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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론
과거 급제자 출신의 정치 10단 군주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3권 후기
태종은 역사적으로도 드물지만 조선의 역대 군주들 중에서 유일하게 과거에 급제하여 관료로서 실무를 해본 사람이다. 요즘에 비유하자면 행시 출신으로 공무원 생활을 좀 해 본 사람이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3권 후기
무엇보다 태종은 사람을 다루는 '용인술(用人術)'에 도가 텄고 조선 건국 이전부터 산전수전 다 겪으면서 왕위에 올랐던만큼 신하들을 가지고 노는 것을 즐겼던 듯하다. 그 예시로 종종 깜짝 양위 쇼를 벌인 것이 있다. 이것은 조선 시대에 국왕이 손쉽게 일으킬 수 있는 왕권 강화 이벤트가 양위 소동이었다. 이 경우 세자부터 신하들까지 전부 '죽여주시옵소서 전하' 모드가 되기 때문에 왕권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게 된다.[2]
문제는 이를 남발할 경우 반대로 세자의 지지 기반이 약해진다는 것으로,[3] 이런 점에서 최악의 본보기가 양위 소동을 자주 왕권 강화의 수단으로 사용하였던 선조(당시 세자 광해군), 영조(당시 세자 사도세자)이다. 이런 정치적 이벤트는 왕권 강화의 일환이자 신하들의 충성도 테스트였을 확률이 높지만, 이런 방식으로 허구한 날 대전 밖에서 "양위는 아니 되옵니다!"나 "역적 누구 누구를 벌하소서!"를 외치는 신하들을 보며 나름의 희열도 느꼈던 듯 하다. 물론 신하들은 대단히 피곤했을 것이다. 다만 충녕대군(훗날 세종)이 후계자로 확정된 후엔 진짜로 양위를 했다.[4]
신하들의 머리 꼭대기에서 놀며 각종 권모술수로 신하들을 쥐락펴락하는 능력은 단연 조선의 역대 임금들 가운데 최강. 후계자인 세종대왕이 방대한 지식과 철저한 논파를 통해 신하들을 정면에서 승복시키고 업무(공무)량을 늘려서(...) 괴롭혔다면, 태종은 순수 정치테크닉을 구사하는 경향이었다. 워낙 삶이 다사다난했고 문무를 겸비했으며 여색까지 밝히는 태종은 신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손바닥 위에 올려놓고 예측할 수 있었으며, 어떤 빌미든 걸어다가 철저하게 괴롭히는 주도면밀함도 있었다. 물론 태종도 신하들을 지식으로 능가하는 분야가 분명 있었고[5] 세종도 훈민정음 반포 당시 태종 뺨치게 권위적인 어법으로 신하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하옥해 버렸지만 평상시의 스타일은 정 반대였던 것.
또한 외척 및 공신들의 숙청을 진행할 때의 연기력도 매우 탁월했다. 태종이 숙청을 진행할 때의 패턴이 따로 있을 지경. 그리고 이 패턴은 후대의 '조선 국왕들이 두고두고 써먹는 신하 길들이기의 방법' 중 하나가 된다.
- 태종 본인이 정보를 흘리거나, 최측근을 통해서 숙청 대상을 처벌할 만한 꼬투리들을 일반 신하들에게 흘려낸다. 신하들이 이 정보를 입수하고 '○○란 자에게 죄가 있으니 마땅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 태종은 해당 인사에 대한 정보를 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놀라는 척 한다. '왕실의 외척', 혹은 '공이 큰 공신이므로 함부로 처벌할 수 없다'라며 처벌에 반대하는 척 한다. 그러면서도 처벌을 반대하는 것은 자신의 본심이 아님을 은근슬쩍 암시한다.
- 신하들은 여기에 낚여서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더 강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태종은 '신하들의 요구가 워낙 강하므로 어쩔 수 없이' 처벌을 한다. 단, '그래도 외척인데/공을 세운 공신인데 더 심한 처벌을 어찌 내리란 말인가?'라고 연기하며 처음엔 가벼운 처벌을 내리도록 한다. 그 와중에도 추가 정보를 흘려내서 신하들이 더 강한 처벌을 내리도록 유도한다.
- 신하들은 또 여기에 낚여서 더 강한 처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태종은 단계적으로 조금씩 처벌의 강도를 높여나가지 한번에 처벌을 완료하지 않는다.
- 태종 자신이 원하는 수준으로 처벌의 강도가 정해질 때까지 이 과정을 반복한다. 이를 통해 '나는 외척과 공신들을 소중하게 대하고 싶지만 신하들의 주장 또한 따라야 하고 법도를 지켜야 하므로 내 본심은 아니나 어쩔 수 없이 처벌을 내림'이라는 명분을 확보한다.
2. 심술쟁이 군주
앞서 언급했듯이 태종 이방원 하면 현대에는 무인의 이미지를 주로 떠올리지만, 사실 그는 성리학이 흥하던 고려 말기 과거 급제자 출신, 즉 엘리트 문과생에 해당하는 인물이다. 즉 성리학에 대한 태종의 수양은 적어도 조선 초 그 자신이 거느린 신료들과 대등한 선상에 있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학문적 기반과 말꼬리 잡아 물고 늘어지는 치사한 수법, 게다가 여말 시절 관직 생활을 하면서 얻은 경험으로 정계의 여러가지 역학 관계를 모조리 꿰뚫어 보는 능력도 상당했다.단순히 관직 생활만 한 것이 아니라, 정도전과 함께 아버지 이성계의 정적들을 견제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다. 또한 그 스스로도 대권을 잡기 위해 숱한 피의 숙청과 왕자의 난을 겪으며 단련된(?) 사람이니, 권력관계나 정치에서 보이는 암투에 대해서는 도가 텄다고 볼 수 있다. 거기에다 왕이라는 권위와 위상까지 더해지면 신하들은 도저히 버틸 수가 없다. 신하들을 갖고 노는 일화는 실록에도 많이 실려 있는데, 몇 가지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 별궁을 짓는 것을 신하들이 반대하자 '아니 그러면 지금 집도 절도 없는데 나더러 길바닥에서 이슬을 맞으면서 잠을 청하란 것이냐?'라고 버럭 화를 냈다. 그런데 신하들이 무서워서 우리 전하께서 성군이 되긴 글렀다며 통곡을 하자 '그냥 화 좀 내 봤다.'라며 넘어간 적도 있다. 참고로 별궁은 결국 자신이 짓고 싶었던 대로 지었다(...).
-
창덕궁에 새로운 정자를 지어 놓고 당시 도승지였던
황희를 통해 신하들에게 새로 지은 정자의 이름에 대해
권근하고 의논했는데, 권근은 '청녕'이란 이름을 올렸다. 그런데 태종은 "난 이거보다는 '해온'이라는 이름이 더 마음에 든다. 그대들의 생각은 어떠한가?"라고 다른 신하들에게 묻자 그들은 "아이고 최고의 이름입니다
전하"로 일관했다. 그러자 태종 가라사대, "임금이 뭔 말만 하면 신하들은 아부하기만 바쁘구나. 하여간 비위 맞춰주는데는 도들이 텄어. 쯧쯧. 권근이랑 다시 의논해서 결정하라."라고 받아쳤다. 결국 권근도 여기에 동의해서 정자 이름은 자기 뜻대로 해온이라고 지었다.
어느 장단에 맞추라는 건지...이 이야기의 출처는 태종실록 1406년 4월 9일자 기록. 기사
- 박자청이라는 신하는 대형 공사의 책임을 자주 맡아 태종의 신임을 받았는데, 어느 날 일꾼들과 현장에 앉아 있다가 자기보다 직급이 낮은 이중위가 자기 앞을 말을 타고 지나가자 건방지다며 그를 붙잡아 폭행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이중위는 형조에 고발하여 형조에서는 박자청을 벌할 것을 청했다. 박자청은 태종에게 폭행 사실을 부인했고 태종도 박자청을 신임했기에 벌을 주고 싶지 않았는지 "박자청은 과인에게 폭행한 사실이 없다고 맹세까지 했다"라고 말했다. 그런데 신하들이 "이중위도 맞은 게 분명하다고 맹세했습니다?"라고 말하자 태종 왈, "이래서 맹세는 믿을 수 없어. 이런 사소한 일에 일일이 죄를 주면 백성들이 안심하겠는가? 사직과 관련된 게 아니면 용서해야 하노라!" 참고로 사헌부에서도 박자청을 죄줄 걸 청했지만 박자청에게 벌을 내렸다는 기록은 없다. 결국 어물쩡 넘어간 모양. 근데 이것은 엄밀히 말해서, 일이 좀 커지면 이 박자청이란 사람은 임금에게, 그것도 태종 이방원에게 거짓말을 한 기군망상죄 혐의를 받을 수도 있는 일이다. 왕권에 위협이 가지 않는 인물이다 싶으면 어지간한 것은 그냥 넘겼던 태종다운 일화.
-
상왕이 된 후
형이랑
강원도 평강에 놀러갈 계획을 세우고 영의정 유정현, 좌의정 박은 등을 불러 "내가 평강에 놀러갔다 오고 싶은데 수행원을 조금만 데려갈 건데 괜찮겠지?"라고 묻자 유정현은 "지금 한창 농사철인데 수행원이 적어도 임금이 두 분이나 가시면 곤란할 듯 합니다."이라며 반대의 뜻을 밝혔고 박은은 가도 좋다고 말했다. 태종은 바로 다음과 같이 말해서 박은을 무안하게 만들었다고 한다.
"영의정의 말은 내가 새겨 듣겠다. 그런데 좌의정의 말인들 어찌 망령된 신하라고 하겠는가''[6]
박은은 태종의 의중을 잘 읽어서 태종의 비위 맞추기 선수였다. 태종도 박은에게 힘을 실어 줘서 박은의 라이벌 격인 세종의 장인 심온 집안을 박살냈지만, 그의 아부 또한 돌려서 꼬집은 것. 세종 역시 박은을 두고 "아부밖에 모르는 신하"라고 힐난했다. 다만 그 덕분에 박살나지 않을 수 있었다고 볼 수도 있는데 너무 유능했어도 숙청의 칼날을 피하기 어려웠을 테니까 말이다.
-
역시 상왕이 된 후에 태종이 거처할 궁궐의 이름을 신하들이
수강궁(壽康宮)이라고 지어 올렸다. 목숨 수(壽)에 편안할 강(康)[7]을 쓴 좋은 의미의 궁궐 이름이었는데 이 궁 이름을 듣고 박은 등을 불러서 "수강궁이라면 옛날
남송
광종이 광증에 걸려 폐위당한 후 감금된 궁의 이름이다. 그런 이름을 왜 이 궁에 붙이는 건가? 이것은 <송감>[8]이라는 역사책에 나오는 얘기다"라고 면박을 주었다. 신하들이 당황하며 궁 이름을 다시 지어 올리겠다고 용서를 빌자 태종은 쿨하게 넘어 갔다.[9] 아버지에게도 공부 안 한다고 면박받고
그 아들에게도 공부 안 한다고 면박받은 조선 초기 신료들이 이쯤 되면 불쌍할 지경.
