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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일본 골드 디스크 대상 수상자 | |||||||||||||||||||||||||||||||||||||||||||||||||||||||||||||||||||||||||||||||
일본 골드 디스크 대상[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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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잔 올 스타즈 | → | 마츠토야 유미 | → | CHAGE and ASKA |
<colbgcolor=#232A34><colcolor=#fff> 마츠토야 유미
松任谷 由実 | Yumi Matsutoya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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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마츠토야 유미 ([ruby(松, ruby=まつ)][ruby(任, ruby=とう)][ruby(谷, ruby=や)] [ruby(由実, ruby=ゆみ)])[2] | ||
출생 | 1954년 1월 19일 ([age(1954-01-19)]세) | ||
도쿄도 시부야구 | |||
출신 | 도쿄도 하치오지시 | ||
국적 |
[[일본| ]][[틀:국기| ]][[틀:국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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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업 | 싱어송라이터, 작곡가, 작사가 | ||
데뷔 |
1972년
7월 5일 싱글 1집 (데뷔일로부터 [dday(1972-07-05)]일, [age(1972-07-05)]주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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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훈 |
자수포장 (2013년 수상) 일본 문화공로자 (2022년 수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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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속사 | 키라라샤( 雲母社)[3] | ||
레이블 | 유니버설 뮤직 재팬 | EMI Records | ||
서명 | |||
링크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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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232A34><colcolor=#ffffff> 신체 | 163cm[4] | O형 | |
가족 |
부 아라이 스에오(1912~2006)[5] 모 아라이 요시에(1920~2022)[6] 오빠, 언니, 남동생[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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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자 마츠토야 마사타카(1976. 11. 29. 결혼 ~ 현재) | |||
학력 |
하치오지제일시립소학교 (졸업) 릿쿄여학원중학교 (졸업) 릿쿄여학원고등학교 (졸업) 타마미술대학 (회화과 일본화전공 / 졸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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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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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싱어송라이터. 일본 음악계에 한 획을 그은 국민 가수이자 뉴뮤직의 선구자 중 한명으로 평가받는다.
애칭은 유밍(ユーミン),[9] 타 가수에게 곡을 제공할 때의 필명은 쿠레타 카루호(呉田 軽穂).[10] 원래의 성은 아라이(荒井)이며 키보디스트 겸 프로듀서 마츠토야 마사타카와 결혼한 이후 마츠토야 유미로 활동하고 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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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가정부, 아라이 유미, 할아버지, 아버지, 언니, 어머니[11] |
아라이 오복점의 후계자였던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만의 역량으로 가업을 관장하는 한편, PTA 회장 활동에도 열심이었다. 취미는 레뷰와 가부키 등의 연극 관람. 집안일이나 아이들을 돌보는 일은 모두 가정부에게 맡겼다. 어머니는 영화를 보기만 해도 울음을 왈칵 터뜨릴 정도로 감수성이 예민해 자녀들에게는 조금 당황스러운 타입이었다고 한다.[13] 유미는 어른이 되어서야 비로소 어머니를 받아들일 수 있었다. 그녀가 만든 곡 중 일부 가사 속에는 어머니에게서 느꼈던 여자의 질투와 시기심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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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머니의 대역과도 같았던 미야바야시 히데코 |
2.2. 데뷔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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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톨릭 유치원에 다니기 시작한 그녀는 자립심이 왕성한 아이였다. 초등학교에 입학한 해 6월부터 시작해 중학교 1학년까지 피아노를 배웠는데, 연주회 무대에서는 연습 때와는 전혀 다른 독창적인 실력을 선보였다고 한다. 2년 정도 샤미센을 배웠으나 다리가 마비될 수 있다는 이유로 그만두었다. 공부는 노력하지 않아도 초등학교 내내 1등을 놓치지 않았으며 부모가 장차 의사로 키우고자 했을 만큼 신동으로 불렸다.
음악에 본격적으로 눈을 뜬 중학교 시절, 당시 재학 중인 미션스쿨 릿쿄 여학원(立教女学院)[15]은 개신교로, 매일 예배 시간이 있었고 주일 예배도 의무였다. 예배당에는 파이프오르간이 있었는데 그곳에서 들은 요한 제바스티안 바흐의 토카타와 푸가(BWV 565)는 처음으로 그녀에게 충격을 주게 된다. 그렇게 학교 성가대에 들어가 클래식에 자연스럽게 스며드는 한편, 후지 테레비의 일본 최초 서양음악 프로그램을 통해 프로콜 하럼의 A Whiter Shade of Pale에 매료된다. 이 곡이 그녀 인생의 전기가 되었고, 그때부터 작곡을 시작했다. 음악 외에도 그림을 좋아했기에 미대를 목표로 과외도 받고 입시 미술학원에도 다니기 시작했다.
집이 있는 하치오지시에서 학교가 있는 미타카시, 학원이 있는 오차노미즈를 오가는 바쁜 하루의 연속이었다. 거리가 거리인 만큼 여러 곳에서 놀기도 했는데, 밤에는 가발로 자는 척을 해놓고 각 계 각 층의 유명인이 드나드는 이탈리안 레스토랑[16]과 디스코에 출입했다. 본인의 방 2층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나선형 계단으로 몰래 빠져나와, 버스를 타고 1시간씩 걸어 롯폰기와 긴자를 오가며 아침까지 신나게 춤추고 첫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학교에 갔다. 그때부터 디스코 그룹사운드의 무슈 카마야츠, 호소노 하루오미, 마츠모토 타카시 등을 포함한 많은 뮤지션과 안면이 트이기 시작한다. 그녀의 나이 중학교 2학년 때의 일이다.
그녀는 그룹사운드 중 하나인 'The Fingers'의 팬이었다. 부유한 집안의 자제들이 모여 만든 밴드로 <慶応のボンボンバンド(게이오의 봉봉밴드)>라고도 불렸다. 이 밴드에서 베이스를 맡은 중국계 일본인 사업가 시유 첸(Sy Chen)과는 특히 친하게 지냈다. 고등학생이 된 그녀는 어느 날 첸에게 자신이 부른 자작곡이 담긴 카세트 테이프[17]를 건넸고, 이 연주를 들은 첸은 16살 소녀가 만든 곡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훌륭한 피아노 선율과 세밀한 가사에 큰 충격을 받는다.[18] 첸은 그 녹음테이프를 업계 사람에게 소개했고, 무라이 쿠니히코 귀에도 들어가면서 몇 곡이 레코드화되었고 그녀는 알파 레코드 소속 작곡가가 된다. 이 시기에 그녀가 한밤중에 가위에 눌려 흉상이 염소인 남성에게 성공을 약속받았다는 신비로운 경험을 했다고 한다.
음악계의 발을 내디딘 그녀는 불안정한 직업에 종사할 결심을 할 리 만무했다. 아직 고등학생인데다 작곡가나 음악가라는 직업은 본격적이지 않았기 때문에, 중학생 때부터 공부해 온 그림 실력을 살려 도쿄예술대학 일본화 전공으로 진학하기로 결심한다. 일본화라면 유젠 염색에도 도움이 되고 기모노 디자이너가 된다면 가업에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일이었다. 냉정하게 현실적인 진로 선택을 한 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는 디스코에도 일절 가지 않고 첸과도 만나지 않았다.
열심히 입시 준비를 했지만 아쉽게도 3차 실기시험에서 예술대학의 꿈은 무너진다. 낙담하며 울면서 재수하겠다고 말해보았지만, 부모의 설득으로 먼저 합격한 2지망이었던 타마미술대학 회화학과에 입학하게 된다. 대학에 다니기 시작한 그녀는 작곡가로서 알파 사무실에 매주 출근하며 곡을 써 내려갔다.
그러던 중 무라이 쿠니히코가 그녀에게 직접 노래를 불러볼 것을 제안한다. 처음에는 가수로 데뷔 시키려는 계획은 없었다. 그러나 곡 자체가 새로웠기에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도 새로워야 한다고 생각했고, 녹음테이프에서 들었던 그녀의 목소리와 창법이 매우 매력적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또한, 당시 미국에서 캐롤 킹의 Tapestry가 대성공을 거두면서 싱어송라이터의 시대가 열리고 있었기에 그녀를 일본의 캐롤 킹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 제안에 그녀는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직접 노래를 부를 생각은 단 한 번도 없었고, 곡에는 자신이 있었지만 노래를 잘 부르지 못했다. 그러나 이 제안을 거절하면 자신의 곡을 발표할 기회가 두 번 다시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고민 끝에 가수가 되기로 결심한다. 딸의 연예계 진출을 반대하는 그녀의 부모를 설득하기 위해 무라이 쿠니히코와 스태프들이 하치오지까지 여러 차례 찾아갔다고 한다.
2.3. 아라이 유미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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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재도 명곡으로 회자되는 고등학생 때의 작곡한 데뷔곡 'ひこうき雲(비행기 구름)' | ▲ 만 19세에 작곡한 'やさしさに包まれたなら(상냥함에 감싸이면)' |
그렇게 1972년 18살의 나이로 返事はいらない(답장은 필요없어)를 발매하며 '아라이 유미' 명의로 데뷔한다. 이 싱글은 300장 밖에 팔리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는 희귀 싱글이 되어있다.
1973년, 현재도 일본 대중음악사의 걸작으로 아직도 회자되는 앨범 ' ひこうき雲(비행기 구름)'을 발매하였고 1975년 싱글 'あの日にかえりたい(그 날로 돌아가고 싶어)'가 첫 오리콘 차트 1위를 하며 제1차 붐을 맞는다.[19] 당시 그녀의 음악은 일본 음악계의 충격을 줬다고 한다. 당시 일본 음악계는 소위 ' 다다미 넉 장 반 포크'라 불릴 만큼 포크송 전성시대였고, 그런 시절의 세련된 팝적인 감각의 아라이 유미의 노래는 많은 음악 팬들과 뮤지션들에게 충격을 줬다고 한다. 이때부터 그녀는 천재 뮤지션 타이틀을 얻게 된다.
1976년은 아라이 유미 시절 인기의 절정이었던 해로, 베스트 앨범인 YUMING BRAND가 연간 앨범 차트 3위에 이르렀다. 이 외에도 앞서 발매한 정규 앨범 3개가 모두 연간 차트 15위권 안에 드는 등 1976년은 그녀의 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전 해 발표한 싱글 あの日にかえりたい는 1976년 연간 싱글 차트 10위를, 1976년 초에 발매한 翳りゆく部屋(희미해져 가는 방)[20]는 동년도 연간 싱글 차트 43위를 기록했다.
이 시절 아라이 유미는 맑고 고운 캐롤 킹 풍의 부드러운 팝 스타일의 어쿠스틱한 음악으로 주목받았다. 핫피 엔도의 멤버였던 호소노 하루오미[21]와 스즈키 시게루가 결성한 밴드 틴 팬 앨리(ティン・パン・アレー)가 데뷔 때부터 백밴드를 맡았는데, 이에 힘입어 커다란 인기를 얻었다. 틴 팬 앨리 외에도 코즈믹 라라바이(コズミックララバイ)가 백을 연주하기도 했다.
그녀가 아라이 유미라는 이름으로 활동한 것은 불과 4년밖에 안된다. 이 시대의 발매한 4개의 정규 앨범( ひこうき雲, MISSLIM, COBALT HOUR, 14番目の月)은 모두 일본 음악계의 대표적인 명반 혹은 수작으로 꼽히고 있다. 음악적으로는 이 시기가 그녀의 전성기라고 평가하는 사람들이 있을 정도로, 지금까지도 일본에서 계속해서 회자되는 명반과 명곡들을 발표했다.
