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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01:30:51

Hearts of Iron IV/카이저라이히/국가/유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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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남동유럽
2.1. 그리스 (GRE)2.2. 루마니아 (ROM)2.3. 불가리아 왕국 (BUL)2.4. 세르비아 공화국 (SER)2.5. 알바니아 (ALB)
3. 남유럽
3.1. 스페인 왕국 (SPA)3.2. 이탈리아반도
3.2.1. 교황령 (PAP)3.2.2. 사르데냐 (SRD)3.2.3. 양시칠리아 (SIC)3.2.4. 이탈리아 공화국 (ITA)3.2.5.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 (SRI)
3.3. 포르투갈 (POR)
4. 동유럽5. 북유럽
5.1. 스칸디나비아
5.1.1. 노르웨이 (NOR)5.1.2. 덴마크 (DEN)5.1.3. 스웨덴 (SWE)5.1.4. 핀란드 왕국 (FIN)
5.2. 아이슬란드 (ICE)
6. 서유럽
6.1. 네덜란드 (HOL)6.2. 아일랜드 (IRE)6.3. 플란데런-왈로니 (BEL)
7. 중부유럽

[clearfix]

1. 개요

Hearts of Iron IV/카이저라이히의 주요 유럽 국가들을 정리한 문서.

2. 남동유럽

2.1. 그리스 (GRE)

헬레닉 제4공화국 The Fourth Hellenic Republic

벨트크리크[1]에서 그리스가 패배한 이래로 대변동과 고난이 닥쳐왔습니다. 마케도니아를 테살로니키 조약으로 상실함과 동시에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인한 엄청난 전쟁 채무에 의해서 알렉산드로스 왕은 망명을 떠나야 했고, 그 뒤에 제3공화국이 수립되었습니다. 하지만 정부의 실패로 인하여 1925년 요르요스 콘딜리스의 쿠데타가 일어났고, 그는 왕이 망명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영구적인 그리스 왕국의 섭정을 선언했습니다. 콘딜리스는 1931년에 최종적으로 권좌에서 쫓겨나 처형당했습니다. 그리고 제4공화국이 수립되었고, 요르요스 파판드레우가 이끄는 연정이 일단 첫 번째 선거에서 승리하여 정권을 잡은 상태입니다.

"빌어먹을!"
<colbgcolor=#eee,#444>
2% 그리스 민족해방전선
0% 그리스 사회노동당
5% 농민민주전선
14% 민족통일당
36% 신자유연맹
10% 자유당
21% 인민당
6% 신국가운동
5% 자유사상가당
1% 그리스 국민연합
}}} }}}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영토가 크게 축소되었고, 테살로니키 지역은 월경지가 되었다. 정치적으로는 국왕 알렉산드로스 2세가 퇴위하고 왕정이 붕괴한 후 차례대로 공화정, 군사정권, 공화정이 들어서서 게임 시작 시점에서는 공화정으로 시작한다. 시작 시 지도자는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초반에는 크게 신경써야 할 부분이 크게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유럽 국가들이 다 그렇듯 검은 월요일을 회복하는 것이고, 둘째는 베오그라드 조약, 셋째는 정치 체제를 결정하는 것이다.

검은 월요일은 중점을 찍다 보면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자산을 몰수할지 구제할지 결정하는 이벤트가 뜬다. 몰수하고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경제 제재를 가하지 않고 침묵하는 선택지를 고르면 좋겠지만 확률은 랜덤이다. 만약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자산 몰수에 침묵해 준다면 나중에 라이히스팍트나 도나우-아드리아 연맹에 가입할 수 있다.

37년이 되면 세르비아가 베오그라드 협약을 창설한다. 베오그라드 협약은 가능한 가입해 불가리아와 알바니아로부터 영유권 지역들을 되찾아야 한다. 전쟁이 끝나면 곧바로 조약을 탈퇴할 수 있는데, 이를 통해 오스트리아와의 전쟁을 피할 수도 있다. 보통 37년 초에 제4차 발칸 전쟁이 일어난다.

정치 체제는 왕정복고 트리와 공화정 유지 트리로 나뉜다. 게임 시작부터 여러 개의 이벤트가 나오는데, 이벤트 선택지에 따라 왕정복고파의 지지율을 올리거나 낮출 수 있다. 계속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1938년 선거 이후 왕정복고와 공화정 유지를 결정할 수 있다. 왕정을 복고하고 난 뒤 요르요스와 알렉산드로스 중 하나를 국왕으로 추대하는데, 동생인 알렉산드로스 2세는 입헌군주정과 전제군주정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고, 형인 요르요스 2세는 확정적으로 전제군주정이다. 또 다른 선택지로 메탁사스가 이끄는 독재정권을 수립하여 메탁사스 체제를 유지할지 파블로스를 왕으로 앉힐지 선택할 수 있다.

공화정을 유지할 시에는 생디칼리슴, 대중주의, 민주주의 등의 성향을 가진 정당 중 한 정당을 여당으로 선택할 수 있다. 왕정복고 국민 투표에서 투표조작을 할 수도 있는데, 일정 확률로 부정선거가 발각되어서 그로 인해 내전이 일어날 수도 있다.
그리고 독재체제를 유지하거나 사회주의 정당을 금지하면 생디칼리스트들이 내전을 일으키고, 반대로 생디칼리스트 세력이 집권을 하게 되면 우파 세력이 내전을 일으키게 된다. 무난한 방법은 착하게 부정선거를 하지 말고, 왕정 트리에서는 독재로 가지 말며, 생디칼리스트 정당을 금지시키지 않으면서 선거에서는 무난한 민주주의 이념에 속하는 자유주의/보수주의/사민주의 정당을 선택하는 것이다.

37년 이후, 불가리아와의 전쟁을 치르면서 고토를 수복할 기회가 주어진다. 전쟁 중점 트리가 열리는 것인데, 이 중점을 따라가다 보면 바로 트라키와 콘스탄티노플, 서부 아나톨리아를 수복한다는 메갈리 이데아 트리가 열린다. 메갈리 이데아와 배타적인 오스만과 친하게 지내는 트리는 소비재 감소 10%를 획득할 수도 있지만, 메갈리 이데아 트리를 찍고 오스만 제국을 공격하는 방향으로 계속 중점 찍으면 오스만 제국을 공격할 수 있는 디시전이 활성화된다. 디시전을 누르고 60일을 기다리면 선전포고가 되는데 대략 1938년인 이 시기면 오스만 제국이 카이로 조약과 한창 치고 박고 있으므로 아나톨리아와 콘스탄티노플은 빈집상태나 다름 없다. 빈집털이 후 카이로 조약과 오스만 제국을 분할하고 평화조약을 맺으면 구 오스만 영토와 관련된 디시전이 또 다시 활성화된다. 콘스탄티노플, 트라키, 프루사, 스미르니, 에게해 군도, 키프로스 섬만 점령하고 나머지는 종속국 튀르키예로 해방하거나 터키 영토 전체를 군사점령하는 선택지가 있다. 이후 디시전을 통해 클레임 지역인 남부 마케도니아, 콘스탄티노플, 남부 알바니아 등지에 코어를 박을 수 있다. (마케도니아 같은 구 불가리아령 영토는 오스만과의 전쟁 이전에도 코어 박기 디시전이 활성화되어 있다.) 코어 박기도 그렇고 그리스 자체가 정치력이 상당히 많이 필요한 국가지만 중점으로 정치력을 왕창 퍼주니 혹시 코어를 못 박을까 크게 걱정할 필요는 없다.

그와 동시에 협상국, 라이히스팍트, 인터내셔널 진영에 참여하는 디시전도 있는데, 웬만하면 협상국에 참여하는 것이 좋다. 지중해 제해권을 대개 협상국이 잡기 때문. 협상국이 아닌 다른 진영을 선택했다가 그리스 혼자 할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는 상황을 맞닥뜨릴 수도 있다. 하지만 간혹 러시아가 기껏 오스만으로부터 되찾은 콘스탄티노플을 내놓으라고 요구하면서 선전포고 날리는 경우도 있어서, 이런 경우에 대비해 유일하게 러시아와 육군으로 대결할 수 있는 라이히스팍트도 나쁜 선택만은 아니고, 아니면 아예 모스크바 협정에 가입해도 된다.

맨파워가 아쉽긴 하지만 비열강 국가 중에선 꽤나 쉬우며, 리워크 된지 세월이 꽤 흐른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플레이 가능한 루트도 다양한 편이다. 팬덤 일각에선 비잔티움 제국 재건 트리가 없고, 아나톨리아 지역에는 코어를 박을 수 없다는 점을 아쉬워한다. 그러나 미친 남작 운운하던 한물 간 역사왜곡에 기반해 있던 운게른 루트를 싸그리 날려버린 데서 보여주듯 한번 물갈이 된 현재 카라 개발진은 과거 다키스트 아워 시절이나 바닐라 게임의 (카라 개발진 관점에선) 시대착오적인 복고주의적 성향[2], 지나치게 역사적 실증주의와 유리되어 있는 과도한 확장 루트를 쳐내겠다고 여러 차례 말한 바 있다. 때문에 비잔티움 재건이 가능할 일은 다시 제작진이 싸그리 한번 바뀌고 현재와 정반대 분위기로[3] 뒤집히지 않는 한 결코 없다.[4]

메갈리 이데아 트리를 열면 세력가입이 불가하니 세력가입을 하고 트리를 타야 한다.

2.2. 루마니아 (ROM)

루마니아 왕국, 1936년

루마니아 왕국은 1916년 헝가리인들로부터 트란실바니아를 빼앗겠다는 원대한 야망을 품고 벨트크리크에 가입했을 당시 비교적 젊은 신생국가였습니다. 1916년 초기의 몇몇 성공에도 불구하고 이 작은 나라는 독일, 오스트리아, 그리고 불가리아 군대에 의해 빠르게 제압되었습니다.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루마니아군은 무너지지 않았고, 대신 그들은 이아시를 중심으로 저항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도움으로 루마니아는 그들의 힘을 보충하고 계속해서 동맹국을 격퇴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러시아 혁명과 동부전선의 붕괴로 흔들리면서 끝이 났습니다.

많은 젊은이들이 닿을 수 없는 이상 때문에 죽었고, 나라에는 아무런 이익도 가져다주지 못했습니다. 루마니아군은 최선을 다해 싸웠기 때문에 부쿠레슈티 조약은 더욱 더 쓰라린 것이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배후중상론이 등장했습니다. 루마니아는 러시아인들에게 배신당했고, 서방의 협상국에게서 홀로 남겨졌고, 유대인들 같은 반역자들이 내부에서 벌인 방해공작에 당했습니다. 이러한 쓰라림, 보복주의, 그리고 불평등한 토지 소유와 같은 사회적 문제들은 급진적인 운동을 빠르게 발전시켰습니다. 1936년까지 그러한 운동 중 가장 강력했던 것은 철위대의 수장 코르넬리우 코드레아누가 이끄는 군단 운동으로 알려진 대천사 미카엘 군단이었습니다.

1927년, 페르디난드 왕이 사망하자 그의 아들 카롤 2세가 그 뒤를 이었습니다. 카롤은 꽤나 바람둥이라는 평판을 가지고 있었지만, 대전쟁은 그에게 상흔을 남겼습니다. 그의 꿈은 확고했습니다. 아버지가 이루지 못했던 것을 성공시키는 것입니다. 국왕은 같은 추진력을 가진 동맹을 발견했고 코드레아누와 거래를 맺었습니다. 보복의 열정으로 힘을 합친 두 남자는 1933년 선거에서 민주주의 체제를 무너뜨렸습니다. 철위대가 이온 게오르게 두카 총리를 암살한 이후 코드레아누는 첫 군단 정부를 구성했습니다. 이는 대루마니아를 향한 첫 발걸음이었습니다.

국왕과 수장은 그들의 보복 프로젝트에서는 동맹일지 모르지만, 궁극적으로 그들은 권력을 나눠 갖고 싶어하지 않습니다. 두 남자 사이에서 벌어진 '그레이트 게임'이 선거 이후 빠르게 시작되었습니다. 코드레아누는 그의 근거지에서 매우 인기 있는 문제인 야심찬 토지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영향력 있는 지주들은 왕에게 호소했고, 왕은 코드레아누에게 개혁을 중단할 것을 지시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의 적대감이 커지면서 권력 투쟁은 더욱 치열해졌고, 두 명 모두 권력을 포기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들이 대루마니아라는 공동의 목표를 공유하는 한, 그들은 함께 일할 것입니다. 하지만 그 이후에는... 오직 신만이 알 것입니다.

"루마니아의 새로운 미래를 위해!"
<colbgcolor=#eee,#444>
0% 루마니아 생디칼리슴당
0% 루마니아 생디칼리슴당
0% 루마니아 생디칼리슴당
8% 루마니아 사회민주당
11% 농민당
16% 국민자유당
3% 보수당
0% 군사정부
18% 왕실 고문단
44% 대천사 미카엘 군단
}}} 플로이에슈티 유전의 소유권은 독일에게 있습니다. ||
}}}
가혹한 부쿠레슈티 조약의 결과로 루마니아는 오헝 제국과 독일 제국의 식민지들 중 하나에 가까운 신세로 전락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서유럽 협상국들, 러시아, 루마니아 내 소수민족들의 배신으로 졌다는 배후중상설이 퍼졌고, 그로 인한 과격한 운동은 불평등한 토지 소유와 같은 사회 문제가 겹치자 더욱 거세졌다. 이 중 제일 강력했던 것은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가 이끄는 대천사 미카엘 군단이었다.

한편 1927년 페르디난드 1세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 카롤 2세가 즉위한다. 아버지가 이루지 못한 트란실바니아 확보의 꿈을 이루려 하는 카롤 2세는 코드레아누와 손을 잡는다. 이온 두카 총리가 철위대에 의해 암살된 후 코드레아누와 대천사 미카엘 군단이 집권한다. 하지만 두 지도자는 서로 손을 잡았지만, 권력을 양보할 생각은 없다. 코드레아누가 토지 개혁을 시작한 후 지주들이 카롤 2세에게 호소해 토지 개혁을 중단시켰다. 이것이 "그레이트 게임"이라고 불리는 카롤 2세와 코드레아누 간 권력 투쟁의 시작이었다.

불가리아에게 빼앗긴 도브루자를 되찾고 오스트리아의 영토인 트란실바니아와 부코비나를 빼앗는 것이 목표인데, 정치력을 소모해 트란실바니아에 불안정을 유도하며 폭동까지 유발할 수 있다. 그 전에 검은 월요일로 인해 망가진 경제를 복원하며 미완성된 토지 개혁을 완수해야 하는데 국왕의 권력이 강하다면 지주들과 타협하고 산업화와 도시화 위주의 개혁을, 철위대의 권력이 강하다면 지주들의 토지를 빼앗아 재분배하고 농업 분야를 강화하는 개혁을 추진하게 된다. 중점을 어떻게 선택하느냐에 따라 국왕도, 철위대도 목적을 제대로 달성하지 못하는 개혁 완료도 가능하다.

만약 오스트리아에게서 영토를, 특히 쾨니히스보덴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면 카롤 2세와 코드레아누의 권력 투쟁이 점점 격화되며 둘 중 하나가 죽기도 한다. 둘의 권력 투쟁은 4가지 루트로 끝난다.

0.26.2 패치 후 산서군벌과 민감기의군만 가지고 있었던 권력의 균형 창이 추가되었다.

2.3. 불가리아 왕국 (BUL)

흔들리는 산 스테파노의 꿈

불가리아는 벨트크리크의 승전국 중 하나로 부상하여 발칸반도에서 요구한 모든 영토를 할양받았고, 1878년 산 스테파노 조약 체결 이래로 불가리아 외교 정책의 핵심 목표였던 "대불가리아" 권역을 통일했습니다. 그러나 대불가리아의 통일은 더 많은 분쟁의 시작일 뿐이었습니다. 새로운 영토의 점령에는 많은 비용이 필요했고, 국가는 심각한 부채에 시달렸으며, 정치권은 분열되었습니다.

1920년대 초에는 바실 라도슬라보프의 국민자유당과 민주당, 농민연합 중도파, 포괄사회주의자 등 많은 야당들이 정치적 투쟁을 벌였습니다. 이는 벨트크리크 이전부터 존재했던 당파주의의 연장선이었지만, 의회의 전통적인 주류 정당들은 더 이상 승리를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1925년 영국과 세르비아의 혁명으로, 지방의 농민들과 의회의 사회주의자들이 더욱 대담해졌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보리스 왕태자는 노쇠한 부왕에게 본인이 신임하는 콘스탄틴 게오르기에프 장군을 신임 총리로 지명할 것을 종용했습니다. 게오르기에프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반군주주의자 정당들을 규제하고, 공공질서를 유지하는 데 있어 정부에게 전제적인 권한을 부여하는 국가보안법을 통과시켰습니다.

1928년, 의회의 민주주의 야당들은 완전한 독재 체제가 시행되기 전에 게오르기에프를 강제 퇴임시켰습니다. 계엄령이 해제되고 민주주의가 회복되는 동안에도, 권위주의 법률의 그림자는 여전히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급진민주주의자, 민주주의자 그리고 "브라브차(참새)"의 농민들이 결성했던 소위 "인민연합"은 1933년 크레디탄슈탈트 위기 이후 붕괴되었습니다. 이에 대응하여, 국민자유당과 인민진보당은 바실 라도슬라보프의 자유주의 연정에서 이름을 딴 '제2차 자유주의 집중'을 결성했습니다. 왕태자의 후원으로 만들어진 이 연합은 국내외 정책에 있어서 단합에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1936년이 시작되었고, 그들의 수장인 페트코 스타이노프 총리는 불가리아의 미래를 결정해야만 합니다.

"대불가리아는 존속되어야만 한다!"
<colbgcolor=#eee,#444>
1% 불가리아 아나키스트 공산주의자 연합
3% 농업전문인연합 "블라소브덴"
6% 불가리아 사회민주노동당 - 협소사회주의자
6% 불가리아 사회민주노동당 - 포괄사회주의자
8% 불가리아 농업인민연합 "참새 1"
11% 5인 위원회
15% 두번째 자유주의 집중 - 국민자유당/연합인민진보당
30% 두번째 자유주의 집중 - 국민자유당/연합인민진보당
11% 정치집단 "즈베노"
9% 불가리아 국민군단연합
}}} 불가리아 민주주의의 생사는 이 법의 미래에 달려 있습니다. ||
생산 효율성 한도 +10.00%, 저항도 증가 속도 -25%, 일간 순응도 획득 -0.05%
}}}
동맹국이 승리한 세계인 만큼 동맹국 편에 선 불가리아도 적잖이 이득을 봤다. 세르비아로부터 마케도니아와 니시 지역을, 루마니아로부터 실리스트라(도브루자)와 콘스탄차를, 그리스로부터 세레스와 플로리나를 빼앗으며 덩치를 크게 불렸다. 그러나 이러한 영토 통합은 내부 반발을 불러왔고, 세르비아, 루마니아, 그리스인들의 봉기는 1924년까지 불가리아를 준 내전 상태로 빠트렸고, 그 상황 속에서 불가리아는 계엄령을 선포하였다. 1924년 군정 해산 이후, 1930년까지 12차례의 정부 수립과 해산이 이어졌고 이러한 혼란은 곧 정부에 불만을 품은 참전 용사들이 점차 자체적인 조직을 형성하는 계기가 되었으니, 이러한 사설 군조직체 "즈베노"는 불가리아의 민주주의를 군사독재정으로 대체하기 위해 암약하고 있다.

당연하게도 동맹국 편에 서도록 한 차르 페르디난트 1세도 굳건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리워크 이후 영유권 주장 지역이던 니시 지방을 처음부터 가지고 있게 되었지만 니시, 북부 도브루자, 자파드나 마케도니야 지역은 핵심 주가 아니며 정치적으로는 군사독재정을 표방하는 즈베노,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페토르카, 전제군주정을 표방하는 보리스 왕태자 간의 대립으로 정치가 혼란스럽다. 이를 반영해 장군진 중 펜초 즐라테프, 흐리스토 루코프, 키몬 게오르기에프가 '숨은 동조자' 특성을 가지고 있다.

영토는 크게 신장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외교적으로는 완전히 고립되고 말았다. 세르비아, 루마니아, 그리스 모두 불가리아라면 이를 갈고 있으며 빼앗긴 영토를 되찾기 위해 복수전을 준비하고 있다. 이후 불가리아의 최대 동맹인 독일과 오스트리아가 검은 월요일에 직격탄을 맞고 침몰해 발칸에 신경을 쓸 여지가 없게 되면 그 마수를 드러내며, 대전쟁에서 획득한 영토를 모두 뱉어내라며 최후 통첩을 날리고 거부할시 4차 발칸 전쟁에 돌입하게 된다. 이때 외교를 잘 해둔 상황이라면 알바니아를 아군으로 끌어들이고 오스만과 불가침 조약을 맺을 수 있지만, 외교 상태가 엉망인 경우 알바니아는 중립을, 오스만은 뒷치기를 들어오게 된다.

전쟁에서 승리할시 이전에 선택했던 정치 체제가 굳건해지고 베오그라드 협약국에 대한 처우를 결정하게 되지만[5], 패배할 경우 이전에 집권하고 있었던 정부가 실각하고 페르디난트 1세가 퇴임하며 새로운 정치 세력이 등장하게 된다.[6]

전쟁 전에는 초당파 정권(군주 독재정), 즈베노 쿠데타, 정당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고, 패전 이전에 초당파 정권이 집권했었다면 즈베노 쿠데타와 민주주의의 회복중 하나를, 즈베노가 집권했었다면 군주 독재정과 군단 혁명중 하나를, 민주주의였었다면 군주 독재정과 알렉산더르 스탐볼리스키,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마놀 바세프의 농업인민연합, 협소사회주의, 농업전문인연합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게 된다.
국민군단연합은 왕정을 종결시키거나 키릴 왕자를 즉위시킬 수 있다. 조국전선은 세 집단의 연합체이기 때문에 이벤트로 셋 중 하나가 정권을 잡게 되며 스탐볼리스키가 정권을 잡을 시 빼앗긴 영토를 포기하고 베오그라드 협약에 가입하는 것으로 세르비아와 화해할 수 있다.

