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lbgcolor=#003764><colcolor=#fff> 대한뉴스 Daehan News[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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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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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영 시작 | 1952년 1월[2] | |
종영 | 1994년 12월 30일 | |
상영 횟수 | 2040회 | |
제작소 |
국립영상제작소 (현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정책방송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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링크 | | | 다시보는 대한늬우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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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공보처 산하 국립영상제작소(현 문화체육관광부 한국정책방송원)에서 1952년 2월부터 1994년 12월까지 35mm 필름으로 제작한 극장 상영용 뉴스. 전국의 모든 극장에서 의무 상영해야 했다. 필름은 1주에 한 번씩 바뀌었으며, 총 2040회가 제작되었다.2. 특징
대한뉴스는 라디오 뉴스보다는 늦게 나왔지만 당시 텔레비전은커녕 라디오의 보급률도 상당히 낮았고, 신문이나 잡지 등 활자 매체의 경우 문맹률이 상당히 높아 제대로 된 뉴스를 전한다는 것이 여의치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나라 안팎의 동향을 대중에게 효율적으로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었다. 뉴스영화는 19세기 말에 제작되기 시작했고, 정규제작은 1909년 프랑스 파테사에서 제작한것이 시초였고, 이후 전세계적으로 제작되기 시작했다. 이 당시에는 유일하게 영상으로 뉴스를 접할수있던 수단이었기 때문에 텔레비전이 대중화되기 이전에는 인기가 높았고, 세계 각국의 TV방송사들도 방송 초기에는 영화뉴스를 가져다가 TV로 방송하였다.대한뉴스처럼 국가에서 기록영화를 제작하는 것은 나치 독일 같은 군국주의 국가에서 가장 활발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서구권에서는 위와 같은 이유로 기록영화를 많이 만들어 상영했다.
나치 독일의 '독일 주간 평론'(Die deutsche Wochenschau)이 유명하며[3] 미국은 할리우드의 인프라를 이용해 많은 기록영화를 찍어냈다. 네덜란드에서도 '폴리혼 주르날'(Polygoon Journaal)이라는 이름으로 1919년부터 1987년까지 상영한 바 있으며[4] 쿠바에서도 쿠바영화예술산업연구소 주도로 'Noticiero ICAIC Latinoamericano'를 1959년부터 1990년까지 제작했다.[5] 대만에서도 대한뉴스와 비슷한 시기에 중화민국신문(中華民國新聞)이라는 뉴스 영화를 제작했고, 중국에서는 신문간보라는 명칭으로 뉴스영화를 제작했다.
앞서 말한 독일 주간 뉴스가 추축국 일원이었던 일본 제국에도 영향을 주었고, 그로 인해 1940년부터 일본도 국정 기록 영화를 제작해 상영하기 시작하는데, 그게 '일본 뉴스'(日本ニュース)다. 보러가기
3. 역사
3.1. 탄생과 상영
1940년 '일본뉴스'가 시작되면서 조선에서도 정기적인 뉴스영화 제작이 시도되었다. 1941년 조선문화영화협회에서 '조선뉴스'를 제작하였으며, 1942년 조선의 모든 영화회사가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로 통폐합되면서 '조선시보'로 이름을 바꿔 월 1회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월 1회라는 제작 주기는 뉴스로서는 속보성이 떨어지고 기록영화로서도 영상기술이 조잡하는 등 평판이 좋지 않았다. 결국 1944년 이후로는 뉴스영화의 공급처는 '일본뉴스'로 집약되었다. 한편, 1943년 9월 22일 발행 조선시보 제11보가 러시아 국립 아카이브 고스필모폰드를 통해 영상이 발굴되어 남아 있다. 조선시보 제11보(1943)광복 이후 미군정청 공보부 영화과에서는 1946년 1월부터 1947년 말까지 총 27호의 '시보'[6]를 제작하였다. 