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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2,
1946년 월드컵은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인해 취소 [1] 아르헨티나, 우루과이, 파라과이에서도 일부 경기 개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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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 | ||
1er Campeonato Mundial de Fútbol 1930 FIFA World Cup Uruguay™ |
||
대회 기간 | 1930년 7월 13일 ~ 1930년 7월 30일 | |
개최국 |
[[우루과이| ]][[틀:국기| ]][[틀:국기| ]] |
|
공인구 | T-모델 (T-Model) | |
본선 진출팀 | 13개팀 | |
대회 결과 | ||
우승 |
우루과이 (첫 번째 우승) |
|
준우승 | 아르헨티나 | |
4강[1] | 미국 | |
유고슬라비아 | ||
수상 | ||
득점왕 |
[[아르헨티나| ]][[틀:국기| ]][[틀:국기| ]] 기예르모 스타빌레 |
|
이전·이후 대회 | ||
대회 창설 이전 |
1930년 우루과이 |
1934년 이탈리아 |
[clearfix]
1. 개요
1930년 우루과이에서 개최된 최초의 FIFA 월드컵으로, 현대의 월드컵에 비해 미흡한 점이 많았지만 월드컵이 현재까지 이어지게 된 최초의 대회로 역사적 의의가 크다.2. 내용
우루과이는 초대 개최국이자 강력한 우승후보였다. 월드컵 이전 가장 권위 있던 축구 대회인 올림픽 축구에서 우루과이는 2회 연속 우승( 1924년, 1928년)을 달성했다.[2] 80년 가까이 우루과이 A매치 최다 득점기록을 가지고 있던 엑토르 스카로네, 중원의 살림꾼이자 흑진주 호세 안드라데, 우루과이의 수비의 핵이자 축구 역사상 최고의 주장 중 하나인 호세 나사치 등 올림픽 2연패의 주역들이 초대 월드컵에도 출전하였고 우루과이의 우승을 이끌었다.[3]3. 지역 예선
이 대회는 첫 월드컵이라서 홍보 차원에서 지원하는 모든 팀들에게 지역예선 없이 전부 본선에 진출하도록 했다. 그러나 남미에서 개최된다고 했기 때문에 잉글랜드를 필두로 한 유럽의 보수세력들은 자신들은 이미 세계 최강이라는 착각과 오만함으로[4] 월드컵을 아예 저질대회로 취급하면서 불참을 유도했고[5] 이에 독일, 이탈리아 등의 국가들이 말려들어 유럽의 대다수 국가가 불참했으나, 당시 독일은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및 대공황으로 인해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고 있었다. 먹고 살기도 바쁜 와중에 축구, 스포츠에 신경 쓸 겨를도 없었고 또 1930년 당시엔 비행기가 아직 발달이 되지 않아서 유럽에서 남미까지 갈 만한 수준이 못 되었으므로 오직 여객선만이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개최국인 우루과이에서 유럽 국가들을 위해 호화 여객선을 구입하고 체제 경비까지 모두 부담하겠다고 했지만 결국 독일은 이 대회에 불참했다. 그나마 쥘 리메의 조국인 프랑스와, 프랑스의 간청으로 참가해준 벨기에, 유고슬라비아, 루마니아 등이 참가했다. 말 그대로 쥘 리메는 유럽 각국을 돌며 제발 월드컵에 참가해달라고 부탁했다. 즉, 제1차 세계 대전과 전간기의 세계평화 암흑기 시절로 시간과 경제적으로 1930년 당시 열악했던 교통비용도 감당하기 어려운 국가들과 식민지 지배국가, 세계에서 알려지지 않은 국가들은 진출하기 어려웠던 시절로 현재도 월드컵에 한 번 진출하는 것과 우승하는 것이 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생각해보면 여전히 월드컵은 쉽지 않은 무대라는 것은 변함이 없다.역대 FIFA 월드컵 지역예선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유럽, 남미, 아프리카, 북중미카리브, 아시아, 오세아니아, 대륙PO | ||||||
#지역예선 | |||||||
1934 FIFA 월드컵 이탈리아/지역예선 | |||||||
1938 FIFA 월드컵 프랑스/지역예선 | |||||||
1950 FIFA 월드컵 브라질/지역예선 | |||||||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지역예선 | |||||||
