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5-23 16:52:16

육운

진서(晉書)
{{{#!wiki style="margin: -0px -10px; margin-top: 0.3px; margin-bottom: -6px; color: #ece5b6"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25%"
{{{#!folding [ 제기(帝紀)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7px 10px"
{{{#181818,#e5e5e5
1권 「선제기(宣帝紀)」 2권 「경제문제기(景帝文帝紀)」 3권 「무제기(武帝紀)」
사마의 사마사 · 사마소(昭) 사마염
4권 「혜제기(惠帝紀)」 5권 「회제민제기(懷帝愍帝紀)」 6권 「원제명제기(元帝明帝紀)」
사마충(衷) 사마치 · 사마업 사마예 · 사마소(紹)
7권 「성제강제기(成帝康帝紀)」 8권 「목제애재폐제기(穆帝哀帝廢帝紀)」
사마연(衍) · 사마악 사마담 · 사마비 · 사마혁
9권 「간문제효무제기(簡文帝孝武帝紀)」 10권 「안제공제기(安帝恭帝紀)」
사마욱 · 사마요 사마덕종 · 사마덕문
※ 11권 ~ 30권은 志에 해당. 진서 문서 참고
}}}}}}}}}}}}
[ 열전(列傳) ]
||<-6><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 31·32권 「후비전(后妃傳)」 ||
[ 재기(戴記) ]
||<tablewidth=100%><tablebgcolor=#800080><width=33%> 101권 「유원해재기(劉元海戴記)」 ||<-2><width=34%> 102권 「유총재기(劉聰戴記)」 ||<width=33%> 103권 「유요재기(劉曜戴記)」 ||
유원해 , 유화 · 유선, 유총 , 유찬 · 진원달, 유요
104 · 105권 「석륵재기(石勒戴記)」 106 · 107권 「석계룡재기(石季龍戴記)」
석륵 , 석홍 · 장빈, 석계룡 , 석세 · 석준 · 석감 · 염민,
108권 「모용외재기(慕容廆戴記)」 109권 「모용황재기(慕容皝戴記)」
모용외 , 배억 · 고첨, 모용황 , 모용한 · 양유,
110권 「모용준재기(慕容儁戴記)」 111권 「모용위재기(慕容暐戴記)」
모용준 , 한항 · 이산 · 이적, 모용위 , 모용각 · 양무 · 황보진,
112권 「부홍등재기(苻洪等戴記)」 113 · 114권 「부견재기(苻堅戴記)」 115권 「부비등재기(苻丕等戴記)」
부홍 · 부건 · 부생 , 왕타, 부견 , 왕맹 · 부융 · 부랑, 부비 · 부등 , 삭반 · 서숭,
116권 「요익중등재기(姚弋仲等戴記)」 117 · 118권 「요흥재기(姚興戴記)」 119권 「요홍재기(姚泓戴記)」
요익중 · 요양 · 요장 요흥 , 윤위, 요홍
120권 「이특등재기(李特等戴記)」 121권 「이웅등재기(李雄等戴記)」
이특 · 이류 · 이상 이웅 · 이반 · 이기 · 이수 · 이세
122권 「여광등재기(呂光等戴記)」
여광 · 여찬 · 여륭
123권 「모용수재기(慕容垂戴記)」 124권 「모용보등재기(慕容宝等戴記)」
모용수 모용보 · 모용성 · 모용희 · 모용운
125권 「걸복국인등재기(乞伏國仁等戴記)」
걸복국인 · 걸복건귀 · 걸복치반 · 풍발 , 풍소불,
126권 「독발오고등재기(禿髪烏孤等戴記)」
독발오고 · 독발리록고 · 독발녹단
127권 「모용덕재기(慕容徳戴記)」 128권 「모용초재기(慕容超戴記)」
모용덕 모용초 , 모용종 · 봉부,
129권 「저거몽손재기(沮渠蒙遜戴記)」 130권 「혁련발발재기(赫連勃勃戴記)」
저거몽손 혁련발발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800080><tablebgcolor=#800080> ||
}}} ||

1. 개요2. 생애3. 평가4. 일화

1. 개요

陸雲
(262 ~ 303)

삼국시대 오나라의 신하이자 서진의 신하로 는 사룡(士龍)이다. 육항의 아들로 육손의 손자가 되며 형제로는 육안, 육경, 육현(陸玄),[1] 육기, 육탐이 있다. 양주 오군 오현 사람.

2. 생애

274년 아버지 육항이 죽자 위에서 열거한 형제들 가운데 육탐을 제외한 나머지와 함께 아버지의 군사를 나눠가졌으며, 280년에 육안과 육경이 싸우다가 죽은 뒤 육기와 육운은 서진에 항복한다. 태강(太康, 진무제 사마염의 연호, 280~289) 말에 형 육기와 함께 낙양에 들어갔는데, 태상 장화가 이를 보고 본래 그들의 명성을 중히 여겨, 육기와 오래전부터 아는 사이 같았다. 그리고
오나라를 격파하고 얻은 최고의 수확은 이 두 사람의 준걸을 얻은 것이다.
라고 침이 마르게 칭찬하며 주위 공(公) 벼슬을 하는 사람들에게 이 둘을 추천한다.

291년에 가밀과 곽창의 권세가 대단할 때 가밀의 친구인 24우 중의 한 사람이었으며, 육운은 사마영의 낭중령이 되어 지방으로 나가 준의 지역을 다스린다. 그 곳에서 혜정[2]을 펼치는데 백성들이 얼마나 고마워하면 육운이 살아있을 때 이미 사당이 세워진다.

