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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0-31 21:44:41

임꺽정

임거정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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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은 (임걱정)

(1504년? ~ 음력 1562년 1월 9일 이전[1])
1. 개요2. 이름에 대해3. 생애
3.1. 출생과 도적 활동의 시작3.2. 세력 확장3.3. 체포 과정3.4. 정말 잡았는지의 의문
4. 평가5. 기타6. 대중매체에서7. 같이보기

1. 개요


▲ KBS 역사스페셜


▲ KBS 역사저널그날

조선 명종 시절에 활동했던 도적이다. 조선 시대에도 도적은 많아서 소위 ' 조선 시대 3대 도적'으로 홍길동, 임꺽정, 장길산이 거론되기도 한다. 다만, 임꺽정처럼 수 차례 관군과 맞붙어서 이겼을뿐만 아니라 거의 한 나라를 뒤집어엎을만큼 패악질을 부렸던 도적은 전무후무하다.

2. 이름에 대해

한글로는 임'꺽'정이라 불리지만 한자 표기는 林'巨'正이라 표기한다. 巨(거) 밑에 'ㄱ'을 붙여 (걱)이라고 쓰기도 한다. 이 글자는 한국에서만 쓰이는 한자인 국자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임거질정(林巨叱正)'으로 기록되었는데, 叱(질)은 전통적으로 사이시옷을 나타내는 표기이긴 했으나 조선시대의 이두 표기에서는 ㄱ 받침을 나타내기도 했으므로[2] 통상적으로 알려진 독음과 같이 '임꺽정'으로 읽을 수 있다.

3. 생애

3.1. 출생과 도적 활동의 시작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시 유양동 출신이었으며 백정 신분으로 태어났다. 단 일반적으로 백정 하면 생각하는 짐승 도축하는 백정이 아니라 버드나무나 갈대로 생활도구를 만드는 일을 하는 고리백정이었다고 한다. 도적 활동은 당시 양주의 남쪽 지역에서 했다. 이곳은 현재 남양주시 지역이다.

임꺽정이 도적이 된 명확한 계기나 시기는 알기 힘들지만 아마도 백정으로서 겪어야 할 신분적 차별과 당시의 혼란스러웠던 정치 상황으로부터 영향을 받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임꺽정이 도적으로 활동하던 무대가 되었던 명종 대에는 명종의 나이가 아직 어린 탓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 수렴청정을 했고 그 동생인 윤원형이 권력을 장악하고 부정부패와 전횡을 일삼아 나라가 안팎으로 어지러웠으며 관리들이 부패하여 민생이 어려웠던 시기였다.

그는 원래 황해도 일대에서 갈대를 구해 생활도구를 만들었다. 이 시기에는 간척 기술이 발전되며 황해도 일대가 농경지로 바뀌었는데 간척에 성공하면 그대로 토지 소유권을 인정해주는 제도가 시행되면서 앞 다투어 간척지 개발에 나선 권문세가들의 횡포가 시작되었다고 하며, 근처의 소농민은 땅을 뺏겨 유랑하는 신세가 되었다고 한다. #

맹꽁이 서당 조선편에서는 명종 10년에 전라도에서 을묘왜변이 일어나자 참전해 큰 공을 세웠으나 백정이라 상은 없다고 사또 혹은 목사가 개무시해서 그로 인한 분노가 그를 도적의 길로 이끌었다고 언급한다.

임꺽정은 민심이 흉흉해지자 그 틈을 타서 자신과 비슷한 처지의 불평 분자들을 선동하여 황해도 함경도를 중심으로 각지의 관아와 민가의 재물을 훔치며 종횡무진하였다. 이때 악명이 얼마나 대단했는지 임꺽정이 한 고을에 나타났다 하면 짐을 나르던 사람들이 길을 나서기를 두려워하여 교통이 끊어질 지경이었다고 전한다.

3.2. 세력 확장

임꺽정이 거느린 도적패는 1559년 이후로 제법 세력이 커져서 황해도와 경기도 일대에서 관아를 습격하여 관리를 살해하고 재물을 약탈하는 등 행패를 부렸다. 2018년 방영된 KBS '역사저널 그날' 171회에서 임꺽정 관련해 도적 활동은 했지만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눠주는 것 같은 의적 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없다고 나온다. 일부 백성들이 임꺽정에게 호응한 것도 임꺽정의 보복을 두려워했고 자신들을 괴롭히던 관리들을 임꺽정 무리가 대신 처치해 주었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했다.

