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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토닌 드보르자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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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같이 보기: 위대한 인물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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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3B3B3><colcolor=#000> 안토닌 드보르자크
Antonín Dvořák
파일:Dvorak.jpg
본명 안토닌 레오폴트 드보르자크
Antonín Leopold Dvořák
출생 1841년 9월 8일
보헤미아 왕국 넬라호제베스
사망 1904년 5월 1일 (향년 62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라하
직업 작곡가
종교 가톨릭[1]

1. 개요2. 인명 표기3. 생애4. 주요 작품들
4.1. 교향곡4.2. 관현악곡4.3. 관악, 현악합주곡4.4. 협주곡4.5. 실내악4.6. 피아노곡4.7. 가곡4.8. 합창곡4.9. 오페라
5. 창작 성향6. 사생활7. 사후의 영향력과 평가8. 그 외

[clearfix]

1. 개요

오스트리아 제국 프라하 출신의 작곡가.[2]

스메타나와 함께 체코를 대표하는 클래식 작곡가로 손꼽히는 인물이며, 소위 '국민악파' 라고 불리는 19세기 중후반 민족주의 악파의 거두이기도 하다.

2. 인명 표기

한국 검색사이트 기준으로 '안토닌 드보르작'으로도 검색되지만, 국립국어원에서 정한 체코어 표기법에 따라 '안토닌 드보르자크'가 맞는 표기이다. Dvořák의 á가 장음을 나타내며 체코어에는 불파음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성씨에 들어가는 r는 다이어크리틱(diacritic)이 붙은 ř로 표기된다. 이는 치경 마찰 전동음(/r̝/)을 나타내며 /r/(치경 전동음, 스페인어의 rr)과 /ʒ/(유성 후치경 마찰음, 영어 pleasure의 s)을 동시에 발음하는 느낌이다. 한글로는 어쩔 수 없이 ㄹ와 ㅈ[3]를 나눠서 표기하지만 체코어에서는 동시에 발음한다는 소리. řá를 정확하게 표시 안하고 diacritic을 뺀 ra로 써버리면 누가봐도 드보락[4]이라고 읽을 수밖에 없는 표기이다.

3. 생애

당시 오스트리아 제국 산하 보헤미아 왕국의 수도 프라하 근교의 시골 마을인 넬라호제베스[5]에서 태어났는데, 아버지인 프란티셰크 드보르자크는 도축업이 본업이기는 했지만 치터를 수준급으로 연주하는 아마추어 음악가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아들에게도 가업을 잇게 하고 싶었다고 하는데, 실제로 아들 안토닌도 도축업 시험을 무난하게 통과했다.[6]

하지만 결국 안토닌은 음악을 본업으로 택했고, 1857년에 연주 실기를 중점적으로 가르치는 프라하 오르간 학교에 입학해 바이올린 비올라, 오르간 연주법을 배웠다. 동시에 작곡도 시작했고, 졸업 한 지 2년 뒤인 스무 살에 첫 현악 4중주를 작곡했다.

1860년대 중반에는 갓 설립된 프라하 국민극장의 부속 관현악단에서 비올라 단원으로 일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지휘자로 일하고 있던 대선배인 스메타나로부터 작곡 활동을 본격적으로 해보라고 권유를 받기도 했다. 드보르자크는 이 시기에 두 곡의 교향곡을 쓰는 등 창작 쪽에서도 분발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극장에서 주는 월급은 집세 내기도 빠듯했고, 비올라 연주 외에도 생계 유지를 위해 중상류층 자제들에게 피아노 레슨을 나가야 할 정도로 박봉이였다.

1873년에 결혼한 뒤 박봉과 격무에 허덕였던 극장 악단 연주자 생활을 청산하고 프라하의 한 교회에 오르가니스트로 취직했는데, 여전히 살림살이는 어려운 상태였지만 그나마 봉급은 약간 더 후한 편이었고 매일같은 연주 활동도 없어서 작곡할 시간도 상대적으로 더 많이 주어졌다. 드보르자크의 작품들 중 중요한 초기작들은 주로 이 해를 전후해 쓰이기 시작했다.

