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항적과 같은 이는 이를 가질 수 없었다.
범증을 얻고도 쓸 수 없었고,
진평을 얻고도 쓸 수 없었고,
한신을 얻고도 쓸 수 없어, 모두 원망하여 엎어져서 버리고 떠나게 했고, 단지 필부의 하찮은 용기로, 도전하는 중에 자웅을 가리고자 해, 힘과 세력이 곤궁해지는 지경에 이르렀는데도, 오히려 장차 달려나가
한의 장수 한 두 명을 죽여, 사지에 할 힘이 있음을 보였으니, 이것이 초가 천하를 잃은 까닭이다. 그런즉 항적이 망할 때, 또한 어찌 천하를 원망할 수 있겠는가?"
범준(范浚)의 향계집(香溪集)
범준(范浚)의 향계집(香溪集)
항우의 평가를 정리한 문서.
2. 군사적 능력
초(楚)의 전사들은 한 명이 열 명을 당해내지 못하는 사람이 없었고, 부르짖는 소리는 천지(天地)를 흔들었으며, 제후들의 군사들은 서로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이에 이미 진(秦)의 군사를 깨뜨리고 항우(項羽)는 제후들의 장수들을 불러 보았는데, 원문(轅門)으로 들어오는 제후들의 장수들 중 무릎으로 기어서 앞으로 나아가지 않는 사람이 없었고, 감히 올려다보는 사람도 없었다.
《사기(史記)》항우본기(項羽本紀), 항우의 지휘 능력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장면이다.
항우에게서 유래된
패왕(覇王)은
역발산기개세와 더불어 항우를 상징하는 표현이다. 현대에 이르면서 패왕이라는 칭호는 너무나 강해서 힘으로 천하를 평정하는 최강의 인물에게 붙는 경우가 많은데, 이 패(覇)라는 칭호를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 바로 항우다.[1][2]《사기(史記)》항우본기(項羽本紀), 항우의 지휘 능력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장면이다.
항우 이전까지만 해도 패(覇)라는 단어는 춘추오패 같이 천자를 모시는 제후 중에서 돋보이는 능력을 바탕으로 제후들의 회맹을 주도하는 대표자에게 주어지는 칭호였다. 이 패자들은 지도자로서 능력을 선보였기 때문에 패자가 된 것이지, 항우처럼 군사적 능력과 힘에서 나오는 카리스마로 패자가 된 것이 아니었다. 물론 '패(覇)'라는 단어에 힘이나 무력과 관련된 뉘앙스도 없었다. 현대로 따지면 의장이나 회장 같은 느낌의 단어에 가까운 단어였다.[3] 다시 말해, 패왕(覇王)이라는 단어가 무력과 강함을 의미하게 된 시초가 바로 항우인 것. 이 패왕(覇王)을 쓴 항우가 역사의 패(敗)배자임에도 불구하고 2,200년이 넘게 지난 현재까지 최강을 상징하는 칭호로써 자리매김한 것을 보면 항우가 그 당시 얼마나 강렬한 인상을 남겼는지 알 수 있다.
근, 현대전과는 다르게 항우가 활약하던 시대는 화기 등의 발명이 아예 없었던 완전한 냉병기의 시대였기에, 군을 지휘하는 장군의 역량과 용맹이 군 전체의 사기와 전투의 승패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가장 대표적인 예시가 가우가멜라 전투, 거록대전 등. 이러한 시대에 압도적인 전략적 불리함 속에서도 거록대전, 팽성대전, 고릉 전투처럼 오히려 상대방을 항상 궤멸시켜 버렸던 인물이 바로 항우다. 오죽하면 한나라 군사들은 항우가 온다는 소식만 들어도 다 이긴 전투를 내팽개치고 도망쳤다고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다.[4]
그 일례로 거록대전, 전영을 물리친 전투, 팽성대전, 고릉 전투, 심지어 마지막 해하 전투조차도 측면 부대가 움직이기 전까지 항우가 이끄는 근위부대는 항상 한군을 몰아붙였다. 전술적 영역에서 그는 최고이자, 최강의 지휘관 중 한 명이었으며, 그 천부적인 군사적 능력으로 거병 후 고작 2년 만에 진의 멸망을 확정지으며 유방을 포함한 모든 제후들을 무릎 꿇리고 중국의 패자로 군림했다. 인류 역사를 통틀어도 이토록 단기간에 항우만큼 무지막지한 전공을 쌓아올린 인물은 찾아보기 힘들다.
역사서인 사기에는 항우가 엄청난 패기와 카리스마로 군중을 제압하고 병권을 가져가거나, 항우의 패기에 제후들이 서로 무서워서 움직이지도 못했다는 이야기가 자주 나오며[5], 전투에서는 그야말로 만인지적이었고, 과거나 지금이나 항우를 표현하는 가장 대표적인 표현 3가지가 패왕, 역발산기개세, 만인지적[6]이다. 해하 전투에서는 항우가 큰 소리를 지르며 돌진하니, 모든 적군들이 놀라서 엎드리며 길을 터주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더군다나 이 때의 상대가 평범한 보병들이었던 것도 아니고, 고작 항우와 그 부하 28기를 잡기 위해 출전한 용장 관영과 정예 5천 기병 및 다수의 장수들을 상대로 이루어낸 것이라는 점에서 이때 보여준 항우의 무위는 그야말로 압도적이다. 항우가 꾸짖으니 장수와 말이 놀라서 몇 km를 달아났다고.
더군다나 오강에 이르러서 말에 타지도 않고, 항우를 추격하던 5천의 기병 부대와 최후의 결전을 벌였다고 나오는데, 항우 혼자서 무려 수백 명의 기병을 죽여버렸다고 나온다. 전술, 전략적 판단과 군사 지휘력 및 통솔 능력 또한 고대 아시아사 최고라 평가받을 정도인데, 아무리 초한전쟁 당시에 훈련받지 못한 농민군이 다수였다고는 하나 이는 항우의 초군도 마찬가지였고[7], 그렇기에 항우의 지휘력과 통솔력이 빛을 발한 것으로 보인다.
병력의 질은 서로 비슷한데, 항우가 지휘하는 군대는 패기가 하늘을 찌르는 일당백의 용사들이 되는 반면 적 병사들은 추풍낙엽처럼 쓸려나가기만 했으니 항우의 무력은 물론이거니와 전투 지휘 능력 또한 대단했다는 방증이 된다. 특히 승리에 도취해 방심한 60만 대군을 상대로 고작 3만의 정예 군사로 정면에서 맞붙어 초토화 시키고 별다른 피해 없이 적군 30만 명을 살육하는 경우는 훗날 항우의 괴력과 군사적 능력이 어느 정도인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전투가 된다.
또한 무력과 통솔력 및 카리스마에 묻혀서 조명이 잘 안 되는 사실인데, 항우는 전쟁과 직접적으로 관련된 영역의 전술적 능력 또한 최고의 자리에 위치하고 있었다. 거록 대전에서 적의 보급을 끊거나 한신보다도 먼저 병법에서 배수의 원리를 응용하는 등, 명장이라 일컬어지는 다른 장수들보다 뛰어나면 뛰어났지 결코 아래가 아니었다. 애초에 항우가 힘에만 의존했다면 유방, 장한, 한신, 팽월 같은 당대 최고의 명장들을 상대로 붙을 때마다 박살내진 못했을 것이다. 심지어 저돌적인 이미지와 다르게 전략적 후퇴 판단 역시 완벽에 가까운 수준이다. 수도 팽성이 점령당하자 지체 없이 원정군에서 정예만 추려서 구원군을 편성하고, 후방에서 편성한 전력을 거의 손실하지 않고 팽성으로 왔다는 사실만으로도 항우의 전술적 능력 및 판단력에 대해서는 이견을 제시할 수 없다.
특이한 것은 곽거병과 함께 중국사에 흔치 않은 기동전 스타일의 지휘관이란 것이다.[8] 팽성대전에서 먼 거리를 신속하게 달려와 분산된 적을 기습해 각개 격파하는 전술에서 볼 수 있듯이, 기동성을 이용해서 적의 취약한 지점을 찔러 돌파한 뒤 그 여파로 혼란에 빠진 적을 분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제나라 원정이나 유방과의 대치 상황에서도 최전선과 후방을 오가며 전투를 벌이는 모습을 보면,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은 의심의 여지조차 없다. 상식적으로 따져도 오랜 행군에 지치고 공격하는 쪽이 든든한 요새에 의지해서 지키는 쪽보다 더 열세인 것은 당연한데, 항우는 병력의 일부만 추려 가서 광활한 중국 땅을 이리 저리 내달려서는 숨 쉴 틈도 없이 서쪽 성을 쳐부수고, 동쪽으로 다시 마구 달려와서는 또 쳐부쉈다. 단 한달 즈음 되는 동안 형양과 팽성을 왕복하며 그 와중에 전투까지 벌이는 식으로 무슨 순간이동을 하는 수준으로 움직이는데, 결국 유방 - 팽월의 기각지세를 돌파하지 못했기 때문에 똥개 훈련이라는 식의 조롱을 받는 것이지 이 기동전만 놓고 보면 항우의 전투 능력은 경이롭다는 말 밖에 안 나온다.
전투력 외에도 정말 기괴한 사항이 있는데, 식량이 거의 끊어지다시피 해도 절대로 자멸하지 않는다. 거록대전 때 식량을 거의 전부 불태워버리고도 이후 신안대학살까지 반년을 넘게 버티더니 그 상태로 관중까지 진격했고[9], 팽월에 의해 보급로가 아무리 파괴되어도 무려 몇 년 간이나 도통 무너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삼국지의 관우를 포함한 여러 역사적 사례에서 보듯이, 전쟁에서의 보급은 한번만 잘못되도 그대로 자멸하거나 혹은 매우 큰 패배로 이어질 만큼 중요한 사항인데,[10] 항우는 어느 누구보다 보급로 공격을 많이 받았고, 식량이 아예 끊어진 적도 제법 있었는데, 보통이면 병사들이 쫄쫄 굶고 모랄빵 나서 관광 당하는게 정상인데도 식량이나 보급 때문에 전투에서 밀리거나 졌다는 기록이 아예 없다.
이상과 같이 항우의 전술적 판단력과 군사 지휘 능력은 기나긴 중국 전사(戰史)에서도 맞수가 없을 정도로 막강했음은 분명하다. 야전 지휘관으로서의 능력이나 전공 및 일신의 무력으로만 본다면 인류 역사를 통틀어도 적수를 찾기 어려운 수준이다. 그나마 콘스탄티누스 1세나 리처드 1세 정도가 견줄 만하다.[11]
결과적으로, 항우는 자신이 직접 군사를 이끈 전술적 차원의 싸움에서는 해하 전투 이전까지 단 한 번도 패배하지 않았다. 항우가 정치적으로 실책만 반복하면서도 그렇게나 버틸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그의 군사적 능력 덕분이다.[12]
다만 자주 언급되듯 항우는 정치적 실책, 인사상의 실책이 너무 많았고 특히 정치적 능력이 심히 결여되었다 보니 전술적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좋지만 전략적 식견이 너무 없다로 평가될 수 밖에 없는 인물이기도 했다. 전술적 능력이야 일개 개인의 무력이나 용병술로도 충분히 되지만 전략적 단계로 가면 정치적인 역학 관계나 앞날을 내다보는 식견도 필요한데, 항우의 능력 중 좋은 게 딱 무력과 용병술 수준이니 전술가라면 모를까 전략가라고는 할 수 없었다. 어떻게 보면 장수로서의 능력도 한쪽은 충분한데, 한쪽은 텅텅 빈 반쪽짜리 수준이다. 달리 말하자면 최고 지휘관으로는 부족하고 선봉이나 일선 지휘관이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13]
3. 정치적 능력
人言
楚人沐猴而冠, 果然
사람들이 초나라 인간들은 원숭이가 갓을 쓰며 사람 행세를 하는 꼴이라고 하던데, 과연 그렇군.
모 한나라 유생, 금의환향하겠다며 중국 최대의 요충지인 관중을 버리고 고향인 서초로 천도하여 화려하게 돌아가겠다며 고집하는 항우를 원숭이라고 비꼰말. 이후 누군가의 밀고를 통해 이 말을 들은 항우는 처음에는 뭐라 하는지도 몰랐다가 이때는 항우를 섬기던 문관 진평이 뜻을 알려주자 크게 분노하여 한생을 기름에 삶아 죽여버린다.
사람들이 초나라 인간들은 원숭이가 갓을 쓰며 사람 행세를 하는 꼴이라고 하던데, 과연 그렇군.
모 한나라 유생, 금의환향하겠다며 중국 최대의 요충지인 관중을 버리고 고향인 서초로 천도하여 화려하게 돌아가겠다며 고집하는 항우를 원숭이라고 비꼰말. 이후 누군가의 밀고를 통해 이 말을 들은 항우는 처음에는 뭐라 하는지도 몰랐다가 이때는 항우를 섬기던 문관 진평이 뜻을 알려주자 크게 분노하여 한생을 기름에 삶아 죽여버린다.
하지만 항우의 정치적 판단력은 최악이었다. 2년 만에 패기와[14] 군사적 능력만으로 제패한 중국 땅을, 4년 만에 정치적 실책으로 잃었을 정도. 이런 정치 및 외교에 대한 무지는 항우 본인의 말도 안 되는 전투력을 필부지용으로 만들었고, 전쟁은 아무리 만인지적이라도 혼자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진리의 또 다른 예시로 남고 말았다.
새로운 중원 대륙의 패자가 된 이후 분봉 문제와 한나라 왕을 죽이는 등 괜히 척을 져서 싸우지 않아도 될 세력을 적으로 만들어 버리거나[15] 통일 이전의 봉건주의로 돌아가버렸으며, 잠재적인 적들을 줄인답시고 신안대학살은 물론이고 죄가 없던 민초들을 학살하고 다닌 끝에 백성들한테 증오받아 민심을 크게 잃었으며, 아군을 늘려도 모자랄 판에 항우의 질투심과 단순한 성격으로 인해 반간계에 홀라당 넘어가 항우군의 최고 브레인이자 두뇌역할, 개국공신인 범증마저 내칠 정도였다. 이렇다보니 한신과 진평, 영포, 팽월 등등 천하의 인재들이 끝내는 항우를 버리고 줄줄이 적인 유방 측에 붙어버리게 만드는 등, 항우가 초한 대전 내내 보여주는 행보는 과연 그에게 대전략이라는 개념이 있었는지 의문이 들게 할 정도다. 정치적 능력과 연계된 전략적 개념에서 항우는 어이를 상실할 정도로 무능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라이벌인 유방은 최대 보급로인 오창과 가까운 형양을 중심으로 한 우주방어 라인을 만든 뒤 여러 위기가 있었으나 어떻게든 항우에게 맞서 지구전을 펼치는 동안, 한신이 이끄는 별동대를 보내 위나라를 비롯한 북방을 평정하고 여러 제후들을 하나하나 끌어모은 뒤 제후들에게 지시를 내려 사방팔방 공격을 통한 소모전과 팽월을 통해 후방을 공격해 보급을 차단시켜 항우의 전쟁 수행 능력 쪽을 서서히 고갈시킨다는, 시대를 한참 앞서간 총력전을 실행한 것에 비하면 항우는 "일단 눈 앞에 적이 있다면 때려 부수고 보자."는 전쟁이라고 보기 힘든 전투의 관점으로 전쟁을 벌였다.
심지어 그 유방 하나에게만 제대로 집중하는 것조차 하지 못했는데, 유방이 자신을 지킬 군대를 배치하고 여유분을 한신에게 넘겨줘 북방을 평정하는 등 분산시켜 움직인 반면 항우는 타인을 잘 믿지 못해서 자신에게만 세력을 집중시킨 뒤 맹공을 펼쳤는데 당연히 부대 소집 후 어택하는 동안 후방이 공백 상태가 되는건 당연했고 이렇게 텅빈 후미를 치러 온 팽월을 제때 막지 못해 식량과 무기 보급 문제로 유방을 잡을려 할 때쯤 보급이 고갈나서 몇번이고 본진과 최전방을 오가야 했기 때문이고 후반에는 상술한 대로 한신이 유방 휘하에 들어가는 것을 막지 않았던 것이 점점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커진 것이다.[16]
또한 유방은 곡창 지대인 관중과 파촉에서의 지원은 물론 형양 북쪽 오창이라는 교통의 요지 지역까지 확보한 뒤 초한쟁패기가 끝날 때까지 오창은 24시간 군량을 실은 마차가 지나갈 정도로 식량 보급을 원활히 한데 반해 항우는 지역 자체는 식량 보급이 문제있는게 아니었음에도 끝까지 팽월 하나에게 발목이 잡혀 식량 문제에서 완전히 벗어나는 일은 없었다.[17] 결국 초나라라는 국가는 총력전에서 뒤떨어지고 항우가 없는 곳에선 패배만을 거듭하며 피해가 누적된 끝에 결국 붕괴하고 말았다.
