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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6 13:16:09

스웨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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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대3. 중세
3.1. 내전3.2. 재건3.3. 혼란 재개3.4. 스웨덴-노르웨이 시대
3.4.1. 망누스 4세 시대3.4.2. 노르웨이의 분리와 스웨덴 귀족들의 반란
3.5. 덴마크-노르웨이 창설과 칼마르 동맹
3.5.1. 섭정 마르가레테의 덴마크-노르웨이 통치 시작3.5.2. 스웨덴 왕 알브렉트와 스웨덴 귀족 간의 갈등3.5.3. 마르가레테의 3왕국 통합, 칼마르 동맹의 탄생
3.6. 칼마르 동맹 시대
4. 근대 초기, 전성기5. 근대 후반기6. 현대7. 둘러보기

폴란드볼 애니메이션으로 요약한 스웨덴의 역사
지도로 표현한 스웨덴의 역사[1]

1. 개요

스웨덴의 역사를 기술하는 문서다. 스웨덴은 덴마크와 더불어 북유럽, 특히 스칸디나비아 반도 근교의 역사에서 빼 놓을 수 없는 지역강국으로 자리매김 하였고, 특히 근대의 바사 왕조는 스칸디나비아 반도를 벗어나 스웨덴 제국을 형성하며 신교의 대표 열강으로 30년 전쟁에 참전하기도 하고, 러시아 - 폴란드 등과 발트해의 패권을 놓고 다투기도 하는 등 유럽사에 커다란 족적을 남겼다 할 수 있다.

여담으로 기원전부터 지금까지 한 번도 다른 국가의 지배를 당한 적이 없는 유일한 국가이다.[2]

2. 고대

고대 로마제국과 대립하던 게르만족 부족 상당수가 스웨덴에 기원을 두었기 때문에 고대 로마인들은 이 지역과 멀리 떨어져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 지역에 대한 상세한 기록을 종종 남겼다. 타키투스는 그의 저서 게르마니아에서 수이오네스족이 많은 배를 가지고 강력한 세력을 거느리고 있다는 서술을 남겼다. 로마 공화정 시기의 테우토니족을 비롯해서 서기 4세기 무렵 로마 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던 고트족 등은 주로 오늘날의 스웨덴 영토에 해당하는 지역에서 발흥하였다. 스웨덴인들도 룬 문자나 구전 설화로 자신들의 왕이나 영웅에 관련한 기록을 남기곤 했지만 이 중 상당량이 중세 필경사들이 필사하기 전에 소실되었다.

중세 초 바이킹 이른바 노르드인들은 오늘날 노르웨이에 해당하는 지역과 스웨덴 및 덴마크에 해당하는 지역 사이에 방언과 문화, 교역 방향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노르웨이 일대의 노르드인들이 주로 브리튼 제도 북부와 건지 섬, 저지 섬, 아이슬란드 등 서쪽, 즉대서양 방향으로 진출하는 것을 선호하였다면 스칸디나비아 중부와 덴마크에 거주하던 노르드인들은 서유럽 해안지대 외에도 동유럽 해안지대와 수운 교통을 적극 개척하였다. 노르드인들은 흑해와 북해를 잇는 교역로를 장악하며 막대한 부를 축적하였는데 압바스 칼리프조, 사만 왕조의 금화나 중앙아시아의 불상이 당시 유적지에서 발견되는 것을 보면 교역량이 상당한 수준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노르드인들의 도시가 점차 성장하면서 초기 형태의 왕국이 스웨덴에 성립되었다.

3. 중세

스웨덴의 초기 역사는 신화와 전설로 이루어져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가늠하기 힘들어 서로 모순되는 점도 많다. 한때 패권국의 반열에 올랐던 강대국으로 노르드 3형제 중 가장 잘 나갔던 것을 생각하면 굉장히 의외지만, 스웨덴의 국가 형성 과정은 라이벌인 덴마크, 한 수 아래 취급이었던 노르웨이보다도 알려진 것이 적다. 특히 문헌증거가 거의 없다시피하다.[3]

전설에 의하면 북유럽 신화의 신인 프레이르로부터 비롯된 윙글링 왕가가 덴마크와 스웨덴을 통치했고 노르웨이를 최초로 통일한 하랄 1세 하르파그리도 윙글링 왕가의 후손이라고 한다. # 사실로 확인되는 스웨덴의 본격적인 역사는 웁살라 근처의 멜라렌 호수 근처에서 스베아족이 건설한 스베아 리케(Svea Rike; '스베아족의 나라'라는 뜻)로부터 시작되었다. 고대 로마 제국의 역사가인 푸블리우스 코르넬리우스 타키투스가 이미 AD 100년경에 스베아 리케의 존재를 언급하고 있고 러시아의 키예프 공국을 창건한 류리크와 바랑기아인들도 스베아족 출신이라고 알려져 있다.

AD 10세기말에 우플란드 지방을 통치하던 에이리크 6세가 피리스벨리르 전투에서 조카인 스티르비르욘을 물리치고 스웨덴 왕으로 즉위하여 '승리왕(Segersäll)'이라는 별칭을 얻고 멜라렌 지방을 중심으로 스웨덴 역사상 최초의 왕이 되었다. 에이리크 6세라는 칭호를 쓴 이유는 그 이전의 전설 상의 스웨덴 국왕을 모두를 계승한다는 의미인데, 다만 에이리크 6세가 윙글링 왕가의 후예로 알려져 있지만 그가 직접 윙글링이라는 가문명을 사용했는지는 확실치 않으며 역사적으로는 에이리크 6세가 창건한 왕조를 문쇠(Munsö) 왕조라고 부른다. 그리고 일부에서는 아예 에이리크 6세 자체의 실존 여부도 부정하고 에이리크 6세의 아들이자 스웨덴 최초의 그리스도교 군주인 올로프 솃코눙을 최초의 왕으로 보기도 한다.

AD 995년 에이리크 6세가 사망하면서 스웨덴의 올로프 솃코눙이 스웨덴 왕으로 즉위했다. 초기 북유럽 역사를 기록한 브레멘 주교의 아담에 의하면 에리크 6세가 AD 994년 덴마크 국왕 스벤 1세 잉글랜드 왕국으로 내쫓고 AD 995년 사망할 때까지 덴마크를 지배했지만 에리크 6세가 사망하자 스벤 1세에게 덴마크를 빼앗겼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 올로프가 덴마크 왕위를 두고 다투게 되었지만 올로프의 어머니이자 에리크 6세의 미망인인 시그리드가 스벤 1세와 재혼하면서 화해하였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에리크 6세가 덴마크를 지배했다고 한 시기에 스벤 1세는 잉글랜드로 쫓겨난 것이 아니라 잉글랜드를 공격하고 있었기 때문에 브레멘 주교 아담의 기록은 그 사실성을 의심받고 있다.

