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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5 01:31:40

Hearts of Iron IV/카이저라이히/국가/아시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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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동남아시아
2.1. 시암 왕국(SIA)2.2. 네덜란드령 동인도 (DEI)2.3. 독일령 동아시아 (GEA)
3. 동아시아
3.1. 공사관 도시 (LEC)3.2. 몽골 (MON)3.3. 중국
3.3.1. 마가군벌 (XSM)3.3.2. 민감기의군 (CHI)3.3.3. 봉천정부 (FNG)3.3.4. 사천군벌 (SZC)3.3.5. 산동군벌 (SQI)3.3.6. 산서군벌 (SHX)3.3.7. 신강군벌 (SIK)3.3.8. 양광군벌 (GXC)3.3.9. 운남군벌 (YUN)3.3.10. 청 조정 (QIE)3.3.11. 팔성연합 (LEP)3.3.12. 호남군벌 (HNN)
3.4. 트란스아무르 (TRM)
4. 중동
4.1. 자발 샴마르 토후국 (JBS)4.2. 나지드 하사(SAU)4.3. 조지아 공화국 (GEO)4.4. 페르시아 (PER)4.5. 예멘4.6. 무스카트
5. 남아시아
5.1. 인도 자치령5.2. 바라트 코뮌5.3. 토후 연방

[clearfix]

1. 개요

Hearts of Iron IV/카이저라이히의 주요 아시아 국가들을 정리한 문서.

2. 동남아시아

2.1. 시암 왕국(SIA)

2.2. 네덜란드령 동인도 (DEI)

1936년 동인도 제도

1925년 생디칼리슴 폭동이 없었다면 네덜란드 제국이 가진 '왕관의 보석'은 안정의 횃불이 되었을 것이고, 네덜란드가 새로운 시장에 상품 (설탕, 커피, 석유)를 판매하기 위해 미텔오이로파와 가까워진 덕에 이익을 보았을 것입니다. 현재 제대로 다시 강화된 독일의 경쟁력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경제 성장은 그럭저럭 이어졌으며 안정도 같이 찾아왔습니다.

하지만 그뿐만은 아닙니다. 네덜란드 정부는 동쪽의 땅de oost 없이는 네덜란드가 살아남을 수 없다 믿으며 어떠한 독립에 관한 요구도 묵살했고, 사람들의 독립 열망은 점점 거세지고 있습니다. 식민지 정부의 많은 사람들은 경제가 침체된다면 1925년이 반복되거나 더 나빠질 것을 우려하고 있습니다...

"뭐, 불경기가 올 것 같지는 않군!"
<colbgcolor=#eee,#444>
0% 전체주의
0% 생디칼리슴
0% 급진사회주의
0% 사민노동당
3% 자유민주연합
7% 자유당
4% 기독국민동맹
57% 네덜란드 동인도 협의회
29% 국가통일위원회
0% 국민대중주의
}}} }}}
시작 시점부터 현지의 독립운동 움직임이 포착되며 독립운동을 이벤트와 디시전으로 저지해 동인도를 계속 유지시켜야 한다.

대처를 잘못해서 독립운동 수준이 높아지면 인술인디아 독립전쟁이 발발하고, 패배하면 인술인디아 독립군과 평화협정을 맺어 인술인디아를 독립시키고 동인도의 영토는 서파푸아 부근으로 축소된다.

추가로 모국인 네덜란드의 상황에 따라 네덜란드령 동인도의 미래도 결정되는데 네덜란드가 현상유지를 잘 한다면 상관이 없으나 만약 좌파가 득세해 생디칼리슴 정권이 들어설 경우 이에 반발한 네덜란드령 동인도가 독립을 선언하게 된다.
이후 라이히스팍트 가맹을 청원하며 독일에게 보호를 요청할 수 있다.

2.3. 독일령 동아시아 (GEA)

동방의 진주 Pearl of the Orient

1926년에 영국이 붕괴하자, 황립해군은 논란의 여지 없이 동방 해역의 지배자이자 동양에서 서구가 주도하는 질서의 수호자로 자리잡았습니다. 영국의 '중국 주둔지'가 오스트랄라시아로 후퇴하면서 그들의 아시아 식민지와 조계는 반란에 취약한 상태가 되었으며, 독일만이 제공할 수 있는 보호가 필요해지자 수에즈에서 칭타우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식민지와 조계로 구성된 띠가 완성되었습니다. 하지만 이 위대한 업적에는 대가가 있었습니다.

동아시아에서의 우리의 확장은 그 속도와 규모가 이례적으로 빨랐으며, 본토에서 분리된 다양하고 복잡한 일련의 식민지를 관할하게 되었습니다. 현지인들은 우리의 우월성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지만, 한편으로는 그들이 붕괴하면서 함께 붕괴한 원래의 행정체계를 복구하거나 완전히 재편하기에는 정세가 너무나 혼란스러웠고, 원 행정부도 과대 팽창한 상태였습니다. 따라서 독일령 동아시아는 식민지나 형식상의 자치령이 아니라 비교적 공정한 제국해군청이 현지인들의 요구를 충족하고 이윤을 창출해내며 다양한 보호국들과 대립하는 동시에 이 모든 것을 보호해야 하는 위임통치령으로 설립되었습니다.

우리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일본은 여전히 위협적인 존재로 남아 있으며, 우리를 동양에서 몰아내고 자신들의 영토로 삼으려 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용감한 병사들은 공사관 도시를 보호하고 있고, 우리의 영광스러운 전함들은 지금도 대양을 가로지르며 우리의 해안을 순찰하고 있습니다.

내부적인 문제로 가득했던 과거는 아직 우리가 예상치 못한 심판이 남아 있다는 걸 시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심판의 시기가 오면, 심판을 이겨내는 건 다름 아니라 제국해군청과 황립해군의 의무가 될 것입니다.

"중국은?"
중국과 동아시아

중국 내 독일 관할 구역은 우리 통치 하에 있으며, 미국이 중재를 맡은 1928년 상하이 회담에 따라, 중국에서의 독일의 권리는 타 열강들과 동일한 것이 되었습니다. 칭다오시는 중국에서의 독일 전초기지가 되었으며, 현대적인 도시, 번성하는 항구, 동양의 상업 중심지로 변모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자오저우 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이 합법적인 것은 아닙니다. 1928년 합의의 내용과 다르게, 동아시아 총괄경영 감사이사회는 비공식적으로 수많은 선박, 공장을 관리하고 있습니다.

난징군벌 쑨촨팡은 중국 중앙 정부로부터 자치를 인정받기 위해, 팔성연합 내부로부터 광범위한 경제적 양보를 받아내는 대가로 일방적인 무기 거래를 받아들였습니다. 비록 베이징과 국제 사회로부터 인정받지는 못했지만, AOG는 팔성연합과 중국 깊숙한 곳까지 영향력을 끼치고 있습니다.

베를린은 일본에 대항하기 위해 중국을 완충지대로 삼는 우리의 전략을 지지하고 있으며, 그곳에 배치되는 우리 병사들은 정예 병사들입니다. 중국 정부와 팔성연합은 우리의 지원을 받을 것이며, 우리는 일본의 중국 대륙 잠식을 두고 보지 않을 것입니다.

"멋지군! Sehr Gut!"
<colbgcolor=#eee,#444>
0% 동아시아 전체주의자
0% 인도차이나 생디칼리스트
0% 사이공 결사
5% 독일 사회민주당 지지파
5% 진보인민당
5% 국민자유당
10% 술탄 연맹
10% 식민행정부
60% 식민행정부
5% 말라야 국가연맹
}}} }}}
설명에 쓰여있다시피 독일령 칭다오의 해군성이 대전쟁의 결과물인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메콩강 동쪽 지역)와 영국 혁명의 여파로 버려진 영국령 말레이 남부 지역 및 북부 보르네오를 집어삼켜[1] 대대적으로 확장하여 기존의 독일령 뉴기니 독일령 사모아까지 하나로 합쳐진 독일령 식민지. 이들을 통해 독일 제국은 중국 조계지 및 팔성연합에 영향력을 미치고 일본 제국을 견제하고 있으며, 아시아에서의 독일의 우위를 지키기 위해 매우 강한 해군력을 보유하고 있다. 지도자는 SMS 엠덴의 갑판사관 출신 헬무트 폰 뮈케.

게임 시작 후 중점 한두 개 찍고 나면 팔성연합이 붕괴된다. 의용군을 보낼 수도 있고 물자를 보내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방팔방이 포위당한 팔성연합은 왕징웨이의 국민당군하고 천댜오위안의 안경군벌에게 양쪽으로 싸먹혀 순식간에 멸망한다. 의용군을 보내도 도착하기 전에 후딱 합병당하는 경우도 많으므로 남경군벌 살리고 싶으면 보낸 뒤 기도나 하자.

검은 월요일 이후 1년이 채 되지 않아 인도차이나에서 사이공 지역을 중심으로 베트민 반란이 터진다. 이 전쟁은 사실상 카이저라이히 버전 베트남 전쟁으로 독일령 동아시아의 무장 수준이 더 우월하지만 장악한 지역에 각종 사보타주가 일어나고 공격하기에 불리한 지형과 보급 부족에 허덕이며 고생하게 된다. 통킹만까지 빼앗기면 이벤트가 일어나 독일이 결국 발을 빼며 인도차이나가 독립하고 만다.

독립 전쟁을 일으키기 싫다면 다음과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
미텔아프리카와의 유대 강화 중점은 최대한 빨리 찍어 고문단을 받아두자. 붕괴해서 남아프리카에 넘어가는 순간 미텔아프리카 고문단 중점은 독일 제국 혹은 자신이 평협창에서 해방시키기 전까지 영영 닫혀버린다. 그나마 미텔아프리카 리워크 이후 웬만해서는 미텔아프리카가 붕괴되지 않게 된 것이 다행이다.

만일 다른 루트를 타서 반란이 터졌을 경우 인도차이나 생디칼리스트 반란을 제압하고 싶으면 베트민에게 반드시 넘어가는 사이공과 메콩 삼각주 바로 곁에 이런 식으로 참호를 파 방어전으로 일관해야 한다.[2]

하지만 너무 시간을 끌어서는 안 된다. 후술할 일본의 침공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거기에 항복 한계도는 상당히 높은 편. 사이공을 함락시켰다 하더라도, 인도차이나가 강 끼고 방어전으로 일관할 경우 독일 제국이 이를 뚫을 방법은 없다. 한 번에 강을 건너든가, 아니면 뺐다가 다시 미는 식으로 메콩강을 무조건 건너 식민지 주를 함락시켜야만 한다. 다행인 점은 베트민에게 항공기와 함선은 없어, 동아시아 함대가 함포와 항공기로 적극적인 지원을 넣을 수 있다는 것. 비정통적 접근 중점만 찍어도 베트민을 진압하기에 충분한 전투력 보너스를 얻을 수 있으니, 일단 앉아서 중점 진행만을 세월아네월아 기다리자. 바오다이를 계속 밀어준 뒤에 베트민이 전쟁을 벌일 경우 베트남이 독일의 괴뢰국으로 떨어져나가는 것을 허가할지 말지 정하는 이벤이 뜬다.

0.10 Blood on the Yangtze 패치에서 중국과 관련된 컨텐츠가 대거 추가되었다. 중국에 독일 자본이 대거 투자되어 있다는 점을 반영해 친독한간인 팔성연합(남경군벌)을 적극 보호하려고 하고 팔성연합이 소유한 영토와 AOG의 지지율에 비례해서 경제적 이익을 얻게 된다.

인도차이나와의 전쟁이 어떻게든 마무리된 이후에는 일본이 이 지역으로 눈독을 들이게 된다. 독일은 본토에서 프랑스를 상대하느라 정신이 없으니 육지에서는 청나라가 잘 싸워주기를 기대하며 스스로 주요 식민지를 방어해야 한다. 인술인디아와 방콕이 모두 공영권에 들어왔다면 선택과 집중, 포위섬멸이 최선이다. 방콕만 들어왔다면 물론 방콕만 밀면 끝.

사단을 최대한 펌핑해 방콕, 말레이, 보르네오, 뉴기니에 전선을 깔 수 있으면 깔아서 최대한 다 상대한다고는 생각하되, 안 될 것 같으면 혹은 뭔가 막히면 줄 건 준다는 마인드로 주저없이 빼고 방어선을 재구축하는 등등 유연하게 플레이해야 한다.

먼저 뉴기니. 거기에 있을 쪽수 많은 일본군의 공격을 한 번 막은 뒤 바로 역공해서 유일무이한 항구를 딴 다음 일본군을 포위섬멸하는대로 바로 버리고 보르네오로 합류한다. 사단이 모자라기 때문에 예비대를 보르네오로 빼줄 필요가 있다. 물론 뉴기니를 미리 장악해뒀다면 걱정하지 말자.

보르네오는 일진일퇴를 반복하고 후방 상륙에 주의하다가 예비대 및 방콕의 주력부대가 합류하는대로 공격으로 전환, 보르네오섬의 항구를 최우선으로 노리고 포위섬멸에 집중한다.

말레이는 방어로 일관. 그 사이 방콕에서는 한타 막고 역러쉬. 방콕을 반드시 항복시킨다는 생각으로 밀어붙여 방콕을 이탈시켜야 북부 말레이와 인도차이나반도에 코어 박을 수 있고 아무튼 이 다음이 편하다.

방콕을 이탈시켰으면 일부는 인도차이나와 말레이에 상륙 방어 돌려놓고 보르네오로 재배치, 추가적으로 상륙해오는 놈들과 기존 부대와 일진일퇴중인 적을 섬멸해야 한다.

일본 해군은 걱정할 필요 없다. 독일 제국 동아시아 함대는 캐나다 자치령 수준의 함대는 가지고 있고, 훈련시켜놓으면 제 역할을 다 해준다. AI는 해군을 여기저기 분산시켜놔 운영이 비효율적이다. 다가오는 놈을 전력을 다해 요격한다고 생각하고 하면 편하다. 상륙 방어는 주요 식민지 상륙만 막아도 수월하다. 단, 훈련은 물론 연구도 충실히 해서 디버프를 줄이고 버프를 늘리고 함대 제독도 능력자 위주로 잘 갖춰놓아야 한다.

최종적으로 일본 본토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항복시키고 먹을 수 있는 최대한의 강역을 먹어치우면 된다. 러시아가 빨갱이 내전이 터진 경우 일본은 절대 해방하지 말고[3], 그 외의 경우 일본을 알아서 굴리고, 인술인디아와 필리핀, 대만 등등의 땅을 직접 통치하여 공장을 늘리자. 그 중 인술인디아는 후술하듯 코어 박는 것이 가능해서, 본토가 붕괴됐을 때 탈환 전쟁을 위한 인력으로 써먹을 수 있다.

만일 본토 및 라이히스팍트가 무너지는 걸로 대전쟁이 끝난 뒤에도 인도에서 아직까지 내전 중일 경우, 바라트 코민에 정당화를 걸고 공격, 토후 연방에 통행권을 얻어 무조건 밀어내자. 3인터에 가입하지 않은 바라트를 밀어낼 수 있을 때 밀어내둬야 본토 탈환 시 골칫거리일, 3인터의 인력 담당 중 하나를 이탈시킬 수 있다. 인도 자치령의 경우 이미 협상국에 가입되어 있으므로 역시 걱정할 건 없다. 적어도 본토를 찾기 전까지는 독일 제국을 치진 않으니까. 인도 자치령이 망했다면 더욱 좋고.

캄보디아와 라오스, 북부 말레이[4], 파푸아뉴기니, 인도네시아(인술인디아) 전역에 코어를 박는 것이 가능하다. 하지만 종속국이라 이들 국가로 쳐들어갈 수 없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 해결방법은 독일 제국 본국이 전쟁을 벌이든가, 독일 제국이 붕괴되어 식민지 통제력을 상실해야 하므로...0.23까지는 그랬다. 0.24 기준 독일령 동아시아는 싱가포르와 칭다오에만 핵심 주를 가진 상태로 시작하며 나머지 모든 지역에는 코어를 박을 수 없다. 즉 인력도 없고 싱가포르와 칭다오에 상륙당하면 그대로 항복당하면서 끝이란 소리.

여담으로, 독일령 동아시아의 조선소 7개는 독일 제국 본토에서 할당해서 사용하고 있다.[5] 즉 본토가 함락당할 경우 조선소는 없다는 뜻. 중점을 찍고 미리 지어두는 식으로 대책을 마련해두자.

0.23 기준 라이히스팍트 붕괴시 독일 제국 AI는 동아시아 함대 지휘권을 인수한다.[6] 만일 라팍이 밀리고 있을 때 일본을 항복 직전까지 몰아붙였으면 라팍 붕괴까지 이벤트를 기다리자.

0.24 기준 싱가포르와 칭다오를 제외하고 독일령 동아시아 전역의 코어가 다 빠졌다. 따라서 식민지 문제 국민정신도 징병 가능 획득치 -85% 같은게 빠졌다. 이후 국민정신을 통해 단순히 항복했다고 독일이 대뜸 평협을 맺지 않도록 '독일의 무기' 국민 정신을 통해 '200k 이상의 핵심 주 및 영유권 주가 있을 경우 독일은 평협하지 않음'을 추가해 항전 자체는 가능하도록 해놓았다.[7]

2.3.1. 인도차이나 (INC)

<colbgcolor=#eee,#444>
18% 신월혁명당
19% 동양혁명회
40% 고망회
23% 월남국민당
0% 대월민정당
0% 동양입헌당
0% 진보당
0% 국가연합회
0% 보황당
0% 대도삼기보도
}}} }}}
게임 초반 독일령 동아시아 식민지에 맞서 베트민, 베트남 국민당 같은 독립운동 단체들 중심으로 베트남과 캄보디아, 라오스 일부[8]가 들고 일어난 반란군이다. 컨텐츠는 오래됐지만 풍부해서 구정 공세 호찌민 루트의 땅굴, 처음 조우한 독일 식민지군 소속 탱크 상대로 혼비백산하는 베트민 게릴라 등 원 역사의 베트남 전쟁을 오마주한 내용이 많은 편이다.

독립 전쟁에서 이기려면 위에 나온 독일령 동아시아와는 반대로 하면 된다. 초반 정글에서 포위 기동으로 최대한 식민정부군의 안그래도 부족한 맨파워를 피말려버리고, 멍청한 AI가 해안가에 아무런 주둔군도 배치 안해놓고 있다가 바로 사이공 따여서 항복하는것과 반대로 사이공, 다낭 일대엔 항상 상륙작전 대비 수비군 주둔 시키며 후에쪽으로 쭉쭉 밀고 올라가면 어렵지 않게 독립을 이룰수 있다. 꼼수지만 영 독립전쟁 싸우는거 자체가 싫으면 아예 반란 터지고 플레이 국가 전환 이전 독일령 동아시아로 군대고 해군이고 다 해체해놓을수도 있다.

그러나 진짜 본게임은 독일령 동아시아 식민지에서 독립하고부터이다. 일단 선거 이벤트와 정치 디시젼으로 집권 세력을 정하게 되는데 좌익에선 전형적인 유럽에서 유학하고 온 지식인들 중심으로 베트남 산업화, 도시화를 주장하는 정통 생디, 중국 국민당 좌파의 다이리 같은 강력한 전위당 통제를 주장하는 토털리스트, 여성해방, 성역할 해체, 종교적 혼성주의 같은 베트남 전통 고유의 농민 공동체 전통에 기반한 농본 사회주의를 주장하는 급사 세가지 루트가 있고, 유일한 비좌파 루트로 중간에 일본의 영향을 받은 유신파 내셔널리스트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공영권에 가입하는 우파 루트가 있다.

친일 우파루트를 탔으면 이후로 남은건 적당히 일본 딸랑이 노릇을 하며 2차 세계대전 터지면 일본 따라 남아있는 독일령 동아시아 숨통 따는거 정도밖에 없지만 다른 3가지 좌파루트를 탔으면 본격적인 시련은 이제 시작일 뿐이다. 보통 공영권에서 유일하게 일본한테 점령당한 속국이 아니라 동맹으로 들어오는 시암이 인도차이나가 차지하고 있는 캄보디아, 라오스쪽 땅에 침을 흘리며, 일본 또한 남진론 포커스 연 이후 자연스럽게 베트남을 침략하게 되기 때문이다. 일본의 침략은 일본 포커스 위치상 타이밍도 빠른 편이고[9], 국력도 압도적이며 무엇보다 대부분의 경우 지상으로 연결된 태국이랑 같이 처들어오느라 자력으로 막는 게 거의 불가능하다.

대독 독립전쟁 때 사용했던 게릴라전 인터페이스 메뉴, 강과 정글을 낀 방어전 같은 노하우를 총동원하면서 일본의 침략을 막으면서 동시에 거대 세력에 가입해서 강대한 열강들의 힘을 빌려 일제의 야욕을 꺾어야 한다. 그런데 인도차이나 컨텐츠 자체는 풍부한 편이지만 만든 지도 오래됐고 최근 리워크된 인근 국가들과 상호 연계도 별로 안좋아서 세력 가입할 수 있는 중점은 평화 중에만 탈 수 있는데, 독일에게서 독립 후 일본-태국 동맹이 처들어 올때까지 막간 기간은 빠듯하다. 이 시기에 최대한 빨리 외교 포커스를 뚫어서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해야 한다. 중국에서 국민당 좌파가 연합전쟁에서 승리하고 북벌까지 완수했거나 인도의 바라트가 이른 인도 아대륙 통일을 달성해서 자체 아시아 생디칼리스트 세력을 만든 상태라면 여기 가입해도 좋지만 보통 국좌나 바라트가 자체 세력 창설하는 건 한창 이후인 게임 후반에나 볼 수 있으니 가장 안정적인 건 역시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해서 유럽과 세계의 생디 동지들에게 도움을 청하는 것이다.

