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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라즘 제국 خوارزمشاهیان Khwārazmshāhiyā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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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77 ~ 1231[1] | ||
<rowcolor=#ffffff> 성립 이전 | 멸망 이후 | |
셀주크 제국 | 몽골 제국 | |
샨샤브 왕조 | ||
카라한 칸국 | ||
<colbgcolor=#704214><colcolor=#ffffff> 수도 |
구르간지(1077 ~ 1212) 사마르칸트(1212 ~ 1220) 타브리즈(1225 ~ 1231) |
|
정치 체제 | 봉건군주제 | |
국가원수 | 호라즘샤 / 술탄 | |
주요 국왕 | 무함마드 2세 1200 - 1220 | |
언어 |
페르시아어(공식) 킵차크어[2](군대) 그 외 다수 |
|
민족 |
페르시아인 킵차크인 오구즈인 그 외 다수 |
|
종교 | 이슬람 수니파 | |
현재 국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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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 |
페르시아어, 다리어 |
دولت خورزمشاه/خوارزمشاهیان (허라즘셔히연[3]/다울라트 호라즘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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Xorazmshohlar davlati (호라즘숄라르 다블라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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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 | Khwarazmian Empire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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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077년에 성립되어 1231년에 멸망한 서아시아, 중앙아시아의 이슬람 왕조.호라즘 지역에서 발원했으므로 '호라즘 왕조'라고 한다. 왕가는 튀르크계 굴람( 맘루크) 출신이었으며, 행정 체제와 사회 문화는 페르시아식이었다. 원래 셀주크 제국의 일부였으며, 셀주크 세력이 카라 키타이에 패망한 이후에는 카라 키타이의 속국이 되었다.
1160년대 이후 1190년대에 이란 지역을 장악했으며, 1200년대에는 고르 왕조와 카라한 왕조를 차례로 멸망시키고 트란스옥시아나, 아프가니스탄 지역까지 정복하여 동부 이슬람 세계의 패권을 차지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몽골 제국에 멸망하였고, 호라즘 왕조의 튀르크 귀족들은 몽골 귀족에 편입된 후 몽골 제국의 유럽 및 중동 침략에 있어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다.
페르시아어로는 'Xwārazmšāhiyān'(허라즘셔히연, 허라즘 왕국)이라고 하는데, 한글로 표기할 수 없는 발음이기 때문에 표기가 제각각이다. 보통 "화레즘"으로 쓰이지만 '콰레즘'이나 '코라즘', '호라즘'이라는 표기도 자주 보인다. 일단은 대중적으로 널리 알려진 "'호라즘"'을 표제어로 쓰고, 본문도 호라즘으로 통일한다.
왕조의 국호 역시 "'호라즘 샤 왕조/제국(또는 화레즘 샤 왕조/제국)"'이라고 부른다.
2. 역사
2.1. 초기 역사
호라즘은 아무다리야 강 하류의 비옥한 저지대를 가리키는 지명이다. 북으로는 아랄해, 동으로는 키질쿰 사막, 서로는 우스튜르트 고원, 남으로는 카라쿰 사막과 접한다. 트란스옥시아나의 일부로 간주되며, 현대 국경으로 보면 투르크메니스탄 북부에 해당한다.트란스옥시아나의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페르시아 지역의 제국들에 직•간접적으로 복속된 페르시아 문화권으로 몽골 초원까지 확장한 튀르크인이 살고 있었던 곳이다. 아랍 이슬람 세력의 대정복 이후에도 호라즘은 시리아와 이라크의 아랍 중심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반독립적인 세력을 계속 유지할 수 있었다. 게다가 훗날 아바스 왕조는 분열되어 북아프리카와 아라비아 동부를 상실했을 정도로 국력이 약화되었다.
