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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25 09:45:45

릭 웨이크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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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Music thisday라는 사이트가 선정한 " 100대 록 음악 최고의 키보디스트"이다. 기술, 창의성, 영향력, 실험정신등을 기준으로 선정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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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스 에머슨 릭 웨이크먼 존 로드 레이 만자렉 리처드 라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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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 라비츠 돈 에어리[4] 가스 허드슨 데이비드 샌셔스 이안 맥라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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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듀크 앨런 자보드 스티브 니에브 맥스 미들턴 빌리 파웰[5]
<rowcolor=#fff> 36위 37위 38위 39위 40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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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41위 42위 43위 44위 45위
켄 헨슬리 벤몬트 텐치 스티비 원더 조나단 케인[6] 척 리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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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프 다운스[7] 레온 러셀 패트릭 모라즈 위르겐 프리츠 하워드 존스
<rowcolor=#fff> 51위 52위 53위 54위 55위
마이크 핀더 맷 벨라미 알렌 라벤스틴 앨런 프라이스 마이클 맥도날드
<rowcolor=#fff> 56위 57위 58위 59위 60위
존 폴 존스 밥 마요 토니 케이 빌 페인 로이 비탄
[ 각주 ]

[1] 올맨 브라더스 밴드의 키보디스트. [2] 스틱스의 보컬 겸 키보디스트. [3] 캔자스의 기타 겸 키보디스트. [4] 딥 퍼플의 키보디스트. [5] 레너드 스키너드의 키보디스트. [6] 저니, 베이비스, 배드 잉글리쉬의 키보디스트. [7] 버글스, 예스, 아시아의 키보디스트.
61위부터는 링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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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RickWakeman.jpg
(젊은 시절)
파일:Rick Wakeman.jpg
(현재)
1. 개요2. 생애
2.1. 초기 생애2.2. 1970년대
2.2.1. 세션맨 활동, 예스 합류2.2.2. 예스 및 솔로 활동의 시작2.2.3. 탈퇴 이후, 예스의 재 합류2.2.4. 예스 재탈퇴
2.3. 1980년대2.4. 1990년대2.5. 2000년대2.6. 현재
3. 연주 스타일 및 평가
3.1. 사용하는 악기
3.1.1. 1970년대3.1.2. 1980년대3.1.3. 1990년대3.1.4. 2000년대3.1.5. 2010년대 - 현재
4. 여담

1. 개요

영국 키보디스트, 작곡가.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예스의 멤버로 잘 알려져 있으며, 수십여 개의 솔로음반을 내었고, 데이비드 보위, 블랙 사바스등 수많은 뮤지션들의 세션으로 활약하는 등 다양한 커리어를 가지고 있는 뮤지션이다.

2. 생애

2.1. 초기 생애

웨이크먼은 1949년 5월 18일 런던 서부 페리베일에서 태어났다. 건축공급업자였던 그의 아버지 시릴 프랭크 웨이크먼은 군인 시절 빅밴드에서 피아노를 연주한 경험이 있었으며, 이를 바탕으로 릭이 7살때 피아노 정식 레슨을 등록해 음악의 입문할수 있도록 해주었다.

학생 시절 웨이크먼은 여러 소규모 블루스, 재즈에서 활동했으며, 피아니스트의 꿈을 키워오며, 명문 음악대학인 왕립음악대학에 들어가서 피아노와 클래식 작곡, 클라리넷과 오케스트라 편곡을 공부했다. 하지만 다른 학우들과 실력 차이와 10개월 안에 2년치 작업을 마쳐야하는 많은 학업량에 강한 스트레스를 받았었고, 조금 더 자유로운 음악활동을 하기 위에 세션 뮤지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이후 개별 세션활동을 금지하는 왕립 음악대학 지침으로 일년만에 반 강제적으로 학교를 중퇴해 본격적으로 키보디스트로서 활동을 시작했다.

2.2. 1970년대

2.2.1. 세션맨 활동, 예스 합류

학교를 중퇴한 이후 웨이크먼은 풀타임 세션 뮤지션으로 활동하며 일주일에만 15번에서 18번 다양한 음반작업에 참여했다.[1] 당시 데이비드 보위의 음반에 참여 해 Space Oddity에서 멜로트론을 연주했으며, 1970년에 프로그레시브 록 밴드 스트롭스의 멤버로 합류했고, 그외에도 엘튼 존 Madman Across the Water, 보위의 여럿 음반들에서 세션 키보디스트로 활약했다.

