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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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쾩 튀뤼크
𐰚𐰇𐰚 : 𐱅𐰇𐰼𐰰[1]
突厥
파일:돌궐 지도.png
▲ 6세기 중반 영역[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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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골 고원
중앙아시아 일대
수도 외튀켄 의쉬[3]
정치체제 유목정
국가원수 대카간
국성 아사나(阿史那)
언어 고대 튀르크어, 소그드어
종족 튀르크족
종교 텡그리교
존속기간 돌궐 제1제국 (동,서돌궐 포함) 552년~ 583년~ 630년~ 657년
동돌궐 583년~ 630년
서돌궐 583년~ 657년
당의 기미지배기 630년~ 687년
돌궐 제2제국 687년~ 745년
성립 이전 유연
멸망 이후 위구르 제국
1. 개요2. 명칭3. 역사
3.1. 돌궐 제1제국(동돌궐, 서돌궐)(552~583~630~657)3.2. 동돌궐(583~630)3.3. 서돌궐(583~657)3.4. 당의 기미지배기(630~687)3.5. 돌궐 제2제국(687~745)
4. 동돌궐 역대 가한5. 돌궐 제2제국 역대 가한6. 돌궐 비문7. 현대 튀르키예와의 관계8. 더 읽어볼만한 글9. 현대10. 매체11. 관련항목

[clearfix]

1. 개요

파일:GokturkWarrior.jpg 파일:Tyurki.jpg
당시 돌궐족을 묘사한 유물 암각화, 공통적으로 당시 튀르크족들이 입던 특유의 호복 차림에 중국 사서에서 언급되는 길게 땋은 머리칼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552년부터 745년까지 중앙아시아 동북아시아 북부 스텝 지대(지금의 몽골, 카자흐스탄 초원)에서 활동한 튀르크 민족과 그들이 세운 유목제국의 총칭. 몽골 제국 등장 이전 최대의 유목 제국이며 강력한 통합 국가를 세워 당대의 중국사 한국사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현대 튀르키예 아제르바이잔부터 중앙아시아의 여러 스탄국까지[4] 튀르크 계통 민족국가들에게 영향을 주었다고 보고 있다.

중국의 사서인 《신당서》 <북적>편에는 돌궐의 카간 당나라 사신한테
" 티베트의 자손이고, 거란족 해족은 우리의 노예인데 왜 당나라는 그들한테는 공주를 시집보내면서 우리한테는 안 보내는가?"
라고 화를 내는 내용이 언급된다.

2. 명칭

돌궐(突厥)은 널리 알려져 있는 《주서》(周書)에 의한 음차 표기로, 현대 튀르키예어로는 Göktürk Kağanlığı(괵튀르크 카안르으)이다. 돌궐 문자로 적힌 비문을 직역하면 쾩 튀뤼크(𐰚𐰇𐰚 : 𐱅𐰇𐰼𐰰, Kök Türük) 또는 튀르크(𐱅𐰇𐰼𐰰, Türk) 정도가 된다. '쾩 튀뤼크'는 '신성한 튀르크'라는 뜻이다. #

본 문서에서는 한국에서 가장 널리 쓰이는 '돌궐'이란 말을 사용한다.

3. 역사

3.1. 돌궐 제1제국(동돌궐, 서돌궐)(552~583~630~657)

파일:Gokturk_cav.jpg
돌궐인이 지은 오르혼 비석에는 돌궐의 기원에 관한 이야기가 나타나지 않는다. 하지만 중국 사서에서는 엿볼 수 있는데 《 주서》에는 과거에 존재했다가 이 시점에는 사라진 흉노의 별종(別種)으로 나와 있으며[5] 수서》에는 돌궐의 선조가 아사나씨(阿史那氏)로 원래 평량(平凉, 현 간쑤성 핑량시)의 잡호(雜胡, 호족)였는데 아사나씨의 500호가 유연으로 도망하여 야금업(冶金業, 제철)에 종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색국(塞國, saka로 추정되며 '사카'는 '스키타이'이다.)에서 나왔다고도 한다. saka에서 나왔다는 말과 같이 Tranoid 서양계 유목민으로 본다. 한문 사료에 기록된 돌궐의 신화를 보면 대개 이리를 돌궐의 시조로 삼고 있다.

북사》 등에는 북녘 색국의 아방보(阿諸步) 부락의 17명[6]의 아들 중 한 명이자 이리의 소생인 이질니사도(伊質泥師都, Igil Nisha čor로 추정)가 아방보 부락이 멸망한 뒤 여름의 신 및 겨울의 신과 혼인하여 아들 넷을 낳았는데, 그중 한 명이 흰 기러기로 변했으며, 또 다른 한 명이 검수(劒水)와 아보수(阿輔水) 사이에서 키르기즈를 세웠고, 또 한 명이 처절수(處折水)에서 나라를 세웠다고 한다. 큰아들인 눌도육설(納都六設, Nur Türk shad로 추정)은 발사처절시산(跋斯處折施山)에 살며 추위로부터 여러 부락을 구제해냈다고 전하고 있다. 그의 10명의 아내에게서 나온 아들들은 각자 성(姓)을 가지게 되었고, 눌도육설이 죽자 그들 중 아현설(阿賢設, Ashana shad로 추정)이 부족을 이끌었다는 전설이 있다.