미군정청 공보부의 '시보'는 미국국립문서보관소(NARA)가 소장한 4편[7]의 영상이 남아 있는데 서울 중앙청사 태극기 게양식, 미국 육군장관 로버트 패터슨 방한, 미소 1차 정식회담, 남조선과도입법의원 개원식 등 역사의 중요한 장면을 영상 기록으로 남겼다. '시보'는 1948년 1월부터 '조선전진보'로 제명을 바꾸어 제작되었고 1948년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해 11월 4일에 공보처 공보국 영화과가 발족되어 그 산하에 들어가면서 '대한전진보'로 개명되어, 흑백필름으로 월 1회 제작되었다. 이후 6.25전쟁이 발발하면서 제작이 중단되었다.[8]
참고로 북한에서도 북조선국립영화촬영소에서 1948년 3월부터 '조선시보'란 이름으로 뉴스영화를 제작하였다.[9][10]
뉴스 제작은 피난정부가 있던 부산에서 1952년 1월 다시 시작되었다. 이때 다시 제목을 고쳐 “대한 뉴-스”라고 하였는데, 16mm 필름으로 월 2-3회 정도 부정기적으로 제작되었다. '대한 뉴-스'는 이동영사반이 지방을 돌면서 사람들이 많이 모이는 곳에서 상영되었는데 안타깝게도 이 시기 제작된 1호부터 21호까지의 원판은 서울 환도 과정에서 분실되고 말았다.[11] 공식적으로 남아있는 기록은 1953년 6월 23일 22호부터다. 1954년(48호)부터는 외래어 표기법 개정으로 인해 이름을 \'대한늬우스'로 바꾸는데, 약 6년밖에 사용되지 않았음에도 그 쌈마이함으로 인해 현재까지도 회자되는 이름이기도 하다.[12] 이후 1957년 4월부터 본격적으로 한 주마다 제작되기 시작하였고, 1960년(275호)부터 '대한뉴우스'라는 이름으로 제작되다 1978년(1214호) 이후 '대한뉴스'라는 이름으로 정착되었다. 1980년 3월(1279호)에는 '카메라 순보'로 이름을 바꾸고 제작 간격도 월 2회로 줄어들었지만 3개월(1285호)만에 원래대로 환원되었다.
1972년부터 영화의 컬러화 시대에 따라 컬러 상영을 순차적으로 도입하기 시작하여 1977년 8월(1145호)부터는 컬러로 완전히 전환하였다. 대한뉴스 제 1008호 불조심처럼 흑백과 컬러가 섞여있는 뉴스도 있다.[13] 참고로 최초의 컬러뉴스는 1972년 12월 27일 912호로, 제8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당선된 박정희대통령 취임식과 임진각의 건설 소식을 다루고 있었다. #
일부는 애니메이션으로 이루어진 대한뉴스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서울 올림픽 즈음에는 호돌이가 나와 공익광고를 하는 대한뉴스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당시 대한뉴스 중 일부분은 공익광고협의회에 제작한 공익광고가 들어간 것도 있었다.
해외 소식도 대한뉴스를 통해 많이 보도되었다. 프라하의 봄, 나치 아돌프 아이히만 재판, 베트남 전쟁 발발, JFK 피격 사건, 베를린 대치, 장개석 사망, 베트남 쿠데타, 미국 유인로켓 발사 성공, 아폴로 11호, 도쿄 찌르기 사건, 동독 반소봉기 등. 1958년도 뉴스의 국외 소식에서 "유니버살 영화사 제공"이라는 자막이 나오는데, 영상을 자체적으로 촬영할 사정이 안 되다보니 유니버설 픽처스가 제작한 뉴스 영화를 수입한 것.
권위주의 독재 정부 선전수단이라는 비판을 많이 받았다. 제작 주체가 주체다 보니 권위주의 독재 정권에서는 그 나팔수 노릇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5.18 민주화운동 이후에 내놓은 안정만이 살길에서는 5.18 민주화운동을 '불순분자들이 조장한 폭동'으로 보도했고, 활기 되찾은 광주는 '폭동'이 끝난 후 광주의 '평화로운 모습'을 연출했다.
또한 전두환 신군부 집권 시기에는 항상 ' 대통령 동정'이란 제목을 무조건 첫 머리로 내보내야 했다.
3.2. 폐지, 그리고 TV 메인뉴스화
마지막 대한뉴스 2040호. |
1994년 8월부터 영화진흥법안 확정에 따라 문화영화와 같이 폐지가 결정되어 그 해 12월 말 2040호를 끝으로 공식적으로 종영됨으로써 42년간의 역사를 마감했다. 독재 선전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이미지, 국립영화촬영소의 쇠락과 함께 현대적인 지상파 TV 뉴스라는 대체재가 확고히 자리를 잡은 지 오래되어 더 이상 대한뉴스를 제작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사실 1970년대부터 TV가 각 가정에 널리 보급되어 지상파 TV 뉴스도 1970년대 후반에 자리를 잡기 시작했고, 컬러 방송도 1980년 12월 이루어졌다는 것을 감안하면 꽤 늦은 시기까지 존속한 것은 맞다.