어쨌든 울라프 솃코눙와 덴마크의 스벤 1세의 동맹은 사실로 보이는데 실제로 스벤 1세가 노르웨이의 울라프 1세 트뤼그비손을 몰락시키는 데 동참했다. AD 1000년 노르웨이의 울라프 1세가 벤드족의 땅인 포메른을 습격하고 노르웨이로 되돌아가는 것을 노려 덴마크의 스벤 1세는 스웨덴의 왕 올로프 및 라데 백작 에리크 호코나르손과 연합하여 공격을 개시했다. 이렇게 벌어진 스볼데르 전투에서 울라프 1세는 11척으로 총 70척을 상대해야 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놓였고 결국 라데 백작 에리크에게 생포되어 바다에 던져졌다.

레고를 이용한 스톱모션 애니메이션으로 스볼데르 전투를 재현한 사람이 있다.

이후 비록 라데 백작 에리크가 노르웨이의 통치를 위임받았고 겉으로는 종주권을 덴마크와 스웨덴이 양분했고 올로프 솃코눙이 노르웨이의 트뢰넬라그를 획득하는 대신에 덴마크의 스벤 1세가 노르웨이의 실질적인 지배자가 되었다. [4]

올로프 솃코눙은 AD 1008년 스웨덴 역사상 최초로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라틴어로 왕의 칭호인 '렉스(REX)'를 사용하기 시작했고 AD 1022년 사후에는 그리스도교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그러나 브레멘 주교 아담의 기록에 의하면 여전히 스웨덴은 대부분 전통 신앙을 유지했다고 한다. AD 1015년 노르웨이의 초대왕 하랄 1세의 5대손인 울라프 2세도 AD 1013년 그리스도교 세례를 받은 뒤 AD 1015년 노르웨이로 되돌아 와서 AD 1016년 노르웨이 전역에 대한 통치권을 확립했다. 그리고 노르웨이의 울라프 2세는 스웨덴의 올로프 솃코눙와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는데 울라프 2세가 올로프 솃코눙의 딸인 잉리드와의 결혼을 청했으나 올로프 솃코눙은 잉리드를 러시아의 키예프 대공 야로슬라프 1세와 결혼시켰다. 이에 전쟁이 임박해지자 AD 1019년 스웨덴의 올로프 솃코눙은 노르웨이의 울라프 2세와 화해하고 다른 딸인 아스트리드를 결혼시켰다.

AD 1022년 스웨덴 왕 올로프 솃코눙이 사망하고 그의 아들인 아눈드 3세 야코브가 새로운 스웨덴의 왕이 되었다. 본래 이름은 야코브였으나 나중에 스칸디나비아적인 이름인 아눈드가 추가되었다고 한다. 아눈드 3세 야코브는 부왕 올로프 솃코눙과 마찬가지로 노르웨이의 울라프 2세와 동맹관계를 유지하였다. 노르웨이의 울라프 2세의 지원을 받은 아눈드 3세 야코브가 덴마크까지 위협하기 시작하자 덴마크 섭정 울프 야를이 AD 1026년 반란을 일으켜 크누트의 어린 아들인 하레크누트를 왕위에 올리는 일이 일어났다. 이에 잉글랜드 군을 이끌고 다시 덴마크로 돌아온 크누트가 울프 야를을 제압하였고 같은 해 벌어진 스웨덴-노르웨이 함대를 상대로 벌인 헬게 강 전투에서 승리를 거뒀다. 그리고 AD 1028년 노르웨이 지주들을 매수하여 노르웨이 왕인 울라프 2세에 대한 반란을 일으키게 만든 후 노르웨이 왕위까지 차지했다. 이후 크누트가 사망하자, 노르웨이의 왕이 된 스벤에 맞서 망누스 1세를 지원해 노르웨이 왕위로 복귀시켰다.

AD 1060년 에문드 2세가 사망하면서 문쇠 왕가가 단절되고 에문드 2세의 사위 자격으로 왕위를 계승한 스텐킬은 스웨덴 최초의 백작(야를)으로서, 웁살라가 아닌 베스테르예틀란드 출신이었다. 이에 따라 스웨덴의 고대로부터 이어진 왕계가 단절되었는데 이는 정통성 부족을 의미했다. 또한 당시 스웨덴은 아직 그리스도교화가 완전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이교도와 그리스도교 간의 대립도 심각한 상태였다. 결정적으로 비교적 강력한 세력을 보유했던 스텐킬도 제위 6년 만인 AD 1066년 사망하면서 스웨덴은 왕위를 둘러싼 내전의 혼란이 시작되었다. 먼저 스텐킬의 아들로 추정되는 에리크 7세 스텐킬손과 이교도인 에리크 8세가 왕위를 두고 1년간 내전을 벌이다 둘다 사망한 후 AD 1067년 스텐킬의 아들인 할스텐이 동생인 잉에 1세의 보좌를 받아 스웨덴 왕으로 즉위했다. 그러나 할스텐의 왕권이 매우 불안하여 결국 AD 1070년 폐위되고 만다.

이후 러시아의 키예프 루시 출신인 아눈드 4세가 스웨덴 왕위를 차지했으나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스웨덴의 전통 신앙을 거부하여 AD 1075년 폐위당했다. 그리고 AD 1070년부터 스웨덴 남부의 예타족의 땅인 예탈란드 일대를 통치하고 있던 호콘이 스웨덴 전역을 장악하였다. 일부에서는 아눈드 4세를 건너뛰고 할스텐 다음 왕으로 호콘을 손꼽기도 한다. 그러나 AD 1080년경부터 폐위되었던 할스텐이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도움을 받아 스웨덴 왕으로 복귀했다. AD 1081년 로마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의 교서에 의하면 이니셜 'A'와 'I'을 베스테르예틀란드의 공동왕으로 칭하고 있는데 여기에서 이니셜 'I'는 잉에 1세를 지칭하는 것이 분명해 보이지만 이니셜 'A'가 할스텐이라는 설과 호콘이라는 설이 있다. 또한 어느 기록에서는 호콘이 사망한 후 잉에 1세가 왕이 되었다고도 한다.

잉에 1세는 그리스도교 신자로서 스웨덴 전통 신앙을 경시하는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AD 1084년 폐위당했고 이교도이자 처남인 스벤에게 잠시 왕위를 빼앗겼다. 하지만 AD 1087년 스벤을 살해하고 왕위를 되찾았고 AD 1105년 죽을 때까지 그리스도교 포교를 위해 노력했으나 그의 아들인 랑발이 먼저 요절했기 때문에 왕위는 형인 할스텐의 두 아들인 필리프와 잉에 2세에게 왕위를 물려줘야 했다. 그렇지만 AD 1118년에는 필리프가, AD 1125년에는 잉에 2세가 모두 후계자를 남기지 못하고 차례로 사망하면서 스텐킬 왕조가 갑자기 단절되었다.