1958 FIFA 월드컵 스웨덴/지역예선 | |||||||
1962 FIFA 월드컵 칠레/지역예선 | |||||||
1966 FIFA 월드컵 잉글랜드/지역예선 | |||||||
1970 FIFA 월드컵 멕시코/지역예선 | |||||||
1974 FIFA 월드컵 서독/지역예선 | |||||||
1978 FIFA 월드컵 아르헨티나/지역예선 | |||||||
1982 FIFA 월드컵 스페인/지역예선 | |||||||
1986 FIFA 월드컵 멕시코/지역예선 | |||||||
1990 FIFA 월드컵 이탈리아/지역예선 | |||||||
1994 FIFA 월드컵 미국/지역예선 | |||||||
1998 프랑스 |
남미, 북중미카리브,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유럽 | ||||||
2002 한국·일본 |
남미, 북중미카리브,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유럽 | ||||||
2006 독일 |
남미, 북중미카리브,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유럽 | ||||||
2010 남아프리카 공화국 |
남미, 북중미카리브,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유럽 | ||||||
2014 브라질 |
남미, 북중미카리브,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유럽 | ||||||
2018 러시아 |
남미, 북중미카리브,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유럽, 대륙PO | ||||||
2022 카타르 |
남미, 북중미카리브,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유럽, 대륙PO | ||||||
2026 캐나다·멕시코·미국 |
남미, 북중미카리브, 아시아, 아프리카, 오세아니아, 유럽, 대륙PO |
FIFA 월드컵의 창시자 쥘 리메 | 당시 신문에 실린 기사 이미지[6] |
실제로 참가신청 마감 데드라인인 1930년 2월 28일까지, 본래 대회가 목표로 정한 16개국 본선 진출 정원이 채워지지 않아 대회는 13개국이 본선에 진출로 치러지게 되었다.[7] 심지어 1930년 1월까지도 유럽 참가국은 1개도 없었으니 FIFA 회장 쥘 리메가 저렇게 간곡하게 나설만도 했다. 특히 루마니아 팀을 섭외할 때는 선수들이 대회에 참가한 사이 선수들의 생업이 유지되지 못할 것을 우려하며 루마니아 선수들이 참가를 하지 않으려 하자, 당시 루마니아 국왕인 카롤 2세가 직접 나서 선수들의 생업을 지켜줄 것을 약속해서야 겨우 참가 신청을 받을 수 있었다. 프랑스는 FIFA 회장의 조국이니 참가는 했는데, 당시 프랑스 축구 최고의 스타 선수인 마누엘 아나톨이 참가를 거부하는 등 정상적인 전력이 아니었고, 벨기에 또한 FIFA 부회장이 벨기에 사람이어서 참가는 했지만 역시 최소 규모의 선수단만 꾸리며 구색만 맞췄다. 유일하게 유고슬라비아만이 진지하게 대회에 참가해 좋은 성적을 거두게 된다.
4. 본선 진출팀
대륙 | 국가 | 1928 올림픽 성적[8] | ||
개최국 | 우루과이 | 금메달 | 5전 4승 1무 | 12득점 5실점 | |
남아메리카 | 아르헨티나 | 은메달 | 5전 3승 1무 1패 | 25득점 7실점 | |
브라질 | 불참 | - | ||
칠레 | 예비라운드 | 1전 1패 | 2득점 4실점 | ||
페루 | 불참 | - | ||
볼리비아 | 불참 | - | ||
파라과이 | 불참 | - | ||
북아메리카 | 미국 | 1라운드 | 1전 1패 | 2득점 11실점 | |
멕시코 | 1라운드 | 1전 1패 | 1득점 7실점 | ||
유럽 | 프랑스 | 1라운드 | 1전 1패 | 3득점 4실점 | |
벨기에 | 8강 | 2전 1승 1패 | 8득점 9실점 | ||
루마니아 | 불참 | - | ||
유고슬라비아 | 1라운드 | 1전 1패 | 1득점 2실점 |
- 쥘 리메가 갖은 노력 끝에 유럽 팀들을 섭외했지만 2년 전 올림픽에서 동메달을 딴 이탈리아나 8강에 올라간 독일, 스페인 등 기존의 유럽 강호들은 1차 세계 대전 패전 및 경제 대공황으로 우루과이까지 갈 만한 돈 경비문제도 포함되어 끝내 참가하지 않았으나, 그럼에도 진출국들 모두 유럽, 남미, 북중미로 축구 강팀 대륙들만 모였다.
- 우루과이가 속한 남미 대륙에서는 당시 FIFA 회원국이 아니었던 콜롬비아, 베네수엘라와 불참한 에콰도르를 제외하고 7개국이 참가했다. 2년 전 올림픽 금메달과 은메달 팀인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는 강력한 우승후보로 점쳐졌다.