아래에는 아라이 유미 시절 그녀의 성장 과정을 적었다.
2.3.1. 1972년
무라이 쿠니히코는 유미의 데뷔곡 음악 프로듀서로 무슈 카마야츠[22]를 기용했다. 유미가 중학생이었을 때부터 친구 같은 사이로 지냈고 경험도 풍부한 데다가 새로운 것에 민감한 감성을 지녔기 때문에 그녀와 잘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했으나, 그녀는 자신만의 비전을 확고히 주장했다. 무슈는 대강 불러도 좋다며 계속 띄워주었지만 본인 스스로가 납득이 안 됐는지 타협이 되지 않았다. 무슈는 그런 그녀를 이해했고 이후 스튜디오도 편안한 분위기로 흘러갔다고 한다.[23]그렇게 7월 5일 그녀의 첫 데뷔 싱글 앨범을 발매했다.[24] 풋풋한 서해안풍 사운드에 어쿠스틱 기타 중심인 포크송이면서도 누구도 들어보지 못한 장르의 이 앨범은, 뮤지션들 사이에서의 평판은 좋았지만 300장밖에 팔리지 않아서 그녀 자신은 흑역사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무라이는 대중들 앞에서 노래하는 것에 거부감을 느끼는 유미가 레코딩 경험을 통해 두려움과 서투름이 누그러지면 좋겠다는 생각이었기 때문에 이 결과를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알파 스튜디오가 새로 만들어진 시기인 1972년 후반, 무라이는 그녀의 다음 앨범 제작 가능성에 대해 레코딩 감독인 아리가 츠네오와 함께 타진해 보기로 했다. 그녀는 피아노 연주를 하며 비행기구름(ひこうき雲), 비 내리는 거리를(雨の町を), 종이비행기(紙ヒコーキ)를 들려주었다. 긴장한 듯 간간이 흐릿한 서툰 노래솜씨와는 별개로 지금껏 그 누구와는 전혀 다른 멜로디와 글자 하나하나가 삶을 응축하듯 그려진 시적인 감각의 가사, 세련되고 매력적으로 느껴지는 노래방식이 그들을 사로잡았다. 그녀는 악보 10곡을 더 가져왔고 이내 앨범 제작이 결정되었다.[25]
2.3.2. 1973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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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 호소노 하루오미, 마츠토야 마사타카, 스즈키 시게루, 하야시 타츠오 |
녹음이 시작되기 전, 그녀는 캐러멜 마마 멤버 네 사람과 면담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때가 후에 남편이 되는 마츠토야 마사타카와의 첫 만남이다. 1973년 초, 그녀의 대학교 1학년 시절이 끝나갈 무렵부터 녹음이 개시되었다.
캐러멜 마마 멤버들은 각자의 파트에서 저마다 개성을 발휘했다. 순조롭게 진행되는 녹음 풍경이 바로 무라이가 그린 캐롤 킹의 자유로운 라이브 세션과도 같았다. 이윽고 그녀도 캐러멜 마마 사운드에 익숙해졌고 점점 자신의 목소리와 맞는다고 생각하게 되면서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융합되어갔지만, 얼마 안 가 큰 난항을 겪게 된다.
세션 녹음은 원만히 끝나가는데 그녀의 보컬 문제는 전혀 진전되지 않았던 것. "음반은 영원히 남는 것이니까 완벽에 가깝게 만들어야 한다."라는 무라이의 주장이 있어, 그의 책임을 맡은 아리가 츠네오가 유미를 매우 엄격하게 대하기 시작했다. 발성법, 특히 음정이 어긋나는 것은 용납하지 않았다. 세 테이크 정도 녹음하고 그중에서 좋은 것만 골라 테이프를 연결했다. 그녀는 "그렇게 해서는 감정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며 스튜디오 한구석에서 울기도 했다고 한다. 계속해서 녹음을 반복하는 아리가 츠네오를 보며 마츠토야 마사타카는 "아라이씨 특유의 논 비브라토[27]는 가수로서의 장점이니 그대로 두는 게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몇 번이고 녹음을 반복하다 보면 감정도 없어질뿐더러 깊이도 없어진다. 가수가 가지고 있는 정서를 억지로 떼어내는 것은 좋지 않다."고 옹호했지만, 아리가 츠네오는 일말의 표정 변화 없이 "앨범은 계속 남는 거니까 똑바로 불러주세요."라며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무라이도 엔지니어인 요시자와 노리오에게 “믹스의 밸런스가 안 맞네” 등으로 재작업을 요구했고 급기야 제작 회의에서 "완벽한 것이 마무리 될 때까지 아라이 유미의 앨범을 내지 않겠다."라고 단언하면서 크게 지연되어 버린 스케줄은, 완성일을 정하지 않기로 했다. 자체 스튜디오를 사용하다 보니 비용적인 측면에서는 여유가 있었지만,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에 빠져버린 녹음에 불안해하는 직원들도 많았다고 한다. 사실 무라이가 이렇게까지 완벽을 추구하는 이유는 따로 있었는데, 알파 소속인 가로[28]의 인기가 식고 있던 데다가 붉은 새[29]까지 해체설이 나돌았던 것이었다. 누군가를 새로운 스타로 만들기 위해 아라이 유미라는 도박에 전 재산을 걸고 있었다.
많은 난관과 우여곡절 끝에 1973년 가을, 모든 녹음을 마쳤다. 1년에 걸쳐 만들어진 ひこうき雲는 발매 예정이 두 번 정도 늦춰진 11월 20일 도시바 EMI에서 발매했다. 무라이는 곡의 신선함과 캐러멜 마마 밴드의 뛰어난 세션을 도시바 측에 강조했으나 쭉 가요계의 길을 걸어온 베테랑 담당자는 가사의 난해함과 가창력을 문제 삼았다. 결국 제시된 프레스는 3,000장. 장르가 너무나도 새로운 쪽에 속했는지 어느 레코드점에서도 주문이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문제는 콘서트였다. 그녀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불러본 적이 거의 없던 것이다.[30]가수로서 익숙해지려면 기회를 밟는 수밖에 없었다. 다음 달인 12월 26일, 무라이 쿠니히코 슈퍼세션 'Introducing Yumi Arai'가 열렸다. 가로와 무슈 카마야츠 등의 응원 출연을 얻어 장소는 시부야 파르코 세이부 극장으로 정해졌다. 업계 관계자들에게 선보이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티켓 판매에는 힘을 쓰지 않았다. 무라이가 말하길, 이날 팔린 입장권은 단 2장 뿐이라고 한다.
그날 밤, 그녀가 무대에 등장해 스포트라이트를 받자, 객석은 술렁거렸다. 당시 싱어송라이터들은 청바지에 티셔츠가 정석이었는데 그녀는 세련된 재질인 타카라젠느의 새하얀 정장 차림이었다. 중학생 시절부터 그녀를 아끼던 이탈리안 레스토랑의 카와조에 카지코가 생 로랑의 의상을 준비해 준 것.[31] 이날 백밴드는 마츠토야 마사타카가 결성한 '파파 레몬'이었는데 마사타카 회상에 의하면 첫 데뷔 무대는 산산조각이 났다고 한다. 다섯 곡을 부를 예정이었지만 첫 곡인 비행기구름을 부르다가 도중에 막혀 이어진 나머지 네 곡이 모두 밴드만의 연주가 되고 말았다. 가사를 잊어버린 것일까. 감정이 북받쳤는지 계속 울고 있었다.[32]
2.3.3. 1974년
그녀가 첫 데뷔 무대를 마쳤을 무렵, 심야방송인 ‘팩 인 뮤직’에서 ベルべットー・イースター(벨벳 이스터)가 매주 금요일마다 흘러나오고 있었다. 이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자는 TBS 아나운서인 하야시 요시오.[33] 당시 인기 디스크자키였으며 히트 차트나 화제가 되는 음반에는 관심을 보이지 않고 자신의 음악 취향에 맞는 곡을 틀었다. 먼저 비행기구름의 샘플 음반을 미리 들어본 다음, 그 매력을 모두에게 알리기 위해 발매와 동시에 틀어놓기 시작했다. 얼마 후, 라디오를 들은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미의 열성 팬이 생기기 시작한다. 도쿄도 오기쿠보에서 팬클럽이 만들어졌고 회원은 200여 명에 달했다. 나중에서야 올라온 팬클럽 회장의 블로그 글에서 "벨벳 이스터의 전주를 처음 들었을 때 외국곡인 줄 알았어요. 유밍이 프로콜 하럼을 좋아한다는 말을 듣고 ‘아, 그렇구나’하고 납득했습니다. 라이브도 자주 갔어요. 지금도 기억나는데, 낮 시간대의 시부야 장장[34] 티켓값은 300엔이었어요. 관객은 20명 정도. 이렇게나 노래를 못 부르는구나! 하고 깜짝 놀랐어요. 함께 출현한 슈가 베이브의 오오누키 타에코나 야마시타 타츠로의 목소리가 더 좋다고 생각하면서 듣고 있었습니다."라는 회상이 적혀 있었다. 서툴러도 그녀는 자신의 노래를 계속 스스로 불러갔으며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위해 NHK 프로그램 오디션을 세 번 만에 겨우 합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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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돌아와서, 업계적인 선보이기가 끝난 후 본격적인 데뷔 콘서트를 연 것은 이듬해 4월이었다.[38] 장소는 교토 염색회관. 교토에 아라이 오복점의 기모노 관련 거래처나 지인이 많아 초청자가 많을 것으로 판단한 것이다. 하지만 객석 수는 760석. 무명 가수였던 그녀에겐 도저히 채울 수 없는 자리였다. 무라이는 이전에 그가 출연한 영화 음악을 담당한 적이 있는 카츠 신타로에게 동원을 부탁하자 "그래 알았어, 걱정하지 마. 몇십 명이라도 데리고 갈 테니 내게 맡겨 둬."라며 호쾌한 목소리를 들려주었다. 이날은 역시 아라이 오복점 관계자들의 기모노 차림과 카츠 신타로가 데려온 게이샤와 영화 동료들 모습이 눈에 띄었다. 딱 봐도 그녀의 진정한 팬은 많지 않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콘서트가 중반에 이르렀을 때 카츠 신타로가 어두운 공연장 가운데서 서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흥이 부족하다고 느낀 듯 “나도 노래하자”라며 스테이지에 올라가려고 하는 것이다. 무라이는 필사적으로 말리며 "첫 리사이틀이니, 본인에게 맡겨둡시다."라고 정중히 거절하자 "맞는 말이야."라며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자리로 돌아갔다는 일화가 있다.