즈베노 루트를 타서 유고슬라비아 지역을 점령하면 불가리아로 유고슬라비아를 수립할 수 있고, 왕실 독재정을 수립하고 150일 안에 전쟁에 참전한 베오그라드 세력을 완전히 항복시키고,[7] 코스탄티니예를 점령하면 불가리아 제1제국, 불가리아 제2제국에 이은 제3제국을 선포할 수 있다. 불가리아 제3제국은 자체적인 세력권 형성이 가능하고, 즈베노 루트의 불가리아로 형성하는 유고슬라비아는[8] 세르비아의 사회주의 유고연방과 더불어 유이하게 불가리아까지 코어가 닿는 유고슬라비아다. 반면 4차 발칸전쟁 패전시 뜰수 있는 정부 중 루마니아 코드레아누의 영향을 받은 국민군단연합은 방금 전쟁에서 패전해놓고서 정신 나갔는지 바로 다시 베오그라드 조약에 복수전 걸었다가 폭망하고 아예 세르비아 속국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은데 버그가 아니라 배후중상설을 진지하게 믿어서 4차 발칸전쟁에서 불가리아가 '실력으로 패배한게 아니다'라고 생각하고 거기에 맞춰 행동할 것이라며 의도적으로 넣은 장치라고 한다.

위에 설정을 보면 알겠지만 카이저라이히의 불가리아는 과하게 욕심을 부린 대가를 어떤식으로든 치를 수밖에 없게 만는 국가다. 제작진에서도 4차 발칸 전쟁에서 불가리아가 패배할 것을 기본 골자로 삼았는지 전쟁에서 승리했을 때 찍을 수 있는 중점들은 그 숫자가 적고 심심한 반면, 패배 후에는 정치 세력도 다양해지고 중점도 엄청나게 늘어나 플레이가 상당히 재밌어진다.
또 불가리아가 발칸 전쟁에서 승리하게 될 경우 동맹국의 따땃한 아랫배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남쪽 국경이 안전해지는 결과를 낳기 때문에 2차 대전쟁이 (동맹국 입장에서) 굉장히 수월해진다.

2.4. 세르비아 공화국 (SER)

세르비아 공화국

보스니아의 세르비아계 민족주의자인 가브릴로 프린치프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 암살은 벨트크리크의 발발을 초래한 기폭제였습니다. 세르비아군은 용감하게 싸워 동맹국 진격을 몇 달 동안 지연시키면서 세계의 존경을 얻었지만, 1915년 말에 세르비아 전역이 점령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불가리아의 점령 지역으로 분할된 세르비아는 착취당하고 불길에 휩싸였으며, 적들은 야만적인 정권에 대한 복수를 하려고 하였습니다. 이는 영토 내의 저항을 대담하게 하였을 뿐이지만, 1918년에 전선의 상황이 바뀌었습니다. 동맹국인 독일의 압력을 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는 마침내 평화회담을 시작하였고, 코르푸의 세르비아 저항군은 협상국의 처참한 상태를 보고 합병보다는 쓰라린 평화가 낫다는 결론에 도달하였습니다. 국왕 페타르 1세는 퇴위하고 그의 아들이자 191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점령 지역에서 세르비아가 잔존국으로 영원히 오스트리아의 영향권에 묶이도록 한 징벌적인 바르톨츠 조약에 서명한 알렉산다르 2세[9]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러시아와 프랑스의 혁명, 그리고 인민급징당의 반대파에 고무된 베오그라드에서의 대담한 사회주의 운동은 알렉산다르 2세가 가혹하게 대응하게 하였습니다. 정치 생활은 끝났으며, 사회주의 운동은 금지되었고, 패전국의 질서를 유지하고자 군주독재정이 도입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행동은 끝까지 국가의 긴장을 고조시켰을 뿐이었고, 1925년 혁명으로 폭발하였습니다. 콘스피라치야 비밀결사로 구성된 군대는 국왕에 반항하는 행동을 보였고, 12월 3일에 알렉산다르 2세의 암살을 계획하여 군주독재정을 무너뜨렸습니다. 보이슬라브 벨코비치 총리는 세르비아 공화국을 선포한 반대파에 항복하였습니다.

짧은 외교적 교착 상태 후, 류보미르 스토야노비치의 임시정부는 바르톨츠 조약을 승인하였고, 빈도 차례로 공화국 정부를 승인하였습니다. 오늘날 세르비아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발칸반도에서 민주주의의 불타는 상징으로 서 있습니다. 하지만 사실 정부가 평화, 복지 그리고 번영과 같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목표를 선언할 수도 있지만, 세르비아 정부의 어떤 것도 콘스피라치야의 승인 없이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의도적으로 검은 손을 본뜬 이 군사비밀결사는 오직 하나, 즉 공화국 국경 밖에 있는 모든 세르비아인의 해방만을 추구합니다. 또 다른 음모도 도사리는데, 페타르 지브코비치가 이끄는 하얀 손은 공화국을 타도하고 알렉산다르 2세의 미성년자 아들을 복위할 기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1936년이 시작되면서 세르비아는 아직 명목상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의존국이지만, 통제가 점차 느슨해지고 결국 무너지면 세르비아의 적들은 떨 것입니다.

"세르비아는 다시 위대해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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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회노동당 (펠라기체브치)
2% 사회노동당 (중앙노동조합)
15% 사회노동당
5% 세르비아 사회당
31% 세르비아 공화당
21% 인민급진당
4% 농업당
3% 세르비아 민주 국가당
7% 하얀 손
11% 콘스피라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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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칸 국가의 중심. 베오그라드 협약을 창설해 루마니아와 그리스를 동맹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세계대전 이후 카라조르제비치 왕조는 유지되었으나, 불가리아에게 마케도니아와 니시 지방을 빼앗겼다. 보상으로 몬테네그로와의 통합을 이뤘지만 해안가는 오스트리아의 차지인지라 여전히 내륙국이며, 세르비아의 산업경제가 붕괴되었고 농업경제로 회귀하였다. 세계대전의 패전으로 인해 정치상황이 혼란스러워지자 새로운 국왕 알렉산다르는 군주 독재정을 구축해 혼란스러운 정치적 상황을 타개하려 했으나 결과적으로는 오히려 악화되었고 1925년 공화혁명 도중 암살당했다.

1925년 이후로는 쭉 공화당이 집권중이며 1936년 10월 선거에서 집권당을 교체할 수 있다. 집권이 가능한 당은 사회노동당(급진사회주의), 공화당(사회자유주의), 인민급진당(시장자유주의)가 있으며, 연정에 참여 가능한 당으로는 농민당(사회보수주의), 사회당(사회민주주의)이 있다.

드라고미르 바시치의 공화당은 민주주의를 수호하는 개혁정당으로, 제작자가 공인한 입문루트이다.

급진당은 과거 왕국시절 주요 정당이었으며 밀란 스토야디노비치 대통령이 이끌게 된다. 민주주의 성향을 유지할 수도 있으나, 스토야디노비치 대통령의 의중에 따라 민주주의를 파괴하고 독재체제를 구축해 권위민주주의나 후견전제주의까지 변화할 수 있다. 사회노동당은 세르비아 공화국 체제에 의심을 가지고 있으며 3번째 혁명을 완수하기 위해 노력한다. 여담으로 유고슬라비아를 형성한 다음 크로아티아인 지도자를 선출하고 루마니아를 괴뢰하고 형제애와 단결 중점을 5년 동안 달성하지 않으면 요시프 브로즈를 선출할 수있다.

사회주의노동자당의 선거승리를 받아들이지 못한 하얀 손이 쿠데타를 단행해, 캐나다에 망명해 있는 알렉산다르 왕의 아들 페타르 2세를 불러와 세르비아 왕국을 복원할 수 있다. 집권 후 급진농민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꾸고 페타르 지브코비치와 디미트리예 료티치가 섭정이 되어, 페타르 2세가 성년이 되기 전까지 통치할 수 있다.

섭정기간 동안 찍은 중점에 따라 후견전제주의를 유지하거나 루마니아 철위대에 영향을 받은 국민대중주의자들이 집권할 수 있으며 히든 루트로는 페타르 2세가 친위 쿠데타를 감행해 민주주의를 복원할 수 있는데, 3번의 이벤트에서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성공할 수도 실패할 수도 있다.[11] 세르비아로 유고슬라비아를 형성할 때는 집권당에 따라 5가지 형태의 유고슬라비아를 형성할 수 있는데, 0.20 패치 이후 달마티아와 리예카 없이도 유고슬라비아를 형성할 수 있게 되었다.
콘스피라치야, 즉 "음모"는 1920년대 세르비아 군대 내에서 결성된 군사 비밀 단체로, 옛 흑수단 대원들의 지도 아래 결성되었습니다. 이 단체의 목표는 모든 세르비아인의 통일이며 '강한 세르비아 정체성-강한 세르비아 국가'라는 표어를 내세우고 있습니다. 이들은 1925년에 알렉산다르 2세 국왕을 암살하고 보다 융통성 있는 세르비아 공화국의 시대를 여는 데 주저하지 않는 등 정치적 성향에 구애받지 않는 이념적 신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들의 영향력은 공공 영역에 널리 퍼져 있지만, 이 단체의 광범위한 인맥을 잘 활용하면 강력한 혜택을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콘스피라치야와 이들의 지원은 세르비아의 주요 재무장 수단이며, 이 항목은 군대를 개선하기 위한 다양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합니다. 재무장에 필요한 비용을 지불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군대 내 인맥에 의존하여 국민대중주의 지지도를 높이거나 군대를 우회하는 대신 막대한 정치력을 사용할 수도 있습니다.

게임 내적으로나 제작진들이나 두루뭉술한 암시만 있어서[12] 초보자들은 종종 저지르는 실수인데, 당장 주는 장비나 인력 같은 보너스 좋다고 콘스피라치야에게 협조하다 콘스피라치야 영향력이 너무 높아지면 나라 뒤집히고 고유중점 없는 상태로 전락하며 제작진 공인 실질적 게임오버가 되어 버리니 조심하자. 제작진 공인으로 콘스피라치야 정국 장악은 무슨 정권 교체 같은 '다른 플레이'가 아니라 민주공화국을 자처하면서 극우 군인 음모론자들한테 의지하면 어찌 되는지 보여주는 페널티로 넣은 루트아닌 루트기 때문에 정치개혁 하는 와중 피의 숙청으로 날려버리자.[13]

2.5. 알바니아 (ALB)

1936년 알바니아 공화국

벨트크리크의 발발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알바니아의 병사들을 보내 그들과 함께 싸울 것을 요구하며 알바니아에 새로운 문제를 안겨 주었습니다. 빌헬름 추 비트 공작이 런던 조약에서 설정된 알바니아의 중립을 거론하며 이를 거절하자, 오스트리아-헝가리는 지금까지 보내왔던 급료를 갑작스럽게 끊었습니다. 정권은 무너졌고, 빌헬름 공작은 1914년 9월 3일 나라를 떠나 형식적으로는 알바니아의 정부 수반 직위를 유지하면서도 독일 제국군에 입대했습니다. 1919년, 명예로운 평화로 알바니아의 지위가 공식적으로 결정되었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영향을 받는 빌헬름 공작의 권력 아래에 놓인 공국이 재건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오스트리아에서 일어난 사건들 덕분에, 1924년 알바니아는 아흐메트 조구, 셰프체트 버를라치, 알리 켈멘디, 술레이만 델비나, 판 놀리, 아브니 루스테미 같은 수많은 알바니아 민족주의자들의 도움으로 자유를 쟁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은 공작을 성공적으로 축출했고 나라에서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제거했습니다. 익히 알려진 것과 같이, 1924년 알바니아 혁명은 아브니 루스테미가 이끄는 통합당과 셰프체트 버를라치가 이끄는 진보당이라는 두 정당의 대두를 낳았습니다.

알바니아에서 가장 큰 지주 버를라치와 다른 귀족적 인물들의 도움으로, 아흐메트 조구와 진보당은 1928년, 1932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알바니아와 통합당의 민주적인 인사들은 토지개혁과 하층민들에게의 권력 분배를 주장해왔습니다. 이러한 개혁은 진보당에 의해 모두 거부되었고, 현 상태의 알바니아는 앞으로 힘든 시기를 보내야 할 매우 양극화된 국가입니다...

"상황에 관계없이 우리는 승리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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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알바니아 전위당
4% 국가혁명위원회
0% 코르처 그룹
38% 통합당
7% 인민당
4% 신민주당
42% 진보당
0% 고등평의회
2% 대중당
3% 민족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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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전쟁이 끝난 후 알바니아 공국에서 공화주의 혁명이 발발해 공화국이 수립되었고 1928년 초대 대통령 아흐메트 조구에 의해 왕국으로 국체가 바뀐 실제 역사와는 달리 1936년에도 공화국이 유지되고 있다.

정치적으로는 통합당과 진보당이 서로 대립하고 있으며, 검은 월요일의 영향을 지우는 중점과 국가를 개혁하는 중점 역시 서로 대립하고 있다. 심지어 도중에 카눈으로 정권을 갈아치워 버릴 수도 있는데, 카눈으로 정권을 교체하면 이전 정부가 찍었던 중점 역시 사라진다.

4차 발칸 전쟁 중 코소보를 차지하기 위해 불가리아의 편을 들어 베오그라드 협약에 선전포고할 수 있지만 기본적으로 너무 약소국이기 때문에 AI가 잡으면 코소보를 얻기는커녕 좀 밀리고 바로 평협을 맺어 전쟁에서 빠지거나 세르비아와 그리스에 분할당하기 일쑤다. 외교적으로는 주로 도나우-아드리아 연맹에 가입하지만 루마니아나 불가리아 중 하나에 접근하여 그들이 가입하는 세력에 함께 가입하기도 한다.

오스트리아의 괴뢰국이 되면 비트 대공이 다시 복귀한다. 물론 비트 대공이라도 카눈을 피해갈 수는 없다.

3. 남유럽

3.1. 스페인 왕국 (SPA)

1936년 스페인 왕국

한때 식민제국 중 가장 위대했던 스페인 왕국은 1898년 미국과의 짧은 전쟁 이후 남아있는 해외 식민지를 모두 상실했습니다. 그 후 바스크 카탈루냐 양방향에서 분리주의 운동이 일어났고, 교회 그리고 급진적인 노동자 운동인 전국노동연맹이 내정에 간섭하고 있습니다. 스페인의 여론은 크게 분열되었습니다.

알폰소 13세는 1902년 옥좌에 앉은 이후, 모로코에 개입해 스페인의 식민제국 지위를 되찾는 데 혈안이 된 듯했습니다. 모로코 개입은 10년 내내 지속되었고, 승리의 여신은 완전히 스페인의 편만은 아니었습니다. 모로코 식민지는 영구적인 소요 사태의 근원으로 남게 됐습니다. 그 후 스페인은 내분으로 휘청거리게 되었으며, 벨트크리크 내내 중립을 유지하는 동안, 왕정에 대한 스페인 국민의 지지도는 점점 사그라들었습니다.

1931년 총선의 결과로 스페인 제2공화국이 선포되었고, 알폰소는 국민의 의지를 받아들이며 퇴위했습니다. 하지만 공화국은 백일천하로 끝났습니다. 불과 1년 후에 산후르호 장군이 주도한 쿠데타에 의해 복벽이 이뤄진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단명한 스페인 공화국의 기억이 왕국의 반대파를 좌우로 부채질하고 있습니다.

현재까지 스페인 사회에는 깊은 분열이 남아 있습니다. 알폰소 카를로스가 이끄는 카를로스파 운동은 '진정한 왕조'를 복벽하고 통일주의적인 기독교 왕국을 재건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반대편에서는 아나르코-생디칼리스트인 전국노동연맹이 스페인의 국가 체제 전체를 갈아엎은 뒤, 코뮌과 경제적 조합들의 자발적인 연합으로 대체하려고 합니다. 이 정치적 분열을 해결하지 않는다면, 스페인의 내전은 시간 문제일 뿐입니다.

"승리를 위해 전진하자."
<colbgcolor=#eee,#444>
0% 마르크스주의 통일노동자당
5% 전국노동연맹
2% 스페인 사회주의노동자당
9% 공화좌파
10% 공화행동
12% 공화자유 우파
8% 국민행동
47% 국민행동
5% 애국연합
2% 국민생디칼리슴 공세평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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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역사와는 달리 호세 산후르호의 프로눈시아미엔토(Pronunciamiento)가 성공하여 왕정이 다시 복고되었으며 영국의 몰락으로 히브랄타르를 차지했다.

원래는 중점이 다소 빈약한 편이었지만 0.26 패치로 리워크가 이루어지면서 국가 중점이 좀 더 알차게 바뀌었다.

스페인 내전은 스페인 왕국vs전국노동연맹vs카를로스파 3파전으로 발생하며 미국 내전처럼 회피가 불가능하게 설정되어 있다.
내전이 끝난 후 카를로스파는 협상국에, 전국노동연맹은 인터네셔널에만 세력 가입이 가능하며 스페인 왕국은 협상국과 라이히스팍트중 선택을 하는 게 가능하다.

내전 발발 전 병으로 혼수상태가 된 알폰소 13세의 후계자로 후안 3세[14]나 하이메 1세를 선출하며 선거를 치르는 이벤트가 있고 아예 공화정으로 전환하는 것도 가능하다.

3.2. 이탈리아반도


이탈리아는 지난 전쟁 당시 오헝 제국과 독일 제국의 패권에 도전한 댓가로 참혹한 패배를 경험해야 했다. 그리고 1917년부터 활동하기 시작한 이탈리아의 생디칼리스트 민병대는 1919년 오헝 제국과 휴전을 맺은 이탈리아 왕국 정부를 무너뜨리고 로마를 점거하여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의 통치를 끝냈다. 그렇게 이탈리아는 왕정을 내쫓은 베네치아의 이탈리아 공화국 정부, 바티칸의 교황청, 로마의 생디칼리스트 이탈리아, 다시 부활한 양시칠리아 왕국, 사르데냐 섬의 사보이아아오스타 왕가로 나뉘었으며 교황청을 제외한 모두가 리소르지멘토를 부르짖으며 서로에게 총구를 겨누고 있다.

과거에는 교황령을 제외한 4개국만 '이탈리아 실지회복주의' 중점을 선택 가능했지만 현재에는 이탈리아에 있는 모든 국가가 리소르지멘토와 실지회복주의 중점을 공통으로 갖게 되었다. 교황령은 물론이고 이탈리아 공화국이 터지면 나오는 베네치아와 롬바르디아 역시 고유 중점이 추가 되었다. 이사공을 멸망 시키고 이탈리아의 다른 국가들과 협상이나 전쟁을 통하여 마저 합병할 수 있으며 전부 합병하여 통일을 완수하면 실지회복주의 중점을 찍을 수 있게 된다.

실지회복주의 중점을 찍으면 디시전으로 니스, 코르시카, 몰타, 사부아, 오트사부아, 티치노, 고리치아, 이스트리아, 트리에스테, 리예카, 달마티아, 쥐트티롤, 트렌티노, 코토르에 영유권을 주장, 전쟁으로 점령할 수 있으며, 고유 점령지 시스템을 통해 순응도를 올리면 핵심 지역으로 편입 가능하다. 하지만 일부 제약이 있어서 양시칠리아는 이탈리아 연방을 수립하면 실지회복주의 중점 선택이 불가능하다.

열강들의 입김이 강하게 작용하는 지역이지만 밸런스 문제로[15] 사르데냐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은 세력에 소속되어 있지 않다.[16]

이후 중점을 통해 세력 가입이 가능해진다.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당연히 3인터, 이탈리아 공화국은 도나우[17], 양시칠리아 왕국은 협상국이나 라이히스팍트로 합류한다. 사르데냐는 처음부터 협상국 소속이다.

3.2.1. 교황령 (PAP)

<colbgcolor=#eee,#444>
0% 이탈리아 통일당
0% 라치아 노동조합 연합
6% 이탈리아 사회당
2% 기독교 민주동맹
10% 인민민주당
10% 자유주의 연맹
12% 라틴 사회운동
8% 새로운 교황
42% 교회 국가
10% 초몬타누스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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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탈리아에 대한 외국의 모든 원조는 물질적, 기술적 수준에서 제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힘의 균형은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어떠한 국가가 직접 이탈리아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 한 이러한 균형은 계속 유지될 것입니다. 그러나 외국 동맹국이 이 전쟁에 참전하면 이 모든 것은 끝날 것이고, 다른 후원국도 그와 똑같이 행동할 것입니다. ||
동맹국 호출 및 참전 불가능 (속국 제외):
세력 가입 불가능
* 성좌
교황청은 전세계에 분포한 3억 명이 넘는 가톨릭교도들의 중심에 있으며, 교황이 하는 행동과 말은 지구상 어디에도 볼 수 없는 특별한 무게를 가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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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와 그 부근만을 다스리는 미니 국가로 등장. 양시칠리아 왕국의 자치 괴뢰국으로 설정되어 있다. 1936년 시점에는 비오 11세가 통치하고 있고 비오 11세가 실제 역사보다 3년 일찍 사망하면 콘클라베가 열려 4명의 후보 중 하나가 각각 스테파노 10세[18], 요한 23세[19], 비오 12세, 율리오 4세[20]로 교황에 선출되게 된다.

양시칠리아가 제국을 선포하거나 이탈리아 공화국 또는 사르데냐가 평화적으로 양시칠리아를 흡수하면 자동으로 통일된 이탈리아에 흡수된다.