단종이 10년 일찍 태어나서 할아버지에게 조기교육을 받고 20대에 왕위에 올랐다면?아 사직 마렵네
- 목인해라는 인물이 공신의 자손이자 왕실 인척이었던 조대림이 역모를 꾀하려 한다고 무고한 사건이 있었다. 조대림은 개국 공신 조준의 아들이자 태종의 사위. 그는 당시 종친 중에서 유일하게 군부에 있었던 인물이었다. 이는 태종이 군대를 장악하기 위해 일부러 조대림을 군부에 넣어두었기 때문이다. 태종은 목인해의 고변 이전에 정보망으로 이미 무고 사건이라는 걸 알았는데, 그걸 뻔히 알면서 내버려 두었다가 역모 고변이 일어나는 시점에 조대림을 본인이 역모로 몰아 구금시킨 다음 맹사성 등에게 암묵적으로 지시를 내려서 조대림에게 곤장을 때리게 했다. 그 다음에 조대림이 무고하다는 걸 본인이 직접 밝힌 다음에 맹사성을 종친을 모함해 왕실을 능멸했다는 이유로 재빨리 가두고 사형선고까지 내렸다. 결국 두고 볼 수 없었던 조정 중신들의 사정 끝에 맹사성을 살려주는 결정을 내리는데 태종은 맹사성에게 사형 선고를 내리고 사형장에 끌려갈 때 사면 결정을 내려서 망나니 칼이 목에 닿기 직전에 맹사성을 살려줬다고 한다. 조대림 사건 참고.
- 즉흥적인 면모도 있었다.
- 출중해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세 장의 과거 시험 답안지 중 하나를 장원으로 뽑아달라는 요청이 들어왔다. 사전에 검사한 시험관들은 셋 모두 수준이 거의 비슷하나 하나는 아주 약간 모자라고, 나머지 둘의 수준이 비등하다고 평가했다. 이에 태종은 답안지를 읽어보지도 않고 "내가 집는 게 장원이야!"라며 한 장을 집어 장원 급제를 시켰다. 이 행운의 당첨자(?)가 바로 세종 시대의 유명한 학자이자 정치가인 정인지. 다만 이 일화의 경우 실은 이미 합격자를 정인지로 내정하고서는 쇼맨십으로 저랬다는 분석도 있다.
-
개성에서 한양으로 다시 돌아올 당시 도성을 다시 바꿀지에 대해서 논의가 오갔는데, 기존의 한양과
하륜이 주장한 무악(현대의
신촌)이 후보로 올랐다. 이에 대해 태종은 동전으로 점을 쳐보겠다고 했고, 종묘에서 점을 친 결과 한양을 도성으로 유지하는 것으로 결론이 났다.(그러나
경복궁이 아닌
창덕궁을 새로 지어 천도했다) 물론 태종의 마음은 어차피 한양에 가 있었으므로, 점을 쳐서 무악이 걸렸어도
이 항목의 예시들처럼어거지를 써서 한양으로 밀고 나갔을 게 뻔하다는 것이 후대의 해석이다.
3. 사냥 애호가
정쟁(政爭)에서 참아야 할 일이 있을 때는 몇 년이고 참아내는 등 엄청난 자제력을 발휘했지만 취미에 관해서는 자제심이 아예 없었던 모양. " 전하께선 사냥을 너무 다니시니 걱정입니다."라고 간언을 올린 기사가 자주 나온다. 상왕이 되고 나서도 사냥을 가려고 은근슬쩍 아들인 세종대왕이 살이 너무 쪘으니 함께 사냥을 나가야겠다며 아들까지 끌어들여서 핑계를 댈 정도.또한 사냥과 관련해 재미있는 일화 하나가 전해지는데, 종묘에 나라의 일을 고하기 위해 신도(新都)로 가는 일이 있었다. 그런데, 사냥이 너무 하고 싶었는지 갑자기 발을 돌려 종묘에 고묘[10] 하기 위한 복장을 다 벗어던지고 신하들 몰래 혼자서! 사냥을 하러 간적도 있었다. 당연히 신하들이 깜짝 놀라 태종에게 쫓아와서 태상왕도 편치 않으시고 종묘에도 일이 있는데 이렇게 사냥하시면 참으로 곤란하다고 잔소리를 해대니 태종도 화가 났는지 아니 임금이 사냥하는 법이 없냐? 왜 이렇게 잔소리야라며 버럭 화를 낸적도 있었다.
그런데, 그도 그럴 것이 왕조 시대 왕의 사냥은 많은 이들을 피곤하게 했다. 왕을 수행할 수행원들은 물론이고, 사냥 가는 지역 수령은 임금이 자기 관내에 들어오니 당연히 초긴장 상태. 더욱이 그 지역 주민들은 왕의 사냥 준비를 도맡아 해야 했으니 고생이 이만저만 아니었다. 게다가 2~3개 도에서 많은 농민들이 차출되어 몰이꾼 역할을 했으므로 여기에도 막대한 비용이 들었다.(자기 먹을 것은 스스로 준비해야 했다.) 사냥터를 확보하기 위해 농지를 싹 갈아엎느라 한해 농사를 망치는 것은 기본.[11]
하여튼 이런 간언에 응수하는 것도 정말 고단수의 면모를 보여준다. 정기적인 군사훈련이라며 반론을 봉쇄하는 것은 예사요, 종묘에 제물을 바치겠다는 구실을 대기도 했고 어떤 때에는 "내가 과거에는 붙었어도 원래 무인 집안 사람이라 가끔 몸을 움직여줘야 기가 잘 돈다"는 핑계를 대고, 어떤 때에는 "내가 원래 대궐에서 자란 사람이 아닌데, 매 사냥은 잠저에서 살 때부터 즐겨하던 것"이라는 핑계를 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사간 대부 윤사영이 "3일 전에 우박도 내리고 분위기도 안 좋아서 반성부터 하셔야 되는데 전하는 왜 사냥으로 즐거움만 추구하시느냐"고 따지자, 태종은 "그래도 한 번 해볼 건데 그대들이 날 강제로 못 하게 할 것이냐"고 고집을 꺾지 않았다. 《태종실록》 권12 6년 9월 25일 신사 1번째 기사
그런가 하면 <대학연의>를 펴들고 "이 책에서도 사냥을 권장하고 있는데 왜들 지랄임?"이라고 온갖 핑계를 다 대서 결국 실컷 즐기고 돌아오곤 했다. 《태종실록》 권6 3년 10월 1일 을사 1번째 기사 그런데 일반 행정에서 자기 의견을 관철할 필요가 있을 때나, 자기가 좀 배운 사람이라는 티를 낼 때에는 앞서 보인 모습과는 반대로 "내가 무인 집안이긴 해도 과거 급제자 출신이라서…."라는 식이다. 이쯤 되면 도저히 말로는 이길 수가 없다.
다만 사초를 기록하는 사관들을 두려워하여 사냥을 가도 "지금 나 사냥 온 거 사관들이 아는가 모르는가?"고 끊임없이 물어봤다고. 한 번은 사냥을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다치지는 않았지만 그보다 부끄러운 것이 더 신경쓰였는지 "사관한테 내가 낙마했단 얘기하지 마라."라고 지시를 내렸다.
...라고 실록에 적혀있다. 즉 낙마한 사실과 그 얘기 하지 말랬단 사실까지 고스란히 사관이 듣고 사초에 적어 실록으로까지 편찬된 것이다. 그야말로 철혈 군주의 굴욕. 이 기록은 결국 태종실록 태종 4년(1404년) 2월 8일자 기사 #에 남아 있다. 조선 왕조 실록과 사관의 위대함을 언급할 때 제일 많이 인용되는 기록 중 하나.[12]
4. 여성 편력
이미 즉위 다음 달부터 조선왕조실록에 아내의 투기를 피해서 아내와 잠자리를 같이 할 수 없어 경연청으로 열흘 동안이나 도망가 있었다.《정종실록》 권6 2년 12월 19일 기유 3번째 기사. #[13]여자에 관해서는 그의 가족관계를 보면 잘 나타나지만 한 번은 김우와 황상이라는 무관이 한 기생을 두고 싸우는 폭력사태가 벌어지자 황상과 김우의 수하 양춘무 등 4명을 벌줬는데[14] 그래놓고 그 기생은 자기가 데려갔다.[15]
조선 군주 중 다자녀 1위. 슬하에 무려 12남 17녀(29명)을 두었고, 요절하여 공식 기록에 포함되지 않은 9명(7남 2녀)까지 합하면 무려 38명이다. 참고로 2위가 성종의 16남 12녀(28명), 3위는 선조의 14남 11녀(25명), 4위로 정종의 15남 8녀(23명)이다.
상왕으로 물러난 이후에도 후궁들을 들였는데, 그 중 신순궁주는 본인이 직접 유배 보낸 이직의 차녀였다[16]. 이직의 장녀는 원경왕후의 남동생인 민무휼의 부인이었으니, 한마디로 자기 처남댁의 동복 자매를 첩으로 들인 것. 또한 신순궁주는 당시 한 번 결혼을 했던 과부였고, 같은 시기에 후궁으로 들인 혜순궁주 또한 과부였으니, 이를 통해 여성의 재가를 금기시 하지 않았던 고려시대의 문화가 아직 남아있었음을 알 수 있다.[17]
간택후궁들도 여럿 들였지만 궁녀 출신 승은 후궁도 많았다. 특히 원경왕후의 나인 출신인 효빈 김씨와 신빈 신씨가 있다. 우연인지 아닌지 모르겠으나 태종이 총애한 후궁들은 원경왕후의 궁녀였다.
이처럼 여성 편력이 꽤 심했으니 자연히 부부관계가 매우 나빴다. 즉위 초기부터 원경왕후 민씨와 피터지는 부부싸움이 끊이지 않았다. 하루가 멀다하고 남편이란 작자가 젊은 궁녀들을 처소로 끌어들였으니. 보통의 내명부 여인이라면 참고 견뎠겠지만, 원경왕후는 조선 역사상 가장 활동력 강하고 다혈질 성향인 왕비였다는 점이 문제.[18] 민씨는 태종에게 바가지를 긁고, 태종 역시 그에 못지않는 성격이라서 똑같이 화내다 보니 부부싸움으로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었다. 참다못한 원경왕후가 태종의 승은을 입은 궁녀를 벌주자 대노한 태종이 교태전 소속 궁녀와 내관들을 모두 궐 밖으로 내친 일도 있었다. 겉으로 보기엔 궁녀와 내관들을 내친 것이지만 원경왕후의 수족을 잘라버린 것이다.
