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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24 15:11:27

소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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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고려의 왕실 용어

1. 개요

소군(小君)은 역사적 용어로 두 가지 뜻이 있다. 하나는 ' 제후 아내', 다른 하나는 ' 고려시대에 왕후 이외의 몸에서 태어나 승려가 된 왕자를 이르던 말'이다. 전자는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고 후자는 남성을 가리키는 말이니 지칭하는 대상이 완전히 다르다.

2. 고려의 왕실 용어

한국민족문화대백과의 '소군' 항목

고려왕조에서는 왕 또는 왕족과 정식으로 혼인관계에 있는 후궁· 첩(妾)이 아닌, 궁녀 천민 출신인 폐첩(嬖妾)[1]의 자녀라면 모두 사생아로 취급하여 왕족 신분으로 인정하지 않았다.[2] 남성 사생아는 승려로 출가(出家)시키고 머무는 사찰의 이름을 따와 '○○소군(小君)'으로 호칭했고, 여성 사생아는 장애가 있어 공주로 책봉되지 못하는 왕녀의 예에 따라 궁궐 밖의 집을 주어 그 집의 이름을 따온 '○○택주(宅主)'로 불렀다. 이때 쓰이는 소군과 택주는 작위가 아닌 칭호다.

고려 전기에는 혼인 관계에서 출생한 왕자를 칭할 때 종종 대군이라는 용어를 사용했는데, 이에 대조하여 사생아는 소군이라 칭한 것으로 추정된다.

소군 중 가장 유명한 인물로 훗날 현종이 된 신혈소군[3]이 있다. 현종은 안종 헌정왕후 사이의 간통으로 인해 태어난 사생아였다는 점이나, 승려로 출가해 소군이라고 불렸던 점에서 《 고려사》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소군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현종은 어머니가 궁인이나 폐첩이 아니라 태조의 손녀이며, 경종의 계후였던 헌정왕후였다는 점에서 신분의 기반은 사실 매우 탄탄하여 다른 소군들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다. 때문에 예외적으로 왕족 신분이 유지되었고, 혈통 자체에 문제를 제기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으며, 광종의 직계 후손이 단절되는 상황까지 겹쳐 왕으로 즉위할 수 있었다[4].

왕의 사생아만 소군으로 불렸던 것은 아니고, 다른 왕족의 사생아 또한 출가하여 소군으로 불렸다. 이들은 왕의 친아들이라도 왕족 신분이 아니었으며, 이에 따라 작위를 받을 수도 없었다. 또한 정식 왕족이 출가하면 받는 ' 국사(國師)' 또는 ' 왕사(王師)' 칭호도 주어지지 않아서, 소군이 받을 수 있는 최고의 칭호는 삼중대사(三重大師)였다.

조선에서는 궁녀나 비자(婢子)가 왕 또는 세자의 자녀를 낳으면 천민 출신이라도 후궁으로 승격되어 신분을 보장받게 되었고, 그 소생 또한 사생아로 취급되지 않아서 서자녀로 대우받았으며, 종친의 서얼도 일단은 왕족으로 대우했던 것과 대비되는데, 이는 고려와 조선의 상속 제도가 달랐기 때문이다. 성리학적 종법 질서가 확립된 조선에서는 정실 장자 상속이 확고한 원칙이므로, 서얼을 차별하더라도 굳이 배척할 필요까지는 없었다. 하지만 고려에서는 딸의 상속도 인정되어 형제자매의 균등 상속이 일반적이었고, 왕위 또한 형제 승계가 가능했기에, 정식 혼인관계 외의 자녀는 철저히 배제하기 위해 사생아로 취급한 것이다.[5]

비록 소군들의 공식적인 신분은 왕족이 아니었으나, 당연하게도 권력과 완전히 단절된 삶을 살았던 것은 아니었다. 일례로 무신정권 초기 집권자가 자주 교체되는 기간 동안에 재위한 명종은 소군들을 궁궐로 불러와서 측근으로 두었고, 태자는 자기 소생의 사생아들을 출가시키면서 명종 측근 소군들의 제자로 삼았다고 한다. 정황상 왕실에서 혈연에 기반한 친위세력을 구성하려 했던 시도로 보이는데, 결국 최충헌 일당은 이를 빌미로 명종과 태자를 폐위했다.