3.2.2. 사르데냐 (SRD)

사르데냐 왕국

사르데냐 왕국은 벨트크리크의 폐허 속에서 태동했습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왕은 1919년 오스트리아 정부와의 휴전 조약에 서명했지만 사회주의자와 급진적 민족주의자, 그 외에 다른 대중들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정부에 대해 분노해 들고 일어섰습니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와 그의 아들은 퇴위했고 아오스타 공작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 왕이 사르데냐에서 거의 누구도 보지 않는 채로 왕위를 물려받았습니다. 그러나 1920년에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 본토의 백군 연합에 이탈리아 연방을 형성하도록 하면서 이탈리아의 왕위에 대한 우리의 주장은 끝나고 말았습니다. 영국인들은 오스트리아가 요구해오자 독일의 분노를 사 코펜하겐 휴전을 깨고 싶지 않아 우리가 연방에 가입하도록 강요했습니다. 1926년 대영제국이 몰락하고 오스트리아인들이 내부 문제로 이탈리아에서 철수하자 우리는 이탈리아 연방에서 탈퇴했습니다. 우리의 전 이탈리아에 대한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지만 피에몬테만은 재주장할 수 있었습니다. 이는 실제로는 거의 프랑스 공화국의 속국이나 마찬가지인 우리를 명목상으로나마 독립적인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안그래도 침울한 상태인 국가는 내부 분열 때문에 더 침울해지고 있습니다. 아마데오 왕은 고작 5년 전에 선왕이자 부친인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의 왕좌를 물려받게 되었습니다. 절대군주제에 입각하여 그가 휘두른 권력은 많은 입헌군주제 지지자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었습니다. 이런 배경 하에서 절대군주제냐 입헌군주제냐 하는 국가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 벨트크리크 이후로 지금까지 쭉 이 조그만 섬의 국론을 분열시켜 왔으며 현 상태를 계속 유지할 수 없다는 공감대가 형성되었습니다. 행정부와 사법부는 이미 썩을 대로 썩었기에 모두 개혁이 필요한 상태이며 이를 위해서는 무능한 정치환경의 개선과 사르데냐인의 권리 회복을 필요로 합니다.

"국왕 폐하 만세!"
<colbgcolor=#eee,#444>
0% 사르데냐 국민생디칼리슴 연맹
0% 사르데냐 생디칼리슴 연맹
0% 사르데냐 사회당
23% 사르데냐 행동당
5% 사르데냐 행동당
5% 자유연합
25% 사르데냐 민주연합
0% 재향군인당
42% 바르단첼루 정부
0% 사르데냐인
}}}
지금까지 이탈리아에 대한 외국의 모든 원조는 물질적, 기술적 수준에서 제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힘의 균형은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어떠한 국가가 직접 이탈리아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 한 이러한 균형은 계속 유지될 것입니다. 그러나 외국 동맹국이 이 전쟁에 참전하면 이 모든 것은 끝날 것이고, 다른 후원국도 그와 똑같이 행동할 것입니다. ||
동맹국 호출 및 참전 불가능 (속국 제외):
* 협상국의 지원
사단 한계 +5
}}}
0.21 패치 후 리워크가 이루어졌다.

대전쟁 이후 동맹국은 이탈리아 왕국을 해체하려 했으나 사회주의자들의 봉기와 뒤이은 혼란 속에서 사보이아 왕가 사르데냐로 도망치는데 성공한 상태로 협상국 소속이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독일의 압력에 의해 퇴위했고, 방계인 사보이아아오스타 가문의 아메데오[21]가 지배하고 있다.

시작시에는 선거도, 의회도 없는 전제군주정이지만 중점을 통해 전제정을 유지할지 입헌군주정을 수립할지 선택할 수 있다.

이탈리아 전역을 수복하는 루트를 타면 당연히 이탈리아계 국가에 코어가 박혀 통일 전쟁을 다시 벌일 수 있다. 리워크 전에는 사르데냐-피에몬테를 만드는 선에서 리소르지멘토를 끝낼 수도 있었다.

처음부터 협상국 소속이기 때문에 2차 대전 이전에 사르데냐가 리소르지멘토를 시작할 경우 SRI가 인터내셔널에, 양시칠리아가 세력에 가입하지 않은 상태라면 협상국에 가입해 빠른 협상국-인터내셔널 간의 전쟁이 일어나게 된다.

국력은 처참하다. 사르데냐 섬만 소유하고 있는 상태라 인력은 1백만이 간신히 넘고 사단 제한은 6, IC도 군공 1개, 민공 1개뿐.[22] 중점으로 피에몬테를 수복하면 코어를 받지만 거기까지 혼자 가는 게 불가능에 가까운 게 문제. 인력이 끔찍한 관계로 주로 육군 사단보다는 해군과 공군 위주로 플레이 하게 되는데 이마저도 IC가 폐급이라 힘들다.

사르데냐의 존재 의의는 협상국 소속 사보이아 왕조 이탈리아의 부활이 끝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3.2.3. 양시칠리아 (SIC)

<colbgcolor=#eee,#444>
0% 이탈리아 통일당
0% 메초조르노 노동조합연합
8% 사회개혁동맹
10% 인민민주당
10% 기독교민주당
12% 자유당
30% 기독민주당
8% 농민당
12% 부르봉-나폴리 왕조
10% 시칠리아 통일주의당
}}}
지금까지 이탈리아에 대한 외국의 모든 원조는 물질적, 기술적 수준에서 제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힘의 균형은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어떠한 국가가 직접 이탈리아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 한 이러한 균형은 계속 유지될 것입니다. 그러나 외국 동맹국이 이 전쟁에 참전하면 이 모든 것은 끝날 것이고, 다른 후원국도 그와 똑같이 행동할 것입니다. ||
동맹국 호출 및 참전 불가능 (속국 제외):
세력 가입 불가능
* 조선업으로부터의 수입
10년 이상 시칠리아는 이 어려운 시기 속에서도 여러 국가에 군함을 판매하기 위해 대규모 건선거를 사용해 큰 이익을 보았습니다. 비록 국내 건선거 대부분이 외세를 위해 일하고 있다고는 해도, 국가 전체에 의미 있는 공헌을 가져다 줍니다.
매일 정치력 비용+0.5, 소비재 공장 -5%, 조선소 생산량 -20%
국가적 중점 조선소 국영화로 제거됨
* 토지 문제
롬바르드족의 침공 이래로 대지주들이 이탈리아 땅을 지배해 왔습니다. 상황은 최근 수십 수백년간 더욱 악화되었을 뿐이며, 극소수의 상류층이 토지 대부분을 차지한 채로 왕국 내 농촌 지역에서 엄청난 긴장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소비재 공장 20%
국가적 중점 농업의 미래로 제거됨
}}} }}}
이탈리아를 통일하기 쉬운 국가에 속한다. 기본 체급이 너무 약하고 동맹도 협상국인 사르데냐나 초반에 이렇다 할 동맹도 없는 이탈리아 공화국보다는 체급도 있고 동맹 체결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동맹을 호출하지 못한다는 것까지 고려하면 양시칠리아가 통일하기에는 제일 쉬운 국가일 것이다.

동맹은 디시전으로 라이히스팍트, 도나우-아드리아 연맹, 협상국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으며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전쟁을 벌여 합병하고 나면 제국을 선포할 수 있고, 사르데냐에게 피에몬테를 줘서 괴뢰화시킨 다음 이탈리아 공화국까지 흡수한 뒤 최대 3개의 괴뢰국을 보유하고 있으면 산하에 여러 연합주를 가진 연방이 될 수 있다.

언제부턴가 통일 전쟁 때 이탈리아 공화국과 협정을 맺어 이탈리아 공화국을 평화적으로 흡수하면 자동으로 이탈리아 공화국의 장군들과 원수들, 제독들을 영입할 수 있게 되었다.

3.2.4. 이탈리아 공화국 (ITA)

이탈리아 공화국의 역사: 패배와 내전

벨트크리크에서 프랑스가 패배함과 동시에 이탈리아도 붕괴되었습니다. 1919년 8월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 왕국은 휴전 협정을 체결했습니다. 이 협정으로 평화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오스트리아의 군대는 롬바르디아와 베네치아에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굴욕적인 휴전 선언 며칠 후, 격분한 민족주의자들은 밀라노에서 새로운 이탈리아 공화국을 선언했고, 밀라노 정부는 사보이아 왕가가 서명한 모든 조약이 무효라고 주장했습니다. 이탈리아 전역의 공화주의자들과 민족주의자들이 왕국에 대항하여 봉기했으며,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그의 아들이 왕좌에서 퇴위했음에도 불구하고, 왕실 권위의 몰락을 막을 수는 없었습니다.

이탈리아 중부와 북부에서 군주주의자들을 몰아내기는 했지만, 공화국의 서로 다른 파벌들 간의 사상 차이는 너무나도 커서 상호간의 합의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고, 작은 파괴 행위들로부터 시작된 적색과 백색 세력 사이의 충돌은 내전으로 번졌으며, 이전에 이루어졌던 군주주의자들에 대한 적대행위는 중단되었습니다.

"끔찍하군."
이탈리아 공화국의 상태: 연방의 실패

내전이 장기화되면서, 전쟁의 흐름은 백군에게 불리하게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반도 남쪽의 군주주의자들과 함께 자신들의 연방에 합류한다면 군사적인 도움을 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공화국(백군)은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마침 사회주의자들과 그들의 동맹 프랑스는 우리와 오스트리아 사이의 공통의 적이기도 했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을 상대로 포강에서 승리를 거둔 후, 공화국과 오스트리아는 앞으로도 이 '협력'이라는 쓰라린 알약을 삼킬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공화국은 오스트리아의 보호 아해 합법적인 이탈리아 연방의 일원으로 남아있을 필요가 있었습니다. 대신 오스트리아는 베네토 지역에 상당한 자치권을 부여했고 지역 내 오스트리아인들과 이탈리아 연방의회 정부에 많은 영향력을 부여했습니다. 그 대가로 공화국의 수상은 이탈리아 연방의 '임시'수장이라는 칭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조심스럽게 균형을 이루어왔던 이 협력은 1926년, 브리튼 연합이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하면서 급격히 기울어졌습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전보다 더욱 대담해졌고 또 다시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얘기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반대로 오스트리아는 남부의 시칠리아가 사회주의자들의 공격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들의 군대가 어떠한 움직임도 취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했습니다. 이로 인해 이탈리아반도는 혼란에 빠졌고, 이탈리아 연방의회가 오스트리아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지금까지의 상황이 오랫동안 불만이었던 시칠리아와 사보이아는 연방의회의 구성원에서 탈퇴하겠다고 선언했습니다.

아직까지 사회주의자들의 공격은 없었지만, 의회는 아무런 목적도 가지지 못한 채 1930년에 10년의 임기를 마쳤습니다. 밀라노에 있는 권력가들이 저마다의 활동과 야심으로 분주한 가운데, 연방의회의 회의실은 먼지만 날리고 있습니다.

"의회가 다시 열릴 수 있을까?"
이탈리아 공화국의 상태: 회복과 리소르지멘토

국가적 자부심을 지키기 위해 상당한 비용을 들였지만,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와의 관계 덕분에 서서히 공화국의 경제적 상황을 향상시켰고, 독일의 미텔오이로파와 오스트리아의 투자로부터 힘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탈리아가 내전의 피해로부터 점차 회복함에 따라, 공화국의 많은 사람들은 합스부르크와 정부의 협력에 격분하기 시작했고, 코스탄초 치아노의 반오스트리아 세력인 이탈리아 국민연합에 대한 대중의 지지는 롬바르디아와 프리울리에서 성장했습니다. 이바노에 보노미의 중도좌파 연합은 1927년부터 이 나라를 통치해 왔지만, 그들의 인기는 주로 경제적으로 안정적이었던 시절 때문이며, 그들이 다시금 정부를 구성할 수 있을 만큼 충분한 지지를 얻기 위해서는 확고한 공화주의자인 이탈리아 자유당이나 보수주의자인 이탈리아 민중당과 같은 다른 정당들의 영향력을 종식시켜야 할 것입니다. 정치적 문제를 통제할 수 없게 되고 연방 연합군이 무력으로 북쪽의 질서를 회복한다면, 옛 이탈리아 연방의 구 의회도 정권을 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모든 정당이 공통적으로 가지고 있는 것은 자유롭고 통합된 이탈리아에 대한 열망입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은 제2의 리소르지멘토가 오고 있다고 확신합니다.

"이탈리아 만세!"
<colbgcolor=#eee,#444>
0% 국민주의 조합
2% 생디칼리슴 조합
0% 이탈리아 사회주의당
4% 민주개혁연맹
31% 자유민주당
11% 이탈리아 자유당
18% 이탈리아 민중당
13% 이탈리아 연방의회
3% 군사정부
18% 이탈리아 국민연합
}}}
지금까지 이탈리아에 대한 외국의 모든 원조는 물질적, 기술적 수준에서 제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힘의 균형은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어떠한 국가가 직접 이탈리아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 한 이러한 균형은 계속 유지될 것입니다. 그러나 외국 동맹국이 이 전쟁에 참전하면 이 모든 것은 끝날 것이고, 다른 후원국도 그와 똑같이 행동할 것입니다. ||
동맹국 호출 및 참전 불가능 (속국 제외):
세력 가입 불가능
* 불안정한 공화국
1920년, 우리나라는 오스트리아인들에 의해 내전에서 구제되었고, 합스부르크인들은 우리의 지역들, 특히 베네토를 중심으로 이탈리아 연방을 이룰수 있도록 권력을 집중했습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 이러한 계획은 6년 동안 효과적인 진전 없이 제자리 걸음이었고,결과적으로 혼란스러운 관료적 상황을 만들어낼 뿐이었습니다. 야당은 자체적인 연방의 복원을 요구하며 말썽을 부리고 어떤 이들은 민주주의와 오스트리아의 영향력을 완전히 종식시켜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러한 정치적 국면은 단기간에 안정될 것 같아 보이지 않습니다.
일일 정치력 비용 +0.15
국가적 중점 안정된 민주주의로 제거됨
국가적 중점 단일 공화국을 통해 새로운 단일 공화국으로 대체됨
국가적 중점 안정적인 이탈리아 공화국으로 제거됨
}}}
현재의 이탈리아 깃발을 쓰는,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의 강역을 보유한 공화국. 영토는 빈말로도 크다고 보기 힘든 상황이기는 하나 알짜배기를 점유하고 있는 덕에 실제 산업력은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함께 수위를 다투고 있다. 시작 시 지도자는 이바노에 보노미.

시작 지점에서는 오스트리아의 자치 괴뢰국이지만 검은 월요일에 직격탄을 맞은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에서 손을 뗀다는 이벤트가 뜨면서 자동으로 독립된다. 예정된 선거는 37년이지만 검은 월요일의 여파로 총리가 의회를 해산하고 조기 총선거를 실시한다. 선거에서는 사회자유주의, 시장자유주의, 사회보수주의, 국민대중주의 정당 중 하나를 선택하게 된다.

다른 정당이 당선 될 때는 현상 유지를 할 수 있지만 국민대중주의 정당인 이탈리아 국민연합(ANI)이 당선될 경우 사실상 무솔리니만 없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의 재림이 된다. 각종 선전으로 대중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유도하고 강력한 팽창주의적인 면모를 보인다. 국가 지도자는 현실에서 무솔리니의 친구이자 정적이었던 이탈로 발보였지만 1.0.3 패치 후에는 갈레아초 치아노의 아버지 코스탄초 치아노가 지도자가 된다. 이들이 정권을 잡으면 곧바로 독재에 반발해 베네치아 공화국이 반란을 일으킨다. 병력은 형편없지만 지형이 산지와 늪지로 공격해 들어가는데에 불리한 편이라 이를 적절히 돌파해 줄 필요가 있다. 또 중점을 밟다 보면 오스트리아에 전쟁을 선포하는 중점이 있는데 오스트리아가 빌빌댄다고는 해도 엄연히 열강인데다 속국들이 줄줄이 딸려 있어 정직하게 1대 1로 맞붙으면 질 수밖에 없지만, 오스트리아가 '이중 통치의 끝' 중점을 찍고 속국들과 내전을 벌이거나 베오그라드 조약국과의 싸움을 할 경우 해당 국가들과 임시 동맹을 맺고 오스트리아를 칠 수 있게 되고, 공략에 성공했다면 남티롤 전체를 업어올 수 있다.

이탈리아 국민연합은 당선되지 못할 때 결과를 인정 못한다고 난동을 부리는 이벤트가 발생하는데 이 때 난동을 막지 못하는 정부는 믿을 수 없다며 정부를 불신임하는 선택지를 고르면 왕국이 다시 재건되며 국호도 이탈리아 연방으로 돌아온다.

어느 쪽이 집권하던 1938년이 되면 다시 한번 리소르지멘토를 선언하는 중점이 열리게 된다.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SRI)은 설정상 제3인터내셔널 소속이지만 이탈리아 통일전쟁 중 밸런스를 위해 시작시엔 프랑스 코뮌이나 브리튼 연합과 같은 세력이 아니다. 2차 리소르지멘토가 벌어지면 브리튼과 프랑스 코뮌에서 의용군들을 보내고, 이에 맞서 독일과 오스트리아 의용군과 함께 최대한 빨리 SRI를 항복시켜야 한다. 만약 프랑스 코뮌이 2차 세계대전을 시작하거나 또는 플레이어가 세력에 가입한 경우 이탈리아 내 세력 균형이 깨졌다고 판단돼 제3인터내셔널 전체를 상대해야 하고, 라이히스팍트와 협상국이 적들의 병력을 분산시키나 그만큼 이탈리아 전 국토를 회복하는 게 늦어져 추천하긴 어렵다.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 양시칠리아 왕국, 교황령, 사르데냐 왕국[23]을 정복하거나 회담으로 평화적으로 흡수할 경우(같은 세력에 가입되어 있을 경우) 중점과 디시전으로 이탈리아의 실지회복을 선언하여 전 지역에 핵심 주를 생성할 수 있다.

그 외에 오스트리아가 공화국 정치에 전면적으로 개입해 정당을 지원할 수도 있고, 오스트리아가 도나우-아드리아 연맹을 형성하면 도나우-아드리아 연맹에 가입하게 된다. 다만 코스탄초 치아노가 집권했다면 협상국이나 모스크바 협정에, 오스트리아가 멸망한 상태라면 라이히스팍트에 가입할 수 있다.

통일을 완료하면 국가 중점으로 사회주의 공화국을 제외한 타 이탈리아권의 장군들을 영입할 수 있다.

원래 이탈리아 국민연합은 공화정 성향이었지만 소규모 리워크 이후에는 사보이아 왕조의 지지 세력으로 설정이 변경되었기 때문에 국민연합으로 이탈리아를 통일하면 국대 왕국이 된다.

3.2.5.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 (SRI)

<colbgcolor=#eee,#444>
18% 혁명행동 파쇼
29% 노동총동맹 - 이탈리아 생디칼리스트 동맹 (생디칼리슴 노동자 인터내셔널 이탈리아 지부)
18% 행동당
8% 사회기독당
6% 이탈리아 공화당
2% 국민민주연합
8% 가톨릭 행동/이탈리아 가톨릭 대학연맹
2% 이탈리아 공업연맹
6% 비밀군사전선
0% 비밀군사전선 (푸른셔츠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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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탈리아에 대한 외국의 모든 원조는 물질적, 기술적 수준에서 제한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이러한 힘의 균형은 계속 유지되고 있습니다. 어떠한 국가가 직접 이탈리아 분쟁에 개입하지 않는 한 이러한 균형은 계속 유지될 것입니다. 그러나 외국 동맹국이 이 전쟁에 참전하면 이 모든 것은 끝날 것이고, 다른 후원국도 그와 똑같이 행동할 것입니다. ||
동맹국 호출 및 참전 불가능 (속국 제외):
세력 가입 불가능
* 단눈치오 연정
1934년 이래 사회주의 공화국은 줄리에티 의장과 무솔리니 주석 아래 민족주의와 국제주의가 결합된 통치를 받았습니다. 둘의 모습은 마치 애국주의적 열성으로 가득 찬 순교자 가브리엘레 단눈치오를 닮아 있었습니다. 이런 선전이 무색하게도, 단눈치오의 이야기만으로 혁명정부를 단결시킬 수는 없는 노릇인 듯합니다. 혁명 민주주의를 갉아먹으려 무솔리니가 뒷공작을 펼치고 있다는 소문에 두려워하는 이들이 한둘도 아니고요.
매일 정치력 비용 +0.25, 전쟁 지지도 +5.00%, 매일 전체주의 지지도 +0.01
* 이탈리아 체트니크
1919년 형성된 (그리고 톨리아티가 "이탈리아 체트니크"라는 별명을 붙인) 비밀군사전선은 이탈리아 본토에 남겨진 왕당파들을 사보이아 왕가의 귀환을 위한 잔류부대로 재조직하는 업무를 담당하는 조직입니다. 주로 보수적인 지역에서 활동하나, 피에몬테 남부와 (스위스의 상당한 지원 덕에) 오솔라 골짜기 등지에서도 활동을 이어가는 이들은 우리의 영토여야 할 곳에서 강력한 반동세력으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징병 가능 인구 획득치 -5%, 안정도/전쟁 지지도 -5.00%, 매일 후견전제주의 지지도 +0.01
}}}
통칭 빨탈리아, 혹은 SRI (Socialist Republic of Italy)라고 불린다. 브리튼과 프랑스처럼 초반의 선거 이벤트들을 통해서 집권정당을 선택할 수 있다. 이벤트 3개가 끝나고 정당 지지율에 따라 지방분권과 기독교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급진사회주의, 프랑스의 영향을 많이 받은 생디칼리스트, 그리고 무신론과 중앙집권을 주장하는 전체주의가 승리한다. 특이하게도 전체주의가 집권하면 베니토 무솔리니가 집권하는데 마오쩌둥이 빙의한 것 마냥 무려 이탈리아인들에게 파스타를 금지하려고 든다니[24], 다른 나라도 아닌 이탈리아에서 카톨릭 교회를 무지막지하게 줘패는 등 대놓고 문화대혁명 패러디스러운 국정을 펼친다.