외교 포커스 빨리 찍어 일본이 처들어오기 전에 제3인터내셔널의 보호를 확보해도 국제 생디들의 중심은 머나먼 프랑스, 영국인 반면 자체만으로도 덩치와 국력이 더 큰 태국과 일제의 야욕은 가깝게 있다. 태국과 일본의 침략으로 생디칼리스트-공영권간 태평양전쟁이 터진다 하더라도 유럽의 동지들이 독일, 오스트리아 다 밀고 2차대전 승리한이후 아시아 태평양으로 진출하는거나, 설령 CSA가 미국 내전에서 승리해서 역사적 미국의 태평양 진출하는거나 한창 걸린다. 여기서 만약 일본과 공영권의 주력을 조금이라도 분산시킬수 있는 생디 오스트랄라시아가 있으면 그나마 체감 난이도가 많이 떨어지니 게임 초반에 생디들이 오스트레일리아 먹기를 기대하거나 정 아니면 그냥 커스텀 게임 설정에서 오스트랄라시아 적화로 설정해버리자. 이렇게 피똥싸면서 태국과 일본의 초기 공세를 어찌 막으면 AI의 한계와 게임 진행상 일본은 마치 현실 그대로 인도차이나도 똑바로 정리 못한 상태에서 대독 전쟁 터뜨리고, 중일전쟁, 인도침략, 호주 침략, 하와이 침략 마구잡이로 터뜨리다가 결국 통일 미국, 유럽에서 싸움 정리하고 아시아로 돌아온 제3인터/독일, 중국이나 러시아등에게 두들겨 맞고 참교육당해서 패망한다. 일제가 패색이 짙어질때 태국으로 들이치면 태국령 캄보디아, 라오스를 뜯어오고 공영권에서 이탈시키는 조건으로 조기휴전 할수도 있고, 끝까지 태국을 밀어서 태국도 적화시키고 동남아 패자도 될 수 있다.

상술된거 처럼 만들어진지 상당히 오래된 컨텐츠임에도 불구하고 현실 베트남 전쟁의 패러디한 맛과 대독 독립전쟁->대일 항전->주변 외교적 상황에 따라 중월전쟁까지 게임 내적으로 할것도 많고 난이도도 딱 적당히 도전욕을 자극할 정도이며, 20세기 식민지 아시아의 민족 독립 운동, 사회주의 운동을 다루는 내용도 풍부하며 카라 제작진에도 베트남 사람들이 꽤 있어서 제작진과 팬덤 양쪽으로 인기 많은 태그 중 하나이다. 설정상 호찌민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가 몰락하며 독일령 동아시아가 새로운 주인으로 들어오는 과정에서 민족 봉기를 계획하다가 독일령 동아시아 당국에게 잡혀 비밀 처형 당했고, 나머지 베트민은 이를 모르고 호치민의 생사를 여전히 찾고 있는 상태이다. 보응우옌잡은 그대로 등장한다. 그리고 세계관 내에서 프랑스 식민제국이 한번 망하고 프랑스 본토는 사회주의 혁명정권이 들어오면서 어제의 식민 지배자였던 프랑스인들은 이제는 오히려 반독 반제국주의 투쟁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게 되면서 베트남 젊은이들 사이에 프랑스어, 바인미 같은 프랑스 문화가 대유행하자 베트민 혁명 지도층은 눈살 찌푸리며 이를 막아야 하나, 이제는 프랑스가 적이 아니라 동맹이니 방치하냐 갈등하는 깨알같은 내용도 많다.

3. 동아시아

3.1. 공사관 도시 (LEC)

<colbgcolor=#eee,#444>
0% 특수정보국
0% 중국 생디칼리슴당
0% 국민당 민생파
1% 국민당 민권파
4% 주홍사
46% 주상하이 미국상공회의소
11% 홍콩 클럽
5% 공부국
19% 동중국이사회
14% 지나특별본부
}}} }}}
1925년, 영국의 생디칼리슴 혁명으로 인해 영국 소유의 중국 조계지들이 위험에 처하자, 독일과 일본은 군을 파견하여 조계지들을 차지하기 위해 신경전을 벌인다. 이후 1928년 4차 직봉전쟁이 독일-일본의 전면전으로 확장되기 직전 미국이 개입해 타국의 중국에 대한 개입을 금지하고 각국 간에 이익을 공평하게 분배하는 타협안을 내놓았다. 그 결과 7개국[10]의 조계지를 모두 모으고 확장해서 공사관 도시가 탄생했다.

미국의 영향으로 세워진 국가이니만큼 현 대표는 미국 대사가 맡고 있다. 그러나 게임 진행상 미국이 내전으로 무너지면 대표 자리가 영국, 독일, 일본 대사 중 한명에게 넘어갈 수 있다. 미국 대사가 유임되거나 영국 대사가 대표가 되면 중립을 유지하거나 협상국에 가입한다. 독일 대사와 일본 대사는 당연히 각각 라이히스팍트, 공영권에 가입하려하고 상대편 대사를 공사관에서 추방해버릴 수 있다. 공사관 도시의 자금을 제대로 관리하지 못하면 파산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때는 상하이만 남기고 남은 영토는 독일령 동아시아, 일본, 동중국 등으로 넘어가버린다. 상하이와 홍콩이 같은 소속으로 들어간 덕에 홍콩의 삼합회와 상하이의 청방이 모두 날뛰고 있고 조직 범죄 관련 이벤트들이 심심치 않게 발생한다.

군대 관련 중점 중에는 외국인 자원자들을 모집하거나 중국인 군인들을 모집하는 중점으로 갈린다. 중국인 모집 루트에서는 인구 징병보너스와 중국 출신 장군 한명을 준다.

물론 이러한 모든 정책 결정들은 각국 대사들이 회의 및 표결을 통해 행사하므로 가부결 여부에 따라 군비 증강 등등이 불발될 수 있다.

3.2. 몽골 (MON)

<colbgcolor=#eee,#444>
0% 몽골 인민당
0% 몽골 인민당
0% 몽골 인민당
17% 몽골 인민당
0% 몽골 자유당
0% 시장당
0% 보수민주당
23% 노요딘 의회
48% 러시아 군벌
12% 불교의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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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바와 차하르 지역, 현 몽골 영토만을 가지고 있어 주변 국가와 비교하면 국력이 약한 편이다.

시작시 지도자는 운게른[11]이나 이후 서부 혁명을 시작으로 한 세력다툼으로 운게른 유지, 몽골 인민당, 7대 창캬 후툭투, 데므치그돈로브 중 하나가 집권한다. 마가군벌과 티베트의 전쟁 중에 마가군벌의 뒤통수를 쳐서 영토를 뜯을 수 있고 이후로는 일본이나 러시아에게 빌붙게 된다. 운게른이 정권을 잡으면 중점을 통해 러시아와 협력하거나 독자노선을 걷고, 불교연맹이 집권하면 티베트를 본받아 신정국가로 바뀌면서 불교를 국교로 지정하는데 소수종교는 공존/금지 중에서 중점을 택해 정하게 된다. 인민당이 집권하면 민주주의 입헌군주국, 데므치그돈로브가 집권하면 귀족과두제 군주국이 된다.

어느 정치 체제를 선택하든 마가군벌에게서 영토를 뜯고 나면 범몽골주의를 주장하며 봉천, 신강, 러시아의 영토에 영유권을 주장할 수 있다.

몽골은 인구가 적기 때문에 어떤 루트를 타든 인력 한계를 늘려주는 중점을 받는데 운게른이나 불교의회 집권이 유리하다.

0.26.1 패치로 마가군벌과 신강군벌과의 국경이 재조정되었는데 판도가 역사적 고증을 따르느라 너무 못생겨졌다고 비판받고 있다.

3.3. 중국

0.24 패치 후 중국 내 모든 국가에 '군벌시대의 결점'이라는 디버프 국민정신이 추가되었으며 육군 경험치를 사용하는 '육군 개혁' 디시전 등으로 조금씩 개혁하며 해제할 수 있다.

3.3.1. 마가군벌 (XSM)

마가군벌 소개

마가군벌은 1880년대 이래로 청나라 아래에서 일했던 수많은 중국인 총독들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마씨 가문부터가 하나의 거대한 가문이 아니라 지배 지역에서 권력을 나누어 가진 세 가족들의 통합체일 뿐입니다. 첫 번째 가족은 1918년 가주 마안링이 죽은 이후부터 그늘에 가려진 상태입니다. 지금은 주로 두 번째와 세 번째 가족이 군벌을 주도하고 있으며, 이후 군벌은 여기서 번창하는 중입니다.

신해혁명이 일어났을 때 마안링이 이끌던 마가군벌은 처음에는 청나라의 편을 들었지만, 패배가 명백해지자 청을 배신하고 공화국 편을 들었습니다. 이후 마가군벌은 북쪽의 몽골과 남쪽의 티베트 양쪽 모두에게 공화국이 정당한 정부라는 사실을 강제로 인정받으며 서북부 중국 내에서 안정을 다졌습니다. 조만간 1918년 마안링이 사망하자 마가군벌은 크게 두 파벌로 갈라졌습니다. 간쑤와 닝샤를 지배하는 마부팡이 주도하는 일파와 조만간 칭하이의 지배권을 손에 넣게 될 마치가 주도하는 일파가 바로 그들입니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국민군이 남부 간쑤를 점령하자 군벌 구성원들은 한 편으로 모일 수 밖에 없었고 펑위샹 아래로 집결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국민군의 패배가 점점 더 가시화 되자 소수를 제외한 대부분의 군벌들은 편을 바꾸어 직예군벌 편으로 돌아섰습니다.

직예군벌이 청 황조를 복원하는 동안에도 충성을 지킨 마씨 일가는 비록 모든 파벌들이 중국 영토를 지키기 위해 목숨걸지는 않을지라도 대체로 신뢰할 수 있는 존재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항상 싸울 준비가 되어 있는 청 황조의 중요한 일원으로 발돋움한 지금은 쑤이위안까지도 지배합니다.

"세 가족은 번창할 것이다."
<colbgcolor=#eee,#444>
0% 혁명위원회
0% 국민통합전선
0% 노동자농민연합당
0% 서북 민주사회당
0% 서북 민주주의 동맹
0% 서북 민주자치연맹
23% 시닝 민정
17% 닝샤 민방위기구
45% 텐수이 군정
15% 시닝 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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겉으로는 마가군벌로 묶여서 표시되지만 내부적으로는 남부의 청해군벌과 북부의 감숙, 영하군벌로 나뉜다. 시작시 지도자는 간쑤의 마푸샹이나 시작한지 얼마 안되어 사망하고 칭하이의 마린이 지도자에 오른다.

남부에서는 일단 마린(사회보수주의)이 주도권을 잡았지만 그의 조카 마부팡(국민대중주의)은 삼촌을 비난하며 정권을 탈취하려 한다. 북부는 닝샤의 마훙빈(권위민주주의)과 간쑤의 마훙쿠이(후견전제주의)사이에서 분열되어서 서로 싸우고 있다. 일반적으로는 남부의 마린과 마부팡 사이에서 권력투쟁이 주로 일어나지만 북부에서의 집안싸움이 한쪽으로 결판 나면 남부에서 주도권을 빼앗아온다.

마린은 국민당, 연성주의, 봉천과 동맹할 수 있고 마린을 제외한 셋은 친 직예로 분류되나 중원의 전쟁에는 그다지 관심이 없고 주로는 위수 지역을 놓고 티베트와의 전쟁에 집중한다. 위수 지역의 분쟁은 디시전으로 결정되며 분쟁이 고조되다가 결국에는 티베트와의 전쟁으로 이어진다. 전쟁이 시작되면 몽골은 마가군벌을, 사천군벌은 티베트를 각각 공격한다.

마가군벌의 지도자가 마린, 마부팡, 마훙빈 중 한 명이면 국민당 좌파가 살아서 북벌을 성공했을 때 협상으로 괴뢰국 휘장 자치성이 될 수도 있다.

3.3.2. 민감기의군[12] (CHI)

민감기의군 소개

1927년 늦겨울, 중국 국민당의 국민혁명은 일련의 대규모 군사적 패배와 원정 지휘관 장제스의 사망 이후 좌절 직전에 있었습니다. 국민당의 국민혁명군이 파멸하자 리지선 장군은 직예군벌과 그들의 독일 추종자들에게 대항하는 장기간 항전을 하여 혁명을 지속하자고 국민혁명군 일부를 설득했습니다. 그는 이후에 쑹칭링과 덩옌다와 합류하였고, 1932년 상하이 봉기 실패 후 언젠가 있을 반격을 위해 장시 남동부와 푸젠 북서부 외딴 산악 촌락과 삼림 지대로 도피하였습니다. 한편 좌익이 지배하는 국민당 중앙위원회는 언젠가 중국을 해방하기 위한 망명정부를 조직하여 유럽으로 도피하였습니다

화남의 외딴 시골 오지인 이 곳에서, 쑹칭링의 대중주의 기반 정부는 지역의 조직 및 동맹한 마을과 관련있는 비밀에 쌓여있는 독특한 운동을 창조하였습니다. (남녀를 불문하고) 농민들은 구국이라는 사명을 완수할 젊은 혁명가들에게 영감을 주기를 바라는 국민혁명군 장교들에게 교육받고 훈련되었습니다. 그들은 국민당의 자유로운 중국에 계급이 없어야 한다고 배웁니다. 그들은 범죄 조직이 무기 밀반입과 공급 역할을 한다는 소문과 함께 상하이 중립지대에 있는 광대한 간첩, 정보원, 당 조직, 동료 좌익 네트워크에 추가로 도움받고 있습니다.

1932년 중국의 생디칼리스트, 사회주의자, 그리고 국민당원들은 중국 동해안 전역의 대규모 파업을 벌여 비열한 팔성연합의 무력화를 바랬습니다. 이는 잔인하게 진압되었지만, 중국인들에게 국민당이 다시 한번 귀환할지도 모른다는 희망과 믿음을 주었습니다.

국민당의 다수파

쑨원 선생의 혁명을 진정으로 계승한 이들로서 이들은 "단결"을 천명하기는 했지만, 좌파가 지배하고 있는 국민당은 점점 파벌주의적 정당이 되어가고 있습니다. 수년간의 거리감과 당원들 사이의 개인적 불신은, 당 내에 중요한 두 파벌이 형성되는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중앙위원회를 주도하는 파벌, 개조동지회[13]는 왕징웨이 의장[14]과 함께 유럽으로 망명한 급진파 및 중도파 사회주의자들의 연정을 대표합니다. 원래는 유럽에 거주하는 중국인들의 공동체와 공사관 도시 내에 조직을 둔 비밀조직이었던 개조동지회는 국민당이 대전쟁 이후의 사회주의 혁명으로부터 영감을 얻었던 1924년 당 "개조"에서 이름을 따왔습니다. 그런 만큼, 이들은 당이 정화, 및 개조되어야 하며 농민들과 노동자들로 이루어진 새롭고 혁명적인 국민혁명군이 창설되어 국민당은 물론 다가오는 물질주의적 "계급투쟁"의 선봉을 맡아야 한다고 믿습니다.[15] 개조동지회는 이를 위해 혁명이 위에서 이끌어져야 하며, 교양 있고 애국적인 간부들이 혁명의 승리를 위해 대중을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좌파가 지배하는 국민당의 둘째 가는 파벌은 쑹칭링과 함께 민감기의구로 도망간 이들의 파벌입니다. 이들은 중국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한 가장 훌륭한 방법은 직접적인 행동을 최대한 빨리 집행하는 것이라 말하며 자신들을 임시행동위원회라 선언했습니다.[16] 임시행동위원회는 반대로 혁명이 아래에서 위로 진행되어야하며, 덩옌다 장군 같은 "특출난" 개인들은 대중이 혁명적 의식을 달성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믿습니다. 다만 이로 인해 임시행동위원회는 유럽에서 귀환한 이들과 대립하고 있습니다.
국민당의 소수파

좌파가 주도하는 국민당 내의 두 주요 파벌을 제외하더라도, 진정한 정통 국민당이라는 좌파의 주장은 어쨌던 이들이 국민혁명이라는 공통된 대의 아래 여러 "소수" 파벌 조직들을 포함하도록 이끌었습니다.

유럽의 중국 망명자들 사이에서는 불만스러운 황포군관학교 장교들이 성장하는 유럽의 급진주의, 이를테면 사빈코프의 국민공화당, 프랑스주의 소렐주의 운동, 브리튼 연합의 오스왈드 모즐리의 최대주의 운동 등에 영감을 받아 작은 파벌을 이루고 있습니다. 유럽의 극좌 분파들 사이에서 인기를 얻은 전체주의는, 제국주의로부터 자유로운 중국에 민주주의가 있을 곳은 없다고 믿는 급진적인 군대 장교들 사이에서 작지만 확실히 성장하고 있는 지지를 받고 있습니다.[17]

국민당의 모두가 유럽이나 중국으로 도피한 것은 아니며, 상당한 수의 중도파, 그리고 비슷한 사상을 가진 "자유주의자"들은 동남아시아나 미국(특히 하와이)로 망명했습니다. 이 교무위원회[18]의 명목상 지도자는 국민당의 창업자의 아들인 쑨커입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교무위원회는 바라트 코뮌에 보내져 정치 및 군사 훈련을 받고 있는 국민혁명군 장교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보고가 있습니다. [19]

"통일전선" 정책의 일환으로, 또 제3인터내셔널 지원과 인정을 받는 대가로 국민당은 국민당에 소속되지 않은 중국 내의 다른 사회주의 집단들과 불가피한 협력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서로 이질적인 노동조합, 정당, 조직들은 중국 공단주의 동맹이라는 이름으로 느슨하게 통일되어 있으며, 평의회주의자, 아나르코-생디칼리스트, 아나키스트 그리고 다른 사회주의자들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들 중 가장 주도적인 조직은 중국 공단당입니다.
<colbgcolor=#eee,#444>
5% 중화부흥사
10% 중국 공단주의자[20]
45% 중앙위원회
35% 민감정부
5% 하와이파
0% 당외
0% 국민당 장로
0% 상해파
0% 황포 극단분자
0% 황포계 극단분자
}}}
대중이 국민정부를 정당하다고 보려면, 오만한 선언과 화려한 열병식 대신 장기간의 국가 건설과 신중한 정책 실현이 필요할 것입니다. 한편 대다수는 국민당을 군벌 독재자로부터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하거나 먼 생디칼리슴 강대국의 위험한 꼭두각시로 봅니다. ||
정치력 획득 -10%, 안정도 -25.00%, 전쟁 지지도 -30.00%, 연구 속도 -20.00%, 매일 순응도 획득 -0.02%
* 국부군 반군
중국 국민당의 국면혁명군은 북벌 실패 이후 거의 10년 동안 과거의 망령으로 전락하였습니다. 혁명을 위하여 여전히 싸울 수 있다고 믿었던 사람들은 푸젠의 구릉 지대로 도망쳐 지난 수년간 게릴라 반란에 관여하고 1932년에는 용감하지만 실패한 기의를 일으켰습니다. 팔성연합 내 정치적 안정의 붕괴로, 민감기의구의 국민혁명군 잔당은 자유로운 중국을 위한 쑨원의 비전을 실현하는 마지막일지도 모를 시도를 시작하기로 했습니다.
매일 정치력 획득 -0.10, 매일 육군 경험치 획득량 -0.30, 보급 소비량/훈련 시간 -5.0%, 핵심 영토에서 사단 공격/방어 +5.0%, 무기대여 요청 긴장도 제한 +5.0%, 계획 수립 속도/최대 계획 획득치 -20.0%, 사단 한계 +12, 동맹국 호출 및 참전 불가능
}}}
카이저라이히 세계관에서 국민당의 운명은 랴오중카이 암살 사건를 기점으로 변하기 시작한다. 여기서 랴오중카이는 실제 역사와 달리 부상을 입지만 살아남는다. 그 책임으로 국민당 우파의 중심인물인 후한민이 처형당하고 우파는 이에 앙심을 품는다. 이후 국민당은 북벌을 시작하지만 실제 역사와 달리 북벌의 진행은 어긋나기 시작한다. 우선 약속된 프랑스의 지원이 독일의 개입으로 방해되고 여기서 더 나아가 난징 사건을 빌미로 독일은 광저우를 점령하고 쑨촨팡의 병력을 지원한다 여기서 장제스는 난징을 점령해 사태를 반전시키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장제스는 (아마도 후한민 처형의 영향을 받았을) 자신의 부하들에게 살해당한다. 이 시점에서 북벌은 실패하고 국민혁명군은 붕괴한다.

왕징웨이를 필두로 랴오중카이, 저우언라이 등의 국민당 주요 인사들은 해안가가 완전히 봉쇄되기 전 가까스로 프랑스로 탈출하였고 리쭝런, 주페이더 등은 운남과 광서(양광) 지역으로 도망쳐 군벌화된다. 그 밖에도 다이지타오, 허잉친등 국민당 좌파와 대립하는 인사들도 로어상으로는 존재하나 게임 내에서는 구현되지 않았다.

