이 쇠퇴한 시점부터는 이들 남첩들이 궁중을 장악하면서 점차 입김을 늘려가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런 입장에서 보면 측천무후는 특권 계층의 권리와 힘을 숙청을 통해 제어하며, 국가의 재정 건전성을 끌어올리고, 동맥경화 현상을 보이는 기존의 주류 세력을 대신하여 신진 세력을 적극적으로 등용하는 작업을 했다는 것이다. 이런 작업은 매력없고 잔혹하며 그 시대에 인정받기 힘들고, 주류층과 권신들에게 군주에 대한 인기를 크게 상실하게 만드는 일이었지만 국가를 위해서라면 누군가는 반드시 해주어야 하는 일이라는 것이다.[41] 당나라는 고종 시절부터 무후가 통치에 관여하기 시작했다는 것, 무후는 고종보다도 연상이었다는 것을 생각하면 무후는 실질적으로 당 제국의 3세대쯤에 해당하는 황제가 된다. 반면 수문제는 제1대 황제로서 굉장한 업적을 이룩하고 태평성대를 이끌었지만 제2대 수양제가 나라를 말아먹어서 박살난 것을 생각해보면 측천무후의 숙청을 통한 공포정치는 시대의 필수적인 요구라고 보는 게 합당할 것이다. 측천무후가 절대 권력을 휘둘렀다는 말도 사실과 다르다. 무후의 권력은 고종 사후에도 신하들에게 여러 번 도전을 받아야 할 정도로 절대권력과는 거리가 멀었으며 황후나 태후라는 위치를 최대한 부각시켜야 권력 유지가 가능한 수준이었다. 앞서 언급했지만 측천무후에게는 정치적인 배경이 전혀 없었다. 때문에 고종과 연계가 되지 않으면 그나마도 없었을 가능성이 높다. 훗날에야 절대권력에 걸맞은 권력을 쥐게 되나 그 시기는 700년 즈음으로 무후 통치기의 말년 중의 말년에 해당되는 시기였다. 또한 혹리들도 고종이 붕어한 683년부터 즉위하는 690년까지만 활동했을 뿐, 즉위 직후에 대부분 숙청했으니 측천황제의 시대가 "공포정치"라는 것은 좀 거리가 있다. 게다가 측천무후를 까는 또 한 가지의 요소인 "음탕한 년" 혹은 "요녀"로써의 이미지도 과장된 것이 많다. 특히 측천무후가 죽였다고 하는 사람이 공식 기록상에서는 살해된 후에도 버젓이 활동하는 기록이 남아있는 등 여러 사료를 교차비교를 해 보면 말이 안 되는 요소들이 너무나도 많이 있다.

과거 제도의 완성이자 황권의 강화책인 전시를 역사상 최초로 시행한 것도 측천무후였다. 측천무후는 능력에 따른 인재 등용 방식인 과거 제도의 전시 시도와 더불어, 인재 등용을 위한 여러 가지 파격적인 제도를 제시하여 시행했다.[42] 이때 뽑혀서 측천무후의 친위집단이 된 것이 북문학사(北門學士)였다. 원래 관리가 궁궐에 입궐할 때, 주작대로를 중심으로 하는 궁궐 남문으로 입궐하여 정사를 논하는 것이 원래 예법이었는데, 북문을 통해 몰래 측천무후의 정치적인 브레인 역할을 했던 사람들을 칭하는 단어가 바로 '북문학사'였다. 더불어 훗날 개원의 치로 칭송받는 현종의 치세를 이룩하게 한 기본적인 시스템과 요숭, 송경 등의 인재 풀은 사실상 측천무후가 만들어준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제위 계승에서 태평공주가 아닌 현종을 지지한 게 바로 이 신진 비관롱집단이었다. 이런 면에서 측천무후는 최소한 용인과 정치력 자체는 발군이었던 것이 분명하다. 다만 전시는 중종의 복위로 폐지되는 바람에 전시가 본격적으로 시행된 것은 북송시대에 비로소 이루어졌다.

3.2. 비판

측천무후는 비교적 성공적인 내치에 불구하고, 외치에서는 그다지 성공적이지 못했다. 정확히는 당나라의 최대 강역을 이룩한 고종 사후부터가 문제였다.[43]

무후의 시대는 북방 민족과 수많이 싸웠지만 대체적으로 영향권과 영토가 크게 축소되는 양상을 보였다. 서쪽의 토번(티베트)에는 가르친링으로 대표되는 대당 강경 정권이 들어서면서 하서의 패권을 두고, 일진일퇴를 거듭했으며 대비천 전투, 승풍령 전투, 인식가 전투, 소라한산 전투 등에서 많은 피해를 입었다. 682년 돌궐 제2제국( 후돌궐)이 골돌록 가한(일테리시 카간)에 의해 부활했으며, 691년에는 묵철가한(카프간 카간)이 즉위해 쿠차와 사주( 돈황)의 ( 안서도호부)를 위협했다. 한창 때는 하북은 커녕 산동까지 털리는데도 손을 쓰지 못했을 지경이었다. 696년 거란 이진충 반란을 일으켰을 때는 1차에 180,000명의 대군을 투입했다가 황장곡 전투에서 깔끔하게 괴멸되었고, 2차로 300,000명을 투입했음에도 불구하고, 자력으로는 진압을 못해서 돌궐 제2제국의 지원을 받아 겨우 진압했다. 그나마 698년에 돌궐 제2제국과의 관계가 악화되자 곧바로 동북방의 거란족과 해족이 재독립하며 요동 요서의 통제력을 상실한 걸 보면 진압한 이후의 통제조차 혼자서는 불가능할 정도로 약해졌다는 의미가 된다. 거란의 반란을 틈타 나라를 세우겠다며 이주하던 대조영을 추격했지만 천문령 전투에서 대패하여 그토록 많은 인력과 물자를 갈아넣어 간신히 멸망시킨 고구려가 발해라는 이름으로 재건되는 것을 지켜보는 처지가 되었다.

군사적인 실패의 이유도 그녀가 권력을 잡는 과정에서 관롱집단을 숙청하던 와중에 정무정[44], 왕방익[45], 흑치상지 등의 양장들이 숙청당한 부작용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무측천 일가가 군사적으로 무능했다.[46] 대표적으로 무측천의 조카인 무삼사와 하내왕 무의종, 건안왕 무유의, 설회의 등이다. 먼저 무삼사의 경우, 영주 반란 제1차 진압군 파견 당시 유관도안무대사에 있었다. 선봉인 조인사와 장현우, 마인절 몽땅 포로가 된 뒤 연비석과 종회창의 군대가 몰살에 가까운 대패를 당하자 황급히 장안으로 도주했다. 무의종의 경우에는 낙무정 산하의 거란군이 조주에 있는 것을 보고 싸우지도 않은채 상주로 달아났고, 조주가 거란군에게 도륙당하는 비극을 초래했다.[47] 무유의의 경우에는 그의 소속이었던 청변도행군대총관 왕효걸이 죽는 등 악재가 있었다.[48] 심지어는 북송 시기 거란, 즉 요나라가 강대해진 것이 무측천 때문이라는 과장도 나왔다.

다만 이런 사태의 책임을 측천무후 한 사람에게 모두 떠넘김은 부당하다. 태종과 고종의 치세에 당나라는 한족 문화 국가로서[49] 최대 판도를 구축하고, 이민족들을 기미체제로 편성했다. 하지만 이들 이민족들이 완전한 야만족도 아니고 돌궐, 고구려 등 국력이 통일 중국에 미치지 못한다 한들 중국에 맞선 강력한 국가를 이룬 적이 있는 이들이었다. 비록 당군에 패배하여 기미체제 속에 편입되었지만, 기미체제가 불안정해지면 얼마든지 독립해서 새로운 나라를 세울 수 있는 역량이 있었고, 결국 그렇게 되었다. 그리고 기미체제의 불안정한 조짐은 다름아닌 당고종 때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측천무후가 이를 막지 못했긴 했지만, 측천무후 한 사람의 책임만은 아니었다.

이밖에도 측천무후의 긴 치세는 여러 문제점을 남겼다.[50] 내치에 성공적이라지만 결국 균전제의 붕괴를 막지 못했으며 이는 결국 당현종 대에 파국을 불러 올 조치를 할 수밖에 없게 만든다. 무후 한 명만의 잘못은 아니라지만 내치에 성공적이었다고 긍정하려면 적어도 세법이나 재정 관련해서 업적이 있었어야 한다.