교토 공연 후, 일행들은 그 길로 고난대학에서 캠퍼스 콘서트를 열었다. 그녀는 여전히 긴장이 풀리지 않은 듯 내레이션도 부자연스럽고 평소 대화에서 자주 말하는 소소한 이야기나 말장난이 어색하게 흘러나왔다. 그녀는 갑자기 “ 감기 기운이 있으니 실례하겠습니다.”하고 피아노 의자에 앉은 채 코를 풀었다. 그 소리가 공연장에 울려 퍼졌고 그대로 분위기가 확 바뀌며 "와~"하고 박수갈채 소리와 "힘내세요!" 등의 환호가 터져 나왔다. 그녀도 완전히 긴장을 풀고 콘서트는 좋게 마무리되었으나, 도쿄 야쿠르트 홀[39]에서 열린 세 번째 콘서트는 연고 동원이 없어서인지 티켓이 절반도 팔리지 않아 스태프들이 총출동해 친구, 지인, 친척들에게 팔아넘겼다. 그래도 처리하지 못해 급히 라디오 방송국을 중심으로 홍보에 나섰다. 비장의 카드는 역시 하야시 요시오의 팩 인 뮤직. 새벽 3시가 넘어 그녀가 게스트로 출연했다. 하야시는 열띤 목소리로 "아라이 유미의 데뷔 콘서트에 모두 함께 가자!"라고 호소했다. 그 덕분인지 당일은 봄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에도 불구하고 만석이 되었다. 이후 그는 프로그램 편성으로 인해 팩 인 뮤직에서 하차하게 된다. 마지막 방송 시작 전에 유미가 스튜디오에 나타나 旅立つ秋(떠나는 가을)의 테이프를 남기고 돌아갔다. 이 곡은 그날 밤 방송되었고, 2집 앨범인 MISSLIM에 수록됐다.
교토와 도쿄 콘서트에 온 관객들의 평가는 다양했다. 그녀의 음악 세계를 무겁게 받아들이는 사람, 잘 모르겠다는 사람, 취향이 아니라며 말끝을 흐리는 사람, 가사와 멜로디는 새롭지만 노래가 좀 그렇다는 사람도 있었다. 그녀의 음악이 가진 본질적인 새로움을 이해한 것은 소수의 팬뿐이었고 대다수 사람들은 그녀를 흔한 싱어송라이터 중 한 명에 불과했다. 이후 그녀는 캠페인, 팬사인회, 잡지 인터뷰, 여러 그룹과 가수가 공동 출연하는 행사, 라디오 게스트 출연 등 적극적인 홍보 활동을 펼쳤다. 지방 캠페인에서는 상가에 있는 작은 레코드점 앞이나 슈퍼마켓에서도 노래를 불렀다. 한번은 센다이시의 엔도 체인점 팬티 매장 옆에서 손님을 부르는 데 쓰이는 확성기를 마이크 대신 건네받기도 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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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대 입시 시절 그린 작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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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타마미대 재학 시절 그린 작품 |
그런 가운데에도 그녀는 두 번째 앨범을 준비했다. 함께 수록된 海を見ていた午後(바다를 보고 있던 오후)는 요코하마의 카페 레스토랑 돌핀에서 쓴 것. 중학생 시절에 첸이 대마초로 체포된 적이 있었는데 그가 갇힌 외국인 수용소가 돌핀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를 동경하던 유미는 자주 면회를 가기도 했다. 항상 혼자 와서 바다가 들여다보이는 유리창가 자리에 앉아 노트에 가사를 적었고 해 질 녘까지 바다를 계속 바라보기도 했다. 그 무렵에는 비행기구름의 판매량이 정체된 상태였다. やさしさに包まれたなら(상냥함에 감싸인다면)도 반년 전인 4월에 세 번째 싱글로 발매되어 후지야 소프트 에클 레어 CM송으로도 채택되며 인기의 도화선이 될 것으로 기대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MISSLIM의 레코딩은 7월부터 시작되었다. 음악 프로듀서는 마츠토야 마사타카. 아리가 츠네오는 변함없이 엄격한 자세였지만 비행기구름 때와는 달리 단기간에 끝마쳤다. 재킷 사진은 카와조에 카지코 자택에서 촬영했다. 제목은 MISS와 SLIM의 조어로 유미의 날씬한 외모[42]에서 따온 것.
10월 5일 MISSLIM과 싱글 앨범 12月の雨(12월의 비)가 발매됐다. 그 해 연말, 잡지 뉴뮤직 매거진에서는 음악평론가들이 뽑은 올해의 베스트 앨범을 선정했는데 서양음악 및 재즈평론가들은 에릭 클랩튼이나 스티비 원더 등을 꼽았지만, 오구라 에이지는 “단 한 장으로 따지자면 단연 유밍.”이라고 평가했다. 그러자 그들에게 조롱을 당했다고 당시를 회고하였다. 또 다른 음악평론가 하기라와 겐타도 미쓰림이야말로 70년대 초의 일본 팝을 대표하는 걸작이라며 극찬했다.
이후 그녀는 매달 시부야 장장에서 브레드&버터[43]와 합동 라이브를 펼쳤다. 소극장이었지만 달이 갈수록 관객이 늘어 연말에는 만석으로 가득 찼다.[44] 객석의 열기도 뜨거웠고 숨죽여 바라보는 시선과 한 소리도 놓치지 않으려는 진지함이 느껴졌다. 하지만 이 인기도 도쿄의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2.3.4. 1975년
12월의 비는 화제가 됐고 미쓰림도 발매된지 한 달 후에 차트 36위까지 올랐지만, 그 이후로는 부진했다. 일본 음악계의 충격을 준 비행기구름과 미쓰림의 판매량도 훨씬 저조했다. 비행기구름에 수록된 곡은 모두 16세 이전에 썼으며 미쓰림의 상당수 또한 10대 때 쓴 것이었다. 즉 곡의 재고는 이제 모두 소진되었다는 소리. 더 이상 10대가 아닌 본인은 '벨벳 이스터'이나 '비 내리는 거리를' 와도 같은 감성적인 곡을 쓸 수 없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애를 써도 두 앨범은 폭넓은 지지를 얻지 못했다. 그녀는 팔리는 곡을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기세로 자신의 다양한 가능성을 실험해 보기로 한다. ‘섬세한 마음의 움직임보다 많은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명쾌한 팝송을 쓰자. 완벽하지 않아도 된다. 거기서부터 다음 높이가 보일지도 모르니까.’라는 생각으로 재출발의 시동을 걸었다. 그녀는 집에 돌아오자마자 오빠가 가지고 있는 LP를 닥치는 대로 들었다. 그러자 엘리자베스 테일러의 영화가 떠오르면서 거울에 작별의 인사를 쓰고 집을 나가는 장면을 머릿속으로 그려가며 써 내려갔다.[45] 그렇게 순식간에 완성된 곡이 바로 ルージュの伝言(루즈의 전언)이다.2월 20일, 세번 째 싱글 루즈의 전언이 발매됐다. 그녀의 팝적인 멜로디는 아메리칸 팝을 연상시켰고 경쾌한 리듬은 닐 세다카 풍의 스타일이었다. 이전의 내성적인 곡들과는 확연히 달라진 루즈의 전언은 대히트를 쳤고 그때부터 그녀의 인기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곡 자체는 귀에 쏙쏙 들어오는 매력이 있지만 가사의 내용은 단순한 러브송이 아니었다. 리듬의 편안함에 이끌려 노래의 세계로 들어가보면 꽤나 심각한 남녀의 트러블이 그려져 있었다. 이전에도 일본어로 번역된 올드팝은 있었지만, 순수창작으로 만들어진 유밍식 팝이 10대, 20대에게 받아들여진 것은 처음이었다.
COBALT HOUR는 6월 20일에 발매되었다. 이 앨범의 구성은 루즈의 전언과 마찬가지로 폭넓은 공감을 얻을 수 있는 시티 팝집으로 완성됐다. 사소설적인 점이 많았던 전 두 앨범에서 그녀는 빠르게 방향을 틀어 올드 패션 분위기인 1940년대~ 1960년대의 아메리칸 음악을 지향했다. 그때부터 그녀는 마음의 풍경 방향이 아닌, 누구나 알 수 있고 팔리는 음악을 목표로 했다. 같은 해 7월 14일 마침내 히트 차트 베스트 텐에 진입해 6위에 올랐으며 반년 뒤 あの日にかえりたい(그날로 돌아가고 싶어)가 초대박을 터뜨린 것이 소급되어 첫 앨범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이후 그녀는 무서운 속도로 거대하게 성장해 나간다.
한 편, 데뷔 때부터 그녀의 노래를 지지해 온 팬들은 당황스러웠다. 루즈의 전언과 코발트 하워는 그동안의 곡조와 너무나 큰 차이가 난 것이다. 오기쿠보 팬들은 실망했다. 왜 그녀가 굳이 60년대 아메리칸 팝의 유사품을 만들어야 했는지, 그럴 거면 왜 기존 음악 세계에 발을 들여놓은 건지. 조금이라도 눈에 띄기를 바라며 레코드점에서 유미의 앨범을 맨 앞에 진열해 놓은 팬들은 바보가 된 기분이었다. 창작 시간이 한정적이었던 것인지 코발트 하워의 구성이 엉성하다고 느낀 이들도 있었다. "우리에게 유밍은 비 내리는 거리를처럼 마당에 있는 코스모스 한 송이로 풍경을 보여 줄 수 있는 사람이었다.[46] 듣다보면 떨림이 오는 게 어느 곡에나 있었다. 그러나 유밍은 매우 세련되고, 스마트하게 변해버렸다."라는 말을 남기며 팬클럽은 해산되었다.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오랜 시행착오 끝에 마침내 히트곡을 낼 수 있었다. 앨범은 오래 남는 것이니까 뮤지션 이상의 시간을 들여 보다 더 좋은 작품을 만들고 싶었다. 하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의 판매량을 남기지 않고서는 나의 위치와 창작 활동을 결코 지킬 수 없었다. 나는 현실과 필사적으로 씨름을 하고 있다. 팬들의 간섭을 받을 이유는 없다."라고.
그녀는 코발트 하워 발매 전부터 전국 투어를 진행하고 있었다. 4월부터 시작된 투어는 끝없이 이어져 8월 어느 날 과로[47]로 인해 이른 아침 하네다 공항에서 쓰러지는 일이 발생한다. 그러나 이날 노베오카 콘서트를 강행했고 구루메시, 후쿠오카시, 가고시마현, 오무타시, 토쿠야마시로 이어지는 빡빡한 스케줄에도 필사적으로 소화했지만, 9월에는 끝내 콘서트를 취소할 수밖에 없었다.
이 무렵에는 '긴자 Now!'[48]등 TV 출연도 늘어났다. 낯선 방송국 환경이 특히 힘들었다고 하는데[49] 스튜디오에 들어서면 연예 관계자들이 적대적인 눈빛으로 그녀를 노려봤다고 한다. 방송국, 연예기획사, 음악 출판사, 작사가, 작곡가들은 일종의 카르텔을 형성해 막대한 이익을 분배하고 있었다. 그 안에 속하지 않은 싱어송라이터들은 기존 연예계를 위협하는 존재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녀를 향한 적개심을 품고 있었다. 게다가 같은 여성 싱어송라이터인 이츠와 마유미와 자주 비교됐다. 같은 프로그램에 나와 똑같이 피아노를 치기 시작하면 이츠와는 선이 굵고 노래를 잘했으며 침착하고 차분하게 잘 소화해 냈으나, 반면 유미는 선이 가늘고 노래가 서툴렀다. 프로그램이 끝나면 항상 한껏 우울해지곤 했다. 어느 날 그녀는 콘서트를 학예회처럼 하겠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무대에서 노래하는 것 자체가 부끄러웠던 그녀에게 차라리 구경거리로 삼으면 보컬의 약점과 긴장감을 감출 수 있었다. 사실 작년 아라이 유미 크리스마스 콘서트에서 이 방법은 진작 시작되었으며 무대에 자전거를 타고 등장하는 등 이 무렵부터 그녀의 라이브 퍼포먼스는 바뀌었다. 웬만하면 피아노를 치지 않고 핸드마이크를 쓰며 춤추고 노래하는 일이 많아졌다. 패션도 상당히 남달랐는데, 여성 싱어송라이터의 정석이었던 검은색 롱스커트에 긴 생머리 이미지를 깨버리고 빨간 망토를 걸치거나 점프슈트 등 화려한 의상을 입고 뛰어다녔다.[50] 일종의 코스프레이다. 남편 마츠토야 마사타카는 "그녀가 대중성과 화려함을 좋아하는 건 장모님 영향일 거예요. 다양한 연극을 보는 걸 좋아하셨으니까요."라고 말한 바 있다.
