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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 포르투갈-중국 관계, 중국-포르투갈 공동선언, 마카오 반환, 상임이사국 | |
<nopad> 사건사고 | 중국의 국외 불법 경찰조직 운영 | |
역사 | 포르모자 | |
외교 | 포르투갈-마카오 관계 | |
역사 | 포르투갈령 마카오 | |
문화 | 마카오/문화( 마카오 요리) | |
민족 | 마카오인 | |
기타 | ||
포르투갈/외교, 중국/외교( 마카오/대외관계), 중화민족( 중화사상), 중국/경제( 마카오/경제), 포르투갈/경제 | }}}}}}}}} |
포르투갈 | 중국 |
1. 개요
포르투갈과 중국의 관계. 중국과 포르투갈은 역사적으로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중국은 마카오를 통해 포르투갈을 포함한 포르투갈어권 국가들과 교류가 많은 편이다.2. 역사적 관계
2.1. 20세기 이전
대항해시대부터 포르투갈인들은 아프리카 해안 지역을 거쳐 아시아 지역에 식민 요새들을 하나씩 건설하며 중국까지 도착했다. 중국 남부 해안 지대에 온 포르투갈인들은 명나라 관리들을 매수하여 마카오에 무역 기지를 건설했다. 이렇게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조차지가 되었다.[1]전근대 중국에서는 포르투갈을 佛郞機(한국식 독음으로는 불랑기)라고 불렀다. 이는 원래 아랍어권/페르시아어권에서 유럽인 가톨릭교도들을 각각 파란지(فرنجی)/파랑기(فرنگی)라고 부른 것에서 기원한 표현이다. 원래 아랍권에서 11~12세기 십자군들을 (중세 초 유럽에 있던) 프랑크 왕국 사람이라는 뜻으로 사용하던 말인데, 어느덧 해당 용어가 이슬람권에서 유럽계 가톨릭 기독교인 전반을 (안 좋은 쪽으로) 지칭하는 말이 되었다. 16세기 본격적으로 포르투갈인들이 인도양 연안에 나타나자 동아프리카에서 남아시아 그리고 동남아에 이르는 무슬림 상인들은 이들을 야만스러운 광신도 이방인이라는 멸칭으로 혹은 프랑크인들의 한 갈래라고 생각해서 파란지 혹은 파랑기라고 불렀다. 해당 용어가 포르투갈인들과 중국인들을 서로 통역해주던 동남아 출신 통역을 통해 중국으로 전해진 것.
불랑기(佛郞機)는
말라카에 가깝다.
정덕제 연간(1506~1521)에 말라카의 영토를 점거하고 그 나라 왕을 쫓아냈다. [정덕] 13년(1518)에, [불랑기는] 사신을 보내 방물을 바치고 책봉을 청하여서, 처음으로 그 나라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조서를 내려 방물의 가치만큼 주어 돌려보내도록 했다. [그런데] 그 사람들은 오래 머물며 떠나지 않고 길가는 사람들을 협박하고 어린 아이를 빼앗아 먹이로 삼기에 이르렀다. 얼마 안 되어 진수환관(鎭守宦官)에게 뇌물을 주고 입경을 허락받았다. 그 나라 사신은 회원역(懷遠驛)에 머물면서 더욱 노략질을 일삼고 양민을 사들이며, 집을 짓고 요새를 세워 오랫동안 거주하고자 했다.
번역출처 그 나라 장수 페드루(別都盧)는 이미 거포와 예리한 병기로 말라카 등 여러 나라를 멋대로 탈취하여 해상을 횡행하였고, 또 그 부하 시세이루(疏世利) 등에게 5척의 배를 이끌고 가도록 하여 파서국(巴西國)을 격파했다.