이후 덴마크 왕 닐스와 잉에 1세의 딸인 마르가레타 사이에서 태어난 망누스 1세가 스웨덴 왕위를 주장했고 스웨덴 남부의 예타족이 망누스 1세를 왕으로 인정했다. 그렇지만 망누스 1세를 반대하여 웁살라의 스베아족은 스텐킬 왕가의 일원으로 추정되는 랑발을 별도의 왕으로 선택했다. 비록 랑발이 재위 1년만에 예타족에게 살해당했지만 망누스 1세도 베스테르예틀란드에서는 끝내 인정받지 못했고 결국 AD 1130년 외스테르예틀란드(예탈란드 동부) 출신으로 베스테르예틀란드(예탈란드 서부)에서 왕으로 선택된 스베르케르 1세에 의해 스웨덴에서 추방당했다. 그러나 스베르케르 1세의 왕권도 그리 안정되지 못하여 그의 사후 왕위가 베스테르예틀란드 출신인 에리크 9세에게 넘어가는 것을 시작으로 이후 스웨덴 왕위를 두고 스베르케르 가문과 에리크 가문이 서로 다투며 번갈아 가며 차지하는 혼란이 찾아온다.

3.1. 내전

AD 1125년 스텐킬 왕조가 단절된 이후 왕위를 두고 혼란이 발생하였으나 AD 1130년 외스테르예틀란드(예탈란드 동부) 출신인 스베르케르 1세가 새로운 왕이 되었다. 스베르케르 1세는 스웨덴의 그리스도교화에 힘써서 알바스트라, 뉘달라, 바른헴 등 스웨덴의 각지에 수도원을 건설하였다. 이때 AD 1152년 로마교황 유게니우스 3세의 특사로 잉글랜드 출신의 이탈리아 알바노 주교이자 추기경인 니콜라스 브레이크스피어가 스칸디나비아에 파견되어 교회 조직의 재정비에 나서면서 노르웨이의 니다로스 대주교구가 창설된 데 이어 스웨덴 역시 구(舊) 웁살라(Gamla Uppsala) 대주교구의 신설이 추진되었지만 아직까지 이교도 세력이 강성했기 때문에 실패했다. 참고로 추기경 니콜라스는 AD 1154년 로마로 돌아가 로마교황 하드리아누스 4세로 선출된다.

스베르케르 1세는 26년이라는 장기간의 재위 기간에도 불구하고 왕권이 그리 안정되지 않았고 AD 1156년 갑자기 암살까지 당하면서 왕위가 그의 아들이 아닌 베스테르예틀란드(예탈란드 서부) 출신인 에리크 9세에게 넘어갔다. 이후 에리크 9세가 통치 기간 동안 스웨덴의 그리스도교화에 크게 기여하였고 웁살라 주교인 헨리크와 함께 북방 십자군의 일환으로 아시아계 핀족이 살던 핀란드 지역에 그리스도교를 전파시키며 향후 스웨덴이 핀란드를 지배하게 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 때문에 에리크 9세는 비록 로마교황으로부터 정식으로 시성을 받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교 성인으로 널리 인정받게 되었다. 한편 전설에 따르면 AD 1157년 에리크 9세가 핀란드 원정을 떠나기 전 기도를 올리면서 파란 하늘에 노란색 십자가를 보았는데 여기에서 오늘날의 스웨덴 국기가 유래되었다고 한다.

뛰어난 업적을 남긴 에리크 9세도 AD 1161년 암살당하면서 왕위를 자신의 아들에게 계승시키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이후 잉에 1세의 손녀의 아들인 망누스 2세가 잠시 스웨덴 왕위를 차지했는데 그는 스베르케르 1세와 에리크 9세의 유력한 암살 배후로 의심받고 있다. 결국 망누스 2세도 재위 1년 만에 스베르케르 1세의 아들인 칼 스베르케르손에게 살해당했고 이후 칼 스베르케르손이 칼 7세로 즉위하면서 스웨덴은 다시 스베르케르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참고로 칼 7세는 스웨덴 역사상 '칼'이라는 이름을 가진 첫번째 왕이었지만 지금은 알려지지 않는 '칼'이라는 이름을 가진 전설 상의 6명의 왕이 존재했기 때문에 칼 7세로 명명되었다고 한다.

칼 7세가 즉위할 당시 이미 스웨덴은 에리크 9세의 노력으로 그리스도교화가 거의 완료되었기 때문에 스베르케르 1세 시절에 추진되었던 대구교구 창설이 비로소 결실을 맺으면서 AD 1164년 웁살라 대주교구가 설치되고 덴마크의 룬드 대주교구로부터 독립하였다. 이렇게 비록 칼 7세는 유능한 통치자였지만 그도 역시 왕위 세습권만은 확보하지 못한 채 재위 6년만인 AD 1167년에 암살당했다. 이에 덴마크에서 망명 중이던 에리크 9세의 아들인 크누트 1세가 귀국하여 왕위를 계승하면서 스웨덴은 다시 에리크 왕가의 지배를 받게 되면서 스베르케르 왕가와 에리크 왕가가 서로 번갈아 왕위를 계승하는 관례가 만들어졌다. 이후 비록 칼 7세의 2명의 동생이 외스테르예틀란드에서 반란을 일으켰지만 AD 1173년 크누트 1세가 반란을 모두 토벌하였다. 이제 크누트 1세는 AD 1187년 스톡홀름을 비롯하여 수많은 요새를 세우면서 스웨덴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게 된다.

AD 1196년 크누트 1세가 사망하자 왕위를 스베르케르 가문과 에리크 가문이 번갈아 계승하는 관례가 계속해서 이어져 스베르케르 가문의 칼 7세의 아들인 스베르케르 2세가 다시 왕으로 즉위하게 되었다. 스베르케르 2세는 즉위 과정에서 크누트 1세에 의해 야를(Jarl)로 임명받아 왕국의 2인자가 되었던 비르예르 보르사의 도움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첫번째 부인이 사망하자 비르예르의 딸인 잉리드와 재혼을 했다. 그리고 스베르케르 2세는 AD 1202년 자신의 후원자였던 비르예르가 사망하자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1살에 불과한 아들인 요한 1세를 야를로 임명했다.

스베르케르 2세가 즉위한 이후에도 크누트 1세의 아들들은 스웨덴 왕궁에 머물렀지만 AD 1203년 왕위를 노리기 시작했기 때문에 노르웨이로 추방당하게 되었다. 이후 AD 1205년 크누트 2세의 아들들이 노르웨이의 유력 세력인 비르클레크스족의 지원을 받아 스웨덴을 침공했지만 스베르케르 2세가 엘가로스 전투에서 크누트 1세의 아들들을 격파하여 4형제 중 3명을 처형했다. 하지만 막내인 에리크 10세만은 도망치는데 성공했고 AD 1208년 노르웨이의 지원을 받아 스웨덴을 재침공하여 이번에는 대승을 거두고 아버지의 왕위를 되찾는데 성공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스베르케르 2세가 덴마크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되찾기 위해서 AD 1210년 스웨덴을 공격하였으나 예스트릴렌 전투에서 전사하고 말았다.

