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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9:35:23

한국사의 후궁 제도

1. 개요2. 고려시대
2.1. 고려 초기2.2. 목종 이후2.3. 원나라 간섭기~후반기
3. 조선시대

1. 개요

한국에서 후궁 제도에 대해 자세한 기록이 나오는 것은 고려 시대부터이다. 물론 이전 삼국시대에서부터 왕이 왕비를 여럿 두는 경우가 발견되며, 여기에 더해 후궁을 둔 것으로 추정되는 기록도 종종 발견되므로 후궁과 같은 제도 자체는 고려 이전에도 존재했던 것으로 보인다. 예를 들어 신라 52대 효공왕은 후궁 소생의 서자였다.

그러나 고려 이전의 후궁 제도 체계에 관한 자세한 내용의 기록은 전해지지 않는다. 사실 고려 시대사의 기록도 고려왕조실록이 모조리 사라지고, 고려사 고려사절요에만 의존하는 상황이라 조선 시대에 비하면 많이 부족한 감이 있지만 어쨌든 그나마 제도의 틀을 살펴볼 수 있는 시기는 고려 시대부터이다.

참고로 각 나라마다 후궁 제도에 차이가 있는데, 한국에서는 대체로 일부일처다첩제의 성격이 강했다. 정확히는 삼국시대~고려시대까지는 일부다처다첩이 일단 가능하지만 일부일처가 권장되는 형태였고[1] 조선 태종부터 일부일처가 공식화된다.

2. 고려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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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고려 초기

초기 고려에서는 왕후(王后)와 부인(夫人)으로 나눠 전자를 정실로, 후자를 후궁으로 삼았다. 호족과 결혼할 때는 '지역+(궁/원)부인'이었다. 왕건의 후궁들이 호족의 여식이라는 것을 잘 보여주는 것이, 이 부인들의 칭호 대다수가 출신 지역의 이름을 따서 '지역+(원)부인'이라고 불렸다. 예를 들면 광주지역의 대호족 왕규의 딸들은 각각 광주원부인, 소광주원부인이라는 칭호가 내려졌다. 성종 대까지 고려시대의 후궁제도는 비교적 단순하게 나뉘고 정리가 되지 않은 것이 보통이었다.

한국사사상 가장 많은 후궁을 둔 태조 왕건의 경우도 왕후가 6명이고 부인은 23명이었다. 그런데 첫째부인 신혜왕후가 생전 하동군부인으로 불리고,[2] 대부분의 다른 부인들이 ~부인으로 불린 것으로 보아, 왕후들도 생전에는 왕후로 칭해지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3]

광종 이후 족내혼을 하면서 '건물이름+전/궁/원부인' 형태로 불렀다. 왕태후>왕후(왕의 정처, 어머니, 조모, 외조모)>궁부인>원부인>궁인 순으로 보인다.

성종 이후 문물정비가 이뤄짐에 따라 왕후 이하 내명부의 품계가 정해졌는데 전해지는 것은 정1품에 관한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왕후는 내명부 품계를 초월한 수장이며, 정1품으로 비(妃)가 있었으며 4개의 존칭인 귀비(貴妃), 현비(賢妃), 숙비(淑妃), 덕비(德妃) 중 하나가 주어졌다. 이는 당나라의 내명부 제도를 본 딴 것으로 고려가 황제국이었다는 뉘앙스를 슬슬 풍기는 근거 중 하나가 되는데, 사실 정실부인을 후(后)로, 후궁을 비(妃)로 두는 것은 황제국에서나 가능하기 때문이다. 제후국 즉, 조선의 경우에는 내명부 수장인 중궁의 품계가 왕비이니 사실 제후국의 수장은 황제국 최고 등급의 후궁과 동급이 된 것이다.

왕후의 경우, 대체로 왕의 정처였던 사람, 왕의 어머니, 할머니, 외할머니를 선대의 왕후로 추존한 걸로 보인다. 외할머니까지 왕후로 추존된 이유는, 고려 초기 근친혼 때문에 왕이 된 이들의 외할머니가 선대의 비인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덧붙여 고려 전반에 걸쳐서 왕태후가 된 인물들은 고인을 포함해 왕의 어머니와 할머니였다. 이것은 정통성을 강화시키기 위해서로 보인다.