동쪽으로 진출하여 몽골어 계통 언어를 쓰던 유연을 멸망시키고, 북아시아의 패자가 된 돌궐의 투멘(土門)은 '나라(il)를 세운 카간'이란 의미의 일릭 카간(Iliq Qaghan, 이리가한[伊利可汗])을 칭했다. 《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고(구)려 제24대 양원왕 7년인 551년에 경쟁관계인 유연과 우호적인 고구려의 신성 및 백암성을 직접 공격하기도 했는데 고흘 장군의 맹활약으로 실패했다. 553년에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일릭 카간이 이때 붕어하고, 제2대 카간인 아이 카간(Ay Qaghan으로 추정, 아일가한[阿逸可汗])이 즉위했으나 같은 해에 역시 붕어했다.

돌궐 제국은 제3대 무칸 카간(Mukhan Qaghan, 목간가한[木杆可汗], 재위 553~572) 치세에 확고하게 기반이 닦여졌다. 그는 서쪽으로는 이란 사산 왕조와 연합해 에프탈을 멸망시키고, 아무다리야 강을 경계로 국경을 설정해 트란스옥시아나에 발을 들였고, 동쪽으로는 거란을 꺾고, 북쪽의 키르기스를 병합해 새외 모든 나라를 복속시켰다. 이 때 돌궐 제국의 영역은 서쪽으로는 카스피해, 동쪽으로는 고구려와의 인접 지역인 흥안령 산맥까지 이르렀다. 과거의 유목제국 흉노 유연의 서쪽 영역이 파미르 고원을 넘지 못한 것과 비교하면 더욱 서쪽으로 확대된 것이다.

이 시기 중국 북부는 고씨의 북제와 우문씨의 북주가 다투고 있어 신흥제국 돌궐과는 서로 우호관계를 맺으려 했다. 당시 튀르크 또는 몽골계의 선비족이 중국을 정복하고 북제와 북주를 건국했는데, 돌궐은 중국을 공격하고 영토를 넓혀 속국으로 만들었으며, 북제와 북주 등 북중국의 격렬한 분열은 돌궐에게 막대한 이익을 가져다주었다. 돌궐의 제4대 카간이었던 타스파르 카간(Taspar Qaghan, 타발가한[佗鉢可汗], 재위 572~581년)은 조공을 바치는 북주 북제를 두고
"내가 남쪽의 두 아이들을 효순하게만 하면 어찌 물자가 없음을 걱정할 필요가 있겠는가"[7]
라고 할 정도였으니 그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돌궐 대제국은 동•서로 매우 긴 국토였는데[8] 전성기 동•서돌궐의 영역을 모두 합치면 흑해에서 내몽골에 이르는 실로 광활한 영토였다. 이것은 유목민족 특성으로 항상 이동을 하며 살아서 유적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흔히 이때 돌궐 모든 지역이 멸망한 것처럼 카스피 지역 근처까지의 돌궐 영토가 당나라 영토로 표기되는 잘못된 지도들이 있는데, 돌궐이 멸망한 것은 맞으나 돌궐 카간이 전투 중에 사망하여 남은 돌궐인들이 책봉을 받거나 당나라에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경우에 중국 문헌에서는 돌궐 멸망으로 기록한 것이며, 돌궐 카간이 사망하여도 돌궐 영토가 전부 당나라 영토가 된 것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해당 돌궐 지역에는 당나라 유적이 전혀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 돌궐의 가한이 사망하여 돌궐 제국 자체의 위험이 사라졌지만 당나라도 그 먼 지역까지 영토를 둘 수는 없었다. 돌궐은 황제(카간, 가한)가 사망하면 일시적으로 멸망하여 돌궐 부족들이 다른 영토로 이동하는 것이지, 돌궐 전 지역이 멸망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돌궐이 멸망했더라도 길고 긴 돌궐 영토내에 당나라 유적 또한 전혀 발굴되지 않는 것을 알 수 있다. 《유라시아 유목 제국사》를 쓴 르네 그루세의 말에 의하면 만약 그들이 단결할 수만 있었다면, 돌궐 제국은 천하무적이었을 것이라고 단언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이런 영토 한 지점에서 광대한 영토를 다스리기 어렵다고 판단해 나라의 동과 서를 가까운 일족에게 맡겨 셋으로 분할해 지배하는 체계를 갖췄다.

