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rowbgcolor=#002654> 총재정부 의장 (1795~1799) ||
}}}}}}}}} ||초대 | 제2대 | 제3대 |
장프랑수아 뢰벨 | 루이마리 드 라 레벨리에르레포 | 폴 바라스 |
제4대 | 제5대 | 제6대 |
필리프앙투안 메를랭 드 두에 | 장프랑수아 뢰벨 | 폴 바라스 |
제7대 | 제8대 | 제9대 |
필리프앙투안 메를랭 드 두에 | 에마뉘엘 조제프 시에예스 | 루이제롬 고이에 |
통령 (1799~1804) | ||
제1통령 | 제2통령 | 제3통령 |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 장자크레지스 드 캉바세레스 | 샤를프랑수아 르브룅 |
프랑크 ·
서프랑크 ·
왕국 제1공화국 · 제국 · 7월 왕정 · 제2·3·4·5공화국 |
에베르파 | 로베스피에르파 |
당통파 (관용파) |
자크 르네 에베르 |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 조르주 당통 |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관련 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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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654><colcolor=#fff> 프랑스 제26·45대 국민공회 의장
막시밀리앙 드 로베스피에르 Maximilien de Robespier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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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막시밀리앵 프랑수아 마리 이지도르 드 로베스피에르 Maximilien François Marie Isidore de Robespier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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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 | 1758년 5월 6일 | ||
프랑스 왕국 아르투아
아라스 (現 프랑스 오드프랑스 파드칼레 아라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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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망 | 1794년 7월 28일 (향년 36세) | ||
프랑스 제1공화국
파리 콩코르드 광장 (現 프랑스 파리 8구 콩코르드 광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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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
프랑스 왕국 (1758~1792) 프랑스 제1공화국 (1792~179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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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임기간 | 제26대 국민공회 의장 | ||
1793년 8월 22일 ~ 1793년 9월 7일 | |||
제45대 국민공회 의장 | |||
1794년 6월 4일 ~ 1794년 6월 19일 |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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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2654><colcolor=#fff> 묘소 | 에란시스 묘지 | |
부모 |
아버지 프랑수아 드 로베스피에르 어머니 자클린 마르그리트 케로[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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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제자매 | 3남1녀 중 장남 | ||
학력 |
리세 루이르그랑 (
졸업) 파리 대학교 ( 법학 / 학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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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정치인, 법조인 | ||
신체 | 160cm | ||
종교 | 이신론( 이성신)[2] | ||
최종 당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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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력 |
아라스지방형사법원 판사 아라스 문학 아카데미 비서 삼부회 제3신분 대의원 국민의회 의원 제헌의회 의원 클뢰브 데 자코뱅 지도자 국민공회 의원 몽테뉴파 영수 공안위원회 위원 제26대 국민공회 의장 제45대 국민공회 의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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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
자유, 평등, 우애
자유, 평등, 우애
자유의 비밀은 사람들을 교육시키는 데에 있지만, 폭정의 비밀은 그들을 무지하게 만드는 것에 있다.
프랑스의 변호사, 혁명가, 정치가이자 제26 · 45대 국민공회 의장이다.
프랑스 혁명 시기 자코뱅파의 주요 지도자 중 한 명이었으며 혁명을 주도한 부르주아 중에서도 급진파에 해당하는 인물로, 앙시앵 레짐의 모든 유산을 청산하려는 급진적 개혁을 추진했다.
또한 공포정치를 주도한 독재자이기도 했다. 혁명을 반대하는 반동 세력에 대한 탄압뿐만 아니라 혁명 세력 중에서도 혁명성이 의심되는 인물에 대해서도 예외 없이 무자비한 숙청을 가한 단두대 매니아로서 공포정치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주었고, 그 대가로 결국 자신도 똑같이 단두대로 처형당했다.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대표적인 급진 좌익의 아이콘으로 여겨지는 동시에 혁명의 양면성을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현대 프랑스 공화국의 슬로건인 자유, 평등, 우애(Liberté, Égalité, Fraternité)도 이 사람의 작품이다.
2. 생애
2.1. 프랑스 혁명 전까지
프랑스 아라스 시에서 법률가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6살에 사산으로 어머니를 잃고 8살에 아버지가 행방불명되어 여동생들은 고모들 집에서, 그는 남동생과 함께 외조부모 집에서 자랐다.[3] 11살에 성직자가 되기 위해 콜레주 루이르그랑 (Collège Louis-le-Grand)[4]에 진학했으나 로마 공화정의 이상적인 모습, 장자크 루소와 카토,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의 사상에 매료되어 공화주의자가 되었다. 루소와는 직접 만나본 적도 있다고. 12년간의 학창 시절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으나[5] 굉장히 가난하게 살았던 지라 종종 찢어진 옷, 해진 신발을 신고 있었다고 한다. 때때로 옷이 없어 외출을 하지 않으려고 했다고.하지만 성적은 우수해서 장학생으로 학교를 다닐 수 있었고, 루이 16세가 대학을 방문하자 17세의 로베스피에르는 성적 우수자의 자격으로 500명 학생을 대표해 축사를 올렸다는 일화가 알려져 있다. 문제는 그날 비가 와서 땅바닥에 무릎을 꿇고 비를 맞으며 연설을 해야 했고, 애초에 한 나라의 국왕 폐하께서 비 맞아가며 17살짜리 애가 떠드는 알아듣지도 못할 장문의 라틴어 연설을 듣고 싶을 리도 없었으니 건성으로 듣고 대답없이 돌아갔다고 한다.[6][7]
대학을 졸업한 뒤 아라스시의 법률가가 되어 괜찮은 수입을 올리며 살며 어려운 사람을 돕고 그들을 대변하는 등의 행위로 여러 사람들에게 명성을 얻는다. 법률가 시절의 유명한 사건 중에는 피뢰침에 대해 신성모독 혐의로 철거 명령이 내려지자, 이를 변호해 피뢰침을 지킨 사건이 알려져 있다.[8] 또한 사형제 폐지, 처벌 앞에서의 평민과 귀족의 평등, 유죄를 선고받은 자에 대한 재산 몰수 폐지, 서자들의 처우 개선 등의 개혁을 주장했다.
2.2. 자코뱅의 지도자
우리와 함께 살고 있는 수많은 사람들을 비천하게 만들고 억압하는 것은 어떤 이유로든 결코 현명한 일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잊지 맙시다.
1789년 12월 23일, 유대인의 투표권을 옹호하며.
로베스피에르는 1789년 31세의 나이로 시민층의 지지를 받아 아르투아주 제3신분 대표로
삼부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면서 정치에 입문한다. 혁명 초기의 로베스피에르는 주목받는 인물은 아니었으나, 이 시기부터 가장 단호한 제3신분 대의원의 한 사람이었다.
테니스 코트의 서약에 45번째로 맹세했고 7월 9일 국왕에게 파리 주변의 외국 군대 철수를 요구할 24인의 대표 중 한 명으로 선출되었으며, 7월 17일 루이 16세의
파리 방문을 수행했다.1789년 12월 23일, 유대인의 투표권을 옹호하며.
하지만 혁명이 진행되면서 의회에서 파벌의 분화가 이뤄지기 시작하자,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의 거두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로베스피에르는 인간과 시민의 권리 선언을 열렬히 지지했으며 이의 준수를 촉구했다. 로베스피에르는 보통 선거, 근위대 · 공무원 · 군 장교 계급의 자격 제한 철폐 및 청원권을 위해 싸웠으며, 왕의 거부권을 반대하고 행정권의 남용과 종교적 · 인종적 차별을 배격했다. 또한 사형제 폐지 법안을 제출했고 #, 연좌제를 금지하는 법안에 관여하였으며 배우, 유대인, 흑인 노예들을 옹호하고 과거 교황령이었던 아비뇽이 프랑스에 재통합되는 것을 지지했다.
이러한 로베스피에르의 활동은 상퀼로트들의 지지를 얻게 된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가 소속된 자코뱅은 의회 내에서 소수파였고, 그런 탓에 의회에서의 활동의 성과는 미미했던 편이었다.
상황이 반전된 것은 바렌 사건 이후였다. 바렌 사건은 국왕이 외국으로 도망쳐 외국 군대를 동원해서라도 파리 시민들을 토벌해야 하는 반란군으로 간주한다는 것으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상퀼로트들로 대표되는 파리 시민들이 살아남거나, 왕이 살아남는 둘 중 하나만이 남게 된 것이다. 이 시점에서 의회 내부의 왕당파와 지롱드파는 국왕을 옹호하는 쪽을 택했지만,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은 상퀼로트의 편에 선다.
이후 로베스피에르는 바렌 사건의 충격을 덮기 위해 지롱드파와 왕당파가 이 사건을 국왕 유괴 사건으로 조작하려 할 때 이를 정면으로 부정했고, 국왕을 재판에 회부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각 정파들의 기묘한 이해관계 합치로 최후의 수단으로서 제시된 유럽 각국에 대한 선전포고[9]에도 로베스피에르는 거의 유일하게 반대하는 의원이었다. 프랑스는 전쟁을 치러내기에는 너무 막장인 상황이었기 때문이었다.[10] 그러나 결국 선전포고와 함께 프랑스 혁명 전쟁이 시작되고, 당연히 프랑스는 연전연패한다. 게다가 프로이센군이 파리 인근으로 접근했고, 이를 지휘하는 브라운슈바이크 공작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가 파리 시민들에게 협박을 가하자, 격분한 상퀼로트들은 1792년 8월 10일 봉기를 일으키고, 그 결과 국민 공회가 들어선다.
2.3. 공화국을 구하다
"여러분은 어떤 정부가 승리했는지를 알고 있습니까? 국민공회의 정부입니다. 빨간 보닛을 쓰고 거친 모직 옷을 입고 나무신을 신은, 보잘 것 없는
빵과 질 나쁜
맥주를 먹으며, 너무 피곤해서 더이상 깨어서 논의할 수 없을 때는 그들 집회실의 마룻바닥에 깔려 있는 이불 위로 잠을 자러 갔던 열정적인 자코뱅의 정부입니다. 프랑스를 구했던 것은 그런 종류의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저도 그들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여기서 제가 들어가려고 하고 있는 황제의 거처를 자랑으로 여기듯 저는 이 사실을 자랑으로 여깁니다."
- 훗날 러시아 원정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도지사 장봉 생탕드레가 국민공회 시기는 더 망한 상황에서 이겼는데 왜 나폴레옹 황제는 그걸 못 하냐고 까는 연설.
1792년 8월 10일 봉기로 국민공회 정부가 들어섰고, 왕정을 폐지하고 프랑스 공화국이 수립된다. 그리고 더이상 파리 시민들의 격분에서 국왕을 보호하는 건 불가능했고, 공화국을 지키기 위해
상퀼로트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이런 가운데 지롱드파와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자코뱅파는 루이 16세 처리 문제를 둘러싸고 격한 대립을 보인다. 지롱드파가 루이 16세의 처형에 반대한 반면 자코뱅은 확고한 혁명의 완수와 공화국 체제의 완비를 위해서는 루이 16세를 처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자코뱅은 파리의 민심을 등에 업고 지롱드파를 몰아붙여 결국 의회에서 벌어진 투표 끝에 승리하게 된다.- 훗날 러시아 원정 이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도지사 장봉 생탕드레가 국민공회 시기는 더 망한 상황에서 이겼는데 왜 나폴레옹 황제는 그걸 못 하냐고 까는 연설.
국민공회 안에서는 지롱드파가 갈수록 몽테뉴파에 밀려 기세를 잃어갔다. 거기에 지롱드 계열의 뒤무리에 장군의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면서 지롱드파는 갈수록 궁지에 몰렸다. 결국 지롱드파는 국민공회 안에 "12인 위원회"를 설치하고 파리 코뮌에 대한 탄압을 가했다. 이와 동시에 마르세유, 보르도, 리옹 등지에서 군대를 동원해 파리를 제압하려 했다. 그러나 파리 코뮌에 대한 탄압으로 부당한 체포가 연이어 일어나자 분노한 파리 시민들은 1793년 5월 31일, 국민공회를 포위하고 12인 위원회의 폐지와 반혁명 용의자 체포 등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였다. 6월 2일, 국민군 사령관 앙리오가 칼을 빼들고 의회에 난입하여 시민들이 요구하는 지롱드파 의원들의 제명이 이뤄지지 않으면 한 발짝도 물러서지 않겠다고 위협했다. 결국 지롱드파 의원 29명이 제명되어 지롱드파는 사실상 무력화되고 만다. 이로써 국민공회는 자코뱅이 장악하게 된다.[11]
이렇게 되자 프랑스 안의 반(反) 혁명 세력들은 혁명 정부에 저항하는 반란을 곳곳에서 일으켰다. 대표적인 사례가 서부 방데 전쟁이다. 이는 지롱드파의 영향력이 컸으며 그들이 내전 준비를 하고 있던 리옹, 보르도 등지로 확산되었다. 또한 프랑스를 고립화시키기 위해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연합에 영국, 네덜란드, 스페인, 나폴리, 교황청 등이 가담하여 대(對) 프랑스 동맹이 결성되었다. 이윽고 프랑스 공화국은 최악의 상황에 처하게 된다. 1793년, 프랑스의 80개 지역 중에서 60개가 파리에 대해 반란을 일으키고 있었고, 프로이센군과 오스트리아군이 북쪽과 동쪽에서 프랑스로 침공하고 있었으며, 영국군이 남쪽과 서쪽에서 침입해 오고 있었다. 물론 프랑스 정부는 고립무원이었고, 당연히 파산 직전이었다. 프랑스군 총사령관은 두 번 연속으로 외세와 연계한 쿠데타를 시도하다가 도주하기까지 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이런 상황을 타개하고 혁명의 승리를 위해 창설된 공안위원회의 의원 중 한 명이 된다.
