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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롤링 스톤이 2011년 독자들을 대상으로 진행한 투표로 뽑은 "가장 위대한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이다. | ||||||||
<rowcolor=#fff> 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러시 | 핑크 플로이드 | 제네시스 | 제쓰로 툴 | 킹 크림슨 | |||||
<rowcolor=#fff> 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예스 |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 TOOL | 더 마스 볼타 | 드림 시어터 | |||||
같이 보기: 아티스트, 프로그레시브 명반 | }}}}}}}}} |
선정 50대 프로그레시브 록 아티스트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 Ultimate Classic Rock이 2023년에 선정한 50대 프로그레시브 록 아티스트를 정리한 틀이다. 이는 음악 자체의 작품성 보다는, 얼마나 프로그레시브 록 스러운지, 프로그레시브 록에 미친 영향력은 어느 정도인지 등을 기준으로 선정 되었다고 한다.[1] | ||||||||
<rowcolor=#fff,#000>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킹 크림슨 | 제네시스 | 예스 | 핑크 플로이드 | 프랭크 자파 | |||||
<rowcolor=#fff,#000>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러시 | 젠틀 자이언트 | 제쓰로 툴 | 카멜 | 툴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11위-20위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
<rowcolor=#fff,#000> 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공 | 캐러밴 | Van der Graaf Generator | 더 마스 볼타 | 마이크 올드필드 | |||||
<rowcolor=#fff,#000> 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 캔 | 프레미아타 포르네리아 마르코니 | 캔자스 | 오페스 | |||||
21위부터는
링크 참조. |
선정 가장 위대한 하드 록 아티스트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2px" |
※ VH1이 2000년 발표한 가장 위대한 하드 록 아티스트 순위. | ||||||||
<rowcolor=#fff>1위 | 2위 | 3위 | 4위 | 5위 | |||||
레드 제플린 | 블랙 사바스 | 지미 헨드릭스 | AC/DC | 메탈리카 | |||||
<rowcolor=#fff>6위 | 7위 | 8위 | 9위 | 10위 | |||||
너바나 | 밴 헤일런 | 더 후 | 건즈 앤 로지스 | KISS |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2px" |
<rowcolor=#fff>11위 | 12위 | 13위 | 14위 | 15위 | ||||
에어로스미스 | 섹스 피스톨즈 | 퀸 | 사운드가든 | 핑크 플로이드 | |||||
<rowcolor=#fff>16위 | 17위 | 18위 | 19위 | 20위 | |||||
크림 | 라몬즈 | 오지 오스본 | 더 클래시 | 앨리스 쿠퍼 | |||||
<rowcolor=#fff>21위 | 22위 | 23위 | 24위 | 25위 | |||||
펄 잼 | 딥 퍼플 | 주다스 프리스트 | 아이언 메이든 | 칩 트릭 | |||||
<rowcolor=#fff>26위 | 27위 | 28위 | 29위 | 30위 | |||||
모터헤드 | 이기 팝 | 러시 | 머틀리 크루 | 레드 핫 칠리 페퍼스 | |||||
<rowcolor=#fff>31위 | 32위 | 33위 | 34위 | 35위 | |||||
데프 레파드 | 도어즈 | 레이지 어게인스트 더 머신 | 앨리스 인 체인스 | 제인스 애딕션 | |||||
<rowcolor=#fff>36위 | 37위 | 38위 | 39위 | 40위 | |||||
프랭크 자파 | 야드버즈 | MC5 | 닐 영 & 크레이지 호스 | 스톤 템플 파일럿츠 | |||||
<rowcolor=#fff>41위 | 42위 | 43위 | 44위 | 45위 | |||||
Ted Nugent | 킹크스 | Nine Inch Nails | ZZ Top | 판테라 | |||||
<rowcolor=#fff>46위 | 47위 | 48위 | 49위 | 50위 | |||||
스콜피온즈 | The Rollins Bird | 재니스 조플린 | Smashing Pumpkins | 슬레이어 | |||||
<rowcolor=#fff>51위 | 52위 | 53위 | 54위 | 55위 | |||||
Thin Lizzy | Faith No More | Korn | Sonic Youth | 블루 오이스터 컬트 | |||||
<rowcolor=#fff>56위 | 57위 | 58위 | 59위 | 60위 | |||||
White Zombie | Heart | 앤스랙스 | Bad Company | New York Dolls | |||||
<rowcolor=#fff>61위 | 62위 | 63위 | 64위 | 65위 | |||||
제쓰로 툴 | Ministry | 보스턴 | Steppenwolf | The Cult | |||||
<rowcolor=#fff>66위 | 67위 | 68위 | 69위 | 70위 | |||||
Joan Jett & The Blackhearts | 롤링 스톤스 | Husker Du | 메가데스 | Living Colour | |||||
<rowcolor=#fff>71위 | 72위 | 73위 | 74위 | 75위 | |||||
레너드 스키너드 | 푸 파이터즈 | Twisted Sister | Pat Benatar | Spinal Tap | |||||
<rowcolor=#fff>76위 | 77위 | 78위 | 79위 | 80위 | |||||
본 조비 | Hole | Marilyn Manson | Ratt | Green Day | |||||
<rowcolor=#fff>81위 | 82위 | 83위 | 84위 | 85위 | |||||
Pixies | Queensryche | King's X | UFO | Whitesnake | |||||
<rowcolor=#fff>86위 | 87위 | 88위 | 89위 | 90위 | |||||
포리너 | 킹 크림슨 | Tool | Lita Ford | 레인보우 | |||||
<rowcolor=#fff>91위 | 92위 | 93위 | 94위 | 95위 | |||||
Danzig | Black Crowes | Lenny Kravitz | 예스 | Fugazi | |||||
<rowcolor=#fff>96위 | 97위 | 98위 | 99위 | 100위 | |||||
Meat Loaf | Primus | Mountain | Bed Brains | Quiet Riot |
같이 보기: VH1 선정 가장 위대한 아티스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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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00><colcolor=#fff> {{{#!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bordercolor=#fff> |
예스 Y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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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성기 시절 라인업 위에서 왼쪽부터 릭 웨이크먼, 빌 브루포드, 존 앤더슨, 스티브 하우, 크리스 스콰이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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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성 | 1968년 | |||
영국 잉글랜드 런던 | ||||
멤버 |
스티브 하우 제프 다운스 빌리 셔우드 존 데이비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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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멤버 | ||||
장르 | 프로그레시브 록, 팝 록, 아트 록 | |||
활동 |
1968년 ~ 1981년 1983년 ~ 2004년 2008년 ~ 현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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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블 | 애틀랜틱 레코드 | |||
링크 |
1. 개요2. 상세3. 역사
3.1. 초기 (1968 - 1971)3.2. 전성기 (1971 - 1973)3.3. 과도기: 끝없는 멤버 교체 (1973 - 1981)
4. 평가5. 여담6. 디스코그래피3.3.1.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3.3.2. Relayer, 휴지기3.3.3. Going For The One, Tormato, 내부 분란3.3.4. Drama, 공식 해산
3.4. 음악적 변화와 상업적 성공: Yes-West (1983 - 1988)3.5. 재결합: ABWH, Union (1989 - 1992)3.6. 이후[clearfix]
1. 개요
영국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70년대 프로그레시브 록의 주류를 이끌어 전세계에 수많은 팬들과 그들의 음악을 따라하는 추종자 밴드들을 낳았으며, 80년대 이후 음악의 성향을 기존의 프로그레시브 록에 뉴 웨이브 성향을 섞은 새로운 취향으로 바꾸면서 다시 성공을 누렸다.