종합적으로 볼 때 필부지용이라는 말의 산증인이자 거시적인 안목 따위는 찾아볼 수 없는, 군벌로서는 뛰어나지만 천자로서는 자격 미달이었던 인물이 항우다.
3.1. 정치적 오판
유방으로부터 관중을 빼앗은 뒤 여러 부하들로부터 관중에 대한 전략적인 이점[18][19]의 설명을 듣고도 관중을 재건시켜 기반을 탄탄히 하는 것보다 자신이 불태운 관중을 버리고 진을 멸망시켰다는 것을 고향에 자랑하기 위해 천혜의 지형 관중을 버리고 팽성을 도읍으로 삼아 되돌아가는 모습은 항우의 정치적 안목 부재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일화다.[20][21]사실 관중과 함양을 버린 이유부터 항우 본인 때문이었다. 이곳으로 들어오면서 진왕 영자영을 참살하고, 진군 20만을 먹여살리기 어렵고 다른 세력에게 붙는 걸 막겠다며 생매장해 묻어버린 신안대학살로 인해 관중 땅의 수많은 백성들을 적으로 돌렸으며, 그것도 모자라 항우는 함양을 약탈하고 불태워 장차 도읍으로 삼기는 커녕 자기 손으로 박살을 내버려 관중에 정착한다는 선택지를 없앴다. 애시당초에 그에게는 정치적 고려나 식견이 없었단 걸 보여준다.[22] 반면 라이벌 유방은 함양에 입성한 후 장량과 소하 등 책사들의 진언에 귀를 기울여 약탈을 엄히 금하고 가혹한 진나라의 법에 시달리던 진의 민중들을 간소화 된 법으로 통제하며 민심을 샀다. 또한 소하는 진나라의 승상부와 어사부를 비롯한 주요 행정 기관들의 각종 지도와 행정 문서 및 도감, 자료를 손에 넣어 장차 천하 공략에 필요할 각종 지리, 행정 자료, 통계 등을 활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3.2. 부하 기용
게다가 자신의 심복에 대해서도 제대로 신용하거나 받아들이지 않았고 결국 진평에게 제대로 이용당해 유일한 책사이자 대외적으로라도 양아버지로 칭하기도 했던 범증을 스스로 버리기도 했다.다만 이건 범증의 문제도 어느 정도 있는데, 범증은 성격이 상당히 괴팍하고 고집스러워서 홍문연 때 반드시 유방을 죽이라고 몇번이나 우겼고 항우가 싫다함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밀어붙이려 했다. 물론 범증의 선구안이 결국 맞긴 했지만 이 당시 항우와 유방은 후한 말기의 원소와 조조 같이 압도적인 세력 차이를 가지고 역학 관계가 굳어진 상태라 여기서 암습까지 해서 스스로 굽히고 들어오는 유방을 죽여버리면 민심과 유력자들의 신용을 잃는 건 마찬가지였다. 거기에 이때 암살이 결국 실패하자 항우의 면전에 대놓고 "너의 성격이 그렇게 아이 같으니 결국 유방한테 잡혀 죽을 거다."라고 말하기도 했을 정도로 평소에 자기 역정을 못참는 인물이었다. 유방과 장량이 서로 자신을 굽히고 인정해서 별 불화가 없던 것과 정반대로 범증과 항우 둘 다 자기 성깔을 전혀 억제하지 않았던 게 문제였다. 진평은 원래 있던 갈등을 벌렸을 뿐이었다. 하지만 설령 그렇다고는 해도 이제까지 아부라 부르며 사실상 항우 진영의 브레인 역할을 하고, 명분을 제공해 주었던 범증을 고작 진평의 사소한 술수만으로 의심해서 결국 분사하게 만드는 건 아무리 범증의 성격이 괴팍하다고 해도 항우는 한술 더 떴다. 무엇보다 인재를 이런 식으로 대접하면 그렇잖아도 없던 인재가 더 떨어져나갈 것은 불문가지다. 그리고 범증의 성격이 괴팍한 것은 범증의 평가를 깎아먹는 근거는 될 수 있어도 항우 입장에서는 잘 쳐줘야 조금 참작하는 정도 밖에는 평가를 올리지 않는다.[23] 사실 진평의 계략으로 범증이 쫓겨난 건 사실이지만 실제로 보면 오히려 범증이 분을 못 참고 뛰쳐나왔다가 죽은 형국이다. 아무리 그래도 항우가 의심을 품긴 했지만 범증이 말로 무마하는 것 자체는 크게 어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 조금 의심을 받았다고 스스로 나와서 분사까지 할 정도면 범증의 성깔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갈 정도다. 그나마 범증이 이렇게 죽은 덕택에 항우도 더 이상 다른 장수들을 의심할 생각은 하지 않았다.[24]
이런 모습을 보면 항우는 "천하를 아우른다."는 의미보다는 마치 전국시대의 개념으로 진나라를 대했다. 타국을 정복하고 외국인을 학살하는 차원에서 더 나아가지 못한 것으로, 본래 관중과는 아무런 연관도 없던 강소성 출신 유방이 관중의 사람들을 위로해서 인심을 후하게 산 부분과는 확연히 대조되는 부분. 각 국가 간의 배타적인 소속감에서 완전히 벗어나 있던 유방이 유독 특이했던 면도 있지만, 그렇더라도 항우의 외국인 차별은 심한 수준이었으며 이 와중에 장한 등은 또 총애했으니 여기서도 일관성이 없었다. 이후 이어지는 분봉 조치도 마찬가지다. 이때의 모습으로 보면 항우는 중국의 통일이라는 개념에 대해 아예 이해를 못 하거나 혹은 조국을 멸망시킨 진나라 때문에 군현제 등에 극도의 불만을 가지고 있지 않았나 싶을 정도다.
의심 가는 신하를 숙청하는 방식 또한 세련되지 못했는데, 대표적으로 사실상의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장악한 마당에 굳이 초 회왕의 약속을 형식상으로나마 지키겠다며 유방을 파, 촉의 왕으로 봉했다.[25] 이건 원래 홍문연에서 유방을 죽였어야 했는데 유방의 조리있는 변명과 번쾌의 대담한 시위에 의해 실패하면서, 유방에게 관중왕 자리는 주기 싫지만 그렇다고 죽이지도 못했으면서 그냥 내쫒으면 자신의 권위에도 손상이 올 것 같으니까 대충 얼버무리려 한 것이다. 또한 진평의 이간질 작전에 흔들렸을 땐 범증을 바로 실각시키거나 하다못해 구금하는 것도 아니고, 괜히 야금야금 자잘한 권한만 빼앗는 등 소심하고 이도저도 아닌 대응을 취하곤 했다. 범증의 경우 바로 출사표를 내고 떠났으니 망정이지, 반역을 일으키거나 아예 유방에 투항해버렸다든가 항우와 대립각을 세워 다투었다면 다른 장수들과의 사이까지 엉망이 되었을 것이다.[26]
때문에 항우에 대한 평판이 급속도로 나빠졌음과 동시에 비록 전장에서는 전무한 활약을 보였으나 되레 이기면 이길수록 점점 불리해지는 희한한 상황에 몰리게 된 것이다. 고위급 인사만이 아니라 일반 병사나 포로를 다룰 때도 마찬가지였다. 항복한 병력들을 데리고 있기 부담스러우면 무장 해제를 한 후 변방으로 내쫓아버리거나 하다못해 그들을 인질로 잡고 협상 테이블로 상대를 끌어오면 그만인데 항우는 오히려 모조리 죽여버리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
사실 한나라에서 가장 유능한 이른바 한삼걸의 면면만 봐도 유방을 후방에서 지원해서 한의 승리에 결정적으로 기여해서 고조공신후자연표에서도 서열 1위를 차지한 소하는 진나라의 일개 하급 관리에 불과했고 한신도 거렁뱅이 취급을 받을 정도였다. 그나마 장량이 한나라 귀족 출신이라 원래부터 이름이 알려졌지만 고국 한나라가 전국칠웅 중 최약소국였기 때문에 기반이 튼튼한 편은 아니었다. 이 말은 즉 항우도 이런 인재를 등용하려면 얼마든지 등용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당장 범증, 계포, 용저, 종리말 등이 이렇게 등용한 인물인데 정작 이들도 의심해서 높은 자리를 주지는 않았을 정도다.
3.3. 의제 살해
정치적 능력이 전무한 항우가 관중포기에 이은 제2의 오판이자 파멸로 이끈 자충수.초의제 살해 혐의는 항우가 죽을 때까지 꼬리표 달리며 괴롭혔다. 초 의제는 항량이 진나라 타도를 외치며 옹립시킨 대의명분용 왕인만큼 그 정통성과 상징성은 무시할 수 없었다. 항씨 가문이 반진 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도 범증의 의견을 따라 몰락한 초나라 왕통을 이었다는 정통성이 크게 작용하고 있었으며 이는 대대로 초나라에 충성한 명문가로서 충의를 보여준 것이었다. 범증은 항량에게 "초나라 사람들은 진승이 초 회왕의 한을 풀어 초나라를 다시 일으킬 줄 알고 환호했는데 그 자는 스스로 왕이 되었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사람들이 강동 출신인 당신에게 호응하는 건 당신이 초나라 귀족 출신이라 그런 것이니, 왕이 될 생각은 접고 회왕의 후예를 옹립하는 게 신상에 좋을 것"이라 하였고 이를 들은 항량이 회왕의 후손을 찾아 초왕으로 세우니 그가 바로 의제였다.[27] 애초에 숙부인 항량이 본인이 오르지 않고 초나라의 후계자를 찾아낸 뒤 옹립한 의제가 관중왕 약속을 어기고 멋대로 차지한 자신을 비난한다는 이유로 죽여서 자기 발판을 무너뜨린 작자가 항우다. 훗날 위 태조가 실권은 없지만 존재만으로 자신에게 명분을 가져다 줄 수 있는 군주를 어떻게 다뤘는지만 봐도 항우의 선택은 한심한 수준이라 할 수밖에 없다.
아무리 의제가 왕위에 오르기 전까지는 양치기 신분으로 그 출신이 의심스럽다 해도 자신의 숙부인 항량이 직접 찾아 모셔왔고 추대하자 흩어진 초나라 출신 장수들과 진나라를 타도하고 싶은 민중들이 초나라로 몰려올 정도로 정통성을 확보한 인물이었고, 항우가 의도적으로 의제를 배제하고 분봉을 통해 각지로 흩어버리기 전까지 초 회왕 밑에서 항우와 함께 싸운 군웅들은 그 속내가 어떠했건 간에 명목상으로는 의제의 신하들이었다. 거기다 항우의 견제로 의제는 제대로 권력을 확보하지 못하고 항우의 뜻에 휘둘릴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라 굳이 암살해야 할 힘조차 가지고 있지 않았다. 의의를 굳이 찾자면 항량 사후 항우와 척을 진 것에 대한 분풀이뿐이었다.
항량이 의제를 옹립한 이유가 정통성에 있음을 볼 때, 아직 천하를 차지하지 못한 항우가 의제를 죽이는 것은 스스로 정통성을 차버리는 역적 인증이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그의 정치적 식견이 얼마나 형편없었는지를 알 수 있는 부분.[28][29][30] 오죽하면 초한쟁패기까지는 그저 '옛날 이야기 속 미담'으로만 전해져내려오던 선양이, 항우가 남긴 오점 이후에는 선양을 하지 않으면 항우와 동급으로 싸잡아 폭군 인증으로 역사에 남겨질 것이 뻔했기 때문에 하나의 정치적 수단으로 굳을 정도였다. 실제로 초한쟁패기 이전의 하, 상, 주, 진 등의 왕조 교체도 전부 무력 정벌로 이루어졌지 선양 같은 (표면상으로라도) 온건한 방식의 천자 교체는 없었다. 그리고 초한쟁패 이후 왕망이 전한을 멸망시킨 시점에서 선양을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했고, 이후에 조비, 사마염 등이 반복하면서 필수적인 절차가 된다. 후한에서 조위로 넘어가는 시기에 조비가 9번이나 제위를 거절하며 선양 쇼를 벌인 이유가 바로 항우 때문이다.
이후 위 무제 조조에게 사실상 예속된 헌제가 400년 통일 한 왕조의 정통성을 잇고 있던 것에 비해 초 의제의 존재감이 미약한 측면은 있었다곤 해도 의제를 살해한 건 엄연한 반역 행위였으며, 이는 일전에 항우와의 친분을 따라서 사실상 항우의 기분내키는 대로 이루어진 분봉 책정과 합쳐져 기존의 도리와 위계 질서를 완전히 붕괴시킴으로써 말 그대로 군사만 많이 모아서 깃발을 내걸면 어떤 인간이든 왕을 칭할 수 있는 진정한 의미에서의 난세를 열었다. 문제는 항우는 이미 전국 패자에 가까웠으므로 진승과는 다른 스탠스를 취했어야 했는데 전혀 그러지를 못했다는 점이다. 진승은 " 왕후장상에 씨가 따로 있다더냐?"라고 주장했던 만큼 항우는 " 나야말로 전국시대를 평정한 자이니 나와 내 후손만이 황제의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다."라는 것을 주장해야 하는데 전혀 그러지 못했고 그 점을 적나라하게 보여준 것이 바로 초의제 살해였던 것. 즉, 항우가 초의제를 죽인 것이 문제가 된 이유는 그로 인해 세상이 어지러워진 것이 아니라[31] 반대로 그로 인해 어지러운 세상을 혼돈에서 바로잡을 자격을 상실했다는 것에 있다. 당연히 유방은 그 반대로 행동했으며 그런 생각이 가장 잘 드러난 것이 바로 초의제의 살해를 알았을 때 크게 통곡하며 의제의 제사를 지낸 것과 광무대치 당시 항우에게 일갈했단 항우의 죄 열 가지를 그의 앞에서 읊은 것이다. 이로 인해 유방은 가장 큰 도둑인 항우를 처단하여 자신이 천자의 자리에 오를 자격이 있다는 것을 증명하겠다고 선언한 거나 마찬가지다. 그리고 유방은 초한전쟁 후에도 숙손통을 스승으로 모시고 이런 위계 질서를 다시 세우기 위해 무척이나 애를 썼다.
항우 사후 반란을 일으켜 유방과 대치한 영포가 당당하게 "나도 황제 한번 해보려고 반란했다!"라고 유방에게 일갈할 정도로 초한전쟁에 이르러선 명분이란 것의 가치는 휴지 조각이나 다름없었고[32][33][34][35], 이런 상황을 만든 장본인은 바로 누구보다도 정치적 입지에서 앞서 있었던 항우였다.[36] 특히, 자신의 숙적인 유방에게 엄청난 정치적 이득을 선사한다. 한마디로 원래라면 반란군으로 비난받아야 할 유방을 역적이자 학살자인 항우를 치는 의인이자 의제의 후계자라는 명분을 쥐어주었다.[37][38] 물론 언젠가는 의제를 제거하기는 해야겠지만 시기도 방법도 완전히 글러먹었다는게 문제다. 어차피 의제가 호락호락 선양해 줄 인물이 아니라면 후사를 남기기 전에 비밀리에 독살이라도 해야 했을 것이고 이런 공작에 도가 튼 범증 또한 분명히 조언을 했겠지만 정작 항우는 일을 그렇게 진행할 성격이 아니고 무엇보다 그럴 참을성이 없었다는게 문제였다. 가장 유력한 라이벌이던 유방은 한중으로 쫒아냈으니 설마 뭔 일을 하겠냐는 게 홍문연 이후 그의 일관적인 생각이었다.