관아나 양반들을 습격해 약탈한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줬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는 후대에 만들어진 이야기일 뿐 사실과는 다르다. 《 조선왕조실록》이나 다른 어떠한 기록에도 임꺽정이 재물을 백성들에게 나누어주는 등 의적 활동을 했다는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임꺽정이 홍길동보다는 악행을 덜했는데 홍길동은 만난 사람들마다 입을 막기 위해서 족족 살해하고는 했지만[3] 임꺽정은 자신의 위치나 자신이 왔다 간 것을 알려준 이들만 손을 보았다.

임꺽정 무리는 점차 대담해져서 여러 지역에 신출귀몰 출몰하여 조선 전역을 무법천지로 만들어 놓았다. 이들은 세력 범위를 넓혀 개성에 나타나는가 하면 1560년 한성에까지 출몰하였다. 일당들이나 가족들이 행여 잡히기라도 할 경우에는 관아로 쳐들어가서 건물을 때려 부수고 붙잡힌 일당들을 구출해가기도 하였다.

사태가 이 지경에 이르자 임꺽정 이하 도적떼는 더이상 일개 도적떼가 아닌 '국적(國賊)' 즉 나라를 어지럽히는 역적 및 반체제적 세력( 반란군)으로 간주되었다. 조정에서 평산부와 봉산군의 군사 500명을 보내 평산에 집결한 임꺽정의 무리를 토벌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임꺽정은 되려 관군을 무찌르고 군관을 살해하였으며 군마를 약탈해갔다. 결국은 명종이 직접 어명을 내려서 황해도, 경기도, 평안도, 강원도, 함경도 등의 5도에 대장을 정하여 임꺽정을 잡도록 하였으며 모든 관청에 명을 내려 자잘한 업무는 쉬게 하고 임꺽정을 잡는 데에 주력하라고 명할 정도로 임꺽정의 악명은 자자했다.

그러나 임꺽정은 체포령이 내려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전국을 헤집고 다니면서도 3년 동안이나 잡히지 않았다. 오히려 개성부의 포도관 이억근이 추적 도중 살해당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 소수 병력만 이끌고 무리하게 갔다고 웃기다는 사람도 있고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임꺽정의 부하 하나가 "웃기네 우릴 뭘로 보고"라고 디스하기도 하는데 실상 이억근은 실록에도 이미 도적 수십 명을 잡았다고 기록된 경험 많은 포도관이었다. 명종 14년 3월 27일의 실록 기록을 보면 정작 이억근은 소수 병력만 끌고 들어가는걸 반대했는데 개성부 도사가 20명만 주고 억지로 보냈다고 나와 있다.

그리고 봉산군수이자 왕실의 먼 친척인 이흠례를 살해하기로 계획하는 등 임꺽정 일당의 위세는 더해졌다

반대로 장수들과 수령들이 포상과 독촉 때문에 마음이 급한 나머지 엉뚱한 사람을 잡아다 놓고 임꺽정과 한패라 하여 벌주고 고문하다가 사람잡는 일도 여럿 있었다. 이렇게 허위 사실로 함부로 백성을 죽이거나 허위 보고를 올리는 이들도 파직당하거나 유배당하는 등 온 나라가 혼란에 빠졌다.

3.3. 체포 과정

이런 난리통 중에 1560년 11월 24일경 임꺽정의 참모였던 도적 서림이 붙잡혔다. 임꺽정과 도적떼의 사정을 낱낱이 알고 있었던 서림은 관군의 앞잡이 노릇을 하여 임꺽정을 추격하였고 임꺽정의 형 가도치와 김세준 등 임꺽정 일당들이 체포되었다.

임꺽정은 이후로도 잡히지 않고 1년간 도피 생활을 하였으나 1562년 1월 3일경 황해도 서흥에서 군관 곽순수와 홍언성 등에게 사로잡힌 뒤 확실하지 않은 이유로 사망했으며 이후 명종은 1월 8일에 토벌군들을 치하했고 그 뒤로도 임꺽정의 잔당들은 남아 저항했지만 대부분 처단된다. 임꺽정이 죽었다는 기록은 확연하지만 어떻게 죽었는지 실록에 구체적인 기록은 없다.