태종은 그 이후에도 여자문제로 원경왕후와 박터지게 싸웠다. 원경왕후는 남편의 외도에 식음을 전폐하며 눈물을 쏟았지만 태종은 보란듯이 신하들에게 후궁의 법제화를 논의케 하였다. 그리고 제후는 9명의 부인을 둔다는 고사를 들며 가례색까지 설치해 9명의 후궁을 들였다. 당연히 원경왕후는 크나큰 배신감을 느꼈고 이후에도 마찰은 계속되었다. 그나마 마지막 배려인지 당시 태종의 첫 간택후궁이었던 의빈 권씨와의 성대한 혼인식만은 취소하고 단순히 궁궐로 들이는 것만 행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계속 후궁과 궁녀를 들였다.
유명한 예가 야사에도 자주 등장하는 효빈 김씨와 관련된 이야기다. 효빈 김씨는 본래 원경왕후의 친정에서 거느리던 노비였는데, 미모가 상당해서 태종이 그녀와 동침해 태종의 아이를 임신했다.[19] 그러자 원경왕후는 친정에 일러 김씨를 학대하게 했다. 실록의 표현에 따르면, 한겨울인 음력 12월에 만삭인 김씨를 문바깥에 방치하고,[20] 아기를 낳은 뒤에도 난방이 되지 않는 방에 방치했다. 몇몇 노비가 동정심에 이불 등을 가져다 줘서 김씨는 간신히 아기를 낳아 살릴 수 있었다.[21] 이 아기가 태종의 서장자인 경녕군 이비이다. 태종은 차마 왕비가 투기 때문에 이런 짓을 직접 저질렀다고 공표하기는 곤란해서[22], 민무휼과 민무회가 이런 학대를 멋대로 행했다고 죄를 뒤집어 씌웠다. 물론 이에 대해 원경왕후가 항의한 것은 뻔하다.
계속되는 아내의 바가지에 지친 태종은 침소를 경연하는 곳으로 옮겨버리고 원경왕후 대신 궐 안의 살림을 대신할 규수를 찾아보라고 명을 내린다. 내명부를 다스리는 권한을 원경왕후에게서 빼앗겠다는 선전포고나 다름이 없는 것이다. 당연히 원경왕후는 식음을 전폐하고 드러누웠고, 태종의 결정엔 절대로 간섭하지 않던 형인 상왕 정종마저 나서서 "나는 아들이 없어도 젊은 날의 정으로 사네. 주상은 아들도 많으면서 왜 또 장가를 들려 하는가?" 하며 만류했다.[23] 위에도 언급하였듯이 결국 가례색까지 설치했던 후궁간택은 정종의 만류로 없던 일이 되기는 하였으나 태종은 상왕으로 물러난 이후에도 계속해서 간택후궁과 승은후궁도 여럿 들이는 등 여자문제로 정처인 원경왕후의 속을 꽤나 썩였다.
하지만 이렇게 투닥거렸음에도 불구하고
여담으로 이런 여성 편력은 과도한 외척의 권력 남용을 견제한다는 목적도 있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위에 나와있듯 태종은 공신들이 잘못할 땐 벌을 주더라도 외처로 보내는 정도로 끝냈지만, 외척들에겐 정말 심할 정도로 자비가 없어서 민제 일가 및 심온이 과하다 싶을 정도로 고생 + 억울한 죽음을 맞았다.[27] 이런 사람이니 중전에 대한 견제 목적[28]으로 여자를 밝히는 정치적 고단수가 숨어있었을 가능성도 충분하다.
5. 태종의 외모
여말선초 시대에 왕실의 많은 인물은 초상화가 남거나, 외모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태종에 대한 기록은 상당히 적은 편이다.용장의 포스를 느끼는 어진이 남은 아버지 태조 이성계와, 여인처럼 단아하고 어여쁜 외모라는 기록이 남았고, 실제 초상화도 남아있는 숙부 이지란, 어진은 소실됐지만, 기록상 곰 처럼 강건한 체구에 눈밑에 큰 사마귀가 있었다는 외모 묘사가 있는 형 정종 이방과, 그리고 초상화가 남은 아들 효령대군과 고기를 많이 먹어 비만 체형이었다는 아들 세종대왕에 비하면 태종은 잠저 시절부터 외모에 대한 묘사가 유독 없었다.
그나마 태종에 대한 외모 묘사를 유추할 수 있는 기록이 딱 하나 있는데, 조선왕조실록에서 태조실록에서 태조가 명나라 사신을 보낼때 아들 이방원이 자진해서 명나라에 가겠다고 하니 너의 체질이 파리하고 병약해서 그 먼길을 갈수 있겠느냐?라고 말한 기록을 보아 무인 집안의 아들 치고는 호리호리한 체형으로 추측된다. 실제로 태종은 어려서부터 무력보다는 문재에 뛰어났고, 성균관 생활을 하며 수도에서 관직 생활을 했으니 형들처럼 우락부락한 체형 보다는 마른 체형의 타입으로 보인다.
하지만 태종은 명나라 사신 업무도 무난히 해냈고, 장수까진 아니라도 당대 군주치곤 살만큼 산 나이이며(54년 11개월), 살인적인 업무량에도 그가 딱히 병에 시달렸다는 설명은 없다. 게다가 태종은 세종4년이던 1422년 5월에 사망했는데, 죽기 바로 전달인 3,4월에 연달아 사냥을 나갈 정도로 건강했다가 갑자기 병에 걸려 죽은 것이다. 즉, 아버지 태조나 "곰처럼 강건했다"는 기록이 있는 형 정종 수준이 아니었을 뿐, 태종 역시 일반적인 기준으론 강인한 신체를 지녔을 확률이 높다.
6. 왕자 관련
"
내가 젊은 시절에 아들 셋을 연이어 여의고 갑술년에 양녕을 낳았는데, 그도 죽을까 두려워서 본방댁(本房宅)에 두게 했고, 병자년에 효녕을 낳았는데, 열흘이 채 못되어 병을 얻었으므로, 홍영리(洪永理)의 집에 두게 했고, 정축년에 주상을 낳았다. 그때 내가 정도전 일파의 시기로 말마암아 형세가 용납되지 못하게 되니, 실로 남은 날이 얼마 없지 않나 생각되어 항상 가슴이 답답하고 아무런 낙이 없었다. 그래서 나는 대비와 더불어 서로 양녕을 안아 주고 업어 주고 하여, 일찍이 무릎 위를 떠난 적이 없었으며, 이로 말마암아 자애하는 마음이 가장 두터워 다른 자식과 달랐다."
< 세종실록> 세종 1년(1419년) 2월 3일
< 세종실록> 세종 1년(1419년) 2월 3일
철혈군주로서 친인척들조차 냉혹하게 대한 그도 자식들 앞에서는 한없이 무른 아빠일 뿐이었다. 형제들을 죽이거나 귀양보내며 권력을 쥔 사람이었기에 적어도 자기 아들 세대가 같은 일을 겪기를 바라지 않았을 수도 있고, 사적으로도 왕위에 오르기 전에 자식을 3명이나 유아기때 병마로 잃었던 아픔 때문에 살아 있는 자식에게 자상하게 대했을 수도 있다.
“옛 사람이 말하기를, ‘나라에 훌륭한 임금이 있으면 사직(社稷)의 복(福)이 된다.’고 하였다. 효령대군(孝寧大君)은 자질(姿質)이 미약하고, 또 성질이 심히 곧아서 개좌(開坐)하는 것이 없다. 내 말을 들으면 그저 빙긋이 웃기만 할 뿐이므로, 나와
중궁(中宮)은 효령이 항상 웃는 것만을 보았다[29]. 충녕대군(忠寧大君)은 천성(天性)이 총명하고 민첩하고 자못 학문을 좋아하여, 비록 몹시 추운 때나 몹시 더운 때를 당하더라도 밤이 새도록 글을 읽으므로, 나는 그가 병이 날까봐 두려워하여 항상 밤에 글 읽는 것을 금지하였다[30]. 그러나, 나의 큰 책(冊)은 모두 청하여 가져갔다. 또 치체(治體)를 알아서 매양 큰 일에 헌의(獻議)하는 것이 진실로 합당하고, 또 생각 밖에서 나왔다. 만약 중국의 사신을 접대할 적이면 신채(身彩, 몸을 꾸밈)와 언어 동작(言語動作)이 두루 예(禮)에 부합하였고, 술을 마시는 것이 비록 무익(無益)하나, 그러나, 중국의 사신을 대하여 주인으로서 한 모금도 능히 마실 수 없다면 어찌 손님을 권하여서 그 마음을 즐겁게 할 수 있겠느냐? 충녕은 비록 술을 잘 마시지 못하나 적당히 마시고 그친다[31]. 또 그 아들 가운데
장대(壯大)한 놈이 있다. 효령대군은 한 모금도 마시지 못하니, 이것도 또한 불가(不可)하다[32]. 충녕대군이 대위(大位, 임금으로서의 큰 자리)를 맡을 만하니, 나는 충녕으로서 세자를 정하겠다.”
유정현 등이, “신 등이 이른바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택현, 擇賢)도 또한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여, 의논이 이미 정하여지자 임금이 통곡하여 흐느끼다가 목이 메었다.
<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년) 6월 3일
유정현 등이, “신 등이 이른바 어진 사람을 고르자는 것(택현, 擇賢)도 또한 충녕대군을 가리킨 것입니다.” 하여, 의논이 이미 정하여지자 임금이 통곡하여 흐느끼다가 목이 메었다.
< 태종실록> 태종 18년(1418년) 6월 3일
이러한 철혈 군주의 이미지와는 달리 자신의 아들 앞에서는 매우 약했다고밖에 생각할 수 없는 기록이 의외로 꽤 많다. 정작 애엄마인 원경왕후와는 상기했듯 외척 처분 문제와 여성 편력 문제로 박터지게 싸웠지만 그 아들들에게만큼은 물렀다. 특히 현대 세대의 증조할아버지 세대만 해도 아버지는 아들에게 엄한 게 당연했던 걸 감안하면 오늘날의 시각이 아닌 당대의 기준으로 본다면 분명히 답없는 아들바보가 맞다. 양녕대군의 수없는 망나니 짓도 끝까지 참으려고 했으며, 결국 양녕을 폐세자시킨 후에도 당시 태종과 사이가 매우 안 좋았던 중전의 핑계를 대며 양녕을 자신의 곁에 두며 가능한 보호하려고 했었다.
위의 기사는 양녕의 폐세자 이후 충녕을 새로 세자로 삼을 당시 태종의 발언인데, 여기서 보듯이 양녕을 폐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안타까워 목이 메도록 울었을 정도였다. 선조가 광해군을 대했던 태도나 인조가 소현세자를 대했던 태도나 영조가 사도세자를 대했던 태도를 감안하면 굉장히 이례적인 것.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세자시킨 것에서는 국가의 장래를 위해 자식의 목숨도 포기하는 냉혈 군주의 모습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정몽주나 정도전을 죽일 때처럼 많은 피를 흘리며 어렵게 새 나라를 건국하고 교통정리를 한 입장에서는 종묘사직을 위해 폐세자는 불가피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이미 의정부, 육부, 사간원 등 모든 부서의 관료들이 연합하여 세자를 쫒아내라고 상소한 상황이라 무시할 수가 없었다.[34] 위의 기사 전문을 보면 점을 쳐보겠다 했다가, 왕비에게 의견을 구하는 등, 역시 굉장히 주저하고 있었음이 담담한 실록의 서술에서도 생생하게 느껴진다.