항우는 자기 마음대로만 하다 보니 하는 말이 앞뒤가 안 맞기도 했는데, 한 예시로 의제를 대낮에 습격해 죽여버리는데 "회왕 그 자가 한 게 뭐가 있는가? 천하를 평정한 건 전부 나와 장수들의 공이 아니냐!?"고 했지만 이 말을 한 게 약조대로 공적을 세운 유방에게 제대로 땅을 주기 싫어서였다. 항우의 18제후왕 분봉에서도 공적의 유무는 자신과의 친소를 잣대로 하여 맘대로 무시하였는데 의제는 공이 없으므로 대우해주지 않겠다면서 정작 공을 세운 사람들도 푸대접한 것.[39] 진나라 멸망 이후 항우는 천하를 재편할 기회를 잡았으나 논공행상을 엉망진창으로 처리해버림으로써 제나라에서 반란이 터지고 아버지, 아들 하던 장이, 진여는 완전히 원수가 져서 분란이 끊이질 않았다. 냉정하게 사람을 쳐내지도 못했고, 그렇다고 해서 누군가를 만족시키지도 못했다. 공평하게 분배할 자신이 없으면 어느 한쪽이라도 확실하게 챙겨줘서 일부의 충성이라도 확보해야 했는데 그것도 못 했다. 대표적으로 제나라 전씨들은 제나라 땅을 빼앗겨서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결정적으로 유방은 진나라 땅을 받지 못해 속이 끓어오르고 있었다. 결국 제나라 땅에서 난이 터지고 유방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한중 땅에서 빠져나와 다시금 천하 대권을 잡을 기회를 잡는다.
중국 사학계에서는 항우의 결정적인 패착을 의제를 시해한 것에서 찾는다. 대부분의 초한쟁패기를 다룬 창작물에서는 의제를 허수아비로 치부하지만, 역사학적 관점으로 볼 때 의제의 시해는 단순하게 볼 수 없다. 아무리 실권이 없고, 세력이 약해도 의제는 그 자체로 항우의 주군이며 초나라의 왕(君)이자 새로운 통일 왕조의 군주였다. 그런데 단순히 세력이 강하다는 이유로 신하(臣)인 항우가 의제를 죽였다는 것은 단순한 세력 다툼이 아니라 당대의 가치관 자체를 뒤엎는 엄청난 일이며 초 의제는 숙부 항량이 초나라를 건국할때 내세워서 존재만으로도 명분을 지닌 자이기 때문이다. 굳이 유가를 언급하지 않더라도 칠국 시대는 물론이고 그 이전의 춘추 전국 시대부터 군주는 신하와는 다른 격으로 존재하였으며, 유교의 군정지론, 군주별이신을 끌어붙일 것도 없이 신하는 이유를 불문하고 군주에게 충(忠)을 바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그런 시대상에서 단순히 자신과 의견이 다르고 유방이 관중에 먼저 진입했으니 약속을 수행하라는 정당한 이견[40]을 유방에 대한 편애[41][42]로 여겨 주군인 의제를 시해한 것은 당대의 가치관을 완벽히 부정하는 행위였으며, 그런 항우에게 반감을 가진 것은 둘째 치고 "너도 마음에 안 든다는 이유로 주군을 죽이는데, 나라고 못할 것은 뭔가?"라는 명분을 주게 되어 중국 전역에서 반란의 씨앗을 심게 만든다.[43] 아군으로 남은 사람들과의 관계조차 원만치 못했는데, 팽성이 점령된 상황부터가 항우 휘하의 제후들이 조금이라도 적극적으로 저항했다면 일어나지도 않았을 일이었다. 항우가 자기 주군을 죽인 마당에, 관망하다가 이기는 쪽에 붙는 것쯤은 그들 입장에선 전혀 문제될 게 없었다. 그렇게 다들 간만 보고 줄타기만 하다가 다른 곳도 아닌 수도를 허무하게 빼앗겼던 것이다. 이후로도 유방과 팽월의 철저한 기각지세에 비해 항우와 휘하 제후들은 말만 초나라 세력이지 뭔가 따로 노는 느낌이 강하다.
다만, 초한전쟁 당시 명분이란 것의 가치가 유독 희미하기도 했고, 항우가 딱히 내부 반란으로 몰락한 것도 아니므로[44] 의제의 정치적 존재감에 대해서는 약간 의문이 드는 부분도 있지만, 일단 의제 암살 과정에서 영포가 항우에게 불만을 가지게 되어 이후 유방 쪽으로 붙어버렸고, 명목상의 주군조차 없어진 유방은 아무것도 거리낄 것 없이 왕을 거쳐 황제까지 자연스럽게 오를 수가 있었으니 별 이득 없이 손해만 봤다는 점에선 크게 차이가 없다. 어떻게 보면 이미 정치적으로 존재감이 없는 의제를 유방이 꺼내 들어서 항우의 명분을 깎아내렸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그렇다고는 해도 죽이지 않고 이용해먹을 수 있었던 의제를 굳이 죽였던 항우의 잘못이 더 크겠지만. 당장 유방은 의제의 묘를 찾아 제사를 지내면서 자신의 명분의 정당함을 널리 알렸다. 즉, 이 명분의 정당성이 사라졌기 때문에 항우가 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미 진승이 말한 '왕후장상에 씨가 있다더냐?'라는 말이야말로 이 시대를 한마디로 함축한 말이었다. 그리고 이에 대항하려면 이미 한번 천하를 차지한 항우야말로 이 말을 가장 전면적으로 부정해야 했다. 그런데 항우는 의제를 죽임으로써 오히려 이 말을 긍정해 버렸다. 즉, 이로 인해 항우가 세운 나라가 새로운 세상을 열 명분을 상실해 버린 것이 가장 큰 문제였고 유방이 파촉 지방에서 나와 동진한 것도 원래는 반역 행위이지만 초의제 시해로 인해 완전히 명분을 얻었다는 점도 항우에게는 패착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사실 초의제가 항우의 손에 죽음으로써 개나소나 나도 그래도 된다고 여겼다는 말은 틀렸다고 할 수 있다. 애시당초 이미 항우가 초의제를 죽이기 전부터 이런 생각이 군벌들 머릿속을 지배했기 때문. 그런데 이 중에서 항량이 초의제를 내세움으로써 명분이라는 면에서 다른 군벌들보다 일보 앞서게 되었다.[45] 그런데 정작 그 조카 항우가 초의제를 시해함으로써 그 명분을 도로아미타불로 만들고 유방에게 명분을 내어준 것이 항우 패배의 원인이 되었던 것이다. 즉, 항우가 초의제를 시해하기 전부터 이미 진승과 오광이 '왕후장상에 씨가 있다더냐?'는 말로 난세를 만들었으며 항우는 이에 따른 것에 불과했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초의제 시해의 의의는 항우가 명분을 상실하고 유방에게 명분을 넘겨주게 된 것과 그로 인해 유방이 결국은 통일제국을 세울 수 있게 된 것이지 항우가 초의제를 시해함으로써 난세가 도래한 게 아니다. 이미 진작에 난세였기 때문.
3.4. 복고주의
이러한 모습을 항우 개인의 차원이 아니라 항우가 가진 세력로 문제로 이야기하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스스로가 초나라 귀족의 후예이자 초나라 땅에서 거병하여 그 세력이 주축이 된 항우로서는 초나라 땅이 아닌 관중을 중심지로 삼는 건 불가능한 일이고,[46] 진나라에 대한 잔혹한 모습 역시 통일 진나라와 그 제도에 반감이 극심한 세력으로서는 당연하다는 가설이다.이러한 모습이 항우의 개인적인 개성 때문이든 혹은 그 세력 자체의 모습 때문이든, 초나라 귀족 가문 출신 항우가 춘추전국시대에서 한 발자국도 더 나아가지 못한 것과 반대로 유방과 그 패거리는 오히려 그 출신 성분 때문에 이런 점에서는 거리낄 것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구(舊)시대적, 복고주의적이었다는 평가는 항우의 문제점을 단순화하는 경향이 있다. 일단 당시 반(反) 진을 기치로 일어난 군벌과 인물 가운데 구(舊) 6국 귀족 출신은 사실 적지 않다. 위왕 위표, 한왕 한신, 장량, 제나라의 전씨 일족 등이 그렇다. 하지만 이들 가운데 누구도 항우 만큼 심각한 문제점을 보여주지는 않았다.
특히 항우의 학살은 진나라에 대한 적대심만으로는 설명하기 어렵다. 항우는 제나라에서도 잔혹무도한 모습을 보였고, 그 심각한 대학살은 당시는 물론 춘추전국시대에도 그 전례를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잔혹한 악행이었다. 항량이 죽자마자 초 의제와 신하들이 가장 먼저 항우부터 쳐내려고 했던 것부터가 그 전의 양성 학살의 잔인함 때문.
항우가 봉건제를 택하여 제후들에게 땅을 나눠주는 방식은 복고주의적 관점에서도 엉망진창이었다. 유방은 견제를 위해 파촉에 처박아 놓았지만 항백의 설득 하나로 한중까지 지배 영역으로 퍼주는가 하면[47], 자신을 도왔다는 이유로 제나라의 장수에 불과했던 전도를 제나라 왕으로 봉하고 본래 제나라 왕을 교동왕(膠東王)으로 옮겨버린 일 때문에 전영의 분노를 샀으며, 그 전영은 자신이 직접 들고 일어남은 물론 다른 사람들을 후원해서 항우가 세운 천하를 단번에 뒤흔들어 버렸다. 전영의 협조를 얻은 진여도 항우가 자신을 돕지 못했다는 이유로 왕에 봉하지 않아 불만이 있었던 사람이었으며, 이후 정말 지독하게 항우를 괴롭힌 팽월에게 항우는 아무런 봉국도 내리지 않았다. 결국 알아서 적을 만든 셈이나 다름없는 것.
항우의 분봉은 춘추전국 시대의 가치관으로도 긍정적으로 평가하기 어렵다. 항우가 명분으로 삼은 복고주의적인 관점에서 보자면 가장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항우는 "정통성 있는 구(舊) 6국의 후예를 제대로 예우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심각한 자기 모순을 일으키게 된다. 정통성 있는 한왕 성을 유방과 가깝다는 의심만으로 살해해버리고 대신 자기 부하인 정창을 한왕으로 앉혔으며, 월왕 구천의 후예들을 푸대접하면서 굳이 오예를 형산왕에 앉히더니 나중에는 그조차도 쫓아내고 땅을 강탈했다. 위왕 위표는 땅을 반쯤 빼앗기고 항우의 직속 부하가 그 자리에 들어서게 되었다. 결국 한왕 성의 조카 한왕 신은 유방의 충실한 부하가 되었고, 위왕 위표는 항우를 한 번 배신하고 유방 측에 붙었다. 오예도 본인의 활약상은 알 수 없지만 북월이 유방 편을 든 것은 분명하며, 훗날 대를 이어가며 장사왕 자리를 유지했다.
항우는 형식적으로는 초 회왕을 의제(義帝)로 높여 천자로 삼고, 자신은 패왕(覇王)이 됨으로써 춘추오패와 같은 정치적 위치에 자신을 놓았지만 결국 초 회왕을 죽여버렸으니 오히려 스스로 역적의 오명을 뒤집어 쓴 꼴이 되어버렸다. 구세대의 춘추시대 패자들은 비록 실질적으로 천하의 권력을 잡고 패도를 펼치기는 했으나, 그 패자들 가운데 누구도 자신이 모시던 주 천자를 살해한 전례는 없다.[48] 항우는 그러고도 스스로 패왕임을 계속 자칭하고 있었으니 그야말로 모순의 극치였다.
이처럼 항우의 정치적 행동은 근본적으로 체계적인 사상적 기초가 전혀 없이 그저 감정적으로 움직인 것 뿐이었으며, 앞뒤가 전혀 맞지 않는 모순투성이의 정치 활동을 오직 군사력으로만 밀어붙이는 상황이었다. 거기에다 그 잘못을 지적하면 같은 편이라고 해도 가차없이 잔인하게 죽여버리니 누구도 나서지 못했다. 이처럼 근본적인 정치 사상 측면에서 결함을 가지고 있는 항우의 통치는 항구적인 체계가 될 수 없었다. 항우와 같은 막나가는 방식으로는 상대가 유방이 아니더라도 대규모 반란을 피할 수 없었다. 실제로 제나라 전씨, 연나라 장도, 조나라 장이, 월나라 오예는 유방이나 한나라 세력과는 딱히 관련이 없었다.[49] 즉슨 한나라의 군국제와 대비해서 항우의 봉건제와 복고주의 성향을 언급하기는 하지만, 항우의 행동을 보면 사실 그것이 복고주의적인 것도 아니었고 그냥 우격다짐식의 폭정이나 다름없었다.
3.5. 학살
아무리 사람 목숨이 쉽게 죽어나갔던 과거 시대이고 또 전쟁 중이었다지만 항우의 처사는 분명 도가 지나쳤다. 사실 도가 지나쳤다는 수준을 넘어 춘추전국시대에도 항우 수준으로 민간인을 잔혹하게 학살한 경우는 없었다.[50][51] 당대에도 유방이 항우를 비난하는 주요 근거가 되었으며, 후대 역사가들도 두고두고 악행이자 패착으로 지적했다. 한마디로 옛날 기준으로 봐도 심한 학살을 자행했으며, 이는 민심이 떠나 항우 스스로에게 해가 되는 실책 그 자체였다.사실 항우의 학살이 전국시대의 개념이라는 평도 무색한 게, 백기를 비롯해 전국시대에 학살자로 악명을 떨쳤던 장수들도 전쟁 포로 등 군인을 학살하였지 민간인을 의도적으로 학살한 경우는 거의 없었다.[52]
항우는 전쟁 도중 적국의 포로나 점령지의 주민들을 학살하는 만행을 저질렀는데 가장 잘 알려진 건 신안대학살이지만 알고 보면 항우가 저지른 학살은 한두 번이 아니다. 기록된 사례만 하더라도 다음과 같다.
- 양성 학살: 항량 생전, 별동대로 출전하여 양성이 쉽게 함락되지 않자, 성을 함락시키고 나서 주민들을 생매장했다.
- 성양 학살: 유방과 별동대로 움직일 때 성양을 함락하고 주민들을 학살했다. 다만 이 건은 항우 본인만의 결정인지, 유방의 동의가 있었는지, 주체가 유방이었는지 불분명하다. 다만 이후 유방이 항우와 싸울 때 오랫동안 성양 인근을 방어선으로 삼고 버텼고, 유방이 위기인데도 성양 주민들의 반발이 없었던 것을 보면[53] 이때도 항우가 학살을 주도했거나 적어도 세간에는 그렇게 알려진 것으로 추정된다.
- 신안 학살: 기원전 207년 음력 11월 항복한 진나라 군 20만을 생매장한 대학살이다.
- 함양 학살: 기원전 207년 음력 12월 진왕 자영을 죽이면서 함양성의 진나라 주민들도 같이 학살한다.[54]
- 제나라 학살: 기원전 205년 겨울 반기를 들어 제나라 왕이 된 전영을 성양에서 토벌하고 항복한 포로들을 생매장한 뒤, 계속 북해까지 북진하면서 고을을 마주칠 때마다 백성들을 학살했다.
- 외황 학살 미수: 여기서도 팽월에게 협력해 늦게 항복했다는 이유로 학살을 자행하려고 하다가 소년의 설득[55]을 듣고 그만두었다.
그 외에도 사람을 태워 죽이거나 삶아 죽였다는 내용이 심심치 않게 나온다. 오죽하면 사마천은 항우가 파묻어 죽인 사람이 천만 명은 될 것이라고 적었을 정도.[56] 유방과 팽월 또한 드넓은 초나라 지역을 초토화시키고 다녔기 때문에 초한쟁패기가 끝난 후의 한나라가 통계를 낼 수 있던 당시 중국의 인구는 고작 500만 명에 불과하였다.[57] 게다가 전쟁으로 인해 중국의 경제력도 개판이 되어 신하들과 장수들이 말이 아닌 소를 타고 다녔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 항우가 2년만에 중국을 제패하고 4년만에 망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결과다. 다른 군벌들 또한 학살을 저질렀다고는 하지만 기록자들도 항우가 독보적으로 엄청나게 학살한 것만은 인정하고 있다.
