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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전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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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언론들의 행적3. 관련 영상4. 관련 인물
4.1. 대통령 및 핵심 고위급4.2. 보도국 보직간부4.3. 제작자4.4. 앵커, 해설위원, 기자
5. 현재6. 대중매체에서7. 유사 사례8. 관련 문헌

1. 개요

땡전뉴스의 예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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땡전뉴스 예시(1980년 8월 31일 동양방송 방영분)[1]

전두환 정부 당시, 뉴스 시보를 알리는 9시 종이 "땡~"하고 울리자마자 직후에 "전"두환 대통령은~ 으로 시작되는 헤드라인 "뉴스"를 내보낸 데서 비롯된 명칭. 그 외에도 9시 뉴스 시보 후에 주요 뉴스 배경음이 나왔기 때문에 "뚜뚜전 뉴스"라고 부르기도 했다.

이 탓에 명목상으로는 공영방송이던 KBS MBC는 전두환 정부 시기에 실질적으로는 국영방송의 색채를 띄었는데, 그 이전에도 특히 보도 프로그램을 본다면 사실상 국영방송이긴 했다.

당시 양 방송사의 땡전뉴스 경쟁이 너무 심해서 KBS에서는 전두환 영상만 취급하는 전용 편집실을 따로 설치하고, 뉴스 편집 데스크와 청와대 담당 기자만이 사용할 수 있도록 통제하여 계속 땡전뉴스를 보도하였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자 경쟁 방송사인 MBC도 땡전뉴스 전용 편집실을 설치하게 되었다. 한편, 어느 날 전두환 동정 영상이 9시가 되도록 도착하지 않자, 결국 전두환 소식을 MBC 뉴스데스크 첫 번째 소식에 담지 못하고 겨우 두 번째 소식에 담게 되었는데, 이는 중대한 방송사고로 처리되어 당시 관련 기자는 3개월 감봉과 청와대 출입이 교체되는 중징계를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까 9시가 되도록 도착하지 않았다면 그 9시를 넘겨서라도 첫 번째 소식으로 방송해야 되는데, 그 9시를 맞추고자 첫 번째 소식으로 넣지 않았다는 이유로 징계를 받았다는 뜻이다. 그야말로 북한이나 중국의 언론이 보이는 행태를 그대로 보였던 것이나 다름없었다.

심지어 소련군이 우리나라 민항기를 군용기로 착각해 격추시켜 269명이 사망한 중대한 사고였던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이 있었던 1983년 9월 1일에도 KBS 뉴스 9, MBC 뉴스데스크의 시작은 "오늘 전두환 대통령은..."이었다.[2][3] 이어 전두환이 서울 청진동 거리에서 빗자루를 들고 환히 웃으며 조기 청소하는 장면이 비춰졌다. 자국민이 수백 명이 죽었고 전세계 외신에 대서특필되었으며, 당시 기준으로 세계 5위의 항공사고였던 동시에 우리나라 현대사에서도 대사건으로 꼽히는 사건이었지만, 전두환이 조기 청소하는 뉴스가 그날 톱 뉴스로 나온 것.

다만 예외적으로 1981년 3월 31일 뉴스에서는 땡전뉴스가 아닌 미국 동부 표준시 기준으로 3월 30일에 벌어진 로널드 레이건 암살 미수 사건을 먼저 다루었다.[4] 전두환 정부는 애초부터 집권 당위성을 미국이 공인한 덕분에 출범할 수 있었던 정부라 미국 대통령의 동정이 전두환의 동정보다 더 중요하기는 했다.

땡전뉴스의 두 번째 예외는 바로 1986년 1월 28일, 미 우주왕복선 챌린저호 폭발 사고였다. 이는 전 세계적으로도 충격적인 뉴스였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전두환 동정보다도 먼저 보도가 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노태우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로 확정된 이후에는 노태우가 톱 뉴스를 차지하는 경우도 늘어났다. 이러한 관행은 전두환 임기 마지막 날까지도 계속되었으며, 특히 KBS는 9시 뉴스에서 전두환의 임기 마지막날 퇴임사 전체를 거의 20분 가까이 편성해 보도하기도 했다.

이러한 행태 덕분에 전두환이 자칭하던 호는 일해(日海)였으나, 항간에서는 전두환의 호가 오늘이라는 우스갯소리가 유행할 정도. 그리고 전두환의 소식 뒤엔 항상 "또한 이순자 여사는..." 혹은 "한편 이순자 여사께서는.."과 같이 또한/한편이라는 수식어와 함께 영부인 이순자의 소식을 전했기 때문에 당시 이순자의 호가 또한/한편이라는 농담도 돌았다.

이런 이유로 당시에는 전두환과 이순자를 9시 탤런트라 비꼬아서 부르기도 했다.

전두환은 평소 쇼맨십이 강하고 다른 사람에게 자기 이름을 알리길 무척 좋아하는 성격이었는지라, 국민들이 가장 많이 보는 뉴스인 9시 뉴스를 이용하여 그 뉴스에는 무조건 제일 먼저 자신의 이름이 거론되게 했고, 그게 땡전뉴스의 원인이다.