5. 대회 포스터·마스코트·공인구
첫 월드컵의 포스터.[9] |
5.1. 우여곡절
당시 우루과이 정부에서 선수들의 체류비용과 교통비 등 부대비용을 모두 지급하겠다고 해서 일단 우루과이가 개최하는 것으로 가닥을 잡긴 했으나... 민간 항공이 개척되지 않아 세계적으로 열악했던 당시에 유럽에서 남아메리카까지는 배편으로 몇 주일에서 달포가 걸리는 대장정이었다. 유럽도 제1차 세계 대전과 전간기의 세계평화 암흑기 시절 가운데 그 먼 거리를 항해해야만 한다는 것과 선수들이 클럽에서 장기간 차출돼야 한다는 부담 때문에 많은 유럽의 나라들도 돈과 시간문제로 불참했다는 점이다.[10] 결국 쥘 리메와 우루과이 정부가 앞장서서 유럽 국가들을 설득시킨 끝에 유럽팀 전원불참은 간신히 모면했다. 심지어 루마니아에서는 왕이 직접 선수들의 직장과 접촉해서 그들이 귀국한 후에도 계속 종사할 수 있게 보장해 줄 것을 부탁하기도 했다. 유럽도 이 정도인데, 남아메리카와의 거리가 훨씬 먼 아시아 국가들은 독립국이라고 해도 참가하지 못하는 게 당연하다.또한 공인구가 정해지지 않아 각국 대표팀들끼리 서로 자국의 공을 사용하겠다고 난리를 쳤다. 특히 결승전이 가장 극심했는데 그래서 전반전에는 아르헨티나제 축구공을, 후반전에는 우루과이제 축구공을 사용하기로 합의를 보게 된다. 그래서 그런지 전반에는 아르헨티나가 2 : 1로 이긴 채로 끝났지만, 후반전은 우루과이가 3골을 넣어 2대4로 우루과이의 역전승으로 끝난다.
6. 조 편성[13개팀]
순번 | 1조 | 2조 | 3조 | 4조 |
시드국 | 아르헨티나 | 브라질 | 우루과이 | 미국 |
2 | 프랑스 | 유고슬라비아 | 루마니아 | 벨기에 |
3 | 칠레 | 볼리비아 | 페루 | 파라과이 |
4 | 멕시코 | - | - | - |
진하게 표시된 국가는 4강 진출국. 순서는 각 조 순위.
13개국이 본선에 진출한 관계로 1조만 4팀으로 구성되었고 나머지 2, 3, 4조는 3팀이 배정되었다. 아르헨티나, 브라질, 우루과이, 미국이 시드배정을 받았다.
7. 참가팀 정보
자세한 내용은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참가팀 정보 문서 참고하십시오.8. 대회 진행
현재는 개최국이 개막전을 하는 것이 원칙이긴 하지만[12] 우루과이 월드컵 조직위원회는 쥘 리메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개막전을 우루과이의 첫 경기인 우루과이 대 페루 대신 프랑스 대 멕시코로 정했다.[13] 그런데 원래 16개 팀 이상 초청해서 대회를 개최하려 했으나 남미의 팀까지 다 합쳐도 13개팀이 본선에 진출하였고 8강전 없이 조별리그 직후 준결승을 치르는 형국이 되었고, 현재처럼 인터넷도 없이 상대팀과 전력을 분석하던 매우 열악했던 시절이었다.이 대회에서 역대 월드컵 최소 관중 경기가 나왔으니... 바로 페루 대 루마니아의 경기 이다. 이 경기에서 관중의 수는 불과 300명에 지나지 않아 역대 월드컵 역사상 최소 관중 경기가 되었다.[14]
8.1. 조별리그[13강]
8.1.1. 1조
자세한 내용은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1조 문서 참고하십시오.<rowcolor=#df6911> 순위 | 국가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득실차 | 승점 | |||
<colcolor=#000,#fff> 1 | 아르헨티나 | 3 | 0 | 0 | 10 | 4 | +6 | 6 | |||
2 | 칠레 | 2 | 0 | 1 | 5 | 3 | +2 | 4 | |||
3 | 프랑스 | 1 | 0 | 2 | 4 | 3 | +1 | 2 | |||
4 | 멕시코 | 0 | 0 | 3 | 4 | 13 | -9 | 0 | |||
■ 토너먼트 진출 | ■ 탈락 |
8.1.2. 2조
자세한 내용은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2조 문서 참고하십시오.<rowcolor=#df6911> 순위 | 국가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득실차 | 승점 | |||
<colcolor=#000,#fff> 1 | 유고슬라비아 | 2 | 0 | 0 | 6 | 1 | +5 | 4 | |||
2 | 브라질 | 1 | 0 | 1 | 5 | 2 | +3 | 2 | |||
3 | 볼리비아 | 0 | 0 | 2 | 0 | 8 | -8 | 0 | |||
■ 토너먼트 진출 | ■ 탈락 |
8.1.3. 3조
자세한 내용은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3조 문서 참고하십시오.<rowcolor=#df6911> 순위 | 국가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득실차 | 승점 | |||
