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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 | ||
정보 | 공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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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이저라이히: 대전의 유산 | ||
정보 | 등장 국가 | 인물 | 이벤트 | 업데이트 내역 | |
3차창작 모드 | Kaiserredux | 모에라이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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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표 | Kaiser Cat Cinema |
카이저라이히 시리즈의 연표. 카이저라이히 위키의 공식 설정을 번역한 것이다. 대부분 현재형으로 되어있어 읽기 어색할 수 있다.
http://kaiserreich.wikia.com/wiki/Timeline_of_World_History_since_1914
이 문서는 카이저라이히 위키의 공식 설정에 따라, 현재가 카이저라이히 세계의 1936년임을 가정하고 쓰여 있습니다. |
1. 대전쟁
1.1. 1914년
날짜 | 사건 | 상세 |
6월 28일 |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의 암살 |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과 그의 아내 조피가 사라예보 방문 중에 세르비아군과 모종의 연관이 있는 단체, 검은 손의 요원이자 세르비아의 민족주의자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당하며 7월 위기를 초래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이에 대한 반응으로 세르비아 왕국에게 고의적으로 세르비아인들에게 받아들여지기 힘들게 작성된 내용의 최후 통첩을 했고 독일의 총리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는 세르비아와 전쟁이 발발할 경우 무조건적인 지원을 약속하는 "백지 수표"를 보냈다. |
7월 28일 | 대전쟁 발발 | 위기를 완화하고자 하는 한 달 간의 시도 끝에 유럽의 열강들은 전면전에 들어갔고 연쇄적인 선전포고가 이루어졌다. 독일의 지원을 받은 오스트리아-헝가리가 세르비아에 전쟁을 선포하자 러시아는 군의 동원을 멈추라는 요청을 거부했고 독일은 러시아에 선전포고했다. 이틀 후, 프랑스가 러시아와의 동맹 관계로 전쟁에 합류했다. |
8월 4일 | 벨기에 침공 | 프랑스를 전쟁에서 최대한 빨리 배제하고 싶었던 독일은 슐리펜 계획을 발동해 독일-프랑스 국경에 걸친 세레 드 리비에르 체제[1]를 우회하고자 벨기에를 침공했다. 그러나 1839년의 런던 조약은 벨기에의 중립을 보장했고 대영제국이 이에 개입해 협상국의 편으로 참전했다. 왕립 해군은 독일에 해상 봉쇄를 시작했고 이후 대규모의 식량과 물자 부족을 야기했다. |
8월 17일 | 러시아의 동프로이센 침공 | 러시아는 동프로이센 깊숙히 공세를 감행했고 독일의 경악을 자아냈다. 굼비넨, 뢰첸, 인슈테르부르크 그 외에 많은 마을들이 약탈당하고 불타며 지역 주민들은 학살당했다. 그러나 2주 후, 독일은 마주리안 호수와 타넨베르크에서 대승을 거두며 러시아 1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이 승리의 설계자인 파울 폰 힌덴부르크 상급대장과 에리히 루덴도르프 소장은 이후 독일의 최종 승리에 핵심 역할을 맡게 되었다. |
8월 23일 | 일본의 참전 | 영일동맹에 따라 일본 제국이 협상국의 편으로 참전했다. 그 해 말까지 산둥반도의 키아우초우, 독일령 사모아, 독일령 뉴기니와 같은 아시아와 태평양의 독일 식민지들은 일본과 영국의 점령 하에 들어갔다. |
9월 3일 | 알바니아 붕괴 | 봄부터 알바니아의 대공으로 선출된 빌헬름 추 비드는 무슬림 농민 반군이 수도 두러스를 점령하자 나라를 떠났고 알바니아 공국은 완전히 무정부상태로 접어들었다. 국제 헌병대는 철수했고 알바니아는 곧 주변국의 장기말이 되었다. 그리스는 에피루스 북부로 진군했으며 이탈리아는 블로러와 사잔섬을 점령했고 세르비아는 알바니아의 장교 에사드 파샤 톱타니와 비밀 조약을 맺어 알바니아에서의 그들의 영향력을 확장했다. |
9월 11일 | 러시아의 갈리치아 침공 | 러시아는 오스트리아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고 렘베르크시를 점령하며 성공적으로 갈리치아 동부를 확보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셰미실의 오스트리아 주둔군은 1915년 초까지 지역을 사수했고 독일은 러시아령 폴란드로 진군해 우치시를 점령해 실레시아와 포젠을 향한 러시아의 공격 계획을 저지했다. |
9월 12일 | 슐리펜 계획의 실패 | 프랑스는 1차 마른 전투에서 승리하며 파리 동쪽 100km지점까지 도달한 독일의 진군을 저지했다. 동시에 바다로의 경주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프랑스 북부와 벨기에 북서부로의 돌파 시도는 제1차 이프르 전투로 흐지부지 끝났다. 10월이 되자 서부전선의 전선 이동은 종료되고 5년간의 참호전이 시작되었다. |
9월 14일 | 마리츠 반란 | 남아프리카에서 마니에 마리츠가 주축이 된 친독 보어인들은 종주국 영국에 대해 "마리츠 반란"이라는 무장 폭동을 시작해 남아프리카 공화국을 재건했다. 9월 그들은 독일령 남아프리카로 들어갔고, 독일과 비밀 협정을 맺어 샌드폰테인 전투에서 영국령 남아프리카 군을 상대했다. 1915년 초, 봉기는 진압되었고 마리츠는 유럽으로 탈출했다. |