2. 상세
밴드의 리더는 보컬리스트인 존 앤더슨 (Jon Anderson)이며, 음악적 역량을 가장 많이 보여준 이는 릭 웨이크먼이다.[1][2] 존 앤더슨의 경우 중간에 다른 멤버들과의 분란으로 한번 축출된적이 있고, 릭 웨이크먼은 몇번의 재가입과 탈퇴를 반복한다. 현재의 밴드 명의의 법적인 소유자는 밴드를 한번도 떠나지 않았던 베이시스트 크리스 스콰이어다. 현재는 존 앤더슨이 탈퇴 (2008년)하고 다른 보컬리스트가 영입되었다.음악적 성향이 시대에 따라 많이 변하긴 했지만 그래도 밴드의 특징을 들자면, 첫째는 리더 존 앤더슨의 천사와 같은 청아한 보컬이고, 두번째는 상당한 연주 실력을 지닌 멤버들의 꽉 짜여진 연주 하모니,[3] 셋째는 록 이외의 여러가지 음악 요소가 잔뜩 들어가 조화를 이룬 복잡하고 드라마틱한 곡의 전개이다. 쉽게 말해 전형적인 록 밴드가 키보드 멜로디를 중심으로 각각의 연주력으로 오케스트라를 구현해냈다고 생각하면 된다. 또한 이러한 성향은 예스를 제외하고도 제네시스,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등의 많은 심포닉 프로그레시브 밴드 대부분이 해당되는 이야기이다.
연주력으로 따지고 보면, 70년대 당시 프로그레시브 록의 범주를 벗어나서, 록의 무대 전체를 살펴봐도 내로라할 만한 뮤지션들이 모인 밴드였기에[4] 그 연주력은 지금 들어도 굉장히 잘 짜여져있고 지금의 후배 연주자들도 감히 따라하기가 어려운 연주 파트가 많다. 당시로서는 굉장히 스케일이 크고 기승전결의 순서를 가진 복잡한 구조의 곡을 만들었는데, 한 앨범에 세네개의 곡밖에 안들어가는 대곡위주의 수록곡들이 많다. 특히 전성기 시절 음악들은 이쪽 바닥의 대표적 모범사례이다.
그들의 음악은 기존의 록 음악 이외 여러가지 다른 장르의 자양분이 많이 스며들었는데, 먼저 클래식적 악곡 요소가 다분히 많이 차용되었고, 빌 브루포드와 같은 연주자들의 취향으로 전위적인 재즈적 시도도 적지 않았다. 그리고 6,70년대 당시 록음악에 많은 영향을 준 동양의 명상 사상, 즉 힌두교의 신비주의 사상에 많은 영향을 받은 리더 존 앤더슨의 시도로 예스의 음악에는 이후 뉴에이지라 불리울 형태의 새로운 음악 사조의 시조라 할만한 실험도 많이 나타난다. 예스의 음악이 장중하고 때론 암울하기까지 한 핑크 플로이드나 킹 크림슨과 차별을 두는 밝고 낙관적이고 환희에 찬 모습을 많이 보이는건 이때문이기도 하다. 예스의 음악은 장중할지언정 어둡지는 않다.
70년대 당시 존 앤더슨은 멤버들을 데리고 인도의 힌두교 요기들을 방문하곤 했다고 한다. 현재까지도 릭 웨이크만을 제외한 멤버들 대부분이 채식주의자라고 하기도 하고, 밴드 멤버들 대부분이 존 앤더슨의 사상적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물론 예스의 음악 = 뉴에이지라고 생각하는건 큰 오산이다. 영향만 주었을 뿐, 예스의 음악과 뉴에이지는 완전히 딴판이라고 보면 된다.
워낙 뛰어난 연주력을 가진 자부심 강한 멤버들이 모인 밴드였기에 밴드의 멤버들은 자주 교체되었으며, 그런만큼 음악의 성향이 많이 바뀌었다. 이런 점에선 음악 성향은 다르지만 예스 못지않게 멤버 교체가 잦았던 딥 퍼플과 비견되기도 한다. 사실 거론했던 5대 밴드 중 예스와 킹 크림슨은 멤버들끼리의 교류가 잦았고, 이후 밴드 멤버들끼리 이합집산하여 U.K., 아시아 등등의 여러 밴드를 결성하기도 하고 서로의 솔로 앨범에 세션으로 참여하기도 한다. 그래서 예스와 킹 크림슨,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 이 세 밴드 멤버들의 활동 연혁을 살펴보면 70년대 프로그레시브 록 세계의 절반 이상은 파악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세 밴드에서 활약한 연주자들이 곧 당시 프로그레시브 록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연주자 들이라고 생각해도 무방하다.
3. 역사
3.1. 초기 (1968 - 1971)
3.1.1. 초창기
예스는 1968년 보컬리스트 존 앤더슨과 베이시스트인 크리스 스콰이어를 주축으로 드러머인 빌 브루포드, 기타리스트인 피터 뱅크스, 키보디스트인 토니 케이가 합류하면서 본격적인 데뷔를 알렸다. 초창기 브루포드가 리즈 대학교에서 공부에 전념하기 위해 밴드를 탈퇴해서 잠시 쿠바스의 토니 오라일리로 교체되었으나, 얼마지나지 않아 다시 복귀했다.활동 이전 존 앤더슨은 축구선수가 될 생각이었다고 하는데 신체 능력 미달로 실패하고, 당시 젊은 예술인들의 요람이었던 2년제 예술 대학 (아트 스쿨)에 들어가 예술적인 영감을 얻고 밴드를 결성할 생각을 했다고도 한다. 당시 영국의 음악씬은 사이키델릭 록이 뒤로 후퇴하면서 크림으로 대표되었던 하드 록이 슬슬 확고한 입지를 구축하고 있었다. 동시에 19세기 클래식 음악을 전격적으로 도입한 프로그레시브 록 역시 키스 에머슨이 몸담았던 나이스와 딥 퍼플을 중심으로 세력 확장에 박차를 가하는 중이었다.
밴드는 같은 해 11월, 로얄 알버트 홀 (Royal Albert Hall)에서 펼쳐진 크림의 고별 무대 오프닝을 장식하면서 대중적으로 이름을 알렸고, 그 유명한 존 필(John Peel)의 라디오 쇼에 출연하면서 수면 위로 부상하게 되었다. 이후 이들은 아틀란틱 레코드(Atlantic Records)[5]와 계약한 뒤 1969년 셀프 타이틀 데뷔앨범인 "Yes"를 내놓으며 단번에 프로그레시브 록의 총아로 떠올랐다.
음악 평론가 전정기씨의 표현에 따르면, 이 앨범만 내놓고 바로 해체되었어도 전설적인 희귀반으로 남았을 거라고 하는데, 확실히 처음 밴드를 시작하는 신출내기 록 밴드의 음악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연주 앙상블이 뛰어나고, 특히 빌 브루포드의 드럼이 훌륭하다. 하지만 당시의 음악은 완전한 프로그레시브 록이라 보기는 조금 어렵고, 오히려 사이키델릭 록과 팝의 요소가 많이 섞여있었다.
[6]
1970년 이들은 2집인 "Time And A Word"를 발표하며 향후 전개될 "예스표 심포닉 록"의 서막을 알렸다. 하지만 오히려 전작보다 못하다고 평하는 사람들도 많다. 1950년대 영화 "The Big Country"의 메인 테마를 리메이크한 곡에서 클래식한 오케스트레이션과 멤버들의 연주의 조화가 많은 주목을 받았다.
하지만 피터 뱅크스는 이러한 오케스트레이션 방식에 반대했으며, 종종 다른 멤버들과 충돌을 이르켰다. 결국 뱅크스는 음반이 발매되기도 전에 앤더슨과 스콰이어에 의해 해고되었고, 기타리스트 자리는 사이키델릭 록밴드인 투모로우(Tomorrow) 출신의 스티브 하우(Steve Howe)로 교체되었다. 여담으로, 이 때의 존 앤더슨은 처음엔 기타리스트로 킹 크림슨의 로버트 프립을 영입하려고 했다고 한다. 프립이 지금처럼 성격이 유들유들해져서 당시의 예스에 들어갔다면 예스는...(...)
3.1.2. The Yes Album
1971년 3집 앨범 "The Yes Album"은 복잡하고 심오한 록의 예술을 펼치며 대중들의 열렬한 지지를 이끌어냈고, 싱글 "Your Move"는 밴드 역사상 최초 빌보드 40위권에 진입하며 전세계적으로 예스를 알리는데 선봉 역할을 톡톡히 한다.