각종 협약 등이 체결된 현대의 전쟁과 과거의 전쟁에서 벌어진 민간인 피해를 동일선상에 놓을 순 없지만 항우는 그 당대에도 이미 심각하게 비난을 받고 있었다는 점에서 당시 윤리에서도 부정적인 평가를 받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 당대에도 항우의 경쟁자인 유방이 함양에 입성했을 때 어떤 조치를 취했고, 이로 인해 백성들에게 어떤 평가를 받았는지 본다면 이는 윤리적인 부분을 굳이 따지지 않더라도 전략적으로도 최악의 악수였다. 상식적으로 고을을 점령을 해도 백성들을 모두 죽여버리면 영토를 차지한 이득이 전혀 없다.[58] 세금, 군역, 노역을 담당할 주체들이 모두 사라지는데다 그 영토를 아예 폐허로 만들 계획이 아니라면 죽어버린 사람들을 대신할 인원들을 자국 어딘가에서 데려다 이주시켜야 하기 때문에 그 과정에서 소요되는 비용이 고스란히 자국의 손해로 남는다. 전쟁이 많았던 춘추전국시대에서조차 전쟁은 기본적으로 사람이 사는 '읍성'을 땅따먹기 하는 것으로, 궁극적으로 '땅과 백성'을 지배하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특수한 상황이 아닌 이상 민간인을 이렇게 마구잡이로 학살하는 사례는 찾아보기 어렵다.
간단히 말해 항우의 학살이 문제인 건 적군을 죽이는 정도는 남들도 다 마찬가지였지만, 항우가 적군뿐만 아니라 민간인인 '고을'과 도시인 '성' 자체를 학살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게다가 항우는 조금의 자비심도 없이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백성들을 모조리 죽이는 잔혹성을 보였다. 춘추전국시대에 진나라의 백기가 장평대전에서 조나라군 40만을 몰살한 사례가 떠오를 정도. 게다가 백기의 경우, 비록 잔혹성으로 인해 전국에서 욕은 먹었지만 학살의 목적이었던 "조나라를 일어서지도 못하는 불구로 만들어 버린다."는 목표 자체는 달성한 것에 비해 항우는 그것도 아니었다.
항우의 학살에서 분풀이 외의 목적을 찾을 수 있다면 "본보기" 정도일 것이다. 하지만 이런 학살은 전혀 본보기가 되지 못 했으며, 각국의 백성은 그저 "죽지 않기 위해서" 당연하게도 항우에 대항할 수 밖에 없었다. 정복을 수월하게 하려는 의도였다면 항복하면 살려주되 저항하면 다 죽이는 정도로도 충분했다. 순순히 따르면 안전하다니 대부분 항복했을 테니까. 그런데 항복하든 안 하든 죄다 죽는다면 아무도 항복하지 않는다.[59][60] 오히려 날 죽일 놈들을 하나라도 더 같이 끌고 가겠다고 이를 갈 뿐이다. 결국 항우의 학살은 기껏 항우가 그 천재적 무예를 발휘해도 군사와 수고와 시간만 낭비하고 전세를 질질 끄는 원인이 되고 만다. 반면에 유방은 진작부터 이 부분에서 강약 조절을 하는 법을 배웠다. 진나라 공격 도중 항우가 항복한 양성을 파묻었다는 이야기에 겁을 먹은 태수가 차라리 버티려고 하자 그 부하의 요청을 받아들여 목숨을 보전해주는 것은 물론이고 지위도 그대로 유지시켜 주어 주변 읍성에서 앞다퉈서 문을 열게 만들었고, 이 이미지 전략에 낚인 조고가 유방과의 밀약 시도[61]를 통해 항복하려고 호해를 죽이자 새로 진왕이 된 영자영의 항복을 받아[62] 수도 함양에 입성했다.
가장 극심했던 진나라에서는 당연히 적대감이 폭발하여 한신은 유방에게 전략적인 관점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더욱이 항왕의 군대가 지나간 곳은 학살과 도륙을 당하여 살아남은 것이 없게 되어 천하 백성들은 모두가 원망하며 아무도 항우에게 의지하려고 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나, 단지 그의 위세에 눌려 복종하고 있는 체하고 있을 뿐입니다. 겉으로는 패자인 것처럼 보이나, 사실은 천하 인심을 잃고 있습니다."
"또한 삼진(三秦)의 왕은 모두 진나라 장수들 출신으로, 그들이 진나라 장군으로 몇 년간을 군사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싸움 중에 전사시킨 진나라 자제들의 수효는 수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고, 더욱이 그 남은 군사들을 속여 제후군들에게 항복시킨 다음 진나라에 들어오다가 신안(新安)에 이르자 항왕이 20여 만에 달하는 그들을 속여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 놓고도 유독 장한(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 등만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진나라의 사람들이 이 세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은 골수에 사무쳐 있습니다. 오늘 항우가 그의 위세를 믿고 이 세 사람을 삼진의 왕에 임명했으나 진나라 백성들은 아무도 그들을 믿고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무관(武關)을 통해서 관중으로 진입하실 때, 터럭 하나도 건들지 않음으로 해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고,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폐하고 법삼장(法三章)만을 두기로 백성들과 약속함으로 해서 진나라 백성들치고 대왕께서 진왕(秦王)이 되기를 바라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기》회음후 열전 중
"또한 삼진(三秦)의 왕은 모두 진나라 장수들 출신으로, 그들이 진나라 장군으로 몇 년간을 군사들을 이끌고 다니면서, 싸움 중에 전사시킨 진나라 자제들의 수효는 수도 셀 수 없을 만큼 많았고, 더욱이 그 남은 군사들을 속여 제후군들에게 항복시킨 다음 진나라에 들어오다가 신안(新安)에 이르자 항왕이 20여 만에 달하는 그들을 속여 구덩이에 파묻어 죽여 놓고도 유독 장한(章邯), 사마흔(司馬欣), 동예(董翳) 등만이 목숨을 건졌습니다.
"진나라의 사람들이 이 세 사람을 원망하는 마음은 골수에 사무쳐 있습니다. 오늘 항우가 그의 위세를 믿고 이 세 사람을 삼진의 왕에 임명했으나 진나라 백성들은 아무도 그들을 믿고 따르지 않고 있습니다. 대왕께서 무관(武關)을 통해서 관중으로 진입하실 때, 터럭 하나도 건들지 않음으로 해서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았고, 진나라의 가혹한 법을 폐하고 법삼장(法三章)만을 두기로 백성들과 약속함으로 해서 진나라 백성들치고 대왕께서 진왕(秦王)이 되기를 바라고 있지 않은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사기》회음후 열전 중
이후 관중은 유방의 세력권이 되었는데, 진나라 사람들이 항우와 유방 중 누가 이기기를 바랄지는 너무 뻔한 일이다. 참고로 이 진나라는 비록 망했지만 한 번 천하를 통일해본 경험이 있는 나라다. 또한, 유방이 동진하고 있을 때 재빨리 끝낼 필요가 있던 제나라에서의 싸움은 쓸데없는 학살로 오히려 사람들의 증오만 사고 한없이 길어지게 되었다. 일단 유방의 세력은 팽성대전으로 격파했다고는 하지만, 이러한 상황을 이용한 전횡이 제나라를 다시 부활시키는 바람에 항우의 제나라 원정은 결과적으로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일이 되고 말았고 팽성대전 역시 전략적 목표라 할 수 있는 유방을 제거하지 못했기 때문에 의미가 상당히 반감됐었다. 그리고 팽성대전 이후의 한나라는 법까지 뜯어고치며 징병 제외 대상인 노인들도 전쟁터로 보내고, 자원은 나오는 족족 보급으로 보내는 수탈이 따로 없는 가혹한 총력전 체제로 이행했는데, 안그래도 대기근이 돌아 난장판이 된 와중에 이랬는데도 한나라 백성들은 일체의 봉기 없이 이 모든 걸 감내했고, 심지어 이를 주도한 소하를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얼마나 항우에 대한 공포가 사무쳤으면 유방 눈치를 보느라 일부러 행패를 부리게 만들 만큼 존경했다.
사실 이쯤 되면 백성들도 자기들 쥐어짜고 사지로 보내는 게 마음에 안 들어도 '그래도 안 그러면 항우가 우리 다 죽이겠지?' 하고 자기들끼리 납득해서 어쩔 수 없이 받아들였을 가능성도 높아 보인다. 가난해지고 죽을 수도 있는 곳으로 보내는 유방이랑 100% 죽이는 항우랑 누가 낫냐고 보면 당연히 전자니까. 그리고 사실 유방이 수도의 구중궁궐에 편히 앉아 장수들만 보내 싸움 시키던 왕도 아니고, 관중만은 어떻게든 보전하려고 그 앞에 수비라인을 만들어 필사적으로 항우와 싸우며 구르던 중이었다.[63] 유방 입장에서야 관중이 자기 심장이나 다름없는 지역이니 목숨 걸고 지키는 게 당연하겠지만, 이미 항우의 칼춤 아래 대량의 유혈을 겪었던 관중 사람들에겐 유방이 구세주로 보였어도 이상하지 않다. 그리고 유방은 전시 상황에서도 여유가 있으면 틈틈히 관중에 들러 노인들을 불러 연회를 벌이고 백성들을 위무하고 세자를 세워 후방을 튼튼히 하는 등의 민심을 돌보는 일도 소홀히 하지 않았다.
어느 한 지역을 점령하기는 힘들지만 민심을 얻는 건 더더욱 힘든 일이다. 점령하기 위해 들인 손해를 그대로 감수하면서 점령지를 위해서 베풀어야 하는데 결국 손해가 갑절이 되어버리기 때문이다. 실제 역사상에서도 쥐어짜인 백성들의 봉기나 어설프게 민심을 베풀다가 불만을 품은 병사들의 반란으로 몰락한 정복자들도 꽤 많다. 그런데 유방의 경우에는 그게 아주 쉬웠다. 유방이 성인군자라고 불릴 만큼 선행을 한 것도 아니고, 지식인들을 감화시킬 만큼 학식이 있던 것도 아니고, 백성들이 경외할 만큼의 명문가[64]는 더더욱 아니었다. 하지만, 항우가 앞뒤 구분 없이 다 죽여버리는 바람에 유방으로서는 아무것도 베풀 필요 없이 그냥 목숨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민심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항우가 저질러 놓은 짓들은 알아서 대비 효과를 만듦으로써 유방을 도와주는 일들뿐이었다.[65]
칭기즈 칸이나 알렉산드로스 대왕도 거의 무적이나 다름없이 군사적으로 뛰어났고, 이들도 학살을 벌였지만 항우와는 그 결과가 다르다. 칭기즈 칸은 자신과 싸우거나 항복을 거부하던 상대는 용서 없이 도륙했고 그의 군대가 지나간 자리엔 풀 한포기도 남기지 않았지만, 먼저 항복을 청하는 경우엔 그대로 받아줌으로써 상대의 저항 의지를 꺾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주로 반란과 저항에 대해서 학살을 벌였지만 자신이 군사적으로 점령한 지역에 대해서는 관대한 정책을 베풀었고, 그 지역의 유력자들은 자신의 신하들과 동등하게 대우해줬을 뿐만 아니라 아예 그들의 문화까지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점령지에서의 저항을 최소화했다. 특히,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동방 문화에 대한 관심이 높았으며 멸망시킨 페르시아의 공주들을 왕비로 맞이하기도 했다. 정리하자면, 역사적으로 항우 정도의 지위에 올라간 군주는 아무리 학살을 저지르고 다녀도 최소한 항복하는 사람은 잘 받아주는 등 당근과 채찍을 전략으로써 적절하게 썼는데 항우는 당근 따위는 개나 줘버리고 채찍만 죽도록 써댔으니 일단 목숨이라도 건지려면 항우에게 적대할 수밖에 없었다.
이후 항우가 외황의 13살짜리 어린아이의 설득을 따라 학살을 그만두고 항복을 받자 학살을 자행할 때는 그토록 저항하던 성들이 줄줄이 항복하는 장면은 항우의 정치력 부재를 단적으로 나타내는 사례이다. 미수에 그쳤지만 자기가 천하를 거머쥐면 시황제의 분서갱유를 벤치마킹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은 일화도 존재한다.[66]
4. 인사상 실책
"항왕이 화를 내며 큰 소리를 지르면 1000명이 모두 엎드리지만, 어진 장수를 믿고 일을 맡기지 못하니 그저 보통 남자의 용맹에 지나지 않습니다. 항왕이 사람을 대하는 태도는 공손하고 자애로우며 말씨가 부드럽습니다. 누군가 병에 걸리면 눈물을 흘리며 음식을 나누어 줍니다. 그러나 부하가 공을 세워 벼슬을 주어야 할 경우가 되면 인장이 닳아 깨질 때까지 만지작거리며 선뜻 내주지 못하니, 아녀자의 인자함일 뿐입니다."
《사기》회음후 열전. 대장군이 된 한신이 유방을 만난 자리에서 항우를 평하며. 쉽게 풀이하면, "항우는 제 좋을 때나 사람 좋은 척 하고 정작 곁에서 자길 믿어주는 사람은 무시하는 여편네와 진배 없다" 라고 깐 것이다.
《사기》회음후 열전. 대장군이 된 한신이 유방을 만난 자리에서 항우를 평하며. 쉽게 풀이하면, "항우는 제 좋을 때나 사람 좋은 척 하고 정작 곁에서 자길 믿어주는 사람은 무시하는 여편네와 진배 없다" 라고 깐 것이다.
"항우는 그나마 있던 범증 한 사람도 제대로 쓰지 못해서 나에게 패한 것이다."
유방이 자신이 승리한 이유를 논하며.
유방이 자신이 승리한 이유를 논하며.
한신과 유방 등 당대의 인물들이 항우를 평가했다 치면 입을 모아 항우의 인색함을 비웃었을만큼 항우는 사람을 부리는데는 정말 노골적으로 무능했으며, 이는 항우가 겪게 되는 모든 난관의 근원이 된다.
최측근에 대한 대우도 미묘한 면이 있었다. 항우를 내내 따르며 공을 숱하게 세운 종리매, 용저, 계포 등은 18제후 분봉에서 제외되었다. 그렇다고 따로 영지를 챙겨주었다는 얘기도 없었으니, 이런 점을 진평이 이간질에 이용해먹은 결과 제일 먼저 범증이 이탈. 용저는 군공으로 제나라 땅을 취하고 싶었던 욕심에 한신에게 굳이 정면으로 덤볐다가 역으로 패배해 사망하고, 나머지는 사면초가에 이르자 모두 항우를 버리고 떠난다. 계포의 경우엔 아예 3대에 걸쳐서 한나라 왕조를 섬기기도.
이외에도 인재들을 버리거나 중용하지 않아서 이들이 유방 측에 붙어서 대활약을 하거나 항우의 실책을 유방이 대폭 활용하는 경우가 여럿 있었다. 아래는 그 예시. 보면 알겠지만 아래에 써진 실책 하나하나가 전부 핵폭탄 급의 실책이었다.
무력뿐만아니라 포상도 마초적으로 팍팍줬다면 한고조는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았다.
참고로 이렇게 유방에게 미적지근하게 대하든 적극적으로 충성하든 초한전쟁 시기에는 反 항우라는 기치는 일치되었던 한신, 팽월, 한왕 신, 진회 등등을 보면 항우라는 적이 사라지자 분열하며 그 중 한왕 신, 노관 등은 무려 흉노로 망명하기까지 하는데 달리 보면 항우의 인망이 '오랑캐' 군주인 묵돌만도 못하다는 의미가 된다.[67]
4.1. 한신
중국사에서 흔히 "군사 통솔력"의 대명사 취급을 받는 명장이자 유방의 천하 통일에 가장 큰 공을 세운 장군인 한신은 원래 항우 산하에 있던 사람이었다.한신은 항량 시절부터 항씨 일가를 따라다니며 종군했고, 항우에게는 여러 계책을 전했지만 항우는 모조리 씹어버리고 한신을 한직[68]에 머무르게 했으며, 그렇다고 해서 죽이지는 않았고 다른 사람에게 가지 않도록 어르고 달래지도 않았다. 용저와 유방이 알고 있던 한신의 빨래하는 아낙에게 밥을 빌어먹고 건달 가랑이 사이나 기던 찌질한 과거사를 항우라고 몰랐을 리 없을 테니, 범죄자가 되지 않은 결단은 인정하지만 끽해야 딱 그 정도의 팔푼이로 취급했거나, 그 정도의 관심도 없어서 그저 키만 크고 칼 찬 놈으로 취급했든가 둘 중 하나.