1877년에는 당시 유럽에서 날리던 음악비평가 에두아르트 한슬리크를 만나게 되었는데, 한슬리크는 당시 신예에 불과했던 자신이 쓴 음악을 당대를 대표하던 거장 요하네스 브람스가 은근히 높이 평가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한슬리크의 중개로 드보르자크는 브람스를 직접 만났고, 브람스는 후배를 대단히 환대하면서 계속 작곡 활동을 하도록 독려했다. 심지어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음악출판사 중 하나였던 짐로크 출판사와 전속 계약을 맺도록 주선까지 해줬다.

브람스의 사람 보는 눈은 틀리지 않았고, 곧 드보르자크는 성장을 계속하면서 진정한 거장으로 거듭나게 된다. 이듬해인 1878년에 바로 짐로크를 통해 피아노 3중주 제1번, 현악 4중주 제2번, 현악 합주를 위한 세레나데, 교향곡 제5번 네 작품이 출판되었고, 반응은 상당히 좋았다. 1880년에는 종교음악 분야에서 처음 나온 걸출한 대작인 스타바트 마테르(슬픔의 성모)가 초연되었고, 약 3년 뒤인 1883년에는 런던에서 공연되어 절찬을 받았다.

이듬해에는 직접 영국을 방문해 연주 여행을 할 정도로 인기를 얻기 시작했고, 1890년에는 러시아 제국으로 가서 차이콥스키를 직접 만나 영향을 주고받기도 했다. 1891년에는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프라하 음악원에서는 작곡과 악기론 정교수 직위를 받기도 했다. 하지만 1870년대 후반 부터 전속으로 있던 짐로크 출판사와는 관계가 점점 악화되기 시작했는데, 인세 수입 등의 교섭이 자주 무산되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체코인임을 강하게 자각하고 있던 드보르자크의 이름을 자꾸 독일어로 악보에 기입하여 드보르자크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짐로크에서 출판된 초판본 악보들 대다수가 안토닌 드보르자크가 아닌 '안톤 드보라크(Anton Dvorak)'라고 표기하고 있다.

1892년에는 미국 뉴욕에 새로이 설립된 내셔널 음악원에 원장으로 부임했는데, 처음에는 고향을 떠나면 강한 향수병에 시달릴까봐 몇 차례 고사했다. 하지만 당시로써는 매우 파격적인 거액이었던 연봉 15000달러가 음악원 측에서 제시되고, 짐로크와의 관계가 끊겨 수입이 급감할 것을 걱정했는지 결국 초빙 요청을 수락하고 가족들과 함께 미국으로 건너갔다.

드보르자크는 음악원장에 부임한 뒤 당시로서는 매우 대담하게 인종을 불문하고 모든 미국인 음악 전공자들에게 문호를 개방했고, 흑인 아메리카 원주민 혈통의 학생들도 물론 입학할 수 있었다. 한 예로 흑인 바리톤 가수 겸 작곡가인 해리 벌리(Harry Burleigh)는 당시 음악원의 조수로 일하기도 했다. 드보르자크는 이때 들어온 학생들로부터 흑인 영가나 원주민 민요 등의 미국 토착 전통음악을 전수받는 데 힘썼고, 이때의 경험은 교향곡 제9번 '신세계로부터'[7], 현악 4중주 제12번 '아메리카', 첼로 협주곡 등의 후기 대작들에 차례차례 반영되었다.

인종주의와 우생학이 심했던 당시에, 드보르자크는 드물게 깨어있었던 교양인이었으며 유색인종의 문화적 잠재력에 대해서 명확하게 인지하고 있었다. 드보르자크는 흑인 영가나 아메리카 원주민 민요야말로 진정한 미국의 음악이라 극찬했고 미국 작곡가들은 그들의 음악으로부터 영감을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드보르자크의 발언처럼 현대 미국 대중음악의 대부분( 블루스, 재즈, , 힙합, 펑크, 디스코 등)은 흑인 음악이 원류라고 할 수 있는데, 록과 메탈 등은 원류가 블루스, 힙합도 결국엔 흑인 음악이 원조이다. 재즈나 블루스는 말할 것도 없다.