하지만 로베스피에르를 단순한 공안위원회의 의원 중의 한 명으로 평가할 수는 없다. 로베스피에르는 온건파 조르주 당통, 강경파 장폴 마라 등을 중재하며 자코뱅을 이끄는 지도자나 마찬가지였다. 또한 자코뱅이 국민공회 내에서 다수파는 아니었을지라도, 국민공회의 다수파는 이 시점에서 자코뱅이 공화국을 이끌어야 한다는 것에 동의하고 있었다. 공안위원회 역시 당통과 로베스피에르의 요청에 응해 창설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공회기의 상당기간 동안 로베스피에르는 사실상의 프랑스의 지도자였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선 지롱드파에 의해 지연되었던 급진화한 새 헌법이 포고되었다. 여기서 보통 선거, 저항권, 노동과 생계유지의 권리, 모든 사람의 행복이 정부의 목표이며 인민의 권리는 손에 넣을 수 있고 실시되어야 한다는 공식성명이 이뤄진다. 이는 근대국가에 의해 포고된 최초의 민주주의적 헌법으로 평가받고 있다. 또한 모든 잔존해 있던 봉건적 권리들을 무상으로 완전히 철폐하였고, 몰수된 망명귀족들의 토지를 소규모 구매자가 매입할 수 있는 가능성을 증진시켰다. 아이티의 흑인노예혁명을 인정하고 그들과 함께 영국과 맞서 싸우기 위해 프랑스 식민지에서 노예제를 폐지했다. 1792년 로베스피에르가 했던 연설 중 일부 내용을 보자.
여러분의 법령 중 하나에서 여러분이 노예라는 단어를 말하는 그 순간, 여러분은 스스로 명예를 훼손하게 될 것입니다. 국민과 식민지들의 최상의 이익은 여러분이 자유로운 상태로 남아 있는 것, 그리고 자유의 토대를 여러분 자신의 손으로 뒤엎지 않는 것입니다. 여러분의 행복, 여러분의 영광, 여러분의 자유를 대가로 치르며 분투한다 해도 식민지는 사라질 것입니다! 되풀이하여 말하지만, 식민자들이 우리를 위협하여 강제로 자신들의 이익에 가장 적합한 것을 법령화하게 한다 해도 식민지는 사라질 것입니다. 나는 의회의 이름으로 헌법의 전복유 원하지 않는 의원들의 이름으로, 자유록기를 원하는 국민 전체의 이름으로, 우리가 식민지 대표들을 위해 국민도, 식민지들도, 인류 전체도 희생시키지 않으리라는 것을 선언합니다.
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p.152 ~ 153
프랑스 혁명전쟁 수행을 위해 국민총동원을 표방한
징병제가 실행되었으며, 최고가격제를 도입해 경제적 통제를 실행했다. 완전히 붕괴해버리다시피 한
장교단을 충원하기 위해 하사관, 병사들에게 능력과 실적에 따른 승진 기회를 제공했으며, 혁명군의 사기를 유지하기 위해 공안위원회 파견의원들이 전선에서 군대를 독려했다.로베스피에르, 혁명의 탄생 p.152 ~ 153
이와 같은 노력의 결과로, 공화국은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794년 3월 경에는 이전의 3배에 달하는 군대를 1793년 3월의 절반에 불과한 비용으로 운영할 수 있었다. 프랑스 전역에서 공화국은 적군을 압도했으며, 혁명군은 벨기에를 점령하고 프랑스 혁명전쟁에서 나폴레옹 전쟁에 이르는 기간의 군사적인 우세를 시작해 나갔다. 이 모든 일을 해내기 위한 유일한 재원이었던 아시냐 화폐의 가치조차도 최하 3분의 1 선에서 지켜내기까지 했다.[12] 또한 이러한 성과를 바탕으로 파리 코뮌의 각 구들을 비폭력적으로 무장 해제하는 데 성공하여, 중앙집권과 안정적인 의회의 통치가 가능하게 된다.
2.3.1. 로베스피에르가 구했다?
정작 로베스피에르 집권 시기의 프랑스 혁명전쟁은 엄청난 참패가 계속됐다. 사실 이때 프랑스는 국민개병제를 통한 가공할 머릿수로 이를 버텨내고 있었던 것인데, 당시 프랑스 인구가 3천만이던 상황에서 1794년 기준으로 150만을 징집했고, 이중 80만 병력이 정규군 취급을 받았다. 이는 전근대 국가가 동원할 수 있는 병력 비율을 아득히 넘어버린 것이었다. 이 덕분에 보급이 징병을 따라가지 못해서 보급 상황도 악화되고 결국 군대로서는 최악인 현지 보급 명령까지 내려진다. 위에 언급된 3배의 병력을 같은 비용으로라는 문구가 내포하는 진실된 의미가 바로 이것이다. 이전만큼 보급을 안 해주니 돈이 들어갈 리가 없다. 이 때문에 당시 프랑스군은 무기도 부족하여 곤봉으로 무장하는 지경에 이르렀고, 안정된 중앙집권과 의회통치가 시작되었다는 파리와 달리 지방에서는 반란이 속출한다.[13] 아래 언급에는 혁명군의 성과로 벨기에 점령과 함께 언급되지만 규모에서 비교도 안 되는 플랑드르 전역에 시간이 이렇게 소모된 것은 지롱드를 축출한 1793년에 지롱드 파벌이 많았던 남프랑스에서 반란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왕당파도 아니고 지롱드 반란이라는 것은 완전한 정치적 실패이다.그리고 이 시기 연이어 벌어졌던 툴롱 공방전은 그 당시 프랑스군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다 보여주는 사건이었다. 툴롱의 왕당파는 외국군을 끌어들여서[14] 반란을 일으켰고, 이를 진압할 프랑스군 지휘관은 전직 화가에 변호사, 의사 출신의 무능력자들이었다. 이러다보니 그저 닥돌말고는 할 줄 아는 게 없기 때문에 프랑스군은 병력이 2, 3배가 되는데도 영국군과 왕당파에게 계속 피해를 입어야 했다. 여기에 나폴레옹이 내리꽂힌 다음에는 나폴레옹까지 포함된 지휘관들의 정치싸움이 시작된다. 결국 이 다툼은 정치에도 능했던 나폴레옹이 정치질로 이 무능력자들을 모조리 쫓아낸 뒤, 자신의 취향에 맞는 장군과 함께 사실상 자기가 단독지휘하면서 겨우 해결되었다. 어찌됐건 병력면에서는 우세하다 보니 프랑스군은 결국 툴롱을 함락했고, 툴롱의 왕당파들은 학살당했으며 생존자들은 영국군 함대에 타서 영국으로 도주했다.
실제로 이 시기 제대로 성과를 낸 것은 우습게도 사관학교 경력을 갖춘 낙하산 장교[15]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였고, 프랑스 혁명전쟁 시기 프랑스군의 업적은 대부분 로베스피에르가 죽고 국민공회가 붕괴된 다음부터 시작된다. 여기에는 전쟁을 치러왔던 하사관들이 경험을 쌓았다거나 하는 이유도 있지만, 로베스피에르 사후 성립된 부르주아 정부는 혁명보다 생존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기존 귀족집단 장교들에게 공화정에 충성을 맹세하고 귀족 특권을 포기하고 군에 복귀하면 대신 처벌을 면하겠다고 선언하고, 그 다음 혁명군을 기존의 정규군으로 재편한 결과였다. 그리고 장교들은 군대의 기강을 다시 잡고 훈련도를 높여 영국군을 밀어내는 데 성공할 수 있었다. 기존의 혁명군 시스템[16]이었던 민병대 국민위병은 로베스피에르 시기에는 수시로 예비대 형태로 전선으로 보내졌다. 아래 언급되는 로베스피에르가 전선에 보내서 문제가 생겼다는 혁명군이 바로 이 국민위병인데, 예비병을 계속 전선에 밀어넣다보니 기존에 로베스피에르가 장악하고 있던 국민위병 상당수도 전선으로 보내졌고, 이 공백을 메꾸기 위해 보충된 국민위병을 로베스피에르 반대파가 장악한 것이다. 로베스피에르가 가장 혁명성향이 강한 민병대를 이런 식으로 소모하다 보니 당연히 자기 지지층은 줄어들고 혁명의 피로도가 높아진 것이다. 그렇다고 혁명 성향이 약한 사람들을 보내기도 곤란한데, 정신무장이 안된 사람들을 무작정 전선으로 보내면 전투를 거부하고 탈영하거나 심지어 사령관을 죽이고 스스로 해산해버리는 상황이 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17] 후에 나폴레옹은 이런 폐단을 없애기 위해 시스템을 다 뜯어고쳐서 해당 부대를 철저한 예비대로 만들었다.[18]
다만, 전쟁에서의 성과와는 별개로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가 내부 정리에 도움을 준 것은 사실이다. 당장 국왕부터 혁명 정부를 반란 세력으로 보고 해외에다 러브콜을 날리던데다, 귀족이랍시고 있는 자들도 태반이 자신들의 특권을 되찾겠다고 외국과 내통하던 사람들이 천지에 널렸던 게 당시 프랑스의 상황이었다. 그리고 이들을 옹호한다는 지롱드파 중에는 실제로 이러한 왕당파들에게 뇌물을 받고 그들을 옹호해주던 자들이 있던 것도 엄연한 사실이다. 거기다 당시 프랑스는 거의 모든 유럽 국가들에게 공격을 받고 있었으니, 이런 반대파를 일일이 어르고 달래고 설득할 시간 같은 건 없었다. 때문에 프랑스의 국론을 통일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중앙 정부 내의 의견만이라고 확고하게 단일화할 필요가 있었고, 당시 상황에서 이를 이룰 가장 현실적이고 빠른 방법은 공포정치를 통한 강압 말고는 없었다. 물론 결과적으로는 이 잔학한 짓의 대상이 자신들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을 민중과 자코뱅파가 깨달으면서 새로운 불만분자를 만들게 되었지만, 적어도 반 혁명이라는 기조 아래 왕정 시절의 잔재를 뿌리 뽑고 외세와 결탁하던 배신자들을 처분했다는 점에서는 확실한 효과를 발휘하였다. 이를 뒤집고 다시 왕정을 주장하려면 나중에 등장하는 나폴레옹처럼 국민 영웅이 되어서 프랑스를 구한 걸로도 모자라 유럽 최강국의 지위에다 올려놓을 정도의 업적은 세워야만 했다.
2.4. 공포정치
"여러분이 세우는 정책의 첫 번째 원칙은 민중은 이성으로, 민중의 적들은 공포로 이끈다는 것이어야 합니다. 공화국 내외의 적들을 제거하거나, 아니면 공화국과 함께 죽어야 합니다. 혁명 정부는
전제정에 항거하는 자유의 독재입니다. 언제까지 독재자들의 분노는 정의로, 민중의 정의는 야만이나 반란으로 불려야 한다는 말입니까?"
"나는 압제당하는 사람들을 동정하기 때문에, 압제자들에 대해 완고합니다. 나는 민중을 학살하면서 전제군주를 용서하는 인류애를 알지 못합니다. 제헌의회에서 나로 하여금 헛되이 사형제의 폐지를 요구하게 만들었던 그 감정은 오늘 그것을 내 조국의 압제자와 그가 구현하는 왕정 자체에 적용할 것을 요구하게 하는 감정과 같은 것입니다."
루이 16세에 대한 사형을 주장하는 연설 中.
로베스피에르의 집권 기간은 공포 정치의 기간이기도 하다. 반혁명 분자, 반역자라 의심되는 사람들을 잡아들이기 시작했고, 1793년부터 1년 동안 약 30만 명의 사람들이 체포되었고 그중 1만 7천 명이 사형을 당했다. 특히 가톨릭, 반혁명 지지
방데 전쟁에 대한 학살 진압은 근대적인 학살의 효시로 기록될 정도로 잔인하고 철저했으며, 이 기간 동안 갓난아이, 임산부까지 포함해 최소한 30만 명 이상이 학살당한 것으로 파악된다.루이 16세에 대한 사형을 주장하는 연설 中.
이러한 숙청은 자코뱅파 내부에게까지 미쳤다. 로베스피에르는 급진 혁명주의자 자크 르네 에베르와 그 지지자들을 고발했으며 이들은 1794년 3월 처형당했다. 조르주 당통은 공포 정치와 전쟁의 중단을 요구하며 공안 위원회의 정책을 점점 더 격렬하게 비난했다. 당통파 지도자들과 의원들은 프랑스 동인도 회사를 청산할 때의 부패 혐의로 1794년 4월 단두대의 제물이 되었다.
여기서 공안 위원회와 국민 공회, 로베스피에르를 분리하는 것은 무리한 일이다. 자코뱅은 사실상 국민 공회를 주도해가고 있었고, 로베스피에르는 자코뱅의 확고한 지도자였다. 당시 프랑스의 모든 정치범 숙청은 특별 법원에서 행하였고, 로베스피에르는 단 한 번도 이 특별 법원의 검사 혹은 재판장을 맡은 적이 없다고는 하나[19] 혁명 재판소 역시 1793년 10월에서 이듬해 4월까지 로베스피에르파 에르망 등에 의해 장악되어 있었다. 또한 프레리알법[20]의 입법과 시행에도 로베스피에르는 큰 영향을 끼친다. 다만 공안 위원회와 국민 공회, 혁명 재판소의 책임 소재를 분명히 하는 것은 공포 정치가 '로베스피에르 개인의 선동과 민중들의 학살'이라는 편견과 달리 당시의 법과 제도에 따른 국가 권력의 집행이었다는 것이며, 로베스피에르와 무관하다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선동적 학살이 아니라 제도적 국가권력의 집행이라고 한다면 수정주의적 혁명사가들이 프랑스 혁명과 전체주의 사이의 친연성을 지적하며 제기한 공포정치가 대숙청 같은 국가권력의 대량살해와 뭐가 다르냐는 질문에도 대답해야 할 것이다.
