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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대군/가족과 후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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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94153E> 《선원속보: 월산대군파보》
파일:선원속보: 월산대군파보_1900.jpg
1900년(광무 4년)에 제작한 《선원속보: 월산대군파보》
1. 개요2. 가계도3. 부인(승평부대부인 박씨)4. 측실(원주 김씨)5. 아들(덕풍군)6. 손자 대 이후
6.1. 현재
7. 항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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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 의경세자 장남이자 성종의 형인 월산대군의 가족과 후손들에 대해 다룬 문서이다.

2. 가계도

3. 부인(승평부대부인 박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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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 장손 월산대군을 아끼고 사랑했지만,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이 되지는 않기를 바랐다.[1] 그래서 세조 본인의 이종사촌이자 글도 잘 읽지 못하는 무장 평양군 박중선(朴仲善)의 장녀와 혼인하도록 했다. 월산대군의 정실인 승평부대부인 박씨(昇平府大夫人 朴氏)는 본관이 순천이며 중종반정 1등 공신인 박원종의 큰누나로, 월산대군보다 1살 어렸으며 장안에 소문난 미인이었다. 성품도 착하며 부드러웠고 시어머니인 인수대비나 시동생 성종에게 있어서는 상당히 후덕하고 순종적인 며느리이자 형수였다고 한다. 이에 인수대비는 큰며느리를 매우 사랑했으며 성종도 극진히 예우했다.

박씨 부인은 조정 중신 부인 모임에 이끌려 나가더라도 일일이 월산대군의 허락을 받았으며 일절의 청탁을 받지 않는 등 전혀 잡음이 없었다. 남편에 대한 사랑과 존경심, 내조 같은 것들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사례로 볼 수 있다. 하지만 박씨 부인은 남편과 금슬이 좋았음에도, 불임이여서 슬하에 자녀가 1명도 없었다. 그래서 월산대군과 34세에 사별한 후, 본인이 직접 월산대군묘 옆에 여막을 짓고 아침 저녁으로 곡하면서 상식을 올리며 삼년상을 치렀다. 이후 홀로 남은 박씨 부인은 독실한 불자가 되었는데, 월산대군묘 근처에 대군의 원찰인 흥복사를 창건하고 불사를 자주 일으켜 남편의 명복을 비는 것으로 소일했다. 또한 일찍 세상을 떠난 다섯째 여동생의 딸을 자신의 집에 데려와서 《소학(小學)》, 《내훈(內訓)》 등 여러 편을 가르치며 길렀다.

그리고 월산대군의 측실 원주 김씨 소생인 서자 덕풍군을 적자로 인정해주고, 자신의 조카, 즉, 장경왕후 윤씨의 언니와 혼인시켜 월산대군의 제사를 받들게 했다. 말년에 연산군의 부탁으로 어린 세자를 키우면서 지내다가 1506년(연산군 12년) 병에 걸려 사망했다. 박씨 부인은 세상을 떠나기 전에 "평소 존경하고 사랑하던 남편을 끝까지 따르겠다."며 월산대군 봉분 옆이 아닌 뒷자리에 묻어 달라고 유언을 남겼다고 한다.

4. 측실(원주 김씨)[2]

월산대군은 평생을 자연과 벗 삼으며 전국을 여행하면서 풍류적인 생활을 했지만 기방 출입이나 여색을 멀리하기로 정평이 나있었다고 한다. 성종은 평소에 형이 나이 30살이 넘도록 아직까지 후사가 없는 것을 안타깝게 여기다가, 형수인 승평부대부인 박씨 생일을 맞아 겸금(兼金)[3]을 아끼지 않고서 훌륭한 장인을 불러 황금 6냥으로 만든 메뚜기 형상을 선물하면서까지 임신을 기원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그래서 월산대군이 원주에 머물고 있을 때, 성종은 원주 현감에게 명을 내려 김씨 성의 규수로 하여금 대군을 옆에서 잘 보필하도록 꾸몄고, 마침내 김 규수는 월산대군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았으니 이가 서자 덕풍군 이이(德豊君 李恞)이다. 이 김 규수는 부호군 김량신(金良信)의 딸로, 본관은 원주(原州金氏)이다.

월산대군이 김 규수를 가까이하기는 했으나 정식으로 후실로 들이지는 못했고 이른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4] 김씨 부인은 평소에 월산대군과 정실 승평부대부인 박씨를 모시는데 소홀함이 없었으며 지극정성으로 보필 했다고 한다. 김씨 부인의 묘는 길 건너에서 월산대군묘를 향하여 마주 보고 있다.