예외적으로 문화왕후 현종 때 왕태후가 아니라 대비가 되었고, 사후에 왕후로 추숭되었다. 그녀는 왕의 외할머니도 아니었지만 궁에서 성종의 조카 목종과 현종을 양육했고, 딸 원정왕후가 현종의 1비가 되었으므로 현종의 입장에서도 양어머니나 마찬가지였기에 현종이 대비의 존호를 올린 듯하다.[4] 또는 문화왕후가 생전에 생전에 왕비여서 태후와 왕비 사이 절충안으로 '대비'란 칭호를 올렸을 수도 있다.

2.2. 목종 이후

보통 중후기는 왕태후>전주>궁주(궁비)>원주(원비)>궁인 혹은 택주 순이었다.

보통 목종부터 원 간섭기 이전인 원종까지를 일컫는 고려 중기에는 왕비와 후궁에게 보통 건물을 하사하고 그 건물의 이름을 따라 ○○ 궁주(宮主)(혹은 전주나 궁비(宮妃)) ○○ 원주(혹은 원비(院妃)) 등으로 불렀으며, 이는 고려 초기의 ○○ 궁부인, ○○ 원부인이 변형된 것으로 보인다. 이와 별개로 왕태후(왕의 어머니이거나 할머니)-왕후, 왕비- ○ 비(귀비, 덕비, 현비, 숙비)[5] 순으로 봉작을 내렸다. 예를 들어 용신왕후는 처음엔 혜비(惠妃)로 책봉됐고 후에 정신왕비(定信王妃)로 봉했다. 죽은 뒤 용신왕후라고 추증했다. 또한 왕후 ○○ 궁주 귀비 ○○ 원주, 덕비 ○○ 궁주, 왕비 ○○ 전주 등으로 봉작되는 때가 많았다. 실생활에서는 궁주(전주)나 원주로 많이 불리면서 궁주인 동시에 비(妃)인 경우가 많았다.

왕후나 왕비가 중궁(中宮)이기는 했지만 조선시대와 달리 ㅇ비(妃)와 엄격한 차이가 있지 않았다. 또한 생전 왕후와 왕비는 칭호가 공존할 수 있었다. 그러나 생전 왕후의 경우 몇 명 없고 왕의 마음대로 세웠기 때문에 왕후가 없는 경우도 많았다. 생전 왕후는 원정왕후, 경성왕후 등이 있다. 생전 왕후는 보통 왕족이었지만 정종의 왕후인 용의왕후(容懿王后)처럼 왕족 출신이 아닐 때도 있었다. 왕족 출신은 특별하여 왕녀일 경우 무조건 생전 왕후, 왕비이다. 왕족 출신일 경우 최소한 궁주부터 시작하여 사후에 왕비로 추증되었다. 반면 왕비의 경우 칭호가 기록에서 다수 발견되고, 왕족 출신이나 후궁 중 한 명이 되었다.

그리고 생전에 왕비의 자리에 올랐던 자도 사후에 왕후로 추증되었다. 왕비의 경우 소생이 없어도 자리에 올랐다면 추존하였다. 왕을 낳았으면 태후가 되거나 고인인 경우에 남편이 왕후로 추숭하고, 아들이 즉위하면 한 단계 높은 태후로 다시 추존했다. 왕후가 여러 명이기에 내명부의 수장은 왕태후라는 듯한 뉘앙스의 서술이 고려사 전반에 나타나 있다. 그러나 원 간섭기에 왕의 정비(正妃)가 원나라 공주로 정해지면서 이 규칙은 사라진다.[6]

이러한 규칙은 현종의 비들을 사후 추존할 때 과도기적 면모를 엿볼 수 있다. 문종 때는 생전 왕비가 아니었고 자식도 없었던 원목왕후에게도 왕후의 시호를 올렸다. 대신 능호를 만들지 않고, 절에서 제사를 그만두는 등 차등을 두었다. 이는 신하들이 또 다른 현종의 비 원순숙비(생전 경흥원주 덕비)의 장례를 치를 때 문화왕후(문화대비)의 예에 의하여 장례를 치르되 그 능호는 없이 했는데, 원순숙비와 원목왕후 둘 다 선왕의 비이니 예우가 달라서는 안 된다고 건의했기 때문이다. 한편 선평왕후의 경우, 의종 때 왕태비로 책봉되었다. 이유는 생전 왕비였으나 자식이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죽은 뒤 왕후로 추존되었다. 반드시 자식이 없는 왕비가 태비(대비)로 추존되는 것이 아니며, 선왕의 비라면 태후 밑의 대비 격으로 대우했던 듯하다.