역사의 뒷이야기를 아는 우리들은 잘 느끼지 못할 수도 있는데 태종이 양녕대군을 폐한 것은 당시 기준으로 사실상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35] 왕조국가에서 한 번 후계자 자리에 있었던 사람이 멀쩡히 살아 있다는 것은 차기 왕에게 있어서 위험 요소 1순위이며, 만약 세종의 치세가 좋지 못하다면 거기에 반발하여 난이 일어났을 때 반란 세력이 양녕대군을 추대할 것은 자명한 일이었다. 명분도 혈통도 멀쩡하니 양녕대군을 구심점으로 사람이 뭉치기도 쉬울 테고 설령 다른 사람의 뜻이 없더라도 폐세자가 된 양녕대군 스스로가 앙심을 품고 반란세력의 수괴가 될 가능성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태종과 주변 사람들이 살아왔던 여말선초 시기에 우왕, 창왕, 공양왕 그리고 1차 왕자의 난에서 희생된 이방석까지 왕의 자리에 있었거나 후계자 자리에 있던 사람들이 실권을 잃거나 폐해지면 어떻게 되는지 똑똑히 봐왔을 것이다. 따라서 태종이 죽은 후 세종이 전 폐세자를 숙청하는 것은 당시 모든 사람이 생각하는 매우 당연하고 바람직한(?) 시나리오였기 때문에 태종 입장에서는 죽이겠다는 선고나 다름없었던 것. 실제로 태종은 양녕대군이 종묘사직에 해가 된다면 죽여도 좋다라는 유언을 남겼고, 세종 때에도 양녕대군을 처형하라는 상소가 수없이 이어졌다. 물론 세종은 양녕대군을 죽이지 않고 끝까지 곁에 두어 모두의 예상을 빗나가게 했다.[36]
양녕대군이 사라졌다가 돌아왔을 때 그를 꾸짖는 모습은 냉혹한 철혈 군주였던 그 역시 평범한 아버지였음을 보여준다.
양녕이 어둘 녘에 성안에 들어와 스스로 부끄러워서 옷소매로 낯을 가리고 수강궁에 나아가니, 상왕은 보고 슬픔과 기쁨에 잠겨 순순히 훈계하며, 또 이르기를, "네가 도망했을 적에,
주상이 듣고 음식을 전폐하며 서러운 눈물이 그치지 아니했다. 너는 어찌 이 모양이냐. 너의 소행이 너무도 패악하나 나는 특히 부자의 정으로써 가련하게 여기는 것이다."고 하였다.
< 세종실록> 세종 1년(1419년) 2월 1일
< 세종실록> 세종 1년(1419년) 2월 1일
요즘식으로 말하면 방탕한 아들 보고 '이 놈아. 네 놈이 가출했을 때, 네 동생은 밥도 안 먹고 울기만 했다.(동생 보기에 부끄럽지도 않냐.)[37] 너는 왜 이 모양이냐? 네 놈이 이렇게 막 나가도 넌 내 아들이기 때문에 항상 걱정스럽기만 하다.(남 같았으면 백 번이고 죽였겠지만 내 아들이니까 참는다.)'라고 탄식하는 여느 아버지와 다를 바 없는 모습. 그래 놓고 이 말을 한 이틀 뒤에 양녕에게 "내가 눈물을 흘린 것은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라에 부끄러웠기 때문이다"라고 훈계하기도 했다.
"네가 도망해 갔을 적에, 나나 대비는 너의 생사를 알지 못하여 늘 눈물을 흘리니, 주상이 곁에 있어 역시 눈물을 흘렸다. 가령 네 몸은 편안한데, 아우들이 연고가 있다면, 너는 주상의 처사와 같이 하겠느냐. 주상은 효도와 우애가 참으로 지극하여, 너희 형제가 다 같이 보전될 수 있을 것이니, 나는 근심이 없다.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너를 위한 것이 아니라, 국가의 수치가 되기 때문이다. 네가 만약 도주하여 불행했다면, 후일에 어찌 네가 광망(狂妄)해서 스스로 그렇게 된 것임을 알 수 있으랴."
< 세종실록> 세종 1년(1419년) 2월 3일
< 세종실록> 세종 1년(1419년) 2월 3일
양녕대군이 세자 시절, 기생 봉지련과 정을 통하는 게 들통나서 봉지련이 쫓겨나자 식음을 전폐한 일이 있다.[38] 잘못을 하고도 오히려 떼를 쓰니
1회 면피용이나 다름없던 양녕대군의 반성을 알면서도 매번 믿으려 애썼고, 세자궁을 대궐 가까이 지어 조석으로 문안 올리게 하고 경연에도 참여케 하라는 우빈객 이래의 주청에도 그러면 오히려 부자 간의 사이만 나빠진다며 끝까지 아들을 배려해주었다.[40]
그렇다고 양녕대군만 편애한 건 아니다. 효령대군이 불교에 심취하자 신료와 유학자가 "왕자가 불교에 심취하는 건 좋지 않다."라고 토를 달자 태종은 오히려 "그건 효령의 취미 생활인데 취미 생활도 못하게 하라는 거냐?"라고 신료들의 말을 씹었고, 효령이 원하는대로 불교에 심취할 수 있도록 배려해주고 방해하지도 않았다. 숭유억불의 서막을 열었던 그 태종이 말이다.
거기다 워낙에 편식이 심했던 세종대왕이 큰아버지인 상왕 정종의 상중에 육고기를 잠시 끊자 "우리 주상이 고기없는 수라를 드시다니!"라고 기뻐했다는 기록도 있다.[41] 또한 죽기 직전엔 '나 죽고 상 치를땐 주상이 고기 꼭 드시게 해라'라는 유언까지 남길 정도. 그 뿐만 아니고 한창 신덕왕후의 압박으로 입지가 위태로울 때 위의 세 아들은 잃고 넷째 양녕은 외가에 보내고 다섯째 효령은 다른 집에 맡기고 슬하에 남은 아들은 갓 태어난 충녕대군뿐이라 애지중지하며 길렀다고 한다.
형제들과 꽤 터울을 두고 태어난, 적자 중 막내인 성녕대군의 경우는 몸이 약한 것도 있어서 그랬는지 결혼한 왕자(세자 제외)는 모두 궁궐을 나가서 살아야 한다는 법도를 깨고 결혼시킨 후에도 옆에서 끼고 살았다. 병약했던 이 아들이 병을 앓다가 결국 14살에 요절했을 때는 그야말로 낙심천만이었던 듯. 참고로 양녕대군은 막내동생이 죽어서 부모형제가 모두 슬퍼할 때 사냥하고 놀러다니고 술을 마셔댔다. 태종도 이 일로 인내심이 바닥나서 노발대발해 양녕에게 "사람의 마음이 없다."[42]라고 했고 앙녕의 스승까지 "부모도 못 가르치는 걸 스승이 가르칠 수는 없겠지만 벌하지 않을 수도 없다."라고 책임을 물어 벌했다.
조선의 국시인 숭유억불 정책을 매우 철저하게 시행했고 심지어는 1차 왕자의 난 때 죽은 자식들과 사위를 애도하기 위해 태조가 드리는 불공에 대해서도 핀잔을 줄 정도로 불교를 혐오했는데[43] 정작 성녕대군이 죽고 나서는 대자사(大慈寺)라는 절을 세웠다. 그것도 처음에는 도성 안에 절을 지으려 했다!!![44] 태종은 이 대자사를 대군의 무덤을 살피는 원찰로 삼았는데 그 규모가 어마어마하여 부지와 절에 딸린 전답이 수만평이었고 그 규모가 임진왜란으로 소실되기 전까지는 조선 최대규모였다고 할 정도. 아직도 그 사적지에는 당시 토기 파편이 어마어마하게 나온다. 죽은 성녕대군의 부인에게도 국대부인 작호를 주고 후하게 대접했다. 다른 대군부인이 부부인 작호를 받은 것과 차이가 있다.
이후에도 성녕대군의 처갓집 사람들을 보면 아들 생각이 난다면서 슬퍼했고 거처를 옮기려고 했을 때도 지나가는 길에 성녕대군의 집이 있어서 울까봐 못가겠다고 중지한 적도 있다. 외척을 하도 혐오해서 심심하면 사돈 집안을 작살내는 것을 주특기로 삼던 사람이 성녕대군의 처가인 성억 일가에 대해서만은 지극히 아껴서 죽을 때도 세종에게 성녕대군의 처갓집 사람들을 공신의 예로 대우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는데 그 덕에 세종 시절까지도 그 집안 사람들은 각별한 대우를 받았다. 심지어는 14살에 죽은 성녕대군이 제삿밥 못 먹을 것을 걱정해서 양자를 들여서 후사를 이으려고 시도했다. 그 당시만 해도 그런 전례가 없었기 때문에 그만 둘 수밖에 없었지만 결국 세종대왕 이후에 자신의 아들을 성녕대군의 양자로 입적시켰다.
태종은 양녕 위로 아들이 셋이 더 있었는데 모두 어린 시절에 죽어버렸던 기억 때문인지 자식들에게 무르게 대할 수밖에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외에도, 태종 자신이 형제들에게 칼끝을 겨누고 피바람을 불러 일으킨 왕자의 난 중심에 있었기에 자기 아들들에게는 이러한 형제간의 피바람이 없기를 기원했기에 이런 태도를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특히나 양녕을 폐세자하는 데 심각한 고민을 하는 것은 더더욱. 첫째인 양녕을 폐세자 시켜버리고 셋째를 국본으로 세우고 왕위를 잇게 한다면? 필시 양녕이 반란을 일으킬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왕자의 난의 주인공이었던 태종이니 만큼 필히 이 부분에 걱정을 했을 듯. 이 때문인지 아들 문제에 한해서는 평소 부부싸움을 벌이던 원경왕후와 뜻이 일치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원경왕후는 세자를 폐위시키고 바꾸면 자신들같은 일이 또 벌어질 거라면서 끝까지 반대했다.
아들에게 극진했던 것 때문이었는지 이후 세종은 국가 정책을 결정할 때도 태종 시기의 예를 들고 아버지께선 이랬을 것인가 하는 대목도 많이 보이고, 실록이 완성되었을 때는 실록을 보고 싶어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희한하게도 더 선대인 태조가 아니라 무려 2번이나 태종실록을 보려고 시도한 적이 있다. 둘 다 주변의 반대로 보는 것을 단념하게 되긴 하지만. 이는 정치적인 선례를 참고하려는 공적인 이유도 있겠지만, 화기애애했던 부자관계를 생각해보면 사적으로는 아빠와 함께 했던 일들이 적힌 기록들을 보고 추억할 목적으로 그랬던 것으로 보인다.