4세기 극초반 부터 11세기 이전까지 호라즘의 지배 세력은 아프리그 왕조(Afrighids)라고 불리는 토착 이란계 왕조였다. 아프리그 왕조는 사산 왕조에 복속되었던 반독립 왕조로 호라즘 샤라는 칭호를 썼으며, 이 '호라즘샤'는 13세기 호라즘의 '아누쉬테긴 왕조'가 몽골에게 멸망할 때까지 쓰였다. 8세기경 아랍 세력의 공격을 받아 큰 타격을 입기도 했지만 일시적인 점령에 그쳤고, 이후에는 트란스옥시아나에서 발흥한 페르시아계 왕조인 사만 왕조에 복속된 상태로 계속 존속할 수 있었다. 9세기경 기존의 조로아스터교 신앙을 버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서기 995년,호라즘 내부의 다른 귀족인 마문(Ma'munids) 가문이 왕위를 찬탈하고 아프리그 왕조를 멸망시키나, 곧 사만 왕조를 계승한 튀르크계 굴람 왕조인 가즈니 왕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1017년, 호라즘은 가즈니 왕조의 속주가 되었다. 그러나 가즈니 왕조 역시 1040년 단다나칸 전투에서 셀주크 튀르크 세력에게 패배해 호라산 일대를 전부 빼앗겼으며, 호라즘 지역도 이때 셀주크 제국으로 넘어가게 되었다. 이후 '호라즘 샤'의 지위는 셀주크 튀르크 제국의 술탄이 파견한 총독들의 차지가 되었다.
2.2. 아누쉬테긴 왕조
1077년, 셀주크 술탄 말리크샤 1세의 직속 굴람이었던 아누쉬테긴 가르차이가 호라즘 샤로 임명되었다. 아누쉬테긴이 언제까지 통치했고 언제 사망했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1097년, 말리크샤 1세의 후임 술탄인 바르키야루크가 보낸 총독이 바로 죽자 아누쉬테긴의 아들 무함마드 1세(1097 ~ 1127)가 후임 호라즘샤로 인정되었다. 그러므로 보통 아누쉬테긴이 임명된 1077년을 (아누쉬테긴 계열) 호라즘 왕조의 시작으로 본다. 무함마드 1세는 1127년까지 살았으며, 재위 기간 내내 셀주크 제국의 속국 상태를 유지했다.무함마드 1세의 아들인 아트시즈(1127 ~ 1156) 역시 부왕과 마찬가지로 처음 10여 년 동안은 셀주크 제국에 순종했으나, 그 뒤에는 노골적으로 반기를 들었다. 1138년 아트시즈는 군대를 일으켜 호라산을 약탈했으나, 셀주크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가 호라즘으로 쳐들어오자 그대로 도주했다.
산자르가 돌아가자 아트시즈는 곧 돌아와 새 총독을 죽였고, 산자르에게 다시 복종하기로 합의했다. 1141년, 산자르가 카트완 전투에서 야율대석이 이끄는 서요 군대에게 패배하자 아트시즈는 그 틈을 타 다시 호라산 지역을 공격했다. 그러나 아트시즈는 산자르의 반격을 받아 호라산에서 쫓겨났고, 카라 키타이 군대가 호라즘까지 쳐들어오자 막아내지 못하고 연공을 바치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이때부터 호라즘 샤는 셀주크 왕조와 서요 왕조에 이중으로 복속되었으며, 카라 키타이에게는 조공을 바치게 되었다. 1153년 아흐마드 산자르가 오우즈 반란군과의 전쟁에서 포로로 잡히자 아트시즈는 또다시 반란을 일으키며 호라산을 넘보았지만 별다른 소득을 얻지 못하고 1156년에 사망했다.
아트시즈의 아들 일 아르슬란(1156 ~ 1172)은 부왕에 비해 운이 꽤 좋은 편이었다. 그가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산자르가 사망했고, 약해져 있던 셀주크 제국은 산산이 분열되어 더이상 호라즘에 간섭할 수 없게 되었다. 이를 기회 삼아 일 아르슬란은 호라산의 오우즈 반란군이나 트란스옥시아나의 카라한 왕조 잔당 등을 상대로 영토 확장을 꾀했지만 뾰족한 성과를 거두진 못했다.
한편 셀주크 제국이 멸망한 뒤에도 서요에게는 계속 연공을 바쳤는데, 말년에 연공을 제대로 바치지 않았다는 이유로 쳐들어온 서요의 군대에 맞서 싸울 준비를 하던 중 병사했다. 그의 치세부터 호라즘은 실질적인 독립 왕국이 되었는데, 서요에 대한 복속은 계속되었지만 연공 납부 이외의 내정 간섭은 거의 받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아누쉬테긴계 호라즘 샤 왕조의 영토는 호라즘 지역에 한정되었다.