궁주가 원주보다 높았고, 전주가 궁주와 비슷하나 격이 조금 높았던 것으로 보인다. 원주인 후궁이 궁주로 승진하거나[7] 궁주는 선왕의 후궁[8] 왕비, 높은 후궁 등을 가리켰고 공주 역시 궁주(전주)로 봉작했다. 공주 역시 건물을 내려 그 건물의 이름을 따서 칭호를 정했다.[9] 전주는 후궁에서는 잘 볼 수 없는 칭호이며, 좀 더 높은 신분이었다. 왕태후는 전주였다. 태후가 거주하는 곳의 건물 이름은 주로 ○○전이었기 때문이다. 왕후, 왕비, 가끔 공주의 칭호에서 보인다.
궁주는 보통 왕족이나 귀족 출신 여인이었고 양인 이상 궁인이 총애를 받고 아들을 낳은 경우 봉작을 받고 승격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혜종 때 궁인인 애이주를 제외하고, 원성태후, 정종의 왕비 용의왕후, 선종의 후궁 원신궁주가 있었다. 이들과 다르게 대조적으로 무비는 3남 9녀를 낳을 정도로 의종의 총애를 받았지만 관비 출신이었기 때문에 봉작받지 못했다. 고려시대에 천민 출신 궁인이 봉작을 받는 것은 금기였다.

궁인의 칭호 중 목종 때 요석택궁인(邀石宅宮人)이라는 칭호가 보여 궁인의 칭호가 택주로 발전했을 가능성도 보인다. 또한 강종의 서녀가 정화택주(靜和宅主)의 칭호를 받았으므로 딸이 어머니의 작위를 따라갔던 궁주 등의 고려의 칭호로 미루어 볼 때 택주가 궁인과 딸에게 쓰였을 가능성이 있다. 이로 보아 봉작을 받지 못한 궁인의 딸은 왕족에게 시집가지 못간 듯 하다. 궁주(전주)는 고려 족내혼의 전통을 따라[10] 왕의 왕후가 되거나 종친에게 시집갔는데, 궁인의 딸은 신하에게 시집갔다.

다만 충혜왕 때 내명부 관제가 무너져 천민에게 택주와 옹주 칭호를 주었다고 고려사에서 나오므로, 이전까지 천민 출신 궁인은 택호를 받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이로보아 양인 출신 궁인이나 후비의 아들은 봉작을 받았지만, 천민 출신 궁인의 아들은 출가해 승려가 되어야 했음을 알 수 있다.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 궁(宮) 계열
* 전주(殿主) : 전(殿)을 소유한 자. 태후는 전주였다. 가끔 왕후, 왕비, 왕녀가 썼다.
* 궁주(宮主) : 후비와 왕녀의 칭호. 왕족, 간택을 받은 귀족 출신. 혹은 왕자를 낳은 양인 이상 궁인, 원주에서 승격한 자. 왕녀에 한해서 공주와 같고, 실생활에서 많이 불린 칭호이다. 비(妃)일 경우 별칭은 궁비(宮妃).
* 원주(院主) : 간택받은 귀족이나 왕자를 낳고 봉작을 받은 양인 이상 궁인. 궁주보다 낮다. 원부인의 변형이며 실생활에서 많이 불린 칭호이다. 비(妃)일 경우 별칭은 원비(院妃).
* 택주(宅主) : 택호(宅號)를 받은 양인 궁인 혹은 궁인의 딸이나 장애를 가진 왕녀.[11]
* 궁인(宮人) : 승은을 입은 궁녀.

고려사에서 가끔 원비(元妃)라는 단어가 나오는데, 보통 이 단어는 정비(正妃)와 같은 뜻으로 쓰이나, 고려 시대 때는 왕의 정실부인이 1명이 아니며 정실부인과 후궁의 구별이 엄격하지 않았기에 왕이 처음 맞은 아내를 일컫는 말로 쓰였다. 고려는 위계 체계가 엄격하지 않아 왕이 처음으로 맞은 아내면 품계나 서열이 낮아도 원비라고 불렸다. 사숙태후 선종의 정비라고 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으나 선종의 원비는 아니기 때문에, 사숙태후의 신위를 종묘에 모시려고 했을 때 예종이 "적서의 예를 고려해야 한다." 하며 미룬다.[12]