수정주의적인 시각에서 주목받는 방데 반란에 대한 진압 역시 일방적인 폭력이 일어난 것은 결코 아니고 양쪽 모두 폭력을 휘둘렀으나 왕당파의 학살보다 로베스피에르의 집정부 쪽 학살이 압도적으로 스케일이 크고 잔혹했다. 그리고 혁명정부가 방데 지방에 혁명 정부를 따를 것을 강요하고 권리를 제한해서 주민들이 혁명 정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었음을 고려해야 하고 공화파가 먼저 당했다는 학살도 실상은 150에서 160명 정도로 추정되며 오히려 공화국 군대가 먼저 방데 농민들을 처형했음을 알아야 한다.[21]
하지만 그전에, 방데 학살은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한 일이 아니었다는 점을 유의해야 한다. 로베스피에르는 방데 학살을 듣고 놀라서 주도한 의원들을 책망했다.
로베스피에르에 의한 억울한 희생양 정도로 미화하는 당통 역시 부정부패의 죄목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반동이란 죄목으로 사람들이 처형되는 와중에 당통의 죄목은 부패였다. 애초에 당통, 로베스피에르, 마라의 자코뱅 3두정 시기에도 당통의 도덕성은 자코뱅의 아킬레스건이었다. 테르미도르 이후 당통파는 당통의 부패 혐의에 대해서 변명하는 것을 포기하다시피 했다. 차라리 로베스피에르가 필요할 때는 당통의 혐의를 책하지 않았냐는 것을 묻는 게 더 나을 지경. 또한 로베스피에르가 과격해져서 당통마저 숙청되었다고 알려져 있지만, 진상은 당통이 갑자기 원래의 입장을 뒤집은 쪽에 가깝다. 일단 공안 위원회를 설치하고 그 전반기를 주도한 게 당통이다. 에베르의 경우에도 실제로 쿠데타 기도까지 간 상황에서 체포되어 처형된 것이며, 에베르는 에베르 이전에 과격파를 이끌던 자크 루 등의 격앙파 지도자들을 숙청한 인물이기도 하다.
또한 로베스피에르는 생쥐스트식 무분별한 처형에 반대했으며[22], 지롱드 당원과 국왕의 누이를 체포하는 데 대해 항의했던 의원들을 보호했다. 또한 로베스피에르는 순찰 의원이 저지르는 학살 행위에 염증을 느끼고 혁명을 모독하는 그들의 소환을 요구했다. 위에 언급된 방데 내전과 주민 학살의 경우도 이 문제와 관련된 격론에 그가 참가를 하지 않았고 파견된 군대가 그의 지시에 완벽하게 통제되지 않은 면도 있어서 학살 사건이 단순히 그의 책임이라고 말하기엔 애매하다. 오히려 엄밀히 말하면 로베스피에르의 무자비한 학살자적 이미지는 파리 코뮌과 생쥐스트에게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로베스피에르가 처형을 남발했고 자코뱅을 제외한 프랑스 시민들의 반감이 이로 인해 강해진 것은 부인할 수 없다.
2.5. 테르미도르 반동
음모에 가담한 자들은 만일 자신들이 성공한다면 극단적인 관용에 의해 현재의 상황과 대조를 이룰 것이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잠시 혁명의 고삐를 늦춰보십시오. 바로 그때 여러분은
군사독재가 혁명을 탈취하고
당파들의 지도자가 국민의 타락한 대표체를 전복시키는 것을 보게 될 것입니다.
- 로베스피에르, 테르미도르 반동 전날 연설[23]
- 로베스피에르, 테르미도르 반동 전날 연설[23]
민주주의는 두 가지 과도함으로 망합니다. 통치하는 자들의
귀족주의로 망하거나, 인민이 스스로 확립한 권위를 경멸함으로써 망합니다.
그러나 로베스피에르의 모든 성공은 역설적으로 그를 몰락으로 이끌고 있었다. 로베스피에르가 이끄는 공안위원회는 전쟁에서 엄청난 성공을 거뒀으며, 이는 더이상 비상조치의 필요성이 없어짐을 의미했다. 국민총동원에 의해 열성적인 상퀼로트들이 혁명군에 입대했고, 이는 파리 시민들 중 자코뱅에 대한 가장 열렬한 지지자들이 사라졌다는 의미였다. 혁명군은 공세를 취해 남프랑스의 반란을 평정하고 벨기에를 정복하며 라인강 일대로 진격했다. 달리 말하자면 혁명군이 국내에 없어진 것이니 유사시에 자코뱅이 혁명군에 기댈 여지조차 없음을 의미했다. 로베스피에르의 정치적 성공에 의해 파리 코뮌은 약화되었으며 코뮌과 의회의 충돌은 거의 사라졌으나, 이 역시 자코뱅의 최고의 기반이었던 파리 코뮌이 약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했다.이와 같은 역설적 상황에서 로베스피에르가 2차 국민공회 의장 재임기에 1794년 6월 8일 최고 존재의 제전 (La fête de l'Être suprême)을 시도했다. 종래의 가톨릭 대신 이성을 섬기자는 종교를 만든 것이다. 단, 이 시도는 로베스피에르가 이런 불안한 상황에 몰려서 혹은 몰렸는데도 했던 광인의 소행은 아니고 역설적으로 로베스피에르의 권위가 견고해지면서 시작한, 견제할 사람들이 다 사라져서 시작한 것이다. 또한 이것은 로베스피에르가 했기 때문에 비호받는 것이 아니라 나름대로 서양에서는 유서 깊은 사상에 바탕을 둔 것은 맞다. 단, 로베스피에르가 좋아하고 깊은 영향을 받은 그리스 로마 시대도 일반인들은 최고 존재니 이성이니 신적 존재니 하는 건 신경도 안 쓰고 자기 믿을 신 알아서 믿다가 예수 믿기 시작한 것처럼 이런 사상은 절대 대중적이지 않다. 검소하게 살았다는 점에서 로베스피에르랑 비슷한 로마의 정치가 소 카토도 죽을 때, 플라톤의《 파이돈》을 읽으면서 자살했는데,《파이돈》내용이 딱 최고 존재이자 신적 존재인 이성 같은 내용이다. 둘 다 비슷한 기행을 벌인 것인데, 즉 말하자면 로베스피에르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이 신앙을 믿으면 더 좋은 세상이 된다!"는 생각으로 실행한 것이지만 셋방에서 출퇴근한 프랑스 국가수반이 로베스피에르 단 한 명뿐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상식적으로 될 리가 없는 것이다.[24] 사이비 종교인 것도 맞고.[25]
또한 공포정치에 대한 사람들의 피로가 누적되었고, 무엇보다 로베스피에르가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은 시점에 '순찰의원'들을 소환해서 지방에서 저지른 학살 등에 대해 규명하고 처벌할 뜻을 밝혔던 것이 치명적이었다.
1794년 7월 26일, 국민공회에서 로베스피에르는 누구의 이름도 거론하지 않은 채 지금 이 공회안에 반(反) 혁명파가 존재한다는 내용의 연설을 시작했다. 로베스피에르는 장장 2시간이나 연설에서 비난을 퍼부었다. 결과적으로 이 연설은 로베스피에르 인생 최악의 악수가 되었다. 누구인지 특정하지 않고 이 자리에 반(反) 혁명파가 존재한다고 선언하면서 공회에 참석자들 사이에서는 이전처럼 나만 아니면 돼로 넘기지 못하고 오늘은 진짜로 자기가 죽을지도 모르겠다는 공포와 불안감이 확산되었다. 의원들이 심리적으로 압박을 받아 절박해지고 궁지에 몰려 초조해진 분위기 속에서 결국 탈리앵과 바렌이 단상에 뛰어올랐다.
저는 어제도 그저께도 이런 고발을 들어야 했습니다. 오늘도 어김없이 의원들에 대한 중상모략을 하고 있습니다. 이 자들은 지칠 줄도 모르고 동료들을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나라에 재앙을 가져오고 있습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늪 속으로 떨어트리고 있습니다! 여기서 감히 제안하겠습니다. 이 사악한 음모의 장을 이제 그만 걷어치워 버립시다!
장랑베르 탈리앵 (Jean-Lambert Tallien)
탈리앵의 외침에 이어 자코뱅을 제외한 의원들 대다수가 "반혁명파가 누구냐? 이름을 밝혀라!", "독재타도!"라고 외치며 공개적으로 반발하며 공회가 아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공회를 빠져나온 로베스피에르는 파리 코뮌에 도움을 요청했으나 의견불일치로 결정을 머뭇거리는 사이, 조제프 푸셰가 이끄는 '순찰의원'들이 중심이 되어 반 로베스피에르 세력을 결성했으며 지롱드파 의원들이 여기 결탁했다. 여기에 더해 다수파였던 국민공회의 비자코뱅 의원들이 이에 연합했으며, 공안위원회 소속의 상당수 의원까지 이에 가담하기에 이른다. 1794년 7월 27일, 국민공회는 그를 고발하였고, 그를 비롯한 일파들의 체포안도 통과되어
프랑스 헌병대가 출동해 이들을 체포했다. 로베스피에르는 헌병들에게 끌려가며 "공화국은 망했다. 악당들이 이겼다"라고 소리질렀다.[26]장랑베르 탈리앵 (Jean-Lambert Tallien)
그가 체포된 후 파리 코뮌에 의한 로베스피에르 구출작전이 일어나 파리 시청을 한때 점거하기까지 했지만, 통일된 지도부가 없어 테르미도르파가 지휘하는 국민위병들에 의해 쉽게 분쇄되었다.
7월 28일 오전, 법정에서 선 로베스피에르와 그 동료들은 자신들이 정적들에게 했던 방식 그대로 되돌려 받았다. 사실 관계 조사와 변론의 기회는 없었다. 그들을 기소한 검사나 사형판결을 내린 판사 모두 이제까지 해왔던 절차를 이번엔 그대로 로베스피에르 일파에게 적용했고 만장일치로 사형이 선고되었다.[27]
그는 체포되는 과정에서 권총탄에 턱뼈가 날아가 말을 제대로 못 하게 되는 바람에, 유언을 남기지 못했다. 교도관들이 보기 흉한 그의 턱뼈를 붕대로 대충 고정시켜놓은 채 로베스피에르는 다음날 단두대 앞에 서게 된다. 수많은 사람들은 당대의 연설가가 죽기 전에 무슨 말을 할까 기대했지만, 거칠게 떼어진 붕대 때문에 턱뼈가 달랑달랑거리는 와중에 그가 마지막으로 한 말은 처절한 비명뿐이었다. 어째서 그런 꼴로 잡혀왔는가에 대해서는 크게 두 가지 설이 있다.
첫 번째는 고발 이후 잡히기 직전 그는 자살하기 위해 턱에 총구를 대고 총을 발사하는데, 불행히도 죽지 않고 턱뼈만 날아갔다는 설이다. 권총으로 자살할 때 턱 밑을 대고 쏘면 무의식적으로 고개가 뒤로 젖혀지기 때문에 대부분 저렇게 턱이나 코까지 날아가고 죽지 않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다른 한 가지는 당시 로베스피에르를 체포하기 위해 출동한 헌병들 중 하나인 샤를앙드레 메르다(Charles-Andre Merda)라는 헌병 사병이 지근거리에서 그의 입에다 발포했다는 것이다. 이 가설을 토대로 한 기록화도 있다. 메르다는 이 사건 이후 출세해 나폴레옹 1세 치하에서 육군 기병 대령까지 올랐다가, 보로디노 전투에 연대장으로 참전해 전사, 육군 준장으로 사후 추서됐다. 이 시기를 배경으로 한 프랑스 영화 중 하나는 두 가지를 절충, 자결하려고 입에 총을 넣었는데 헌병이 이를 막으려고 밀치면서 오발로 턱이 날아가는 것으로 나왔다.
물론 어찌되었든 로베스피에르는 턱이 망가진 것만으로도 이미 자기가 죽여 없앤 루이 16세, 마리 앙투아네트 부부보다 훨씬 비참하게 죽는 신세가 되었다. 굳이 사형을 집행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미 턱뼈가 날아갔기 때문에 음식을 먹을 수 없는 몸이 되어버리고 말았고, 이렇게 된 상태라면 다른 사람이 유동식을 계속 목구멍으로 넣어주지 않으면 굶어죽게 된다.
로베스피에르가 너무 유명해져서 그렇지만 현장에 있던 여러 자코뱅파 지도자들이 목숨을 끊으려고 시도했는데, 로베스피에르의 동생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와 앙리오는 창밖으로 투신했고,[28] 르 바는 권총으로 머리를 쏘았다. 하지만 죽은 것은 르 바뿐이었고, 오귀스탱과 앙리오는 군중들에게 몇 시간이나 조리돌림과 구타를 당하면서 죽기 직전까지 갔으나 기요틴에서 죽여야 한다는 외침에 목숨만 건져서 감금되었다. 하반신이 마비된 쿠통은 인파에 떠밀려 계단 아래로 곤두박질쳤고, 생쥐스트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있어서 그나마 얌전하게 체포되었다.
어쨌든 테르미도르 10일 오후 5시, 유죄선고를 받은 사람들 중 로베스피에르, 동생인 오귀스탱과 동료 쿠통, 생쥐스트 등의 최초의 22인이 환호하는 군중들 앞에서 혁명광장의 단두대에 올랐다.[29] 2살 어린 여동생인 샤를로트 로베스피에르는 감옥에 갇혀있다 풀려나 목숨을 건졌으며, 후일 오빠인 막시밀리앙과의 친분관계가 돈독했던 당시 제1집정인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의 도움을 받아 그럭저럭 여유롭게 글도 쓰며 천수를 누리다 갔다.
1989년작 프랑스 영화 프랑스 대혁명에서 그려진 로베스피에르의 처형 장면.