앨범은 영국에서 7위, 미국에서 40위를 기록하는 성공을 거두었다. 사실 이때부터 슈퍼 밴드로서의 예스 음악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즈음 케이와 하우 사이 마찰이 생긴다. 스티브 하우는 더 오케스트레이션한 음악을 하기위해 멜로트론이나 신디사이저를 적극 도입해한다고 주장했지만, 기존에 단순한 하몬드 오르간과 피아노 연주만을 선호했던 토니 케이가 이것을 반대하면서 균열이 생긴것이다. 결국 다른 멤버들에 의해 케이는 밴드에서 해고 된다.
3.2. 전성기 (1971 - 1973)
3.2.1. Fragile
1971년 4집 앨범 "Fragile"을 발표함으로서 예스의 개화는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해고된 키보디스트 토니 케이를 대신해 클래식에 조예가 깊은 릭 웨이크먼이 밴드에 합류하면서, 앨범은 음악적, 상업적으로 전작을 뛰어넘는 결과를 이뤄내며 최고의 프로그레시브 밴드 중 하나로 우뚝 섰다. 각자 최상의 기술적 완성도를 지닌 멤버들이 밴드라는 우산 아래 합일점을 찾아내어 완벽한 연주 하모니를 일궈낸 것이다. 특히 릭 웨이크먼은 테크닉 면에서도 ELP의 키보디스트 키스 에머슨에 결코 뒤지지 않는, 풍부한 멜로디 메이커이자 오케스트레이터였다. 예스의 로고를 제작했던 디자이너 로저 딘(Roger Dean)이 제작한 초현실적인 앨범커버도 웅장한 밴드의 사운드를 형상화하는데 성공했다는 평을 얻어냈다.
수록곡들은 각자의 연주력을 뽐내는 솔로 연주 위주의 대곡들로 채워져있다.[7] 다른 프로그레시브 명반들과 달리 산만해 보일 수도 있는 구성이지만, 곡 하나하나 라이브에서 주 레퍼토리가 될 정도로 개성과 임팩트가 뛰어나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첫 트랙 " Roundabout"[8]은 일본 애니메이션 " 죠죠의 기묘한 모험"[9]의 엔딩곡으로 쓰였다.[10]
이때의 멤버가 존 앤더슨 ( 보컬), 릭 웨이크먼 ( 건반악기), 스티브 하우 ( 기타), 빌 브루포드 ( 드럼), 크리스 스콰이어 ( 베이스)로, 대부분의 예스팬들은 이 때가 밴드의 최전성기이자 최고의 연주실력을 가진 멤버 조합으로 인정한다. 역시 최전성기였던 동시대의 딥 퍼플 2기의 멤버 ( 이언 길런 - 보컬, 존 로드 - 키보드, 리치 블랙모어 - 기타, 이언 페이스 - 드럼, 로저 글로버 - 베이스)와 비견되기도 한다.
3.2.2. Close to the Edge
1972년 발표된 " Close to the Edge" 역시 영국 차트 4위, 미국 차트 3위에 랭크되며 밴드의 성공을 이어나갔다. 팬들에 따라 본 앨범을 최고작으로 꼽는 사람들도 많다고 한다. 이 앨범에 대한 높은 평가는 50년이 지난 2022년에도 계속 되고 있는데, 프로그레시브 록에 관한 최대의 인터넷사이트인 Progarchives의 All time Top Progressive Rock Album 리스트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다. 3곡만이 이 앨범에 들어있으며, 타이틀 곡이며 4개의 파트로 나눠져있는 대곡 "Close to the Edge"는 심포닉 록 최고 수준의 조곡이다.[11]
하지만 레코딩이 끝나고 음반 투어가 시작되기 직전 멤버들과의 음악적 견해차이로 빌 브루포드가 킹 크림슨으로 떠났다. 브루포드 웹사이트에 말하기를 지금까지 예스의 음악 방법론으로 달성할 수 있는 결과물이 "Close to the Edge"에서 최고의 단계를 달성했고 더이상 이 다른 네명에 멤버들과 추구할 것이 없는 벽에 부딪쳤다고 생각했다고 한다. 빌 브루포드는 재즈스럽고 자유분방한 즉흥 연주를 추구했지만, 세션 과정에서 여러 멤버들과 합주하며 정밀하게 사운드를 조정하는 데 불편함을 느꼈다고 술회했다.
이때부터 밴드의 음악이 하향세로 돌아섰다는 평가가 많다. 그들의 얘기로는 여러 뛰어난 연주자들의 초절기교가 넘치는 복잡한 연주를 빌 브루포드가 재즈적인 센스의 리듬으로 중심을 잡아주어 지금까지 밴드의 음악이 균형을 잃지 않았는데, 일반 팝, 락앤롤 음악의 세션을 주로 하던 앨런 화이트는 오히려 그런 연주자들의 연주 선율에 동조하여 고조시켜 따라가는 연주를 하는 식이었기 때문에 이후 밴드의 음악이 균형을 잃고 난잡해졌다는 것이다. 드러머의 중요함은 비단 재즈적 드럼이 아니더라도 비정상적인 박자가 가장 빈번하게 쓰이는 록 음악이 프로그레시브 록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그리 이상한 일은 아니다. 특히 예스처럼 안그래도 머리 터질듯 복잡한 리듬에 한술 더 떠 변화가 심했던 밴드는 빈자리가 컸다.
밴드는 1973년 Close to the Edge 투어 공연 실황 앨범인 "Yessongs"을 발매하기도 했다. 드러머는 앨런 화이트가 담당했으며, 빌 브루포드와 함께한 실황은 두 곡(Perpetual Change, Long Distance Runaround / The Fish (Shindleria Praematurus))이 수록되어 있다. 비슷한 시기에 열린 런던 레인보우 극장에서의[14] 콘서트를 녹화한 동명의 콘서트 영화는 이후 1975년에 공개 되었다.
3.3. 과도기: 끝없는 멤버 교체 (1973 - 1981)
3.3.1.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빌 브루포드의 탈퇴 이후 발매된 1973년 작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를 기점으로 하향세의 기미를 보이기 시작했다. 이 앨범은 앤더슨이 브루포드의 결혼식에서 만난 킹 크림슨의 드러머 제이미 뮤어에게 추천 받은 파라마한사 요가난다의 자서전에서 영감을 받아 그의 주도로 작곡되었으며, 구성은 음반으로만 2장의 LP, 4개의 20여분짜리 대곡으로 이루어져 있는 과한 구성이었다.
이 음반은 영국 차트 1위 미국 차트 6위에 오르며 상업적으로 성공했지만, 발매 당시 평론가들에게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사운드 메이킹의 주축을 이뤘던 릭 웨이크먼은 이러한 앤더슨의 음반 방향성에 강한 불만을 표했고,[15] 자신의 솔로 음반 Journey to the Center of the Earth가 상업적으로 성공하면서, 음반 투어가 끝나고 솔로 활동에 집중하기 위해 탈퇴를 선언했다.
3.3.2. Relayer, 휴지기
웨이크먼의 대체자로 키스 에머슨, 반젤리스[16], 록시 뮤직의 에디 좁슨 등이 거론되었지만, 최종적으로 영화음악가이자 Refugee[17] 출신의 패트릭 모라즈 (Patrick Moraz)로 대체되었다. 패트릭 모라즈는 웨이크먼 못지 않게 속주연주나 기교등 음악적 기량이 뛰어난 인물이고, 기본적으로 클래식 영향을 짙게 받은 웨이크먼 보다 비교적 재즈 퓨전 스타일이 강한 인물이었다. 이러한 영향으로 이 무렵 밴드의 음악성에 재즈 성향이 더욱 두드러지기 시작한다.그렇게 1974년 나온 "Relayer"는 발매 직후 영국차트 4위, 미국 차트 5위에 오르며 상업적으로 성공했으며, 비평적으로 찬사를 받았고, 특히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보다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몇몇 팬들은 Fragile , Close to the Edge과 더불어 예스 3대 명반으로 꼽기도 한다.
위에서 언급했듯 패트릭 모라즈도 대단한 기량을 보였던 키보디스트였고 앨런 화이트가 리듬을 주도하는 예스의 음악엔 보다 차갑고 무미건조한 패트릭 모라즈의 건반음이 더 어울려 보이기도 한다. 특히 20분 대곡인 "The Gates Of Delirium" 마지막에 파트인 Soon은 따로 싱글 커트되기도 했다. 스티브 하우는 이 시기 최고 역량의 기타 연주를 들려준다.
