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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03 21:02:34

오(삼국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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吳 | Wu Dynasty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Saam_Gwok_262_CE.png
지도의 노란색 부분 (262년 기준)
229년 ~ 280년
<rowcolor=#ece5b6> 성립 이전 멸망 이후
후한[1] 서진
별칭 손오(孫吳), 동오(東吳)
위치 중국 화남, 베트남 북부
수도 건업(建業) (229년 ~ 265년, 266년 ~ 280년)
무창(武昌) (265년 ~ 266년)
면적 2,320,000km² (262년 기준)
인구 2,562,000명 (280년 기준)
민족 한족, 산월
언어 상고 중국어[2], 한문
문자 한자
종교 유교, 도교, 중국 토속 종교
화폐 오수전, 대천(大泉)
정치체계 전제군주제
국가원수 황제[3]
국성 오군 손씨
주요 황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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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열제 (추존)
장사환왕 (추존)
대제 (초대 황제, 229년 ~ 252년)
말제 (264년 ~ 280년)
현재 국가
[[중국|]][[틀:국기|]][[틀:국기|]]

[[베트남|]][[틀:국기|]][[틀:국기|]] (북부)

1. 개요2. 역사
2.1. 성립2.2. 멸망2.3. 이후
3. 영토4. 인구5. 사회6. 경제
6.1. 강남 대호족 세력의 성장6.2. 둔전 제도6.3. 화폐, 상업6.4. 손오 정권의 경제사적 의의6.5. 촉한과 비교할 때6.6. 산출되던 물산
7. 군사8. 문화9. 해외 교류10. 평가11. 기타12. 역대 황제
12.1. 계보
13. 대중매체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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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국 삼국시대에 존재했던 국가. 수도는 건업(지금의 난징).

강동 손씨 정권의 시조는 추존황제 손견이고, 독립적인 기반을 마련한 것은 추존왕 손책이며, 공식적인 초대 건국군주는 이를 물려받은 손권, 마지막 군주는 장락공 손호이다. 국호인 오(吳)는 198년 손책이 오후(吳侯)로 책봉되었을때 사용되었던 땅 이름에서 유래했으며 더 거슬러 올라면 손씨일가의 고향이 오군(吳郡)이었던 것에서 유래한다.

삼국 시대의 삼국 가운데 하나. 후한 말기의 혼란한 상황 속에서 군벌 손견, 그의 장남 손책을 거쳐 최종적으로 차남 손권이 황제로 즉위하였다.

개국 이후 촉한과 전략적 동맹관계를 맺었으며, 조위 서진에 대하여 적대관계를 유지하였다.

수성의 이미지로 많이 알려져 있으나, 합비전선에서 꾸준히 조위에 대한 공격을 시도하였다. 다만 촉한의 북벌과 마찬가지로 단 한번도 성공하지 못했다. 촉한이 멸망한 후, 서진이 파촉에서부터 대량의 수군을 조련하여 내려오며 형주, 회남에서도 동시에 공격하자 여러 장수들이 전사하거나 포로가 되는 등 치열하게 맞서 싸웠으나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고 멸망한다.

위진남북조시대의 다른 명칭인 육조시대는 오나라부터 건업에 차례대로 도읍한 여섯 국가들 오(吳), 동진(東晉), 송(宋), 제(齊), 양(梁), 진(陳)에서 유래한다. 오나라는 육조 중 첫 번째로, 아이러니하게도 이 나라를 멸망시킨 장본인인 사마씨 진나라가 훗날 북방민족에 의해 남쪽으로 쫓겨와 오나라의 뒤를 잇는 두 번째 남조 정권이 된다.

중국 역사에서 오(吳)라는 이름을 가진 나라가 많기 때문에 동오(東吳), 손(孫)씨성을 붙여서 손오(孫吳)로도 불리며 간혹 남오(南吳)로 불리기도 한다.

삼국 중 가장 장기간 존속했다. 229년부터 280년까지 51년간 유지했는데, 조위(220-265, 45년)과 촉한(221-263, 42년)에 비하면 다소 길다.

2. 역사

198년 손책, 오후로 책봉.
208년 적벽대전
219년 형주 공방전
221년 손권, 오왕으로 책봉.
222년 이릉대전 / 손권 칭왕.
229년 손권, 황제 즉위 / 오나라 건국
231년 공손연과 외교 분쟁
242-252년 이궁지쟁
265-267년 무창 천도 시도
279-280년 서진의 침공으로 멸망.

2.1. 성립

삼국 중에 건업(建業)[4]을 수도로 하는 오나라는 오군(吳郡) 부춘(富春)[5]의 손씨에 의하여 세워졌다. 이 부춘이라고 하는 토지는 2세기 말경에는 아직 강남에 있어서 한족의 식민지로서 최전선에 위치하는 마을의 하나였고, 강남의 원주민이었던 산월의 습격을 받을 위험에 처해 있었다. 그곳은 마치 서부극에 나오는 개척의 제1선 기지를 떠올리게 하는 곳으로, 손씨의 한사람인 손견은 젊었을 때부터 그와 같은 변경 마을의 유력자였다고 여겨진다. 팔힘이 세고 전쟁에서 공적을 올린 손견은 그 공적에 의하여 후한의 정부에 발탁되어 어떤 현의 차관으로서 양쯔강의 북쪽으로 부임했다.

당시, 회하 양쯔강 사이의 지방에는 환관정부의 압정 하에서 신음하고 있던 중원의 선진지대로부터 많은 빈민이 흘러들어왔고, 그 중에는 무뢰한이 많이 있었다. 마침 184년에 황건의 난이 일어나자 손견은 이 무뢰배 젊은이들을 모아 1군을 조직하고 황건토벌군에 속하여 활약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군웅할거의 혼란 속에서 그는 192년에 전사했지만, 그 아들인 손책도 역시 이와 같은 거친 임협자(任俠者)들의 집단을 이어받는다. 그리고 손책은 이를 자신의 중심세력으로 하여 강남에 할거할 의도를 굳혀 갔다.

그 무렵 강남에서는 당시의 오, 지금의 쑤저우시 일대와 회계(會稽),지금의 저장성 사오싱시 일대가 일찍부터 개발되어, 오나라에서는 주(朱)씨, 장(張)씨, 고(顧)씨, 육(陸)씨 등과 같은 대호족이 세력을 가지고 있었으며, 회계에도 우씨, 위씨, 공씨, 하씨등의 호족이 성장하고 있었다. 손책은 195년에 본격적인 강남진출 작전을 개시했는데, 그 군의 규율은 정연한 것으로써 약탈하는 일이 전혀 없고 "항복하는 자는 전력(前歷)을 묻지 않는다. 종군희망자가 한 사람 있으면 그 일가는 부역을 면제한다. 종군을 희망하지 않는자라도 강제하지 않는다"등의 포고를 내어 강남의 사람들은 손책의 밑에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고 한다.

손책은 또한 오와 회계의 유력한 호족들을 자신의 진영으로 끌어들이는 공작도 동시에 진행시켰다. 그들 토착호족의 입장에 있어서도 강남의 각지에 약소권력이 할거하는 상황보다도 강남 전체를 하나로 하는 강력한 정권이 생기는 것을 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당시의 강남은 개발도상에 있던 식민지이고 개발을 강력하게 추진하기 위해서는 강력한 정권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이리하여 드디어 양쯔강의 북으로부터 들어온 거친 임협자 집단의 군사력과 오와 회계의 재지호족 세력과의 협력에 의하여 손책을 우두머리로 하는 정권이 탄생한다. 손책은 200년에 죽고, 동생인 손권이 이 정부를 주재하는데, 오오가와 후지오(大川富士夫)의 조사에 의하면 이 손오정권의 인적구성은 강북계와 강남계가 거의 절반씩이라고 한다. 이것은 강남재지의 호족 세력만으로는 아직 자립적인 군사정권을 수립할 수 없다는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오와 회계 이외의 강남에서는 재지호족의 성장이 미숙했다는 것을 말해 준다.

실제로 손오정권이 수도로 정한 건업, 즉 지금의 난징시조차 그때까지는 아직 전혀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지역이었다. 그리고 전장에서 보았듯이 화북에서는 각지에 호족이 성장했고, 그에 대하여 자립 농민을 포함한 지식인들의 향론이 활발했던 것에 대하여, 강남에서는 향론이 활발한 것은 전반적으로 보아 거의 없었고, 강남에서의 선진지대인 오와 회계에서 겨우 찾아볼 수 있는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강남에서는 지식인층이 아직 극히 엷었는데 오의 호족인 고씨, 육씨, 장씨중에는 교양을 갖춘 지식인이 배출되었으나, 그 사람들도 손오 정권하에서는 무장으로서 활약하는 일이 많았다. 화북에서는 이전과 같이 무장이 지식인인 '사'계층 앞에 무릎을 꿇었으나 강남에서는 교양인조차 오히려 무장의 길에 뜻을 두었던 것이다. 이는 먼 미래 강남이 완전히 한화(漢化)되고 나서 강남은 문(文)에 치우친 지역이라는 스테레오타입과 완전히 반대이다.

이 정권에는 이미 화북에서도 이름을 떨친 북방 출신의 명사가 정치 고문으로서 2, 3명 가담하고 있었다. 그들은 화북의 혼란을 피하여 이주해 온 지식인으로 장소가 그 대표적인 존재이다. 그러나 조조의 대군이 남하해 오는데 어떻게 대처하는가가 큰 문제가 되었을 때 장소가 무기력한 항복론을 주장한 데 대하여 조정의 의견을 주전론에 통합하여 조조의 군대를 적벽에서 괴멸하여 오나라의 독립을 확보한 것은 주유 노숙 등 강회의 임협 출신자였다. 화북 명사의 발언권은 손오 정권 중에서는 그다지 강하지 않았던 것이다. 단지 손씨를 섬기던 냥야 제갈근은 촉한의 유비를 보좌한 유명한 제갈량 즉 공명의 형으로 이 형제는 조조에 대한 손권-유비 동맹의 체결에 기여한 점을 주목해 볼 수 있다.

샹양시 부근으로 이주해 와있던 제갈량이 유비로부터 소위 삼고의 예로서 맞이되었을 때 조조에 대항하는 데에는 오와 동맹할 필요가 있다는 것, 그 뒤에 형주에서 巴·蜀[四川省]을 취해야 하는 것을 이미 유비에게 진언하고 있다. 208년 남하하는 조조의 군에 쫒기어 겨우 하구를 유지하게 된 유비는 마침 시상에 진을 치고 있던 손권의 군영에 제갈량을 파견하여 무사히 손권-유비 동맹을 체결할 수가 있었다. 그 때 손권은 제갈근에게 말했다.
자네는 공명과 형제다. 게다가 동생이 형에게 따르는 것은 사람의 도로서도 순당하다. 어째서 공명을 우리 진영에 붙들어 두지 않는가.
동생은 그의 몸을 사람을 위하여 버리고 충성계약을 하여 주종의 분을 정했기 때문에 사람의 도로서 두 마음을 갖지 않습니다. 동생이 여기에 머무르지 않는 것은 내가 그 쪽으로 가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제갈근의 이 대답은 “신명을 관철하는 데 충분하다”고 하며 손권이 크게 감복했다고 사서는 전하고 있다.

“충성계약을 하였다”고 번역했는데 그 원문은 "질(質)을 위임하여 분(分)을 정한다”이다. "質"이라 하는 것은 "치(雉)"로 통하고 옛날 춘추시대, 주군을 섬길때 을 바쳐서 충성의 약속을 맺는 관례가 있었다. 삼국시대에는 이미 실제로 꿩을 사용하는 것과 같은 의식은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위지(委質)"이라 하는 것은 그러한 충성계약을 의미하고 있다. 그것에 의하여 맺어진 주종관계는 형제간의 육친관계와 "형에게는 공손한다"라고 하는 윤리보다도 우선하는 것이 “인의 도”라고 여겨졌다. 위의 문답은 그러한 당시의 관념을 나타내고 있다.

당시는 개인과 개인과의 사이에 맺어지는 매우 인격적인 종적관계 즉, 주종관계가 사회속에서 큰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하나는 임협관계에서 오는 것이고 이것은 지식인 사이에서도 그와 비슷한 관계가 보편적으로 있었다. 즉 "사는 자기를 알아주는 자를 위하여 죽는다"는 것으로, 자신의 인격을 인정해 준 자로서 제자는 선생에 대하여 아랫사람은 자신을 인정해 준 윗사람에 대하여 이후 오랫동안 헌신적인 충성을 다하였다. 이를 "문생, 고리"의 관계라고 한다.

"고리"라 하는 것은 일찍이 부하였던 자라는 의미로, 현재에는 이미 부하가 아닌데도 옛날의 윗사람에게 언제까지나 은의를 계속 느끼고 있는 관계를 말한다. 이와 같은 문생고리관계는 이후 육조시대를 통하여 인간관계를 규제했다. 그것은 실로 봉건적인 인간관계라고 해도 좋을 것이다.

따라서 이와 같은 봉건적 종적인 사회관계는, 화북에 있어서 위진의 사회에서도 물론 도처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문인이 우선시되는 귀족제사회가 만들어져 감에 따라 한말의 전란기에 보여지는 임협적 주종관계가 자취를 감추고 문생, 고리적 주종관계가 눈에 띄게 된다. 그러나 오나라에서는 입협적 주종관계가 국가로서의 통합을 이루는 근간으로까지 되어 갔으며 이는 오나라의 주요한 특징이었던 것이다. '그것은 결국 오나라 (말하자면 양쯔강 하류지역)의 후진성은 촉한보다도 심각한 수준이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가와카쓰 요시오)이라는 학자들도 있고, '오나라 특유의 폭발적인 활력을 상징한다'(김문경)이라고 해석하는 이들도 있는 등 평가가 갈린다.

2.2. 멸망[6]

손오 정권을 하나로 통일해주는 것은 오랜 기간 남방을 평정하고 통치한 강력한 권위의 손권이 여러 호족, 장군간 맺은 주종관계였다. 따라서 이 주종관계에 금이 가면 이 정권에 위기가 도래할 것이었다. 때문에 오 정권에 있어서 손권의 오랜 통치는 안정감을 가져다 주었다. 위의 경우는 이와 반대로 조비는 7년밖에 못 다스렸으며 조예는 239년에 9살짜리 입양한 아이만 남기고 죽어버려 왕조를 약하게 만들었고, 유선은 223년부터 263년까지 다스렸지만 아무도 그를 실질적인 군주라 여기지 않았다.