또, 새로 뽑힌 신진 집단이 측천무후의 개인 숭배를 위해 사용되었으며 후계를 튼튼히 할 수 없다는 여제의 태생적인 한계 탓에 측천무후 사후 당나라는 경룡정변, 당륭정변, 선천정변 등 다시 한 번 계승 문제로 혼란에 시달려야 했다.[51] 더구나 토지제도인 균전제와 이를 기반으로 한 부병제가 고종 때부터 무너지기 시작해서 측전무후 때 완전히 붕괴되었는데 외치의 실패는 이런 결과일 뿐이다. 부병제가 붕괴하자 군사적인 약화를 극복하기 위해 당현종은 대대적인 군사개혁을 실시했으니 바로 군진체제이다. 그리고 이 과정에서 번진(藩鎭)과 절도사가 등장하고, 안사의 난이 일어나며 당 왕조는 서서히 중당(中唐)에서 만당(晩唐)으로, 나아가 오대십국시대로 접어들었다.

4. 가계


가족사가 조금 복잡한데 아버지인 무사확과 전처인 상리씨 사이에서 나온 형제 두 명인 무원상 무원경이 있었고, 이후 무사확과 양씨가 재혼해 언니인 한국부인[52]과 여동생인 무씨가 있었다. 어머니 양씨는 수나라 관덕친왕 양웅의 조카딸이자 시안공후 양사달의 막내딸로 명문가 출신이었다. 훗날 무측천이 황후가 되자 '영국부인'에 봉해졌다가 죽은 뒤 '노국부인'으로 봉해져 시호를 받았고, 함양에 안치되었으며 무측천이 이미 죽은 아버지를 '태원군왕'으로 봉하면서 어머니를 그곳의 왕비로 올렸다.

고종과 측천무후의 아들들은 어머니에게 눌려 있었던 탓에 이후에도 기를 잘 펴지 못한건가 싶을 정도로 황제답게 혼자 정권을 쥐고 있었던 시간이 길지 않은 편이다. 장남인 이홍의 경우, 현재는 부정되지만 전통적 일설에 의하면 어머니의 뜻을 자주 거스르다가 독살당했다는 의혹을 받았으며 차남 이현의 경우, 역시 어머니에게 밉보였다가 쫓겨났다. 3남 중종 이현은 예전부터 유약했다고 하며 복위한 뒤에는 건강이 좋지 않아서 정사를 처리하는데 아내 위황후에게 의지했다. 이런 아들들에 비해 중종의 딸이자 측천무후의 손녀인 안락공주나 측천무후의 막내딸인 태평공주는 권력욕이 강했다고 한다. 안락공주는 어머니 위황후와 손을 잡고 자기 친아버지인 중종을 만두로 독살했을 정도였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태평공주는 성격이나 재능면에서 측천무후와 닮은 점이 많아서 측천무후가 특별히 아꼈다고 한다. 그러나 태평공주는 자신의 남편 설소에게 곤장 백대를 가하고 옥에서 아사시킨 어머니를 평생 두려워했다.
4남 예종 이단이 복위한 건 여동생 태평공주와 후에 현종이 된 아들 이융기 덕이 크며 예종이 재위한 동안은 태평공주와 이융기가 첨예하게 대립했다.[53]

5. 여담

6.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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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李訓) · 정주 · 왕애 · 왕번 · 가속 · 서원여 · 곽행여 · 나립언 · 이효본 배도
171권 「이발등전(杜黃裳等傳)」 172권 「영호초등전(令狐楚等傳)」
이발 · 장중방 · 배린 · 이중민 · 이감 · 고원유 · 이한 · 이경검 영호초 · 우승유 · 소면 · 이석
173권 「정담등전(鄭覃等傳)」 174권 「이덕유전(李德裕傳)」
정담 · 진행이 · 이신(李紳) · 오여납 · 이각(李珏) · 이고언 이덕유
175권 「헌종·목종·경종·문종·무종·선종·의종·희종·소종제자전(憲宗穆宗敬宗文宗武宗宣宗懿宗僖宗昭宗諸子傳)」
이녕 · 이운(李惲) · 이종(李悰) · 이흔 · 이오 · 이각(李恪) · 이경(李憬) · 이열 · 이순(李恂) · 이역(李懌) · 이음(李愔) · 이협 · 이담(李憺) · 이충(李㤝) · 이췌(李惴) · 이척(李惕) · 이탄 · 이책 · 이주(李湊) · 이용(李溶) · 이보(李普) · 이휴복 · 이언양 · 이집중 · 이성미 · 이영(李永) · 이종검 · 이준(李峻) · 이현(李峴) · 이기(李岐) · 이역(李嶧) · 이차 · 이한 · 이경(李涇) · 이관(李灌) · 이자(李滋) · 이근(李沂) · 이택 · 이윤 · 이흡 · 이예(李汭) · 이문 · 이옹(李澭) · 이일(李佾) · 이건 · 이길 · 이간(李侃) · 이보(李保) · 이의(李倚) · 이진(李震) · 이승 · 이유(李裕) · 이우(李祤) · 이계(李禊) · 이점 · 이인(李禋) · 이의(李祎) · 이비 · 이기(李祺) · 이동(李同) · 이진(李禛) · 이상(李祥)
176권 「이종민등전(李宗閔等傳)」
이종민 · 유위 · 양우경 · 마식 · 이양이 · 위모 · 주지 · 최귀종 · 정숙 · 노상
177권 「최신유등전(崔慎由等傳)」
최신유 · 최공 · 노균 · 배휴 · 양수 · 위보형 · 노암 · 하후자 · 유첨 · 유전 · 조확 · 필함 · 두심권 · 유업 · 두로전
178권 「조은등전(趙隱等傳)」
조은 · 장석 · 이울 · 최언소 · 정전 · 노휴 · 왕휘
179권 「소구등전(蕭遘等傳)」
소구 · 공위 · 위소도 · 최소위 · 장준 · 주박 · 정계 · 유숭망 · 서언약 · 육의 · 유찬
180권 「주극융등전(朱克融等傳)」
주극융 · 이재의 · 양지성 · 장중무 · 장윤신 · 장공소 · 이가거 · 이전충
181권 「사헌성등전(史憲誠等傳)」 182권 「왕중영등전(王重榮等傳)」
사헌성 · 하진도 · 한윤충 · 악언정 · 나홍신 왕중영 · 왕처존 · 제갈상 · 고병 · 시부 · 주선
183권 「외척전(外戚傳)」
독고회은 · 두덕명 · 장손창 · 무승사 · 위온 · 왕인교 · 오서 · 유성 · 두유 · 왕자안
184권 「환관전(宦官傳)」
양사욱 · 고역사 · 이보국 · 정원진 · 어조은 · 두문장 · 구문진 · 토돌승최 · 왕수징 · 전령자 · 양복광 · 양복공
185권 「양리전(良吏傳)」
위인수 · 장윤제 · 이동객 · 이소립 · 설대정 · 가돈이 · 이군구 · 최지온 · 고지주 · 전인회 · 위기 · 권회은 · 풍원상 · 장엄 · 왕방익 · 설계창 · 배회고 · 장지건 · 양원염 · 예약수 · 이준(李浚) · 양교 · 송경례 · 강사도 · 강순 · 반호례 · 양무겸 · 양인 · 최은보 · 이상은(李尙隱) · 여인 · 소정 · 장연 · 이혜등 · 임적간 · 범전정 · 원자 · 설빈 · 염제미
186권 「혹리전(酷吏傳)」
내준신 · 주흥 · 부유예 · 구신적 · 삭원례 · 후사지 · 만국준 · 내자순 · 왕홍의 · 곽패 · 길욱 · 요소지 · 주이정 · 왕욱 · 길온 · 나희석 · 모약허 · 경우
187권 「충의전(忠義傳)」
하후단 · 유감 · 상달 · 나사신 · 여자장 · 이공일 · 장선상 · 이현통 · 경군홍 · 풍립 · 사숙방 · 왕의방 · 성삼랑 · 윤원정 · 고예 · 왕동교 · 소안항 · 유문준 · 연흠융 · 안금장 · 이징(李憕) · 장개연 · 최무피 · 노혁 · 장청 · 안고경 · 설원 · 장순 · 허원 · 정천리 · 원광정 · 소진 · 부린 · 조엽 · 석연분 · 장비 · 견제 · 유돈유 · 고목 · 가직언 · 유경휴 · 신당
188권 「효우전(孝友傳)」
이지본 · 장지관 · 유군량 · 왕군조 · 조홍지 · 진집원 · 원양 · 배경이 · 배수진 · 이일지 · 최면 · 육남금 · 장수 · 양문정 · 최연 · 정공저 · 나양
189권 「유학전(儒學傳)」