#
불랑기포의 도입
가정 9년(1530) 가을에 왕굉이 아뢰기를, “지금 새(塞) 위에 돈대(墩台)와 성보(城堡)가 비록 설치되었다고는 하나 곧 외적이 침범해 오면 쉽게 유린되오며, 대체로 돈대는 요망대(暸望臺)에 불과하고 성보는 또 먼 곳을 공제(控制)할 기구가 없어서 왕왕 곤란을 받습니다. 응당 신이 바친 불랑기를 이용하시옵고, 그 작은 것은 겨우 20근(斤)에 미치지 않은 것으로 멀리 600보(步)를 공제할 수 있으니, 이를 돈대에 이용하면 됩니다. 매 돈(墩)마다 한 문을 이용하고 3명이 이를 지키면 됩니다. 그 큰 것은 70근이 넘으며 멀리 5~6리를 공제할 수 있음으로 성보에 이를 이용하면 됩니다. 매 보(堡)마다 3문을 이용하고 10명이 이를 지키면 됩니다. 5리에 하나의 돈대가 있고 10리에 하나의 성보가 있으니, 크고 작은 포가 서로 의지하여 멀고 가까움에 서로 대응할 수 있음으로, 앞으로 외적이 쉽게 침범할 수 있는 곳이 없고, 앉아서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황제는 기뻐하며, 곧 이를 따랐다. 화포(火砲)인 불랑기가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 비롯한다. 그러나 장졸(將卒)들이 잘 사용하지 못하여 결국 외적을 제어할 수 없었다. #
마카오의 건설
해금(海禁)은 다시 완화되자, 불랑기는 이윽고 거리낌 없이 해상을 마음대로 누볐다. 그리고 향산오와 호경(壕鏡)에서 거래를 하는 자들은 집을 짓고 성(城)을 쌓기에 이르렀는데, 그 웅장함이 해변에 걸쳐 자리잡고 있어 마치 하나의 나라와 같고, 또 미련한 서리(胥吏)들은 오히려 이를 지방의 관부(官府)로 여겼다. 호경은 향산현(香山縣) 남쪽 호도문(虎跳門) 밖에 있다. 이전에 섬라·점성·조와· 유구·발니 등 여러 나라들의 무역은 모두 광주에서 행했는데, 시박사를 설치하여 이를 통령(統領)했다. 정덕 연간(1506~1521)에는, 고주(高州) 의 전백현(電白縣)으로 [시박사를] 옮겼다. 가정 14년(1535)에, 지휘 황경(黃慶)이 뇌물을 받고 상관에게 청하여 이(시박사)를 호경으로 옮기고 매년 2만 금(金)을 부세(賦稅)로 받았는데, [이로써] 불랑기는 마침내 이곳에 혼입(混入)해 들어올 수 있었다. [호경은] 높은 처마와 기와집이 즐비하게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민(閩)과 월(粤)의 상인들은 마치 집오리처럼 이곳을 향해 재촉해 갔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그 나라(불랑기)에서 오는 자는 더욱 많아졌다. 여러 나라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이들을 피하고, 오로지 이들만이 웅거(雄據)하는 곳으로 되어버렸다. [가정] 44년(1565)에 말라카라고 거짓으로 칭해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이후 포르투갈(蒲都麗家)로 개칭하였다. 수신이 조정에 보고하니 예부에 내려 논의하도록 하였는데, 필시 불랑기가 남의 이름을 모칭(冒稱)한 것이라고 말하자, 이에 이를 거절하였다. #
명사 외국열전 불랑기편
불랑기포의 도입
가정 9년(1530) 가을에 왕굉이 아뢰기를, “지금 새(塞) 위에 돈대(墩台)와 성보(城堡)가 비록 설치되었다고는 하나 곧 외적이 침범해 오면 쉽게 유린되오며, 대체로 돈대는 요망대(暸望臺)에 불과하고 성보는 또 먼 곳을 공제(控制)할 기구가 없어서 왕왕 곤란을 받습니다. 응당 신이 바친 불랑기를 이용하시옵고, 그 작은 것은 겨우 20근(斤)에 미치지 않은 것으로 멀리 600보(步)를 공제할 수 있으니, 이를 돈대에 이용하면 됩니다. 매 돈(墩)마다 한 문을 이용하고 3명이 이를 지키면 됩니다. 그 큰 것은 70근이 넘으며 멀리 5~6리를 공제할 수 있음으로 성보에 이를 이용하면 됩니다. 매 보(堡)마다 3문을 이용하고 10명이 이를 지키면 됩니다. 5리에 하나의 돈대가 있고 10리에 하나의 성보가 있으니, 크고 작은 포가 서로 의지하여 멀고 가까움에 서로 대응할 수 있음으로, 앞으로 외적이 쉽게 침범할 수 있는 곳이 없고, 앉아서 싸우지 않고 이길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황제는 기뻐하며, 곧 이를 따랐다. 화포(火砲)인 불랑기가 있게 된 것은 이때부터 비롯한다. 그러나 장졸(將卒)들이 잘 사용하지 못하여 결국 외적을 제어할 수 없었다. #
마카오의 건설
해금(海禁)은 다시 완화되자, 불랑기는 이윽고 거리낌 없이 해상을 마음대로 누볐다. 그리고 향산오와 호경(壕鏡)에서 거래를 하는 자들은 집을 짓고 성(城)을 쌓기에 이르렀는데, 그 웅장함이 해변에 걸쳐 자리잡고 있어 마치 하나의 나라와 같고, 또 미련한 서리(胥吏)들은 오히려 이를 지방의 관부(官府)로 여겼다. 호경은 향산현(香山縣) 남쪽 호도문(虎跳門) 밖에 있다. 이전에 섬라·점성·조와· 유구·발니 등 여러 나라들의 무역은 모두 광주에서 행했는데, 시박사를 설치하여 이를 통령(統領)했다. 정덕 연간(1506~1521)에는, 고주(高州) 의 전백현(電白縣)으로 [시박사를] 옮겼다. 가정 14년(1535)에, 지휘 황경(黃慶)이 뇌물을 받고 상관에게 청하여 이(시박사)를 호경으로 옮기고 매년 2만 금(金)을 부세(賦稅)로 받았는데, [이로써] 불랑기는 마침내 이곳에 혼입(混入)해 들어올 수 있었다. [호경은] 높은 처마와 기와집이 즐비하게 마주 보고 서 있는데, 민(閩)과 월(粤)의 상인들은 마치 집오리처럼 이곳을 향해 재촉해 갔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그 나라(불랑기)에서 오는 자는 더욱 많아졌다. 여러 나라 사람들은 두려워하여 이들을 피하고, 오로지 이들만이 웅거(雄據)하는 곳으로 되어버렸다. [가정] 44년(1565)에 말라카라고 거짓으로 칭해 입조하여 공물을 바쳤다. 이후 포르투갈(蒲都麗家)로 개칭하였다. 수신이 조정에 보고하니 예부에 내려 논의하도록 하였는데, 필시 불랑기가 남의 이름을 모칭(冒稱)한 것이라고 말하자, 이에 이를 거절하였다. #
명사 외국열전 불랑기편
포르투갈은 중국과의 교역이 활발하면서 포르투갈의 음식, 대포 등이 중국에도 전해지게 되었고 중국의 차도 포르투갈에 전해졌다.