반대로 손권의 오랜 통치는 후계자들에게는 어려움을 가져다 주었고 죽을 때쯤에는 이궁지쟁 같은 불행을 야기했다. 오랜 기간 황태자로 있으면서 손권 다음가는 황실 내 권위를 획득했던 손등은 241년에 불과 30대의 나이로 죽었고, 다음으로 살아남은 연장자 손화가 후계자가 되었으나 황태자 자리를 둘러싸고 손화파와 손패파 사이에 불화가 심하게 터지며 이 일은 250년에 손화는 폐위당하고 손패는 자살을 종용받는 것으로 끝난다. 나중에 늙은 손권은 손화를 복원시키는 것도 생각해 봤지만 가장 어린 손량을 후계자로 삼도록 설득당했고, 제갈각에게 보호를 맡긴다. 손권이 죽은 지 18개월 되는 253년에는 제갈각이 합비에서 처참한 실패를 한 후 손준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손량에 의해 암살당한다. 손준은 256년에 급작스레 죽었고, 손침이 이 요동치는 정권을 차지한다. 손준의 옛 동맹 등윤은 손침의 집권에 반대해 쿠데타를 계획하나 실패하고 258년에는 십대 중반이 된 황제 손량이 손침을 제거하려고 하다 실패하고 폐위된다. 손량 대신 황제에 오른 것은 손휴로 손권의 6째 아들이며 당시 22살이었다. 몇 달 뒤 손휴는 성공적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손침을 제거하고 권력을 손에 잡는다.

손권의 유조를 받아 어린 황제를 보좌하게 된 중신들 중에 대장군인 제갈각 등은 옛날의 태자당이었고, 손준 등은 노왕당이었다. 그때까지 손오 정권이라고 하는 통일체의 중심이었던 대제 손권을 잃은 직후, 유제를 내세워 그 통일체의 중심을 또다시 확립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중요한 시기에 그 중심에 있는 중요한 중신들은 두 파로 분열된 상처를 안은 채 서로 의사소통을 하지 않고 있었다.

어린 황제를 보좌하는 중신들 가운데, 손권으로부터 후사를 위임받은 제갈각은 유능한 군략가이기도 했으므로, 화북의 위나라에 대하여 전쟁을 일으켜 일발의 대승리를 올림으로서 중앙정부의 권위를 높이려고 꾀하였다. 그러나 권위의 확립을 초조해하여 무리하게 일으킨 대위 전쟁은 오히려 비참한 패배로 끝났다. 제갈각은 그래도 무리하게 북벌을 계속하려고 했으나, 원래 반대파였던 손준은 전쟁 반대의 분위기를 이용하여 제갈각을 암살했다(253년). 그 후 256년까지는 손준이, 이어 256년부터 258년까지는 손준의 사촌동생인 손침이 중앙정부의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단지 초조해할 뿐 이미 권위를 확립하는 유효한 방책을 발견하지도 못하고 그저 무턱대고 권력을 휘둘러 약자를 괴롭히는 능력밖에 없었다. 포악한 손침을 주살하고 나름대로 권위를 세운 제3대 황제인 손휴(258-264)는 점차 정치로부터 조금씩 도피하여 독서 학문에 심취했으나, 실제로 그 아래에서 권력을 휘두른 복양흥이나 장포 같은 이들은 손휴가 죽인 손침과 비슷하게 무슨 중앙 정부의 권위를 다시 세울 만한 능력은 없는 자들이었다. 손휴가 학문을 더 쌓은 이후 정치에 도피하지 않고 나섰다면 어땠을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촉이 망하고 이를 근심하다가 불과 30세의 나이로 집권한 지 6년 만에 죽었다.
또 장강 해안가를 수비하는 병사들은 멀리로는 마땅히 땅을 개척하여 지역을 넓혀야 하고, 가까이로는 응당 변방을 지켜 어려움에 대비해야 하므로, 특별히 두텁게 대우하고 양육함으로써 일에 대비해야 하므로, 특별히 두텁게 대우하고 양육함으로써 일에 대비해야만 합니다. 그런데 징발하고 부세를 걷는 것이 안개나 구름이 밀려와 운집해 있는 것 같아 입는 것은 짧은 갈옷도 온전하게 하지 못하며, 먹는 것은 아침 저녁을 돌아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나가서는 칼과 창이 부딪히는 어려움을 감당해야 되고, 들어와서는 의탁할 곳 없는 우수를 끌어안습니다.
삼국지 오서 하소

이어 즉위한 손호(264-280)는 무리한 토목공사를 일으켜 궁전을 짓기도 하고, 신하를 함부로 참살하기도 하는 등 광폭하다고 할 수 밖에 없는 천자였다. 이런 상황에서 무리한 군사적 활동을 진행한 중앙정부의 무리한 자세는 전쟁에 의한 쓸데없는 손해, 화려한 황실과 수도 건업의 권위를 위한 사회의 사치 풍조와 재정낭비를 초래했다. 손호의 치세에 궁궐 안의 환관들은 각 주(州)와 군(郡)에 분포하여 임의로 노역을 발동하고 다투어 폭리를 구했으며 병사들이 무리한 징병과 부세에 수탈당하고 있다는 하소의 발언이 이를 증명한다. 또 손호가 중앙권력의 강화를 위해 끌어들인 세력들(환관이나 이들과 연관된 중앙조정의 관리들)의 축재를 보장하면서 이들이 각지의 부와 토지, 노동력을 수취하는 과정 역시 큰 문제가 되어 국가의 부담을 가중시켰다.

한편 토착 호족들에게 시선을 돌리면, 처음에 손책과 손권을 지지했던 남동쪽의 호족들은 경쟁자를 물리치고 바로 이득을 봤으며 손씨 정부에 영향력을 가질 수 있었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자 그들이 가지고 있던 지역 권력은 점점 막강해져 정치적으로 제거가 불가능한 수순에 이르었다. 후한 말기에 다른 곳에서도 보이듯 자발적 지원으로, 혹은 혼자서 일을 하고 세금에 바치느니 힘 있는 사람 밑에 들어가는게 낫다는 논리로, 혹은 징집되어 군대에서 활동하다 개인 사병이 되어버리며 호족들이 거느린 세력이 점점 더 막강해진 것이다.

그럼에도 이런 호족들은 중앙정부가 가진 무력과 볼모를 통해 통제가 가능했다. 볼모의 경우 중앙으로 간 사람이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경우도 있었기에 딱히 부담스런 일이 아니었기도 했고 말이다. 하지만 오나라에서는 정치적, 군사적으로 힘 있는 사람이 다른 마음을 품지 못하게 하기 위해 수신기의 보질이라는 것에서도 확인되듯 필수적인 시스템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런 방식으로 얻어낸 충성심은 나라를 위해 일하겠다는 열정으로 이어지지 않았으며 결국 오나라의 발목을 잡은 것은 호족의 불충이 아니라 호족의 협력 부족이었다.

오나라의 많은 호족들은 오나라가 어떤 정책을 취하든 간에 관심 없었다. 역사가 황실에 의해 쓰였을지라도, 상당수의 인구는 호족들에 묶여 있었다. 만약 4대 호족 중 하나로 뽑히는 위씨가 이 황실 기록에 언급이 안 될 정도로 조정과 따로 놀았다면, 조정에 영향받지 않고 따로 활동하는 작은 호족은 더 많았을 것이다. 수많은 호족들은 지역 유지로 현이나 마을 하나를 다스리는 데 만족했고 수도에서는 무슨 일이 일어나든 오히려 관심 꺼줘서 고맙다며 만족하고 살았던 것이다. 이 관점에서 오나라의 호족은 후한 말과 비슷하게 자신의 생존과 영향력을 건드리지 않는 조건 하에 중앙정부에서 필요로 하는 최소한만을 지불하는 형태를 보이고 있었다. 밑에서 설명하듯이 이는 오나라의 각 지방호족들이 각자만의 방식으로 개발과 발전을 이룩하는 원동력이기도 했지만 중앙정부 입장에서는 어떤 권위를 가지고 이들을 제어해야 할지 고심할 수밖에 없었다.

손권의 개인적 권위는 이 문제를 어느 정도 덮어주었으나 252년 그가 죽고 젊고 약한 군주들이 등극하자, 이 문제는 곧 수면 위로 떠오른다. 수도에서 일어났던 제갈각 VS 손준, 등윤 VS 손침 같은 것은 북부인에서 남부인으로 권력이 넘어가는 것을 보여준다. 등애가 사마소에게 253년에 보고했듯, 이제 거대한 사병과 자산을 가진 호족들이 실권을 쥐게 된 것이다. 그리고 군주로부터 지지를 못 받는 제갈각은 곧 죽을 것이라 예견하였고 등애의 관측은 옳은 것으로 증명되었다. 또한 중앙 최고위직에서는 손권의 분가들이 세력을 키워나가 장악하고 있었다. 특히 궁전에서는 손권의 두 딸 손노반과 손노육이 큰 역할을 하였다. 이런 갈등 과정에서 군주들은 권력을 잃어나갔고, 정부의 효율은 점점 떨어졌다. 이런 현실과는 동떨어진 황실가문 내부의 계파 싸움은 중앙 정부를 점점 더 폐쇄적으로 만들었고 지역의 관심사와는 더 멀어지게 만들었다.

손권의 후계자들은 모두, 이런 상황에서 영주와 같은 존재가 각지에 할거하여 분열될 수밖에 없는 극히 불안정한 정국 속에 있었고, 게다가 권위의 확립을 필요로 하는 입장에 놓여진 지배자가 아무런 유효한 시책도 간구하지 못한 채였다. 손량, 손준, 손침, 손휴, 손호로 대표되는 젊고 미숙한 손씨 황실의 권력자들은 무리한 권위 확립을 재촉받아 단지 권력 의지만을 맹목적, 자의적으로 발동시켰다. 손권의 죽음과 이를 이어받은 젊은 권력자들의 권위 확립 실패로 인한 중앙정치의 혼란, 그리고 무엇보다 촉이 무너진 전후로 오가 열세에 처한 상황에서 무리한 군사활동을 단행했던 것은 전쟁에 의한 쓸데없는 손해를 초래하고 민생을 도탄에 빠뜨렸다.

이런 상황에서 손침을 제거한 것 빼고는 손휴 정권은 딱히 잘한 게 없었고 촉이 위에게 항복했을 때인 264년에 손휴는 죽는다. 이 위급 상황에 황제에 등극한 것이 20대 초반이던 손호로 예전 황태자였던 손화의 아들이다. 손호는 오나라에 힘을 북돋아 줄 것으로 기대되었지만 도참을 통한 손씨 황실의 위상 강화 정도 외엔 무리한 권위 강화를 위한 국력의 소모만 일으켰을 뿐 나라를 흥성하는 진나라로부터 지키는 일에는 성공하지 못했다. 그리고 촉이 괴멸적인 군사적 모험을 시도하다 실패하고 힘의 균형이 무너지자, 어찌됐던 간에 긴 관점에서 보면 오나라는 촉을 무너뜨리고 들어선 진나라에 질 가능성이 높아졌다. 일반적으로 손호가 부도덕적이고 강압적인 군주라 비난받는데 물론 이를 뒷받침하는 증거도 몇 개 있다. 하지만 많은 부분이 망국의 군주는 부도덕하며 마땅히 망할 만 해야 한다는 전통적인 관점에 의해 생겨난 것이며 손호 같은 상황에 처해 있다면 잔혹하거나 성급한 행동은 나오기 마련이다.

만약 손호가 폭정을 펼치지 않았으면 이보다 더 오래 가지 않았을까 하는 시각[7]도 있는데, 17년을 버티긴 했지만 여러 요인이 겹치면서 결국 오도 멸망을 피해가지 못했다. 촉한이 존속한 상황이면 몰라도 촉한이 망한 순간 이미 세력 균형은 서진으로 쏠려버렸고 게다가 오(吳)의 군사력이 감당하기엔 전선이 너무 넓어졌다. 촉한이 망한 순간 위진은 오나라를 공략할 고속도로를 얻었다. 가뜩이나 양번이 서진 영토라 육지로 남군과 이어져 있어서 방어하기가 매우 어려운데 파촉까지 넘어갔으니 오나라의 형주는 서쪽과 북쪽의 적을 모두 막아야 하는 형국이었다. 괜히 등애가 촉한 멸망 직후에 수년 후에 손오마저 정복할 수 있다고 한 게 아니다. 이때 손오는 아직 손휴 치세였고, 육항, 시적, 정봉 등 유능한 상장들이 생존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말이다.[8] 다만, 등애나 왕준 모두 의견을 개진한 시점이 고령의 나이였음을 감안해야 한다. 즉, 자신의 생전에 직접 천하통일을 이루고 싶다는 의지가 있었을 것이다. 70세 즈음으로 추측되는 등애나 70대인 왕준이 해당 주장을 하는 시기를 넘겨버리면 군에 종사할 수 있을지조차 의문인 상황이므로 오를 정벌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면 설득력이 높은 근거를 뒷받침하는 것이 당연하다. 종합하자면 촉을 점령함으로써 오나라는 이전보다 더 취약해졌던 상황(손휴 역시 오의 미래를 걱정하다가 죽었다)이었고, 왕준의 주장은 지금 오가 어지러울 때 무너뜨릴 수 있는데 이렇게 시간을 끌면 기껏 오나라를 공격한다고 준비했던 것들이 망가지니 미룰 이유가 없다는 의미에 더 가까울 것이다.

다만 손호의 실책 역시 무시할 수 없다. 육항이 죽을 때 촉이 망하는 바람에 서릉(=이릉)을 방비하기가 너무 힘들어졌다면서 군사를 더 늘려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손호는 듣지 않았고, 왕준의 계략에 넘어가 서릉 방면 담당자를 변경하는 등 여러 실책을 저질렀다. 오언이 왕준이 배를 준비하는 것을 눈치채고 군사 보강을 청했을 때도 듣지 않았다. 게다가 진서 무제기를 보면 진나라로 투항하는 장수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9] 그리고 이 중에는 종실인 손씨들도 여럿 있었다. 이는 내부 정치의 문제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수많은 장수들이 전사하며 치열하게 투쟁한 끝에 중과부적으로 패한 것이 오나라의 멸망이다. 오 멸망전은 서진의 대오전선 군비확충 > 물량에 압살되기 시작 > 최전방 관리자들 패사 > 정예 총동원해 벌인 대회전 패배 > 대세가 기울자 투항 & 귀부 & 도주 > 새수 반납 등 침략전 성공의 정석을 밟아가면서 단계적으로 시행된 것을 알 수 있으며 이 과정에서 오나라도 만만치 않게 저항했다. 두예의 파죽지세로만 기억되는 오나라의 멸망전이지만 사마주가 오군 5~6만명을 전투 끝에 참수하거나 항복시켰다는 기록, 오나라의 마지막 승상 장제가 이끄는 3만명이 불리한 상황에서 일대 회전을 벌여 일부 진군의 항복을 받기도 했으나 결국 패했다는 기록, 장강 중류의 핵심 방어거점인 강릉의 군대가 두예에게 저항하다가 격파되었다는 기록, 곽마의 난으로 수만 명의 군대가 난을 진압하기 위해 싸우러 가서 병력이 분산되었다는 기록 등이 남아 있다. 이렇게 오군은 각지에서 치열하게 싸웠지만 열세를 뒤엎진 못했다.