하지만 1년 사이 그가 합류했던 스트롭스와의 사이의 간극이 생기기 시작했다. 웨이크먼은 더 재정으로 좋은 스튜디오 세션을 우선 순위로 삼았고 스트롭스의 새로운 음악에 거의 기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모습을 본 데이비드 보위는 웨이크먼에게 그의 새로운 빅밴드인 The Spiders from Mars에 합류 제안을 했지만, 같은 시각 마침 기존 키보디스트였던 토니 케이가 탈퇴했던 예스(밴드) 크리스 스콰이어에게 합류 제안을 받아 보위의 제안을 거절하고 예스의 멤버로 합류하게 되었다. 훗날 웨이크먼은 이때의 순간이 인생에서 가장 어려운 결정의 순간이었다고 회고했다. 그래도 이후에도 보위에 몇몇 음반의 곡들에 참여하긴 했다.

2.2.2. 예스 및 솔로 활동의 시작

1971년 그가 예스에 들어오면서 예스는 음악적으로 더욱 향상된 변화를 맞이했다. 당시 밴드는 Fragile를 녹음하고 있었는데, 웨이크먼은 투어 일정을 위해 5주동안 모든 곡들을 녹음했으며, 몇몇 곡들에 음악적인 기여를 했다. 특히 연주에 있어서 피아노 하몬드 오르간만 고집하던 토니 케이와는 다르게, 미니무그 신디사이저 멜로트론, 하프시코드, 클라비넷, RMI 368 일렉 피아노 등 다양한 키보드들을 연주에 도입해 더욱 다양한 색채를 내기도 한다. 또한 음반 수록곡중 Cans and Brahms에서 요하네스 브람스의 4번 교향곡의 3악장의 일부를 편곡해 솔로를 연주하기도 했다.

하지만 레이블사인 애틀랜틱 레코드는 웨이크먼에 합류를 끔찍하다고 보았고, 결국 레이블과의 분쟁으로 웨이크먼은 그가 작곡에 참여한 Heart of the Sunrise과 South Side of the Sky의 작곡 크레딧을 받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Fragile는 그동안 예스가 발매해온 음반 중 최고하는 찬사를 받았으며, 영국차트, 빌보트 차트에 10위권에 오르는 등 대 성공을 기록한다. 이른바 예스의 최전성기가 시작한 음반이다.

이후 1년뒤 1972년 발매하는 Close to the Edge 또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Fragile와 함께 예스 뿐만 아니라 프로그레시브 록/ 아트 록 역사상 최고의 명반 중 하나로 꼽히고 있다. 웨이크먼은 Close to the Edge에서 파이프 오르간을 연주하기도 했으며, Siberian Khatru에서 처음으로 작곡 크레딧을 부여받았다. 웨이크먼은 Close to the Edge를 가르켜 ''예스의 경력 중 가장 훌륭한 순간 중 하나"로 꼽았다. 같은 시기 투어에서 밴드의 팬이 공연에서 망토를 입는 것을 제안하면서 망토를 입은 웨이크먼의 모습은 그만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으며, 당시 실황을 영상으로 담은 Yessongs에서 볼수 있다.
파일:Wakeman YES.webp
예스 활동을 이어가던 중 웨이크먼은 A&M Records와 솔로음반 계약을 맺고 1년뒤인 1973년 실질적인 첫 솔로 음반인[2] The Six Wives of Henry VIII을 발매 했다. 이 음반은 헨리 8세와 그의 여섯 왕비들의 이야기를 그린 음반으로 스티브 하우나 빌 브루포드 등 다른 예스 멤버들도 몇몇 곡에 참여했다. 수록된 모든 곡이 인스트루멘탈에 클래식 성향이 짙은 음반임에도 불구하고 영국 차트 7위, 미국 빌보드 30위까지 오르며 상업적으로 주목 받았고, 평단 역시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다.