TV 뉴스의 보급이 이루어지며 대한뉴스는 신속성도 없고, 논조는 정권 친화적이어서 대중적으로 거부감이 많았으며, 분량도 10분 안팎으로 적었기 때문에 시대에 뒤떨어진 대한뉴스는 자연스럽게 도태될 수밖에 없었다. 물론 당시 KBS와 MBC의 논조도 친정권 성향을 보였기는 했지만, 이 당시 메인 뉴스는 물론 주말에 방영하는 뉴스도 대한뉴스보다는 분량이 많아 더 많은 소식을 다룰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또한 1980년대 중후반 이후 방송사에서 뉴스 자료를 전량 보존하기 시작하여, 그나마 대한뉴스가 유일하게 내세울 수 있었던 역사 기록이라는 장점도 사라졌다. 지존파 사건, 성수대교 붕괴 사고 등 대한뉴스에서 다루지 않은 이유도 이미 TV 방송사가 크게 다루고 있어서 대한뉴스가 이를 제작할 명분이 없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대한뉴스 폐지 직전 상영분들을 보면 정부 시책을 적극적으로 홍보하거나 국민들을 계도시키려기보다는 찍던 것을 찍듯이 호수 채우기를 하는 평범한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폐지 이후 국정 홍보 기능은 1995년 3월 케이블 방송 출범에 따라 KTV 한국정책방송으로 이관되었다. 사실상 KTV 국민방송 뉴스가 대한뉴스의 정신적 후신인 셈이다. KTV 개국 후 약 15년이 지난 2010년 3월 15일부터 KTV에도 메인뉴스가 생겼는데 타이틀을 정책라인 10으로 시작해 여러가지로 바꿔가며 써오다 2018년 6월 18일부터 아예 '대한뉴스'로 바꾼 후 현재까지 방송 중이다.
4. 역사적 의의
대한뉴스는 정부 주도로 만들어진 만큼 정부 정책이나 권력자의 홍보에 치중하는 면이 있었지만, 한국 현대사의 주요한 맥락을 매주 기록해 나갔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를 가진다. 대한뉴스는 광복직후의 환희부터 6.25전쟁의 참상, 4.19와 5.16, 베트남전 참전, 남북회담, 수출신장, 10.26, 12.12 사태, ‘88올림픽 등의 정치․경제적 상황 뿐 아니라 각 지방의 특산물, 문화행사 등을 수록하는 등 1945년부터 1994년까지 대한민국 현대의 정치․경제․문화․생활사를 속속들이 영상으로 남겼다.
국가기록원 #
국가기록원 #
TV 방송이 1956년도에 시작되었고, TV 뉴스도 같은 해부터 편성되오기는 했지만 필름과 비디오 테이프의 가격이 워낙 비싸다 보니 1950~60년대의 경우 일부 프로그램이나 뉴스 필름을 제외하면 남아있는 것이 없고, 1970~80년대에도 방송사에서 테이프를 돌려쓰는 관행[14]이 남아 있었기 때문에, 당대의 시대상을 엿볼 수 있는 TV 프로그램들이 정상적으로 보존되지 못했다.
하지만 대한뉴스는 사실상 정부 시책의 선전 기관이다 보니 풍부한 예산으로 자료를 체계적으로 보존해왔기 때문에 그 당시의 시대상을 쉽게 알기 위해서는 사실상 대한뉴스밖에 길이 없는 셈이었다. 디지털화도 이미 2000년대를 거쳐 모두 완료되었기 때문에 KBS나 MBC, 그리고 동양방송의 자료를 가지고 있는 JTBC처럼 역사가 오래된 방송국들의 입장에서도 찾기 어려운 1950년대~1970년대 뉴스 자료를 찾는 것 보다는 그냥 대한뉴스 자료를 빌려서 쓰는 게 더 빠르고 편하다. 특히 1990년대에 개국해서 상대적으로 방송 자료가 부족한 SBS, YTN의 경우는 어쩔 수 없이 대한뉴스를 쓸 수밖에 없으며, 한 때 YTN에서 방영한 '오늘의 역사 - 역사 속 오늘'에서도 대한뉴스 자료를 사용했다.