이 전쟁에 참여했고 그 과정에서 두 명의 형( 육안, 육경)을 잃었으며 본인도 포로 신세가 된 육기는 오멸망전을 두고 자신의 저서 변망론에서 '손호 치세 초기엔 자신의 아버지 육항을 비롯한 뛰어난 신하들이 보좌했기에 나라를 지킬 수 있었는데 이들이 차례로 죽고 이들의 공백을 미처 채우지 못했던 시기에 진이 쳐들어와 오가 망한 것이지 촉이 망해서 나라가 망한 것은 아니다. 이전에도 오나라에 여러 차례 위기가 있었지만 그때는 위기를 막아낼 능력이 있는 장군들과 신하들이 존재했었고 오가 망하는 그때는 마침 그런 사람들이 없었던 것일 뿐이다.'라는 의견을 제시했다. 육기는 아버지 육항의 시대와 오멸망전을 동시에 겪은 세대인 만큼 아버지에 미치지 못하는 오나라의 지휘관들을 비교할 수 있었던 입장이라 이렇게 쓴 것으로 보인다.[10][11] 역시 오나라의 장수였던 오언 역시 '손호는 영명한 군주였고 뛰어난 신하들이 그를 도왔으나 대세를 역전시키는 데는 실패했을 뿐'이라고 사마염 앞에서 술회한 것을 보면 당대 오의 패장들 입장에선 불과 몇년 전 선대에 비해 오가 멸망할 당시엔 좋은 장수가 많이 없었고, 열심히 싸웠지만 상황이 중과부적이었다는 입장을 취하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오나라의 관료들은 대부분 항복하여 진나라의 관리를 지냈고, 손호의 폭정으로 쫓겨나거나 실망해 물러났던 이들은 양주자사 주준을 통해 등용되었으며, 석위, 제갈정, 범평, 진훈처럼 오나라에 충성하여 평생 벼슬을 하지 않고 은둔하다가 여생을 마치는 경우도 있었다. 282년에 오나라의 옛 장수였던 완공 백봉이 군사를 일으켜 건업을 공격하고 양주를 포위했는데, 진나라의 서주자사인 혜희에게 토벌되어 오나라는 완전히 멸망했다.

본 삼국지 삼국지가 울고있네의 저자 리동혁의 연구에 따르면 오는 멸망 직전 비축된 곡식이 280만 섬, 배가 5,000여 척, 후궁이 5,000여 명 정도 됐다고 한다.

2.3. 이후

그러나 진 무제(武帝) 태강(太康) 3년(282년)에 오를 완전히 평정한 후에도, 강남 동요엔 "국축육(局縮肉), 수횡목(數橫目), 중국은 마땅히 패망할 것이며, 오나라가 마땅히 돌아올 것이다." 또 "궁문의 기둥(건업궁의 기둥)이여, 결코 썩지 마십시오, 오나라가 반드시 돌아올 것이니, 이는 30년 후입니다."라고 했다. 또 "닭이 울면 날개를 치지 않으니(서로 돕지 않으니), 오나라가 돌아오는 것은 힘을 쓰지 않아도 된다."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흘러퍼졌다. 당시 오나라 사람들은 모두 (스스로를) "손씨의 자손"이라고 일컬었고, 때문에 연이어서 반란을 일으켰다. '횡목'의 네 글자는 오나라가 망한 후부터 원제가 흥한 지 사십 년을 가리키는 말로 진나라 원제가 강동에서 흥한 것은 모두 동요의 말과 같았다. 동진이 세워지고 진나라 원제는 마음이 약해져서, 북인을 뜻하는 '국축육(局縮肉)'인 자들은 배척했다.[12]

이는 진서 오행지, 송서 오행지에 나오는 기록으로 오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손씨의 후예들과 옛 오나라인들은 진나라 정권에 계속 저항했다. 이 때문에 진 무제 사마염은 '촉인들은 얌전한데 오인들은 통일 이후에도 반란을 일으키는 등 저항이 심하다'며 불만을 표시했다. 동진 이후로 오나라의 토착 오성 귀족들을 강남 남조 정권에서 무시할 수 없었던 이유는 이런 민심의 여파 때문이었다.[13]

통일을 완수한 서진은 통일과 거의 동시에 기강이 헤이해졌고, 20여년 후, 팔왕의 난에서 사마씨 본인들끼리 싸우며 국력을 낭비하는 한편, 매년 일어나는 홍수, 우박, 지진 등 자연재해, 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일어나는 반란군 덕에 마침내 이민족에게 2명의 황제가 죽는 치욕을 겪게 된다. 또한 서진 말에는 북방 이민족과 청주에서 들고 일어난 왕미 말고도 형주, 양주 일대에서는 두도, 진민 같은 반란군이 활동했는데 이는 사마예, 왕도, 왕돈, 도간 등의 활약으로 진압하며 진 황실은 오나라 손씨가 발전시킨 강동에 의지하여 버텨나가게 된다.

동진은 옛 오나라와 비교했을 때, 회남을 소유하고 있었고 북방에서 전란을 피해 내려오는 유민들로 인해 군대와 인민도 그보다는 더 많은 상태에서 시작할 수 있었다. 여기에 무엇보다도 오나라 손씨정권이 낙후된 강남을 80여년간 열심히 개발했기에 동진은 그 기반 위에서 중흥을 이룰 수 있었다. 또한 세력구도가 6:2:1로 평가되는 삼국 시대 위:오:촉한 구도와는 달리, 동진은 적어도 3 정도는 되었고 6이라 할 수 있는 화북 지역은 조씨의 위나라가 화북을 통일했을 때와 달리 오랫동안 통합이 어려운 상태였던 것도 동진 이래 남조가 오래 존속할 수 있었던 바탕이 되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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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영토

수도는 건업(建業. 오늘날의 난징)이고, 가끔 천도가 이루어지기도 한 제2 수도급 무창(武昌. 오늘날의 어저우시), 강릉(江陵), 교지(交趾), 오군(吳郡), 회계, 장사 등이 주요 도시. 그리고 오늘날의 대만 하이난 섬도 오나라의 영역이었다.

얼핏 보면 오나라의 영토 크기가 위나라보다도 더 크지만[14] 실상은 좀 다르다.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 장강 이남은 밀림으로 뒤덮인 지방으로 지배 영역 중 남방의 대부분은 인구가 거의 없거나[15] 오의 통제력이 그리 크지 않은 이민족의 영역이었다. 그러니까 오나라는 면보다는 이런 밀림 가운데 간헐적으로 개척된 지역을 중심으로 한 점과 선으로 연결되어 있는 나라였다. 현대로 비유하자면 브라질 아마존 지역의 여러 도시들과 비슷한 형태였다. 다만 오나라 영역중의 핵심인 양쯔강 하구지역 (오늘날 장쑤성, 저장성, 안후이성) 부근은 전국시대부터 널리 개척된 곳이었고, 후에 손에 넣은 형주도 곡창지역이었다. 이곳은 지리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매우 유리했기 때문에, 오나라가 삼국정립의 한 축을 유지할 수 있었다.

오나라 영토 자체는 위촉오 중 제일 넓긴 한데 사실상 장강 유역을 따라서 있는 도시들인 건업, 장사, 양양, 무릉, 계양 이외에는 별 볼일 없으며 산월쪽은 아예 허허벌판, 게다가 회계와 일남은 아예 최고의 유배지로 활용될 정도의 불모지이기마저 했다.[16] 그러니 땅 자체는 넓지만 빛 좋은 개살구에 불과한 것이다. 정작 진짜 알짜 도시들은 죄다 위나라에 몰려있고, 경작지도 위나라가 훨씬 더 많았다. 그렇기 때문에 손권이 그렇게나 합비를 차지하려고 마구 발버둥을 친 것이다.

양주 지방에 해당되는 강남은 이제 막 개척과 개발의 도상에 들어간 단계에 불과했으며 손권도 농업의 발전에도 신경을 쓰긴 했으나 근본적으로는 오나라의 이런 불모지들이나 이민족의 영역을 오의 영역으로 확장하는 데 더 골몰했다. 형주도 무릉 쪽은 이민족들 투성이였기에 끊임없이 확장하는 오인들과 무릉만간의 마찰이 지속적으로 있었으며, 교주 쪽도 손권 사후에는 교주를 완전히 장악하려는 중앙 정부와 이에 반발하는 교주인들이 부딪치며 막장이 된다.[17] 실제로 오의 강역 수준은 위 지도만큼이 아니라, 동에서는 건업으로부터 서로는 이릉과 자귀에 이르는 장강 유역의 긴 띠의 형태로 보는 의견이 존재하고 양주 쪽은 장강 유역의 긴띠, 형주 쪽은 장사, 영릉, 계양 정도 까지로 보는 의견도 존재한다.

실제로 후한 시절 주를 따진다면 위나라는 9개 주 반[18], 촉한은 익주 하나뿐인데 오나라는 2개 주 반[19]이었다. 그나마도 교주[20]는 13개 주 중에서 가장 후진 주인 데다가 인구도 거의 없는 수준[21]이었고, 그나마 얻은 형주의 반도 전란의 중심에서 수십 년 동안 있었던지라 유표 때의 부유함은 찾기 힘들었다.

위나라도 서량 지방이나 한사군을 포함한 유주, 태원으로 대표되는 병주에 대한 지배력은 약했다고 보여지며[22], 촉한도 쓰촨 지방의 장강 또는 큰 강의 이남, 윈난(남만)은 적지 않은 반란 및 이민족 거주 지역이라[23][24] 실제로 지도에 표시된 것과는 달리 실 통치 영역이나 영토로 볼 수 있는 영역은 더 좁다고 볼 수 있다.

후한 말 강남 지방은 개발이 거의 되지 않았는데 본격적으로 강남이 개척되어 개발되기 시작한 건 손권 치세부터이다. 그리고 손오의 발전을 토대로 서진이 캐발살나고 동진이 건국된 뒤 중원의 유민들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한 남북조시대(육조시대)에 강남은 비약적인 성장을 이루게 되며, 강남이 강북을 앞지르기 시작한 건 천년 뒤인 남송 때의 이야기이다. 어쨌거나 이 때문에 손권의 오는 중국 중세 강남의 발전을 이끈 여섯왕조를 뜻하는 육조시대의 필두에 서게 된다.

4. 인구

인구는 촉나라보다는 많지만 위나라보다는 적었다고 알려져 있다. 일본의 중국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위:오:촉의 인구비율을 6:3:1로 주장했다.

한서 지리지(전한 시기, AD 2년 기준)에 따르면 형주(3,775,884명)+양주(3,027,598명)+교주(1,372,290명) : 익주(4,548,654명) 사이에는 약 2:1 정도의 차이가 성립하며 후한서 군국지(AD 140년 기준) 링크에 따른다 해도 형주(6,315,952명)+양주(4,338,538명)+교주(1,114,444명) : 익주(7,242,028명) 사이에는 약 1.65:1 정도의 차이가 존재한다. 후한이 전한보다 지역에 대한 통제력 및 인구 파악 능력이 부족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호족의 세가 강한 편이었다.) 전한과 비슷한 2:1 정도의 인구비가 존재한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의 차이다. 인구가 밀집된 형북 일대가 오의 영역에서 벗어나 있다고 해도 인구 피해는 촉한에도 존재함을 감안한다면 통상적으로 2:1, 아무리 적게 잡아도 1.5:1 정도의 인구 비례가 존재한다고 예측된다.

또한 촉한이 망할 때 배송지가 주석으로 남긴 왕은의 촉기에 따르면 촉한의 인구는 - 호(戶) 28만 / 남녀구(男女口) 94만 / 대갑장사(帶甲將士) 10만 2,000 / 관리(吏) 40,000명 하여 약 인구 108만 2천 명에 병력 10만 2천 명, 오의 경우에는 손성의 진양추에 따르면 - 4개 주(州) / 43개 군(郡) / 313개 현(縣) / 호(戶) 52만 3,000 / 관리(吏) 32,000 / 병(兵) 23만 / 남녀구(男女口) 230만 하여 약 인구 256만 2,000명에 병력 23만 명으로 촉의 인구가 2배를 넘는다.

또한 통전 7권에 있는 내용에 따르면 아예 촉한은 건무 원년에 인구 90만 오나라는 230만으로 역시나 두 배가 넘는다.[25] 이는 위에서 확인할 수 있는 전한&후한 시기 지역별 인구 비례와도 유사하다.
손오와 촉한의 인구 비교표
손오 촉한
호(戶) 인구(민간인) 병력 관리 호(戶) 인구(민간인) 병력 관리
52만 3,000호 230만 명 23만 명 32,000명 28만 호 94만 명 10만 2,000명 40,000명
참고로 오는 멸망 직전 영토가 4주, 43군, 313현 정도였다고 한다.

5. 사회

한때 학계에서는 손오가 조위, 유촉과 비교하여 중앙의 통제력이 낮고, 지방 호족, 그중에서도 일종의 개발영주에 속하는 토호들의 힘이 강했다는 관점이 유행했다. <중국의 역사 - 위진남북조> 등 이 시대의 강남 정권들을 다룬 서적들에서는 오의 국가 구조가 이러한 개발 영주들과 피란민으로 구축된 측근 세력들 간의 균형으로 성립했다고 설명한다. 오의 사성을 위시한 지방 호족들이 꾸준히 오나라의 주축이었으며, 이는 오나라가 건국된 시점부터는, 오의 사성 중 장온의 장씨를 제외한 나머지 3성(육씨[26], 고씨, 주(朱)씨)과, 장소의 일족인 장씨, 제갈근의 일족인 제갈씨, 전종의 일족인 전씨, 우번의 일족인 우씨, 주치의 일족인 주씨[27], 설종의 일족인 설씨, 보즐의 일족인 보씨, 여범의 일족인 여씨, 그리고 황족인 손씨가 아니면 아예 제대로 언급도 안 될 정도.[28] 초창기 오의 건국을 이끌었던 대도독들( 주유, 노숙, 여몽 등)이나 강동십이호신 무장들의 후손들은 대부분 2세대부터 존재감이 미미해졌다.[29] 다양한 가문의 인재가 넘쳐나는 위나라와 정복자 집단인 형주계가 인재를 독점한 촉과 비교해보면 호족들의 세력이 매우 막강했다. 3세기가 끝날 무렵, 좌사는 오도부(吳都賦)를 지었는데 여기서 그는 오나라의 가장 잘난 가문 4개를 회계군에서 온 우씨, 위씨와 오군에서 온 육씨, 고씨로 뽑으며 이들이 모두 건업에 거대한 저택이 있고, 수많은 사병을 거느렸다고 적었다.

오국을 제외하면 아직 미개척지에 가까운 강남 일대를 기반으로 삼은 데서 유래한 숙명이라고도 할 수 있다. 촉한이나 위가 그래도 과거 400년간 중원을 군림한 한나라의 영향을 강하게 받는 지역을 기반으로 하였기에 잘 구축된 군현제를 기반으로 하는 탈봉건적 중앙 집권 국가였던 반면에 한무제 시기에야 본격적으로 중국의 영역에 들어왔던 지역이 많았던 만큼 기반으로 하는 지방 호족 세력의 연립 정권인 오나라의 경우 상대적으로 중앙의 힘이 약하고 지방 호족들의 목소리가 클 수밖엔 없었던 셈이다.

이 때문에 오나라 장수들 열전을 보면 커리어에 이민족 토벌이 기본으로 들어갈 정도로 이민족도 많았고 개발되지 않은 땅이 많았으며 나라의 건국 후에도 행정 구역 정비와 호족들을 관리하는 데 역량을 집중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에 기본적으로 손오의 성립은 손책의 강동 정벌에서부터 시작인데 한미한 가문인 손가[30]가 이 지역을 명분 없이 무력으로 장악한 데다가 지역 명사들과도 마찰이 심했기 때문에 건국 이후 이 지역에 대한 통제력이 약할 수밖에 없었다.

