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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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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12대 국왕
인종 | 仁宗
파일:인종효릉.jpg
효릉 능침
출생 1515년 3월 20일[1]
(음력 중종 10년 2월 25일)
한성부 경복궁 자선당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즉위 1544년 12월 14일[A] (29세)
(음력 중종 39년 11월 20일)
한성부 창경궁 명정전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율곡로 99
사망 1545년 8월 17일[B] (향년 30세)
(음력 인종 1년 7월 1일)
한성부 경복궁 청연루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로 161)
능묘 효릉(孝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520년 5월 18일[4] ~ 1544년 12월 14일[A]
(음력 중종 15년 4월 22일 ~ 중종 39년 11월 20일)
조선 제12대 국왕
1544년 12월 14일[A] ~ 1545년 8월 17일[B]
(음력 인종 즉위년 11월 20일 ~ 인종 1년 7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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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억(命) → 호(峼)
부모 부왕 중종
모후 장경왕후, 계모 문정왕후
형제자매 9남 11녀 중 4남[8]
배우자 인성왕후 (1524년 혼인)
후궁 숙빈 윤씨, 혜빈 정씨, 귀인 정씨, 양제 윤씨[9]
종교 유교 ( 성리학)
천윤(天胤)
전호 영모전(永慕殿)
묘호 인종(仁宗)
시호 조선: 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
(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
: 영정(榮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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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생애
2.1. 탄생과 세자 책봉2.2. 작서의 변, 가작인두의 변, 의문의 화재 사건2.3. 즉위와 사망2.4. 유언
3. 사후
3.1. 묘호와 시호3.2. 능묘3.3. 을사사화
4. 가계
4.1. 친가( 전주 이씨)4.2. 외가( 파평 윤씨)4.3. 처가( 반남 박씨)4.4. 배우자 / 자녀
5. 기타6. 대중매체7. 관련 문서8.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조선의 제12대 국왕. 묘호 인종(仁宗),[10] 시호영정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榮靖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11] 호(峼), 는 '천윤(天胤)'. 동복형제로는 누나인 효혜공주가 있다. 재위 기간은 8개월로 조선 왕조 사상 재위 기간이 가장 짧은 왕이다.

2. 생애

2.1. 탄생과 세자 책봉

1515년(중종 10년) 음력 2월 25일, 중종 장경왕후 윤씨의 아들로 태어났다.[12]

중종의 계비인 장경왕후가 인종을 임신했을 때 태몽을 꿨는데 아기의 이름을 '억명(億命)'으로 지으라는 것이었다. 이후 인종을 낳은 뒤 위독해지자 꿈이 어떤 계시로 생각되었는지 중종에게 이름을 '억명'으로 지어달라고 부탁하여 원자의 이름은 '이억명'이 된다. 하지만 '억(億)'이라는 이름이 민간에서 많이 쓰는 한자였기 때문에, 세자에 책봉되기 46일 전인 1520년(중종 15년) 3월 23일 피휘를 위해 '이호'로 개명했다.
우부승지 김희수가 원자의 개명단자에 관해 아뢰다
우부승지(右副承旨) 김희수가 ‘ 장경 왕후(章敬王后)의 일남(一男)인 원자(元子)의 아명(兒名) 억(億)을
명에 의하여 호(岵)로 개명(改名)한다.’는 단자(單子)를 써서 올리고서 아뢰기를,
"지난번 원자의 개명 단자(改名單子)에 관하여는 예사(例事)를 몰랐기 때문에 서하(書下)한 것을 즉시 종부시로 보냈습니다."
하니, "알았다."라고 전교하였다.
중종실록》 38권, 중종 15년( 1520년, 명 정덕(正德) 15년) 3월 5일 (계사) 1번째기사.[13]
3살 때부터 책을 읽기 시작하는 등 어려서부터 엄친아의 기상을 풍겼으나[14], 태어난지 며칠만에 어머니 장경왕후 윤씨가 산후병으로 죽어 계모인 문정왕후 밑에서 눈칫밥을 먹어야만 했다.[15] 문정왕후는 형제인 윤원형과 그 첩실 정난정을 수족으로 삼아 권세를 부렸다.

1520년(중종 15년), 왕세자로 정식 책봉된 이후 1524년(중종 19년), 박용의 딸인 인성왕후 박씨 세자빈으로 맞이했다.[16]

2.2. 작서의 변, 가작인두의 변, 의문의 화재 사건

어릴 때는 남곤의 보호를 받았고, 남곤이 죽고도 아버지 중종이 각별히 아끼는 아들이었지만 문제가 있었으니 자신의 소생이자 중종의 서장자 복성군으로 만들려고 호시탐탐 기회만을 노리던 경빈 박씨의 견제 때문이었다.