1895년에 고향으로 돌아온 뒤에는 영국 등에 연주 여행 가는 것 외에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고국 보헤미아 왕국에 정주하면서 실내악과 교향시, 오페라 작곡에 주력했고, 1901년에는 탄생 60주년 기념식이 국가 행사로 성대하게 열리고 프라하 국립음악원 원장에 추대되는 등 대대적인 환영을 받기도 했다.

1904년 초 건강 악화로 모든 활동을 중지하고 비소카의 별장에서 요양했는데, 잠시 병세가 호전되는 듯 했지만 결국 심장마비 뇌졸중이 겹쳐 5월 1일에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국장으로 거행되었고, 유해는 프라하의 비셰흐라드 묘지에 안장되었다.

4. 주요 작품들

4.1. 교향곡

4.2. 관현악곡

4.3. 관악, 현악합주곡

4.4. 협주곡

4.5. 실내악

4.6. 피아노곡

4.7. 가곡

4.8. 합창곡

4.9. 오페라

5. 창작 성향

관현악단 연주자 생활을 오래 한 영향인지, 관현악을 구사한 작품이 꽤 많다. 피아노곡이나 실내악 중에도 관현악용 혹은 관현악 반주를 붙여 편곡한 곡들도 있으며, 자신의 장기 악기들이었던 바이올린이나 비올라가 들어가는 현악 위주의 실내악도 상당히 많다.

하지만 연주 수업 위주로 공부했기 때문인지, 초기 작품들에는 알게 모르게 이론적으로 여러 결함이 발견된다. 초기 작품들에서는 슈베르트 멘델스존 등 초기 낭만파 선배들의 강한 영향이 엿보이며, 아직 고향의 전통음악 어법 응용 같은 면모는 좀처럼 찾아보기 힘들다.

그리고 드보르자크가 바그너의 음악에도 심취한 적이 있어, 그런 바그너의 영향이 그의 대부분의 작품에도 반영되어 있다.

짐로크에서 출판을 시작한 1870년대 후반 이후의 작품들은 주목할 만한 역작이 많으며, 1880년대 초반에는 그 동안 합스부르크 가문의 지배 하에 있던 보헤미아(체코어로는 체히)와 모라비아(체코어로는 모라바) 지방이 부분적이고 제한적이나마 자치를 허용받기 시작하면서 드보르자크도 애국심을 발휘하여 반영한 작품들을 과감히 내놓게 되었다.

특히 이 시기 동안은 고향인 체코의 전통음악 외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내부의 이웃 지방들인 폴란드 헝가리, 슬로바키아, 우크라이나,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등 동유럽 지방 전반의 음악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고, 이러한 전통음악 어법에 대한 탐구는 피아노 3중주 '둠키' 나 슬라브 춤곡집들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1890년대 초중반의 미국 생활 중에는 그 쪽 전통음악에까지 관심을 가지는 등 음악에 대한 식탐은 굉장했던 모양이다.

다만 오페라 영역에서는 '루살카' 빼면 대부분 범작 아니면 졸작, 심하면 괴작으로까지 까이는 실정이다. 그렇다고 드보르자크가 오페라라는 장르를 홀대하거나 얕본 것은 절대 아닌데, 마지막 작품도 오페라 '아르밀다'였을 정도로 이 장르에 쏟은 관심과 열정은 예사롭지 않았다.

드보르자크의 오페라들이 실패하게 된 중요한 원인은 작곡가가 대본 작가를 보는 눈이 없었다는 것이었다. 막말로 개나 소나 대본 갖다주면 그대로 작곡하는 스타일이었으니, 오히려 음악이 아깝다고 생각되는 경우도 많다. 게다가 그렇게 만든 오페라가 엉망이라면 바로 딴 작품을 구상하는 것이 정상이지만, '왕과 숯쟁이(Král a uhlíř)'에서처럼 그 절망적인 대본을 그대로 붙잡고 아예 음악을 새로 쓰거나 전면적인 개작을 단행하는 지경에 이른 파란만장한 사례[22]도 있다. 1871년에 처음 완성된 건 극장 지휘자였던 선배 스메타나로부터 연주 불능이라고 반납당했고, 1874년에 완전히 새로 작곡한 것은 평은 좋았지만 이번엔 드보르자크 자신이 성에 안 찼는지 1887년에 대본 일부 개정을 포함한 대규모 개작을 단행했다.