특히 이론적으로 4K UHD급 화질로 복원할 수 있는 영화 필름으로 촬영했다보니 방송사 카메라로 찍은 영상보다 화질이 훨씬 좋다. 이 때문에 대한뉴스가 완전히 폐지된 1995년부터 HD 방송이 본격화되던 2010년 이전까지의 자료화면 화질이 더 좋지 않은 경우가 많다. 특히 1995년~2000년대 초반 자료는 방송사들이 저화질 SD 장비로만 촬영해서 화질이 좋지 않다. 2000년대 중반~2010년까지의 뉴스도 대부분은 화질이 좋지 않다.
은근히 밀덕후들을 즐겁게 해주는 장면이 많다. 이런 거나 이런 거. '1435호-기습도발 방어' 영상에서 공군의 An-2가 대항군 장비로 등장하고, '제 1253호-수도권 민방위 훈련'에서는 특전사 병력이 MAC-10 기관단총과 CAR-15로 묶여 불리는 단축형 AR-15계열 총기를 사용하는 장면이 등장한다. 베트남 파병 당시 한국으로 밀반입된 미제 군수품의 일부였던 CAR-15들의 경우에는, 4공화국 시절부터 경호실과 경호실의 통제를 받는 일부 경호부대에만 보급되었으며 1980년대 초 K1 기관단총의 보급으로 일선에서 물러나게 된다.
철도 동호인들도 여기서 옛날 자료들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수인선 협궤열차 시절이나 서울1호선 개통 뉴스 등. 철도박물관 얘기도 나오며 중앙선, 태백선, 영동선 전철화 준공, 경북선 개통 등 철도 관련 유물들도 찾아볼 수 있다.
5. 대한뉴스의 BGM
대한뉴스의 각 꼭지별 배경 음악은 초창기부터 5공화국 이전까지는 주로 미국의 행진곡들을 사용했다. 존 수자가 작곡한 High School Cadets March[15], The Stars and Stripes Forever[16], The Washington Post March[17], Nobles of the Mystic Shrine[18], 에드윈 F. 골드만이 작곡한 Bugles and Drums[19]등이 있다.그러던 것이 5공화국이 들어선 1980년대 방영분 이후부터는 과거처럼 행진곡 일변도에서 벗어나 당시 국내 또는 해외의 유행가의 Instrumental을 사용하는 경우도 자주 볼 수 있게 되었다. 특히 CUSCO의 음악은 당시 방송에서도 애용되었지만 대한뉴스에서도 단골로 쓰였다. 순수한 연주곡은 원곡을 그대로 쓰는 경우도 많았지만 노래, 특히 해외의 유행 팝송을 사용한 경우 어른의 사정으로 대부분 커버곡을 사용했기에 대충 들으면 원곡이 무엇인지 바로 알아채기 어려운 경우도 많다. 이 중 적잖은 곡을 남택상 & Young Pop's Orchestra가 커버한 음원을 사용하였다.[20]
이 시기 대한뉴스에 쓰인 유행가 및 연주곡 가운데 유명한 것을 소개하면 아래와 같다.
- 올리비아 뉴튼 존의 Xanadu, 편곡버전도 존재한다. Jean Michel De France의 Xanadu[21]
- 마이클 셈벨로의 Maniac[22]
- 마리아 비달의 Body Rock[23]
- 가제보의 I Like Chopin[24]
- 영화 록키의 삽입곡인 Going The Distance[25]
- 장 미셸 자르의 Les Chants Magnetiques, Part 2[26], Equinoxe, Part 4[27]
- 토토의 Africa[28]
- 요제프 하이든의 트럼펫 협주곡 Eb장조 3악장[29]
- 루트비히 판 베토벤의 요크셔 행진곡, Yorkscher Marsch[30]
대한뉴스가 끝날 때 사용된 배경음악(엔딩 음악)은 1960년부터 1990년까지 사용되었으며, 보통 이 음악과 함께 표어가 나올 때가 많았으며, 이 음악과 함께 성우가 말하는 표어 멘트가 같이 나오는 경우도 있었다. 실제 상영분의 한 예(1974년)
6. 기타
- '대한뉴스'라는 제호의 인터넷 언론사가 있긴 있으나[31] 여기서 말하는 대한뉴스와는 관련이 없다.