1527년(중종 22년), 세자의 생일 무렵에 죽은 쥐의 사지를 찢어 불에 지진 다음 동궁전 창가에 매달아놓고 세자인 인종을 저주하는 일이 발생하였다. 사건의 배후로 중종의 서장자이자 인종의 이복형인 복성군과 복성군의 어머니인 경빈 박씨가 지목되어 폐서인 되었다.[17]

동복 누나인 효혜공주와 우애가 두터웠는데, 1531년(중종 26년) 4월 20일에 효혜공주가 외동딸을 출산한 뒤 산후병으로 향년 21세의 젊은 나이에 갑자기 죽자 병이 날 정도로 매우 슬퍼하였다고 한다.[18]

또한, 1533년(중종 28년)에는 동궁(東宮)의 빈청 남쪽 바자(把子) 위에 사람의 머리 모양을 한 물건이 발견되었다. 이 형상에 누군가가 머리카락을 붙이고 이목구비 등을 새겨 목패에 단 다음, 목패에 '세자의 몸을 능지할 것', '세자 부주(父主)의 몸을 교살할 것', '중궁(中宮)을 참(斬)할 것' 과 같은 내용을 적어놓았는데, 이 저주 사건으로 인해 6년 전 폐출된 복성군 모자와 혜정옹주의 남편인 당성위(唐城尉) 홍여(洪礪)가 연루되었다.[19] 경빈의 딸들이자 인종의 이복 누나들인 혜순옹주 혜정옹주 또한 이 사건으로 폐서인 되었다.

대간의 탄핵을 받은 복성군과 경빈 박씨는 마침내 사사되었는데, 나중에서야 이 사건의 배후가 인종의 동복누나인 효혜공주의 남편 연성위(延城尉) 김희(金禧)와 김희의 아버지인 김안로가 꾸민 일임이 드러났다. 이후 인종은 아버지 중종에게 복성군 모자의 신원 회복과 폐출된 두 옹주의 작호를 회복시켜줄 것을 청하였다.[20]

작서의 변으로 경빈 박씨가 처참히 몰락한 뒤에는 세자(인종)를 보위한다는 명목으로 권세를 휘두르는 김안로가 문제가 되었다. 하지만 권신 김안로가 세자의 후원자를 자처한 덕에 세자의 지위는 안정될 수 있었다. 김안로가 몰락한 뒤에 조정의 권력은 그의 외숙인 윤임, 의붓어머니이자 10촌 누나 뻘인[21] 문정왕후와 그 동생 윤원형의 손에 넘어갔다. 흔히들 말하는 대윤(大尹)과 소윤(小尹)의 갈등이 이 시기에 있었다. 문정왕후는 먼 친척이기도 하고 아들을 낳기 전까지는 필요에 의해서 세자(인종)를 적극 감쌌지만[22] 경원대군(훗날의 명종)을 낳게 된 뒤에는 자신의 아들을 세자로 세우기 위해 인종을 정말 죽일듯이 견제했다고 한다.

이런 가운데 세자궁(동궁)에 의문의 화재 사건[23]이 일어나 당시 세자였던 인종이 그대로 타 죽을뻔한 사건이 있었다. 야사에 따르면 이 때 불이 나자 당시 인종이 “어머니( 문정왕후)가 나의 죽음을 원하시니 그에 따르는 것이 효(孝)가 아니겠는가”라며 자리에 앉아 불에 타죽기(燒死)를 기다렸다. 그러나 밖에서 아버지 중종이 나타나 그의 아명인 백돌을 울면서 애타게 부르자 '이대로 죽으면 어머니에게는 효가 되지만 아버지에게는 불효(나아가 '불충')가 된다'는 사실을 깨닫고 밖으로 나왔다고 한다. 증거는 없었으나 세간에서는 문정왕후가 세자(인종)를 죽이려고 벌인 짓이란 소문이 떠돌았으니 문정왕후와 세자(인종)의 관계에 갈등이 심했던 것을 알 수 있다. 정사의 기록에서는 인종이 자고 있는데 동궁에 불이나 자고 있던 세자를 세자빈이 깨워서 구출해낸 이야기이다.[24] 인종은 화재 사건에 대해서도 아랫 사람들을 벌하기 보다는 자신의 잘못에 대한 천벌이라고 자책하는 글을 남겼다.