<colcolor=#000,#fff> 1 | 우루과이 | 2 | 0 | 0 | 5 | 0 | +5 | 4 | |||
2 | 루마니아 | 1 | 0 | 1 | 3 | 5 | -2 | 2 | |||
3 | 페루 | 0 | 0 | 2 | 1 | 4 | -3 | 0 | |||
■ 토너먼트 진출 | ■ 탈락 |
8.1.4. 4조
자세한 내용은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4조 문서 참고하십시오.<rowcolor=#df6911> 순위 | 국가 | 승 | 무 | 패 | 득점 | 실점 | 득실차 | 승점 | |||
<colcolor=#000,#fff> 1 | 미국 | 2 | 0 | 0 | 6 | 0 | +6 | 4 | |||
2 | 파라과이 | 1 | 0 | 1 | 1 | 3 | -2 | 2 | |||
3 | 벨기에 | 0 | 0 | 2 | 0 | 4 | -4 | 0 | |||
■ 토너먼트 진출 | ■ 탈락 |
8.2. 결선 토너먼트
자세한 내용은 1930 FIFA 월드컵 우루과이/준결승 문서 참고하십시오.경기 | 대진표 | 경기 | 대진표 |
A |
준결승 1경기 아르헨티나 6:1 미국 |
C |
결승 아르헨티나 2:4 우루과이 |
B |
준결승 2경기 유고슬라비아 1:6 우루과이 |
8.3. 우승
|
1930 FIFA 월드컵 우승 |
|
[[우루과이 축구 국가대표팀|{{{#000,#e5e5e5 우루과이}}}]] |
첫 번째 우승 ★ |
9. 최종 순위
<rowcolor=#000,#e5e5e5> 순위 | 국가 | 경기 | 승 | 무 | 패 | 득 | 실 | 득실 | 승점 | 비고 |
우루과이 | 4 | 4 | 0 | 0 | 15 | 3 | +12 | 8 | 우승 | |
아르헨티나 | 5 | 4 | 0 | 1 | 18 | 9 | +9 | 8 | 준우승 | |
3 | 미국 | 3 | 2 | 0 | 1 | 7 | 6 | +1 | 4 | 4강 |
4 | 유고슬라비아 | 3 | 2 | 0 | 1 | 7 | 7 | 0 | 4 | |
5 | 칠레 | 3 | 2 | 0 | 1 | 5 | 3 | +2 | 4 | 조별리그 |
6 | 브라질 | 2 | 1 | 0 | 1 | 5 | 2 | +3 | 2 | |
7 | 프랑스 | 3 | 1 | 0 | 2 | 4 | 3 | +1 | 2 | |
8 | 루마니아 | 2 | 1 | 0 | 1 | 3 | 5 | -2 | 2 | |
9 | 파라과이 | 2 | 1 | 0 | 1 | 1 | 3 | -2 | 2 | 조별리그 |
10 | 페루 | 2 | 0 | 0 | 2 | 1 | 4 | -3 | 0 | |
11 | 벨기에 | 2 | 0 | 0 | 2 | 0 | 4 | -4 | 0 | |
12 | 볼리비아 | 2 | 0 | 0 | 2 | 0 | 8 | -8 | 0 | |
13 | 멕시코 | 3 | 0 | 0 | 3 | 4 | 13 | -9 | 0 |
10. 수상
11. 기록실
첫 월드컵이니 만큼 당연하게도(...) 최초의 기록들이 무더기로 쏟아져 나왔다.- 월드컵 첫 경기: 프랑스 vs 멕시코[18]( 개막전)
- 월드컵 첫 승리: 프랑스, vs 멕시코( 개막전)
- 월드컵 첫 패배: 멕시코, vs 프랑스( 개막전)
- 월드컵 첫 득점: 뤼시앵 로랑( 프랑스), vs 멕시코, 19분( 개막전)
- 월드컵 첫 페널티 킥 골: 마누엘 로사스( 멕시코), vs 아르헨티나, 42분( 조별 리그)
- 월드컵 첫 멀티골: 앙드레 마쉬노( 프랑스), vs 멕시코, 43분&87분( 개막전)
- 월드컵 첫 해트트릭: 버트 파테노드( 미국), vs 파라과이( 조별 리그)[19]
- 해트트릭
- 버트 파테노드( 미국), vs 파라과이( 조별 리그) - 최초[20]
- 기예르모 스타빌레( 아르헨티나), vs 멕시코( 조별 리그)
- 페드로 세아( 우루과이), vs 유고슬라비아( 준결승)
- 월드컵 첫 클린시트: 지미 더글러스( 미국), vs 벨기에( 조별 리그)
- 월드컵 첫 자책골: 마누엘 로사스( 멕시코), vs 아르헨티나, 51분( 조별 리그)
- 월드컵 첫 퇴장: 플라시도 갈린도( 페루), vs 루마니아( 조별 리그)
- 최다 득점 경기: 9점, 아르헨티나 6 vs 3 멕시코( 조별 리그)
- 최다 득점차 경기: 5점
- 월드컵 최초 역전승: 우루과이 0 vs 1 유고슬라비아 → 우루과이 6 vs 1 유고슬라비아( 준결승)
- 월드컵 첫 결승전 득점: 파블로 도라도( 우루과이), 1930년 7월 30일, vs 아르헨티나, 12분
- 무득점팀: 벨기에, 볼리비아
18경기에 70골이 터지면서 경기당 평균 3.89골을 기록했다. 그리고 이 대회는 유일하게 무승부가 없었다.
거기에 역대 월드컵 개최 기간 중 가장 추웠던 월드컵이다. 자세한 내용은 아르헨티나와 프랑스전 참고.
12. 뒷이야기
- 우루과이는 월드컵이 개최된 해가 자국의 건국 100주년[21]이 되는 해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첫 월드컵을 유치하고 싶었고 결국 월드컵 유치도 성공하고 우승도 했다.