이때 한 유력 문벌귀족들의 딸들을 한꺼번에 들이는 경우도 있을 정도로, 한꺼번에 많은 비들을 뽑은 뒤에 왕후나 왕비가 죽을 때마다 자리가 비면 정식 왕후로 봉했다. 이러다보니 고려 왕들의 정실부인 숫자들은 조선에 비해 많았고, 왕의 부인들끼리는 살아있는 동안에 동일한 반열의 자리에 있는 사례도 있었다. 이 탓인지 대체로 품계가 높으면 서열도 높지만, 덕종의 2비 경목현비처럼 서열은 높은데 품계는 아랫서열의 비보다 낮아 이 사람이 정실부인인지 후궁인지 판단하기 힘든 경우도 간혹 발견된다. 다만 왕과 함께 묻히거나 기록되는 순서에서 우대사항이 존재하기는 했다. 정비(正妃)라면 서열과 품계가 가장 높은 게 일반적이므로 대체로 1비로 기록되는 비가 정비(正妃)에 해당하나, 고려의 왕비들의 서열엔 신분이나 들인 순서, 정치적인 것 등이 종합적으로 적용되었기에 1비로 기록되지 않은 이가 정비격인 경우도 있다.

2.3. 원나라 간섭기~후반기

후반기부터는 태후[13]> 대비[14]

왕비=몽골 공주>공주>비(妃), 원주>옹주>택주 혹은 궁인 순이었다.

원 간섭기 이후에는 왕실 관제가 상당수 격하되고 내명부의 수장과 그 구성원 일부가 원나라 공주가 되면서 내명부 관제가 사실상 무너졌다. 법제상 내명부의 수장이 제후국의 왕후로서 비(妃)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후궁들의 최고 품계는 제후국 군주의 첩인 빈(嬪)이 아니라 여전히 황제국의 첩인 비(妃)인 상태가 계속되었다. 사실 원나라 고려의 관제와 왕실용어들을 격하시키기는 했지만, 이 격하는 사실 눈에 띄는 주요부서들에게 주로 행해진 것이며, 고려의 관제 모두를 속속들이 격하시킨 것이 아니었다. 3성이 죄다 격하되었어도 그 안에 있는 관제들이 격하되지 않아, 고려 행정의 위계성에 황제급과 제후급이 섞여 혼란이 생긴 것이다. 후궁제도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당시로선 무조건 원나라 공주가 정비(正妃)가 되었다. 원나라 출신이면 고려인 부인들보다 서열이 앞섰다. 반드시 공주 출신이 아니었어도 원나라 출신이면 정비로 대우받았다. 국왕의 정비는 원나라의 공주로 정해졌지만 여전히 국왕은 여러 부인을 정식 부인으로 둘 수 있었다. 이때 여성들은 ㅇ비(妃) 형태로 책봉되었다. 당시 기록상으로는 비(妃)가 붙은 이들은 모두 국왕의 왕비나 왕비에 가까운 후궁으로 간주했다. 봉호의 종류는 이때 더욱 다양해져 의비, 정비, 신비, 혜비, 순비 등 붙일 수 있는 칭호들은 대부분 붙여졌다. 그리고 몽골 공주가 황제로부터 고려왕비 책봉을 받았으나, 원 간섭기 이후 왕후나 왕비 칭호를 찾아보기 힘들고 일부다처제 성격을 띄게 된다.

또한 호칭적인 면에서 궁주가 사라졌다. 정확히 말하면 원나라 공주가 공주의 칭호를 가지고 가는 바람에, '공주=궁주'라고 여기던 고려의 왕실 칭호에서 원나라 출신이 아닌 이상 공주나 궁주를 쓸 수 없게 되었다. 공주 칭호는 원나라의 공주, 원나라 출신 후궁들과 그들의 딸들이 쓰게 되어, 칭호가 격하된 것이다. 후비와 왕녀가 칭호를 공유하는 고려 왕실의 전통에 비추어 어머니를 따라 왕녀는 궁주 칭호를 쓸 수 없게 되었다

궁주=공주가 격하되어 고려인 출신 후비와 그들의 딸이 쓸 수 없게 된 것을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은 정화궁주, 정화궁주의 딸인 정녕원비(靖寧院妃), 충혜왕의 딸 장녕공주이다. 정화궁주는 제국대장공주의 눈밖에 나서 부고에 가둬진 뒤에 정신부주라고 칭호가 바뀌었고, 정녕원비는 아버지 충렬왕이 즉위할 당시 궁주로 책봉되었지만 시호는 한단계 낮은 원비가 되었다. 반면 장녕공주는 덕녕공주의 딸이었다. 궁주의 칭호는 원간섭기를 벗어난 공양왕과 조선 초기 때 복구된다.