10월 29일 | 오스만의 참전 | 오스만 제국은 오랫동안의 독일과 연줄이 있었고 세바스토폴의 러시아 흑해 함대에 포격을 감행하며 동맹국 측으로 참전했다. 8월, 콘스탄티노폴리스는 독일과 반러 비밀동맹을 맺고는 쫓기는 독일 군함 괴벤과 브레슬라우를 불법적으로 다르다넬스 해협으로 들였다. 곧 영국령 인도 군이 메소포타미아의 바스라에 상륙했고 러시아 군은 카프카스에서 투르크와의 충돌을 개시했다. |
12월 15일 |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침공 저지 | 늦여름의 체르 전투와 가을의 드리나 전투에 이어 콜루바라 전투까지 세르비아의 승리로 끝나며 오스트리아의 세르비아 침공은 정지되었고 1915년 가을까지 전선은 상당수 고착화되었다. 이는 갈리치아에서의 재앙에 이어 오스트리아-헝가리 지휘부의 또다른 대망신이 되었다. |
1.2. 1915년
날짜 | 사건 | 상세 |
1월 15일 | 21개조 요구 | 일본은 중화민국 정부에 중국을 실질적으로 일본의 보호령으로 만드는 소위 21개조 요구를 제시했고 이는 미국이 비공식적으로 견지하는 "문호개방정책"을 위반한 것이었다. 위안스카이 대총통은 최종적으로 이를 승인했다. 이는 매우 인기가 없는 행보였고 그 해 말 그가 스스로 황제로 등극하려는 시도와 함께 호국전쟁으로 이어졌고 그의 몰락을 초래하고 만다. |
2월 7일 | 동부전선 겨울 공세 | 독일과 오스트리아는 마주리아와 카르파티아에 공세를 실행했다. 오스트리아는 갈리치아를 탈환하는데 실패했지만 러시아가 헝가리로 더이상 밀고 들어오는 것은 막을 수 있었고 독일은 다시 한 번 폴란드로 깊이 진군해들어가 독일 영토에 남아있는 러시아군 대부분을 퇴거시켰다.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 조합이 다시 한 번 승리를 가져왔다. |
2월 15일 | 싱가포르 항명 | 싱가포르에서 영국령 인도 제5경보병연대의 850명의 무슬림 병사들이 홍콩으로 발령되기 직전 그들이 중동으로 수송되어 오스만 제국과 싸우게 될 것이라고 오해하면서 영국인 상급자에 대항해 항명을 일으켰다. 항명은 프랑스, 러시아, 일본 함선이 증원을 위해 도착하면서 겨우 진압되었다. 싱가포르 항명은 1월에서 2월까지 영국령 남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서 일어난 비슷한 종류의 사건 중 최대 수준이었다. 혹자는 그런 반란들이 독일이 지휘한 것이며 베를린 위원회와 가다르 운동이 이를 실행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
2월 17일 | 갈리폴리 전역 개시 | 2월, 연합군은 오스만을 전쟁에서 이탈시키기 위한 불운한 노력의 일환으로 다르다넬스의 통제권을 얻기 위해 갈리폴리 근교에 상륙했다. 갈리폴리 전역은 재앙으로 발전했고 연말 연합군은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갈리폴리의 대참사는 윈스턴 처칠 해군 장관의 명성을 크게 손상시켰지만 젊고 카리스마 있는 튀르크 장교 무스타파 케말 파샤를 부상시켰다. |
2월 22일 |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 작전 | 독일은 영국을 압박해 해상 봉쇄를 분쇄하고자 했고, 대양함대를 직접적으로 움직이지 않고도 영국 해군을 괴롭힐 수 있는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공식적으로 개시했다. 이전에는 대양함대를 이용한 봉쇄 돌파 시도는 실패했고 해군 장관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는 이에 실망했다. 잠수함 작전은 독일에 엄청난 성공을 가져왔지만 중립 함선들이 독일의 어뢰의 희생된 사실은 곧 중대한 위기를 야기하게 되었다. RMS 루시타니아와 SS 아라빅이 침몰하며 미국 시민 여러 명의 사망을 유발하자 베를린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무제한 잠수함 작전을 정지하고 대신 나포법에 따라 제한적 잠수함 작전만을 실행했다. 티르피츠와 독일의 우익 집단들은 이에 이의를 주장했다. |
4월 22일 | 2차 이프르 전투 | 서부전선에서는 전선은 고착화되었으나 전투는 더 잔혹해져서 4월 22일 2차 이프르 전투에서 염소 가스가 최초로 사용되었다. 협상국은 연말에 샹파뉴와 아르투아에 공세를 가했지만 백중세, 혹은 독일의 승리로 종료되었다. |
1.3. 1916년
- 베르됭 전투가 개시되었다. 프랑스 군의 출혈을 유도하기 위한 작전이었으나 실제로는 양측이 비슷한 수준의 출혈을 입으며 전투의 목적을 상실한다. 영국군도 솜에서 유사한 시도를 했으나 같은 결과가 나왔다. 솜 전투에서 최초의 전차가 선보였다.
- 동부에서는 브루실로프 공세가 시작되었다. 초반에는 매우 성공적이었으나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전쟁에서의 완전한 배제도, 폴란드에서의 독일의 추방도 달성되지 못했다.
- 쿠트의 영국군이 항복했고 이는 영국의 위신에 큰 타격을 입혔다. 러시아의 작전은 오스만을 캅카스와 아르메니아에서 몰아내는데 성공한다. 메카의 샤리프가 튀르크에 대항하는 아랍인의 반란을 시작했다.
- 바다에서는 1차 유틀란트 해전이 독일군의 전술적 승리, 영국군의 전략적 승리로 끝났다. 1918년 말까지 대양함대는 항구에 남아 있어야만 했다.
- 루마니아가 오스트리아로부터 이득을 얻기 위해 트란실바니아를 침공했다. 독일의 도움으로 루마니아는 빠르게 몰락했고 아우구스트 폰 마켄젠은 해가 가기 전에 부쿠레슈티를 함락했다. 그보다 남쪽의 테살로니키에는 연합군이 주둔했다.
1.4. 1917년
- 1월 8일, 카이저가 무제한 잠수함 작전의 재개에 대한 청원을 들으나 최종적으로 거부한다. 이것이 카이저라이히 세계와 우리 세계가 갈라지는 분기점이다.
- 독일의 수상 폰 베트만홀베크가 사임을 강요받았고 게오르크 미하엘리스[2] 가 뒤를 이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미하엘리스는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의 꼭두각시에 지나지 않음이 드러난다.