- 우루과이는 이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합숙 훈련을 했는데 1924년과 1928년 올림픽 우승 멤버이자 팀의 주전 골키퍼였던 안드레스 마살리[22]가 통금 시간을 어기고 부인과 데이트를 즐기다 걸렸다. 마살리는 국가대표팀에서 퇴출되었고 그 이후 다시는 대표팀에 소집되지 못했다. 그렇게 마살리를 대신하여 나간 골키퍼가 엔리케 바예스테로스였고 그는 초대 월드컵 우승팀의 주전 골키퍼가 되는 영광과 함께 대회 최우수 골키퍼가 되었다.
- 우루과이는 이 대회 4번의 시합에서 15골을 넣어 경기당 평균 3.75골을 기록하였는데 이는 아직도 월드컵 우승팀 중 최고의 기록이다. 역대 국가대표 팀 중 자타공인 최강으로 일컬어지는 1970년 월드컵의 브라질 대표팀도 이 기록에는 미치지 못한다.
- 루마니아 선수의 선발에는 당시 루마니아 국왕이었던 카롤 2세의 엄청난 간섭이 있었다.
- 프랑스는 이 월드컵에 진출했지만 당시 진짜 감독이었던 가스통 바로와 스타 수비수 마누엘 아나톨[23]이 불참했다. 그 때문에 코치였던 코드롱이 대신 감독을 맡았다.
- 당시 브라질의 주장이었던 프레기뉴는 축구 뿐만 아니라 배구, 농구, 수구, 하키, 트랙&필드 육상 경기 선수도 겸업했다.
- 당시는 축구 선수들이 해외의 클럽에서 뛰는 것이 활성화되어있지 않은 시기라 거의 모든 선수들이 자국 리그에서 뛰었었다. 하지만 유고슬라비아 대표팀에서는 이반 베크 등 3명의 선수가 리그 1에서, 페루에서는 훌리오 로레스가 리가 MX의 클루브 네칵사에서 활동하였다.
- 아르헨티나에서는 첫 월드컵을 관전하기 위해 엄청난 사람들이 배에 마구잡이로 탑승하여 정원초과가 되었으며 이 때문에 심지어는 물에 빠져 익사하는 사람이 발생하기까지 했다.
- 월드컵 개막 당일, 프랑스는 멕시코와 상대를 가졌다. 24분에 프랑스 골키퍼 알렉스 테포가 멕시코의 공격수 메히아의 공을 막으려다가 메히아와 충돌로 턱에 부상을 입기도 했다. 결국 하프백 오귀스탱 샹트렐에게 골키퍼 자리를 넘겨줬지만 프랑스는 4대1로 승리를 거두었다.
- 아르헨티나는 첫 상대로 프랑스와 경기를 가졌는데, 갑자기 심판이 6분의 시간이 남았음에도 경기를 끝냈다. 프랑스가 아르헨티나 수비수들을 제압해서 맞이한 골키퍼와의 1:1 상황임에도 갑자기 심판이 시간을 제대로 못 보고 경기를 빠르게 종료시킨 것이다. 그 사고로 인해, 프랑스 감독이 심판에게 다가가 "경기 종료 6분이나 남았는데, 왜 호각을 부냐?"라고 항의한다. 주심 지우베르토 지아우메이다 헤구(Gilberto de Almeida Rêgo)가 부심들에게 진짜 6분 남았냐고 물어보았고 경기가 끝난 줄 알고 있던 선수들은 다시 경기장으로 복귀, 남은 6분을 다시 뛰게 되었다. 결국은 프랑스는 이 오심때문에 아르헨티나에 1-0으로 패배한다.
- 이 월드컵은 오직 몬테비데오 단 한 곳에서만 진행되었으며 월드컵 경기를 진행한 경기장도 에스타디오 포시토스, 에스타디오 그란 파르케 센트랄, 그리고 결승전을 치른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 이렇게 3곳 뿐이었다. 주경기장이었던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가 월드컵이 열리는 도중인 7월 18일에 완공이 되었고 이후의 경기는 오직 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 한 곳에서만 치렀다. 그러다보니 1조에서는 칠레와 프랑스가 경기를 끝낸지 30분만에 같은 구장(에스타디오 센테나리오)에서 다음 경기인 아르헨티나와 멕시코의 경기가 열리기도 했다.