이후 국민혁명군의 잔존세력은 실제 역사에서의 공산당처럼 권력의 공백지대인 장시성과 푸젠성의 변경지대에서 절망스러운 항쟁을 이어나간다. 팔성연합은 이들을 토벌하려고 시도하나 인게임상으로 핵심주가 박히지 않은 것을 보면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한듯하다. 이에 대중들은 국민당이 완전히 실패했다고 간주하나 1932년 상하이 봉기는 이러한 인식을 역전시켰다. 비록 봉기는 독일이 또 다시 개입하면서 실패로 돌아갔지만 대중들은 국민당이 여전히 살아있으며 언젠가 다시 한번 북벌을 재개할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36년이 밝아오고 중국을 얽애던 독일이 검은 월요일로 비틀거리자 중앙위원회는 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지원병과 함께, 임시행동위원회는 해방구에 남아있는 모든 힘을 끌어모아, 중화부흥사는 공사관 도시의 네트워크를 통해 쑨원의 이상을 실현시킬 마지막 기회를 부여잡고 국민혁명을 재개한다.

게임이 시작하면 대부분의 당내 인사들이 프랑스 코뮌으로 망명하여 망명정부를 구성하고 있으며, 처음부터 제3인터내셔널에 가입해 있다. 다만 이는 망명정부 시스템을 쓰기 위해서이고 화동대전이 시작된 이후에는 3인터에 가입할 수 없다. 팔성연합이 무너지고 그 잔해를 놓고 남경, 안경, 산동군벌과 경쟁하는 화동대전으로 국민당의 플레이가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플레이어가 주의해야 할 점은 개편된 국민당 좌파는 무조건 타임어택이다. 1차 중점 트리의 마지막 중점 설명대로 화동대전은 10년 동안 이어진 국민당 좌파 최후의 발악이다. 따라서 난징을 못 딴 채로 기한이 지나버리면 국민당은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리고 만다. 다행인 점은 플레이어 입장에서 화동대전은 쉬운 편이라는 것이다. AI 특성상 서로 싸우기 바쁘고 모자르다 싶은 사단은 인터내셔널의 지원병들이 해결해주니 최대한 적의 영토를 확보한다는 마인드로 촉수를 넓혀주자. 푸젠, 장시 지역을 완전히 확보하고 추가로 병력을 징병하면 화동대전은 무난하게 국민당의 승리로 끝낼 수 있다.

안경, 남경, 산동[21]을 다 합병해 화동대전을 마무리하면 1차 환송당대회가 열려 국민혁명정부가 재건되고 중점 계통이 변경된다. 중점의 좌측은 군사, 우측은 내정, 중앙은 정치, 외교를 다룬다. 군사 중점을 통해 국민혁명군을 어느정도 재건하고 남방군벌들에 대해 어느정도 대처를 한 이후에야 북벌을 실시 할 수 있다. 우측의 내정 중점들은 통일 전쟁의 중간중간에 찍어주면 된다. 이거부터 누르고 전쟁을 하려고 하면 연성주의자나 직예의 공격에 역으로 노출되고 만다. 실제 역사에서의 장제스같이 적이 재정비하기전에 하나씩 요격하는 전략을 통해 고립된 군벌들을 격파하는 것이 좋다.

1차 환송당대회에서부터 정치적 투쟁이 시작된다. 가장 중요한 것은 힘의 균형 시스템을 이용한 개조동지회와 임시행동위원회 사이의 대결로 장관 선정, 내정 해결, 군벌들과의 동맹과 적대, 항복한 군벌 및 장성의 처리는 물론 사령관의 레벨까지도 영향을 주기 때문에 수치를 잘 조절하며 신중하게 행동하는 것이 좋다. 두번째로 중요한 것은 당내 급진주의라는 이름으로 표현되는 중화부흥사의 영향력이다. 정당지지율 역시 정치적 투쟁의 지표로 활용되며 개조동지회(급진사회주의), 임시행동위원회(사회민주주의) 외에도 여타 파벌들 - 공단주의자 동맹(생디칼리슴), 재조파(사회자유주의), 중화부흥사(전체주의), 연성주의자(시장자유주의)의 지지율로 정계 상황을 볼 수 있다. 이 중 공단주의자 동맹은 다시 정통파, 급진파, 세계사의 세 파벌로 나뉘며 천사오위의 급진파는 개조동지회를, 4원로[22]의 세계사는 임시행동위원회를, 천두슈의 정통파는 두 파벌 모두를 지지한다.

2차 북벌의 목표는 청나라이며 북벌 성공 이후의 중점은 베이징을 점령해야 개방된다. 다만 청나라가 다른 군벌들에게 베이징을 빼앗겼다면 해당 군벌을 공격하는 결정이 주어지기 때문에 베이징 레이스를 걱정할 필요는 없다. 베이징을 정복하면 2차 환송당대회가 열리며 이후 중점이 열린다. 아직 봉천군벌과 전쟁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이쯤 해서 봉천에서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주장하면서 침공해올텐데 이미 중국의 알짜배기 지역들을 모두 장악했을 국민정부에게 봉천 정도는 별 의미 없다. 적당히 방어선을 구축하다가 포위섬멸로 잘라먹고 곧바로 진군해주자. 이 때 봉천군벌은 선양시가 점령당하면 공영권에 가입하도록 설정되어 있다. 그러므로 봉천군벌을 점령한다는 것은 사실상 2차 중일전쟁을 시작한다는 의미다. 이를 회피하려해도 40년 전후로 일본이 봉천정부를 공격하거나 장쭤린을 암살하고 양위팅을 내세워 괴뢰국으로 만들어버리니 중일전쟁은 필연이다. 일본은 군벌들과는 비교도 안되는 적이니 준비를 단단히 해야한다. 다만 일본과 독일령 동아시아의 전쟁으로 일본의 병력이 분산된 뒤 전쟁을 시작하면 생각보다 수월하게 끝낼 수 있다.

중일전쟁까지 마무리해서 선양외를 끝냈다면 이제 후안내를 준비할 시간이다. 개조동지회와 임시행동위원회간의 갈등은 극에 달하고 결국 임시행동위원회는 3차 환송당대회에서 권위주의로 일관하는 왕징웨이 탄핵안을 제출한다. 여기서 지금까지의 정치상황에 따라 루트가 갈린다. 내전에서는 푸젠, 베이핑, 부흥사의 세 세력이 승리할 수 있다. 난징 정부는 이벤트 도중 베이핑이나 부흥사에게 함락되거나 푸젠과 합작하기 때문에 승리는 불가능하다.
여러모로 현실 역사에서 이상적인 중국 공산당과 국민당 좌파의 면모를 섞어놓은 국가라고 할 수 있다.

사족으로 0.26 패치 직전 국민당 좌파 리워크 담당 공인에 의하면 카이저라이히에서 가장 많이 플레이되는 국가 중 하나라고. 또한 바닐라의 중화민국 코드인 CHI를 배정받은 국가로, 다른 국가와 다르게 난징 점령 시 이벤트로 자동으로 천도하며 핵심주가 박힌다. 여기에 장교단에서 육군군관학교의 정신을 선정할때 황포의 정신이라는 고유 특성도 가지고 있다.

1.2 패치 즈음 1차 환송당대회에서 형성되는 정부 이름이 국민혁명정부에서 남경 국민정부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3.3.3. 봉천정부 (FNG)

북방의 요새

1936년은 밝아오고, 봉천정부는 중국의 민국화라는 꿈의 최후의 보루로서 동북 지역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중국의 여러 다른 비밀들처럼, 이 꿈 역시 불편한 진실을 숨기고 있습니다. 중화민국의 봉천정부는 직예의 정통성에 이의를 제기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민주주의도 겉치레이며, 과거부터 그랬고 아마 앞으로도 그럴지도 모를 권위주의적 독재국가입니다.

선양에 있는 의회는 부패했고, 권력은 독재적인 장군들, 부도덕한 철도 귀족들, 그리고 범아시아 이념을 주창하지만, 실제 속내는 검은 세력들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이 가운데에 대원수 장쭤린이 있는데, 그의 야망은 크지만 직예의 힘과 일본의 영향력이 이를 막고 있으며, 지금은 이 둘 사이에서 정치적인 외줄타기를 강요받고 있습니다. 또한 그의 분열된 정부 안에서 벌어지는 각종 권모술수 역시 방해요소입니다. 이 상황이 영원히 지속되진 않겠지만, 적당한 때가 왔을 때 기회를 잡지 못한다면, 다신 이루지 못할 겁니다.

남쪽과의 전쟁, 그리고 경제적 교류의 단절로 만들어진 막대한 비용으로 봉천은 휘청였고, 지난 몇년간을 재건을 위해 보냈지만, 아직도 재건하지 못한 것이 많습니다. 마찬가지로, 군대 역시 예산부족으로 등한시되어 빈약하며, 개편되어야 합니다. 한편 날이 갈수록 영향력이 커져가는 일본은 우리에게 큰 위협임과 동시에 기회이기도 합니다. 우리 앞의 해로는 험하며, 국가라는 배를 생존으로 이끎은 물론 중국 전체를 재수복하기 위해선, 훌륭한 조타수가 필요합니다.

봉천의 특수한 사항들, 일본과의 관계, 그리고 내부 정치에 관한 설명들을 들을 수 있습니다.
정치에 대한 설명

봉천은 4개의 주요 정치 파벌이 있습니다.

1. 광복회
퇴역 장성, 관료, 정치인 등이 어떠한 정치적 이념 없이 묶인 느슨한 연합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은 대부분 봉천에만 머무르는데, 이는 봉천을 제외한 곳에서는 어떠한 권력도 없다는 반증이기도 합니다. 뇌물과 유혹이 오고가며, 누구든 간에 그들은 돈을 받은 사람의 뒤편에 서줍니다. 결과적으로 '광복회'는 의회의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정치적 결정력도 없으며, 분열되어 있습니다.

2. 장씨군벌
충성파와 장군들의 집합체인 장씨군벌은 대원수의 정치력의 증가 이외의 특정한 이념은 없습니다. 겉으론 민주주의를 내세우고 있지만, 사실 장씨군벌의 지지자들은 공화국적인 이상에 관심도 없고,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서 이를 이용할 뿐입니다.

3. 교통계
북양정부 시절부터 존재하여 유일하게 정치적인 일관성을 유지한 교통계는 사리사욕을 좇는 철도와 전신 귀족들의 집합인데, 국가의 인프라를 두고 만철과 협화회와 경쟁 중에 있습니다.

4. 협화회
각각의 이익에 따라 모인 정치인과 로비스트들로 구성된 협화회는 만철의 이익을 대변하고, 때로는 다른 일본 자이바츠들의 의회 내 이익을 대변합니다. 각 구성원들의 이념과 사상은 다양합니다. 일본인과 공조해 장쭤린의 권력에 대항하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들이 있는가 하면, 범아시아주의적 원칙을 지지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특수한 사항들에 대한 설명

봉천 정부는 불안정하고, 안팎으로 압박을 받고 있으며, 궁극적으로는 -공통된 목표가 아니라면- 모순된 요인들의 융합입니다. 정당들, 정확히는 파벌들은, 국민들의 호응을 받는 대신 정부 기관을 장악함으로써 그들의 지지도를 증가시키는데, 이처럼 정당의 '지지도'는 정부와 여타 기관들을 장악한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며, 장관들의 정책(능력)보다는 각 소속 파벌의 영향력을 늘이고 줄이는 선택, 포커스, 그리고 사건들을 통해 결정을 해야 합니다.

그 결과로, 플레이어의 최우선 목표는 각 파벌들의 균형을 유지하는 것으로, 파벌들은 모두 권력이 너무 강해지면 각기 다른 방식으로 이를 남용할 것입니다. 파벌들은 지지도가 높아지면 장관을 추천하는데, 장관들은 자기 자신의 신념이나, 소속 파벌, 혹은 나라를 위해 일할 것이지만, 때론 단기적이든 장기적이든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습니다.

또 다른 중요한 것은 협화회입니다. 정치에 대한 설명에 적혀있듯, 그들의 지지도는 일본의 영향력을 보여주는 간접적 지표이기도 합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증가하면, 생산에서 보너스를 받지만, 정치력과 자치권에서 일정 부분 패널티가 있습니다. 협화회의 영향력 증대는 시간이 지날수록 불가피해지므로, 주의깊게 살펴야 합니다.
일본과의 관계에 대한 설명

일본은 봉천과 맺은 일련의 조약들을 통해 그들의 힘을 행사하며, 치외법권뿐만이 아니라 봉천 시민들과 동일한 거주권과 일할 권리를 갖고 있습니다. 대원수를 포함한 여러 중국인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일본을 불편하게 하고 있지만, 그들은 우리에게 필수적이고, 영향력의 증대는 불가피합니다. 이러한 영향력 증대의 주역은 남만주 철도회사, 줄여서 주로 '만철'이라 불리는 기업으로, 그들의 최근 몇 년간의 수익은 일본 정부 예산의 4분의 1에 해당합니다.

동시에, 일본은 봉천과 그 부수이익 -봉천이 원하는 것- 을 원하는데, 봉천과의 협력과 봉천이 남부 중국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은 일본에게 있어 시간과 돈 모두를 아낄 일석이조의 기회이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일본은 더 많은 이익과 권력을 원하긴 하지만, 너무 밀어붙이면 장쭤린의 정치적 입지를 위태하게 할 수 있고, 그가 실각하면 그간 해왔던 세심한 노력들을 물거품으로 만들 수 있기 때문에, 그 결과 미약한 균형이 지속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장쭤린은 때우기식의 정책을 유지해 왔습니다. 일본과의 범아시아적 유대를 증진하면서도, 간간히 일본의 주장이 너무 나갔을 때는 이를 거절하고, 개인적으로는 일본의 영향력을 줄이기 위한 노력을 계속하는 식으로요. 어떻게 플레이할지는 플레이어의 선택에 달렸지만, 주의깊게 살펴야 합니다.

"전진하라!"
카이저라이히의 세계 - 봉천 (펴기/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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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트크리크가 시작될 때 사람들은 장쭤린 마적이라고 했다. 별 볼일 없는 출신을 가진 별 볼일 없을 사람이라고. 자기보다 더 나은 사람을 등쳐먹을 하이에나라고. 그가 봉천성장이 되자 사람들은 단순한 기회주의자라고 했다. 운명의 장난으로 권력을 잡은 사람이라고. 그가 동북 3성을 지배하게 되자 사람들은 그의 군대가 산해관을 뚫을 수 없을거라고 말했다.

하지만 만주는 더 이상 변방이 아니었다. 도시들은 거대한 상업 중심지로 변해있었다. 시베리아부터 보하이해까지 이어진 철로에서 새로운 번영이 피어났다. 장쭤린은 봉천에 중국 최대 산업체를 세웠다. 소총, 기관총, 천둥과 같은 대포로 무기고를 채웠다. 바람 부는 만주 벌판에 중국에서 제일 돈 잘 받고, 제일 잘 먹고, 제일 잘 규율잡히고, 제일 근대화된 군대를 만들었다. 그가 베이징을 점령하고 그의 군대가 화베이 평원을 가로지르자 사람들은 그를 호랑이라고 불렀다. 묵던의 덕망있는 원수라고. 봉천의 대원수라고. 옥수의 경쟁자라 자칭한 장쭤린은 중국에서 제일 권력있는 자들 중 하나가 되었고 오랫동안 그를 비난하던 이들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이 승리의 순간과 모처럼 찾아온 기회는 우페이푸와 독일 카이저가 단번에 빼앗아버렸다. 베이징 주변의 장쭤린 군대는 박살나 만리장성 너머로 밀려났다. 최고의 군대라도 패배할 수 있었다. 전세를 역전시키려는 모든 시도는 실패했다.

그후 1년 동안 장쭤린은 동북 3성의 봉천정부를 중국 공화주의라는 꿈의 마지막 보루로 만들었다. 독일의 제국주의와 만주족 폭군의 손아귀에서 중국 전토를 탈환할 수 있는 곳. 하지만 그가 가진 선양의 의회는 부패하고 분열되어 있었다. 그의 리더십은 대총통이라기에는 너무 독재적이었다. 베이징은 도쿄가 봉천 경제를 쥐려 하는 것을 보고 장쭤린을 일본의 괴뢰라고 불렀다. 청은 북동부를 보강하고 장쭤린의 부하들이 제 무덤을 파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다.

하지만 이게 익숙한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른다. 장쭤린은 야망이 넘치는 인물이다. 청의 국력과 일본의 힘도 그의 목표를 흔들리게 할 수 없다.

언젠가 베이징은 다시 한 번 그의 것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중국 전역이 그의 것이 될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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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동북 생디칼리슴당
0% 동북 생디칼리슴당
0% 국민당
0% 중국 사회당
0% 민주입헌당
14% 협화회
18% 교통계
40% 광복회
28% 장씨군벌
0% 한황실 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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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7년 직예군벌과 독일에 의해 세워진 청나라에 의해 봉천군벌이 만주로 도망친 상태다. 청 정부의 적법성을 인정하지 않고 스스로 중화민국의 정통성을 계승했다고 주장하나 실상 일본과 트란스아무르 정부에게만 인정받을 뿐이며 일본에게 상당히 의존하는 형편. 심지어 양쯔강 패치 이전까지는 일본의 속국으로 설정되어 있었다. 패치 이후에는 일본의 독립보장을 받고 있다.

시작시 장쭤린의 관제정당 광복회(권위민주주의)가 여당으로 집권해 있고 야당으로는 장쉐량과 만주의 군벌들로 구성되어 마적, 군벌이라는 출신을 상징하는 장씨군벌(후견전제주의), 옛 북양정부의 요인들로 구성되어 자칭 중화민국의 후계자로서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교통계(사회보수주의), 친일 자본가로 구성되어 일본의 자본 잠식과 친일적인 성향을 상징하는 협화회(시장자유주의)가 공존하고 있다. 이들은 게임 시스템상 야당이라고 표시되지만 이는 국민들의 지지도나 국회에서의 의석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고 내부 파벌로서의 영향력을 나타내는 것으로 어느정도 선까지는 무해하거나 보너스를 주지만 너무 과도하면 디버프가 걸리기 때문에 각각의 영향력을 잘 조율하는 것이 중요하다.

특히 중요한 것은 시장자유주의로 나와있는 협화회(Concordia Association)로 만철을 비롯한 일본 자본의 만주 침투를 나타낸다. 협화회의 지지도가 너무 낮으면 일본이 원조를 중단해 버리며[24] 반대로 협화회의 지지도가 높아질 경우 안정도와 정치력이 깎이지만 공장 생산량, 건설 속도 등 높은 산업 보너스를 받을 수 있다.[25] 그렇다고 일본이 주는 꿀에 너무 취해 있으면 종국에는 대가를 치르게 된다.

내부의 문제를 해결하고 디시전을 이용해 전쟁 지지도를 충분히 높이면 청에 선전포고할 수 있다. 청에게서 베이징을 점령했다면 천하의 판세가 봉천에게 기울면서 이후 어떤 방침으로 통일을 할지 결정할 수 있다.

장쭤린 자신이 총통에 오르기에는 동북 마적 출신에 정치적 경력도 일천한지라 평판이 부족하기 때문에 선양에서 회의를 개최해 다른 세력, 특히 천중밍과의 제휴를 통해 평판을 올리려고 한다. 친 청/친 직예, 친 국민당 좌파/우파, 티베트, 몽골을 제외한 중국의 모든 국가들이 참여할 수 있지만 AI의 경우 친봉천이 아니라면 잘 참여하지 않는다. 회의를 성공시키고 싶다면 천중밍과 쑹칭링[26]의 요구를 잘 따라서 일본과 손절하고 개혁을 약속하는 쪽이 좋다. 어차피 다른 군벌들은 땅 달라거나 지지할 테니 자치권을 달라는 말밖에 안한다. 그런 놈들까지 안고 갈 수 있다면 좋지만 필요하다면 과감히 손절해야 한다.

회의가 성공하면 협상 통일 루트가 열리면서 세력 '안국군'을 창설할 수 있는데 회의에 끝까지 남은 군벌들이 다함께 안국군에 가입한다. 양광군벌의 경우 회의장에 끝까지 남아 있으면 아예 합병도 이루어진다. 이후 회의에 참여하지 않은 국가들을 공격하고 세력에 남아있는 국가도 하나하나 흡수하며 최종적으로 일본을 손절하고 중국을 통일하면 된다. 이상적이고 쉽게 통일을 달성할 수 있는 방법이지만 성공률은 그다지 높지 않다. 특히 협화회 지지율이 높다면 천중밍과 다른 군벌들이 합작을 거부하기 때문에 초대장도 못 보내고 무력 통일 루트가 열릴 수도 있고, 패치가 계속 진행되면서 협상 루트를 밟아도 연성주의자들의 지지를 얻기가 매우 힘들어졌다. 연성주의자들의 지지를 얻으려면 0.16 패치 기준으로 양광에 계속 천중밍이 집권해 있어야 하며 사천은 군관계가 집권해 있어야 한다. 협상 통일 루트를 완료하면 장쭤린은 퇴진하고 장쉐량이 지도자가 되는데, 0.16 패치 이후 '1923년 헌법의 복원' 중점만 완료하면 장쭤린이 퇴진한다. 그리고 협상 루트를 타면 다른 군벌들의 장군, 제독, 원수 중 일부를 영입할 수 있다.

