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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dddddd,#000000><colcolor=#000000,#dddddd> 키몬 게오르기에프 Кимон Георгиев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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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명 |
키몬 게오르기에프 스토야노프 Кимон Георгиев Стоянов |
출생 | 1882년 8월 11일 |
오스만 제국 루멜리아 파자르지크 | |
사망 | 1969년 9월 28일 (향년 87세) |
불가리아 인민공화국 바르나 | |
국적 |
[[불가리아| ]][[틀:국기| ]][[틀:국기| ]] |
가족 | 베스카 로데바(아내) |
별명 | 옛 쿠데타 주동자[1] |
종교 | 정교회 |
직업 | 정치인, 군인 |
소속 | 불가리아 조국전선 |
서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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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불가리아의 제24대 총리. 무려 3번의 쿠데타를 일으킨 것으로 유명하다.2. 생애
그는 1902년부터 군 생활을 시작해서 발칸 전쟁과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활약했다. 전쟁이 끝난 후 불가리아에선 농본사회주의 정당인 불가리아 농민연합이 집권 중이었는데 불가리아 공산당이 전후 세력을 늘려나가자 농민연합은 준군사조직인 주황위대를 동원하여 공산당을 억압하고 권위주의 통치를 이어갔다.또한 군 인사 문제에서 갈등을 빚어 군부에서 불만 세력이 상당했다. 상당수 반대파가 예편되는데 게오르기에프 역시 예편되고 이후 야당 정치인으로 활동한다. 반좌파, 반권위주의 연합인 인민동맹이 설립되었고 게오르기에프 역시 가입하였으나 1923년 여당인 농민연합은 부정선거를 일으켰다. 이에 인민동맹과 헌법연합[2]과 군부는 왕실의 승인하에 1923년 쿠데타를 일으켜 농민 전국연합 정부를 뒤엎고 총리였던 알렉산더르 스탐볼리스키를 살해한다. 이 쿠데타에서 게오르기에프는 공로를 인정받아 내무장관에 임명된다.
이후 헌법연합과 인민동맹은 합당하여 민주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불가라아의 유일한 합법정당이 된다. 민주동맹은 인민동맹계(민족주의), 민주당계(기독교민주주의), 통합인민진보당계(보수주의)의 연립정권으로 존속한다. 그러나 게오르기에프는 강성 민족주의자로 대외정책과 마케도니아 문제를 두고 내각과 끊임없는 갈등을 빚다 결국 탈당하고 극우 정당 즈베노를 창당한다.[3]
3. 총리 재임기
대공황 시기 하나의 정당에 세 개의 정파가 따로 노는 모순적 일당제 체제는 결국 경제위기 속에 빠르게 붕괴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게오르기에프는 30년대에 유럽에 불어닥친 권위주의+ 파시즘 열풍을 등에 업고 1934년 쿠데타를 성공시켜 총리에 오르게 된다. 그는 외무장관과 법무장관을 겸임했으면 일부 기간엔 국방장관까지 겸직했다. 그는 주요 기호품에 과세를 강화하고 전매제를 실시했다. 또한 부실은행을 통폐합시키고 부채를 동결시키는 등 급진적인 처방을 이어나갔다. 또한 마케도니아 독립운동 세력을 불법화하고 권위주의 통치를 강화했다. 그러던 와중 보리스 3세가 친위쿠데타를 일으키며 왕당파 정권이 들어서게 된다.4. 조국전선
게오르기에프와 즈베노는 완전히 몰락하여 왕정 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는 신세가 된다. 하지만 게오르기에프는 자신들이 불법화한 농민연합과 공산당과 물밑교섭을 하며 이들과 친해지게 된다. 게오르기에프는 터르노보 헌법의 복구를 요구하며 입헌군주정으로 회귀를 주장했으나 왕정으로부터 무시당한다. 그는 대외 강경파였으나 세계대전에 참전하는 것은 극구반대했다. 그러나 중립론이 씨알도 안 먹히자 그는 공산당에 합류해 불가리아 조국전선에 가입한다.보리스 3세가 사망하자 야당의원 10인과 함께 터르노보 헌법의 복구와 섭정 선임을 주장했으나 이번에도 왕당파는 이를 무시했다. 1943년 추축국의 전황이 불리해지며 이번에는 조국전선 내부에서 발칸연방 주장(민족주의)과 소련과 연대(공산주의)간 의견충돌이 심해 졌다.[4] 그러나 결국 양측의 타협으로 유고슬라비아와 마케도니아 및 국경문제에 대해 확실히 명기하지 않은 공한만을 주고받으며 사태는 일단락된다.
그리고 1944년. 왕정이 추축국 탈퇴 및 중립화의 가능성이 없자 쿠데타를 일으켜서 왕정을 뒤엎고 조국전선 내각을 수립하며 총리에 임명된다. 이로써 3번째 쿠데타인 것이다. 쿠데타가 성공하자 즉각 소련에 공격 중단을 요청하였다. 한편 국내에선 다시 활동을 재개한 즈베노와 공산당 간의 유혈충돌이 발생했고 내각은 겉으로만 폭력을 반대할 뿐 실질적 대처는 없었다. 내각은 소련 인사와 공산당 그리고 반대편엔 민족주의, 보수주의, 농본주의 세력이 어지럽게 섞여 있었고 게오르기에프는 갈등에도 불구하고 다원적 구조를 지닌 조국전선 체제를 유지하기로 결의했다.
이후 미국과 영국은 자유선거를 주장했으나 소련과 불가리아 공산당은 반대했고 결국 자유선거는 없었다. 게오르기에프 내각은 기존보다 사회주의 세력이 다수 임명되고 반공 각료의 해임되도록 개편되었고 2차 내각이 들어섰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게오르기에프를 신임했으나 1946년부터 왕당파 장교와 중도파 장교에 대한 숙청, 야당 지도자에 대한 숙청이 자행되었다. 그 후 불가리아의 전쟁 책임을 덜기 위해 노력했으나 효과는 미미했다.
5. 말년
과도정부가 역할을 다하자 왕국은 인민공화국이 되었고, 게오르기에프도 공직에서 사임했다. 스탈린은 불가리아의 인민민주주의의 종식을 명령하면서 어느 정도의 비중을 지니던 야당들은 모조리 관제화되거나 해산되었다. 그나마 공산정권도 게오르기에프의 공로를 인정하였는지 그에게 사회주의노력영웅 칭호를 2번 수여했다.이후 포도원을 가꾸며 살아가다 1969년 9월 28일 급성 뇌졸중으로 사망한다. 그의 장례식엔 토도르 지프코프 총리가 참석하였으며, 유해는 소피아 국립묘지에 안장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