오후 4시 정각, 사악한 행렬이 정의의 궁전 마당에 나타났다. 지금까지 파리에 그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인 적은 없었다. 대부분의 구경꾼들은 로베스피에르가 타고 있는 수레에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었다. 그 불행한 사람은 온몸이 피투성이였다. 로베스피에르는 계속 눈을 감고 있었으며, 처형대로 옮겨질 때야 다시 눈을 떴다. 이 비참한 사내의 머리는 이제 끔찍하고 징그러운 물건에 지나지 않았다. 마침내 그 머리가 몸에서 떨어졌을 때, 사형 집행인은 그 머리채를 잡고 들어올려 사람들에게 보여주었다. 뭐라 말로 표현할 수 없이 끔찍한 장면이었다.
로배스피에르의 처형을 지켜본 한 시민의 증언.
로배스피에르의 처형을 지켜본 한 시민의 증언.
22인의 머리는 나무상자에 담겨 공동묘지에 던져졌고, 그 위에는 생석회가 뿌려졌다. 그 뒤를 이어 108명의 로베스피에르 추종자들 또한 처형되었고 프랑스 전역에 걸쳐 자코뱅파의 세력이 정리되었다. 반혁명분자 척결을 빌미로 프랑스를 피바다로 만들었던 과거를 그대로 돌려받은 것이다.
테르미도르 반동을 기점으로 프랑스 대혁명은 끝났다. 즉 막시밀리앙의 사망과 동시에 프랑스 대혁명이 끝났다고 보는 견해가 많다. 하지만 나폴레옹 집권 이전까지를 혁명의 단계로 보는 경우도 많은 편이다. 물론 혁명의 방향성이 바뀌면서 사실상 끝났다고 봐도 무방하긴 하다. 실제로 나폴레옹 이전까지 집권한 총재정부가 왕당파와 자코뱅파의 중간에 속했다고 평가되기 때문이다. 다만 나폴레옹 전쟁을 대혁명의 연장선상으로 보는 경우 나폴레옹 전쟁의 종말을 프랑스 대혁명의 끝으로 보기도 한다. 물론 공식적인 혁명의 종결시기는 나폴레옹의 쿠데타로 보고 있다.
3. 평가
공안위원회는 강력했고 방탕했으며 아마 부패했지만 무한한 재능을 가진 보기보다 온건했던 혁명가
당통을 잃고 로베스피에르를 얻었는데, 그는 가장 영향력 있는 위원이 되었다. 미덕을 개인적으로 독점했다는, 다소 과도한 의식을 지닌 멋쟁이이며, 냉혈하고 광신적인 이 변호사에 대해 냉정했던 역사가는 거의 없다. 왜냐하면 오늘날까지도 로베스피에르는 어떤 인간도 중립일 수 없는 무시무시하고 영광스러운
혁명력 2년의 체현자이기 때문이다. 물론 그는 호감을 주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가 옳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조차도 오늘날 스파르타식 낙원의 건축가인 젊은
생쥐스트의 빛나는 수학적 엄격함을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로베스피에르는 위대한 사람은 아니었으며, 종종 편협했다. 그러나 그는 혁명을 부상시킨 인물 중에서 그 주위에 숭배가 생겨났던 유일한 인물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보듯이 로베스피에르에게 있어 자코뱅 공화국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창출된 하나의 장치가 아니라 하나의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의와 미덕의 무섭고도 영광스러운 통치이며, 이러한 통치 아래 국민이라고 하는 관점에서는 선량한 시민들이 모두 평등하였고, 인민들은 반역자들을 죽였다. 장자크 루소와 정의에 대한 투명한 신념은 로베스피에르에게 힘을 주었다. 그는 단지 국민공회에 속한 소위원회에 불과했던 공안위원회의 한 위원이었을 뿐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독재 권력이나 심지어 관직조차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의 권력은 인민의 권력이었으며, 그의 공포정치는 그들의 공포정치였다. 인민들이 로베스피에르를 버렸을 때 그는 몰락했다.
에릭 홉스봄, 1998, 『혁명의 시대』, 한길사, p.17
로베스피에르는 위대한 사람은 아니었으며, 종종 편협했다. 그러나 그는 혁명을 부상시킨 인물 중에서 그 주위에 숭배가 생겨났던 유일한 인물이다. 이는 역사적으로 보듯이 로베스피에르에게 있어 자코뱅 공화국은 전쟁에서 이기기 위해 창출된 하나의 장치가 아니라 하나의 이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정의와 미덕의 무섭고도 영광스러운 통치이며, 이러한 통치 아래 국민이라고 하는 관점에서는 선량한 시민들이 모두 평등하였고, 인민들은 반역자들을 죽였다. 장자크 루소와 정의에 대한 투명한 신념은 로베스피에르에게 힘을 주었다. 그는 단지 국민공회에 속한 소위원회에 불과했던 공안위원회의 한 위원이었을 뿐이기 때문에 공식적인 독재 권력이나 심지어 관직조차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의 권력은 인민의 권력이었으며, 그의 공포정치는 그들의 공포정치였다. 인민들이 로베스피에르를 버렸을 때 그는 몰락했다.
에릭 홉스봄, 1998, 『혁명의 시대』, 한길사, p.17
프랑스 혁명기에서도 가장 격동의 시대의 중심에 있었기에, 그에 대한 평가는 꽤나 양분된다. 그러한 양 갈래의 평가는 그가 정치를 할 때부터 예견된 것이었다.[30] 그에 대해서, " 공포정치를 주도하며 피에 굶주린 독재자였다."는 비판과 분명한 이상을 가지고 행동한 진정한 혁명가라는 주장이 엇갈렸다. 프랑스 혁명 이후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박한 편이었으나 프랑스 제3공화국 시기부터 마르크스주의 사학자들을 중심으로 그에 대한 재평가가 시도됐다.
3.1. 긍정적 평가
나는 이제, 예전에 혁명정부와 로베스피에르 그리고
생쥐스트를 비관적으로 보았던 것을 후회한다는 사실을 솔직히 고백한다. 나는 그들이 그들만으로도 모든 혁명가들을 다 합친 것보다 낫고, 그들의 독재정부가 진실로 훌륭하게 고안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그들과 혁명정부가 사라진 이후에 일어난 모든일이 나의 이러한 주장을 충분히 정당화해줄 것이다.
나는 그들이 무거운 범죄를 저질렀으며 수많은 공화주의자들을 죽였다는 데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이 결백하다 해도 나는 로베스피에르에게 죄가 없다고 믿는다. 명예를 탐하고 자만심으로 꽉 찬 자들,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우리의 로베스피에르가 보기에 수레의 방향을 놓고 그와 다투려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때 그는 틀림없이 이 모든 우스꽝스러운 경쟁자들은 아무리 선한 의도를 지녔다 해도 모든 것을 방해하고 망쳐놓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성가신 요정(妖精)들을 그들의 선한 의도와 함께 질식시켜버리자." 그래도 나의 견해는 그가 잘했다는 것이다.
쇄신을 도모하는 자는 넓게 보아야 한다. 그는 자신을 속박하고, 가는 길을 막고, 그가 정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베어버려야 한다. 그것은 어리석거나 오만하거나 명예를 탐하는 사기꾼들에게 모두 마찬가지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들이 거기 있단 말인가? 로베스피에르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부분적으로 그 점이 내가 그를 찬양하는 이유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나는 그를 진정한 재생의 이념을 지닌 천재로 보는 것이다."
프랑수아노엘 바뵈프
나는 그들이 무거운 범죄를 저질렀으며 수많은 공화주의자들을 죽였다는 데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결코 그렇지 않다. 그들이 결백하다 해도 나는 로베스피에르에게 죄가 없다고 믿는다. 명예를 탐하고 자만심으로 꽉 찬 자들, 수준이 낮은 사람들은 우리의 로베스피에르가 보기에 수레의 방향을 놓고 그와 다투려는 사람들이었을 것이다. 그때 그는 틀림없이 이 모든 우스꽝스러운 경쟁자들은 아무리 선한 의도를 지녔다 해도 모든 것을 방해하고 망쳐놓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가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성가신 요정(妖精)들을 그들의 선한 의도와 함께 질식시켜버리자." 그래도 나의 견해는 그가 잘했다는 것이다.
쇄신을 도모하는 자는 넓게 보아야 한다. 그는 자신을 속박하고, 가는 길을 막고, 그가 정한 목적지에 도착하는 것을 방해하는 모든 것을 베어버려야 한다. 그것은 어리석거나 오만하거나 명예를 탐하는 사기꾼들에게 모두 마찬가지며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왜 그들이 거기 있단 말인가? 로베스피에르는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고, 부분적으로 그 점이 내가 그를 찬양하는 이유이다. 바로 그러한 이유로 나는 그를 진정한 재생의 이념을 지닌 천재로 보는 것이다."
프랑수아노엘 바뵈프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그가 죽고 나서는 그에 대한 향수가 일기도 하였다. 특히 급진적인 성향을 보이던 자코뱅이나 좌파 세력에서 그런 태도를 취했다. 특히 네오 자코뱅으로 유명한 바뵈프는 로베스피에르의 집권 당시에는 그의 정치를 신랄하게 비판했지만,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 출범한 총재 정부에 실망하여 그를 재평가하였다. # 이외에도 총재정부의 친(親) 부르주아적 정책에 반발한 상퀼로트들은 "빵과 93년 헌법을!"이라 외치며 봉기를 일으켰다가 진압당하기도 했다. 심지어 테르미도르 반동에 참여한 사람 중에서도 재평가가 있을 정도였다![31] 하지만 부르주아 공화정의 수립과 나폴레옹의 쿠데타, 그리고 이어진 프랑스 제1제국과 왕정복고는 그에 대한 옹호론에 재를 뿌렸다. 이후 2월 혁명, 7월 혁명, 파리 코뮌 등의 혁명적 사회 운동이 일어나면서 예전보다는 나아졌지만 여전히 그에 대한 평가는 박한 편이었다.
하지만 진보적이고 좌파 성향의 학자들을 중심으로 그를 재평가하려는 움직임은 계속 이어져왔다. 1889년 처음 개설된 이후 상당기간 프랑스 혁명사 해석의 주류를 상징하게 된 소르본 대학 프랑스 혁명사 강의의 첫 주임 교수였던 알퐁스 올라르 (Alphonse Aulard)는 자코뱅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역사 해석의 기틀을 닦았다. 뒤를 이어 두 번째로 강의를 맡게 된 20세기 초의 마르크스주의 사학자 알베르 마티에즈 (Albert Mathiez)는 온건공화파를 강조하는 기존 학계를 비판했는데, 특히 전임자 올라르가 혁명적 정통성의 담지자로 평가한 당통을 깎아내리고 로베스피에르를 대안으로 강조하였다. 그는 많은 사료를 검증하여 부패할 수 없는 자라는 별명의 로베스피에르를 복원하였으며, 그의 도덕적 권위와 혁명적 순수함을 입증하였다. 또 로베스피에르 학회를 만들어서 로베스피에르와 프랑스 혁명사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도록 도왔다.[32]
그의 뒤를 이은 조르주 르페브르 (Georges Lefebvre)는 마티에즈의 연구 성과를 그 동안의 주류 역사학으로 끌어들이는데 큰 역할을 하였다. 그리고 전기작가 장 마생 (Jean Massin)은 그를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전기를 작성하기에 이르렀다. 이처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영향을 받은 학자들은 그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주저하지 않는다.[33]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들은 자코뱅에 매우 긍정적인 입장을 취하기 때문에 이들의 프랑스 혁명사 인식을 자코뱅-마르크스주의적 해석이라고 부르며, 19세기 말부터 1970년대까지 혁명사 학계의 주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정통주의"라고 불리기도 한다. # 이전에는 로베스피에르가 계속 주류 역사학에서 비판받는 입장인 것처럼 서술한 부분이 있었지만 적어도 20세기 초부터 1970년대까지 정통주의로 대표되는 혁명사학계 다수파는 로베스피에르에 상당히 우호적이었다.
그는 위대한 웅변가도 아니었고 뛰어난 조직가도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사태를 명석하게 분석하고 그것을 의지를 통해 입증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녔다. 그는 혁명 초기부터 이미
민주주의자로서 평판을 지녔고 죽을 때까지 그 자세를 유지했다. 그가 민주주의자였음은 곧 혁명 프랑스가 대내외적인 반혁명의 위협 앞에서 굳건하게 살아남으려면 민중의 광범위한 지지가 불가피하다는 것을, 곧 스스로 혁명적 부르주아로서 민중 세력과의 연대를 적극 보듬어야 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감지하고 있었음을 말한다. 그는 그것을 단순히 전술이나 전략의 차원이 아니라 신념으로서 추구하였다. 민중에 대한 그의 사랑은 뜨거운 가슴이 아니라 냉철한 머리에서 비롯한 것이었다.
그는 혁명정부의 이데올로그이자 혁명 프랑스의 조타수로서 우파의 부동주의, 좌파의 모험주의 양자를 모두 배격하였다. 그는 민중세력의 동참과 민중 운동의 활력이 혁명을 지켜내는 데 무엇보다도 필요함을 인식하여 그들의 요구사항을 수용하고 지롱드파의 숙청을 받아들였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최갑수.[34]
그는 혁명정부의 이데올로그이자 혁명 프랑스의 조타수로서 우파의 부동주의, 좌파의 모험주의 양자를 모두 배격하였다. 그는 민중세력의 동참과 민중 운동의 활력이 혁명을 지켜내는 데 무엇보다도 필요함을 인식하여 그들의 요구사항을 수용하고 지롱드파의 숙청을 받아들였다.
서울대 서양사학과 교수 최갑수.[34]
이러한 학자들의 노력으로 로베스피에르는 기존의 피에 굶주린 독재자라는 이미지를 어느 정도 벗을 수 있게 되었다. 그가 혁명, 자유, 평등, 민주주의, 민중 등의 가치에 대해 순수하고도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과 부르주아를 넘어서서 상퀼로트들에 대한 정책을 시행하였다는 것, 프랑스 대혁명기의 인물 중 도덕적 권위를 가졌다는 것, 사생활이 아주 깨끗했다는 것 등이 20세기 중반부터 다시 주목받고 있다.