프리덤 하우스 언론자유지수에서 한국은 박정희가 사망한 1979년에는 신문, 방송 모두 '부분 자유'로 분류되었으나 전두환이 집권한 1980년 조사에서는 신문, 방송 모두 '부자유'로 강등되었고, 1981년부터 1987년까지 신문은 '부분 자유'로 올랐으나 방송은 '부자유'를 그대로 유지했다.

2. 언론들의 행적

파일:스크린샷 2023-11-17 213623.png
당시 KBS에서 내보낸 땡전뉴스. 찬양문이 마치 북한 로동신문, 조선중앙TV와 흡사하다.
"대통령께서는 오랜 가뭄 끝에 이 강토에 단비를 내리게 하고 떠나시더니, 돌아오시는 오늘은 지루한 장마 끝에 남국의 화사한 햇빛을 안고 귀국하셨습니다"
"서울보다도 더 추운 어느 날 오후에 찾아든 우리 대통령의 풍성한 웃음에 팔을 휘저으며 국기를 흔드는 꼬마들은 그만 추위를 잊고 말았다"
"위대한 영도자 밑에서 위대한 국민이 된 긍지와 기쁨을 갖게 해주신 위대한 여정이었습니다."
여러 땡전뉴스 내레이션들.

실제로 전두환은 자신의 프로파간다를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했는데, 조선일보 부장급 기자 출신인 허문도를 공보 비서관에 임명하여 정책 홍보에 매우 요긴하게 써먹었고 자신의 해외 순방 때에도 몇 시간이나 방송 분량을 할양하여 생방송을 하게 하는 등 언론을 자기 입맛대로 요리하였다.[5]

특히 각 방송국들은 전두환의 해외 순방 비디오를 개인 소장 용으로 따로 만들어 준다던지, 전두환이 애청했던 ' 수사반장' 등의 드라마 녹화 테이프를 손수 조공해 갖다 바치는 등의 행태를 보여[6], 이 시기 언론이 얼마나 권력에 굴종적인지를 보여주었다. 일명 각하만을 위한 다시보기 서비스다. KBS1 미디어 포커스가 6월 항쟁 20주년 특집으로 만든 '전두환 정권, 그리고 방송'에도 나온다. 그리고 방송사에서 그것도 모자랐는지 1985년 제12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아예 정권홍보성 편파드라마를 15번에 걸쳐서 방영했다.

심지어 6.29 선언 제13대 대통령 선거를 치른 이후에도 1988년 2월 24일 전두환 퇴임 직전 보도국에서 제작하여 KBS1에서 '역사를 세운 큰 약속 단임의지'라는 다큐멘터리를 만들기도 하고, 동시에 MBC에서는 '인간 전두환'이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마지막까지 충성심을 아끼지 않았다.

이는 KBS의 방만한 경영 태도와 가뜩이나 심각한 양 방송사의 편파 보도에 불만을 가진 시청자들을 분노시켜 결국 남부 지방의 농촌을 중심으로 조금씩 퍼져나가던 KBS 시청료 거부 운동이 전국적으로 확산되는데 크나큰 기여를 하게 된다. 2010년대에도 KBS 뉴스 9이 일일연속극과 연계 효과에 힘입어서 상당한 시청률을 기록하고 있다고 하지만 1990년대 초반까지도 1TV에서 광고하던 시절이었음에도 일일연속극과 KBS 뉴스 9 사이에 광고 한편 편성하지 않았어도 신뢰도 문제 때문에 시청률에서 만년 2~3등을 오가는 신세였다.

사실 당시 정부 차원에서 이를 막기 위해서 대도시 지역에서도 통합 공과금제를 도입하기도 했으나, 어차피 편파 보도 문제를 제외하더라도 KBS도 광고 방송을 하고도 비싼 시청료를 거두었다. 신문사에서 전두환을 비판할 수 없어 TV 드라마나 오락 프로그램을 대신 까던 게 당대 풍토였다는 걸 감안하더라도 비싼 시청료를 거두면서 학생시위나 파업 등 민주화 운동을 '사회 불안 현상', '북괴의 지령을 받은 좌경용공세력'으로 편파 보도하는 건 물론이요, 노동자와 농민, 도시빈민사회 실태도 다루지 않았다. 애니메이션도 대부분 외제로 채운 점, 선정적이거나 폭력적인 외국 드라마도 상당수 편성했던 점 등은 엄연한 사실이었던지라[7], 반 정부적인 색채를 띠긴 해도 대놓고 잡아들이기 힘들었다. 그리고 1987년 6월 항쟁 이후에도 1988년 상반기까지 편파적으로 뉴스 프로그램을 진행하면서 시청료 징수율이 50% 밑으로까지 떨어졌다.

