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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9-22 11:12:50

마린(1873)

파일:마린(1873).jpg
<colbgcolor=#00001b> 중화민국 3대 칭하이성 정부주석
정체 馬麟
간체 马麟
한국식 독음 마린
영문 Ma Lin
훈신(勳臣)[1]
출생 1873년
청나라 간쑤성 하주현
사망 1945년 1월 26일 (향년 72세)
중화민국 칭하이성 시닝
국적 청나라 파일:청나라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중화민국 북양정부 국기.svg
중화민국 파일:대만 국기.svg
민족 후이족
학력 없음
직업 군인, 정치가
종교 이슬람

1. 개요2. 생애3.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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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중화민국의 군벌. 칭하이성 주석을 지낸 마치의 동생이자 마부팡의 삼촌이다. 형의 뒤를 이어 칭하이성의 지배자가 되었으나 조카인 마부팡에게 축출되었다.

2. 생애

1873년 청나라 후이족군인인 마해안의 아들로 태어났다. 마해안은 원래 칭하이성의 후이족 실력자인 마점열, 마안량과 함께 청나라에 대항하는 후이족 반란에 참여하여 좌종당의 부대와 교전했으나 좌종당을 한차례 크게 격파한 직후에 청나라에 귀순하여 후한 대우를 받게 되었다. 신해혁명 이후 마린의 형 마치가 청해몽장선위사 겸 감변영해진수사 직을 수여받으면서 칭하이성에서 마씨 일족의 기반을 꾸렸다.

1919년, 마안량이 사망하자 마안량과 대립하던 신흥 종파인 서도당의 지도자인 마계서와 감숙군벌들 간의 화해를 주선했다. 이후 감주진수사에 임명되어 국민군 계열의 감숙독군 육홍도의 통제를 받았다. 1927년, 장쭤린과 마치의 지원을 받아 조카 마중잉 등이 펑위샹에 대항하기 위한 황하사변을 일으키자 마훙빈과 함께 진압에 참여했고 마중잉을 간쑤성 북부로 몰아내는데 성공했다. 1929년 3월, 편견회의의 결과에 따라 잠편 제4혼성여단장에 임명되었다. 1930년, 중원대전에서 펑위샹이 몰락하자 장제스에게 투항했다.

1931년, 마치가 사망하자 9월에 칭하이성 정부주석직을 승계했다. 취임 직후인 11월, 마린은 칭하이성금고를 만들어 과거 펑위샹이 만든 군용포를 모방하여 칭하이성금고유지권을 발행하여 부를 축적했다. 아버지의 자리를 계승하지 못한 것에 불만을 품은 마부팡이 칭하이성 정부의 세금 징수를 방해하자 이에 대항하여 1932년, 경비부족을 이유로 공직자와 교직원들의 봉급을 착복하는 등 개인 축재에 여념이 없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로 인하여 칭하이성 정부의 공공기관과 학교의 경비가 지불정지 되는 사태가 발생했음에도 마린은 1934년 6월, 정부 유지비와 공무원의 봉급을 확보한다는 명목으로 1934년 6월 칭하이성임시유지권을 발행하는 등 여전히 축재에만 힘썼다. 1935년 11월에 개최된 중국국민당 5차 전국대표대회에서 감찰위원에 선출되었다.

하지만 마부팡이 칭하이성임시유지권의 가치를 붕괴시키기 위해 대량으로 위조지폐를 발행함에 따라 칭하이성의 화폐경제가 붕괴되었고 마린이 자신이 착복한 은과 금을 소금으로 위장하여 칭하이성의 성도인 시닝 밖으로 유출하고 있다는 것이 들통남에 따라 마린에 대한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다. 마부팡은 분노한 칭하이성의 주민들을 선동하여 곳곳에서 마린을 타도하는 민중 소요를 일으켰고 마린이 경영하던 상점들을 몰락시켜 칭하이성 재계에서 마린의 영향력을 일소시켰다.

1936년에 이르러 완전히 궁지에 몰린 마린은 6월, 6개월 간의 병가를 내고 메카 성지순례를 떠났다. 그가 성지순례를 떠난 사이에 마부팡이 칭하이성 주석 대리를 맡았으며 1937년 마린이 귀국하자 성정부기념주대회에서 마린을 탄핵하는데 성공했다. 1938년 3월, 장제스가 정식으로 마부팡을 칭하이성 정부주석에 임명함에 따라 마린은 완전히 몰락했다. 마린은 1937년 110월, 국민혁명군 17집단군 부사령관에 임명되었으며 1938년 3월, 국민정부 위원에 선출되었다. 1937년 귀국하면서 와하비즘을 중국에 소개하는 등 정치보다는 종교 지도자로의 역할에 충실했다.

1945년 1월에 사망했다.

3. 참고문헌


[1] 의 이름과 를 조합하면 기린각 훈신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