1975년까지 음반 투어를 마치고 멤버들은 각자 솔로 활동에 집중한다. 이후 1976년 짧은 투어를 마치고 영국의 고세율 정책을 피해 스위스 몽트뢰에서 다음 음반 작업에 착수한다. 한편 모라즈는 다른 멤버들과의 음악적 연대감 부족으로 심적 압박감을 가지고 있었고, 같은 시기 릭 웨이크먼이 이 다음 음반 데모를 듣고 예스의 재합류 의사를 표하면서 패트릭 모라즈는 다음 음반 레코딩 세션 두달만에 다른 멤버들에 의해 해고되었고, 웨이크먼이 다시 예스로 복귀하게 된다.
3.3.3. Going For The One, Tormato, 내부 분란
그렇게 1977년에 등장한 "Going For The One"은 멤버들이 심기일전하여 만들어낸 또 하나의 역작이었다. 그간의 성과를 고스란히 안으면서 좀 더 현대적이다.
밴드는 이전 작들 보다 단순하고 쉬운 음반을 만들려고 했으며, 그 결과 15분 짜리 Awaken를 제외한 나머지 곡들은 비교적 짧고 직접적인 노래들로 구성되어 있다. 스텝 인원도 이전이랑 다른 인물들이 참여했으며, 특히 커버도 로저 딘의 커버가 아닌 핑크 플로이드의 앨범 커버를 담당한 것으로 유명한 힙노시스의 커버이다. 해당 음반은 영국 차트 1위, 빌보드 차트 8위에 올리며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웨이크먼은 이 음반이야 말로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 대신 만들었어야 했던 음악이라고 소외를 밝히기도 했다.
하지만 뒤이은 야심작인 1978년 "Tormato"는 당시 영국 음악계의 대세였던 펑크 밴드들에게 집중 포화를 맞아가며 역사 속에 파묻히고 만다. 본 앨범은 영국 차트 8위, 빌보드 차트 10위에 오르며 상업적으로 성공했지만, 평론가들에게 악평을 받았다. 이전의 "Fragile" 시절의 음악으로 충실히 돌아간 시도였다. 하지만 "Tormato" 때에는 거기서 정도를 지나쳐 너무 가벼워졌던 것 같다.
그나마 "Tormato" 앨범의 좌절과 별개로 당시 진행되었던 콘서트 투어는 대부분 매진을 기록할 정도로 흥행에 성공했으며, 이 시기 예스는 360도 사운드 시스템과 회전무대로 구성된 대형 스타디움에서 공연을 진행했었다.
하지만 후속 앨범 준비중 내부분열이 심각하게 발생하기 시작한다 존 앤더슨과 릭 웨이크먼은 환상적이고 섬세한 음악을 추구한 반면, 크리스 스콰이어와 스티브 하우, 앨런 화이트는 하드한 음악을 선호하면서 갈등이 생긴것이다. 같은 해 결국이 내부 불화에 못이겨 앤더슨과 웨이크먼은 밴드를 탈퇴했으며, 이 때 밴드의 소유권 명의는 존 앤더슨에서 크리스 스콰이어에게 넘어간다.
3.3.4. Drama, 공식 해산
보컬과 키보드의 공석은 밴드의 매니저인 브라이언 레인의 소개로 알게된 Video Killed the Radio Star로 유명한 신스팝 듀오 버글스의 트레버 혼 (Trevor Horn, 보컬)과 제프 다운스 (Geoff Downes, 건반악기)가 대신했다.밴드는 이 새로운 라인업으로 1980년 "Drama"를 발매하여 항해를 지속하였고 앨범은 영국에서 2위, 미국에서 18위를 기록하며, 자신들이 여전히 건재함을 알렸다. 하지만 1971년 이후 RIAA에서 골드 인증을 받지 못한 최초의 음반이 되었다. 음반 발매 직후 이 음반를 지원하는 투어는 여전히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팬들은 변한 예스, 특히 트레버 혼의 보컬에 악평을 쏟아냈다.
음반 "Drama"로만 보았을때 존 앤더슨 대신 트레버 혼이 보컬을 맡았으며 목소리는 음색 외엔 비슷비슷한 편으로 버글스의 영향으로 뉴 웨이브 느낌이 물씬 풍기긴 하지만 전작 "Tormato"처럼 유치한 주제를 가진 앨범은 아니었다.
결국 매니저 레인과 트레버 혼은 투어 직후 다른 멤버들에 의해 해고 되었으며, 이후 크리스 스콰이어와 앨런 화이트가 밴드를 탈퇴하고, 남은 스티브 하우와 제프 다운스가 더 이상 밴드를 유지하지 않기로 하면서 예스는 해체되었다.
이후 스콰이어와 화이트는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와 슈퍼 그룹 XYZ를(ex-Yes-and-Zeppelin의 줄임말) 준비하지만, 로버트 플랜트가 합류를 거절하면서 무산되고, 하우와 다운스는 ELP의 칼 파머, 킹 크림슨, U.K.의 존 웨튼과 함께 아시아 (Asia)를 결성하며 1980년대 초반에 짧지만 화려한 시절을 보내기도 했다.
3.4. 음악적 변화와 상업적 성공: Yes-West (1983 - 1988)
3.4.1. 시네마, 90125
1982년 애틀랜틱 레코드의 필 카슨에 소개로 스콰이어와 화이트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출신인 기타리스트이자 프로듀서인 젊은 뮤지션 트레버 래빈을 알게 된다. 이후 셋은 시네마라는 밴드를 결성했으며, 스콰이어는 예스의 창립 멤버인 키보디스트 토니 케이를 초대해 합류하게 되었다. 스콰이어는 케이의 더 단순하고 질감 있는 연주 방식 때문에 그를 이상적인 키보디스트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직후 Drema에 참여했던 트레버 혼이 보컬로 영업되었지만, 혼은 얼마되지 않아 음반의 프로듀서로 자리매김 하게 된다.하지만 얼마되지 않아 혼과 케이와 불화가 발생하면서 케이는 밴드를
이후 필 카슨과 음반사 경영진들의 제안으로 시네마는 예스로 변경되었다. 래빈은 처음엔 이것에 반대했다. 새로운 그룹을 시작하는 데 도움이 되기보다는 역사와 명성이 있는 밴드에 실수로 합류한것으로 비춰질지도 모른다는 우려 때문이다. 하지만 그를 제외한 나머지 멤버들이 모두 예스 출신이였기에 결국 받아들이게 되었다. 키보디스트 자리는 록시 뮤직, U.K. 출신의 에디 좁슨이 합류했으나, 밴드가 예스로 바뀌고 경영진의 설득으로 토니 케이가 다시 돌아오면서, 좁슨은 음반 발매 직전 프로모션에서만 참여한채 밴드를 탈퇴했다.
빌보드 핫 100 역대 1위 곡 | ||||
Say Say Say (6주) | → | Owner of a Lonely Heart (2주) | → | Karma Chameleon (3주) |
1983년 그렇게 어째어째 재결성 뒤 내놓은 " 90125"는 당시 주류였던 팝/ 뉴 웨이브 사운드를 예스의 필터로 걸러낸 수작이었다. 멤버들의 공동작곡으로 되어있지만 대부분의 곡들은 기존에 트레버 래빈이 만들어 놓았던 곡들을 다듬은 것이었다. 이 시절 예스는 런던이 아닌 로스엔젤레스를 기반으로 했기에 비공식적으로 기존의 예스와 구분지어 Yes-West라고 불리기도 한다.
이렇게 새 멤버 트레버 래빈의 존재감이 두드러진 이 앨범에서 밴드는 명곡 " Owner of a Lonely Heart"라는 뉴웨이브 사운드의 곡으로 미국 빌보드 핫 100 1위를 차지하고,[18] 최초로 미국 차트에서 플래티넘을 기록하는 대 히트를 기록한다. 다만 이전의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로서의 예스를 좋아한 옛 팬들이 떨어져 나간것은 당연지사. 대신 팝/ 뉴 웨이브 스타일의 새 곡을 좋아하는 새로운 팬들이 생겨난다.