이후 1538년(중종 33년) 10월, 아버지 중종은 본인의 재위년수와 나이가 세종의 재위년수(32년)와 세종이 승하했을 때의 나이(52세)와 비슷해지자 태종 세종의 고사를 들며 세자에게 선위하려 하였는데, 세자가 음식을 입에 대지 않고 극구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중종의 태종/세종의 고사를 인용하며 전위하고자 하였음
" 태종께서는 문무(文武)가 영명(英明)한 자품을 갖추시고 50여 세가 되도록 큰 병환이 없으셨는데도 어진 세자( 세종)에게 전위하였으니 어찌 우연이라 하겠는가. 이는 우리 나라의 복이었다. 태종께서 전위하신 해가 무술년( 1418년, 태종 18년)이었는데 금년이 또한 무술년( 1538년, 중종 33년)이고 내 나이 50여 세가 되었으니 사정이 같지 않은 것이 아니다. 다만, 세종은 태종에게 수선(受禪)하셨는데 또한 세자( 문종)에게 전위하신다면 그 또한 어려운 일이 아니겠는가. 세종께서 춘추는 50여 세였으나 즉위한 해는 30여년에 불과했다. 그러니 내가 세종을 본받으려 하나 어떻게 될 수 있겠는가.

나에게는 네 가지 기회가 있으니 지금 바로 그때이다. 간신을 물리치고 조정이 화평하니 이것이 한 가지 기회요, 내 나이 태종과 바로 같으니 이것이 두 가지 기회요, 내가 즉위한 햇수가 세종의 33년과 바로 같으니 이것이 세 가지 기회요, 세자가 어질고 또한 장성했으며 학문이 고명하고 기질이 순수하니 이것이 네 가지 기회이다. 이 네 가지 기회는 만나기가 어려운 것이다. 나는 조금도 다른 생각이 없고 바로 이 네 가지 기회를 만났으므로 감히 이런 말을 발설하는 것이니 이는 대의(大義)요 대계(大計)인 것이다.

전에 큰 종기가 나서 위험한 즈음에 이르렀을 적에도 이러한 생각이 없지는 않았으나 조정의 일이 중하기 때문에 말하지 못하였다. 이제는 간사한 무리들이 형을 받았는가 하면 사류(士類)들이 모두 돌아왔고 노성한 훈구(勳舊) 대신들도 또한 조정에 있으니 마치 조종조의 당당하던 시대와 같은 때이다. 내가 물러나 여생을 보내려 하나 오직 권병(權柄)만을 놓았을 뿐이지 나라 일을 어찌 잊을 수가 있겠는가."
중종실록》 88권, 중종 33년( 1538년, 명 가정(嘉靖) 17년) 10월 2일 (임인) 8번째기사 中.[25]

2.3. 즉위와 사망

1544년(중종 39년) 음력 11월 15일 아버지 중종이 승하하고 관례대로 5일 후인 음력 11월 20일, 창경궁 명정전에서 다음 왕위에 올랐다. 인자하고 학문을 좋아하는 성격의 소유자답게 유학에 바탕을 둔 선한 정치를 펼치려 노력했다. 기묘사화 때 죽은 조광조를 신원하고 현량과를 부활시키는 등 중종 때 좌절된 성리학에 입각한 도학(왕도) 정치를 재현하려 노력했는데 실제로 인종이 왕위에 오르자 그동안 압박받던 사림들이 환호했다. 사간원의 건의를 받아들여 사관이 자신을 기록하는 사초(실록의 원본)에 이름을 써넣지 않아도 된다는 옛 규정을 부활시켰다. 다만, 몸이 약했고 계모였던 문정왕후의 도를 넘은 압박 때문에 고생해야 했다. 야사 등에서는 문정왕후가 인종을 늘 괴롭혔다고 하는데 경원대군과 함께 편전[26]에 들어서 "우리 모자를 언제 죽일 거냐. 죽이려거든 지금 죽여라."라고 포악을 부렸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정작 그는 문정왕후를 어머니로 극진히 우대했고 나이 차이가 거의 아들뻘(19살 차이)인 이복동생 경원대군과도 친밀하게 지냈다고 한다.

