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9-21 12:46:52

효혜공주


조선의 왕녀
[[틀:조선의 왕녀/중종 ~ 철종|{{{#!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ackground: #ffd400; border-radius: 3px; font-size: .8em"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751232, #94153e 20%, #94153e 80%, #751232); color: #ffd400;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94153e;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94153e;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94153e;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94153e;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94153e; font-size: .7em"
[[사도세자|{{{#!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ffd400;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94153e; font-size: .7em"
{{{#!wiki style="display: inline; padding: 2px 4px; border-radius: 3px; background: #94153e; font-size: .7em"
}}}}}}}}}


<colbgcolor=#94153e><colcolor=#ffd400>
조선 중종의 왕녀
효혜공주 | 孝惠公主
출생 1511년 6월 23일( 음력 5월 18일)
사망 1531년 5월 16일( 음력 4월 20일)
(향년 19세)
묘소 고양 신원 원당면(高陽 新院 元堂面)[선원록]
본관 전주 이씨
옥하(玉荷[훈음])[선원록]
부모 부왕 중종
모후 장경왕후
부군 연성위 김희(延城尉 金禧)[4]
자녀 슬하 1녀
딸 - 김선옥(金善玉)
봉호 효혜공주(孝惠公主)
1. 개요2. 생애3. 어린 시절
3.1. 혼인3.2. 죽음3.3. 사후
4. 가족관계5.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조선 공주.

조선 제11대 왕 중종과 계비 장경왕후의 적장녀.[5] 또한 인종 동복누나이자 명종의 이복누나이다.

2. 생애

3. 어린 시절

1515년(중종 10) 공주는 나이 5세에 어머니 장경왕후를 여의었다.[6] 어린 나이에 어머니를 잃은데다 유일한 친남매라는 공감대로 인종과 사이가 매우 돈독했으며, 연려실기술의 인종조 고사본말에서는 나중에 효혜공주가 죽자 인종은 너무 슬퍼하다 병을 얻을 정도였다고 한다.

3.1. 혼인

1520년(중종 15) 김안로의 아들 김희(金禧)[7]와 혼인하기로 결정되어 이듬해 11월 가례를 올렸다. 부마가 된 김희는 연성위(延城尉)에 봉해졌다.

한편 딸을 사랑한 중종은 공주의 시아버지가 된 김안로에게 "공주가 떠받드는 속에서만 자라서 시부모를 존대하는 예를 모르니 부드럽게 타일러 달라."라고 말했는데, 쉽게 말하자면 '내 딸이 귀하게 자라 버릇 없겠지만 심하게 혼내지 말고 잘 달래라'라는 것이다.[8] -이거 사실상 협박이다-

가례를 올린 공주는 중종이 진성대군일 적 잠저에서 신혼생활을 하였다. 중종과 신하들 모두 효혜공주와 연성위의 집을 중종의 잠저라고 말하고 있다.[9]

3.2. 죽음

1528년(중종 23) 공주가 이질을 앓았는데, 중종이 이를 걱정해 대간의 반대를 부릅쓰고 문병하였다.

그로부터 3년 후 외동딸을 출산한 후 산후병으로 향년 21세로 사망했다.[10]

3.3. 사후

효혜공주는 슬하에 김선옥(善玉)이라는 딸 하나만 두었다. 이 딸은 문정왕후의 남동생 윤원로의 아들 윤백원과 혼인했다. 그런데 윤백원은 명종대에 이량 일파에 가담하여 사림을 제거하려다가 유배되는 사람이다. 그 이유가 아버지 윤원로를 죽게 만든 윤원형에게 복수하고자 권신이자 외척인 이량의 말 잘 듣는 장기말이 되었던 것. 이때 효혜공주의 하나밖에 없는 사위라고 문정왕후가 언서를 내려 가까운 곳으로 유배지를 옮겨주었다.[11]

사실 문정왕후는 세간의 이미지와 달리 중종의 후궁들이나 자식들에게 야박하게 군 적은 없다.[12]

훗날인 1589년 효혜공주의 사위 윤백원이 의문사한다. 그의 첩 복이와 딸 윤개미치가 아버지/남편을 독살했다는 죄목으로 장을 맞다가 사망하는 참극이 벌어졌다. 13년 후인 1602년, 윤개미치의 아들 이순이 상언하여 재조사가 이루어졌다. 알고보니 진범은 윤백원의 아버지 윤원로의 서자들[13]이었고, 이들이 무고한 사람들에게 죄를 전가하였다는 것이 밝혀졌다. 진실이 밝혀진 뒤 복이와 윤개미치는 뒤늦게 신원(伸冤) 및 복권되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그야말로 비극. 그나마 진범들은 자신 때문에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 당한 것과 완전히 똑같은 꼴을 그대로 되돌려받게 되었다.(출처: <조선의 명탐정들>)

4. 가족관계

5. 대중매체에서

파일:효혜공주(여인천하).jpg
2001년 SBS 월화 드라마 《여인천하》
배우: 이예림
파일:효혜공주(대장금).jpg
2003년 MBC 월화 드라마 《대장금》
배우: 미상

[선원록] # [훈음] 구슬 연꽃 [선원록] [4] 김안로의 아들로, 아내 효혜공주가 죽고 몇 달 뒤에 본인도 같은 해에 사망했다. [5] 적서를 통틀어서도 장녀이며, 중종이 장남 복성군 다음으로 본 둘째 자녀이다. [6] 이때 장경왕후는 아들 인종을 낳고 산후병을 얻어 25세 나이로 일찍 떠났는데, 딸인 효혜공주도 똑같이 산후병으로 25세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7] 실록에서는 몽룡(夢龍)이라는 이름으로 나오는데, 김희의 아명이거나 초명일 것이다. [8] 중종실록 43권, 중종 16년 11월 11일 기미 1번째기사. # [9] 중종실록 52권, 중종 19년 11월 4일 갑자 1번째기사. # [10] 중종실록 70권, 중종 26년 4월 20일 3번째 기사. # [11] 선옥은 태어나자마자 어머니 효혜공주가 사망하고 아버지 김휘도 몇 달 뒤에 죽는 바람에 부모님의 사랑을 받지 못했다. 문정왕후도 남동생 윤원로를 정계에서 축출하는 데 동의했을 테니, 그의 아들이자 자신의 친조카이기도 한 윤백원과 자신의 의붓외손녀인 선옥에게 미안한 감정이 있었을 것이다. [12] 중종의 후궁 희빈 홍씨, 창빈 안씨 등은 명종 대까지 궁중에서 살았고, 문정왕후의 행장에도 평상시에 왕자와 왕손들에게 두루 은전을 베풀었다고 쓰였다. [13] 즉, 윤백원의 이복동생들. [14] 다만 김안로 부자와 달리 효혜공주는 어디까지나 친동생 인종을 지켜주기 위해서 가담한다. 비록 인종이 중종의 적장자에 세자였으나, 총애 받는 어머니가 살아있는 복성군과 알게 모르게 신경전을 펼치는데다 입지가 불안해서 김안로의 권세에 의지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