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 프랑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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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France–United Kingdom relations( 영어) / Relations entre la France et le Royaume-Uni( 프랑스어).[1]
아무래도 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왕국가 오랫동안 교류했고 스코틀랜드 왕국 또한 결혼동맹 등으로 프랑스와 밀접한 관계를 맺었기에 Anglo-French relations란 용어도 쓰인다.
오랜 라이벌 관계로 유명하다. 아쟁쿠르 전투, 워털루 전투 등은 국내에서도 유명하다. 역사적으로도 중세부터 나폴레옹 전쟁까지 서유럽의 패권을 두고 다투었지만 19세기부터는 프랑스가 영국과의 경쟁을 피하기 시작하며 양국 사이의 물리적 충돌이 사라졌다.[2] 그리고 20세기에는 양차 대전을 겪으며 새로운 강대국 독일과 소련을 상대로 군사 동맹을 맺으며 협력했다. 다만 현재도 국민감정상으로는 여전히 라이벌 관계이다.
오늘날에 35만 명의 프랑스인이 영국에 거주하며 프랑스에도 약 40만 명의 영국인이 거주한다. 통혼이 빈번했고 인구 이동도 잦았던 탓에 조상 중에 영국인의 피가 섞여 있는 혼혈인 프랑스인이나 프랑스인의 피가 섞여 있는 영국인이 굉장히 많다.
2. 단순비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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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1f2024> 항목 | 영국 | 프랑스 |
면적 | 243,610km²[3] | 674,843km²[4] [5] |
인구 | 67,026,000명 [A] | 68,000,000명[A] |
수도 | 런던 | 파리 |
언어 | 영어( 영국식)[8] | 프랑스어 |
명목 GDP[B] | $3조 5,875억 (6위) | $3조 1,741억 (7위) |
1인당 GDP[10] | $52,423 | $48,012 |
무디스 국가신용등급 | Aa3 | Aa2 |
국방비 | $749억 | $613억 |
정치형태 | 의원내각제 | 이원집정부제 |
국가원수 | 찰스 3세 영국 국왕 |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
정부수반 | 리시 수낙 영국 총리 |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가브리엘 아탈 프랑스 총리 |
국토면적과 정치체제를 제외하면 인구, 경제력, 군사력 등등 대부분의 스펙에서 신기할 정도로 비등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니 서로가 라이벌일 수 밖에 없다.
3. 역사
3.1. 로마 시대와 1000년까지
로마 제국 시절 갈리아와 브리타니아는 모두 켈트족들의 땅이었다. 이후 로마에 정복당하여 두 지역 모두 로마의 속주로 편입되었다. 다만 이 시절의 켈트는 후대의 사람들이 묶은 범주일 뿐, 양 지역민 사이에는 서로 동족 의식이 전혀 없었다.이후에 게르만족이 쳐들어오면서 프랑스에는 라틴계나 켈트계 말고도 게르만계가 포함되었고 , 이 게르만족 가운데 색슨(작센)족이나 앵글(앙겔른)족이 브리튼 섬으로 이주해서 켈트족을 스코틀랜드와 웨일스로 쫓아내고 잉글랜드땅을 차지하였고 , 게르만족이 브리튼 섬에 대거 유입되었다. 프랑스가 프랑크 왕국을 거치면서 자체적인 정체성을 쌓는 동안 잉글랜드는 소왕국들이 권역 내에서 군림했다.
3.2. 노르망디 공 시대
그러다가 롤로가 이끄는 북유럽의 노르만족들이 내려와 프랑크 왕국 서쪽 지역인 네우스트리아를 대대적으로 약탈했다. 파리까지 약탈당하자 골치가 아파진 당시의 프랑크 왕 카롤루스 3세는 충성을 대가로 네우스트리아 서북부 땅을 노르만인들에게 주면서 노르만인들의 땅이라는 뜻으로 노르망디라 부르게 된다. 이렇게 노르망디의 공작이 된 노르만인의 후손인 정복왕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정복하여 잉글랜드의 왕이 되었다.먼나라 이웃나라의 폐해로 잉글랜드 왕이 프랑스왕의 신하였다고 아는 사람도 있는데, 잉글랜드 왕국(정확히는 원래 웨식스 왕국)은 프랑크 왕국만큼이나 역사가 오래되었으며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의 왕이 되면서 잉글랜드 왕위와 노르망디 공작위는 분리되어 운영되었는데 프랑스는 노르망디 공작령에 한해서만 명목상 주군이었을 뿐이다. 프랑스 왕은 잉글랜드와 잉글랜드 왕위에 대해서는 전혀 아무런 권한도 가지지 않았다. 즉, 잉글랜드 국왕은 프랑스 영토 내에서는 노르망디 공으로서 프랑스 국왕의 신하였지만, 프랑스 밖에서는 동등한 왕이었다.