결국 1984년 1,255억 원으로 피크를 찍었던 KBS 시청료 수입은 1987년에 1,000억 원선을 밑돌았고, 1988년 789억 원으로 급감했으며 반대로 1988 서울 올림픽, 3저 호황의 영향으로 광고 수요가 크게 증가함에 따라 1980년대 후반 KBS의 재원구조는 상업 방송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급속히 상업화되었다.

그러나 1987년 6.29 선언과 노동자 대투쟁 후 MBC를 시초로 각 방송사에 노동조합이 속속들이 결성돼 방송민주화 운동을 시작했다. 1988년 8월에 MBC 노조가 방송사상 첫 파업을 벌여 황선필 사장을 쫓아내 방송민주화 진전의 기반을 다졌고, 서울 올림픽 직후 시민운동가 출신 서영훈이 KBS 사장으로 부임했으며, MBC도 새로 출범한 방송문화진흥회가 대주주 자리에 올랐다. 1989년에는 단체협약 결렬로 MBC 노조가 또 파업을 벌여 보도-편성-TV기술국장의 3배수 추천제 등 5개 조항을 관철시켰다.

양 방송사에서 진보적인 젊은 기자/PD들에 의해 <어머니의 노래>와 <광주는 말한다> 같이 현대사를 재조명하는 프로그램들은 물론, <뉴스비전 동서남북> 같이 정치권을 겨냥한 사회고발 프로그램들도 같이 제작돼 한동안은 방송 민주화, 제작 자율화 바람이 불어 공영방송으로서의 모습을 보이는 듯 싶었다.

위와 같이 과거 흑역사를 스스로 반성하는 듯한 방송도 나오고 해서 시청자들이 이제 정신 차렸구나 싶었지만, 1990년 3당 합당으로 초거대여당인 민주자유당이 탄생하자 서영훈 사장은 특근수당 변칙지출 누명을 쓰고 쫓겨났다. 이에 항의해서 벌어진 파업이 이른바 1990년을 풍미한 KBS 사태다. 이 파업은 타 방송사 노조까지 합세해 방송민주화 쟁취운동으로 이어졌으나 정권의 탄압과 언론의 편파보도 등으로 실패했다.

그를 대신해 새로 부임한 서기원 사장 아래 이전처럼 특정 정권에 기생하는 국영방송과 같은 행보를 보이면서 공영방송으로서의 명분을 다시 상실하기에 이르렀고, 최창봉 MBC 사장도 3당 합당과 KBS 사태 등의 영향으로 태도가 바뀌어 < PD수첩> '그래도 농촌을 포기할 수 없다' 불방, 안성일 노조위원장 해고, 1991년 드라마 <>의 조기종영 등으로 정권 눈치보기에 열을 올렸다. 같은 해에는 노조의 제작 관련 3개국장 추천제 폐지를 시도하려 하자 1992년의 50일 총파업으로 번지기도 했다.

1993년 문민정부 출범 후 KBS에선 홍두표 사장이 취임하여 보도국에 대대적인 쇄신을 가하고 1TV 광고를 폐지하고 나서야 겨우 나아졌으나, 1995년 2월 7일 민주자유당 전당대회를 기점으로 김영삼 대통령 동정을 헤드라인으로 틀어 5공 시절로 회귀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런 과거는 2020년대까지도 시청자들이 수신료 인상을 반대하는 가장 큰 근거로 작용하고 있으며, 이 때문에 1981년 이후로 물가가 지속적으로 상승했음에도 수신료는 2,500원으로 동결되어 있다. 사실 기형적 재무구조, 비효율적인 인건비 지출 등 여러가지 문제점이 있기는 하지만, 이 땡전뉴스를 비롯한 '정권에 기생하는 더러운 놈들'이라는 부정적 이미지가 가장 결정타로 작용하고 있다. 웬만한 시청자들은 이런 전력이 있는 방송사를 믿을 리가 없으니 "내가 뭘 믿고 니들한테 돈을 더 줘?", "그렇게 돈이 부족하다면 1TV 광고를 다시 하면 될 거 아냐?"라는 논리로 나오면, KBS 측은 반박할 거리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의외지만 한동안 MBC에서 땡전뉴스를 방영하지 않았던 적이 있었다. 이는 1982년 6월 청와대 대통령비서실 공보수석비서관 겸 청와대 대변인직에서 문화방송 사장으로 자리를 옮기게 된 이웅희가 전두환에게 TV뉴스 맨 앞에 항상 대통령이 나가는 걸 바람직하지 않다는 점을 전두환에게 설득했는데 의외로 전두환도 이에 수긍은 해서 MBC에서 땡전뉴스가 나오지 않았다.[8] 하지만 1년 정도가 지난 1983년 경, 참모진의 말을 듣고 나서 생각이 바뀐 전두환은 이웅희를 부른 다음에 열심히 갈궜고 결국 MBC에서 다시 땡전뉴스가 나오게 되었다.[9]

그리고 KBS 2TV에선 1TV에서 방영되는 땡전뉴스와 시간대가 겹치던 "생방송 오늘"[10]이 땡전뉴스를 피하려던 시청자들 덕분에 시청률이 높게 나왔는데 당시 윗선에서 2번째 꼭지 부분을 재미 없게 해달라는 요구에 진짜로 2번째 꼭지 부분을 일부러 재미없게 만들었다는 얘기도 있고, 그래도 시청률이 높게 나오자 1987년 상반기에 아예 폐지되었다는 얘기도 있다.