충분한 인력과 그를 뒷받혀주는 강력한 산업력, 인터내셔널 가맹국들의 지원으로 인하여 가장 이탈리아를 통일하기 쉬운 국가이다. 다만 인게임 상으론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나기 전에는 제3인터내셔널 가입을 할 수 없다. 설정상으론 SRI는 인터쪽 주인공 국가인 프랑스보다도 일찍 혁명을 터뜨려 설립된 인터내셔널 창립 회원국이지만 실제 게임내에선 밸런스 문제로 2차대전이 터지기 전까지 인터에 가입할 수 없고, '대독결전을 준비하고 있는 영불이 결정적인 한타 싸움 이전 지나치게 전선을 늘리고 전유럽의 어그로를 끄는 걸 막기 위해 SRI를 자제시키고 있다'고 퉁치고 넘어가는 모양. 그러나 의용군 파병은 전혀 문제 없고 기본적인 체급 차이 덕분에 플레이어가 잡거나 빨랑스/빨영/CSA 같은 인터 강대국으로 정예 기갑사단+공군 의용군 정도만 파견해주면 SRI의 국력만으로도 2차대전 발발 이전 충분히 이탈리아 통일을 이룩하고도 남는다.

0.24 패치로 국기가 바뀌었다.

1.0 패치로 리워크되었다. 시작 시점의 지도자가 팔미로 톨리아티에서 주세페 줄리에티로 변경되었으며, 무솔리니 루트의 경우 좀 더 파시즘스러운 루트로 변경되어 알체스테 데 암브리스가 집권할 수도 있게 되었고 리소르지멘토 이후 내정 중점이 대거 확충되었다.

3.3. 포르투갈 (POR)

포르투갈 왕국 The Kingdom of Portugal

벨트크리크의 재앙과 모잠비크와 프랑스에서의 우리 군대의 몰락 이후로 포르투갈의 찬탈자인 공화국의 체면과 군대의 지지는 땅에 떨어졌고 영광스러운 복위에 저항하지 못했습니다. 마누엘 2세Manuel II는 왕좌로 돌아왔고 한때 그와 경쟁하는 계승자이던 두아르트 누누Duarte Nuno를 후계자로 삼았습니다.[25] 전쟁의 종전 잠깐 후에 일어난 복위는 경제 회복의 시작으로 보였습니다. 하지만 포르투갈이 1925년의 폭풍우에 잘 대처하기에는 영국의 수입 수출에 의존도가 너무나 컸습니다. 우리는 대영제국의 몰락 이후 우리의 땅을 통합하는 것 조차 하지 못했고 독일은 침략 행위를 벌여 그 땅들을 점유했습니다. 거대한 정치적 위기를 책임지게 되자 총리 드 파이바 코세이루de Paiva Couçeiro는 선거를 요구했습니다. 승리한 통일주의자들은 막대한 의제를 가져왔고 공격적인 반공화주의적 정책은 가장 확고한 군주주의자 사이에서도 여론의 양극화를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현재 왕에 충성을 다하고 있고 영원히 그러할 것이라 주장합니다. 스페인의 병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아 보이고 이에 따라 더한 혼란이 세계에 닥칠 듯 포르투갈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아프리카에서는 카를 리터와 그의 야만적인 폭력배들이 우리의 노력을 방해해 우리 손으로 보복하게 하며 긴장도가 빠르게 올라가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슨 일이 일어나든지 우리는 포르투갈이 굳게 설 것을 신뢰합니다.

"전진하라! Avante!"
<colbgcolor=#eee,#444>
0% 포르투갈 최대주의자 연합
0% 노동총연맹
1% 포르투갈 아나키스트 연합
6% 민주좌파공화당
4% 민주당
4% 자유공화당
12% 국민공화당
14% 누누 알바레스 십자군
19% 포르투갈 현실주의 행동당
40% 루시탄 통일주의
}}}
* {{{#!folding 국가 정신
* 불명예스러운 평화 Paz sem Honra
대전쟁 때는 무시받았지만, 다시금 전쟁이 벌어지려 하는 지금 세계는 포르투갈을 영토 방위의 잠재력이 충분한 중견국으로 보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런 의견은 우리 정부의 늙은 고위급 인사들에게는 무시당하고 있습니다.
AI 보정 (공격 중점 +50%), 전쟁 목표를 정당화하는데 걸리는 시간 -5%
}}}
실제 역사와는 달리 대전쟁에서 협상국이 패전하여 왕정이 다시 복고되었다.

정치 관련 선택지가 있는 나라 중 가장 수구적인 국가이다. 선택지가 국민대중주의와 후견전제주의 그리고 권위민주주의 3가지로, 원래는 다른 루트도 기획되어 있었으나 제작 도중에 담당 제작자가 탈주하면서 다른 루트 개발이 중지된 탓이다.

주로 아프리카의 식민지 확보와 안정화에 주력하는 편이며 미텔아프리카와의 분쟁이 해결되고 나면 협상국에 가입할 수 있다.
그 외에 스페인 내전이 발발할 시 개입해서 갈리시아를 얻는 것도 가능했으나 1.2 업데이트[26]에서 삭제되었다.

군사적으로는 체급 대비 해군이 강한 편이기는 하나 인력과 공장 모두 폐급인 탓에 가지고 있는 걸 지키기도 벅차다. 특히 이베리아 전체를 공산화시키려는 생디 스페인이 굉장히 위협적이니 스페인 내전에서 웬만하면 카를리스타를 지원하도록 하자.

스페인에서 이베리아 연방이 수립되었다면 두아르트 2세가 암살당하기도 하는데, 암살 이벤트 이후 선택지로 두아르트의 여동생 마리아 3세가 뒤를 잇게 할 수 있다.

리워크 티저가 공개되었다. 아마 다른 담당자가 투입된 듯.

4. 동유럽

4.1. 리투아니아 왕국 (LIT)

리투아니아 왕국 The Kingdom Of Lithuania

1917년 12월 11일 맺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의해 리투아니아 왕국이 공식적으로 수립되었습니다. 그리고 1918년 2월 16일 리투아니아 평의회가 이 선언을 다시 한번 공언하였습니다. 하지만 이 선언은 진정으로 리투아니아를 독립시키려는 게 아닌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들을 분열시키고 공화주의 성향의 사회민주당을 의회에서 축출하는데 사용되었으며 1919년이 되어서야 독일은 리투아니아를 독립시키기로 마음먹고 빌헬름 폰 우라흐를 1263년 이래 최초의 리투아니아 국왕 민다우가스 2세로 추대했습니다.

1920년 헌법은 리투아니아를 양원제 입헌군주제로 제정하여 언론의 자유, 출판의 자유, 종교의 자유, 보편적 참정권과 같은 기본적인 권리를 보장했습니다. 오늘날까지도 해당 헌법은 라이히스팍트에서 가장 진보적인 헌법 중 하나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별다른 위협 없이 손쉽게 집권한 기독민주당은 정부를 구성했지만 국가의 경제는 독일 융커들과 독일 회사의 지사에게 위임했습니다. 빌뉴스는 '독일 개발'을 위한 도시로 선언되었으며, 외국인 투자 대부분이 그곳으로 향했습니다. 그 덕에 5개 국어를 들을 수 있는 국제 도시가 되었고 동방주의 보석이라는 이명까지 가지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국가의 온 역량이 수도 빌뉴스로 집중된 결과 리투아니아의 남은 지역들은 낙후되고 말았습니다. '외부 리투아니아'라고 불리는 남부 지역이 특히나 그렇습니다.

카를 게로 폰 우라흐라고도 알려진 비타우타스 2세는 1928년 이래 리투아니아의 왕입니다. 현직 총리는 기독민주당을 대표하는 레오나스 비스트라스입니다.
메멜 봉기의 기억

벨트크리크 말기의 독립 선언으로 잠시 잠잠해진 리투아니아의 민족주의는 1920년대에 부활했습니다.
표현의 자유는 리투아니아 문화의 부활을 허용했고, 수많은 민족주의 성향의 예술과 문화운동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프로이센 리투아니아 철학자 빌헬마스 스토로스타비두나스는 과거 강대했던 리투아니아의 부활을 선언했습니다.
계속된 민족주의의 확산은 리투아니아의 동방주 지위에 대한 불만을 부추겼습니다. 이에 동조한 민족주의자들은 1916년에 설립되고 독립선언서의 서명자 중 한 명인 안타나스 스메토나가 이끄는 소규모 민족주의 정당인 국민진보당을 중심으로 결집하기 시작했지만 기독민주당과의 갈등으로 인해 연정에 참여하지 않고 야당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1928년, 민다우가스 2세가 사망하자 리투아니아 민족주의자들은 혼란을 이용하여 빌뉴스와 클라이페다를 점령하려고 시도했습니다. 허나 빌뉴스 봉기는 제대로 일어나지 않았고 클라이페다 봉기는 별다른 효과를 거두지 못한 채 독일 수비대의 손에 의해 50명의 무장 민병대가 사망하고 끝이 났습니다. 이러한 극단주의적 행동은 대중들의 반발을 샀고 결국 봉기를 주도한 국민진보당은 해산되고 국민주의 연합으로 재창당하게 되었습니다.

오늘날 리투아니아의 민족주의자들은 두가지 접근법 사이에서 분열되어 있습니다.
안타나스 스메토나를 중심으로 민주적 수단을 통해 제2의 국가 부흥을 이룰 수 있다고 믿는 리투아니아 국민주의 연합과 그보다 더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사람들이 모인 리투아니아 행동주의 전선이 바로 그것입니다.
레오나스 비스트라스 정부

기독민주당을 대표하는 레오나스 비스트라스는 의사 일을 하다가 정치에 뛰어들었고 1933년, 리투아니아 왕국의 5번째 총리가 되었습니다. 비스트라스는 열성적인 당원이자 당대표이며 독실한 가톨릭 신자이기도 합니다.

리투아니아는 그의 임기 초부터 독일의 성장과 리투아니아의 경제에 대한 긴밀한 관계, 교육 개혁으로 인해 높은 경제 성장을 경험했습니다. 이러한 경제 성장은 비스트라스 내각이 한때 불가능한 꿈으로 생각했던 대규모 프로젝트를 고려할 정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집권은 쉽지 않아보입니다. 리투아니아 폴란드 위원회, 유대인 노동자당 등 소수 정당이 세를 불려가고 있고 1920년대 침체를 겪은 이후 힘을 회복한 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도 괄목할만한 성장을 보이고 있습니다. 극단주의 정당이라고 치부했던 리투아니아 국민주의 연합 역시 안타나스 스메토나라는 지도자를 만나며 기독민주당을 위협하고 있습니다.

리투아니아가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어떻게 변할지 지켜봐야 합니다.

"조국을 위하여!"
<colbgcolor=#eee,#444>
0% 아우슈리네
3% 아우슈리네
0% 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
25% 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
7% 리투아니아-폴란드 위원회
8% 민주국가자유연맹
39% 리투아니아 기독민주당
12% 리투아니아 국민주의 연합
3% 신국가진보당
3% 리투아니아 행동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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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여섯 동방주 가운데 하나다. 현 리투아니아의 왕 비타우타스 2세는 리투아니아인들에게 인기가 있었던 선왕 민다우가스 2세[27]가 사망한 후 왕위를 이어받았지만 정작 본인은 건축가가 되고 싶어했기에 왕권에 별 욕심이 없는 상황이고, 리투아니아인들도 그에게 별 기대를 걸고 있지 않다. 다만 비타우타스 2세도 이왕 즉위했느니만큼 어떻게든 왕 노릇을 잘해보고 싶어하기는 한다.

독일의 전략적 투자를 받아 수도 빌뉴스를 '동방주의 보석'이라는 이야기를 들을 정도로 발전시키는 데에 성공하였으나 그 대신 경제적으로 독일에 종속되어 버렸고[28] 수도와 나머지 지역 간의 발전 차이가 극심해져 큰 사회 문제가 되어버렸다.
비아위스토크, 볼코비스크가 편입되며 국력이 적잖이 늘었지만[29] 대신 그곳에 살고 있는 소수민족인 폴란드인과 벨라루스인이 목소리를 키우며 왕국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있다. 두 지역은 리투아니아에서 국민주의 쿠데타가 발발하면 폴란드와 백루테니아로 넘어간다.

군 상황 역시 심각하다. 군 기강은 해이해져 있고 장비는 구식이라 군대라고 부르기 힘들 정도.

리투아니아 플레이는 이 3가지 상황에 더해 인기없는 군주 문제와 검은 월요일을 해결하는 방향으로 맞춰져 있다.

시작 시점에는 사회보수주의인 리투아니아 기독민주당 주도로 국정이 운영되고 있다. 하지만 검은 월요일이 터지고 상황이 급변하며 기독민주당은 리더십에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30] 그 틈을 타 극단주의 세력들이 세를 불려나간다.

37년 2월에 총선이 치러지며 민주주의 루트는 사회민주당, 기독민주당, 국민주의 연합 총 3가지 루트가 준비되어 있다. 세 세력 모두 단독으로 집권할만한 힘이 없는지라 소수 정당과의 연정이 필수다.[31]

총선이 끝난 후 왕이 행사에 참여할지를 결정하게 되는데, 참여하게 된다면 경호에 대한 선택지가 또 나온다. 만약 비타우타스 2세가 군의 경호를 마다하고 경찰의 경호만 받게 되면 비타우타스 2세는 암살당하고 정치 중점이 변경되며 스타니슬로바스 나루타비추스[32] 포빌라스 플레하비추스가 정권을 잡는데, 플레하비추스는 군사정권을 수립하거나 왕의 동생 에버하르트를 민다우가스 3세로 즉위시킨다. 참여하지 않거나 참여하되 군의 경호를 받을 경우 기존의 중점을 그대로 사용할 수 있게 된다.

이후 중점과 결정으로 리투아니아를 발전시키는 한편 국민대중주의 세력 리투아니아 행동 전선의 쿠데타에 맞서 진압을 실시하게 되는데 허술하게 대처할 경우 나라가 전복되어 버린다.

비타우타스 2세는 처음에 안정도를 5% 깎는 인기없는 군주란 특성을 갖고 있지만, 검은 월요일 이후 전공을 살려 여러 건축 프로젝트를 성공시켜 궁극적으로 리투아니아 대공 궁전을 재건하면 안정도 10%, 정치력 0.1씩을 주는 건축왕이란 특성을 얻는다. # ##

4.2. 발트 연합공국 (BAT)

발트 연합공국

발트해 동부 연안에 위치한 발트 연합공국은 1918년 발트의 독일계 주민의 주도로 결성된 유럽에서 가장 동쪽에 위치한 독일계 국가입니다. 초기에는 독일 제국의 새로운 회원국으로 구상되었지만, 이러한 희망은 결국 좌절되었는데, 이는 벨트크리크 이후 유럽의 지정학적 현실과 압도적으로 다수인 라트비아와 에스토니아 현지인이 이러한 계획을 불가능하게 만들었기 때문이지, 발트의 독일인들 스스로가 그들의 조국으로서의 정체성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에스토니아 독립전쟁을 성공적으로 진압하고 라트비아 민족주의 운동의 내부 분열 덕분에 라트비아에서 이와 유사한 봉기를 막은 뒤, 공국은 그 자리를 굳혔고, 이는 이제 거의 20년의 역사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발트 연합공국은 무엇보다도 전통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공국은 발트해 지방법, 란트탁(독일식 주의회)을 통한 대표 제도, 그리고 발트 기사단의 제도적인 역할을 리보니아 연방 시절의 것으로부터 계승하고, 이러한 전통은 독일계 발트의 정체성에서 큰 부분을 차지합니다. 발트해에서 가장 가난한 귀족들조차도 모든 지주들의 각각의 불만과 걱정거리에 귀 기울이는 공동체에 사는 것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으며, 귀족의 기사다운 전통을 무엇보다 가장 존중합니다. 그러나 실제로 이것은 공국이 비잔틴적 정부 체제로서 거의 기능하지 않는 국가라는 것을 의미하며, 앞으로의 닥쳐올 시련에 대해 전혀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잠존히멜슈톄어나의 협회

현재 주 위원회 회장이자 주 행정협회 회장, 그리고 공국의 경영자는 공작 섭정 위원회의 창시자이자 발트 독일계 민주당의 일원인 프리드리히 폰 잠존히멜슈톄어나입니다.

발트 기사단이 통제하던 몇몇 보수적인 정권이 연속됨에 따라, 발트 연합공국 내의 개혁에 대한 압력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어려워졌습니다. 어쩔 수 없이 보수적 귀족들과 동맹을 맺었던 발트 독일계 중산층은, 복잡하고 오래된 체제에 어떤 개혁이 도입되는 것을 의미한다면 개혁주의자나 발트 민족주의 단체에게도 동조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비록 아돌프 프리드리히 공작이 자유주의 개혁가는 아닐지라도, 그가 개입해야만 했습니다. 왕실 권력을 이용해 그는 전 주 위원회 회장을 내쫓았고 개혁파와 온건파의 연대를 도와줄 자유주의 개혁자들, 민주당과 협력했습니다.

그러나 왕좌 뒤의 진정한 권력은 발트 독일계 민주당 당수인 파울 쉬만에게 있습니다. 자유주의 개혁가인 그는 귀족이 아니라는 이유로 란드랏츠콜레지움(주 위원회)에서 어떠한 입장도 밝힐 수 없지만, 낮은 지위에도 불구하고 현 정권을 이끌어나가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습니다. 이상주의적 선견지명을 가진 파울 쉬만은 현대적 헌법, 자유, 보편적이고 민주적인 선거, 독일계와 발트인 사이의 평등, 사회 복지 체계가 확립된 자유주의적이며 다원주의적인 발트 연방을 꿈꾸고 있습니다. 발트 기사단의 반발보다 그의 비전을 이루는 것이 중요하다고 믿는 그는 발트인과 주 의회에 있는 독일 중산층의 지지를 받고 있으며, 온건 보수파인 발트 독일계 개혁당은 그를 마지못해 묵인하고 있습니다. 비록 공작이 몇몇 신조에 동의하지 않을지라도, 그는 쉬만의 프로그램이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고 보고 있습니다.
공국의 정부 구조

발트 연합공국은 연방 과두정치 반입헌 군주국이라는 말로 가장 잘 설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공국은 각각 주 의회와 주 위원회를 가진 6개의 주로 나뉘며, 거기에 더해 리가 자치시까지 있습니다. 이러한 주권 분립은 공국 주 의회와 주 행정협회를 가진 연방 정부를 그대로 따라한 것입니다. 발트 지방 의회는 공국의 시민이 프로이센식 3원 선거제를 통해 선출한 의회 기구이며, 그것은 주 집행관이 이끌고 있습니다. 주 위원회와 행정협회는 발트 독일계 귀족 조직인 발트 기사단에 의해 임명됩니다. 이 두 가지 위에는 사법부 및 행정부 임명 권한과 왕실 특권을 가진 공작이 있습니다.

란드탁, 즉 주 의회가 입법부고 행정협회가 행정부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사실은 훨씬 더 복잡합니다. 행정협회는 어떠한 행정 부처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기사단 협회 및 주 의회와 협력해 국가의 일상적인 업무를 총괄 관리하는 18명의 주 행정관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그들은 상원의 특징을 갖고 있습니다. 그들은 주 의회에 참석해 법을 제안할 수 없지만 제안된 법안을 검토할 수 있으며, 그들의 명시적인 목적은 "귀족들의 권리, 합법성, 제도, 관습을 스스로 지키기 위한 강력한 부성애"입니다. 행정협회는 고정된 직함이 없고 단지 그들의 권한 아래, 문제가 발생하면 그것을 해결하기 위한 임시직만 갖고 있습니다. 한편 주 의회는 다수결을 통해 자체 행정실 및 기관을 구성할 수 있습니다. 행정협회는 사전에 무언가를 예방하거나 법을 제안할 수 없다는 점 때문에, 국가를 통치할 능력은 전적으로 주 의회가 원하는 것에 달려 있습니다. 하지만 국가를 관리한다는 발트 기사단의 역할은 제도화되어 있으며 그리 간단하게 제거할 수 없기 때문에 주 의회 역시 행정협회에 의해 좌우됩니다.

이것은 기사단 협회와 주 의회가 단지 커다란 귀족 집단이었던 16세기에는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상황은 바뀌었습니다...
정치적 관심

발트 독일계 민주당에 의해 조직된 연립 정부는 공국을 현대적으로 개혁하려는 숭고한 목표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그들에게는 적이 많습니다. 발트 독일계 귀족들이 연합한 귀족 집단인 발트 기사단 협회는 파울 쉬만이 주장하는 자유주의적 입헌 개혁에 전혀 호의적이지 않은데, 이는 그들이 보호해야만 하는 땅의 역사적 전통을 위협한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현재 협회의 가장 큰 골칫거리는 기사단이 정부에 그들을 대표할 사람을 갖고 있다는 점이고, 그가 바로 공국 의회의 주 집행관인 롤프 폰 운게른슈테른베르크 남작입니다. 남작은 결코 반동주의자가 아닙니다. 하지만 그는 보수적인 지주이며 진보적인 발트 민주당을 분명히 지지하지 않습니다. 만약 상황이 악화된다면 그의 무사안일주의는 끝나버릴 것입니다.