- 서부전선에서는 슈망데담 전투에서의 프랑스군의 대 손실은 대규모의 항명을 야기했다. 이 재앙으로 그해 말까지 프랑스군 고위부가 공세를 지속하는 것을 막았고 이는 독일군에게 브루실로프 공세에서의 회복의 찬스였다.
- 3월( 구력[3] 2월), 러시아는 무정부 상태에 빠지고 차르는 퇴임했다.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하에서 임시정부가 꾸려지나 이 정부도 11월(구력 10월)에 레닌의 볼셰비키에 의해 무너지면서 러시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 이탈리아에서는 카포레토 전투로 이탈리아가 베네치아로의 최후 방어선인 피아베 강까지 퇴각한다.
- 오스만은 영국군에 예루살렘과 바그다드를 빼앗기며 큰 타격을 입었다.
- 영국 잠수함이 실수로 독일로 크리스마스 선물을 이송하던 미국 화물선에 어뢰를 발사해 미국 시민이 몇 명 사망한다. 대중의 반발로 봉쇄에 구멍이 뚫리게 되어 중부 유럽은 기근의 공포에서 벗어날 수 있게 된다.
1.5. 1918년
- 3월 초 독일과 볼셰비키 사이에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맺어지며 독일과 오스트리아군 수십만명이 가용병력이 되었다.[4] 볼셰비키들은 핀란드, 발트, 우크라이나, 벨라루스를 독일에 넘겨줘야 했다.
- 연합군은 동부의 증원군이 도착하기 전에 독일군을 몰아내고자 춘계 대공세를[5] 실행하지만 수많은 인명손실만 내면서 실패로 돌아간다.
- 그리스를 패퇴시키기 위한 토이토부르크 작전이 개시된다. 동맹군은 테살로니키의 요새들을 직접 공략하는 대신 특수부대를 대거 운용하여 침투작전을 펼쳤다. 테살로니키에 방어군이 틀어박혀있는 사이 동맹군은 온 그리스를 헤집고 다녔다. 7월 3일 아테네가 무너졌고 그리스 정부는 항복했다. 테살로니키의 주둔군들은 곧 퇴거되었다.
- 라브르 코르닐로프[6]장군 휘하의 '의용군' 중 반 볼셰비키 백군이 2월에서 5월까지 로스토프에서 얼어붙은 쿠반 강을 건너 남쪽으로 후퇴한다. 이 유명한 '얼음 행진' 작전은 예카테리노다르 전투에서 코르닐로프가 지휘부 위로의 포격에서 가까스로 살아남는 것으로 종료된다. 도시가 함락되면서 백군의 쿠반 지역에 대한 통제권이 강화되었다.
- 에드먼드 알렌비[7] 장군은 오스만의 대군을 포위섬멸하고 다마스쿠스를 점령하며 연합군 최후의 대승을 거둔다. 그렇지만 독일군이 2개 사단을 소아시아에 파견하면서 아나톨리아 진격은 무위로 돌아갔다.
- 러시아 볼셰비키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레닌이 파니 카플란[8]에 의해 암살되었고 사회혁명당 좌파는 볼셰비키에 의해 억압받게 되었다. 레프 카메네프[9] 가 빠르게 뒤를 이었지만 볼셰비키의 기세는 꺾이게 되었다.
- 독일 U보트에 대한 연합군의 성공적 대응과 독일 봉쇄가 계속되자 프란츠 폰 히퍼[10] 제독이 이끄는 대양함대는 자포자기로라도 출격할 수밖에 없었다. 2차 유틀란트 해전은 무승부로 끝났지만 영국 왕립 해군은 습격의 충격으로 포위를 풀 수 밖에 없었다. 봉쇄가 종료되고 우크라이나의 곡식이 유입되며 독일의 기아로 인한 항복의 가능성은 사라졌다.
- 한편 황제 카를은 붕괴되는 국내전선과 지속적으로 팽창하는 혁명의 기운의 압력에 의해 '민족선언'를 의제화했고 오스트리아의 수많은 소수민족을 달래기 위해 전쟁이 승리할 시의 제국내의 민족들의 자기결정권을 약속했다. 선언은 헝가리에는 어떠한 요구도 제기하지 못했지만 10월 말, 크로아티아국의 자결권이 이중제국의 양쪽으로부터 승인받았고 그 결과로 크로아티아 왕국이 헝가리와 같은 지위를 획득하게 된다.
- 반볼셰비키 연합의회와 시베리아 정부사이의 협상으로부터 거의 한달간의 후에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은 백군의 단합을 위해 마지못해 영국의 지원을 받는 쿠데타를 개시했다. 상황은 보리스 사빈코프[11] 가 도착하며 해결되었다. 그는 콜차크가 사회혁명당의 요구를 많이 받아들이게 했으며 그의 권력을 최고 군사령권만으로 제한시켰다.
1.6. 1919년
- 3월 2일, 독일이 베르됭 남쪽의 생 미엘에서 대공세를 시작했다. 침투 전술은 성공적이었고 16일 낭시가 무너졌다. 프랑스는 임시 방어선을 세웠고 측면이 노출되었다. 26일의 랭스 공격은 연합군을 둘로 나누었다. 샤토티에리가 공격당하며 마른으로의 후퇴는 불가능하게 되었다. 거의 모든 프랑스 군이 남쪽으로 후퇴해야했다. 파리는 포위되었다.
- 3월 11일, 피아베가 아닌 트렌토에서 이탈리아군을 공격하는 라도비츠 작전이 결행되었다. 24일 베로나와 비첸차가 함락되며 4월 10일, 이탈리아군이 베네치아에 도달했을 때에는 옴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다. 베네치아 공성전에서 7월까지 버티게 되지만 이탈리아의 나머지 지역은 무방비 상태가 되었고 8월 1일 로마가 함락되었다. 며칠 뒤, 이탈리아가 항복했다. 이탈리아의 항복으로 남프랑스로의 길이 열렸고 9월 마르세유가 함락된다.