트레버 래빈은 기존 예스 멤버들보다 10살 가까이 어린데다가 미남이기 까지 했다. 당시 크리스 스콰이어는 공연에서 소녀팬들의 함성이 들려 신기했었다고 한다. 물론 그들은 트레버 래빈의 팬들이었다. 덕분에 예전 예스 팬들은 새 기타리스트인 트레버 래빈이 예스를 망친 주범이라며 이를 갈았다고 한다. 하지만 지금 이 앨범은 지금 들어도 70년대의 예스 사운드에 결코 뒤지지 않는 잘 짜여진 새로운 예스 사운드의 시작이었으며, 2018년 기준으로 클래식중의 클래식이 되어버렸다.
음반 발매 직후 밴드는 1985년까지 음반 투어를 진행한다. 오랜만에 밴드로 돌아온 키보디스트 토니 케이는 하몬드 오르간과 피아노 연주만 했던 과거와는 다르게, 여러 신디사이저들을 연주했으며, 도르트문트에서 열린 공연에서 레드 제플린의 지미 페이지가 특별출연해 예스 멤버들과 함께 비틀즈의 I'm Down를 공연했다. 이 투어는 예스 역사상 가장 상업적으로 성공한 투어였다. 투어 막바지는 브라질의 Rock in Rio에 퀸, AC/DC, 조지 벤슨, 로드 스튜어트 같은 쟁쟁한 뮤지션들과 공동 헤드라이너로 올랐으며, 직후 아르헨티나에서도 열렸는데, 이는 포클랜드 전쟁 이후 영국 그룹이 아르헨티나에서 공연한 첫번째 공연이였다. 앤더슨에 따르면 공군 제트기로 이동했고, 방문 내내 민병대의 포위당했었다고.. 해당 투어는 같은해에 9012Live라는 제목으로 음반 / 비디오 형태로 발매되었다.
3.4.2. Big Generator
이들은 계속해서 다음 음반 작업을 진행한다. 트레버 혼이 프로듀서로 참여했지만, 계속 이탈을 하면서 음반 제작이 늦어지자 결국 래빈이 직접 프로듀서로 참여해 간신히 완성될수 있었다.
그렇게 밴드는 1987년 "Big Generator"를 발표하였다. 해당음반은 영국차트 17위, 미국 차트 15위에 올랐으며, 동시에 발매된 싱글 Love Will Find a Way 는 메인스트림 록 차트에서 1위를 차지했고, Rhythm of Love는 2위, Shoot High Aim Low는 11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지나치게 상업적인 방향과 스콰이어 - 래빈의 작곡 방식에서 소외감을 느낀 존 앤더슨은 1988년 음반 투어가 끝난 직후 밴드를 탈퇴했다.
3.5. 재결합: ABWH, Union (1989 - 1992)
3.5.1. 앤더슨 브루포드 웨이크먼 하우 (ABWH)
탈퇴 직후 앤더슨은 스콰이어를 제외한 예스 최전성기 멤버인 릭 웨이크먼, 스티브 하우, Close to the Edge 이후 오랜만에 빌 브루포드와 재결합하여 아리스타 레코드와 계약하고 음반 제작에 들어간다. 이들은 예스라는 밴드명 대신 "앤더슨 브루포드 웨이크먼 하우"라는 명칭으로(약칭 으로 "ABWH") 선보여졌다.
1989년 "Anderson, Bruford, Wakeman And Howe"를 선보여 영국차트 14위 미국 빌보드 30위까지 진입했고, MTV에서 히트했으며, 기존 예스 팬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았다. 스콰이어의 공백은 브루포드가 멤버로 있던 킹 크림슨의 베이시스트 토니 레빈이 참여했다. 당시 80년대 킹 크림슨 시절부터 시몬스 전자드럼을 전면 도입했던 브루포드나, 디지털 신디사이저를 전반적으로 도입한 웨이크먼, 토니 레빈의 채프먼 스틱, 펑키 핑거스 스타일로 기존에 예스와는 살짝 다른 맛을 느낄수 있으나, 트레버 래빈이 합류한 Yes-West 시절 음반보다는 훨씬 70년대 예스 음악에 가까운 음반이었다. 네 멤버가 모두 전곡에 공동 작곡으로 참여했으나, Brother of Mine은 스티브 하우가 아시아에서 제프 다운스와 작곡한 부분이 포함되었으며, Birthright는 하우가 GTR시절 맥스 베이컨과 쓴곡이다. Let's Pretend는 존 앤더슨이 반젤리스와 함께 썼던 곡이다.
이후 이 라인업으로 An Evening of Yes Music, Plus라는 명칭으로 1990년까지 월드 투어를 진행했고, 이 공연 또한 팬들에게 호평을 받았다. 투어 막바지쯤 녹음된 공연 실황은 동명의 라이브 음반으로 발매되었는데, 해당 공연은 토니 레빈이 질병에 걸리는 바람에 그를 대신해 유명 재즈 베이시스트이자 브루포드의 개인 밴드 멤버였던 제프 벌린이 참여했다. 해당 투어는 ABWH의 곡들과 브루포드가 예스 멤버로 있던 초창기 / 전성기 시절 예스의 곡들이 연주 되었으며, 브루포드가 처음으로 Close to the Edge 수록곡들을 무대에서 연주하기도 했다.
3.5.2. Union
ABWH측과 크리스 스콰이어의 Yes-West측은 YES라는 밴드명에 대한 사용 등 문제로 법적 다툼이 있었지만, 이후 여러 협상을 통해 간신히 봉합되었다.음반 투어 직후 ABWH는 후속음반 Dialogue을 준비한다. 하지만 음반 작업은 전진이 없었는데, 앤더슨과 하우 사이에 불화가 발생했고, 하우와 웨이크먼은 각각 솔로 음반을 준비중이였고, 음반 작업에 비협조적이였다. 앤더슨은 옥수수밭의 아이들(영화)등 영화음악가이자 듀란 듀란과 작업한 바 있는 조나단 엘리아스를 음반 프로듀서로 영입했는데, 엘리아스는 기존 웨이크먼과 하우의 음악적, 테크닉적 우위를 강조하기 보다, 더 간결하고 상업적인 음반으로 만들어 하고 싶어 했고, 90125 같은 음반을 원하지 않았던 앤더슨은 이에 반대했다.
결국 하우와 앤더슨이 따로 쓴 소재들을 엘리아스가 중심이되어 곡 작업을 할수밖에 없었고, 엘리아스 또한 몇몇 곡에 작곡 크레딧을 올리게 된다. 이후 엘리아스가 레코딩 중 하우와 웨이크먼의 연주 방식에 불만을 가지고 토토 출신의 스티브 포카로나 지미 하운등 세션 뮤지션들을 대거 끌어들어 오버더빙했고, 하우와 웨이크먼은 이에 크게 불만을 표했다. 트레버 래빈도 이때 오버더빙 대열에 초대되었으나 거절했다고 한다.
이후 아리스타 레코드에서 상업적인 곡이 없다며 ABWH에게 추가곡을 요구했다. 앤더슨은 트레버 래빈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당시 스콰이어의 기존 예스 역시 새음반 작업에 들어가 있었기 때문에 래빈은 3곡을 제시하며 이중 한곡만 고를수 있다고 했지만 앤더슨은 세곡 다 녹음하고 싶어 했다. 직후 양측 밴드 경영진들 사이에서 함께 음반을 만드는것에 대한 의논이 시작되었다. 두 밴드의 병합에 대해선 멤버들 의견이 엇갈렸다. 래빈과 스콰이어는 이에 찬성했지만, 하우와 브루포드는 반대했다. 특히 브루포드는 ABWH가 "잘 만들어지고 있는 그룹"이었지만 "정치꾼들이 개입하면서 그 아이디어는 금세 무너졌다"고 언급했다.
결국 새로 만든 음반은 ABWH - Yes 두 밴드가 각각 따로 제작된 음반이 되었으며, 역대 예스 음반중 가장 많은 뮤지션들이 크레딧에 올린 음반이 되었다.
