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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00:16:10

위트레흐트 조약

Traités d'Utrecht (프랑스어)
Fried von Utrecht (독일어)
Tratado de Utrecht (스페인어)
Treaty of Utrecht (영어)
1. 개요2. 내용
2.1.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2.2. 협상 및 결과2.3. 현황

1. 개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의 수습을 위해서 1713년 프랑스 왕국 그레이트브리튼 왕국, 네덜란드 공화국과 체결한 조약이다. 이 조약의 체결로 루이 14세의 손자가 펠리페 5세로 즉위하면서 스페인에도 부르봉 왕조가 세워졌으나, 스페인 국왕 프랑스 국왕을 겸하는 것이 금지되었다.

조약이 체결된 위트레흐트 네덜란드의 대도시이다.

2. 내용

2.1.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오랜 세월 근친혼을 반복해온 합스부르크 가문( 압스부르고 가문)의 내력으로 인하여 스페인의 국왕 카를로스 2세는 온갖 유전병을 다 달고 태어났고, 결국 후손을 낳는 데 실패했다. 이에 비텔스바흐 가문의 요제프 페르디난트가 후계자로 지명됐으나 그 역시 요절해버리자, 스페인 왕실과 친척이었던 오스트리아의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는 뒷공작을 통해 레오폴트 1세의 차남 카를 대공을 후계자로 밀기 시작했다. 이 뒷공작을 깨닫고 분노한 카를로스 2세는 루이 14세의 손자 앙주 공작 필리프를 후계자로 지명했다.

루이 14세의 왕비 마리아 테레사 펠리페 4세의 딸이었기 때문에 펠리페 5세에게도 어느 정도는 스페인의 피가 흘렀고[1], 따라서 스페인의 왕위 계승을 주장할 근거가 전혀 없는 것은 아니었다.[2] 하지만 펠리페가 스페인의 왕좌를 차지한다는 것은 서유럽 내 전통적인 두 강국이었던 프랑스와 스페인이 추후에 하나의 국왕을 모시는 단일 국가로 통합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이 생긴 것이고, 영국과 오스트리아는 충격과 공포에 빠졌다. 결국 프랑스와 스페인에 대항하는 유럽 국가들이 동맹을 맺게 되면서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이 발발했다.

프랑스의 국력은 유럽의 중국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유럽 모든 국가들의 다굴을 견딜 수 있었지만, 반대로 말버러 공작 처칠 사부아 공자 외젠이 이끄는 영국-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결정타를 먹일 수도 없었다. 게다가 이 시기 유럽에서의 전쟁은 야전보다는 대포들로 도배된 요새들을 깨부수는 공성전의 비율이 높았고, 전쟁은 툭하면 교착 상태에 빠졌다.[3]

프랑스가 스페인 왕위를 강력하게 주장한 이유는 스페인이 소유한 부유한 이탈리아 영토[4]와 더불어 '스페인 왕위에 부르봉 왕조 출신을 앉혀 합스부르크 왕조의 국가들로 둘러쌓이는 양면 전쟁의 상황을 피하는 것'이었다.[5] 프랑수아 1세 시절 스페인-오스트리아 연합을 다스리는 카를 5세에 연패를 당한 기억으로 뼈저리게 느낀 바 있어서 이것에 대해선 프랑스는 필사적이었다. 반면 반 프랑스 연합국의 경우 목표가 '프랑스와 스페인이 하나의 나라를 이루어 유럽의 세력 균형이 깨지는 것을 막는다'는 전제를 성립시키기 위해 프랑스의 숙적 합스부르크 가문의 카를 대공을 지지했지만 스페인 왕위 계승을 주장해왔던 오스트리아의 카를 대공의 형 요제프 1세가 후사 없이 사망하면서[6] 카를 대공이 합스부르크 제국을 상속받고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로 선출되면서 흐름이 뒤바뀌었다. 계속 카를 6세를 밀어주면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이 카를 6세라는 한 군주를 모시는 꼴이 되고 말 터이니 결국 200여 년 전 서유럽의 최강자 카를 5세의 시대가 재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반 프랑스 연합국의 주요 국가인 영국과 네덜란드는 카를 6세의 스페인 국왕 즉위에 회의적인 시각을 가지기 시작했다.

'부르봉 왕조의 인물을 스페인 왕위에 앉혀 양면전쟁을 피한다.', '합스부르크 왕조의 인물이 동유럽의 거대한 합스부르크 제국과 스페인 왕위를 동시에 차지하는 카를 5세의 재림은 막아야 한다.', '따라서 프랑스-스페인 연합을 견제하기 위한 몇 가지 조건을 붙인 뒤 부르봉 왕조의 인물을 스페인 왕위에 올린다.' 이렇게 프랑스와 영국-네덜란드, 양측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협상 테이블을 차렸다.