1350년경 잉글랜드의 추정인구는 300만, 1801년에는 770만 정도였다. 그러다가 1821년에 1,000만을 넘겼고 1871년엔 2천만, 1901년엔 3,000만을 넘기는 등 파죽지세로 성장했다.[12] 그에 비해 프랑스는 120년에 이미 700만이었고 그후 감소하다가 850년경에 다시 700만을 회복했다. 그리고 1226년에 1,600만이었고 1345년에 2,020만 정도로 추정한다.[13] 1000년 경에 중국의 인구가 약 8,700만이었고[14] 15세기까지 그리 큰 변화가 없던 걸 생각하면 당시 프랑스의 인구는 잉글랜드와는 비교하기 힘들 정도로 굉장히 많았다. 추세가 유지되었다면 현재 프랑스의 인구는 2~3억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3.3. 12세기의 전쟁
자세한 항목은 리처드 1세, 존 왕, 필리프 2세 항목 참조.이 시점을 기준으로 잉글랜드는 프랑스 내 영토를 급격한 속도로 상실하기 시작했다.
3.4. 백년전쟁과 전쟁 이후
그러나 백년전쟁이 터지면서, 후반기에 접어들 무렵에는 프랑스 영토의 절반 수준을 집어삼킬 정도로 우세를 점했다. 궁지에 몰렸던 프랑스는 이후에 잉글랜드 세력을 칼레를 제외[15]한 프랑스 본토에서 완전히 몰아냈지만 워낙 길었던 전쟁의 여파로 프랑스도 상당히 타격을 입었다.노르망디 공 시기에 프랑스어가 영어에 영향을 주었다는 설이 있는데 그건 왕실이나 귀족이 쓰는 고급 언어 차원이었고, 대중 언어의 측면을 보면 프랑스어에 영향을 미친 라틴어가 영어에도 마찬가지 영향을 주었다는 해석이 더욱 적절하다. 참고로 프랑스어의 경우 지금도 사전에서 라틴어 어원을 쉽게 찾을 수 있다.[16] 아주 노골적으로 말하자면 게르만족 언어를 베이스로 야매 라틴어를 섞어 쓰던 잉글랜드가 원조에서 많이 변질되었지만[17] 직접 라틴어를 구사하던 프랑스를 베꼈다는 게 정확하다. 그렇게 사이가 안좋은 나라였지만 국익에 따라 협력하는데 중세 시대 프랑스가 제일 두려웠던 주적은 잉글랜드가 아닌 신성 로마 제국으로 대표되던 합스부르크였다. 잉글랜드가 합스부르크와 동맹을 체결하거나 아니면 프랑스가 스코틀랜드와 동맹을 체결하여 합동 공격을 가한다면 위기가 오기 때문에 잉글랜드의 제임스 1세와 프랑스의 루이 13세가 사돈을 맺은 것도[18] 후방을 안정시키고 합스부르크를 치기 위함이었다.
이후 17세기에 30년 전쟁이 일어나자 프랑스는 구교임에도 신교 편으로 투입돼 싸웠고, 그 와중에 프랑스와 인구가 엇비슷했던 독일 지역은 1700년에 1,960만 수준으로 회복했을 정도로 처참히 파괴되었다.[19]
17세기가 지나면서 잉글랜드는 해군력을 발전시켜 당시 먼저 대항해 시대에 진출하여 패권을 부리던 스페인, 포르투갈, 네덜란드와 비슷한 위치로 올라섰으며, 북아메리카쪽에 식민지를 개척했다. 프랑스나 스코틀랜드도 한 몫 해보려고 했는데 이들의 식민지 개척은 실패했고 7년 전쟁 등을 거치면서 영국이 북미 및 인도 식민지 쟁탈전에서 우위를 점했다.