서문원 · 육덕명 · 조헌 · 구양순 · 주자사 · 장사형 · 가공언 · 장후윤 · 곡나율 · 소덕언 · 허숙아 · 경파 · 유백장 · 진경통 · 나도종 · 형문위
고자공 · 낭여령 · 노경순 · 왕원감 · 왕소종 · 위숙하 · 축흠명 · 곽산운 · 유충 · 노찬 · 윤지장 · 서대 · 소변 · 육질 · 풍항 · 위표미 · 허강좌
190권 「문원전(文苑傳)」
공소안 · 원랑 · 하덕인 · 유포 · 채윤공 · 정세익 · 사언 · 최신명 · 장온고 · 유윤지 · 장창령 · 최행공 · 서제담 · 두역간 · 노조린 · 양형 · 왕발 · 낙빈왕 · 등현정 · 곽정일 · 원만경 · 교지지 · 유윤제 · 부가모 · 원반천 · 유헌 · 심전기 · 진자앙 · 송지문 · 염조은 · 가증 · 허경선 · 하지장 · 석예 · 제완 · 왕완 · 이옹(李邕) · 손적 · 이화 · 소영사 · 육거 · 유포 · 최호 · 왕창령 · 맹호연 · 원덕수 · 왕유 · 이백 · 두보 · 오통현 · 왕중서 · 최함 · 당차 · 유분 · 이상은(李商隱) · 온정균 · 설봉 · 이증 · 이거천 · 사공도
191권 「방기전(方伎傳)」
최선위 · 설이 · 견권 · 송협 · 허윤송 · 을불홍례 · 원천강 · 손사막 · 명숭엄 · 장경장 · 이사진 · 장문중 · 상헌보 · 맹선 · 엄선사 · 금양봉 · 장과 · 엽법선 · 현장 · 신수 · 일행 · 상도무
192권 「은일전(隱逸傳)」
왕적 · 전유암 · 사덕의 · 왕우정 · 노홍일 · 왕희이 · 위대경 · 이원개 · 왕수신 · 서인기 · 손처현 · 백이충 · 왕원지 · 반사정 · 유도합 · 사마승정 · 오균 · 공술예
193권 「열녀전(列女傳)」
배숙영 · 경상자 · 위무기 · 두백랑 · 두중랑 · 이현진 · 왕화자
194권 「돌궐전(突厥傳)」 195권 회흘전(回紇傳)」 196권 「토번전(吐蕃傳)」
돌궐 회흘 토번
197권 「남만·서남만전(南蠻·西南蠻傳)」
임읍국 · 파리국 · 반반국 · 정랍 · 수진랍국 · 타원국 · 가릉국 · 타화라국 · 타파등국 · 동사만 · 서조만 · 장가만 · 동여국 · 남조만 · 표국
198권 「서융전(西戎傳)」
니파라국 · 당항 · 고창 · 토욕혼 · 언기국 · 소륵국 · 우전국 · 천축국 · 계빈국 · 발율국 · 강국 · 파사국 · 불름국 · 대식국
199권 「동이·북적전(東夷北狄傳)」
고려 · 백제 · 신라 · 왜국 · 일본 · 철륵 · 거란 · · 실위 · 말갈 · 발해 ·
200권 「안녹산등전(安祿山等傳)」
안녹산 , 안경서 고상 손효철, · 사사명 , 사조의, · 주차 · 황소 · 진종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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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당서(新唐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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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본기(本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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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1818,#e5e5e5
1권 「고조기(高祖紀)」 2권 「태종기(太宗紀)」 3권 「고종기(高宗紀)」
이연(李淵) 이세민 이치
4권 「측천황후·중종기(則天皇后中宗紀)」 5권 예종·현종기(睿宗玄宗紀)」 6권 「숙종·대종기(肅宗代宗紀)」
이현(李顯) · 무조 이단 · 이융기 이형(李亨) · 이예(李豫)
7권 「덕종·순종·헌종기(德宗順宗憲宗紀)」 8권 「목종·경종·문종·무종·선종기(穆宗敬宗文宗武宗宣宗紀)」
이괄 · 이송 · 이순(李純) 이항 · 이심(李湛) · 이앙 · 이염(李瀍) · 이침(李忱)
9권 「의종·희종기(懿宗僖宗紀)」 10권 「소종·애제기(昭宗哀帝紀)」
이최 · 이현(李儇) 이엽 · 이축
※ 11권 ~ 60권은 志에 해당. 61권 ~ 75권은 表에 해당. 신당서 문서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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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열전(列傳) ]
||<-6><tablebgcolor=#a48252><tablewidth=100%> 76·77권 「후비전(后妃傳)」 ||
태목황후 · 문덕황후 · 서혜 · 무조 · 왕폐후 · 화사황후 · 위황후 · 상관소용 · 숙명황후 · 소성황후 · 왕폐후 · 정순황후 · 원헌황후 · 양귀비
장황후 · 장경황후 · 정의황후 · 예진황후 · 소덕황후 · 위씨 · 장헌황후 · 의안황후 · 효명황후 · 공희황후 · 정헌황후 · 선의황후 · 곽귀비 · 왕현비 · 원소황후 · 혜안황후 · 곽숙비 · 공헌황후 · 적선황후
78권 「종실전(宗室傳)」
이도종 · 이도흥 · 이효기 · 이도현 · 이숙량 · 이효협 · 이사훈 · 이진(李晉) · 이유량 · 이침 · 이효공 · 이괴 · 이원 · 이신통 · 이도언 · 이효일 · 이신부 · 이박의 · 이봉자
79권 「고조제자전(高祖諸子傳)」
이건성 · 이현패 · 이원길 · 이지운 · 이원경(李元景) · 이원창 · 이원형 · 이원방 · 이원례 · 이원가 · 이원칙 · 이원의 · 이원궤 · 이봉(李鳳) · 이원경(李元慶) · 이원유 · 이원명 · 이령기 · 이원상 · 이원효 · 이원영
80권 「태종제자전(太宗諸子傳)」
이승건 · 이관(李寬) · 이각(李恪) · 이태 · 이우(李祐) · 이음 · 이운(李惲) · 이정(李貞) · 이신(李愼) · 이효(李囂) · 이간(李簡) · 이복 · 이명
81권 「삼종제자전(三宗諸子傳)」
이충(李忠) · 이효 · 이상금 · 이소절 · 이홍 · 이현(李賢) · 이중윤 · 이중복 · 이중준 · 이헌 · 이총 · 이범 · 이업 · 이융제
82권 「14종제자전(十四宗諸子傳)」