- 아르헨티나는 후안 호세 트라무톨라와 프란시스코 올라사르의 2명 공동감독 체제였는데 이 중 트라무톨라는 1902년 생으로 만 27살[24]이었으며 이로서 FIFA 월드컵 역사상 최연소 축구감독이라는 기록을 세웠다.[25] 심지어는 팀의 미드필더인 후안 에바리스토, 아돌포 수멜수, 공격수인 카를로스 스파달로와 동갑내기였고 같은 팀의 미드필더인 루이스 몬티보다 1살, 공격수인 나탈리오 페리네티보다 2살, 수비수인 라몬 무티스보다 3살이 어렸다. 그리고 옆동네 칠레에서도 같은 경우가 있었다. 당시 칠레의 감독 오르트 죄르지는 1901년생이었지만 수비수 중 울리세스 포이리에르는 1897년 생으로 당시 참가한 선수들 중 두 번째로 나이가 많았다. 나이 차이로만 따지면 칠레쪽이 더 심했다.[26][27]
- 아르헨티나 대 프랑스 전에서의 부심 2명은 멀쩡한 소속팀인 볼리비아의 감독 울리세스 사우체도와 루마니아의 감독 코스텔 러둘레스쿠였다. 한술 더 떠 나중에 사우체도는 아르헨티나와 멕시코의 경기에 주심을 보기도 했다. 이 경기에서 그는 페널티 킥을 3개나 불었다. 또 결승전에서도 선심을 보았다. 하지만 모두 볼리비아와 루마니아와는 다른 조에 소속된 팀들의 경기였으므로 큰 문제는 없었다.
소속팀 | 감독 | 주심 | 부심 |
우루과이 | SUPPICI Alberto | ||
아르헨티나 |
TRAMUTOLA Juan OLAZAR Francisco |
||
미국 | MILLAR Bob | ||
유고슬라비아 | SIMONOVIC Bosko | ||
칠레 | ORTH Gyorgy | ||
브라질 | DE CARVALHO Pindaro | ||
프랑스 | CAUDRON Raoul | ||
루마니아 |
RADULESCU Constantin LUCHIDE Octav |
13강 조별리그 ARG vs FRA, 13강 조별리그 ARG vs MEX - |
|
파라과이 | DURAND LAGUNA Jose | ||
페루 |
BRU Francisco RIVERO Guillermo |
||
벨기에 | GOETINCK Hector | ||
볼리비아 | SAUCEDO Ulises | 13강 조별리그 ARG vs MEX |
13강 조별리그 ARG vs FRA 13강 조별리그 URU vs ROM 13강 조별리그 ARG vs CHI 4강전 URU vs YUG 결승전 URU vs ARG |
멕시코 | LUQUE Juan |
- 그래서인지 심판 유니폼은 운동복인데 넥타이가 있는 정장이었다.
- 원래 월드컵 최초의 해트 트릭 기록자는 기예르모 스타빌레로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2006년에 있었던 FIFA의 대대적인 기록 재조사 과정에서 미국의 전반 15분 득점이 톰 플로리의 골이 아닌 파테노드의 골[28]이라는 주장이 미국 축구협회에서 나왔다. FIFA는 재조사 끝에 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결국 그 골이 파테노드의 골임을 인정했고, 월드컵 최초의 해트트릭 기록자는 스타빌레가 아닌 파테노드로 공식 수정되었다.
- 원래 이 대회 득점왕인 기예르모 스타빌레는 주전 선수가 아니었다. 그러나 팀의 주전 공격수이자 주장이었던 마누엘 페레이라가 당시 대학생이었는데 중간고사를 봐야 한다면서 잠시 귀국해버리는 바람에 그 땜빵으로 들어간게 스타빌레였다.
- 멕시코의 수비수 로사스는 1912년 생으로 월드컵에 출전했을 당시 18살에 불과하였다.[29] 하지만 월드컵 최초이자 초대 월드컵의 유일한 자책골을 기록하는 비운[30]과 월드컵 역대 최연소 득점자라는 영광[31]을 한 대회에서 모두 맛보았다.
- 알렉상드르 빌라플란은 월드컵의 역사적인 첫 승리를 거둔 팀의 주장이라는 영광스런 커리어를 거머쥐었지만, 훗날 인간 쓰레기가 되어 총살당하면서 개인으로서는 월드컵 최초의 흑역사가 된다.
- 브라질은 월드컵 2조 첫경기인 유고슬라비아와의 경기 이전에 5년 가까이 A매치를 단 한 차례도 치르지 않았었다. 이것이 브라질이 무기력하게 탈락하게 된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
- 미국은 13개의 팀 중 유일하게 후보 골키퍼가 없는 팀이었다. 결국 유일한 골키퍼였던 지미 더글러스가 아르헨티나와의 준결승전에서 후반에 무릎 부상을 당하는 바람에 패했다.
-
볼리비아는 선수들이 개최국인
우루과이를 응원하는 문구를 유니폼에 새겨오는 훈훈함을 연출했다. 그리고 저 옷을 입고 실제 시합까지 뛰었다.[32]
Viva Uruguay!! -
첫 우승팀인
우루과이 대표팀의 결승전 출전 멤버 중 최후의 생존자는
에르네스토 마스체로니로 1984년에 76세의 나이로 별세했다.[33] 그리고
아르헨티나의 대표 선수였던
프란시스코 바라요가 2010년 100살(!)의 나이로 별세하면서 현재 이 대회에서 참가했던 선수 중 살아있는 사람이 더 이상 없게 되었다.