중국에서 종종 간과되곤 하는 사실이지만 마카오는 1844년까지 인도 고아 총독부 예하 하위 행정구역에 속해 있었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포르투갈은 브라질의 독립을 계기로 국력이 크게 쇠퇴하는 동안에도 포르투갈령 마카오를 유지했다. 포르투갈령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직할 영토였고 포르투갈의 지배는 1999년까지 이어졌다.
2.2. 20세기
1949년에 국공내전에서 중국공산당이 승리해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된 뒤에 중국은 포르투갈령 마카오에도 영향을 주게 되었다. 중국은 마카오에 압력을 주고 있었지만, 영국과 달리 포르투갈은 영향력이 많이 줄게 되면서 마카오도 중국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1999년에 마카오도 중국에 반환되었다.2.3. 21세기
중국은 21세기 이후, 마카오를 통해 포르투갈을 포함한 포르투갈어권과 교류가 많은 편이다. 포르투갈도 마카오를 통해서 교류가 많이 있다. 마카오내에는 포르투갈의 영향으로 포르투갈어와 포르투갈어 크레올인 마카오어가 사용되고 있는데, 마카오인들은 포르투갈인들과 중국인의 혼혈이다. 또한, 중국은 포르투갈의 영향을 받아 유럽식 포르투갈어를 가르치고 있지만, 브라질과의 관계강화를 위해 브라질식 포르투갈어도 가르치는 추세이다. 또한, 포르투갈 정부가 주관하는 시험인 CAPLE가 실시되고 있다. 포르투갈어 사용국 공동체의 경우, 마카오는 비공식 회원국으로 취급되고 있다. 포르투갈의 경제가 어려워지면서 마카오로 이주하는 포르투갈인들도 존재한다.중국과 포르투갈은 아소르스 제도에 중국의 과학탐사용 기지를 개방하기로 결정하는 등 현재 가까워지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하긴 미국과 대립하고 있으니까 그럴 수밖에.[2]
2012년부터 포르투갈은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황금비자를 발급중이고 중국, 러시아, 브라질, 앙골라 출신들이 받았다. #
포르투갈의 산토스 실바 외무장관은 2019년 12월 5일에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공동 기자회견에서 미국의 화웨이 배제 요구를 거부했다. #
포르투갈과 싱가포르가 중국인들의 부동산 투자 대체지로 부상하고 있다. #[3]
포르투갈은 2018년에 일대일로에 참가한 이후, 중국과의 경제적인 협력을 하고 있다. #
2023년 1월 7일, 포르투갈 정부는 중국인 입국자에 대한 코로나19 검사를 실시하기로 했다. #
3. 문화 교류
상술했다시피 중국과 포르투갈은 마카오를 통해 교류가 활발한 편이다. 중국에서 가르치는 포르투갈어는 브라질과의 관계강화로 브라질식 포르투갈어이지만, 마카오의 영향으로 유럽식도 가르치고 있다.4. 교통 교류
포르투갈과 중국은 마카오를 통해 항공노선으로 교류하고 있다.5. 관련 문서
- 포르투갈/외교
- 중국/외교
- 포르투갈/역사
- 중국/역사
- 포르투갈/경제
- 중국/경제
- 포르투갈/문화
- 중국/문화
- 포르투갈인 / 중국인
- 포르투갈어 / 중국어
- 대국관계일람/아시아 국가/동아시아 국가
- 대국관계일람/유럽 국가/남유럽 국가
[1]
마카오는 포르투갈의 영향으로 포르투갈의 문화와 가톨릭, 포르투갈어가 남게 되었다.
[2]
하지만 이에 대해서
미국은 우려를 표명했다.
[3]
그러나 싱가포르의 경우 국토의 대부분이 싱가포르 정부의 소유이므로 중국인들이 미치는 영향은 적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