이종(李琮) · 이영(李瑛) · 이염(李琰) · 이요 · 이완 · 이거(李琚) · 이일(李一) · 이수(李璲) · 이교 · 이민 · 이린(李璘) · 이모 · 이분 · 이기(李琦) · 이환(李環) · 이황 · 이빈 · 이규(李珪) · 이공(李珙) · 이진(李瑱) · 이선(李璿) · 이경(李璥) · 이계(李係) · 이담(李倓) · 이필(李佖) · 이근(李僅) · 이간(李僴) · 이정(李侹) · 이영(李榮) · 이광 · 이수(李倕) · 이사 · 이소(李佋) · 이동(李侗) · 이막 · 이하(李遐) · 이술 · 이유(李逾) · 이연(李連) · 이형(李迥) · 이구(李遘) · 이내 · 이신(李迅) · 이선(李選) · 이소(李溯) · 이조 · 이섬 · 이운(李運) · 이우(李遇) · 이휼 · 이통 · 이규(李逵) · 이일(李逸) · 이의(李誼) · 이심(李諶) · 이량 · 이상(李詳) · 이원(李謜) · 이겸 · 이인(李諲) · 이계(李誡) · 이악 · 이함(李諴) · 이경(李經) · 이위(李緯) · 이종(李縱) · 이서(李紓) · 이주(李綢) · 이종(李綜) · 이약 · 이결 · 이상(李緗) · 이구(李絿) · 이기(李綺) · 이현(李絢) · 이훈(李纁) · 이관(李綰) · 이선(李繕) · 이롱 · 이곤 · 이신(李紳) · 이륜 · 이작 · 이집 · 이녕 · 이운(李惲) · 이종(李悰) · 이흔 · 이오 · 이각(李恪) · 이경(李憬) · 이열 · 이순(李恂) · 이역(李懌) · 이음(李愔) · 이협 · 이담(李憺) · 이충(李㤝) · 이췌(李惴) · 이척(李惕) · 이탄 · 이책 · 이주(李湊) · 이용(李溶) · 이보(李普) · 이휴복 · 이언양 · 이집중 · 이성미 · 이영(李永) · 이종검 · 이준(李峻) · 이현(李峴) · 이기(李岐) · 이역(李嶧) · 이차 · 이한 · 이경(李涇) · 이관(李灌) · 이자(李滋) · 이근(李沂) · 이택 · 이윤 · 이흡 · 이예(李汭) · 이문 · 이옹(李澭) · 이일(李佾) · 이건 · 이길 · 이간(李侃) · 이보(李保) · 이의(李倚) · 이진(李震) · 이승 · 이유(李裕) · 이우(李祤) · 이계(李禊) · 이인(李禋) · 이의(李祎) · 이비 · 이기(李祺) · 이진(李禛) · 이상(李祥) · 이정(李禎) · 이기(李祁) · 이복 · 이희(李禧) · 이고(李祜) · 이제 · 이희(李祐)
83권 「제제공주전(諸帝公主傳)」
동안공주 · 장사공주 · 양양공주 · 평양소공주 · 고밀공주 · 장광공주 · 장사공주 · 방릉공주 · 구강공주 · 노릉공주 · 남창공주 · 안평공주 · 회남공주 · 진정공주 · 형양공주 · 단양공주 · 임해공주 · 관도공주 · 안정공주 · 상락공주 · 양성공주 · 여남공주 · 남평공주 · 수안공주 · 장락공주 · 예장공주 · 북경공주 · 보안공주 · 동양공주 · 임천공주 · 청하공주 · 난릉공주 · 진안공주 · 안강공주 · 신흥공주 · 성양공주 · 합포공주 · 금산공주 · 진양공주 · 상산공주 · 신성공주 · 의양공주 · 고안공주 · 태평공주 · 신도공주 · 의성공주 · 정안공주 · 장녕공주 · 영태공주 · 안락공주 · 성안공주 · 수창공주 · 안흥소회공주 · 형산공주 · 회양공주 · 대국공주 · 양국공주 · 설국공주 · 식국공주 · 금선공주 · 옥진공주 · 곽국공주 · 영흥공주 · 천장공주 · 영국공주 · 흥당공주 · 서평공주 · 낭령공주 · 광화공주 · 창락공주 · 수춘공주 · 장녕공주 · 연경공주 · 정락공주 · 낙온공주 · 영청공주 · 위국문의공주 · 안화공주 · 보강공주 · 창원공주 · 창녕공주 · 금화공주 · 인수공주 · 영수공주 · 당흥공주 · 영평공주
84권 「이밀전(李密傳)」 85권 「왕두전(王竇傳)」
이밀 , 선웅신 조효징, 왕세충 · 두건덕
86권 「설이이유고서전(薛李二劉高徐傳)」 87권 「소보심이양전(蕭輔沈李梁傳)」
설거 , 설인고 이궤 · 유무주 · 고개도 · 유흑달 · 서원랑 소선 · 보공석 · 심법흥 · 이자통 , 주찬 임사홍 장선안, 양사도(梁師都) , 유계진,
88권 「유배전(劉裴傳)」 89권 「굴돌울지장진당단전(屈突尉遲張秦唐段傳)」
유문정 · 배적 굴돌통 · 울지공 · 장공근 · 진경 · 당검 · 단지현
90권 「이유은허정시임구전(二劉殷許程柴任丘傳)」 91권 「온황보이이강최전(溫皇甫二李姜崔傳)」
유홍기 · 은개산 · 유정회회 · 허소 · 정지절 · 시소 · 임괴 · 구화 온대아 · 황보무일 · 이습지 · 강모 · 최선위 · 이사진
92권 「두감왕이원나왕전(杜闞王李苑羅王傳)」 93권 「이이전(二李傳)」
두복위 · 감릉 · 왕웅탄 · 장사귀 · 이자화 · 원군장 · 나예 · 왕군곽 이정(李靖) · 이적
94권 「후장설전(侯張薛傳)」 95권 「고두전(高竇傳)」 96권 「방두전(房杜傳)」
후군집 · 장량 · 설만균 고검 · 두위 방현령 · 두여회
97권 「위징전(魏徵傳)」 98권 「왕설마위전(王薛馬韋傳)」 99권 「이이대유최전(二李戴劉崔傳)」
위징 왕규 · 설수 · 마주 · 위정 이강(李綱) · 이대량 · 대주 · 유계 · 최인사
100권 「진양봉배우문정권염장강장전(陳楊封裴宇文鄭權閻蔣姜張傳)」
진숙달 · 양공인 , 양사도(楊師道), · 봉륜 · 배구 · 우문사급 · 정선과 · 권만기 · 염입덕 · 장엄 · 위홍기 · 강사도 · 장지건
101권 「소우전(蕭瑀傳)」 102권 「잠우이저요영호전(岑虞李褚姚令狐傳)」
소우 잠문본 · 우세남 · 이백약 · 저량 · 요사렴 · 영호덕분
103권 「소위손장전(蘇韋孫張傳)」 104권 「우고장전(于高張傳)」
소세장 · 위운기 · 손복가 · 장현소 우지녕 · 고풍 · 장행성
105권 「장손저한내이상관전(長孫褚韓來李上官傳)」
장손무기 · 저수량 · 한원 · 내제 · 이의염 · 상관의
106권 「두이최고곽조최양노이유이유손형전(杜二崔高郭趙崔楊盧二劉李劉孫邢傳)」
두정륜 · 최지온 · 고지주 · 곽정일 · 조홍지 · 최돈례 · 양홍례 · 노승경 · 유상도 · 이경현 · 유덕위 · 손처약 · 형문위
107권 「부여진전(傅呂陳傳)」 108권 「유배누전(劉裴婁傳)」
부혁 · 여재 · 진자앙 유인궤 · 배행검 · 누사덕
109권 「최양두종축왕전(崔楊竇宗祝王傳)」
최의현 · 양재사 · 두회정 · 종초객 · 축흠명 , 곽산운, · 왕여
110권 「제이번장전(諸夷蕃將傳)」
사대내 · 풍앙 · 아사나사이 · 아사나충 · 집실사력 · 글필하력 · 흑치상지 · 이근행 · 천남생 · 이다조 · 논궁인 · 손유정 · 울지승 · 상가고 · 배분
111권 「곽이장삼왕소설정당전(郭二張三王蘇薛程唐傳)」
곽효각 · 장검 · 왕방익 · 소열 · 설인귀 · 정무정 , 정명진 왕효걸 · 당선 · 장인원 · 왕준
112권 「왕한소설왕류풍장전(王韓蘇薛王柳馮蔣傳)」 113권 「당장서전(唐張徐傳)」
왕의방 · 한사언 · 소안항 · 설등 · 왕구례 · 류택 · 풍원상 · 장흠서 당림 · 장문관 · 서유공
114권 「최서소두로전(崔徐蘇豆盧傳)」 115권 「적학주전(狄郝朱傳)」
최융 · 서언백 · 소미도 · 두로흠망 적인걸 · 학처준 · 주경칙
116권 「이왕위육이이두전(二王韋陸二李杜傳)」 117권 「배유위이길전(裴劉魏李吉傳)」
왕침 · 위사겸 · 육원방 · 왕급선 · 이일지 · 두경전 · 이회원 배염 · 유의지 · 위현동 · 이소덕 · 길욱
118권 「장위한송신이이배전(張韋韓宋辛二李裴傳)」 119권 「무이가백전(武李賈白傳)」
장정규 · 위주 · 한사복 · 송무광 · 신체부 · 이발 · 배린 · 이중민 · 이감 무평일 · 이예(李乂) · 가증 · 백거이
120권 「오왕전(五王傳)」
환언범 , 이복업 습수 설계창, · 양원염 · 경휘 · 최현위 · 장간지 · 원서기
121권 「유종최이왕전(劉鐘崔二王傳)」 122권 「위위곽전(魏韋郭傳)」
유유구 · 종소경 · 최일용 · 왕거 · 왕모중 위원충 · 위안석 · 곽진
123권 「이소로위조화전(李蕭盧韋趙和傳)」 124권 「요송전(姚宋傳)」
이교 · 소지충 · 노장용 · 위거원 · 조언소 · 화봉요 요숭 · 송경
125권 「소장전(蘇張傳)」 126권 「위로이두장한전(魏盧李杜張韓傳)」
소괴 · 장열 위지고 · 노회신 · 이원굉 · 두섬 · 장구령 · 한휴
127권 「장원배전(張源裴傳)」
장가정 · 원건요 · 배요경
128권 「소윤필이정왕허반예석제전(蘇尹畢李鄭王許潘倪席齊傳)」
소향 · 윤사정 · 필구 · 이걸 · 정유충 · 왕지음 · 허경선 · 반호례 · 예약수 · 석예 · 제한