손견, 손책 때부터 치면 80여년간 손씨 일가가 장기 집권하며 지역 군주로서 위상을 다진 덕분에 오나라는 삼국 중 유일하게 멸망 이후 오랜 기간 부흥운동이 일어난 곳이기도 하며 많은 이들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하여 나름대로의 권위를 세우는 데도 성공했다. 서진 시대 사서에서 몇 번 보이는 손오 부흥운동이나, (분명히 서진 시대에 쓰인 정사 삼국지에는 오서(吳書)에 본기(本紀)를 두지 않음으로써, 손오를 천자국으로서 인정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진을 계승한 남조 시대에는 손오의 천자국으로서의 지위를 인정하는 쪽으로 조정의 공식 입장이 바뀐 기록이 이를 반증한다. 더 자세히는 『宋書』 「五行志」와 『搜神記』에 투영된 孫吳 인식 ― 南朝化의 端緖 ― 논문을 참조하면 좋다.

박물지에 따르면 예장군에는 일부다처제가 존재했으며, 여자들의 사회 활동이 활발했다고 한다. 박물지의 저자 장화는 오나라가 존속하던 시기의 동시대인이며 따라서 박물지가 쓰인 시기를 보자면 오나라 때도 이런 풍속이 있었을 것이다.
예장군豫章郡의 사대부들은 많은 아내를 거느리고 산다. 그런데 그 부인들은 부끄러움도 모른 채 얼굴을 드러내고 시장에서 한 푼까지도 다투며 돈을 벌어 그 남편의 수레, 말, 옷 등을 마련해 주고 있다. 그 남편이 효렴으로 천거되어 다시 부잣집 여자를 아내로 맞이해도, 여자들이 모든 것을 공급하여 바친다. 먼저 들어온 아내들이 비록 몇 년을 부지런히 하며 그들이 낳은 아이들이 온 집안에 가득할 정도일지라도, 오히려 방출되어 자리를 뒷사람에게 피해 준다. 박물지 314(10-4)

6. 경제

6.1. 강남 대호족 세력의 성장

오와 회계 등 일찍부터 개발이 진행된 곳에서는 고씨, 육씨 등과 같은 대호족이 이미 성장하고 있었다.

그들은 광대한 토지를 소유하고 그곳에 예속되어 있던 다수의 전객(佃客)을 언제라도 사병으로 동원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사병은 평시에는 전객으로 되돌아갈 수 있었다. 또한 그 곳에는 무기고의 설비도 있었다. 게다가 이와 같은 강남재지의 호족으로서 오나라의 장군이 된 사람도 있는데, 예를 들면 육손, 주환이 그러한 인물로, 그들 역시 개발을 추진하기 위하여 더욱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들은 강북으로부터 들어온 손씨 통솔 하의 무장들과 협력하여 손오의 발전을 이끌었다. 또한 손권 후기부터 이런 외부 무장 세력의 인적자원이 소진되면서 손오 정권은 이런 대호족 세력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6.2. 둔전 제도

위나라의 경우 진서 26권과 Yang, "Economic History," 164-170에서 보이듯 많은 토목공사를 하였고, 둔전을 세웠으나 오나라는 이와 반대로 거대한 토목공사나 둔전 설립을 거의 하지 않았다. 육손이 해창에서 둔전 감독을 맡은 것과 비릉을 특별 농업구역으로 선포한 적은 있었지만 이 모두 민사라기보다는 식민화와 관련된 것 쪽이다. 해창에서는 간척과 소금 생산을 할 수 있었고, 비릉에서는 논으로 만들 수 있는 습지대가 존재하였다. 거기다가 이 두 가지는 모두 국가적 차원이 아니라 지역적으로 일어난 일로, 여기에 더해 202년에 비릉은 다른 3개의 현과 같이 주치에게 주어졌다는 점을 눈여겨 봐야 한다. 222년에 이르면 주치가 비릉후가 되었으며 손오 말기에는 육손의 손자가 비릉후가 되었기에 중앙정부는 이 지역의 특별정책으로 별 이득을 볼 수 없었다.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 남부의 장군들.

손권의 오나라는 식민을 위한 개척을 진행하고 기존 토착사회 지배구조의 손오 행정으로의 편입을 이루었다. 손권은 호족들과 휘하 무장들의 영지랑 사병들을 중앙정부의 마음대로 다른 인물에게 배속시키는데 성공하는데 이는 어떻게 보면 중앙의 강한 구심력이 존재했기에 가능한 일일 수도 있다. 한편 위의 경우 둔전이 군현 지역내에 있더라도 군현의 간섭을 받지 않았지만 손오는 둔전관이 군현을 다스리는 경우도 있었다. 육손전에 따르면 육손이 처음 손권에게 등용되었을때 해창현의 둔전교위로 임명되고, 아울러 현의 정무를 관리하며 성과를 냈다는 기록이 있는데 바로 이런 케이스를 지칭한다. 육손이 둔전교위던 시절에 했던 일은 오나라의 행정망에 누락된 토착민들을 병력으로 굴복시키고 기존의 행정망을 오나라 행정망에 편입시키는 일이었으며 손오의 식민화를 이끌었던 일이다. 이런 둔전직의 배분은 당시 육손이 맡은 비릉현이 주치에게 나중에는 육손의 손자에게 맡겨지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특정 인물에게 해당 둔전들이나 개발된 영지가 무조건 세습되거나 종속되는 것이 아닌 중앙정부의 관직 배분을 통해 해당 둔전을 맡은 관리가 알아서 개척과 식민으로 개발하는 형태를 띄게 되었다.

손오 말기의 군사 둔전 운영에 대해서 특기할만한 점이라면 258년 손휴가 내린 조서(既出限米,軍出又從)를 보면 알 수 있다. 둔전병은 따로이 조세(限米)를 납부해야했다. 이듬해 내린 조서에는 주군의 관원과 백성 그리고 둔전병들이 농사를 등지고 장삿꾼이 된 것은 과중한 세납 때문(由租入過重)이라고 했다. 강남이 손오정권 하에 통일되고, 강남 각지 개발이 진행되면서 소운하도 갖추어 감에 따라 물자의 교환이 늘어갔다. 배가 항해하기에 편리한 양쯔강 및 그와 연결되는 소운하의 정비는 물자의 이동을 용이하게 한 것이다. 그리고 수도 건업의 인구는 증가하고 그곳은 소비도시의 양상을 띠어 갔다. 손권의 시대에 이미 새로운 화폐가 발행된 것도 물자의 교환을 자극했으며 중앙의 위령이 미치는 지역에 있어서 이와 같은 둔전체제의 붕괴와 그곳에 사는 병, 민의 유동현상 등이 진행되어 상업의 활발화와 그에 의한 일부지배층의 사치한 풍조가 퍼져가면서 곧 다른 지역에도 파급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와 같은 상황을 배경으로 하여 손권 사후 점점 강력해지는 오 외부의 군사적인 압박을 해소&중앙의 권위를 세우기 위한 군사활동으로 인해, 둔전지역에서 농업에 계속 종사하기엔 재정적으로 버거워, 보다 유리한 상업에 의하여 생활을 보충해 가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이 조서를 보면 둔전 대장은 그 지휘하의 병과 민을 부려서 관하의 생산물을 수송시키고, 상판 행위에 노역과 봉사를 시켰고 병, 민은 단지 농업에 종사하는 것 뿐만 아니라 장사 행위까지 노역 봉사를 하게 되었으므로 이를 보면 손오 말기에는 병, 민은 상업에 종사하여 시장에 나가는 것으로써 위에서 가해지는 압력과 재정적 빈곤을 해소하려고 노력했음을 알 수 있다.

6.3. 화폐, 상업

세금과 조폐권이라는 근본적인 부분에서 오나라는 매우 한정된 권력만을 가지고 있었다. 이 당시 오는 이후 왕조에서도 골머리를 썩인 문제를 맞닥뜨리는데 경제의 고립화와 지역 이기주의였다. 한나라 시기에는 화폐경제에 힘입어 넓은 지역에서 교역과 물자의 교환이 활발했다. 하지만 말기에 터진 내란은 이 통상로를 끊어 놓았고, 3세기 말 쯤 되면 대부분의 땅 있는 사람들은 자급자족을 하게 된다.

화폐와 인플레이션은 이미 후한말부터 터진 문제였다. 내전 시작 때 동탁이 오수전 대신 소전을 만들면서 화폐제도를 망가트렸고, 221년에는 조비가 화폐 대신 곡식과 비단을 사용하기로 결정을 내린다. 이후 북쪽에서는 진나라 대에 이르러서야 화폐제도가 부활하게 된다. 비슷하게도 손권 역시 236년에 구리 전매 제도를 통해 대전을 주조하고 개인의 화폐 주조를 금하였지만 246년에 실패를 인정하고 주조를 중단하게 된다. 결과적으로, 명문가들이 개인적 추종자들을 거느린 것처럼 호족들 역시 소작민들을 물물교환제도로 묶어 놓을 수 있었고, 중앙정부는 전매제도와 화폐 주조, 화페를 통한 세금 납부를 통해 이득을 볼 수 없었으며 정보를 수집하는 것조차 어려웠다. 세금과 병사는 정식으로 평가한 가치 기준이 아닌 개개인과의 협상을 통해 이루어졌고, 상당수의 경제 활동은 중앙정부가 건드릴 수 없는 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군사적으로 교착 상태에 빠진 장강 유역에서 좀만 아래로 내려가면 사회와 정치 제도는 중앙정부로부터 적당히 거리를 둔 호족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었다. 역사는 이들에 대해 언급도 자주 안 하는 편이지만, 이 호족들의 네트워크가 오나라의 표면적인 후원 아래 식민화와 인구 증가를 이끌어 내게 된다. 결과적으로, 손책과 손권은 처음에는 이 호족들을 대상으로 주도권을 지녔지만 나중에(손권 사후) 가면 이들은 사병과 토지, 봉신을 통해 국가의 주류가 되었고 결국에는 조정을 지배하게 된다.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Rafe de Crespigny) 교수의 남부의 장군들(Generals of the South, 1990) 출처 중에서.

동탁이 화폐 제도를 말 그대로 개박살낸 이후, 중국 전토에서 인플레이션이 극심해지고 현물 거래제로 전환하게 된다. 이것을 바로잡기 위해 위에서 오수전을 다시 제대로 발행하고 촉한에서 직백오수, 태평백전 등의 당백전을 발행했던 것처럼 오는 가화 5년(236)에 대천오백大泉五百전을 주조했는데 가치는 하나 당 오수전 500전, 적오 원년에는 대천당천当千, 대천이천二千, 대천오천五千까지의 당백전들을 발행하였다. 그러나 화폐 경제를 되살리려 한 손권의 노력이 무색하게 사람들은 화폐보다는 실물 거래를 더 신뢰했고, 마치 훗날 한반도에서 일어날 일과 비슷하게 화폐 장려 계획은 실패하게 된다. 대천오백은 결국 적오 9년(246) 금대전(禁大钱)령을 내려 사용을 금했다. 그리고 이때 만들어진 동전들은 도자기를 만드는데 쓰인다.

한편 촉한에서 만든 태평백전등이 오나라 일부 지역에서 유통되기도 했는데, 이 태평백전 역시 크기와 중량이 일정하지 않은 악화(惡貨)[31]였으므로, 오나라 내에서 얼마나 유통되었는지는 많은 자료가 추가되어야 알 수 있겠지만, 이미 화폐 경제 자체가 박살난 상황에서 얼마나 영향을 주었을지는 의문으로 남는다. 다만 아예 유통이 안 된 동탁의 소전과 달리 촉한의 직백오수와 그것을 계승한 화폐들은 촉한 내부에선 그럭저럭 성공적으로 유통되어, 비록 이전 시대에 비하면 악화였으나 이미 화폐 경제가 무너진 상황에서 그나마 신뢰가 가능했기에 촉한 경계와 인접한 일부 지역에서 유통된 것으로 여겨진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오나라 중앙 정부가 유통한 화폐가 아니었으므로 오나라 전체에 줄 수 있었던 영향은 크지는 않았을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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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나라의 화폐상황에 대한 흥미로운 자료가 있다. 이 목간은 236-237년(오 가화 5-6년) 사이의 것으로 추정되는데 장사오간 혹은 주마루오간 등으로 불리는 14만점의 목간 중 하나이다.[32] 이 목간은 창고 담당 관리들이 그 해 12월 분의 세금 얼마치를 걷어서 군으로 보낸다는 보고서 같은 것인데, 정확한 양은 쌀 44곡 3두라고 되어 있다.

문제는 동전(錢)으로 따지면 8억전이라고 써 있다는 것인데 동탁이 소전을 만든 이래로 당시 인플레이션이 어느정도 수준이었는지 보여주는 유물이라고 할 수 있을 거 같다. 저런 인플레이션 수준이면 오나라에서 찍어낸 돈의 의미가 없을거 같고, 오나라 인들이 촉한의 화폐를 썼다고 하는 이야기나 손권이 고액전을 발행했다고 하는 이야기에 신빙성이 더해지는 듯 하다. 장사간독박물관 사이트 참고

미야자키 이치사다에 따르면 손권은 이런 문제를 형주와 양주를 합쳐서, 그러니까 장강을 교역 통로로 만들어 무역을 활성화시키는 방법으로 해결하려고 했는데, 일껏 장강을 손에 넣었더니 촉한과 위의 전쟁 연발로 사람들이 다 죽고 도망가서 비었다는 일화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나라는 외국과의 교역이 타국보다 활발하여 건업은 당대의 상업도시로 성장했다. 남중국 정복으로 얻은 해외무역을 통해 동남아시아의 이국적인 물품을 수입하고 활발한 교역을 진행한 손권은 한나라가 건재하던 시절엔 그저 제국의 변방이었던 오 지역에서 화려하고 멋진 도시를 완성할 수 있었다. 손권이 세운 건업의 문화와 화려함은 이미 당대의 유서깊은 다른 대도시들에 충분히 견줄만 했다. 케임브리지 중국사에 따르면 본디 북중국의 수도는 인민에 대한 통제가 쉽도록 네모반듯한 방형 모양의 통제도시인 경우가 대다수였던 반면 오 제국이 건립한 건업은 상업지구가 좀 더 혼재되어 있어서 당대 기준으로는 꽤나 상업친화적인 도시였다고 설명한다. 이런 이 지역의 발전 기조는 육조시대나 이후의 중국 왕조에서도 마찬가지였기에 손권이 다스리던 양쯔강 델타는 훗날 북중국의 도시들과는 달리 발전된 서구권 지역과도 대등하게 맞서는 고도의 상업도시 네트워크를 구축하는 것에 성공했다. 오늘날에도 이 지역은 상하이로 대표되는 중국 굴지의 번성한 지역인데, 이런 발전의 토대는 이미 손권 시대에 이렇게 싹을 틔운 것이다.
대황제(大皇帝 : 손권)께서는 이전 시대(한 나라 시대)의 상황이 그와 같음을 보고, 지금의 형세가 이와 같음을 관찰하였기 때문에 농업과 양잠 사업을 광범위하게 개척하고 사리를 꾀하지 않고 대대적으로 비축하였으며, 중복된 노역을 하는 백성을 안쓰러워 하고 전사들을 양성하는 일에 힘썼습니다.
정사 삼국지 오서 화핵

이런 손오 치세의 경제적 발전으로 인해 각종 산업의 발전도 융성해졌다. 단적으로 오늘날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남경운금의 시초를 마련한 것도 이 시대로써 남경운금의 배경이 된 양잠업의 시초는 바로 이 손오 시대이다. 손오 시대에 손권이 정력적으로 양잠업을 양성하고 지원하면서 산업이 대대적으로 흥하여 양쯔강 델타 땅에 처음으로 본격적인 비단의 생산이 이루어졌고, 이후 북쪽의 장인들이 남방으로 이주하여 417년 동진이 건강에 직조를 관리하는 관서인 금서(錦署)를 설치하면서 남경운금의 시작을 열었다. 이렇듯 손오 시대에 처음으로 시초를 닦은 강남의 비단은 시대가 지나면서 원래 유명했던 촉금의 성세를 넘어 중국 제1의 비단으로써 칭송받으며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

6.4. 손오 정권의 경제사적 의의

위진남북조의 사회 경제사 측면에서 본다면 오는 거의 위에 필적하는 비중으로 다뤄진다.[33] 이는 중국 경제사 측면에서 엄청나게 중요시되는 강남 개발의 시작점을 오나라, 개중에서도 손권으로 잡고 있기 때문. 이 시기 오는 이민족을 몰아내고 지금의 강동 지역인 남방에서 한족이 지배하는 지역을 넓혔다. 당대의 오 지역은 아직 미개척지가 많아서 행정 구역을 쉽게 늘릴 수 있었다.