2.3. 영토 확장
일 아르슬란이 사망한 뒤 두 아들 사이에 샤 계승 다툼이 발생했다. 술탄 샤(1172 ~ 1193)가 정치적 지지를 얻어 수도인 구르간지(현 코네우르겐치)에서 샤에 올랐으나, 서요의 군사 지원을 받아낸 테키쉬(1172 ~ 1200)가 쳐들어오자 그대로 도망쳤다. 이후 술탄 샤는 호라산 지역에서 셀주크 제국의 잔당이나 고르 왕조 등에 의탁하며 호라즘 본토의 테키쉬와 대립했다.테키쉬와 서요의 관계가 악화된 틈을 타 술탄 샤와 카라 키타이가 테키쉬를 협공하기도 했으나 결국 패배했고, 술탄 샤는 호라산 지역에 독자 세력을 구축하는 데 만족했다.
테키쉬는 1193년 술탄 샤가 죽을 때까지 그를 완전히 제압하지 못했지만, 술탄 샤가 사망하자 그의 세력을 큰 힘 들이지 않고 흡수할 수 있었다. 호라산 일대의 패자가 된 6대 샤인 테키쉬는 1194년 아바스 왕조의 칼리파 알 나시르와 함께 마지막 셀주크 술탄 투으룰 3세를 공격해 제거하고, 이란 서부까지 진출했다. 1200년에 숨을 거둘 당시 테키쉬는 이란 서부, 호라산, 호라즘 일대를 아우르는 동부 이슬람 세계의 최강자였다.
그러나 이 급격한 영토 확장이 완전히 성공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아프간의 고르 왕조는 여전히 강력한 군사력을 가지고 호라산을 위협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호라즘은 서요에 대한 복속 상태를 완전히 청산하지 못했다. 또 테키쉬는 군사력 증강을 위해 튀르크계 킵차크의 일파인 캉글리족 출신 여성 테르켄 하툰과 결혼하는 등 북쪽의 튀르크, 킵차크계 부족 집단들을 적극적으로 호라즘으로 끌어들였다. 이 부족들은 호라즘의 급속한 영토 팽창에 도움이 되었으나, 이슬람화도 거의 되지 않은 데다 난폭하고 잔인해서 새로 정복된 이란과 호라산 일대 주민들의 증오를 받았다. 셀주크 왕조의 잔여 세력 말살을 위해 동맹을 맺었던 바그다드의 칼리파 역시 호라즘의 급격한 확장을 경계했고, 결국 갈등이 격화되어 전쟁 직전에 이르기도 했다. 이 같은 문제점들은 이후 무함마드 2세 시대의 급격한 붕괴의 원인이 되었다.
1200년 테키쉬가 죽자 이란 서부 지역 주민들이 호라즘 주둔군에 대항해 폭동을 일으켰고, 호라산에서는 테키쉬의 조카가 고르 왕조의 지원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지만 새로 등극한 무함마드 2세(1200 ~ 1220)는 이를 모두 진압했다. 1204년에는 호라즘 본토로 쳐들어온 고르 왕조의 무이즈 앗 딘 무함마드(무함마드 고리)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기도 했지만 결국 몰아내는 데 성공했고, 1206년 무함마드 고리가 죽은 뒤로 고르 왕조는 내전으로 분열되어 무력해졌다.
고르 세력의 위협이 약화되자 무함마드 2세는 트란스옥시아나로 눈을 돌려 종주국인 서요와 본격적으로 적대하기 시작했다. 사마르칸트의 카라한 왕조 세력을 우군으로 끌어들이려는 시도는 실패했지만, 대신 서요 국내에서 나이만 족장 출신인 쿠츨루크가 반란을 일으켜 제위를 찬탈한 틈을 타 트란스옥시아나에서 서요의 세력을 완전히 몰아낼 수 있었다.
이후 무함마드 2세는 카라한 왕조를 완전히 멸망시키고, 수도를 구르간지에서 사마르칸트로 천도했으며, 1215년 고르 왕조가 멸망하자 아프간 북부와 가즈니 일대까지 차지했다. 호라즘 왕조는 역대 최대의 영역을 확보했으며, 동부 이슬람 세계에서 유일무이한 패권국이 되었다.