이는 결국 그를 단두대로 보낸 그의 반대파들이 총재정부를 수립해서 사실상의 독재 체제를 만들었다는 점, 나폴레옹 즉위 이후에는 이에 편승해 그대로 신흥 귀족이 되었다는 점, 심지어 일부는 왕정복고 이후에는 부르봉 왕가에 굴종했다는 점 때문이기도 하다. 즉, 그의 반대파들이 모두 혁명의 배신자들이 되어버려서였다.
3.2. 부정적 평가
왕당파는 물론이고, 온건한 혁명을 지향하는 공화주의자들이나 지롱드파에게는 상당히 위험스럽고 증오스러운 인물이었다. 테르미도르 반동으로 그가 몰락한 후 그는 공포정치의 대명사로 여겨지며 냉혈동물, 피에 굶주린 독재자 등 온갖 악명을 획득하였다.
당장 처형을 할 거면 루이 16세와 그 아내 마리 앙투아네트, 그리고 그 일족 선에서 끝냈어야 했다. 하지만 귀족 칭호를 가진 이들을 전부 몰살시키려 했으며 이로 인한 대학살로 인해 민심을 너무 크게 잃었고[35] 심지어는 자신과 의견이 다른 동료 정치가들까지 처벌하는 등 점차 극단화되다가 그는 끝내 몰락했다.
이런 영향으로 19세기 역사학계에서는 로베스피에르를 아주 많이 비난했다. 19세기 프랑스의 역사학자 쥘 미슐레 (Jules Michelet)는 자신의 저서《 폭군》에서 로베스피에르를 잘못된 종교 정책과 폭군적 야망을 지닌, 시대에 역행한 인물로 규정했다. 실증주의 성향의 자유주의자 이폴리테 텐느 (Hippolyte Taine)는 고전적 정신의 조생아, 낙제생, 혁명적 현상을 타락한 소수의 자코뱅의 기도라며 그를 비난했다.
이외에도 로베스피에르에게 부정적 태도를 취하는 서술이 적어도 20세기 이전까지 대부분의 프랑스 혁명 관련 서적을 차지했다. 그에 대한 비판 중 가장 큰 것은 공포정치에 대한 것이다. 공포정치를 통해서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목숨을 잃었고, 혁명을 변질시켰다는 것이다.[36]
로베스피에르는 미덕과 선, 정의에 관해 끝도 없이 긴 연설을 늘어놓았고, 프랑스를 미덕의 본보기가 되는 진정한 공화국으로 만들고자 했다. 로베스피에르의 미덕 (les vertus)의 공화국은 인간 생활의 모든 영역을 감시하는 현대의 전체주의적 독재 체제와 많은 유사성을 지니고 있다는 비판을 받는다.
자유를 위해 혁명을 일으킨 사람이 정작 집권후에는 통제적 경제정책으로 자유를 말살하는 모순을 저질렀다는 비판도 있다. 이러한 이유로 한나 아렌트는 로베스피에르가 자유를 위해 자유를 없앴다며, 이것이 나중에 이오시프 스탈린의 대숙청과 굴라크로 이어졌다고 지적했다. 그의 사상과 행동이 가진 전체주의적 속성을 꼬집은 것.
로베스피에르와 자코뱅이 우유, 버터, 고기, 포도주 등 30여 개의 식품과 생필품에 가격상한제를 실시한 것과 그에 따른 부작용이 발생한 적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후술할 생필품 가격상한제 실시와 그 영향 항목 참조.[37]
한편, 좌파 내에서도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비판이 나온다. 먼저 로베스피에르보다 더 급진적인 성향의 사람들은 왜 더 과격하지 않냐고 비판한다. 당장 대혁명 때도 자크 르네 에베르 등의 자코뱅 급진파는 로베스피에르와 당통을 싸잡아서 온건주의자라고 비판했고, 그를 재평가했던 프랑수아노엘 바뵈프도 테르미도르 반동 전까지 로베스피에르에 대단히 비판적이었다. 프랑스의 혁명가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는 쓸모없고 잔인한 권력자라고 깎아내렸고, 카를 마르크스는 그의 진정성만큼은 인정해주었으나, 그가 부르주아적 사상을 탈피하지 못한 채로 정치의 힘에만 의존하고 경제를 제대로 신경쓰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한편, 로베스피에르보다 온건한 성향의 좌파들은 우파들의 비판처럼 그의 공포정치가 가지는 잔인함과 비민주성에 초점을 맞춰 비판한다.
결과부터 말하자면, 그가 일으킨 혁명은 죽 쒀서 개준 꼴에 불과했다. 애초에 "로베스피에르"는 프랑스의 왕정제를 폐지하려고 혁명을 일으켰으나 본인은 그 혁명에 대한 혜택을 일절 받지도 못한 것은 물론이요, 본인 역시 반(反) 혁명분자로 몰려 단두대로 처형당했으며, 그가 일으킨 혁명은 그저 프랑스 왕정제에 일절 흠집조차 못 냈으며[38] 단지 왕가만 부르봉 왕조에서 보나파르트 왕조로 변경하기만 했을 뿐이었다.
또한 20세기 전반기에 그를 재평가했던 학계의 평가를 다시 지나 프랑수아 퓌레(François Furet)를 비롯해 1970년대 이후 대두한 수정주의 학자들은 프랑스 혁명이 시작부터 독재 체제로 나아갈 수밖에 없는 전체주의적 경향을 내포하고 있었음을 강조하며 정통주의 혁명사 해석의 논거 상당수를 무너뜨리는 데 성공했고, 당연히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평가도 긍정적이지 않다. 때문에 1970년대 이후의 수정주의적 평가에서는 평가가 매우 좋지 못하다. 수정주의 관점에서 서술한 책을 훑어보면
- 파시스트 + 전체주의자 + 볼셰비키의 선배
- 무작정 대책없이 고대 그리스, 로마 시절로 되돌아가자는 복고주의자
- 학살 사건 터지면 나는 몰랐다 발뺌하며 푸셰 같은 하급자에게 떠넘기는건 피해자 코스프레
- 공포정치 상황을 이용해 권력을 강화하고, 증오를 부추겨 프랑스를 후퇴시킨 정치인
라는 식으로 과대평가 받고 미화된 독재자 겸 편협한 정치인이며, 좀 더 나아간 경우 프랑스대혁명을 사실상 끝장낸 악의 축으로 기술해 놓는 경우도 있다. 볼셰비키의 선배라는 표현처럼, 후대의 레닌마냥 자기가 권력 밖으로 밀려나있을땐 민주주의, 공화정치, 파벌다툼의 철폐를 외치지만 정작 자신이 권력을 잡으면 입 꾹 닫고 철권독재를 시전하는 내로남불스러운 혁명기 정치인의 한계에서 벗어나지는 못했다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혁명 성과의 좌절은 로베스피에르를 처형시킨 다른 혁명파들에 의해서 이루어졌다. 로베스피에르에 대해서는 아낌없이 혐오하던 자들이 정작 군사 독재자 나폴레옹 앞에서는 혁명의 성과를 버리기 바빴다. 심지어 그들은 나중에는 왕정 복고로 되돌아온 부르봉 왕조에게까지 충성했다. 따라서 보나파르트의 집권과 혁명의 좌절 책임을 로베스피에르에게만 묻는 것은 어폐가 있다. 정작 그 집권과 좌절은 혁명파 중 로베스피에르 반대파에 의해서 이루어지거나 승인되었기 때문이다.
3.2.1. 생필품 가격상한제 실시와 그 영향
로베스피에르는 생필품 가격상한제 법(The Law of the Maximum / La loi du Maximum)을 통과시켰는데, 이 법은 식품의 공급과 가격을 규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주로 수도 파리의 상퀼로트들을 만족시키고 달래기 위해서였다.사실 프랑스는 1793년 경에, 임금과 생필품의 가격 그리고 파리의 생활환경은 1789년의 대혁명 발발 이후로 거의 개선된 것이 없었다. 특히 당시 프랑스는 유럽과 전쟁을 벌이는 상황이라 프랑스의 수출과 수입이 감소된 상황이었고, 국내 무역은 무너져가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전쟁을 위해 많은 병력을 동원하고 지방에서는 이러저러한 많은 사건들로 농업 생산이 붕괴되고 있었다.
그래서 1793년 초, 파리의 상퀼로트들은 국민공회(National Convention / la Convention nationale)로 하여금 식량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천정부지로 치솟는 물가를 해결하기 위해 뭔가를 할 것을 촉구하고 있었다. 이런 캠페인을 주도하던 자들을 앙라제(Les Enragés)라고 불렀는데, 이들은 정치적인 정당이나 클럽에 속한 자들은 아니었다. 높은 식품 가격을 통해 부당한 이득을 취하는 사람들이 있다고 믿으면서 그런 자들에 대해 분노하는 일군의 화난 사람들이었다. 이들 화난 사람들 중에서 가장 주목받던 인물은 자크 루라는 가톨릭 성직자이자 급진적인 운동가였다. 그는 일관되게 경제적으로 평등한 세상을 부르짖었다. 자코뱅파가 부르주아적인 무기력함을 보이고 있다고 성토하였다. 그는 누구라도 모든 이가 식품을 구할 수 있어야 함을 주장하고 물건 사재기를 하는 부자들을 처형할 것을 주장하였다. 극단적인 급진주의 때문에 후에 그에게 붉은 사제(Red Priest, le curé rouge) 또는 작은 마라(le petit Marat)라는 별명이 붙었다. 자크 루의 열렬한 연설은 당시 자코뱅들이 장악하던 국민공회에 거의 영향력이 없었지만 상퀼로트를 비롯한 평민들이 있는 파리의 거리에서는 그의 연설이 크게 먹히고 있었다.
1793년 2월이 되자 파리에서 폭동이 연이어 발생하였다. 이 폭동들은 처음에는 거의 전적으로 여성들이 일으켰는데 빵, 설탕, 커피, 비누 등의 생필품 가격이 폭등하는 것에 대해 항의하면서 발생한 것이었다. 2월 말이 되자 남자들도 가세하면서 가격을 내리는 것을 거부하는 빵가게 주인과 식료품가게 주인들에게 폭력으로 위협을 가하는 상황이 되었다. 이러한 식품 폭동들은 빵 부족 상황이 완화되기 시작하던 3월 초까지 지속되었다. 1793년 3월부터 6월 사이의 기간 동안 당시 국민공회는 주로 전쟁 문제에 집중하고 있었으며 또한 지롱드파와 급진 자코뱅인 몽테뉴파가 서로 권력투쟁을 하던 때였다.
자코뱅과 같이 하던 급진적인 언론인들은 높은 식료품 물가에 대한 비난의 화살을 온건파인 지롱드파에게 돌리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대중들은 지롱드파 인사들이 지방 세력, 사업적 이득을 보는 세력, 그리고 부르주아 세력들과 결탁된 자들이라 여기게 되었다. 이것이 사실이든 아니든 이러한 낙인은 지롱드파들을 식품 공급 문제와 관련되어 희생양으로 만들었다.
1793년 5월 초, 파리의 자코뱅들은 식품 정책과 관련하여 상퀼로트 편을 들기 시작했다. 이는 계산된 움직임이었는데 이로써 대중의 지지를 얻어 지롱드파를 영원히 없애버리기 위해서였다. 이때껏 식품 문제로 폭동을 일으킨 상퀼로트에게 동조하지 않았던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는 식량을 비축해 놓은 자들과 가격 투기세력, 이를 통해 폭리를 취하던 자들에게 불호령을 떨어뜨리기 시작했다. 5월 4일, 국민공회는 가격통제를 위한 첫 조치로 밀과 밀가루의 가격을 고정시켰다.
이에 지롱드들은 가격 통제를 반대했다. 왜냐면 가격이 오르면 식품 공급이 증가할 것이고 그러면 물가도 결국 떨어진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특히 자코뱅들은 이런 경제 조치를 취함으로써 정치적으로 의도했던 효과를 얻을 수 있게 되었다. 상퀼로트들이 자코뱅파와 몽테뉴파의 편을 들기 시작한 것이다. 상퀼로트들은 지롱드파들을 국민공회에서 축출할 것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1793년 5월까지 대중들의 압력이 계속되었고 결국 6월 2일에 지롱드파들은 축출되었다. 이로써 자코뱅파와 몽테뉴파들이 공회에서 완전히 승리하게 되었다. 하지만 이로써 이제부터의 파리의 경제 상황에 대해서 그 책임을 오롯이 자코뱅들만이 지게 되었다. 한마디로 더 이상 남탓하며 비난할 대상, 희생양으로 삼을 대상이 없어지게 되었다.
1793년 6월 25일, 자크 루는 공회 내에서 열성적인 연설을 하였다. 후에 이 연설을 화난 사람들의 성명서(Manifesto of the Enragés)라 부르게 되었다. 이 연설에서 그는 자코뱅파와 몽테뉴파가 상퀼로트들의 요구에 충분히 호응하지 못하고 있음을 비판하면서 물품을 독점하고 높은 가격으로 이득을 취하는 자들에게 자코뱅과 몽테뉴파가 엄벌을 취해줄 것을 강력히 요구하였다.
프랑스 인민의 대표여러분! 이기주의자들과 사기꾼들의 범죄행각에 대한 성토가 이 신성한 공회 건물내에서만도 일백번 울려 퍼졌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항상 당신들은 저 인민의 거머리들을 박살내주겠다고 약속했었습니다. 이제 곧 새 헌법 조항들이 승인 절차를 거칠 예정입니다. 그런데 새 법 조항 안에 투기를 금지하는 내용이 들어갔습니까? 아니요! 독점업자들을 사형시킨다는 내용이 들어갔습니까? 아니요! 상업의 자유를 구성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적시하였나요? 아니요! (중략) 자! 당신들은 인민의 행복을 위해 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선언하였습니다.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굶주리게 할 수 있다면 자유는 단지 헛된 환상일 뿐입니다. 부자들이 독점력을 써서 사람들을 죽일 수도 살릴 수도 있는 권한을 행사할 때 평등이란 단지 헛된 환상일 뿐입니다. 생필품 가격을 가지고 반혁명이 일상적으로 발생하는, 그래서 시민들이 생필품을 구하기 위해 눈물을 흘린다면 공화국이란 단지 헛된 환상일 뿐입니다. 상업에서의 강도질을 중단해야합니다. 상업에서의 강도질과 상업은 구별되어야 합니다. 당신들이 혁명으로 데려온, 당신들이 새 헌법쪽으로 집결시킨 상퀼로트들의 손에 식품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해줘여만 이것들이 가능합니다.