1545년 6월 26일 인종은 40도가 넘는 고열에 시달리며 혼절하는 등 몸 상태가 급격하게 나빠졌다. 6월 29일에는 대역죄인과 강상죄 등 국가 중대 범죄를 저지른 자들을 제외한 모든 잡범들의 죄를 용서하고 사면한다는 교서를 내렸다.[27] 그날 밤 병세가 점점 악화되어 위독해지자 19살 아래의 이복 동생인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선위한다는 뜻을 밝혔다.[28][29] 그러나 결국 8개월만인 1545년 7월 1일 경복궁 청연루(景福宮 淸讌樓) 소침(小寢)에서 세상을 떠났다.
상이 청연루 아래 소침에서 훙서하다
묘시(卯時, 오전 5시~7시)에 상(上)이 청연루(淸讌樓) 아래 소침(小寢)에서 훙서(薨逝)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상은 자질이 순미(純美)하여 침착하고 온후(溫厚)하며 학문은 순정(純正)하고 효우(孝友)는 타고난 것이었다. 동궁(東宮)에 있을 때부터 늘 종일 바로 앉아 언동(言動)은 때에 맞게 하였으니 사람들이 그 한계를 헤아릴 수 없었다. 즉위한 뒤로는 정사(政事)할 즈음에 처결하고 보답하는 데에 이치에 맞지 않은 것이 없었고, 때때로 어필(御筆)로 소차(疏箚)에 비답(批答)하되 말과 뜻이 다 극진하므로 보는 사람이 누구나 탄복하였다. 외척(外戚)에게 사정(私情)을 두지 않고 시어(侍御)에게 가까이하지 않으므로 궁위(宮闈)가 엄숙하였다. 중종(中宗)이 편찮을 때에는 관대(冠帶)를 벗지 않고 밤낮으로 곁에서 모셨으며 친히 약을 달이고 약은 반드시 먼저 맛보았으며 어선(御膳)을 전연 드시지 않았다. 이렇게 한 것이 거의 20여 일이었고 대고(大故)를 만나게 되어 음료(飮料)를 마시지 않은 것이 5일이었으니 애통하여 수척한 것이 예도에 지나쳐서 지극히 쇠약하여 거의 스스로 견딜 수 없었다. 졸곡(卒哭)이 되어 조정(朝廷)이 권제(權制)를 따르기를 청하였으나 고집하여 허락하지 않다가, 대신이 백관(百官)을 거느리고 청하게 되어서야 비로소 허락하였으나 실은 실행하지 않았다. 창덕궁(昌德宮)에서 경복궁(景福宮)으로 이어(移御)하여서는 중종이 평일에 거처하던 곳을 보고 가리키며 ‘여기는 앉으신 곳이고 여기는 기대신 곳이다.’ 하고 종일 울며 슬피 사모하여 마지않았다. 병이 위독하던 밤에는 도성(都城) 사람들이 모여서 밤새도록 자지 않고 궐문(闕門)에서 오는 사람이 있으면 문득 상의 증세가 어떠한가 물었으며, 승하하던 날에는 길에서 누구나 다 곡하여 울며 슬펴하는 것이 마치 제 부모를 잃은 것과 같았다.
인종실록》 2권, 인종 원년( 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7월 1일 (신유) 1번째기사.[30]
인종의 석연치 않는 죽음에 독살설이 나돌았다. 인종에게 그렇게도 포악스럽게 굴던 계모 문정왕후가 어느 날은 아주 친절한 모습으로 인종에게 오색떡을 권했는데 오색떡을 먹다가 그 날 쓰러져서 원인도 모르는 채 즉사했다는 것. 그러나 이것은 야사의 이야기이기 때문에 거식증으로 죽은 것을 문정왕후를 비난하기 위해 독살설을 만들어냈다고 하는 이들도 있으나, 정사에서도 음식뿐 아니라 약까지 거부하는 모습으로 보아 인종은 자신의 위치를 호시탐탐 노리는 문정왕후와 윤원형, 윤원로에게 시달리면서 삶에 대한 미련이 없어졌다는 추측도 있다. 아버지 중종이 병에 걸려 앓아 누웠을 때 침식(寢食, 자는 것과 먹는 것)을 거르며 지극정성인 간호에 몰두했고 즉위 이후에도 5개월 동안 음식도 제대로 먹지 않고 단식한 뒤 곧바로 제사니 사신 접대니 하는 일정을 쉬거나 영의정같은 고위직에 있는 당상관 신하들로 하여금 시켜도 되는 걸 체면에 국왕이라 굳이 무리하게 강행했다. 걱정이 된 신하들이 말렸을 정도인데 이러니 몸이 남아날 턱이 없었다. 죽기 1달 전인 6월 4일부터 《 조선왕조실록》에 기록이 될 정도로 몸 상태가 악화되고 있었으나 걱정이 되어 찾아온 신하들에게 괜찮으니 진료를 받지 않아도 된다고 고집을 부리다가 1달 만에 건강 악화로 세상을 떠났다. 신하들이 인종에게 고기(육선)를 먹도록 권하자 인종은 "대비( 문정왕후)께서도 고기를 드시지 않는데 어찌 내가 고기를 먹을 수 있겠느냐"고 거부했고 신하들이 문정왕후에게 가서 "인종께 고기를 드시라고 권해드려 달라"고 부탁하자 문정왕후는 그러겠다고 하고는 실제로는 견제 때문에 고기를 권하지 않았다.