프란시스코 바라요의 100번째 생일
13. 대회 이후
첫 월드컵 우승의 영광을 놓친 아르헨티나는 머리끝까지 빡쳐서 결국 자국에 있는 우루과이 대사관을 때려부수는 등의 폭동을 일으켰으며 우루과이와는 1년 정도 단교를 선언했다. 그런데 우루과이는 아르헨티나의 지원을 받아 브라질에서 독립한 나라이다.[34]그 다음 월드컵이 이탈리아에서 개최되자 디펜딩 챔피언 우루과이는 자국에서 개최한 월드컵에 유럽 국가들이 대거 불참한 앙갚음으로 불참하며 월드컵 우승을 더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만다. 그 이후 3회차 월드컵 또한 불참했다. 그 후 제2차 세계 대전으로[35] 2번의 대회가 취소되며 무려 20년 동안이나 월드컵에 불참하고 말았다. 비록 20년 후에는 이 때만큼의 압도적인 모습은 사라지고 다소 삐걱거리는 면도 보여주었지만 우루과이는 브라질에서 다시 한 번 월드컵 우승의 영예를 차지하며 2회 진출/2회 우승의 위업을 달성해냈고, 우승을 놓친 브라질은 국가적으로 큰 후폭풍이 일어났다. 그렇게 이탈리아와 함께 2번씩의 우승을 나눠가지며 명실상부 세계 최강 팀중 하나로 우뚝섰다. 그러나 이 두번의 대회가 우루과이의 마지막 영광이였다. 그 이후로 현재까지 70년이 넘도록 우승은 커녕 결승도 못밟으며 우승후보에서 세계 강팀 정도로[36] 수십년동안 위상이 많이 하락했다.
[1]
이 대회는
3위 결정전이 없었고
준결승전에서 탈락하면 대회를 마쳤다.
[2]
그래서 우루과이 대표팀 엠블럼에는 올림픽 우승+월드컵 우승을 모두 세서 별 4개가 표시되어 있다. FIFA도 한때 인정했으나 현재는 올림픽 우승의 별 2개는 때고 별을 2개만 달도록 권유하고 있다.
[3]
당시
우루과이와 견줄 만한 팀은
아르헨티나,
헝가리,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정도로 매우 드물었으며 그나마도 다른 대륙 팀간의 교류는 아직 활발하지 않던 시대다. 월드컵의 흥행 성공으로 인해 이후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이다.
[4]
그러다가
1950 브라질 월드컵에서 잉글랜드는
미국에게 0:1로 참패당한다.
[5]
게다가 줄 리메는
프랑스인이고 결국 프랑스의 주도로 인해 월드컵이 개최된 것이었기 때문에 프랑스를 증오하던 잉글랜드는 더더욱 월드컵에 참가하고 싶지가 않았을 것이다. 우습게도 피파 창립에 기여한 것도 프랑스인이었고, 유러피언 컵 대회 역시 프랑스에서 주축이 되었다. 알다시피 잉글랜드에선 유러피언컵 대회도 나갈 값어치도 없다고 초기에 불참했다. 참고로 근대
올림픽도 프랑스인 쿠베르탱이 만들었다.
[6]
사진을 보면
불가리아 국기가 있는 포스터가 보이는데,
불가리아가 초청장을 받고 참가하려다 모종의 이유로 참가를 포기해 무산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7]
당시 FIFA는 남은 자리를 채우기 위해
아시아의
일본과
시암,
아프리카의
이집트에도 초청장을 보냈으나, 일본과 시암은 거절, 이집트는 흔쾌히 출발하려는 찰나 배편을 놓쳐(!) 안타깝게도 불참했다.
[8]
월드컵이 생기기 전 올림픽 축구는 사실상의 세계 챔피언을 가리는 유일한 대회였기에 비교 자료로써 여기에 기재한다.
[9]
이 당시 월드컵의 공식 명칭은 '
FIFA 월드컵'이 아니라 '쥘 리메배 세계 축구 선수권 대회'였다. 포스터의 디자인은 우루과이의 화가이자 조각가인 기예르모 라보르데가 제작했다.
[10]
실제로
프랑스 대표팀도
대서양을 건너는데 열세 밤이 지나서야 간신히 우루과이에 도착했고, 불참한 유럽팀들도 표면적인 사유는 대개 '장거리 항해 불가'였다. 당시는 8강전이 없었지만,
유고슬라비아를 제외한 모든 유럽팀들이 4강 진출에 실패한 것으로 미루어보면 결과론적으로는 옳은 선택이었다고도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상술했듯 이 당시는 지금 21세기 인프라와 다르게 항공편 등의 교통수단이 매우 미비했던
제1차 세계 대전과
전간기의 세계평화 암흑기 시절로 돈과 시간도 있는 나라들이 유리했고 홈 어드밴티지는 그야말로 절대적이었다. 이후의 모든 월드컵에서도 남미 지역에서 열린 대회는 모두 남미 대륙에서 우승 팀이 나왔고,
2014 FIFA 월드컵 브라질 대회에 가서야 독일이 4강전에서
브라질을 대파하고 결승에 올라 접전 끝에 아르헨티나를 꺾고 우승컵을 들어올림으로써 징크스가 깨진다.
