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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0 20:01:20

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연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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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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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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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라이히 시리즈의 연표. 카이저라이히 위키의 공식 설정을 번역한 것이다. 대부분 현재형으로 되어있어 읽기 어색할 수 있다.
http://kaiserreich.wikia.com/wiki/Timeline_of_World_History_since_1914

이 문서는 카이저라이히 위키의 공식 설정에 따라, 현재가 카이저라이히 세계의 1936년임을 가정하고 쓰여 있습니다.

1. 대전쟁

1.1. 1914년

날짜 사건 상세
6월 28일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조피가 사라예보 방문 중에 세르비아군과 모종의 연관이 있는 단체, 검은 손의 요원이자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하며 7월 위기를 초래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에 대한 반응으로 세르비아 왕국에게 고의적으로 세르비아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들게 작성된 내용의 최후 통첩을 했고 독일의 총리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는 세르비아와 전쟁이 발발할 경우 무조건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백지 수표"를 보냈다.
7월 28일 대전쟁 발발 위기를 완화하고자 하는 한 달 간의 시도 끝에 유럽의 열강들은 전면전에 들어갔고 연쇄적인 선전포고가 이루어졌다. 독일의 지원을 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자 러시아는 군의 동원을 멈추라는 요청을 거부했고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이틀 후, 프랑스가 러시아와의 동맹 관계로 전쟁에 합류했다.
8월 4일 벨기에 침공 프랑스를 전쟁에서 최대한 빨리 배제하고 싶었던 독일은 슐리펜 계획을 발동해 독일-프랑스 국경에 걸친 세레 드 리비에르 체제[1]를 우회하고자 벨기에를 침공했다. 그러나 1839년의 런던 조약은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했고 대영제국이 이에 개입해 협상국의 편으로 참전했다. 왕립 해군은 독일에 해상 봉쇄를 시작했고 이후 대규모의 식량과 물자 부족을 야기했다.
8월 17일 러시아의 동프로이센 침공 러시아는 동프로이센 깊숙히 공세를 감행했고 독일의 경악을 자아냈다. 굼비넨, 뢰첸, 인슈테르부르크 그 외에 많은 마을들이 약탈당하고 불타며 지역 주민들은 학살당했다. 그러나 2주 후, 독일은 마주리안 호수와 타넨베르크에서 대승을 거두며 러시아 1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이 승리의 설계자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 상급대장과 에리히 루덴도르프 소장은 이후 독일의 최종 승리에 핵심 역할을 맡게 되었다.
8월 23일 일본의 참전 영일동맹에 따라 일본 제국이 협상국의 편으로 참전했다. 그 해 말까지 산둥반도 키아우초우, 독일령 사모아, 독일령 뉴기니와 같은 아시아와 태평양의 독일 식민지들은 일본과 영국의 점령 하에 들어갔다.
9월 3일 알바니아 붕괴 봄부터 알바니아의 대공으로 선출된 빌헬름 추 비드 무슬림 농민 반군이 수도 두러스를 점령하자 나라를 떠났고 알바니아 공국은 완전히 무정부상태로 접어들었다. 국제 헌병대는 철수했고 알바니아는 곧 주변국의 장기말이 되었다. 그리스 에피루스 북부로 진군했으며 이탈리아 블로러 사잔섬을 점령했고 세르비아는 알바니아의 장교 에사드 파샤 톱타니 비밀 조약을 맺어 알바니아에서의 그들의 영향력을 확장했다.
9월 11일 러시아의 갈리치아 침공 러시아는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렘베르크시를 점령하며 성공적으로 갈리치아 동부를 확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셰미실의 오스트리아 주둔군은 1915년 초까지 지역을 사수했고 독일은 러시아령 폴란드로 진군해 우치시를 점령 실레시아 포젠을 향한 러시아의 공격 계획을 저지했다.
9월 12일 슐리펜 계획의 실패 프랑스는 1차 마른 전투에서 승리하며 파리 동쪽 100km지점까지 도달한 독일의 진군을 저지했다. 동시에 바다로의 경주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 북서부로의 돌파 시도는 제1차 이프르 전투로 흐지부지 끝났다. 10월이 되자 서부전선의 전선 이동은 종료되고 5년간의 참호전이 시작되었다.
9월 14일 마리츠 반란 남아프리카에서 마니에 마리츠가 주축이 된 친독 보어인들은 종주국 영국에 대해 "마리츠 반란"이라는 무장 폭동을 시작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재건했다. 9월 그들은 독일령 남아프리카로 들어갔고, 독일과 비밀 협정을 맺어 샌드폰테인 전투에서 영국령 남아프리카 군을 상대했다. 1915년 초, 봉기는 진압되었고 마리츠는 유럽으로 탈출했다.
10월 29일 오스만의 참전 오스만 제국은 오랫동안의 독일과 연줄이 있었고 세바스토폴의 러시아 흑해 함대에 포격을 감행하며 동맹국 측으로 참전했다. 8월, 콘스탄티노플은 독일과 반러 비밀동맹을 맺고는 쫓기는 독일 군함 괴벤 브레슬라우를 불법적으로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들였다. 곧 영국령 인도 군이 메소포타미아의 바스라에 상륙했고 러시아 군은 카프카스에서 투르크와의 충돌을 개시했다.
12월 15일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침공 저지 늦여름의 체르 전투와 가을의 드리나 전투에 이어 콜루바라 전투까지 세르비아의 승리로 끝나며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침공은 정지되었고 1915년 가을까지 전선은 상당수 고착화되었다. 이는 갈리치아에서의 재앙에 이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지휘부의 또다른 대망신이 되었다.