20년 동안의 정치적 부패와 내분은 이 모든 체제에 실망한, 특히 젊고 야심찬 귀족들을 남겼습니다. 진보적 발트 연방 계획과 발트 기사단의 반발 모두 그들을 실망시켰습니다. 하층민 현지인들에게 굴복한 전자와, 발트의 위대함을 되찾는 데 실패한 후자로서 말입니다. 그들의 구원자는 범게르만 민족주의 질서를 주장하며, 비밀스러운 종교 집단이나 다름없는 발트 형제단입니다. 그들은 마을과 도시마다 형제단으로 활동하며 발트 독일계 귀족들 내부의 영향력을 통해 권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이들의 목표는 발트 독일인들의 튜튼 정신 복원과 독일 제국과의 밀접한 연합이고, 그들의 목표는 드랑 나흐 오스텐, 게르만 우월주의를 명분으로 하는 동방 원정의 중세 사상을 부활시키는 것입니다. 국가를 중앙집권화하고자 하는 형제단의 야망 때문에 이들은 공작이나 주 의회와는 절대 공존할 수 없으며 협력할 수도 없습니다.

라트비아인과 에스토니아인은 발트 공국에서의 종속을 완전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민족주의 운동은 1918년 실패한 봉기 이후 힘을 잃었지만, 1930년대 초 재건되었습니다. 스톡홀름의 에스토니아 공화국 망명 정부와 페트로그라드의 라트비아 국가 평의회는 각각 독립을 주장하고 있으며, 유격대가 해방을 위한 마지막 투쟁을 위해 숲과 언덕에서 조직되고 있습니다...

"공국은 번영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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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라트비아 및 에스토니아 혁명동맹
0% 라트비아 및 에스토니아 혁명동맹
0% 라트비아 및 에스토니아 혁명동맹
5% 리가 민주 블록
32% 발트 독일계 민주당
8% 발트 독일계 진보당
13% 발트 독일계 개혁당
14% 발트 독일계 인민당
25% 발트 기사단협회
3% 발트 형제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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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트 독일인들의 국가로 독일의 여섯 동방주 가운데 하나다.

상당히 복잡한 사정을 가진 국가다.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 민족주의를 소수의 독일계 귀족들이 억지로 찍어누르고 있는 형태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했던 정치 상황이 검은 월요일로 경제가 폭삭 망하며 폭발하게 되는데 이걸 최대한 빠르게 수습하는 게 목표다. 이때 제대로 나라 관리를 못하면 연방 자체가 해체되어 리가 시만 남을 수도 있고 발트 형제단이라는 극단주의 단체에 나라 전체가 넘어가는 수도 있다.

본격적으로 이벤트가 시작되면 수도 리가를 제외한 모든 지역에 저항도 시스템이 생성되고 숲의 형제단이란 이름의 민족주의 반군 단체가 등장하며 봉기 상태로 들어간다.
이 봉기는 디시전을 통해 진압해야 하는데 디시전 실행에 정치력이 상당부분 소모된다.

추가로 완전히 분열되어 버린 의회도 컨트롤해야 한다. 정해진 시간 내에 정치력을 150 모아서 의견을 통합해야 하는데 이원화라는 국가 정신으로 정치력 수급에 큰 패널티를 받아 기본적으로 받는 정치력이 0에 가깝기 때문에 특별 디시전을 통해 연방 내 인권 단체들과 협상을 통해 정치력을 얻어야 한다.
주로 안정도를 일부 내리고 정치력을 얻던가 부정적인 기간제 모디파이어를 받고 정치력을 얻는 식.

모든게 다 성공적으로 진행된다면 다시 정치가 제대로 돌아가기 시작한다. 중점에 따라 헌법을 새로 작성하는데 2가지중 하나를 선택하는 식이다. 모든 조항을 선택하고 나면 강력한 국가 정신이 생기는데 강대국에 비빌 수 있을 정도로 성능이 강력하다.

성능 자체는 좋지만 체급이 너무 아쉽다. 특히나 인력이 매우 부족하다. 300만이 안되는 인구를 보유하고 있는데 국가 정신으로 징병 가능 인구에 60% 패널티를 얻으며[33] 대규모 이민 국가 정신으로 자연 인구 증가분에 상당한 패널티를 받는다. 부분 동원령 기준 12개의 사단 캡이 존재하나 해당 사단을 유지시키기도 벅찬 수준이라고 보면 된다.

대신 소비재 관련 보너스는 좋은 편이다. 관련 중점을 모두 찍고 전시 경제에 들어가면 소비재 0%에 가깝게 만드는 것도 가능하다. 물론 체급 자체가 적은 탓에 활용 가능한 민간 공장이 두자릿수가 안되어 표가 잘 나는 편은 아니긴 하나 디시전을 통해 독일에 군수 물자를 구매할 수 있고 동유럽 방위조약 시스템을 통해 장비 수급이 가능해 빠듯하게나마 영토를 지킬 부대를 운용할 정도는 된다.

만약 공국이 발트 형제단의 국민대중주의 국가가 된 상태에서 독일 제국이 인터내셔널에 의해 멸망했다면 독일의 영토를 다시 수복하여 독일국을 재수립할 수 있으며, 독일 제국 전역에 코어와 함께 약간의 추가 중점이 생긴다. 대놓고 나치스멜이 나는 " 의지의 승리" 국가 정신이 생기는 건 덤

4.3. 백루테니아 (WHR)

백루테니아 - 시작 상황

여전히 백루테니아로 불리는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의 힘겨운 탄생은 벨트크리크와 러시아 내전을 배경 삼아 일어났습니다. 1918년 2월 독일군 민스크에 입성했을 때, 독일군은 이 지역에 살고 있는 동슬라브족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고, 단지 옛 폴란드 귀족의 지배를 받는 러시아인으로만 생각했습니다. 벨라루스 민족 부흥은 1890년대에야 시작되었으나 이는 소수지만 점점 늘어나는 도시 지식인층에 국한되어 있었으며, 흔히 흐라마다라고 불리는 벨라루스 최초의 정당인 벨라루스 사회주의 의회는 1903년에야 창당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독일군은 1918년부터 꾸준히 벨라루스 국가평의회, 즉 라다에 권한을 위임하면서 전개되는 상황을 재빨리 활용했습니다. 독일군은 자신들이 도착하기 불과 두 달 전에 볼셰비키가 전벨라루스 의회를 강제로 해산하는 것을 목격한 후, 비록 독일의 철저한 감독하에 있기는 하지만 백루테니아 국가 수립을 지원함으로써 이 지역에서 러시아, 즉 볼셰비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동유럽에서 폴란드의 영향력을 제한할 수 있는 방법을 찾게 되었습니다.

1920년 민스크 조약을 통해 백루테니아의 독립이 인정되었지만, 독일군이 드니프로강과 드비나강에 방어가 가능한 국경을 선호했기 때문에 국경은 라다가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작았습니다. 벨라루스 민족주의자들은 이에 실망했지만, 자신들의 주장을 관철할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벨라루스의 민족 정체성이 약하고 공화국의 대중적 지지가 제한적이라는 것은 아무리 강경한 민족주의자라 할지라도 알 수 있었기 때문에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의 야망을 좀 더 관리하기 편한 수준으로 억제할 수 있었습니다.

1920년 말, 라다는 약속된 제헌의회에 권한을 양도했고, 제헌의회는 헌법을 채택하고 인민공화국 의회인 소임[34]에 대한 선거를 실시했습니다. 그 이후로 정부는 1918년 독일과의 협력 문제로 흐라마다가 분열하면서 결성된 벨라루스 사회민주당이 지배해 왔습니다. 이후 벨라루스 사회민주당은 중도 좌파 선거 연합인 벨라루스 농민-노동자 연합으로 재편했습니다. 새로운 흐라마다는 교육과 문화 기관을 대폭 확대하여 벨라루스의 민족 정체성을 더욱 확고히 하고 문맹 퇴치에 주력하는 진보적 국가로 거듭났습니다.

벨라루스의 미래는 밝아 보였지만 지평선 너머로는 먹구름이 몰려오고 있었습니다.

"우리의 새로운 공화국을 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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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벨라루스 혁명조직
4% 벨라루스 사회당 - 혁명파
12% 벨라루스 사회민주당 - 좌파
38% 벨라루스 사회민주당 - 우파
3% 벨라루스 사회연방당
12% 벨라루스 인민당
7% 벨라루스 기독민주당
7% 벨라루스 군사위원회
4% 벨라루스 군사위원회
10% 벨라루스 농민당 - 녹색참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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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유럽 라이히스팍트 구성국 중 하나로 독일의 여섯 동방주 가운데 하나다. 설정상 독일은 처음에는 실제 역사처럼 이 국가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지만 생각을 바꿔 현지 독립운동가들과 협력하였고, 그 결과로 세워진 국가라고 한다. 시작 시 지도자는 브라니슬라우 타라슈케비치[35].

시작 시점에서는 백루테니아지만 중점을 타다 보면 마지막 중점으로 국명을 벨라루스 인민공화국으로 바꾸게 된다. 다만 사회보수주의 정당이 집권하면 국명이 벨라루스 국민공화국이 된다. 라다슬라우 아스트로우스키가 집권해 권위민주주의 국가가 되면 국명이 벨라루스 중앙 라다가 되는데, 중앙 라다가 계속 뇌절을 하면 베르너 켐프가 집권하여 후견전제주의 국가가 되고 국명이 민스크 총독부[36]로 바뀌어 벨라루스인들은 러시아를 막는 방벽의 재료로 쓰인다. 바츨라우 라스토우스키가 집권하여 국민대중주의 국가가 되면 국명이 크리비아가 된다.

사민주의 정권을 유지한 상태에서 러시아가 사회주의 국가가 되어 있으면 러시아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국가가 되며 러시아의 자치 괴뢰국이 될 수 있다.

러시아에 있는 영유권 주장 지역들을 획득하면 독일에 독립을 요구하는 디시전이 추가된다.

4.4. 우크라이나국 (UKR)

우크라이나국

러시아 내전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새로운 국가가 세워졌습니다. 수 세기에 걸친 몽상가들과 철학자들의 노력으로 세워진 국가, 바로 우크라이나라는 국가입니다.

1918년 1월에 독립을 선언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에 서명하고 독일 제국의 사실상 보호국이 되었습니다. 당시 이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가 볼셰비키를 키이우에서 몰아내고 러시아로 돌아가는 데에 대한 작은 대가로 여겼습니다. 우크라이나는 두 국가의 굶주린 인구를 먹여 살리기 위해 독일과 오스트리아로 곡물을 수송하면서 동맹국과 곡창지대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서부 전선에서 임박한 패배에 대한 독일의 두려움과 인민공화국의 전면적인 토지 개혁 약속은 독일 지휘부가 방침을 변경하도록 했습니다.

1918년 4월 29일, 독일의 지원을 받은 쿠데타가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전복시키고 그 자리에 우크라이나 장군 파울로 스코로파즈키의 지도 아래 우크라이나국이 수립되었습니다. 인민공화국의 개혁은 역전되었고, 소련이 재임 기간 동안 몰수한 토지는 상류층 지주에게 반환되었으며, 헤트만은 우크라이나의 확고한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격동과 갈등으로 가득했던 20년대를 지나 우크라이나는 30년대에 접어들면서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미텔오이로파의 곡창지대이자 우크라이나 국민의 수호자인, 우크라이나는 아직 멸망하지 않았으며 안정적인 지도 아래 동방의 선봉으로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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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우크라이나 공산당
10% 보로티비스티
9%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블록 - 우크라이나 사회혁명당/평의회-혁명 블록
18% 우크라이나 사회주의 블록 - 우크라이나 사회민주노동자당
13% 우크라이나 급진민주당
4% 지주연합/프로토피스
5% 우크라이나 민주농민당
28% 우크라이나 농민-국가주의자 연합/우크라이나 민주농민당
7% 헤트만주의-건국자 연합
5%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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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 패치 후 독일의 동방주가 되었고, 0.25 패치로 전면적 리워크를 거쳐 왕국에서 헤트만국으로 변경되었다.

대전쟁기 말, 독립을 선언했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은 마흐노의 아나키즘 봉기를 비롯한 내분, 볼셰비키와 동맹국의 공세에 끼어 끝내 단명하고 그 자리엔 현실 속 독일 제국의 괴뢰국이었던 '헤트만' 파울로 스코로파즈키 우크라이나국이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헤트만국의 인기는 처음부터 없었고 곧 사회자유주의 올렉산드르 슐힌과 사회민주주의 이사아크 마제파, 극좌 볼로디미르 빈니첸코의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의 잔당과 올렉산드르 슘스키의 생디칼리슴 세력, 미콜라 스치보르스키 예우헨 코노발레츠를 중심으로 하는 국민대중주의 세력 등에 포위된 꼴로 정치를 시작하게 된다.

독일의 뒷배로 헤트만은 권위민주주의와 사회보수주의의 불안정한 연정을 이끌었고 친러파와 극좌파를 우크라이나 정치계에서 빠르게 배제하였다. 그러나 경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에 의존적인 경제 모델과 벤처 사업에 의해 불안정하며 지역 간 불평등은 극심하다.

정치적 루트는 다음과 같다.
헤트만국의 히든 루트로 민주운동과의 협상 중 파울로 스코로파즈키가 열차 사고로 사망하고 그의 아들 다닐로 스코로파즈키가 새로운 헤트만으로 옹립되면 진정으로 민주적인 헤트만국이 수립된다. 인민공화국 루트처럼 선거를 치르는 헤트만국을 볼 수 있다.

여러모로 라이히스팍트의 최중요 국가인데 인력이 무려 3800만으로 라이히스팍트의 다른 회원국인 리투아니아+백루테니아+발트 연합공국+폴란드를 합쳐도 택도 없다. 저 네 국가를 다 합쳐도 거의 1.5배의 인력을 가진 셈.
대신 산업력이 인구 1300만이 안되는 폴란드와 동급일 정도로 낙후되어 있어 저 많은 인력들을 다 써먹지 못한다. 본인의 체급만큼의 힘을 발휘하기 위해선 라이히스팍트 국가의 적극적인 지원을 필요로 한다.

헤트만국이건 인민공화국이건 러시아와 전쟁을 하게 되면 러시아에게서 인접한 영토 일부를 가져와 핵심 주로 만들 수 있으며, 독일의 동방주 상태에서 영토를 확장했다면 최종적으로 완전 독립을 달성할 수 있다.

여담이지만 리워크 이전 우크라이나의 왕으로 등장했던 바실 비시바니도 여전히 등장하는데, 이번에는 인민공화국의 대통령 중 한 명으로 선출할 수 있다. 또는 오스트리아가 우크라이나를 괴뢰화시키면 우크라이나의 왕으로 만들 수도 있다고 한다.

1.1 패치 이후 인민공화국 루트 중 사회민주주의-사회자유주의 루트의 재정비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이후 1.1.1 패치로 연정을 맺고 유지시키는 방향으로 인민공화국 루트가 정비되었다.

5. 북유럽

5.1. 스칸디나비아

북유럽 국가들 소개 (펴기/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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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칸디나비아인들은 항상 독일과 러시아에 저항해 왔다. 16세기 초, 우리 스칸디나비아 형제국가들은 유럽으로부터 우리의 권익을 수호하는 유일한 길이 모든 국경에 산처럼 쌓인 적들에게 맞서싸우는 것 뿐이란 것을 깨달았다. 북쪽의 사자들은 남쪽과 서쪽에서 행해지는 제국들의 침략에 직면하여 몇 번이고 맞서고 후퇴하길 반복했다.

우리들은 승리를 봤고, 또 패배를 보았다. 핀란드는 러시아에게 패배했고, 덴마크 남부는 독일 제국이 점령하였다. 유럽의 강대국들이 위협을 행하자 내부갈등은 곧 잦아들었다. 대전쟁이 일어났을 때, 우린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대전쟁의 업화가 우리의 차갑고 광활한 숲 속에 퍼지기 않기만을 바랐을 뿐이다.

우리가 중립을 선언한 사이, 카이저는 대전쟁에서 승리하였다. 이제 그는 전 세계에서 위엄을 떨치고 있다. 하지만 스칸디나비아 사람들은 전쟁의 참상을 직면했다. 불타는 도시, 대기근 같은 것들을 말이다. 우리가 참전했다면, 대전쟁은 달라졌을까? 하지만 우리는 이상이 아닌 평화를 택했고, 야망이 아닌 안전을 택했다. 우리의 선택이 옳은 것이었을까?

우리들 안엔 친독파들이 많았지만, 난 하나도 알 수 없다. 이제 노르웨이도 새로운 위협에 직면했다. 스칸디나비아 사회민주주의가 무장한 생디칼리슴의 횃불에 위협받고 있다. 의회는 급진파와 온건파들로 분열되고 말았다. 이 혁명의 배후엔 프랑스 코뮌과 브리튼 연합이 서 있다. 독일과의 복수를 북유럽에까지 퍼트리기 위함이다. 저들의 거짓말을 믿지 마라, 우리의 형제들이여. 저들의 붉은 노래도 따라부르지 말라.

우리는 기다리고, 또 기다린다. 우리의 패, 선택지, 야망, 그리고 호랑이의 모습을 숨기고 있어야 한다. 독일과 프랑스, 러시아가 다시 파괴적인 대전쟁을 벌이고, 미국은 불에 타버리고, 아시아는 폭력의 소용돌이에 휘말리는 동안, 우리의 땅은 차갑고 평화롭게 남아있다. 광활한 숲은 첫눈과 함께 고요해졌고, 불길이 우리 주변을 휩쓸었다. 러시아는 핀란드 국경을 탐하고, 독일은 미소를 짓고 춤과 노래로 다가왔지만 언제든지 등에 칼을 꽂을 준비가 되어있다.

저들은 스웨덴이 라이히스팍트에 참가하길 바라고 있다. 독일은 우리들이 경제적 의존으로 인해 그들의 세계 제국의 일원이 되기를 바라고 있다. 우리 사회는 독일에게 무릎을 꿇고 나아가는 것은 비열한 대의가 될 것이라 믿고 있다. 만약 저들이 우리들을 침공한다면, 난 저들에게 "그럼 와보거라"라고 말할 것이다.

저들은 여기서 암흑과 추위 이외엔 아무 것도 못 찾을 것이다. 저들은 우리들이 준비한 것처럼 준비되지 못 했다. 이제 저들이 보인다. 그저 얇은 부츠만을 신은 채로 몇 미터는 쌓인 눈을 헤치면서, 우리가 끝없는 숲에서 병사들을 배치하는 동안, 저들의 차량과 무기들은 얼어붙을 것이다. 그리고 저들은 스카겐에 도사리는 위험들을 두려워해야 할 것이다.우리들의 숲에선 하얀 가면을 쓴 병사들이 기다리고 있다. 저들이 전통적인 전쟁을 하는 동안, 달빛 아래 라플란드 숲 속에서 하는 사냥처럼, 저들을 물리치고 사냥할 것이다. 오거라, 러시아와 독일이여, 우리들이 두려움이 무엇인지 가르쳐줄 것이니까. 스칸디나비아, 북쪽은 기다리고 있다.
스웨덴, 덴마크, 노르웨이가 모두 민주주의 정권이거나, 민주주의 스웨덴이 노르웨이를 합병, 민주주의 독립 덴마크와 함께 세력에 가입되어 있지 않을 경우 만들 수 있다.

노르웨이, 덴마크, 스웨덴의 국가 중점을 보면 한쪽 구석에 스칸디나비아 통합에 관련된 방대한 중점 트리가 있는데, 특정 조건을 만족할 경우 스톡홀름 조약 이벤트가 뜨면서 첫 중점이 해금된다. 이후 현재의 유럽연합이 만들어지기까지의 역사를 보는 듯한 중점들을 찍으며 다른 국가들이 해당 내용에 동의하게 만들어야 한다. 마지막 중점을 찍고 다른 국가들도 모두 동의한 경우 세 국가는 합쳐져 노르드 연방이라는 국가가 되고 국기도 바뀐다. 핀란드와 에스토니아도 민주주의 정권일 경우 1938년 6월 1일 후에 노르드 이사회에 가입 후 노르드 연방에 통합될 수 있다.[37]

헌법을 정하는 중점도 있는데 3국의 왕( 구스타프 5세- 크리스티안 10세- 호콘 7세)이 돌아가면서 국가원수를 맡는다고 하나 지도자로 등장하지는 않는다. 많은 중점과 좋은 국민정신, 개발 디시전을 가지고 있지만 세력 창설도, 세력 가입도 불가능하고 확장 명분도 없어서 막상 만들어보면 실망스러운 국가이다.

5.1.1. 노르웨이 (NOR)

노르웨이의 상태 The state of Norway

노르웨이는 역사의 교차로에 서 있습니다. 국가는 비교적 호황을 누리는 반면에 시민 사회는 정치적 내분과 불경기로 인해 골머리를 앓고 있습니다. 좌파는 한때 여당이었던 노동당Labour Party의 분파 난립 결과 분열되어 있습니다. 1921년 온건파가 이탈하여 사회민주노동당Social Democratic Labour Party을 창당한 이래로 급진 생디칼리스트 또한 1923년 탈당하여 노르웨이 생디칼리스트 연합Norwegian Syndicalist Federation을 결성하였습니다. 게다가 노르웨이 공산당Norwegian Communist Party이 고전하고 있으며 국민생디칼리슴의 원리에 입각하여 극좌파의 새로운 선봉당을 결성하려 한다는 소문도 돌고 있습니다. 정치적 스펙트럼의 반대쪽 끝에서는 여러 국민주의 단체들이 권력과 영향력을 놓고 다투고 있습니다. 사회주의에 대한 반대라는 기본적 논조는 같지만, 이들의 수단과 목표는 각기 다릅니다. 정치적 내분이 폭력적 결과를 낳지는 않았지만 집권당인 자유당Liberal Party 정권은 소수당 정권이기 때문에 긴급한 현안을 처리할 힘이 없습니다. 유럽 전역에 먹구름이 다시 한번 몰려들면서 국민들은 1936년 10월 선거를 애타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 도브레 산이 무너질 때까지 단결과 충성을. Enig og tro til Dovre faller"
<colbgcolor=#eee,#444>
9% 노르웨이 노동당
5% 노르웨이 생디칼리스트 연합
27% 노르웨이 노동당
8% 노르웨이 사회민주노동당
9% 좌파당
13% 보수당
11% 농민당
8% 조국회
5% 사회수비대
1% 사회수비대
}}} }}}
특이하게도 다른 나라가 36년 2월에 독일발 검은 월요일이 터지면서 경제가 망가지는 반면 노르웨이는 이미 시작부터 경제가 망가져 있다. 불행중 다행으로 미국처럼 경제 위기가 두번 터지는 대참사는 발생하지 않는다.