다만 의외로 일요일만큼은 땡전뉴스가 잘 방영되지는 않았는데, 이때 KBS와 MBC에서 평일 뉴스와 별개로 심층 뉴스 프로그램[11] 뉴스파노라마 MBC 뉴스센터를 편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충성 경쟁은 어쩔 수 없었는지 1984년 가을에 MBC에서 뉴스센터를 MBC 뉴스데스크로 통합시켰고, 동시기 KBS1에선 뉴스파노라마를 8시로 옮기고 기존 뉴스파노라마가 편성되던 시간대에 KBS 뉴스센터 9를 방영한 바 있다. 다만 KBS에서는 1986년에 어찌된 모양인지 몰라도 다시 뉴스 파노라마를 복구시켜 놨다가 이듬해인 1987년 초에 폐지. 그러나 MBC에서 방영된 뉴스센터는 전두환 집권 기간이 끝난 1989년 5월 말이 되어서야 부활했지만 1989년 당시의 뉴스센터는 포맷이 심층 뉴스 프로그램 위주가 아닌 일반적인 종합뉴스( 메인 뉴스) 프로그램으로 방영하였으며, 11월 중순에 잠깐 사라졌다가, 1991년 4월 ~ 1993년 10월까지 일요일마다 MBC 뉴스센터라는 같은 타이틀로 방영하다가 1993년 10월 중순에 다시 뉴스데스크로 통합했다.

KBS 뉴스 9는 1988년 3월부터 1996년 11월까지, MBC 뉴스데스크는 1988년 4월 중순부터 1996년 9월까지 주요 뉴스를 각각 보내지 않고 바로 본 방송을 시작했고[12] SBS도 비슷하게 평일 메인 뉴스도 마찬가지로 주요 뉴스를 내보내지 않고 바로 본방송을 시작했다는 흑역사가 있다.

그래서 당시 KBS 뉴스 9와 MBC 뉴스데스크 자료를 보면 " 오늘의 주요 뉴스" 부분이 없었던 것.[13] 후발 주자인 SBS는 1994년부터 KBS 뉴스비전과의 경쟁으로 주요 뉴스 부분이 도입되기는 했지만 개편 때마다 사라졌다 재도입되었다를 반복하다 1997년 5월이 되어서야 완전히 정착되었다.
과거 땡전뉴스를 주도하거나 가담했던 언론 부역자들은 민주화 이후에도 한동안 반성 없이 방송사나 언론계 곳곳에서 '선배'나 '원로' 대접을 받으며 영향력을 행사해 왔다. 당장 땡전뉴스를 만들면서 KBS 보도본부 데스크를 지켰던 강용식이나 박성범[14] 같은 사람들은 국회의원을 지냈고, MBC 땡전뉴스를 진행한 이득렬은 사장까지 지냈었다. 민주언론시민연합은 2003년 발간한 <80년 신군부 부역 언론인들에 대한 방송 모니터 보고서(3차)>에서 "독재에 부역하고 방송계에 왜곡된 조직문화를 뿌리내리게 한 장본인들이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 진정한 방송 개혁은 요원한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3. 관련 영상

땡전 뉴스를 직접 보고 싶은 사람들은 아래의 동영상을 감상해 보자. MBC에서 제공되는 20년 뉴스 보기에서 1987년 2월 ~ 1988년 2월 뉴스데스크 자료를 참고해도 좋다. 단, 전반적으로 땡전뉴스가 나오지 않는 주말뉴스는 권장하지 않는다. 또한 MBC 아카이브에서는 1980년 ~ 1985년까지의 일부 방송분을 열람할 수 있으며 KBS 뉴스 9 다시보기 역시 1987년 1월 ~ 1988년 2월까지 볼 수 있다.[15] 그 외에 국가기록원 사이트에선 일부 방영분을 열람할 수 있다.
관련 다큐멘터리[16]의 일부 영상이다. 참고로 2분 27초 쯤에 저 위의 캡처 화면도 등장한다. KBS의 NHK 뉴스센터 9시 표절은 덤이다. 영상 중후반에는 전두환이 가는 곳마다 날씨가 맑아진다며 하느님도 전두환을 돕는다고 신격화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여기에 "세계인들은 확신의 지도자가 없음에 궁핍을 느끼지만, 우리는 확신의 지도자가 있으니 축복받았다."는 식의 국수주의적인 멘트는 덤으로 딸려 나온다. 풀버전은 이곳(1편) 이곳(2편)에서 참고. 혹여라도 보고 북한 방송이 오버랩된다면 지극히 정상이다.