1.2. 1915년

날짜 사건 상세
1월 15일 21개조 요구 일본은 중화민국 정부에 중국을 실질적으로 일본의 보호령으로 만드는 소위 21개조 요구를 제시했고 이는 미국이 비공식적으로 견지하는 "문호개방정책"을 위반한 것이었다. 위안스카이 대총통은 최종적으로 이를 승인했다. 이는 매우 인기가 없는 행보였고 그 해 말 그가 스스로 황제로 등극하려는 시도와 함께 호국전쟁으로 이어졌고 그의 몰락을 초래하고 만다.
2월 7일 동부전선 겨울 공세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마주리아와 카르파티아에 공세를 실행했다. 오스트리아는 갈리치아를 탈환하는데 실패했지만 러시아가 헝가리로 더이상 밀고 들어오는 것은 막을 수 있었고 독일은 다시 한 번 폴란드로 깊이 진군해들어가 독일 영토에 남아있는 러시아군 대부분을 퇴거시켰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 조합이 다시 한 번 승리를 가져왔다.
2월 15일 싱가포르 항명 싱가포르에서 영국령 인도 제5경보병연대의 850명의 무슬림 병사들이 홍콩으로 발령되기 직전 그들이 중동으로 수송되어 오스만 제국과 싸우게 될 것이라고 오해하면서 영국인 상급자에 대항해 항명을 일으켰다. 항명은 프랑스, 러시아, 일본 함선이 증원을 위해 도착하면서 겨우 진압되었다. 싱가포르 항명은 1월에서 2월까지 영국령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난 비슷한 종류의 사건 중 최대 수준이었다. 혹자는 그런 반란들이 독일이 지휘한 것이며 베를린 위원회와 가다르 운동이 이를 실행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월 17일 갈리폴리 전역 개시 2월, 연합군은 오스만을 전쟁에서 이탈시키기 위한 불운한 노력의 일환으로 다르다넬스의 통제권을 얻기 위해 갈리폴리 근교에 상륙했다. 갈리폴리 전역은 재앙으로 발전했고 연말 연합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갈리폴리의 대참사는 윈스턴 처칠 해군 장관의 명성을 크게 손상시켰지만 젊고 카리스마 있는 튀르크 장교 무스타파 케말 파샤를 부상시켰다.
2월 22일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 독일은 영국을 압박해 해상 봉쇄를 분쇄하고자 했고, 대양함대를 직접적으로 움직이지 않고도 영국 해군을 괴롭힐 수 있는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공식적으로 개시했다. 이전에는 대양함대를 이용한 봉쇄 돌파 시도는 실패했고 해군 장관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는 이에 실망했다. 잠수함 작전은 독일에 엄청난 성공을 가져왔지만 중립 함선들이 독일의 어뢰의 희생된 사실은 곧 중대한 위기를 야기하게 되었다. RMS 루시타니아와 SS 아라빅이 침몰하며 미국 시민 여러 명의 사망을 유발하자 베를린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정지하고 대신 나포법에 따라 제한적 잠수함 작전만을 실행했다. 티르피츠와 독일의 우익 집단들은 이에 이의를 주장했다.
4월 22일 2차 이프르 전투 서부전선에서는 전선은 고착화되었으나 전투는 더 잔혹해져서 4월 22일 2차 이프르 전투에서 염소 가스가 최초로 사용되었다. 협상국은 연말에 샹파뉴와 아르투아에 공세를 가했지만 백중세, 혹은 독일의 승리로 종료되었다.