그러나 이 정복 활동이 마무리된 것은 얼마되지 않았기 때문에 호라즘은 점령한 지역들에서 그리 많은 지지를 받지 못했다. 당시 동부 이슬람 세계는 셀주크 제국이 붕괴된 지 반세기가 넘는 동안 정치적 혼란과 전쟁이 지속되어 매우 피폐해진 상태였다.
호라즘은 1170년대까지 호라즘 지방만 다스리던 소국이었다가 외부의 튀르크, 킵차크 부족 집단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여 동부 이슬람 세계를 정복할 수 있었다. 군주인 무함마드 2세는 모후 테르켄 하툰을 중심으로 뭉친 킵차크 부족 전사와 적대적인 점령지 주민 사이에서 어느 쪽도 완전하게 통제할 수 없었다.
거기다 갑자기 넓은 지역을 정복하면서 사방을 들쑤시고 다닌 데다, 명목상 이슬람 세계의 구심점인 아바스 칼리파와도 노골적으로 대립하면서 주변 거의 모든 세력과 외교 관계가 최악이었다. 특히 칼리파와의 대립은 호라즘 군대가 대놓고 바그다드를 향해 진군할 정도로 악화되었다. 비록 1218년의 이 공격은 자그로스 산맥의 혹독한 겨울 날씨 때문에 무산되었지만, 이슬람 세계 내에서 호라즘에 대한 적대감을 증폭시켰다.
이처럼 호라즘은 외형만 거대한 조각이불같은 불안한 상태에서 몽골 제국과 접촉하는 비운을 맞게된다.
2.4. 전쟁과 멸망
2.4.1. 무함마드 2세 치세
자세한 내용은 몽골-호라즘 전쟁 문서 참고하십시오.이즈음 무함마드 2세 치세의 호라즘은 이라크에서 트란스옥시아나 이르는 이슬람권 유일의 패권국이 되었으며 이 때 무함마드 2세는 '제2의 알렉산더', '지상의 알라', '알라의 그림자' 등으로 불릴 정도로 강력한 정복군주였다.
이를 바탕으로 샤를 “자칭“하고 칼리프 앗 나시르가 공식적으로 인정하지 않자 칼리프가 구상한 포위망을 깨뜨리고 칼리프를 침공할 정도로 위세를 보였다.
칼리프를 침공하려던 무함마드 2세의 군대가 자그로스 산맥에서 철수하던 1218년 시점에 하필이면 칭기즈 칸의 몽골 제국이 쿠츨루크의 목숨을 빼앗고는 서요를 멸망시키면서 호라즘 제국과 접촉하게 되었다. 이 시기 무함마드 2세와 칭기즈 칸의 의도가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에 대해서는 여러 가지 설이 있다.
라시드 앗 딘의 기록에 따르면 칭기즈칸은 3명의 사신과 자신의 친서를 대상을 통해 보냈는데, 호라즘령 오트라르의 '아미르'(영주)이자 샤 무함마드 2세의 외가 친척인 이날추크(غایرخان)[4]가 칭기즈 칸이 보낸 사신과 무슬림 대상들을 살상했다.
살상한 이유를 두고 라시드 앗 딘은 당시 이날추크가 가이르 칸이라는 칭호를 가지고 있었는데 칭기즈칸이 보낸 상인 가운데 가이르 칸과 친분이 있었던 힌두인이 한 명 있었고 이 힌두인이 어린 시절 친분과 칭기즈 칸의 위세를 믿고 가이르 칸을 본명인 이날추크로 막불렀다는 것이다.[5]
이에 가이르 칸은 무시당한 분노와 상인들의 재물에 대한 욕심으로 몽골인 상인들을 감금한 뒤, 샤 무함마드 2세에게 상황을 알렸고 무함마드 2세가 칭기즈칸 사절단의 처형을 명령했다고 주장한다.[출처1-2-2-2-5]
행군 루트나 전시의 계산적인 학살 및 파괴 행위를 보면 이 사건이 우발적으로 발생한 사고라고 보기 어렵다는 의견도 있지만, 당시 몽골이 최우선으로 노리던 건 인근의 서하나 금이었지, 멀리 떨어진 호라즘이 아니었다는 주장도 있다.