참고로 사생아를 출가시켜 후계 구도에서 배제하는 것은 당시 고려 지배층의 보편적인 관행이기도 했는데, 대표적으로 최우와 천민 출신 창기의 소생인 최항은 최우의 후계구도에서 배제되는 것을 목적으로 어렸을 때부터 친형 만종과 송광사로 출가당해 강제로 승려 생활을 했다. 물론 이렇게 사생아로 취급되어 출가당한 이들은 비록 승려가 되었어도 그들의 출생과정 자체가 세속성을 내포한 것이라, 정상적인 수행 생활을 하지 않고 생부의 배경을 믿고 온갖 행패를 부려 악명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6]. 다만, 불교 국교였던 고려에서 종교 권위를 왕실에서 장악하기 위한 목적도 있었기에, 이런 폐단에도 불구하고 소군들을 지속적으로 승려로 출가시킨 것이다. 그래서 이 때문에 종종 사생아도 아닌 정상적인 혈통을 가진 왕자가 출가해서 승려가 되는 경우도 꽤 있었는데, 대표적으로 천태종을 창시한 의천의 사례가 있다[7].


[1] 혼인관계에 있는 첩이 아니라 오늘날 정부(情婦)라는 의미에 가깝다. [2] 특히 천민 출신 폐첩 소생이면, 당시의 신분 제도인 종모법(從母法)에 따라 태생적으론 아예 천민 신분이다. [3] 신혈사에 있는 소군이란 뜻 [4] 애초에 현종 근친혼으로 태어난 아이였다는 것 하나만으로 사생아 취급받은 건 아니다. 본래 고려는 근친혼이 흔해서 이복남매 간의 혼인(...)도 이루어진 사회인데, 안종 헌정왕후는 5촌지간이라서 당시 기준으로는 양반인 수준이라 이 자체는 별 문제가 없었다. 진짜 문제는 둘의 사이가 공인된 관계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고려 신라, 고대 이집트같이 근친혼이 용인된 나라들은 왕가 이외의 다른 가문에게 왕위 계승권을 넘겨주지 않으려는 정치적인 목적으로 그런 결혼을 한 것이었다. 그래서 이들 나라의 근친혼은 철저하게 정략결혼으로 치러졌는데, 혼약도 없이 서로 사통하여 현종을 낳은 게 문제가 된 것이다. 근친혼을 엄금하는 분위기라서 반드시 족외혼으로 결혼을 하는 현대에도, 아무리 혈연관계가 없다고 한들 정식으로 결혼한 것이 아닌 내연관계의 사람과의 사이에서 아이를 낳으면 불륜으로 간주되어 지탄을 받는 것과 같다. [5] 고려와 조선 왕실제도의 이러한 차이점을 잘 이해하면, 공민왕이 죽은 뒤에 명덕태후가 왜 친손자인 모니노의 즉위를 반대하려 했는지 알 수 있다. 왕실 예법상 모니노는 사생아로 취급되어야 했으나, 공민왕은 모니노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왕실 예법을 무너뜨려 모니노의 어머니인 궁인 한씨를 후궁으로 들였고, 한씨의 3대조를 부원군으로 봉작해 신분을 사대부로 세탁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전반적인 왕실의 여론은 모니노의 신분을 탐탁하게 여기지 않았던 것이다. 왕실의 이런 반응 덕택에 후일 신진사대부들은 모니노가 신돈 반야의 자식이라는 이른바 '폐가입진' 여론 공작을 수월하게 펼칠 수 있었다. [6] 비슷하게 가톨릭이 국교였던 중세 유럽 국가들은 사생아나 차남 이하의 아들들을 수도원으로 보내어서 수사 신부로 출가시키는 관행이 있었다. 이렇게 강제로 출가하게된 왕족이나 귀족의 자제들은 공식적으로는 세속에 관심을 끊고 교직에만 매달려 살아야했으나, 실제로는 가문의 후광을 등에 업고 교황 측과 연줄을 만들어서 수도원장직이나 주교, 추기경 직을 따낸 뒤에 실질적인 영주로 행세해서 유럽의 정세에 개입하는 일이 잦았다. 당연히도 이런 귀족 출신의 성직자들은 세속의 욕망을 잊지 못해서 공공연히 정부를 두거나, 매관매직을 통한 부정축재에 열을 올리는 추태를 일삼는 통에, 중세 시대 내내 교황청 측이 이를 시정하기 위한 끊임없는 노력을 쏟아부어야 했다. [7] 의천 본인은 문종의 4남으로 제12대 순종, 제13대 선종, 제15대 숙종의 동생이며, 모후는 문종의 제2비인 인예왕후였다. 왕의 정실부인의 소생으로서 흠잡을데 없는 혈통을 가졌으나, 단지 형들이 너무 많아서 본인에게는 왕위가 돌아갈 여지가 희박했고, 마침 부왕 문종이 왕족 출신 승려를 통해 고려 불교계를 장악하려는 야심도 있던지라, 11살의 어린 나이에 출가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