특히 건업을 수도로 정한 일은 반드시 다뤄질 정도로 중요시된다. 손권이 수도로 정하기 전까진 도시 근처에도 미개척지가 존재할 정도로 별볼일 없던 지역이 손권이 수도로 정하고 오나라 시기에 집중적으로 개발되면서 이후 오랫동안 강남 지역 정권들의 수도로 사용될 정도로 발전하니 그럴 만도 하지만. 위진 남북조 시대에서 건업을 수도로 한 남조를 가리키는 표현인 육조시대의 선두로 오나라가 꼽힌다.

전한 시기 아주 강성한 제후왕이자 오초칠국의 난의 주동자였던 오왕 유비의 영지였던 오나라의 부유함(< 사기> 오왕 비 열전에 따르면 구리와 소금이 많아 세금을 거두지 않았다고 한다)을 생각하면 손권의 강남 개발 이전에도 강남은 개발이 많이 되어 있었다는 주장도 있다. 하지만 전한 시기 오나라는 생각처럼 넓은 지역은 아니었다. 대략 장강 하류 삼각지와 그 주변 지역 정도에 불과한데 그것도 다른 왕들에 비하면 아주 크고 강성한 것이었다.

또, 양자강 이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육조시대 이후라고 하지만 그 전에도 사람은 꾸준히 살고 있었고, 특히 남쪽은 고온다습하여 농사를 지어 작물을 키우기에는 오히려 북쪽보다 유리했다. 특히 하류지역인 양주 일대는 비옥한 삼각지가 엄청나게 넓게 자리잡고 있어 그 옛날 상고시대에도 사람이 살고, 읍락을 이뤘던 유적과 유물이 있을 만큼 역사 깊은 곳이다. 따라서 인구부양력은 중원에 비해 그다지 밀리지 않았으며 촘촘한 국경선을 서로 맞대고 끊임없는 전란에 시달리던 중원의 다른 나라보다 오히려 전란은 더욱 적어 인구를 안정적으로 유지할 수 있었다. 실제로 초나라의 춘추전국쟁패기를 보면 동원하는 군대의 양이 다른 나라의 몇 배는 될 때가 자주 나오며,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에도 나타난 군벌들 중 상당수가 초나라 유민[34]들이었던 것으로 볼 때 적어도 인구수 하나만큼은 밀리지 않았다. 이는 오나라가 풍요로운 회남 지방을 손에 넣지 못하고 회수를 방어선으로 삼지 못한 탓도 있다. 실제로 초나라부터 시작해서 동진, 유송, 남제, , 등 다른 육조 왕조와 달리 오나라는 이들 가운데 유일하게 회남을 차지하지 못한 왕조였다.

어쨌거나 대체적으로 손권의 오가 근거지로 삼았던 강남 지방은 오군 지역 일부를 비롯한 손권의 직할 지역 일부 외엔 한대에 비교적 낙후된 곳이었음은 분명하다. 그런데 손책과 손권이 여기서 지배력을 확충하던 후한 말에 북쪽 지방이 혼란에 빠지자 많은 사람들이 강남으로 이주해 왔다. 이들은 북쪽의 선진 농업 기술을 가지고 강남 지방의 황무지를 개발하여 장강 하류 지역은 점차 경제적으로 부유한 지방으로 바뀌었다. 손권 정권은 토착 지주인 강동 오군(吳郡)의 고(顧), 장(張), 주(朱), 육(陸)씨와 강북에서 이주해 온 장소, 주유, 노숙 등 세족 집안의 지지를 받아 유지되었다.

때문에 손권은 사족 세력을 적극적으로 키워 중앙에서 지방에 이르기까지 모든 관직을 그들에게 맡겼다. 또, 일부 호적에 편입된 농민과 둔전객(屯田客)을 고급 관리들에게 하사하여 조세와 요역을 면제해 주는, 즉 복객제(復客制)를 실시하여 사족 지주의 이익을 보장해 주었다. 그리고 이들에게 장군을 세습시켜, 장군은 정부에서 하사한 군대나 개인이 모집한 군대를 지휘하는 영병제(領兵制)를 실시했다. 그 결과, 사족에게 소속된 이들은 정부에 소속되지 않아 조세와 요역, 병역을 부담하지 않는 개인의 부곡(部曲)이 되었다. 이렇게 북방의 공격에 맞선 손오 정권의 표면적인 보호 하에서 중앙 정부의 정쟁에도 불구하고 호족들은 나름대로 독립적으로, 또한 경쟁적으로 개척과 확장을 진행하였다.
군사적으로 교착 상태에 빠진 장강 유역에서 좀만 아래로 내려가면 사회와 정치 제도는 중앙정부로부터 적당히 거리를 둔 호족들에 의해 좌지우지 되고 있었다. 역사는 이들에 대해 언급도 자주 안 하는 편이지만, 이 호족들의 네트워크가 오나라의 표면적인 후원 아래 식민화와 인구 증가를 이끌어 내게 된다. 결과적으로, 손책과 손권은 처음에는 이 호족들을 대상으로 주도권을 지녔지만 나중에 가면 이들은 사병과 토지, 봉신을 통해 국가의 주류가 되었고 결국에는 조정을 지배하게 된다.

(중략)

일반적으로, 오나라가 존재하는 것만으로 장강 남쪽의 땅은 더이상 중앙 정부의 이득을 위한 수탈의 대상이 아니게 되었다. 한나라 시절 장강 남쪽의 논, 광산, 교역 등으로 얻어진 부는 조정의 이득 혹은 북방경계를 위해 주기적으로 수거해가는 대상이었다. 황하에 위치한 정부에게 있어 남중국은 언제나 두 번째였고 가끔 조그만 반란이 일어나는 수탈의 대상이었던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오나라 정부는 남쪽에 즉각적인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기존 수탈에 사용되던 한수와 회수는 습격로가 되었고 장강 방어선 구축에 필요한 금액은 합리적이었으며 이제 남부의 이득은 남부에 남게 되었다. 오나라 궁전과 병사를 유지하는 데 돈이 필요하기는 했지만 남부 교역의 독점으로 충분히 매꿀 수 있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정과 수도가 모든 국가의 부를 독점할 필요는 없었고, 상당수의 병사들은 장강을 지키기 위해 배치됐으며 가끔 대규모 식민화에 동원될 뿐이었다. 그럴 때가 아니라면 각 지역의 발전은 지방 호족이 맡아서 했다. 그들을 지켜줄 군벌이 없긴 했으나 이는 주는 것은 거의 없이 수탈만 해갈 정부가 없다는 의미기도 했으며, 또한 이민족들이 이 확장을 꾀하는 지방 호족들에게 미친듯이 시달린다는 얘기기도 했다. 이 호족들이 바로 남쪽을 개간하고 독립을 일군 자들인 것이다.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Rafe de Crespigny) 교수의 남부의 장군들(Generals of the South, 1990) 출처 중에서.

오는 촉과 연합하여 위에 대항하는 정책을 취하였고, 위와의 전쟁도 회하와 장강 이북에서 일어났다. 수군이 약한 위나 군사력이 부족한 오였기 때문에 쌍방은 반세기 동안 서로 대치할 수 있었다. 또, 오는 자연 조건이 다른 지역보다 좋아서 북쪽으로부터 많은 사람이 이주해 왔기 때문에 농업이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마직업은 당시 수공업의 중심이었으며, 사직업도 점차 일어나기 시작하였고, 검(劍)이나 구리로 만든 거울의 공예 수준도 뛰어났다. 그뿐만 아니라 청자(靑瓷)의 제작 기술도 뛰어났다. 특히, 오는 동남 지방이 바다에 면해 있어 조선업이 발달하였는데, 건안군(建安郡)의 후관(侯官, 복건 민후)은 당시 조선의 중심지였다. 장강에 띄웠던 전선에 3천 명을, 바다를 왕래하는 큰 선박은 길이가 20여 장으로 6~7백 명을 승선시키고 화물 1만 곡(斛)을 실을 수 있었다. 이렇게 보면 오는 조선업의 발달로 해상 교통이 크게 발달하였다. 그리하여 군대를 이주(夷州, 현재의 대만)에 보내 대륙과의 관계를 강화시켰고, 또 동남아시아에 있는 부남( 캄보디아), 임읍(베트남 중부)에 사신을 파견하여 무역 왕래가 있었다. 외국 상인들, 심지어는 로마 상인들도 남해를 통하여 건업으로 와서 손권의 초대를 받고 무역하였다.[35]

춘추전국시기 장강 유역인 형초, 오월 지역에 나라가 세워져 경제와 문화는 어느 정도 발전했으나 여전히 땅은 넓고 사람은 적어 생산력은 낮은 상태였다. 그래도 적어도 생계를 꾸리는 데 큰 곤란은 없어 토지 개간에 큰 압박감을 느끼지 않았다. 손오 시기에 북방의 선진 농업 기술이 강회 이남 지역에 전해지긴 했으나 아직은 이러한 혜택을 입은 지역은 넓디넓은 남방 지역의 일부일 뿐이며 그 나머지 지역은 여전히 낙후한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삼국 시대만 하더라도 손권의 직할지인 강회 이남 선진지역, 형초 일부 지역을 제외한 손오 강역 대부분의 지역 경지에 불을 질러 밭을 갈아 물을 끌어다 농사짓는 화전 경작 수준이었는데, 이 때문에 손오는 꾸준히 행정구역을 새로 개척하고 치소를 늘리고 산월을 비롯한 이민족들을 잡아 호적에 넣고 동화시킴으로써 개척을 실시하고 행정력을 강화해 나갔다.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 교수의 연구에 따르면 이런 손오의 개척으로 인해 오나라는 후한 말보다 2배 이상의 행정구역 확보를 이룰 수 있었다. 손권이 기존 농업의 발전에 아예 신경을 안 쓴 건 아니었고 열정적으로 농업발전을 시도해 본격적인 논농사가 오나라에서 처음 시작되었지만, 사실 그보다 그에게 더 중요한 것은 일단 농업이 발전되었으나 한정된 기존 영토가 아니라 새로운 영토의 개척과 인구, 행정의 확보였다.
226년 조비가 죽어 북방의 위협이 완화되자, 손권은 농업 발전에 힘써야 한다는 내용을 선포하고, 육손은 여기에 더해 장수들도 직접 개간을 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손권은 열정적으로 이 제안을 받아들이고 자신과 아들들도 직접 참여하겠다고 말한다. 진서 식화지에서는 이를 보고 오는 이때부터 쌀농사에 전력을 다했다고 기록했으나 농업을 짓기 보다는 언제나 군사적 확장에 관심이 있던 손권에게 이런 평가는 과장인 것 같다. 몇 년 후 240년에 가뭄이 들자 손권은 징병과 부역이 농업을 방해한다며 장군들의 자제를 촉구한다.

장강 남쪽과 북쪽은 서로 사정이 달랐는데 조조와 후손들이 다스리던 위나라는 한 번 정돈되었던 사회가 전란으로 혼란에 빠진 것이었기 때문에 둔전을 통해 부랑민을 정착시키고 새로운 행정체계를 만들어 군사 활동에 필요한 식량을 공급하고자 한 것이었다.

하지만 장강의 개척지에서 손권은 이미 한족들이 자리 잡은 곳의 안전성을 올려서 얻을 게 별로 없었고, 어떻게 농지와 농민을 확보하냐가 문제였다. 그렇기에 주된 관심은 어떻게 더 공격적으로 나와 국경선 밖의 영토를 더 확보하냐였지 북쪽처럼 떠돌고 있는 이들을 자리잡게 하고 지키는데 있지 않았다. 물론 군사 활동을 위해서는 농업 기반이 필요했지만 농업 개선은 주된 관심이 아니었고 단순 계산으로도 손권은 자신의 손아귀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을 정복하고 식민하는게 이미 있는 농지를 개선하는 것보다 훨씬 이득이었던 것이다.

그렇기에 위나라는 제한된 공간을 효과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고, 오나라는 계속해서 확장을 했던 것이다. 오나라에는 경제 발전에 필요한 한나라의 복잡한 행정 정치 구조가 별 필요 없었고, 군과 현 체계를 자신에 맞게 변경해서 산월족에게 지속적으로 압력을 가했으며 필요할 경우 군사력을 동원했다. 이를 통해, 산월들은 새로운 현에 정착했고 시민으로 등록되었으며, 오나라는 이렇게 얻어낸 인력과 물자를 이용해서 더 확장하거나 아니면 북쪽의 외적을 막는데 사용할 수도 있었다. 그렇기에 오나라에서 말하는 개발과 유지는 전쟁과 식민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이 확장 속도를 가늠하기는 매우 어렵다. 우리는 하제가 푸젠성의 해안가에서 시작해 민강유역을 장악한 것과 육손 전종이 황산 남쪽에 있는 제하 유역을 장악한 얘기를 기억할 것이다. 그리고 이 양주 식민의 큰 틀은 234년에야 끝나는데 제갈근의 아들 제갈각이 단양에 사는 산월에게 새로운 공격을 가한 것이다. 제갈각은 각 마을을 요새화하여 주민들을 밖에 못 나가게 하고, 병사들로는 마을 밖의 모든 곡식을 거두게 한다. 그러면서 투항하는 자에게는 규휼을 약속하니 기록상으로는 4만명이 나와서 항복했고 이 새로운 주민들은 여러 장수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한다. 이를 통해 길고 길었던 황산 지역 식민이 끝나, 장강과 제하 사이의 황산은 결국 중국에 속하게 된다. 이렇게 큰 틀은 끝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국경지역 어딘가에서는 계속해서 이런 식민 활동이 때로는 정부에 의해, 때로는 개인에 의해 일어난다.