- 이탈리아가 몰락하자 에티오피아의 저우디투[12]와 데르비쉬 왕국의 사이드 무함마드 압둘라 하산[13]은 전쟁을 선언해 이탈리아의 식민지들을 탈환하며 유럽의 아프리카 식민화를 최초로 뒤집는다.
- 연합군의 패배로 알렌비와 그의 군사들은 프랑스로 재배치된다. 알렌비의 후임, 윌리엄 마셜 경[14]은 병력 부족으로 후퇴할 수 밖에 없게 된다.
- 프랑스군의 후퇴로 영국 원정군의 위치도 무방비 상태가 되었다. 6월, 대부분의 영국군은 디에프를 통해 빠져나갔고 프랑스군만 남겨졌다. 이 시점에서 프랑스군은 지치고 염전사상이 퍼지고 승리에 대한 희망이 거의 없게 되어 공공연한 항명이 나타났다. 두번째 항명과 목전에 닥친 노동자 총궐기와 파리의 함락 위기, 마르세유의 함락 등으로 10월 4일 프랑스 정부가 독일에 항복하며 유럽에서의 전쟁이 종결되었다. 한 달 후 동맹국들과 남은 연합국들은 코펜하겐에서 휴전을 맺는다.
1.7. 베르사유 조약
- 프랑스, 러시아, 이탈리아, 발칸 국가들의 항복은 남은 연합국인 영국, 일본, 포르투갈의 결속의 약화를 가지고 왔다. 이들 국가들은 독일로부터 직접적인 위협을 받지는 않았지만 독일에게 위협을 줄 수도 없는 처지였다. 독일과 영국 사이의 전투가 아일랜드 등지에서 대리전으로 치러졌고 승리한 동맹국들은 그들의 전리품을 나누었다.
- 세르비아는 마케도니아를 불가리아에 넘기고 내정과 외교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알바니아 역시 비슷한 운명을 겪었다. 몬테네그로는 오스트리아의 직할령이 되었다.
- 그리스는 마케도니아 지방과 살로니카를 불가리아에 넘겼고 크레타 섬을 카이저가 원하는 기간만큼 임대해주어야 했다.
- 루마니아는 도브루자 전지역을 불가리아에, 카르파티아 산맥 통행권을 헝가리에 할양했다. 그러나 루마니아는 이전에 러시아 영토였던 베사라비아의 합병을 승인받았다. 국가 내에서 종교적 소수자들의 완전한 권리가 인정되었고 동맹국의 경제적 이익이 보장되었다.
- 이탈리아는 여러 개의 공화정과 공국, 공작령으로 쪼개지면서 토스카나, 교황령, 양시칠리아 왕국이 다시 유럽의 지도에 등장하게 되었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완전히 비무장화되어 오스트리아-헝가리와의 완충지대가 되었다. 그러나 이탈리아 내전으로 양시칠리아, 사르데냐, 잔류한 교황청만이 유럽의 지도에 오래 등장하게 되었다.
- 리비아는 왕국이 되었고 오스만의 보호 아래에 들어갔다.
- 프랑스는 다호메이, 코트디부아르, 마다가스카르, 차드 호 남쪽의 적도아프리카, 퐁디셰리, 인도차이나, 태평양 식민지들을 할양했고 파드칼레부터 로렌까지를 포기했다. 그러나 혁명으로 로렌 외부 지방의 점거는 막혔다.
- 벨기에는 플랑드르-왈로니아 왕국으로 변했고 카이저의 아들 아달베르트[15]를 왕으로 모시게 되었다. 벨기에령 콩고는 독일에 할양되었고 왈로니아 동부에 위치한, 벨기에의 산업의 중심지 뫼즈는 독일 정부가 원하는 기간만큼 점유되게 되었다. 룩셈부르크 대공국은 독일 제국의 구성국이 되었다.
- 동쪽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얻은 땅들에는 여러 괴뢰국들이 세워졌다. 에스토니아와 라트비아는 발트 연합 공국으로 통일 되었고 아돌프 프리드리히 추 메클렌부르크[16][17]가 초대 대공에 올랐다. 카이저의 동생 하인리히[18] 는 백루테니아( 벨라루스)의 왕 겐리흐가 되었다. 폴란드와 핀란드는 독일의 보호하에 독립국이 되었고 카이저의 아들 아우구스트 빌헬름[19]이 폴란드의 왕, 카이저의 매제 프리드리히 카를 폰 헤센[20] 이 핀란드의 왕이 되었다. 리투아니아도 독립해서 우라흐 공작 빌헬름 폰 우라흐[21]가 리투아니아 왕 민다기우스로 즉위했다. 오스트리아는 빌헬름 프란츠 폰 합스부르크 대공[22]을 우크라이나의 권좌에 앉히고 미텔유로파의 동맹국으로 삼았다.
1.8. 명예로운 평화(1921년)
- 휴전이 끝나가고 양 측 모두 다시 전쟁에 들어갈 생각이 없었기에 루덴도르프는 연합국에 '명예로운 평화(Peace with Honour)'를 제안했다. 잔존 연합국들은 독일과 전 연합국 멤버들과의 평화조약을 인정하고 독일의 식민지들에서 물러나는 대가로 평화를 얻게 되었다. 조약은 11월 11일 오전 11시에 승인되었고 대전쟁(Weltkrieg)[23]은 7년만에 종결되었다.
2. 전쟁 이후의 전개
2.1. 1919년
- 독일의 대공세로 프랑스가 큰 출혈을 입고 2차 항명이 일어나자 아나코생디칼리스트 에밀 푸제[24]가 이끄는 Confédération Générale du Travail(CGT, 노동총연합)가 총파업을 선언했다. 그들의 제 1목표는 전쟁의 종결이었다. 파리가 함락되자 조르주 클레망소의 내각은 아리스티드 브리앙[25] 임시정부로 교체되었다.