이제 에리크 10세가 정식으로 대관식까지 치렀고 스베르케르 2세를 지원했던 덴마크와 화해하기 위해 덴마크 왕 발데마르 2세의 누이인 리케자와 결혼시키면서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AD 1216년 비싱쇠 섬에서 고열로 급사하고 말았기 때문에 스웨덴 귀족들은 왕위 선출 과정에서 로마교황의 간섭을 배제하기 위해서 서둘러 스베르케르 2세의 아들인 요한 1세를 왕으로 선출했다. 이렇게 스베르케르 왕가의 요한 1세가 스웨덴 왕이 되고 AD 1219년 대관식까지 치르면서 정통성을 갖추게 되었지만 결혼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AD 1222년 갑자기 사망했기 때문에 스베르케르 왕가가 갑자기 단절되고 말았다.

요한 1세가 급사한 이후 에리크 10세의 아들인 에리크 11세가 6살에 불과한 나이에 스웨덴 왕으로 선출되면서 스웨덴 왕위는 다시 에리크 왕가의 차지가 되었다. 하지만 에리크 11세의 나이가 너무 어렸기 때문에 에리크 9세의 증손자 뻘로 에리크 11세의 먼 친척이 되는 크누트 2세가 섭정이 되었다. 그리고 에리크 11세가 성장하여 AD 1229년 크누트 2세를 몰아내고자 했지만 오히려 패배하면서 덴마크로 쫓겨나야 했다. 이후 크누트 2세가 정식으로 대관식을 치르고 왕위에 올랐지만 크누트 2세가 AD 1234년 사망했기 때문에 에리크 11세가 귀국하여 왕으로 복위할 수 있었다.

이제 에리크 11세가 AD 1250년까지 왕으로서 스웨덴을 통치하게 되지만 그 역시 자식을 남기지 못하고 사망하였기 때문에 스베르케르 왕가에 이어서 에리크 왕가도 단절되고 말았다. 그러자 스웨덴 재상로 왕국의 2인자였던 야를 비르예르 망누손이 에리크 11세의 누이인 잉에보리와 결혼하였다는 점과 모계 혈통으로 스베르케르 왕가의 피를 이어받은 점을 내세워 자신의 아들인 발데마르 1세를 왕으로 선출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이렇게 하여 스웨덴 왕위를 둘러싼 스베르케르 왕가와 에리크 왕가의 오랜 분쟁이 종식되고 새로운 '폴쿵아(Folkunga)' 왕조가 시작되었다.

3.2. 재건

AD 1250년 야를 비르예르 망누손의 아들 발데마르가 스웨덴 왕으로 선출되면서 새로운 폴쿵아 왕가가 시작되었다. 발데마르의 어머니인 잉에보리가 에리크 10세의 딸이었고 아버지인 비르예르 야를이 모계 혈통으로 스베르케르 왕가의 혈통을 이어받았기 때문에 발데마르의 즉위는 스웨덴 왕위를 둘러싼 에리크 왕가와 스베르케르 왕가의 오랜 분쟁의 종식을 의미했다. 그러나 즉위 당시 발데마르의 나이가 아직 11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아버지인 야를 비르예르가 섭정이 되어 죽을 때까지 스웨덴을 통치했다. 그리고 AD 1266년 야를 비르예르가 사망한 이후 발데마르가 왕으로서 친정에 나섰지만 그의 동생인 망누스가 스웨덴 공작이 되어 아버지 비르예르의 지위를 이어받으면서 이제는 스웨덴 왕위까지 넘보기 시작했다.

결정적으로 발데마르가 부인인 덴마크왕 에리크 4세의 딸 소피아를 두고 그 동생인 유타와 불륜을 저지르고 애까지 낳았기 때문에 AD 1274년 로마로 향하여 로마교황에게 사죄를 해야만 했다. 이에 망누스가 AD 1275년 반란을 일으켜 발데마르를 폐위시키고 스스로 왕으로 즉위했지만 덴마크가 개입하면서 발데마르도 스웨덴 남부의 예탈란드를 통치할 수는 있었다. 참고로 망누스는 스웨덴 최초의 '망누스'라는 이름의 정식 왕이었지만 찬탈자나 대립왕까지 왕조 계보에 포함시키면서 '망누스 3세'로 명명되었다. 또한 망누스 3세는 AD 1278년 스웨덴 남부에 살던 고트족의 군주를 자처하였기 때문에 '고트족의 왕(rex Gothorum)'이라는 칭호를 사용하였는데 이로 인해 이후의 스웨덴 왕들이 '스웨덴인과 고트족의 왕'이라는 칭호를 사용하게 된다.

이후 망누스 3세는 스웨덴에 대한 대대적인 통치 체제를 정비하기 시작하여 우선 AD 1279년 알스뇌 규약을 통해서 평민 중 상류 계층에게는 왕에게 충성을 맹세하고 전시에 군마를 제공하는 대신에 면세 특권을 허용하였는데 이들은 세금으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하는 '프랠세(fralse)'라는 귀족 계층이 되었다. 또한 망누스 3세는 교회 조직도 재정비하여 주교는 각 주교구의 참사회에서 선출하도록 하고 교회법에 따른 종교 재판으로만 처벌할 수 있도록 했으며 교회에게도 면세 특권을 부여하면서 스웨덴 교회가 귀족 세력을 견제하는 제3의 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망누스 3세는 기존의 성직자와 귀족이 참여하는 국정 회의를 체계화하여 귀족, 주교, 지방회의 의원, 왕의 군사, 법률 보좌관, 재상 등이 참여하는 원로원(Riksradet)을 구성했다. 이들 원로원 의원들은 평상시에는 자신의 영지에 머물다가 회의가 소집될 때만 모이게 되었다.

3.3. 혼란 재개

풀쿵아 왕조를 창건한 이후 스웨덴의 통치 체제를 정비한 망누스 3세였지만 후계 구도에 있어서는 만전을 기하는 데 실패했다. 비록 AD 1290년 망누스 3세가 사망할 때 자신의 장남인 비르예르를 후계자로 지명했지만 나이가 10살에 불과하였기 때문에 직접 통치할 능력이 없었고 결국 먼 친척이자 군대를 총괄하는 지위인 '컨스터블(constable)'인 토르길스 크누트손을 섭정으로 지명하고 원로원을 통하여 통치하도록 해야만 했다. 이에 토르길스가 스웨덴 귀족들의 지원을 바탕으로 스웨덴을 통치하기 시작했고 특히 에리크 9세 시절 중단되었던 핀란드 정복을 재개하여 AD 1293년 카렐리야 서부를 장악하고 비보리에 요새를 세우며 러시아와 국경선을 확정지었다.

AD 1302년 비르예르의 동생인 에리크와 발데마르가 각각 쇠데르만란드 공작과 핀란드 공작으로 임명받았다. 이후 에리크와 발데마르는 스웨덴 통치권에 대한 야심을 들어냈고 그러던 중 섭정인 토르길스가 망누스 3세 이후 덴마크의 제3의 세력으로 성장했던 교회 측과 대립각을 세우기 시작하자 교회의 지원을 받아 토르길스를 축출하며 내전을 시작했다. 그리고 에리크와 발데마르가 비르예르의 아들인 망누스 비르예르손의 왕위계승권을 인정하면서 비르예르가 에리크와 발데마르의 편으로 돌아섰기 때문에 토르길스는 처형당하고 말았다.