각하께 상납했다는 영상 1분 45초 자막에서의 友宣(우선)은 友誼(우의)의 잘못. 誼(정분 의)를 宜(마땅할 의)로 잘못 쓴 걸[17] 宣(베풀 선)으로 또 잘못 썼다.
1982년 8월 31일 뉴스데스크 영상.[18] 당시 캐나다 총리인 피에르 트뤼도[19]와의 정상회담을 메인뉴스로 다루고 있다. 물론 지금도 대한민국 대통령의 국외 순방 및 정상회담 등의 일정들은 헤드라인을 장식하지만, 당시에는 대통령 부부의 하루가 전부 헤드라인이였다.
1982년 KBS 9 뉴스 영상.[20] 남자 아나운서는 최동호 기자, 여자 아나운서는 신은경 아나운서. 전두환의 케냐 정상회담이 1면으로 다뤄지는데 당시는 남북한 아프리카 외교전이 치열하게 이루어지고 있던 시절이라 남북한 막론하고 대아프리카 외교전에 공을 들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985년 MBC 뉴스데스크 中
1985년 뉴스데스크의 영상. 여기는 시보음이 "뚜 뚜 삐~"가 아니란 점에 유의.[21] 하지만 내용은 영락없는 땡전뉴스다. 앵커는 이득렬 당시 보도국 부국장이었다.
1985년 4월 30일 여기는 MBC 영상

앵커의 주요뉴스 안내

- 전두환 대통령의 방미를 평가하는 세계 각국 언론들의 반응들이 밤 사이 외신을 타고 많이 들어옴. 이것을 대략적으로 보면 대부분의 언론들은 "이번 한미정상회담은 북괴에 의한 남침 가능성을 막은 그런 결실을 가져왔을뿐만 아니라 1988년 평화적 정권 교체 기반을 다진 성공적인 정상외교였다"고 평가

- 미국의 저명한 컬럼리스트 잭 앤더슨(Jack Northman Anderson)은 북괴에 유출된 휴즈사의 헬기가 한국영공을 침범했다는 기사를 워싱턴포스트에 실음

- 여야는 이번주 안에 제12대 국회 개원을 위한 협상을 본격적으로 제기할 것으로 예상

- 민한당은 오전 10시에 임시전당대회를 열어서 조윤형 총재에 대한 불신임안을 처리할 예정

- 스키마스크로 위장한 무장강도 4명이 사상 최고 액수인 현금 5천만 달러를 털어 도망감[22]
1987년 뉴스데스크 영상 중 손석희 앵커가 진행한 땡전뉴스 모음.[23]
라디오에서도 땡전뉴스가 나왔다. 1984년 3월 8일자 부산MBC 라디오 녹음. 영상 설명에 따르면 해당 영상은 일본 치바현 사쿠라시에서 녹음했으며, 일본에서 녹음되었기 때문인지 잡음이 있다. 아래 멘트는 영상 속에서 나오는 라디오 멘트.
방송 광고의 모든 것을 도와드리겠읍니다.[24] 한국방송광고공사[25]
MBC, 여러분의 부산문화방송입니다. H.L.K.U.
여름은 여름대로 겨울은 겨울대로 금성 전천후 냉장고!
냉장고의 제3시대 금성 전천후 냉장고, 금성사 제공시보 6시를 알려드립니다.
(시보음)[26] 땡~![27]
...
MBC 6시 뉴스입니다. 두환 대통령은 오늘 오후 청와대에서 방한 중인 쿠시아노비치 페루 감사원장을...[28]

4. 관련 인물

4.1. 대통령 및 핵심 고위급

4.2. 보도국 보직간부

4.3. 제작자

4.4. 앵커, 해설위원, 기자

5. 현재

군사독재가 종식되고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 대통령에 대한 무분별한 찬양일색의 뉴스는 자취를 감추었다. 그러나 KBS MBC와 같이 정부의 입김이 강한 방송국에서는 아직까지도 언론 매체가 국가중대사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보다는 그에 따른 대통령의 행보를 위주로 편성되는 경향이 있으며, YTN TV조선 같은 케이블 방송국에서도 각자의 정치성향에 맞게 대통령의 시시콜콜한 행보를 위주로 편성하는 경향이 있다.[41] 이는 땡전뉴스에서 비롯된 권위주의적인 인식의 유산이라는 견해를 내놓기도 한다. 또 이런 시선 때문에 좌우를 막론하고 매 정부마다 그때의 여당을 지지하는 성향의 언론사들은 항상 반대측 지지자에게 ‘땡X뉴스’라며 비판받는 일이 발생한다.[42]

물론 대통령은 분명 그 자체가 하나의 헌법 기관으로서 기능하기도 하고, 대통령제 국가인 우리나라는 여러 정치적인 사건들이 대통령을 중심으로 돌아가므로 이런 행보들은 언론에 보도되어야 하는 것이 맞다. 하지만 대통령 개인은 어디까지나 국가의 직무를 수행하는 일을 직업으로 가진 시민의 하나일 뿐이므로 뉴스는 어디까지나 사건과 사실들을 중심으로 보도되어야 한다. 따라서 오늘날의 언론들도 땡전뉴스를 반면교사 삼아 언론으로서의 사명감을 갖고 과거의 흑역사를 되풀이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할 것이다.