같은 시기 예스는 새 음반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의 제작에 들어간다. 하지만 웨이크먼은 음반의 난해한 컨셉과 지나치게 과한 구성인 더블 음반이라는 점에서 의구심을 품기 시작했고 이러한 의구심은 음반 기여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결국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는 발매 이후 차트는 정상을 차지했으나, 엇갈린 평가를 받았다. 이후 웨이크먼는 예스와도 거리를 두기 시작했으며, 특히 곡이 난해해 리허설이 더 필요하다는 웨이크먼에 제안을 다른 멤버들이 거절했으며, 웨이크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투어에서 Tales from Topographic Oceans를 전곡을 연주하면서 웨이크먼에 좌절감은 더욱 커져만 갔다. 이후 멘체스터 공연에서 웨이크먼이 무대에서 파트가 비어있는 지루한 타이밍에 혼자서 카레를 먹은(…) 일명 "카레 사건"으로 이러한 사태는 절정에 달했다.

투어 중반 잠시 휴식기간인 1974년 초 웨이크먼은 고전 소설 지구 속 여행을 바탕으로 제작한 두번째 솔로음반 Journey To The Centre Of The Earth를 발표했다. 이 음반은 런던 심포니 오케스트라가 참여한 라이브 음반으로, 원래는 스튜디오 음반으로 제작될 예정이었으나, 재정적인 문제로 라이브로 녹음되었고, 자금 조달을 위해 웨이크먼이 자신의 자동차 몇 대를 팔아버릴 정도로 재정적으로 상황이 좋지 않았다고 한다. 그러나 출시 직후 평단에서 전반적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 영국 차트 1위, 미국 빌보드 3위를 기록하는 등 상업적으로 대성공하였다. 이는 웨이크먼의 솔로 음반 중 가장 높은 기록이다.

결국 예스와 음악적 견해가 벌어질대로 벌어진 웨이크먼은 그의 25번째 생일인 1974년 5월 18일 런던 레인보우 극장 공연후 예스를 탈퇴 한다. 여담으로 웨이크먼은 Journey To The Centre Of The Earth가 차트 정상에 올랐다는 사실을 탈퇴 통보 직후에 알았다고 한다.

2.2.3. 탈퇴 이후, 예스의 재 합류

탈퇴 직후 웨이크먼은 솔로 투어인 Journey To The Centre Of The Earth 투어를 진행한다. 하지만 이 시기 웨이크먼은 투어 스트레스와 수면부족, 과도한 흡연, 음주로 인한 건강 문제에 직면해 자주 의식을 잃어 여러차례 타박상을 입기도 했으며, 공연 이 끝난 직후 경미한 심장마비를 겪어 병원에 입원하기도 했다. 병원에서 회복하는 동안 웨이크먼은 아서 왕 전설을 컨셉으로 한 컨셉트 앨범 The Myths and Legends of King Arthur and the Knights of the Round Table를 제작하기 시작했다. 당시 음반 경영진과 의사들은 웨이크먼의 건강 상태를 고려해 잠시 음반 준비와 연주를 중단하라고 권고했지만, 웨이크먼은 이를 무시하고 음반준비와 투어에 강행했다.

음반 The Myths and Legends of King Arthur and the Knights of the Round Table은 1975년 발매 되었으며, 영국 차트 2위, 빌보드 차트 21위를 기록하는 등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이후 해당 음반 순회공연 투어를 지속적으로 이어갔으며, 같은 해 프란츠 리스트의 이야기를 담은 영화 리즈의 사운드트랙과 이듬해인 1976년 솔로음반인 No Earthly Connection를 발매했다.

하지만 당시에 투어 수익이 비용에 충족하지 못해 재정적 어려움에 빠졌었다. 웨이크먼은 가지고 있던 롤스로이스 자동차를 매각했으며, 개인이 하던 사업과 자신의 개인 밴드를 해산하는 등 여러 어려움을 겪었지만, 음반사인 A&M에서 로열티를 미리 지급하기로 하면거 간신히 봉합되었다. 하지만 당시 영국병을 비롯한 영국의 경제 상황으로 인해 수익이 많았던 웨이크먼도 예외는 아니었고, 결국 세금망명자가 되었다.