이후 에리크 및 발데마르와 비르예르 사이에 불화가 발생하면서 AD 1306년 에리크와 발데마르가 비르예르를 호투나에서 붙잡아 뉘셰핑 성에 감금하는 호투나 사건이 발생했다. 하지만 AD 1308년 덴마크 왕 에리크 6세의 압력에 따라 비르예르가 석방되었기 때문에 이후 10년간 스웨덴 귀족들이 둘로 나뉜 채 서로 다투게 되었다. 비록 AD 1317년 비르예르가 뉘셰핑 파티에서 에리크와 발데마르를 체포하여 이듬해 감옥에서 굶어 죽게 만들었으나 에리크와 발데마르의 측근들이 반격에 나서서 AD 1318년 비르예르를 축출하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에리크가 노르웨이 왕 호콘 5세의 외동딸 잉게보리와 결혼하여 낳은 아들인 망누스 4세가 AD 1319년 7월 웁살라 전국의회를 통해서 왕으로 선출되었다. 또한 망누스 4세는 모계혈통에 따라 같은 해 8월 노르웨이 왕위까지 이어받으면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국왕을 모두 겸하게 되었다.

3.4. 스웨덴-노르웨이 시대

3.4.1. 망누스 4세 시대

스웨덴의 왕권을 확립했던 망누스 3세가 AD 1290년 사망한 뒤 그의 아들들과 스웨덴 귀족들의 대립하는 혼란이 거의 30년 간 이어졌지만 망누스 3세의 차남 쇠데르만란드 공작 에리크와 노르웨이 왕 호콘 5세의 딸 잉에보리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인 망누스 4세가 AD 1319년 7월 왕위에 오르면서 겨우 종식되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 호콘 5세도 사망하면서 망누스 4세가 노르웨이 왕위까지 상속받아 망누스 7세로 즉위했기 때문에 스웨덴과 노르웨이가 동군연합 상태가 되었다. 하지만 정작 망누스 4세의 즉위 당시 나이가 3살에 불과했기 때문에 그의 할머니 홀슈타인의 헬비히, 어머니 노르웨이의 잉에보리, 그리고 덴마크 귀족인 크누트 욘손과 노르웨이 귀족인 에를링 비드쿤순이 섭정단을 조직했다.

비록 망누스 4세가 성년이 되기 전인 AD 1333년 노르웨이에서 에를링 비드쿤손의 주도로 반란이 일어났다가 진압되는 일이 벌어졌지만 섭정단이 큰 무리없이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양국을 통치했다. 또한 당시 덴마크는 독일의 홀슈타인-렌즈부르크 백작 게르하르트 3세 및 홀슈타인-플뢴 백작 요한 3세가 그동안 덴마크 왕실에 빌려준 대출금의 담보를 위해 영토 대부분이 저당잡혀 있는 신세였는데 이에 AD 1332년 스코네 지방에서 반란을 일으켜 스웨덴에 귀속될 것을 요청하고 나서자 스웨덴 섭정단은 홀슈타인-렌즈부르크 백작 게르하르트 3세에게 보상금을 지급하고 스코네를 스웨덴의 영토로 병합하였다.

AD 1336년 망누스 4세가 20살이 되자 스톡홀름에서 스웨덴 왕과 노르웨이 왕으로서 정식으로 대관식까지 치르게 되었지만 AD 1338년 노르웨이 귀족들이 다시한번 반란을 일으켰다. 이에 결국 AD 1343년 바르베리 조약에 의한 대타협이 이루어져 스웨덴 왕위는 망누스 4세의 장남인 에리크 12세가 이어받지만 노르웨이 왕위는 차남이 호콘 6세로 계승하고 당장 호콘 6세가 노르웨이 왕위에 오르는 대신에 호콘 6세가 성년이 될 때까지는 망누스 4세가 섭정이 되기로 결정되었다. 이후 망누스 4세는 내정을 정비하면서 스웨덴에서 노예제를 완전히 철폐하고 지방법들을 통일하기 위한 '통일 국법(Landslag)'의 초안을 작성하기 시작했으며 스웨덴 전국의 도시들에게 적용되는 '도시법(Stadslag)'도 만들어졌다. 그렇지만 망누스 4세의 대외정책은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는데 AD 1348년 러시아의 노브고로드 공화국을 공격하였으나 AD 1350년부터 북유럽을 휩쓸기 시작한 흑사병(페스트) 때문에 결국 실패하고 말았다.

3.4.2. 노르웨이의 분리와 스웨덴 귀족들의 반란

망누스 4세는 치세동안 자신의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귀족들과 교회의 경제력을 위축시켰기 때문에 많은 불만을 샀다. 그리고 AD 1355년 노르웨이의 왕으로 임명하였던 차남인 호콘 6세가 성년이 되면서 스웨덴과 노르웨이의 동군연합은 종식되고 다시 별개의 나라로 분리되었다. 그러자 스웨덴의 왕세자가 되었지만 그동안 아무런 실권을 가지지 못했던 망누스 4세의 장남인 에리크 12세가 망누스 4세에게 불만을 가진 귀족들의 수장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이후 에리크 12세는 덴마크 왕 발데마르 4세의 지원을 얻어냈고 AD 1356년에는 로마 교황 인노첸시오 6세의 지지까지 받으면서 AD 1357년 망누스 4세로부터 핀란드와 스웨덴 남부 지역에 대한 통치권을 위임받는 데 성공했다.

이후 망누스 4세가 반격에 나서서 AD 1359년 노르웨이 왕이 된 차남 호콘 6세 발데마르 4세의 딸 마르그레테를 결혼시키는 조건으로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와 동맹 조약을 체결하고 장남인 에리크 12세와도 화해하였다. 같은 해 에리크 12세가 갑자기 병사하였고 이듬해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가 망누스 4세를 배신하여 스코네를 되찾아 갔다. 하지만 부 욘손 그리프를 중심으로 한 스웨덴 귀족들이 망누스 4세의 매제인 메클렌부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2세에게 접근하여 그의 아들인 알브렉트에게 왕위를 제안했기 때문에 망누스 4세는 스코네의 탈환을 포기하며 덴마크의 발데마르 4세와 다시 동맹을 체결하였다. 그리고 망누스 4세는 AD 1362년 호콘 6세를 스웨덴의 공동왕으로 임명하여 노르웨이의 지원도 받아내었다.