화난 사람들의 성명서.
화난 사람들의 성명서.
자크 루의 이의제기를 살피는 대신, 자코뱅들은 그를 침묵시키고자 하였다. 장 폴 마라는 그의 신문인 인민의 친구(L'Ami du Peuple)에서 자크 루를 사고뭉치라며 맹비난했다.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무리들은 장 폴 마라 편을 들었다. 8월경에, 자크 루는 날조된 죄명[39]으로 감옥 독방에 갇히게 되었다. 자크 루의 자극적인 화술은 폭동을 촉발시키고 있었다. 자코뱅파가 주도하는 정국을 자크 루가 위협하고 있다고 걱정을 한 로베스피에르는 그가 혁명정부를 붕괴시키고자하는 외국 간첩이라는 혐의를 씌워 고발하고 감옥에 넣었다. 나중에 1794년 2월 10일, 혁명재판소에서의 재판을 기다리던 자크 루는 옥중에서 칼을 이용하여 자살하였다. 그의 나이 41세였다.
자크 루가 사라졌지만 상퀼로트들을 침묵시킬 수 없었다. 상퀼로트들은 공회측이 조치를 취해줄 것을 끊임없이 요구하였다. 1793년 9월, 이들은 공회에 다음과 같은 내용의 청원을 냈다.
사람들이 고통받고 있다. 귀족들은 박살이 났지만 여전히 새로운 엘리트들과 상인들, 그리고 식품 투기꾼들 속에서 살아 숨쉬고 있다. 부자들이 더 부자가 되는 상황에 왜 상퀼로트들은 자신들의 피를 조국을 위해 흘려야 하는가? 왜 상퀼로트들은 떨쳐일어나 그들이 왕과 귀족들에게 했던 것처럼 부자들의 목을 치기 위해 일어서지 않는가? 만약 당신네들이 가격상한제를 실시하지 않는다면 부자들의 목을 치는 일을 보게 될 것이다.
이 청원이 일어나 며칠 후인 9월 29일, 공회는 가격상한제 법을 통과시킴으로써 상퀼로트들의 청원에 응답하였다. 이 급진적인 법은 30여가지가 넘은 필수품들의 가격에 상한을 설정하였다. 상한가가 설정된 물품들 중에는 신선육, 소금간을 한 육고기, 베이컨, 버터, 올리브유, 소, 소금에 절인 생선, 포도주, 브랜디, 식초, 사이더, 맥주, 장작, 석탄, 숯, 양초, 램프오일, 소금, 소다, 설탕, 꿀, 종이, 가죽, 철, 주철, 납, 강철, 구리, 삼, 마직류, 모직류, 나막신, 신발, 순무, 유채씨, 비누, 담배, 칼륨 등이 대상이었다.상인들은 그들 가게 바깥이나 창문에 법에 따라 모든 판매 물품의 최고 가격 목록을 보이게 붙여 놓게 강제되었다. 만약에 이들 가격 중에 법으로 정해진 최고가격을 초과하는 것이 있으면 일반 대중들이 관계 기관에 알리도록 만들었다. 상인들은 최고가격을 위반한 가격의 두 배를 벌금으로 내도록 하였다. 재미있게도, 그 벌금은 관청에 내는게 아니라 위반을 알린 사람이 받도록 하였다. 이런 가격통제 법은 또한 삯에도 적용시켰다.
물가와 삯에 고정된 제한을 가한 이 조치는 좋은 의도에 기반한 것이었다. 하지만 돌아온 것은 경제적 재앙이었다. 강제로 부과된 제한으로 인해 농부들과 생산자들은 생산 의욕을 잃게 되었다. 이들은 실제 가치보다 낮은 가격에 파는 것을 포기하고 덜 생산하거나 생산한 것들을 숨겨 쌓아놓기 시작했다. 그래서 도시와 마을로 들어오는 식품의 양이 줄어들었고 이 때문에 식품 부족은 더 악화됐다.
게다가 중간에서 이도저도 못하는 자들은 도시의 소매업자들과 쁘띠부르주아들이었는데, 이들 대부분은 원가와 매가의 차이가 극히 적은, 작은 이윤으로 버텨나가고 있었다. 결국 정직한 상인들이 최고가격제의 희생자가 되었고 부패하고 비윤리적인 자들은 이를 악용하였다. 정육점주인들은 질좋은 고기보다는 고기 부스러기를 이전보다 더 많이 붙여 고기 무게를 쟀다. 가게주인들은 최고가격제로는 1급 보다는 2급 제품을 팔았다. 대중들은 품질에 불만이 많아지게 되었다. 이때 얼마나 품질이 나빴냐면 포도주를 샀지만 배 주스였고, 올리브유를 샀지만 저질기름을 사게 되었고, 후추를 샀으나 재가 들어있는 후추였으며, 설탕을 샀지만 전분가루가 섞인 설탕이 있을 정도였다. 더욱이 불법적으로 상품을 팔고 더 많은 가격을 지불할 용의가 있는 사람들이 생겨나면서 암시장이 창궐하였다.
가격상한제로 설정된 가격은 1790년의 물가수준의 133%에 해당하는 가격수준이었다. 그런데 정부에서 최고가격을 정할 때 운송비용을 과소하게 설정하였기 때문에 생산자들은 자신들의 상품을 상품을 필요로하는 시장에 내다팔기 보다는 가장 가까운 시장에 내다 팔게끔 만들었다. 이 때문에 전국에서 최고가격의 통제를 받는 식품들을 구하기가 더욱 힘들어졌다. 이에 따라 암시장에 의존하거나 추가 비용을 지불해야만 구할 수 있게 되었다.
4. 여담
- 로베스피에르의 전기로 장 마생의 《로베스피에르 : 혁명의 탄생》이 있다. 로베스피에르의 인생을 중심으로 프랑스 혁명을 풀어낸 작품인데, 로베스피에르를 자세히 알고 싶은 사람에게는 꽤 괜찮다. 다만 로베스피에르에 대해서 아주 긍정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으며, 로베스피에르 한계에 대해선 비판이 소극적이므로 그런 부분은 좀 주의해서 읽을 것. 무튼 로베스피에르가 어떠한 이데올로기를 가지고 있었는지 판단하는데, 제법 도움이 되는 책이다. 로베스피에르 관련 전기는 국내에 이 책 밖에 없으니, 로베스피에르에 대해 알기 위해 읽을 책으로 추천할만한 책인 것은 분명하다.
- 로베스피에르는 150여 년 전 영국에서 혁명을 일으켜 군주를 처형한 올리버 크롬웰과 비슷하다는 평도 있다. 둘 다 금욕적이고 청렴결백하였지만 독선적인 국정 운영 방식으로 인해 적을 많이 만들었다는 점과 자신의 사상에 집착하여 무시무시한 공포통치를 하였고 이로 인해 국민들에게 원성을 사게 되었다는 점에서 비슷히다. 그리고 둘 다 머리가 잘리는 비참한 최후를 맞이하였지만 크롬웰은 사후에, 로베스피에르는 생전이라는 것이 차이점이지만 말이다.
- 의외의 사실이지만 나폴레옹과 로베스피에르는 연결 고리가 존재한다. 나폴레옹은 원래 워낙의 하급 장교라서 출세를 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는데, 나폴레옹이 출세할 수 있도록 전방 장교로 꽂아주고 지원해준 사람이 바로 로베스피에르의 동생인 오귀스탱이다. 오귀스탱이 나폴레옹을 낙하산으로 임명한 것은 알려지기로는 나폴레옹이 쓴 공화제 옹호 정치 선전물을 보고 감탄해서라고 알려져 있다. 군사 쿠데타를 경고한 로베스피에르이지만, 그 씨앗이 자신의 주변에서 자라고 있었다는 것은 몰랐던 셈이다. 여담으로 나폴레옹은 로베스피에르가 숙청된 다음에는 곤란을 겪게 되지만, 자신이 자코뱅이 절대로 아니라고 분명히 선을 그었고 같이 단두대로 가는 것은 피할 수 있었다. 애초에 나폴레옹은 프랑스 혁명 세력과는 별개의 인물이다.
- 한편 2013년, 그의 사후 밀랍인형으로 유명한 마리 투소(Marie Tussaud)[40]가 그의 잘린 머리로 직접 본뜬 데스마스크와 당대 주변인들의 그에 대한 기록 등을 종합해 현대의 법의학 전문가들이 그의 실제 생전 모습을 재현했는데, 널리 알려진 문서 상단의 초상화와는 딴판인 모습이다. 실제로 로베스피에르는 여섯 살 때 앓은 천연두로 얼굴이 얽어 있었으며, 현대에는 유육종증으로 추측하는 미상의 질병을 달고 살아서 밤마다 코피를 흘리고 만성 황달과 무력증, 안면 경련에 시달리는 등 건강이 매우 나빴다고 한다. 참고자료. 이곳에서 로베스피에르의 실제 얼굴을 볼 수 있다.
- 러시아 혁명 직후 소련에서 그를 기념하는 조각상을 세운 적이 있다. 1918년 11월 3일 모스크바에서 공개되었다. 그러나 11월 4일 동상이 스스로 부서져 버렸다. 당시 소련은 1차대전의 상흔과 혁명의 혼란기로 인해 제대로 된 청동이나 대리석 등을 구하기 어려워서 콘크리트로 만들었는데, 이 과정에서 부실 공사가 있던 것으로 추정한다.
-
다른 건 몰라도 사치, 부패와 완전히 담을 쌓고 살았다. 부패할 수 없는 자(incorruptible)라는 그의 별명은 반대파들도 인정했다고 한다. 특히 어린 시절에 매일 해진 옷을 입고 다닐 정도로 근검했고, 나이가 들어서도 여전히 근검했다. 이 때문에 국민공회 이전부터 자코뱅의 도덕성을 책임졌으며, 당통이 왕창 깎아먹었던 자코뱅의 이미지를 회복하는 데 큰 공로를 세웠다. 나중에 사실상 프랑스의 국가수반이 된 뒤에도 관사가 아닌 목공 장인인 뒤플레가 세놓은 방에서 출퇴근했다. 셋방에서 집무실로 출근한 국가 원수는 프랑스 역사를 넘어 전세계를 뒤져보아도 흔치 않다.[41]
취미 생활도 독서와 산책 정도뿐이었으며, 여자 관계도 매우 깨끗해서 셋방 주인 딸과 처형 직전 약혼한 것 이외에는 없었다. 연애의 전설인 프랑스에서, 그것도 국가 원수가, 심지어 혁명기라는 큰 혼란기에 아무것도 가지지 않은 채로 프랑스 대혁명과 함께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프랑스의 역대 국가 원수 가운데 사생활이 로베스피에르만큼 깨끗했던 사람은 없다. 그나마 견줄 만한 인물이 본부인에게만 충실했던 샤를 드골 정도다. 그래도 옷차림과 몸가짐은 깔끔하게 유지했으며, 특히 변호사로 성공해 가난에서 벗어난 이후부턴 외모만큼은 빈곤해 보이지 않도록 세심히 신경써 관리했다. 당시 중산층의 정장 스타일인, 항상 분칠을 하고 세심하게 다듬은 가발을 단정히 쓰고 화려한 색상의 정장 코트를 입었다. 그렇다고 과하게 비싼 옷을 입은 것은 아니고, 국가원수에 가까운 지위로 의전상 품위 유지를 헤치지 않는 한도에서 조절한 것이다.
- 마시는 차에 설탕을 넣지 않는 것으로도 유명했다. 하루는 조르주 당통이 찾아와서 함께 차를 마시려고 하는데 설탕을 달라고 요구하는 당통의 말에 "내 집에는 설탕이 없습니다. 설탕을 마시면 악마의 유혹에 빠집니다."라고 말하면서 차에 설탕을 넣지 않고 그냥 마셨을 정도로 금욕적인 인물이었다. 당시 설탕이 아무리 지금보다 비쌌다곤 해도 저 당시면 이미 카리브해 연안의 대규모 플랜테이션으로 서민들도 부담 없이 접할 수 있게 된 지 오래였다.
- 아버지 막시밀리앙 프랑수아는 변호사로 활동했으며 아내인 자클린이 난산으로 인해 사망한 뒤엔 집을 떠나서 유럽 각지를 떠돌다가 1777년 뮌헨에서 객사했다. 형제관계는 막시밀리앙이 장남이고 다음 순서대로 샤를로트, 앙리에타, 오귀스탱이 있다. 동생 3명 중 앙리에타는 혁명 이전인 1780년 사망했다. 샤를로트와 오귀스탱은 막시밀리앙을 따라 프랑스 혁명에 참여했다. 오귀스탱은 형과 마찬가지로 장학금을 받는 수재였으며, 변호사로 활동했었다. 정치적 성향은 형인 로베스피에르와 유사했고 형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그러나 오귀스탱은 사적인 면에선 형과 많이 달랐는데, 외모도 수려했고 많은 사람과 만나 어울리는 등 사교적인 인싸였다. 오귀스탱은 테르미도르 반동 때 도주하다가 창문에서 떨어져서 중상을 입었으나 살아남았고, 형과 함께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샤를로트는 반동 당시 체포되어 심문받았으나 석방되었고, 처형되기 전의 형제들을 마지막으로 만나기 위해 면회를 요청했으나 거부당했다. 이후엔 혁명 지인들의 도움을 받아 살아갔으며, 형제들의 삶에 대한 기록을 남기고 1834년 사망했다. 막시밀리앙과 마찬가지로 형제들은 모두 혼인하지 않아서 로베스피에르 집안의 후손은 없다.