- 대한뉴스의 일부, 특히 1호부터 21호까지의 분량은 소재가 불분명하다. 이 분량은 한국 전쟁 당시 제작된 것들인데 전쟁의 혼란 탓에 정부에서도 원본 필름을 제대로 보관하지 못했다. 그래서 국가기록원에서도 이 원본 필름을 현재도 찾고 있다.
-
2009년 4대강 정비 사업을 홍보하기 위해 일부 극장에서 '2009 대한늬우스'를 상영했다. 개그콘서트 대화가 필요해 멤버들[36]이 출연했다. 출연진들에서 알다시피 대한뉴스의 성격과는 거리가 멀고, 대화가 필요해를 패러디한 코미디물이다. 다만 여러가지 최신 마케팅 기법이 범람하는 마당에 굳이 대한늬우스라는 이름까지 걸고 극장에서 상영할 이유가 있느냐는 비판[37]은 물론, 여성 비하 발언도 등장하면서 논란이 되었다.
- 우당탕탕 은하안전단의 은하안전단 늬우스가 대한뉴스의 패러디이다.
7. 관련 링크
- 한국정책방송원 e-영상역사관 - 대한뉴스 공식 사이트. 미공개 뉴스들도 볼 수 있다. 대부분 유튜브에 업로드된 영상보다 화질이 비슷하거나 좋지 않다.
- 대한뉴스 유튜브 공식 채널 - KTV 국민방송에서 직접 업로드한다. 2016년부터 업로드되고 있으며 원본 흑백/컬러 35mm 필름[38]을 720p로 스캔한 덕분에 품질이 옛날 영상 치고는 좋다.[39] 하지만 모든 뉴스가 올라와있지는 않아서 일부 영상은 위 e-영상역사관 사이트에서 봐야 하며, 최규하 대통령 사임 영상 같이 필름 보존 상태가 원래부터 엉망인 영상은 어쩔 수 없다. 참고로 16:9 비율을 맞추기 위해 하단부가 잘려 업로드 되었으므로, 원본 영상을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e-영상역사관에서 열람해야 한다. 다만 일부 영상은 e-영상역사관에서도 비율이 잘린 채 업로드 되어있기도 하다.
[1]
영어판으로 제작될 시에는 'Korean News'라고 불렀다.
[2]
'대한뉴스' 제1호 기준이다. 미군정청 공보부 '시보' 기준으로는 1946년 1월.
[3]
참고로 여기에
안익태가 찍힌적이 있어서 안그래도 친일의혹 망신에 일조했다.
황기 2600년 봉축곡 참조.
[4]
네덜란드에서 TV가 대중화된 것이 1960년대라는 것을 생각해보면 꽤 오랜 시기동안 존속한 셈이다.
[5]
즉
쿠바 혁명부터
소련 해체까지 제작한 셈. 특이하게도 쿠바에서 컬러 방송이 시작된 1976년 이후에도 꾸준히 흑백으로 제작되었다. 2009년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다.
[6]
'조선시보'로 언급되기도 하는데, 남아 있는 영상을 보면 그냥 '시보'라고 되어 있다.
[7]
제1, 2, 5호 및 특보
[8]
국립영화제작소 측은 미군정 공보부의 '시보'를 대한뉴스의 전신으로 간주하나 논란이 있다. 미군정 공보부의 역할은 이후 주한미국공보원(USIS)으로 넘어가 1952년부터 1967년까지 '리버티 뉴스'를 제작하게 되므로 미군정 공보부 시기의 '시보'는 대한뉴스가 아닌 '리버티 뉴스'의 전신이라는 주장도 있다.
[9]
현재 1948~1949년 제1~7호, 제11, 16, 21, 25호, 특보 제2, 5, 6, 8호 영상이 남아 있다.
[10]
일제강점기의 '조선시보', 미군정청 공보부 '시보', 북한의 '조선시보'가 모두 명칭이 유사해 혼동하기 쉽다. 심지어 인터넷에서는 북한의 조선시보 21호를 두고, "대한뉴스 21호가 북한에 남아 있다"는 잘못된 서술도 발견되므로 주의를 요한다.