129권 「배최노이왕엄전(裴崔盧李王嚴傳)」 130권 「배양송양최이해전(裴陽宋楊崔李解傳)」
배수진 · 최면 · 노종원 · 이조은 · 왕구 · 엄정지 배최 · 양교 · 송경례 · 양창 · 최은보 · 이상은(李尙隱) · 해완
131권 「종실재상전(宗室宰相傳)」 132권 「유오위장유침전(劉吳韋蔣柳沈傳)」
이적지 · 이현(李峴) · 이면 · 이이간 · 이정(李程) · 이석 · 이회 유자현 · 오긍 · 위술 · 장예 · 유방 · 심기제
133권 「이곽양왕장우전(二郭兩王張牛傳)」 134권 「우문위양왕전(宇文韋楊王傳)」
곽건관 · 곽지운 · 왕군착 · 장수규 · 왕충사 · 우선객 우문융 · 위견 · 양신긍 · 왕홍
135권 「가서고봉전(哥舒高封傳)」 136권 「이광필전(李光弼傳)」 137권 「곽자의전(郭子儀傳)」
가서한 · 고선지 · 봉상청 이광필 곽자의
138권 「이이마노전(二李馬路傳)」 139권 「방장이전(房張李傳)」 140권 「최묘이배여전(崔苗李裴呂傳)」
이사업 · 마린 · 이포옥 · 노사공 방관 · 장호 · 이필 최원 · 묘진경 · 배면 · 배준경 · 여인
141권 「최등위위이한노고전(崔鄧魏衛李韓盧高傳)」
최광원 · 등경산 · 최관 · 위소유 · 위백옥 · 이징(李澄) · 한전의 · 노종사 · 고하우
142권 「이양최류위로전(李楊崔柳韋路傳)」
이린(李麟) · 양관 · 최우보 · 유혼 · 위처후 · 노수
143권 「고원이위설최대왕서치신전(高元李韋薛崔戴王徐郗辛傳)」
고적 · 원결 · 이승 · 위륜 · 설각 · 최한형 · 대숙륜 · 왕굉 · 서신 · 치사미 · 신비
144권 「내전후최엄전(來田侯崔嚴傳)」 145권 「원반여양엄두전(元王黎楊嚴竇傳)」 146권 「이이전(二李傳)」
내진 · 전신공 · 후희일 · 최녕 · 엄여 원재 · 왕진 · 여간 · 양염 · 엄정 · 두참 이서균 · 이용(李鄘)
147권 「삼왕노신풍삼이곡이로전(三王魯辛馮三李曲二盧傳)」
왕사례 · 노경 · 왕난득 · 신운경 · 풍하청 · 이봉(李芃) · 이숙명 · 곡환 · 왕건휴 · 노군 · 이원소 · 노사매
148권 「영호장강이유전왕우사전(令狐張康李劉田王牛史傳)」
영호창 · 장효충 · 강일지 · 이유(李洧) · 유옹 · 전홍정 · 왕승원 · 우원익 · 사효장
149권 「유제오반왕이전(劉第五班王李傳)」 150권 「이상조최제로전(李常趙崔齊盧傳)」 151권 「관동원조두전(關董袁趙竇傳)」
유안 · 제오기 · 반굉 · 왕소 · 이손(李巽) 이계 · 상곤 · 조경 · 최조 · 제앙 · 노매 관파 · 동진 · 원자 · 조종유 · 두역직
152권 「장강무이송전(張姜武李宋傳)」 153권 「단안전(段顏傳)」 154권 「이성전(李晟傳)」
장일 · 강공보 · 무원형 · 이강(李絳) · 송신석 단수실 · 안진경 이성, 이소(李愬),
155권 「마혼전(馬渾傳)」
마수 · 혼감
156권 「양대양이이한두형전(楊戴陽二李韓杜邢傳)」
양조성 · 대휴안 · 양혜원 · 이원량 · 이관(李觀) · 한유괴 · 두희전 · 형군아
157권 「육지전(陸贄傳)」 158권 「위장엄한전(韋張嚴韓傳)」
육지 위고 · 장건봉 · 엄진 · 한홍
159권 「포이소설왕오정육노유최전(鮑李蕭薛樊王吳鄭陸盧柳崔傳)」
포방 · 이자량 · 소흔 · 설파 · 번택 · 왕위 · 오주 · 정권 · 육긍 · 노탄 · 유성 · 최융
160권 「서여맹유양반최위전(徐呂孟劉楊潘崔韋傳)」 161권 「장조이정서왕풍유전(張趙李鄭徐王馮庾傳)」
서호 · 여위 · 맹간 · 유백추 · 양풍 · 반맹양 · 최원략 · 위수 장천 · 조연 · 이서 · 정운규 · 서대 · 왕중서 · 풍항 · 유경휴
162권 「요독고고위단여허설이전(姚獨孤顧韋段呂許薛李傳)」
요남중 · 독고급 · 고소련 · 위하경 · 단평중 · 여원응 · 허맹용 · 설존성 · 이손
163권 「공목최유양마전(孟簡等傳)」
공소부 · 목녕 · 최빈 · 유공작 · 양우릉 · 마총
164권 「귀해삼최노이설위호정이왕은전(歸奚三崔盧二薛衛胡丁二王殷傳)」
귀숭경 · 해척 · 최연 · 노경량 · 설빈 · 위차공 · 설융 · 호증 · 정공저 · 최홍례 · 최현량 · 왕질 · 은유 · 왕언위
165권 「삼정고권최전(三鄭高權崔傳)」 166권 「가두영호전(賈杜令狐傳)」
정여경 · 정순유 · 고영 · 정인 · 권덕여 · 최군 가탐 · 두우 · 영호초
167권 「백배최위이이황보왕전(白裴崔韋二李皇甫王傳)」
백지정 · 배연령 · 최손 · 위거모 · 이제운 · 이실 · 황보박 · 왕파
168권 「위왕육유유정전(韋王陸劉柳程傳)」 169권 「두배이위전(杜裴李韋傳)」
위집의 · 왕숙문 · 육질 · 유우석 · 유종원 · 정이 두황상 · 배기 · 이번 · 위관지
170권 「이고이주이유범이왕맹조이임장전(二高伊朱二劉范二王孟趙李任張傳)」
고숭문 · 이신(伊愼) · 주충량 · 유창예 · 범희조 · 왕악 · 맹원양 · 왕서요 · 유창 · 조창 · 이경략 · 임적간 · 장만복 · 고고 · 학비
171권 「이오왕양조고유석전(李烏王楊曹高劉石傳)」 172권 「우왕이두범전(于王二杜范傳)」
이광진 · 오중윤 · 왕패 · 양원경 · 조화 · 고우 · 유면 · 석웅 우적 · 왕지흥 · 두겸 · 두아 · 범정전
173권 「배도전(裵度傳)」 174권 「이이원우양전(二李元牛楊傳)」
배도 이봉길 · 원진 · 우승유 · 이종민 · 양사복
175권 「두유이장양웅백전(竇劉二張楊熊柏傳)」 176권 「한유전(韓愈傳)」
두군 · 유서초 · 장우신 · 양우경 · 장숙 · 웅망 · 백기 한유
177권 「전최이위이고풍삼이노봉정경전(錢崔二韋二高馮三李盧封鄭敬傳)」
전휘 · 최함 · 위표미 · 고익 · 풍숙 · 이우중 · 이고(李翺) · 노간사 · 고원유 · 봉오 · 정훈 · 경회 · 위박 · 이경양
178권 「유분전(劉賁傳)」
유분
179권 「이정이왕가서전(李鄭二王賈舒傳)」
이훈(李訓) · 정주 · 왕애 · 가속 · 서원여 · 왕파 · 곽행여 · 한약 · 나립언 · 이효본 · 고사옹 · 이정소
180권 「이덕유전(李德裕傳)」 181권 「진삼이조유전(陳三李曹劉傳)」
이덕유 진이행 · 이신(李紳) · 이양이 · 조확 · 유첨 · 이울
182권 「이이최소이정이노위주이배유조왕전(二李崔蕭二鄭二盧韋周二裴劉趙王傳)」
이고언 · 이각 · 최공 · 소업 · 정숙 · 노균 · 노간방 · 위종 · 주지 · 배휴 · 유전 · 조은 · 배탄 · 정연창 · 왕부 · 노광계
183권 「필최유육정주한전(畢崔劉陸鄭朱韓傳)」
필함 · 최언소 · 유업 · 육의 · 정계 · 주박 · 한악
184권 「마양노노전(馬楊路盧傳)」 185권 「정이왕위장전(鄭二王韋張傳)」
마식 · 앵수 · 노암 · 노휴 정전 · 왕탁 · 왕휘 · 위소도 · 장준
186권 「주왕등진유조이양고전(周王鄧陳劉趙二楊顧傳)」
주보 · 왕처존 · 등처눌 · 진유 · 유거용 · 조덕인 · 양수량 · 양성 · 고언랑
187권 「이왕제갈이맹전(二王諸葛李孟傳)」 188권 「양시주손전(楊時朱孫傳)」
왕중영 · 제갈상 · 이한지 · 왕경무 · 맹방립 양행밀 · 시부 · 주선 · 손유
189권 「고조전주전(高趙田朱傳)」 190권 「삼유성두종장왕전(三劉成杜鐘莊王傳)」
고인후 · 조주 · 전군 · 주연수 유건봉 · 성예 · 두홍 · 종전 · 유한굉 · 장웅 · 왕조 · 유지겸
191·192·193권 「충의전(忠義傳)」