- 프랑스 학계에서는 역사학자 알베르 마티에즈에 의해 로베스피에르의 이름을 딴 로베스피에르 학회(Société des études robespierristes, SER)가 1907년부터 조직되어 활동 중이다. 이 학회에서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연구를 실시하고 있다.
- 전 12권으로 이루어진 로베스피에르 전집(Oeuvres complètes de Maximilien Robespierre)이 로베스피에르 학회를 통해 출판되어 판매 중이다. 초판은 1912년부터 1967년까지 10권으로 출판되었는데, 이후 개정을 거치면서 보충자료로 2권이 더 추가되었다. 각 권은 다음과 같이 구성되어 있다.
권호 | 부제 | |
1 | 아라스의 로베스피에르 | 문학 작품(산문, 운문) |
2 | 사법 업무(변론, 브리핑) | |
3 | 남동생 오귀스탱 로베스피에르와의 서신 | |
4 | 신문 | The Defender of the Constitution |
5 | 유권자들에게 보낸 서신 | |
6 | 연설 | 1789년 ~ 1790년 |
7 | 1791년 1월 ~ 9월 | |
8 | 1791년 10월 ~1792년 9월 | |
9 | 1792년 9월 ~ 1793년 7월 | |
10 | 1793년 7월 27일 ~ 1794년 7월 27일 | |
11 | 보충 자료 | 1784년 ~ 1794년 |
12 | 1778년 ~ 1794년 |
5. 대중매체에서
- 베르사유의 장미에 프랑스 혁명 관련으로 나온다. 베르나르 샤틀레와 생쥐스트의 스승격이자 공화주의자로 지하에서 혁명 세력의 중심격인 인물로 등장한다. 하지만 혁명이 일어나려 하자 시민들 스스로가 혁명의 주체가 되길 원했던 베르나르와는 달리 로베스피에르는 자신이 주도하는 혁명으로 이끌어 나가길 원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자신과 뜻을 함께 하는 생쥐스트도 그를 권력을 탐하는 테러리스트라고 평하였다. 혁명을 마친 이후에는 루이 16세를 처형하기를 주장하는 연설을 하는 모습으로 등장한다. 성우는 모리 카츠지.
- 진정남 나폴레옹에서는 작중 내내 선글라스[42]를 끼고 다니는 포스 있는 정치인으로 등장한다. 실제로도 로베스피에르는 도수가 들어간 초록색 선글라스[43]를 썼던 것으로 당대 기록에서 여러 번 언급된다. 멋으로 썼던 것은 아니고, 시력이 나쁘기도 했던 데다 눈이 빛에 예민했기 때문에 눈 보호 차원에서 선글라스를 썼다고 한다. 동정이라는 말을 한 것으로 유명하다. 한편 일명 사형간지 로베스라는 것도 있는데, 이는 재판에 임해서 사형 아니면 무죄만을 선고했다는, 당대부터 유명한 카더라이다. # 참고로 이 작품에 등장하는 나폴레옹은 권력을 잡은 후 종종 선글라스를 끼고 다니는데, 이게 다름 아닌 로베스피에르의 선글라스다.[44] 이 작품에서는 로베스피에르를 꽤 우호적으로 묘사하는 편인데 작품에서는 로베스피에르에서 생쥐스트를 거쳐 나폴레옹으로 이어지는 가상의 정신적 후계 구도를 묘사하고 있다. 위의 사형 짤방도 실제로는 의미가 다르다. 어린 시절 자신을 따뜻하게 대해준[45] 루이 16세의 성품은 인정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국왕인 것 만으로도 혁명의 적이어서 사형이 불가피하다는 결정을 내린 것이다. 로베스피에르 본인도 이 결정이 인간적으론 내키지 않아서 사형 결정을 내리기 직전 의자를 움켜쥐는 모습이 나온다.
- 소설가 전민희가 한때는 가장 존경했었던 인물로, 막시민 리프크네와 란지에 로젠크란츠 등은 로베스피에르의 영향을 많이 받은 캐릭터 조형이다. 어린 시절에 어머니가 죽고 아버지가 실종된 상태의 장남이라는 가족배경과 어린 시절 해진 옷을 입고다니는 패션 그리고 이름[46] 등에서 막시민 리프크네와의 공통점을, 청렴결백한 것으로 유명한 공화주의자 혁명가라는 점에서 란지에 로젠크란츠에 끼친 영향을 볼 수 있다. 다만 결과적으로는 작중 아노마라드 공화국은 현실의 로베스피에르마냥 반쪽짜리 혁명으로 평가받으며 실패로 돌아갔고 결국엔 기존 아노마라드 왕국을 전복시킨 것이 무색하게 공화국 멸망 후 신 아노마라드 왕국이 건국되는 것으로 끝났다. 이후에 전민희는 그 시절에는 젊은 시절 자신도 이상주의적 면모가 있었기에 로베스피에르가 가장 매력있게 느껴졌던 것 같았고 지금은 결혼하고 가정주부가 되면서 현실적인 면도 생각해보게 되고 로베스피에르의 타락한 면모를 차마 부정할 수는 없겠다면서 타락하기 전 이상주의적이고 정의로웠던 모습만큼은 여전히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만 단지 그 뿐이라고 입장을 선회했다. 초기 판타지 작가로 지명도는 다소 떨어지지만 확고한 팬층을 가진 에누마 엘리시의 작가 김유나 역시 가장 존경하는 인물 중 하나로 이 사람을 들었다고.
- 만화 슈발리에에서는 메인 악역으로 등장한다.
- Fate/Grand Order에서는 슈발리에 데옹의 인연퀘스트에서 등장. 성배가 일으킨 영향의 잔재 때문에 망령으로 소환됐다. 망령으로 소환된 탓인지 자신의 정의를 잃고 숙청과 죽음만 외치는 상태. 본래는 결의에 찬 기백을 지닌 남자로, 데옹과 검을 나눈 적도 있다. 여담이지만 FGO의 로베스피에르는 상술한 슈발리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이며 유저들 사이에서는 망령이 아닌 서번트로 나오길 바라는 목소리도 있다.
* 게임
어쌔신 크리드: 유니티에서도 등장. 슈발리에와 마찬가지로 본작의 메인 악역 중 하나로 여기서는
성전기사단, 정확히는 신 성전기사단과 손을 잡고 있는 것으로 나오며, 실제 역사적 사실보다는 공포 정치의 수장으로서의 면모가 부각되었다.[47] 어찌되었든, 공포정치로 프랑스를 장악하였지만, 게임 후반부에 신 성전기사단을 토벌하려는
아르노 도리안과
엘리즈 드 라 세르가 여론을 그에게서 멀어지게 하는 물밑 작업을 하는 바람에 체포되었으나 탈출에 성공하여 파리코뮌의 보호를 받으며 숨게되면서 최종보스에게 도달하게 된다. 결국 뒤쫓아온 경비병들에 의해 체포당하였고 여기서는 그가 죽기 전에 입가에 총을 맞아 말을 못했다는 가설을 따랐는데 그 총을 쏜 사람이
엘리즈 드 라 세르다! 로베스피에르가 절대 알려주지 않겠다고 말을 하자마자 소원대로 바로 총을 쏴버리는 것이 압권이다. 여담이지만 사망 당시 36세이었는데 나이에 비해 훨씬 늙어보이는 모습이다.
- 다카라즈카 가극단의 극 《빛이 내리는 거리(ひかりふる路): 혁명가 막시밀리앙 로베스피에르》에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 게임 아머드 코어 포 앤서에서는 로베스피에르를 모티브로 한 등장인물로 스토리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맥시밀리안 테르미도르라는 링크스가 반체제 혁명 조직 오르카 여단의 보스로 등장한다. 또, 공교롭게도 그 체제의 꼭대기에는 그가 사형당한 날인 28일을 이름으로 하는 링크스가 존재한다.
- 게임 영웅전설 여의 궤적 II -CRIMSON SiN-의 악역 캐릭터인 가든 마스터의 정체인 오귀스트 알댕의 모티프이다. 혁명의 주역이었으나 공포정치를 자행해 후일 숙청당했다는 것을 보면 확실하다.
- 혼블로워 시리즈를 오마주한 밀리터리 SF 겸 스페이스 오페라 소설 아너 해링턴 시리즈에서는 그를 모델로 한 로버트 스탠튼 피에르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아예 작중에서 롭 S. 피에르라는 약칭이 나온다. 프랑스를 모델로 한 헤이븐 인민공화국의 유력자로, 정치경찰의 2인자 오스카 생쥐스트, 극단주의 포퓰리스트 코델리아 랜섬[48]과 함께 자작극을 벌여 정권을 손에 넣는다. 붕괴한 헤이븐의 산업과 교육을 정상화한 업적이 있지만[49] 패전한 지휘관들을 그 가족까지 함께 처단하거나 열악한 환경의 행성을 비밀 수용소로 운영하는 등 잔인한 모습을 보인다. 결국 자신이 중용한 에스더 맥퀸 국방장관이 일으킨 쿠데타 와중에 사망한다.[후속작스포]
- 영화 4교시 추리영역에서는 그가 남긴 "범죄는 원하는 바를 얻으려 결백을 도살하고, 결백은 범죄에 맞서 온 힘을 다해 싸운다."라는 명언이 언급된다.
- 리첼렌의 대체역사소설 단두대에서 살아남기에서는 주인공이 빙의한 인물로 등장한다. 단 로베스피에르 본인의 의식도 공유하고 있어서 주인공과 티격태격한다. 아직 공포정치로 흑화하기 전 시점이라서 순수한 혁명가의 풋풋함도 남아 있다.
- 리들리 스콧이 감독한 나폴레옹에서는 샘 트로튼이 연기했다. 마리 앙투아네트 처형 직후 공포정치를 이끌어나가는 모습, 이후 테르미도르 반동[51]으로 실각하여 달아나다가 권총 자살에 실패[52]하는 모습이 묘사된다. 이후 폴 바라스로부터 단두대로 가자는 말을 듣는 것으로 출연 종료.
6. 둘러보기
[1]
1764년 7월 16일 사망
[2]
최고 존재의 제전 문서 참조
[3]
1777년 뮌헨에서 사망했다.
[4]
루이 14세 때부터 부르봉 왕조의 후원을 받아오던 파리 최고의 명문학교다. 지금은 한국의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중등학교인데 그랑제꼴 합격률이 프랑스 최고다.
[5]
같은 시기에
카미유 데물랭이나 루이 프레롱 등의 혁명기 유력 정치인들이 같은 콜레주에 다녔으나, 로베스피에르의 학창 시절은 거의 언급되는 일이 없었다.
[6]
로베스피에르가 이후 루이 16세를 처형하니 비 맞은 복수를 했다는 드립이 있다.
[7]
그런데 당시 루이 16세는 21세였다. 루이 16세는 어릴 때부터 숫자
21을 무서워해왔는데, 그 때문에 건성으로 듣다가 돌아간 것이라는 설도 있다. 참고로
프랑스 혁명 전 루이 16세에게 자금난으로 인해 돈을 요구한
귀족의 수는 21명이었고, 그가 처형된 날도 21일이었다고 한다.
[8]
이때 반대측에서 증거로
장폴 마라의 연구 자료를 제출했다.
[9]
공식적 명분은 "혁명을 방해하는 외세에 대한 전쟁"이었고, 이 탓에 로베스피에르를 제외한 자코뱅 의원들은 이에 대해 반대하지 못했다. 반면
루이 16세는 프랑스의 패배를 통해 외국 군대로부터 구출되기를 바라 전쟁을 찬성했고, 지롱드파는 전쟁을 통해 바렌 사건 이후 왕가에 적대적인 상퀼로트들의 눈을 돌리게 하기 위해 찬성하는 상황이었다.
[10]
프랑스는
선전포고를 하는 각 정치 세력들의 동기에서 보이듯 심각하게 분열되어 있었고,
프랑스 혁명이 시작되게 된 원인인 엄청난 국가 부채는 전혀 해결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11]
그러나 자코뱅은 국민공회의 다수파가 아니었다. 봉기로 인한 상퀼로트의 영향력과 전쟁의 급박함 탓에 다수파였던 지롱드파가 자코뱅의 주도를 묵인한 것에 가깝다. 이것은 테르미도르 반동에서 중요하게 작용한다.
[12]
엄청난 가치 하락이지만, 실상은 아시냐 지폐는 1789년 발행된 이후 계속 가치가 급락한 상황이었고, 이를 공안위원회가 전시통제경제를 통해 전쟁에도 불구하고 안정시킨것에 가깝다.
테르미도르 반동 이후 아시냐는 다시 폭락해, 결국 1797년 30분의 1의 가치로 환금하게 된다.
[13]
왕당파들과 지방 귀족들이 중앙집권과 의회통치에 반발하여 반란을 일으킨 것도 있지만 보급이 안되어 현지 보급 명령을 내린 것 때문에 군인들의 강제 징발과 약탈이 심각하여 이에 반발하는 반란들이 많이 일어났다.
[14]
영국뿐만 아니라 스페인과 나폴리, 시칠리아, 샤르데냐도 지원했다. 특히 영국과 스페인이 주력인데 이 두 나라는 1만 3천명의 병력과 함대 74척으로 구성된 대규모 병력을 제공했다.
[15]
국민공회의 눈에 들기위해 자신이 직접 저술한 혁명정신이 충만한 서적들을 자비로 출간해서 뿌리고 다녔다. 《보케르의 만찬》이라는 혁명정신으로 충만한 이 희대의 문제작은 당연히 훗날 황제의 자리에 오른 저술가 본인에 의해 금서로 지정된 바람에 현재까지 남아있는 책이 단 한권도 없으며 그 내용조차도 기록된 곳이 없다. 이러한 저작물들이 로베스피에르 친동생의 눈에 띄어 그의 화려한 경력이 시작됐으나 자코뱅의 몰락 이후 투옥되는 등의 부작용도 있었는데, 적극 지지자가 아니라 국민공회의 눈에 들고 싶어서 단지 아첨했다는 것이 밝혀져서 얼마 후 풀려났다.