오의 이런 개척을 평가하는데 가장 좋은 방법은 후한서 군국지에 실린 140년에 행해진 인구조사와 진서 지리지에 실린 280년에 행해진 인구조사를 비교하는 것이다. 다만 단순히 두 문서에 기록된 인구를 비교하는 것은 적절치 않은데 후한서는 모든 인구를 셌지만 진서의 인구수는 오직 호(戶)로만 주어지고 그나마도 Bielenstein, "Census," 154-155에서도 언급했듯 세금을 내는 주민. 즉, 건장한 성인 남성만 센 숫자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의 목록은 확실한 편이기에 이 현의 위치와 숫자의 비교는 중국이 해당 지역을 얼마나 통제했는지를 알려주는 좋은 증거가 된다.

이걸 보면 140년과 280년의 차이는 확연하게 들어난다. 같은 기간 동안 촉한의 현 개수는 117개에서 141개로 20% 정도 증가하는데 이는 남쪽에서 현이 더 늘긴 했지만 서쪽에서 감소하였기 때문이다. 반면 오나라의 경우 장강 남쪽 현의 개수는 160개에서 322개로 2배로 뛰었으며 기존에 아무 것도 없던 곳인 오늘 날의 저장성, 장시성, 푸젠성 등에 현들이 속속들이 들어가있다. 특히 광저우에서 서쪽 강을 따라 남쪽으로 가는 길과 베트남 쪽으로 향하는 해안가의 발전이 두드러진다. 기존의 변경 지역이었던 장강 유역은 이제 중앙 정부가 들어선 확고부동한 지역이 되었다. 다만 이 개척에서 가장 큰 이득을 얻은 것은 진나라로, 오나라가 개인적 필요로 의해 개척을 했지만 이후 진나라에 흡수되었고, 4세기 초반, 북쪽에서 밀려난 진나라가 과거 손권과 그의 후손들이 다스리던 오나라에 망명정권을 세우면서 그 혜택을 누리게 된 것이다.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Rafe de Crespigny) 교수의 남부의 장군들(Generals of the South, 1990) 출처 중에서.

이 오나라의 존재가 후에 남북조시대를 열었다고 할 수가 있는데, 만약 오나라가 장강 이남을 개발해 놓지 않았다면, 오랑캐의 침입으로 장강 이남에 쫓겨온 동진은 존립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남북조시대의 남조는 거의 오나라를 계승한 것으로 봐도 무리가 없다는 이야기다. 오나라 멸망 후 겨우 30년 만에 동진이 같은 영역을 차지하게 된다. 동진은 오나라와 마찬가지로 건업(건강)을 그대로 도읍으로 삼았고, 오나라가 닦아놓은 기반으로 강남 개발을 계속한다. 다만 동진 문서에도 나오지만 화북에서 내려온 유이민 귀족들에 의해서 오나라 유민, 호족들은 차별을 받게 되고 그에 따른 반항심도 높았다.

경제 개발에 따른 환경의 변화도 있었는데 한나라 이래 진행되어 서진 말에 이르러 대규모로 인구가 이주했던 강남에서는 특기할만한 환경의 변화가 있었다. 본시 사마천이 말했던 것처럼 '땅은 넓지만 인구는 희박했고, 죽목(竹木)이 우거진'( 사기, 권 129), 강북보다 큰 규모의 산림을 가졌던 강남에서 산림의 부족 현상 문제가 발생했다. 특히나 이러한 문제를 촉발했던 것은 후한 말~삼국시대에 걸쳐 발생한 대규모 전쟁이었다. 적벽, 이릉으로 대표되는 대규모의 화공, 장강과 한수, 회수 일대에서 발생한 수전에서 사용될 전함의 건조 등은 그 일대의 산림을 크게 훼손했다. 이러한 문제가 발생하면서 손오 정권[36]과 그 이후의 남조 국가들은 목재 부족에 대해 경각심을 가지게 되었으며, 목재의 조달과 소비에 대해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한편, 산림의 부족 문제가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던 것으로 보이는 후한 말~삼국시대에도 목재 부족과 관련된 일화가 몇 차례 소개되는데, 손권은 건업에 궁궐을 건설하면서 무창에 있는 자신의 궁궐을 헐어서 목재를 충당했으며, 손휴 시대에는 광릉에 성을 보수하면서 그 지역의 무덤들을 도굴해 목재를 마련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당시에도 현지 조달, 타지에서의 목재의 공급과 관련해 크게 문제가 있었음을 보여주는 기록이라 할 수 있다.

6.5. 촉한과 비교할 때

사료상 오나라의 인구는 230만명으로 94만명에 불과했던 촉한보다 두 배나 많았다고 기록하고 있다.[37] 삼국시대 특성상 호족에 예속되어 정부가 파악하지 못한 주민 수를 감안하면 실 인구 수는 이것보다 훨씬 많았을 것이다. 전근대 사회에서는 인구가 곧 경제력이었다.[38] 또한 오나라는 남쪽의 교주를 중심으로 남방 교역을 활발하게 전개했다. 이는 여러 동남아 국가들로부터 조공을 받은 사실에서 알 수 있다.

당시 장강 이남이 거의 개발되지 않았지만, 이에 반해 장강 하류는 춘추전국시대부터 개발되었으며[39], 오나라가 형주 공방전을 통해 장악한 형주 남부 지역(현재의 후난성 지역)까지 포함하면 촉한이 장악한 익주 전체를 상회하기 때문에 아무리 촉한이 국가 운영을 탄탄히 해도 근본적인 규모의 차이 때문에 오나라를 능가하기는 힘들었다.

지도상으로 보면 두 나라의 면적은 107만 km² vs 145만 km²로 큰 차이가 나지 않아 보이지만, 촉한에서 실제 활용된 국토는 파촉 지방의 거대한 분지와 한중, 기타 변두리의 땅 몇 조각 뿐이라 실질적으론 몇 배의 차이가 난다. 아무리 익주가 알토란 같은 땅이라고 해도 1개 주밖에 차지하지 못한 촉한과 3개 주에 걸쳐 영향력을 발휘한 오나라가 같을 순 없다. 현재도 촉나라 영역이었던 쓰촨+충칭+윈난 지역의 인구는 아무리 높여봐도 1억 5천만이 안되지만, 오나라 영역이었던 저장+장쑤+푸젠+광둥+후난+후베이+베트남 북부의 인구는 총합 4억이 휠씬 넘는다.

6.6. 산출되던 물산

손오가 차지한 장강 중상류 일대는 옛 초나라, 오나라, 월나라 땅으로 각각 춘추오패에 든 강국임에서 알 수 있듯이 남중국 지역 중에서는 물산이 풍부한 편에 속했다. 또 이곳들은 예로부터 벼농사에 적합해 쌀이 많이 생산되어 식량이 풍족하였다. 또한 강과 바다에 인접해 있어서 각종 생선들도 많이 잡혔다. 진나라 말기의 명장 장한이 소부 직책을 맡고 있을 때 어업세를 거둔 지역 중 하나가 바로 회계로, 손오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또한 국가에서 중요시 여기던 자원인 소금 또한 많이 산출되었다. 앞서 말한 사기에도 나왔듯 이 땅은 구리와 소금이 많은 땅이었고 전한 시기 오나라는 소금과 구리를 수출하며 '해염현'이라는 명칭을 가지는 현도 존재할 정도였으며 더군다나 202년에 주유가 "우리 땅은 소금과 동이 나와 부유하기 때문에 적을 걱정할 필요가 없다!"라고 주장할 정도로 소금은 풍족한 것이었다. 소금의 생산량은 대단해서 대장군 주환이 죽었을 때 손권은 장례비로 쓰라고 소금 5천 곡(斛)을 더해주었다. 그 정도로 동오 지역은 개발은 덜 되어 있을지언정 예로부터 물산이 풍부하여 잠재성을 인정받은 지역이었다. 괜히 제갈량이 천하삼분지계를 논할 때 오나라가 지리를 얻었다고 평한 것이 아니다. 이를 기반으로 손오는 아직 개발이 상당히 덜 된 장강 일대 및 남방개척에 적극적으로 나서 국력을 크게 신장시킬 수 있었다.

또 가는 실로 정교하게 짠 갈포가 유명했다. 조비가 사신을 통해 요구한 적도 있고 삼도부에도 오의 갈포 칭찬이 나온다고. 건안군에는 조선공장이 있어 전선교위도 두었는데 노동강도가 엄청 쎄서 많은 범죄자들이 배 만드는 데 차출됐다고 한다. 황제에게 죄를 지은 경우 고관이 건안에 보내지는 경우도 있었는데 손호 시기의 임해태수 해희와 회계태수 곽탄. 어쨌든 오나라는 다양한 종류의 배를 많이 잘 만들어냈고, 대형선의 경우엔 높이가 5층에 3천 명이 탈 수 있는 것도 있었다고 한다. 큰 배가 줄줄이 바다로 나가는 모양은 마치 섬이 떠 있는 듯 했다고.

그 외에 오나라는 기후 조건과 남방 교역 덕분에 진귀한 사치품을 다양하게 모을 수 있었고, 이를 통해 말[40]과 같이 부족한 자원들을 거래했다. 특히 교주는 오나라가 남방의 물품을 생산하거나 들여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지니고 있었고, 이는 결국 사섭 사후 손권이 사씨 가문을 내치고 교지를 직할 통치하는 이유 중 하나가 되었다. 다만 이 과정에서 사섭이 죽은 뒤 교주자사 여대가 사섭 일가의 영향력이 강한 합포군·교지군·구진군·일남군 4군만 교주에 남기고 나머지 구역을 광주로 분할하는 구상으로 광주자사를 자처하여 손권의 승인을 받았다가 이에 격분한 사섭 일가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망하면서 환원되었던 것이 교주의 정치를 불안정하게 만들었고 이 때문에 손오 멸망 때까지 교주 지역은 자주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다만 손오는 멸망 직전까지도 교주, 광주에 대한 지배력을 잃지 않으며 손오 중앙정부의 지배력을 계속 확대하려고 노력했다.

7.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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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오의 병사.

군사적인 면에서는 세병제를 취했는데 군대가 사병화되어 통합된 지휘 체계가 없는 점이 큰 약점이었다. 오나라의 장군들은 부자 형제 사이에서 휘하의 군대를 세습해 가는 것이 제도로서 인정되어 있었다. 그것은 오나라 일대를 통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오나라가 정식으로 발족하기 이전 손책의 시대부터 계속되고 있었으므로 군대는 그것을 이끄는 장군의 사병이라는 성격을 강하게 띠게 되고 또한 각각의 군대가 독립성을 더해가게 되는 것이다. 즉 무력을 기초로 하는 오나라는 사병집단의 연합체라고 하는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이를 연합시키는 핵심은 앞서 기술한 손권과 여러 장군 사이의 주종관계였던 것이다.

오왕 즉위를 기점으로 봉읍제가 폐지되지만, 호족들의 사병 연합군이라는 오군의 편제는 크게 변하지 않았는데, 다만 군량을 비롯한 보급을 중앙정부에서 파견한 관리가 관장하는 형태를 취하게 된 것이다. 이것이 제갈각과 고담 등 손권 친위세력이 맡았던 절도의 역할이다.

이는 호족 연합체인 오의 국가 특성에서 기인하는데, 호족들 개인이 이끄는 군대를 모아서 오군으로 편성하는 방식이었기 때문에 오군의 지휘 체계 아래에 또 별개의 지휘 체계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방어전에서 꽤 뛰어난 성과를 거둔 반면, 외정을 나갔다 하면 발리는 게 일이었다. 특히 통합된 지휘 체계를 요구하는 야전 능력이 심각하게 떨어졌다. 그리고 이렇게 죽을 쑨 다른 원인은 남중 평정 후 말을 어느 정도 자급자족할 수 있게 되었지만, 그래도 부족한 기병을 대신해 보병 전력을 강화하는 데 힘썼던 촉한[41]과 달리, 오는 이런 노력이 없었다는 것도 한 몫했다. 일본의 동양 사학자 미야자키 이치사다는 이런 손오의 체제를 일종의 일본의 개발 영주(사무라이와 다이묘의 전신격)와 유사한 체제로 보았다.

둔전제를 통해 노동력과 군사력이 일치되고, 휘하 병력의 규모가 장군의 영향력과 비례하게 되는 사병 연합군의 형태를 취하다 보니 장수들이 희생을 감수해야 하는 적극적인 싸움을 피하게 되는 결과를 낳았고, 병사들이 평시에 농사에 종사하는 덕에, 정기적인 훈련을 거치던 촉한이나 위의 중앙군에 비해 그 정예도가 현격히 떨어졌다. 심지어 병사들이 다루는 제식 무기나 군의 편제조차 각 지휘관별로 다를 지경이었다고 하니까, 이래서야 체계적인 전쟁이 될 수가 없었다. 서진의 침공 당시 도준 등의 군대가 하룻밤 새에 홀라당 도망갔다는 말이 있는데, 이것도 오군의 고질적인 문제가 극단적으로 표출된 경우로 보인다.

군사 지휘관들마저도 제멋대로이며 당시 기준으로 봐도 용맹함과는 별개로 규율은 형편없다고 볼 수 있을 정도. 감녕 여몽이 다툰 일화에서 이러한 군부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다. 감녕의 하인인 어린애가 여몽에게 도망쳐 있다가 감녕이 그 아이를 붙잡아 죽이자, 분노한 여몽은 군사를 몰아 감녕을 공격하려 했다. 그러다가 어머니가 말리자 감녕과 화해하였다는 일화인데, 서로의 그릇을 드러내는 훈훈한 일화라고 포장은 했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한 국가를 대표하는 명장들이 무슨 조직폭력배들처럼 사소한 다툼으로 자존심 싸움을 벌이다가 원한을 품어 사병들을 함부로 동원해 전투를 벌이려다가 그만 둔 엽기적인 모습이다. 게다가 이게 무슨 '막장'스러운 이야기가 아니라 '미담'으로 취급된다. 이런 고위 간부들이 어린아이 하나 때문에 내전을 벌이며 서로 죽이려던 걸, '어머니의 중재로 참았다'고 자뭇 훈훈하게 기록하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갓 임관한 신입 무장들도 아닌 여몽과 감녕이 이런 짓을 벌였다는 점이다(…).

그나마 손권이 오왕에 즉위한 뒤에는 보급 체계라도 통합하려는 시도가 있었지만, 손권이 오왕 즉위하기 전까지는 아예 봉읍제라 하여 각자 땅 나눠주고 적절히 관원 임명하고 각자 무기 조달해서 군대 편성하는 체제였다.