한편으로는 땡전뉴스가 과거의 유물이라고 생각했다가, 회사 생활을 시작한 사회 초년생들이 입사 초반에 경직되고 조직화된 사내 분위기에 당황하며 땡전뉴스를 떠올리기도 한다는 뒷이야기가 있다. 특히 미래전략본부, 기획조정본부 등으로 이름지어져 있는 대기업이나 공기업의 중추에서 근무하는 신입의 경우, 5공시절 땡전을 생각하고 행동하면 의외로 쉽게 적응할 수 있다고 한다. 실제로 이들 조직의 경우 오너 일가를 '황족'이나 '황태자'라고 부르는 경우가 비일비재하고 의전이나 외부 홍보 등도 거의 용비어천가를 부르는 수준이 많기 때문이다.

6. 대중매체에서

7. 유사 사례

8. 관련 문헌


[1] 해당 방송은 1980년 8월 31일 동양방송에서 방송된 <내가 본 전두환 대통령>이라는 제목의 방송으로, KBS <미디어 포커스>에서 영상자료로 제시한 걸 캡처한 사진이다. 사진 속의 인물은 박종세 아나운서로, 중앙방송국 재직시절인 1959년부터 대한뉴스 내레이션도 담당하였다. [2] 그 당시 정부에서는 태풍이 오든 눈이 펑펑 오든 땅이 갈라지든 간에 얄짤없이 " 전두환 대통령~"으로 시작하는 기사를 톱으로 내라고 지시했으며, 연합연감( 연합통신), 동아연감( 동아일보), 보도사진연감(한국사진기자회, 1981~1987년판까지) 등도 1면에 그것도 대문짝만하게 무조건 올려야 했다. 그러니까 설사 중대한 뉴스가 있다고 해도 반드시 전두환 대통령과 직접 관련된 기사가 나온 직후에야 바로 나오는 식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종이신문은 검열이 비교적 덜해서, 평소에도 전두환이 아닌 다른 주요 사건은 1면에 싣는 경우가 많았고 이 사건도 마찬가지였다. [3] 물론, 굳이 "전두환 대통령~"으로 시작하지 않는 톱기사도 있기는 했지만, 그 톱기사 역시 "전두환 대통령"이라는 단어가 반드시 들어간건 확실했다. 그러니까 톱기사에는 첫 멘트의 어느 위치이건 간에 "전두환 대통령"이라는 단어만큼은 무조건 들어가야 했던 것이다. [4] 그러나 이마저도 보도 내용이 그다지 정상적이지 않았다. 이 암살미수 사건이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부작용 때문에 벌어졌다"며 독재정권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5] 참고로 허문도는 이후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 규모의 어용 축제 국풍81을 기획·개최한다. 전두환의 군 출신 측근인 허삼수, 허화평과 함께 속칭 '3허'로 불리면서 전두환 정부 초기 그 누구도 건드리지 못하는 막강한 권력 실세였다. 게다가 허삼수, 허화평과는 달리 전두환이 끝나갈 때까지도 권력을 지키는데 성공한다. [6] 이후에 청와대에서 KBS로 이 자료를 이관했는데, 당시 방송 프로그램 보존에 도움이 된 측면이 있었다고 한다. 왜나하면 1980년대 초중반까지만 해도 프로그램에 대해 자산이라는 생각이 없었던데다가 테이프 가격과 공간 문제로 인해 테이프를 여러 번 돌려서 쓰는 것이 일반적이었고, 설사 보존을 한다 하더라도 주요 교양 프로그램이나 뉴스 프로그램 위주로 보존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드라마나 오락 프로그램들은 자료가 별로 잘 남아있지 않은데, 전두환은 TV쇼 프로그램이나 드라마를 많이 좋아했기 때문에 이 당시의 자료들이 남아있게 된 것이다. 방송사에서 방송 자료를 전량 보존하기 시작했을 때가 1987~1988년도 무렵부터이고, 그 전의 방송 자료는 테이프 돌려 쓰기 때문에 보존되어 있는 자료가 많지 않다. 해당 사실은 1989년에 KBS 노조 측이 엮은 <5공하 KBS 방송기록>에 언급된 사실로, 미디어 포커스 2편에서도 5공 당시의 방송 자료가 여러가지 이유로 사라지는 일이 많았다고 언급하였는데 이 이관된 자료가 당시 멸실된 기록의 빈 부분을 채워주고 있다는 멘트가 나왔다. [7] 그러나 전두환 집권 초기인 1980년 8월에 국보위가 사회정화운동의 일환으로 폭력 프로그램 편성 금지 정책을 만들어서 단속하긴 했지만, 대중들의 욕망 때문인지 결국 실효를 보지 못했다. [8] 그렇다고 이웅희가 MBC에서 전두환을 찬양하는 방송을 완전히 없앤 것은 아니었다. 