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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03-16 00:37:11

숙의 홍씨(성종)


조선의 후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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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조선 성종의 후궁
숙의 홍씨 | 淑儀 洪氏
숙의 홍씨묘 위치
출생 1457년 8월 23일( 음력 7월 25일)
사망 1510년 10월 24일( 음력 9월 12일)
(향년 54세)
묘소 경기도 의정부시 녹양동 산 38-1
재위기간 조선 숙원
1490년 5월 25일 이전 ~ 미상
조선 숙용
1495년 1월 29일 이전 ~ 미상
조선 소용
1495년 이후 ~ 1506년 9월 28일
조선 숙용 (강등)
1504년 ~ 1506년 9월 28일
조선 숙의
1506년 9월 28일 ~ 1510년 10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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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9236A><colcolor=#ffd400> 본관 남양 홍씨
부모 부친 - 홍일동(洪逸童, ? ~ 1464)[1]
모친 - 측실 노씨
배우자 성종
자녀
슬하 7남 3녀 [ 펼치기 · 접기 ]
장녀 - 혜숙옹주(惠淑翁主, 1478 ~ ?)
장남 - 완원군(完原君, 1481 ~ 1509)
차남 - 회산군(檜山君, 1482 ~ 1512)
3남 - 견성군(甄城君, 1482 ~ 1507)
차녀 - 정순옹주(靜順翁主, 1486 ~ ?)
4남 - 익양군(益陽君, 1488 ~ 1552)
5남 - 경명군(景明君, 1489 ~ 1526)
6남 - 운천군(雲川君, 1491 ~ 1555)
7남 - 양원군(楊原君, 1492 ~ 1551)
3녀 - 정숙옹주(靜淑翁主, 1493 ~ 1573)
봉작 숙원(淑媛) → 숙용(淑容) → 소용(昭容) → 숙용(淑容) → 숙의(淑儀)
}}}}}}}}} ||
1. 개요2. 생애3. 여담4.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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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성종 후궁. 홍숙의(洪淑儀)는 중추부 동지사를 지낸 아버지 홍일동(洪逸童)과 문유질(文由質)의 딸인 어머니 남평 문씨(南平文氏)와의 사이에서 2남 3녀 중 3녀로 태어났다. 성종의 후궁으로 궁에 들어와 숙원(淑媛)에 봉해졌다가,(『성종실록(成宗實錄)』 14년 6월 12일),(『성종실록』 21년 4월 27일) 이후 숙용(淑容)으로 진봉되었다.[『성종실록』성종대왕 묘지문]

슬하에 완원군 이수, 회산군 이염, 견성군 이돈, 익양군 이회, 경명군 이침, 운천군 이인, 양원군 이희를 비롯하여 세 옹주를 낳아 7남 3녀를 두었다. 성종의 여러 후궁 중 가장 다산하여 훗날 자손이 번창하게 되었다.

2. 생애

숙의 홍씨가 궁궐에 들어간 계기는 두 가지로 전해지고 있다.
숙의 홍씨는 어릴 때 아버지를 따라 궁중에 들어와 잔치를 구경하였는데, 이때 자산군(성종)이 숙의의 관상을 보고 " 이 아이는 생김새가 보통 사람과 다르니 뒷날 필시 귀한 자식을 많이 낳으리라" 라고 하였다.

이어 다른 사람과 혼인을 금하도록 하였고, 더 성장하기를 기다렸다가 궁에 들라 명하였다. 이에 숙의 홍씨가 선뜻 응하지 않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자, 임금은 다시 입궐하라고 권하였다.
14세 되던 1470년(성종1년) 성종은 숙의에게 어의를 보내어 건강상태를 살펴보게 하였고, 또한 대궐에서 궁중의 법도와 왕실의 예절을 알고 익히도록 했다. 입궁한 지 2년이 지난 후, 성종은 숙의와 혼인하여 숙원(종4품)에 봉했다.(성종 왕자, 『선원속보 양원군 파보』)

다른 하나는 양반가 출신으로 궁인으로 입궁했다가 14세 때 성종의 후궁으로 간택되어 1481년(성종12년) 숙원(종4품)으로 봉해지고 숙용(종3품)과 소용(정3품)을 거쳐 중종 때 숙의(종2품)에 봉해졌다는 것이다. (대왕의 후예들-이웅구 저)

1490년(성종 21) 장녀 혜숙옹주가 혼인할 때, 혜숙옹주의 어머니인 홍씨는 양반 출신임에도 종4품 숙원[2]으로 후궁 중 가장 낮은 품계였다. 앞글은 잘 못 기술된 것으로 홍씨는 어머니가 측실이기 때문에 양반으로 볼 수 없다.[3] 이 당시 성종은 혜숙옹주의 시아버지가 될 신종호를 불러, "옹주가 귀하게 자라서 시부모에 대한 예를 모르겠지만, (옹주에 대한) 예의를 지키며 예의를 가르쳐달라"고 말하였다.[4]

성종이 사망할 당시, 종3품 숙용으로 있었고 연산군 때는 정3품 소용으로 진급되어 있었는데, 아들 완원군 갑자사화 연루되는 바람에 규례대로 직첩을 빼앗기고 폐출당할 뻔 하였다. 그러나 숙용으로 강등되는 정도로 멈췄으며, 나중에 중종반정이 일어나 다시 후궁의 예우를 받아 종2품 숙의가 되었고 자수궁에서 살게 되었다.[5]

3. 여담

4. 가족 관계


[1] 홍길동의 이복 형. [2] 숙원의 작위를 받는 자들은 대개 궁녀 출신이었다. 이 사실로 볼때 양반이지만 한미한 집안으로 궁녀 출신으로 보인다 [3] 성종실록 239권, 성종 21년 4월 27일 기유 2번째기사. # [4] 실상 이는 "내가 딸자식 귀하게 키웠으니 버릇없다고 잔소리하지 말고 잘 달래가며 가르쳐라" 하는 반 협박이다. 중종 역시 효혜공주의 시아버지 감안로에게 비슷한 협박을 한 적이 있다 [5] 중종실록 1권, 중종 1년 9월 2일 무인 5번째기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