이렇게 망누스 4세가 덴마크 및 노르웨이와 공동 전선을 펼쳤으나 AD 1364년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렉트가 북독일의 한자동맹 도시들의 지원을 받아 군대를 이끌고 스웨덴의 스톡홀름에 입성하여 대관식까지 치르는데 성공하였다. 이후 스웨덴은 8년 동안 망누스 4세와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렉트 지지파 사이의 내전이 벌어졌고 최종적으로 AD 1364년에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렉트 세력이 망누스 4세를 지원 온 호콘 6세의 노르웨이 군을 물리치고 망누스 4세까지 포로로 붙잡았다. 이제 호콘 6세가 AD 1370년 한자동맹 도시들에게 상당한 무역 특권을 보장해주는 조건으로 강화조약을 체결하고 이듬해 덴마크 왕 발데마르 4세의 지원까지 받아 스톡홀름을 포위 공격했지만 함락에는 실패했다. 결국 호콘 6세와 알브렉트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져 포로로 붙잡혀 있던 망누스 4세가 풀려나는 대신에 알브렉트가 스웨덴 왕위를 차지하는 평화조약이 체결되었다.

3.5. 덴마크-노르웨이 창설과 칼마르 동맹

3.5.1. 섭정 마르가레테의 덴마크-노르웨이 통치 시작

덴마크는 AD 1375년 발데마르 4세가 사망한 후 정통성 있는 왕위계승 후보자가 없기 때문에 덴마크 왕위가 비어있는 대공위 시대가 한동안 이어졌다. 그리고 처음에는 발데마르 4세의 딸인 잉에보르가 메클렌부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2세의 장남이자 후계자인 하인리히 3세와 결혼했기 때문에 둘 사이에서 태어난 알브레히트 4세가 할아버지인 메클렌부르크 공작 알브레히트 2세의 후광에 힘입어 강력한 왕위계승권자로 부상했다. 하지만 독일의 메클렌부르크 공작 가문이 이미 스웨덴 왕위를 차지한 상태에서 더 이상 스칸디나비아에 대한 영향력이 확대되는 것을 원치 않았던 덴마크 귀족들이 이를 거절하고 노르웨이왕 호콘 6세와 결혼한 발데마르 4세의 딸 마르그레테의 아들인 올루프 왕자를 AD 1376년 덴마크 국왕 올루프 2세로 선출했다. 그리고 AD 1380년 노르웨이의 호콘 6세가 사망하자 올루프 2세가 노르웨이 왕 올라프 4세로 즉위하면서 이제 덴마크와 노르웨이가 동군연합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올루프 2세의 나이가 아직 너무 어렸기 때문에 마르그레테가 섭정이 되었다.

3.5.2. 스웨덴 왕 알브렉트와 스웨덴 귀족 간의 갈등

비록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렉트가 스웨덴 왕위를 차지했지만 스웨덴 귀족들로 이루어진 섭정 의회의 광범위한 권한을 인정해 주어야 했다. 그 중에서 알브렉트를 왕위에 올리는 데 가장 큰 공을 세운 부 욘손 그리프는 무려 1,500여개의 농장을 얻고 스웨덴 영토의 3분의 1을 차지하기에 이른다. 이 때문에 비록 알브렉트가 19년 간이나 왕위를 유지했지만 스웨덴 서부에 대해서는 거의 통치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이후 알브렉트가 자신의 지지 기반을 만들기 위해서 주요 지역의 토지를 독일 영주에게 넘겨주고 중요 보직에도 독일인만 중용하자 스웨덴 귀족들은 부 욘손 그리프를 중심으로 결집하여 알브렉트를 견제하였다. 그리고 AD 1389년 부 욘손 그리프는 사망하자 이제 스웨덴 귀족들이 부 욘손 그리프의 방대한 영지의 상속권을 두고 알브렉트와 분쟁을 벌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를 위해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마르그레테 1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3.5.3. 마르가레테의 3왕국 통합, 칼마르 동맹의 탄생

본래부터 마르그레테도 스웨덴의 망누스 4세의 왕위를 빼앗은 메클렌부르크의 알브렉트를 상대로 자신의 아들인 올루프 2세가 망누스 4세의 외손자임을 내세워 스웨덴 왕위 계승권을 요구하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올루프 2세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이 되어 강력한 군사력을 갖추게 되었고 스웨덴 사람들도 올루프 2세가 왕이 되는 것에 대하여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이 올루프 2세에 의해 하나로 통합되는 것도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지만 올루프 2세가 AD 1387년 17세의 나이에 갑자기 사망하면서 무산되었다.

이후 마르그레테는 자신의 외교적 역량을 총동원하여 언니 잉에보르의 외손자이자 포메른-슈톨프 공작 바르티슬라프 7세의 아들인 포메른의 에리크를 양자로 삼아 덴마크 왕위를 계승시키고 덴마크 왕 에리크 4세로 즉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그리고 노르웨이는 국가자문위원회에 의해 통치되었지만 사실상 마르그레테가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모든 실권을 장악하였다. 그리고 AD 1389년 알브렉트와 대립하던 스웨덴 귀족들의 요청에 따라 사망한 스웨덴의 실력자 부 욘손 그리프의 막대한 영지까지 대부분 넘겨받는데 성공하였다. 이 때부터 마르그레테는 스웨덴의 '여군주이자 통치자'로 선포되었고 AD 1389년 2월 스웨덴을 공격하여 오슬레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고 알브렉트도 생포하는 데도 성공하였다.

이후 알브렉트는 6년 간이나 스코네의 린드홀름 성에 감금되어야 했고 AD 1395년 거액의 보상금을 받는 조건으로 스톡홀름을 공식적으로 포기했다. 그 사이 마르그레테가 이미 스웨덴의 통치권을 장악하였기 때문에 AD 1396년 포메른의 에리크를 노르웨이 왕위와 스웨덴 왕위에 모두 즉위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포메른의 에리크는 노르웨이 왕으로서는 에리크 3세, 스웨덴 왕으로서는 에리크 13세로 각각 명명된다. 이어서 마르그레테는 AD 1397년 6월 스웨덴의 동남부에 있는 칼마르에 덴마크, 노르웨이, 스웨덴의 3개국 귀족 의회를 소집하여 3개국의 연합안을 통과시키는데 성공하면서 덴마크-노르웨이-스웨덴이 서로 동군연합 상태가 되는 '칼마르 동맹(Kalmar Union)'이 성립되었다. 그리고 포메른의 에리크가 3개국의 통합 왕이 되어 같은해 6월 7일에 3개국 합동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비록 공식적으로는 포메른의 에리크가 통합 왕이었지만 여전히 마르그레테가 실질적인 통치자로 군림했다. 그렇지만 마르그레테는 칼마르 동맹의 3개국 통합 헌법을 비준시키는 데는 실패하여 칼마르 동맹은 하나의 국가가 아닌 국가 연합체의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스칸디나비아 3개국은 칼마르 동맹을 결성한 이후에도 여전히 독자적인 귀족 의회를 가지며 고유의 법과 관습을 지킬 수 있게 되었다. 다만 일반적으로 칼마르 동맹의 주도권은 덴마크가 행사했고 나머지 노르웨이와 스웨덴은 종속적인 지위에 머물렀다. 이렇게 스칸디나비아를 하나로 통합시킨 업적을 남긴 마르그레테는 마지막으로 덴마크 남부의 홀슈타인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기 위하여 전쟁을 벌이던 중 AD 1412년 흑사병에 걸려 플렌스부르크에서 사망하였다.