3.4. 정말 잡았는지의 의문

다만 이전에 가짜 임꺽정 체포로 여러 번 곤란을 겪었던 점, 명종이 임꺽정의 범죄 역모 행위로 간주하여 좌의정과 우의정에게 임꺽정이 잡히면 궁궐에서 심문을 지시했던 점(명종 16년 9월 7일), 임꺽정을 체포한 후 1월 13일 내통자 서림의 처형을 논의한 점, 1월 17일 형조에서 "도적의 괴수는 이미 처단하였습니다."라고 아뢴 기록 등을 종합해보면 임꺽정은 1월 3일쯤 체포되자 한양으로 압송되어 1월 8일쯤 임꺽정의 신분을 확인하고 1월 13일쯤 일당들과 같이 처형당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해서 백과사전 등에서는 그저 막연히 임꺽정이 사로잡힌지 15일만에 처형되었다고 써놓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그전에 1월 9일에 사간원이 올린 글에서 임꺽정이 죽었다는 이야기가 언급이 된다. 그 이튿날인 1월 10일에 임꺽정을 토벌한 남치근의 부대가 한양으로 올라왔기에 명종이 남치근을 만나 토벌보고를 듣기도 전에 임꺽정을 급히 처형해야 할 이유도 없었기에 임꺽정이 정말로 처형된 것인지 의문이 든다.

애초에 '도적의 괴수를 이미 처단하였다'는 저 말부터가 한양에 압송되기 전 남치근이 임의로 즉결처분했거나 임꺽정이 부상으로 사망한걸 토벌군과 조정의 공로를 띄우기 위해 처단한걸로 치는 뉘앙스로 읽힐 수도 있을 뿐더러 그렇게 전국을 뒤흔든 도적이면 참수한 후 저잣거리에 머리를 효수할 법도 한데 기록에는 그런 행적도 없다.

야사인 《기재잡기》에 따르면 임꺽정은 군관 곽순수와 홍언성 등의 토벌군들에게 포위당하여 탈출할 길이 없어지자 토벌군 복색으로 변장한 후 꾀병을 부리면서 은근슬쩍 뒤로 빠지려고 했는데 토벌군 병졸들이 이를 수상히 여겼고 마침 서림이 임꺽정을 알아보고 토벌군에게 알리는 바람에 들켜 급히 도주하였다. 추격하는 토벌대가 화살을 난사하자 임꺽정은 결국 여러 대의 화살에 맞은 후 "내가 이렇게 된건 모두 서림 때문이다. 서림아! 서림아! 네가 어찌 관군에 투항할 수 있느냐?"라고 서림을 질책한 후 사망하였다는 야사가 있다. 실록에서 자세한 정황을 설명을 안해놨기에 아무리 개인문집인 기재잡기의 기록이라 해도 일단은 이것을 중심으로 파악할 수 밖에 없는데다 실록에서 임꺽정이 별다른 앞뒤 설명도 없이 그저 죽었다고만 기록했기에 이를 토대로 보면 남치근으로부터 단순히 임꺽정의 신변을 확보했다는 보고만 들은 조정이 6일이나 지나서야 임꺽정이 죽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4. 평가

도적 두목 치고는 용맹함이 상당해서 추격해온 관군과 직접 맞부딪혀서 무찌른 일도 있었고, 계략을 짜내 관군을 골탕먹인 일도 있었다. 이를테면 눈덮인 산에서 관군들에게 쫓기게 되자 일부러 신발을 거꾸로 신어서 발자국을 남겨 되려 도적떼를 쫓던 관군들이 산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게 만들기도 하였다.

이처럼 임꺽정은 전투력과 교활함을 두루 갖추었고, 리더십과 카리스마도 상당했는지 상인이나 농민, 백정 등 다양한 출신의 사람들이 임꺽정의 휘하로 몰려들어 도적이 되는 일도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행적을 고변하는 자는 잡아서 배를 갈라 버리는 무시무시한 협박도 했다고 하니 역시 도적은 도적.