모든 오페라의 대본이 비교적 마이너한 언어인 체코어로 쓰인 것도 국제적인 보급에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는데, 그나마 루살카는 독일어 등 다른 언어로 번안되어 외국에서 여러 차례 공연되어 명성을 유지했다. 20세기 중반 이후로는 원어 중시의 바람이 불면서 외국에서도 체코어 그대로 공연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루살카 빼고 다른 작품은 여전히 상연이 안 되거나 극히 뜸하게 상연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상대적으로 라틴어로 된 가사를 쓰는 종교음악 분야는 그나마 오페라보다는 훨씬 국제적인 명성을 보유하고 있는데, 스타바트 마테르 이후로 작곡된 대규모 종교곡들은 대부분 지금도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특히 '레퀴엠'은 지금도 종종 공연되고 음반도 꽤 있는 편. 가곡 중에서는 독일어로 작곡된 가곡집 '집시의 노래' 중 네 번째 곡인 '내 어머니가 가르쳐준 노래(Als die alte Mutter sang)'가 명곡으로 널리 애창되고 있다.

6. 사생활

비교적 안정적인 도축업을 포기하고 음악인의 길을 과감히 선택했다고는 해도, 초기에는 생애 란에 쓴 것처럼 그야말로 인간극장 삘의 인생 역정을 보여주었다. 심지어 난로나 화덕에 불 지필 종이가 없어서 자기가 썼던 곡의 악보를 불쏘시개로 쓰는 등 그야말로 안구 건조증에 직효인 에피소드까지 있을 정도.

하지만 곡이 연주가 되든, 출판이 되든, 혹은 둘 다 안되고 불쏘시개로 쓰이든 간에 드보르자크는 정말 열심히 작곡에 임했고, 이러한 근면함은 생애 후반에도 계속 이어졌다. 매일 부엌 식탁에 앉은 채 주변이 아무리 떠들썩해도 무시하고 자신이 정한 분량만큼 꼬박꼬박 썼다고 한다. 주변인들이 보기에는 낭만적인 음악인보다는 부지런하고 다소 고지식한 농사꾼 같았다는데, 실제로도 프라하 같이 번잡한 도시보다는 고향이었던 넬라호제베스나 별장을 지어놓았던 비소카 같이 고즈넉한 시골에서 지낼 때 가장 편안함을 느꼈다고 한다.

극장 일로도 돈이 한참 부족해 피아노 레슨을 늘 뛰어야 했던 초짜 시절에는 첫사랑을 경험했다고 하는데, 레슨 제자들 중 요제피나 체르마코바라는 미녀와 눈이 맞은 것이었다. 드보르자크는 요제피나에게 가곡집 '사이프러스'도 써 바치는 등 이런저런 노력을 해봤지만, 결국 마음을 얻지 못하고 차이고 말았다. 그 대신 요제피나의 여동생이었던 안나 체르마코바와 1873년에 결혼에 성공했는데, 어찌 보면 좋아하던 여자랑 연애에 실패하고 그 여자의 여동생과 결혼한 모차르트와 거의 비슷해 보인다.

드보르자크 부부의 금슬은 매우 좋았고, 유년기에 사망한 셋을 빼고도 여섯 아이들을 남겼다.[23] 바람 피우는 일도 절대 없었다고 하는데, 부모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고 그 자신도 마찬가지로 종교에 대한 열정이 강했음을 생각하면 이해가 될 듯하다. 이 여섯 자녀들 중 둘째 딸인 안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전 국가대표 축구팀 공격수이자 축구 감독인 이르지 소보트카의 어머니이다. 즉 이르지의 외조부가 드보르자크. 이르지는 1911년에 출생했기 때문에 두 사람이 생전에 만난 적은 없다.