정치적 방향은 3가지로 36년 10월의 선거와 후속 이벤트에 따라 정치 성향이 결정된다. 선거의 선택지는 3가지로 사회민주노동당(사회민주주의)이나 우파(시장자유주의)를 고르면 민주주의가 유지되고 노동당을 고르면 우익 계열이 정부 참여를 거부하며 국가가 혼란에 빠진다. 이 때 쿠데타가 일어나 호콘 7세는 망명하고 생디칼리슴 혹은 권위주의 정부를 설립할 수 있게 된다. 생디칼리슴 루트에서는 다른 생디칼리슴 국가와 같이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하게 된다. 스웨덴이나 덴마크의 노동조합에 지원을 보내 생디칼리슴의 힘을 키울 수도 있다.

민주주의 루트에서는 다른 루트에서와 달리 경제 회복에 좀더 오랜 시간이 걸리게 된다. 다른 루트에서는 중점 하나만 찍으면 바로 경제 위기에서 회복되지만 민주주의 루트에서는 중점을 여러번 찍어야 하고 집권당의 성향에 따라 그 방안들도 조금씩 차이가 나게 된다. 외교적으로는 현재의 고립을 유지하거나 협상국에 가입하거나 스칸디나비아 국가끼리 노르딕 연방을 결성하는 방향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

권위주의 루트에서는 비드쿤 크비슬링이 집권하게 되며 온 스칸디나비아에 영유권을 주장하며 전쟁명분을 얻을 수 있다. 기존 AI도 보통 생디행을 많이 찍고 인게임, 설정상으로도 빨영과 관계가 깊은지라 차기 업데이트 이후 시작부터 생디 공화국일 예정이다. 설정상 카를레스의 아르헨티나처럼 게임 시작 날짜 겨우 몇달 전에 우파 군사쿠데타를 막고 역으로 정권을 차지해버린 민중 혁명을 통해 생디칼리스트 정권이 들어서고 호콘 7세는 캐나다로 망명간 상태이며, 플레이어 선택에 따라 왕정 복고도 가능하다고 한다.

5.1.2. 덴마크 (DEN)

1936년의 덴마크 Denmark in 1936

모든 전쟁을 끝내기 위한 전쟁에서 덴마크는 중립을 지켰지만 막대한 손해를 봤습니다. 이웃 나라 독일이 영해를 삭감하라고 요구했을 때 굴복해야만 했던 것입니다. 게다가 미텔오이로파 경제 체제가 설립된 순간에 이미 덴마크가 편입된 것만 보아도 사회와 정부에 대한 독일의 영향력은 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줄어들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1920년대 독일이 호황을 누리던 시대에 덴마크가 상당한 이득을 보는 동안, 급진좌파당은 카리스마 있는 토르발 스타우닝이 이끄는 사회민주당에게 밀려났습니다. 토르발은 1926년 12월과 1929년 4월 사이에 잠깐 권력을 빼앗겼을 때를 제외하고는 1924년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서 총리직을 지켜왔습니다. 스타우닝이 목표로 했던 복지국가 덴마크의 꿈은 아직 구체화되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보수주의 정당이 상원을 지배했기 때문이고, 이들이 토르발의 복지 정책에 반대표를 던졌기 때문입니다. 덴마크의 미래에 대해 많은 이들이 의문을 던지고 있습니다. 덴마크는 독일의 실질적인 괴뢰국으로 전락하게 될까요? 아니면 이 작은 게르만 국가가 현 국제 정세에 도전하려는 새로운 세력이 부상하는 때를 틈타 스스로 미래를 개척해 나갈 수 있을까요?

"지금 덴마크는 굳건하게 서있다."
<colbgcolor=#eee,#444>
0% 노동조합 (최대주의파)
2% 노동조합 (정통파)
0% 노동조합 (혁명파)
43% 사회민주당
10% 급진좌파당
25% 좌파당
8% 보수인민당 (입헌파)
11% 보수인민당 (독재파)
1% 통일 덴마크
0% 덴마크 인민공화당
}}} }}} }}}
시작 시 국왕은 크리스티안 10세이며 의회에서는 사회민주당의 토르발 스타우닝 총리가 재직중이다.

선거에서 스타우닝이 유임되고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면 국왕은 독일의 편을 들어 참전하고 싶어하지만 내각과 국민들의 반대를 맞게 된다. 억지로 내각을 해산하고 참전하면 라이히스팍트에 가입하면서 권위민주주의로 사상이 전환된다. 그러나 여기서 국민들의 반대가 더 거세지면 크리스티안 10세는 퇴위당하고 다시 사민주의 정권이 세워지며 프레데리크 9세가 즉위하거나, 공화정으로 전환된다.

공화정으로 전환시 모든 전쟁을 중단하고 다시 중립국으로 돌아가지만 배신당한 독일이 역으로 공격해들어오게 된다. 이때 프랑스 코뮌과 협상해서 인터내셔널에 가입하고 생디칼리슴과 사민주의의 혼합 정권을 세울 수 있다.

1.3 패치로 리워크되어 인터내셔널에 가입하는 사민 또는 사자 루트가 전체주의 또는 급사 루트로 대체되었으며 사민 또는 권민 중점 루트가 추가되었다.

5.1.3. 스웨덴 (SWE)

1936년 스웨덴 Sweden in 1936

독일이 벨트크리크에서 승리한 이후, 스웨덴은 새로운 세계 질서에 적응해야 했습니다. 스웨덴 정부가 스웨덴이 독일의 조직인 미텔오이로파에 가입할 것이라고 발표했을 때, 이에 놀라워하는 사람들은 거의 없었습니다. 미텔오이로파를 통해 많은 이익을 얻은 아비드 린드만과 그의 보수당은 선거에서 승리하여 집권하려는 사민당을 가까스로 막아내며, 스웨덴을 스칸다나비아의 보수주의 방벽으로 확고히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2년전, 린드만이 은퇴하면서 상황은 바뀔지도 모릅니다. 올해에는 린드만의 뒤를 이어 총리로 취임한 새로운 당수 예스타 바게가 첫 총선에 나서게 됐습니다. 바게는 자신의 적수인 야당의 페르 알빈 한손을 막아낼 수 있을까요?

"스웨덴을 위하여! För Sverige!"
<colbgcolor=#eee,#444>
0% 좌파 전체주의자
0% 스웨덴 노동자중앙위원회
1% 스웨덴 사회민주좌파당
32% 사회민주노동자당
14% 농민연합
12% 자유당
39% 총선동맹
0% 애국재단
2% 육군전우회
0% 스베아 리케 국민대중당
}}} }}}
실 역사에서는 스웨덴 사회민주노동자당이 집권해 대공황에 대한 대처로 계획경제와 복지정책 등 사회민주주의 정책을 실행하고 있을 때지만 카라에서는 프랑스와 영국 혁명의 여파로 레드 컴플렉스가 더 심해지고 독일 주도의 관세 동맹인 미텔오이로파 체제에 참여해 경제가 안정되면서 총선동맹이 장기집권을 이어나가고 있다.

물론 독일과 경제적으로 연관이 깊다는 말은 검은 월요일의 여파를 아주 강하게 맞는다는 뜻이다. 검은 월요일의 회복을 위한 정부의 조치를 금본위제 폐지, 차관 도입, 기업 국유화 등등 수많은 디시전 형식으로 구현했고 이를 통해 자산, 부채, 실업률, 인플레이션을 서로 조정해나가며 검은 월요일의 악영향에서 차츰차츰 회복되는 독특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시작시에는 총선동맹과 사회민주노동자당이 선거에서 주로 경쟁하고 있지만 그 외의 다른 여러 정당들도 어느정도의 경쟁력이 있어서 여러 경우의 수로 연정이 이루어진다. 다른 경우는 상관없지만 사회민주노동자당과 좌파당이 연립할 경우 왕정 폐지를 연립 정부 구성 조건으로 내세우고 실제로 왕정을 폐지할 수 있는 중점이 열린다. 그 중점을 타면 구스타프 5세를 퇴위시키고 평범하게 공화정으로 변모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강제적으로 후속 이벤트가 일어나 군대에서 쿠데타를 일으켜 페르 알빈 한손을 몰아내고 군사 정부를 세운다. 이후 생디칼리슴 계열 민병대가 군에 저항하는 이벤트가 발생하는데 군이 굴복해 스웨덴 코뮌을 성립시킬 수도 있지만 AI는 높은 확률로 민병대를 학살하고 군부 독재를 더욱 확고히 하는 쪽을 선택한다. 군부 독재 루트를 타면 구스타프 6세 아돌프 왕태손을 모셔와 왕정을 복고할지, 군정을 유지할지 선택할 수 있다.

외교적으로는 친독 국가이기 때문에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거나 노르웨이에 생디칼리슴 정권이 들어서면 라이히스팍트에 가입하게 된다. 스웨덴 코뮌의 경우에는 당연하게도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한다.

5.1.4. 핀란드 왕국 (FIN)

핀란드 왕국 The Kingdom of Finland

1917년 12월 4일,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의 원로원이 핀란드 독립선언을 발표하고, 동년 12월 6일 러시아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한 직후, 핀란드 사회는 완전히 두쪽이 났습니다. 한 쪽은 알리 알토넨이 이끄는 적위대였고, 다른 쪽은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이 이끄는 백위대였습니다.

핀란드 사회민주당원들로 주로 이루어진 적핀란드와 스빈후부드 원로원 및 독일에서 훈련받은 엽병부대 중심의 백핀란드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3개월간의 잔혹한 전쟁 끝에 독일을 등에 업은 백핀란드가 적핀란드 내각 인민대표단을 헬싱키에서 쫓아냈고, 포위된 적위대 병력들은 항복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핀란드 내전의 잿더미 속에서 피어난 핀란드 왕국은 광신적인 반공국가가 되었습니다. 그 지도자의 이름은 프리드리히 카를 폰 헤센 방백작영식, 또는 핀란드 국왕 대관식 이후 얻은 이름으로는 핀란드 국왕 프레드리크 카를레 1세라고 하였습니다.

독일 제국의 비공식적 보호국으로서 평화와 보호의 세월을 누렸음에도 불구하고, 독일군 장교들과 독일 기업들로 대표되는 독일의 영향력이 지나치게 침투한 사실은 핀란드 민중들 사이에 불온한 정치적 기류를 만들어내기 시작했으며 국왕과 여당 국민연합당이 무관심했던 수 년의 세월 동안 좌우 급진파들이 서서히 세력을 재규합하기 시작했습니다...

"난관을 뚫고 승리하리라. Vaikeuksien Kautta voittoon"
<colbgcolor=#eee,#444>
0% 적위대
3% 핀란드 인민대표단
0%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당
29% 핀란드 사회민주당
7% 농업동맹
1% 국민진보당
14% 국민연합당
4% 만네르헤임 군벌
30% 국민연합당
12% 라푸아 운동
}}} }}}
1.0 패치 이후 독일의 괴뢰국으로 등장하며, 중점도 약간 리워크되었다. 이후 추가 패치로 자치 괴뢰국으로 승격되었다.

빌헬름 2세의 친척 헤센카셀 가문이 왕실을 형성하였으며 당연하게도 핀란드인들은 독일의 영향력이 너무 크다는 사실에 불만을 품고 있다. 다만 현 국왕 프레드리크 카를레는 입헌군주적인 면모와 함께 독일의 자치령이라는 지위를 활용해 핀란드를 나름대로 안정적으로 이끌었다고 한다.

도중에 왕실과 반대파 사이의 분쟁이 이벤트로 발발하는데, 선택지에 따라 왕실이 존속하거나, 만네르헤임이나 민주주의자들이 승리하거나, 라푸아 운동이나 생디칼리슴 세력이 승리한다. 만네르헤임이 승리하면 마지막 중점으로 민주주의자들에게 권력을 이양한다.

왕국을 유지한 채 시간을 흘려보내다 보면 프레드리크 카를레 왕이 죽고 사남 볼프강이 배이뇌 1세[38]라는 즉위명으로 즉위한다.

0.20 패치 이후 라이히스팍트에 가입하려면 러시아와 불가침 조약을 맺으면 안 되게 바뀌었다.

0.27 패치 이후 모스크바 협정에 가입할 수 있게 되었으며, 러시아에서 생디칼리슴 내전이 발발할 때 공화국이 되면 자동으로 생디 공화국이 되도록 변했다.

1.0 패치 전에는 러시아에서 사회주의 내전이 발발할 시 러시아에 압력을 넣어 러시아령 카리알라와 페트로자보츠크를 차지할 수 있었다.

제작진이 언젠가 제대로 리워크하고 싶다고 언급한 적이 있는 국가이다. 특히 독일계 낙하산처럼 묘사된 헤센카셀 왕조를 다시 재조명하고 싶다고.

5.2. 아이슬란드 (ICE)

1922년 아이슬란드

1874년에 탄생한 아이슬란드는 덴마크가 식민지에게 자치와 헌법을 부여했을 때 처음으로 독립을 맛보았습니다. 덴마크의 일부로서, 아이슬란드는 벨트크리크 기간 동안 중립을 지켰습니다. 종전 이후 아이슬란드는 종주국 덴마크와 함께 미텔오이로파 경제블록과 합류했습니다. 이것은 아이슬란드가 주요 수출품인 어류로 두 시장에 진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이 섬나라에 번영의 시기를 가져다 주었습니다. 영국은 두 섬 사이의 거리 때문에 아이슬란드에서 수익성이 좋은 생선 수입을 계속했습니다. 한편, 아이슬란드 대구의 유럽 시장 진출은 아이슬란드 경제를 활성화시키기 위한 적은 추가 자금의 원천이 되었습니다.
1925년 아이슬란드

그러나 이러한 경제적 번영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았습니다. 1925년 영국 혁명은 종전 후 아이슬란드가 겪고 있던 기적을 산산조각 냈습니다. 충성파가 제국 구석구석까지 달아나자 영국-아이슬란드 무역은 순식간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대구 무역이 가능할 유일한 나라는 왕족들이 도망간 캐나다였지만 그들은 아이슬란드 무역 재개보다 더 시급한 경제 문제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미텔오이로파 경제 정책이 생디칼리슴 국가들과 어떤 무역도 할 수 없다고 명령한 이후 아이슬란드는 영국 혁명의 여파로 비틀거리고 있었습니다.
1932년 아이슬란드

이 나라에서 증가하기 시작한 대규모 실업률에 미봉책을 마련하기 위해, 국회는 사람들이 육체 노동 건설 프로젝트에 종사하도록 하기 위해 도시 일자리 증가 계획을 만들었습니다. 이것은 한동안 효과가 있었지만 결국 정부 내 정당들 사이에서 불화의 원인이 되었습니다. 1932년 11월 9일 시의회 회의에서 시의회는 그 사업의 추진에 대해 토론했습니다. 경제 불황이 여전히 아이슬란드를 괴롭히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이 계획이 그대로 유지될 것을 요구하며 건물 앞에서 폭동을 일으키기 위해 집단으로 도착한 사람들에게 이 소식이 전해졌습니다. 이 폭동은 구토우슬라구린으로 알려지게 되었고, 도시 일자리 증가 계획이 가까운 미래에 효력을 발휘하도록 했습니다.
1936년 아이슬란드

지난 10년은 아이슬란드 사람들에게 재앙이었지만, 여전히 지평선 너머로 더 밝은 미래에 대한 희망이 남아 있습니다. 유망한 정부 관리들은 일자리를 제공하거나 관광 산업을 일으키거나 심지어 우리 섬이 우리에게 제공하는 지열과 수력 발전 자원을 활용하는 것을 검토하기 위해 대규모 공공 사업 계획을 짜기 시작했습니다. 아마도 덴마크의 약간의 도움을 받으면, 우리는 이러한 꿈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도 끝이 머지 않았다!"
<colbgcolor=#eee,#444>
0% 인민동맹
8% 인민통일당
6% 농부당
19% 사회민주당
25% 진보당
0% 독립당
41% 독립당
1% 입헌주의 통치
0% 의회당
0% 국민주의당
}}}
매일 정치력 획득 -0.05
* 병든 경제
소비재 공장 20%, 주간 안정도 -1%, 건설 속도 -10%, 생산 효율성 한도 -10%, 공장 생산량 -10%
* 도시 노동-창조 계획
건설 속도 +5%
* 구토우슬라구린 폭동 Gúttóslagurinn Riot
매일 정치력 -0.10
}}}
시작 시점에서는 덴마크의 괴뢰국이다.

보수당이 집권하면 덴마크로부터 독립하며, 사민당이 집권하면 덴마크의 괴뢰국으로 잔류한다.

독립 시 협상국에 가입하는 선택지도 있다.

6. 서유럽

6.1. 네덜란드 (HOL)

1936년의 네덜란드 The Netherlands in 1936

네덜란드는 벨트크리크 동안 독일 편에 붙자는 논의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중립을 유지한 유럽의 몇 안되는 국가 중 하나입니다. 벨트크리크가 끝난 후 네덜란드는 경제 호황의 혜택을 맛보았지만, 경제의 상당 부분이 독일 회사의 대규모 투자와 함께 독일인의 손에 놓여 있습니다. 게다가 1920년대에 프랑스가 무너지고 영국이 생디칼리슴에 물들어 버리면서 좌익 사상이 네덜란드에서 크게 관심을 끌고 있으며 반동적인 사상에도 점점 탄력이 붙고 있습니다. 국제적 긴장도가 높아지고 경제 번영이 끝나면서 네덜란드의 민주주의는 확실히 시험받을 것입니다.

"여왕 폐하 만세! Leve de Koningin!"
<colbgcolor=#eee,#444>
2% 애국당
1% 전국노동사무국
6% 혁명사회노동당
20% 사회민주노동당
6% 자유민주연맹
4% 자유국가당
54% 반혁명당
2% 군사평의회
5% 국가재건연합
0% 국가재건연합 극단주의자
}}} }}} }}}
1차 대전 동안 중립을 유지해 독일의 속국이 되진 않았지만 독일과 그 괴뢰국 플란데런-왈로니에 둘러싸여 있다.

v0.6에서 전면적 개편을 받았는데 10개의 정치 사상에 더불어 각 사상이 연립하는 경우까지 중점이 만들어져 가장 방대한 국가 중점을 가지고 있는 국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국가 중점 창이 너무 넓어서 정치 관련 트리는 3개씩 분리해놨을 정도이다. 이러한 방대한 국가중점 트리를 해결한 방법은 Dynamic Focus Tree. 이벤트 등의 디시전 등에 따라 정치관련 중점 트리가 바뀐다! 즉, 처음에 시작 할 때는 어떠한 디시전도 선택되지 않았으므로 정치트리는 아예 보이지도 않는다. 이는 미래의 디시전을 미리 맵핑하며 큰 그림을 그리는 플레이가 어렵다는 말도 된다.

사민주의 루트로 갈 경우 빌헬미나 여왕이 새로운 정부를 부정하며, 이에 대한 대답으로 율리아나 여왕을 대신 집권시키거나 왕실을 폐지하고 공화국으로 만들 수 있다. 공화국으로 바꾼다고 딱히 큰 단점이 있는 것은 아니며 오히려 안정도를 더 준다! 다만 국민대중주의나 후견전제주의 정당들의 캠페인을 가만히 놔두면 안정도나 정당 지지도에 손해가 가므로 유의해야 한다.

사민주의 루트 중간에 생디칼리슴 루트로 빠질 수 있다. 다만 이렇게 되면 정치트리를 모두 끝내는데 시간이 매우 오래 걸리게 되며, 외교 트리를 언락하는데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린다. 오죽하면 프랑스 코뮌 vs 독일 제국의 2차 대전이 터진 이후에야 겨우 외교 트리의 첫번째 중점을 찍는 경우가 허다하다.

6.2. 아일랜드 (IRE)

외로운 섬 하나

유럽의 가장자리에 자리한 아일랜드는 '성자와 학자'의 땅으로서 수많은 유적과 기념물에 녹음이 우거진 풍경에 놓인 고대의 유산입니다. 켈트족의 언어와 사회는 다른 대륙과 별개로 발전했지만 아일랜드는 문화적 통일성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극도로 분열되어 수세기 동안 여러 '하이킹'에 의해 명목상으로만 통합되었습니다. 1169년, 축출된 아일랜드 왕을 지원하기 위해 영국에서 온 노르만 기사단이 대규모 군대의 선봉으로 상륙하면서 영국과 아일랜드 간의 험난한 관계가 시작되었습니다.

이후 몇 세기에 걸쳐 아일랜드에 대한 영국의 지배력은 점점 더 확고해졌고, 여러 차례의 봉기가 실패하면서 지도자들의 땅은 몰수되어 영국 정착민에게 분배되었습니다.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아일랜드는 점진적으로 식민지화되었고, 특히 북동부 얼스터 지역은 가톨릭 신자들의 권리를 크게 제한하는 엄격한 형법이 시행되며 아일랜드에 영어를 사용하는 새로운 개신교 엘리트층이 형성되었습니다.

1798년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공화주의 반란이 실패한 후, 1801년 아일랜드 왕국이 그레이트브리튼 왕국에 정식으로 합병되어 연합왕국이 탄생하면서 영국의 지배력이 크게 강화되었습니다. 더블린은 독자적인 개신교 의회마저 잃었고, 아일랜드를 웨스트민스터에서 직접 통치하게 되면서 경제적으로 큰 쇠퇴를 겪게 되었습니다.