당대의 명종실록의 기록을 보면 일단 임꺽정을 가리켜 희대의 흉악범 정도로 묘사하고 있지만 실록을 편찬한 사관은 임꺽정과 같은 도적이 나타나 날뛸 수 있었던 것도 다 나라가 혼란하기 때문이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평가를 두고 사관이 대단하다고 하는데, 대단한 게 아니라 당연한 의무다. 거기에 사초는 아무도 볼 수 없고 누설할 수도 없기 때문에 자유로운 표현이 가능했다. 사실 이러한 문화는 실록을 열람했던 연산군이 이후 폭군으로 흑화하면서, 이후에도 실록을 국왕이 열람하려고 하면 신하들은 '그것은 폭군 연산이나 하는 악행입니다'라고 뜯어말릴 계기가 생겼기 때문이다. 다른 경우는 국법이나 원리원칙이 있더라도 왕이 어거지를 쓰면 어쩔 도리가 없었다.
盜賊之熾發, 由於守令之掊克, 守令之掊克, 由於宰相之不廉. 今之宰相, 貪汚成風, 不知紀極. 是以守令剝民膏血, 以事權要, 啖豚咀雞, 無所不至, 而民窮無告, 其勢不爲盜, 則無以資生, 故相率而自投於死亡之地, 以僥倖刦奪爲事. 是豈民之性也哉? 苟朝廷淸明, 而無惟貨其吉之心, 守令皆得如龔, 黃者而任之, 則帶釰者買犢而歸農矣. 安有殺越無忌, 如此之甚者乎? 不然, 徒欲率兵趕捕, 則抑恐隨捕隨起, 將不勝其捕矣.
도적이 성행하는 것은 수령의 가렴주구 탓이며, 수령의 가렴주구는 재상이 청렴하지 못한 탓이다. 오늘날 재상들의 탐오한 풍습이 한이 없기 때문에 수령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어 권력자들을 섬겨야 하므로 돼지와 닭을 마구 잡는 등 못 하는 짓이 없다. 그런데도 곤궁한 백성들은 하소연할 곳이 없으니[4], 도적이 되지 않으면 살아갈 길이 없는 형편이다. 그러므로 너도 나도 스스로 죽음의 구덩이에 몸을 던져 요행과 겁탈을 일삼으니 이 어찌 백성의 본성이랴? 조정이 청명하여 재물만을 탐하지 않고 어진 이를 수령으로 가려 뽑는다면 칼을 든 도적들이 송아지를 사서 고향 땅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고 군사를 거느려 추적하여 붙잡으려고만 한다면 붙잡은 대로 또 뒤따라 일어나 장차엔 다 붙잡지 못할 것이다.
명종실록 명종 14년(1558년) 3월 27일 기해 2번째기사

곧 '윗놈들이 잘만 했으면 이런 난리도 나지 않을 것이다.' 정도로, 윤원형, 문정왕후 같은 외척을 비판하는 내용인데 20세기 이전까지 만연한 유교식 도덕사관에 기반한 평가다.

또한 흉악범이었다는 점만 제외하면 천민치고는 나름대로 능력도 꽤 있었던 것 같다. 오합지졸 도적 무리를 이끌면서도 관군을 발라 버렸고, 몇 년 동안 잡히지도 않으면서 전국을 휘저으며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았던 것만 봐도 범상치 않은 도적이었던 것은 확실하다.

민간 설화에서는 의적으로 많이 묘사되곤 하지만 현실은 시궁창이다. 비록 당대에 일부 백성들에게 지지를 받기도 했다지만 이는 그저 임꺽정이 평소에 꼴보기 싫던 탐관오리와 부자들을 박살내는 모습이 보기 좋아서 그랬을 뿐이다.[5] 도적들이 다 그렇듯이 백성들이나 행인들도 약탈 대상이었다. 더욱이 자신을 밀고한 백성들의 민가에 불을 지르고 이들을 학살하는 등의 처참한 짓도 마다하지 않았다.

백정을 조선전기와 조선후기로 나누면서 임꺽정의 문제가 조선 전기 백정의 문제점을 확대한 것 아니냐는 이야기도 나온다. 조선 전기 백정은 유목집단이 농경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모습으로 마적단의 모습으로 구현되는 데 비해서, 임꺽정 집단의 모습은 보다 전형적인 도적 떼에 가깝다. 조선시대 백정묘사와 수호전의 양산박 도적떼를 두고 비교하면, 임꺽정의 모습은 차라리 후자에 가깝다. 일단 임꺽정 본인부터가 유목집단의 후예로 추정되는 도축백정이 아니라 버드나무로 생필품을 만드는 역을 맡은 고리백정 출신이다.