어느 날 외주로부터 알파 사무실에 의뢰가 들어왔다. 의뢰자는 마에다 히토시.[51] 유미에게 포크 듀오 '방방(Bang Bang)'의 곡을 써달라는 것이었다. 그들은 앨범이 팔리지 않아 차기작도 안되면 해체되는 상황에 놓여있었다. 유미는 마에다에게 어떤 곡이 좋겠냐고 물었고 그는 곤경에 처한 방방의 상황을 이야기하다가, 대학을 졸업한 지 5~6년이 지났는데도 여전히 들끓어 오르는 것이 있다며 왠지 자신의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와세다대학 시절 등록금 인상 반대 학생운동에 참여해 상사 취업 내정이 무산되는 쓰라린 경험부터 해서 그 당시 함께했던 여자친구 이야기 등 생각나는 대로 늘어놨다. 가만히 듣고 있던 그녀는 미국 청춘 영화 '딸기 백서'(The Strawberry Statement) 줄거리를 꺼냈다. 컬럼비아 대학교의 대학 분쟁을 바탕으로, 갈등이 격화된 캠퍼스에 경찰이 난입하면서 결국에는 연인이 찢어지는 논픽션 영화였다.[52]
그로부터 2주 후, 그녀는 『いちご白書』をもう一(『딸기 백서』를 다시 한번)을 써 왔다. 본인이 직접 경험한 것이 아니었지만 마에다의 학생운동 이야기를 잘 녹여냈으며 방방의 캐릭터 또한 잘 살린 곡이었다. 70년대 초반 학창 시절 풍경의 감상적인 분위기도 묻어나왔다. 이전까지의 그녀 작풍과는 다른 완성도는 작가로서의 비범한 재능을 다시 한번느끼게 했다. 하지만 실제 학생운동을 경험한 세대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학생운동은 그렇게 달콤한 것이 아니며 실패나 전향을 쉽게 노래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다. 그런 순진무구한 영화를 소재로 삼았다는 것에 대한 반발도 있었다.
그해 여름, 인기 만화가 하나무라 에이코[53]의 작품을 기반으로 한 드라마 '가정의 비밀'이 TBS에서 방영되기 시작했다. 치프 디렉터 후쿠다 신이치[54]는 당시 치바대학 학생이었던 하기오 미도리를 캐스팅했다. 하기오는 유미와 동갑이여서 그런지 그 음악성에 공감하고 있었고, 음악에 대한 조예가 깊었던 후쿠다에게 비행기구름을 추천해 준다. 삽시간에 그녀의 노래에 빠진 후쿠다는 유미에게 드라마 주제가를 맡기고 싶어 한다. 곧바로 프로듀서인 히나타 히로유키에게 비행기구름을 들려주자 "뭔가 불경같네. 구절도 없고, 난 이런 건 싫어."라며 이해하지 못하는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포기하지 않고 "주제가는 새로운 느낌으로 가겠습니다. 저에게 맡겨주세요."라며 히나타를 설득했다. 그녀는 큰 기회를 잡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매주 흘러나오는 드라마의 주제가는 한번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으면 단숨에 승승장구하기 때문. 이후 후쿠다와 연출팀으로부터 드라마의 하이라이트와 그 장면에 필요한 음악 분위기를 듣고 곡을 썼다. 그러나 가사와 드라마가 맞지 않아 한 번 거부당했고 그 후 수정되며 완성한 곡이 あの日にかえりたい(그날로 돌아가고 싶어)이다.[55] 원작자 하나무라 에이코는 "장편 연재로 파란만장한 내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것이 가사 속에 담겨있었어요. 장면도 미묘하게 묘사 되어있어서 정말 놀랐습니다."라며 감탄을 자아냈다.
이 싱글은 드라마가 절반 지점에 이른 10월 5일에 발매됐다. 발매가 이 시기로 미뤄진 이유는 그녀가 지방 콘서트 등으로 바빠 녹음 조정이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드라마 촬영이 막바지에 접어들 무렵, 마지막 홋카이도 로케이션을 진행했다. 시코츠호로 향하는 노선버스 안에서 지역 라디오 방송국 가요 프로그램에 그날로 돌아가고 싶어가 흘러나왔다. 요청 엽서에 의한 히트 랭크 1위로 소개된 것이다. 히나타 히로유키는 "아, 드디어 1위구나. 그 프로그램을 내가 하는구나."하고 남의 일처럼 생각했다고 한다. 그러나 가사가 급조적이고 직설적이라며 아라이 유미답지 않다는 비판도 있었다.
『딸기백서』를 다시 한번은 10월에 오리콘 차트 1위를 달성했으며 12월에는 6주 연속 1위를 차지했다. 10월에 발매된 그날로 돌아가고 싶어도 처음에는 70위에 머물렀지만, 이후 가파른 상승세를 이어가며 12월에 가수로서 처음 1위에 올랐고 2주 연속 정상을 유지하면서 그녀의 첫 넘버원 히트곡이 되는 등 작곡가로서 정점을 찍었다. 또한, 이전 앨범 비행기구름은 14위, 미쓰림은 8위, 코발트 하워는 1위를 차지하며 그녀의 작품들은 단번에 불이 붙기 시작했다. 데뷔 전부터 주변인들에게 "나는 반드시 유명해질 거야."라고 말해오던 그녀는 마침내 소원을 성취하며 새로운 시대의 깃발이 되었다.
2.3.5. 1976년
돌이켜보면 1975년은 루즈의 전언, 코발트 하워, 『딸기백서』를 다시 한번, 그날로 돌아가고 싶어를 발매한 해였으며, 12월에는 마츠토야 마사타카와 약혼을 하는 등 그야말로 순풍만범의 해였다. 그러나 그녀의 속사정은 달랐다. 이 해에는 알파와의 알력 문제가 있었다. 계약에 따른 앨범 제작과 투어가 있었고 더불어 같은 소속사인 하이 파이 세트와 이시카와 세리 등에게 곡을 줘야 했다. 심지어 열심히 일해도 그 돈이 다른 아티스트 육성에 쓰이기까지 했다. 그녀 혼자 수레바퀴를 굴리는 것이나 다름없었던 것. 딸기백서를 다시 한번과 그날로 돌아가고 싶어 역시, 비판을 각오하며 본의 아닌 스타일로 쓴 것이었다.그녀는 알파를 그만두고 싶었다. 그러나 회사의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아 정상에 오른 그녀가 떠나면 알파가 기울어진다는 걸 알았다. 지금까지 들인 홍보비는 어떻게 할 것이냐는 비난까지 받으며 본인의 반대를 무릅쓰고 베스트 앨범 YUMING BRAND도 발매했다. 그날로 돌아가고 싶어가 히트될 때쯤 그녀의 열정은 이미 사그라들고 있었다. 1년에 정규앨범 2장을 발매해야 했지만, 코발트 하워 이후 이듬해 14番目の月까지 1년 반 동안 새 정규앨범을 내지 않았다. 정신상태도 좋지 않았고 결혼하면 다른 지평이 열리리라 생각했다. 결혼은 현실 도피였다. '이제 사람들 앞에서 노래하지 말자. 부탁이 있으면 그때 곡을 쓰자. 난 원래 작곡가가 되려고 했으니까.'라고 다짐하며 3월 타마미대를 졸업할 무렵에는 은퇴를 결심했었다.
파파 레몬의 히라노 하지메는 이미 백밴드를 그만둔 상태였지만 그의 저서에는 그간 사정을 짐작하고 있다. “유미는 주변 사람들을 배려하는 사람이었어요. ‘내가 내가’라며 앞에 나서는 타입이 아니었죠. 반걸음 정도 물러나서 사람들을 지켜보다가 적절한 타이밍에 참여해 분위기를 띄우는 스타일이었습니다. 그 타이밍이 절묘해서 상대가 뮤지션이든 스태프든, 다른 업종의 사람이든 상황의 균형을 유지하는 법을 알고 있었어요. 그녀는 분위기를 읽는 천재라고 추측합니다. 그래서 소속사와 실랑이를 벌인 것은 상당한 불신이 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요.”
그녀는 "수록곡 中央フリーウェイ(중앙 프리웨이)는 스스로 말하기 좀 그렇지만 굉장히 완성도가 높습니다. 이 정도 곡을 쓸 수 있다면 써보라는 자부심이 있었어요. 노래는 하치오지에서 썼는데, 완성됐을 때는 흥분됐습니다."라고 당시를 회고했다. 중앙 프리웨이는 조옮김을 여러 번 반복하며 만들어 낸 작품인데 조옮김을 반복하다 보면 대부분 뮤지션들은 출구를 찾지 못한다. 그녀 역시 이 함정에 빠졌지만, 마침내 완성해 냈다.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본 마츠토야 마사타카는 기적이 일어났다고 느꼈다.
14번째의 달은 아라이 유미의 마지막 독신 앨범으로 11월 20일에 발매됐다. 전작 코발트 하워에서의 아메리칸 팝 흐름을 따라가는 작품으로, 업 템포의 곡이 많고 사운드 적으로도 화려하며 곡 하나하나의 완성도도 높다. 이 앨범의 발매를 계기로 그녀는 알파를 떠났다. 이 무렵에는 모두가 그녀에게 변덕스럽다고 하거나 여러 여성 아티스트들에게는 '포스트 유밍'(ポストユーミン)이라는 말을 듣기도 하는 등 버림받고 버려지는 기분이었다고 한다. 포스트 유밍이라는 말이 굴욕적이었다. 살아있는데 묻혀버린 것 같았다. 변변찮은 가수들이 흉내를 내는 것도 참을 수 없었다. 그녀의 정신상태는 날이 갈수록 최악이었다.
녹음은 시바우라의 알파 스튜디오에서 진행했으며, 마지막 날은 믹스다운과 마스터링을 통해 음반과 같은 상태의 마스터 테이프를 만들어 어두운 스튜디오에서 의자를 나란히 놓고 시청회를 열었다. 친한 친구와 소수의 집안 식구 등 십여 명과 함께 새벽녘에 들은 14번째의 달은 마치 축제가 끝난 후의 묘한 분위기였다고.