그리고 간신히 탈출한 대상으로부터 정황을 들은 칭기즈 칸이 오트라르 영주의 처벌에 대한 항의성 사신을 다시 보냈지만 무함마드 2세가 직접 일부는 죽이고, 일부는 수염을 깎아 돌려보냈다. 칭기즈칸과 무함마드 2세 둘 모두 상대를 만만치 않은 세력이었고 척을 지지 말자는 강국으로 여기고 있었는데, 무함마드 2세의 모욕에 노한[7] 칭기즈 칸이 호라즘에 선전포고를 하고 전 병력을 동원해 침공했다.
무함마드 2세는 아들 루큰 앗 딘에게 본토 수비를 맡긴 채, 본인은 군대를 이끌고 호라산, 사마르칸트, 잔드를 거쳐 투르키스탄 국경 지대까지 향한 뒤 킬리 강과 카임치 강 사이에서 몽골 군대와 대치했다. 당시 무함마드 2세가 대치하던 몽골 군대는 수베데 바하두르와 토가차르의 군대였는데 원래 이 부대는 (잔당 토벌 임무를 받고) 쿠두를 치기 위한 군대였다.
무함마드 2세의 공격에 상황 파악이 덜 된 몽골군은 일단 한 발 물러나 '우린 칭기즈칸의 명령을 받지 않아 호라즘과 싸울 의향이 없다'고 밝혔지만 무함마드 2세는 무시하고 공격했다. 그러나 호라즘 군대는 역으로 포위되어 무함마드 2세까지 포로가 될 위기에 처하게 되었고, 무함마드 2세는 아들 잘랄 앗 딘의 활약으로 간신히 탈출해 사마르칸트로 귀환했다.[출처1-2-2-2-5]
몽골군의 위력을 본 무함마드 2세는 전면전에서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며 수비 태세로 들어가려 했지만, 몽골 군대는 호라즘 측의 예상을 크게 뛰어넘는 속도[9]로 진격하여 트란스옥시아나 일대에 들이닥쳤다. 이 때문에 호라즘 군대는 몽골 군대에 비해 숫자도 적으면서 각 도시에 분산 배치되어 각개격파당했다. 오트라르와 구르간지에서는 몽골군도 상당한 피해를 입을 정도로 격렬한 전투가 벌어졌지만, 그 외에 사마르칸트, 부하라, 발흐, 마르브, 니샤푸르 등 호라즘 측의 주요 대도시들이 몽골 제국에 편입되었다.
전쟁의 원인을 만들었다고 알려진 오트라르 영주 이날추크는 오트라르 성이 함락된 후 몽골군에 생포되었고, 칭기즈 칸이 탐욕에 멀은 성주이니 그에 걸맞게 죽이겠다며 두 눈에 금을 녹인 물을 들이붓는 끔찍한 방식[10]으로 처형시켰다고 전해진다.[11]
당시 호라즘 군대의 구조는 중세 튀르크-페르시아 제국들의 전형적인 형태로, 군주와 유력자들이 개인적으로 보유한 굴람( 맘루크)들이 소수 상비군 겸 정예부대가 되고, 유사시에 다수의 기병을 빠르게 동원할 수 있는 유목 부족 집단들이 군대의 주력을 맡는 구조였다. 호라즘 왕국에서 이 주력부대의 역할을 맡은 것이 앞서 언급했듯이 무함마드 2세의 부왕 테키쉬가 테르켄 하툰과 결혼하면서 끌어들인 튀르크계 킵차크 부족들이었다. 이들은 자신들과 같은 부족 출신인 테르켄 하툰의 명령을 더 우선시했고, 테르켄 하툰은 아예 국왕인 무함마드 2세의 궁정과 별도로 자신의 궁정(divan)을 차려서 왕의 명령조차 모후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수준이었기 때문에 통제하기가 어려웠다. 전쟁의 원인이 된 오트라르 영주 이날추크도 테르켄 하툰의 친족이었다. 게다가 상술했듯이 정복당한 지 얼마 안 된 지방 주민들은 호라즘 세력에 대한 적개심이 강했기 때문에 주요 대도시와 거점에 주둔한 병력을 완전히 뺄 수도 없었다. 이런 사정들 때문에 호라즘은 몽골의 공격에 반격다운 반격을 거의 해 보지 못하고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다가 격파당했다.