오죽하면 두 번째 시도 이후 이틀만에 갑자기 태종이 태조실록을 본 적이 있는지를 주변에 묻고 없다고 하니 그냥 넘어갔는데, 아무래도 선례가 있으면 자신도 태종실록을 볼 수 있는 명분이 생기기 때문으로 여겼거나 그냥 보고싶은 미련이 남아 한 말인 것으로 보인다. 이 사건은 연산군의 사례와 함께 실록을 왕이 보는 것은 윤리적으로 어긋난다는 선례(물론 후자는 반면교사)로 남게 되어 조선왕조실록 편찬이 왕권으로부터 보호받게 되는 원인이 되어준다.
7. 부엉이 공포증
냉혹한 군주라는 이미지로 세간에 비춰진 태종이지만 의외로 부엉이를 몹시 싫어하고 심지어는 두려워하기까지 했다.[45]태종 6년 8월 5일에 부엉이가 경복궁의 누각과 침전에서 울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그 며칠 뒤인 8월 13일에는 부엉이가 경복궁 근정전에서 울었고, 그 다음날인 8월 14일에는 경복궁 침전에서 울었으며 그 다음날인 8월 15일에는 침전과 근정전에서 울었다고 실록에 기록되었다. 8월 18일에는 창덕궁 서쪽 액정에서, 8월 19일에는 전농시의 제기고에서 부엉이가 울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연달아 부엉이가 나타나자 태종은 대단히 불안해했는데 9월 1일에 양녕대군에게 양위할 뜻을 내비쳐서 파란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론 양위 소동은 태종의 술수이기도 했으나 어쨌든 부엉이 때문에 신경이 거슬렸던 건 분명한 듯 하다. 부엉이 때문에 성밖으로 이어[46]하려고 하자 대간에서 상소를 올려서 이를 반대했는데 태종은 이 상소에 대해서 이런 비답을 내렸다.
“몸을 삼가고 행실을 닦는 것이 비록 고론(高論)은 되지만, 내가 옛글을 보았더니 이어(移御)하였다는 글도 없지 않았다. 오늘날 야조(野鳥)가 집으로 들어오고, 또 지붕 위에서 우니, 술자(術者)가 말하기를, ‘다른 곳으로 피하여야 합니다.’ 하고, 또 근일에 태백성(太白星)[47]이 대낮에 나타나고, 다시 헌원성(軒轅星)을[48] 범(犯)하게 되어, 내 마지못해 이렇게 하는 것이니, 그대들은 많은 말을 하지 말라.”
이어를 논할 정도로 부엉이가 파문을 일으킨 가운데 9월 3일에도 부엉이가 근정전에서 울었다는 기록이 나타난다. 부엉이에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이 된 태종은 여기저기로 이어를 하기도 하고 궁궐 수비대에게 잡귀를 쫓는 방상씨탈을 쓰고 경계 근무를 서게 했는가 하면 부엉이를 쫓으려고 한밤중에 궁 전체에 불을 환하게 밝히도록 명했을 정도였다.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부엉이는 불길한 새로 여겨지긴 했지만 태종의 반응은 거의 노이로제 수준인데, 세간에서는 이를 두고 태종이 신덕왕후 강씨의 원혼이 부엉이로 나타났다고 여겨서 부엉이를 질색하고 무서워했다는 소문이 떠돌았다고 한다.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는 부엉이를 밀본의 수장인 정도전의 환생으로 여겨 태종이 질색했다고 묘사되었다. 정도전이 태종의 최대 걸림돌로 나왔기 때문에 이를 부각시키는 극중 장치로 보인다. 동시에 밀본의 조직원이 암살을 행할때 부엉이 울음소리가 나오는 피리를 썼다.
8. 백성 관련
외척이나 공신들을 냉정하게 때려잡던 모습과는 달리, 일반 백성들에게는 무척이나 관대한 모습을 꽤 많이 보였다. 철저하게 왕권에 위협이 될 자들만 숙청하고 그 외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관대한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냈다. 아니, 앞에 링크되어 있는 홍무제보다 훨씬 백성들에게 관대한 모습을 보였다.[49]- 아이들이 혜정교 거리에서 공에다 주상(=태종), 효령군, 충녕군 등의 이름을 붙이고 차면서 놀다 잡혀온 일이 있었다. 일반인 이름 가지고 저래도 욕을 한 바가지 먹을 일인데, 저 시절은 왕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지 않기 위해 피휘도 하던 시절이었고, 특히 혜정교는 오늘날 광화문 교보문고가 있는 자리니까 궁궐 코앞에서 이런 놀이를 한 것이다. 고려를 무너뜨리고 갓 건국된 조선 왕조 입장에서는 애들이고 나발이고 개박살을 냈어도 이상할 것이 없지만, 태종은 애들이 뭘 알고 그랬겠냐? 요사한 말을 처벌하는 법도는 요런 데 적용하는 거 아니다.라고 직접 사태를 무마했고, 다시는 이 일을 논하지 말라고 어명을 내려 뒷말이 나올 여지조차 싹 차단해버렸다. 태종 25권, 13년(1413년 계사 / 명 영락(永樂) 11년) 2월 30일(기묘) 1번째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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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서[50]'라는 관리가 친구를 궐에 데려와 숙직실에서 같이 잔 일이 있는데, 친구가 아침에 나가려다 길을 잃고 헤메던 중 태종의 침전에 들어가 버렸다.
고관대작이라도 왕의 침전에 허락 없이 들어가는 건 매우 무례한 일이고, 더군다나 암살의 위험도 있기에 큰 벌을 받을만한 일이었다.[51] 뜬금없이 외부인이 나타나서 궁인들이 기겁하고, 이 사람도 당황하여 '나가려 했다'고 변명했는데, 태종은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이니 괜찮다'라고 하고, '남들이 알면 법대로 처벌하자고 할테니 이 일은 알리지 말고, 넌 빨리 가라.' 하며 신속히 내보냈다.
과연 민인생은 아래에서 태종이 직접 말할 때까지 이걸 몰랐을까
- 시골에서 상경한 '손귀생'이라는 사람이 창덕궁을 봤는데, 난생 처음 보는 크고 아름다운 건물에 감탄하여 멋도 모르고 들어와 돌아다니며 구경하다 광연루에서 붙잡혔다. 순금사에서는 곤장 80대를 선고했는데, 곤장 80대면 당시 중형이다. 그런데 태종은 모르고 한 일을 그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다며 방면했다. 태종 17권, 9년(1409년 기축 / 명 영락(永樂) 7년) 4월 18일(경인) 2번째 기사 여담으로 이 때 태종이 앞서 있었던 조서 친구의 이야기를 직접 하면서 사면의 근거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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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3년 5월 5일에 경상도 조운선(물길을 통해 조세를 한양으로 운반하는 배)가 무려 34척이나
침몰해 사람이 많이 죽는 사태가 발생했다.(
해당 실록 기사) 실록을 보면 사망자가 정확히 파악되지는 않고 신하들이 천여 명이라고 말하고 있는 걸 보면 엄청난 대형 참사였다. 이때 생존자 한 명이 도망가다가 붙잡혔는데, 머리를 깎고 이 조운을 운반하는 힘든 일에서 벗어나려고 했다는 말을 했다. 이를 듣고 태종은 탄식하며 이렇게 말했다.
책임은 내게 있다(責乃在予). 만인(萬人)을 몰아서 사지(死地)에 나가게 한 것이 아닌가? 닷샛날은 음양(陰陽)에 수사일(受死日)이고, 또 바람 기운이 대단히 심하여 행선(行船)할 날이 아닌데, 바람이 심한 것을 알면서 배를 출발시켰으니, 이것은 실로 백성을 몰아서 사지(死地)로 나가게 한 것이다.
그리고 "쌀은 아까울 것이 없지만 사람 죽은 것이 대단히 불쌍하구나. 그 부모와 처자의 마음이 어떠하겠는가"라고 탄식하면서 조운하는 작업이 힘들어서 도망치는 사람이 나오는 것도 당연한 것이라고 말했다. 한 신하가 "그렇다고 조세를 육로로 옮기면 어려움이 심합니다"라고 발언하자 태종은 "육로로 운반하면 소나 말이 수고를 할 뿐이지, 적어도 사람이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겠느냐"고 반문했다고 한다. 이 일은 세월호 참사 이후 이어지는 2016년의 정국을 비판하는 JTBC 뉴스룸의 앵커 브리핑에 인용되기도 했다.
다만 그래도 어쨌든 조선은 수로로 운반했다. 육로로 운반할 경우 가장 큰 문제는 효율 문제였다. 21세기 대한민국처럼 고속도로나 도로, 혹은 철도가 잘 정비되어있는 것도 아니고 험준한 육로로 운반하면 육로로 운반하는 데 쓰는 마소의 여물은 여물대로 챙겨야 하고 덤으로 사람 먹을 것까지 챙겨야 한다. 그러다 보니 종종 옮기는 양보다 비용이 더 컸다. 속도도 수운이 훨씬 빨랐고. 치안 문제는 사실 큰 고려 대상이 아니었다. 또한 역사적으로 외적의 침입이 많았던 한반도 특성상 육로조세를 위해 로마제국처럼 전국적으로 도로망을 갖출 시 외적이 순식간에 수도로 진격하게 되므로 이를 막기 위해 일부러 토목공사를 안 한 점도 있었다.[52] 사실 도로의 발달이 미비한 것이 외적 때문이라 평가했던 건 조선 후기의 실학자들이었다. 조선은 도로 건설의 이점을 간과하지 않았으며 도로를 건설해야 한다는 소리는 실록의 곳곳에 나온다. 하지만 무엇보다 도로 건설을 방해하는 것은 바로 한반도의 타고난 지형 그 자체였다. 도로를 만들고 넓히고 정비하는데 평야의 국가들보다 훨씬 더 많은 비용과 수고가 들어가는 것은 자명했고 지금과 같은 효율적인 도로를 만들려면 산을 뚫지 않고는 불가능했다. 심지어 세간의 평가와는 다르게 군사용 도로만큼이라도 건설해야 된다는 의견도 있었지만 그마저도 환경 탓에 여의치 않았다. 당장 먼 훗날인 1970년 경부고속도로를 건설할 때도 대전- 대구 구간이 추풍령 때문에 난공사였고, 실제로 선형이 매우 불량했다는 것[53]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 자신이 직접 목숨을 빼앗은 정도전도 그 과정과 결과를 감안할 때 의외로 사후 처분은 꽤 관대하게 하는 의외의 모습을 보였다. 이런 정치 숙청을 단행할 때는 역모 혐의를 적용해서 말 그대로 가문과 명예를 박살내고 다시는 복권되지 못하도록 철저하게 매장하는 경우가 부지기수다. 하지만 태종은 정도전 본인에게만 '종친모해죄'라는 다소 어정쩡한 죄목을 붙이고 명예를 추탈했을 뿐, 정도전의 부인 및 자녀들은 잠시 노비로 전락했다가 몇 년 뒤에 곧 복권시켜서 정상적으로 벼슬살이를 할 수 있게 만들었다.[54] 이후에도 정도전의 후손들은 별다른 연좌제의 피해를 입지 않고 일반적인 사대부 집안으로서 살아갈 수 있었다. 성종, 연산군 때 정문형이라는 정도전의 증손자는 정승이 되기도 했을 정도. 물론 국가공인 죄인이었기에 선조 때 기축옥사에 휘말렸던 진주의 선비 최영경은 "그대가 혹 길삼봉이냐?"라는 물음에 "역적 정도전의 호가 삼봉인데 어떻게 삼봉이라는 이름을 쓰겠느냐"고 답했다. 광해군 때 허균을 고발한 기자헌의 아들은 그 사유 중 하나로 정도전을 현인이라 칭했다는 것을 들었다.