3.5. 나폴레옹 시대
영국이 한참 북아메리카에서 재미를 봤다가 미국의 독립으로 북미 영토의 상당수를 잃어버렸고, 영국에 한 방 먹이기 위해 미국을 돕던 프랑스는 재정 파탄이 일어났다. 이로 인해 프랑스는 프랑스 혁명이 일어나 왕의 목이 날아가고 적잖은 기간 동안 정치적 혼란을 겪다가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등장하며 프랑스 제1제국이 수립되었다. 유럽 대륙을 완전히 제패한 나폴레옹에게 유일한 적은 영국이었다. 영국은 반프랑스 연합의 중심이었고 그들에게 자금을 지원했기 때문에 프랑스 입장에서는 반드시 꺾어야만 하는 상대였다. 이 시기 영국인들은 또 그들 나름대로 나폴레옹의 프랑스군이 영국 본토에 상륙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굉장히 컸다.[20] 영국은 트라팔가르 해전에서 프랑스 해군에게 대승했고 나폴레옹은 러시아 원정 이후 서서히 몰락했으며 워털루 전투에서마저 패배하며 유배되어 생을 마쳤다.한편, 늘 유럽 대륙 언저리에서 프로이센 왕국, 프랑스, 그리고 러시아를 견제하는 등, 유럽의 조정자 역할을 자처한 영국은 여러 곳에서 이득을 챙기며 식민지를 확장해 국력을 쌓았다.
3.6. 19세기
살벌하게 전쟁을 벌였던 나폴레옹 시대 이후에는 양국 사이에 군사 충돌이 거의 벌어지지 않았다.[21] 오히려 크림전쟁 등에선 힘을 합쳐서 러시아를 견제하고, 제2차 아편전쟁에선 양국 연합군이 청나라의 수도 베이징을 함락시키며 중국을 공격했다. 여기까지는 그저 자신들의 이익에 따라 견제와 협력을 오갔던 영불 양국이었으나 독일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서 프랑스를 상대로 승리하며 신흥 강대국으로서 등장하자 영불협상을 체결했다. 오토 폰 비스마르크로 인해 외교적 고립을 당했기에 믿을 수 있는 동맹국을 시급하게 찾아야 했던 프랑스와, 명예로운 고립을 외치며 식민지 확장에만 몰두했으나 독일의 매서운 성장 속도를 보고 위협을 느낀 영국의 이해관계가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결과였다.당시 부르주아 계급이 발달하면서 소설이나 연극 등이 유행하던 건 두 나라 다 비슷했다. 프랑스어는 당시 유럽에서 교양 있는 언어로서 정치권과 사교계에서 공용어로 사용되었으며 영어는 상업에서 많이 쓰였다.
3.7. 20세기
벨 에포크를 지나 유럽의 팽창은 내부적인 한계에 부딪치고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가 충돌하면서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난다. 1904년 영불 협상을 맺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동맹국으로 독일과 싸웠다. 1차 대전 이후 양국은 독일을 비롯한 패전국의 식민지를 나눠 가졌다. 또한 프랑스는 영국과 비밀협정을 체결해서 아랍권국가들을 식민지배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세기부터 쌓여온 제국주의의 모순과 사회진화론, 제노포비아 등이 결합되면서 1차 대전이 끝난지 불과 20여년 밖에 지나지 않은 시기에 미영프와 독일이 체결한 베르사유 조약의 문제점으로 인해서 극단주의가 사회에 만연했던 독일에서 나치가 등장하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다시 일어난다. 이 전쟁에서도 프랑스와 영국은 승리했다.