2.4. 결혼
그녀가 처음 연습한 곡이 '
비행기구름'인데, 후렴구의 "카-케테-유-쿠-"하는 부분에서 B♭m7으로 넘어가는 코드 진행에 큰 충격을 받았다.[56] 이 코드로 나는
결혼을 결심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인생이란 그런 거다. |
비행기구름의 유명한 에피소드가 있는데, 몇 번을 불러도 잘 안되고 녹음할 날도 얼마 안 남은 상황에 마사타카 집 근처에 있는 이노카시라 공원을 둘이서 산책하던 중 좋아하는 꽃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유미는 달리아라고 대답했고 그다음 날 그녀가 '오늘은 오케이 받아야지'하고 굳게 마음을 먹으며 스튜디오에 들어섰을 때, 마사타카가 가져다 놓은 한 송이의 달리아가 피아노 위 우유병에 꽂아져 있었다. 그날 무사히 녹음을 마친 곡이 '비 내리는 거리를'이다.[59] 그녀는 어느 인터뷰에서 “이 일을 생각하면 눈물이 나니까”라며 말을 아꼈다. [60]
이후 마츠토야 마사타카는 아라이 유미의 레코딩에 깊이 관여하고 그녀의 재능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 자신은 음악으로 먹고 살 수 있다고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그것은 그가 고등학생 때부터 잘 알던 사실이었으며 혼자서 자립할 만큼의 재능이 없다는 것도 자각하고 있었다. ‘대학 졸업 후의 나는 사회의 적응하지 못하고 낙오자가 되는 것은 아닐까‘라는 두려움에 시달리는 건 일상이었다.[61] 그러던 와중에 아라이 유미를 만났고, 그녀와 그녀의 음악에 구원을 받았으며 드디어 자신이 하고 싶은 음악을 찾은 것 같았다. 이후 무라이 쿠니히코 인터뷰에서 "그녀의 콘서트에 항상 따라가는 것은 물론 하치오지의 집까지 매일 차로 데려다주고 본인들에게 전화하면 만나지 못하는 날은 꼭 데이트 하고 있었다"고 말할 만큼 아라이 유미와 마츠토야 마사타카는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없어서는 안 될 파트너가 된다.[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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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약혼 발표 당시 아라이 유미와 마츠토야 마사타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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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년 10월, 평소와 다름없이 녹음을 마치고 차로 그녀를 집으로 데려다주던 중 마사타카는 "올해 결혼하지 않으면 이대로 헤어지겠네"라고 중앙 프리웨이 가사 속에 언급된 후추를 지나치면 나오는 그녀가 좋아하는 풍경에서 청혼했다. 이후 둘은 약혼을 발표했고, 그때의 심정을 그녀 자서전에 담았다.
대연애였다. 오랜 연애였다. ― 자서전 루즈의 전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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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미는 결혼 전 마사타카의 생일 선물로 직접 뜨개질한 목도리를 주었고 그도 기쁜 마음으로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3년 후 그녀의 콘서트가 있었는데 마사타카는 무슨 생각인지 어트랙션에서 그 목도리를 경매로 출품해 버려 7만엔이라는 고액이 붙어 낙찰된다. 돌이킬 수 없는 짓을 저질렀다고 깨달은 것은 그로부터 몇 년이 지난 후였으며 그 일을 알게 된 주변 사람들은 ‘사람이 아니다‘라고 비난했고 그는 주변인들에게 참회하고 여기저기서 반성의 말을 전했다고 한다. 그 말을 들은 낙찰자는 목도리를 돌려보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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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적으로 그녀가 계속 활동을 이어오고 있는 결정적인 이유는 결혼식에서 후쿠다 신이치가 "만약 이걸 끝내고 계속 앨범 낼 때는 마츠토야 유미로 해줘. 그게 더 멋있으니까."라고 농담 식으로 얘기한 것을 피로연에서도 이를 미담으로 삼아 업계 관계자들 앞에서 연설하게 되었고, 가수를 그만둘 생각이었던 그녀는 더 이상 물러설 수 없게 되었다.
2.5. 마츠토야 유미 시대
1977년은 결혼 생활로 인해 정규 앨범을 발매하지 않고 콘서트 위주로 활동했으며, 1970년대 후반부터 1980년대까지 매년 두 장씩의 앨범을 릴리스함과 동시에 타 가수들에게도 곡을 제공하는 등 빠른 페이스로 음악을 만들어 낸다. 또한 리조트 등지에서 여는 콘서트라는 개념도 이 시기에 처음 도입. 이 분야에서도 황무지를 개척한 여성 아티스트로 평가받는다. 1980년 이후로는 기타 베이스의 잔잔한 멜로디로 포크송으로 대표되던 일본의 팝 음악을 도회적이고 세련된 뉴 뮤직류 음악으로 탈바꿈시키게 만든 공로자 중 한명으로 평가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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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대 유밍의 최대 히트곡 '守ってあげたい(지켜주고 싶어)' | ▲ '恋人がサンタクロース(연인이 산타클로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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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リフレインが叫んでる(리플레인이 소리치고 있어)' | ▲ 90년대 유밍의 최대 히트곡 '真夏の夜の夢(한 여름 밤의 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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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0년대 또다른 히트곡 'Hello, my friend' | ▲ ' 春よ、来い(봄이여 오라)' |
1981년 '守ってあげたい'(지켜주고 싶어)[65]가 당시 음반 구매력이 지금보다 강하지 않았던 80년대의 판매량 수치를 강타하는 60만 장이라는 판매량을 기록하고 제 1회 일본 작곡 대상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제2차 붐이 도래. 당시의 일본은 전업 작곡가가 작곡이라는 한 분야만 담당하던 시대로 작사, 작곡, 노래까지 모든 것을 한 명의 가수가 담당하는 '싱어송라이터'라는 구분이 생소했던 시기라 음악계에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고 한다.[66]
이후의 오리지날 앨범은 17곡 연속 오리콘 차트 1위를 차지하고 1988년 앨범 'Delight Slight Light KISS' 이후엔 8장 연속 밀리언 셀러를 기록하는 등 80년대는 그야말로 '마츠토야 유미의 시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어마어마한 히트를 치게 된다. 크리스마스 무드가 한창이었던 1980년 12월 1일에 발매한 ' 恋人がサンタクロース(연인이 산타클로스)'[67]는 신토와 불교의 영향이 매우 강해 그저 산타클로스와 어린애들만의 이벤트나 평범한 종교행사라고 여겨졌던 일본의 크리스마스를 연인들의 연애 행사로 변화시킨 곡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이 곡은 아직도 일본에서 크리스마스하면 상위권으로 떠오르는 노래 중 하나.
버블 절정기였던 80년대 후반에서 90년대 초반까지 그녀의 최전성기로, 당시 일본은 마츠토야 유미가 지배하다시피 했다. Delight Slight Light KISS, LOVE WARS, 天国のドア 3개 앨범이 연속으로 연간 1위를 달성하여 일명 ‘유밍 붐’을 일으켰다.[68] 당대 인기 영화 ‘나를 스키장에 데려가줘’, 미쓰비시 자동차 광고, 인기 드라마 ‘雨よりも優しく’, 당대 최고 흥행 애니메이션이었던 마녀 배달부 키키에 그녀의 노래들이 쓰이는 등 그녀의 음악은 당대의 아이콘이었다. Delight Slight Light KISS의 수록곡인 ‘リフレインが叫んでる’는 일본에서 버블 절정기를 상징하는 노래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마츠코 디럭스는 방송에서 “나, 버블의 무렵의 대유밍의 시대가 20세 전후로 진짜였으니까. 나는 버블은 유밍이 만들었다고 생각하고 있으니까”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렇듯 일본에서 마츠토야 유미는 버블 절정기를 가장 잘 체현한 스타로 회자되고 있다.
1983년부터 1991년까지 Merry Xmas from Yuming이라는 크루즈 선상 파티를 개최했는데, 1인당 4만엔이라는 고액의 참가비에도 불구하고 정원 500명에 대해 매년 2000명 정도의 신청이 있을 만큼 인기였다. 요코하마 항에서 출발하는 호화 크루즈에서 라이브 공연을 갖고, 칠면조 요리를 관객들에게 제공했다고 한다. 하선하기 전 유미가 직접 500명과 일일이 악수하고 말을 나눴다고 한다. 해당 파티는 80년대 당시의 풍물시로서 큰 주목을 받았다. 유미의 높은 인기와 당시 일본의 풍족함이 잘 반영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녀가 처음 선보인 보여주는 무대는 1978년 자동차를 타고 등장하는 무대를 시작으로 무대에 엘리베이터를 설치, 30미터나 되는 용 위에 올라타는 등 갖가지 퍼포먼스로 콘서트라는 영역을 벗어난, 당시로써 획기적인 무대를 보여주며 음악과 무대와 기획력에서 모두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는 존재가 되었다. 80년대 후반에는 버블경제의 호황을 타고 마츠토야 유미가 작곡을 주었던 아이돌 하라다 토모요가 주연을 맡은 영화 '나를 스키에 데려가 줘(私をスキーに連れてって)'의 OST가 스키붐을 일으키며 젊은이들 사이에 폭발적인 인기를 얻어 '젊은이들의 카리스마', '연애의 교주'라 불렸다. "실연"이라는 소재를 깊은 감정으로 부르며 시대의 파도를 탄 유밍이었으나 1990년대부터는 민속적인 음악에 심취하여 '真夏の夜の夢(한 여름 밤의 꿈)', ' 春よ、来い(봄이여, 오라), '輪舞曲(윤무곡)', 'Weaver of Love~ORIHIME'[69] 등의 음악을 만들어 낸다.
1989년에는 앨범 '天国のドア(천국의 문)'이 전년에 발매한 앨범 'LOVE WARS'와 함께 당시 일본 가요계 역사상 첫 더블밀리언을 기록하며 일본의 앨범 시장을 개척했다. 다다음해인 1991년 발매한 앨범 'DAWN PURPLE' 역시 일본 팝 역사상 최초로 발매 첫 주 오리콘 밀리언차트를 기록하며 일본의 팝 역사를 써내려갔다. 1998년 발매한 'Neue Musik'는 380만 장이라는 어마어마한 대기록을 세웠고 이 앨범은 오리콘 역대 앨범 판매량 15위에 랭크되어있다.
CM, 드라마 주제곡으로 쓰인 곡은 셀 수 없이 많으며 1970년대부터 2010년대인 현재까지 자신의 곡 뿐만 아니라 타 가수들에게 만들어 준 많고 많은 곡들마저도 초히트시킨 천재. 2018년 일본에서 방송된 아라시니시야가레에서 한 출연자는 마츠토야 유미가 처음 '유밍'이라는 애칭으로 불리며 작곡을 해낸 연령, 마츠토야의 구 소속사 후배이자 2018년 은퇴한 J-POP 여자 솔로계의 레전드 아무로 나미에가 데뷔한 연령, 우타다 히카루가 첫 작곡, 작사를 한 연령 모두가 14세라는 나이였으므로 세상에서 천재라고 불리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14세에 어떤 일을 일으킨다고 언급하였다. 특히 80년대 전설의 아이돌 마츠다 세이코에게 곡을 많이 주었는데 그 모든 곡들이 전부 히트를 쳤다.
1989년 지브리 스튜디오의 영화 마녀 배달부 키키의 OST 'ルージュの伝言(루즈의 전언)'이 또 한번 히트.
자우림의 보컬 김윤아에게 곡을 주고 김윤아가 가사를 붙여 만들어진 곡이 봄날은 간다이다. 같은 해에 발매된 솔로 데뷔앨범 Shadow of Your Smile에 수록.[70]
2011년 NHK 홍백가합전에 출장해 春よ、来い(봄이여, 오라)를 불렀다. 이 무대가 엔딩이 아닌데도 전 출연진이 후반부에 같이 나와 장식해 그녀의 위용이 확인되었다.