[13개팀]
[12]
2006년 독일 월드컵 이전에는 전 대회 우승국이 개막전을 치렀다.
[13]
참고로
쥘 리메 회장의 국적은 프랑스였다.
[14]
피파의 공식 보고서에는 2549명이 왔다고 되어있기는 하다만 대부분의 다른 자료들에는 이 경기에 300명이 왔다고 기록되어 있고, 10년전의 피파 보고서에도 역시 300명이 왔다고 써 있었다. 이 경기가 열렸던
에스타디오 포시토스가 수용인원 천 명 정도의 미니구장이었던 것도 한 몫했다.
[13강]
[16]
일단 미국은 3위로 인정된다. 하지만 그에 대한 논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3문단을 참고.
[17]
그런데 스타빌레는 이 1930년 월드컵을 제외하면 단 한차례도 국가대표 대항전에 출전하지 않았다. 그래서 4경기 출전 8골로 이 위대한 선수의 A매치 기록은 끝났다.
[18]
같은 시각 4조에서도
미국과
벨기에의 경기가 진행되고 있었다. 하지만 1조와 첫 골의 프리미엄으로 흔히 이 경기를 첫 경기로 이야기한다.
[19]
본래
기예르모 스타빌레의 기록으로 알려져 있으나 2006년 11월에 공식 수정.
[20]
원래는 최초로 기록되지 않았지만 2006년에 수정되었다. 자세한 것은 후술
[21]
우루과이는 초대 월드컵이 열리기 100년 전인 1830년에
브라질에서 독립하였다.
[22]
Andrés Mazali. 마살리는
허들에서 남미 챔피언을 차지한 적도 있는 뛰어난 육상선수이기도 했다.
[23]
바스크 출신의
프랑스 대표 수비수. 1929년까지
라리가에서 뛰었지만 대표팀 생활은 프랑스에서 다했다. 1930년 3월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40m짜리 중거리슛을 꽂아넣어 유일한 A매치 득점을 해냈다고 전해진다. 통산 A매치 16경기 출전 1골
[24]
10월 21일이 생일인지라 아직 생일이 자니지 않아서 만 나이로는 27살이 맞다.
[25]
트라무톨라는 유명 하프백이자 국가대표까지 지냈던 올라사르와는 다르게 축구 선수 출신이 아니었으며 원래는 기술 감독의 자리에서 올라사르를 보좌했었다. 그 이후에 트라무톨라는 감독 자리에 재미를 붙여 아르헨티나 프로팀의 감독 자리를 맡기도 했다.
[26]
이런 경우가 현대의 클럽팀에서도 가끔 있다. 대표적인 경우가
마티아스 자머와
위르겐 콜러. 둘 다 독일 축구를 대표하는 스타 플레이어였지만 잠머는 무릎 부상으로 인해 일찍 은퇴했다. 잠머가 2000년에 수석 코치를 거쳐
보루시아 도르트문트의 감독으로 취임했을 때 위르겐 콜러는 아직 현역이었다. 콜러가 잠머보다 2살 위.
[27]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에도 비슷한 일이 발생했다. 1981년 생의
차두리가 코치로 부임했는데 1979년 생의
이동국이 선수로 발탁되었다.
[28]
RSSSF의 기록으로는 파라과이 공격수
아우렐리오 곤살레스의
자책골이라는 이야기도 있었다.
[29]
다만
브라질에 로사스보다 2달 늦게 태어난
카르발류 레이치가 있어서 초대 월드컵 최연소 선수 타이틀의 주인공이 되는 것은 실패했다.
[30]
옛날 기록으로는
미국과
파라과이의 경기에서
파라과이의
곤살레스가
자책골을 기록해서 기록을 양분했지만 이것이
파테노드의 골로 수정되면서 로사스가 독박을 쓰게 되었다.
[31]
로사스는
현재까지도 월드컵 역대 차연소 득점자이다. 최연소 득점 기록은
펠레가 가지고 있다.
[32]
이 사진으로 인해 이 당시의 월드컵은 이벤트전에 불과한 위상이였다는 이야기도 많은데, 정확히는 각 팀마다 대회를 임한 태도가 달랐다.
[33]
후보까지 영역을 넓히면 에밀리오 레코바로 1992년에 별세했다.
[34]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의 국기가 닮은 이유가 이것.
아르헨티나의 도움을 잊지 않고자
아르헨티나 국기를 모방하여 탄생한 것이 오늘날까지 쓰는
우루과이의 국기이다.
[35]
1942년에는 한참 제2차 세계 대전이 진행 중이였고 1946년에는 많은 국가들이 아직 전후 복구도 제대로 되지 못해서 결국 열리지 못했다.
[36]
그래도 대륙 대회인 코파 아메리카 에서는 여전히 상당히 강하며 전력이 좋을 때는 월드컵에서도 우승후보 말석에 낄 때도 있기는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