그리고 임꺽정의 문제를 일반 백정의 문제로 해석하면, 일반 백성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것은 그렇다고 해도 아전들의 도움을 받았다는 부분은 이해하기 어렵다. 다만 홍경래의 난은 수백년 뒤의 일이고, 무역으로 경제력이 발전한 평안도 사람들이 과거에 급제해도 관에서 출세를 못한다고 한 것이 난의 요인이었기에 평안도가 경제적으로 발전하지 못한 이 시대의 생활과는 전혀 다르다. 게다가 출세를 못한 것도 평안도가 무슨 역사성이 없는 지방이어서가 아니라 이곳 출신 명문가가 전란으로 뿌리 뽑혔기 때문이다. 임꺽정은 평안도가 아니고 황해도에서 본격적으로 활동을 했으며, 활동 반경 자체가 경기도와 강원도를 포괄했다. 출신 자체는 경기도다.

5. 기타

파일:03480383_20060812.jpg * 2006년 황해북도 장풍군 덕적리 심복동 산골에서 임꺽정 패거리들의 아지트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집터, 바위굴과 함께 그 곳에서 한 남성의 모습이 조각된 암각화가 발견되었는데, 이 벽화가 임꺽정의 생전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발견된 벽화의 모습은 흔히 생각하던 임꺽정의 모습과 달리 구레나룻, 턱수염이 없으며 눈이 실눈으로 묘사되어 있다. 하지만 이 암각화가 불교 양식인 점도 그렇고, 실눈이나 특유의 목주름 등은 불상의 특징이기 때문에 도적들이 자신의 우두머리를 우상화하기 위해 임꺽정을 부처와 같이 묘사한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일반적인 임꺽정의 외형 묘사도 잘못된 것이라 보긴 힘들다.

6. 대중매체에서

6.1. 소설

6.2. 영화

6.3. 코미디

6.4. 게임

6.5. 만화

6.6. 드라마

6.7. 애니메이션

7. 같이보기



[1] 실록에 임꺽정이 사망했다는 내용이 기록되는 최초의 시점이 1562년 1월 9일이다. [2] 조선 전기의 문헌 《 향약집성방》에서는 박쥐의 옛말인 'ᄇᆞᆰ쥐'를 '발질쥐(勃叱鼠)'라고 표기했으며, 《 우마양저염역병치료방》에서도 붉나무의 옛말 '븕나모'를 한글로 표기함과 동시에 한자로 '블질나모(火乙叱羅毛)'라고 표기했다. [3] 홍길동 항목에도 나오지만 자신을 도와준 백성들의 고변을 매우 경계하여 얼굴 가죽까지 벗길 정도였다. [4] 실제로 수령을 고소할 수도 없었다. [5] 이 마저도 같이 차별을 받던 황해도, 평안도 출신의 북부 민간인들과 천민들에 한정 되었지, 일반 양민들과 노비들에겐 당시 기준으로도 그저 엄청난 규모를 지닌 도적단에 불과했다. [6] 지금은 존재가 거의 잊혀진 소설가인데 유명한 소설은 천추태후를 다룬 거의 유일한 소설인 《자규야 알라마는》으로 2009년 KBS 드라마 〈 천추태후〉의 원작이 되었다. [7] 임꺽정이 부하의 딸한테 욕정을 느끼고 겁탈하려 들다가 실패하자 부하와 딸을 모두 배신자로 몰아 죽여 없앤다거나 청석골 일당이 실수로 동료를 죽였는데 이 사실을 숨기려 죽은 동료가 관군과 용감하게 싸우다 죽었다고 거짓말을 한다든가... [8] 신영균 추정. [9] 소설에 만화풍으로 그려진 삽화가 들어간 것이다. [10] 2000년 KBS 드라마 〈 태조 왕건〉에서는 강 장자 역. 손숙의 남편. [11] 북한에서 제작되었지만 정치색이 비교적 없고 극적 리얼리티가 확보된 작품이었기 때문에 시청자들이 외면하지 않았다는 분석이다. [12] 실제로 북한에서는 주제가의 '악한 무리 쓸어내고' 대목을 '당간부를 때려잡고'로 바꿔 부르는게 유행이었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