그러나, 전쟁으로 인해 독일군에게 순식간에 털린 프랑스는 산업 기반이 많이 파괴되었으며 영국도 폭격과 군비 증강으로 경제적으로 피폐해졌다. 이미 19세기 말부터 저력을 쌓아오며 성장한 미국이 그들을 옛적에 추월했고 본인들이 우습게 보았던 러시아도 소련을 거치면서 막대한 공업생산량으로 초강대국이 되었으며, 6.25 전쟁 특수를 시작으로 제대로 탄력이 붙은 일본이 경제 대국으로 성장하고, 독일이 패전 후 막대한 경제 원조를 얻으며 영국과 프랑스를 추월하는 등 이 둘의 국제적 위상은 점점 색이 바랜다.
게다가 제2차 세계대전 전후에 양국은 식민지들을 안 놓으려고 베트남, 케냐, 알제리 등 식민지에서의 독립운동을 억압하며 식민지 통치를 유지하려고 하였지만, 결국 국제사회의 비난 여론과 거세지는 식민지들의 독립 운동에 버티지 못해 대부분의 식민지들을 다 독립시키고 경제/정치적으로 위축되기에 이르렀다. 특히 전투에서는 압도적으로 승리했으나 미국, 소련의 압박으로 인해 이집트에 수에즈 운하를 뺏기게 된 2차 중동전쟁을 겪으며 영불의 위기의식은 극에 달했고, 그 결과물로서 핵을 개발해 양국 모두 핵 보유국이 되었다. 영국의 핵개발과 프랑스의 핵개발 참고.
3.7.1. 프랑스-영국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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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년 수에즈 위기로 더 이상 미국과 소련에 영국과 프랑스가 국력으로 맞설 수 없는 현실이 명확해지자 프랑스-영국 연합이 다시 고려되었다. 프랑스 측은 고개를 숙이며 프랑스가 영연방에 가입하거나, 더 나아가서 엘리자베스 2세를 공동 국가원수로 하고 양국의 군사력을 합치는 방안을 제안했다. 독자적 성향의 프랑스는 양국 연합이 냉전에서 제 3세력으로 세력을 유지하기를 원했지만 영국이 거절했다.
3.8. 21세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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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프랑스에서는 "꼴도 보기 싫은 영국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히고 엿을 먹이려면 영국에서 만든 스포츠인 축구를 이겨야 한다!" 라고 생각해서 축구 발전에 온갖 공을 들였다.
역사적 사건이나 정치적 이해관계, 그 외에도 스포츠나 언어 같은 문화적 요소로 인해 발생하는 양국간의 감정 싸움에 있어, 영국과 프랑스가 서로를 비난하는 모습은 가히 본능적이다. 대표적으로 콘돔을 부르는 속어로 영국은 '프랑스식 편지(French letter)'라고 부르고 프랑스에서는 '잉글랜드산 외투(Capote Anglaise)'라고 부른다.
그리고 근대까지 불치병이었던 매독의 경우 영국에선 ’프랑스에서 온 천연두(french pox)’라고 불렀다.[23] 특히 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 독일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해서 6주만에 항복하고 본토까지 빼앗긴 프랑스의 최대 흑역사는 언제나 영국인들의 주요 놀림거리이다. 영국에서는 프랑스인들을 비하할 때 "개구리나 처먹는 놈들" 이라면서 개구리(frog)라고 부르며[24] 프랑스에서도 영국 요리를 "맛대가리 없는 요리나 처먹는 놈들" 이라면서 조롱하기도 한다.
그래도 비교적 최근인 1차대전과 2차대전 때 동맹국이 되었으니 현재 국민적 감정은 상당히 우호적으로 변했다.[25]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스포츠에서는 라이벌 감정이 강력하다.
두 나라는 채널 터널로 이어져 있으며 물리적인 거리도 가깝다. 따라서 영불 양국 사이에 인적교류는 매우 활발하다.