옹주(翁主)라는 칭호가 충선왕 때 궁주를 대체하며 후궁과 왕녀에게 처음 사용되었다. 그러나 충선왕 때부터 옹주 칭호는 궁주보다 낮은 원비(원주)보다 낮게 쓰여 본래의 목적을 상실한다. 충선왕에게 의붓딸이 되는 순비 허씨의 딸들과 충선왕의 친딸 수춘옹주(壽春翁主)는 모두 옹주로 책봉되었다. 이들은 궁주가 족내혼을 하던 왕실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다. 충선왕 때 이르러 왕녀와 종실 간의 혼인을 금지했으므로, 옹주가 궁주를 대체한 것처럼 보이지만, 수춘옹주의 출신에 주목해야 한다.

수춘옹주는 고려사 열전의 공주에서 누락되어있다. 천인 궁인이나 왕자를 낳지 못해서 봉작을 못받은 양인 궁인 소생은 아예 고려사의 왕자나 공주 항목에서 기록이 누락되는 것이 빈번하다. 그리고 수춘옹주의 어머니는 이복형제 덕흥군의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기록에 없다. 천인 출신 궁인이 낳은 왕자는 왕위를 잇지 못하고 소군이러 불리며 출가한 고려 왕실 전통을 따라서 덕흥군은 출가했다. 수춘옹주의 어머니도 덕흥군의 어머니와 같은 궁인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수춘옹주가 궁주를 대신해 옹주의 칭호를 받은 것은 희박해보인다.[15]

게다가 충선왕의 후궁 중 원비의 칭호를 받은 이가 보이고, 친딸 수춘옹주가 원주(원비) 칭호를 받지 못했음을 알 수 있다. 충선왕의 의붓딸들 역시 친부가 종실이었으나 친딸은 아니었기에 원주의 칭호를 받지 못했다고 예상할 수 있다. 이처럼 옹주는 궁주보다 낮게 사용되어 천민출신 후궁 등에게서 보이며 왕실 관련 외명부 봉작에서 남발되었다.

그리고 충혜왕이나 우왕 때는 출신이 천민출신인 기생이나 사노비, 관비 등이 품계를 받은 사례가 있다. 충혜왕의 후궁 은천옹주와 우왕의 여러 후궁이다. 충혜왕 때는 내명부의 관제가 무너져 궁인 중 천민 출신이 택주와 옹주를 받았다는 기사가 고려사에 나온다. 또한 우왕의 후궁들은 대부분 노비나 천민, 기생이어서 ㅇ비(妃)와 옹주로 책봉되자 백성들이 놀랐다는 기사가 고려사에 나온다. 그러나 천민출신 은천옹주의 아들은 왕위 계승권은커녕 신분 때문에 얄짤없이 출가해서 승려가 되었다.[16] 예외로 우왕이 있지만 이는 우왕이 공민왕의 하나뿐인 아들이고 당시 공민왕의 형제 중 살아있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으로, 그런데도 불안했는지 당시 왕실의 최고 어른이었던 공원왕후 홍씨가 손자 우왕 대신 혈통이 온전한 종친을 왕위에 세우려 했다. 이만큼 고려에서 신분와 혈통의 벽은 높았다.

혹은 원주가 후궁과 서녀의 칭호로 정착되고 옹주가 이를 대신했다는 시각도 있다. 출처 그러나 고려 말기로 갈수록 옹주 칭호가 서왕녀와 후궁에 그치지 않고 남발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다 옹주 칭호는 공양왕 3년 왕자의 정비(正妃)와 왕의 유복(有服) 동성자매(同姓姉妹), 조카딸, 군(君)의 정처(正妻) 등에 한하여 사용하게 하였다. 이는 조선 시대 때 그대로 이어진다.