7. 사후의 영향력과 평가

체코를 넘어 쇼팽, 스메타나 등과 함께 동유럽의 위대한 음악가 중 한 명으로 존경받는다. 특히 독일어권 국가(오늘날 독일, 오스트리아) 중심의 음악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의 눈길과 흥미를 동유럽에도 어느정도 돌리는 데 성공한다. 그의 곡들이 오늘날 인기있는 이유 중 하나는 단연코 아름다운 멜로디이다. 특히 현악기의 멜로디가 매우 아름다운데 "아메리카"나 "현을 위한 세레나데(특히 2악장)" 나"첼로협주곡 나단조" 등 드보르작의 우수에 가득찬 목가적인 아름다운 선율을 짜내는 능력은 정말 탁월하다.

드보르자크가 생전에 가르친 수많은 제자들 중에도 작곡가로 성장해 20세기 체코 음악계에서 주도적으로 활동한 사례가 많으며, 사위까지 되었던 요제프 수크 외에도 비테슬라프 노바크, 오스카르 네드발, 프란츠 레하르 등이 문하의 유명한 제자들로 손꼽힌다. 제자는 아니었어도 후배들인 야나체크와 마르티누 같은 작곡가들로부터 드보르자크의 음악성에 대해 광범위한 존경을 받았다.

1904년에 타계한 뒤로도 계속 체코 음악의 국부로서 존재감을 과시해오고 있지만, 꼭 그랬던 것은 아니었다. 특히 선배였던 스메타나를 높이 평가하는 쪽에서 늘 태클을 걸어왔다고 하는데, 특히 2차대전 이후 체코가 슬로바키아와 통합해 사회주의 체제가 된 후 알게 모르게 드보르자크 까들이 친소 성향의 초기 실권자들과 결탁하면서 문화예술계의 요직을 차지해 드보르자크를 '스메타나의 모방자' 정도로까지 폄하하는 짓을 저지른 적도 있었다.[24]

하지만 이러한 여론은 해외 뿐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 국내에서도 까가 빠를 만든다는 법칙에 따라 더 큰 반대 여론에 직면했고, 음악학자 야르밀 부르크하우저 등이 드보르자크 작품에 대한 체계적인 연구와 출판을 과감하게 행하면서 이내 묻혀버렸다. 드보르자크 생전에는 불과 다섯 곡만 출판되었던 교향곡들 중 미발표/미출판작들의 악보가 발견되고 작곡 연대가 판명되어 현재의 번호로 수정된 것도 이 시기였고, 소실 작품과 편곡 작품 등 거의 모든 곡의 목록화나 초판본의 인쇄 오류를 수정한 새로운 드보르자크 전집 악보 발간도 대부분 1960~70년대에 완료되었다. 옛날에 녹음된 음반 가운데 '신세계 교향곡'을 '제5번'으로 표기한 경우가 더러 있는 것은 이 때문이다.