다만 유럽연합을 비롯한 유럽 통합 문제에 관해서는 두 나라의 견해가 갈리는 편이다. 영국은 해양 국가라는 지리적 특성상 유럽 내 패권국과는 거리가 멀기 때문에 유럽 내 협력에 다소 미온적이며 각 나라의 주권을 더욱 중시한다. 일례로 영국은 EU 시절에도 파운드 스털링을 고집했으며 유럽 통합군 설립이나 난민 이슈 등에 대해서도 소극적인 자세로 일관하며 국제외교에서도 유럽 국가들보다 미국 및 영연방 국가들과의 관계를 더욱 중시한다. 반면 프랑스는 대륙 국가답게 프랑스 중심의 유럽 통합에 적극적이며 이웃나라인 독일과의 협력을 강화하는 등 유럽의 연방화를 위해 노력한다. 이러한 양국의 외교 스탠스 차이 때문에 샤를 드골 전 대통령은 영국의 EEC(현 EU의 전신) 가입에 반대했다.[26]
일례로 미국에 대한 스탠스 차이에서 영불 사이의 이견이 드러난다. 이라크 전쟁에서 영국이 미국과 공조체계를 유지한데 비해 프랑스나 독일은 반대 의사를 표시했다.
프랑스의 법인세가 영국보다 비교적 높기에, 프랑스의 대기업들이 종종 영국으로 도망가는 사건이 발생한다. 이에 프랑스 신문은 "꺼져라 배신자여"라고 제목을 싣기도 하였는데, 당시 영국의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신께선 영국을 부유하게 만들기 위해 프랑스를 만들었다"라는 식의 대놓고 어그로를 끌어서 프랑스 정치가들이 험악한 언사를 내뱉었고, 양국관계가 악화되었다.
2018년에 양국간 어민들이 가리비 갈등으로 육탄전까지 벌이는 상황이 오기도 했다. # 양국의 정부들은 중재를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 이와 별개로 현재 영국 정부와 프랑스 정부 사이에서는 브렉시트 이후의 영국과 유럽연합의 관계를 설정하는 협상을 앞두고 팽팽한 기싸움이 오가는 중이다.
2019년 7월 26일에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보리스 존슨 영국 총리는 전화통화를 했지만, 브렉시트의 입장차만 확인했다. # 2020년 1월 브렉시트가 공식적으로 시행되는 날 마크롱 대통령은 영국이 EU에 다시 들어갈 수 없다고 밝혔다. #
마크롱 대통령은 2020년 내에 영국과 EU 간 미래관계 합의를 장담하기 어려울 것으로 내다봤다. # 그리고 그 말대로인지 몰라도 양국의 어업권 두고 긴장감이 돌고 있는 상황이다. 게다가 양국이 저지섬에 순찰선까지 보내는 등 긴장관계가 고조되었다. #, 위키피디아 정보
2021년 9월에 미국과 영국, 호주가 AUKUS를 결성하자 프랑스 측은 반발했다. 이에 프랑스 정부는 주 호주 대사, 주 미국 대사를 소환했고 영국과의 국방장관 회담까지 취소했다. #
프랑스는 영국과 어업 분쟁이 해결되지 않으면 채널 제도에 대한 에너지 공급을 차단하겠다고 경고했다. # 2021년 10월에 프랑스가 영국 어선 1척을 나포하는 일이 발생했다. #
현재로서는 독일-프랑스 관계가 국가적으로 영국-프랑스 관계보다 가까운 모양새이다. 양차대전 시절 양국이 대독 동맹이었다는 사실을 고려하면 세월이 무색한 변화이다. 다만, 상술했듯 전후 프랑스-독일은 둘다 기본적으로 "두 나라가 축이 되어 유럽을 주도하고 그 단결한 유럽을 중심으로 유럽 대륙의 입김을 유지한다"는 식의 미래 비전이 일치했고, 영국은 전통적으로도 계속 단결보다는 어느 정도의 균열 및 세력 균형을 추구했고 EU에 가입한 이후에도 영연방 및 미국과의 협력을 더욱 중시했다. 브렉시트로 영국이 나가자 과격한 유럽주의자들은 차라리 잘 됐다는 반응을 보였다. 브렉시트 이후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아헨협정이 체결되면서 점진적으로 영국-프랑스 관계나 영독관계보다 독불관계가 더욱 진전되는 상황이다.
그럼에도 기본적으로 양국은 서로를 우방국으로 간주하며 다방면에서 협력을 모색한다. 이러한 이유 폴란드볼 창작물에서는 악우 내지는 노부부 관계로 묘사된다.
2022년 9월 9일,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사망하자 마크롱 대통령은 조기 게양을 지시했다. #
2022 카타르 월드컵 8강에서 잉글랜드와 프랑스가 맞붙었다. 결과는 프랑스 승.