물론 한 고제 측에 가서도 한 고제도 이 소문을 알고있던 것과 전혀 연이 없던 장수여서 처음엔 별 중용되지 않았으나, 한신의 능력을 알아챈 소하의 추천으로 유방은 그를 중용하게 된다. 결국 신하의 조언을 받아들인 유방은 한신을 중용한 덕분에 라이벌 항우를 멸하게 된다.
정작 한신도 자기 스스로가 아랫사람을 함부로 대한 항우를 비웃은만큼 아랫사람들에게는 인정을 베풀었으나 이와는 정 반대로 자기 동료들과 한 고제를 포함한 윗사람들에 대한 처신은 개차반이었고 초한쟁패기때 벌인 사건[69]이 있었기에 결국 그를 경계하던 한 고제와 여후에 의해서 결국 숙청되었다.
4.2. 팽월
한신이 중국사 총사령관으로써 명장의 대명사라면 팽월은 중국사의 대표적인 유격수이자 유격부대 장군이었다. 초한전쟁 동안 항우를 쓰러트린 것이 한신이라면, 그런 항우의 기력을 점점 빼놓은 것이 팽월이었다 보면 된다. 유방을 밀어낸다 싶으면 팽월이 후방 쪽에서 난장판을 벌여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게 만드는 팽월의 유격전에 항우는 한 번은 다 이긴 상황까지 가 놓고도 결국 몰락하고 말았다.그런데 그런 팽월도 항우의 분봉 당시 일개 수적으로 참전했다라는 이유로 아무것도 받지 못한 것에 원한을 가져 유방에게 가담한 것이다. 그러나 팽월도 초의 몰락 후 가장 영향력이 강한 3인 대제후 중 하나였는데 이를 두려워한 여후에 의해 토사구팽된다.[70]
4.3. 진평
초한전쟁 내내 큰 전략을 그린 참모가 장량이였다면 작은 공작으로 승리에 기여한 인물은 진평이다. 반간계를 이용해 항우의 유일한 생명줄이였던 책사 범증을 몰락으로 이끄는 큰 성과를 내고[71], 훗날 여씨의 횡포로부터 유씨들을 구원해 천하를 안정시킨 한나라 초기 최고의 충신인 진평 또한 원래는 항우의 산하에 있던 사람이었다. 진평은 항우 휘하에서 은나라를 꼬드기는 데 큰 공을 세우는데, 은왕 사마앙이 삼진을 공격하던 유방에게 다시 붙어버리자 은나라 정벌을 담당한 사람들을 모두 죽이겠다고 길길이 날뛰는 항우를 보고 도망가게 된다. 다만 이것이 전부는 아니고, 항우는 대우가 별로인게 문제라며 비판했으며, 나중에 항우를 버린 이유를 따지는 유방에게 항우가 친족만을 믿고 자신을 중용하지 않아서라고 고백하긴 했다.진평은 항우와 갈등 이후 결국 항우에게 빨리 떨어져 한나라에 들어가 친구의 추천으로 유방 밑에 들어가게 된다. 멀리서 헐레벌떡 도망쳐 오느라 힘들었을테니 좀 쉬라는 말에도 내가 지친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당신에게 계책을 올리는 게 중요하다는 태도를 보였고, 이에 감복한 유방은 진평이 이것저것 비리를 저지르고 구린내를 풍기고 다녀서 휘하 장수들이 불륜을 저지른다는 등 악소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72] 살아 생전은 물론 죽어서까지 진평을 아주 요긴하게 써먹는다.[73]
4.4. 영포
초한쟁패 말엽에 유방의 밑에서 용맹하게 싸우며 초나라를 괴롭힌 영포도 원래는 항우의 산하에 있던 사람이었고 후일 항우의 서초의 개국공신이기도 하다. 영포는 항우의 명대로 초 의제를 죽였으나 초 의제를 죽인 항우를 보고 자신도 이처럼 죽이거나 후일 자신에게 전부 덤터기 씌우는 것이 아닐까라는 의심에 빠졌고 항우가 제나라 정벌에 나간사이 56만의 한군이 팽성을 점령할 기세임에도 팽성도 구원을 안 하고 구강에서 틀어박혔다. 이렇게 항우와의 군신 신뢰관계가 점차 흔들릴 무렵 유방은 영포를 설득하기 위해 자기 밑의 수하라는 사람을 영포에게 보냈는데, 영포가 저울질하며 고민하고 있을 때 마침 항우의 사신도 영포에게 도착했다. 그러자 수하는 항우의 사신에게 영포가 유방 측에 투항했다고 외쳤고, 결국 영포는 사신을 죽여버리는데 항우도 이에 질세라 인질로 쓸 수 있는 영포의 가족을 바로 죽여버렸다. 삐딱선 타서 수도가 함락되는 와중에도 간만 보던 신하를 설득하려고 사신까지 보내놨는데 그걸 죽이고 적한테 귀순했으니 영포가 적인 게 명백한 건 맞지만, 적장의 가족은 훌륭한 인질이니 죽인 건 항우의 실수다. 당장 유방의 가족들을 영포의 배신 직전에 인질로 잡아 살려두고 멸망 직전까지 매우 잘 활용해먹은 것을 생각해보면, 영포의 가족들도 일부만 죽이거나 하는 식으로 처벌하고 나머지는 인질로 써먹을 수 있었는데 지 성질대로 다 죽여버린 통에 매우 적절히 써먹을 패를 그냥 날려버린 꼴이다.결론적으로 영포 부분만큼은 항우의 잘못이라 할 수 없다. 먼저 영포가 항우가 자신을 죽일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지는 바람에 삐딱선을 타서 두 세력 사이에서 간을 보다가 수도인 팽성까지 점령당하게 만든 것은 영포 쪽이며, 그러고도 항우는 영포를 제나라 정벌에 나간 상황이라 윽박만 지르고 징벌하려 하진 않았는데 영포가 먼저 직접적으로 항우의 사신을 죽이며 배신한 것이기 때문. 영포의 가족이 몰살당한 것도 반년 넘게 항우와[74] 싸우다가 패배하고 도망치고 나서 남겨진 것을 죽인 것이라서 이 부분은 오히려 당연한 대우였다. 유씨 일가에 대한 대우와 비교해 약간 일관성이 없고 그것때문에 제법 손해를 본 면은 있지만. 굳이 따지자면 신안대학살과 의제 시해 등 뒤가 구린 짓에 매번 동원당하는 영포의 불만을 고려하지 못한 점이 문제였을 듯하다. 또한 영포 가족의 처리 건은 당시 기준으로는 딱히 항우가 과하게 지탄받을 잘못은 아니지만, 인질이라는 중요한 카드를 날려먹은 전략적 실책이었다고 정리할 수 있다.
영포는 이후 가족을 죽인 항우를 원수로 생각하였고 복수심으로 유방에게 충성을 맹세하였다. 항우 수하에 있을때도 맹장이었고 전투경험이 풍부한 그는 유방으로부터 지원받은 한의 병사들을 지휘하며 여러 전투에서 활약을 선보였고 유방이 믿고 쓰는 장수에 달하였고 해하전투 이전에는 팽월, 한신과 같이 영토 확장이란 보상을 받고 출전하였다. 이후 한신, 팽월이 숙청당하자 그 다음이라고 생각하여 유방에게 반기를 들었으나 패전하고 숙청당한다.
4.5. 용저, 주란
한신을 견제하기 위해서 제나라에 원군의 총사령관이 용저였고 주란이 부관이다. 용저는 한신을 상대로 지나치게 방심해서 유수 전투에서 처참하게 패전하고 전사했다. 반면 주란은 한신의 실력을 어느정도는 파악했는지 신중한 전략을 제시했다."한나라 군대는 멀리서 싸우러 왔으니, 있는 힘을 다해서 싸울 것입니다. 그러니, 그 예봉을 막아내기가 어렵습니다. 제나라와 초 나라는 자기 나라 땅에서 싸우기 때문에 병사들이 패해 흩어지기가 쉽습니다. 그러니, 성벽을 높이 해 지키면서 제나라 왕으로 하여금 그가 신임하는 신하를 보내 제나라가 이미 잃어버린 성을 이쪽으로 돌아오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함락된 성의 군사들이 자기 왕이 건재하다는 것을 듣고 초 나라가 구원하러 왔다는 것을 알면 반드시 한나라를 배반할 것입니다. 한나라 군대는 2천리나 떨어진 타국에 와 있습니다. 제나라 성들이 모두 배반하면 그 정세로 보아 식량도 얻을 수 없을 테니, 싸우지 않고도 항복시킬 수가 있을 것입니다."
원정군인 적의 약점을 이용해서 수비에 전념을 하고 있으면 적은 지치기 마련이고 그 사이에 제나라 왕 전광의 이름을 이용해 어필을 하면 항복한 사람들도 다시 제나라에 돌아올것이고 전광이 살아있다는걸 알면 제나라 각지에서 유격군이 발생하여 한군을 괴롭힌다는 계책이다. 그렇게 된다면 보급도 어려워 지니 싸울 방법이 없어지는 한신으로서는 항복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75]
정형 전투에서 이좌거가 주란과 비슷한 전략을 냈지만 진여가 거부했다. 한신은 첩자를 통해 진여가 이좌거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소식을 듣자 대단히 기뻐했다. 주란의 지략은 한신을 곤란하게 만드는 수준일 가능성이 높다.
주란을 제치고 용저를 총사령관으로 임명한 것은 용인술 실패였다. 주란이 공적이 역사서 기록에는 없다는 것을 고려하면 항우가 주란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해서 발생한 문제일지도 모른다. 주란은 한신과 비슷한 케이스일지도 가능성이 있다.
4.6. 범증, 종리매
이 2명은 반대로 항우의 진정한 충신들이었고 둘 다 당대 최고의 능력자들이며 믿을 수 있는 참모격 장수다. 범증은 유방이 항우 진영 인물 중에 유일하게 한삼걸 수준으로 치켜세워 줬을 정도로 장량과 견줄 만한 전략가이자 정치가였고, 종리매도 초나라 장수들 중에서는 지략과 무력이 뛰어나 최상위권에 속했던 인물로 평가받는다. 특히 범증은 유방의 위험성을 일찍이 통찰하고 그를 견제하려 했으며 오죽하면 홍문연에서 유방을 어떻게든 죽이려 하였다. 종리매는 종전 이후 한 고제가 초의 중신이었던 종리매, 계포를 잡으면 자신에게 바치라는 명령을 한신이 위험을 감수하며 유방의 명을 씹고 챙겨줄 만큼의 인망을 지녔었다. 이것만 봐도 벌써 당대 최고급으로 비범한 인물들이라는게 증명되는 셈인데 항우는 고작 진평의 반간계에 당해서 이렇게 자기에게 충성하는 능력자들을 의심했으며 이에 속은 항우의 사신의 말에 홀랑 넘어가 범증에게 내통혐의를 말하자 범증은 아예 천하는 정해졌다는 말과 함께 관직을 버리게 하는 실수까지 범했다. 어떻게 보면 주인에게 너무 과분한 인재들이었던 셈. 종리매인 경우 해하전투에서 사면초가 상황이 발생하자 후일 초나라를 재건하기 위해 병사들로 위장하여 항우 곁을 떠났다. 실제로 유방-항우 사이에 깨지지 않았던 최소한의 균형에 금이 간 것은 범증의 실각부터가 시작이고, 유방도 제위 등극 후에 항우가 자기에게 진 이유가 자기는 수하에 장량, 소하, 한신을 두고 있고 이들을 잘 활용했지만 항우는 범증을 제대로 못 써서라고 말했을 정도니 더 이상의 설명은 필요치 않을 것이다.4.7. 항백
이쪽은 반대로 너무 우대해서 망한 경우로 항백은 항우의 삼촌 관계라서 항우에게 대접을 받으며 지낸 항우측 사람이었다. 후술할 한중 분봉이나 유태공 팽형 문제에 항우를 설득하는 것을 보아 참모로 주로 활동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 참모로 조언한 행보들이 하나같이 가관이다. 장량과는 친한 친구이며 한고제의 딸과 혼인 관계를 맺어 사돈관계가 된다. 홍문연에서 항우가 자존심때문에 유방을 죽이기에 망설이자 범증이 항장을 시켜 칼춤을 추다가 유방을 죽이려 하자 항백이 흥을 돋구겠다며 유방을 보호하며 칼춤의 상대로써 친구 장량이 번쾌를 부르는 시간을 버는데 성공한다. 이후의 일을 본다면 항백의 행동이 친척인 항우가 천하를 잡는데 방해를 한 셈이다.홍문연 이후의 행보도 하나하나가 가관이었는데 당장 홍문연 직후인 분봉과정에서 유방을 견재하기 위해 당시 중국 최악의 격오지인 파촉의 왕으로 분봉했는데 여기에 유방이 뇌물로 항백을 구어삶아 파촉과 관중을 연결하는 입구인 한중지역까지 주게 만들었으며, 광무대치 때 한왕 유방이 아버지 태공을 삶아죽인다는 협박에 맞대응 한 유방의 한마디에 당황한 항우를 설득하여 이를 취소하게 만든다. 그러다가 항우가 해하전투로 세력이 급속도로 잃어가자 망설임 없이 이탈하여 한고제에게 항복을 하였고 홍문연에서 죽을뻔한 한고제를 살려준 은인이자 아버지까지 살려준 은인이기에 한 고제는 두 팔 벌려 환영했고 이후 한나라 개국공신으로써 등재되었으며 항씨 성을 버리고 유씨 성을 받아 개명할 정도로 대우를 받는다.[76]
5. 총평
5.1. 역사적 평가
사기 항우 본기 |
항우는 하늘이 내린 무력과 카리스마를 갖고 있었고, 명문 귀족으로서 기품있는 언행과 혈통을 타고났으며, 한신과 왕릉과 진평 등, 당대의 모든 인물들이 입을 모아 공손하고 자애로운 태도를 지닌 청렴한 인물이라 평가하였다. 허나, 그것은 한신이 말했듯이 보통 남자의 그릇이었고, 군주의 그릇에는 미치지 못했다. 상관에 대해 교만하고 부하에 대해서는 인색하였으며, 측근들을 신뢰하지 못했고 친족만 편애하였으며, 무엇보다도 자신에게 거슬리면 학살을 남발하였다. 전장에서는 역발산기개세의 패왕이었으나, 정치적으로는 갓 쓴 원숭이에 불과했다.
유방에게 먼저 관중을 빼앗기고, 군주의 총애도 빼앗긴 시점에 유방의 천하로 흘러갔어도 이상하지 않은 구도였으나, 항우였기에 단순히 일신의 무력과 군사적 능력만으로 유방을 비롯한 모든 제후를 무릎 꿇리고 중국의 패자로 설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지존의 자리에 올랐는데도 항우의 사고관은 고작 일개 제후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한마디로 "왕이 되었는데도 사고방식은 군벌"이었던 것이다. 특히 '자기 나라'인 초나라에만 관심을 뒀지, 천하의 백성을 모두 품으려는 마음이 없어 안팎을 극단적으로 차별하여 인심을 잃었고, 상과 벌이 불공정했으며 어떠한 결정을 내리는데도 어느 순간에 손바닥처럼 뒤집었기에 아랫사람에게 미움을 샀다. 또한 너그러워야 할 때는 잔인했고, 배신해야 이득을 볼 수 있을 때는 너무 정직해서 정치적으로 엄청난 손해를 보았다. 무엇보다도 항우는 너무 잔혹했다. 난세의 군주로서 필요한 요소가 무력과 카리스마를 제외하면 거의 결핍된 상태였다. 이는 오만무례하다는 소리[77]를 들었어도 군주가 보여줄 수 있는 장점은 제대로 보여준 유방과 크게 대조되는 점이다. 말하자면 유방은 항우와 반대로 이름없는 평민 집안 출신에 언동이 품위없이 천박하다는 단점이 있었지만, 무력과 집안 외에는 모든 면이 최저인 항우보다 나았다.[78]
사실 항우의 이런 실패는 항우의 출신 성분과 나이, 항량의 죽음 등 여러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뒤섞인 결과다. 항우는 초나라 귀족 출신인데, 춘추전국시대 귀족으로서 과거 제도와 문물에 대한 향수가 있었고, 출신 성분과 주위의 사상은 덕분에 기본적으로 복고주의를 내세웠다. 사실 학살 문제만 해도 항량 및 범증 등 모두가 방관했던 행동이므로, 항우 개인보다는 당시 초나라군 전체의 문제로 보이는 면도 있다. 신안대학살의 계기 중 하나가 초나라 군사들의 포로 학대로 인한 반목이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니. 문제는 시대는 변하는데 애매한 복고주의만으로 세상을 바꾸기에는 항우의 정치적 역량이 부족했다. 본질적으로 사상적 구심점도 없었고, 자신에게 거스른다는 이유로 초나라의 군주였고 당시 천자인 초 의제를 죽이는 하극상을 일으켜서 자신이 만든 질서를 부정해 버렸다.