원 간섭기와 후반기를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조선 시대에 비해 고려는 적서 차별[17]이나 남녀 차별이 느슨했다. 호칭상이나 명예상에서 약간의 서열이 존재하기는 해도 동등한 왕의 여자라는 점 때문에 왕비와 후궁의 구별이 조선보다 엄격하지 않았고, 이는 왕의 아들들도 마찬가지였다. 혜종 때 왕실을 뒤흔들었던 왕규의 난만 봐도, 이 내명부 서열이라는 게 얼마나 의미 없는 것인지를 보여준다. 조선이었다면 현재의 국왕이 선왕의 장남이고, 위로 선왕의 왕자들이 바글바글한데 선왕의 16번째 부인 소생인 광주원군을 왕으로 만들겠다는 계획이 나올 수는 없었다.[18] 조선 시대 같으면 감히 상상도 못할 일로, 서자인데다 서열이 높지 않은 왕자를 왕으로 만들려고 한다는 것은 고려 당시 적서차별이 거의 없었음을 반증하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더군다나 성종 이전에는 원래 왕위계승자들만을 위한 칭호인 태자가 남용되어 왕의 아들이라면 개나 소나 태자 칭호를 받게 되어 새로 맏아들이라는 뜻의 '정윤(正胤)'이라는 칭호가 만들어지는 웃지 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으니 내명부는 말할 것도 없었다.

간혹가다 과부도 후궁이나 왕후가 되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성종의 제1비인 문덕왕후와 충렬왕, 충선왕의 후궁인 숙창원비, 충선왕의 후궁인 순비 허씨(順妃 許氏)가 있다. 심지어 순비는 전 남편과의 사이에서 자녀가 8명이나 있었다.

이렇게 고려의 후궁 제도가 느슨한 점을 나타내 주는 사례로, 우왕 치세 말 이후로 내명부와 왕실의 총책임자 역할을 한 공민왕의 4비 정비 안씨가 있다. 공민왕과 노국대장공주그 관계를 생각하면 노국대장공주를 제외한 다른 비들은 후궁에 가까웠겠지만, 안씨 역시 엄연한 공민왕의 정실로 취급받았고 소생이 없음에도 대비가 되었다. 조선이었다면 후궁으로 그쳤을 것이고 후궁은 정실부인이 아니니 대비도 될 수 없었을 것이다.

3. 조선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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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초기에는 고려 후기의 과도기적인 모습들이 몇 가지 보인다.

첫째는 왕비에게 미칭이 존재했다는 점이다. 즉, 왕비의 품계가 고려시대 후궁제도의 비와 동급이므로, 조선에서는 일부일처제 원칙이 강하게 적용되고 이에 따라 왕비는 오직 한 사람만이 존재하지만 옛 풍습에 따라 별호를 내려 책봉한 것이다.

사실 이렇게 된 것은 노국대장공주 사후에 공민왕의 비(妃)들이 정처와 거의 동등한 취급을 받았을 뿐 따로 정처인 왕비를 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기 때문인 듯하다. 이전까지는 고려의 왕비는 원나라 공주였지만 원명교체기로 인해 원의 간섭에서 벗어났기 때문에 원나라 공주가 아닌 이들도 왕비로 책봉하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나 우왕 공양왕이 이성계에게 폐위를 당했고, 위화도 회군 이후 실권을 잡았으며 결국 새 나라(조선)를 세우기까지 한 이성계 측에서 두 사람의 아내들 중 정비(正妃)에 해당했던 이를 '왕후'로 추존할 이유가 없었다. 또한 "천자나 제후는 정실부인을 1명 둔다"는 유교의 원리를 적용하여 신진사대부들이 공양왕의 1명뿐인 아내인 순비 노씨를 중궁이라고 불렀다. 표면적으로 우왕과 공양왕의 아내들 봉호가 있는 비(妃) 위의 품계를 받은 사람이 없었으나, 의식적으로 ㅇ비(妃)를 중궁이자 왕비로 인식한 듯하다.

참고로 대한제국 시기에는 순헌황귀비 엄씨가 엄귀인 - 순빈 - 순비 - 황귀비의 순서대로 승진했고, 귀비로 책봉하자는 논의도 있었던 것으로 보아 황귀비 - 귀비 - 비 - 빈 - 귀인 - 상재 - 답응 - 관여자로 이루어지는 청나라의 후궁제도를 따른듯 하다.