영국과 프랑스 양국에서 물가와 연금개혁과 관련된 시위가 일어났다. #
4. 관련 문서
5. 외부 링크
[1]
영어 위키백과에선
프랑스를 앞에 두고 있는데, 영어는 영국만이 쓰는 언어가 아니며 영어 위키백과는 영어로 된 위키백과일 뿐 영국의 위키백과가 아니기 때문에 단순히 알파벳 순서대로 해서 프랑스가 앞에 나온 것이다.
[2]
이 때부터 영국의 실질적인 견제 대상은
러시아 제국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그레이트 게임 문서 참고.
[3]
영국
왕실령과 해외 영토의 면적까지 포함하면 262,497km²이다.
[4]
정확히는 면적이 꽤 되는 해외 영토인
프랑스령 기아나를 합친 수치이다. 이쪽 수치를 뺀 프랑스 본토 자체의 면적은 54만km² 정도이다.
[5]
이는
한반도면적의 3배 정도이다
[A]
2021년
https://www.ons.gov.uk/peoplepopulationandcommunity/populationandmigration/populationestimates/bulletins/annualmidyearpopulationestimates/mid2021
[A]
https://www.insee.fr/en/statistiques/6797730
[8]
영국에도
스코트어,
웨일스어 등의 다양한 언어가 존재하지만 공용어는 영어이다.
[B]
2024년 10월 기준
[10]
2024년 10월 기준
[11]
2023년 1월 기준
[12]
출처:
영국의 인구통계(영어)
[13]
출처:
프랑스의 인구통계(영어)
[14]
출처:
중국의 인구통계(영어)
[15]
칼레는 백년전쟁 이후로도 잉글랜드의 땅이었지만 메리 1세 시기에 프랑스가 확보하게 된다.
[16]
프랑스어가 라틴어 후손인 만큼 라틴어에서 온 단어들이 아주 많다. 프랑스어 좀 배운 사람이라면 간단한 라틴어를 읽거나 천천히 말했다면 알아들을 수도 있다. 예) 나는 한국에 산다. J'habite en corée/ (ego) habito in corea
[17]
프랑스도 로망스어군 중에서는 발음이 꽤나 튀는 편이다.
[18]
이로 인해
제임스 1세의 아들이자 그의 후계자였던
찰스 1세와
루이 13세의 여동생이자
앙리 4세의 딸이었던
앙리에트 마리가 결혼하게 되었다.
[19]
출처:
독일 전 국토의 역사적 인구자료(영어)
[20]
호레이쇼 넬슨 제독이 '프랑스인들을 악마를 미워하듯 미워하라' 말하고 아이들에게 겁을 줄 때 나폴레옹을 들먹이는 식이었다.
[21]
파쇼다 사건과 같이 아프리카나 인도 등지에서 간혹 충돌했는데, 대체로 프랑스가 양보하면서 전면전으로 가지는 않았다. 이미 프랑스의 주적은
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으로 옮겨갔고, 이에 대항하려면 영국의 협력이 필수적이었다.
[22]
호이4에서도 프랑스가 독일에게 항복하면 디시전으로 나온다.
[23]
프랑스는 나폴리병이라고 불렀다. 1494년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원정 당시 프랑스군 사이에서 퍼졌으며 이들이 조국으로 돌아온 후 번졌기 때문이다.
[24]
프랑스인들이 개구리 요리를 즐겨먹는 데서 나온 멸칭이다. 미국, 캐나다, 뉴질랜드, 호주 등 다른 영미권 국가들도 프랑스인들을 개구리로 비하한다.
[25]
2014년
BBC 투표에서 영국은 프랑스를 긍정적으로 본다는 의견이 61%였으며 부정적으로 보는 의견은 32%였다. 프랑스에서도 영국을 긍정적으로 바라본다는 의견이 72%였고, 부정적으로 본다는 의견은 20%였다.
[26]
드골은 영국을 "미국이 유럽에 보낸
트로이 목마"라 불렀고, 유럽경제공동체(EEC)에서도 영국을 배제했다. 영국은 드골의 사후인 1973년에야 EEC에 합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