당시 촉한과 위의 대결은 아무래도 옹, 양주의 유동적인 상황을 촉한이 적극적으로 이용해 이민족, 현지인 포섭으로 계속 영향력을 늘리려 하고 위가 군사, 행정력을 동원해 이를 방어하는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전선도 유동적이어서 서로 병력을 기동하는 일이 잦아 장수들이 활약을 주도할 수 있었다. 반면 손오와 위의 싸움에선 장강이라는 거대 지형의 문제로 서로 대치하는 국면이 주가 된 전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오는 위가 공격하게 만들어 승리를 얻었는데 대표적인 예가 육손의 석정 전투와 제갈각의 동흥제 전투.[42]

오나라의 굴욕으로 대표적인 게 료래래(遼來來)로 유명한 합비(허페이) 공방전이지만, 최대의 굴욕은 촉한 멸망 후에 익주나 먹자고 보협과 육항에게 병력 3만 명을 줘서 영안으로 쳐들어가게 했는데, 겨우 2천 명 이끌고 있는 나헌한테 쩔쩔 매다가[43] 진에서 보낸 형주 자사 호열에게 발린 것.

손오의 전쟁을 보면, 대체로 야전을 피하고 매복/기습이나 대규모 병력을 동원해 적의 일정한 거점을 포위하는 공성전에 치중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 역시 야전을 할 수 없는 오군의 특성 때문이다. 이것 역시 합비/소요진 전투 등에서 보이듯 장료 등의 숙장들이 지휘하는 정예병들의 강습에 손쉽게 당해버리는 모습을 보인다. 물론 조인을 격퇴하고 남군을 빼앗은 명장 주유 같은 예외도 있지만, 그 주유조차 상당한 피해를 감수해야 했고, 결국 주유 자신도 큰 부상을 입었다. 육손이나 여몽, 제갈각 등의 장군들도 대부분 유인/매복/기습 등의 기책에 의존하는 경향이 컸다.

또 호족들의 연합이나 다름없는 정권이다 보니, 손권은 권신들의 존재를 상당히 경계했다. 주유만 하더라도 손책 생전에는 양주 일대에서 손책과 주유를 일종의 공동 CEO로 볼 정도였고, 관위로만 보면 손권은 일개 군의 태수에 불과했다.

이런 취약한 기반에서 정권을 다져나가다 보니, 손권은 위나 촉한과는 달리 신하에게 일정 이상의 군권을 맡기는 일이 없거나, 맡기더라도 자신이 온전히 믿을 수 있는 사람에게 군을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234년 북벌 때만 해도 손권은 허페이에 10만 병력을 동원하면서 별동 부대에는 각 1만 명만 편성시켰다. 오의 군사 동원력이 그 정도밖에 안되는 거 아니냐고 하는 의견도 있지만, 제갈각이 3년 만에 단양 1개 군에서 4만 명을 뽑아내고, 1만 명을 거느렸다는 증언들이 수두룩하게 많다. 허페이 공격에 제갈각이 20만을 동원했다는 것도 인력만으로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었다(물론 대군을 모으는 것과 대군을 다루는 것은 문제가 다르지만).

문제는 후자의 경우인데 군을 맡기더라도 군사 전문가가 아니라 손권의 신임이 기준이 되다 보니, 태상인 반준이 무릉만이 토벌을 지휘하고 제갈근이 대장군이 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 사람들은 자기 세력이 없이 연합군을 지휘하는 속된 말로 낙하산들이었는데, 제갈근의 소극적인 군지휘나 반준의 무릉만이 토벌이 장기간 이루어진 것은 이런 총사령관 인선의 문제가 아닌가 보인다.

한편 손오는 건국 과정에서 강남 토착민인 산월(山越)의 저항을 받았다. 산월은 고대 백월(百越)의 후예로 지금의 장쑤성, 안후이성, 푸젠성, 장시성 등지의 산악 지역에 분포했다. 이들은 농사뿐 아니라 무기 제조도 할 줄 알았으며 전투에 뛰어났다. 손오는 병력 충원과 재원 마련을 위해 산월이 비교적 많이 분포해 있던 지역에 반복적으로 출병했다. 제압한 산월인들 중 '강한 자는 병사로 삼고, 약한 자는 민호(民戶)로 편입'시키는 방침을 세워 전쟁과 생산에 활용했다.

8. 문화

수신기가 가장 사랑하는 나라다. 괴상한 사건이나 괴물은 높은 확률로 오나라에 나타난다. 그래서인지 괴물들을 물리치는 사람들도 많다. 계낭을 죽인 제갈각이라거나, 팽후를 삶아먹은 육개라거나, 낙두민이라는 괴인을 하녀로 둔 주환이라거나 무릉만이이나 산월 같은 이민족이나, 중원에서는 보기 어려운 특이한 동물을 접한 경험이 이러한 전설들을 낳게 했을 것이다.

종교 면에서는 손권의 치세에서 불교가 진흥되었으며, 손책의 기록으로 보아 우길을 숭배하는 태평도 계열의 도교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손책과 우길간의 대립에도 불구하고 손권은 형이상학적 사색에 관심이 많은 편이었고 불교 강승회를 후원한 것도 아마 도교 술사들을 후원한 것과 같은 맥락에서였을 것이다.

오나라의 문학적, 학문적 업적은 조조, 조비, 조식이 주도한 건안문학이나 현학을 주도한 위나라에 비하면 떨어졌다. 여기에 단 한 가지 예외가 있다면 육손의 손자 육운과 육기로 진나라가 오나라를 점령할 때는 20살도 안 된 나이였지만 북쪽으로 가서 놀라운 성과를 거둔다. 육기의 경우는 경전에 주석을 단 것에도 업적이 있으며, 부(賦)와 서정시의 선두주자였고, 특히 당시 시스템을 비판한 문부(文賦)의 경우는 걸작이라 부를 만한 작품이었다. 문선에 실린 시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육기의 시 52편이었다.

학문의 다른 분야인 수학 천문학에서는 오나라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손권은 왕번 육적의 도움을 받아 오나라만의 역법을 완성하기도 했다. 육적의 경우는 후한 장형과 비견된 인물로, 장형과 비슷하게 혼천의를 만들기도 했다. 이후 문서에서도 오나라의 천문대를 언급한 경우가 많으며, 특히 멸망 직전 오나라에서 태사령(太史令)이었던 진탁(陳卓)의 경우 4세기 초반에 잃어버렸던 장형의 성과를 복원하였으며 이걸 여러 자료와 엮어서 완전한 성도를 만들었다. 고전 분야에서 오나라는 그냥 괜찮은 정도였지만 과학과 천문 같은 다른 분야에서 두각을 보인 것이다.[44]

손호가 세운 비석이 몇개 있는데 탁본이 남아 있다. 과도기적이고 특이한 서체를 가지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9. 해외 교류

고구려와 접촉하여 외교 관계를 맺으려 했으나 실패했다.

여담으로 한반도의 삼국만큼은 아니지만 일본( 야마타이국)과 어느 정도 교류가 있었으며[45], 실제로 일본에서 오나라의 청동 거울이 발견되기도 하는 등 오나라가 동쪽으로 진출하여 일본과 교류가 있었던 사실은 고고학적으로도 밝혀진 사실이다. # 애초에 삼국 시대 자체가 중국이 갈래갈래 찢어진 시기이다 보니 주변국들도 독립적인 움직임을 보이면서 줄타기를 많이 했다. 고구려가 그런 식으로 오나라와 위나라 사이에서 운을 띄우다가 관구검한테 한방 먹기도 했고, 베트남 지역의 사(士)씨 정권도 사섭의 통치 아래 위와 오 사이에서 외교전을 벌였다가 오나라에 복속되기도 했다.

10. 평가

10.1.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

사실 손권이 세운 오나라는 이전 한나라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중략) 여러 기록에 따르면 손권은 열정이 넘치는 성급한 인물임이 확인되는데 이게 지나쳐 변덕스럽게 보이기도 하며 가끔씩은 무례하고 참혹하게 나타나기도 했다. 이렇듯 손권은 굉장히 강인한 성격을 가지고 있었는데 군벌 사회에서 권위를 잡으려면 불가피한 것이기도 했다.

(중략)

손권의 경우에는 (이 시대의 가장 인상깊은 인물인) 조조와 비교하면 그리 인상적이지 않다. 그는 (주유의 선택을 받았다는 이유로) 순전히 운이 좋게 형 손책의 군사적 기반을 물려 받을 수 있었으며 오나라가 거둔 거대한 승리는 주유, 여몽, 육손 같이 휘하의 장수들이 이룩한 것이었다. 사실 손권은 그렇게 잘 싸우지도 못했으며 직접 군대를 지휘할 때는 창피할 정도의 패배를 겪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손권은 용기 있고, 원대한 야심이 있으며, 배짱 있는 인물이었다. 오나라 성립에 가장 중요한 두 전투인 적벽과, 형주의 관우를 공격할 때, 손권은 잔혹한 선택지를 선택했으며 자신의 열정으로 이를 커버했다. 전술적인 선택은 최전방의 장수들이 했으나 그들을 밀어주고 잘못될 경우 운명을 함께 하는 것은 손권이었다. 손권의 부하들 또한 손권 만큼이나 개성 넘치는 인물들이었다.

(중략)

조조 위나라는 북중국에서 후한을 바탕으로 재건한 국가라 볼 수 있었고, 촉한은 쿠데타로 익주의 지방 정권을 이어받았기에 한나라의 전통이 지역적 스케일로 나타난 곳이었다. 반면 오나라는 아무것도 아닌 무주공산에서 성공한 군벌에서 태어난 국가였다. 조조와 유비도 나름대로는 한나라의 정부를 뒤엎었다 평가받지만 손책 손권은 원래 있던 한나라의 것을 자신의 것으로 바꿈으로써 권력을 얻은 자들이었다. 자연스럽게도, 다른 국가에서는 그래도 표면상 한나라 정부의 껍데기는 남아 있었지만 오나라에선 힘으로 구축한 새로운 정부가 세워진 것이다(중략) 그런 면에서 손권이 이 열정에 가득찬 잔인한 괴짜들을 상대로 권위를 세워 50년 동안 다스릴 수 있었다는 점은 대단한 업적이었다. 4세기의 평론가 손성은 오나라를 참칭자로 봤고 결과적으로 실패한 것은 당연하다라고 말하긴 했지만 손권의 개인적 자질만큼은 높게 봐줬다.

(중략)

마지막으로 손권이 이룩한 물질적인 업적은 말릉 지역에 새운 새로운 수도 건업이다. 북쪽에는 낙양, 허창, 이라는 3개의 큰 도시가 있어 조조와 후계자들이 가꿨고, 서쪽에는 오래된 도시 성도가 있었다. 그리고 손권이 세운 건업의 문화와 화려함은 이 도시들에 견줄만했다.

(중략)

뭐 이런 겉모습이 보기 좋긴 하다만 실제 오제국은 매우 제한되고 취약한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건업은 존재하던 동안에는 엄청난 업적이었으며 이런 것을 이룩한 손권의 상상력, 취향, 능력을 찬미해야 마땅할 것이다. 손권은 예술과 학문의 후원자였고, 건업은 손권이 빚어낸 작품이었다. 그의 일생 동안 건업은 중국 전역에서 가장 큰 도시 중 하나로 성장했고 남중국 정복으로 얻은 해외무역을 통해 동남아시아의 이국적인 물품을 수입한 손권은 꿈꾸던 도시를 완성할 수 있었고 그의 제국은 북쪽의 중산층 정도의 부를 가질 수 있었다.

길게보면 한나라부터 시작한 중국인들의 남방 정착과 문화 전파는 오나라에서 더욱 가속화되었고, 나중에 4세기~6세기로 가면 북중국이 이민족의 손아귀에 들어가 있을 동안 강남은 중국 문화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런 측면에서 손권은 군벌 국가를 물려받아 문화와 권력의 중심지로 만들었고, 후대의 중국을 위한 토대를 마련한 큰 공을 세운 것이다.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Rafe de Crespigny) 교수의 남부의 장군들(Generals of the South, 1990) 중 오나라가 남긴 것 파트 중에서.

11. 기타

요절 징크스가 유명하며, 심지어 촉한으로 양자가 되어서 와도 요절하는 나라. 요절이 많은 이유로는 원래 습기가 많은 지역이라 기생충[46]이나 질병이 창궐하고, 북방에서 이주해온 한족은 강남 지방의 토착병에는 면역력이 없어서 급사하는 경우가 잦았을 것이라는 추측이 있다. 오나라의 요절징크스 참조.

나관중 삼국지연의를 지을 당시, 왕조를 몰아내고 천하를 통일한 왕조가 장강 이남, 건업(당시 금릉)을 중심으로 일어났기 때문에, 그나마 오나라의 비중이 높아지고, 오나라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늘어났다는 말도 있다.[47] 삼국지연의가 촉한 주인공인데 여기서 오나라는 아군이 되었다가 적이 되었다가를 반복한다. 그렇지만 최후에는 제갈각의 의도에 의해 손이 정봉 형제가 촉한의 멸망을 막기 위해 애쓰는 모습도 보인다.

과거에는 빠와 까가 툭하면 충돌했고 요즘에도 심심치 않게 충돌하는 촉한과 위와 달리 별다른 옹호론자들이 없는 게 특징이다. 조위정통론 vs 촉한정통론 논란이 거센 것에 비해 손오정통론은 언급도 없다. 오죽하면 관련 유머에서 오빠 손권을 깐다가 나온다. 다만 이는 손권의 공적보다는 실책만을 언급하며 각인된 이미지 때문이기도 하다. 이궁지쟁으로 인해 사후 내부 갈등이 심화된 것 외에는 깔 요소들이 없고 손책 사후 불안정한 정국을 결국 안정화 시켰다는 점, 산월, 무릉만을 토벌하여 국력을 신장시켰다는 점을 고려하면 손권은 결코 까임만 당할 존재가 아니다. 합비에 매번 꼴아박았다는 이미지가 강하지만 특별히 장료에게 격파된 이미지가 강한 2차 정벌을 제외하면 그닥 피해를 입지도 않았다. 또한 손오정통론은 별 언급이 없으며 인지도도 없지만 유송 시대의 역사를 다룬 『 송서』에는 손권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지 않아 재앙을 얻었다는, 즉 손권이 천자이며 정통이라는 묘사가 존재한다. 다만 이후에는 언급조차 없으며 조위와 촉한 둘의 논쟁이 심화된다.

오나라와 관련되어 한 가지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다 있는데, 오나라 영안(永安) 2년(서기 259년) 3월, 오나라의 수도인 건업에 무려 화성에서 왔다고 스스로를 밝힌 외계인이 나타났다는 기록도 있다 《삼국지》 시대에 나타난 화성인.