[16]
국민위병은 장교를 1년마다 병사들의 선거로 선출했다.
[17]
현대 국민군조차 목표의식이나 동기부여가 되는데도 단지 인력 선별이 제대로 되지 않아
윤일병 사건,
임병장 사건 같은 사고가 터지는데, 이 시기 프랑스군은 말이 국민군이지 사실상 해준 것도 없는 부르주아 세력이 혁명을 일으켜 왕과 귀족의 자리를 빼앗고는 이제 와서 자기 체제를 외국 귀족들로부터 지키겠다고 일반 농민, 도시 빈민의 아들들 보고 군대 가라고 떠미는 격이라 적극적인 지지자들이 아니면 적 앞에서는 싸우지도 못하고 자국민이나 약탈하는 총든 도적떼로 전락하기 딱 좋았다. 당장 아프리카 내전지역 정부군들이 말이 정부군이지 사실상 국가가 공인한 도적이나 다름없다는 걸 생각하면 답 나오는 문제다.
[18]
나폴레옹이 주목받은 첫 전투인 툴롱 전투에서 좋은 예가 있다. 툴롱을 함락하기 좋은 위치가 있는데, 영국군이 점유하고는 있지만 아직 요새화가 제대로 돼있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병사를 이끌고 여기를 공격했는데, 상황이 프랑스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문제는 같이 공격나갔다가 상대의 대포 사격에 겁먹은 프랑스 사령관이 도망치며 후퇴명령을 내려 공격이 실패했다. 이 당시 의회가 선출한 사령관의 전직 직업이 화가와 내과 의사였다. 전쟁 도중에 일어난 피와 시체 때문에 겁에 질려 도망가 버렸다. 전투가 끝나고 이 소식을 알게된 나폴레옹이 황당해 했을 정도로 당시의 상황은 말도 아니었다. 이때 빡친 나폴레옹의 강력한 항의로 그 다음 사령관은 제대로 된 군인이 왔는데 바로 문제를 인지하고 부대와 전략을 개편하여 언덕 점령에 성공하자 얼마 안 가서 영국군이 철수해서 툴롱 탈환에 성공했다.
[19]
특별 법원이 처음 설립될 당시 그에게 특별 법원 검사 직위를 제안했으나, 그는 "피고의 대부분이 자신의 개인적인 적이기 때문에 이 직위에 적합하지 않다."고 하여 반려했다.
[20]
1794년 6월 10일, 혁명 재판소의 소송 절차를 간소화하고 피고의 변호와 예비 심문 제도를 폐지.
[21]
다만 이와 별개로, 로베스피에르와 공포 정치에 관해서는 몇 가지 지적해야 할 점이 남아 있다. 우선 공포정치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사형당했다고 하지만 그중 거의 대부분은 실제 반혁명 활동의 혐의가 짙게 입증된 경우이다. 즉 무턱대고 사형시킨 게 아니다. 물론 반혁명 활동이 사형당할 만한 죄냐는 물음에는 또 다른 답이 필요하지만.
[22]
국왕의 누이동생에 대한 처형에 반대했다.
[23]
기타 문단에도 적혀 있지만, 그 군사 쿠데타의 씨앗이 자신의 옆에서 자라고 있었던 것을 몰랐다는 것이 로베스피에르의 한계이다. 이론과 현실이 괴리를 이뤄갔던 당시처럼.
[24]
그렇기 때문에 당통 같은 사람들이 다 죽고 나서 할 수 있던 것이다. 상식적으로 될 수가 없는 우스꽝스러운 일이니까.
[25]
이 종교 내용이 당시의 이 종교에 대한 극장에서 공연을 했는데, 이성의 신앙이라고 말하면서 갑자기 하늘이 열리며 로베스피에르가 정장을 입고 내려오는 공연 극장을 했다. 물론,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쟤는 지가 신이라고 된다고 생각하나? 미친 거 아니야?"라고 비판적인 시선이 대다수였고 이윽고 그가 초심을 잃었다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늘어갔다.
[26]
로베스피에르를 탄핵하고 반동을 주도한 바라스, 부르동, 푸셰, 탈리엥, 바렌 등은 본래 자코뱅 산악파의 일원으로 로베스피에르가 벌인 공포정치의 선봉 역할을 자처한 인물들이였다. 바로 얼마 전만 해도 자신과 함께 공포정치를 벌인 공범들이 되려 자신을 물어뜯으니 로베스피에르가 끌려가면서 격분한 이유를 알 수 있다. 하지만 이들이 보아도 로베스피에르가 벌인 공포정치는 선을 넘었다는 뜻이며 살기 위해 기회주의적 처세술을 선보였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 나폴레옹에 적극 협력한 푸셰,
반동주의자가 된 부르동, 나폴레옹을 몰아내려 왕당파와 손잡다가 축출당한 바라스를 제외하면 탈리앵과 바렌은 뼛속까지 공화주의자였기에 이어 쿠데타로 공화국의 실권을 쥔 나폴레옹과 협력할 기회가 있음에도 적극 거부해 둘 다 공직에서 퇴출된 후 쓸쓸한 최후를 맞이했다.
[27]
이때 로베스피에르의 사형 판결을 내린
판사 푸키에 탱빌은 사실
공포정치를 상징한 혁명 재판소의 수장으로, 바로 직전까지
공포정치를 충실히 수행한 인물이였다.
기회주의적 처신을 보인 그였지만 혁명 재판소가 곧 폐지되고 자신이 사형 판결을 내린 피해자 유족들에게 역으로 고발당했다.
유대인을 학살한
나치 실무자들처럼
자신은 그저 명령받은 대로 했을 뿐이라며 무죄를 항변했으나 소용없었고, 그대로 단두대로 끌려가 목이 잘렸다.
[28]
이들도 누가 창 밖으로 집어던진 거라는 말이 있다.
[29]
당통이나 에베르 등은 사형판결이 내려진 며칠 뒤에 형이 집행되었지만 로베스피에르 일파는 오전에 선고받고 오후에 집행이 되었다.
[30]
프랑스 혁명 초기에 활동했던
미라보 백작은 로베스피에르를 두고 "저 사람은 멀리 갈 것이다. 그는 자신이 말한 단 한 마디도 빼놓지 않고 모두 믿기 때문이다."라고 말했다.
[31]
대표적인 이가 프랑스 대혁명 시기
루이 16세를 심문하고 반동 다시 로베스피에르를 고발한 것으로 유명한 베르트랑 바레르는 "나는 테르미도르 이후 로베스피에르를 생각해 보았다. 로베스피에르가 골몰한 것은 공화정부의 수립이고 그가 공격한 것은 이를 저지하려는 사람들이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리는 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한 것이다."라고 고백한 바 있다. 또 그에게
자크루이 다비드가
조르주 당통의 흉상 제작을 논하자 "로베스피에르를 잊지 마라! 그 사람은 순수하고 완전하며 진정한 공화주의자였다. 로베스피에르를 몰락시킨 것은 그 자신의 오기와 잘 노하는 그의 감수성과 동료에 대한 부당한 도전이었다. 로베스피에르의 몰락은 공화국의 큰 불행이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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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는 자신의 소망이었던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전기물을 끝내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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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 말고도 헝가리의 유명한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게오르크 루카치는
계급투쟁을 끌어들여서 당통은 혁명을 부르주아의 이해에 한정했기에 로베스피에르의 혁명 완수 목표에서 벗어난 사람이었고, 로베스피에르에게는 봉건제도로부터 해방되는 것 이상의 목표가 있었다고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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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학계에서 프랑스 혁명 연구를 개척한 민석홍 교수의 제자로, 한국의 대표적인 정통주의 계열 프랑스 혁명 연구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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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복이 집필한 세계역사 시리즈에 속하는 만화책 중 하나인《자유의 강풍과 삼색기》에서는 폭력을 혁명에 필요한 방법으로 믿은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대놓고 디스했으며,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모든 수단과 폭력을 가리지 않게 강하게 밀고 나가야 하며 공포정치는 프랑스를 반역자로부터 보호할 뿐 아니라 꿈꾸던 공화국으로 인도하는 유일한 방법이다."라는 대놓고 정신 나간 소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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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안티테제로 역사학자들은 지롱드파나
조르주 당통을 공포정치의 피해자 혹은 순교자로 치켜세우며 온건한 혁명을 강조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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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로베스피에르의
우유 일화는 한국에서만 특히 유명하다는 모양이다. 이야기인 즉 그는 집권하자 "모든 프랑스 아동은
우유를 마실 권리가 있다."며 우윳값을 내리도록 지시했다. 그러자 우윳값은 잠시 떨어졌다가 폭등했다. 농민들이 돈이 되지 않는 젖소 사육을 포기하고 이를 모두 육우로 내다팔았기 때문이었다. 그러자 로베스피에르는 농민들을 불러 젖소를 키우지 않는 이유를 캐물었다. 농민들이 건초값이 너무 비싸 우유를 생산해도 수지타산이 맞지 않는다고 답하자, 로베스피에르는 건초값을 내리라고 지시했다. 그러자 건초생산업자들은 건초를 불태워버렸다. 이러한 일이 계속되어 우유가 품귀현상을 빚자, 결국 우유에 대해 암시장이 형성되었고 우윳값은 천정부지로 치솟았다. 애초에 평민들도 쉽게 먹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해 도입한 가격통제로 인해 우유는 잘 사는 귀족들만 먹을 수 있는 귀한 음식이 돼버린 것이라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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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어 프랑스의 군주제를 완전히 끝장낸 건 초왕당파인
샹보르 백작 앙리에 의해서이다. 잦은 혁명으로 프랑스 국민들이 혁명에 대해 피로감을 느낀데다 프랑스 제2공화국의 선례처럼 나폴레옹 3세 폐위 이후 건국된 프랑스 제3공화국은 1871년 총선에서 왕당파의 압승으로서 왕정복고로 단명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공화주의자보다도 오를레앙파를 더 증오했던 샹보르 백작 앙리는 자녀 없는 본인의 후순위로 오를레앙파가 즉위하는 것을 원치 않았기에 제3공화국은 본의 아니게 장수하게 되면서 프랑스의 공화정 체제가 그대로 굳어졌다. 현재의 부르봉 본가(부르봉앙주 가문), 오를레앙파, 나폴레옹의 방계 후손인 보나파르트 가문은 개인적인 존경과 지지는 받지만 군주정 시절을 경험한
프랑스인은 150년이 넘는 세월에 따라 전부 사망한 데다 공화정 체제가 극좌와 극우를 막론하고 전 국민에게 널리 뿌리내려졌기에 제4왕조로 불릴 만한 정치인 가문(록펠러 가문, 트럼프 가문 등등)의 출현 같은 특별한 변수가 아닌 이상 왕정복고 가능성은 거의 0%라고 보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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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신도들을 이용해 모금한 자금을 자신이 빼돌린 가짜 성직자 혐의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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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혁명 시절 살았던 여인으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비롯해
단두대에서 처형당한 사람들의 목을 가지고
데스마스크와 밀랍인형을 만드는 것으로 유명했다. 그녀가 세운 마담 투소 밀랍인형 박물관은 현재도 운영 중이며, 전 세계에 스무 곳이 넘는 분점이 있을 정도로 규모가 크고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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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베스피에르와 유사하게 절대권력자치고는 매우 금욕적인 삶을 살았던 이로는
이오시프 스탈린이 있다. 스탈린은 별장, 전용 요리사, 주치의를 두긴 했지만 이 정도는 다른 민주주의 국가의 국가 원수들도 다 누리는 수준이었고, 그 밖에는 지도자로써 최소한의 품위만 유지하는 생활만 했다. '세계에서 가장 가난한 국가원수'로 유명한
호세 무히카도 개인 저택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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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의 영향 때문인지 이 이후의 작품들에서는 선글라스를 쓰는 장면이 자주 나온다.
[43]
영화 프랑스 혁명(1989)에서도 로베스피에르는 타원형 안경을 썼다.
[44]
실제 역사상의 나폴레옹은 가위형 안경을 썼다는 기록이 있으나, 이를 묘사한 초상화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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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 언급한 라틴어 연설 일화인데 실제와는 달리 여기선 루이 16세가 "참으로 훌륭하구나."라고 칭찬하며 자상하게 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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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시민은 막시밀리앙의 변형이다.
[47]
원체 자코뱅과 성전기사단을 연결시키는 것은 음모론의 단골 소재이기는 하다.
[48]
뛰어난 선동가라는 묘사와 삼두정의 일원이라는 점, 코델리아와
코르들리에의 유사성으로 보아
조르주 당통을 모델로 한 것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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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문에 작품 내의 헤이븐 인물들에겐 오히려 평이 나쁘지 않은 편이다. 심지어 피에르의 반대파 소속 인물도 "교사가 실제로 아이들을 가르치게 만들었다."며 그의 업적은 인정하는 모습을 보인다.
[후속작스포]
피에르의 측근들 또한 맥퀸의 반란군에 의해 대부분 사망하는데 오스카 생쥐스트만이 생존해서 새로운 대통령이 된다. 생쥐스트는 대통령이 된 후 에스더 맥퀸이 장악한 수도를 핵폭탄으로 날려버리는 초강수를 두면서 반란을 진압하고 맨티코어와 평화협정을 맺는다. 그러나 군부를 불신하여 경찰의 권한을 늘리고 군부 인사들을 숙청했고, 이에 불만을 품은 공화국군의 쿠데타에 의해 그 또한 죽고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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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분량상 국민 공회 회의장 안에서 우발적으로 쿠데타가 일어난 것으로 묘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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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의장에서 탈출하려고 의원들에게 위협 사격을 가했으나 불발되자 또 다른 권총으로 자신의 턱을 쏘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