나이도 문제인 게 거병할 때가 24세, 오강에서 자결할 때가 31세. 즉, 너무 젊었던 탓도 크다. 아무리 과거에는 10대 중후반부터 성인 대우해 주었다고 하지만 경험이 없는 풋내기인 건 어쩔 수 없었다. 타고난 무장으로서의 능력이야 문제가 없었지만, 미묘한 시대의 흐름을 읽는 정치적 안목은 그냥 얻어지는 게 아니었다. 정치적 능력 결여는 항우의 제후 봉분에서 알 수 있듯이 기준도 없고 정의롭지도 않아서 모두에게 불만을 주었다. 물론 젊은 만큼 새로운 시대상에 맞는 사상과 문물 습득에 개방적일 법도 한데, 정작 항우는 모난 성격으로 남의 말도 안 들어서 공부할 이유도 없었고 하지도 않았다. 공부도 검술도 병법도 때려치운 일화만 봐도 드러난다. 거기다 너무나 일찍 최고의 자리에 오른 자신감이 문제였다. 차라리 유방을 그대로 관중왕으로 인정하고, 의제 체제 하에서 정치 싸움을 벌였다면 군사적 역량 외의 요소의 필요성을 느끼고 성장할 길이 있었을지도 모르겠으나, 범증이 주도한 홍문연에 의해 항우는 자신의 무력을 맹신하게 되었다. 이후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감을 깨달았을 땐 이미 모든 게 늦은 후였다.
무엇보다 가장 큰 문제는 이런 항우가 믿고 따랐던, 그렇기 때문에 항우를 제어할 수 있었던 항량이 너무나 이른 시점에 죽었다는 것. 당시 항량은 항우에게 없는 귀족으로서의 식견과 정치적 역량, 사상적 구심점, 행정적 능력 등을 갖추고 있었다. 특히 항량이 정치적, 행정적 문제를 직접 다루고 항우는 군대만 관리했다면 항우가 보여준 정치적 실패나 전략적 문제는 발생 안했을 터였다. 혹여 항우가 항량 밑에서 경험을 쌓고 정치를 맡았다면 훨씬 괜찮은 성과가 나왔을 수도 있었다.
실제로 초나라의 상황이 열악해지고 한신의 북벌이 완수되는 형양 전투 후반부터 광무 대치 기간의 항우는 그저 감정 가는 대로 움직이는 행동에서 벗어나 전투 외에 다른 수단을 꽤 많이 시도해 보는 모습을 보인다. 13살 남자아이의 말을 받아들여 학살을 중지하거나, 하찮게 여겼던 한신의 독립마저 인정할 생각으로 회유를 시도하고, 그토록 이를 갈았던 제나라 전씨와 동맹을 맺는 등. 문제는 그동안의 행실이 있어서 번번이 실패하고, 때는 이미 항우의 성장을 기다려 줄 형세도 아니었다는 것이지만. 또한, 범증 말고 믿을만한 인재도 없었다. 항우를 옆에서 보좌하며 항우를 그나마 말 듣게 할 수 있던 숙부 항백은 유방의 측근인 장량과 친해서 사실상 첩자 짓을 했다.[79] 무턱대고 왕에 올랐다가 처신에 실수한 탓에 몰락한 사례는 진승, 한신, 노관 등, 항우 외에도 당대에 나름 많기도 했고.
항우는 죽기 전에 " 나를 망하게 한 건 하늘이지, 내가 싸움을 잘못한 것이 아니다."라는 말을 했다. 보통 이 말에는 "항우가 자신이 죽는 순간까지 무엇을 잘못했는지조차 이해하지 못 했다."는 해석이 따라붙는다. 그런데 민심이 곧 천심이라는 맹자의 주장에 따르면 이는 오히려 매우 정확한 평가가 된다. 싸움은 잘 했지만 민심을 잡는데 실패하여 하늘에게 버림받은 것이라고 해석하면 지금까지 살펴본 항우의 패인과도 들어맞기 때문이다. 주나라의 천명 사상과 연관지어 해석한다면, 이는 항우의 입을 빌어서 항우의 부도덕함을 스스로 자인하게 하는 일화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항우는 싸움은 잘 했지만 천명을 잃은 탓에 하늘에 의하여 망하고 말았던, 다른 말로 하면 천벌을 받은 것이다. 물론 역사가들이 황당무계한 발언 취급하는 것도 그렇고, 그 항우가 민심이 천심임을 알고 뉘우치며 뱉은 말이라고 생각하기는 힘들기 때문에 그저 아무렇게나 뱉은 말이 아이러니하게도 맞아떨어진 걸로 보인다. 설령, 진짜 후회하며 한 말이라도, 죽기 직전에야 깨달았으니 너무 늦은 뒤였다.
결론적으로 항우는 국지적인 전투에서는 수없이 승리했지만, 전체적인 국면에서는 유방에게 앞서지 못했다. 항우는 전투 전술에는 뛰어났지만, 전쟁 전략에 앞선 유방에게 패할 수밖에 없었다.[80]
사마천은 다음과 같은 평을 남겼다.
진나라가 실정하자 진섭(陳涉)이 먼저 일어났다. 이어서 천하의 호걸들이 벌떼처럼 그 뒤를 따라 서로 다투었으니 그 수를 다 헤아릴 수 없었다. 그러나 당시 항우는 한 치의 영토도 갖고 있지 않으면서도 진나라 말기의 혼란한 틈을 타서 들판에서 일어나 세력을 잡고 3년 만에 다섯 제후들을 이끌고 진나라를 멸했다.
이어서 천하를 나누어 휘하의 장수들을 왕과 후에 봉했으며 모든 정령은 그로부터 나와 스스로를 패왕이라 칭했으니 비록 그의 권세가 끝까지 가지는 못했으나 그와 같은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다.
이윽고 항우가 관중을 버리고 초나라에 돌아와서는 의제를 쫓아내 죽이고 자립하자 제후왕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해서 난이 일어났다. 항우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그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 것을 따르지 않았으며 패왕의 업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무력으로 천하를 다스리려 했다.
이에 5년 만에 나라는 망하고 그 몸은 동성(東城)에서 죽었으면서도[81] 여전히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것은 참으로 그의 허물이라고 하겠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용병을 잘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라고 말했으니 어찌 그가 황당무계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기》 항우 본기
이어서 천하를 나누어 휘하의 장수들을 왕과 후에 봉했으며 모든 정령은 그로부터 나와 스스로를 패왕이라 칭했으니 비록 그의 권세가 끝까지 가지는 못했으나 그와 같은 일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전례가 없었던 일이었다.
이윽고 항우가 관중을 버리고 초나라에 돌아와서는 의제를 쫓아내 죽이고 자립하자 제후왕들이 반기를 들기 시작해서 난이 일어났다. 항우는 스스로 공로를 자랑하고 그의 사사로운 지혜만을 앞세워 옛 것을 따르지 않았으며 패왕의 업을 이루었다고 하면서 무력으로 천하를 다스리려 했다.
이에 5년 만에 나라는 망하고 그 몸은 동성(東城)에서 죽었으면서도[81] 여전히 자기의 잘못을 깨닫지 못한 것은 참으로 그의 허물이라고 하겠다.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한 것이지 내가 용병을 잘못해서 지은 죄가 아니다.」라고 말했으니 어찌 그가 황당무계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사기》 항우 본기
5.2. 문학적 평가
분명히 역사적으로 항우는 그야말로 정치인으로서도 왕으로서도 해서는 안 될 짓만 골라서 하는 폭군이자 암군에 불과했다. 그러나 대중들의 입장에서, 예술적인 입장에서 항우는 엄청난 사랑을 받는 것은 물론 현대의 중국 지식인들 중에서도 항우에게 긍정적인 인물이 상당수 있을 정도로 항우의 서사는 부정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이러한 항우의 이미지는 단순하게 '창작물로 인한 미화' 내지는 '패배자에 이입하는 언더독 효과'로만 설명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이것은 항우는 매우 이질적이고도 독보적이게도 역사로부터 나타났으나 역사로부터 탈각되어 "이미지" 그 자체로서 하나의 상징이 된 인물이기 때문이다.중국사에서 포폄[82]의 절대 기준은 유교 이데올로기로서 충신, 명군, 의협, 군자가 높은 평가를 받았다. 하물며 항우는 그러한 이데올로기와 중화라는 개념을 최초로 정립한 한 고제의 안티테제 격 인물이었다. 그러나 항우는 유교적으로는 충의도 의협심도 애민도 갖다 버린 난신적자였고, 정치적으로는 이견의 여지가 없는 폭군이었음에도 단지 무(武)와 카리스마만으로 중국을 대표하는 영웅호걸의 명단 최상단에 자리하고 있는 실로 불후의 이채(異彩)를 내뿜는 인물이다.
역사의 박한 평가와는 다르게도 그의 일대기는 너무나도 드라마틱하며, 또한 개인적인 면모에서 비롯되는 일화도 많이 남겼다. 항우는 그 자신이 남긴 행적과 그 행적이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문학적으로 정리되는 과정을 통해 짧고 굵지만 화려한 행적을 남긴 나쁜 남자형 주인공이 최후에는 비극적으로 패배하는 이야기라는 하나의 서사 유형에서 거의 모범이라고 할 만큼 완벽한 전형을 남겼다.
아닌 게 아니라 항우는 몰락한 귀공자 출신, 온갖 헛점에도 불구하고 그 순수하고 천부적인 재능만으로 천하를 잠깐이나마 석권했다는 무력과 카리스마, 자신의 능력으로 정점에 올랐으나 자신의 과오로 몰락하는 드라마틱한 생애, 우미인과의 로맨스, 귀족적인 인자한 모습과 광포한 학살자의 면모가 아무렇지도 않게 공존하는 인격,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끝에 오만( 휘브리스)에 빠짐, 그로 인한 몰락과 격정적인 최후(자살) 등등, 왕조시대 중국의 정치인이라기보다 고대 그리스의 서사시나 비극의 영웅이 중국에 돌연 떨어진 듯한 인상을 준다. 지구 반대편에서도 문화 측면에서는 전형적으로 찬미를 받는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다는 것이다. 아무리 봐도 소설 속의 인물 같은 사람이 현실에 태어나 소설과도 같은 행적을 보여주고 갔으니, 이것이 항우가 답도 없는 실책에도 불구하고 영원불멸의 이름을 얻고 있는 이유이다.
사실 항우의 이런 드라마틱한 평가에 매우 큰 영향을 준 인물이 하나 있으니, 바로 위의 정치적 평가에서 항우를 죽어라 씹어댄 사마천이다. 사마천은 특유의 이야기꾼의 천재성으로 걸출한 문장으로 항우의 삶을 재구성하고 응축해냈다. 《 사기》는 각 편과 인물 하나하나의 묘사가 핍진성이 있고 그 개성을 여실히 드러내는 것으로 고평가받지만, 그중에서도 <항우본기>는 《사기》 전편 안에서도 손꼽히는 명문이다. <항우본기> 자체가 중국판 영웅 서사시라 해도 무방할 만큼, 어지간한 연의소설이나 무협소설을 능가하는 생동감을 자랑한다. 특히 해하 전투에서 <해하가>를 부르고 한나라군의 포위를 돌파하다가 자결하기까지의 대목은 <항우본기>의 압권으로 사마천이라는 대문호의 필력이 폭발하는 지점이다. 사마천은 항우의 포악을 비판하면서 그의 파멸을 그 스스로가 불러들인 것이라 말하면서도, 역설적이게도 역사의 패배자인 그를 제후와 신하, 반역자를 다루는 세가(世家)나 열전(列傳)이 아닌 정통한 천하 종주의 계보인 <본기>(本紀) 안에 포함시켰고, 극단적인 암과 명을 겸비한 그 생애를 역사에 다시 그려넣어 그에게 불멸을 부여했다.
그렇게 '역사 인물'로서의 항우는 패배자로서 죽었지만, 불후의 저작을 통해 '문화적 캐릭터'로서 다시 태어난 항우는 중국을 넘어 동아시아 세계의 한 문화적 원형으로 오늘날까지도 남아 후대에 초한지(서한연의), 패왕별희 등 수많은 이야깃거리를 생산하고 무수한 예술가들에게 영감을 주며 수많은 영웅호걸들의 바탕으로 살아 숨쉬고 있다. 특히 우미인, 오추마, 초진창 & 초천검에서 비롯된 '전장에서는 명마를 타고 명검을 휘두르며, 절세미인을 하나뿐인 아내로 가진 순정마초' 라는 중국식 영웅호걸의 원형은 항우에서부터 탄생했다. 라이벌인 유방 역시 《 삼국지연의》의 유비, 《 수호전》의 송강 등 인화(人和)형 영웅 캐릭터의 원형으로서 지금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문화평론가 리어우판(李歐梵)은 《항우본기》와 항우를 호메로스의 《 일리아스》와 아킬레우스에 견주면서, 사마천은 일필휘지의 《항우본기》를 통해서 사람들에게 개인이 역사의 흐름을 이길 수는 없지만 "강렬한 개성은 때로 역사를 밀어낸다"는 사실을 보여주었다라고 평가했다.[83]
중국의 역사학자이자 문학가 이중톈은 이하와 같이 평했다.[84]
항우 주변에는 청렴결백하고 강직하며 지조 있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반면 유방의 주위에는 이익만 밝히는 염치없는 인간들이 대부분이었다. 그들은 유방에게 기대어 작위(벼슬)를 구걸하고 식읍(재산)을 얻고자 했다. 이런 염치없는 인간들의 욕망을 잘 알고 있는 유방은 이들에게 적당히 벼슬과 재산을 주면서 잘 구슬려 이용했기에 이길 수 있었다.
유방의 한나라가 시작된 후 중국에서 항우처럼 바보 같고 순진하고 제멋대로인 영웅은 점점 줄어들고, 그 대신 음험하고 이익만 밝히는 비열한 음모가와 어리석고 진부한 서생들만 늘어났다. 항우가 자신의 실패를 통탄하며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구나"라고 한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항우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것으로, 이 때부터 중국에서 호연지기를 가진 호랑이와 표범의 시대가 끝나고 주인 말을 잘 듣는 개와 양의 시대가 문을 열었다.
사람은 누구나 청렴결백하고 강직하며 지조있고 예의 바르게 살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살다가는 항우처럼 인생에서 실패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중국 사람은 그렇게 살고는 싶지만 그렇게 살 수가 없기에, 그렇게 살았던 항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유방의 한나라가 시작된 후 중국에서 항우처럼 바보 같고 순진하고 제멋대로인 영웅은 점점 줄어들고, 그 대신 음험하고 이익만 밝히는 비열한 음모가와 어리석고 진부한 서생들만 늘어났다. 항우가 자신의 실패를 통탄하며 "하늘이 나를 망하게 하는구나"라고 한 것도 틀린 말은 아니다. 항우의 죽음은 한 시대의 종말을 알리는 것으로, 이 때부터 중국에서 호연지기를 가진 호랑이와 표범의 시대가 끝나고 주인 말을 잘 듣는 개와 양의 시대가 문을 열었다.
사람은 누구나 청렴결백하고 강직하며 지조있고 예의 바르게 살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살다가는 항우처럼 인생에서 실패할 확률이 높다. 그래서 중국 사람은 그렇게 살고는 싶지만 그렇게 살 수가 없기에, 그렇게 살았던 항우를 좋아하는 것이 아닐까 추측한다.
[1]
이후
후한 말기의
군웅할거 시절,
동오의 선조인
손책은 용맹함과 무력이 가히 항우랑 닮았다 하여 소패왕이라고 불릴 정도로 위상이 올랐다. 손책은 군사적 능력이나 용맹함 뿐만 아니라 고고하고 오만하며 무자비하고 다소 잔인한 성격까지 항우와 굉장히 닮았다.