- 남부 백군이 차리친시의 포위와 함께 '볼가 전역'을 개시했다. 백군은 표트르 브란겔[26]장군의 지휘하에 사라토프를 점령하지만 레프 트로츠키에 의해 사마라에서 정지하고 만다. 7월, 시베리아 백군의 반격으로 트로츠키는 사마라에서 철수해야했고 최종적으로 두 개의 백군 전선은 하나가 되었다.
- 발트에서 니콜라이 유데니치[27] 장군 휘하의 북서부 백군이 붉은 페트로그라드에 공세를 가했다. 압도된 적군은 빠르게 페트로그라드로 철수해야했고 백루테니아와 발트의 지원을 받은 백군은 도시를 포위했다.
- 남부와 시베리아 백군은 탈환한 도시 우파에서 그들 정부의 통합을 논의했다. 최종적으로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모든 백군의 총사령관으로 남았고 세르게이 사자노프가 총리가 되었다. 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시베리아 백군이 남부 백군이 했던것처럼 협상국과의 관계를 끊는 것에 동의한 것이다. 곧이어 유데니치의 군대에 의해 페트로그라드가 함락되었고 그는 그 도시를 그의 지지의 의미로 새로운 통합된 전러시아 임시정부에 바쳤다.
- 그들의 러시아의 형제들과 혁명 전위대에 대한 레닌의 이론에 경도된 자코뱅 급진주의자들이 정부청사와 관공서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고 이로 인해 CGT와 임시 정부간의 합의는 불가능하게 된다. 정부의 질서를 회복하기 위한 제대병들을 이용하려던 시도는 병사들이 혁명에 합류하며 끝났다. 프랑스는 짧지만 피비린내나는 전쟁에 휩싸였고 결국 혁명주의자들이 승리했다. 에밀 푸제는 프랑스 공화국을 프랑스 코뮌으로 변화시키는 힘든 임무를 시작했다.
- 프랑스의 기득권 인사들은 알제리로 탈출했고 페르디낭 포슈가 이끄는 망명정부가 설립되었다.
- 국가를 끝장낸 '평화'로부터 겨우 몇 시간 뒤에 밀라노에서 격분한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이탈리아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사보이아 왕가가 승인한 모든 조약은 휴지조각 취급받았다. 1주일도 안돼서 토리노에서 이에 경쟁하는 프랑스의 생디칼리즘 혁명을 모델로 한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선언되었고 이탈리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 베네토와 라치오 사이에 흐릿한 전선이 그어졌지만 오스트리아 주둔군은 갓난 이탈리아를 계승하는 당파들이 맞닥뜨리기에는 너무나 강했다. 곧 거리의 싸움은 완전히 전투가 되어있었다. 약탈이 거리에 만연했고 육군 부대가 혼돈스러운 제대의 와중에 편을 정할것을 강요받았을 때에는 두 '공화국'이 모두 역겹게 본 평화와 싸우기 위해 자주 스스로의 신념을 억눌러야만 했다. 배반자 사보이아 왕가와의 연관성 때문에 푸른색을 상징색에서 포기한 이탈리아 민족주의자 협회는 그들의 불법무장부대를 전면에 배치했고 싸움이 내전으로 발전하면서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베네토, 라치오, 캄파니아의 불온은 오스트리아와 이제는 양시칠리아 왕국에 충성하는 정규군에 의해 빠르게 억압되었다.
- 혼란한 상태에서 외국의 지원이 끊긴 하심 가의 반란이 오스만과 사우드의 연합에 의해 진압되었다.
- 운게른 남작과 그의 '야만인 사단'이 몽골의 수도 우르가를 점령하고 슈테른베르크는 스스로를 몽골의 최고지도자로 선언했다.
- 우루과이가 장관회의를 설립하며 잠시간 정치적 갈등을 봉합했다.
2.2. 1920년
- 모스크바가 백군 연합에 의해 1919년 11월부터 포위되어 있었지만 1920년 1월 22일에서야 볼셰비키는 정식으로 항복했다. 수적으로 양적으로 열세였고 기아와 탈영으로 망가진 볼셰비키에게는 임시정부의 자비에 기대는 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었다. 내전은 백군의 승리로 종결되었다.
- 백군 러시아는 수정된 버전의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의 승인을 위해 거의 모든 러시아 사회 구성원들의 분노의 항의에도 불구하고 알렉산드르 콜차크와 세르게이 사자노프,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위임장을 보낸다. 신생 러시아 공화국은 거의 1918년의 볼셰비키만큼이나 형편없었기 때문에 카이저의 군대의 '가혹한 조치'를 당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러시아는 독일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다.
- 재무부 장관 윌리엄 매커두가 미국 29대 대통령에 취임했다. 부통령은 알렉산더 팔머 였다.
- 수적으로 압도한 오스트리아와 공화국 군이 포 강 공세에서 사회주의자들의 공격으로 패배하자 이탈리아 내전이 실질적으로 종결되었다. 오스트리아와의 전면전을 시작하는 것과 지역이 전투로 폐허가 되었기 때문에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공세를 멈춘다. 이전의 이탈리아 연방 중 3개 국만이 여전히 존재하게 되었다.
2.3. 1921년
- 황제 카를이 다시 제국회의를 열고 제국 내의 민족자기결정의 실행을 위한 그의 의지를 표명했다.
- 유망한 정치인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지병인 소아마비에 무릎꿇으며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2.4. 1922년
- 1916년의 부활절 봉기와 그 이후의 5년간의 전쟁 끝에, 1월 1일 영국과 아일랜드 반군 사이에 평화 조약이 맺어져 아일랜드 자유국이 탄생한다. 반대하는 북부를 자치지역으로 하고 왕을 명목상으로만 인정함에 따라 조약 반대파는 거의 없어진다.
- 남로지디아가 독일의 그 지역에 대한 팽창 정책에 대한 긴장으로 남아프리카에 합류했다.
- 포르투갈이 미첼 드 파비아 코세이루의 쿠데타로 왕정복고되었다.