1845년에서 1850년 사이에 감자 마름병으로 인한 식량 위기가 웨스트민스터의 잘못된 관리로 인해 재앙적인 수준으로 악화되면서 자치권 박탈은 파멸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영국 지주들은 여전히 이윤을 위해 식량을 수출했지만, 대기근, '언 고르타 머르'로 인해 100만 명 이상이 사망하고 인구 800만 명 중 최소 절반이 이주를 감행했습니다. 이로 인해 아일랜드 사람들이 더 나은 미래를 찾아 일상처럼 섬을 떠나면서 수십 년에 걸친 이민, 특히 신대륙으로의 이주가 시작되었고, 이 피해로부터 아일랜드는 아직 회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인구 감소는 아일랜드어가 가장 널리 사용되던 농촌 지역에 가장 큰 타격을 입혔고, 아일랜드어는 단기간에 거의 소멸적인 쇠퇴의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사건의 여파로 결국 웨스트민스터에서 아일랜드 가톨릭 신자들이 대표를 맡게 되면서 아일랜드는 무기가 아닌 말로나마 제한된 형태의 자유를 다시 얻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자유로 가는 길 (펴기/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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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공식적인 일부로서 아일랜드는 웨스트민스터에서 최소한의 대표성만을 가졌고, 그로 인해 아일랜드의 문제에 대해서는 발언권이 제한적이었습니다. 지난 수세기 동안 일어난 여러 차례의 반란이 실패한 후, 아일랜드가 자유를 얻을 수 있는 가장 실현 가능하고 현실적인 방법은 정치적 수단을 이용하는 것임이 분명해졌습니다. 대기근 이후 몇 년 동안 웨스트민스터의 아일랜드 의원들은 아일랜드가 영국의 일부로 남되 더블린의 지역 의회에서 통치하는 '자치'라는 제도를 제안했습니다.

하지만 아일랜드의 모든 주민이 이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더 많은 자치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민족주의자라고 불렸고, 아일랜드와 영국 간의 연합을 유지하려는 사람들은 연합주의자 또는 충성파라고 불렸습니다. 민족주의자들은 헌법 또는 의회의 수단을 선호하는 '자치주의자'와 자치를 디딤돌로도 받아들일 수 없는 타협안으로 생각한 '페니언'으로 알려진, 보다 급진적인 공화주의 분리주의자들로 나뉘었습니다.

몇 가지 주요 예외를 제외하면 민족주의자들은 대부분 가톨릭 신자였으며, 연합주의자들은 부분적으로는 영국 출신 조상을 둔 많은 개신교도들의 조상적 유대감으로 인해 개신교와 연관되었습니다. 특히 얼스터의 연합주의자들은 자치가 농업이 주를 이루는 남부 지방에 유리하게 작용하여 벨파스트의 산업에 해를 끼칠 것을 우려했습니다. 또한 가톨릭 교회의 영향력을 경계하며 "자치는 로마의 통치와 다를 게 없다"고 비난했습니다.

웨스트민스터 내 보수당과 이뤄진 수십 년 간의 논쟁과 지연 끝에 20세기 초에야 자치가 제정될 수 있었습니다. 이에 대한 대응으로 얼스터의 연합주의자들은 자치가 제정될 경우 영국 정부에 맞서 무기를 들고 싸우겠다고 맹세한 무장 민병대인 얼스터 의용군을 결성했고, 민족주의자들은 그들에게 반대하는 의미로 아일랜드 의용군을 결성했습니다.

아일랜드는 전면적인 내전 직전까지 갔지만, 자치의 도입이 지연되면서 이런 상황은 멈추게 되었습니다. 바로 벨트크리크로 알려진 대전쟁 때문에...
잉글랜드의 위기는 아일랜드의 기회 (펴기/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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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에서 발발한 전쟁은 아일랜드에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 자치의 시행은 보류되었고, 이로 인해 잠재적인 내전은 적어도 일시적으로나마 피할 수 있었습니다. 또한 벨트크리크는 아일랜드 의용군의 분열을 일으켰는데, 대부분은 벨트크리크에 참전하면 자치가 승인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하는 웨스트민스터 내 아일랜드 민족주의자들의 신념을 따라 의용군이 영국의 전쟁에 동참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 외의 아일랜드 의용군은 이오인 맥닐의 지휘 아래 영국의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이 단체에는 아일랜드 독립 공화국을 세우겠다고 맹세한 비밀 단체, 아일랜드 공화주의 형제단의 멤버들이 잠입했습니다. "잉글랜드의 위기는 아일랜드의 기회"라고 믿었던 공화주의 형제단과 남은 의용군은 영국이 다른 곳에 정신이 팔려 있는 동안 할 수 있는 유일한 선택은 반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봉기를 계획한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의 아이콘인 제임스 코널리와 그의 민병대인 아일랜드 시민군이라는 뜻밖의 동맹을 얻게 되었습니다. 더 중요한 것은 독일 제국도 이러한 노력을 지원하기 위해 대량의 무기를 보내기로 동의했다는 점이었습니다. 광범위한 동시다발적 봉기가 계획되었지만 독일군의 무기 수송이 영국군에 의해 가로막히면서 재앙이 닥쳤습니다. 우유부단함과 잘못된 의사소통으로 인해 봉기는 마지막 순간에 더블린을 제외하고는 거의 대부분이 취소되었습니다.

1916년 부활절 월요일은 아일랜드 역사의 흐름을 영원히 바꿀 ' 부활절 봉기'로 알려진 사건의 시작이 되는 날입니다. 반란군은 더블린 주변의 여러 지역에 집결하여 자신들을 임시정부로 하는 공화국을 선포했습니다. 수적으로 열세인 데다 장비도 부족했던 반군은 영국 왕실의 총공세에 맞서 싸울 기회가 없었습니다.

5일 간의 전투 끝에 영국군의 강경 대응으로 더블린 중심부 대부분이 초토화되자 반군은 항복했습니다. 대중의 조롱을 받았고, 이들에게 동정심을 느끼는 사람은 거의 없었으며, 이 봉기는 또 다른 피비린내 나는 실패로 끝날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영국의 대응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살아남은 거의 모든 지도자들이 재판 없이 처형된 것입니다. 이 처형 소식은 아일랜드 국민들을 분노하게 만들었고, 조롱의 대상이었던 의용군을 순교자로 만들었습니다. 1916년의 지도자들은 그들의 희생을 통해 공화주의 운동은 아일랜드 정치의 최전선으로 끌어올렸습니다.
독립전쟁 (펴기/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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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이후 아일랜드 정치는 급격한 재편과 급진화를 겪으며 입헌국가주의에 대한 대중의 지지가 하룻밤 사이에 공화주의로 바뀌었습니다. 공화주의자들이 장악한 군소 민족주의 정당인 신 페인이 가장 큰 수혜자였습니다.

1918년 대륙에 대한 독일의 압박이 심해지면서 징병제가 도입되자 웨스트민스터를 향한 아일랜드인의 분노는 더욱 커졌습니다. 얼스터를 제외한 대다수 아일랜드 국민은 이 법안에 반대했고, 사회 각계각층에서 파업, 징병 기피, 시위가 이어졌습니다.

영국 정부는 아일랜드에 대한 '양보'의 일환으로 전쟁 중 북동부 6개 카운티인 얼스터를 제외하고는 자치를 도입했습니다. 이 계획은 웨스트민스터의 옛 아일랜드계 의원들이 자치의회 선거에서 패배하고 신 페인이 사실상 모든 의석을 차지하면서 영국에 큰 역효과를 가져왔습니다.

신 페인은 대중적 지지가 입증되자 웨스트민스터에 출석하는 대신 1916년에 선포된 아일랜드 공화국의 의지를 이어 더블린에서 새로운 아일랜드 의회인 '달 에런'을 선포하는 중대한 조치를 취했습니다.

같은 날, 영국군과 신 페인의 준군사조직인 아일랜드 공화국군 사이에서 벌어진 소규모 교전으로 아일랜드 독립 전쟁이 시작되었습니다. 주로 게릴라전으로 치러진 이 전쟁은 매복, 시골에서의 유격전, 독일제 무기 수입, 반군에 대한 높은 수준의 대중적 지지 등으로 특징 지을 수 있습니다. 영국군의 입장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적과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서 싸우는 것이 벨트크리크의 전장과는 큰 차이가 있었고, 좌절한 군인들은 지역 민간인에게 분노를 표출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영국군이 민간인에게 보복을 가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영국 정부는 물론 국제 사회와 이미 벨트크리크로 전쟁에 지친 영국 국민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일으켰습니다. 지속 불가능한 전쟁과 여론의 압박에 시달리던 영국 정부는 신 페인과 화해를 모색했습니다.

1921년 말, 영국-아일랜드 조약이 체결되어 이전까지 자치가 이루어졌던 26개 카운티로 이루어진 아일랜드 공화국이 탄생했습니다. 많은 양보가 수반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신 페인이 불과 10년 전만 해도 꿈꿀 수 있었던 것보다 더 멀리 나아갔다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공화국의 탄생 (펴기/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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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의 세력권 아래에 남았지만 영국-아일랜드 조약으로 아일랜드 공화국이 탄생했습니다. 조약 자체는 신 페인과 국민들 사이에서 높은 지지를 받았지만, 반대하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습니다. 신 페인은 조약 찬성파와 반대파로 나뉘었고, 전자는 분단이라는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조약 반대파는 그보다는 소수였고 정치적 극단주의에 가까운 이들에게 지지를 받았으며, 이는 향후 10년 동안 신 페인의 분열이 시작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922년 2월 허법이 비준된 후 공화주의 강경파인 카헐 브루는 당 지도부가 결정한 방향에 동의하지 않고 에이먼 데 벌레라 및 다른 여러 의원들과 함께 '쿠만 안 시르스터이트(자유국 연합)'를 결성하여 신 페인에서 분당했습니다. 얼마 후 치러진 선거에서 조약 찬성파인 신 페인은 조약 반대파인 자유국 연합, 노동당, 기타 군소정당들의 반대를 쉽게 물리치고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또한 창당자인 아서 그리피스가 건강 악화로 물러나면서 어윈 맥닐이 단독으로 대통령직을 수행하게 됩니다.

이후 독립전쟁의 영웅이자 영국-아일랜드 조약의 공동 협상가인 마이클 콜린스가 계속해서 부상하게 됩니다. 콜린스는 맥닐의 대리인으로 일했고, 그의 재임 기간 동안 아일랜드는 영국 혁명의 엄청난 결과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콜린스는 브리튼의 북아일랜드 침공이 임박했다는 소식에 자극을 받아 1년에 걸친 협상을 통해 북아일랜드가 공화국에 통합되도록 설득하는 데 성공했지만, 북부의 민족주의 이웃에 대한 충성파의 지배가 계속되는 대가를 치렀습니다. 이로 인한 후유증과 대공황으로 인해 신 페인은 다음 선거에서 패배했고, 기독교 연합이 집권하면서 아일랜드는 옛 영국의 영향권에서 벗어나 독일의 세력권으로 재편되는 과정을 마무리하게 됩니다.

영국 혁명과 분단 종식 이후 더욱 격동적인 정치 상황이 전개되면서 콜린스 자신이 신 페인의 당수에 올랐고, 다음 임기에는 극단주의에 대한 강경한 입장과 미텔오이로파 경제 블록으로의 진입을 바탕으로 다시 집권하게 되었습니다. 대통령에게 주어진 권한의 증가, 정치적 급진주의자에 대한 제한, 외국의 영향력에 대한 관용, 충성파와의 권력 중개 등으로 인해 당은 세 번이나 분열되는 등 적지 않은 혼란을 겪었습니다. 가톨릭 보수주의자, 자유주의자, 온건 사회민주주의자가 정치적 반대파의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지만, 반조약파와 신 페인 우파의 잔존 세력이 극우로 결집했고, 극좌파의 빈약한 지지층은 정치적 제약에도 불구하고 꾸준히 성장하고 있습니다.

새해가 시작되었지만 1936년의 아일랜드를 상상할 수 있는 사람은 얼마 없으며, 아직 다가올 미래를 예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보다 더 없습니다.
<colbgcolor=#eee,#444>
5% 자유 아일랜드
2% 아일랜드 생디칼리슴당
3% 진보노동당
10% 노동당
4% 클란 너 탈루언
7% 국가개발당
18% 기독교 자유국
43% 신 페인
7% 국민연합
1% 국민연합-결석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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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영토에서의 사단 공격/방어 +5.0%, 방어전쟁 불이익의 안정도 변동치 +10.00%
* 얼스터 특권
충성자들과 얼스터의 여섯 개의 북동부 주에는 다양한 혜택이 부여되며 이는 "얼스터 특권"이라고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얼스터 민주당은 이러한 특권을 이용하여 지역의 가톨릭들을 희생하고 개혁 시도를 차단하여 북부 지역에서 자신들의 지배를 확고히 하고 있습니다. 이로 인해 아일랜드의 미래 극우의 성장을 촉진하고 있습니다.
얼스터 내 민족주의자들의 불만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안정도 -2.0%
얼스터 충성파들의 불만은 다음과 같은 문제를 일으킵니다: 정치력 획득 -0.10
얼스터 충성파들은 현재 더블린 정부를 경계하지 않고 있습니다.
* 충성파 대표성 과분화
매일 정치력 획득 +0.05, 안정도 -5.00%
* 확고한 교회 영향력
정치력 획득 -15%, 안정도 +2.00%
* 독일의 경제적 지배력
매일 정치력 획득 -0.10, 소비재 공장 변동치 4.0%, 생산 효율 성장 +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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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클 콜린스가 암살당하지 않고 집권하고 있다.

뒤바뀐 역사 때문에 지정학적 위치가 기가 막힌 곳 중 하나이다. 협상국 입장에서 보면 영국 제도와 유럽 본토로 진출할 교두보이면서 라이히스팍트 입장에선 아군으로 끌어들이면 프랑스 코뮌과 브리튼 연합의 뒤를 조일 수 있는 양면전선용 동맹국이다. 거꾸로 제3인터내셔널 입장에선 적대 세력으로 편입되면 골치 아프기 그지 없는 국가.

1.1 패치로 리워크가 이루어졌다. 이제 대서양으로의 관문에 걸맞게 독일 제국과 브리튼 연합이 아일랜드를 영향권에 넣으려 시도하는 매커니즘이 플레이 도중 생성되는데, 한쪽의 영향력이 15 이상으로 오르면 아일랜드는 어느 한쪽의 자치령이 된다. 때문에 독립을 유지하고 싶으면 브리튼과 독일의 영향력이 15 이상 차이나지 않게 조절해야 한다.

정치적으로는 1937년 선거 이벤트가 생기면서 신 페인, 노동당, 기독교 자유국의 3파전이 벌어지는데 신 페인은 콜린스나 멀캐히 중 한 명을 당수로 선출할 수 있다. 기독교 자유국과 노동당은 국가개발당과 연정을 맺을 수 있으며, 노동당의 경우에는 클란 너 탈루언과는 무조건 연정을 맺지만 국가개발당 대신 진보노동당과 연정을 맺을 수 있다. 국가개발당이나 클란 너 탈루언은 연정을 맺었을 시 다음 선거에서 선출되며, 진보노동당은 노동당과 연정을 맺은 상태에서 제3인터내셔널이 여전히 존재하고 세력에 가입하지 않았으며, 충성파와 민족주의자들의 불만이 없을 시 다음 선거에서 선출된다.

만약 기독교 자유국이 국가개발당과의 거래를 수용하거나 노동당이 진보노동당과의 협상안을 그대로 진행하며, 보수파가 권력의 균형에서 승리하거나 콜린스가 얼스터 매커니즘에서 완전히 실패한 상태에서 기독교 자유국이 국민연합과 연정을 맺으면 후견전제주의 정부가 집권한다. 심지어 국민대중주의 정권이 집권할 수도 있는데, 극우 진영 소장파가 권력의 균형에서 승리하면 국민대중주의 국가가 된다. 국민대중주의 국가가 될 시 아일랜드 군주정을 복고하며 지명, 인명 등을 모두 정통 아일랜드어로 바꾸고[39] 브리튼 내 켈트족 지역에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

만약 대서양으로의 관문 매커니즘에서 브리튼 연합이 승리하고, 혁명 확보 디시전에서 2개를 완료하면 생디칼리슴 국가가 된다.

6.3. 플란데런-왈로니 (BEL)

<colbgcolor=#eee,#444>
0% 벨기에 공산당
5% 벨기에 노동당
0% 벨기에 노동당
17% 벨기에 노동당
2% 벨기에 노동당
9% 자유당
23% 가톨릭 블록/기독민주당
39% 친독파
4% 플란데런 의회
1% 렉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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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 역사와는 다르게 독일 제국이 승전함으로서 패전국이 됐기 때문에 기존 벨기에 왕정은 폐지되고 잠시간 군정 체제였으나, 얼마 후 카이저 빌헬름 2세의 삼남 아달베르트가 새로운 국왕으로 즉위했다.

아르덴은 독일 제국에 편입되었고 콩고 식민지는 미텔아프리카에 흡수된 상황. 대신 프랑스의 영토였던 되윙케르커를 받았다. 현재 상황은 겉으로만 보면 무난해 보이지만 사실 내부에서는 왈로니아계는 프랑스 코뮌에 편입을 기도하며, 플랜더스계는 네덜란드에 편입되기를 원하는 등 내부 문제가 만만찮다. 더군다나 두 세력이 유일무이하게 동의하는 부분이 바로 독일의 지배는 이쯤이면 충분하다는 반독 정서.

시작 시점에서는 독일의 괴뢰국이지만 검은 월요일로 독일이 혼란스러워지면서 독립에 대한 요구가 튀어나오면서 정국이 혼탁해지는데 현재의 체제를 유지하거나 독립하거나 둘 중에 하나를 선택할 수 있다.[41]

독립하면 국명이 다시 벨기에가 되고 왕정이나 공화정 중 하나를 선택할 수 있으며, 아예 플랜더스와 왈로니아로 분리 독립을 하는 경우도 있고 프랑스 코뮌의 심기를 건드려서 코뮌의 침공을 받을 경우 네덜란드어권은 네덜란드에 프랑스어권은 프랑스 코뮌에 분할 합병된다.

온전하게, 독일과 척을 지지 않는 선에서 독립하게 된다면 독일과 아렐 회담을 개최하는데 이때 1차 대전 때 빼앗긴 아르덴과 더불어 룩셈부르크까지 요구할 수 있다. 물론 요구가 너무 과도할 경우 독일이 반발해 회담이 결렬되며 침공당한다.

라이히스팍트 외에는 과거의 동맹 협상국에 가입하는 선택지도 있으며, 만약 네덜란드가 타 세력에 가입하지 않았다면 자체 세력인 저지대 조약기구를 창설할 수 있다.[42]

7. 중부유럽

7.1. 폴란드 (POL)

폴란드 왕국

20년 전, 수천 명의 폴란드인이 동맹국을 위해 싸우다 죽었습니다. 과거 폴란드를 분할 점령했던 세 강대국 중 두 나라와의 협력은 폴란드 왕국의 탄생으로 이어졌고, 폴란드 왕국은 처음부터 타협을 통해 옛 러시아 영토에서 분리된 국가였습니다. 독일 오스트리아로부터 폴란드를 빼앗아 소위 "그렌츠마르크"에 대한 자유 통치를 보장하려 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령 폴란드와의 통일은 일찍이 거부되었습니다. 독일은 추가적인 식민지화를 목표로 소위 "국경지대"를 합병하기까지 했지만, 루덴도르프 독재 정권이 무너진 후 반환되었으며, 폴란드인들은 독일의 의도를 영원히 의심하게 되었습니다. 독일의 원래 야망은 아우구스트 4세의 불안정한 통치와 프로이센 방식으로 훈련한 전문성을 지닌 "폴란드 국방군" 등 몇 가지만 남아있을 뿐입니다.

모든 역경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는 살아남아 상대적으로 번영을 누리고 있습니다. 과거 러시아 제국에서 가장 산업화된 지역이었던 폴란드는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의 투자로 폴란드 도시에 일자리와 성장을 가져왔으며, 미텔오이로파 회원국으로서 이웃 국가들과의 경제 협력으로 큰 혜택을 누리고 있습니다. 폴란드 국왕 아우구스트 4세의 온건한 자유주의 정책과 폴란드 헌법을 존중하려는 의지는 수년 동안 어느 정도 지지를 받았지만, 이면에는 심각한 문제가 깊어지고 있습니다.

폴란드는 대부분 동유럽 국가와 마찬가지로 여전히 농업 국가입니다. 성장하는 도시와 독일과 폴란드 귀족이 토지 대부분을 소유하고 있는 시골 사이의 격차는 수년 동안 더욱 커졌고, 변화를 갈망하는 땅 없는 실업자 빈곤층이 대량으로 형성되었습니다. 이러한 사회적 문제는 정치 진영 양측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치적 급진화의 원인이 되고 있습니다. 전통적으로 강력했던 폴란드 좌파는 잘 조직되어 있으며, 민주화, 토지 개혁, 심지어 공화국 수립까지 요구하며 자유주의-농민주의 정당과 동맹을 맺었습니다. 사회주의 조직은 반독일 및 반유대주의 정서를 지지 기반으로 삼는 극우 단체와 지속적으로 충돌하고 있습니다. 세 개의 반군주주의 세력 모두 오직 한 가지, 왕국의 붕괴와 호엔촐레른 군주의 퇴진에는 동의하고 있습니다... 비록 그것이 많은 피를 흘려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더라도 말입니다.
두 카이저의 체스판

폴란드는 빌헬름 2세의 아들이 왕임에도 불구하고, 언뜻 보기에 독일의 영향을 덜 받는 것처럼 보입니다. 서로 간의 애정이랄 것이 거의 없기 때문입니다. 예술과 문화를 사랑하는 아우구스트 4세는 독일, 오스트리아, 폴란드 산업계 거물과 군 고위직으로 이루어진 추밀원에 통치의 대부분을 떠넘겼습니다. 왕의 환심을 사기 위해 온갖 정치적 암투가 벌어지는 곳이 바로 이 의회입니다. 현재 가장 영향력 있는 사람은 노련한 군인이자 독일의 군사적 이익을 대변하는 볼프강 폰 크리스입니다.