Union은 영국 차트 7위, 미국 차트 15위까지 올라가고 래빈-스콰이어가 쓴 싱글 Lift Me Up이 빌보드 록 차트 1위를 6주간 차지하는 등 상업적으로 성공했지만,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애초에 Union은 완벽한 재결합 음반이 아닌 ABWH가 후속음반으로 준비했던 9개 곡과 Yes-West가 작업한 4개 곡들을 적절히 섞은 음반이었으며, 특히 멤버들은 이 음반을 부정적으로 평가했다. 웨이크먼은 자신의 연주를 알아볼수 없다며 이 음반을 들을 때마다 자신을 울린다고 Onion(…) 이라고 표현했으며, 브루포드 역시 “제가 레코딩한 앨범 중 최악의 앨범”이라 표현한바 있다. 레빈은 이 음반은 연결 스레드가 없다고 생각했고 90125 와 Big Generator가 더 나은 음반이라고 평가했다.
Union 발매 직후 행해진 콘서트 투어는 Union 음반에 참여 했던 8명 멤버들이 모두 한 무대에 올랐다. 존 앤더슨 보컬에, 크리스 스콰이어 베이스, 스티브 하우와 트레버 래빈이 기타, 토니 케이와 릭 웨이크먼이 키보드, 빌 브루포드와 앨런 화이트 드럼. 그야말로 예스의 최고의 명반으로 평가 받는 The Yes Album, Fragile, Close to the Edge, 90125에 참여했던 멤버들이 모두 뭉친 역대급 라인업인 셈이다. 이 8인 조합이 화재가 되어 Union 투어는 음반에 대한 평가와 별개로 대성공 했으며 호평을 받았다. 멤버들 대부분 음반에 대한 평가와 대조적으로 투어 진행을 대부분 긍정적으로 반응했다.
Union 시절 예스의 멤버 라인업. 이렇게 모이는건 정말 드믈다.
왼쪽부터 트레버 래빈(기타), 토니 케이(키보드), 릭 웨이크먼(키보드), 앨런 화이트(드럼), 크리스 스콰이어(베이스), 존 앤더슨(보컬), 빌 브루포드(드럼), 스티브 하우(기타)
Union Tour 중 Roundabout.[19]
3.6. 이후
3.6.1. 다시 Yes-West 라인업으로, Talk
Union 투어가 끝나고 애틀랜틱 레코드의 임원이였던 필 카슨은 당시 새로운 독립 레이블이였던 Victory Music에서 새 예스음반을 제작해 달라고 요청했다. 카슨은 앤더슨-스콰이어-래빈-케이 라인업인 80년대 Yes-West 라인업을 원했으며, 이에 불만을 가진 브루포드와 하우는 밴드를 다시 탈퇴했다.당시 의외로 릭 웨이크먼과 트레버 래빈이 궁합이 좋았기에 래빈은 웨이크먼도 합류하는 방향으로 이야기했으나, 당시 소속사에서 기존에 오랫동안 함께해온 웨이크먼의 매니지먼트를 떠나라는 지시를 웨이크먼이 거절하면서 그 또한 밴드를 탈퇴하게 된다. 결국 밴드는 4년만에 도로 Yes-West 라인업으로 돌아왔다.
그렇게 1994년 발매된 음반 Talk은 예스 음반중 트레버 래빈의 주도로 본격적으로 매킨토시 4대로 녹음한 디지털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도입한 음반이었다. 하지만 영국 차트 20위, 미국 차트 33위로 이전보다 순위가 떨어졌으며, 평론가들에가 부정적인 평가를 받았다. 또한 크리스 스콰이어는 이러한 디지털 사운드에 반대했으며 이는 결국 투어 직후 래빈과의 불화로 번진다. 결국 트레버 래빈은 영화음악 작업에 집중하기 위해 투어 직후 밴드를 탈퇴 했으며, 토니 케이 또한 그 뒤를 이어 다른 프로젝트 작업을 위해 탈퇴한다.
3.6.2. 70년대 라인업 회귀, Keys to Ascension
래빈과 케이의 탈퇴 직후 나머지 멤버들은 스티브 하우와 릭 웨이크먼을 다시 초대하면서 오랜만에 1970년대 중후반 시절 라인업으로 돌아오게 된다. 1996년 이들의 스튜디오 녹음과 라이브 음원을 합친 Keys to Ascension가 발매되었고, 1997년에는 Keys to Ascension 2가 발매되었다. 하지만 음반 제작방식에 불만을 가지고 있던 웨이크먼은 음반 발매 직후 밴드를 탈퇴한다.
이후 간간히 음반에 기여를 했었던 멀티 연주자 빌리 셔우드가 잠시 키보드로 참여하여 1997년 말에 Open Your Eyes를 발매했다. 이후 해당 음반 투어 부터는 음반에서 세션으로 참여했던 러시아 출신 키보디스트 이고르 호로셰프가 건반 멤버로 합류했다.[20]
이후 1999년에는 케나다 프로듀서 브루스 페어베언을 만나 새음반 The Ladder를 녹음했다. 해당 음반에서 과거 70년대 프로그레시브 스타일과 밴드가 이전부터 해왔던 팝 사운드 균형이 어느정도 맞춰진다. 모든 곡들이 전 멤버들의 공동작곡으로 채워졌으며 당시 월드 음악에 심취해 있단 앨런 화이트와 클래식에 영향을 많이 받은 호로셰프의 스타일이 어느정도 반영된 것이다. 음반작업에 만족했던 멤버들은 이후에도 페어베언과의 작업을 원했으나, 페어베언이 음반 믹싱 작업도중 갑작스럽게 사망하면서, 멤버들은 The Ladder를 그에게 헌정했다.
음반 The Ladder는 영국 36위 미국 99위를 기록했지만, 좋은 평가를 받았다. 특히 고전 컴퓨터 게임 팬들에게는 음반 수록곡 중 홈월드의 엔딩 크레딧곡인 "Homeworld"가 아주 유명하다. 해당 게임의 엔딩곡으로 외주 받아 직접 만들어준 OST로서, The Ladder 앨범의 타이틀곡이라 부제로 The Ladder가 붙어 있다. 해당 음반을 지원하는 투어중 라스베가스 공연 실황을 담음 라이브음반이 House of Yes: Live from House of Blues라는 타이틀로 발매 되었다. 투어 직후 셔우트는 밴드를 떠났다.
이후 2000년 들어 밴드는 Masterworks Tour라는 The Yes Album 에서 Relayer 까지 수록곡들로만 이루어진 세트리스트로 투어를 돌았으며, 투어 중반 호로셰프가 여성 경비원에게 성폭행을 저지르는 대형 사건을 일으키면서 밴드를 탈퇴한다.
2001년 밴드는 키보디스트 없이 Time and a Word 이후 오랜만에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Magnification을 발매하지만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고, 해당 투어 실황을 담은 비디오가 이듬해 Symphonic Live라는 타이틀로 발매 되었다. 원래 밴드는 릭 웨이크먼을 초대해 공연할 생각이였지만, 당시 웨이크먼이 솔로 투어를 돌고 있을때여서, 대신 프로그레시브 록을 좋아하는 젊은 키보디스트 였던 톰 브리슬린이 세션 자격으로 참여했다.
2002년 릭 웨이크먼이 복귀하고 2004년까지 공연 투어를 이어가다가 35주년 기념 투어가 끝난 2004년부터 잠시 휴식기에 들어간다.
3.6.3. 존 앤더슨의 탈퇴, 크리스 스콰이어 사망
이후 2007년 밴드 40주년 기념으로 Close to the Edge and Back를 계획한다. 이때부턴 릭 웨이크먼을 대신해 그의 아들인 키보디스트 올리버 웨이크먼이 아버지를 대신해 멤버로 합류하게 된다.하지만 이 투어는 앤더슨이 천식발작과 급성호흡부전 진단으로 6개월 동안 공연을 피하라는 받으면서 갑작스럽게 취소된다. 하지만 나머지 멤버들은 앤더슨 없이도 투어를 진행하고 싶어 했고, 결국 앤더슨은 밴드를 탈퇴하게 된다. 이후 앤더슨은 나머지 멤버들이 자신을 기다려주지 않은것에 실망했으며, 그들의 작업은 더 이상 예스가 아니다라고 생각을 밝히기도 했다. 앤더슨의 자리는 올리버와 예스 트리뷰트 밴드를 했던 브누아 데이비드가 참여했다.