2.5. 1923년
- 국채 횡령 사건에 연루된 루덴도르프가 해임되며 독일의 군정이 끝났다.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이 수상으로 선출되었고 세계 정책(Weltpolitik)의 황금기가 시작되었다.
- 빅토리아 경찰 파업이 생디칼리스트 반란과 멜버른 코뮌의 설립으로 이어지자 조지 5세는 비상 계획을 발동시켰고 코뮌은 잔혹하게 진압되었다.
2.6. 1924년
- 미국에서 매커두 대통령이 재선되었다.
- 러시아에서는 강한 반독 정서로 연결된 자본가, 산업가, 중도우파 보수주의자들, 시베리아 자치론자의 느슨한 연합이 쿠데타를 시도했다. 콜차크는 계획과 별로 연관은 없었지만 임시지도자로 추대된다. 그러나 시베리아 음모자들의 병력은 한 줌 뿐이었고 모두들 그들을 탄압하기 위해 오는 병력과 싸우기보다는 도망치는 쪽을 선택했다. 일이 잘 되어가지 않자 음모자들은 흩어졌고 콜차크는 반독일을 주장하는 트란스아무르의 '러시아 공화국'을 세우라는 영국과 일본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 콜차크 반란으로 촉발된 러시아의 혼란과 자치권에 대한 약속이 깨지는 것을 보자 표트르 크라스노프 장군의 지휘하에 돈, 쿠반, 테렉의 카자크들이 반란을 일으켰다. 모든 카자크들이 반란을 지지했던 것은 아니지만 허약한 러시아군의 상태는 케렌스키로 하여금 마지못해 크라스노프의 요구를 수용하게 했다. 새롭게 결성된 돈-쿠반 연합은 러시아로부터 독립해 나왔지만 명목상 뿐이었다.
-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에 대한 자원 금수조치는 둘을 합병시켜 오스트랄라시아 연방을 결성하게 되었다. 선거는 정지되었고 자치령의 많은 지역이 계엄령 하에 놓여졌다.
2.7. 1925년
- 웨일스의 광부들의 파업은 정부에서 군대를 보내 위협하자 빠르게 총파업으로 발전했다. 군이 항명, 탈영을 일으키고 왕립 해군에서까지 반란이 일어나자 정부는 캐나다로 도망갔다. 좌익 연합은 카리스마적인 존 매클린의 지도하의 노조의회를 중심으로 브리튼 연방을 결성한다.
- 마이클 콜린스가 아일랜드 자유국과 얼스터 자치령을 해체하고 아일랜드 공화국을 세워 스스로 대통령이 되었다.
- 영국 정부의 몰락은 영국의 해외 점유지의 토지 강탈을 야기했다. 지브롤터는 최종적으로 스페인 손에 떨어졌고 아르헨티나는 빠르게 포클랜드를 점령했으며 이집트는 수단에 대한 권한을 얻었고 네지드는 휴전 오만을 침공했고 샴마르는 쿠웨이트의 충성 맹세를 받아들였으며 오스만 제국은 키프로스 섬과 아덴을 탈환하고 아덴을 예멘의 관리하에 맡겼다. 독일은 영국령 아프리카와 몰타, 수에즈, 베르베라, 실론, 말라카, 브루나이, 사라왁의 전략적 식민지를 탈취했다.
- 오스트랄라시아는 영국령 뉴기니와 피지에 대한 통제권을 얻었다.
- 한때 영국 왕실의 진주였던 인도도 삼국으로 분열되었다. 인도 자치령(속칭 델리)은 북서부의 통제권을 지켰고, 인도국민의회는 그들 스스로의 정부 바르티아 코뮌을 설립했다. 남방의 제후들은 그들 스스로의 남방 제후 연합을 형성했다. 버마는 다시 독립 왕국이 되었다.
- 소말리아의 영국 보호령이 멸망하고 술탄 모하마드는 독립을 선언했다.
- 남아프리카는 베추아나 보호령을 확보했다. 연합국에 잔류하려는 얀 스뮈츠와 공화국으로 탈바꿈하려하는 제임스 헤르초흐 사이의 갈등이 커져간다.
- 캐나다와 왕립 해군 카리브 함대에게 남은 것은 그 지역의 영국 식민지들 뿐이었다. 이들은 이전의 프랑스 식민지들과 함께 카리브 연방을 형성했다. 베네수엘라는 미국에게 이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 했다.
- 캐나다에서는 캐나다 상원이 캐나다로 도피한 영국인 귀족들의 귀족원으로 대체되었다.
- 쉬스창(서세창)은 분열된 중화민국의 총통이 되고자 했다. 그는 질서 회복을 목적으로 독일 제국의 도움을 요청하고 그 대가로 푸이의 복위에 동의한다. 국민군은 그를 쑨원의 삼민주의의 배반자라 비난했고 전쟁을 선언한다.
-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는 것으로 추정되는 범슬라브주의 반란이 오스트리아의 영향권의 남부를 휩쓸어 지역내의 오스트리아의 헤게모니가 위협받는다. 황제는 세르비아에 대항해 크로아티아인을 이용해 일리리야라는 이름의 크로아티아 주도의 범슬라브 왕국을 세운다. 헝가리는 기뻐하지 않는다.
2.8. 1926년
- 독일령 인도차이나 총독 한스 폰 젝트는 쉬스창을 도와 중국 내전에 개입할 것을 명령받았다. 6개월 만에 독일은 국민군을 패퇴시키고 대부분의 인구와 산업 중심지들을 확보했다. 반역자들은 서부나 운남, 만주로 도피했다. 푸이는 황제로 복위했지만 AOG(Algemeiner Ostasien Gesellschaft)로 알려진 독일 상사의 기업체가 남부 공업지대의 경제적 지배권을 가져가는 것을 용인해야만 했다. 한스 폰 젝트는 그곳의 초대 총독이 되었다. 다른 열강들의 경제적 이익을 지키기 위해 항구 도시들은 공사관 도시로 통일되어 공동관리에 들어갔다.
- 일본도 장쭤린을 도와 개입했지만 독일과 대립하는 리스크를 지는 것은 거부했다. 봉천 공화국이 만주에 세워졌다.