1.3. 1916년

1.4. 1917년

1.5. 1918년

1.6. 1919년

1.7. 베르사유 조약

1.8. 명예로운 평화(1921년)

2. 전쟁 이후의 전개

2.1. 1919년

2.2. 1920년

2.3. 1921년

2.4. 1922년

2.5. 1923년

2.6. 1924년

2.7. 1925년

2.8. 1926년

2.9. 1927년

2.10. 1928년

2.11. 1929년

2.12. 1930년

2.13. 1931년

2.14. 1932년

2.15. 1933년

2.16. 1934년

2.17. 1935년



[1] 리비에르 장군이 고안한 프랑스의 방위 체계 [2] 실제 역사에서도 베트만홀베크의 후임 총리를 맡았으며 독일 총리 중 최초로 비귀족 출신이었다. 독일의 승리를 쟁취하려는 군부와 빠른 평화를 원하는 의회 사이를 전혀 조율시키지 못하고 110일만에 퇴임. [3] 러시아는 종교적 이유로 1918년에야 그레고리력을 도입하게 된다. [4] 실제로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독일은 광활한 영토를 얻었지만, 무려 110만 명의 치안유지군을 점령지에 투입하여 가용병력은 더 적어졌다. 이 세계관에서는 카이저가 조약이 맺어지자 마자 획득한 영토와 국가들에 독일 제국의 귀족들을 꽃아넣어 지도층 공백을 막고 치안유지를 현지 협력자들에게 맞기는 방식으로 대참사를 피해갔다고 한다. [5] 원래는 춘계 대공세는 루덴도르프 공세 라고도 하는, 연합군이 아닌 독일이 실행한 공세이다. [6] 백군 소속의 장군으로 1917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10월 혁명이 촉발되고 안그래도 흔들리던 케렌스키 정부에 막타를 치게 된다. 쿠데타 실패 이후 감금되었다가 러시아 내전이 일어나자 탈옥해 돈 방면에서 백군을 이끌다가 예카테리노다르 전투에서 포격에 맞아 전사한다. [7] 1차 대전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활약했다.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의 상관. [8] 레닌을 암살하려던 사회혁명당 당원, 실제 역사에서는 암살에 실패. [9] 레닌 당시 볼셰비키의 지도자들 중 하나. 레닌 사후 트로츠키를 경계해 스탈린과 손잡지만 트로츠키가 실각한 이후 스탈린에게 숙청당했다. [10] 1차대전 당시 독일 제국 해군 제독. 대표적인 성과로는 유틀란트 해전이 있다. 아트미랄 히퍼가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 [11] 사회혁명당 소속의 혁명가로 러시아 제국의 많은 요인들을 암살했다. 케렌스키 내각에서 전쟁부 차관을 역임했으나 코르닐로프를 도운 혐의로 해임. 러시아 내전 이후 해외로 망명했는데 1924년에 소련에 재입국하는 모험을 했다가 금방 체포되어 사망. [12] 에티오피아 제국 최초의 여제. 전임자 이야수 5세가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1차대전 중 동맹국으로 참여를 시도하는 등의 행위를 벌여 폐위된 뒤 즉위. 자신은 보수적인 성향이었지만 진보적이었던 섭정 터퍼리 머콘는의 영향으로 에티오피아에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13] 별명은 '미친 물라'. 데르비쉬를 세우고 에티오피아, 이탈리아, 영국의 공격을 받았지만 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타격을 입혀왔다. 1차대전 중 동맹국과 연계를 꾀하기도 했다. 1920년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패배하고 재기를 노리나 1921년 사망. [14] 서부전선, 갈리폴리, 그리스 등지에서 작전을 펼쳤다. 1차대전 말기에는 메소포타미아 방면에서 종군 [15] 빌헬름 2세의 3남 [16] 토고의 총독을 맡았고 자신은 수락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21일동안 통합 발트 공국의 공작으로 추대받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여왕 빌헬미나의 부군 하인리히가 이 사람의 동생. [17] 참고로 이 사람은 호이4 바닐라에서 헝가리가 파시스트 국왕을 선출하면 헝가리 왕국의 국왕으로 나온다. [18] 빌헬름 2세의 동생으로 1차대전 중에는 해군에 복무. [19] 빌헬름 2세의 4남. 