2018년 출전한 NHK 홍백가합전에서는 ' 헤이세이 시대의 마지막'이라는 의미로 시청자들의 투표로 선정된 아라이 유미 시대의 'ひこうき雲(비행기구름)'과 'やさしさに包まれたなら(상냥함에 감싸인다면)' 두 곡을 함께 불렀다. 동시대에 라이벌로 평가되는 가수가 있다면, 역시 나카지마 미유키이다. 비슷한 시기에 데뷔했고 실제로도 친한 사이라고 한다.
2022년에는 데뷔 50주년을 맞아 베스트 앨범을 발매했다. 싱글로 먼저 발매된 곡 ‘Call me back’은 AI로 구현한 아라이 유미와 현재의 마츠토야 유미가 듀엣으로 노래를 불러 화제가 되었다. 이 앨범이 오리콘 차트에서 1위를 차지하며 오리콘 사상 최초가 되는 '1970년대 ~ 2020년대' 의 6연대 연속으로 앨범 1위를 기록, 또한 쇼와 시대· 헤이세이 시대· 레이와 시대의 3시대에서의 앨범 1위 획득도 달성했다.
2022년에는 일본 문화공로자 칭호를 받았다. 수상 소감으로 "그동안 신세진 분들, 그리고 제 음악을 사랑해주신 많은 팬분들과 이 영예를 나누고 싶습니다. 팝은 듣는 사람에게 닿았을 때 비로소 완성된다는 지론이 있기 때문입니다. 듣는 사람 수만큼의 추억이 되고 거기서 더 자유롭게 날갯짓을 해나가겠습니다."라고 말했다. #
2022년 10월 17일 마츠토야 유미가 역사상 최초로 달성한 6년대 ( 1970년대~ 2020년대) 일본 음악 차트 최다 연속 1위를 기록함에 따라, 기네스 세계 기록에 인정된 것이 전해졌다. 이에 본인은 "앗싸~! 감사합니다, 2030년대도 목표로 합니다!"라며 또 다른 활약을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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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위상
일본 음악계를 대표하는 싱어송라이터 중 한 명임과 동시에 일본 내 여성 싱어송라이터들 중에서도 나카지마 미유키와 함께 독보적인 위치를 유지하고 있는 여가수다. 1970년대부터 20세기를 넘어 21세기인 2020년대까지 모든 시대에서 오리콘 차트 1위를 유일하게 기록한 가수이다.[71] 자신이 만든 곡으로 대히트를 친 음악가이지만, 다른 아티스트들에게도 제공한 곡으로도 히트곡을 만든 일본 가요계의 전무후무한 뮤지션 중 한 명이다. 일본 대중음악사에서 마츠토야 유미를 빼고는 얘기가 불가능할 정도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발매작은 앨범이 밀리온 통산 10작품, 앨범 순위 통산 24작품, 2015년 8월 뮤직 스테이션 발표 기준 총판매량 4,004만장으로 역대 6위에 해당하는 기록. 역대 솔로 여가수 중에서는 2위[72]이다. 2012년 데뷔 40주년 기념으로 발매된 베스트 앨범 '일본의 사랑과, 유밍과。'[73]가 솔로 아티스트 및 여성 아티스트 역사상 판매 기록 첫 3000만장 돌파라는 대기록을 남겼으며 2018년 데뷔 45주년 기념 베스트 앨범 '유밍으로부터, 사랑의 노래'가 발매 첫 주 10만장 돌파로 1위를 차지하여 오리콘 통산 여성 아티스트 최연장자로 64세에 1위를 기록했다.
매년 2월 초부터 말까지 니가타현 나에바 프린스 호텔 블리자디움[74]에서 열리는 SURF&SNOW 나에바 콘서트 동원수(여성 아티스트 부분)도 매년마다 갱신하는 등 현재도 매우 건재하게 활동하며 일본 여성 아티스트의 정점 중 한명으로 올라와 있다. 전 세대를 아우르는 일본의 국민 그룹인 사잔 올 스타즈의 쿠와타 케이스케와 자주 비교되곤 한다.
2010년대에 들어서는 잦은 공연으로 서서히 왔던 성대 노화로 인해 예전만큼의 파워는 나오지 못하게 됐지만[75], 그럼에도 그 음악성과 싱어송라이터로서의 독자적인 세계관 덕분에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가창력과 음악성은 별개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4. 어록
자세한 내용은 마츠토야 유미/어록 문서 참고하십시오.5. 음반 목록
자세한 내용은 마츠토야 유미/음반 목록 문서 참고하십시오.6. 히트곡
- 1973.11.05. ひこうき雲(비행기 구름)[76]
- 1973.11.20. ベルベット・イスーター(벨벳 이스터)
- 1974.04.20. やさしさに包まれたなら(상냥함에 감싸이면)[77]
- 1974.10.05. 12月の雨(12월의 비) / 瞳を閉じて(눈을 감고) / 海を見ていた午後(바다를 보고 있던 오후)
- 1975.02.20. ルージュの伝言(루즈의 전언) - 마녀 배달부 키키의 삽입곡.
- 1975.06.20. 卒業写真(졸업사진) / 雨のステイション(비 내리는 스테이션)[78]
- 1975.08.01. 『いちご白書』をもう一度('딸기백서'를 다시 한번)[79]
- 1975.10.05. あの日にかえりたい (그 날로 돌아가고싶어)
- 1976.03.05. 翳りゆく部屋 (그늘져 가는 방)
- 1976.11.20. 中央フリーウェイ(중앙 프리웨이)[80] / 14番目の月(열네 번째 달)
- 1978.10.05. 埠頭を渡る風(부두를 건너는 바람)
- 1979.07.01. 青いエアメイル(푸른 에어메일)
- 1979.12.01. DESTINY
- 1980.12.01. 恋人がサンタクロース(연인이 산타클로스) / サーフ天国, スキー天国(서프 천국, 스키 천국)
- 1981.06.21. 守ってあげたい(지켜주고싶어) - 80년대 유밍 최대의 히트곡. 2022년 NHK가 주최한 '청취자가 뽑은 마음의 유밍송 랭킹'에서 1위를 차지했다. #
- 1981.11.01. カンナ8号線(칸나 8호선)
- 1982.06.21. 真珠のピアス(진주귀걸이) / DANG DANG
- 1983.08.25. ダンデライオン~遅咲きのたんぽぽ(댄디라이온~늦게 피는 꽃) / 時をかげる少女(시간을 달리는 소녀)[81]
- 1983.12.01. ガールフレンズ(걸 프렌즈)
- 1984.02.01. VOYAGER~日付のない墓標 (VOYAGER~날짜가 없는 묘표)
- 1984.12.01. ノーサイド(노 사이드) / DOWNTOWN BOY / BLIZZARD
- 1985.06.01. 今だから(지금이니까) < 오다 카즈마사, 자이츠 카즈오와의 콜라보>
- 1985.08.01. メトロポリスの片隅で(메트로폴리스 한 구석에서)
- 1985.11.30. 青春のリグレット(청춘의 리그레트) / シンデレラ•イクスプレス(신데렐라 익스프레스)
- 1987.11.05. SWEET DREAMS
- 1987.12.05. ダイアモンドダストが消えぬまに(다이아몬드 더스트가 사라지기 전에)
- 1988.11.30. リフレインが叫んでる(리프레인이 외치고 있어) - 유밍의 곡중에서도 영향력이 강렬한 곡이라 일컬어짐.[82]
- 1989.06.25. ANNIVERSARY
- 1989.11.25. LOVE WARS / WANDERERS / Valentine’s RADIO
- 1990.11.23. 満月のフォーチュン(만월의 포츈) / 天国のドア(천국의 문)
- 1991.11.22. 情熱に届かない~Don’t Let Me Go(정열에 닿지 않는다~Don’t Let Me Go)
- 1992.11.09. 愛のWAVE(사랑의 WAVE) <칼스모키 이시이와의 콜라보>
- 1992.11.27. 冬の終わり(겨울의 끝)
- 1993.11.27. 真夏の夜の夢(한 여름 밤의 꿈) - TBS드라마 '誰にも言えない(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어)'의 주제곡으로 사용. JASRAC상 금상을 수상한 유명한 곡. 누계 판매량 143만장을 기록한 유밍의 최대 히트 싱글.
- 1994.09.07. Hello, my friend - 누계 판매량 135만장을 기록한 유밍의 메가 히트곡 중 하나. 유밍 부부와 친분이 있었던 아일톤 세나의 추모곡으로 쓰여졌다.
- 1994.11.25. 春よ、来い(봄이여, 오라) - 하마사키 아유미, 마키하라 노리유키, aiko, 한국에서 임형주, MC 스나이퍼 등이 커버.