사실 이 내용은 야사에 기반한 추측성의 이야기이며 《 조선왕조실록》의 기록은 좀 다르다.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정승 이하 신하들이 하루가 멀다하게 육선( 고기)을 권했고 세종마저도 상중에 육선을 먹었다고 외쳤다. 법적으로 모후인 문정왕후도 권해서 육선이 수라상에 올라갔는데 계속 그대로 나왔다는 기록이 수시로 보인다. 시일이 지나서 어의 진찰이라도 받으라 했지만 거부하다가 받아봤더니 '이미 고기 먹은들 소화도 안될거고[31] 우유라도 드셔요'라고 진단이 나왔다. 그러나 이마저도 거부. 사실 본인이 그러니 방법이 없는 상황이 됐다. 다만 사관의 논평에 따르면 고기를 먹으라는 신하들의 권고가 진정성이 없었을 수도 있음은 배제할 수 없다. '이 지경인데 신하놈들이 억지로라도 먹여야지 아닌걸 보면 뭔가 있는거 같음?'하는 사관 논평이 있다. 독살설을 배제하더라도 문정왕후의 압박이 인종의 건강을 해쳤을 개연성 또한 물론 있다. 조선은 '효(孝)'를 숭상하고 인종은 묘호 그대로 매우 인자하고 효성스러운 인물이었다. 따라서 인종이 문정왕후의 강한 압박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이를 자신의 불효 때문이라며 자책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 이로 인한 스트레스가 인종의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을 것이다. 이 때문에 역덕후들 사이에서는 농담으로 " 한국사 역대 처음으로 굶어죽은 "이라는 드립도 간간히 나돈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사를 통틀어 가장 오랫동안 재위한 영조 역시 소식가로 유명했으며 꿩고기, 전복[32] 외에는 거의 입에 대지 않고 잡곡밥과 나물로 조금씩만 먹는[33] 영조의 식습관은 당뇨 고혈압을 예방하는 효과가 있어 장수 비결로 꼽힌다.[34]

이 사건을 그동안 '이일역월제(異日逆月制)'(하루를 한 달로 치면서 3년상을 하는 편법)로 국정의 안정과 실용성을 꾀하던 조선 왕실이 점차 성리학적 예법을 신봉하는 계기가 되는 사건으로 평하기도 한다. 죽기 직전에야 조광조의 억울한 누명을 신원하라는 명과 함께 이복동생인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겠다는 분부를 내리고 승하했고 선조 대에서 정식 신원되었다.

2.4. 유언

훙서(薨逝, 죽음)에 임박하여 붓을 잡고 유서를 쓰려 하였으나 쓰지 못하고 탄식하면서, 인종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나의 생각을 문자가 아니면 여러 신하들에게 전할 수 없는 지경이 되었다.
이제 이와 같으니 슬픔을 어찌할 수가 없다.

부왕이 돌아가신 지 오래지 않아 내가 또 이에 이르러 마침내 효도를 마치지 못하니,
내 마음이 망극하다.

내가 죽거든 반드시 부모의 능 곁에 장사 지내서 내 뜻을 이루게 하라.
또 겨우 국상을 지냈기에 백성의 힘이 다했으니
나의 초상과 장사에는 되도록 검소함을 좇아서 백성들의 폐해를 덜게 하라.
병이 이와 같으니 효도를 마치지 못하겠고, 또 경들과 더불어 다시 서로 보지 못하겠다.
〈인종대왕 묘지문(仁宗大王 墓誌文)〉

3. 사후

3.1. 묘호와 시호

묘호 인종(仁宗)이며, 인(仁)은 '인(仁)을 베풀고 의(義)를 행함'을 말하는데 생전 인종의 성격과 행실을 봤을 때 훗날의 누군가와는 다르게 정말 묘호가 정말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시호헌문의무장숙흠효대왕(獻文懿武章肅欽孝大王)이다.