회의가 실패하면 무력 통일 루트가 열린다. 이 경우 봉천의 막강한 무력으로 강제로 중국을 통일하려 시도한다. 그러나 정통성은 무력으로 살 수 있는 게 아니기 때문에 마적 출신인 장쭤린은 은퇴하고 유학파 엘리트인 아들 장쉐량을 지도자로 세우려 한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봉천에 주둔한 관동군과 장쉐량의 라이벌 양위팅이 서로 동맹을 맺고 장쭤린 납치를 시도한다. 협화회의 지지율이 낮다면 이 음모는 실패하고 장쉐량이 집권해 일본과 적대 상태로 들어가게 된다. 그러나 일본의 꿀을 빠느라 협화회의 지지율이 높아진 상태였다면 장쭤린은 강제로 하야하거나 사망하고 양위팅이 협화회의 대표로 취임해 일본에 간도 쓸개도 다 빼주다가 결국에는 일본의 속국으로 들어가 버린다.[27]

국민당 좌파가 살아남았다면 국민당 좌파와 협상을 해서 국민당의 북벌 중 협공을 할 수도 있고 가만히 있을 수도 있다. 이후 재협상에서 국민당의 요구를 들어주면 국민당의 괴뢰국인 북동 자치성으로 바뀌고 장쉐량이 지도자가 된다. 다만 괴뢰국이 되어도 급진사회주의 정당이 집권하지는 않는다.

3.3.4. 사천군벌 (SZC)

1936년, 사천군벌

1936년이 밝았지만, 아직 쓰촨은 여러 파벌들 사이에서 매우 취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현재 양썬은 자신의 후원자인 옥수(玉帥) 우페이푸의 지지에 힘입어 그의 측근이자 전 쓰촨성장 류춘허우의 도움을 받아 상당한 세력뿐만 아니라 지위와 인맥을 얻었고, 그에게 필요한 안정과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난 10년간의 군사적 재앙으로 양썬은 덩시허우와 류샹이 이끄는 파벌에 의존하게 되었고, 이제는 정부와 쓰촨성 자체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국민당에 동조하던 장교단의 잔당들은 그들의 통제 영역이 꾸준히 줄어드는 것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쓰촨성 남부 일부 지역을 통제하고 있습니다.

쓰촨은 내분의 벼랑 끝에 서 있으며, 여러 파벌들이 성에서 권력을 위해 투쟁하고 있습니다. 직예군벌의 아주 사소한 약화의 조짐도 화약고에 불을 붙이기에는 충분해 보입니다...

"확실히 우페이푸가 그냥 놔두지는 않겠군."
사천군벌

쓰촨 현대사는 1912년부터 시작합니다. 신해혁명이 쓰촨에까지 이른 이래로 쓰촨 지역은 오랜 불안정 시대로 접어들었고, 지역 군벌들은 외교력과 무력을 통해 지배권을 놓고 다투었습니다. 1912년과 1926년 사이에 대체로 국민당 충성파와 지역 군벌로 이루어진 신해 혁명가들이 쓰촨을 통제했습니다.

이런 상황은 1926년 북벌이 실패할 때 까지 계속되었습니다. 승리한 직예군벌 지도자인 우페이푸의 개인적인 지원을 받은 양썬이 쓰촨의 첫번째 지배자가 되었고 마침내 외관상으로는 지역에 안정을 되찾아 주었습니다. 하지만 쓰촨 내부에서 수많은 군벌들이 각자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와중에 양썬이 그들의 영향력을 제거할 수 없게 되자 쓰촨의 내부 분열은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군벌 중 한명이자 충칭 지방 정부와 제휴하여 자리를 잡은 류샹은 빠르게 쓰촨의 통제권을 놓고 다투는 양썬의 주요 경쟁자가 되었습니다.

1928년에는 이웃한 운남군벌이 쓰촨을 침략했습니다. 초기에는 전쟁이 유리하게 흘러갔지만, 양썬의 사병도 상당히 줄어들었습니다. 1930년 티베트의 공격으로 인해 상황이 더욱 악화되었고, 티베트군이 양쯔강에 이르러 군벌 수도 청두 바로 앞에서 위협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마가군벌이 개입해서 티베트 전쟁의 양상이 역전되기 전까지 쓰촨은 시캉 지역 절반을 티베트에게 내줄 수 밖에 없었고, 양썬의 군대는 더욱 약해졌습니다.

"흥미로운데."
사천군벌

티베트의 침공을 격퇴했지만, 사천이 직면한 문제는 여전히 끝나지 않았습니다.
1931년, 친국민당파 장교들과 군벌, 그리고 전 사천 총독과 공무원 등 수많은 사람들이 모인 집단이 탕지야오의 국민정부에게 무언의 지지를 받아 북운남 지역에 있는 본부를 출발해 사천으로 확장해 들어오기 시작한 겁니다. 양썬 아래에서 누더기가 되어버린 사천군은 국민당군에게 상대도 되지 않았으며 진격하는 침략군에게 계속해서 물자 대부분을 빼앗겼습니다. 군벌이 무너지기 직전인 상황에까지 이르자 군벌 지도자였던 양썬은 필사적으로 중경군벌 류샹과 사업단에게 일시 동맹을 요청했습니다. 류샹의 지원에 힘입은 양썬은 공격을 격퇴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사업단과 밀접히 협력하면서 정부 내에서 사업단의 영향력이 강해지는 대가로 사천군 재건에도 큰 도움을 얻었습니다.

영향력을 넓히고 있는 또 다른 집단은 양썬이 군대를 재건하는 동안 군관계를 억압하는 데 도움을 주었던 덩시허우의 보정계였습니다. 보정계는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눈에 띄는 성과를 거뒀고 이로 인해 사천의 진정한 수호자라는 이미지를 시민들에게 심어주어 점점 더 큰 인기를 얻었습니다.

1933년에는 군관계의 지원을 받는 운남이 또 다른 침략을 시도했는데, 이번에는 팔성연합의 연합사령관 쑨촨팡이 개입하겠다고 위협하는 바람에 빠르게 끝나버렸습니다. 이런 예상치 못했던 운남의 패퇴로 인해 양썬은 일시적으로 남부 사천을 되찾을 수 있었습니다. 이런 혼란으로 인해 텐쑹야오가 소규모 군벌을 구성해 동북부 지역에서 자리를 잡는데 성공했지만, 그의 야망이 어떨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에 싸여 있습니다.

"어떻게 되었든 간에, 사천은 결국 살아남았군."
사천, 분열되다

1936년 사천은 분열된 상태로 여러 파벌들이 절대 권력을 놓고 갈등을 벌이는 중입니다.

현재 집권 파벌은 양썬과 그의 측근 류춘허우가 이끄는 무비계 운동입니다. 우페이푸가 개인적으로 몇년에 걸쳐 지원을 보낸 덕분에 무비계는 베이징과 난징의 직예 당국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들의 영향력이 안정적인 지금, 최근 10년간 군벌은 직예의 지원에 의존하면서 성장했습니다. 만약 직예에 뭔가 문제가 닥친다면 양썬의 지배력 또한 상당한 위협에 직면하게 될 겁니다.

사천의 지배권을 놓고 다투는 양썬의 최대 라이벌은 중경군벌이자 사업단의 지도자인 류샹입니다. 류샹은 1931년 국민당의 확장 시도 이래로 양썬의 동맹이었으나 지금은 사천을 지배하려는 열망을 숨기려고 하지 않는 야망있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기회가 나타난다면 사업단은 언제든지 쓸모없는 양썬과의 동맹관계를 다시 고려해볼 지도 모릅니다.

세번째로 중요한 파벌은 보정군관학교 동문으로 이루어졌으며 양썬 휘하의 장군인 덩시허우가 이끄는 보정계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보정군관학교를 나와야지만 파벌에 들어갈 수 있는 건 아닙니다.) 최근 몇년간 보정계는 남부에서 반란군을 진압하는 작전을 담당했는데, 여기서 눈에 띄는 전공을 올렸고 이로 인해 사람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게 되었습니다. 현재 보정계는 양썬 지지층의 중심을 이루고 있습니다. 덩시허우가 옛날부터 양썬에게 충성을 바쳐오기는 했지만, 양썬에게는 위협으로 비쳐질지도 모릅니다.

남부에서는 1931년에 확장을 시도했던 국민당군 잔당이 지역을 점거하고 있습니다. 그들 자칭 군관계는 양썬이 지배하는 사천에 공공연히 지배하는 주요 단체입니다. 뤼차오와 슝커우가 이끄는 군관계는 생존하기 위해 인근의 운남군벌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의지합니다.

"직예에서 뭔가 일이 터지도록 가만 놔둘 리가 없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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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국민당
0% 국민당
0% 국민당
2% 군관계
2% 군관계
16% 보정계
20% 보정계
18% 무비계
42% 사업단
0% 일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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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기 지도자는 양썬. 본래 이 지역은 통일된 세력이 거점화한 지역이 아니라 여러 갈래의 군벌들이 각축전을 벌이던 곳이었지만 1926년 직예군벌이 중국의 주도권을 잡으면서 쓰촨성에서도 직예와 동맹한 양썬의 무비계가 승기를 잡았다. 그러나 무비계는 이후 운남군벌과 티베트의 공세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했고 사업단과 보정계가 세력을 불린다.

그나마 1936년까지는 무비계(권위민주주의)의 질서가 유지되었지만 팔성연합의 몰락으로 직예군벌의 나약함이 드러나자 류샹의 사업단(후견전제주의)이 무비계를 공격한다. 둘의 싸움이 길어지면 덩시허우와 류원후이의 보정계(사회보수주의, 시장자유주의)가 양썬을 돕는다는 명목으로 개입하고 낮은 확률로 슝커우와 뤼차오의 군관계(사회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가 어부지리로 승리할 수 있다.

내부적으로는 아편 문제가 만연하고 시작한지 얼마 되지 않아 대기근이 닥친다. 아편을 금지할지, 독점할지를 정하고 이에 따라 디시전으로 아편과 기근을 동시에 해결해야한다. 이를테면 아편을 독점하는 쪽에서는 아편을 팔아 번 돈으로 곡식을 사오고 금지하는 쪽에서는 농민들에게 아편 대신 곡식을 키우도록 권장하는 식으로 이어진다.

무비계는 직예, 사업단은 독자세력, 봉천, 연성주의, 보정계는 직예, 국민당 우파(주페이더), 연성주의, 군관계는 연성주의, 국민당 좌파와 동맹할 수 있다. 어느 루트에서도 서북 전쟁에 끼어들어 티베트에게 잃은 영토를 되찾을 수도 있다.

특수한 루트가 2개 있다. 청나라에서 선통유신이 일어났고 사천에 무비계가 집권 중이라면 청에서 도망친 직예 인사들은 모두 사천으로 망명한다. 이들은 우페이푸의 복수를 위해 옌후이칭이나 장바이리의 지도 하에 사천에서 힘을 기르다가 청을 공격해 스스로를 북양정부로 선포하게 된다.

비슷하게 양광에서 천중밍이 실각하고 사천에 군관계가 집권하면 천중밍은 사천으로 망명해 그의 연성주의 이론에 따라 낙후된 사천을 발전시켜 나간다. 사천 개발이 성공하면 다른 군벌들은 다시 연성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고 천중밍은 온 중국을 연성주의의 깃발 안에 묶을 전쟁을 시작하게 된다.

3.3.5. 산동군벌 (SQI)

1936년, 산동의 전환점

산둥성은 독일과 공사관 도시에게 가장 중요한 도시들을 빼았겼습니다. 한때 일본과 독일의 전쟁으로 황폐화되었던 칭다오 항구는 이제 독일 제국해군과 동아시아 총괄행정 감사이사회의 민간 무역 모두에게 매우 중요한 항구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이런 상황으로 인해 지난은 산동의 실권자인 장쭝창의 완벽한 본거지가 되었습니다. 장쭝창은 1911년 표면적으로는 산동혁명군을 이끌기 위해 산둥에 오기는 했지만 얼마 안가 도박과 여색이 그의 주요 활동이 되었습니다. 지난은 마치 '개고기 장군'과 같이 타락하고, 수익이 많으며 처음에 계획했던 것보다 방어가 약하게 되었습니다. 태산의 6600계단을 오르면 일관도의 본부가 있습니다. 신비롭고 '성스러운' 장톈란은 그곳을 산둥에서 가장 안전하고 도덕적으로 바른 곳으로 만들었습니다. 1936년까지 산둥의 주민들은 단절된 지난과 웨이하이웨이 사이의 도로와 심각한 가난함에 시달려왔습니다. 구원은 지난 근처나 태산의 정상에서나 찾아볼 수 있습니다.

"관심 없는데, 열차가 늦었군."
카이저라이히의 세계 - 상청 (펴기/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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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eee,#444>
0% 사회주의 청년단
0% 반일단결회
0% 국민당
0% 진보당
7% 귀의도
0% 일신천도룡화회
0% 연구계
21% 자선회복회
42% 장쭝창 군벌
28% 일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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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아니 카라 세계관 전체를 통틀어도 손꼽히는 막장국가. 장쭤린의 부하였던 장쭝창은 산둥성을 차지한 상태에서 3차 직봉전쟁에서 장쭤린이 즈리성을 빼앗겨 만주와 연결이 단절되며 고립되었다. 장쭤린은 4차 직봉전쟁에서 장쭝창이 자신을 도와 싸워줄 것이라고 기대하지만 독일 정보부에서 이 정보를 입수해 장쭝창을 협박했다. 독일의 식민지인 칭다오시 웨이하이시의 영향력으로 독일에 거역할 수 없었던 장쭝창은 장쭤린을 배반하고 4차 직봉전쟁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다가 전쟁이 끝난 이후 청나라와 우페이푸에게 굴복한다.

이 과정에서 산둥성은 전쟁을 피하게 되고 독일 식민지를 통해 자본까지 들어오면서 전쟁을 피하면서 돈을 벌러 온 난민들로 넘치게 된다. 타이산을 중심으로 세력을 얻은 신흥종교 일관도의 민병대는 규율 따위는 전혀 없는 장쭝창의 군대를 대신해 산둥성의 치안을 지키고 구호활동을 하면서 난민들 사이에서 교세를 불린다. 장쭝창은 아편에 중독되어 골골대다가 일관도 도사에게 치료를 받는다. 일관도의 교주 장톈란은 이를 기회로 장쭝창을 직접 입교시켜 홍보수단으로 삼는다. 청나라에 충성하는 장군 취잉광[28]은 투철한 유교 정신으로 무장한 인물이었고 무절제한 군벌 장쭝창과 수상한 신흥 종교 일관도가 산둥성을 개판으로 만드는 것을 보며 취푸 연성공 쿵더청과 함께 이들을 쓸어버릴 준비를 한다.

게임이 시작되면 장쭝창을 염탐하던 취잉광의 스파이가 장쭝창에게 꼬리를 잡히게 된다. 여기서 베이징으로 가는 길을 앞질러가서 급습하면 취잉광의 음모는 실패한다. 이후 장톈란을 지난으로 유인해 처단해서 일관도를 궤멸시키면 장쭝창 루트(후견전제주의)가 열린다. 반대로 타이산으로 직접 장톈란을 죽이러 가는 길을 선택한다면 일관도의 복병에 장쭝창이 사망하고 신정국가 상청천국을 선포하며 일관도 루트(국민대중주의)가 열린다. 한편, 처음에 취잉광을 놓친다면 취잉광이 베이징에 장쭝창의 비리를 고발하며 장쭝창은 감옥으로 들어가고 취잉광 루트(권위민주주의)가 열린다.

장쭝창 루트에서는 청나라가 약해지면서 다시 장쭤린에게 빌붙고 남쪽의 팔성연합의 개판을 틈타 침공을 개시한다. 남경군벌, 안경군벌, 국민당 좌파를 모두 멸망시켰다면 화동연합으로 이름을 바꾼다. 남경군벌의 치셰위안과 봉천군벌의 양위팅도 한간이지만 장쭝창은 그보다 3배 더하게도 독일, 일본, 공사관 도시에 모두 점령지의 이권을 팔아먹고 군자금과 도박, 아편 자금을 얻는다. 그 셋 중 특히 가까운 것은 일본으로 봉천이 일본을 손절해도 일본의 꿀을 열심히 빨며 아예 봉천과는 별도로 공영권에 가입해버리기도 한다. 장쭝창이 사망할 경우 쑨뎬잉이 그 뒤를 잇는다.

일관도 루트에서도 남부를 공격하는 것은 동일하다. 대신 일관도는 장쭝창의 강력한 군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중국 남부 이곳저곳에 퍼진 일관도 신자들을 이용해 점령지에서 민병대를 불러낼 수 있다. 여기는 장쭝창보다는 낫지만 결국 신흥종교를 국교로 하는 제정일치 국가이며 외국인들을 박해하는 등 야만적인 행위가 드러나기도 한다. 일반적으로는 비동맹으로 분류되지만 푸이가 우페이푸에 대항해 친위 쿠데타, 선통유신을 감행하면 이에 도움의 손길을 제공할 수 있고 성공할 경우 친 청으로 분류되어 청나라와 같은 세력으로 들어가게 된다. 게임 후반이 되거나 선통유신이 실패하면 청나라가 산동군벌을 공격해오는데 이 경우 역으로 청나라를 삼켜버리면 푸이를 바지사장으로 내세우고 스스로를 후청국으로 선언해서 전 중국을 정복할 수도 있다. 장톈란이 사망하면 아내 쑨쑤전이 뒤를 잇는다.

취잉광 루트는 산동군벌의 유일한 제정신 루트로 남부를 공격하지 않고 장쭝창과 일관도로 엉망이 된 산둥성을 회복하는데 주력한다. 물론 취잉광의 집권에 도움이 된 연성공에 대한 보답을 하는 과정도 있다. 일반적인 성향은 친 직예이지만 취잉광은 우페이푸가 아니라 푸이에게 충성을 다하기 때문에 선통유신이 성공하면 친 청으로, 실패하면 비동맹으로 분류된다. 취잉광이 사망하면 리징린이 그 뒤를 잇는다.

3.3.6. 산서군벌 (SHX)

산서군벌

산서는 유구하고 빛나는 역사가 있는 자랑스러운 성으로, 과거 우왕이 황하의 물을 방류한 곳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산지이고 고립된 이 성은 고대부터 다양한 중국 왕조의 지배를 받았고, 이후 산서(또는 진계)군벌의 세력하에 있게 되었습니다. 군벌은 이름에도 산서성의 서부 지역과 인접한 섬서성의 일부만 통치합니다. 지도자는 1911년 신해혁명 이후 이 성을 통치한 교활하고 존경받는 옌시산 성장입니다. 성의 현대화를 추구하는 야심적인 그의 계획은 약간의 존경과 '모범 성장'이라는 별명을 주었습니다.

한때 북부에서 중국의 복잡한 권력 경쟁의 도전자였던 옌시산은 위안스카이와 후에 돤치루이를 지지하였는데, 중국의 정치 지형에서 그들의 통치를 안정시키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1928년 죽어가는 북양정부의 잿더미에서 우페이푸와 직예군벌의 최종 승리는 장쭤린이 만주로 물러나고 펑위샹이 옌시산의 보호로 국민군과 함께 후퇴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옛 적들은 성장하는 직예 세력에 대항하여 연합전선을 결성할 수밖에 없었고, 베이징이 옌시산을 성장으로 인정하는 대가로 명목상의 대청국 복원을 받아들였습니다. 피해가 막심한 북벌 및 제4차 직봉전쟁 참전으로 휘청거린 산서의 두 강자는 재정비하여 복수하리라고 맹세하였습니다.

약 10년 후, 상황은 그들의 희망대로 흘러가지 않았습니다. 옌시산의 아첨하는 별명과 펑위샹의 이상주의적 수사법에도 산서군벌의 영토는 반쯤 끝나거나 완전히 실패한 계획들로 어수선합니다. 산서를 재활성화하려는 그들의 10개년 계획은 대부분 정지되었고, 성 대부분은 여전히 경제 침체 지역입니다. 1936년에 접어들면서 부패, 빈곤과 방치와 같은 구악들이 적어도 1년 더 성을 괴롭힐 것 같습니다. 여전히 모든 것이 잘못되었음에도 익숙한 태도는 여전합니다. 결국 누구도 변화하는 중국에서 한가로이 앉아 있을 여유가 없습니다.

