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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4 16:55:57

빌헬름 프란츠 폰 합스부르크

<colbgcolor=#808080> Wilhelm Franz von Österreich-Teschen
Василь Вишиваний
파일:빌헬름 프란츠 대공.jpg
<colcolor=#ffffff> 이름 빌헬름 프란츠 요제프 카를
Wilhelm Franz Joseph Karl

빌헬름 프란츠 폰 합스부르크로트링겐[1]
Wilhelm Franz von Habsburg-Lothringen
출생 1895년 2월 10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이스트리아 변경백국 로신(Lošinj) 섬
사망 1948년 8월 18일 (향년 53세)
소련 우크라이나 SSR 키예프
아버지 카를 슈테판 대공[2]
어머니 토스카나의 마리아 테레사 공녀[3]
형제 엘레오노라
레나타
카를 알브레히트
메흐틸디스
레오 카를
최종 계급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소위
우크라이나 인민군 대령

1. 개요2. 생애
2.1. 제국 해체 전2.2. 제국 해체 후2.3. 제2차 세계 대전2.4. 전후
3. 참고문헌4. 대중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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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황족이자 우크라이나의 독립운동가. 우크라이나식 이명으로 '자수옷 입은 바실'이라는 뜻의 바실 비시바니(Василь Вишиваний)를 사용하였다.

스페인 국왕 알폰소 13세[4], 바이에른 왕국의 마지막 왕세자 루프레히트와 사촌간이다.[5]

현대 우크라이나에서는 국민 정체성 확립에 영향을 미친 인물 중 한 명이자 독립 영웅 중 한 명으로 존경받고 있다. 2005년경 키이우에 그의 흉상이 세워졌을 정도다.

2. 생애

2.1. 제국 해체 전

1895년 오스트리아의 영토였던 로신 섬에서 합스부르크테셴 가문의 일원 카를 슈테판 대공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카를 슈테판 대공은 자녀들에게 폴란드어를 가르치는 등 폴란드인의 정체성을 심어주려 하였는데, 그는 아버지의 가르침을 따랐던 큰형 카를 알브레히트와 철저히 오스트리아인으로 살았던 작은형 레오 카를과는 달리 우크라이나 문화에 심취하였다. 특히 1912년 동부 갈리치아로 비밀 여행을 다녀온 뒤부터 그는 더더욱 우크라이나에 매료되었고, 우크라이나인의 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다. 이는 그에게 '독립된 우크라이나의 국왕'이라는 야망을 가지게 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 무렵에는 우크라이나 시치 소총병대의 소위로 복무하였는데, 이 때 병사들에게 우크라이나 전통복을 선물받았고 합스부르크 가문이 그에게 부여한 우크라이나식 이름인 바실을 합쳐 이명 '자수옷 입은 바실'을 사용하게 되었다. 빌헬름 프란츠는 이 시기 미하일로 흐루셰우스키, 이반 프란코, 타라스 셰우첸코 등의 저술을 읽었다.

1916년에는 전선에서 복귀하여 우크라이나인 의원들을 대변하였다.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등장하자 빌헬름 프란츠는 카를 1세의 명령을 받아 휘하 부대를 이끌고 우크라이나 남부로 향했다. 거기서 그는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유화적인 통치를 펼쳐 우크라이나인들에게 신망을 얻었고,[6] 크냐지 바실(Княз Василь)이라는 별명까지 얻었다. 물론 당연하게도 동맹국은 이런 그의 행보를 못마땅해했다.

1918년 독일 제국 괴뢰국 우크라이나국이 건국되자 독일은 빌헬름 프란츠가 자신들이 앉힌 헤트만 파울로 스코로파즈키를 축출할 것을 우려하였고, 실제로도 빌헬름 프란츠와 그의 부대는 헤트만과 사이가 나빴다. 그래서 페트로 볼보찬(Петро́ Фе́дорович Болбоча́н)을 위시한 장교들이 헤트만을 쫓아내고 빌헬름 프란츠를 우크라이나의 국왕으로 세우려는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그는 이 제안에 대해 카를 1세의 자문을 구했고 카를 1세가 반대하여 쿠데타는 무산되었다.