이전의 흉노에서 좌현왕, 우현왕을 뒀던 것과 비슷하지만 돌궐은 동방과 서방 모두 카간의 칭호를 사용했다는 점이 차이가 있다. 당연히 시간이 흐르면서 중앙 권력의 약화로 분권화되었다. 제5대 카간인 으쉬바라 카간(Ïšbara Qağhan, 사발략가한[沙鉢略可汗], 재위 581~587년)이 즉위하면서부터 아사나씨 종실 내부에 권력 다툼이 생겼다. 582년에 일어난 충돌을 직접적인 계기로 해서 583년 돌궐 제국은 동과 서로 분열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사발략가한 문서 참조. 그리고 중국 대륙을 수나라가 통일했지만 수나라 또한 돌궐에 조공하던 상태였다.

3.2. 동돌궐(583~630)

북주 시절 우문태 밑에 있었던 양충의 아들 양견은 돌궐 군대의 협력을 받아 세력을 넓혔고, 훗날 수나라를 건국했다(581). 양견이 황제가 되기 전인 북주 무제 건덕 원년(572) 동돌궐은 장안까지 쳐들어가 백성 60,000명을 포로로 잡아 끌고 갔다. 북주 정제 대상 원년(579) 돌궐이 다시 장안에 들어가 나가질 않자 제국의 실권을 쥐고 있었던 양견은 공녀를 보내기로 하고 달래어 장안에서 철수시켰다. 583년 동•서돌궐의 분열은 수 문제 양견의 이간책까지 겹쳐 격화되었다. 궁지에 몰린 동돌궐의 제5대 사발략가한 수나라에 지원을 요청했고, 587년 그의 동생이었던 제6대 막하가한(재위 587~588)은 동부를 되찾았으나 서돌궐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이후 제7대 도람가한(재위 588~600)을 거쳐 제8대 계민가한(재위 599~609)의 치세때 동돌궐은 서돌궐을 이기기 위해 수나라에 일시적으로 협력했다.

하지만 수나라의 폭군 양제 양광이 고구려와의 성과 없는 대전쟁으로 인해 국력을 소모하고 결국 내란으로 붕괴되자, 그 틈을 노려 수나라의 복속에서 벗어나 제9대 시필가한(재위 609~619)과 제10대 처라가한(재위 619~620)때 다시 세력을 길러 중원의 쟁패전에 개입하며 군벌들을 후원하는 등 위세를 떨쳤다.[9] 시해당한 수 양제의 손자 양정도를 내세워 돌궐의 꼭두각시로서의 수나라의 재건을 시도하기도 했고, 당나라를 세운 당국공 이연도 돌궐의 신하를 칭하는 굴욕을 맛보며 돌궐군의 도움을 받아 장안으로 진격하기도 했다. 이때 돌궐군이 장안을 정복하고 유린했는데 대부분의 장안 귀족들이 끌려가 꽤 긴 시간 동안 장안에 공백이 생길 정도였다. 또한 신생 국가였던 당나라는 돌궐에 복속하여 가한을 섬겼다[10]. 이때 동돌궐은 당나라에 대항하여 동쪽의 고구려와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절치부심하던 당나라는 돌궐을 상대로 외교적인 이간책을 시도했다. 설연타의 반란 진압 실패로 제11대 힐리가한(재위 620~630)으로부터 학대를 받아 불만을 품게 된 그의 조카 돌리와 욱사설이 당나라로 투항해왔고, 설연타를 비롯한 철륵계 부족들도 당 태종 이세민의 사주를 받아 동돌궐로부터 등을 돌렸다. 게다가 수년 동안 큰 눈이 많이 내려 유목하던 가축들이 폐사하는 악재가 겹치자 당나라는 동돌궐의 쇠락하고 분열된 상황을 간파하고, 서기 630년에 대대적으로 지금의 내몽골 지역을 기습 공격해 힐리가한을 생포하고, 일시적으로 멸망시켰다. 이때부터를 당나라의 기미지배기(630~687)라고 한다. 하지만 동돌궐의 가한이 포로로 잡혀 공백기가 생긴 것이지, 광활한 영토 전체가 멸망한 것이 아니었다.

힐리가한이 잡히고, 동돌궐 유민들 대부분이 서돌궐로 이동했지만 일부는 내몽골에 그대로 남았고, 634~645년에 만리장성 근처 10개 주에 이주했다. 그러나 639년 동돌궐 수령 결사솔의 반란을 계기로 다시 원래 살던 곳으로 재이주되었다.