"그 무엇보다 산서!" Shanxi Over All!
<colbgcolor=#eee,#444>
0% 조사통계국 (자오청현 지부)
0% 공단주의 동조파
2% 국민당 (개조동지회)
4% 국민당 (임시행동위원회)
5% 학생협회
3% 사업 관계자
5% 상전 군벌
35% 국민군
40% 염계군벌
5% 세심사
}}}
인건비는 차치하더라도 산시성의 농업 부문은 여러 면에서 원시적이고 이익을 내기 어려워 전체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산시성은 인도나 필리핀과 같은 곳보다 농업 소득이 더 낮음에도 불구하고 매년 상당한 금액을 식량 수입에 지출하여 무역 적자를 악화시키고 있습니다. 절반 이상(4분의 3 이상)이 절대 빈곤에 시달리고 있으며, 정치계는 무정하고 무관심한 시골 신사들에 의해 지배되고 있습니다. 산시성의 농장과 공장에서 생산되는 자원은 경제에 재투자되는 경우가 거의 없고, 결혼식과 같은 사치스러운 지출로 낭비되는 경우가 흔하며, 그러는 동안 산시성의 생산성은 중국의 다른 가난한 지역보다도 점점 더 뒤처지고 있습니다. 이 지역을 부흥시키려고 성 정부가 실시한 여러 시도들은 대부분 성공하지 못했고, 실제로 시행되는 10개년 계획은 농민들을 철저히 무시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농민들이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힘겹게 일하는 동안 그들이 가진 환멸은 분노로 바뀌고 있으며, 분노는 행동으로 이어질 위험이 있습니다.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은 명확하며, 이는 빠르게 이루어져야 합니다. ||
매일 정치력 획득 -0.05, 징병 가능 인구 획득치 -10%, 소비재 공장 10.0%, 건설 속도 -15.00%
}}}
옌시산 펑위샹의 군벌. 카라 세계관에서는 소련이 없는 관계로 펑위샹의 세력이 더 약해졌고 결국 직봉풍전쟁에서 완전히 몰락하고 만다. 옌시산은 펑위샹의 남아있는 군사력을 이용할 생각으로 펑위샹의 망명을 받았지만 이 직후 우페이푸가 3차 직봉전쟁에서 승리해 중원의 지배자가 되며 문제가 발생했다. 펑위샹의 배신으로 몰락 직전까지 갔던 우페이푸는 펑위샹이라면 이를 부득부득 갈았던 것이다. 제발이 저린 옌시산은 역으로 우페이푸를 치기 위해 4차 직봉전쟁에서 비밀리에 봉천의 편을 들어 참가하지만 우페이푸에게 간파당해 패전했고 결국 영토의 동부를 상실했다.

1936년 시점에는 옌시산이 정권을 유지하고 있지만 펑위샹이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권을 탈취할 수도 있다. 옌시산은 중원의 싸움에는 그다지 끼어들지 않고 특유의 옌시산주의를 발전시키고 성을 개발하는 데에만 집중한다. 일반적으로는 반 직예로 분류되어 봉천과 동맹하거나 독자적으로 청을 공격하지만 푸이가 선통유신을 감행할 때 옌시산에게 도움을 요청해 성공시키면 청나라 세력에 합류하고 친 청으로 분류된다. 이외에도 가끔 직예가 빼앗아갔던 산서성 동부 지역을 주며 동맹을 요청하는 경우도 있는데 이를 받아들이면 친 직예로 변하기도 한다. 그러나 AI는 받아놓고 배신하는 경우도 많은 편. 펑위샹도 반 직예인 것은 마찬가지지만 군주제를 혐오하기 때문에 푸이를 싫어하고 직봉풍전쟁의 역사 때문에 봉천보다는 국민당이나 연성주의 세력과 동맹을 맺는다.

0.24 패치 후 전면적인 리워크가 이루어졌으며, 특정 중점을 찍을 때마다 옌시산의 비전[29]을 따를지, 펑위샹의 비전[30]을 따를지 선택해야 하며 한 비전을 선택할 때마다 한쪽의 권력이 강화된다. '중원정부' 중점을 완료하면 국명이 중원정부로 바뀐다.

옌시산으로 중원을 통일하면 옌시산은 자신이 만든 민국5원칙을 국가의 통치이념으로 내세우고, 자체 세력인 아시아-태평양 비동맹 운동을 창설한다. 펑위샹으로 중원을 통일해도 펑위샹의 민국5원칙이 통치이념이 된다.

1.1.4 패치로 리워크가 이루어졌다. 여담으로 리워크 이전에는 중원정부 디시전이나 중점을 찍어야 계통도가 변경되었지만 리워크 이후에는 청 조정 혹은 북양정부가 멸망하면 바로 계통도가 변경된다.

3.3.7. 신강군벌 (SIK)

신강군벌 소개

중국의 신강성은 오늘날까지 끊임없이 불안의 속삭임에 고통받고 있기 때문에 서북부의 많은 지역들과 마찬가지로 파괴적인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신해혁명의 여파는 위구르인들에 의해 발생하고 있던 혼란보다 중앙아시아에 거주하고 있던 중국인들에 의해 발생한 것이 더 많습니다. 최근의 도지사인 완두화는 이 사태를 전혀 수습하지 못했고, 그의 지역을 그의 신임 고문인 양쩡신에게 위임한 뒤 떠났습니다.

신강은 약삭빠른 거래와 폭압적인 정책을 통해 20년간 통치를 유지해 왔습니다. 양씨 자신은 매우 편집증적인 사람으로 신강에 거주하는 위구르인들을 한계까지 억압하여 봉기를 예방하기 위한 모든 조치들을 취하고 있습니다. 1936년까지, 그는 그의 저택에만 머무르며 그의 몇 명의 신하 중 한 명이 시도했던 암살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좀처럼 나오지 않는 외딴 영혼입니다. 대부분의 임무는 그의 강력한 조언가인 진수런, 마샤오우, 판야오난의 사이에서 처리됩니다. 세 사람의 의견이 합치하여 일상 업무를 처리하면서 간혹 양 지사의 지시를 받습니다. 현재로선 신강 내의 현상은 유지되지만 양씨의 은둔이 갈수록 심해지면서 무슨 일이 일어날 수도 있습니다.

"양쩡신이시여, 장수하고 번창하시길."
신강과 쿠물 칸국

쿠물 칸국은 공식적으로 신강 내에 있는 청의 보호국으로서 신강 안정의 큰 요인입니다. 현재 나스르 샤에 의해 통치되고 있는 칸국은 신강 지자체에 매년 공물을 보내야 하는 것 외에 신강군벌에는 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중요한 이유는, 현재 사람들은 쿠물 칸국이 자치권을 가지고 있는 것은 신강 내에서의 긴장감이 폭발하는 것을 막는 유일한 이유로 보고 있는데, 이는 사람들이 현재 칸국의 지배자 나스르 샤를 좋아하지 않지만 지방 내에서의 위구르인들의 자치를 어느 정도 보여주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 존재는 중국의 북서쪽의 안정의 열쇠이고, 오직 바보멍청이만이 그 존재를 가지고 장난을 치려 할 것입니다.

"이 작은 놈은 확실히 뭔가..."
신강의 사람들

많은 사람들의 대다수가 중국인이냐고 물어본다면 자신은 전혀 중국인이 아니라고 불쾌해할 것이기 때문에 신강은 중국에서도 단연 독특한 지역입니다. 가장 큰 인종집단 중 하나는 위구르족으로, 신강 내에서 지금까지 가장 민족주의적이고 잘 알려진 민족집단입니다. 다른 주목할 만한 두 개의 집단은, 먼저 40만명의 인구를 가지고 있는 북쪽의 카자흐족과 남쪽의 둥간족으로서, 45만명의 인구를 지닌 중국의 회족의 신강 버전이라 볼 수 있습니다. 둥간족과 위구르인들은 현재 호탄의 도인이 마샤오우라는 것에서 말해주듯 소수의 둥간족이 오랫동안 요직을 장악해 왔기 때문에 사이가 나쁘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위구르족과 카자흐인들은 한족과의 오랜 분리로 인해 정부 내에서 큰 골칫거리로 남겨져 있으며, 과거 중국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여러번 반란을 일으킨 전적이 있습니다.

"그걸로 충분해. 이제 일을 시작할 시간이군."
<colbgcolor=#eee,#444>
0% 청년 튀르키스탄당
0% 청년 튀르키스탄당
0% 국민당
11% 아커쑤 도인
0% 백산
0% 민주연맹
0% 흑산
35% 호탄 도인
54% 디화 성장부
0% 신강 민족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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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쩡신이 아직까지 집권 중이다. 시작 후 곧 양쩡신은 실종[31]되며, 그의 후임자 진수런은 쿠물 칸국을 하미시로 편입하려 하다가 하미 반란군, 동튀르키스탄 반란군에 의해 양면전선에 처하게 된다. 두 반란을 진압한 후 폭정을 하게 될 경우 성스차이를 주축으로 한 반대파가 쿠데타를 일으키며, 성스차이의 친국민당 정책에 반발하는 마샤오우가 정치투쟁을 벌인다.

진수런이나 성스차이가 집권하면 연성주의 세력의 손을 잡을 수 있으며, 국민당 좌파가 살아서 북벌을 성공한 상태고 신강에 성스차이가 집권해 있다면 국민당과 협의하여 자치령이 될 수 있다. 마샤오우가 지도자일 경우에는 중국 내 어떤 세력에도 가입하지 않는다.

3.3.8. 양광군벌 (GXC)

양광에 대한 설명

양광은 서쪽의 광시와 동쪽의 광둥을 아울러 나타내는 지리적 용어입니다. 양광총독부는 명나라 때 처음 창설되었으나, 1911년에 최종적으로 해산될 때까지 수없이 해체되고 개혁되었으며 그 공식 명칭은 굉장히 긴 "총독양광등처지방 제독군무 양항 관리하도겸순무사"였습니다.

광둥성은 광저우가 상하이, 난징, 베이징과 경쟁하는 가운데 중국에서도 가장 부유하고 개발된 지역 중 하나가 되었지만, 그 최근 역사는 전쟁과 파괴로 얼룩졌고, 19세기에는 서구의 제국주의자들에게 홍콩, 마카오, 광저우만을 상실했으며, 신해혁명은 결국 수많은 군벌 간의 전쟁과 국민당의 소란스러운 통치로 더 큰 파멸을 가져왔습니다. 1926년 북벌의 실패 이래로 이 성은 천중밍의 통치하에 놓였고 괄목할 만한 회복과 성장을 보였으며, 그 과정에서 파릇파릇한 성내 민주주의를 발전시켰습니다.

한편, 광시는 전형적인 군벌로 여겨지는 루룽팅의 지배를 받아왔습니다. 광둥이 자금을 주로 지원한 광범위한 군사화는 무력으로 이 성을 지배하려는 시도가 실패할 가능성이 매우 낮고, 팔성연합의 불안정이 전국으로 뒤따를 것을 우려했기에, 두 성이 지난 10년 동안 난징과 직예군벌에게서 많은 자치권을 얻어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그 때문에 중국 대부분에서 금지된 단체들이 양광에서는 활동을 이어 나갈 수 있게 되었습니다.
광둥의 세력

천중밍은 현재 공화주의자들의 광범위한 연정인 공화대동맹을 이끌고 있지만, 이에는 자신의 정당 이외의 수많은 정파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치공당은 1925년 천중밍과 그의 동맹인 탕지야오에 의해 창설되었고, 그 이념은 중국 전역의 시민권과 노동권을 향상시키고자 하는 서구식 사회민주주의와 비견될 수 있습니다. 한편으론 이들은 주로 중앙정부를 연방 공화국과 다당제 민주주의 하에 재편해야 한다고 외치고 있으며 전국에서 가장 중요한 연성주의 정당이기도 합니다.

천밍수가 이끄는 생산인민당은 본질적으로 광둥의 국민당 중도좌파를 위한 표면상의 조직입니다. 또한 이들은 연성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사회민주주의적이긴 하지만, 생산인민당의 이념과 철학이 쑨원의 삼민주의와 그의 가르침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서로 다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들이 연성주의자들과 더 가까이에서 협업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북벌 이전 양당의 창당자 사이에 있었던 끔찍한 수준의 불화입니다.

정당이 아니긴 하지만, 광저우상공회의소 산하의 준군사조직인 월상공안유지회는 큰 영향력을 갖고 있으며, 천롄보가 이끄는 이들의 주요 목표는 도적들과 무책임한 정치인들로부터 기업과 무역을 보호하는 것입니다. 이들은 검은 월요일과 연합의 붕괴로 인한 막대한 손실을 만회하기 위해 AOG가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홍콩과 독일계 사업가들과의 눈에 띄는 유대관계를 맺고 있어 현지 반조계주의자들의 표적이 되고 있습니다.
광시의 상황

광시에서는 성의회가 군대의 거수기에 지나지 않습니다. 그런 만큼, 정치적 단체들의 루룽팅 성장과 광서군벌에 대한 반대 또한 매우 미약한 수준입니다. 이 지역은 고도로 군사화되어 있으며, 중국 전역에서 최고의 군대로 잘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높은 수준의 군사화는 큰 비용을 요했으며, 부유한 광둥이 광시 군대를 부양하고, 상대적으로 작은 광둥 군대를 광시 군대가 지원하는 상호의존적인 관계가 성립되었습니다.

중국의 다른 군벌과 비교해서, 군대가 거의 차별없이 광시의 소수민족을 받아들인다는 것을 봤을 때, 광시는 상당히 다원주의적인 곳입니다. 이 다원주의는 루룽팅의 두 양자인 회교도 마지와 베트남계 루위광에게 광시의 지도력을 확장하기 위해서 조심스럽고 의도적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이들 군벌의 주적은 현재 윈난에 숨어 있으며, 그 지도자인 리쭝런은 국민당 우파와 제휴한 자신이 성을 되찾을 수 있도록 공격 기회만을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습니다.

"천성장은 잘 해낼 것이다."
<colbgcolor=#eee,#444>
0% 중국공단당
2% 중국공단당
4% 생산인민당
15% 중국치공당
32% 공화대동맹
11% 상단
6% 지주협회
0% 신광서군벌
29% 광서군벌
1% 일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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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둥의 천중밍과 광시의 루룽팅이 연성주의의 구호로 묶인 군벌. 광둥의 재력과 광시의 군사력으로 서로를 보완하며 발전해 나가지만 1936년 말 루룽팅이 사망하고 리쭝런이 광시로 침공해 광서내전이 일어나며 상황이 급변한다. 리쭝런이 이기고 광둥의 천밍수가 리쭝런에 호응해 천중밍을 몰아내면 내전을 회피하고 이후 회담을 통해 천밍수가, 혹은 리쭝런이 지도자가 될지 결정할 수 있다. 천중밍이 자신의 자리를 계속 유지하면 리쭝런과 천중밍 사이에서 광동-광서 전쟁이 일어난다. 리쭝런이 패배하고 루룽팅의 후계자 마지가 승리하면 천중밍이 루룽팅의 장례식에 참가하는데 여기서 마지가 천중밍을 암살하려 시도한다. 암살에서 살아남으면 천중밍과 마지 사이에서 광동-광서 전쟁이 일어난다. 천중밍이 사망하면 광둥성에서는 천롄보, 혹은 천밍수가 권력을 잡고 광동-광서 전쟁이 일어난다. 광둥 광서 전쟁에서 승리한 측이 누구냐에 따라 천중밍의 연성주의 중화합중국, 천밍수의 국민당 좌파, 리쭝런의 국민당 우파[32], 천롄보의 친일 상인 공화국, 마지의 친 직예 군벌화로 루트가 갈린다.

가장 자주 발생하는 것은 천중밍의 승리로 그의 연성자치주의 루트를 타다 보면 운이 좋으면 사천-호남-운남을 평화적으로 괴뢰화할 수 있고, 운이 좋다면 마가군벌이나 신강도 평화적으로 괴뢰화할 수 있으며 확률은 매우 낮지만 청나라가 멸망한 후 산서성과 북경을 지배한다면 봉천도 평화적으로 합병할 수 있다.[33] 마지막 정치 중점을 찍는다면 중점 트리가 중화합중국 중점으로 새롭게 바뀌며 정치 중점 트리를 타다 보면 옛 군벌들(국민당, 직예, 봉천 등)을 받아들일 건지에 대한 이벤트가 나온다. 당연히 장군, 원수, 제독들 중 일부를 영입할 수도 있다. 중국 통일 이후 핵심주 박기만 하는 다른 세력보단 후반 컨텐츠가 많은 편.

만약 리쭝런의 신광서군벌이 이긴다면 (국민당 좌파가 살아 있을 때)국민당 좌파를 침공하고 국민당의 정통성을 가져오며, 이후 남서부 군벌을 공격하고 북벌을 준비하는 등 과격하게 확장하는 면모를 보이며, 권력투쟁에서 국민당 우파가 이긴 군벌들과 연합하기도 한다. 천밍수가 정권을 잡을 경우 국민당 좌파와 협력하다 국민당의 속국 양광 자치성이 되며, 국민당이 멸망했을 경우 자신이 진짜 국민당이라 주장한다.

희귀하긴 하지만 구광서군벌이나 상단이 이겼을 경우 인도차이나를 침공하거나 운남 등을 모아서 호국군을 창설하는 등 따로 노는 행보를 보이다가 직봉전쟁에서 승리한 봉천과 일본에 의해 멸망당한다.

원래는 팔성연합 붕괴 후 독립하는 국가였지만 0.24 패치 후에는 처음부터 존재하는 국가가 되었다. 동시에 합중국 건국 후에도 수도가 계속 광저우로 고정되게 되었지만... 제작자가 이건 아니라 생각했는지 현 시점에서는 다시 수도를 옮길 수 있게 되었다.

3.3.9. 운남군벌 (YUN)

운남군벌의 상황

1909년 운남 사관학교를 설립하면서 운남군벌이 탄생했습니다. 1911년 신해혁명이 터진 이래로 운남 지역은 정예병과 중국 공화주의에 대한 충성심으로 유명해졌습니다. 1915년 운남은 홀로 위안스카이에게 저항해 호국전쟁을 선포하고 제정을 무너뜨렸습니다. 승리를 거둔 운남은 팽창주의 정책을 추진하며 주변 지역에 통제권을 행사했습니다. 하지만 그리 오래가지 못했던 운남의 패권은 윈난 바깥에 주둔한 수많은 부대의 통제권을 상실하면서 그 대가를 치렀습니다. 사천을 향한 군사적 모험은 실패로 끝났고 이로 인해 운남군벌 내에서 내분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구핀전 장군이 일시적으로 탕지야오를 권좌에서 끌어내는데 성공했지만, 충성파 군대를 다시 모은 탕지야오가 힘겹게 승리를 거두고 구핀전을 격파했습니다. 하지만 그 이래로 운남군은 더 이상 하나로 뭉친 군대가 아니게 되었습니다. 과거에 학우이자 형제였던 이들이 서로 경쟁을 벌이기 시작한 것입니다.

북벌 동안 운남을 통치하던 군벌 탕지야오는 광저우 국민당 정부와 거리를 뒀습니다. 한편 주페이더 장군이 이끄는 망명 운남군은 국민혁명의 기치 아래에서 집결해 쑨원 선생의 군사주의 파벌이 되었습니다. 북벌이 비극적으로 끝난 이후 자포자기한 국민혁명군 장군들은 남쪽 운남으로 돌아가겠다는 결단을 내렸습니다. 어마어마한 소모를 입은 그들 중 많은 이가 최근 탕지야오가 정복한 땅인 구이저우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탕지야오는 거기서 오랜 적수를 무너뜨리고자 했지만, 룽윈을 위시로 한 장군진은 두들겨 맞은 국민혁명군에게 은신처를 제공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구했고 받아들여졌습니다. 과거에 경쟁관계였던 이들이 공존하는 것이 별로 쉽지는 않았지만, 그들 모두가 중국의 새로운 지배자가 누군지 눈치챘습니다. 직예군벌과 그 뒤를 봐주는 독일 후원자들은 운남 자치권을 가만히 놔두려 하지 않았고, 운남의 여러 세력들은 살아남기 위해 협력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운남군은 유능한 야전 지휘관들과 정예병을 갖췄지만 통일된 지휘구조가 없었기 때문에 4차 직봉전쟁에 대담하게 참전했을 때 엄청난 피해를 입었습니다.

새로운 한 해가 남부 지역에도 찾아온 이 시점에 탕지야오의 군벌 지배력은 강력하다고 말하기에는 민망한 수준입니다. 탕지야오가 고수하는 전제주의와 무능한 형제 탕지위에 대한 노골적인 호감으로 인해 룽윈을 포함한 고위 장교 중 다수가 그와 거리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청에 복종한 일도 그의 위신을 손상시켰고, 결국 탕지야오는 전 국민혁명군 부대에 명목상의 통제권밖에 행사하지 못하는 상황에 이르렀습니다. 운남 장교들 사이에서 정치적 긴장이 날로 고조되고만 있는 가운데 탕지야오가 한번만 실수한다면 그것이 마지막 행보가 될지도 모릅니다.

"정말 신나는구만!"
<colbgcolor=#eee,#444>
1% 국민당-윈난 특별지부
1% 신전사
1% 국민당
4% 국민당
16% 건국전군 (국부군 잔당)
6% 서남실업계
12% 건국전군 (국부군 잔당)
43% 치공당
15% 탕지야오 군벌
1% 소수민족주의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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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지야오가 실각하지 않고 지도자 자리를 유지하고 있다. 원 역사대로는 국민혁명 중 우페이푸와 동맹을 맺었다가 도리어 국민당에게 토벌당하지만 카라에서는 국민당이 패배하면서 후퇴하던 국민당 우파 장군들과 병력을 흡수하면서 오히려 더 세력이 강해졌다. 그러나 삽시간에 중국의 1인자가 된 우페이푸에게는 미치지 못했고 우페이푸 견제를 위해 4차 직봉전쟁에서는 봉천의 편으로 참전하지만 아무것도 못하고 전쟁이 끝난다. 우페이푸와 청나라에 고개를 숙이면서 자존심을 구긴 것을 제외하면 딱히 손해본 것은 없었지만 이 과정에서 탕지야오의 리더십은 많이 손상되었고 세력 확장을 위해 끌어들인 국민당 장성들은 도리어 부담이 되는 상황.