- 상파울루 연방 대통령 와싱톤 루이즈가 암살당하고 연방군이 주에 무단침입하자 긴장도가 올라가면서 브라질은 내전에 들어갔다.
2.9. 1927년
- 루마니아의 왕 페르디난드가 사망하고 아들 카롤은 그의 왕위 계승권을 박탈당해 손자 미하이가 계승한다. 미하이가 어렸기에 군부의 꼭두각시가 되었고 군부가 국가를 완전히 통제하게 된다.
2.10. 1928년
- 공화당의 허버트 후버가 뉴욕 시장을 지낸 민주당의 앨 스미스를 손쉽게 꺾고 대통령이 되었다. 노먼 토마스가 사회당으로 출마해 몇몇 중서부주에서 승리를 거두고 잭 리드가 뉴욕에서 이변을 일으키며 상원에 당선된다. 휴이 롱이 루이지애나 주지사가 된다.
- 브라질이 신 공화국으로 첫번째 선거에 들어갔다. 주앙 페소아의 공화당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둔다.
- 중앙아메리카의 반란이 엘살바도르에 번진다. 과테말라와 엘살바도르는 합병해 센트로아메리카를 형성한다.
- 주앙 "캣피쉬" 고메즈가 군부의 지지를 상실하고 베네수엘라 권력계에서 축출되었다.
2.11. 1929년
- 볼리비아가 파라과이 영토를 공격하며 차코 전쟁이 발발했다.
2.12. 1930년
- 3월 6일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수상이 사망했다.그는 독일 역사상 오토 폰 비스마르크 다음으로 성공적이고 인기있는 수상이었다. 프란츠 폰 파펜이 뒤를 이었다.
2.13. 1931년
- 센트로아메리카의 커져가는 위협에 니카라과와 코스타리카가 통합해 연합주를 형성한다.
- 오스트리아 최대의 은행 크레디탄슈탈트가 짧지만 거대한 금융 스캔들 이후 거의 망하기 직전까지 갔다. 기독교사회당의 주요 정치인이 책임 당사자로 시사되었고 오스트리아 정치계에 대한 기독교사회당의 영향력에 타격을 입혔다.
- 파산과 몇년간의 불안을 겪은 칠레에서 생디칼리스트 반란이 일어나 해군과 육군의 지지에 힘입어 실각된 정부를 승계했다. 아르투로 푸가가 국가 지도자가 되었다.
- 칠레가 파타고니아 반란을 돕기 시작했다.
2.14. 1932년
- 사회주의자들이 충분한 주에서 당선되어 어떠한 정당도 과반수를 차지할 수 없게 되자 하원에서 허버트 후버가 재선되었다. 민주당의 지명을 받지 못한 휴이 롱은 미국제일당을 창당, 이후 미 남부는 당시 휴이 롱이 주지사로 있던 루이지애나를 중심으로 워싱턴의 통치에서 벗어나게 된다.
- 남아프리카에서는 배리 헤어초크가 선거에서 당선되었고 남아프리카의 공화국화를 선언했다. 남아프리카는 연합국을 떠났다.
- 옥타비오 망가베리아가 브라질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2.15. 1933년
- 차코 전쟁이 파라과이의 승리로 끝났다. 볼리비아는 혼란에 빠졌고 공화국은 독재정으로 전환되었다.
- 브리튼 연방이 표면상으로나마 양원제를 되살린다.
- 페트코 스타니오프가 불가리아의 총리로 임명된다.
- 13대 달라이 라마가 사망하고 5대 레팅 린포체가 섭정을 맡는다.
- 루마니아에서 카롤 2세가 갑작스레 선거를 실시하고, 코르넬리우 젤레아 코드레아누가 이끄는 철위대가 당선된다.
2.16. 1934년
- 차코 전쟁의 영웅인 게르믄 부쉬 베체라가 볼리비아를 쿠데타를 통해 장악한다.
- 파라과이 라파엘 프랑코 정권이 무너진다.
- 온두라스에서 대규모 직업군인 숙청이 벌어진다.
2.17. 1935년
- 전직 군인이었던 마마듀크 그로브가 칠레 생디칼리스트 공화국의 두번째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 아르헨티나 정부가 소위 크리스마스 쿠데타에 의해 LPA에 잠식되었다.
- 영국령 인도 총독 루퍼스 아이작스가 사망함에 따라 영국령 인도에 권력 공백이 생긴다.
[1]
리비에르 장군이 고안한 프랑스의 방위 체계
[2]
실제 역사에서도 베트만홀베크의 후임 총리를 맡았으며 독일 총리 중 최초로 비귀족 출신이었다. 독일의 승리를 쟁취하려는 군부와 빠른 평화를 원하는 의회 사이를 전혀 조율시키지 못하고 110일만에 퇴임.
[3]
러시아는
종교적 이유로 1918년에야
그레고리력을 도입하게 된다.
[4]
실제로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독일은 광활한 영토를 얻었지만, 무려 110만 명의 치안유지군을 점령지에 투입하여 가용병력은 더 적어졌다. 이 세계관에서는 카이저가 조약이 맺어지자 마자 획득한 영토와 국가들에 독일 제국의 귀족들을 꽃아넣어 지도층 공백을 막고 치안유지를 현지 협력자들에게 맞기는 방식으로 대참사를 피해갔다고 한다.
[5]
원래는 춘계 대공세는
루덴도르프 공세 라고도 하는, 연합군이 아닌 독일이 실행한 공세이다.
[6]
백군 소속의 장군으로 1917년에 쿠데타를 일으켜 10월 혁명이 촉발되고 안그래도 흔들리던 케렌스키 정부에 막타를 치게 된다. 쿠데타 실패 이후 감금되었다가 러시아 내전이 일어나자 탈옥해 돈 방면에서 백군을 이끌다가 예카테리노다르 전투에서 포격에 맞아 전사한다.
[7]
1차 대전 당시 팔레스타인에서 활약했다.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의 상관.