폰 크리스는 폴란드군의 감독관이자 훈련 담당인 독일 군사 사절단을 이끌고 있습니다. 이 일은 폴란드군에 그의 비전인 현대적이고 기계화된 정예 부대를 천천히 도입시킨 하인츠 구데리안의 거대한 프로젝트입니다. 또한 독일은 동방주들과의 연결을 확보한 국영 철도 회사인 KKWP를 소유하고 있습니다.

폴란드인들은 독일의 군사적 손아귀에서 벗어나기 위해 오스트리아의 지원에 의존해왔습니다. 폴란드 상류층과 오스트리아 귀족들의 사교계, 폴란드 산업에 대한 체코의 투자, 그리고 대다수의 자유주의 정치인들의 친오스트리아 연설들까지, 도나우 국가들은 폴란드 전반에 눈에 띄는 영향력을 갖고 있습니다. 오스트리아가 폴란드 내의 입지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은 비밀도 아니며, 많은 폴란드인들은 이것이 압도적인 독일의 영향력에서 빠져나오게 할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베를린은 그들과 동방주를 잇는 폴란드의 전략적 위치가 국가 안보 문제와 직결되기 때문에, 항상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습니다.
공화주의 운동

소위 말하는 폴란드 공화주의 운동은 법과 자유 수호를 위한 인민연합으로 알려진 "첸트롤레프" 블록에 속한 좌파와 중도 성향의 자유주의 급진파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첸트롤레프, 즉 중도좌파 정당인 폴란드 인민당과 폴란드 사회당은 과거에 공식적으로 군주제를 인정하고 정부를 구성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 대부분이 독일인 왕이 퇴위되고 새로운 진보적 공화국의 선언을 보고 싶어하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입니다. 이들이 폴란드와 갈리치아 전역에서 지지를 받는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반군주주의 파벌이며, 공화주의가 폴란드 통합의 길이라고 생각하는 갈리치아의 폴란드인들에게 더 높은 지지를 이끌어내고 있습니다.

우리에게 다행인 것은 공화주의 운동이 우리 내부 문제 가운데 가장 평화로운 운동이고, 지지자들이 소극적인 저항과 평화적인 시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는 점입니다. 또한 그들은 국왕이 입헌주의와 민주주의의 길을 걷는 한 현재의 체제에 순응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그들에게 가혹한 조치를 취한다면, 그들 중 많은 사람들이 더 급진적이고 극단적인 파벌로 나아갈 가능성이 클 것입니다.
1932년 혁명위원회

폴란드 사회당은 1905년 폴란드 해방 투쟁의 선봉대였으며, 이후 벨트크리크 동안 피우수트스키의 동료들을 그들의 혁명적 준군사조직으로 통합시켰습니다. 당에 여전히 급진파와 혁명파가 남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당 지도부는 온건적인 노선을 밟아왔으며 세임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비공식적인 곳에서는 많은 생디칼리슴 노조와 좌파 준군사조직을 성장시켰습니다.

혁명운동은 의심의 여지 없이 카지미에시 작셰프스키의 "혁명위원회" 산하 폴란드 생디칼리스트들과 아나키스트들이 탈출한 파리에서 지휘되고 있습니다. 코뮌의 지원으로 그들의 더러운 촉수가 폴란드를 부패시키고 프롤레타리아를 혁명의 길로 이끌고 있습니다. 이러한 생디칼리슴 신봉자들을 교화시키기 위해 할 수 있는 건 거의 없습니다. 그러나 경제적, 사회적 개혁은 폴란드 노동자 계층을 향한 그들의 선동을 무효화할 수 있을 겁니다.
1936년 국민위원회

협상국이 벨트크리크 당시 폴란드의 괴뢰정부로 세운 폴란드 국민위원회는 오랜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도 폴란드에 평화를 가져다주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 단체의 지도자인 로만 드모프스키는 모스크바로 망명했지만 여전히 폴란드 우파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드모프스키가 이끄는 국민민주당이 정치적 변방으로 밀려난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드모프스키에 대한 충성심을 여전히 느끼고 있다는 것은 공공연한 비밀입니다.

극우파는 크게 두 파벌로 나눌 수 있는데, 마지못해 협력하긴 하지만 폴란드의 완전한 독립을 위해서라면 뒤통수를 치는 것도 서슴지 않는 보수적 민족주의자들과 국민급진기지와 같은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입니다.

이 국수주의자들은 코드레아누 사빈코프 같은 동쪽의 야만인들로부터 전술을 배워 우리 정부와 정적들에 대한 수십 건의 공격을 자행했습니다. 그들은 격렬한 반독일, 반유대주의, 반체체주의자이며 결코 구제받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정책이 사회주의자들과 자유주의자들의 변덕에 폴란드의 가톨릭적이고 보수적인 성격을 희생시키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한다면 온건한 민족주의자들은 만족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정도면 충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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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폴란드 공산노동자당
8% 노동조합연맹
5% 중도좌파 - 폴란드 사회당 좌파
17% 중도좌파 - 폴란드 사회당
16% 중도좌파 - 폴란드 인민당
23% 정당 간 정치단체
13% 국민통합기독교연합
5% 정당 간 정치단체-국가지위당
0% 추밀원
7% 국민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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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23 패치 이후 리워크가 이루어지면서 독립국에서 독일의 동방주가 되었고, 처음부터 빌헬름 2세의 4남 아우구스트 4세가 왕으로 즉위해 있다. 다만 아우구스트 4세는 소위 "아버지에게 가장 미움받는 아들"로 정치적으로는 전제정을 지향하는 주제에 성품은 유약하고, 보석과 미술품에만 관심을 쏟고 있다.[43] 폴란드 정계는 대안부재의 심정 때문에 독일인 왕을 용인하고 있을 뿐이며 한편으로는 친서방 생디칼리스트들, 친러 민족주의자들이 왕정을 전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고, 오스트리아는 공화주의자들을 지원하며 폴란드를 자신의 세력권에 합류시키려 하고 있다.

중점과 디시전, 이벤트로 왕정을 강화하며 아우구스트 4세가 똑바로 국정을 펴게 할 수도 있지만, 공화주의자들이 정권을 탈취하여 공화국을 수립할 수도 있다. 또한 민족주의자들이나 생디칼리스트들이 반란을 일으켜 정권을 잡을 수도 있다. 만약 독일의 힘을 빌어 쿠데타를 진압하게 되면 괴뢰국 등급이 동방주에서 점령된 괴뢰국으로 변한다. 오스트리아의 지원을 받고 민주공화국이 되어 도나우-아드리아 연맹으로 넘어가면 갈리치아 전체를 돌려받을 수 있다. 라팍에 남으면서 어느 정도까지만 친오스트리아 행보를 타다가 중간에 손절하는 루트도 있는데 이러면 마워폴스카만 돌려 받는다. 전면적으로 친오스트리아 공화국이 되면 좌우익 각 양쪽 반독 반란 일으키는 조건이 빡빡해지기 때문에 2차대전 중에 독일, 오스트리아 양쪽 모두 통수치는 루트를 타겠다면 크라쿠프만 받는 선까지만 정치개혁 초점을 타고 점령된 괴뢰국 이벤트를 본 이후 2차대전 중에 반란을 일으키는 게 좋다.

리워크 이전에는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왕국으로 재건할 수 있었지만 리워크 이후에는 생디칼리슴 루트에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재건할 수 있게 되었다. 폴리투 또한 쳐내겠다고 공언했던 개발진이 자신들의 말을 뒤집은 셈인데, 아마도 유저들의 반대에 겹쳐 개발진 내에서도 이에 대한 갑론을박이 많아 결국 남겨두기로 한 듯 하다.[44]

친독 루트는 유약한 한량 외국인 왕 아우구스트가 정신차리고 폴란드인들과 아버지 빌헬름 양쪽 모두에게 인정받는 군주로 거듭난다는 내러티브상 재미는 있지만 게임플레이는 단순, 지루하고 확장 옵션도 거의 없다. 기껏해봐야 자주 터지는 사건도 아닌 우크라이나, 백루테니아가 라팍 세력권에서 이탈하려고 들면 정벌전에 끼여서 코딱지만하고 아무런 가치도 없는 우크라이나, 백루테니아 쪽 영토 말고는 확장 옵션 자체가 없다. 친오스트리아 계열로 갈아타면 갈리치아는 돌려받을 수 있지만 포즈난, 서프로이센 방면 영토 확장은 여전히 막힌건 마찬가지. 결국 현실의 폴란드 제2공화국만한 덩치로 독자적으로 뭔가 해보고 싶으면 좌우익 양쪽 중 하나 반독 민족봉기 루트가 강제된다.

폴란드 위치 자체가 기가 막히게 라팍국가들에게 사방으로 둘러싸여 있다 보니 생디나 극우 민족주의 양쪽 중 하나를 골라 2차대전 중 독일 패권을 엎어버리는 루트를 골랐으면 준비가 좀 필요하다. 특히 극우 국민대중주의 루트는 성공적으로 확장 루트를 고르려면 제한된 시간 내에 독일령 포즈난을 먹어야 하기 때문에 더욱 어려워진다. 팁으로 전쟁 터지기 전에 미리 수도 바르샤바와 우치 같이 강을 낀 핵심 승점 지역들에 요새를 미리 지어주자. 전쟁 터지면 도대체 폴란드가 왜 잘 나갈 때는 중동부 유럽 패권국가였지만 국운이 한번 빠지면 사방으로 처맞으며 약해지게 한 더럽게 방어하기 어려운 지형을 절실하게 깨닫게 된다. 경기갑 사단을 몇개 뽑아 윙드 후사르의 후예들을 보는 기분으로 예비대를 운용하며 어찌 잘 막아보자.

팁이 있다면, 특히 사회주의 반란 루트를 골랐다면 독일과 라팍이 본격적으로 군대 돌리기 이전 최대한 빨리 그단스크를 먹고 가능한 한 유지하자. 발트해와 북해가 이론적으론 세계관과 게임 내적으로 세계 1위 해군인 독일 해군의 앞마당 호수여야 하는데 이 게임 특유의 부실한 해군 AI 때문에 실제론 제해권을 완전하게 유지 못하고 영불을 비롯한 세계 각지의 인터 동맹군 사단들이 찔끔찔끔이라도 지원와주면 사방이 적이라 당장 전선유지할 사단 하나 하나가 아쉬운 반독 폴란드 입장에선 소중한 도움이 된다.

반대로 우익 민족주의 봉기 루트를 골랐다면 독일 쪽은 미션 깨기 위한 포즈난 확보 정도로 만족하고 일단 병력을 동쪽으로 돌려 국력은 약하지만 지형이랑 위치 때문에 라팍이 져도 의외로 늦게 이탈하는 백루테니아를 러시아군이랑 같이 조지자. 일단 육로로 러시아 쪽과 연결만 되면 밀려도 회복할 수 있다. 어쨋든 봉기 터지면 처음엔 2차대전 중이라 독일군 주력이 전부 서부전선, 동부전선으로 가 있어서 컨트롤만 잘하면 일사천리로 한방에 베를린까지 뚫을수 있을거 같지만 어지간하면 AI가 바로 군대 돌려서 진압하러 오고, 안그래도 사방에 포위당해있고 자연방어선도 없는 폴란드는 늘어진 전선을 도저히 감당하지 못한다. 어지간하면 봉기 터지면서 동시에 베를린 따서 2차대전 끝내겠다는 유혹은 참고 서방 인터내셔널이나 동방의 러시아군이 올 때까지 현실의 바르샤바 봉기 같은 고통스러운 방어전을 각오하는 게 좋다.

힘겹게 반독 봉기를 어찌 성공적으로 마무리하고 2차대전에서 승리하면 보상으로 좌우익 루트 양쪽 모두 확장 루트가 몇가지 있다. 국민대중주의 극우 민족주의 루트는 원래 본인들의 사상적 대부로서 '인종적 순수함'을 유지하기 위해 최대한 소수민족이 안생기게 작은 국경을 주장한 로만 드모프스키의 사상을 이상하게 반대로 뒤집은 범슬라브주의 팽창 루트가 있는 반면, 좌익의 경우 실제로 현실에서 해당 이론을 주장했던 역사학자이자 게임 내 폴란드 좌익의 지도자 카지미에시 작셰프스키의 좌파 범슬라브주의 연방을 만들거나[45], 아님 슬라브주의 대신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등과 연합하는 중부유럽연합을 만들 수도 있다.

비아위스토크의 경우 리투아니아에서 국민대중주의 쿠데타가 발발하면 폴란드로 넘어온다.

여담으로 라이히스팍트 루트에서도 독립이 가능하다. 조건은 아우구스트 4세의 아들 알렉산더가 귀천상혼을 하지 않아야 하며, 2차대전에서 독일이 항복해야 한다. # 아니면 전쟁이 끝난 뒤 독일이 독립시켜 줄 수도 있다. 또한 오스트리아가 폴란드를 괴뢰화시키면 카를 알브레히트를 왕으로 앉힐 수 있다고 한다.


[1] 독일어로 세계대전을 의미한다. welt=세계, krieg=전쟁. [2] 알 안달루스 복원이니, 그란 콜롬비아 복원이니, 바로 그 비잔티움 복원이니, 신성 로마 제국 복원이니... [3] 개발진들의 표현에 따르면 '리덕스스러운' [4] 실제로 공식 개발진 디스코드 채널의 공략에 비잔티움을 검색해보면 " EU4나 하세요"라고 봇이 친절하게 말해준다. [5] 세르비아의 경우 코소보 지역을 알바니아에 넘겨줄지와 몬테네그로 독립 여부를 결정하게 되고, 그리스의 경우 할키디키의 병합 여부를 결정하게 된다. 루마니아는 땅을 뜯지는 못하지만 일부 지역을 비무장화시키는 게 가능해진다. [6] 당연하게도 이전에 집권했던 세력이 재집권하는 경우는 없다. [7] 참전을 안한 국가의 경우 항복시키지 않아도 된다. 그러니 이기기 힘들 것 같다면 설정해둔 채로 진행하자. [8] 팬덤에서 통칭은 즈베노슬라비아(Zvenoslavia) [9] 실제 역사에서의 왕호는 알렉산다르 1세였다. 카이저라이히 세계관에서는 유고슬라비아가 성립되지 못한 상태에서 알렉산다르가 왕위에 올랐기에 이렇게 된 듯 하다. [10] 국민대중주의 지지도에 따라 변동. 게임 시작 시점에서 국민대중주의의 지지도는 11%이다. [11] 섭정의 의견을 우선할지 왕의 의견을 우선할지 선택할 수 있는데 3번 다 왕의 의견을 우선하면 사실 물러날 생각이 없었던 섭정단이 왕을 가택연금시키며 실패한다. [12] 설명이 없는 건 아니다. 분명 콘스피라치야 관련 상호작용 패널마다 자꾸 꿀 빨다간 이후 벌어질 사건에서 모종의 댓가를 치르게 된다는 경고는 한다. 게임오버 수준의 과격한 패널티는 얘기가 없어서 문제지. [13] 비슷하게 불가리아에도 국가보안법 유지를 위해 군인연맹을 강화하다 보면 오히려 군인연맹이 정부를 뒤집는다. 다만 불가리아는 군인연맹을 억제하는 중점들이 있다. [14] 후안 카를로스 1세의 아버지. 실제 역사에서는 왕이 된 적이 없으며 프랑코의 독재에 반대하며 계승권을 주장했다. 이후 프랑코가 죽고 왕위에 오른 아들이 스페인을 민주화시키자 스스로 계승권을 포기했다. [15] 이탈리아 내전이 세계대전으로 비화되는 걸 막기 위한 조치다. [16] 이탈리아 공화국은 처음에는 오스트리아 소속이지만 검은 월요일이 터지자 오스트리아가 이탈리아에서 손을 뗐다는 형식을 들어 세력에서 탈퇴한다. [17] 공화국이 해체되어 베네치아, 롬바르디아로 분리되거나 연방이 될 경우 다른 선택지도 생긴다. [18] 피렌체 대주교 엘리아 달라 코스타 추기경. 반파시즘적인 태도를 보였고 탄압받는 유대인들을 숨기도록 지시해 수많은 생명을 구했다.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가경자로 선포 [19] 실 역사의 요한 23세와는 다르다. 의 주교였던 아실 리에나르 추기경으로 노동 사제 운동에도 참여할 정도로 진보적인 성향이었다. [20] 밀라노 대주교 알프레도 일데폰소 슈스터 추기경. 무솔리니와 파시즘 정권에 대한 밀월관계로 악명이 높았다.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시복. [21] 잠시 스페인 국왕으로 즉위한 아마데오 1세의 손자로 실제 역사에서는 2차 대전 중 영국군에게 포로가 되어 1942년 사망한다. 동생 아이모네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왕 토미슬라브 2세로 추대되기도 했다. [22] 이후 경제 중점으로 민공 2개와 군공 4개, 조선소 4개를 더 받는다. 경제 중점이 더 있긴 한데 나머지는 피에몬테를 수복하고 나서야 열린다. [23] 정복을 하려면 협상국과도 전쟁을 해야 하기 때문에 필수는 아니다. [24] 과다한 탄수화물 섭치로 인민을 게으르게 만든다나 뭐라나... 카라 게임 내 유머성 컨텐츠가 그렇듯이 실제 파스타 금지령까진 못 갔지만 그랬으면 진작 일찍 정권 뒤집어졌다 비슷한 논리로 추진한 쌀 위원회 설립이나 육식 권장 공익 캠페인 등 어느 정도는 현실에 기반한 내용이긴 하다. [25] 마누엘 2세는 후계자가 없었기 때문에 마누엘 2세 사후 브라간사사셰코부르구고다 가문은 단절되고 가문명도 다시 브라간사 가문으로 돌아오게 된다. [26] 2024년 9월 7일 [27] 현지 문화와 정치를 존중하고 리투아니아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고 한다. 민다우가스 2세가 즉위식 연설을 리투아니아어로 하자 모두가 놀랐다고. [28] 조약을 통해 물건을 수출할 수 있는 통로가 독일의 입김이 강한 몇몇 항구로 제한되었고 독일을 제외한 다른 국가에 대한 수출이 철저히 검열받았다. [29] 리투아니아의 인구가 412만인데 저 2개의 주에서 인구가 112만이 나온다. [30] 총리 비스트라스가 사임과 불출마를 선언한다. [31] 리투아니아-폴란드 위원회가 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과 리투아니아 기독민주당 사이에서 캐스팅보터 역할을 수행하며 이들이 손을 잡은 세력이 집권한다. 손을 잡지 않고 독자적으로 행동할 경우 리투아니아 국민주의 연합이 집권한다. [32] 실제 역사에서 폴란드 제2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었던 가브리엘 나루토비치의 형. 실제 역사에서도 리투아니아 국적을 선택했다. [33] 중점을 통해 이 패널티를 없애는 게 가능하지만 대신 육군 보너스가 상당 부분 사라진다. [34] 폴란드의 의회인 세임(Sejm)에서 따 온 이름이다. [35] 실제 역사에서는 언어학자로 벨라루스어의 표기 중 하나인 타라슈케비차를 만들었다. [36] 백루테니아 총독부가 아니라 민스크 총독부인 이유는 벨라루스 민족 자체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에 지역명으로 부르는 것이다. [37] 핀란드가 노르드 이사회에 가입하면 에스토니아 역시 노르드 이사회 가입 디시전이 활성화되면서 가입할 수 있게 된다. [38] 이 왕호는 실제 역사에서 프리드리히의 왕호 중 하나로 고려되었다. [39] 더블린은 '발려 아허 클리어'로, 벨파스트는 '볠 폐르시터'로 바뀐다. [A] 시작 직후 활성화 [41] 독일이 개입할 수도 있기 때문에 설령 독립하더라도 다시금 플란데런-왈로니로 돌아가는 경우도 있다. [42] 저지대 조약기구 창설 시 네덜란드가 독일의 괴뢰국이었다면 저지대 조약기구 가입과 동시에 다시 독립한다. [43] 거기다 실제 역사에서는 국가사회주의에 매료되어 가입은 물론, 돌격대까지 가입해 수권법 통과 이전까진 왕당파에게 어필할 필요가 있었던 히틀러에게 이리저리 잘 써먹히다가 나치가 절대권력을 장악하자마자 없는 사람 취급당하고도 계속 나치 딸랑이 노릇이나 하다가 결국 전후 미군에게 잡혀 옥살이까지 했던 전형적인 ' 파시즘의 쓸모있는 바보'였다. [44] 실제로도 폴리투 부활은 1920년대 피우수트스키파의 염원이었던만큼 다른 확장 루트와는 달리 무조건 쳐낼 수 있는 루트가 아니긴 하다. [45] 이게 바로 윗문단에서 언급된 다시 추가한 폴리투이다. 이름은 어쨋든 그냥 Commonwealth 니깐 어쨋든 엄밀히 따지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은 아니긴 한데, 막상 디시전으로 형성하면 리투아니아도 흡수할 수 있어서 폴리투 연방이 또 아닌 것도 아니다(...). 좌파적 범슬라브주의에 따지고 보면 슬라브족도 아닌 리투아니아가 딸려가는 이유는 현실의 역사학자, 좌익 운동가였던 작셰프스키 본인이 폴란드와 리투아니아는 역사적으로 하도 가까우니깐 리투아니아는 원래 그냥 슬라브족이었다고 믿어버린 걸 반영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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