하후단 · 유감 · 상달 · 경군홍 · 여자장 · 왕행민 · 나사신 · 장도원 · 이육덕 · 고예 · 안금장 · 왕동교 · 오보안 · 이징(李憕) · 노혁 · 장개연 · 최무피 · 안고경 · 가순 · 장순 · 허원 · 남제운 · 뇌만춘 · 요은 · 정천리 · 방견 · 장흥 · 채정옥 · 부령기 · 유내 · 맹화 · 장비 · 주증 · 장명진 · 석연분 · 오서 · 고목 · 가직언 · 신당 · 황갈
194권 「탁행전(卓行傳)」
원덕수 · 권고 · 견제 · 양성 · 사공도
195권 「효우전(孝友傳)」
이지본 · 장지관 · 유군량 · 왕소현 · 임경신 · 지숙재 · 정원사 · 무홍도 · 정잠요 · 원양 · 배경이 · 양문정 · 심계전 · 허백회 · 진집원 · 장수 · 서원경 · 여상안 · 양열 · 목종세 · 후지도 · 정구라 · 하징수
196권 「은일전(隱逸傳)」
왕적 · 손사막 · 전유암 · 맹선 · 왕우정 · 왕희이 · 이원개 · 위대경 · 무유서 · 백이충 · 오긍 · 노홍 · 오균 · 반사정 · 사마승정 · 하지장 · 진계 · 장지화 · 공술예 · 육우 · 최근 · 육구몽
197권 「순리전(循吏傳)」
위인수 · 진군빈 · 장윤제 · 이소립 · 손지원 · 설대정 · 가돈이 · 전인회 · 배회고 · 위경준 · 이혜등 · 나상 · 위단 · 노홍선 · 설원상 · 하역우
198·199·200권 「유학전(儒學傳)」
서문원 · 육덕명 · 조헌 · 안사고 · 공영달 · 구양순 · 주자사 · 장사형 · 장후윤 · 개문달 · 곡나율 · 경파 · 나도종 · 낭여령 · 서제탐 · 심백의 · 노경순 · 왕원감 · 왕소종 · 팽경직 · 노찬 · 윤지장 · 유충 · 마회소 · 공약사, 공소안, · 저무량 · 원행충 · 진정절 · 시경본 · 노이빙 · 왕중구 · 조동희 · 담조 · 위융 · 진경(陳京) · 창당 · 임온 · 위공숙 · 허강좌
201·202·203권 「문원전(文苑傳)」
원랑 · 하덕인 · 채윤공 · 사언 · 최신명 · 유연우 · 장창령 · 최행공 · 두심언 · 왕발 · 원만경 · 이적(李適) · 위원단 · 유윤제 · 심전기 · 송지문 · 염조은 · 윤원개 · 유헌 · 이옹(李邕) · 여향 · 왕한 · 손적 · 이백 · 왕유 · 정건 · 소영사 · 소원명 · 이화 · 맹호연 · 유태진 · 소설 · 우소 · 최원한 · 우공이 · 이익 · 노륜 · 구양첨 · 이하(李賀) · 오무릉 · 이상은(李商隱) · 설봉 · 이빈(李頻) · 오융
204권 「방기전(方伎傳)」
이순풍 · 견권 · 원천강 · 설이 · 명숭엄 · 상헌보 · 엄선사 · 두생 · 장과 · 강무 · 상도무
205권 「열녀전(列女傳)」
배숙영 · 왕난영 · 경상자 · 위무기 · 하후쇄금 · 왕아족 · 왕옥영 · 요아 · 두백랑 · 두중랑 · 이묘법 · 왕화자 · 사소아 · 봉순
206권 「외척전(外戚傳)」
독고회은 · 무사확 · 위온 · 주인궤 · 왕인교 · 양국충 · 이소(李翛) · 정광
207·208권 「환관전(宦官傳)」
양사욱 · 고역사 · 정원진 · 어조은 · 유정양 · 토돌승최 · 마존량 · 구사량 · 양복광 · 이보국 · 왕수징 · 유극명 · 전령자 · 양복공 · 유계술
209권 「혹리전(酷吏傳)」
삭원례 · 내준신 · 후사지 · 왕홍의 · 곽홍패 · 요소지 · 주이정 · 왕욱 · 최기 · 모약허 · 경우
210권 「번진위박전(藩鎭魏博傳)」 211권 「번진진기전(藩鎭鎭冀傳)」
전승사 · 사헌성 · 하진도 · 악언정 · 나홍신 이보신 · 왕무준 · 왕정주
212권 「번진노룡전(藩鎭盧龍傳)」
이회선 · 주도 · 유평 · 주극융 · 이재의 · 장중무 · 장윤신 · 이무훈 · 이전충 · 유인공
213권 「번진치청횡해전(藩鎭淄青橫海傳)」 214권 「번진선무창의택로전(藩鎭宣武彰義澤潞傳)」
이정기 · 정일화 · 이전략 유현좌 · 오소성 · 이우 · 이비
215권 「돌궐전(突厥傳)」 216권 「토번전(吐蕃傳)」
돌궐 토번
217권 회흘전(回紇傳)」 218권 사타전(沙陀傳)」
회흘 사타
219권 북적전(北狄傳)」 220권 동이전(東夷傳)」
거란 · 해족 · 실위 · 발해 · 말갈 고려 · 백제 · 신라 · 왜국 · 일본 · 유귀국
221권 「서융전(西戎傳)」
니파라국 · 당항 · 동여국 · 고창 · 토욕혼 · 언기 · 구자 · 소륵 · 갈반타국 · 우전국 · 천축국 · 계빈국 · 강국 · 안국 · 동안 · 동조 · 서조 · 중조 · 자지국 · 미말 · 굴상니가 · 화심 · 갈상나 · 나색파 · 달밀 · 영원국 · 대발률 · 토화라 · 읍달국 · 구란국 · 월저연국 · 범연국 · 석한나 · 식익 · 사몰 · 구밀 · 호밀 · 개실밀 · 골돌 · 소비 · 다미 · 이오성 · 사자국 · 파사국 · 구위 · 불름국 · 대식국 · 달만
222권 「남만전(南蠻傳)」
남조 · 임읍 · 파리국 · 반반국 · 정랍 · 수진랍국 · 타원국 · 가릉국 · 타화라국 · 타파등국 · 동사만 · 서조만 · 장가만 · 표국
223권 「간신전(奸臣傳)」
허경종 · 이의부 · 부유예 · 이임보 · 진희열 · 노기 · 최윤 · 최소위 · 유찬 , 장현휘 장정범 씨숙종 주우공,
224권 「반신전(叛臣傳)」
복고회은 · 주지광 · 양숭의 · 이회광 · 진소유 · 이기(李錡) · 이충신 · 교림 · 고병 · 주매 · 왕행유 · 진경선 · 이거천
225권 「역신전(逆臣傳)」
안녹산 · 고상 · 손효철 · 이희열 · 사사명 · 주차 · 황소 · 진종권 · 동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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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고종와의 합장릉으로, 중국의 유일무이한 황제 2인 합장릉이다. [2] 장례는 황후의 예로 치렀다. [3] '조'(曌)는 '조'(照)의 측천문자이다. [4] 이복오빠 무원경 무원상은 무사확의 전처인 상리씨의 아들이다. 언니 한국부인 무씨는 한자로 "韓國夫人"이라고 쓰나, 여기서 韓은 춘추시대 한나라의 땅으로 현재는 산시성 웨이난시 한청시(韩城市)다. 대한민국과는 상관없는 곳이다. [5] 출처 측천무후의 키를 본떠 만들었다고 전해지는 금 전표를 통해 추정한 키이다. [6] 부군 고종은 천황(天皇)이라고 하였다. [주]
690년 성신황제(聖神皇帝)
693년 금륜성신황제(金輪聖神皇帝))
695년 자씨월고금륜성신황제(慈氏越古金輪聖神皇帝)
[당] 신룡(神龍) 원년 [9]
705년 측천대성황후(則天大聖皇后)
710년 천후(天后)
710년 대성천후(大聖天后)
712년 천후성제(天后聖帝)
712년 성후(聖后)
716년 측천황후(則天皇后)
749년 측천순성황후(則天順聖皇后)