그저 땡전뉴스만 없앴을 뿐, 대신 연말특집 프로그램 등을 활용해 더 교묘하고 세련되게 전두환을 찬양하는 방송을 내보냈다. 이는 일제강점기 문화통치와 비슷한 맥락이라 볼 수 있다. [9] 참고: 한국대중매체사 563p, 강준만 저. 이는 전두환의 취향에 이웅희의 곡선적이고 다소곳한 스타일보다 이원홍, 이진희 등의 직선적이고 호탕한 스타일이 맞았던 것일 뿐이라고 볼수 있다. [10] 방영 시간은 평일 20:50~21:25. 지금의 2TV 생생정보통과 비슷한 성격의 프로그램이다. [11] 이 중 뉴스파노라마는 뉴스 프로그램이라기보다는 시사 프로그램의 형식을 띠고 있기는 한데, 사회 고발적인 성격은 약했고 계몽적인 성격이나 다큐멘터리적인 성격이 강했다. [12] 다만 프로그램 예고를 내보내긴 했고, 1991년 MBC 뉴스센터도 주요 뉴스를 편성하고 나서 본 방송을 시작했으나 몇 개월도 지나지 않아 흑역사가 되었다. 다만 KBS 일요 9, KBS 9 일요현장, KBS 뉴스 9 일요와이드에서는 멀쩡히 헤드라인을 보냈기는 했다. 1992년에 KBS 9시 뉴스에서 다시금 헤드라인 부분이 부활하기는 했지만 얼마 못갔다. [13] 다만 본방 시작 직후에 앵커가 주요 소식 요약을 하는 경우는 있었다. 현재도 KBS 뉴스 5나 중국 CCTV의 신문연파에서도 방송 시작 직후에 앵커가 이런 식으로 주요 소식 요약을 한다. 참고로 당시 검열에서 상대적으로 자유로웠던 시사 프로그램들 자료를 보면[43] 프로그램 맨 앞 부분에 헤드라인을 보냈다. KBS1 시사 프로그램은 해당되지 않는다. 스포츠 중계 프로그램과 특집 프로그램을 제외하면 몇 번의 블록 광고를 제외하고 광고 편성을 안하고 본방을 시작했다. [14] 그나마 박성범은 KBS에 대해 반성하는 프로그램에 직접 출연해 당시 심정을 밝히면서 사실상 땡전뉴스를 흑역사로 취급하고 있다. [15] 다만 1987년 가을 즈음부터는 직선제 수용 이후이자 선거 시기이기도 했고, 이때부터는 땡전뉴스, 나아가 전두환 정권 자체가 말기여서 이전에 비해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는 편이다. 굳이 따진다면 1987년 상반기까지는 흔한 편이지만 가장 심했던 1980년대 초~중반 분량은 사이트에서는 제공되지 않는다. KBS, MBC에서 하필 1987년부터 방송분을 제공하는 이유가 물론 녹화 분량 보전 문제도 있지만, 이 시기를 자사의 흑역사나 다름없는 시절로 취급하기 때문이라는 설도 있다. [16] KBS 미디어 포커스 6.10 항쟁 20주년 기념 <전두환 정권 그리고 방송> 1부: 각하 만수무강하십시오, 2부: 하늘이 내리신 대통령. [17] 당시 일제 자막기기를 쓴 탓에 情誼(정의)를 情宜로 쓰듯이 友誼(우의)도 友宜로 쓴 게 아닌가 싶겠지만, 일본 국어사전에서 友誼는 友宜로 대체하지 않았다. [18] 여기서는 광고도 수록되어 있다. [19] 현 캐나다 총리인 쥐스탱 트뤼도 총리의 아버지. [20] 이 시기 KBS 9 뉴스 주요뉴스 배경음악은 에런 코플런드의 보통 사람을 위한 팡파르를 Emerson, Lake & Palmer가 편곡한 음악이다. [21] 1970년대 초반생 이상이라면 알겠지만 이 MBC 시보음이 훨씬 유명하다. 흔히 말하는 ' 아재들은 다 아는 시보'다. 애초에 80년대 KBS( 뉴스)를 누가 보냐?라는 취급을 받았었다. 당장 해당 문단의 첫 영상을 보면 가히 북한 뉴스랑 다를 바 없는 수준이었으니 더 그랬었다. [22] 당시 미국 뉴욕에서 생긴 강도사건으로 신문에서는 8백만 달러가 털렸다고 나왔다. 해당 기사에서 5천만달러는 사건 당시 뉴욕 경찰의 피해 추정액수였으며, 이후 8백만달러로 확인되었다. 여담으로 1970년대 ~ 1980년대 뉴스에는 이런 해외 토픽이 자주 나왔다. 국내 뉴스를 제대로 취급할 수 없으니 외신으로 때웠던 것. 이 무장강도 뉴스도 해외 토픽감이긴 하지만 사실 주요 보도 헤드라인으로 다룰 정도는 아니다. 공산주의 매체는 이마저도 부자유스럽기 때문에 결국 권력자 동정을 과도하게 크게 잡고 나머지 뉴스를 압축해서 방송하는데, 중국 CCTV의 신문연파는 아직도 이 모양이다. 