3.3. 서돌궐(583~657)

위와 같이 동돌궐은 북위부터 이어온 선비족의 왕조들과 대립했고, 서돌궐은 돌궐의 발원지인 중앙아시아에서 이란 사산 왕조, 아나톨리아 지역의 동로마 제국 등과 때로는 충돌하고 교역하며 존속했다. 그리고 영역을 넓혀 카스피해 흑해까지 나아가 바다를 접하게 되었다. 그러다 당나라가 중국을 재통일하며, 동돌궐(630), 토욕혼(634~635), 타림 분지 도시국가들, 그리고 서돌궐과 연합한 고창국(639)을 공격했다. 서돌궐은 마침 카를루크의 반란에 시달리며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는데, 당나라는 서돌궐과 652년, 653년, 657년에 전쟁을 벌였다. 657년 마지막 군주였던 사발라가한이 죽어 서돌궐은 일시적으로 멸망하고, 돌궐인들은 동쪽과 서쪽으로 이동했다. 이때 카를룩은 서남쪽 서돌궐 지역으로 이동했다. 서돌궐 가한의 사망으로 인한 멸망으로 서쪽으로 긴 돌궐의 모든 영토가 멸망한 것은 아니어서 언제든지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상태였다. 잘못된 지도로 인해 돌궐 부족들의 지지를 얻지 못한 사발라가한은 죽었지만 서돌궐의 세력은 아직 건재했다. 당나라는 유목민의 지속된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하서 지역(현 감숙성)에 안서도호부를 설치하여 현 동튀르키스탄 지역까지 방어하려 했지만 돌궐의 반란과 공격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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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당의 기미지배기(630~687)

힐리가한의 몰락으로 갑작스럽게 발생한 동돌궐의 붕괴와 이에 따른 대규모 투항으로 인해 당나라는 동돌궐의 투항한 인원들을 중국 내에 머물게 하고 감시하며 통치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동돌궐의 대규모 투항은 당나라 역시 쉽게 감당할 수 없었기에 얼마 지나지 않아 중국 내로 이주시킨 돌궐 인원들을 도로 원래 살던 곳으로 되돌려보낸다.

그러다 설연타가 점차 강성해지자 설연타의 진주비가가한(眞珠毗伽可汗, Ïnanchu bilge qaghan)은 641년에 아들인 대도설(大度設, Tardush shad)을 보내 당조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던 돌궐의 카간인 아사나사마를 공격한다. 처음에는 승리하나 곧 아사나사마를 당나라가 지원하게 되고 이후 몇 달간 전투를 벌인 끝에 결국 설연타 측이 대패한다. 이에 진주비가가한은 당조에 청혼하여 자신의 지위를 인정받으려는 방식으로 노선을 변경하나 당 태종이 이 새로 등장한 설연타 카간의 권위를 흠집 내기 위해 이를 거절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갔으며 이로 인해 유목 세계 내부에서 설연타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나타났다.

한편 아사나사마는 설연타와의 계속되는 대결에 부담감을 느껴 당나라에 돌궐이 다시 황하 이남으로 이주할 수 있게 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이에 당 태종은 신하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를 허락하였다. 이는 당시 당나라가 고구려 원정을 가야 하는 중요한 상황에 있었기에 이들의 전력이 고구려와의 전쟁에서 무엇보다 절실하였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고구려 원정은 실패로 끝났으나[11] 이들은 원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 큰 공을 세웠으며 이후 당나라는 646년에 북벌을 단행한 끝에 설연타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히고 결국 붕괴시키는 데까지 성공한다.

설연타의 패망으로 인해 몽골 초원의 모든 부락에까지 당조의 영향력이 미치게 되자 당 태종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위구르를 비롯한 여러 유목 부락의 추장들에게 항복을 권한다. 이에 각 부족에서 온 사신들은 모두 태종에게 "천지존(天至尊)이 (텡그리) 카간이 되시니 대대로 노복이 되어 섬긴다고 해도 죽어도 한이 없습니다."[12]라고 하면서 당 태종이 새로운 유목 군주로서 과거의 유목 권력이 해주었던 것과 같은 역할을 해줄 것을 요청하였고 태종이 이를 받아들여 몽골 초원의 튀르크계 추장들은 대거 직접 조공에 참여하고 조정에도 들어온다.

결국 당나라는 기존의 돌궐 부락 체제를 당조의 틀 속에 집어넣는 방식의 기미부주(羈縻府州)를 설치하였고 이를 통제하기 위해 몽골 초원에 연연도호부(燕然都護府)를 설치하여 기미지배 체제를 구축하였다. 이 같은 기미부주에 편제된 추장들은 이후 당조의 대외 확장에도 참여하여 서돌궐의 아사나하로 원정과 고구려 원정에도 참여하였다.

허나 679년 4월에 선우도호부 대추(大酋)의 하나였던 아사덕온부와 아사덕봉직이 아사나 출신의 니숙복(泥熟匐, ïdugh beg)을 카간으로 추대하며 당나라에 대한 봉기가 일어나는데 이는 당시 고비 남부에 있던 돌궐의 24개 부락 추장들 모두가 참여한 대규모 봉기로, 이 사건이 바로 당나라의 기미지배 체제 붕괴를 알리는 신호탄이 된다.