처음엔 시호를 예문철무장숙흠효(睿文哲武章肅欽孝)라고 했다가 '예(睿)' 자를 '헌(獻)' 자로 고치자는 얘기가 나왔는데 홍언필 태조의 시호 '강헌(康獻)'과 겹친다는 이유로 반대했다. 하지만 중의도 찬성하여 고치기로 했으며 허자가 체화거중(體和居中)의 뜻이 선왕과 합치한다 하여 '철(哲)' 자를 '의(懿)' 자로 고쳤다.

3.2. 능묘

능은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원당동에 있는 효릉(孝陵)이다. 서삼릉을 구성하는 조선왕릉 가운데 하나이다. 왕비 인성왕후와 나란히 묻혀 쌍릉을 이루고 있으며, 조선왕릉 중 유일하게 일반에 비공개되어있었으나 2023년 9월 7일부로 일반인에게도 공개되었다. # 서삼릉 문서 참고.

3.3. 을사사화

윤임 윤원형은 세조비 정희왕후의 아버지 윤번의 후손들로, 각각 인종과 명종의 외숙부들인데, 이들은 중종 말엽부터 세력을 형성하였다. 인종의 외가인 윤여필, 윤임 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대윤(大尹)과, 경원대군(명종)을 지지하는 문정왕후 윤원형 일파인 소윤(小尹)이 파를 나누어 치열하게 갈등하였다.

인종이 즉위한지 1년도 못되어 승하하고 경원대군이던 명종이 즉위하자,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가 왕대비로서 수렴청정하고 윤원형 등이 권력을 잡았는데, 인종의 외숙부이자 장경왕후의 오빠인 윤임 및 대윤 일당을 역모로 몰아 사사하였다. 윤여필의 외손자인 종친 계림군을 비롯하여 중종의 일곱째 아들인 봉성군 왕실 종친 윤임과 당여를 이루거나 왕권에 위협적으로 여겨졌던 자들이 대대적으로 대거 숙청되었다.

4. 가계

4.1. 친가( 전주 이씨)

4.2. 외가( 파평 윤씨)

4.3. 처가( 반남 박씨)

4.4. 배우자 / 자녀

5. 기타

6. 대중매체

6.1. 만화

6.2. 드라마

6.3. 소설

7. 관련 문서

8.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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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 효릉 · 중종 시기의 괴수 출현 소동 · 인종실록