[8]
레닌을 암살하려던 사회혁명당 당원, 실제 역사에서는 암살에 실패.
[9]
레닌 당시 볼셰비키의 지도자들 중 하나. 레닌 사후 트로츠키를 경계해 스탈린과 손잡지만 트로츠키가 실각한 이후 스탈린에게 숙청당했다.
[10]
1차대전 당시
독일 제국 해군 제독. 대표적인 성과로는
유틀란트 해전이 있다.
아트미랄 히퍼가 이 사람의 이름을 딴 것
[11]
사회혁명당 소속의 혁명가로 러시아 제국의 많은 요인들을 암살했다. 케렌스키 내각에서 전쟁부 차관을 역임했으나 코르닐로프를 도운 혐의로 해임. 러시아 내전 이후 해외로 망명했는데 1924년에 소련에 재입국하는 모험을 했다가 금방 체포되어 사망.
[12]
에티오피아 제국 최초의 여제. 전임자 이야수 5세가 이슬람교로 개종하고 1차대전 중 동맹국으로 참여를 시도하는 등의 행위를 벌여 폐위된 뒤 즉위. 자신은 보수적인 성향이었지만 진보적이었던 섭정
터퍼리 머콘는의 영향으로 에티오피아에 많은 발전을 가져왔다.
[13]
별명은 '미친 물라'. 데르비쉬를 세우고 에티오피아, 이탈리아, 영국의 공격을 받았지만 지지 않고 지속적으로 타격을 입혀왔다. 1차대전 중 동맹국과 연계를 꾀하기도 했다. 1920년 영국 공군의 폭격으로 패배하고 재기를 노리나 1921년 사망.
[14]
서부전선, 갈리폴리, 그리스 등지에서 작전을 펼쳤다. 1차대전 말기에는 메소포타미아 방면에서 종군
[15]
빌헬름 2세의 3남
[16]
토고의 총독을 맡았고 자신은 수락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21일동안 통합 발트 공국의 공작으로 추대받기도 했다. 네덜란드의 여왕
빌헬미나의 부군 하인리히가 이 사람의 동생.
[17]
참고로 이 사람은 호이4 바닐라에서 헝가리가 파시스트 국왕을 선출하면 헝가리 왕국의 국왕으로 나온다.
[18]
빌헬름 2세의 동생으로 1차대전 중에는 해군에 복무.
[19]
빌헬름 2세의 4남. 훗날 나치에 가담하였다.
[20]
원래 역사에서도 핀란드 국회에서 왕으로 지명되나 달가워하지 않았고 독일이 패배하면서 핀란드도 공화정이 되었기 때문에 2개월만에 왕위를 반납했다.
[21]
모나코 공작, 알바니아 왕 등에 물망이 올랐으나 모두 실패했고 결국 리투아니아 의회의 추대를 받아 왕으로 선출되었고 그 자신도 수락했으나 리투아니아 내부의 반발과 독일의 반대로 리투아니아에는 가보지도 못했고 독일이 패배하면서 리투아니아는 그대로 공화정이 되었다.
[22]
테셴 공작
카를 루트비히의 증손자. 그의 아버지는 그를 폴란드인으로 기르려 했으나 오히려 이에 반발해 우크라이나인으로 자라났고 전쟁중엔 우크라이나인으로 된 군대를 이끌거나 우크라이나 왕국 추진 운동에서 왕으로 추대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인민 공화국의 내각에도 참여했고 공화국이 멸망하자 스페인, 프랑스 등을 떠돌았다. 2차대전 초기에는 친나치적인 행보를 보이다가 나치가 우크라이나에 독립을 안겨줄 의도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자 반나치로 전향해 영국에 첩보를 넘겨주었고 소련의 점령 이후에는 프랑스 측의 스파이로 활동하다가 소련에 체포되어 옥중에서 사망하였다.
[23]
독일어로 세계전쟁, 그러니까 세계대전(World War)이다.
[24]
프랑스의 활동가, 저술가. 아나코생디칼리즘 이론가
[25]
프랑스의 정치인. 처음에는 사회주의자였으나 이후 우익으로 전향해서 정치에 입문. 1차대전기에 몇차례 총리로 재직하나 이때는 두각을 나타내지 못하고 외무 장관으로 재직하는 동안
루르 점령의 철회,
로카르노 조약의 체결 등 평화를 위해 대독 유화책을 제시했고 1926년 노벨 평화상을 수상한다.
[26]
러시아 제국, 백군 소속의 장군.
붉은 군대는 가장 강력하다의 검은 남작. 러시아 내전 초기에 카프카스에서 대활약하나 모스크바로 북진할 것을 명령한 데니킨과 달리 동진해 시베리아의 콜차크와 연계하는 쪽을 고수했기 때문에 물러났다가 데니킨이 실각하자 크림방면 백군의 총지휘자가 된다. 토지개혁을 실시하고 우크라이나, 조지아의 독립을 인정하는 등의 개혁을 시행하나 이미 때는 늦었고 백군이 패배하자 망명해 망명 백계 러시아인들의 지도자로 활동하나 1928년 돌연사. 유족들은 소련의 암살 가능성을 제기했다.
[27]
러시아 제국, 백군 소속의 장군. 1차 대전 중에는 캅카스 방면에서 오스만을 열심히 털어먹었고 러시아 혁명 당시에는 코르닐로프의 반란에 호응해 발트 방면에서 들고 일어났다. 에스토니아와 동맹을 맺고 친구였던
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의 연줄로 핀란드 백군과의 동맹도 노렸지만 명목상 총지휘관인
알렉산드르 콜차크 제독이 에스토니아와 핀란드의 독립을 인정하지 않으며 연계는 물 건너 갔고 영국의 지원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함락 직전까지 가나 모스크바에서 증원이 들어오며 그대로 물러났다. 이후 볼셰비키에 패배하고 재산은 붉은 군대에 몰수당해 해산되는 북서부 백군의 퇴직금 명목으로 사용되었고 자신은 프랑스로 망명해 거기서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