결국 단기간에 제국의 심장부와 군대 상당수를 잃게 된 무함마드 2세는 그나마 전란을 피한 이란 서부 지역을 돌면서 병력을 모아 보려고 했으나,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카스피해의 한 섬에서 폐렴으로 추정되는 병에 걸려 죽었다. 다음 왕위는 무함마드 2세와 함께 있던 아들 잘랄 웃 딘 밍부르누(1220 ~ 1231)가 이었다. 한편 무함마드 2세를 쫓던 몽골의 추격대는 추격 도중 러시아인들의 땅까지 도달하는데 이것이 이후 깊은 악연을 맺게 된 러시아와 몽골의 첫 대면이었다.
2.4.2. 잘랄 웃딘 치세
잘랄 웃딘은 호라즘 본토와 트란스옥시아나를 완전히 포기하고 남은 병력을 규합해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동부 지역인 가즈니로 옮겨갔다. 호라즘의 튀르크인 군인들은 예전 돌궐 제국 때 몽골 고원을 오래 동안 정복했듯이 비슷한 문화와 언어 때문에 몽골군에 가담하게 되었다.가즈니에서 현지 부족들과 동맹을 맺고, 병력을 충원한 잘랄 웃 딘은 카불 근교의 파르완 전투에서 몽골군을 한 차례 격퇴했으나, 칭기즈 칸이 직접 군대를 몰아 추격해 오자 인도 방면으로 도주했다. 결국 인더스 강변에서 따라잡힌 호라즘 군대는 몽골군에게 궤멸당했으나 잘랄 웃 딘 본인은 간신히 탈출해 인도 노예 왕조의 수도인 델리로 갔다. 잘랄 알 딘은 맘루크 술탄 샴스 알 딘 일투트미쉬에게 몽골과 싸우자고 제안했으나 거부당했고, 잘랄 웃 딘이 토착 세력과 손을 잡고 라호르를 점령하자 일투트미쉬가 직접 군대를 이끌고 그를 몰아내려고 나섰다.
구자라트, 신드 등을 약탈하다 인도에서 쫓겨난 잘랄 웃딘은 1224년 기회를 보아 이란으로 갔고, 몽골군이 일시 철수한 틈을 타 분열되어 있던 이란 일대의 군소 영주들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몽골군에게 또 다시 패배하여 이란에서의 패권이 무너지자 이번엔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하여 새로운 거점으로 삼았다. 잘랄 웃 딘은 세력을 더욱 확대하기 위해 조지아 왕국을 공격, 수도 트빌리시를 약탈한 뒤 서쪽으로 눈을 돌렸는데, 이곳에서 서방의 무슬림 국가인 룸 셀주크 왕조, 아이유브 왕조와 대립하게 되었다.
결국 1230년 잘랄 웃 딘의 호라즘 군대는 룸 술탄 카이쿠바드 1세가 이끄는 아이유브-셀주크 연합군에게 패배하게 되었고, 몽골군이 아제르바이잔을 점령하여 거점까지 잃게 되었다. 그러나 잘랄 웃 딘은 기어이 몽골 군을 뿌리치고 도주하다가 쿠르드족 노상강도(혹은 암살자)에게 살해당하면서 호라즘 왕조는 완전히 막을 내리게 되었다.