[10] 측천무후 이전에 중국에서 여황제가 된 원고낭(남북조시대 북위 말기)과 진석진(당고종 치세)도 기록에 남아있기 때문에 원고낭과 진석진도 여황제로 보아 측천무후는 첫 번째가 아닌 두 번째나 세 번째 여황제로 보는 시각도 있다. 다만 원고낭과 진석진은 정식 황제로 쳐줄 수 없다는 학계 의견이 많은데 전자는 남자로 둔갑시켜 즉위시킨 사기 즉위였고, 후자는 반란군 세력이 황제를 자칭한 경우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통성이 확실한 여황제로서는 유일한 게 맞으며 후궁, 황후, 황태후, 황제, 태상황제를 모두 거친 전무후무한 존재로 여자로서 황제와 태상황제를 모두 한 사람은 중국 역사 전체에서 측천무후가 유일하다. [11] 우 쩌톈 [12] 한자가 보이지 않는다면 # 측천무후가 직접 만든 한자다. 황제는 피휘 문제 때문에 이런 식으로 자기 이름을 만들거나 아무도 모르는 벽자 이름을 사용해야 모두에게 편하다. [13] 측천무후는 자신을 황제가 아닌 황후의 예로서 장례 지내라고 하였고, 다시는 본인처럼 여성이 황제가 되는 일이 없도록 해야한다는 유언을 남겼다. [14] 본래 입궁 때는 이 정도로 낮은 품계를 받는다. 그러나 비슷한 시기에 입궁한 후궁들이 승급하는 동안 측천무후는 만년 재인이었다. [15] 본명은 기록된 바가 없다. [16] 무씨 성의 예쁜이 [17] 문서에도 설명되고 있지만, 흔히 생각하는 쇠사슬 채찍이 아니라 대나무 모양으로 벼린 쇠막대이다. [18] 이전 품계였던 재인(才人)에서 무려 11품계가 올라간 것으로, 엄청난 신분 상승을 한 것이다. 정2품 소의에서 무품이자 황후의 바로 아랫자리인 귀비까지 총 3명의 비(숙비, 현비, 덕비)만 존재할 뿐이었다. [19] 훗날 당현종 이융기도 자기 아들인 수왕의 여자였던 양귀비 도교 도사로 출가시켰다가 다시 입궁시키는 형태로 후궁으로 삼았다. 당태종 사후 비구니로 출가했다가 환속 당고종의 후궁이 된 측천무후와 비교하면 종교를 제외하고는 비슷한 경우이다. 다만 양옥환의 경우에는 도교에 출가하면 이전의 모든 행적들이 다 지워진다는 것을 활용한 측면이 크지만 측천무후의 경우에는 이러한 과거 세탁을 할 목적으로 에 들어 간 것이 아니라 선황의 후궁들 중 자녀가 없는 사람이 절에 들어간 것으로 봐야 한다. [20] 당고조의 누이인 동안공주의 손녀이다. [21] < 연개소문(드라마)>에서는 아예 '네가 죽어야 내가 황후가 된다' 라며 안정공주를 살해하는 장면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며, < 대조영(드라마)>에서도 무측천이 황위에 오른 후 "내가 낳은 아이까지 내 손으로 죽여가며 오른 자리다"라는 대사를 하는 장면이 있다. 측천무후 소생의 자식으로 무후에게 죽은 사람이 한 명 더 있는데 <황대사> 노래로 유명한 장회태자이다. 측천무후 본인이 죽인 건 아니고 측근이었던 구신적에게 죽은 것이었다. 만화 고우영의 십팔사략》은 아예 이 설을 채용했다. 하술할 국내 비디오 시장에 나온 적 있고, SBS 방영으로 더 유명한 <일대여황>에서는 자기를 오랫동안 모셨던 시녀가 안정공주를 죽이고 왕황후를 모함하려고 자작극을 꾸몄다가 들통나자 사실대로 말하고 황궁 연못에 투신자살하지만 결과적으로는 왕황후는 몰락했다. [22] 이에 대해 많은 논란이 있다. 당고종의 생을 보면 선황이었던 태종 이세민에 비하여 정력적이지는 못했지만, 그 이세민이 자신의 후계자로 세운 사람이었다. 또한 왕황후의 경우, 무천진 관롱집단의 지지속에 황후에 오른 사람으로 궁으로 복귀한 지 얼마되지 못한 상황에서 무측천이 쫓아낼 힘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고종 시기까지 무측천은 황제였던 고종의 최측근 조언자이자 지지자였을 경우가 더 높다고 봐야한다. [23] 당시 기록에서 태자 이홍의 건강이 악화되자 고종과 무측천이 얼마나 지극정성이었는지를 알 수 있으며, 또한 무능한 3남 중종 이현을 쫓아내기는 했지만, 죽이려고 한 적이 없었다. 당장에 가장 유력한 후계자인 자기 소생 아들을 죽인다고 다음 후계자로 지명되는 사람이 또 다시 자기 소생이 된다라는 확고한 증거도 없는 상태에서 이는 멍청하기 짝이 없는 것이다. [24] 배염은 무측천의 반대파 사람으로 훗날 무측천에게 제거될 정도였으니 비밀리에 이를 꾸몄을 가능성도 거의 없다. [25] 국성이라서 반란 이후 도로 성씨를 빼앗겼다. 이적의 집안은 거의 박살이 나서 후손 중에는 토번으로 달아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이경업 자신은 바다에서 배를 타고 고려(옛 고구려땅, 신라일 수도 있다)로 도망치려고 했지만 실패했다. 이경업의 난을 평정할 때 나섰던 장군 중에는 백제 유민 출신의 번장 흑치상지도 있었다. [26] 공식적으로는 조정 신료들과 백성들이 무후의 즉위를 하루가 멀다하고 주청하자 예종도 이에 동조해 스스로 제위를 어머니에게 넘긴 것으로 기록되어 있지만 현실은 시궁창. [27] 사실 무승사, 무삼사가 황제가 되고 싶어서 설친 것에 불과하다. 게다가 측천무후가 중종을 폐위한 이유가 가족주의인데 무씨가 황제가 되면 무후의 자식들은 숙청당할 것이 분명했다. 측천무후가 아무리 무자비한 면이 있었다고 한들, 자기가 자기 자식을 치우는 것과 남이 자기 자식을 숙청하는 건 다른 문제이니만큼 그 꼴을 그냥 두고 볼 리는 없었다. 무씨가 제위에 오를 경우 일어날 반란에 대한 염려는 덤이었다. [28] 당현종 이융기의 이름과 같다고 해서 나중에 '흥광'으로 고치기는 했는데, 성덕왕이 즉위했을 때는 아직 당현종이 즉위(712)하기 이전으로 임치군왕 시절이었다. [29] 하아소, 마행위, 양봉절은 처형당하였다. 이해고와 낙무정도 처형당할 위기에 처하나 이들의 재주를 안타까워한 재상 적인걸의 만류로 인해 사면되었다. [30] 가르친링은 그의 동생 가르다고리와 함께 자결하고, 가르찬파 가르궁린은 당에 투항하여 논씨 성을 하사받는다. [31] 한편 이 무렵의 우리나라는 거란족의 반란에 걸걸중상 대조영이 합세했다. [32] 참고로, 이진충의 난을 통해 무씨 일족의 군사적 무능이 드러나게 된다. [33] 이후의 예종 현종도 모두 측천무후의 직계 자손이다. [34] 여기서 무후를 컷하게 된다면, 무후는 역적이 되는데, 문제는 이후 후계 황족이 모두 무후의 자식이기에 역적의 후손이라는 고질병을 지속적으로 달 수밖에 없었고, 그렇기에 무후의 측근을 죽일지언정 무후을 숙청하자는 언급은 나올 수도 없게 된다. 당장 측천무후가 중종과 예종의 모후라는 점이 너무나도 컸다. [35] 유언에 따라 측천무후의 묘비에는 글자가 없는데 그래서 '무자비'(無字碑)라고 부른다. 중국의 소설가 샨사는 이 측천무후의 무자비 앞에서 소설 《측천무후》를 구상했다고 한다. [36] 어쩌면 두 가지 의미를 같이 노렸을지도 모른다. 이런 식의 '무자 공덕비'는 측천무후의 전유물은 아니었고, 명나라 만력제를 비롯한 중국사의 여러 인물들이 남겼다. [37] 중국사에서 황후, 황태후, 황제, 태상황을 모두 겪어본 유일한 인물인만큼 비범함이 보통이 아님을 알 수 있다. [38] 그나마도 비중은 '호'쪽, 즉 선비족이 더 높았다. [39] 여담으로 인재를 등용할 때도 신분의 고하에 상관없이 능력이 출중하면 무조건 등용했다고 한다. [40] 무후가 죽였다는 첩 혹은 고종의 여인들은 폐황후 왕씨, 숙비 소씨, 한국부인 무씨, 위국부인 하란씨로 왕씨, 소씨는 무후가 황후로 책립되는 과정의 정쟁에서 제거되었고, 한국부인, 위국부인은 무후의 언니, 조카로 고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이것이 통정 관계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도리어 고종의 자식을 낳은 유씨, 정씨, 양씨 등은 살해당하지 않았다. [41] 흥미롭게도 이런 군주들이 등장하면 그 뒤에 반동으로 너그럽고, 인자한 군주가 등극하게 된다. 