다만 요즘 들어 같은 CCTV라도 신문연파가 아닌 신문30분, 중국신문 같은 다른 뉴스 프로그램은 훨씬 나은 편이다. [23] 참고로 모든 보도의 취재기자가 조정민이다. 조정민은 주말 뉴스데스크 앵커를 지냈고, 퇴사 후 현재 목사로 재직 중. 연예인이나 아나운서 주례를 자주 서 주는 것으로도 유명한데, KBS 이정민 아나운서, 정태우 등이 그에게서 주례를 받았다. 이 영상 내용 중 전두환이 나 대통령인데 드립을 하는 장면이 있는데, 1987년 3월 22일에 보도된 육군 해안부대 시찰 중 상황병과의 통화 장면이다. 퉁퉁구구의 영상 중에서 이것을 모티브로 한 영상도 있다. [24] 1984년 당시의 표기법 ' 읍니다'. [25] 한국방송광고진흥공사, 공익광고협의회를 산하기관으로 둔 곳이다. [26] 원래 음은 "시~라~솔~♪ 레솔(낮은)시(높은)레(낮은)솔시(높은)레~♪(또는 미~레~도~♪ (낮은)솔(높은)도(여기서부터 전부 낮은 음이다)미솔도미솔~♪)"이다. 이 시보음은 1982년 9월 4일에 박춘석, 길옥윤, 엄기돈, 정서봉이라는 작곡가가 작곡을 완료한 MBC 시보음으로 보이는데 1995년 7월 31일, 1997년 9월 1일부터 1998년 5월 19일까지, 1998년 6월 21일부터 10월 2일까지 사용했다. [27] 1987년까지는 '시'에 가까운 정각 알람 소리를 썼으나, 1988년부터는 높은 도에 가까운 정각 알림 소리를 1999년 상반기까지 썼다. [28] 쿠시아노비치 발데라마는 1984년 당시의 페루 감사원장으로 1984년 3월에 방한했다. 페루와의 정상회담도 아니고 감사원장 접견인데 첫 꼭지로 내보냈다. 요즘 같으면 라디오 뉴스에서는 아예 들을수도 없고, 9시 뉴스같은 메인뉴스에서조차도 뉴스 단신이나 간추린 소식 코너 등에서나 나올 내용이다. [29] 현재의 문화체육관광부+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 과학기술정보통신부의 일부 기능이 포함된 부서. 독재정권에서 주로 하는 일은 언론통제와 종교단체, 공연윤리위원회 등 문화 검열기관 관리였다. [30] 참고로 2007년에 방송된 미디어포커스에서 언급된 KBS가 1985년 6월 16일에 전두환의 장녀( 서경대 전효선 교수) 결혼식을 비디오로 녹화한 후 청와대에 상납했던 사건도 이 시기때 있었다. 당시 신부입장하는 장면이 정면과 측면에서 촬영된 것으로 미루어 봐서 최소 2대 이상의 카메라가 동원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MBC 역시 이진희 사장 재임시절이었던 1982년 1월 18일에 전두환의 51번째 생신파티를 비디오로 녹화해 상납했다. [31] 이 부분으로는 이진희의 후임이다. [32] 원 출처: KBS와 권력(강동순 著, 서교출판사, ISBN 9788988027608) 112페이지. [33] 12대 때는 민정당, 14~15대 때는 민자당-신한국당-한나라당 소속. [34] 1981년부터 '일요토론'으로 변경. [35] 2010년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직전 "또 하나 반가운 것은 10명의 기초단체장 가운데 옹진군은 무투표로 당선됐고 나머지 9군데도 좀 어렵다고 생각했는데 다행히 천안함 피격 사건이 바로 인천 앞바다에서 일어났다"라는 망언으로 파문을 일으켰다. [36] 1974년부터 1987년까지 13년간 MBC 뉴스데스크를 진행한 엄기영 앵커 다음 장수 앵커. [37] 1987년 5월부터 1988년 11월까지 진행한 앵커. 내귀에 도청장치로 유명한 방송사고 뉴스 앵커로도 잘 알려져 있다. [38] 2000년 새천년민주당 소속으로 당선되었으며 2002년 탈당 후에 한나라당에 입당했고, 2004년 총선에서 낙선했다. [39] 1992~1995: 민주자유당, 1995~1996: 신한국당. [40] SBS의 기자와는 동명이인이다. [41] 특히 대통령의 해외순방 등이 있을 때 이런 경향이 더욱 크게 나타난다. [42] 대표적인 예시로는 KBS가 2023년 박민 사장 취임 이후 박장범 앵커를 중심으로 윤석열 정부에 유리한 기사와 입장만을 내세우며 대통령실 대변인 수준에 이르자 땡윤뉴스라는 용어가 등장한 사례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