비슷한 시기 존 웨튼 빌 브루포드와 새로운 밴드를 결성할 계획으로 6주간 리허설을 시도 했으나, 별다른 이야기 없이 무산되었으며,[3] 1976 인스브루크 동계올림픽의 다큐멘터리 화이트 록의 사운드트랙을 맡았다.[4]

그 외 같은 시기 기존 웨이크먼이 사용하던 각 음마다 자기테이프를 사용하는 건반악기인 멜로트론의 대체 악기인 바이로트론(Birotron)에 자금 투자를 하기도 했다.[5][6] 이 악기는 훗날 웨이크먼의 솔로음반인 Rick Wakeman's Criminal Record와 예스 복귀뒤 발매된 Tormato의 레코딩에서 사용되었다.

1976년 예스 내부에서 심리적 압박감을 받고 있던 그의 후임 키보디스트인 패트릭 모라즈를 대신에 다시 예스의 레코딩 세션에 초대 받게 된다. 당시 밴드는 이전 보다 사운드가 비교적 가벼워진 Going for the One를 녹음하고 있었는데, 웨이크먼은 몇년전 Topographic Oceans 보다 훨씬 마음에 들어했다고 한다. 1977년 Going for the One이 발매된 이후에도 훗날 인터뷰에서 ''예스가 Topographic Oceans 대신 만들었어야 했던 앨범 "라고 견해를 밝혔으며, 수록곡인 15분 길이의 "Awaken"을 예스에서 최고의 순간중 하나하고 말하기도 했다. Going for the One은 영국 차트 1위 빌보드 8위에 오르는 등 상업적으로 성공했으며, 평론가들에게 좋은 평을 받았다.

같은 해 솔로음반 Rick Wakeman's Criminal Record가 발매되었다.

2.2.4. 예스 재탈퇴

성공적으로 예스의 Going for the One 투어를 마무리한 이후 다음 음반인 Tormato 에도 참여했으며, 하지만 Tormato 레코딩에 들어가면서 다시 불화가 생기기 시작했다.

웨이크먼은 음반의 곡들이 이 서로 연결될 수 있도록 기존에 사용하는 키보드 수를 줄여 "조금 더 흐르는" 음반을 만들려 했다. 하지만 스티브 하우는 웨이크먼이 음반에서 많이 사용한 Polymoog 신디사이저와 바이로트론이 자신의 기타 사운드를 보완하지 못했다고 말했으며, 크리스 스콰이어는 웨이크먼과 하우가 하나의 마디에서 더 많은 음을 연주하려고 시도한 것처럼 느꼈는데, 이는 존 앤더슨의 어쿠스틱 기타에 기본 코드를 깐 다음 믹스에서 꺼내어 공백을 남긴 후에 발생했다고 말했다. 결국 음반이 발매된 직후 1979년에 웨이크먼도 앨범을 되돌아보며 "60%는 맞고 40%는 틀렸다"고 말하며, 다르게 연주했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말하는등 음반 내에 건반 사운드의 비약함을 인정했다.

한번은 하우가 웨이크먼의 바이로트론의 자기테이프를 소프트 록 밴드 실즈 앤 크로프츠의 테이프로 교체하는 장난(…)을 쳤다가 웨이크먼이 빡쳐 스튜디오를 벅차고 나간 사건도 있었다.

1978년 공개된 Tormato은 발매 직후 비평적으로 악평을 받았고 훗날 웨이크먼도 위에 사례를 들어 비극적인 음반이라고 말한바 있지만, 전작과 마찬가지로 상업적으로 성공했다. 또한 같은해 열린 투어 또한 성공적으로 성사되었다.

투어가 끝나고 1979년 10월 예스는 파리에서 다음 음반을 위해 모였다. 하지만 앤더슨과 웨이크먼은 더 환상적이고 섬세한 접근 방식을 선호하는 반면, 하우와 스콰이어, 앨런 화이트는 훨씬 하드한 록 사운드를 선호하면서 음악적 분열이 생기기 시작했다. 특히 하우와 스콰이어, 화이트가 당시 앤더슨이 제공한 곡이 너무 가벼웠고 그들이 선호한 하드한 사운드와 안 어울렸기 때문에 그의 어떤 음악도 좋아하지 않았다.

파리 세션은 화이트가 롤러 스케이팅 중 발이 부러진 후 12월에 갑작스럽세 종료되고, 2월에 예스 멤버들이 다시 모였지만 레코딩 세션중 멤버들간 음악적 간극만 더욱 벌어지게 되고 결국 엔더슨은 밴드를 떠났다. 앤더슨이 떠나고 낙담한 웨이크먼도 그와 같이 밴드를 다시 탈퇴했다.