12. 역대 황제

<rowcolor=#ece5b6> 대수 초상 묘호 시호 성명 재위 능호
추존 파일:vqGt6sW.jpg 시조(始祖) 무열황제(武烈皇帝) 손견(孫堅) - 고릉(高陵)
1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42px-Sun_Quan_Tang.jpg 태조(太祖) 대황제(大皇帝) 손권(孫權) 229 ~ 252 장릉(蔣陵)
2 - - - 손량(孫亮) 252 ~ 258 -
3 - - 경황제(景皇帝) 손휴(孫休) 258 ~ 264 정릉(定陵)
추존 - - 문황제(文皇帝) 손화(孫和) - 명릉(明陵)
4 - - - 손호(孫皓) 264 ~ 280 -

12.1. 계보

追. 견(堅) 책(策) 소(紹) 봉(奉)
1. 권(權) 등(登) 영(英)
려(慮)
追. 화(和) 4. 호(皓)
덕(德)
겸(謙)
패(覇) 기(基)
일(壹)
분(奮)
3. 휴(休) 만(𩅦)
굉(𩃙)
망(壾)
보(𠅨)
2. 량(亮)

13. 대중매체에서

가족사 드라마의 소재로는 최적의 국가이나 오나라 자체가 워낙 조연 포스로 무장했기 때문인지 너무 활용되지 못한다. 사실 주된 역할은 조조 vs 유비라는 핵심 줄거리에서 양측이 좀 잘 나가려하면 딴지를 걸어주는 역이다. 삼국지 공명전만 해도 제갈량 오장원에서 살아남고 위나라를 개박살내려고 하자 촉한이 너무 강해지면 자신들이 위험하다고 촉한을 뒤치기하려고 해서 제갈첨이 활약할 기회를 준다.[48]

김용이 오나라를 중심으로 삼국지를 쓰려다가 때려쳤다고 한다. 힘들기도 한 게 한 명의 주인공에 스포트라이트를 줄 수 있는 촉한이나 위하고는 다르게 군주가 두 번이나 교체되고, 주역급으로 밀어줄만한 인물들은 단명이거나[49] 활약할 기회가 없다.[50]

후반부의 주인공급으로 밀어줄만큼 장수하는 손권이나 육손이 나오면 오나라가 너무 얌전하다. 단지 역사 소설이 아닌 막장 드라마를 쓰겠다고 작정하면 아직 연의에 반영되지 않은 풀어낼 이야기가 꽤 많이 있다.

애꿎은 손책 여성화되어 벗겨지는 만화인 일기당천과 BL 강철삼국지 정도가 오나라를 소재로 삼은 경우라 하겠다. 한국 만화 중에는 손영기 정도.

그 많은 웹소설 삼국지물 판에서도 오나라는 인기가 없다. 오나라가 주역인 소설보다 여포가 주역인 소설이 더 많을 정도.

게임상에서도 그나마 손견 손책 정도만 상당한 후빨을 받을 뿐 대부분의 장수들은 그저 무력할 뿐이다. 특히 주연은 삼국지 연의에서 모든 활약을 삭제당하고 조운에게 썰리는 걸로밖에 안나오며 주유 여몽 등 대부분이 일찌감치 죽어버리는 통에 나오는 게임은 촉한이나 위에 비해 적다.

코에이 삼국지 시리즈에선 주위 땅이 공백지 투성이며, 특히 군웅할거 시기에는 주위에 약한 세력밖에 없어서 순식간에 땅을 얻고 다른 군주들과 달리 초반에도 거대 세력으로 성장할 수 있다. 적벽대전 이후는 수춘 지역을 점령하고 조조를 공격하거나, 유비를 공격해서 장수진을 흡수하고 천하 이분을 몸소 실현하면 된다. 장수진도 상당히 강력하고 주변에 바보들밖에 없어서 플레이어가 잡든 AI가 잡든 거대 세력으로 자라나는 진영 중 하나.

삼국지 3에서는 채모 제갈탄 정도를 제외하고는 오나라 장수들만 유일하게 수전 지휘가 육전 지휘보다 높다. 특히 주유는 육전 지휘는 73에 불과한 주제에 수전지휘가 100이다. 채모(육전 지휘 67 수전 지휘 85)야 삼국지 연의에서는 해상전 전문가로 나오니 그렇다 쳐도 주유는 아마도 적벽 대전 때문에 수전 지휘가 극에 달하게 나오는 것일 수 있다.
위는 왕조 계승의 정통성을 중시하는 자들에게 정통으로 인정받았고,
촉한은 충의를 중시하는 자들에게 정통으로 인정받았고,
오는 모에요소로서 덕후들에게 정통으로 인정받았다.
삼국지 갤러리
진삼국무쌍 시리즈에서 오나라의 별명은 아이돌 군단. 주유, 육손 같은 미남 계열부터 시작해서 불멸의 커플 능통 감녕, 목소리와 검법이 간지나는 주태[51], 그리고 여캐 4총사인 대교, 소교, 손상향, 보연사 등 비주얼이 좋은 캐릭터들이 대부분이다. 덕분에 섬나라가 오나라를 좋아한다는 말까지 나왔다. 사실 일본은 오빠가 꽤 많은 편이다. 그런데 6부터 등장하는 남자 캐릭터들의 거의 다 괴물( 정봉), 아저씨( 노숙, 한당)들이라서 이러한 이미지를 탈피하려는 것 같다. 주연이 참전하면서 다시 비주얼로 가는가 싶더니 8에서 정보 서성이 추가되며 점점 평균연령이 높아지는 중이다. 그리고 이 이미지들은 촉한의 어린 신세대들로 대체시키려는 듯.

SD건담 삼국전에서는 '굉(轟)'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손상향 가베라가 먼저 죽은 손견 제피랜서스 손책 사이살리스에게 새로운 나라가 세워졌다고 말한다.

상징색은 코에이 삼국지, 진삼국무쌍 등지에서 주로 빨간색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지만, 요코야마 미츠테루 삼국지 삼국지톡에서는 위나라가 빨간색을 가져가고 오는 위의 컬러인 보라색을 가져왔다.

[1] 220년까지 후한의 제후국이었다. 후한 멸망 이후 조위에 칭신했다가 독립했다. [2] 이 시대의 언어는 중고한어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있었다. 상고한어에 속하는 시대긴 하지만 후한 중국어(Eastern Han Chinese)라는 용어로 따로 분류하기도 한다. [3] 229년부터 칭제 [4] 지금의 난징 [5] 항저우시 푸양구 [6] 출처: 중국의 역사: 위진남북조, 가와카쓰 요시오. 남부의 장군들,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 [7] 왕준이 오나라 정벌을 주장할 때 의견 중에 손호가 죽고 새로운 군주가 세워지면 강력한 적이 된다고 말한 바가 있다. [8] 거기다 손휴가 죽을 것을 감안하고 저 말을 했다고 보기도 어려운 게 손휴는 고작 30세에 들어간 젊은 황제였으며, 손호가 황제가 된 것도 손휴 사후 복양흥의 결단 때문이지 원래는 손휴의 아들이 태자로 있었다. [9] 가장 유명한게 보천의 배신으로, 육항이 아직까지 살아있어 신속하게 진압되었기에 망정이지 그가 죽은 뒤였으면... [10] 확실히 오멸망전 시기에 동오는 이전까지 동오 최고의 명장들이었던 육항, 시적, 정봉에 버금가는 인재는 없었던 게 사실이다. [11] 사실 이는 어느 정도 서진 쪽에서도 인정한 사실인데, 서진의 명장 양호 또한 육항이 살아 있을 시절에는 공격할 생각을 접고 대치하는 것으로 응하다 육항이 죽고 나서야 동오 정벌을 주장했다. [12] 오나리인들의 저항은 282년 오나라의 옛 장수 완공•백봉의 난과 동진 건국 이듬해인 318년 손호의 아들 손번이 모반죄로 처형된 점에서 저항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3] 화북 출신 역사가 손성이 이런 기조에 반발하여 토착 오성에 꼼짝 못하는 동진 시조 진원제와 사마씨 황실을 "동진 사마씨는 사실 사마씨가 아니라 우씨"라는 말을 처음으로 지어내 조롱했다는 설도 있다. [14] 면적으로만 따지면 촉한의 두 배에 달하는 수준이다. [15] 그나마 교주(현재 베트남 지역)는 주변에 홍강이 있어 비옥한 곳이 많아 인구가 밀집해 있었다. 다만 사섭 일가의 지배 지역인 데다 이민족 즉, 베트남인들의 땅이라 인구집계도 제대로 되지 않았다. [16] 후한-삼국시대 당시 회계는 오늘날의 저장성 남부와 푸젠성인데, 저장성이야 오나라의 시대 이후 계속 강남의 일부로써 번영했지만 푸젠성은 이제 막 손오 정권하에서 개발이 시작되려던 시기였다. 현재의 광동성과 광서성 지역은 아예 이민족의 영역으로, 삼국시대보다도 500년 지난 당나라시기가 되어야 온전히 중화왕조의 행정력이 미치게 된다. 일남은 오늘날의 베트남 중부로 참파와 중국의 영향을 받은 홍강 삼각주 지역 간의 경계선이 되는데, 이 때문에 이 지역은 베트남의 독립 이후에야 베트남인들이 남하하며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한다. [17] 이때 최초로 교주를 광주와 교주로 나누어 다스리는 시도를 손오가 이룩했는데 이런 시도는 옛 월(奧) 지역이 광주( 광서성, 광둥성), 교주(북부 베트남)으로 갈리는 시초가 되었다. [18] 사례(후한의 수도), 예주, 기주, 연주, 서주, 청주, 량주(서량), 병주, 유주, 형주 북부 [19] 형주 남부, 양주(서량이 아니라 강동 지역의 주), 교주 [20] 오늘날의 베트남, 광시 좡족 자치구, 광둥성 인근. [21] 명색이 주(州)인데도 어지간한 군(郡)과 인구가 비슷했다. [22] 병주는 숫제 인구가 너무 적어서 병주의 속령인 현들이 계속 통폐합되는 일이 반복되기마저 했다. [23] 애초에 춘추전국시대 때는 중국의 영역에도 포함되지 않았으며, 전한 때에도 남월과 민월, 동월이라는 국가가 존속해 있었다. 이 지역이 중국의 영역 하에 편입된 건 한 무제 때의 일. (정확하게는 진나라도 점령한 적이 있었지만 얼마 안 가 붕괴되어서 다시 독립하게 된 것.) [24] 제갈량의 남만정벌을 두고 봐도, 제갈량과 남만세력(맹획)은 "남만이 촉한의 종주권을 인정하는 대신 남만인의 자치권은 인정되는 선"으로 적절히 타협한 것으로 보인다. 결국 운남이 촉한의 익주에 포함되어 있었어도, 촉한의 행정력이 온전히 미치는 곳은 아니었다고 보는게 합리적일 듯. 오나라 영역 내의 여러 이민족들도 마찬가지로, 당시에는 오나라의 행정력과는 무관하게 독립상태를 이뤘을 것이다. 이들은 중화민국 때까지도 동화되지 않고 남아 있었는데 (현재는 이들 남방종족은 거의 동화되어 한족과 별 다를 바 없다. 문화수준이 높지 못했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이후에는 한족과 다를 바 없어진 것이다), 당시 형주인 현재 후난, 후베이성에 남아있는 묘족, 투자족, 이족 등등이다. 오나라 이후 천년이 지난 명나라 시기에도 이들은 자신의 영역을 넘어오는 한족에 대해 빈번히 반란을 일으켰는데, 오나라 당시에는 다루기가 더 까다로웠을 것이다. [25] 이걸 근거로 병사가 남녀구에 포함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26] 오나라에서 원수, 재상 급만 3명( 육손, 육항, 육개)을 배출한 사실상 황족인 손씨에 이은 2인자 집안이다. [27] 주연 주적은 원래 '시'씨이나 주치의 양자가 되었기 때문에 주치 가문 인물이다. [28] 출처는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의 저작 '남부의 장군들' 중 오나라의 사회와 경제 챕터. [29] 유일한 예외는 진무 정도. [30] 원래 해당 지역의 토호라고 봐주기 어려운 가문이다. 손이라는 성씨 자체가 공손씨처럼 과거 지배층의 후예임을 사칭하려는 사람들이 쓰는 성씨였다. [31] 중국을 말한다 7, 251p 여기서는 태평백전이 서진 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나와있으나, 여기에서 볼 수 있듯이 태평백전은 촉한때부터 만들어졌다. [32] 장사의 옛 우물에서 발견된것으로 232년부터 237년까지의 기록들이 있다고 하는데 출토가 1996년이고 기초 판독은 끝난 듯 보인다고 한다. 대부분은 징세나 호적 등 지방행정과 관련된 내용이라는 것 같다. 현재 소장처는 장사간독박물관. [33] 반면 촉이 차지한 익주, 지금의 사천 지방은 한나라 때 이미 개발이 대부분 끝난 탓에 사회 경제사에서 촉한은 별로 안 다룬다. 이는 촉한이 고작 1개주만 가지고도 삼국 중 하나로 대충 대치가 가능했던 원동력이기도 하다. [34] 후한시기 예주 패국 패현 사람이었던 한고제가 초나라 사람이었다. [35] 출처: 오의 정치와 사회 · 경제, 신승하 중국사, 2008. [36] 손호가 2천석 이하 관리까지 직접 보내서 벌목을 감독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37] 『후한서』 「군국지」의 주석에서 손성의 「진양추」를 인용하여 오나라의 남녀구가 230만 명이라고 했다. 이는 병사와 병사의 가족을 제외한 수치이다. 『삼국지』에 의하면 촉한 멸망시 등애가 거둬들인 인구가 28만 호, 94만 명이라 한다. [38] 물론 당시 기술과 행정의 한계로, 그 경제력을 다른 유형의 국력(군사력 등)으로 실현하는 것은 또다른 문제였다. [39] 춘추시대에는 오(吳) 월(越)의 영역이었고 전국시대에는 초나라가 월나라를 멸망시키고 차지한다. [40] 말은 촉한의 말을 수입했다고 한다. 남중의 준마는 한대에는 궁중 진상품이었다고도 하고. [41] 유명한 팔진도가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등장한 것이다. [42] 실제로 강릉 근처의 방어 곤란한 평야지대에 둑을 쌓아 아예 침수시켜 버린다던가 강에 제방 쌓고 거기서 농성하는 모습도 보인다. [43] 보협은 아예 출전한 나헌에게 발렸다. 이건 농성전 변명도 안 통한다. 육항은 먼저 나간 보협이 못 뚫고 빌빌거리니 추가 병력 끌고 지원 나간 것이다. [44] 출처: 라프 데 크레스피그니의 저서 남부의 장군들 가운데 오나라가 남긴 것 챕터. [45] 일본서기에는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이 일본에 '조공을 바친 나라'로 나온다. 물론 실제 역사에서는 오나라가 일본에게 조공을 바쳤다기보다는, 오히려 일본이 위나라에게 매년 조공을 바쳤던 것처럼 오나라에게도 매년 조공을 빌미로 접근한 것에 가깝다. 일본 서기가 워낙 일본 위주로 역사가 기술되어 있기에 과거 일본과 교류했던 나라들을 어떻게 보고 기록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 [46] 특히 강가나 습한 지역에서 창궐하는 주혈흡충이 기생충의 주요 비중을 차지했다. 오나라는 위나라나 촉한과는 달리 고온다습하고 강이 많다. 주혈흡충은 유럽에 있는 빌하르츠 주혈흡충, 미주 지역과 아프리카에 창궐하는 만손 주혈흡충, 아시아에 분포되어있는 일본 주혈흡충 이렇게 3종류인데 이 지역에서는 일본 주혈흡충이 창궐했다. [47] 참고로 장강 이남을 본거지로 한 왕조 혹은 정치 세력이 중국을 통일한 사례는 중국 역사를 통틀어 주원장의 명 왕조와 장제스의 남경 국민 정부 정도. [48] 근데 사실은 사마의가 흑막이었다는 묘한 반전이 나온다. [49] 여몽, 주유, 손책 [50] 손권, 육손. [51] 물론 진삼국무쌍 5는 제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