- 1995.11.13. [ruby(輪舞曲, ruby=ロンド)](윤무곡)
- 1996.7.15. まちぶせ(잠복)[83]
- 1996.10.16. 最後の嘘(마지막 거짓말)
- 1997.11.12. Sunny day Holiday
- 2001.01.11. 幸せになるために(행복하기 위해서)
- 2007.07.11. ミュージック(뮤직) <테라오카 요히토, 유즈와의 콜라보>
- 2010.05.26. ダンスのように抱き寄せたい(댄스처럼 안아주고 싶어)
- 2016.11.02. 宇宙図書館(우주도서관)
- 2020.08.10. 知らないどうし(수상한 자들)
- 2022.09.21. Call me back
- 2023.11.27. Kissin’ Christmas(クリスマスだからじゃない) <쿠와타 케이스케와의 콜라보>[84]
- 2023.12.20. 中央フリーウェイ < YOASOBI와의 콜라보>
7. 타 아티스트에게 제공한 히트곡 목록
- 1971년
- 카하시 카츠미 - 愛は突然に[작곡]
- 1975년
- 아그네스 장 - 白いくつ下は似合わない, 愛を告げて[작사•작곡]
- Hi-Fi-Set - 卒業写真[87][작사•작곡]
- Ban-Ban - 『いちご白書』をもう一度[89], 冷たい雨[작사•작곡]
- 1976년
- Hi-Fi-Set - 朝陽の中で微笑んで[91][작사•작곡]
- 미나미 사오리 - 青春に恥じないように[작사]
- 미키 세이코 - まちぶせ ( 이시카와 히토미가 81년 커버하여 히트함)[94], 恋のスタジアム [작사•작곡]
- 고 히로미 - 20才を過ぎたら, 恋のハイウエイ, 宇宙のかなたへ, 君のおやじ, 雨にひとり 등[작사]
- 1978년
- 1979년
- 1980년
- 사카키바라 이쿠에 - イエ!イエ!お嬢さん[작곡]
- 마츠다 세이코 - 赤いスイートピー, 制服, 渚のバルコニー, 小麦色のマーメイド, 秘密の花園, 瞳はダイアモンド, 蒼いフォトグラフ, Rock'n Rouge, 時間の国のアリス[작곡]
- 1983년
- 1984년
- 1985년
- 1986년
- 야마세 마미 - メロンのためいき[작곡]
- 1993년
- 미즈키 아리사 - 今年いちばん風の強い午後, 君が好きだから[작곡]
- 1998년
- 2001년
- 2006년
- 하지메 치토세 - 春のかたみ[작사•작곡]
- 2010년
8. 다른 가수들의 커버 목록
- 1974년
- 이토 사키코 - きっと言える
- 하세가와 키요시 - 旅立つ秋
- 1975년
- Hi-Fi Set - 海を見ていた午後
- 오카자키 유키 - 少しだけ片想い
- 요시다 미나코 - CHINESE SOUP
- 1976년
- 미키 세이코 - 少しだけ片想い
- 사토오메 아이 - 魔法の鏡
- 1977년
- Hi-Fi Set - 中央フリーウェイ, 雨のステイション
- 틴 팬 앨리 - 航海日誌
- 1978년
- 야마가타 스미코 - あの日にかえりたい
- 1979년
- Hi-Fi Set - DESTINY, 緑の町に舞い降りて
- 1981년
- 미야자키 요시코 - ためらい
- 이와사키 히로미 - 卒業写真
- 1982년
- 마츠다 세이코 - 恋人がサンタクロース
- 카와시마 나오미 - ルージュの伝言
- 쿠라타 마리코 - 冷たい雨
- 1983년
- 이토 마이코 - 最後の春休み
- 하라다 토모요 - 守ってあげたい
- 하마다 쥬리 - 魔法の鏡
- 1984년
- 코바야시 아사미 - TYPHOON
- 1985년
- 켄 나오코 - 帰愁
- 1987년
- EPO - 12月の雨
- 1988년
- 이시다 히카리 - 卒業写真
- 1989년
- 후지타니 미키 - ロッヂで待つクリスマス
- 1994년
- 1998년
- NOKKO - ベルベット・イースター
- 마츠모토 아키코 - 静かなまぼろし
- 1999년
- 2000년
- NOKKO - COBALT HOUR
- 2002년
- 2003년
- 하마사키 아유미 - 卒業写真
- 2005년
- 오쿠무라 아이코 - 14番目の月
- 토쿠나가 히데아키 - 卒業写真
- 히라하라 아야카 - 晩夏(ひとりの季節)
- 2006년
- 마츠야마 치하루 - 卒業写真
- 임형주 - 春よ、来い
- 2007년
- MC 스나이퍼 - 春よ、来い
- 2008년
- 2009년
- 2010년
- 2011년
- 시바사키 코우 - ルージュの伝言
- 2012년
- Aimer - リフレインが叫んでる
- 2013년
- Acid Black Cherry - 青春のリグレット
- 오노 리사 - 何もきかないで, 水の影
- 이마이 미키 - 青いエアメイル, あの日にかえりたい, シンデレルラ•イクスプレス, 青春のリグレット, 中央フリーウェイ, 手のひらの東京タワー, 人魚になりたい, やさしさに包まれたなら, ようこそ輝く時間へ
- 2014년
- JUJU - ANNIVERSARY
- 마키하라 노리유키 - 真夏の夜の夢, Hello, my friend
- 2015년
- 이노우에 요스이 - リフレインが叫んでる
- 2016년
- 2017년
- 타키가와 아리사 - ノーサイド
- 2018년
- 2020년
- 모리 나나 - 返事はいらない
- 2021년
- 2022년
- JUJU - TYPHOON, 雨の街を, リフレインが叫んでる
- 2023년
- YOASOBI - 中央フリーウェイ
9. 기타
- 2003년 HMV가 선정한 역대 일본 아티스트 3위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녀 뒤에 있는 여가수는 미소라 히바리(5위), 야마구치 모모에(7위), 마츠다 세이코(10위). 가히 일본 음악계의 남을 역대급 전설 중 한 명이다. #
- 팝페라 테너 임형주와의 친분으로 유명하다. 그를 한국의 양아들이라고까지 부르며 일본 내 후원자 역할을 톡톡히 한 바 있다. 2005년에는 경희대에서 열린 임형주의 콘서트에 게스트로 출연하기 위해 생애 처음으로 내한했다.
- 집안이 도쿄 중심가 기모노점인 부잣집인데다[117] 사회 명사들과 교류하는 등 엄청난 상류층 사람[118]이다.[119] 어린 시절에는 가게의 직원이 무려 100여 명에 달했고, 자신과 언니의 머리를 빗어주는 직원도 있었다고 한다. 남편도 한 끝발 날리는 뮤지션에 자동차 평론가이니 만만치 않고.
- 도쿄도 하치오지시에 위치한 아라이 오복점(荒井呉服店)이 마츠토야 유미의 친가이다. 그녀의 조부가 다이쇼 시대에 설립한 가게로, 어머니와 데릴사위로 들어온 아버지가 가게를 기업 수준으로 일궈냈다고 한다. 현재는 조카인 아라이 쿠미코가 사장을 맡고 있다.
- 지브리 스튜디오의 장편 애니메이션에 노래가 무려 세 번이나 쓰인 바 있다. 마녀 배달부 키키에선 루즈의 전언(ルージュの伝言)과 따스함에 둘러싸인다면(やさしさに包まれたなら), 바람이 분다에선 비행기구름(ひこうき雲). 루즈의 전언을 제외한 나머지 둘은 각 작품의 OST.
- 한국에서는 MC 스나이퍼[120]의 대표곡 중 하나인 ' 春よ、来い'의 원곡자로 유명한데, 실제로 MC 스나이퍼와 그녀의 대표곡인 Knockin’ At The Door의 한국어 버전을 직접 부르기도 했다.
- 자신과 동갑이기도 한 아베 신조 내외와 친분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2020년 아베의 퇴임과 관련한 발언으로 실랑이가 인 적 있다.
- 자신이 라이벌이라고 꼽은 나카지마 미유키에 대해 2020년 예능에서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굉장한 노래를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세계관이 대단하다고 생각합니다. 사이가 나쁜 편이 사람들은 재미있을지도 모르지만,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녀에 대한 것을요."라고 말했다. #
- 작사가 마츠모토 타카시와 많이 협업했다. 이 둘은 1980년대 마츠다 세이코의 많은 명곡을 만들어냈다. 2021년 마츠토야 유미는 "마츠모토 타카시씨 가사 안의 소녀성에 굉장히 감탄하게 됩니다."라고 말했다. #
- 데뷔 50주년을 맞이해 2022년 12월 8일부터 2023년 2월 26일까지 롯폰기 힐스 모리 타워 52층 전망대에서 'YUMING MUSEUM'을 개최하였다. 앨범과 콘서트 무대 의상부터 아라이 유미 시절에 사용한 피아노, 가발, 대학 그림 과제 등이 함께 전시돼 있었다. 경치가 훤히 트인 곳에는 피아노가 한가운데 있고 그 위에 악보들이 흩어져 떨어지는 모습으로 연출됐다. 실제로 그 악보들은 아라이 유미 때부터 직접 쓴 악보들.
- 마츠토야 마사타카와 신혼 시절부터 웨스트 하이랜드 화이트테리어, 스코티쉬 테리어 블랙&화이트, 프렌치 불도그를 키워왔었으며 현재는 비글을 키우고 있다. 이름은 순서대로 버디, 헤켈&포키, 모모, 로이.
- 유밍이 주로 작사할 때, 경험담보단 상상을 반영으로 쓴다고 한다.
- 핑크 플로이드의 The Dark Side of the Moon 등의 독창적인 앨범 커버를 제작한 걸로 유명한 힙노시스가 그녀와 협업을 몇 번한 적이 있다. 정규 12집 '昨晩お会いしましょう', 15집 'VOYAGER' 앨범 커버가 그들의 손으로 만들어졌으며, 현재까지 쓰이고 있는 유밍의 로고도 그들이 고안해냈으며, 1984년에는 힙노시스의 일원인 스톰 소거슨이 장편 뮤직 비디오 '컴파트멘트(TRAIN OF THOUGHT)'의 연출을 맡기도 했다.
- 음반 제작을 주로 자택에서 한다. 지하층에 제작된 작업실이 있어서 주로 거기서 녹음을 한다고.
[1]
1991년부터 1996년까지는 '아티스트 오브 더 이어' 대신 시상식 이름을 그대로 따 '일본 골드 디스크 대상'을 대상 명칭으로 사용했다.
[2]
결혼 전 본명은 아라이 유미(荒井由実). 활동명 또한 아라이 유미였으나, 결혼 후 마츠토야 유미로 활동 중이다.
[3]
남편
마츠토야 마사타카도 소속된 2인 전용 기획사. 마사타카와의 결혼 이후 설립됐다.
[4]
키에 비해 비율이 좋고 기럭지도 길어서 더 커보이기도 한다.
[5]
심부전・신부전으로 93세에 작고. 당시 투어 중이었던 그녀는 장례식과 영결식을 불참하고 무대에 섰다.
[6]
2022년 초에
코로나19에 확진되었는데도 경이로운 회복력을 보였지만, 용태가 급변해 결국 같은 해 11월 10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부친상 이후에는 어머니의 시중을 계속 들었다고 하며, 코로나 시국으로 어머니를 만나지 못하더라도 영상 통화로 생일을 축하하면서 어머니와의 시간을 아껴왔다고 한다.
[7]
정신과 의사이다.
[8]
나카지마 미유키에 대해서는
국보라고 평했다.
[9]
유래는 데뷔 전 청소년기에 친분이 깊었던 중국계 일본인 사업가 'Sy Chen'이 유밍이라고 부른 것에서 따왔다. 당시 애니메이션 캐릭터
무민이 유행 중이였고, 중국어로 ‘유명’도 의미하고 있어 유명해지고 싶었던 그녀에게 지어준 것.
[10]
왕년의 헐리우드 여배우인
그레타 가르보(Greta Garbo)에서 따온 것이다.
[11]
예전부터 새해 첫날에 오복점 옥상에서 직원들과 다 같이 사진을 찍는 게 관례였다고 한다. 가정부는 아래 후술되어 있는 미야바야시 히데코.
[12]
맏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직후의 열악한 환경에서 영양실조로 요절.
[13]
유미 역시 이러한 감수성을 물려받았던 것 같다.
1990년, 스케줄로 러시아에 방문했을 때
미르의
도킹 발사 장면에 감동을 받아 폭풍오열하는 모습이 비디오에 적나라하게 녹화되었다. 다수의 팬들이 그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을 정도.
[14]
여담으로 어머니는 그녀의 일에 별다른 관심이 없었다고 하는데, 현재 대중들에게 명곡으로 알려져있는
ひこうき雲도 오복점 손님에게 듣고나서야 딸의 곡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15]
중,고 통합형
[16]
도쿄도
미나토구 아자부다이 3가에 위치한 'キャンティ'라는 가게로, 1960년부터 현재도 운영 중.
[17]
중학생 때에도 자신이 녹음한 테이프를 팔러 간 적도 있었다.
[18]
그 곡이 지금까지 명곡으로 회자되고 있는 '
ひこうき雲'
[19]
이때부터 살인적인 스케줄이 지속되어 한 번은 하네다 공항에서 쓰러진 적이 있었다고.
[20]
중학교 시절 피아노실에서 놀면서 만들어졌다.
[21]
훗날
사카모토 류이치, 타카하시 유키히로와 함께
옐로 매직 오케스트라라는 전설적인
일렉트로니카 밴드를 만들게 된다.
[22]
본명은 카마야츠 히로시.
1960년대 후반에 더 스파이더스로 활동하며 인기를 얻었으며 일본 음악계의 막대한 영향을 끼친 뮤지션이다. 2017년 78세의 나이로 사망.
[23]
4년 뒤인 1976년에 세븐 스타쇼에 함께 출현했다. 그녀의 '中央フリーウェイ(중앙 프리웨이)'는 무슈 카마야츠를 위해 만든 곡.
[24]
레코딩 멤버로
드럼
타카하시 유키히로와
기타 오하라 레이 등이 참가했다.