2.2. 협상 및 결과

협상에 있어서 가장 뜨거운 감자는 역시 하나의 가문으로 묶인 스페인과 프랑스의 통합 문제였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펠리페 5세가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포기하는 댓가로 스페인 왕으로 인정하겠다는 입장이었으나, 1711~1712년 사이에 그랑 도팽 루이, 프티 도팽 루이가 연이어 사망하면서 루이 14세의 직계손이 얼마남지 않은 상황이 도래했다. 이에 루이 14세는 증손자인 루이 15세가 후손 없이 죽으면 펠리페 5세가 스페인 왕위를 포기하고 프랑스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대신에 프랑스는 밀라노와 나폴리-시칠리아를 얻는다는 계획이었고, 스페인 왕위는 사보이아 가문에 넘기겠다는 구상이었다.[7] 영국과 네덜란드는 양자택일을 강요하였고, 결국 1712년 앙주 공작 필리프가 스페인의 왕으로 승인받은 댓가로 자신과 그 후손들의 프랑스 왕위 계승권을 영구히 포기하겠다는 각서에 서명을 하면서 해결되었다. 이 결과 스페인 보르본 왕조가 성립했다.

또한 역으로 프랑스가 스페인의 왕위를 요구하는 사항도 방지하기 위해서 베리 공작 샤를[8] 오를레앙 공작 필리프 2세[9] 역시 스페인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해야만 했다.

또한 압스부르고 왕조 당시 유럽 곳곳에 확보한 영토 역시 할양됐다. 사보이아 공국 시칠리아 밀라노 공국의 일부를 가져갔으며, 오스트리아는 스페인령 네덜란드 사르데냐, 나폴리 왕국, 그리고 밀라노 공국의 대부분을 얻었다. 영국은 지브롤터[10]와 메노르카[11]를 얻어 지중해에서 영국 해군이 활동할 거점을 확보하였다. 프랑스는 네덜란드가 동군연합으로 다스리던 오랑주 공국과 사보이아령이던 알프스 산맥의 위바이 강 계곡 일대를 얻었다.

유럽 외부에서도 영토 할양이 이루어졌는데, 특히 영국이 막대한 이득을 보았다. 허드슨 만 해안 일대와 노바스코샤, 뉴펀들랜드 섬이 프랑스의 손에서 영국에게로 넘어갔으며, 또한 스페인으로부터는 대서양 노예 무역의 독점권(Asiento)을 받아냈다.[12] 네덜란드의 경우 영토는 할양받지 않았지만 프랑스 · 스페인으로부터 상업적 특권을 인정받았다.

상술하였듯, 루이 14세의 목표는 당연히 스페인의 왕좌였지만 가능하면 스페인이 지배하고 있던 막대한 이탈리아 영토도 노리고 있어[13] 손자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였으며, 훗날 스페인과 프랑스의 병합을 통해 프랑스가 유럽의 독보적인 강대국으로 자리잡게 하려는 야심을 품었다. 하지만 한 세기 전 합스부르크 가문의 좌절이 보여주었듯이, 다양한 세력이 엇비슷한 힘을 구축한 유럽에서 독보적인 강대국이 나타나는 것은 이제 불가능해졌다. 루이 14세의 지나친 야심은 영국을 선두로 한 기타 유럽 국가들의 견제 앞에 제지되었고, 위트레흐트 조약 이후로 유럽에서는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힘의 균형이 자리잡는다.[14] 또한 별볼일 없는 섬나라로 여겨졌던 영국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기간 내내 당대 유럽의 최강국 프랑스와 대등한 국력을 보여주면서 자국에게 유리한 조약 내용을 이끌어냈고, 이 조약은 19세기 영국이 독보적인 강대국으로 올라서는 계기가 된다.[15]

2.3. 현황

1883년 본가인 프랑스 부르봉 가문의 직계 수장인 샹보르 백작 앙리가 자녀 없이 사망했고, 부르봉 가문의 직계는 단절된다. 부르봉 직계와 제일 가까운 집안은 다름 아닌 스페인의 보르본 왕조이고, 그 다음은 루이필리프의 가계인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이다. 그래서 원래대로라면 위트레흐트 조약으로 인해 보르본 가문은 부르봉 가문의 전체 수장이 될 수 없고, 그 다음으로 가까운 부르봉-오를레앙 가문이 부르봉 가문의 전체 수장이 되는 것이 맞지만 루이필리프의 아버지 루이필리프 2세가 왕위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프랑스 혁명 때 혁명 세력 편에 서서 루이 16세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고, 1830년 7월 혁명 당시에는 루이필리프가 부르봉 가문 본가의 뒤통수를 치고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부르봉 가문 직계와는 완전히 척진 상태였다. 이에 부르봉 왕조의 일원들과 정통주의자들은 스페인의 보르본 왕조를 지지하게 된다. 여기서 살리카 법을 적용해서 이사벨 2세로 이어지는 스페인 본가가 아니라 남계인 몰리나 백작 돈 카를로스를 지지하게 된다. 이후 프랑스의 명목상 계승권은 카를리스타가 주장하게 되는데, 몰리나 백작 돈 카를로스의 남계 후손이 단절된 이후에는 스페인의 알폰소 13세로 넘어가 스페인 보르본 가문이 부르봉 왕조 전체의 수장[16][17]이 된다.