5. 아들(덕풍군)

덕풍군은 윤임의 누나이자 중종의 계비 장경왕후(章敬王后)의 언니인 파원부원군 윤여필(尹汝弼)의 장녀와 혼인하여 슬하에 3남을 두었다. 사촌인 연산군은 덕풍군에게 상당히 후하게 대했는데 서자인 그를 월산대군의 적자로 인정해주고 덕풍군으로 봉하며 종친부의 정2품 승헌대부로 직급을 올려주었다. 그리고 이런 저런 물품을 자주 하사했다.

6. 손자 대 이후

덕풍군의 장남 파림군(坡林君) 이주(李珘)는 학문을 좋아하고 검소했다. 차남 계림군(桂林君) 이유(李瑠)는 성종의 서자 계성군의 양자로 입적되었으며 을사사화 사사당했다. 3남 전성부정(全城副正) 이리(李璃)[5] 역시 계성군과 같은 때에 화를 입었다. 그러나 파림군, 계림군, 전성부정의 자녀들은 살아남아 대를 계속 이어 나갔다.

6세 집의 이희맹(李希孟)은 병자호란 당시 성하지맹(城下之盟)에 참여하여 대의를 존중하고 지켰으며 자손들에게 관직과 부귀영화를 탐하지 말라는 유훈을 남겼다.

후손들은 이를 지켜 사마(司馬) 양시(兩試)에 합격하고도 조정에 출사하지 않고 학문을 탐구하는 선비들이 많이 배출되어 조정에서 여러 후손들에게 증직을 내리고 포상하기도 했다.

8세 성재공(醒齋公) 이형(李炯)은 숭조의 정신이 지극하여 실전된 월산대군의 유고를 전국을 두루 다니면서 찾아 모아 풍월정집(風月亭集)을 중판 발간했다.

13세 육은공(六隱公) 이봉규(李鳳圭)는 석광사(錫光祠)를 중수하고 우면산에 태봉(胎封)을 봉축하는 등 대대로 내려오면서 숭조의 정신과 우애하는 마음이 돈독했다고 한다.

6.1. 현재

현재 월산대군의 후손들은 전주 이씨 월산대군파와 계성군파로 이어지고 있다. 월산대군 후손이 계성군파로도 분파된 이유는 상술했듯, 월산대군의 손자 계림군이 성종의 서자 계성군 양자로 입적했기 때문이다.

매년 월산대군의 기일인 음력 12월 21일에 월산대군 사당에서 거행되는 기신제와 덕종(의경세자) 소혜왕후 한씨(인수대비) 경릉의 제향을 월산대군 후손 전주 이씨 월산대군 파종회에서 주관하고 있다. 1990년에는 《풍월정집 - 한글 번역본》을 발행하는 등 조상을 기리는 사업도 하고 있다. 참고로 위에서 언급한 계림군의 후손들(족보 상으로는 계성군파)도 매년 월산대군 기신제에 참석하며, 경릉 제향에서 종헌관을 맡기도 한다.

월산대군의 후손들 중에서는 경기도 동두천시 부시장을 지낸 이성호와 육군 중장 출신으로 23대 국가보훈처장을 지낸 이재달이 있다. 또한 조선 말에 철종의 형 영평군 이경응의 양증손자가 된 청풍군 이해승은 실제 혈통으로는 월산대군의 장손 파림군의 14대손이다.

계림군의 후손 중 가장 유명한 사람은 국민의 정부 시기에 노동부 장관을 지낸 이기호가 있다.

현재 월산대군의 후손들은 경기도 고양시 화성시, 대전광역시, 충청도에 많이 있고, 계림군의 후손들은 경기도 고양시 제주시에 다수 거주하고 있다.

( 《고양일보》 - 덕종대왕 562주기 · 소혜왕후 515주기, 경릉 제향)

7. 항렬자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1] 월산대군은 세조의 장손이자 맏아들 의경세자(덕종) 장남이었기에 적장자 승계를 원칙으로 하는 종법으로 따지면 세조의 차남인 예종보다 정통성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2] 《선원록》에서는 덕풍군의 어머니가 양인신분이며 이름은 간아지(干阿之)라고 적혀있다. [3] 보통보다 값이 배나 되는 좋은 황금. [4] 1488년(성종 19년)의 《 성종실록》 - 〈월산대군 졸기〉에는 서자가 2명이 있었다고 했는데, 1494년(성종 25년)에 지은 외할아버지 한확의 신도비명에는 서자가 1명 있다고 적힌 것을 봐서, 덕풍군 외의 아들은 요절한 듯 하다. [5] 《조선왕조실록》에는 한 단계 높은 '전성정'으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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