2.4.3. 콰레즈미야 (호라즘 용병)
잘랄 웃 딘이 죽으면서 왕조는 막을 내렸지만 그 휘하에서 싸우던 호라즘 병사들은 상당히 많이 남아 있었다. 이들은 잘랄 웃 딘이 죽은 뒤에도 흩어지지 않고, 룸 술탄국이 쇠약해진 틈을 타 변경을 노략질하면서 수년 동안 세력을 유지했다. 1244년 아이유브 왕조의 이집트 술탄 앗 살리흐 아이유브가 이 호라즘 군벌을 시리아로 끌어들였고, 이에 따라 남진한 호라즘 군대는 당시 외교 협상으로 십자군 측에 넘어가 있던 성지 예루살렘을 공격해 함락시켰다. 뒤이어 십자군 전쟁의 사실상 마지막 회전인 라 포르비에 전투에서도 이집트 편으로 참여하여 승전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이후에 이집트와 시리아로 분열된 아이유브 왕조의 내전 틈바구니에서 술탄 앗살리흐가 약속한 영지를 주지 않으며 이집트와 관계가 틀어졌고 고립된 채 시리아 아이유브 세력의 공격을 받아 패배하면서 호라즘 용병 군벌 세력은 1246년 와해되었다.그 이후에도 호라즘 출신들이 이집트로 많이 이주하였는데, 한 예로 쿠투즈는 본래 호라즘인이었다가 몽골군에게 붙잡혀 이집트에 노예로 팔려갔는데, 용맹을 인정받아 맘루크 부대에 들어가 군 사령관을 거쳐 술탄에까지 올랐다. 쿠투즈는 1260년 몽골군이 이집트를 노리고 쳐들어오자, 아인잘루트 전투에서 몽골군을 물리쳤다.
3. 성격과 의의
위에서 정리한 내용에서 알 수 있듯, 호라즘 왕조는 오랜 정치적 혼란 때문에 몰락해 가고 있던 서아시아 및 중앙아시아 지역을 일시적으로 제압해 냈지만 오래 버티지 못하고 멸망했다.그러나 칭기즈 칸이 호라즘을 침공한 근본적 원인이 과연 무함마드 2세의 모욕 때문이었는지, 그리고 서아시아 지역의 쇠퇴가 몽골이 원인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당시 서아시아 지역의 혼란했던 역사적 배경을 감안할 때, 호라즘의 역량으로는 칭기즈 칸의 힘에 대항하기 어려웠을 것이라는 점은 확실해 보인다. 또한 호라즘 제국의 정치적 혼란 때문에 우수한 튀르크 기병과 귀족들이 문화적으로 유사한 몽골 군대에 차례 차례 가담하였다. 이재운 작가의 소설 '칭기즈 칸'처럼 호라즘이 금나라보다도 강력한 나라였다는 주장이나 서술도 있지만, 실제 전쟁 양상을 봐도 그렇고, 그렇게 보기는 어렵다. 영토만 놓고 본다면 거의 맞먹었지만, 금나라가 확보한 화북+만주 지방과 달리 호라즘이 차지한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 지역은 전통적으로 인구 밀도가 낮은 지역인 데다, 당시의 호라즘은 앞서 언급한 대로 통치체계도 탄탄하지 못해서 몽골에 맞설 역량이 훨씬 떨어졌다.
호라즘 왕조가 역사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 것은 오히려 동아시아쪽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몽골군 주력이 호라즘 원정에 동원되어 금나라 멸망이 늦춰졌다는 점이다. 당시 금나라는 몽골에 의해 화북과 만주 일대를 모조리 빼앗겨서 카이펑에 천도를 한지 얼마 안 되어서 만약 호라즘 제국과의 전쟁이 없었다면 몽골에 의해 더 빨리 멸망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역사가 짧고 사료가 많지 않은 편이지만, 학자들은 호라즘 제국의 국가 체제나 사회 문화 등이 다른 중세 튀르크-페르시아 제국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으로 본다. 튀르크-페르시아식 체제란 가즈니 왕조와 셀주크 제국을 통해 확립되어 사파비 왕조, 오스만 제국, 무굴 제국 시대까지 이어진 체제로, 유목민 부족들의 연합이나 굴람( 맘루크) 출신 군벌 등 튀르크계 군사력을 바탕으로 정권이 수립되지만 국가 정부 운영은 페르시아인들이 맡는 체제이다. 페르시아인 관료 겸 학자들이 국정을 주도했기 때문에 학술, 예술 등 문화적인 부분은 거의 페르시아적인 색채를 띠었다. 이 체제가 당시 기준으로 상당히 안정적이었기 때문에 호라즘 제국은 과거 패권국가인 셀주크 제국의 페르시아식 체제를 그대로 답습했으며, 호라즘이 멸망하고 들어선 몽골의 일 칸국 그리고 그 이후에 들어선 티무르 제국도 마찬가지였다.
호라즘 왕조가 망한 이후에도 호라즘 지역에는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으며, 훗날 여기서 우즈베크족 출신의 샤이바니 칸이 히바 칸국을 세웠다.