[11]
2016년 행정자치부에서 6.25전쟁 중 사라진 ‘대한뉴스’ 1호에서 21호(1952~1953년 생산)를 찾는 ‘기록 찾기’ 홍보활동(캠페인)을 추진, 현재까지 계속 진행하고 있다.
#
[12]
이 당시 외래어 표기법은 원어 발음을 살린답시고
오토바이를 모오-타 싸이클이 아니라 '오오토바이',
도쿄를 '토오꾜오',
뉴욕을 '뉴우요오크'(...)로 적던 시절이다.
일본어로 번역된 외국 서적을
중역하거나, 그대로 가져와서 번역하는 일이 많았던 시절이었기 때문에 일본식 표기를 그대로 가져오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었다. 그러다보니 1990년대 이전에 출간된 서적이나 당대의 광고 문구를 보면 일본식 외래어 표기를 쉽게 볼 수 있다.
[13]
여기엔 1974년
대왕코너 화재사고가 나오는데, 대왕코너 화재 사고는 1972, 74, 75년 세 번 일어났고 이 중 1974년이 가장 심각했다.
[14]
푸티지 테이프는 현재도 보존하지 않고 재활용하고 있다.
[15]
대한뉴스 제 960호-고등학교 안보 실기대회
[16]
대한뉴스 제 1245호-지미 카터 미국 대통령 내한,
대한뉴스 제 1350호-싸우는 작은 매(F-16),
대한뉴스 제 1463호-로날드 레이건 미 합중국 대통령 각하 내외분 공식방한
[17]
대한뉴스 제 1463호-로날드 레이건 미 합중국 대통령 각하 내외분 공식방한
[18]
대한뉴스 제 631호-북괴 대남간첩 사건 발표,
대한뉴스 제 340호-박의장 미국으로 향발
[19]
대한뉴스 제 263호-과도내각구성,
대한뉴스 제 314호-5.16
[20]
남택상이 연주를 한 대표적인 BGM은 1990년대에 SBS에서 일요일 아침 시간대에 주택복권 추첨을 할 때 사용하던
BGM이 기억날 것이다.
[21]
대한뉴스 제 1455호-서울지하철 2호선
[22]
대한뉴스 제 1674호-국민식생활
[23]
대한뉴스 제 1678호-1988 새해
[24]
대한뉴스 제 1742호-이런 일 저런 일
[25]
대한뉴스 제 1618호-월동준비
[26]
대한뉴스 제 1707호-올림픽 컴퓨터
[27]
대한뉴스 제 1543호-63빌딩 준공식,
대한뉴스 제 1889호-ISDN
[28]
대한뉴스 제 1947호-여성운전사
[29]
대한뉴스 제 1595호-아시안게임 시설 준공
[30]
대한뉴스 제 1693호-김포국제공항,
대한뉴스 제 1713호-호남선 복선 개통
[31]
의외로 오래 되었는데 1995년부터 있었다(라고 신문사에서 주장하고 있다). 최소한 2008년 이전부터 기사 확인은 된다.
[32]
TBC 아나운서 출신이며 1970년부터 1985년까지 내레이션을 맡았다.
[33]
전
외교부장관
강경화의 부친이다.
[34]
서울중앙방송국 출신 아나운서로 1960년대에 제작한 대한뉴스의 내레이션은 거의 다 이분이 맡았다.
[35]
1970년대 우량아 선발대회의 사회자로도 유명하다.
[36]
단, 엄마 역은
신봉선이 아닌
양희성이 대신 출연했다.
[37]
2009년 당시에는
뉴트로가 지금처럼 주류이던 시절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38]
사용된 렌즈, 필름의 종류(방송용, 영화용 필름이 따로 있었고 화질도 달랐다고 한다.)와 보관상태, 스캔 기술, 네거티브/인터포지티브/릴리스 프린트냐에 따라 디지털 4K에 준하는 화질까지도 가능.
[39]
다만 수십 년은 된 영상들이고, 최악의 상태는 아니지만 35mm 필름이라고는 해도 화면비율 조정 외에 노이즈나 스크래치를 제거하거나, 화면떨림 안정화를 하는 등 추가작업을 하지는 않았다. 화질 또한 720p임을 감안해도 조금 흐릿한데 사용된 필름의 종류 때문인지, 실제 화면크기는 720p 이하인데 업스케일링을 한 것인지는 불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