3.5. 돌궐 제2제국(687~745)

동쪽의 신라와 서쪽의 토번의 성장세가 둔화되자 북쪽의 옛 동돌궐 지역에서 679년 니숙복, 680년 복념을 카간으로 추대한 대당 반란이 일어났다. 이 두 반란은 진압되었지만 683년 무렵에 쿠틀룩 카간(Kutluk Kağan)[13]이 중심이 되어 무장 봉기가 일어나 당나라에서 독립했는데, 이를 후돌궐 제국 또는 돌궐 제2제국이라고 한다.[14]

부활한 돌궐 제국은 686~687년 시기에 몽골 고원에 있었던 철륵계 부족들을 격파하고, 돌궐인의 성산이었던 외튀켄으로 돌아왔으며, 쿠틀룩 카간의 동생이었던 카프간 카간(Kapgan Kağan, 묵철가한) 시절에 최전성기를 맞아 동쪽으로는 거란을 격파해 흥안령 산맥까지 영역을 확대하고 북쪽으로는 바이칼호 부근의 바이르쿠를 복속시켰으며, 서쪽으로는 예니세이 강 유역의 키르기스 동부의 서돌궐 지역까지 진출했다. 무주 측천무후는 695년 돌궐의 위세를 진정시키기 위해 묵철가한을 책봉했지만 실제론 제어할 힘이 없었고, 오히려 돌궐의 도움을 받는 처지였다. 696년 거란의 이진충이 반란을 일으키자 묵철가한의 도움을 받은 것이다. 대신 묵철가한은 돌궐인들의 반환, 물자의 공급, 당나라 공주를 공녀로 보내라는 요구를 무주에 끈질기게 했고, 이에 측천무후는 굴욕적으로 다 들어줘야 했다. 이렇게 돌궐은 숙적인 무주를 밟고, 다시 동북아시아 스텝(steppe) 지대를 통일하며 강성해졌다.

705년 무측천이 퇴위하고( 신룡정변) 당중종이 복위하자 돌궐을 방어하는 데 급급해졌다. 당중종 시기 돌궐에 시달리는 일이 잦자, 묵철을 잡는 자는 왕에 봉하겠다고까지 선포했다. 707년에는 장인원이 서수항성, 중수항성, 동수항성을 쌓아 돌궐에 대한 전진기지로 삼았고, 710년에는 중종이 토번에 하서구곡 지역을 할양한 뒤 튀르기시 및 키르기스(힐알사) 부족과 연합해 돌궐을 파멸시키려고 했으나 710년에 암살당해 모든 것이 물거품으로 되돌아갔다.

이후 돌궐의 묵철은 힐알사 부족과 튀르기시 부족을 진압했다. 그러나 묵철이 늙고 병들고 나니 폭정을 휘둘렀고, 토쿠즈 오구즈 부족이 반란을 일으키는 등 혼란에 빠지게 되자 당현종 이융기가 이를 틈타 돌궐 공격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다.

그러던 716년, 묵철가한이 바이르쿠의 반란을 진압하고 돌아오다가 패잔병들에게 기습당해 갑작스럽게 죽게 되었고[15], 생전에 후계자로 정해뒀던 뵈귀는 이 사태를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결국 시조 쿠틀룩 카간의 아들인 퀼 테긴(중국명 궐특근)의 활약으로 내분은 진정되었고, 그는 형 빌게 카간(Bilge Kağan, 중국명은 비가가한)을 즉위시켰다.[16] 그러나 이미 돌궐 제2제국의 세력은 저물기 시작한 상황이었다. 741년 이낼 카간(이연가한)이 붕어한 뒤 6년 동안 지배층의 내분으로 여러 명의 카간이 살해되고, 폐위당하는 막장 상황에 접어들었다. 이를 틈타 당나라의 삭방절도사였던 왕충사가 막북에서 무력시위를 벌였다. 744년에 복속해있었던 위구르, 바스밀, 카를룩 등 세 부족 연합의 반란과 왕충사 휘하 당나라 군대의 공격으로[17] 외튀켄이 함락당하면서 사실상 멸망했다. 그리고 얼마안가 위구르 제국이 성립되었다.

4. 동돌궐 역대 가한

대수 왕호 재위기간
1대 이리가한 토문 552 ~ 553
2대 을식기가한/ 아일가한 과라 553
3대 목간가한 사근 553 ~ 572
4대 타발가한 지두 572 ~ 581
5대 사발략가한 섭도 581 ~ 587
6대 막하가한 처라후 587 ~ 588
7대 힐가시다나도람가한 옹우려 588 ~ 600
8대 계민가한 염간 599 ~ 609
9대 시필가한 돌길세 609 ~ 619
10대 처라가한 사리불설 619 ~ 620
11대 힐리가한 막하돌설 620 ~ 630

5. 돌궐 제2제국 역대 가한

대수 왕호 재위기간
1대 힐질리시가한 토둔철, 골돌록 682 ~ 691
2대 묵철가한 묵철 691 ~ 716
3대 부구가한 복구, 양아지 716
4대 비가가한 묵극련, 골출록 716 ~ 734
5대 이연가한 ? 734 ~ 741
6대 등리가한 비가골돌록 741 ~ 742
7대 판궐특근 ? 742
8대 오소미시가한 오소미시특근 742 ~ 745
9대 백미가한 백미특근골롱복 745

6. 돌궐 비문

몽골의 오르혼 강 유역에는 8세기 돌궐 제2제국 시기에 세워진 석비(石碑)들이 있다. 이들 금석문이 19세기에 해독되어 돌궐인들이 고유한 표음문자 체계를 가지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돌궐문자).