[2]
가공의 소설 초한지에서는 범증이 장량을 죽이기 위해 왕호를 짓게 했으나 장량은 교묘히 피해 항우가 선택하게 만든다. 황제의 제는 본인과 맞지 않다고 항우가 걸렀고 과거 지도자 명칭인 패와 왕을 듣고 고금(옛과 지금)을 아우르는 왕 패왕이라 지었다고 전개된다.
[3]
물론 실질적으로는 이런 지도자로서의 능력은 무력도 포함되기에 패자는 무력도 강력한 군주인 경우가 많았다. 아니, 거의
대부분이었다.
[4]
흔히 중국 역사상 무력 면에서 제일 강한 사람을 삼국지의 여포나 장비, 관우, 허저, 마초, 조운 등을 찾으나 실제로 개인 무력이 가장 강했던 사람은 누가 봐도 항우다. 항우는 최후의 전투인 해하에서 패전하는 순간에도 한나라에 소속된 백여 명의 장수들과 동시에 맞붙게 되었으나 혼자서 이들을 박살내었다. 이는 엄연히 정사의 기록이다.
[5]
회계에서 처음 군사를 일으켰을 때, 송의를 참살하고 상장군이 됐을 때,
거록대전 때,
광무 대치 등.
[6]
중국사에서
만인지적이라 불리는 인물들은 유래인 항우를 비롯해
관우,
장비,
등강,
이성,
한세충 등이 있지만, "그 중에서 최강이 누구냐?"고 물으면 다들 항우를 첫손에 꼽는다.
[7]
다만 항우군 전체로 보면 그럴 수도 있으나 원래 항우의 부대는 약 5천명 정도의 초나라 장정들을 가려 뽑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농민군과는 차원이 달랐다. 예를 들어 팽성에서 한나라 50만 대군을 물리친 초나라의 3만 군대는 그렇게 가려 뽑은 전사들을 중심으로 하였다.
[8]
중국은 일찍부터 중앙집권화가 이루어졌고 거기에 대규모 인구를 부양할 수 있는
화북 평야와 대량의 인구를 수용할 수 있는 빠른 도시화 덕분에
고대부터 만명 단위의 대규모 동원이 가능했는데, 이 때문에 중국의
명장들은 기동전 보다는 대규모 인원이 동원된
회전(會戰)과
공성전에 능한 타입들이 많다.
[9]
진나라 군세가 가진 군량, 그리고 뒤늦게 합류한 제후들의 군량을 얻었을 공산이 크다.
[10]
실제로 항우와 싸운
유방의 경우도
소하를 위시한 훌륭한 장수와 관료들이 보급을 끊임없이 해주었기에 항우를 상대로 간신히 버텼던 것이다. 역사상 이름을 알린 지휘관들이 남긴 명언들 중에선 보급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들이 꼭 있다. 그
조조도 주특기가 적군의 밥줄 끊어먹기였노라고
제갈량이 말하기도 했고.
[11]
의외로 이 중에서도 특히 콘스탄티누스 1세가 항우와 가장 비슷한 유형의 인간이었다. 특유의 욱하는 성질머리와 무시무시한 개인 전투력, 자신에게 반항하는 자에 대한 필요 이상의 잔인한 행태, 대단한 기동전 능력 등 공통점들이 있다. 다만 콘스탄티누스는 항우와는 달리 운이 좋아서 당대 최고의 정치가들과 장군들 밑에서 오랜 세월 동안 군략과 정치를 배울 기회가 있었다는 점이 다를 뿐. 리처드 1세는 전략적으로 필요하다 싶으면 잔인한 결정을 내렸으나 쓸데없이 잔인한 행각을 일삼지는 않았으며, 대범하고 관대한 모습도 많이 보였다.
[12]
이렇다 보니 먼 훗날
정난의 변에서 상황이 불리하게 흘러간 정난군 측에서 후퇴하자는 소극적인 의견이 오가자 정난군 내에서도 용맹한 '주능'이라는 자가
한나라의 고제가 항우에게 번번히 패하면서도 끝내
천하를 쟁취한 것을 예시로 들며 "우리는 그에 반해 연전연승을 거두고 있으니 충분히 해볼 만한데 후퇴를 한다면 정말로 질 것"이라 주장했다.
주체 또한 주능의 의견에 동조했고 얼마 뒤 극적인 승리를 거둔다.
[13]
실제로 항우의
전성기가 도래한 것은
거록대전이 계기로 이 때에는 일단
초의제를 섬기는 신분이었기에 명목상 최고 지휘관은 아니라 할 수 있으며 항우 또한 패왕이 아닌 많고 많은 반
진(反秦) 군웅들 중 가장 진나라 공격에 성공적이던 사람 정도로 볼 수 있다. 즉, 반
진(反秦)의
선봉이자 돌격대장. 그리고 그런 역할로서 완벽한 성공인
거록대전을 통해 천하의 군웅들이 항우를 두려워해 무릎으로 기어서 항우를 만났고 아무도 고개를 들어 그를 쳐다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도 그럴게 단 한판의 승부로 전국을 뒤집어버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인데, 항우는 그 불가능을 이루어 냈다.
거록대전 한 방으로 인해서 진나라의 반격으로 위기를 맞은 반진(反秦)
제후들 그리고 그
진나라의 지휘관인
장한의 항복을 받아내어 진짜로 진나라의
생명연장의 꿈을 완전히 부숴버린 것이다.
[14]
과장이 아니고 역사서의 기록을 보면 정말 항우의 패기에 제후들과 군중이 압도당해서 아무런 말도 못하고 항우의 뜻대로 흘러가는 것이 대부분이였으며 항우는 무력은 당대 최강이였고 그의 군세는 항우와 그의 근위대들을 필두로 진격만 하면 적 지휘관을 썰어버리며 질풍노도에 가까울 정도의 정예병이기도 하였다.
[15]
애시당초 분봉 이전의 문제로 항우에게 분봉을 받은 왕들은 전부 원래 세워져 있던 나라의 일개 장수급인데 항우의 소환에 응해 공을 세워 원래 있던 왕들을 쫒아내고 왕으로 삼았던 것이다. 즉, 처음부터 원래 있던 나라의 장수들을 하극상을 하게 만들었던 것. 이것만 해도 큰 문제인데 거기다 원래 있던 왕들은 명분을 가지고 있거나
전국시대 왕국의 직계 후손이라는 타이틀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항우가 분봉한 왕보다 지역 기반이 잘 닦여 있어서 분봉을 받았다고 해도 금방 원래 왕에 의해 쫒겨나는 경우도 많았다. 원래 왕들은 당연히 항우를 적대했다.
[16]
뒤늦게 용저에게 20만이나 되는 대군을 보내 막으라 했는데 이 말은 반대로 하면 더 빠른 시점에서도 20만까진 아니라도 대군을 보내 막을 수 있었단 소리다. 게다가 그 20만은 한신과 이 지역 군세에 참패하고 용저는 생포당한 뒤 참살당했다. 실제로 한신이 아직 제대로 점령 / 설득하지 못했을 초창기였으면 적어도 지역 전체를 상대하진 않았어도 됐으니 형편없이 참패할 일은 없었을 것이다. 다만 상대가 이미
3만으로 20만을 박살내본 한신이라서 이렇게 했어도 어떻게 됐을진 또 모른다.
[17]
몇번 만나서 부딪힌 적은 있었고 이 때마다 승리하긴 했지만 애초에 팽월은 유격전을 주로 하는 장군인지라 항우와 만나면 직접 맞상대하지 않고 전력을 최대한 보존해 살아돌아갔기에 이 승리는 크게 의미가 없었다.
[18]
관중은 4방향이 거대한 산으로 둘러싸여 함곡관, 무관과 같이 수도의 관문 역할을 하며 폭이 좁은 지형에 요새들이 있어서 방어에도 용이했고, 교통의 요지인 점과 위수라는 강지대가 있어 곡창도 나오는 만능 지형이기에
불로불사에 집착해 미쳐가기 이전의
시황제는 물론 13개 왕조가 관중을 수도로 삼을 정도로 천혜의 땅이었다.
[19]
거기다
춘추전국시대를 제패한 진나라의 유산은 아직 건재해서 당시 관중의 경제력은 어마무시했다. 당장 유방은 관중에서 나오는 경제력으로 항우를 상대해서 승리했으니 이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20]
이때 항우 아래에 있던 간의대부 '한생'이 관중을 버리지 말자고 했음에도 항우가 도읍을 팽성으로 삼으려 하자 초인목후이관(= 초나라 사람은 갓을 쓴
원숭이)라며 비난했지만 알아듣지 못했고, 이후
진평이 이 말을 해석해주자 분노하여 한생을 삶아서 죽여버렸다.
[21]
팽성은 평야 한가운데 성 하나 세워놓은 형국이라 사방팔방에서 공격당할 가능성이 높은 곳이었다.
[22]
가정일 뿐이나 만약 항우가 관중을 새 도읍으로 삼고 유방을 파촉으로 봉했다면 상황이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파촉과 관중은 험난한 산맥을 경계로 한 지역이라서 유일한 길이 잔도였기에 감시에도 용이했다. 20만 장정을 죽여버리고 셋만 살아돌아온
장한,
사마흔,
동예 따위가 아니라 항우가 있었더라면 유방은 기회를 엿볼 수밖에 없을테고 이후 항우의 제나라 정벌을 틈타 관중을 노린다 해도 구강왕 영포를 위시한 항우의 장수들을 뚫어내기는 쉽지 않았을 것이다.
[23]
애당초 부하들의 면모를 감안해서 활용하는 게 지도자의 용인술이다.
제갈량은
위연과
양의를,
유비는
법정을,
손권은
감녕과
반장을 인성이 좋아서 중용했는가?
[24]
하지만 그러면 뭘 하나, 그 범증이 항우의 유일한 인걸이였는데(...).
[25]
나중에 항백의 건의로 한중까지 덤으로 받긴 한다. 항백이 일부러 적인 유방에게 이로운 짓을 한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항우가 한 짓은 워낙 치졸한 데다가 명분도 떨어졌기 때문에 이렇게라도 무마하지 않으면 안 될 수준이었다.
[26]
그리고 사실 이쪽이
진평의 원래 노림수였을 테고. 결과적으로 범증만 떼어냈어도 성공한 것이였지만 말이다.
[27]
당시에는 의제 역시 회왕으로 불렸다. 역사적으로 그를 호칭할 때 초후회왕이라고도 부른다.
[28]
사실
항량이 죽은 상황을 이용해 아첨한 송의를 총애하게 된 의제로 인해 허무하게 실권을 찬탈당하는 바람에 자기 집안이 일으킨 군대에서 뜻대로 움직이기 위해 하극상을 저지른다는 어이없는 상황을 돌파하며 시작부터 관계가 꼬였던데다, 나중엔 홍문연까지 저지른 마당이니 의제를 제거한 것 자체는 불가피했던 면도 어느 정도는 있었다. 문제는 다들 보라고 왕들까지 동원해서 대놓고 의제를 죽여버리고 역적질을 벌이다보니 알아서 욕을 먹게 되었다는 것.
[29]
하지만 이미 이 시점에서는 항우가 모든 권력을 차지한 상황이었으므로 이미 명분만 남았을 뿐, 허수아비였던 의제를 죽일 필요는 없었다.
[30]
그리고 조조와 항우도 연의나 초한지 기준으로 자신을 역적으로 모욕한 자들을 처단할 때 확연히 달랐다. 항우는 자신을 모욕하거나 역적으로 한 소리를 하면 잔혹하게 죽여서 악명만 높이는데 비해 조조는 어느 정도 참고 영악하게 차도살인을 하는 경우가 있다.
[31]
이미 세상은 진작에 어지러워져 있었다. 진이 통일을 하긴 했지만 제대로 육국을 통합하는 데는 실패했기 때문에 그 반동으로 진승, 오광이 난을 일으켰으며 그 외에도 다수의 인물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왕을 칭하고 있었다.
[32]
하지만 이건 힘을 갖추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거고 힘을 갖춘 인물이 명분까지 겸비한 경우에는 이 시대에도 명분의 가치는 그렇게 만만하지 않았다. 당장 황제 한번 하고 싶다고 나섰던 영포도 결국은 토벌당했고 명분을 등한시했던 항우는 그렇게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서도 결국은 유방에게 멸망하고 말았으니 명분의 힘은 결코 얕잡아 볼 만한 것이 아니다. 극도로 정치 및 군사 체제와 전략이 발전한 현대에도 명분이 없다면 크게 불리해지고 나아가 패한단 건 이미 수없이 증명됐다.
[33]
정확히 말하면 명분의 힘이 약해졌다기보다는 군웅들이 명분이라는 것을 얕보게 되었다는 점이 컸다. 한마디로 내가 힘이 있으면 명분이야 아무래도 좋다는 것. 하지만 애시당초 초나라 장군에서 출발해서 왕이 될 명분을 만들기 위해 의제를 데려온 게 항우의 숙부인 항량이었다.
[34]
이런 식으로 명분의 가치를 깎아내린 것이 바로 진승과 오광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그 명분이 없었기에 그렇게나 쉽게 사라졌던 것이다. 항우의 숙부 항량은 이 점을 잘 알고 있어서 일부러 초나라 왕가의 자손을 데려다 초회왕으로 삼아 자신의 명분을 높인 것인데 아무리 항량 사후 권력 다툼이 있었다고는 하나 항우는 그 명분덩어리인 의제를 자신의 손으로 굳이 죽여서 역적 인증을 하는 바람에 새 시대를 열만한 역량이 없음을 만천하에 공개하고 만 것이다.
[35]
그럼에도 항우는 진승과 오광만도 못했다. 진승과 오광은 왕후장상이 어찌 씨가 따로 있겠냐고 한 주제에 자신들은 부소와 몽염의 이름을 써먹었기 때문. 무지렁이인 이들조차도 희미하게나마 나름 명분의 중요성을 알았던 것. 오히려 어중간하게 지위가 있었던 항우가 더 명분에 대한 개념이 없었다.
[36]
항량은 굳이 초회왕을 세워서 명분을 탄탄히 해 두었고 이 명분은 의외로 강력한 효과를 발휘해서 처음에는 항우나 유방 등 기라성같은 장수들도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37]
유방이 출진할 때 한 노인이 의제의 죽음을 울면서 알리자 유방은 공분하여 의제의 제사를 지내고 자신이 의제의 후계자임을 공고히 했다.
광무 대치 때도 유방은 의제를 살해한 사실을 두고 항우를 크게 꾸짖어서 한나라군의 사기를 높였다. 설마 유방이 의제가 어떻게 되었는지 몰라서 그랬을 리 없음에도 이런 정치적 쇼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과 명분을 세웠기 때문에 결국 민중과 선비들의 지지를 얻을 수 있었고 항우를 토벌할 수 있었던 것이다.
[38]
사실 의제만 살아있었다면 유방이 한 짓은 빼도 박도 못하는 하극상이었다. 그런데 항우가 의제를 죽였기 때문에 유방의 거병은 하극상이자 반역이 아니라 의제의 복수를 위한 의군이 된 것. 당장 광무산에서 유방이 항우가 의제를 시의한 일로 꾸짖으니 항우는 얼굴만 붉힐 뿐 아무 말도 못 했다.
[39]
물론 이는 항우가 자신이
두 번째라는 것을 참아줄 수 있는 성격이 아니라서 그런 것이기도 하다. 사실
홍문연 자체가 열린 이유 중 하나도 바로 이 때문인데(요컨대 자기보다 더 큰 공을 세운 유방을
함곡관을 잠근 일을 핑계로 삼아 제거하려 한 것이다.), 정작
명분이 없어서 유방을 처치하는 것에 실패했고 진나라 멸망의 1등 공신인 유방을 굳이 파촉에 묻어버리려 한 것도 사실상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40]
이는 의제가 모든 제후들 앞에 약조한 내용이기에 신하인 항우가 이를 어기면 명분이 약화되는 것은 자명했다.