9. 외척 탄압
태종의 재위 중과 후의 행보에서 특기할 점 중 하나는 외척 탄압이다. 앞서 본 관대한 면모들이 무색해보일 정도로 외척에게는 유독 혹독했는데, 공신들도 숙청했다지만 기본적으로 권력에서 실각시키는 선에 그치지 이무를 제외하면 죽인 공신은 없으며 그 이무도 외척과 얽혀서 죽은거다. 태종의 왕비 원경왕후 민씨는 아버지 민제와 네 명의 남동생들을 두고 있었는데 민제는 권문세족 출신이었기에 세력이 컸기에 즉위 과정에서 태종은 당연히 민씨가의 힘을 많이 받았다. 원경왕후도 태종을 적극 서포터했다.문제는 그렇게 해서 왕이 된 이후인데 왕이 되자마자 태종은 앞서 보았듯 조강지처를 냉대하기 시작했고 민제는 돌아가는 기류를 읽었는지 사직하고 물러났다. 하지만 그러다가 공부와 이현이라는 자가 민제를 찾아와 명나라 공주와 세자를 결혼시키자는 주장을 했는데[55] 다른 이도 아니고 민제를 찾아온 것부터가 민제가 물러났어도 그 힘이 어느정도인지 알려주는 예시였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후부터 태종은 외척을 탄압해 처음에는 이화의 상소를 빌미삼아 처남 둘을 왕자들을 죽이려 했다며 유배보내더니 결국 죽여버리고 남은 처남 둘마저도 조그만 사건을 빌미로 죽였다.
그런데도 안심이 안 되었는지 세종이 즉위한 다음에는 세종의 외척도 때려잡아 강상인의 주장에 동의했다는 이유로 세종의 장인, 즉 본인의 바깥사돈이자 국구인 심온을 사사하고 심온의 가족들을 노비로 삼았다. 심온의 가족들은 태종 사후에야 풀려났고 심온은 문종 때 사면된다.
10. 조사의의 난 관련
태종 이방원이 권력을 잡기 위해 어린 동생들을 죽이고, 형과 싸웠는데 천하의 이성계가 가만히 있을 리 없었다. 태종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태상왕의 신분으로 전국 곳곳을 떠돌아다니던 이성계는 본래 자신의 토착적 기반이었던 함흥 지역에서 일종의 쿠데타를 일으킨다. 실록에는 ' 조사의의 난'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 조사의라는 사람은 신덕왕후 강씨의 조카라고 하며, 봉기의 명분도 신덕왕후와 관련된 것이었다. 그러나 신덕왕후 강씨가 개경의 권문 출신으로 함흥에는 그냥 가볼 일도 거의 없었을 것임을 생각하면 조사의의 난의 실제 주동자는 이성계였을 가능성이 크다. 초기의 조사의의 난은 정치적 명분에 힘을 실어주는 태상왕의 존재 + 강력한 함흥의 군세를 바탕으로 꽤나 맹위를 떨쳤다. 결국 태종은 한양 수비를 신하들에게 맡기고 친아버지를 상대로 친정(親征)에 나서는 조선 역사상 최초이자 최후의 막장 행각을 벌인다. 그리고 이 전투는 조선 국왕이 '친정'한 마지막 전투이기도 하다. 이후에는 국왕이 직접 전장에 나서는 일은 없었다.이성계는 조선 왕조의 개창자이기 이전에 평생동안 출전한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었던 불패의 명장이었으나, 이때 아들 이방원과 벌인 부자간의 전투에서만은 이기지 못했다. 이 전투에서의 패배는 아마 이성계의 삶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임과 동시에, 가장 쓰라린 패배였을 것이다. 물론 태조든 태종이든 부자간의 싸움에서 누가 이겼더라도 뒷맛이 좋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이 전투에서 패배한 뒤 이성계는 사실상 지지를 잃고 아들에게 투항할 수밖에 없는 처지가 된다. 동정 여론도 알아서 거둬졌다. 그래도 태종이 아버지를 강제로 끌고오는 건 차마 할 수 없어서 계속 설득을 하고, 이성계는 체면상 안 가겠다고 좀 거부해 보는데, 이때를 배경으로 해서 나온 이야기가 바로 함흥차사다. 형제, 사위, 동지들까지 다 죽여버린 후레자식 같은 아들 놈에게 너 죽고 나 죽자는 식으로 덤볐다가 그나마도 패배하고, 허수아비 같은 처량한 신세였던 이성계가 함흥차사 이야기에서는 절대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포지션인 것이 흥미롭다. 함흥차사에 대한 좀 더 자세한 내용은 위키피디아에 있으니 참고.
이런 면에서 묘하게 당태종과 겹친다. 실제로 조선 태종과 당 태종 둘 다 아버지를 도와 나라를 세우는 데 큰 공을 세웠고 도덕적으로는 패륜아라고 욕을 먹지만 두 군주 모두 유능해서 나라의 기초를 단단히 하며 당대의 백성들에게는 최고의 성군이라고 칭송 받았으며, 인재들이 앞을 다투어 재야에서 쏟아져 나왔었다. 또한 창업 군주와 수성 군주의 사이에 낀 애매한 위치이며, 묘호도 같다. 심지어 자식들의 싸움이 일어날까봐 유능하고 성격 좋은 자식을 골라 왕위를 물려주었다는 점까지 비슷하다. 차이점이 있다면 조선 태종은 젊었을 때 문관이었는데, 당태종은 젊었을 때 무관의 기질이 더 우세했다. 또한 조선 태종의 후계자는 너무나 유능해서 후대 사람들에게도 최고의 성군으로 칭송받지만[56] 당 태종의 후계자는 전쟁을 많이 벌여 성공했긴 했으나, 부인에게 권력을 쥐어주어 사후에 왕조가 찬탈당하게 되는 경위를 제공한다. 그리고 조선 태종은 아버지를 즉위시키는 데 큰 공을 세웠지만, 당 태종은 그냥 아버지를 즉위시켰다. 이 둘은 국가의 기틀을 만들고 탁월한 정치인 명군이며 군사력을 강화하고 사냥을 좋아하였다. 이 때문에 신하들이 강하게 반발했으며 간언을 잘 가납했고 반려자가 조력자였다. 또한 문무를 겸비한 인물이며 둘 다 50대 나이에 사망하였다. 이외에도 둘 다 후계자 문제 때문에 고생했다는 점이 비슷하다.
11. 무한도전 TV특강 어진 고증오류
무한도전 TV특강에서 태종 이방원을 소개하면서 조선태조어진을 등장시키는 실수를 저질렀다. 어진 모퉁이에 "대왕어진(大王御眞)"이라고 적혀있는데 원본에는 "태조대왕어진(太祖大王御眞)"이라고 적혀있다.12. 왕씨 보호
고려의 왕족인 개성 왕씨 일족을 보호하기 시작한 무렵도 태종부터였다. 위에서도 언급했지만 정적이 아닌 사람에 대해서는 매우 관대한 인물이었던 듯. 당시 왕씨의 후손 한 명이 체포되었는데 신하들은 당연히 그를 죽여야 한다고 나섰다. 이때 태종이 "역사책을 살펴보니 역성혁명을 하고서도 전조(前朝)의 후손들을 완전히 멸망시킨 경우는 거의 없었다. 그것은 임금의 도리가 아니다. 앞으로 나는 왕씨의 후예를 보전하겠다." 아버지 태조 이성계의 조치를 뒤집는 발언이어서 신하들은 벌떼처럼 일어났다. 이에 태종은 "이씨가 도(道)가 있으면 백 명의 왕씨가 있다 하더라도 무얼 걱정하겠는가? 그렇지 않고 이씨가 도를 잃으면 왕씨가 아니라도 천명(天命)을 받아 일어나는 자가 없겠는가?"라고 하며 그를 살려주었다. 이후 태종은 "예전에 태조가 왕씨를 제거한 것은 실은 태조의 본의가 아니었다"는 말로 아버지와의 의견 충돌을 무마했지만, 이건 아버지를 차마 대놓고 나쁜 사람 취급할 수가 없어서 적당히 돌려말한 거다. 알 사람은 다 알고 있었다. 태종실록 13년 11월 26일자 기사이후에 왕씨의 후손을 주살하라는 대신들의 벌떼같은 청이 있었는데 태종은 "혁명(革命)한 뒤에도 오히려 전대의 후예(後裔)가 살아 있을까봐 두려워하여 모조리 죽여서 유종(遺種)을 없애는 것은, 용렬한 군주(君主)가 하는 짓이다. 내가 어찌 차마 하겠는가? 경 등은 나의 아름다운 뜻을 따르려 하지 않고 어찌 이처럼 번거롭게 구는가? 왕씨(王氏)의 유종(遺種)은 죄가 없는데 죽이는 것은 내 마음으로는 불가하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미 결정되었으니 다시 진언(進言)하지 말라"라고 씹었다. 다만 태종이 즉위한 것은 1400년이고 이러한 조치를 내린 것은 즉위 기간의 절반을 넘긴 1413년이었다. 태종실록 13년 12월 1일자 기사 또한 이후로도 왕씨 탄압은 한동안 계속되었고, 문종대에 이르러서야 완전히 사라졌다. 이 때에는 왕씨인 왕우지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사람이 "쟤 왕씨래요."라고 고발했는데 나라에선 "어이구 왕씨네요? 너님 벼슬 받으세요."라는 식으로 벼슬에도 앉혀 주고 문종~성종 시기 의전상 예우를 받기까지 했다.