20세기 중후반에는 Talât Tekin 등의 언어학자들이 돌궐어의 문법을 복원하여 돌궐어의 동명사 존재 등을 밝혔으며, 튀르키예 정부의 주도로 비문 내용 전체를 복원하려는 목표의 프로젝트가 2000년부터 현지에서 진행 중이다.

해독된 내용 중 주요한 것들은 다음과 같다.

7. 현대 튀르키예와의 관계

튀르키예인들은 자신들의 역사를 중앙아시아에서부터 만주까지 호령하던 돌궐에서부터 기원한다고 말한다. 튀르키예 내 고고학계의 주장에 따르면, 돌궐은 중앙아시아에서 발흥한 장두형 인도유럽어족이었는데, 동쪽으로 이동하여 동북아시아의 스텝(steppe) 지역(現 몽골 초원)에 진출했고, 돌궐 동•서분열(583) 이후 서돌궐이 쇠락하자 하자르 카간국(Khazars Kaganate)이 독립하여 볼가 강을 넘어 현재 러시아 남부와 키이우 지역까지 영토를 넓히게 된다. 하자르 카간국의 장군이자 오우즈(투르크멘) 계열의 벡[18]이었던 셀주크(Seljuqs)는 950년경 아랄해 북쪽에서 중앙아시아의 호라산 지역으로 이주했고, 그곳에서 이슬람으로 개종하여 셀주크 왕조를 건국한 후 중앙아시아에서부터 투르크메니스탄, 이란, 이라크, 시리아를 거쳐 더 서쪽으로 이동하여 아나톨리아(현재 터키공화국) 반도까지 영토를 넓혔다는 것이다.

돌궐을 자국 인공위성의 이름으로 사용 중이고, 튀르키예 연구가로 유명한 이희수 교수 역시 《터키사》에서 언급하길 튀르키예의 국부격인 아타튀르크는 돌궐이 튀르키예의 조상이라고 강조하며, 559년 돌궐이 중국을 정복한 걸 기념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1959년 아드난 멘데레스 총리 체제하에서도 튀르키예는 돌궐 승전 1400주년 기념식을 가졌다고 서술했다. 지금도 꾸준히 유적 발굴 작업을 진행 중이다. 튀르키예 정부의 돌궐 유적 발굴 관련 기사. #
다만 고대 국가인 돌궐과 오늘날의 튀르키예 사이에 긴 시대적, 지리적 거리가 있는 만큼, 튀르키예만이 돌궐인들의 후예인 것은 아니다. 돌궐인의 후손들 가운데 가장 서쪽까지 간 한 일파가 현대 튀르키예인인 것이다. 튀르키예의 국호나 국력이 튀르크 계통 중 가장 두드러지기 때문에 마치 튀르키예가 곧 튀르크라는 대중적인 인식이 있을 뿐, 튀르크인은 중앙아시아부터 캅카스에 걸쳐 널리 분포한다. 자치구를 가지고 있는 위구르족이나 시베리아 지역까지 튀르크의 후예가 살고 있다.

튀르크인이 본래 백인종이라는 주장은 세계 역사학과 고고학의 주류가 아닌 단지 현재 튀르키예 고고학계의 주장일 뿐이다. 튀르키예 고고학계는 튀르크인이 장두형 인도유럽어족이 아니라 유로피드 투라니드 계통의 단두형 동아시아계과 백인종의 혼혈이라고 주장한다. 두만 선우와 묵특 선우 이전부터 흉노 제국 이래 기원전부터 북아시아의 몽골 고원과 고비 사막을 주요한 터전으로 삼고 살아가던 튀르크계 유목민들이 돌궐 제2제국의 멸망과 9세기 위구르 제국의 소멸 이후 분산되기 시작했다. 오우즈 튀르크의 서남아시아 이주 이래로 튀르크인의 주도하에 수많은 튀르크계 국가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하면서 현대 튀르키예인은 국가 창건의 주도 세력이었던 튀르크계 외에 이란계, 그리스계 등이 1,000여 년 동안의 혼혈로 형성된 복합민족이고, 유전적으로 백인종 특히 인도유럽어족의 피가 많이 섞인 까닭에 현대 튀르키예 학자들은 셀주크 제국과 오스만 제국의 창건 세력으로 튀르키예 건국의 주도 민족이었던 튀르크인을 지금의 자신들의 인종적 정체성과 일치시키려고 튀르크인이 마치 백인종의 한 갈래인 마냥 주장하지만 세계 역사학과 고고학의 주류는 원시 튀르크인이 분명 몽골로이드에 속하는 것으로 본다. 스텝 유목민족의 역사에 대한 최고 권위자인 르네 그루쎄도 이런 사실을 분명히 하고 있고, 이러한 주류 고고학 및 역사학의 입장은 변한 것이 없다.[19][20] 단지 현재 백인종에 더 가까운 외모를 가진 튀르키예인들이 자신들의 선조로 인식하는 튀르크인을 단두 백인종으로 견강부회하여 자기 정당화를 하는 것일 뿐이다. 한 눈에 보아도 흉노인과 돌궐인이 백인종인 아리안족이라는 주장은 당치도 않은 궤설일 뿐이다. 한국 외국어대 출신으로 튀르키예에서 유학하고, 그들의 고고학과 역사학계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며 터키에서 이슬람으로 개종까지 하며 그들의 이론을 답습하는 이희수 교수가 그런 주장을 내세우는 것은 이상할 게 없지만 객관성이나 학문적 당위성은 불충분하다.