[41]
초 의제는 항우를 위시한 항씨 가문에 의해 추대된 왕이라 항씨 가문의 입김이 강했으며 장성하고 항량이 죽자 송의를 대장군으로 삼아 견제를 하는 면모도 보였다. 일각에서는 관중왕 레이스에서 유방에게 편의를 줬다고 알려져있으나 사실 유방을 관중으로 먼저 가게 해준 이유는 초의 여러 신하들이 인덕이 높은 유방을 보내야 한다고 건의를 하여 의제가 이를 윤허하였기 때문이고 반면 당시 항우는 조나라가 함락 직전인지라 동맹국을 구하기 위해서 송의와 함께 믿을 수 있는 전력인 항우를 보낸 것이다.
[42]
물론 엄밀히 말하면 유방에게 편의를 봐준 건 맞다. 실제로 진의 주공인 장한군은 항우가 향한 곳에 있었으니까 하지만 대신 항우의 군대는 유방보다 많았고 또, 유방이 간 무관 방향도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실제로 무관 쪽도 수십 개의 성과 관으로 막혀있었던 것. 그럼에도 유방은 그 특유의 유연성으로 안될 곳은 넘어가고 웬만하면 말로 항복을 시키기도 하는 등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앞서갔고 반면 항우는 거록대전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그 포로들을 전부 죽이는 등 뻘짓으로 인해 그렇잖아도 늦은 속도를 더 늦췄다.
[43]
반대로 유방은 파촉 땅에서 나오자마자 제일 먼저 초 의제의 제사부터 지냈다. 이는 다른 제후들과 차별점을 두는 것과 동시에 자신만이 초 의제의 후계자로서 다음 시대의 주인공이라고 선언해 버렸던 것이다. 사실 휘하의 하극상도 문제였겠지만 유방에게 명분을 준 것이야말로 진정으로 초 의제를 시해하여 항우가 보게 된 가장 큰 피해일 것이다.
[44]
항우가 도주 끝에 오강까지 도달했다는 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자살하는 순간까지 항우의 근거지인 강동은 여전히 그에게 충성을 바치고 있었다.
팽월에게 점령당한 외항 등의 성들이 잠시 저항하기도 했지만 그거야 당장 성 안에 있는 팽월에게 죽을 수는 없으니 나온 행동일 뿐이지, 완전히 항우에게 등을 돌려서는 아니었다.
[45]
원래 항씨 집안은 초나라를 끝까지 지키려고 싸우다 죽은 명장 항연의 후손이다. 그래서 항연의 자손이 초나라 왕을 찾아다 왕으로 세운 것 자체가 명분이라는 면에서 상당히 그럴 듯했고 그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초나라로 몰려든 것이었다.
[46]
진작부터 사이가 매우 나빴던 제나라가 초나라의 바로 머리 위에 있었기 때문에 후에 한신을 두려워하기도 했고, 누가 예측했을 리야 없겠지만 항우가 떠난 뒤 곧바로 대기근이 관중을 휩쓸기도 했다.
[47]
물론 이는 그만큼 항우가 한 짓이 명분에 어긋났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48]
또한 후대의 대표적인 패자인
조조 조차도 항우만큼 학살을 일삼고 항우 자신보다 욕은 많이 먹었을지언정, 직접
헌제를 살해하지는 않았고 오히려 헌제는 조조의 손자 조예의 대까지 천수를 누린다. 또한 조조는 잔혹한 면모는 항우 못지 않지만 조조보다 항우가 더 혹평을 받는 경우가 조조는 그래도 정치적 군사적 용인술이 항우보다 뛰어나고 어느 정도 자기편을 아끼는 모습을 보여주었고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과 실용적이고 효율적인 의견을 수용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항우는 정치력과 용인술도 조조에 비하면 아주 막장이고 무작정 살육을 저지르는 등 지도자로서 조조보다 못하기 때문이다.
[49]
이 중 장이는 결국 유방에게 귀순하게 된다. 이후 한신과 함께 큰 공을 세워서 아들 장오가 공신 서열 3위에 임명받고 유방의 사위가 되는 등 크게 대우받았다.
[50]
그나마 후술할
백기등 진나라가 잔혹한 행보를 보여주기는 했지만 그것도 포로 학살의 경우였고 항우는 포로뿐 아니라 민간인까지 학살했다. 그리고 학살은 최악의 짓이지만 도덕적 면모는 잠시 치워두고 말하자면, 그래도 백기는 학살을 통해 최소한 전략적인 이득이라도 취했다. 백기가 일으켰던 학살로 인해 조나라의 장정이 씨가 말라 더 이상 조나라가 진나라에 대항할 여력을 없앴기 때문. 하지만 항우가 저지른 학살은 본인에게 아무런 도움도 되지 않았다. 그리고 백기는 죽기 전 자신이 저지른 학살을 크게 반성했지만, 항우는 그런 것 없이 하늘 탓만 했다.
[51]
삼국지의 조조가 서주 대학살을 일으키기는 했지만 아버지의 원수를 찾아 없앤다는 사적인 명분이라도 있었고, 동탁과 항우보다는 학살하는 편이 적었기에 그나마 나은 취급을 받는다. 물론 그 조조도 대학살로 인해 민심을 크게 잃었고, 이는 삼국통일을 이루는 데 최대의 걸림돌이자 부메랑으로 돌아온다.
[52]
항우와 비슷하게 학살을 저지른 인간은 400년 뒤의
조조가 있는데, 그나마 조조는 항우보다 훨씬 더 뛰어난 정치적 능력을 갖추고 나중에는 민간인 학살을 어느 정도 자제했음에도 이 잔혹성이 발목을 잡아 중국 통일에 실패하고 중국에서도 항우 못지않은 악인으로 평가받았다.
[53]
초한전쟁 때는 주요 지도자가 대부분 피지배층 출신이라 백성들에게 밉보이면 바로 등을 돌려버린다. 비슷한 시기 제나라
전영이 이런 식으로 위기에 빠지자 백성들에게 바로 피살당한다.
[54]
반면 함양 주민을 돌본 숙적
유방은 항우의 만행과 대비되어 훨씬 쉽게 민심을 얻게 된다. 즉, 항우의 큰 실책.
[55]
이 소년이 항우에게 할 말이 있다고 왔는데 항우는 성인 남성에게는 매몰차도 아이들이나 가련한 사연을 들으면 눈물을 흘리는 등 감수성이 많은 의외의 인물이었다. 이에 흥미를 느낀 항우는 소년을 자신의 앞으로 오게 하였고 자신들에게 늦게 항복한 이유와 팽월에게 협력한 이유에 대해 소년은 "팽월이 창 칼을 들이밀며 협력하지 않으면 죽이겠다고 하는데 어찌 협력을 거부하겠습니까? 그리고 항복이 늦어진 것은 팽월이 남긴 소수의 부하들이 자신들을 감시하고 있었고 그 부하들을 설득하느라 늦었습니다."라는 정론에 크게 웃으며 학살 시행 중단을 지시하였다는 이야기가 있다.
[56]
다른 사서의 기록에서도 하도 닥치는 대로 죽이고 다니다 보니 이민족들도
한고조에게 붙었을 정도다. 일례로, 광무대치 때 이민족의 장군 누번이 유방의 진영에 합류하여 욕설을 퍼붓던 항우군의 장수를 활로 사살했다는 말이 나온다.
[57]
이는 500만 명만 남았다는 소리가 아니고, 행정에서 통계를 낼 수 있던 인구가 500만 명이라는 뜻이다. 물론 이는 인구 통계가 제대로 안 나올 정도로 항우가 천하를 엉망으로 만들었다는 얘기가 된다.
[58]
문정후는 자신의 만화에서
범증의 입을 빌려 이런 말을 남겼다. "백성들을 모두 죽이면 천하가 다 무슨 소용입니까."
[59]
대표적인 예시가 칭기즈 칸 시절의 몽골군이다. 투항하면 아무도 죽지 않지만, 투항하지 않을 경우 민간인을 포함하여 공격대상 성읍의 모두를 죽였다. 이는 무시무시한 공포로 작용했고, 몽골군이 지나간 곳은 대부분 투항했다.
[60]
그러나 몽골에 대한 그와 같은 통념은 몽골군의 당대 선전 내용을 그대로 수용한 편견일 뿐이라는 견해도 있다. 전체 케이스를 하나씩 대조해 보면 무저항으로 항복했다고 모두가 살아남은 것도 아니고, 저항하다가 항복했다고 다 죽여버린 것도 아니다. 어느 정도 경향성이 있기는 하나 그것을 일관된 정책이었다고 평가하기는 어렵다는 것. 유목민의 전통대로 그냥 약탈이 가능하면 약탈하고, 지배하기 어려우면 다 죽였을 뿐, 반항 여부를 따지는 건 그저 죽일 구실을 만드는 비논리적 명분의 일각에 불과한 것이라는 것이다.
칭기즈 칸이
부하라에서 말했다는 "너희들은 죄를 지었으니까 내가 여기 와서 너희들을 죽이는 거야. 죄를 지은 증거가 어디 있냐고? 내가 여기 온 게 증거다. 너희들이 죄를 짓지 않았다면 신이 나를 여기에 안 보냈을 거니까." 처럼
순환논법 비슷한 구실을 내세우는 것을 보면, 항복한 적을 죽이는 데 따로 이유가 있었던 것 같지 않기도 하다.
[61]
유방이 조고의 제안을 수락한 것은 아니므로, 밀약이 성립한 것은 아니다.
[62]
그 사이에 조고는 영자영의 공격으로 죽었다.
[63]
팽성대전 이후에는 항우에게 쫓겨서 자기 자식들을 내다버리면서까지 도망치려고 할 정도로 생명의 위협을 받았고 광무 대치에서는 항우의 활에 맞기도 했다.
[64]
예를 들어
삼국지의
유비처럼 황실의 친족이라든가.
[65]
흥미롭게도 이는 후손인 유비도 마찬가지인데 조조가 워낙 많은 만행을 저지른 덕분에 유비 스스로도 자신은 조조와 반대로 행동해야 일이 성취되었다고 말할 정도.
[66]
사실 진시황의 분서갱유와도 비교하는 것 자체가 실례인 게, 분서갱유는 진시황이 자신의 정치적 체제를 공고히 하기 위한 목적이자 일환으로 벌인 사건이었고, 게다가 그 악명과는 달리 실제로 희생된 인명은 천만 단위의 수준이라고 보기도 힘들다. 애초에 정치적 입장이 다른 유학자들, 그 중에서도 소수들이 반감을 가졌으니만큼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기 위해서는 반대 세력을 밀어내는 것도 당시 국정 운영의 한 방법이었으니만큼 진시황의 정책은 어떻기 보면 납득할 만한 정치적 명분이라도 있었던 셈이다. 그에 비하면 항우의 정치적 행보는 뚜렷한 비전도 없고, 그렇다고 본인의 입지를 공고히 강화할 수 있는 목적마저도 없었으니 결국은 몰락의 수순을 밟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잔혹함은 진시황보다 항우가 더하다 진시황은 의심이 많고 잔혹했어도 그 모습은 말년이였지 그 통일 이전에는 효율적이고 실용적인 것도 거슬려도 이성적으로 받아드리는 면모가 있었다. 반면 항우는 진시황보다 더 잔혹하고 정치적 비전이 없었고 자신의 아집과 권위와 폭압으로 반대하면 짓밣아야한다는 독선과 막장인 정치력때문에 항우가 진시황보다 잔혹하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다.
[67]
물론 묵돌이 흉노사 최고의 명군으로 여겨지는 걸물인 것도 있다.
[68]
초한전에서 군주의 곁에서 극을 쥐고 따르는 집극랑이라는 일종의 말단 경호원직에 앉혔다는 대목을 통해 대략적인 푸대접의 정도를 짐작할 수 있다. 가상소설 초한지에서는 항량은 한신을 불품없는 사내라며 거절하려했는데 인물보는 눈이 있던 범증의 강한 주장에 집극랑이란 직책을 어쩔수 없이 줬다고 각색되었다.
[69]
휘하 책사인
괴철의 꼬드김에 넘어가
역이기가 벌인 외교 협상의 결과로 항복할 예정이었던 제나라를 독단으로 공격한 일과 제나라 정복 후 광무에서 항우와 대치 중 잠시 성고로 돌아와 있던 유방에게 가왕 직위를 요청한 일, 광무대치 이후 돌아가던 항우를 유방이 공격할 때 군사를 보내지 않았던 일.
[70]
같은 군웅으로써 동업 관계로 한나라 진영에 참가한거라 전쟁 후 새로 세워진 주종관계를 잘 이행하지 못했다는 식으로 평가받는다.
[71]
이 이후에 항우는 진짜로 머리가 잘려나간 것처럼 지능 없는 행동을 하다 파멸한다. 초한전쟁에서 균형이 한나라로 완전히 쏠리게 된 사건이였다.
[72]
여기에는 원래 진평이 하는 일이 이간질 같은 구질구질한 일이니 '장 담그는 데 구더기 좀 묻을 수도 있지 뭘' 하는 식으로 유방이 배려해 주었다는 의견도 있다.
[73]
유방 사후 여씨 천하가 된 한나라에서 여씨들을 축출하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신하들이 진평과 주발이다.
[74]
정확히는
용저와.
[75]
이건 자신의 왕인 항우가 제나라와 전쟁할 때 똑같이 당했던 전략으로 당시와는 달리 전광이라는 구심점과 초나라군대라는 외부지원군까지 있는 더 유리한 상황이라 충분히 활용할만한 전략이었다
[76]
다만 미래를 생각하면 오히려 당연한 것일 수도 있다. 항우가 비록 연전연승을 하고는 있지만 사람 죽이기를 밥먹듯이 하는 데다가 전략적인 이득은 거의 가져오지 못하고 있는 등 문제점은 하나둘이 아니었던 만큼 항백도 보는 눈이 있었던 만큼 뒷걱정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더라도 명분, 체면,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는 것 등을 고려한다면 아주 틀렸다고 하기도 어렵다.
[77]
아예
걸
주 같다는 말을 들었다. 항우를 꺾고 천하를 잡은 황제에게
폭군이라고 에둘러 말한 셈.
[78]
특히, 유방은 상스러운 언행과 몸가짐을 거리낌 없이 보였지만, 마찬가지로 남의 말을 듣고 좋은 점을 취하는 데도 거리낌이 없었다. 자신이 남들에게 무례한 욕설을 하듯 자기 밑의 부하들이 자신을 대놓고 까거나 독설을 날려도 이를 수긍하거나 웃어넘겨 내로남불이 없었다. 무엇보다 상벌이 정확했다. 실제로 유방은 평생 싫어한 옹치가 공을 세우자 그를 제후로 봉했고, 한신이 왕작을 달라는 주제넘은 요구를 해도 일단 들어줬다. 이런 행동들은 한군의 결정적인 균열을 막았다.
[79]
다만 그렇다고 항백이 무턱대고 항우를 배신했냐 하면 그런 건 아니었다. 물론 장량의 말에 넘어가서 유방을 돕는 트롤링도 저지르긴 했지만 그보다는 오히려 항우가 스스로 트롤링을 저질렀고 그걸 말리느라 정론을 말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다만 항우가 이미 저지르고 만 시점에서 정론을 들어 그걸 말리다보니 이도저도 아니게 된 감이 있다 뿐이지 원래라면 항백의 말을 처음부터 듣는 편이 더 나았다.
[80]
항우의 일대기는 "자신의
힘과
카리스마만을 기반으로 한
철권 통치는 결국 망하게 된다."는 것과 정치적
프레임 싸움과 동맹의 중요성과 적에게도 최소한의 관용을 배풀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다.
[81]
위에서 언급한 대로 바로 이 구절이 논란의 원천이다. 동성에서 다시 오강으로 갔다가 강을 건너라는 정장의 말을 거절한 후 단신으로 적병 수백 명을 죽이고 장렬한 최후를 맞았다고 묘사하고는, 정작 죽은 곳은 동성이라는 모순된 기술을 하고 있는 것이다.
[82]
포폄褒貶, 포상과 폄하를 말한다. 옳고 그름, 착하고 악함을 판단하는 기준을 뜻하는 말이다
[83]
출처: 리어우판, 《중국 문화를 읽는 6가지 키워드》, 신의연 역, 흐름출판
[84]
다만 이중톈은 원래부터 역사학자보단 문학자에 가까운 감성적인 평론이 많은 사람이라, 이하는 문학적인 평가로만 보고 역사적인 항우와 유방의 평가로는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추천한다. 이중텐이 말하는 한나라 이전 호랑이와 표범의 시대는 객관적으로 봤을때 중국사 최악의 혼란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