1918년 10월 오스트리아 산하 제후국 부코비나 공국으로 이동한 빌헬름 프란츠는 결핵으로 체르노비츠의 병원에 입원하였다. 이 시기 그는 렘베르크에 그의 우크라이나인 2개 연대가 주둔하게 하였다.

2.2. 제국 해체 후

그가 병원에 있을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해체되었고, 동부 갈리치아에서는 서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으며, 부코비나는 루마니아 왕국에 점령되었다. 르비우로 달아난 빌헬름 프란츠는 폴란드군이 르비우를 점령하자 다시 카르파티아 지역 수도원에 반 년간 숨어 있어야 했다. 이 무렵 우크라이나국이 재수립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에 의해 몰락하였다.

1919년 빌헬름 프란츠는 카르파티아 산맥에서 루마니아군에 체포, 3개월 동안 구금되어 있다가 우크라이나의 청원에 의해 석방되어 우크라이나로 돌아왔다. 그는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정부에 충성을 맹세하고 시치 소총병대의 대령으로 복무했다. 하지만 1920년 시몬 페틀류라 폴란드와 바르샤바 조약을 체결하여 동맹을 맺자 이에 반발하여 사임하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하였다.

오스트리아에서 그는 시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오스트리아의 反합스부르크 법에 의하면 합스부르크 가문은 평민이 되어야 했음에도 이를 거부하였다. 1922년 빈에서 여권을 얻어 여권에 이명을 새긴 그는 스페인으로 떠났는데, 이 때 그는 다시 우크라이나로 떠나기 위해 고종사촌형 알폰소 13세로부터의 재정 지원을 기대하였다. 하지만 기대와는 달리 어떤 지원도 얻지 못했고 1931년 스페인 제2공화국이 수립되자 프랑스로 망명했다. 1933년 아버지 카를 슈테판 대공이 사망하자 빌헬름 프란츠는 아버지의 유산을 상속받은 형제들로부터 지원을 받았다.

파리에서 빌헬름 프란츠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OUN)과 접선하였고,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은 그를 통해 자금원을 얻으려 하였다. 하지만 1934년 사기 사건에 휘말려 도망치듯 오스트리아로 돌아갔고, 궐석재판에서 5년형을 선고받았다.[7]

오스트리아로 돌아온 빌헬름 프란츠는 합스부르크 가문에 동정적이었던 쿠르트 슈슈니크 총리에 의해 마침내 시민권을 받고 본명으로 된 여권을 받을 수 있었다. 1938년에는 나치 독일 안슐루스를 경험하였다.

2.3. 제2차 세계 대전

빌헬름 프란츠는 유럽에서 새로운 대전쟁이 발발한다면 독일이 완전 독립된 우크라이나를 수립해 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있었고, 그래서 나치 독일을 지지하였다.

하지만 그의 기대는 얼마 안 가 무너졌다. 독일이 우크라이나를 독립시킬 의사가 전혀 없음을 깨달았던 데다가 큰형 카를 알브레히트가 나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게슈타포에 의해 체포되어 고문당할 때[8] 그 역시 함께 끌려가 취조를 받았기 때문이었다. 이 일로 격분한 빌헬름 프란츠는 빈의 저항군에 합류하였고, 연합국과 접선하여 反나치 스파이로 활동하였다.

1944년 프랑스의 폴 마스(Paul Maas)와 아는 사이가 되었고, 그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정보를 제공하였다. 이후 OUN과도 재접선하여 마스와 OUN의 연결고리가 되었다.

2.4. 전후

나치 독일이 몰락하고 오스트리아가 해방된 후 빌헬름 프란츠는 독일에게서 압류당한 지비에츠 재산에 대한 보상을 받았고[9], 소규모 회사를 설립하였으며 정치에도 입문해 오스트리아 인민당에 합류했다. 그는 여전히 서방 측의 스파이로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과 서방을 연결하는 일을 수행하였다.