진승총(震乘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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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리우스력 3월 10일. [A] 율리우스력 12월 4일. [B] 율리우스력 8월 7일. [4] 율리우스력 5월 8일. [A] [A] [B] [8] 적자와 서자의 구분없이 나이로 봤을 때는 4남이지만, 적자로는 적장자이기에 아버지 중종을 이어서 즉위할 수 있었다. [9] 간택이 파기되어 후궁이 될 뻔 했을 뿐 후궁은 아니다. [10] 조선의 16대 왕 인조하고 철자가 하나만 다른지라 혼동하는 경우가 간혹 보이니 주의하자. [11] 여기서 보이는 '○효대왕'이 인종만의 특별한 시호는 아니다. '효'와는 거리가 먼 이미지가 강한 군주들인 태종 세조 역시 각각 '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 '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이다. '○효대왕'은 조선 대부분의 국왕 시호 끝에 붙는 말이라서 이걸 가지고 '흠효대왕'이 인종의 효성을 찬양했다고 보는 건 지나친 비약이다. 인종이 조선 시대 뿐만 아니라 동서고금 군주 또는 후계자 중에서 손에 꼽을만큼 정말 효성스러웠기에 생기기 쉬운 오해 중 하나. 정확히 말하면 왕에게 시호로 붙는 '효'자는 선왕의 위업을 잘 이어서 '효도했다'는 의미. 그래서 중국 황제들도 보면 시호가 2글자이던 초기에는 창업자를 제외하고는 모두 '효○황제'였다. 한문제는 태종 효문황제, 한경제는 효경황제, 한무제는 세종 효무황제 하는 식. 조선에서 시호를 받은 왕 중에 '○효대왕'이 아닌 왕은 개국군주 태조, 묘호에 이미 '효'가 있어서 대신 덕(德)을 넣은 효종 두 사람뿐이다. [12] 중종실록》 21권, 중종 10년( 1515년, 명 정덕(正德) 10년) 2월 25일 (계축) 6번째기사. #. [13] #. [14] 현대에 와서는 3살 아기가 책을 읽는 일이 비교적 흔한 일이지만 조선시대에는 동화책이나 그림책과 같은 아동용 도서가 없었으며 있는 서책이라고는 거의 외국어 한자로 쓰여진 어려운 철학 서적과 유교 경서 외에는 찾아보기 어려웠다는 것을 감안하면 실로 놀라운 일이다. [15] 나이순으로 따지자면 중종의 총애를 받던 경빈 박씨 소생인 복성군이 가장 먼저 태어났다. 따라서 장남이 아니라서 형제 순서는 밀리지만 조선에서는 적서 차별이 있었기 때문에, 중전 장경왕후에게서 태어난 적장자 인종이 반대없이 세자에 책봉됐다. 적통의 대군(大君)이 있다면 나이에 상관없이 언제나 왕위 계승에서 후궁 소생보다 우선이었다. 예외는 너무 늦게 태어나서 어쩔 도리가 없었던 영창대군 정도. 물론 적장자가 없을 경우에는 후궁 소생 중 장남 왕위를 계승했는데 조선 왕조 처음으로 왕비 소생이 아닌데 방계이 된 사람은 선조이다. [16] 중종실록》 50권, 중종 19년( 1524년, 명 가정(嘉靖) 3년) 3월 6일 (신미) 3번째기사. #. [17] 중종실록》 58권, 중종 22년( 1527년, 명 가정(嘉靖) 6년) 4월 21일 (정묘) 2번째기사. #. [18] 중종실록》 70권, 중종 26년( 1531년, 명 가정(嘉靖) 10년) 4월 20일 (갑술) 3번째기사. #. [19] 중종실록》 74권, 중종 28년( 1533년, 명 가정(嘉靖) 12년) 5월 17일 (기미) 5번째기사. #. [20] 중종실록》 96권, 중종 36년( 1541년, 명 가정(嘉靖) 20년) 11월 9일 (신묘) 3번째기사. #. [21] 장경왕후 문정왕후의 3당고모, 즉 9촌이 된다. [22] 혹시나 자신이 아들을 낳지 못한 채로 중종이 죽어버리면 으로 즉위할 세자를 같은 편으로 만들어 등에 업기 위해서였다. [23] 중종실록》 100권, 중종 38년( 1543년, 명 가정(嘉靖) 22년) 1월 7일 (임자) 1번째기사. #. [24] 헌데 이 내용도 한심한게 동궁에 불이 나 있는데 승지와 사관들이 멸화군을 모아놨더니만 우왕좌왕하며 아무것도 못했고, 심지어 영의정 윤은보가 "동궁(세자, 인종)께서 어디 계시냐"고 물으니 모른다고 대답하는 등 가관이었다. 정작 세자(인종)는 나중에 알아보니 부왕인 중종과 함께 있었다고 했는데 결국 이 말은 불을 꺼야 하는 멸화군, 세자를 데려와야 할 승지나 사관은 아무것도 안한 채로 멀뚱멀뚱 화재가 나는 것을 불을 끄기는 커녕 넋놓고 구경만 했고, 세자는 일국의 왕인 중종이 직접 데려왔다는 것이다. [25] #. [26] 왕이 국가의 정사를 신하들과 논하고 정무를 집행하는 본 집무실이다. [27] 인종실록》 2권, 인종 원년( 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5월 11일 (임신) 6번째기사. #. [28] 인종이 자식이 없는 이유는 경원대군에게 왕위를 물려주기 위해 일부러 자식을 낳지 않아서라고 한다. 