알폰소 13세 이후에는 그의 사남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 후안 카를로스 1세[18] 펠리페 6세가 왕위주장자가 될 것 같지만, 위에도 나왔다시피 스페인 왕위계승법과 따로 노는 프랑스 왕위계승법에 따라 알폰소 13세의 차남인 세고비아 공작 하이메 왕자에게 계승권이 넘어갔다.[19] 하이메 왕자는 어렸을 때 받은 수술 부작용으로 청각장애를 앓았고 이로 인해 본인 스스로 스페인 왕위계승권을 포기했는데 이와는 별개로 프랑스 왕위계승권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가 이런 이런 주장을 할 수 있던 이유는 1712년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당시 펠리페 5세로 스페인 왕위에 오른 앙주 공작 필리프가 스페인의 왕 펠리페 5세로 완전히 승인받은 댓가로 자신과 그 후손들의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영구히 포기하겠다는 각서에 서명을 하면서 스페인 왕위계승권과 프랑스 왕위계승권을 동시에 가질 수 없는 위트레흐트 조약과 라슈타트 조약을 체결했기 때문이다.[20] 알폰소 13세 사후 하이메 왕자는 부르봉 왕조 전체의 수장이자 앙주 공작을 자처하며 정통주의자들에게 인정받았다.

이렇게 부르봉 왕조의 계승권이 스페인 보르본 왕조와 프랑스 부르봉 왕조로 분리된 결과, 2024년 현재 기준으로는 세고비아 공작 하이메 왕자의 손자인 루이스 알폰소 데 보르본 이 마르티네스-보르디우[21]가 프랑스 왕위 요구자이며 부르봉 왕조 전체의 수장이다. 루이스 알폰소는 알폰소 13세의 증손자이자 카페 가문의 시조, 위그 카페의 직계 31대손으로, 어머니는 프란시스코 프랑코 총통의 외손녀인 마리아 델 카르멘 마르티네스보르디우 이 프랑코(María del Carmen Martínez-Bordiú y Franco)로 현재 스페인 국왕인 펠리페 6세의 육촌에 해당하며, 앙주 공작, 부르봉 공작 직함을 갖고 있다.

즉 현재 프랑스 왕실 수장이자 부르봉 왕조 더 나아가 카페 왕조 전체 수장과 스페인 국왕 모두 펠리페 5세의 자손들인 셈이다.