팔성연합이 붕괴되면 본격적으로 활동을 개시할 수 있다. 구이저우성은 탕지야오의 영역이나 동쪽 끝의 전위안 현은 호남군벌이 소유하고 있어서 분쟁이 있어 왔지만 팔성연합이 무서워서 대놓고 넘보지는 못하던 차에 팔성연합이 붕괴되고 호남군벌이 단독으로 남게 되며 침공을 준비하게 된다. 탕지야오는 당장 침공할 것을 명령하지만 부하들은 공격을 재고하고 내실을 다질 것을 요구한다. 여기가 첫 분기점으로 당장 침공을 명령하면 부하 장성들과 병력들에게서 불온한 움직임이 일어나는데 이를 잘 해결하면 탕지야오는 살아남지만 시간을 끄느라 다른 주변 세력의 어그로를 사고 고립주의에 빠지는 탕지야오 독자 루트로 들어가게 된다. 반대로 부하들의 말을 듣고 내실을 다지기로 한다면 불온은 일어나지 않고 천중밍의 연성주의론을 받아들여 서로 협력관계를 구축한다. 이 경우 친 연방 루트로 들어가게 된다.

독자 루트나 친 연방 루트에서는 중국의 서남쪽 끝에 고립되어 있다는 특성상 중원 국가들과의 전쟁에 끼어들기보다는 티베트, 독일령 동아시아, 시암, 버마 등 중국 외부의 국가들을 공격해서 영토를 한입씩 집어먹는다. 친 연방 루트에서는 여기에 천중밍의 양광군벌과 협력해 호남군벌, 사천군벌, 최종적으로는 청나라까지 멸망시켜 천중밍이 연성주의로 중국을 통일하도록 돕게 되며 나중에는 양광군벌과 통합하는 길을 걷게 된다.

그러나 장성들의 불온을 진압하지 못하거나 장성들의 권력을 빼앗으려고 하면 룽윈이 탕지야오를 암살하고 운남 내전이 시작된다. 룽윈, 주페이더, 후뤄위, 루한이 내전에 뛰어들며 내전이 장기화되면 이 참상을 보다 못한 주더까지 중립을 깨고 참여한다. 내전에서 승리할 수 있는 세력은 룽윈, 주페이더, 주더인데 주더는 자신이 정권을 잡으려고 내전에 뛰어든 것이 아니라 질서를 회복하기 위해 참여한 것이기 때문에 친구인 주페이더나 장보쥔에게 정권을 넘겨준다.

룽윈 루트는 탕지야오 독자 루트와 유사하다. 동남아시아를 휘저을 뿐 중원의 전쟁에는 거의 개입하지 않고 방어에 집중한다.

주페이더가 승리하면 국민당 우파 루트로 들어서게 되며 스스로를 쑨원과 국민당의 정당한 계승자로 선언하고 이름이 곤명 국민정부로 바뀌며 전 중국 정복에 매진한다. 양광의 리쭝런 정도를 제외하면 국민당 우파의 편을 고정적으로 들어주는 국가는 거의 없기 때문에[34] 혼자서 전 중국을 다 먹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편하다. 대신 국민정신이나 이벤트 등으로 얻을 수 있는 성능 면에서는 중국의 모든 국가를 통틀어서 수위권에 든다.

장보쥔이 정권을 잡으면 국민당 좌파 루트로 들어가고 동부 해안에서 발흥하는 국민당 좌파에 복종하게 된다. 나중에 가면 국민당 좌파의 속국으로 들어가고 이름을 남조 자치성으로 바꾼다.[35]

3.3.10. 청 조정 (QIE)

대청국

1928년, 국제 사회의 중재로 직봉전쟁이 종전하자 약 4년간의 혼란과 불안정이 종식되었고, 중국의 일부 지역은 1911년 신해혁명 이래로 가장 긴 평화의 기간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독일의 요구에 따라 우페이푸 북직예군벌 청조의 복벽을 수용했으나, 독일에 추가적인 이권 제공은 거부했으며, 이에 따라 대독 관계는 급속히 냉각되었습니다. 하지만, 독일은 청 조정에 대한 지원을 계속 유지했습니다. 바로 독일의 대중국 전략인 '분할 및 정복'의 일환으로써, 남직예군벌과 동시에 지원해 지속적인 경쟁을 유도하는 한편, 소소하게는 중국을 일본에 대항하는 요새로서 구축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에 기인한 것입니다.

일본의 마수 화북 화둥을 가로지르고 있지만, 중국은 베이징이 원하는 바와는 다르게 분열되어있으며, 청의 권위는 동북방의 반항적인 봉천정부에서부터 중국의 나머지 지역에 걸친 다양한 표면상의 우방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세력들에게 도전받고 있습니다. 이들은 명목상으로는 제국의 구성원이나 지정학적 영향과 지역주의적 경향으로 인해 사실상 독립에 가까운 자치권을 부여받았습니다. 그 결과 청은 사실상 화북 평원에 갇힌 채, 흔들리는 국가 질서의 선두에 선 채로 1936년에 들어섰습니다.
정치적 현황

1936년, 무력한 의회는 벼랑 끝에 서 있습니다. 5개 파벌이 의회를 구성하고 있고, 이들은 딱히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그들을 배후에서 지원하는 세력들은 무시할 만큼 사소하지 않습니다. 이들 중 가장 강력한 파벌은 명목상으로는 차오쿤 의장이 이끌고 있는 화합회입니다. 화합회의 실질적인 당수는 우울증에 시달리는 알코올 중독자 차오쿤이 아닌 우페이푸로, 화합회는 그가 의회에서 직예군벌의 발언권을 보장하기 위해 설립한 파벌입니다. 명목상 독립 정당이지만, 전부 직예 장군들로 구성되어있는 화합회 의원들, 정당한 선거로 의장직에 오른 것이 아닌 게 확실한 차오쿤 의장 등의 여러 증거가 화합회가 우페이푸가 국가를 통치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번영연맹 역시 비슷한 파벌로, 스스로가 정당이라고 주장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이 베이징에 대한 독일의 이해관계를 대변해주는 로비 단체에 불과하다고 여기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 두 정당에 이어, 대청국의 야당은 3개의 주요 파벌로 구성되어있습니다. 청나라 황실과 전직 황실의 식객들로 구성된 종사당, 중국의 청년 튀르크당이 되려고 하는 보정군관학교 출신들의 중국청년당, 그리고 근황파이자 동시에 중국 촌락들의 전통적 이상에 따른 개편과 군벌 타도를 부르짖고 있는 두 파벌의 혼합체인 신보황회입니다. 이 세 파벌은 우페이푸에게 반대하고 있지만, 우페이푸는 그의 인기 없는 정권을 정당화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으로 그들이 유명무실한 의회에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을 허락해 주었습니다.

"황제 폐하 만세!"
카이저라이히의 세계 - 청 제국 (펴기/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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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혁명으로 인해 중국은 약 20년간 내전의 혼란을 겪었다. 군벌 간 권력투쟁은 끝나지 않을 것 같았고, 폭력은 가라앉힐 수 없을 것 같았다. 사회 구조가 뒤집히고 산산조각 나는 것만 같았다. 이 내전 속에서 "옥수(玉帥)" 우페이푸가 주목 받았다. 우한에서 북벌을 막아내고 산해관에서 장쭤린의 봉천군을 두 번이나 격퇴하자 우페이푸는 중국을 하나의 깃발 밑에 놓을 수 있는 이가 되었다.

하지만 우페이푸는 카이저에게서 큰 지원을 받았고, 완전한 승리를 거두지도 못했다. 독일의 지원은 우페이푸가 막강한 군대를 만들게 해주었으며 국내, 심지어는 국외의 위협에도 통치를 계속 할 수 있게 해주었다. 하지만 독일인들은 수 십 년간 실패하고 부패한 민국 정부가 중국에 군주제가 필요한 증거라고 여겼다. 선통제 아이신기오로 푸이의 복벽은 자만심에 쩔은 독일이 우페이푸에게 제시한 모욕의 정점이었다. 중원을 되찾기를 원하던 옥수는 황제를 복벽시켰지만 더이상의 양보는 거절하였다. 독일은 불평등조약을 서명할 새로운 상대를 찾아야 했다.

무역이 장강 하류에 흐르고 상하이의 양지가 세계의 이목을 끌었지만 청 정부는 전의 북양정부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권력은 제국 내각에 집중되었다. 여전히 직계 군벌의 우두머리인 황제의 군사적 근간 우페이푸가 내각을 쥐고 있었다. 민국 정부에서 이어져온 입법원의 힘은 작았고 복벽된 황제는 자금성의 꼭두각시로 남았다. 우페이푸의 군사력은 베이징 정치에서 다른 무엇보다 중요한 요소였다.

하지만 중국의 다른 곳에서는 오랜 속담이 여전히 통했다. 天高皇帝远, 하늘은 높고 황제는 멀리 떨어졌다.[36] 동쪽의 장강 하류에서는 우페이푸의 옛 후배인 "웃는 호랑이" 쑨촨팡이 전 주인에 대항해 힘을 키우고 있었다. 남쪽의 해안 도시와 푸젠의 깊은 산 속에서는 오랜 적이 아직 숨어있었다. 국민당 선동가들은 서서히 도시에 스며들어 새로운 혁명을 떠들어댔다. 북쪽의 만주 국경지대에서는 장쭤린의 봉천 정부가 재정복을 위해 힘을 모으고 있었다. 청 정부의 권위는 어디에서나 의심받았고 산만했다. 한편 황해 너머에서는 욱일이 떠오르고 있었다. 한때 밀접했던 독일과의 관계는 천천히 악화되었다.

나라가 분열되고 중앙정부의 권력이 화베이 평원으로 제한되며 중국은 다시 혼란에 빠져들 것인가? 다시 잔혹하고 무정한 해외 열강의 장기말로 전락할 것인가? 아니면 이 위험을 기회로 삼을 수 있을 것인가? 제국이 다시 천명을 받아 영원히 버텨낼 수 있을 것인가? #
<colbgcolor=#eee,#444>
0% 중국공단당
0% 중국공단당
0% 국민당
10% 신보황회
5% 중국청년당
15% 번영연맹
10% 종사당
48% 화해사단
10% 직예군벌
2% 일관도 영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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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단 훈련 시간 -10.0%, 육군 조직력 회복 -5.00%, 진급 비용 -25.0%, 육군 교리 비용 +10.00%
* 옥수의 조정
육군 경험치 획득량 +5.0%, 계획 수립 속도 -10.0%, 최대 지휘력 증가치 -30, 매일 지휘력 획득 증가치 +5%, 사단 한계 +15
* 북경위원회 영향력 단계
북경위원회는 베이징이 직접 통제하는 지역에 대한 독일의 주요 대리인입니다. 그들은 독일의 산업 방식과 자유무역 채택을 추진하고 의회에서 몇몇 의석을 차지하는 로비단체인 번영연맹에 직접 자금을 지원합니다.
정치력 획득 -7%, 생산 효율 한도 +7.50%
해당 변동치는 시장자유주의 정당의 인기도와 연관되어 있습니다. 매 24시간마다 갱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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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혁명과 3차, 4차 직봉전쟁에서 독일 제국의 도움을 받아 승리한 우페이푸 카이저의 강압으로 청 제국을 복원하게 된다. 청나라는 입헌군주국으로 황제 선통제와 총리 차오쿤이 있지만 모두 허수아비일 뿐 실권은 모두 우페이푸 직예군벌이 쥐고 있다.

우페이푸와 차오쿤의 정당인 화합회[권위민주주의]가 뇌물과 부정선거의 힘으로 집권하고 있고 황족들과 만주인 귀족들을 중심으로 하는 종사당[사회보수주의][39], 도시 지식인들의 정당 중국청년당[사회자유주의], 그리고 농촌 개혁가들과 캉유웨이의 후예들이 주축이 되는 신보황회[사회민주주의]가 야당으로 존재하고 있다.[42] 독일의 강압으로 세워진 국가이니만큼 독일의 경제적 침탈이 존재하고, 친독 기업가와 학자들의 번영연맹[시장자유주의]의 지지도와 국민정신으로 표현된다.

시작 시에는 봉천정부를 제외하면 중국의 모든 군벌이 청나라의 종주권을 인정하기에 "대청국"이라는 세력의 주도국으로 자리잡고 있지만, 게임 시작 후 한 달도 안 되어 팔성연합[남직예군벌]이 붕괴하며 직예의 나약함이 드러나면서 다른 군벌들도 청과 직예군벌을 떠나 각자도생의 길로 들어간다.

팔성연합의 붕괴 과정에서 남직예군벌은 독일 타도를 외치며 들고 일어난 천댜오위안의 안경군벌과 쑨촨팡을 계승한 친독파 치셰위안의 남경군벌로 나뉘고 두 세력은 전쟁의 와중에 우페이푸에게 자신을 지원해줄 것을 각각 요청한다. 여기서 앞으로의 루트가 갈리게 된다.

천댜오위안을 지원할 경우 이는 독일을 손절하는 것으로 비쳐지고 앞으로 다가올 일본의 위협에 독일의 지원 없이 버텨야 한다. 대신 외세를 배척하는 모습에 우페이푸에 대한 국민들의 지지가 매우 확고해지고 안정도, 국민정신과 정당 지지율 등에서 이익을 볼 수 있다.

반대로 치셰위안을 지원할 경우 이는 독일의 영향권에 계속 남는 것으로 비쳐지고 국민들과 야당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천댜오위안은 봉천과 손을 잡게 된다. 그러나 독일이 뒤에 있기 때문에 연구나 산업 등에서 얻는 이득은 제일 확실하다.

한편 두 사람의 지원 요청을 모두 무시하는 방법도 있는데 이 경우 위의 두 루트에서의 리스크를 모두 떠안을 뿐 아니라 같은 직예군벌을 배신한 것으로 비치기에 우페이푸는 리더십에 큰 손상을 입게 된다. 결국 우페이푸에 실망한 직예 장령, 군주주의자, 야당 인사, 선통제와 만주 귀족들이 모두 모여 우페이푸를 축출할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들의 군사력이 부족하기 때문에 외부에 지원을 요청하게 된다. 산서군벌의 옌시산, 산동군벌의 취잉광, 혹은 장톈란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되며 이들의 도움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하면 음모가 실행된다.

음모가 성공할 경우 우페이푸와 차오쿤은 암살, 음모에 참여하지 않은 여타 직예 장령들은 다른 군벌들에게로 망명하고 선통제의 동생 푸제 등이 장군으로 등장한다. 산동군벌의 도움을 받은 경우 바로 청으로 합병되고 후원자들은 조언가로 등장한다. 결정을 통해 지방을 확보하고 직예 잔당들을 몰아내면 이후 중점으로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후원자가 산서군벌의 옌시산인 경우 상황이 조금 달라지는데 공화주의 성향이 강한 펑위샹이 옌시산에게 분노해 옌시산을 축출하고 국민군을 선언한다. 국민군과 청은 거의 바로 전쟁에 들어가며 여기서 청이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면 봉천정부 역시 청을 침공해 조기에 양면전선에 빠지게 된다.[45]

쿠데타의 뒷처리가 끝나면 음모 과정에서 도움을 준 군벌들에게 보상을 하고 찌그러져 있었던 야당들을 새로운 여당으로 삼아 국가를 안정화해나가게 된다. 새 여당 후보로는 중국 청년당(권위민주주의), 종사당(후견전제주의), 신보황회(사회보수주의)가 있으며 옌시산은 중국 청년당외에 다른 정당을 용납하지 않고, 반대로 장톈란은 중국 청년당만은 결사반대한다. 취잉광은 중국 청년당만큼은 꺼리지만 어느 정당을 선택하더라도 푸이에게 충성한다. 여당이 어디인지 관계없이 나머지 정당 역시 후원자가 반대하지만 않는다면 정권에 협력은 하기 때문에 다른 정당에서도 어느 정도의 이점을 얻을 수는 있다. 1940년에는 선거 이벤트가 발생하지만 관제선거이기 때문에 정권의 변화 없이 중국청년당(후견전제주의), 종사당(후견전제주의), 신보황회(권위민주주의)로 정권이 교체되고 앞으로는 정치적 변화가 생기지 않게 된다.

히든 요소로 선거를 개최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여당으로는 신보황회, 후원자로는 취잉광인 상황에서는 결정을 통해 선거 개혁을 할 수 있다. 각 결정의 선택지에는 각각 파란색 툴팁이 뜨는 선택지가 있는데 정치력, 소비재 등에 패널티가 붙는 대신 3번 모두 그 선택지를 고르면 1940년에 관제선거가 아닌 진짜 민주적 선거를 실행하게 된다. 1940년에는 신보황회(사회보수주의)를 여당으로 유지한 채 연정 구성만 교체하고 1944년 선거에서는 신보황회 내 진보파(사회민주주의)나 중국 청년당(권위민주주의)으로 정권을 교체할 수 있다.

정치적 중점을 모두 찍으면 국명을 대청국으로 바꾼다. 그리고 그 동안의 해외에서의 부채는 협상을 해서 제거하거나 아예 채무불이행을 선언해 버릴 수 있다.

음모가 실패할 경우 우페이푸는 음모가들에 대한 피의 복수를 단행한다. 제국은 다시 공화국이 되고 야당은 금지되며 황실 인사들은 추방당한다. 이 경우에도 우페이푸가 직접 총통직에 오르지는 않고 후스 구웨이쥔을 얼굴마담으로 삼아 총통으로 올리고 북양정부를 부활시키게 된다.

정치적인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건 가장 시급한 위협은 만주의 장쭤린과 봉천정부이며 팔성연합의 잔해에서 발흥하는 중국국민당 역시 위험한 적이다. 양광의 천중밍도 만만치 않게 세력을 불리고 있다. 더군다나 몽골이나 티베트도 중국 쪽으로 야금야금 진출하기도 한다. 청나라가 시작 시에 중국에서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은 맞지만 사방이 포위당한 형세이기에 천하 통일의 길은 험난하다. 중국의 각 세력들은 디시전으로 선전포고를 하기 때문에 적대적인 세력과 국경을 맞대고 있을 때는 전쟁 중이 아니더라도 민병대 약간이라도 방어용으로 배치해야 하고 선전포고 알림이 들어오는 것을 예의주시해야 한다.

봉천은 전쟁에서 밀리면 일본을 호출하는데 이 경우 청나라, 국민당, 연성주의 등등 지금까지 싸우던 모든 중국의 세력들이 한데 뭉쳐 청나라를 중심으로 중벤져스중화연합전선을 결성한다. 연합전선이 형성되어도 적극적으로 싸워주는 건 아니고 최소한 뒤에서 방해만 안하는 수준이기 때문에 결국 가장 덩치가 큰 청나라가 직접 항일 전쟁을 지휘해야 한다. 봉천을 항복시키고 한반도까지 진출하면 평화 이벤트가 뜨면서 일본이 대륙 영토를 모조리 내놓으니 굳이 상륙전을 감행할 필요는 없다.

3.3.11. 팔성연합 (LEP)

황실의 초석

지난 10년간의 전쟁 속에서 형성된, 북벌군의 패배로 현재의 규모까지 확대된 쑨촨팡의 연합은 난징에 있는 그의 거점을 중심으로 한 성 정부들의 느슨한 연합체입니다. 비록 중앙정부의 통제에 대한 회원들의 두려움으로 하나로 뭉쳐졌지만, 연합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국의 초석으로써, 공유된 유산 덕분에 외부로부터의 위협과 내부로부터의 위협으로부터 베이징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이 보잘 것 없는 협정은 수년간의 평화와 비교적인 번영을 가져왔습니다. 외국의 산업 방식은 변혁을 입증했으며, 쑨촨팡의 군대는 이제 독일에게 훈련과 장비를 받은 여러 사단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연합 지도자는 기반에 나타나기 시작한 균열에도 불구하고 그가 유지하기에는 벅찬 관료 피라미드의 위에 앉았고, 그 자리를 지키는 것에 행복해 하고 있습니다. 베이징과 연합의 골칫거리인 남부 회원국들의 압력을 상쇄하기 위해 필요한 독일의 물질적 지원은 단독으로는 힘의 원천적 역할을 하지는 못했습니다. 독일의 화폐는 연합의 모든 계층으로 흘러들어와 횡령에서부터 도난품 거래에 이르기까지 공무원들과 함께 부패에 뿌리를 내리고 건강을 해치고 있습니다.

이는 점차적으로 국민들의 불만의 불을 지폈고, 점점 많은 민족주의적 선동가들에 의해 이용되어 갔으며, 국민당의 잔당들에 의해 힘을 얻었습니다. 분열된 연합을 한데 모으려는 쑨촨팡 원수의 모든 노력에도 불구하고, 더 멀리 표류해가고만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국내에서의 말다툼은 동쪽에서 크게 비치는 떠오르는 태양에 의해 사라졌습니다. 내부 갈등 외에도, 연합은 이 도전에 직면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는다면 전멸의 위험을 감수해야만 합니다.
중앙정부

쑨촨팡은 그의 옛 스승인 우페이푸와 함께 국민당의 북벌을 멈추고, 북방 평야로 진출하려는 봉천을 몰아냈습니다. 그들은 함께 중국의 모든 것을 적절히 통제하게 되었지만, 그 뒤에 온 평화는 곧 새로운 딜레마를 가져왔습니다. 과연 쑨촨팡은 북부에 있는 그의 옛 스승에게 계속 절을 할지, 또 우페이푸는 그의 옛 제자가 그의 권위를 무시하도록 놔둘까요?