훗날 나치에 가담하였다. [20] 원래 역사에서도 핀란드 국회에서 왕으로 지명되나 달가워하지 않았고 독일이 패배하면서 핀란드도 공화정이 되었기 때문에 2개월만에 왕위를 반납했다. [21] 모나코 공작, 알바니아 왕 등에 물망이 올랐으나 모두 실패했고 결국 리투아니아 의회의 추대를 받아 왕으로 선출되었고 그 자신도 수락했으나 리투아니아 내부의 반발과 독일의 반대로 리투아니아에는 가보지도 못했고 독일이 패배하면서 리투아니아는 그대로 공화정이 되었다. [22] 테셴 공작 카를 루트비히의 증손자. 그의 아버지는 그를 폴란드인으로 기르려 했으나 오히려 이에 반발해 우크라이나인으로 자라났고 전쟁중엔 우크라이나인으로 된 군대를 이끌거나 우크라이나 왕국 추진 운동에서 왕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내각에도 참여했고 공화국이 멸망하자 스페인, 프랑스 등을 떠돌았다. 2차대전 초기에는 친나치적인 행보를 보이다가 나치가 우크라이나에 독립을 안겨줄 의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반나치로 전향해 영국에 첩보를 넘겨주었고 소련의 점령 이후에는 프랑스 측의 스파이로 활동하다가 소련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23] 독일어로 세계전쟁, 그러니까 세계대전(World War)이다. [24] 프랑스의 활동가, 저술가. 아나코생디칼리즘 이론가 [25] 프랑스의 정치인. 처음에는 사회주의자였으나 이후 우익으로 전향해서 정치에 입문. 1차대전기에 몇차례 총리로 재직하나 이때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외무 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루르 점령의 철회, 로카르노 조약의 체결 등 평화를 위해 대독 유화책을 제시했고 192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26] 러시아 제국, 백군 소속의 장군. 붉은 군대는 가장 강력하다의 검은 남작. 러시아 내전 초기에 카프카스에서 대활약하나 모스크바로 북진할 것을 명령한 데니킨과 달리 동진해 시베리아의 콜차크와 연계하는 쪽을 고수했기 때문에 물러났다가 데니킨이 실각하자 크림방면 백군의 총지휘자가 된다.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우크라이나, 조지아의 독립을 인정하는 등의 개혁을 시행하나 이미 때는 늦었고 백군이 패배하자 망명해 망명 백계 러시아인들의 지도자로 활동하나 1928년 돌연사. 유족들은 소련의 암살 가능성을 제기했다. [27] 러시아 제국, 백군 소속의 장군. 1차 대전 중에는 캅카스 방면에서 오스만을 열심히 털어먹었고 러시아 혁명 당시에는 코르닐로프의 반란에 호응해 발트 방면에서 들고 일어났다. 에스토니아와 동맹을 맺고 친구였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의 연줄로 핀란드 백군과의 동맹도 노렸지만 명목상 총지휘관인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이 에스토니아와 핀란드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으며 연계는 물 건너 갔고 영국의 지원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함락 직전까지 가나 모스크바에서 증원이 들어오며 그대로 물러났다. 이후 볼셰비키에 패배하고 재산은 붉은 군대에 몰수당해 해산되는 북서부 백군의 퇴직금 명목으로 사용되었고 자신은 프랑스로 망명해 거기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