8. 그 외


[1] 꽤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레퀴엠, 미사, 테 데움 등의 가톨릭 종교 음악을 남겼다. 단순히 종교 음악을 많이 작곡했을 뿐만 아니라, 일상에서의 일을 신앙으로 극복하여 그걸 음악으로 표현해냈다는 것에 있다. 드보르작의 두 딸이 선종했을 때 드보르작은 정서적으로 엄청난 고통과 슬픔에 젖어있었는데, 이 때 작곡한 것이 스타바트 마테르 - 슬픔의 성모이다. 아들인 예수를 잃은 슬픔의 성모를 그린 작품으로 예수님과 성모님의 초월적인 사랑을 되새기고 자신의 고통을 가톨릭 신앙으로 극복하고 위안받기 위함이다. [2] 드보르자크가 태어난 1841년에는 체코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았다. 체코의 전신인 체코슬로바키아는 1918년에 생겨났고, 1993년에 지금의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되었다. 그러나 그는 보헤미아인(현재의 체코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니고 있었고, 보헤미안의 애환이 담긴곡을 많이 작곡하고 이를 자신의 음악에 반영했다. [3] 뒤에 모음이 나오지 않을 때에는 '슈', '시' 등으로 표시한다. 참고 : 체코어의 한글 표기, 드보르자크의 실제 발음. [4] 실제 드보락 자판 발명자 오거스트 드보락과 먼 친척 관계라 한다. [5] Nelahozeves. 프라하에서 약 40km 떨어진 곳으로 대략 서울에서 수원 정도 거리 쯤 된다. [6] 클래식 작곡가들 중 유일한 도축업 자격증 보유자이다. [7] 국내에서는 신세계 교향곡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곡이다. [8] 현재 체코 국가 나의 조국은 어디에?의 멜로디를 차용했다. 파일:유튜브 아이콘.svg 변주가 많이 되어서 어디가 어딘지 잘 모를 수 있지만 3분 11초부터는 확실하게 들린다. [9] 특히 2악장 Valse( 왈츠) C샤프 단조가 유명하며 광고음악으로도 많이 등장한다. [10] 인지도가 있는 편은 아니여서, 드보르자크의 피아노 협주곡 존재여부조차 모르는 사람들도 상당수 있다. 카를로스 클라이버가 지휘하고 리히테르가 연주한 불멸의 명반이 존재한다. [11] 2바이올린, 2비올라, 첼로 [12] 2바이올린, 비올라, 첼로, 더블베이스 [13] 1번을 리바이벌한 것. [14] 이 작품 중 Op.75의 1악장이 가장 유명하며, 1994년 방영된 KBS 前 단막극인 '미스터리 멜로 금요일의 여인 - 정애리의 천사 없는 천국'에서 테마 음악으로 많이 쓰였다. [15] '아메리카'로 널리 알려져 있지만 체코어 명칭, 영어 명칭, 불어 명칭, 독어 명칭 전부 '아메리카'의 형용사형인 'Americký', 'American', 'Americain', 'Amerikanische'를 쓰고 있다. [16] 2바이올린, 2비올라, 첼로 [17] 5번째곡이 1891년 드보르자크에 의해 직접 첼로와 피아노곡으로 편곡되었다. 편곡된 곡의 부제는 "고요한 숲" [18] 이 작품 중 제 2번이 가장 유명하다. [19] 드보르작 48세 즈음 작곡된 피아노 소품으로 13곡이 묶였다. 슈만을 연상케 하는 시적인 정서가 담겼다. 각 곡에는 1.황혼의 길 3.옛성에서 4.봄노래 5.농부의 발라드 6.몽상 9.세레나데 10.바카날 12.영웅의 무덤에서 13.성스러운 산에서 등의 부제가 붙어 있다. [20] 이 작품에서 제 7번이 가장 유명하며 우리가 흔히 드보르자크의 유머레스크라 칭하는 곡은 보통 이 7번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프리츠 크라이슬러 등에 의하여 바이올린 편곡으로도 많이 연주되었지만, 원곡은 피아노곡. [21] 네번째 곡이 가장 유명한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노래들(Songs my mother taught me)"이다. 아름답고 인상적인 선율로 기악편곡으로도 많이 연주된다. 가사내용도 무척 애틋하다. 영어번역 가사: When my old mother taught me to sing, Strange that she often had tears in her eyes. And now I also weep, when I teach Gypsy children to play and sing. [22] 세 차례나 개정했다. [23] 아이들 중 장녀 오틸리에 드보르자코바는 1898년에 드보르자크의 작곡 제자였던 요제프 수크와 결혼했다. [24] 야나체크는 진정한 체코 음악은 드보르자크부터 시작한다고 주장했으며, 스메타나의 작품은 체코 음악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25] 철도 동호인으로 유명한 또 하나의 작곡가로는 자기는 기차를 사랑한다고 한 아르튀르 오네게르가 있다. 이 쪽은 아예 기차를 소재로 한 교향시 '퍼시픽 231'을 썼을 정도니 말 다한 셈. [26] 선진국의 철도 인프라를 직접 체험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27] 1867~1921. 미국 오하이오 밀워키 출신의 피아니스트로 16세에 <시계포>를 작곡했다. [28] 삼성 애니콜에서 초창기부터 전화 벨소리로 채용했기 때문에 노년층 벨소리로 인기가 높다 #. [29] 이종범 이종범 안타 이종범~ 이종범 이종범 안타 이종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