3.6. 칼마르 동맹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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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근대 초기, 전성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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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근대 후반기

1792년 즉위한 구스타브 4세 아돌프는 1802년 나폴레옹 전쟁 때 반프랑스 동맹에 참가하였다. 그러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공격을 받아 스웨덴령 포메른을 빼앗겼으며, 1808년에는 러시아 제국에게 공격당해 1809년 프레드릭스함[5] 조약으로 핀란드까지 빼앗겼다. 결국 쿠데타 끝에 국왕 구스타브 4세 아돌프가 폐위되고, 대신 즉위한 칼 13세는 늙어서까지 후손이 없어 스웨덴 의회는 나폴레옹의 부하였던 프랑스의 육군 원수 장 바티스트 베르나도트를 칼 13세의 양자로 추대해 스웨덴 왕세자로 선출했다.

그러나 1812년 베르나도트는 반프랑스 동맹에 가담해 나폴레옹을 배반했고, 덴마크를 공격하여 노르웨이를 차지했다. 이후 노르웨이는 자치령의 형태로 스웨덴의 지배를 받는다. 스웨덴-노르웨이 연합 왕국 참조. 1818년 칼 13세가 사망하자 베르나도트가 칼 14세 요한으로 즉위했고, 베르나도테 왕조가 시작되었다. 1838년 진보주의 언론인 M.J.크루센스톨페가 칼 14세 요한을 중상했다는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자 일어난 라불리스트 폭동(Rabulist riots)의 결과 언론 검열이 완화되고 의회 정치가 발전하게 됐다.

1800년대 말에는 신대륙으로의 이주가 활발했는데 100만명 정도의 사람들이 넘어갔으며(전체 인구의 20% 정도) 미국 중부의 초원을 중심으로 이주한다. 지금도 '~손'이라는 이름이 붙은 미국인들은 이들의 후손인 경우가 많다. 이런 대이주는 스웨덴이 산업 발전기에 접어들면서 나온 주거 문제, 노동권 운동 등에 영향을 주었다.

스웨덴은 189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 많은 산업 발전을 이루었고, 키루나광산과 새로운 수력 발전 방식을 기반으로 산업 생산량을 빠른 속도로 늘려나가기 시작한다.

1905년에는 오스카르 2세 노르웨이 왕국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권리를 포기하고 노르웨이가 분리되었다. 노르웨이가 분리된 이후로 스웨덴은 전면적인 전쟁을 치르지 않았다.

비동맹 무장 중립을 선언하여 제1차 세계 대전의 전화를 피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1917년과 1918년은 격동적인 시기였는데, 1917년의 러시아 혁명으로 인해서 스웨덴 사회민주노동자당 내부의 급진좌파들이 좌파당(Vänster partiet)을 형성하면서 빠져나갔고, 1918년의 독일의 패배로 인해서 독일을 모델로 삼고 있던 보수주의 세력도 급속도로 규모가 작아졌다. 이후 사회민주당이 노동자들과 힘을 합쳐 1921년 여성 참정권을 포함한 보통 선거권을 획득하고 이것을 기반으로 과거부터 핀란드를 정복하고 북유럽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였던 러시아의 볼셰비키즘의 영향으로 스웨덴은 사회민주노동당이 장기 집권하면서 스웨덴식 복지국가를 만들었다.

제1차 세계 대전 시기에는 생산량이 급증하기도 하는데 독일의 U보트 계획으로 인하여 영국의 직물들이 들어오지 않게 되면서 스웨덴 기업들이 성장할 수 있는 기반을 제공했으며, 전쟁으로 인하여 독일로의 철 수출도 최고조였기 때문이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는 제지 펄프 산업은 증대되었고 철 수출량은 감소한다.

제2차 세계 대전에서도 무장 중립을 유지했으나 스웨덴인 무장친위대 부대가 편성되고, 철광석 교역 등으로 나치 독일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스웨덴은 이 당시에 나치가 노르웨이로 침공할 때 철도를 내주지 않으면 침공하겠다는 통보에 철도를 빌려줘 노르웨이가 빠르게 나치의 지배를 받도록 만들었다. 이 같은 사실은 전후 연합국에게 많은 비난을 받았으며, 노르웨이에서는 스웨덴에 대한 악감정이 남은 노인이 조금 있다. 또한 주변 국가인 핀란드를 돕기 위해 8,000명의 스웨덴 자원병이 참전하기도 했다.

그러나 스웨덴에도 오스카 쉰들러같은 사람이 있었다. 라울 발렌베리[6]는 '사회에서 존경받는 재벌'로 유명한 스웨덴의 최대 재벌 발렌베리 가문의 사람이다. 발렌베리는 자신이 외교관 신분이라는 것을 이용해 수용소에 끌려갈 유대인들에게 위조 스웨덴 여권을 돌려 우방국의 국민으로 보이게 해 구출했다. 그러나 종전 직후 난민 보호를 위해 주변의 반대를 무릅쓰고 소련군 사령부로 향했고 그 후로 실종되었다. 10여 년이 지난 후에야 스메르시에게 체포, 구금된 뒤 수용소에서 병사했고 시신은 화장하였다고 소련 측이 밝혔으나 시신이나 유품도 인도되지 않아 아직도 알 수 없는 것이 많으며 그의 어머니는 죽을 때까지 아들이 살아 있다고 믿었다.

6. 현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NATO, WTO에 가입하지 않고 중립국의 지위를 고수하며 북유럽 국가들의 중립 정책, 노르딕 밸런스(Nordic Balance)를 선도했다. 하지만 친 미국적 정책을 취해 소련으로부터 서방 세계의 북방 측 방벽 역할을 하였다. 나중에 미국의 베트남 전쟁 개입을 정부가 공식적으로 비난하는 등 어느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았지만 최근 비밀 해제된 외교 문서들을 보면 NATO와 WP 간 전쟁이 일어나면 NATO측으로 참전하기로 미국과 합의하기는 했다. 스페츠나츠의 주요 실전 훈련용 침투 루트가 아프가니스탄, 체첸과 더불어 스웨덴 방면이었으며, 이 때문에 스웨덴 군의 평시 스페츠나츠와의 교전 비율은 상당한 수준이었다. 심지어는 스페츠나츠 하수구를 통해 스톡홀름 왕궁 정문 앞까지 침투했다가 경비대에 발각되어 총격전 끝에 도주하기도 했을 정도다.[7]

스웨덴은 복지 정책을 전방위적으로 확대하고 여러 선진적인 정책을 시행해서 매우 살만했고, 난민을 많이 받아들이게 된 것도 이 시기의 일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세금 부담이 과중해지면서 점차 장기집권하던 사민당에 대한 지지가 줄어들었고 1970년대 초반에 원자력 발전 건설 논란도 일어났다.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 초반까지 오일 쇼크의 영향으로 경제가 다소 침체되었고, 이것의 영향으로 잠깐 보수 3당의 연합 정권이 수립되었다. 그래도 이 시절에도 사회민주당은 원내 1당이었다. 사실 이 때의 스웨덴은 이미 소득도 세계 최고 수준이었고 삶의 질도 상위권을 유지했기에 이전에 비해 비교적 안 좋은 상황이었지, 전체적으로는 여전히 기존 정권의 지지가 높았다. 1980년대 중반부터 오일 쇼크의 후유증을 차츰 극복하였고 자산 가격이 빠르게 상승하면서 성장했다. 1990년대 초반에 부동산 가격이 하락하면서 다시 침체를 겪었지만 침체가 장기화되지는 않았고 1990년대 중반부터는 다시 성장세로 돌아섰다.