이후 2011년 올리버 웨이크먼이 밴드를 탈퇴했고, 그자리는 스티브 하우와 같은 아시아 멤버이자, 과거 1980년 Drama에 참여했던 제프 다운스가 오랜만에 예스에 합류하게 되었다.
2012년 보컬을 맡던 브누아 데이비드가 호흡기 질환에 걸리면서 그를 대신해 글래스 해머의 보컬 존 데이비슨(Jon Davison)가 멤버로 합류했다. 이에 대해 존 앤더슨은 "나를 대체한 보컬이 병에 걸려서 또 다른 보컬을 영입해야 했다"며 실망감을 표했다.
2013년 3월 7일 창립 멤버이자 기타리스트인 피터 뱅크스가 심부전증으로 사망했다.
2014년 7월 25일 21번째 앨범 "Heaven&Earth"의 라이센스반이 발매되었다.
2015년 6월 27일 베이스 주자인 크리스 스콰이어가 백혈병으로 사망했다. 이로써 예스를 결성한 원년 멤버들은 모두 그룹를 떠난 셈이다. 그나마 3집부터 참여한 스티브 하우가 초창기 멤버에 가깝다. 스콰이어의 자리는 과거 부터에 밴드의 여러 곡들에서 세션과 믹싱을 맡아오던 빌리 셔우드가 합류했다.
2016년 존 앤더슨과 릭 웨이크먼, 트레버 래빈은 서로 이름을 딴 ARW를 결성하고 투어를 돌았다. 이 그룹은 예스가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면서 Yes Featuring Jon Anderson, Trevor Rabin, Rick Wakeman로 개명되었다가, 2018년 마지막 투어를 끝으로 해산되었다.
3.6.4. 로큰롤 명예의 전당 헌액, 현재
2017년 러시의 추천으로 로큰롤 명예의 전당에 헌액되었다. 전성기 시절 라인업인 존 앤더슨, 빌 브루포드, 크리스 스콰이어, 스티브 하우, 릭 웨이크먼과 토니 케이, 앨런 화이트, 그리고 트레버 래빈 이렇게 8명이 대상이 되었다. 이 라인업은 1991년 Union 시절 라인업과 동일하다. 다만 사망한 크리스 스콰이어를 제외하고, 토니 케이는 같은 초창기 멤버인 피터 뱅크스가 같이 헌액이 안됐다며 불참했고, 2009년 은퇴를 선언했던 빌 브루포드는 시상식에 참석은 했으나, 기념공연엔 참여하지 않았다.
이때 앤더슨과 하우, 웨이크먼, 화이트, 래빈이 기념으로 오랜만에 재투합해 Roundabout을 연주했는데, 사망한 크리스 스콰이어를 대신하여 베이스로 러시의 게디 리가 참여하였다. 반응 역시 스콰이어를 대신할 사람은 리 밖에 없다는 분위기이다. 같이 공연된 Owner of a Lonely Heart의 경우는 스티브 하우가 베이스를 연주했다.
2018년 스티브 하우와 앨런 화이트가 있는 예스는 50주년 기념으로 진행하고 있던 투어에서 기존에 공연하지 않았던 Drama등 음반들도 공연했으며, 트레버 혼과 토니 케이 그리고 1976년 탈퇴 이후 거의 40년만에 패트릭 모라즈를 특별 게스트로 초대하기도 했다.
2022년 5월 26일 드러머 앨런 화이트가 사망했다.
2024년 현재 예스는 스티브 하우를 중심으로 여전히 The Classic Tales of Yes 투어를 진행하면서 음반을 준비하고 있다고 한다.
현재 멤버는 스티브 하우 - 기타, 제프 다운스 - 키보드, 빌리 셔우트 - 베이스, 존 데이비슨 - 보컬, 제이 셸렌 - 드럼
4. 평가
예스는 대중 음악의 수많은 장르 중, 프로그레시브 (Progressive)라는 수식어가 붙는 모든 것의 원조이자 그 자체로서 평가받는 수퍼밴드이다. 이들은 동시대의 음악 동료였던 " 에머슨 레이크 앤 파머(Emerson Lake And Palmer)", " 제네시스 (Genesis)" 등과 함께 1970년대 초 프로그레시브 록의 중흥기를 선포하면서 예술적이고 독창적인 음악세계를 30년 이상 펼쳐왔다. 이런 탐미적 음악관은 비록 동시대의 펑크 록 진영에게 적잖은 비판을 받았지만, 그들이 일궈놓은 예술 지상주의 록은 앞으로도 사라지지 않을 위대한 업적임에는 분명하다. 국내에서도 예스의 정교한 록 사운드는 수많은 추종자들을 낳아, 1970년대와 1980년대의 한국 록 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했다.5.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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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blebgcolor=#ffffff,#191919><tablewidth=100%> 보컬 | |||
1968 - 1980 1984 - 2004 존 앤더슨 |
1980 - 1981 트레버 혼 |
2009 - 2012 브누아 데이비드 |
2012 - 현재 존 데이비슨 |
|
기타 | ||||
1968 - 1970 피터 뱅크스 |
1981 - 1995 트레버 래빈 |
1997 - 2000 빌리 셔우드 |
1970 - 1981 1990 - 1992 1995 - 현재 스티브 하우 |
|
베이스 | ||||
1968 - 2015 크리스 스콰이어 |
2015 - 현재 빌리 셔우드 |
|||
드럼 | ||||
1968 - 1969 1969 - 1973 1990 - 1992 빌 브루포드 |
1969 토니 오라일리 |
1973 - 2022 앨런 화이트 |
2023 - 현재 제이 셸렌 |
|
키보드 | ||||
1968 - 1971 1983 1983 - 1995 토니 케이 |
1972 - 1974 1976 - 1980 1990 - 1992 1995 - 1996 2002 - 2004 릭 웨이크먼 |
1974 - 1976 패트릭 모라즈 |
1983 에디 좁슨 |
|
1998 - 2000 이고르 코로셰프 |
2009 - 2012 올리버 웨이크먼 |
1980 - 1981 2012 - 현재 제프 다운스 |
- 한편 고전 컴퓨터 게임 팬들에게는 홈월드의 엔딩 크레딧곡인 "Homeworld"가 아주 유명하다. 해당 게임의 엔딩곡으로 외주 받아 직접 만들어준 OST로서, The Ladder 앨범의 타이틀곡이라 부제로 The Ladder가 붙어 있다. 앨범 자체의 분위기와는 잘 안 맞지만 게임의 분위기와는 절묘하게 맞아떨어지는 명곡으로 이후로도 게이머들 사이에서는 꽤 오랫동안 회자되었다. 다만 아쉽게도 게임이 리마스터되었을 때는 저작권 문제로 인해 잘렸다.
- 퍼블릭 이미지 리미티드의 멤버였던 키스 르빈이 Close to the Edge 투어 당시 로디로 일했었다.
6. 디스코그래피
- Yes (1969)
- Time and a Word (1970)
- The Yes Album (1971)
- Fragile (1971)
- Close to the Edge (1972)
- Tales From Topographic Ocean (1973)
- Relayer (1974)
- Going for the One (1977)
- Tormato (1978)
- Drama (1980)
- 90125 (1983)
- Big Generator (1987)
-
Anderson Bruford Wakeman Howe (1989)[21] - Union (1991)
- Talk (1994)
- Keys to Ascension (1996)
- Keys to Ascension 2(1997)
- Open Your Eyes (1997)
- The Ladder (1999)[22]
- Magnification (2001)
- Fly from Here (2011)
- Heaven & Earth (2014)
- Fly from Here - Return Trip (2018) [23]
- The Quest (2021)
- Mirror to the Sky (2023)
[1]
릭 웨이크먼의 평가는 연주자적 면에 초점을 맞추어야 할것이다. 작곡이란 측면에선 아무래도 다른 멤버들이 우세했다...라고 적혀있었지만, 이런 평가는 릭 웨이크먼에게 대단히 실례이다. 본문에도 언급되다시피 웨이크먼은 런던 왕립음악대학(RCM)에서 클래식 피아노를 전공한
피아니스트 출신으로 음악적 성향이 다른 멤버들보다 좀 더 클래식, 특히 오케스트레이션 성향이 강했다. 결국 이 양반이 작곡한 음악들은 밴드 내 작품들이 아니라 별도의 개인 작업들이 훨씬 더 유명하다. 예를 들면
이런 거.