[1] 물론 어머니도 아니고 할머니가 스페인 사람이라서 펠리페 본인은 스페인 사람이라는 정체성이 전혀 없었다. 애초에 민족주의 감정이 전혀 없던 이 시기에 민족 정체성 얘기를 하는 게 터무니없기도 하고. 스페인어도 카를로스 2세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되고 나서야 배우기 시작했을 정도. [2] 왕위계승법칙에 따르자면 펠리페 5세가 가장 정통 후계자임에는 틀림없다.오스트리아의 카를 6세는 왕위계승법에 따르면 펠리페 5세보다는 후순위이다 [3] 거의 모든 징집 가능 남성과 동원 가능한 자원을 쥐어짜서 총력전으로 진행된 제1차 세계 대전에서도 상대방의 우주 방어를 뚫지 못해서 4년 동안이나 참호전을 해야만 했다. 그런데 이 시기 각국의 군대들은 사실상 용병에 가까운 소수의 직업 군인들이었고, 각국의 정부들은 왕실 명목으로 돈을 꾸어서 전쟁 자금을 조달해야만 했으니 전쟁 진행이 얼마나 지지부진했을지는 자명하다. [4] 밀라노 공국,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등. [5] 남아메리카의 황금을 바탕으로 쌓아올린 스페인 제국의 부를 노렸다는 설명이 있으나 당시 스페인 왕실은 어마어마한 빚더미에 앉아있었기 때문에 부를 위해 전쟁에 뛰어든 것은 절대로 아니었다. [6] 정확히는 딸 둘만 있었다. 이 두 딸은 바이에른 선제후 카를 알브레히트와 작센 선제후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2세에게 시집갔는데 우습게도 나중에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한 원인을 제공한다. [7] 사보이아 가문은 안 도트리슈의 손녀인 안-마리 도를레앙(사보이 공비)을 통해 스페인 왕위계승권이 있었다. [8] 루이 14세의 막내 손자. 카를로스 2세의 유언에 따라 앙주 공작 필리프에 이은 스페인 왕위 계승 2순위였다. [9] 루이 14세의 조카이자 루이필리프 1세의 직계 조상. 마리아 테레사의 후손은 아니지만 루이 13세의 왕비가 펠리페 3세의 딸 안 도트리슈였던지라 왕위계승법에 따르면 카를 6세보다도 왕위계승 서열이 높았기에 이쪽도 스페인 왕위 요구의 여지를 막을 필요가 있었다. [10] 지브롤터는 메노르카와 달리 현재까지도 영국령으로 남아 지중해에 대한 영국의 영향력 투사에 많은 기여를 하고 있다. [11] 발레아레스 제도의 섬으로, 이후 7년 전쟁 중에 프랑스가 잠시 차지하였다가 영국이 다시 회복하였고, 미국 독립 전쟁 중에 스페인이 프랑스와 연합하여 탈환하였는데, 프랑스 혁명 전쟁 중에 영국이 또다시 점령하였다가 끝내 아미앵 조약으로써 스페인의 영토임이 종국적으로 인정되었다. [12] 이 때, 영국 정부로부터 이 독점권을 따낸 회사가 그 유명한 남해 회사 (South Sea Company)인데, 영국 정부의 채권을 인수하는 대가로 노예 무역권을 얻게 된다. 그러나 규모 자체가 워낙 작아 (남미의 주요 항구 10여 곳에 1년에 노예선 1척을 보내는 것만 허가받았으며, 그나마도 수익의 4분의 1을 스페인 왕에게 내야 했다) 수익성은 시망이었고, 결정적으로 1718년 사국 동맹 전쟁이 벌어지면서 스페인이 남미의 남해 회사 자산을 압류하여 큰 손해를 본다. 이는 남해거품사건이 일어나는 주요 계기가 된다. 다만, 노예 무역권은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 종결 이후 1750년 마드리드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유지되었다. [13] 사실 당시 스페인 왕위 계승의 주요 쟁점은 스페인 왕위보다는 이탈리아 영토였다. 스페인 국토가 척박한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었던데다가 30년 전쟁으로 부채만 많은 종이호랑이라는게 다 드러났기 때문. [14] 위트레흐트 조약 이후 유럽 역사를 보면 잘 나타난다. 위트레흐트 조약 이후 한동안 세력 균형이 이어지다가 다시 프랑스가 설쳐대자 유럽 각국들의 공조로 진압하고 빈 체제를 수립했다. 이후 19세기 후반에 프로이센 독일 제국을 수립하고 세력 균형을 위협하자 양차대전을 통하여 독일의 야망을 분쇄한다. 그리고 2차 대전 종전 이후 지금까지는 유럽 연합 공조 체제. [15] 바로 앞 문장에서 유럽 내 세력 균형이 이루어졌다는 글과 모순되어 보이지만, 영국의 국력은 인도를 비롯한 해외 식민지와 강력한 해군을 바탕으로 한 대서양 일대의 제해권에서 나왔다. 영국은 20세기 초 독일의 위협으로 영불협상을 체결하기 전까지는 영예로운 고립을 부르짖으며 유럽 내의 일에는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16] 오를레앙 가문과 카를리스타들이 반대하여 완전하게 인정받지는 못한다. 다만 이사벨 2세의 남편(알폰소 13세의 할아버지이자 알폰소 12세의 아버지) 역시 스페인 왕국의 왕자(프란시스코 데 아시스)였기 때문에 알폰소 13세 역시 부계로도 부르봉/보르본 왕조의 혈통을 물려받았다.) [17] 몰리나 백작 돈 카를로스의 남계후손이 단절된 상태에서 계승권은 카를로스의 동생인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후손에게 넘어가게 되는데, 프란시스코 데 파울라의 차남(장남은 요절)이 이사벨 2세의 남편인 카디스 공작 프란시스코이고, 그의 유일한 친손자가 알폰소 13세이므로 계승권이 알폰소 13세에게 넘어가게 된다. [18]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알폰소 13세의 사남인 바르셀로나 백작 후안의 아들이다. [19] 장남은 귀천상혼으로 인해 계승권을 포기했다. [20] 카를리스타의 수장들 역시 자신이 프랑스 왕위 요구자가 되면 스페인 왕위 요구자의 자리를 자신의 후계자에게 넘겼다. [21] 일명 루이 20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