하지만 1947년 3월, 동료였던 로만 노보사드(Роман Новосад), 바실 카초로우스키(Василь Качоровський)와 함께 체포되어 소련으로 압송되었고[10], 지난 행적에 대해 심문받았다. 이 때 그는 우크라이나 독립운동에서 자신의 역할을 최대한 축소하려 하였다. 1948년 5월까지 심문을 받은 그는 8월 12일 피고인도, 증인도, 변호사도 없이 치러진 재판에서 징역 25년을 선고받고 키예프의 MVD 감옥으로 이송되었다.

그러나 그동안 지병이었던 결핵이 악화되었고, 그는 선고 닷새만에 사망하였다. 오스트리아 정부가 그를 찾으려 했지만 소련 정부는 형량 증명서만 보냈으며, 그의 묘지는 아직도 숨겨져 있다.

한편 오스트리아 정부는 1955년 소련에 의해 다시 헌법에 추가된 反합스부르크 법에 의거, 빌헬름 프란츠가 황족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1930년대에 그가 받은 시민권은 불법이라 규정하고 시민권을 재박탈하였다.

1989년 로만 노보사드와 함께 복권되었으며, 소련 붕괴 후 우크라이나 정부가 가지고 있던 그의 사진과 기록들은 2005년 독일에 살고 있던 그의 조카인 레오 슈테판 합스부르크(Leo Stefan Habsburg-Lothringen)[11]에게 전해졌다.

3. 참고문헌

4. 대중매체



[1] 오스트리아 제1공화국 수립 이후 신분제가 폐지됨에 따라, 그리고 반 합스부르크 법에 의거해 법적 이름에는 von을 제외해야 했지만 황족으로서의 권리를 포기하지 않았기에 von이 계속 이름에 붙어 있다. [2] 레오폴트 2세의 증손자이며, 테셴 공작 카를 대공의 손자이다. [3] 토스카나 대공 레오폴도 2세의 친손녀. [4] 알폰소 13세의 모후 마리아 크리스티나가 빌헬름 프란츠의 고모다.(아버지 카를 슈테판 대공의 바로 위 누나) [5] 루프레히트 왕세자의 어머니 마리아 테레지아 역시 빌헬름 프란츠의 고모다.(아버지 카를 슈테판 대공의 이부누나, 할머니 엘리자베트 프란치스카가 빌헬름 프란츠의 할아버지 카를 페르디난트 대공과 결혼하기 전에 사별한 첫 남편 사이에서 낳은 딸이다) [6] 빌헬름 프란츠가 관리하는 지역의 우크라이나인들은 지주에게 땅을 빼앗기지 않을 수 있었고 동맹국 군인을 죽인 사람들도 빌헬름 프란츠에 의해 보호받았다. [7] 하지만 오늘날 역사가들은 그가 무죄라고 결론짓고 있다. [8] 큰형 카를 알브레히트(혹은 폴란드어로 카롤 올브라흐트)는 폴란드인 정체성을 가져서 20년대 폴란드 독립과 관련하여 동생 빌헬름과 의견이 충돌하여 사이가 나빠졌다고 한다. 카를 알브레히트는 폴란드 침공 때 폴란드군 포병대령 계급을 가지고 있었고 폴란드 패망 이후 독일의 회유에 넘어가지 않아 체포되었다. [9] 반대로 큰형 카를 알브레히트는 폴란드가 공산화되어가는 중이었던 탓에 오히려 다시금 재산을 압류당했다. [10] 카초로우스키의 아파트에서 생일파티를 할 때 소음 신고를 받은 경찰이 찾아와 그들을 체포하였고, 재판 결과 소련군에게 인계되어 소련에 압송된 것이었다. [11] 빌헬름 프란츠의 작은형인 레오 카를 대공의 아들이다. 부친이 귀천상혼을 했기 때문에, 오스트리아 대공 칭호는 사용하지 못하고 합스부르크 백작 칭호만 사용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