그리고 이런 군주의 시대에 태평성대와 이후의 몰락이 오가게 되는데 당현종은 자기 대에 성세인 개원지치와 난세인 천보난치가 공존하는 매우 특이한 사례이다. 사실 현종도 측천무후의 손자가 아니랄까봐 자신의 반대파였던 큰어머니 위황후와 사촌 안락공주를 위시한 위씨 일족, 할머니의 무씨 일족, 고모인 태평공주와 그녀의 세력을 싹 숙청한 전례가 있어 마냥 너그럽고 인자한 타입이라고는 말하기 힘들다. [42] 첫째, 스스로를 추천하는 자거(自擧) 제도를 처음으로 열었다. 이 제도가 시행됨으로써 천하의 인재들이 출신을 불문하고 모두 능력을 자랑하며 스스로를 추천했고, 합격하면 바로 채용되었다. 둘째, 무거(武擧) 제도를 시행하여 유능한 무관을 선발했다. 셋째, 시관(試官) 제도를 시행하여, 관리의 소질을 보증할 수 있도록 했다. 넷째, 측천무후는 사회 최하층까지 사람을 보내 인재를 선발했다. 하층에서도 당나라 사회에 도움이 될 만한 인재가 여럿 있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섯째, 제과(制科)를 개설하여 특별한 능력을 지닌 인재를 선발했다. 여섯째, 관원들이 유능한 인물을 추천하는 것을 장려했다. [43] 대체로 고종 시기 백제 고구려의 멸망도 무후의 공으로 보는 경향이 있지만 백제 멸망의 경우, 무후가 완전히 전면에 나서기 이전이었다. 도리어 무후는 고구려 원정에서 고종의 친정을 반대하며 반전 여론 혹은 고종의 대외정책에 그다지 적극적이지 않은 입장을 취했다. 고종이 군사적인 해결을 선호한 반면, 무후는 외교적인 해결을 선호했다고 한다. [44] 돌궐 전선에서 활약했으나 서경업의 반란에 연좌되었다는 무고를 받고 군중에서 처형당했다. 그 결과는 대돌궐 방어선의 와해였다. 돌궐군은 출전할 때마다 정무정의 사당에 기도를 드리고 출전했다. [45] 안서 4진을 되찾은 명장이었으나 왕황후의 일족이라는 이유로 유배되던 와중 사망했다. 그 결과는 서역을 토번에게 다시 빼앗겼다. [46] 이진충의 난때 이게 드러나고 말았다. [47] 이 과정에서 그의 참모가 진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많은 물자를 버리고 도망친 것은 덤이다. 《구당서》와 《신당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전당문》에 있는 장열의 기록과 《자치통감》에 이 사실이 그대로 나와 있다. [48] 진자앙의《 등유주대가》가 창작된 배경이기도 하다. 정확히는 소굉휘가 왕효걸에게 지원을 해주지 않아 왕효걸이 불리한 위치에 있었다. 그로 인해 백성들은 무삼사가 군대를 모집할 때는 거의 모이지 않았고, 이현이 군대를 모집할 때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49] 엄밀히 말해 건국 집단은 선비족 출신이지만, 성격을 따지자면 한족 문화권 국가라 봐도 무방하다. [50] 사실 군주가 너무 지나치게 오래 재위해도 이런저런 문제점이 발생할 수밖에 없다. 인간의 노쇠는 필연적으로 판단력 저하를 불러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당 현종. [51] 굳이 측천무후의 입장에서 후계 구도에 대해 변호하자면 측천무후 말년에 장간지 등 신하들의 추대로 복위한 중종 본인이 너무도 무능한 군주인 데다 위황후에게 휘둘리는 공처가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기만 했던 점도 한몫했다. [52] 이름이 한국부인인 것이 아니라 직위명이다. 본명은 불명이다. [53] 예종이 건강에 이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아들 이융기에게 빨리 선위한 것도 이런 정국을 뒤집어엎기 위함이었다. [54] 다만 이 이야기는 현실성이 떨어지는게 당장 황제인 이세민이 무씨가 이씨를 멸문시킨다는, <여주무왕> 예언 때문에 전혀 관련없는, 능력있는 장군을 누명 씌워 죽였을 정도로 전전긍긍했는데 무려 무씨 집안에서 황제의 상을 가진 사람이 있다고 하면 불보듯 뻔하게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여주무왕>이 아니더라도 무사확 일가는 반역죄로 꼬투리를 잡혔을 가능성이 높다. 하지만 당태종이 이 <여주무왕>의 예언을 결정적으로 확신했던 것은 그녀가 커서 궁으로 들어온 뒤 이순풍으로부터 <여주무왕>에 대한 풀이를 듣고 난 후였다. 즉 이미 손쓸 수도 없었던 상황이었던 것이다. <여주무왕>에 대한 풀이를 해준 이순풍 역시 이미 그가 궁에 있고 대세 역시 <여주무왕>에게 있으며 이 이상 <여주무왕>을 찾아내 죽일 경우, 오히려 태종의 자손들이 다시 태어난 그에게 멸문당할테니 더 이상 그(녀)를 찾지 말라고 했었다. 더 자세하게는, 지금 <여주무왕>으로 의심되는 사람을 죽여도 그 운명을 지닌 사람이 다시 환생할 것이며, 그때는 더 젊고 혈기방장한 상태이기 때문에 숙청에 있어서 자비를 베풀 가능성이 없지만, 지금 살려 두면 나이가 좀 있는 상태에서 권력을 잡게 되므로 숙청의 정도가 약해질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이로 인해 측천무후는 죽임을 당하는 대신 감로사로 가는 것으로 일단락되었다. 다만 이 <여주무왕>에 관련된 설 자체가 밑에 이군선 이야기와 더불어 야사라는 이야기가 있기 때문에 섣부른 판단은 금지다. [55] 유명한 도다이지도 그러한 고쿠분지였다. [56] 현종의 후궁 40,000명 운운은 《 신당서》 <환관지>에 있는 "개원 연간에는 궁빈이 40,000여 명이 있었다."라는 구절에 근거하는데, 《신당서》를 쓴 구양수 말장난으로 보는 시각이 있다. 현종에 대해서 이런 비판이 가능했다면, 측천무후에 대해서는 더한 소리가 불가능하지 않다. [57] 더군다나 선덕여왕은 엄연히 전대 진평왕의 공주로서 정통성을 가지고 즉위한 것이지만, 측천무후는 당나라의 황족인 농서 이씨와는 전혀 별개 집안의 사람으로 제위를 찬탈했다. [58] 애초에 측천무후의 권력은 당고종이 그녀를 신뢰했기에 나왔던 것이다. 당고종이 혜제(서진) 정도의 무능력자가 된 것이 아닌 이상에야 그녀의 권력에는 한계가 있었다. [59] 굳이 들자면 측천무후를 후궁으로 들인 것인데 이는 결과론적인 이야기일 뿐이다. 이미 중국에서는 3세기 조위에서 현 일본의 야마타이국의 여왕 히미코를 왕으로 인정한 바 있었으며 결정적으로 중국 입장에서는 신라나 야마타이나 제후국으로 간주했다는 것이다. 즉 중국 입장에서는 신라나 야마타이나 다 자기 아래로 보였다는 건데 측천무후가 바보도 아니고 중화의 황제가 되고 싶으면서 제후국이 하는 것을 예시로 들었다는 것은 체면상 맞지가 않다. 진짜 선례를 찾아내서 하려고자 했다면 중국의 역사를 이 잡듯이 뒤져서 비슷한 사례를 들었을 것이다. [60] 장회태자의 경우는 실제로 측천무후 자신이 명령한 건 아니더라도 측천무후가 보낸 구신적에 의해 죽임을 당한 이상 측천무후가 분명히 그의 죽음에 일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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