세종 14년(1432) 옛 후궁들에게 붙이던 관습인 미칭을 한 나라의 내명부 수장이 받을 수 없다 하여 공비 심씨가 왕비로 개봉이 되면서 봉호를 붙이는 관습은 사라지게 되었다. 한편 세자빈들도 왕비들과 마찬가지로 봉호가 붙여졌으며, 역시 세종 14년(1432) 이후로 그 칭호들은 사라졌다. 다만 왕세자가 왕이 못 되고 죽은 경우에는 그 세자빈들에게 봉호가 새로 부여되었다. 세종 때 이후로 과부가 되었음에도 봉호를 못 받은 세자빈은 민회빈 강씨 밖에 없다.[19]

둘째로, 아직 고려시절에 사용되는 후궁 칭호들이 사용되며 나머지 용례들도 제각각 사용된다는 점이다. 제도를 정비하는 과도기라 비(妃) 칭호가 왕후와 후궁의 품계에서 모두 사용되는 경향이 있었다. 태조의 3번째 부인 성비 원씨가 대표적.

태조 이성계는 사실 굉장히 정력적인 사람이라서 늘그막에 후궁 화의옹주 사이에서 딸까지 볼 정도였다. 워낙 앞의 두 부인과 그 소생들이 여말선초 역사에 상당한 역할을 하다 보니 존재감이 없긴 하지만, 거의 3번째 왕비라 할 만한 위치에 있던 여자였기 때문에 태조 사후에 성비 원씨를 정식 왕비로 볼 것이냐 후궁으로 볼 것이냐 하는 논쟁이 발생했다.

후술하겠지만 태종 이후 제도를 정비하며 궁주 칭호는 사라졌고 왕의 적녀에겐 공주, 서녀에겐 옹주란 칭호를 붙였다.

또한 후궁은 엄연히 말하자면 어디까지나 내명부의 품계가 있는 왕의 신하이지만, 왕의 서자녀들은 아무리 말단 궁녀에서 태어났다고 하더라도 왕가의 혈통을 타고난 이상 품계를 초월한[22] 왕자군 혹은 옹주의 봉작을 받았고 왕에게서 태어난 모든 자녀들은 명목상 왕비의 양자녀로 간주되었다. 이 때문에 후궁은 자기 자신이 낳았다고 하더라도 자녀들에게 하대를 할 수 없었다. 일례로 효종의 후궁 안빈 이씨가 딸 숙녕옹주에게 '너'라고 했다가 효종이 죽이네 살리네 하는 걸 정비 인선왕후뜯어말려서 중재해서 겨우 넘어간 사례가 있다. 후궁이 되면 자신보다 한참이나 고령인 제조상궁을 휘하에 두는 반면 자신이 낳은 아이에게 존댓말을 써야 한다는, 굉장히 독특한 신분이 된다. 그러나 한중록에서는 영빈 이씨가 자신의 자식들과 며느리인 혜경궁 홍씨에게 반말을 하는 것으로 나온다. 효종 시대로부터 1세기나 지났으니 가풍이 바뀐 것일 수도 있다.

당호를 받은 후궁 중 마지막까지 생존한 사람은 고종의 후궁 삼축당(三祝堂) 김씨로, 1970년 9월 23일 80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3.1. 역대 후궁