우페이푸의 베이징 정부와 쑨촨팡의 연합은 봉천 정부와 일본이라는 북부와 동부의 공동의 적들에 의해 보장되는 어색한 위치에 있습니다. 쑨촨팡은 격식을 차리고 통일된 국가의 모습을 유지시키는 한에는 연합 내에서 그가 원하는 대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지속될 수 있을지 없을지는 두고 봐야 하겠지만요.
독일

1927년 북벌군의 전멸에 대한 독일의 중요한 역할은 베를린이 중국에서 거대한 영향력을 펼칠 수 있도록 만들었는데, 1928년 국제 상하이 회의에서 모든 국가들이 중국 시장에 동등한 접근을 할 권리가 있다는 선언과 함께 약간은 누그러졌습니다. 이러한 '제한'에도 불구하고 유리한 위치를 확보하기 위해 독일의 관리들은 연합 지도자 쑨촨팡 및 우리 성장들과 일련의 협정을 제안했습니다. 국제 협정과 중국의 권위를 피해감으로써, 독일의 힘은 우페이푸의 북직예로부터 연합의 자치권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그 대가로 독일의 영향력이 점점 더 확산되고 있습니다.

이 협정은 점차 빛을 잃어가고 있습니다. 독일의 통제가 커져가고 국민들이 그들의 노동의 결실보다 더 큰 돈을 장군들과 외국인들의 주머니에 있는 것을 지켜보며, 많은 이들이 독일의 필요성에 의문을 품게 되었습니다.

연합과 독일의 관계의 본질은 앞으로 다시 고려되어야 할지도 모릅니다.
내부 문제

독일의 영향력과 연합의 분권적 성격은 종종 지역의 불안을 야기시켰고, 이는 빠르게 처리되었음에도 여전히 큰 문제였습니다. 연합은 수많은 전복 세력에 의해 괴롭힘을 당하고 있으며, 비록 그들이 아무런 위협도 끼치지 못하더라도, 그들이 통제에서 벗어나도록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1926년의 실패한 북벌의 잔재이자 1932년 두번째 소규모 봉기의 잔재인 국민당 저항군은 우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푸젠의 산악과 주요 해안 조계지에 남아 있습니다. 일관도의 추종자들은 외국의 영향력을 제거하고 중국을 오랜 전통으로 되돌리기 위해 전념하고 있으며 산둥에서 남부로 이동해 동부 지방들 사이에 침투하고 있습니다. 후난뿐만 아니라 양광이라고 불리는 광둥과 광시는 사실상 자주적으로 운영되며 독립이라는 야망을 품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모든 것을 면밀히 주시해야만 합니다.

"연합은 견뎌낼 것이다!"
<colbgcolor=#eee,#444>
0% 중국 생디칼리슴당
0% 중국 생디칼리슴당
0% 국민당
0% 국민당
5% 주색협회
19% 동아시아 총괄행정감사이사회
7% 장난 협령단
15% 안경군벌
54% 남경군벌
0% 일관도 영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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쑨촨팡의 오성연합의 확장 버전. 저장, 장쑤, 장시, 안후이, 푸젠의 기존의 다섯 성에 더불어 국민당이 장악했던 후난, 광둥, 광시까지 손에 넣었다. 독일군은 국민혁명을 진압하고 직예군벌을 돕기는 했지만 우페이푸가 선통제를 복벽하는 것 이외에는 추가적인 요구를 들어주는 것을 거부하여 별로 이득을 보지 못했다. 그러나 직예의 또다른 실력자로 떠오른 쑨촨팡은 독일의 요구를 승낙했고 자금과 무기, 병력을 지원받는 대가로 해안도시들을 마음대로 조계로 내주고 독일 기업의 경제적 이권만을 보장하는 등 매국행위를 저지른다.

이는 당연히 주민들에게는 인기가 없는 정책이었고 국민혁명 패배 이후 숨죽이고 있던 국민당과, 종말론을 추종하는 종교단체 일관도가 세를 불리고 심지어는 쑨촨팡의 부하들 사이에서도 반발이 나타난다. 결국 게임 시작 이후 독일 회사가 중국에 건설된 철도를 매입하려는 방침을 발표하자 쌓여있던 불만이 폭발하며 대규모 봉기가 일어난다. 게다가 하필이면 이 타이밍에 독일에서 검은 월요일이 터지고 쑨촨팡 자신은 스젠차오에게 저격당해 사망하며 상황은 통제 불능이 된다. 팔성연합 체제는 붕괴되고 쑨촨팡의 부하 천댜오위안은 안후이를 차지해 팔성연합 붕괴를 외치며 안경군벌을 이루고 푸젠 남쪽 끝에서는 민감기의군이 봉기하며, 북쪽의 산둥성에서는 승냥이같은 장쭝창이나 일관도의 교주 장톈란이 집권해 침공을 시작한다. 쑨촨팡의 부하들의 잔당은 치셰위안이 접수한다.

초반부터 안경군벌, 국민당 좌파, 산동군벌[46]과 3면전쟁이 일어난다. 병력 수도, 공장도, 시작시 지배하고 있는 지역도 다른 적들 하나하나와는 비교가 되지 않지만 더 부패한 군벌이라는 특성상 디버프가 강하게 걸려있고 전선이 멀리 퍼져있어서 AI의 경우 3면전쟁 시점에서 광탈하기 십상이다. 적이 진군하면서 생기는 전선의 틈을 파고들어 병력을 하나하나 각개격파 하는 전략으로 나가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강을 끼고 상대적으로 쉽게 막아낼 수 있는 산동군벌은 후순위로 하고 수도 난징을 직접적으로 위협하는 안경군벌이나 코어박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른 국민당을 먼저 처리하는 쪽이 더 효율이 좋다. 초반의 삼면 전쟁을 끝마치면 다시 팔성연합의 재건을 선포할 수 있다.

친독 군벌이니만큼 독일 & 독일령 동아시아에게서 도움을 받을 수 있다. 건설 속도, 무기 생산량을 올리고 질 좋은 설계사를 고용하며 군사력에도 버프를 더하는 등 좋은 버프가 많이 있지만 중점, 디시전, 이벤트 등으로 이런 버프를 마구마구 뽑아먹다 보면 AOG(시장자유주의)의 지지율이 상승하고 독일령 동아시아에 완전히 종속되어 역으로 공장을 상납하는 수준까지 가게 된다.

안경과 국민당 좌파를 흡수하면 남방연합으로 이름을 바꾸며 독일에 중국의 자원을 팔아먹고 국민당과 일관도를 탄압하는 등 한간짓을 열심히 해서 팔성연합의 내부 재건이 어느 정도 끝나면 후난과 양광에 전쟁 목표를 생성하고 코어를 박을 수 있다.

스스로 세력을 만들거나 천하 통일을 주도하거나 할 수는 없고 우페이푸가 친 남경 루트를 선택하면 친 직예로 분류되어 청나라와 같은 세력에 가입하게 되고 그 외의 루트(친 안경, 선통유신, 푸이 축출)를 선택하면 비동맹으로 분류되어 다른 세력에 가입하지 않는다.

0.24 패치 후 호남과 양광이 처음부터 독립해 있게 되었으며 1.0 패치 이후 안경-국민당(-산동)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나면 바뀌는 이름이 남방연합이 아닌 동남제성연합이 되었다.

1.2 패치 이후 OTL에서도 쑨촨팡 휘하였던 최용덕이 지상지원 전문가로 추가됐다.
3.3.11.1. 안경군벌 (ANQ)
<colbgcolor=#eee,#444>
0% 국민당
0% 국민당
0% 국민당
3% 반조계연맹
4% 주홍회
10% 베이징 협의회
9% 강남협회
33% 안경군벌
41% 안경군벌
0% 일관도
}}} }}}
팔성연합에서 천댜오위안이 독립하며 등장한다. 우페이푸가 안경군벌의 편을 들면 친청 루트로, 그 이외의 경우에는 친봉천 루트로 들어선다. 시작하자마자 팔성연합과 전쟁을 벌이며 팔성연합 멸망 이후에는 국민당과 전쟁을 벌인다. 장쭝창이나 상청천국 루트를 탄 산동군벌과도 전쟁 중이라면 양면전선에 처해 분할당할 수도 있다. 전쟁에서 이기면 이름을 동남제성연합으로 바꾼다.[47]

안휘성이 세력 기반인데, 정작 돤치루이의 안휘군벌과는 연관성이 없고 지역 군벌, 혹은 직예군벌로 분류해야 할 것이다.

3.3.12. 호남군벌 (HNN)

호남과 신해

자오다펑 도독 휘하에서 신해혁명에 참여한 최초의 성 중 하나, 호남은 격동적인 수년간의 역사가 있습니다. 자오다펑이 신해혁명 중에 전사하면서, 탄옌카이가 1911년에 그를 승계하였습니다. 하지만 탄옌카이의 재임은 2년만 지속하였는데, 위안스카이와 쑨원의 갈등에서 중립을 유지하자 탄옌카이가 위안스카이에게 해임되고 이어서 탕샹밍으로 대체되었던 일 때문이었습니다.

짧은 6개월간의 재임 이후, 탕샹밍 도독 대리의 의도된 목적 때문에 성은 탕샹밍이 다시 한 번 도독이 된 1916년까지 일련의 도독들 사이에서 주인이 이리저리 바뀌었습니다. 이 재임은 위안스카이의 홍헌제 즉위 이후 탕지야오 운남도독이 독립을 선언하면서 다시 한 번 몇 개월만 지속하였습니다. 늘어진 도미노들처럼 성마다 운남과 제휴하고 독립을 선언하여 뒤따르기 시작하였고, 곧...
격동의 시기

...현지 군벌 톈잉자오가 호국군의 인내심은 한계라고 선언하면서 호남은 포위당하였으며, 탕샹밍 제독은 혼란 속에서 배로 호남을 탈출하여 양쯔강을 거슬러 올라갔습니다. 8월, 중앙정부의 돤치루이 국무총리는 탄옌카이를 다시 한번 성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이번 재임도 오래가지 않았고, 청첸, 푸량쭤와 저우자오상의 짧은 재임 후에, 돤치루이는 장징야오를 독군으로 임명하였습니다.

악명 높은 "호남의 도살자"는 피로 흠뻑 젖은 정권을 가졌습니다. 도적질과 약탈은 사실상 공식적인 정부 정책이었으며, 성 전역에서 대규모 소요가 일어났습니다. 광란은 단 2년만에 탄옌카이와 그의 부하, 자오헝티가 힘을 합쳐 성에서 도살자를 몰아내면서 장징야오가 축출되게 하였습니다. 탄옌카이에게 불행하게도, 그리고 이전 임기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오랫동안 독군이지 않았습니다.

연성주의 지식인들의 압력이 증가하자 탄옌카이는 공식 헌법의 재정을 주저하였고, 모든 것은 리링 수비대 사령관 청첸의 반란으로 끝났습니다. 자오헝티 총사령관이 독군 지원을 거부하면서 탄옌카이는 사직하고 자오헝티에게 독군직을 넘겼습니다.
자오헝티 치하의 10년

자오헝티는 신임 호남독군이 되자, 즉시 중국의 가장 뛰어나고 명석한 지성들을 초청하여 호남 및 자신의 연성주의적 이상에 알맞은 헌법 초안을 작성하였습니다. 1922년 1월 1일, 자오헝티는 공식적으로 "호남성 헌법"을 공포하였으며 그해 9월에 민주적으로 선출된 최초의 성장이 되었습니다.

민간 개혁 중 자오헝티는 펑위샹이 옥수 우페이푸를 배신한 후인 1925년에 그를 보호하였는데, 우페이푸가 제때에 보답한 은혜였습니다. 1926년 중반, 그의 두 부하 탕성즈와 예카이신이 분쟁을 벌였는데 자오헝티는 예카이신에게 유리하도록 중재하였습니다. 성장이 편애를 보여주는 중이라고 믿은 탕성즈는 반란하여 광저우의 국민당에 합류하였고, 북벌을 시작하였습니다.

이는 자오헝티 세력이 완전히 패배하여 호남에서 쫓겨난 것으로 이어졌습니다. 하지만 예카이신의 도움으로, 연성파는 우페이푸에게 성 탈환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우페이푸의 국민당에 대한 승리 후, 그는 자오헝티를 호남성장으로 임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제4차 직봉전쟁으로 우페이푸의 관심이 북부로 되돌아오고 자오헝티가 구이저우와 성 전역에 잔존한 국민당 거점들로부터 명백한 군사적 위협을 받으면서, 자오헝티는 긴박한 처지에 놓였습니다.

유감스럽게도, 소호 쑨촨팡이 필요하다고 여긴 자오헝티는 양보에 대한 개인적 혐오에도 그에게 팔성연합 가입을 청원하였습니다. 하지만 자오헝티의 진정한 충성을 의심한 우페이푸는 10여넌 만에 호남으로 돌아온 악양주군 사령관 탕샹밍의 형태로 호남성 정부에 직예군벌의 직접적인 주재관을 "파견"하였습니다.

병자년이 밝으며 호남은 자오헝티의 지도를 통하여 안정적이었지만, 직예의 단두대가 참수를 기다리며 이두정 및 구귀주군벌의 존재와 함께하는 앞날은 험난할 것이 확실합니다...
<colbgcolor=#eee,#444>
0% 중국공단당-급진파
6% 중국공단당-정통파
6% 국민당-제8군 (급진파)
5% 국민당-제8군
16% 공화당
9% 중국민주건국회
31% 민신사
5% 국민당-제6군
11% 악양주군
3% 구귀주군벌
}}}
안정도 +5.00%, 전쟁 지지도 -15.00%, 정치고문 비용 +10%
선전포고 불가능
* 위험한 산업 부문
매월 인구 -10.0%, 소비재 공장 변동치 10.0%, 건설 속도 -5.00%
* 심각한 농업 불균형
매일 정치력 획득 -0.05, 동원 속도/전쟁 지지도 -10.00%, 종주국과의 추가 무역 +20.00%
* 지식인의 중심지
소비재 공장 변동치 10.0%, 연구 속도 +5.00%
* 서부의 이두정
계획 수립 속도 -5.0%, 육군 교리 비용 +10.00%, 매일 후견전제주의 지지도 +0.02
}}}
초기 지도자는 자오헝티이며, 이후 선거를 통해 지도자를 뽑는다.

1.1.4 패치로 리워크가 이루어졌다. 이제 자오헝티 루트는 무조건 연성주의 루트이며, 친 직예 루트는 탕샹밍 루트로 대체되었다. 원래 중점이 따로 있었던 청첸과 탕성즈는 중점이 통합되었다.

국민당 좌파의 속국이 될 시 국명이 호남 자치성으로 바뀐다.

원래는 팔성연합 붕괴 후 독립하는 국가였지만 0.24 패치 후에는 처음부터 존재하는 국가가 되었다.

3.4. 트란스아무르 (TRM)

트란스아무르 - 주 블라디보스토크 러시아 임시정부

민주주의가 오래가지 못하는 곳에 위치한 시베리아와 러시아 극동지역은 ' 체코 군단'의 부상, 일본의 개입 등으로 러시아 내전 당시 분쟁의 주요 지역이었습니다. 독일군의 압력(그리고 카자크로부터의 강력한 저항)으로 군대를 철수시키는 동안, 일본인들은 그들의 영향력을 열심히 확대해, 1922년에 트란스아무르 지역에 독립국의 설립을 추진했습니다. 일본에 의한 독립국의 설립이 경제적인 의존을 형성한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움직임은 블라디보스토크 경제 공동체의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들의 대다수는 러시아를 괴롭히는 혼란에 더 깊이 빠져들 수 있는 다른 대안과 비교할 때, 동양의 부상하는 세력과의 경제 및 외교관계 구축을 중요한 이점으로 보았습니다. 이 신생 국가는 1925년, 통치권 장악에 실패한 후 러시아를 탈출할 수밖에 없었던 내전의 백군들 중 하나이자 한때, 자칭 '전러시아의 최고지도자'인 콜차크 제독이라는 두드러진 인물을 얻었습니다.

1936년, 트란스아무르 공화국은 기업주의와 군국주의 국가가 되었으며, 정치적, 경제적, 군사적으로 일본 제국의 손아귀에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콜차크는, 자신의 야망을 품고 있습니다. 그는 일본의 위세를 이용해 자신의 지배력을 확립하고, 시베리아를 넘어 러시아 전체를 아우르는 아주 위험한 게임을 할 수 있을까요?

"흥미롭군..."
<colbgcolor=#eee,#444>
0% 극동 전체주의당
0% 극동 생디칼리슴당
0% 트란스아무르 사회당
2% 인민극동당
6% 민주당
6% 대중주의자
17% 젬스키 의회
20% 대표단
47% 군정
2% 왕정복고 위원회
}}} }}}
연해주에 위치한 친일 국가. 봉천정부와 비슷하게 일본의 독립 보장을 받는 것으로 표현된다. 수도는 블라디보스토크이며 알렉산드르 콜차크가 다스리고 있고 러시아와는 사이가 매우 나쁘다.

일본의 영향력은 디시전 '우리의 스승으로부터의 방문'으로 표현되는데 이 디시전이 한번 끝날 때마다 일본 대표단(권위민주주의)의 지지율이 상승한다. 이를 막기 위해서는 주기적으로 '반일집단 지원' 디시전을 눌러서 대표단의 지지율을 깎아야 한다.

1937년에 반콜차크 쿠데타 이벤트가 발생하는데, 결과는 크게 4가지로 나뉜다.
반콜차크 쿠데타가 성공하면 콜차크가 지도자로서뿐만 아니라 장군과 제독으로서도 사라진다.

몽골에서 혁명이 일어나 운게른이 몰락하면 그를 따르던 러시아인 장군 2명이 트란스아무르로 오는데, 받아주든 말든 마음대로 하면 된다.

의외로 확장은 쉬운 편인데 반콜차크 쿠데타를 일본의 개가 되지 않고 어떻게든 끝내서 시베리아 영토를 얻는 중점을 해금하면 이후 러시아가 개입하느냐 개입하지 않느냐에 따라 영토를 그냥 얻을 수도 있고 러시아와 전쟁을 할 수도 있다. 러시아를 멸망시키고 나면 러시아를 칭하며 일본의 영향력을 완전히 없애는 중점이 열리며 러시아처럼 옛 러시아 제국의 영토를 되찾을 수 있다. 그리고 일본이 조선의 독립운동가들을 단속하라는 공문을 보내기도 하는데, 이걸 무시하면 일본이 최후통첩을 보내고, 최후통첩까지 무시하면 일본과 전쟁을 벌여 러시아를 칭할 때처럼 일본의 영향력을 완전히 없앨 수 있다. 진행하면서 어쩔 수 없이 모스크바 협약을 창설해야만 하는 러시아와는 달리 초반에 캐나다에 특사를 보내는 이벤트가 좋게 마무리되었다면 협상국에 가입이 가능하다.

0.20 패치로 콜차크가 육군 장군진에서 삭제되고 보이체홉스키가 추가되었다.

러시아의 2번째 리워크안에서는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고 러시아의 혼란이 계속되면 일본 제국의 지원을 받아 독립하는 국가로 등장할 예정이며 초기 지도자도 그리고리 세묘노프로 변경될 예정이다. 현재도 트란스아무르가 극동 지역을 장악할 수 있는데 이제 일본에게 선택권을 줄 것이라고 보면 되겠다.

4. 중동

4.1. 자발 샴마르 토후국 (JBS)

자발 샴마르 에미르국

하일의 대 에미르는 제2 사우드 국가의 폐허 위에 라시드 국가의 기초를 쌓았습니다. 이 국가가 1904년 이븐 사우드가 흥기할 때까지 고작 수십 년밖에 지속되지 못하리라고는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샴마르가 나지드 지역민에게 잔인한 통치를 일삼으며 명예로운 라시드 가문을 아라비아의 인구와 경제 대부분을 주름잡는 지역과 유리시켰기 때문에 이는 불가피한 결과였습니다. 여러 전투 끝에 라시드 군대는 처음에는 리야드에서, 이후에는 아랍 내륙 지역 대부분에서 밀려났고, 그들의 손 안에 남은 지역은 고향이었던 자발 샴마르 뿐이었습니다.

하지만 하일의 에미르는 다른 아랍 군벌들과는 달랐습니다. 그는 남부 국경을 방어하기 위해 그들을 활용한 대재상부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이런 관계는 벨트크리크까지 이어졌습니다. 벨트크리크 동안 하심 가문은 영국 편에 섰고 사우드 가문도 그쪽 편을 들었지만, 자발 샴마르의 에미르는 모든 자금을 쏟아부으면서 대재상부가 가장 힘든 시기를 지나는 와중에도 충성을 다했습니다. 이런 충성심으로 인해 전쟁이 끝난 이후 엄청난 보상을 받았지만, 이로 인해 라시드 가문은 아랍 이상의 반역자이자 오스만의 개로 인식되면서 표적이 되었습니다.

벨트크리크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에미르국은 튀르크 편에 서면서까지 기대했던 부를 손에 넣지 못했지만, 그래도 코스탄티니예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게 되었습니다. 산업 혁명이 중동 지역에 퍼져나가자 이미 취약한 상태였던 샴마르 경제는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샴마르 경제는 하즈를 위해 메카를 향하며 아랍 내륙 지역을 통과하는 순례객에게 의존했지만, 증기선과 자동차 그리고 결정적으로 오스만 철도망이 고대부터 내려온 무역에 엄청난 타격을 주었습니다.