아니면 최소한 이건 어디선가 들어 봤을 것이다. 전자는 그가 예스와 처음 결별하던 1974년에 발표한 곡으로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와 협연하여 1400만장이 팔렸다고 알려졌으며, 후자는 그 다음 앨범에 포함되어 있으며 이 역시 적지 않은 판매량을 기록했다. 당시 작품들의 성향으로 볼 때, 아마도 밴드보다는 록과 클래식의 결합을 통해, 20세기 판
바그너 같은 음악을 만들어내는 데 더 관심이 있었던 것 같다. 여하튼 예스의 전성기 때 음악적인 방향에 가장 많이 기여한건 역시
존 앤더슨이고, 작곡도 마찬가지였다. 다만 그의 고집적인 산물이었던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1973)"에서의 한계도 염두에 두자.
[2]
또 릭 웨이크먼은 최근에 대영제국 훈장의 CBE 등급을 수여받았다.
https://youtu.be/lZicS7wjdMk
[3]
베이시스트
크리스 스콰이어는 리딩 베이스의 선구자였고, 드러머
빌 브루포드는 엇박, 정박을 완벽히 연주할 수 있었으며, 기타리스트
스티브 하우는 일렉 기타의 강렬한 사운드와 어쿠스틱 기타의 부드러운 음색을 모두 완벽히 표현할 수 있었다. Roundabout 앨범에서의 각자의 솔로곡 The fish, Five per Cent for Nothing, Mood for a day를 들어보면 그들의 실력을 잘 알수 있을것이다. 키보드 릭 웨이크먼은 위에 나왔으므로 생략.
[4]
릭 웨이크먼은 음악계를 통틀어 최고의 키보디스트중 하나였고,
빌 브루포드는 러시의
닐 피어트가 존경하고 영향을 받은 프로그레시브 록 최고의 드러머였고,
스티브 하우는 70년대에 이미
스티브 해킷을 누르고
지미 페이지,
에릭 클랩튼,
리치 블랙모어와 같은 빅네임들과 장르를 초월해 당대 기타리스트 순위에 오르내리고 80년대엔 아시아로 초대박을 친 프록계 최고의 기타리스트였다. 베이스는 일정 수준 위로 올라가면 비교가 힘들지만
크리스 스콰이어는 독창적이고 그루브한 연주로 최고의 평가를 받았다.
존 앤더슨은 다른 프록 보컬들과 차별화되는 성가대를 연상시키는 청아한 고음역대와 가성으로 독자적인 영역을 구축해내며 당시 Jon 'God' Anderson이라는 소리까지 듣던 거물 보컬리스트다.
[5]
여담으로,
하드 록계의 전설
레드 제플린도 아틀란틱 레코드 소속이었다.
[6]
미국에선 선정성 문제로 커버가 바뀌었다.
[7]
멤버 각자가 작곡한 곡들이 하나씩 포함되어 있다. Cans and Brahms는 릭 웨이크먼이
요하네스 브람스의 교향곡 제 4번 3악장을 어레인지한 곡이고, We Have Heaven은 보컬
존 앤더슨이 혼자 오버덥을 이용해 합창으로 만든 곡이고, Five Per Cent For Nothing은 드러머 빌 브루포드의 특기인 엇박과 정박을 넘나드는 드럼실력이, The Fish (Schindleria Praematurus) 는 스티브 하우의 기타 하모닉스와 크리스 스콰이어의 베이스 속주로 이루어진 곡이고, Mood For a Day는 스티브 하우의 클래식 기타 연주로 플라멘코 장르와 바로크의 하모니를 들을 수 있다.
[8]
이 곡은 원래부터 Fragile 앨범과 예스 밴드를 대표하는 걸작이었다. 이 곡의 조화로운 연주는 예스의 상징 중 하나인 하모니를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다. 기승전결이 희미한 구성이라 일반 대중들에게는 다소 산만하게 들릴 수 있지만, 난해하면서도 매력적인 프로그레시브 록의 모범을 보여주고 있으며, 이 때문에 예스 팬들에게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곡이다.
[9]
원작자
아라키 히로히코가 처음 스토리를 썼을때 들었던 노래중 하나라고 한다.
[10]
죠죠의 기묘한 모험에서 엔딩곡으로 쓴 뒤 유튜브에서 'Jojo'라는 댓글이 수없이 달렸는데, 예스 골수팬들은 '도대체 Jojo가 뭐냐?'하는 얘기를 끊임없이 했다.그뭔씹
[11]
프로그레시브 마니아층들은 보통 이 곡을 예스 최대의 명곡으로 꼽는다. 프로그레시브 록 4대 명곡 중 하나이다. 곡은 예스에게 있어서
핑크 플로이드의
Echoes 같은 곡이라고 볼 수 있다.
[12]
이후 방향으로 볼 때 전작 "Fragile"이나 본작 "Close to the Edge"보다 훨씬 감성적이고 개인기 위주가 아닌 밴드 지향적인 음악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13]
브루포드는 탈퇴 이후에도 릭 웨이크먼의 The Six Wives of Henry VIII (1973), 크리스 스콰이어의 Fish Out of Water (1975), 스티브 하우의 Beginnings (1975) 같은 솔로 앨범에도 참여하는 등, 예스 멤버들과 친분관계를 계속 유지했다.
[14]
이 극장은
핑크 플로이드가
The Dark Side of the Moon을 첫 초연한 공연장으로 유명하다.
[15]
어느 정도였냐면 무대에서 이 음반 수록곡을 선보이던 도중 빈 타이밍에 웨이크먼이 혼자 스테이지 위에서 카레(..)를 먹는 기행을 할정도 였으니…
[16]
존 앤더슨이 예스 활동 중 중간중간 반젤리스의 앨범인 "Heaven And Hell"의 보컬에 참여한 적이 있었다. 실제 이후 몇달간 함께 연주를 하며 밴드와 합숙을 했지만 반젤리스가 공연 투어를 다니는걸 비선호했고, 매니지먼트에서 반대하는 등 여러 이유로 결국 합류하지 않았다. 이후 반젤리스와 음악을 함께 하고 싶었던 앤더슨은 1978년 "Jon And Vangelis"라는 세션을 구성하여 총 4장의 앨범을 발표하기에 이른다.
[17]
키스 에머슨의 밴드였던
나이스가 에머슨의
ELP 결성으로 해체되면서 나이스의 남은 멤버인 리 잭슨, 브라이언 데이비슨과 키보디스트 패트릭 모라츠가 결성한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이후 모라츠가 예스에 합류하면서 해체되었다.
[18]
빌보드 Hot 100에서 1위를 기록한 곡은 "
Owner of a Lonely Heart"가 유일하고, "Love Will Find a Way"와 "Lift Me Up"은 각각
메인스트림 록 차트와 앨범록 차트에서만 1위에 올랐다.
[19]
예스를 거쳐갔던 토니 케이 - 릭 웨이크먼, 빌 브루포드 - 앨런 화이트, 스티브 하우 - 트레버 래빈이 각각 얼마나 서로 다른 연주 스타일을 지녔는지 알수 있는 실황이다.
[20]
호로셰프는
소련 출신
키보디스트로 클래식 피아니스트를 준비하다가 10대 시절 예스의 Relayer 빽판을 듣고 패트릭 모라즈를 동경해온 인물이다. 이후 20대 중반때는 미국으로 건너가
케이크워크에서 일하기도 했다.
[21]
전성기 시절 멤버들이 다시 의기투합했지만, 예스의 명의는
크리스 스콰이어에게 가있어서, 소송을 피하기 위해 사용한 명칭. 즉, 공식적으로는 예스의 앨범은 아닌 셈이다. 이후 크리스 스콰이어 측과 화해하면서 전현직 멤버가 고루 참여한 Union 앨범을 내게 된다.
[22]
게임
홈월드의 엔딩테마.
[23]
2011년에 내놓은 Fly From Here를 재녹음한 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