[25]
사실 비행기구름은 그녀가 가수 유키무라 이즈미에게 주려던 곡이었다. 최고의 가창력을 가진 가수였으나, 무라이는 그녀의 서툴고도 소박한 목소리가 마음에 사무쳐 결국 아라이 유미의 앨범으로 발매됐다. 유키무라 이즈미는 지금도 정말 좋아하는 곡으로, 그녀의 목소리를 동경한다고 말했고 당시 음원 그대로
1990년 자신의 앨범에 수록했다.
#
[26]
틴 팬 앨리의 전 밴드명
[27]
데뷔 싱글 返事はいらない(답장은 필요없어)를 들어보면 알겠지만 문장마다 비브라토를 과하게 늘려 마무리하는 창법을 가지고 있었다.
[28]
1970년부터 1976년까지 활동한 일본의 포크 록 그룹.
[29]
1969년부터 1974년까지 활동한 일본의 포크 록 그룹. 멤버들이 해체하게 되면서 각각 종이풍선, 하이 파이 세트, 허밍 버드로 나뉘어졌다.
[30]
1월과 11월에 작은 공연에 출연해 작게 2~3번 불러본 것이 전부.
[31]
카와조에는 평소에도 “이 아이는 커서 스타가 될 거야.”라며 모두에게 유미의 칭찬을 아끼지 않는 사람이었다.
[32]
파파 레몬의 멤버 히라노 하지메는 저서 '나의 음악 이야기'에 유미와 처음 만났을 때가 담겨 있다. "이야기를 시작하면 무슨
아줌마처럼 싹싹해서 부담스럽지 않게 사람을 대했다.
모델 같은 풍모와 말투의 차이가 인상적이었다."라고 말했을 만큼 평소 모습은 쾌활하고 밝은 사람이다.
[33]
훗날 그녀의 결혼식 사회를 맡는다.
[34]
1969년부터 2000년까지 운영한 소극장
[35]
현 나가사키현립 나루 고등학교
[36]
위 영상 3:37에 꽃다발을 전해주는 여성이 엽서를 보낸 학생이다.
[37]
[38]
그 전에는
가나자와시 호쿠리쿠 내셔널 쇼 룸,
오사카시 오릭스 극장,
요코하마시 소테츠 빌딩.
[39]
현 닛쇼 홀
[40]
일본의 화가
[41]
이 덕분에 졸업도 간신히 했다.
[42]
당시 프로필 기준 163cm, 44kg.
[43]
1969년부터 현재도 활동 중인 일본의 형제 포크 듀오.
[44]
티켓값은 800엔이었다.
[45]
일설에는 친하게 지내던
야자와 에이키치의 부부싸움 모습을 담았다는 소리도 있다.
[46]
비유법이다.
[47]
평소
저혈압이 있어서 충분한 수면이 필요했다고 한다. 아침에 일어나려면 침대 밖에 벗어나는 것부터가 1시간은 걸린다고.
[48]
1972년부터 1979년까지
TBS 테레비에서 생방송 된 아마추어 참여형 정보 버라이어티 프로그램. 진행자 센다 미츠오가 큰 인기를 끌었으며, 후에 유명해진 개그맨과 뮤지션들이 무명 시절에 자주 출연했던 것으로도 유명하다.
[49]
그래서인지 이후로는 TV 출연을 거의 안 했다.
[50]
패션에 관심이 많아 콘서트 의상 중에 본인이 직접 디자인한 것도 많다. 가수를 안 했다면
디자이너 쪽으로 갔을지도 모른다고. 실제로 그녀의 예전 사진을 보면 코디가 훌륭하다.
[51]
당시
소니 뮤직 엔터테인먼트에서 요시다 타쿠로를 담당하는 실력파
감독으로, 그녀와는 이전부터 안면이 있는 사이다.
[52]
그녀가 아오야마 학원 대학생과의 연애하던 시절 경험도 포함됐다.
[53]
일본의
순정 만화 거장인 여성 만화가.
[54]
훗날 하야시 요시오와 함께 유미의 결혼식 사회를 봐준다.
[55]
기존에 쓴 가사에 무라이 쿠니히코의 작곡을 더한 노래가 하이 파이 세트의 스카이 레스토랑.
3:13부터가 원래 가사대로 부른 그날로 돌아가고 싶어
[56]
'카'에서 '케'부터의 볼드체 부분이 B♭m7다.
[57]
캐러멜 마마 자체가 아메리칸 스타일의 밴드였기 때문에 유럽 음악을 좋아하는 그녀는 '분명 이 사람들은 나를 싫어하겠지?'하며 경계했다고 한다.
[58]
당시에도
생 로랑과 소니아 리키엘을 포함해 옷장에 있는 것들은 대부분 1만엔 상당이라고 했을 정도로 명품을 즐겨 입었다.
[59]
본인 피셜 달리아의 의미는 레코딩 감독에게 피치도 중요하지만, 이 부분은 감정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나름의 의사 표현이었다고 한다.
[60]
38년 후 열린 마츠토야 마사타카 깜짝 환갑잔치 무대 피아노 위에는 우유병에 꽃은 달리아가 놓여있었고, 마츠토야 유미가 피아노로 비 내리는 거리를을 직접 연주하며 노래도 불러주었다.
[61]
어린 시절부터
공황장애를 앓고 있었다.
[62]
여담인데 그가 음악으로 먹고 살 수 있는 만큼이 되자 은행에 입금된 300만엔의
출연료로 갖고 싶었던
아우디를 샀다. 부족한 금액은 유미가 흔쾌히 빌려준 200만엔으로 채웠는데, 후지은행이 문을 닫는 토요일 오후 3시 전에 그녀와 둘이 그녀 계좌에 한 번에 10만엔 한도액을 반복해서 인출하다 보니 뒤 돌았을 땐 긴 줄이 늘어져 있었다는 일화가 있다.
[63]
바이올린을 다룰 줄 알아
COBALT HOUR 수록곡 Chinese Soup의 도입부를 연주했다. 원래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미쓰비시 은행에서 근무했지만 퇴사한 후에는 밴드 활동에 전념하는 중이다. 종종 형을 게스트로 초대해 합동 공연을 펼치기도 한다.
[64]
야마구치 모모에,
고 히로미 등의 노래를 작곡한 작곡가이자, 배우.
[65]
표적이 된 학원(ねらわれた学園)의 1981년 실사판 주제가이다.
[66]
우타다 히카루가 싱어송라이터로써 어린 나이로 데뷔했을 때와 같은 충격이었다고. 여담으로 우타다 히카루와는 생일이 같다.
[67]
해당 곡은 마츠다 세이코도 불렀다.
# 또한 나카모리 아키나와 체커즈 등 많이 커버했다.
[68]
LOVE WARS와 天国のドア는 역사상 최초로 더블 밀리언을 기록했다.
[69]
1996년에 제작된 극장판 애니메이션
녹색나라 삐삐의 모험의 OST로 쓰였다.
[70]
자신의 곡인 あの日にかえりたい를 새롭게 편곡했다는 소문이 파다하지만 헛소문이다.
[71]
80년대부터 따지면
토쿠나가 히데아키,
쿠와타 케이스케,
야마시타 타츠로도 있다.
[72]
위 발표 기준으로 1위는
하마사키 아유미인데 오리콘 발표와는 너무 차이가 커서 신빙성이 애매하다. 오리콘 발표로는 마츠토야 유미가 1위, 하마사키 아유미는 200만장 정도 뒤진 2위.
[73]
유밍의 경력을 총망라한 올타임 베스트 앨범이다. 이 앨범은 롱런을 거듭해 2018년 100만장에 돌파했다. 나이 64세에 밀리언 앨범을 배출하는 대기록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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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이 기간에는 호텔 총지배인이기도 하다.
[75]
90년대에 창법을 바꿨다. 80년대까지만 해도 여리여리했던 음색이 더 굵어지고 성숙해졌다. 사실 바꿨다기보다는 이쪽도 성대 노화로 인해 자연스레 바꿔진 것으로 보인다.
[76]
바람이 분다의 주제가
[77]
마녀 배달부 키키의 주제가
[78]
앨범 'cobalt hour' 수록곡. 졸업사진과 비 내리는 스테이션은 둘 다 Hi-Fi-Set이 부른 버전이 상당히 히트했다.
[79]
Bang Bang에게 제공한 곡. 70년대 일본 운동권 학생들 사이에서 반향을 일으켰다.
[80]
YOASOBI와 콜라보하여 2023년 새로운 버전이 공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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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1]
하라다 토모요에게 제공한 곡
[82]
여담이지만
히가시노 게이고의 단편소설집 '교통경찰의 밤'의 '천사의 귀'에서 진나이 슌스케 형사가 이 노래를 듣고 좋아하는 장면이 소설 도입부에 나온다.
[83]
이 곡을 낼 당시 20년 만에 본명인 아라이 유미로 냈다.
[84]
1986년 방송으로만 공개되었던 곡을 2023년에 정식 싱글로 발매했다.
[작곡]
[작사•작곡]
[87]
유밍 본인의 3집 COBALT HOUR에서의 셀프 커버 버전이 더 유명하지만, 이쪽이 엄연한 원곡이다.
[작사•작곡]
[89]
유밍이 타 가수에게 제공한 곡 중 첫 차트 1위를 기록한 곡.
[작사•작곡]
[91]
유밍 본인이 4집 14番目の月에서 셀프 커버함.
[작사•작곡]
[작사]
[94]
타케우치 미유도 커버했다.
[작사•작곡]
[작사]
[작사]
[작사•작곡]
[작사•작곡]
[작곡]
[작곡]
[작사•작곡]
[작사•작곡]
[작곡]
[작사]
[106]
참고로 이 곡은
이탈로 디스코 그룹 Gazebo의 I like Chopin의 리메이크다.
[작곡]
[작곡]
[작곡]
[작사•작곡]
[111]
상술했듯 1976년 발표한 あの日にかえりたい(그 날로 돌아가고 싶어)를 리메이크 했다는 설이 잘못 퍼지기도 했다. '봄날은 간다'는 OST를 위해 유밍이 새로 쓴 곡이다.
[작곡]
[작사•작곡]
[작곡]
[115]
립반윙클의 신부 삽입곡으로 쓰임.
[116]
수수하지만 굉장해! 교열걸 코노 에츠코 주제가로 사용됨.
[117]
기모노는 한 벌에 몇 백만에서 비싸게는 몇 천만 엔에 달하는 굉장히 비싼 품목이다. 특히 도쿄의 전통있는 기모노 집들은 에도 시대부터 생겨난 거라 200~300년간 이어져 온 경우가 많다. 평범한 일본인들은 보통 부모로부터 기모노를 물려받거나 아예 기모노를 사기 위한 적금을 들기도 한다.
[118]
한국으로 치면 소형 한복점이 아니라 대형 한복전문가
박술녀의 딸 정도되는 수준이다.
[119]
장인정신이 강한 일본에서는
화과자, 기모노 등 가업을 이어가며 부를 축적하고, 명문가들의 경조사마다 납품을 해서 상류층과의 인맥도 두텁다. 흔히 우리가 생각하는 과자가게, 한복집 아들 딸을 생각하면 안 된다. 상술된대로 한국으로 치면 박술녀 레벨이다. 물론 박술녀 자체는 유미보다 어리지만.
[120]
실제로 스나이퍼는
사카모토 류이치와 같이 작업한 적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