황족들이 권력 다툼을 할 때 사마륜을 위해 선양하는 조서를 썼다고 의심해 죽이려고 하자 육운은 사마영의 변호로 살아남았다가 그의 추천으로 육운은 청하국의 내사에 임명되었다가 우사마로 승진한다. 사마영이 낙양을 공격할 때 육운은 남정부를 써서 그의 군사 행동을 칭찬한다.

그런데 육운은 환관 맹구의 행적을 계속해서 비판했는데, 이에 불만을 품은 맹구의 동생 맹초는 자신의 상관 육기의 말을 따르지 않는다. 이걸 육기가 처형시키려고 할 때 견수, 맹구 등이 육기가 적과 내통하고 있다고 무고해 육운, 육기, 육탐은 모두 처형된다.

육기 형제들은 이미 강남의 수재들로 역시 제하에서도 이름이 유명했는데, 죄도 없이 몰살 당하게 되자 천하의 사람들이 슬퍼했다. 다만 사람들을 이를 두고 예전에 육항이 보천을 죽일때 어린 아이까지 죽였는데, 이 때 "육항의 후세들은 필히 그 재앙을 만날 것이다"라고 한 것이 결국에 육운이 죽게 되고 육씨의 세가족이 후세가 없어지며 사실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의 저서로는 육사룡집이 있다.

3. 평가

육운은 속문[3]에도 능했으나 청신[4]의 측면에서는 육기에 못 미쳤다. 하지만 구두로 의견을 말하거나 사람들과 논의를 싸울때에는(口辯持論) 육기를 능가하는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다행히도 육운의 저서는 후세에 전해졌다고 오서에 기록되어 있다. [5]

손혜(孫惠)가 주탄(朱誕)에게 준 편지에는 이런 이야기가 있다.
마원이 공직에 나올때는, 좋은 주군을 골라서 했다는 일화는 일반 사람들도 모두 들어서 알고있는데, 지금 육시의 삼형제가 모두 폭악한 조정에 들어가 같이 어울리다가 떼죽음을 당했으니 슬픈 일이다.

이는 진서에도 수록되어 있다.

4. 일화

정조라는 사람과 친해 서로 시를 주고 받을 정도로 친했다고 한다. 정조 또한 장화에게 부름을 받았지만 이 사람은 가지 않고 그냥 죽었다.

육씨의 이림에는 자신이 청하태수로 있는 숙부 육운에게 이런 이야기를 들었다며, 다음과 같은 종요의 얘기가 실려있다.
종요는 몇 달 동안 조회에 참석을 하지 못할 정도로 성품과 건강이 좋지 않았다. 어떤 사람이 그 이유를 묻자 종요는 이렇게 대답했다.

"항상 대단히 아름다운 여자가 찾아옵니다."

질문을 한 사람이 이렇게 말했다.

"반드시 귀신일 것입니다. 죽여야 합니다"

나중에 여자가 왔지만 들어오지 않고 문 바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종요가 왜 그러느냐고 묻자 여자는 공이 나를 죽이려고 한다고 대답했다. 종요는 그렇지 않다고 말하고 은근히 그 여자를 불러들였다. 여자가 들어오자 종요는 아무래도 이상한 생각을 참을 수가 없어서 숨겨두었던 도끼로 여자의 허벅지를 내리쳤다. 여자가 놀라서 뛰어나가자 핏자국이 길을 따라 이어져 있었다. 다음 날 사람을 시켜서 그 흔적을 따라가 보았더니 커다란 무덤이 있었고, 그 안에 있는 관에는 살아있는 것과 같은 여자가 누워있었다. 흰색 장삼을 들추고 보았더니 왼쪽 허벅지에 상처가 있었으며, 조끼에는 피가 묻어 있었다.
말 그대로 종요 변강쇠설. 그런데 정작 육운은 종요가 죽고 30년이 넘은 다음에야 태어났다. 차라리 자기가 귀신과 정을 통했다고 하지 종요를 걸고 넘어지다니 아니, 종요의 막내 아들인 종회마저 육운이 고작 두 돌일때 즈음에 죽는다. 종요랑은 111세 차이(...).

또한 주처에게 개과천선의 유래를 말해준 것도 육기 혹은 육운이다.

성도왕 사마영의 책사였던 노지와는 이런 일화도 있었는데 강동 지식인들은 당시 멸시에 가까운 조롱을 받았다.
" 육손 육항은 그대와 어떤 관계요?"

"그대와 노육(노지의 조부), 노정(노지의 부친)의 관계와 마찬가지요."

육운은 문을 나서자 형에게 말했다.

"왜 그런 얘기를 한 겁니까? 그의 얼굴을 보니 어쩌면 알지 못하고 있던 것 같던데요."

그러자 육기가 대답했다.

"우리 아버지와 할아버지의 명성은 천하에 알려져 있는데 어찌 모를 리가 있단 말인가? 귀신 자식 같은 자 같은 것이 일부러 그런 흉내를 냈던 것이야."


[1] 자는 불명. 아버지 육항이 죽을 때 육탐을 제외하고 아버지의 군사들을 형제들과 같이 물려받았으며, 그 외의 행적은 불명. 뒷날 남북조시대 북주의 관리 육현(528~?)과 이름, 한자까지 같다. 자도 사감(士鑑)으로 육항의 아들들처럼 士부터 시작한다. [2] 惠政, 은혜로운 정치 [3] 屬文, 글을 이리 저리 문구를 얽어서 글을 짓는다. [4] 清新, 작품의 신선도다. [5] 한 마디로 지금은 모르겠다는 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