하지만 근거라고는 없는 야사에 불과하고 유교에서는 자식을 못 낳는 것도 불효이므로 효자로 소문난 인종이 일부러 자식을 낳지 않을리 만무하다. 정말로 일부러 자식을 낳지 않았다 해도 그러한 의사를 대놓고 드러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29] 인종실록》 2권, 인종 원년( 1545년, 명 가정(嘉靖) 24년) 6월 29일 (경신) 9번째기사. #. [30] #. [31] 실제로 오랫동안 굶주린 상태에서 고기 같은 음식을 바로 먹었다가는 쉽게 탈이 난다. 단식인 상황에서는 거친 음식이나 기름진 음식 위주로 먹게 되면 바로 속을 게워낼 수 있으니 밥알갱이가 없는 멁은 흰죽인 미음부터 먹어야 한다. [32] 영조는 소식을 했다지만 나름 미식가이기도 했는데 그가 좋아한 음식은 새끼 꿩, 전복, 고추장 등이었다. [33] 중년기부터만 그랬는데 만약 영조가 실제 역사와 달리 요절했다면 고기를 잘 먹었던 젊은 시절의 식습관이 대중적으로 유명해졌을 것이다. [34] 가장 짧게 재위한 왕은 고기 안 먹어서 죽었고 가장 길게 재위한 은 고기 안 먹어서 장수했다는 이야기. 결국 사람 체질의 차이라고 볼 수 있는데 영조 또한 왕위에 오른 후 인종 못지 않게 스트레스를 여러모로 많이 받았던 왕이기 때문. 그렇기에 핏줄이 어느 핏줄에 따라 체질이 다른 것이다. 인종은 어머니 쪽을 물려받아 굶은 것을 포함하더라도 허약한 것이고, 영조는 아버지 숙종과 할머니 명성왕후 쪽을 많이 물려 받아 영조 또한 아버지 못지않게 성격이 괴팍하고 깐깐한 왕이기에 인종에 비해 장수한 결과일 수 있을 것같다. [35] 권신 김안로의 아들이다. [36] 세조비 정희왕후의 친정아버지이다. 친가로 보나 외가로 보나 공통조상인 윤번이 서로 겹친다. [37] 월산대군의 하나뿐인 아들로, 세조 의경세자를 공통 조상으로 하는 5촌 당숙-조카 관계이면서 이모부-조카 관계를 하는 겹사돈을 맺었다. 월산대군/가족과 후손 문서 참고. [38] 인종의 후궁으로 명시돼있으나, 간택이 파기되어 궁궐에 들어가지도 않았다. [39] 다른 버전에는 재위에 오르면 내정할 차기 삼정승감을 병풍 뒤에 적어놓았다고 한다. 그림자 내각? 영의정에 피장, 좌의정에 화담 서경덕, 우의정에 북창 정염. 셋 다 선가, 도가와 연관이 깊은 인물들로 피장은 말 그대로 갖바치(가죽 장인)이라는 뜻이며 성명은 불명이다. 전해오는 얘기로는 어린 조광조에게 많은 가르침을 주었다고 한다. 《 여인천하》에서 임혁이 분한 역이며 홍명희 저 《 임꺽정》에서는 갖바치 양주팔(병해대사의 모델이 된 인물)이다. 정염은 도가에서 정북창으로 알려진 인물로 어려서 학문에 통달했으며 특히 점복에 능해 여러 기이한 일화를 남겼다. 그러나 부친 정순붕이 윤원형의 심복으로 사화를 일으킨 탓에 환멸을 느껴 잠적 후 생을 마쳤다. [40] 백옥반속대 1부와 백옥토환다희 1부를 잃어버리고 찾지 못했던 일이 일어났다. [41] 인종 본인의 고조할아버지인 세조 문종이 형제 관계다. 종고조부이다. [42] 8개월하고도 4일이다. 조선 임금 중 가장 짧게 재위했다. [43] 왕세자가 없을 때 사왕(嗣王, 왕위를 이을 왕족 남성 계승권자)을 지명하는 것은 동서고금 왕실 최고 어른의 권한이다. [44] 물론 이건 수렴청정 한정해서고 명종 대에 후계자 지명 자체는 왕실최고어른이면서 종친들의 가장 웃어른이기도 한 왕대비 인성왕후가 권한을 갖는게 맞다. 인순왕후도 당시 순회세자가 사망했고, 공주조차도 없었던걸 생각하면 자식 문제보다는 인성왕후의 친정 및 반남 박씨 가문이 인순왕후의 동생인 심의겸을 위시로 한 청송 심씨 가문에게 세력상 밀렸다고 보는게 맞다. 다만 이는 당사자인 인순왕후와 인성왕후 모두 서로를 인식해서인지 선조의 왕비는 인성왕후의 가문인 반남 박씨 가문을 통해서 들였고, 그녀가 바로 의인왕후이다. 안타깝게도 의인왕후는 얼굴도 아름답고 남편인 선조와도 그닥 사이가 나쁘지 않았음에도 선천적인 불임으로 인해 큰어머니 인성왕후처럼 자식을 두지 못했고, 인성왕후는 이조차 지켜보며 한이 많다면 많은 인생을 마감했다. [45] 2007년 MBC 드라마 《 이산》에서는 박대수 역. [46] 물론 실제 잘못을 떠나서 왕이 승하하게 되면 담당 어의가 크게 문책받는건 당연한 것이었다. 중종도 그걸 걱정해서 장금이를 다른곳으로 보냈다. [47] 무한 그룹에서는 갑작스러운 개방을 센트럼의 영향이라 추정하고 있다. [48] 그 소녀의 정체는 바로 마성의 첫사랑 해리. 부친에게 학대받던 해리가 도망치다가 동궁전으로 들어오게 되고 일년에 1번 타임머신으로 변하는 자선당을 통해 해리가 조선 시대로 가게 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