2000년대 이후 고고학과 유전학의 발전으로 튀르키예가 돌궐로부터 이어져 왔다는 튀르키예인들의 오랜 믿음은 크게 흔들리고 있다. 최근 여러 연구 결과에 따르면, 과거 몽골 고원과 중앙아시아에 있었던 돌궐인의 피가 현재 튀르키예인들의 피에 흐르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니지만 그 비율은 미미하다. 현대 튀르키예인들의 유전자의 대부분은 이웃한 남유럽 지중해 인종 또는 인도이란인 계열이다.

그 이유는 위에서 이미 서술했듯이 몽골로이드 계열인 돌궐 즉 쾩튀르크가 멸망한 후 그 일부가 서쪽으로 이동을 거듭하여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한 뒤 1,000여 년의 시간 동안 원주민인 이란계나 그리스계, 코카서스계와 혼혈이 이루어져 왔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현대 그리스인도 2,500여 년 전에 고대 문명을 건설한 고대 그리스인과는 확연히 다른 유전자를 가졌고, 오히려 튀르키예인들과 흡사한 인종적 동일성을 가지고 있는데 그 이유 또한 위에 상술한 것과 같다.

물론 민족이란 건 단순히 혈통만으로 성립하는 것이 아닌 문화, 언어, 자의식 등이 종합되어 형성되는 것이므로, 튀르키예라는 국가 자체는 거슬러 올라가면 오우즈 튀르크족이 세운 국가를 모체로 하고 있기에 돌궐을 근본으로 보는 튀르키예의 스탠스는 다소 변화는 있을지언정 지속적으로 유지될 가능성이 높다.[21]

8. 더 읽어볼만한 글

정재훈 저, 《돌궐 유목제국사 - 아사나 권력의 형성과 발전, 그리고 소멸》, 사계절, 2016 : 고대 유목제국사의 권위자인 경상국립대 사학과 정재훈 교수가 쓴 552년부터 745년까지의 돌궐 유목제국사에 관한 개론서이다.

9. 현대

파일:Lenguas_túrquicas.png
남동 튀르크
남서 튀르크
북동 튀르크
북서 튀르크
아르구(칼라지)
오구르 튀르크(추바시)
돌궐(튀르크)은 언어적 계통에 따라 다음과 같이 분류된다. 볼드체로 표시된 것은 현재 자신들의 국가를 가지고 있는 집단이고, † 표시가 있는 것은 현재 사멸한 종족이다.

10. 매체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캐먼치킨 개파이가 돌궐 출신이라고 언급된다.

역시 드라마인 < 대조영>에도 등장한다. 여기서는 대조영과 직접 대립하거나 협력하거나 하는 제3의 세력으로서의 포지션이다.

