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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르나 Варн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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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리아어:Варна
1. 개요
바르나는 불가리아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로 흑해 연안의 해변 휴양지이기도 하며, 불가리아의 항구 도시이기도 하다.2011년 통계 기준 도시 거주인구 중 불가리아인은 284,738명 (93.8%), 터키인은 10,028명 (3.6%), 로마니는 3,162명(1.0%)이라고 한다.
2. 역사
선사 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던 곳인데, 기원전 4550년경에서 기원전 4100년경까지 바르나 문화[1]가 번성했다. 청동기 시대에 트라키아인이 거주하던 지역이었으며 기원전 9~8세기 무렵부터 고대 그리스의 폴리스들과 교역이 활발하였다. 그리스인들은 오늘날의 바르나에 해당하는 지역을 오데소스(Ὀδυσσοῦ)라고 불렀는데, 이는 오늘날 우크라이나의 해안 도시 오데사의 어원이기도 하다.[2] 이후 마케도니아 제국의 영토에서 고대 로마의 영토로 편입되었으며, 로마 제국 시대 이후 불가르족이 침공해오면서 불가리아 제1제국의 도시가 되었다.1444년에는 오스만 술탄국과 유럽 십자군간의 바르나 전투가 일어났고 이후 오스만 제국의 영토로 편입되었다. 16~ 17세기 사이에 바르나는 오스만 제국의 주요 항구 중 하나로 기능하였으며, 이후 오스만 제국과 러시아 제국이 바르나를 두고 여러 차례 공방전을 벌였다. 10만 명의 크림 타타르 난민을 수용하기도 했다. 이후 체르케스 난민들도 수용했으나 약 8만 명의 체르케스인들이 주변 환경에 적응하지 못한 데다 도시 외곽에 위치한 수용소에 정착해 질병과 기아에 시달리다 비참하게 죽어갔다.[3] 어찌나 상황이 참혹했던지 군에서 체르케스인들의 시신을 제대로 매장하지 못해 죄수들을 모집해야 했을 정도다.
19세기 말 불가리아가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바르나는 불가리아 왕국의 주요 항구도시로 기능하게 되었다. 1949년 12월 20일부터 1956년 10월 20일에는 벌코 체르벤코프의 우상화 작업의 일환으로 도시 이름이 잠시 스탈린으로 개명되기도 했다가 토도르 지프코프 집권 이후 원래 이름으로 환원되었다.
3. 관광
냉전 시대 바르나는 바르샤바 조약기구 국가 국민들에게 인기 있는 해변 휴양지였다. 소련 해체 이후에는 독일인 관광객들이 자주 찾는 장소 중 하나이다. 바르나 시 북부 해변은 따로 황금 모래(Златни пясъци)라고 해서 해변 리조트들이 들어서 있다. 해변 관광지 외에도 고대 고고학 유물이 전시된 박물관 및 중세 수도원 유적지도 인기 목적지 중 하나이다.시 외곽에는 바르나 전투 당시 전사한 폴란드 국왕 브와디스와프 3세의 영묘당[4]과 바르나 전투를 설명하는 박물관이 있다. 서쪽으로 좀 더 가면 포비티 카마니(Побити камъни)라는 이름의 사막이 있다.
[1]
이
문화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금을 제련해 가공한 것으로 유명하다.
[2]
흑해를 수복한
예카테리나 2세는
러시아 제국이
고대 그리스 및
동로마 제국을 계승했다는
프로파간다 차원에서
우크라이나 남부에 새로 건설한 해안 도시들의 이름을
그리스어 지명에서 가져와 붙였다.
헤르손도 케르소네소스(Χερσόνησος)에서 유래한 지명이나 정작 케르소네소스는 현재
크림반도의
세바스토폴에 있었다.
[3]
체르케스인들이 굶주림을 버티지 못해 빵을 구걸할 때 오스만군은 질병에 감염될까 두려워 오히려 그들을 쫓아냈다.
[4]
다만 브와디스와프 3세의 유해는 찾지 못했기 때문에 빈 껍데기만 남아있는 가묘에 지나지 않는다.
폴란드
크라쿠프의
바벨 대성당에도 브와디스와프 3세의 세노타프가 있지만 역시 장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