번영하지만 냉담한 오스만 제국과 팽창주의 야욕을 품은 사우드 국가 사이에 위치한 하일의 에미르는 스스로를 재창조하고 새로운 수입원을 찾고 남아 있는 지지자들의 충성심을 유지해야 합니다. 그렇지 못한다면 확실히 역사책에서 완전히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알라께서 우리가 갈 길을 인도해 주시길!"
<colbgcolor=#eee,#444>
46% 알-라시드
39% 알-라시드
15% 알-라시드
}}}
이러한 태도는 샴마르족을 신뢰할 수 없는 우월주의자로 보는 아라비아의 다른 부족들과 과거에 심각한 문제를 일으켰고, 그들의 무자비한 정복 시도가 이 지역을 불타는 폐허로 만들었을 때, 나지드 지역 전체에 대한 짧은 통치 때문에 더 악화되었습니다. ||
매일 정치력 획득 +0.25, 안정도 -10.00%, (나지드-하사) 대외 공격 혜택 +10.0%, (나지드-하사) 타국에 대한 방어 혜택 +10.0%
반도의 다른 지역과의 통합은 잦은 부족 갈등과 권력을 나누기를 꺼리는 샴마르 가문 때문에 가혹한 불이익으로 이어질 것입니다.
* 오스만의 개

그러나 부활한 이븐 사우드를 막지 못한 그들의 무능함은 새로운 사우디 왕국을 진압하는 것을 돕는 튀르크에 대한 의존을 증명해 주었고, 아라비아반도의 전통에 따라 그들에게 오스만의 개와 배반자라는 평판을 주었습니다. 계속 패배를 겪은 자발 샴마르는 남아 있는 모호함을 없애고 오스만 편으로 몸을 던져 그들의 자리를 되찾으려고 시도했습니다. 이 결정이 리야드에서 독립한 국가로부터 그들의 생존으로 이어질지라도, 이는 그들을 튀르크에 더 가깝게 묶어두었습니다. 이븐 사우드가 권력과 영향력을 늘리고, 나지드의 강력한 군사적 잠재력과 라시디 왕조의 끊임없는 내전 때문에 튀르크인들이 여전히 에미르국을 잡고 있는 유일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
매일 정치력 획득 -0.10, 전쟁 지지도 -20.00%
우리가 오스만 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는 한, 그들은 우리에게 자금을 주고, 군대를 무장시키고, 영토를 보호해줄 것입니다.
* 오스만 군사사절단
이 나라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근대화를 장려하고 군에 진보된 전술 지식과 규율을 도입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군사사절단을 받아들였습니다.
사단 조직력 +5.0%, 사단 회복률 +5.0%, 계획 수립 속도 +5.0%, 최대 계획 수립 +15.0%, (오스만 제국) 대외 공격 혜택 +15.0%
}}}
리워크 이전에는 독립국이었지만 리워크 이후 오스만의 토후국이 되었다.

시작 시에는 라시드 가문[52]이 집권하고 있으며 절대권력을 추구하거나 절대권력을 내려놓을 수도 있는데, 숩한 가문이 라시드 가문을 몰아내고 권력을 잡을 수도 있다. 숩한 가문이 권력을 잡으면 국명이 수도와 같은 하일로 바뀐다.

나지드와의 전쟁으로 멸망하거나 나지드를 멸망시킬 수 있는데 나지드를 합병해도 이크완과 나지드 잔당을 미리 중점으로 진압해야 한다. 이후에는 오스만에서 독립해 나가거나 오스만의 토후국으로 잔류하며, 오스만에서 독립해 나갈 경우 헤자즈 지역과 카타르, 바레인, 아부다비를 노리고 카이로 협약에 가입해 전쟁을 치를 수 있다.

헤자즈를 차지하면 헤자즈를 완전히 통합하거나 동군연합을 구성해 헤자즈를 괴뢰국으로 해방시킨다. 헤자즈를 통합할 시 어느 가문이 권력을 잡았느냐에 따라 국명이 라시디아라비아 또는 수바니아라비아가 된다. 다만 보통 카이로 협약의 맹주인 이집트가 헤자즈를 독립시키기 때문에 괜히 헤자즈를 차지하려다 카이로 협약에 다굴당하고 헤자즈에 합병당하는 결말을 맞이하는 경우가 많다.

4.2. 나지드 하사(SAU)

4.3. 조지아 공화국 (GEO)

조지아 민주공화국

조지아는 러시아 내전의 혼란기에 자캅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에서 이탈하며 독립을 얻었습니다. 혼란기 동안, 조지아는 주변의 적들을 막기 위한 도움을 받고자 독일의 편에 섰습니다. 조지아는 독일과 복수협정을 체결했고, 특히 포티 조약을 통해 독일의 보호를 받는 대가로 경제 내에서 독일의 확실한 지배를 초래한 몇 가지 경제적 양보를 했습니다. 또한 바투미 조약을 통해 조지아는 오스만 제국에게 무슬림 다수 지역을 넘겨줬습니다. 지금은 멸망한 아르메니아 공화국과의 짧은 갈등 끝에 조지아는 로리 지방을 얻어냈고, 이후로 평화롭고 안정된 상태를 유지했습니다.

러시아의 일부였던 시절, 조지아는 독립을 쟁취했을 때도 남아 있던 멘셰비키의 중심지였고, 1918년부터 조지아의 멘셰비키 사회민주당이 집권했습니다. 1918년 노에 라미슈빌리가 의장으로 잠시 재임한 후, 노에 조르다니아는 18년 동안 이 나라를 확고히 통치해 왔습니다. 멘셰비키는 지난 몇 년간 득표 수가 줄어들긴 했지만, 여전히 조지아 내의 완고한 정치적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습니다. 1935년 선거에서 멘셰비키는 의석의 거의 대다수를 잃었지만 버틸 수는 있었습니다. 국민민주당, 즉 EDP는 많은 표를 얻었고, 당수인 에크브티메 타카이슈빌리는 복벽주의 단체들과 가까이 지내기 시작했습니다. 왕좌에 오를 주요 후보자인 카이저 빌헬름 2세의 아들 프로이센의 요아힘 왕자와, 구 조지아 왕실인 바그라티온 가문의 가주인 기오르기 바그라티온과 함께, 군주제에 대한 인기는 지난 몇 년간 높아져 왔습니다.

조지아는 점점 더 커져만 가는 불확실성으로 가득찬 세상에서 안정의 등불로서 서 있습니다. 지난해 말, 늙고 명망있는 노에 조르다니아가 총리직에서 물러나고, 독립 이후 조르다니아 정권에서 일해왔지만 그보다는 인기가 떨어지는 에브게니 게게치코리가 자신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라고 발표했습니다. 하지만 갑작스레 재난이 닥치지 않는 한 1939년 차기 선거까지는 정치적으로 변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조지아는 살아남을 것이다."
<colbgcolor=#eee,#444>
0% 조지아 공산당
0% 생디칼리슴당
7% 사회혁명당
44% 조지아 사회민주당
8% 조지아 사회연방혁명당
6% 국민지주당
30% 국민민주당
0% 조지아 정통주의자 연합
5% 애국연합
0% 애국연합
}}} }}}
시작 시점에서는 멘셰비키 사회민주당이 집권 중이다. 예정된 선거년도는 1939년이지만 검은 월요일의 여파로 연말에 조기 선거를 치른다.

검은 월요일 극복 방법은 자립, 독일에 의존 2가지가 있다.
사회보수주의 정당이 집권하면 군주제를 복원할 수 있는데, 검은 월요일 극복시 자립을 택하면 바그라티온 왕조의 기오르기 9세가 집권하고, 독일에 의존을 택하면 빌헬름 2세의 6남 요아힘 폰 호엔촐레른이 이오아킴 1세로 집권한다.[53]

군주제를 복원하면 야당이 반대하는 시위를 전개하는데 기오르기의 경우 카쿠차 촐로카슈빌리의 제안을 받아들여 국가를 전복할 수 있다. 이 경우 인민수비대를 재편한 발리코 주겔리가 이벤트 상의 내전을 시작하며 이벤트 체인에 따라 주겔리가 민주정을 재수립하고 재선거를 하거나 기오르기가 인민수비대를 끝장내고 후견전제주의 정부를 수립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이 카이로 협약과 전쟁을 벌일 때 바투미의 반환을 요구할 수 있고, 오스만이 거절하면 선전포고할 수 있다.

1.3 패치 즈음 독일의 동방주가 되었다.

4.4. 페르시아 (PER)

이란 소개 Introduction of Iran

지난 수십 년간, 이란은 끊임없는 변화와 불안정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우리는 러시아와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쟁취했고, 국제사회에서 우리의 자리를 찾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있습니다. 변방의 작은 시골에서 테헤란과 같은 대도시까지 국가 전역의 민중들의 생각은 각기 다릅니다. 불과 몇 년 전, 한 사회주의자가 샤를 저격했습니다. 비록 샤는 목숨을 건졌지만, 그의 건강은 날로 악화되고 있습니다. 샤의 죽음이 가까워지고 있고 국가가 휘청거리고 있으며, 국가 내의 이념의 골이 분쟁으로 번지려 하고 있습니다. 민주주의자들은 공화국을 세우려 하고 있으며, 군주주의자들은 샤의 형제인 하산 미르자를 왕위에 올리려 하고 있으며, 사회주의자들은 중동 최초의 사회주의 국가를 건설하려 하고 있습니다. 어떻게 되든 평화롭게만 되길 기원합니다...

우리 군대의 상태 또한 난장판이며, 우리나라는 수백만을 죽인 기근에서 아직 회복하는 중입니다. 그뿐 아니라, 부패한 귀족들이 정치계를 주름잡고 있으며, 정치계를 어지럽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는 많은 문제를 안고 있으나, 우리가 성공적으로 그 문제들을 해결하면 우리는 중동에서 가장 위대한 제국이 될 것입니다.

"페르시아는 강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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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이란 사회주의당
0% 이란 생디칼리스트당
9% 에달라트당
41% 민주당
2% Hezab Eetedaliun
2% 타자도드당
4% Hezb Eslah Talaban
26% 칸데인 카자르
14% 칸데인 카자르
2% 범이란주의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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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대전과 영국 혁명으로 페르시아를 압박하던 영국과 러시아가 동시에 몰락하면서 카자르 왕조가 입헌군주정의 형태로 유지되고 있으며 아시가바트 지역을 차지했다.

시작한지 얼마 안돼서 샤가 사망하면 샤의 동생인 하산 미르자 카자르가 집권해 의회를 폐지하고 전제군주정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여기서 미르자와 그 충성파의 선택에 따라 전제군주정, 입헌군주정, 민주공화정, 사회정 중 하나로 결정된다.

선택에 따라 이벤트로 내전이 일어나는데 공장을 망가뜨리거나 안정도, 정치력을 빼앗는다.

내전없이 원하는 루트를 가는 방법이 있으니 참고.

리워크 티저 판도가 공개되었다. 리워크안에서는 후제스탄 지역이 독립해 나갔으며 정치적으로는 국민대중주의 공화국이 될 것으로 보인다.

4.5. 예멘

4.6. 무스카트

5. 남아시아

5.1. 인도 자치령

5.2. 바라트 코뮌

5.3. 토후 연방


[1] 메콩강 서쪽과 북부 말레이는 후술하듯 시암이 먹어치웠다. [2] 식민지 주둔군은 기갑 하나 없고 해병사단 4개를 포함해 보병 31개만 있는 순수 보병부대. [3] 러시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디시전 중 '혁명 수출' 디시전에 일본이 반드시 포함되어있다. 러시아와 지리멸렬한 전쟁을 겪기 싫으면 일본을 해방시켜선 안 된다. 더욱이 쿠릴 열도 역시 손도 대서는 안 된다. [4] 이 세 지역은 태국령이다. 일본이 압박을 가해 공영권에 강제 참여 시 독일령 동아시아가 쳐들어가 수도고 뭐고 죄다 점령해서 항복시키면 태국이 이탈하고 라오스와 캄보디아, 북부 말레이를 점령하여 코어를 박는다. [5] 올덴부르크(빌헬름스하펜), 하노버,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을 클릭해 프로빈스창을 확인할 경우 동아시아 해군 조선소라는 디버프가 달려있는데, 이 디버프의 설명란을 보면 "이 주에 있는 조선소는 동아시아 해군성의 지휘하에 있으며 그들의 함대를 지원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디버프는 주의 최대 공장으로, 빌헬름스하펜은 1개, 하노버와 슐레스비히홀슈타인은 3개씩 최대 공장 슬롯이 줄어든다. [6] 이 경우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이 총독이 되고 제독 풀이 텅 비어버린다. 땅을 한 조각도 잃지 않고 오히려 이겨가고 있는데 갑자기 함대가 철수당하는 황당한 사태를 맞이할 수 있다. [7] 칭다오는 상륙으로, 싱가포르는 시암을 통한 육로로 후다닥 점령이 가능한지라 AI여도 사실상 '날먹'이 가능했기 때문에 취한 조치로 보인다. 가뜩이나 코어가 다 빠져서 충분한 육군을 확보하려면 별 수를 다 써야 하는 독동아에게 필요한 조치. [8] 현실 역사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 설정상 프랑스 식민제국 붕괴 당시 태국이 뜯어간 메콩강 서안 지역을 뺀 영역이다. [9] 이르면 진짜 1938년무렵 독립하자마자 2차대전 개전도 안한 상태에서 바로 남진론 찍은 일본이 처들어온다. [10] 미국, 독일, 일본,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헝가리, 플란데런-왈로니(벨기에). [11] 양쯔강 패치 이전에는 그에 대한 도시전설들이 여과 없이 그대로 있어서 정말 미친 남작으로서의 모습으로 나왔고, 아예 칭기즈 칸 2세를 칭할 수도 있었다. [12] 민은 푸젠성의 약칭, 감은 장시성의 약칭, 기의군은 봉기군이란 뜻이다. [13] 실제 역사에서 이들은 북벌 이후 국민당이 1924년 개조의 원칙을 저버리고 유력자(특히 장제스)의 관계로 당 중앙에 진출한 인사들을 비판하였다. 그리하여 이들은 왕징웨이를 공개적으로 지지하면서 국민당의 혁신을 주장하였다. 이들은 중원대전에서 패배하면서 해체되었으나 장왕합작이 복원되면서 어느 정도 재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이들은 1930년대 중국 정치, 역사 및 경제학, 문학 등에 적지않은 영향을 끼쳤다. [14] 카이저라이히 한국어 패치에서는 주석이라고 번역했으나 의장이 맞는 번역이다.당시 왕징웨이가 역임했던 주석 직위는 국민정부 주석이었는데 카이저라이히에서는 북벌의 실패로 국민정부가 붕괴되어 정부랄게 없고 그 대신 중앙위원회를 중심으로 집단지도체제를 구성했으니 왕징웨이는 해당 위원회의 수장인 위원장, 또는 의장이라고 표기해야 옳다. [15] 실제로도 개조동지회의 인사들은 적잖은 수가 공산당과 직,간접적으로 접촉했던 시기가 있었기 때문에 마르크스주의적 경제학, 역사학에 대한 이해와 관심이 높았다. [16] 실제 역사에서 중국 국민당 임시행동위원회는 북벌 과정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모두 혁명을 배반했다고 주장하면서 대중혁명을 복원하는 제3의 길을 모색하였다. 이러한 시도는 덩옌다가 살해당하면서 와해되었지만 이후 국공내전 시기 반장세력을 결집시키는 민주당파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17] 실제 역사에서 국민당은 북벌을 수행하기 위해 민주집중제 원칙을 포기하고 지방 군벌들과 사병, 유력자들에게 당원증을 남발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문에 국민당은 실제로 당-국가 체제의 기반이 크게 흔들렸다. 이에 실망한 황포군관학교 출신 장교들은 국민당을 대체할 새로운 비밀결사를 내세웠는데 그것이 중화부흥사였다. 이들은 1932년부터 장제스에게 절대복종하면서 국민당에 적대시하는 이들을 제거하는 작업에 돌입하였다. 이들은 중일전쟁이 터지고 국민당 소조직을 제거하는 원칙에 따라 1938년 해산되었지만 실제로는 1945년까지 활동을 지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18] 화교들과 관련된 업무를 총괄하는 부서. 국민당의 불안정한 재정수입상 부유한 화교들의 지지를 얻는 것은 중요한 일이었다. [19] 실제 역사에서 쑨커는 북벌 이후 국민당의 재조직을 주장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같은 재조파의 일원인 후한민이 처형당해 큰 영향력이 없는 듯. [20] 생디칼리슴을 중국식으로 표현한 '공단주의자'들의 세력. 급진파인 왕밍과 같은 마르크스주의자, 천두슈와 같은 정통 생디칼리슴을 표방하는 공단당(생디칼리슴당), 중국 아나키스트들의 조직인 세계사로 구성되어 있으며 실제로 누가 공단주의자내 세력을 잡냐에 따라서 생디칼리슴 정당의 이름과 지도자도 바뀐다. 다만 집권은 못하고 이후 쑹칭링 천궁보의 루트에 다른 루트를 제공하는 정도이다. [21] 산동은 집권 루트에 따라서 늦게 참전하거나 아예 참전하지 않을 수도 있는데 장쭝창이 집권하는 것이 가장 좋다. 안되겠다 싶으면 루트 설정을 해주자 [22] 리스쩡, 장런제, 우징헝, 차이위안페이 [23] 실권은 개조동지회와 공단당 급진파의 연결고리라고 할 수 있는 쓰춘통이 차지한다. [24] 이때 선택지에 따라 선전포고도 가능하다. [25] 제작팀의 답변에 의하면 협화회가 시장자유주의로 나오게 된 까닭은 이들이 만철의 이익 관계를 대표하기도 하지만 넣을 만한 다른 이념이 없는 이유로 그렇게 되었다고 했다. [26] 국민당 좌파가 멸망하면 초대할 수 있다. [27] 그런데 실제 역사에서 양위팅은 항일을 주장해 관동군에게 거슬렸었다. 아마 양위팅이 일본 육사 출신이라는 사실만 보고 양위팅을 협화회로 설정한 듯. [28] 0.22 패치 이전에는 쑹저위안이 등장했지만 패치 이후 쑹저위안은 산서의 장군진으로 이동했다. [29] 고등교육, 신사층과 협의하는 토지개혁, 외자 유치를 통한 산업화, 유교적 통치, 향군 [30] 보편교육, 신사층을 무시하는 토지개혁, 자급자족하는 산업화, 사회주의적 통치, 국민군 [31] 사실은 신강성의 공금을 유용해 비자금을 조성해왔고 나중에 혼란을 틈타 고향 운남으로 도망갔음이 밝혀진다. [32] 국민당 좌파에서 사민주의가 정권을 잡으면 두 국민당 간의 통합이 가능하다. [33] 이를 평화적 합병 중점의 이름을 따서 이룡치수라 하며, 봉천의 협화회 영향력이 15%이하일 경우에 선양 회의 이벤트 도중 발생한다. [34] 그나마 국민당 좌파가 망해준다면 원래 국민당 좌파에 붙어야 할 군벌들이 대신 국민당 우파에 붙어준다. [35] 주페이더가 정권을 잡아도 국민당 좌파에 쑹칭링이 집권해 있다면 협상으로 국민당의 속국이 될 수 있다. [36] 중앙 정부의 권력이 먼 곳까지는 못 닿는다는 의미다. [권위민주주의] [사회보수주의] [39] 만주당이라는 별칭도 있다 [사회자유주의] [사회민주주의] [42] 다만 야당들은 실제 이념 슬롯에 맞게 배치됐다기보다는 빈자리에 욱여넣은 것이나 다름없기에 이후 정치 상황이 변하면 원래의 성향과 유사한 자리를 찾아 변동하게 된다. [시장자유주의] [남직예군벌] [45] 플레이어가 민감기의군(국민당 좌파)일 경우 펑위샹의 지원요청에 응해 봉천과 함께 북직예를 나눠먹는 구도가 된다. [46] 낮은 확률로 취잉광이 집권할 경우에는 참전하지 않는다. [47] 원래 남경군벌처럼 남방연합이었지만 1.0 패치로 변경되었다. [48] 실제 역사에서도 체코 군단 출신이었으며 바닐라에서도 체코슬로바키아의 3스킬 장군으로 등장한다. 다만 출신지는 러시아다. [49] 트란스아무르의 원수로 등장하는 아나톨리 페필랴예프의 형. 실제 역사에서는 콜차크와 함께 처형되었다. [50] 실제 역사에서는 소련 영화계의 책임자였으며, 대숙청 시기 세르게이 예이젠시테인의 영화 <베진 초원> 문제로 처형되었다. [51] 시베리아 출병 때 일본군 12사단 사단장이었다. 원래는 시베리아 출병의 지휘관이었던 유히 미쓰에가 집권했으나 1925년에 죽은 인물을 예토전생시킨 거라 더 오랫동안(1951년 사망) 살아남았던 오오이로 교체되었다. [52] 예멘의 집권당이자 이맘인 라시드 가문과는 다른 가문이다. 그쪽은 무함마드-알리의 직계인 알하산의 후손이고 이쪽과는 다른 가문이다. 영어 이름부터 Rassid와 Rashidi로 다르다. [53] 실제 역사에서 요아힘은 1920년에 사망했다. 제국의 몰락으로 인한 우울증에 이혼까지 겹치며 자살했는데, 카라 세계관에서는 독일 제국이 여전히 살아있으니 자살할 이유가 없는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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