공산권 붕괴 후에는 중립 정책을 사실상 포기하였고, 1995년 유럽연합에 가맹하였으나 NATO에는 가입하지 않고 유로 사용도 거부하는 등 아직도 독자적인 정책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2022년 단행된 러시아 푸틴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따라 5월 핀란드와 함께 나토 가입을 타진하는 중이다.

2010년대 들어서는 세계 금융위기같은 글로벌 경제 위기와 중동발 난민 급증으로 인한 불만이 복지국가로 유명한 스웨덴에서조차 극단 세력의 선거 약진을 불러왔다. 다만 상대적으로 부상했다는거지 절대치론 여전히 집권하긴 좀 무리고, 스웨덴 자체가 극우에 반감이 제법 많은 나라다 보니 그렇게 부상했던 정당은 이미지 실추를 걱정해서 내부적인 자정을 해 현재는 다른 국가의 극단 세력에 비하면 비교적 평범한 정당이 되어버렸다. 그렇게 쓸려 나간 극단 세력의 인사들은 새로운 정당을 만들어서 이전보다 더 노골적인 극단성을 띄는 중이다. 다만 단독 집권은 요원해보인다.

2021년 6월 21일에 스웨덴 의회가 뢰벤 총리에 대한 불신임안을 가결하면서 연립정부가 무너졌다. #

스웨덴 동부 노르셰핑에서 극우단체의 이슬람 경전 꾸란 소각으로 폭동이 일어난지 4일만에 스웨덴 남부에서도 극우단체의 폭동이 이어져 40명이 부상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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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유럽 역사
북대서양 발트 3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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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슬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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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투아니아]]
스칸디나비아반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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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웨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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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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덴마크]]
[[노르웨이/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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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르웨이]]



[1] 이 영상은 스웨덴의 군주이자 스웨덴을 북방의 사자로 불리게 만든 구스타브 2세 아돌프를 기념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2] 스웨덴을 제외한 세계의 모든 국가들은 적어도 한번씩 외세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다. 아시아 지역을 보면 태국을 제외한 모든 동남아시아 국가들과 모든 남아시아 국가들은 열강들의 보호령이나 식민지가 되었고 대부분의 중앙아시아 국가들은 러시아 제국과 소련의 지배를 받았으며 네팔, 부탄, 아프가니스탄도 영국의 보호령이었다. 한 때 전 세계를 경악하게 만든 몽골도 만주족의 청나라의 지배를 받았고 청나라 멸망 이후에도 중화민국과 소련의 영향을 많이 받았고 이후 소련의 위성국이 되었다. 한국 역시 일본의 식민지였고 해방 이후에도 미국과 소련의 영향을 받았고 일본 또한 제국주의 열강에 합류하면서 외세의 지배를 받지 않을 뻔 했지만. 2차대전 시기에 미국령 하와이를 기습공격해 이에 분노한 미국의 반격으로 인해 패망하여 식민지는 아니었으나 미 군정의 지배를 7년간 받게 되었다. 땅 덩어리가 거대한 중국도 몽골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으며 이란을 제외한 모든 서아시아 국가들 역시 열강이나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거나 보호령이었고 그 이란 역시 중세 시절 몽골의 지배를 받은 전적이 있다. 제국주의 시절 식민지배를 잘 피한 튀르키예도 중세 시절 식민지라기엔 애매했으나 몽골의 봉신국, 즉 속국이었고 천하의 태국마저 중세 시절 크메르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유럽도 마찬가지인데 노르웨이는 스웨덴과 나치 독일에게 병합되었고, 핀란드는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폴란드 등의 동유럽 국가들, 발칸 반도 국가들은 로마 제국이나 러시아 제국, 소련, 나치 독일, 오스만 제국 등의 지배를 받았고 한 때 강력했던 네덜란드, 벨기에, 오스트리아도 나치 독일에 병합되거나 지배당했고, 안도라, 바티칸, 모나코 같은 소국들도 예전에는 로마 제국, 스페인 제국 등의 영토였고 영세 중립국인 스위스도 로마 제국과 합스부르크의 영토였다. 아일랜드는 영국의 지배를 받았고 아이슬란드는 덴마크의 지배를 받았으며 원조 식민제국이었던 스페인, 포르투갈도 이슬람 국가인 우마이야 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이탈리아는 2차 대전 패망 후 연합국의 지배를 받았고 한 때 세계에서 가장 영토가 넓었고 나치 독일로부터 살아남은 영국도 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고 프랑스는 로마 제국, 나치 독일의 지배를 받았으며, 한 때 유럽 대부분을 장악했던 독일도 로마 제국, 2차 대전 패전 후 연합국의 지배를 받았다. 그리고 한 때 나치 독일을 패망시키고 미국과 패권을 다퉜던 러시아마저 몽골 제국의 지배를 받았다. 아프리카는 모든 국가가 열강들의 식민지나 보호국이 되었었는데 아프리카 국가 중 식민지배를 당하지 않았다고 알려진 국가들인 에티오피아도 짧지만 5년 정도 이탈리아 왕국의 식민지였고 라이베리아도 처음에는 미국의 식민지였다. 오세아니아도 전 국가가 영국 등의 식민지였어서 현재 영연방 국가들이 많을 정도고 중남미도 전 국가가 스페인 제국이나 포르투갈 제국의 식민지였고 캐나다도 영국의 식민지였고 무엇보다 현재 세계 1위의 초강대국 국가인 미국마저도 영국의 식민지였다. 반면 스웨덴은 외세에 의해 식민지가 되거나 병합이 되거나 보호국, 괴뢰국이 된 적도 없으며 대부분의 유럽 영토가 점령당한 로마 제국 시대, 대부분의 국가가 식민지가 되던 제국주의 시절, 수많은 국가들이 점령당하던 1,2차 세계대전 때도 멀쩡했다. [3] 덴마크는 " 데인인의 사적"이라는 두툼한 왕사서가 있고, 노르웨이는 창업군주 하랄 1세 하르파그리의 통일과 왕권강화 정책에 반감을 품은 사람들이 아이슬란드 등지로 도망가서 기록한 사가문학이 있다. 당연히 이런 사가들에는 하랄 1세의 욕이 한가득이지만(...). [4] 자세한 사정은 덴마크/역사 노르웨이/역사 참고 [5] 현재 핀란드 하미나. [6] 독일식 발음은 발렌베르크다. [7] 스웨덴 왕실이 드로트닝홀름 궁전으로 옮겨간 또 다른 이유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