13. 메뚜기떼의 창궐
야사 중에는 메뚜기떼가 창궐하자 몇 마리를 잡아오게 한 후 가장 큰 놈을 골라 "네놈이 백성의 곡식을 갉아 먹는다니 차라리 내 오장육부나 갉아먹어라!!!"라고 대성일갈을 내지르면서[57] 먹어버렸고, 깜짝 놀란 신하들이 혼비백산하며 빨리 의원을 불러오라고 명을 내렸는데, 정작 태종 본인은 멀쩡했다. 이후 메뚜기떼는 다 사라졌다고 한다. 중국 당태종에게도 같은 일화가 있는데, 야사라는 특성을 감안하면 어느 쪽이든 성군의 면모를 나타내고 싶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후손인 정조도 아버지 사도세자 무덤과 관련한 비슷한 일화[58]가 있다.14. 사관 혐오
임금의 모든 행적을 기록하여 실록으로 만드는 사관들을 매우 싫어했다. 말에서 낙마한 뒤 사관들에게 비밀로 하라 했지만 당연히 사관들은 기록, 게다가 민인생이란 사관은 '내가 쉬는 편전에 들어오지 말라' 하는데도 기어들어왔다가 잡혔을 정도였다고...15. 코끼리 사육
한반도에서 코끼리를 처음 길들여본 왕이기도 하다. 일본에서 바친 코끼리를 선물받았으나, 코끼리가 사람을 죽이자 다시 일본으로 되돌려보내려 했지만, 아무래도 선물받은 개체이다 보니 대신 섬으로 유배하는 선에서 끝냈다. 발단은 이렇다. 코끼리가 조선에 들어오면서 조선 전체는 이 처음보는 짐승에 놀라 서둘러 구경을 오고 난리법석이었다.[59] 그런데 문제는 전직 공조판서인 이우가 이 코끼리를 보고 대놓고 놀려대다 침까지 뱉는 바람에 노한 코끼리가 화를 내며 그를 밟아 죽였다는 거다.기록상으로 보면 코끼리는 조선 입장에서는 애물단지였다. 만약 1500여년 전 로마에서 잡혔다면 이 코끼리는 황제 앞에서 글자를 쓰는 등의 재주를 익혀 나름대로 쓸만한 수준이 되었겠지만 조선은 코끼리도 없고 코끼리가 나는 나라가 주변에 있는 것도 아니었기에 이런걸 할 수 없었고 결정적으로 그걸 감안해도 코끼리는 키우는데만 너무 많은 비용을 소모하는 동물이었다.
16. 흑역사
고려가 원나라에 그랬듯 조선 역시 명나라에게 공녀를 바쳤는데 이를 모면하기 위해 딸의 머리카락을 자르거나 얼굴에 침이나 뜸을 들이거나, 약을 붙이는 등의 방법을 쓰는 자들에겐 왕명을 거역한다는 명분으로 엄벌에 처하며 가산까지 몰수하겠다고 엄포를 놓았다. 결국 300명의 공녀 후보자를 44명으로 압축했다가 5명으로 최종결정되었는데 태종은 환궁한 후 대신들에게 대상자들로 선정된 여자들에 대해 '누구는 얼굴이 관음보살같아 애교가 없네, 누구는 입술이 넓고 이마가 좁네 그게 무슨 인물이냐?' 라고 불평했다고 한다. 공녀 차출에 대해 원통함을 느끼며 혹시나 자살시도라도 하지않을까 걱정했던 중종(조선)과는 정반대.
[1]
태종이 과거에 급제했던 여말시기에는 공민왕의 정책 덕분에
정몽주와
정도전같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성균관에서 배출되던 시기였다. 따라서 당시의 과거급제자들은 그 이전 시기와는 다르게 우대받고 존경받던 최고의 엘리트들이였으며, 이와 대비되게 이성계는 고관 직위에 있었지만 지방 군벌 출신이라는 이유로 멸시받고 있었다. 이렇게 과거급제의 중요성이 대두됐을 시기에 해낸 이방원의 과거 급제는 개인뿐만 아니라 가문 전체의 영광이였고(나이가 기록된 사람 중 최연소 급제), 이성계가 이방원의 과거급제 홍패가 왔을 때 그 앞에서 절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을 만큼 가문의 격을 높여주는 일이였다. 또한 당시 명문가였던
여흥 민씨와의 혼인도 이뤄질 만큼 중차대한 일이였다.
[2]
세자가 양위에 찬성하면 아버지를 제끼고 왕위를 차지하려는 욕심이 원래부터 충만했던 불효자가 되고 신하가 양위에 찬성하거나 순순히 받아들이면 주상 전하의 신하가 아니라 양위에 찬성한 불손한 세자 라인에 탑승한 세자의 신하가 되는 것이다. 둘 중에 한쪽이라도 통촉하여 달라고 외치지 않으면 세자랑 신하가 결탁한 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생전 퇴위 및 양위 문제만 나오면 세자고 신하고 납작 엎드려 "차라리 소신을 죽여주시옵소서 전하" "전하께서 아직 이리 강건하신데 어찌... 통촉하여 주시옵소서" 를 외치는 것이다. 적극적으로 어필하지 않으면 주상에게 찍혀서 황천가는 선물로 사약을 받을 지도 모르기 때문.
[3]
더욱이 세자도 신하들처럼 "아니되옵니다." 를 외쳐야 했다. 나이가 적든 많든 상태가 좋든 나쁘든간에 이래야 했다. 안 하면 세자는 불효자로 찍히고 입지마저 약화될 가능성이 컸으니까.
[4]
이 때는 신하들이 어쨌거나 반대를 해야 했기에 반대를 외치자 아예 세종에게 군주의 복장을 입혀서 '이번엔 진짜다.' 라는 의미를 전달했다. 태종 의도대로 그걸 본 신하들은 더 이상 반대없이 따랐다. 군주가 이 정도로 뜻을 확고하게 보인다면 적당히 구색맞추기용 반대 몇 번 하고 따라야지 안 그러면 그것도 또 불충이라...
[5]
1383년 17살의 나이로 문과 17등 급제.
조선시대 기준 병과 급제
[6]
한마디로 "좌의정은 말 하나는 남 비위 맞춰주는 데 선수야". 세종실록의 1422년 5월 9일 박은의 졸기.
[7]
만수무강에 들어가는 글자들이기도 하다. 한편으로는 '수이강 사건'이라 하여 송시열의 인성질(...) 사건의 글자이기도 하다.(수이강)
[8]
여기서 송감은 중국 송나라의 역사를 편년체로 기록한 책으로, 중국의 기본 역사서들인 '흠정
24사' 에는 들어가 있지 않지만(송나라 때의 역사서로는 <
송사>가 들어간다) 왕이 서연에서 공부해야 하는 역사서 가운데 하나다.
[9]
세종실록 5권, 1년 9월 28일 기사.
[10]
종묘에 참배
[11]
사냥이 필수이자 생존인 국가라면 모를까 조선처럼 농경 국가라면 군주의 사냥은
양날의 검이다.
[12]
참고로 저 당시 실록을 기록하던 사람이 바로 민인생. 근데 이 사람은 거의
스토커 수준이라서 태종이 측근들만 데리러 갔을 때는 몰래 일행인 척 하면서 따라가질 않나, 한 번은 태종이 내려가다가 다리를 헛딛은 적이 있었는데 누가 보지 않았나하고 안심했지만 민인생은 왕궁의 돌다리 아래에서 다 지켜보고 있어 적어놓았고, 태종이 잠자리에 들려고 할 때 뭔가 인기척이 있어서 놀라 병풍을 치우니 민인생이 있질 않나... 태종 입장에서는 거의 공포 그 자체였다. 참다못해 한 번은 호되게 호통친 적이 있었으나 민인생이 그 대화 자체도 적겠다고 하자 꼬리를 내렸지만, 나중에 보복으로 사관에서 짤리게 만들었다. 아무리 날뛰는 사관이라도 자리 앉히고 내리게 하는 것은 왕의 몫 압권인 것은 귀양명을 받은 와중에도 마지막으로 사초를 쓰게 해달라 하여 7월 11일, 임금께서 사관 민인생을 귀양보내시다'라고 기어코 기록을 남기고 떠났다는 것이다.태종이 좀 봐줬나보다. 이 이야기는
조선왕조실톡 51화, 책 <조선 백성을 사랑한 바른말쟁이들>(제목을 보면 감이 오겠지만 아동서다) 등에도 실려있다.
[13]
태종이 아니라 정종실록의 기사이기는 한데, 이 해 11월에 태종이 즉위했기 때문에 이 기사에서 가리키는 중궁은
원경왕후가 맞다. 조선 초에는 새 임금이 즉위한 해 12월 기록까지 선왕의 실록에 포함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더불어 이 이야기는
용의 눈물에도 묘사되어 있는데, 태종이 경연청에서 이부자리를 펼치면서 친구이자
지신사였던 박석명과 이야기를 나눈다.
[14]
김우는 2차 왕자의 난 때 활약한 공신이라 벌주지 않았다.
[15]
혜선옹주 홍씨로, 기명 가희아(可喜兒). 드라마
하녀들에서
이채영이 연기한 인물이다. 이것과 비슷한 일화가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
신>에도 나온다. 다만 거기서는 그게 화가 되어 신하들이 역모를 꾸며 결국 나라가 망한다.
[16]
이 때문에 이직은 딸을 태종에게 후궁으로 들여서 정가에 복귀하려 하는 거 아니냐며 대간들에게 비판을 들어야 했다.
[17]
근데 정작 본인 치세에 재가금지법을 만들었고, 이는 후대에 경국대전에 그대로 실려나온다.
[18]
실제로
2차 왕자의 난 때 이방원은 안 돌아오고 이방원의 말만 집으로 찾아오자, 남편에게 무슨 일이 생겼다고 생각해서 직접 창을 들고 나가 싸우겠다며 달려나가려 한 일이 있었을 정도였다. 한반도 역사상 현재의 대한민국 다음으로 여성과 남성의 사회적 권력이 동등했고 망국 시기까지 외척과 박터지게 싸웠던 고려의 영향을 받은 인물이라서인지는 몰라도 굉장히 호전적인 성향이었다
[19]
서모인
신덕왕후가 살아있을 때, 태종이 신덕왕후의 여종과 정을 통했다고도 하니 말 다했다. 다만 이때는
원경왕후도 시계모인 신덕왕후가 싫어서인지, 신덕왕후의 앞에서는 이 여종을 자신이 혼내주겠다고 해놓고, 뒤에서는 몰래 칭찬해주긴 했다.
[20]
말이 12월이지 이게 음력이다. 양력으로는 그야말로 한겨울인 1월이라는 것인데, 이런 행위는 "얼어 죽어라!" 라는 것과 다를 바 없다.
[21]
...라지만 이 일은 태종이 일방적으로 밝힌 거라...
[22]
투기, 즉 질투는 당시 사회에서 해서는 안 되는 것들 중 하나였다. 더구나 왕실에서, 그것도 왕비가 투기를 했다는 것이 알려진다면 왕실의 체면이 그야말로 넝마꼴이 되는 것이다. 하물며 왕실의 생활은 그 나라의 생활양식을 대표한다고 봐도 무리가 없을 정도인데 왕비가 대놓고 사회의 금기를 행한다면...
[23]
여기에서 말하는 아들은 정실 부인이 낳은 적자를 가리킨다.