11. 관련항목


[1] 𐰴𐰜, 또는 𐰚𐰇𐰚(kök)은 '푸른', 혹은 '신성한'이라는 뜻이다. 현대 튀르키예에서는 셀주크, 오스만 등과 구분짓기 위해 '뿌리의 튀르크'라는 뜻의 괵튀르크 카간국(Göktürk Kağanlığı)이라 부른다. [2] 돌궐 제1제국 기준 전성기의 영역. <빌게 카간 비문>에 나오는 "앞(東)으로는 카드르칸 의쉬{Qadɨrqan yɨš, 대흥안령(大興安嶺) 산맥}까지, 뒤(西)로는 테미르 카프그{Temir Qapɨğ, 철문(鐵門)}까지 나아갔다고 한다"라는 기록에 의거한다. 서돌궐이 멸망할 때는 이미 카스피해 영토는 존재하지 않았고, 서돌궐이 멸망할 때 남아 있던 영토는 동투르키스탄의 동부 극히 일부였다. [3] 외튀켄 산지는 아직 그 명확한 소재지가 밝혀지지 않았는데, 현재의 항가이 산맥 북사면의 어딘가로 추정되고 있다. 참고로 이곳에는 후대 위구르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발가순, 몽골 제국의 수도였던 카라코룸, 돌궐 제2제국의 군주 빌게 카간( 비가가한)과 그의 동생 퀼 테긴( 궐특근)의 제사 유적 및 비문이 있는 호쇼 차이담 등이 분포하고 있는 몽골 초원의 가장 비옥한 중심지이다. [4] 타지키스탄 이란계 국가라서 제외된다. [5] 《주서》에서는 '귀방'과 '철륵'이 있었던 위치가 언급되는데 '돌궐'이라는 단어는 아니다. 훨씬 옛날에 있었던 귀방과 철륵이 과연 돌궐과 같은 뜻인가에는 의문점이 많다. 또한 《주서》의 철륵이 돌궐과 상관없는 '키르키스'를 뜻한다고 주장하는데 그 이유는 철륵이 위치한 곳이 예니세이 강 상류의 바이칼 호수 서쪽이며, 키르기스가 있었던 위치와 일치하기 때문이다. [6] 혹은 70명이라고도 하는데, 둘 다 돌궐이 성스럽게 여겼던 숫자 7이 반영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7] 주서》 권50 <열전>42 -이역전-. [8] 사실 이 동네 유목제국들이 과거 흉노부터 후대의 몽골 제국까지 대부분 남북보다 동서로 훨씬 긴 편이다. 남북으로 가면 갈수록 환경이 크게 달라지는데 위도대가 비슷한 동서는 비슷한 스텝 자연환경이 이어지므로 유목민들은 대부분 동서로 확장하는 게 더 편했다. [9] 이때 돌궐은 말을 타고 활을 쏘는 기마궁수가 무려 400,000명이나 되었을 만큼 그 힘이 강성했고, 두건덕 같은 중원의 군벌들은 돌궐의 힘을 빌려 황제가 되어 보려는 속셈에서 돌궐에 앞다투어 사신들을 보냈는데, 그들의 수가 하도 많아서 길가에 돌궐로 가거나 중원으로 돌아오는 사신들의 행렬이 서로 마주칠 정도였다고 한다. [10] 사실 초창기의 당나라는 힘이 약하여 스스로를 가리켜 돌궐에 대해 신하라고 칭했다. 이때의 정황을 가리켜 역사 기록에는 "고조(이연)가 즉위하면서 전후로 상사(賞賜)를 내린 것이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시필(始畢)칸은 스스로 공이 크다고 생각하여 더욱 오만해졌다. 매번 사자를 장안으로 보낼 때마다, 매우 무례하였다. 고조는 중원이 아직 안정되지 않았다고 생각하여 매번 용인해주었다"라고 언급되었다 # [11] 고구려 원정 당시 설연타는 고구려의 편에 서서 당나라의 변경을 공격한다. [12] 『자치통감』 권 198 태종 정관(貞觀) 20년(646) [13] 혹은 일테리시 카간(İlteriş Kağan) [14] 이 독립 과정에서 고문간이 지휘하는 고구려 유민들이 돌궐에 협력했다는 기록이 있다. [15] 그 수급은 당나라의 수도인 장안으로 보내졌다. [16] 이 퀼 테긴의 업적을 한문과 고대 튀르크 문자로 기록한 <오르콘 비문>이 19세기경 러시아인에 의해 발견되어 서양에 소개되고 유명해졌다. [17] 여기서 왕충사는 이 세 부족을 초유했고, 자신은 당나라군을 이끌고, 돌궐을 토벌하여 그 좌부에 소속된 아파달간의 11부락을 공격해 격파했으나 다만 그 우부만은 격파하지 못했다. [18] bey,بك‎ Beik는 튀르키예계의 '수장'을 뜻한다. [19] 137 ancient human genomes from across the Eurasian steppes [20] Populations dynamics in Northern Eurasian forests: a long-term perspective from Northeast Asia [21] 이를테면 현 중국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한족도 중원에 여러 종족이 난입하며 형성되다 보니 북중국과 남중국이 다소 차이가 나게 될 정도로 혈통상으론 다채롭고, 인도는 한술 더 떠서 아예 언어, 인종 양쪽으로 다채로운 판인데도 힌두교를 매개체로 하여 인도인을 형성하고 있다. 미국이나 캐나다는 현대 다민족, 다문화 국가의 대표적인 예시이다. [22] 이쪽은 튀르크 계열이라기보다는 선비 계열인 유연족의 일파라는 설이 현재 대세이다. [23] 중국은 투르키스탄을 돌궐, 동투르키스탄을 동돌궐이라고 한다. 정작 동돌궐은 현 몽골에 있었고 동투르키스탄은 서돌궐의 일부 지역었단 게 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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