4. 역대 군주
- 1대 샤: 아누쉬테긴 가르차이 (1077 ~ 1097)
- 2대 샤: 무함마드 1세 (쿠툽 웃딘 아불파트 무함마드 아르슬란테긴 빈 아누쉬테긴, 1097-1127) : 세습 체제 구축, 실질적 창건자
- 3대 샤: 아트시즈 (알라 웃딘 아불무자파르 아트시즈 키질아르슬란 빈 모함마드, 1127 ~ 1156) : 술탄 아흐마드 산자르에 대한 반란 시작
- 4대 샤: 일 아르슬란 (타즈 웃딘 아불파트 일아르슬란 빈 아트시즈, 1156 ~ 1172) : 산자르 사후 독립, 카라 키타이에 조공
- 술탄 샤 (잘랄 웃딘 아불 카심 마흐무드 술탄샤 빈 일 아르슬란, 1172-1193)[12]
- 5대 샤: 테키쉬 (알라 웃딘 아불 무자파르 테키쉬 빈 일 아르슬란, 1172-1200) : 셀주크 제국을 멸하고 칼리파 앗 나시르와 대립
- 6대 샤: 무함마드 2세 (알라 웃딘 아불파트 무함마드 산자르 빈 테키쉬, 1200 - 1220) 최전성기의 군주이자 실질적으로 최후의 군주
- 7대 샤: 잘랄 웃 딘 (잘랄 웃 딘 아불무자파르 밍부르누 빈 무함마드, 1220 ~ 1231): '밍부르누'가 이름인데 아직까지 이 이름을 제대로 읽는 법이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약칭할 때 이름을 쓰는 선대 왕들과 달리 약칭에 라카브인 잘랄 웃 딘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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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몽골 침공(1220) 직전의 영역.
[2]
카자흐어,
키르기스어,
카라칼파크어가 이 킵차크어족에 속하며, 이들의 언어와 비슷했다고 보면 된다.
[3]
현대 페르시아어에서 khw/xw 발음은 kh/x로 난다. 이란은 아니지만
아랍어로도 허라즘셔히연(خوارزمشاهیان)이라고 부른다.
[4]
'이날축', '이날치크' 등으로도 표기된다. 가끔은 이날죽으로도 발음된다.
[5]
칭기즈 칸 위인전이나 일부 도서에서는 해당 부분은 삭제되었으며 대다수가 칭기즈 칸의 위업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오트라르의 영주가 몽골 사신들의 금은보화에 눈이 멀어 이들을 전부 죽인 뒤 이를 차지했다며 칭기즈 칸의 호라즘 원정 명분을 지지하는 서술이 많이 나온다. 그러나 이 부분이 언급되었더라도 금은보화를 빼앗고 몽골 상인들을 죽이며 전쟁의 빌미를 준 건 이날추크의 과가 맞다.
[출처1-2-2-2-5]
라시드 앗 딘, 집사, 2권 칭기즈칸 기, 2편 2장 5절
[7]
수염은 남성성의 상징이었으니, 사신의 수염을 자른다는 건 외교석상에서 대놓고 "닥쳐, 불만 있으면 덤벼보든가."라고 외친 거나 다름없는 행동이었다. 특히 무슬림, 당시시대 남성에게는 수염을 깎인다는 건 굴욕 of 굴욕이었다.
[출처1-2-2-2-5]
라시드 앗 딘, 집사, 2권 칭기즈칸 기, 2편 2장 5절
[9]
이는 몽골초원에서 태어난 군마들의 특유의 보법이 있었으나 몽골군은 한 기병당 준비해둔 예비용 군마로 갈아타면서 기동력을 유지하였다.
[10]
일각에서는 은을 부어 죽였다고도 하고 어떤 매체에서는 녹인 금이나 은을 두 눈과 목에 부었다고도 한다. 어느 방식이든 간에 매우 처참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11]
2005년에 한국 지상파를 탔던
드라마 칭기즈칸에선 끓는
수은을 부은 것으로 표현되어 있다. 소설 천년영웅 징기스칸에서는 금을 녹여서 눈과 귀에 부은 다음 마지막에는 입 안에 금을 부어서 죽인 것으로 묘사했다.
[12]
대립 군주. 테키쉬의 이복형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