2.3. 1980년대

2.4. 1990년대

2.5. 2000년대

2.6. 현재

3. 연주 스타일 및 평가


(1989년 앤더슨 브루포드 웨이크먼 하우 공연중 릭 웨이크먼의 키보드 솔로)[7]
파일:WakemanKeyboard.jpg

”명실상부한 최고의 키보디스트 중 한명.” 특히 록 음악계 최고의 키보디스트를 논할 때 존 로드, 키스 에머슨, 리처드 라이트, 레이 만자렉, 토니 뱅크스 그리고 후대의 옌스 요한슨, 조던 루데스와 함께 항상 거론되는 인물이다.

웨이크먼은 수백여개의 키보드 / 신디사이저를 소유하고 있으며, 라이브에서도 다른 키보디스트였으면 1대에서 많아도 4대까지만 사용하는 반면 최소 신디사이저를 8대에서 10대 이상은 사용하는 멀티 키보드 형태를 현재까지도 고수하고 있다.

멀티 키보드 형태란 키보디스트의 주위에 배치한 각 키보드를, 각각 독립한 악기로는 보지 않고, 하나의 악기의 시스템으로서 취급하는 연주 기법으로, 기존의 곡의 편곡에 더해 특정 사운드가 필요한 파트가 오면, 특정 사운드가 나오는 악기의 건반에 손을 가져가, 필요한 연주를 실시하는 하는, 키보디스트가 다루는 방법론으로 웨이크먼은 이러한 방법론에 선구자다.

과거 1970년대 아날로그 시절에는 건반마다 나는 음색이 다르고 특성도 각자 제각각이라서 라이브에서 여러 건반을 쌓아두고 연주하는 키보디스트들이 많았지만, 1980년대 들어 여러가지 음색을 낼 수 있는 디지털 신디사이저들이 속속 개발되고 점점 발전해 가면서 2,3대면 몰라도 5대 이상 건반을 한꺼번에 무대에 들이는 경우는 드물어졌지만, 웨이크먼은 여전히 멀티 키보드 방식을 고수하고 있으며, 이러한 그의 방식은 이후 제프 다운스, 코무로 테츠야 같은 후대 키보디스트들에게 영향을 줬다.

3.1. 사용하는 악기

3.1.1. 1970년대

3.1.2. 1980년대

3.1.3. 1990년대

3.1.4. 2000년대

3.1.5. 2010년대 - 현재

4. 여담



[1] 짧은 시간에 여러 음반들에 녹음하는 모습을 보고 뮤지션들 사이에서 원 테이크 웨이크먼이라는 별명이 생긴건 덤. [2] 웨이크먼은 이전에 이미 1971년 발매된 팝 음악들을 피아노곡으로 편곡해 녹음한 Piano Vibrations 라는 솔로 음반은 발매한 바 있으나, 웨이크먼이 로열티를 받지 못하는 재정등 여러모로 문제가 많아 사실상 흑역사 취급한다. [3] 이 구상은 웨이크먼 대신 록시 뮤직의 키보디스트 에디 좁슨의 합류로 결성된 U.K.로 대중들 앞에 선보여 진다. [4] 해당 다큐멘터리는 마침 피터 가브리엘이 탈퇴한 필 콜린스 체제의 제네시스의 라이브 실황 영화인 Genesis: In Concert와 동시 상영되었다. [5] 해당 악기는 멜로트론와 마찬가지로 자기테이프로 구동되나, 8트랙 테이프를 사용하여 멜로트론의 문제점인 8초뒤에 음이 중단되는 문제점을 피할수 있었다. [6] 바이로트론은 1975년 발표 당시 뮤지션들에게 큰 주목을 받았으며, 존 레논, 폴 매카트니, 키스 에머슨, 존 폴 존스, 엘튼 존이 사전 주문을 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악기를 실질적으로 사용했던 뮤지션은 탠저린 드림과 클라우스 슐체 둘 뿐이이다. [7] 해당 라이브는 릭 웨이크먼 솔로 연주 영상중 가장 유명하다. [8] 참조 [9] 이건 정식은 아니고, 딥 퍼플 키보디스트 돈 에어리가 건강상의 이유로 잠시 빠져서 임시로 잠깐 활동한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