정종은 정실 부인
정안왕후 김씨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가 없었고, 전부 다 첩들과의 사이에서 낳은 서자들뿐이었다. 그리고 이 일은 태종이 뭘 하든 일절 간섭하지 않던 정종이 국정에 관해 발언한 유일한 사건으로서, 아무리 조용히 지낸다지만 이것만은 동생이 하는 행동이 막장으로 보였나 보다. 사실 내명부의 권한을 뺏는 건 폐비에 준하는 거라 부담이 큰 일이었을뿐더러 좋지 못한 선례도 되었을 것이다.
[24]
태종실록 12년 6월 "중궁이 해산했고 약 덕분에 난산을 하지 않았다"며 상을 내린 기록이 있다. 이때
원경왕후의 나이는 무려 47살...
[25]
태종의 적자 4남 중 막내인
성녕대군은 태종이 즉위한 후에 태어났다.
[26]
원래
왕자든
공주든 결혼하면 궐 밖으로 나가야 한다. 특히나 신분에 상관없이 왕세자가 아닌 왕자는 10살 이상이 되면 궐 밖에 나가는 게 법도였다. 물론 궐 밖에 나간다고 맘대로 활동하는 건 불가능하지만.
[27]
다만 양녕대군의 장인 김한로는 세자의 장인이라서 그런지 고위직에서 계속해서 있었는데, 일설에 따르면 허물이 많은 별볼일 없는 인사이기에 그냥 두었다라는 이야기도 있다. 그에 비하면 민씨 형제들은 공신에, 제법 능력이 출중하였고, 심온의 아비는 여말에 이성계와 어깨를 나란히 하던 인물에, 심온 자체도 능력이 출중한 인물이였다. 아마도 뛰어난 외척들이 발호하는 것을 방지하고자한 측면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28]
즉, 왕의 총애가 없는 중전은 그냥 끈 떨어진 연에 불과하니 곧 외척의 발호를 견제하는 효과를 본다.
[29]
자기 의견을 개진하거나 표현하는 능력이 없었음을 의미한다. 이런 성격은 신하들에게 휘둘릴 가능성이 커서, 태종은 왕이 될 자질이 효령에겐 없음을 밝힌 것이다.
[30]
정말이지 무시무시한
책벌레였다. 심지어 병상에서조차 책을 읽는 것을 그만두지 않았다. 보다 못해 아버지였던 태종이 처소의 모든 책을 압수해 오라고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충녕대군은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은 책을 가져다가 그것을 다 떨어질 때까지 읽으며 충족하였다는 일화까지 있으니...
[31]
이를 토대로 볼 때, 세종은 애주가는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한편으로 보면 사교적인 성격을 가진 술자리에는 어울리는 인물이 아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32]
위에서 언급한대로 하다 못해 외교사절을 접대함에도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이어가기 위한 목적으로도 필요한 것이 음주인데 효령은 금주가여서 이에 대한 문제가 있을 것을 언급했던 것.
[33]
이런지라 역사에 만약은 없다지만 만약 광해군이나 소현세자나 사도세자가 태종 아들로 태어났다면 어땠을까 하고 상상하는 사람들도 있다. 최소한
쪼잔한
아버지의
질투로
견제당하거나
강박증 아버지에게
학대당하다 정신질환이 오는 지경까지는 안 가고 나름 예쁨받았을 테고, 잘 풀렸으면 성군이 되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니.
[34]
그나마 사간원 측은 세자가 죄를 뉘우치면 복위시키라는 여지를 남기긴 했다. 하지만 폐세자와 동시에 충녕이 세자가 되는 것이 태종과 신하들 사이에서도 당연시되는 것으로 보아 단지 태종을 배려한 표현이었을 듯하다.
[35]
양녕대군 스스로도 예로부터 나 같은 처지에 빠지고 살아남은 경우가 없다고 한탄했다.
[36]
아이러니하게도 양녕대군은 세종의 배려를 받아 죽지 않고 살았음에도, 세종의 손자이자 자신에게는 조카손자인 단종을 죽이는데 일조하여 모두의 예상을 다시 한번 빗나가게 한다.
[37]
그러나 양녕이 가출했다 돌아온 바로 그 달에 세종과 사냥을 나가면서 '진작에 노는 데 엉아도 좀 끼워주고 그랬으면, 이 엉아가 가출을 왜 했겠냐?' 라고 농담이나 해댄 것을 보면 딱히 부끄럽지 않았던 듯하다...
세종 1년 2월 28일 기사
[38]
이때 양녕대군은 "아버지도 첩실 여럿 들이고 재미 보시는데 나는 왜 못 하지?"라는 취지의 편지를 써서 태종의 뒷목을 잡게 만들었다.
[39]
그 할아버지가 아버지와 화해하기 전
무력 봉기를 일으킬만큼 한성깔하는 인물이기도 했다.
[40]
실록에는 "만약 학문을 좋아하지 않는다면 비록 한 궁궐 안에 같이 있다 하더라도 이를 어찌 하겠느냐? 또 장년(壯年)의 나이이다. 만약에 늘 사람으로 하여금 정찰하게 한다면 어찌 서로가 해침이 없겠느냐?" 라며 신하들의 청을 뿌리치는데
350년 후에 어떤일이 벌어지는가 보면.....
[41]
정종은 세종이 왕위에 오른 이후에 승하하였다.
[42]
즉, "니가 그러고도 사람이야?" 라는 뜻
[43]
예외적으로 태조가 중병에 걸렸을 때는 불사를 일으키고 기도를 올리면서 팔뚝을 지지기
모습까지 하긴 했지만, 부모의 쾌유를 기원하는 불사는 유교에서 중시하는 효심의 표현으로 받아들여져 사대부들도 크게 문제삼지 않았다.
[44]
당시 도성 내에 사찰조성은 국법으로 금지되어있었다. 즉 왕이 아들 죽어서 슬프다고 대놓고 법을 어기려고 한 것. 그것도 아버지가 도성 안에 지은 의붓어머니 무덤도 불법조성이라고 파헤쳐서 딴데 처박아버리고 심지어 자기 묫자리에 원찰 짓는 것도 퇴짜놓은 양반이... 정확히는, 한양 내에 있는 성녕대군의 집(훗날 나이가 차면 나가서 살 집)을 절로 개축하자고 한 것이지만 당연히 신하들은 반대했고 대신에 성녕대군 묘 근처에 암자를 하나 지어서 명복을 빌어주자고 제안한 것을 태종이 받아들인 것이다.
[45]
사실 부엉이란 새 자체가
야행성인 데다 우는 소리마저 섬뜩한 면이 있는지라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 있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단지 그 두려워하는 사람이 하필 세상 무서울 게 없을 것 같은 이미지의 호랑이 임금님 태종이라는 게 좀 아이러니컬할 뿐.
[46]
임금의 이주, 이사
[47]
금성을 가리킴.
[48]
왕이나 여왕을 상징하며 천궁도의
사자자리로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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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예로 바로 아래에 자신과 자신의 아들들 이름을 쓴 공을 찬 아이들을 곱게 살려보낸 태종과는 달리 홍무제는 자기 황후를 왕발이라고 놀린 이들을(이는 중국에 있던
전족때문이었다.) 다 잡아 싸그리 응징하려다가 황후인 마씨가 만류하고서야 그만두었다.
[50]
개국공신이면서 태종의 최측근 무신인
조영무의 장남. 무신인 아버지와는 달리 과거에 급제한 문신인데 세종실록의 졸기를 보면 사관들에게도 꽤 사람 좋고 능력도 좋은 관료라는 평가를 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51]
몰랐다고는 하나 스토커에 가깝게 태종을 따라다니던 그 사관 민인생이 아닌 이상에야(...) 감히 태종의 침전에 함부로 들어갔다는 것은 "나 죽여주십시오."나 마찬가지이다. 현대로 쳐도 청와대 직원이 친구 불러다 같이 놀면서 숙직실에서 잤는데 그 친구가 길을 잃고 대통령 침실에 들어갔다면, 그 친구도 한바탕 곤욕을 치를 것은 물론 친구를 부른 직원까지도 책임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52]
다만 영남 내륙 지역은 문경새재를 넘어서 남한강 수로를 이용하였다. 이게 바로
영남대로로 훗날
중부내륙고속도로의 원형이 되기도 한다.
[53]
이 구간이 얼마나 험했냐면, 경부고속도로를 순차적으로 개통할 때에 제일 늦게 개통된 곳인 데다가, 실제로 건설 당시 수요와 지형 문제로 2차로 건설까지 검토된 바 있었다. 2000년
추풍령 경부고속도로 연쇄추돌 참사가 벌어진 적도 있었다.
[54]
정도전 사망시 두 아들은 아비를 구하려다가 죽었지만, 장남은 임금을 모시고 있어서 살아서 수군이 되었다가 태종 7년에 복직되었고, 세종시기 형조판서까지 지내다가 세상을 떠났다.
[55]
물론 민제는 신중하게 행동해서 첫번째 찾아왔을 때는 거절, 두번째 찾아왔을 때도 거절했지만 정히 그렇다면 정승들이라 찾아가보라고 했다. 아들들도 역시 신중하게 행동했다. 하지만 이 때 이미 태종은 김한로의 딸을 세자빈으로 낙점해두었기에 자기도 모르게 이딴 짓을 한 것에 분노해 공부, 이현 등을 잡아다 벌하다가 곧 풀어주었다. 참고로 김한로의 딸로 낙점한 것도 외척 경계 때문이었다.
[56]
사실 세종대왕의 많은 업적은 태종이 다져놓은 기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아버지가 깨끗하게 닦아놓은 부지에 아들이 벽체를 쌓고 내부 정리를 하여 조선이라는 멋진 집을 완성시킨 것. 물론 그 집이
점점
기둥뿌리가
흔들
리다
옆집에
집문서까지 처절하게 빼앗긴 것은 꽤 나중 일이다
[57]
맹꽁이 서당에도 이에 관한 이야기가 있는데, 이 대성일갈을 들은 메뚜기가 "무식한 말씀 마시오. 메뚜기는 초식곤충이라 곡식 외엔 안 먹소이다."라고 대꾸했다. 그러니깐 먹은거다.
[58]
송충이가 크게 번져 사도세자 묘 근처의
소나무가 모두 말라죽는 일이 일어났다. 인부들이 잡아온 송충이를 집어 "내 아비가 억울하게 죽어 이 곳에 누워 계신데 그 나무를 갉아먹는단 말이냐?"하고 호통을 치고 그 송충이를 씹어 삼켰다. 그러자 하늘에서 까치떼와 까마귀떼가 내려오더니 그 송충이들을 다 먹어치웠고, 이후로 무덤 근처에 송충이가 싹 사라졌다는 전설. 당태종이나 조선 태종의 일화가 백성을 위한다는 면모를 강조한다면, 정조의 일화는 효심을 강조하는 전개다.
[59]
실록에서는 귀는 파초잎과 같고 눈은 작고 네 다리는 통나무, 코는 누에와 같다고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