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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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물론 삼국도 그 제도가 모두 달라서 고구려는 일부다처, 백제는 일본과 같은 일부일처다첩, 신라는 일부일처가 공식이었다. 고려는 기본적으로 일부일처 왕에 한해서 일부다처인데 고구려와 달리 서자를 왕자로 취급하지 않아 유럽의 그것과 유사한 양상을 띤다는 차이가 있다. [2] 고려사 열전에 따르면 중국에서 하동군부인으로 책봉을 받고, 시호로 신혜왕후를 받았다. [3] 왕건의 첫 혼례자인 신혜왕후를 제외하고는 나머지 왕후들은 아들이 왕이 된 경우( 장화왕후, 신명순성왕후), 왕의 장모이자 손자가 왕이 된 경우( 신정왕후 황보씨), 손자가 왕이 된 경우( 신성왕후), 외손자가 왕이 된 경우( 정덕왕후)들로 생몰연도가 불명확한 신혜왕후와 장화왕후를 제외하고는 사후에 왕후로 추봉되었거나, 추봉된 것으로 추정되는데, 그렇다면 생전에는 왕건의 여자들을 모두 부인이라고 하였을 가능성도 있다.소생이 없는 신혜왕후가 단지 첫째부인이라는 이유로 왕후가 된 것이 약간 약할 수 있는데, 정덕왕후와 본관이 같은 것으로봐서 연관성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소생이 장남이기에 왕후가 된 장화왕후 같은 경우에는 다른 여성들의 소생들이 중첩된 혼인관계를 형성하지 못하면서 별볼일이 없다. [4] 문화왕후의 사망년도는 기록에 없다. 일단 대비가 된 것은 1029년으로, 그 이후에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5] 주로 ○ 비라고 봉작을 내리다가 죽은 뒤 귀비, 덕비, 현비, 숙비 등으로 추증하였다. [6] 정화궁주 충선왕의 3비 정비(靜妃)는 본래 왕족 출신의 정비(正妃)였지만 밀려났고 왕후로 추존받지 못했다. 공민왕의 3비 익비는 왕족 출신이지만 '정비 사후 들인 새로운 정비'가 되지 못했다. [7] 고려사 현종 후비 열전 " 원성태후는 연경원주(延慶院主)라고 불리다가, 아들을 낳자 원(院)을 고쳐 궁(宮)으로 고쳤다.” [8] 고려사 현종 후비 열전 " 흥성궁주와 경흥원주는 두 분 다 선왕의 비이니.." [9] 고려 초기 왕자나 왕족이 이렇게 불린 경우가 있다. 문원대왕의 아들 천추전군(千秋殿君)이나 정종의 아들 흥화궁군(興化宮君)이 예이다. 오등작제가 시행되고 난 이후에도 낙랑궁, 부여궁, 진한궁 등 나라의 이름이나 지역의 옛지명 등을 붙인 별궁에 살았다. 이들의 봉호 역시 사는 궁궐에 따라 낙랑후, 부여후, 진한공 등이었다. [10] 흔히 고려의 족내혼은 초기의 경우가 널리 알려졌지만, 고려는 멸망 때까지 왕실의 전통을 지켰다. 특히 공주의 경우 더 엄격해서 족내혼을 하지 않은 경우가 손에 꼽힐 정도이다. [11] 수안택주(遂安宅主). # 선종(고려) 사숙태후의 딸이었으며 태어날 때부터 맹인이었다. [12] 고려의 적서 개념은 조선 시대와 많이 달랐다. 고려시대에는 장유유서 순으로 적서를 따졌다. [13] 대비를 추증 [14] 원 간섭기 이후 왕의 어머니 혹은 할머니. 왕대비는 왕태후의 격하된 버전이다. 국대비는 공양왕 이후 왕대비와 구분해 공양왕의 생모 복녕궁주를 국대비라고 불렀다. [15] 수춘옹주와 덕흥군의 차이점은 덕흥군의 어머니 출신을 짐작할 수 있다는 점이다. 수춘옹주의 어머니가 궁인인 것은 분명하지만 양인인지 천민인지 알 수 없다. [16] 조선에서는 설령 무수리의 몸에서 났다 해도 왕의 아들이라면 왕이 될 수 있었지만, 고려에서는 모계혈통 최소한 양인 이상으로 왕족, 귀족이어야 제대로 인정받았다. [17] 고려는 적서 차별의 개념이 달랐다. 먼저 태어나거나 먼저 들어온 부인 순으로 적서를 따졌다. 장남은 태자가 됐고, 대신 신분의 차별이 엄격해 천민 출신 소생은 정식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18] 단 광주원군을 보위로 올리려 했다는 부분은 진정성을 의심받고, 왕규 측이 패배자이기에 조작한 것이 아니냐는 의문을 많이 받는다. 정황상 왕식렴의 난이라고 봐야 한다는 말도 있고, 왕식렴에게 왕규, 박술희 등의 혜종파가 학살당하고 왕식렴의 거사의 명분을 위해서 왕규가 누명을 뒤집어쓴 것이라고 여겨지기도 한다. [19] '민회빈'은 봉호가 아니라 시호다. 봉호를 받기 전 폐위되었다가 후에 신원되어 시호를 받았다. [20] 이 당시 빈(嬪)이라 불린 건 후궁이라는 것을 의미할 뿐 후궁의 품계 중 하나인 '빈(嬪)'을 의미한 게 아니었다. 원씨만이 아니라 태조 이성계의 또 다른 후궁인 정경궁주도 정식 봉작되기 전엔 빈(嬪)이라고 불렸다. [21] 후궁 역시 비 칭호를 공유하는 것. [22] 무품 하계. 적출 대군ㆍ공주는 무품 상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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