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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르메니아계 우크라이나인은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 또는 아르메니아계 주민들이다.2. 역사
2.1. 고대~근세
동로마 제국의 방계 국가 중 하나인 크림 반도의 테오도로 공국에는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정착해 살고 있었는데, 이들의 규모가 얼마나 컸던지 중세 제노바 공화국 상인들은 크림 반도를 '바다의 아르메니아(Armenia Maritima)'라고 부르곤 했다. 제노바와의 무역으로 세력을 키운 아르메니아 상인 공동체는 동유럽을 넘어 중부유럽 각지로 진출하여 오늘날의 우크라이나, 루마니아, 폴란드, 리투아니아 일대를 넘어 브뤼셀과 뉘른베르크를 오가는 육로 무역 대상단을 운영할 정도였다. 1475년 테오도로 공국이 멸망한 이후 크림 반도의 아르메니아인들 상당수는 갈리치아 지역으로 이동하였지만 크림 반도에 잔류한 사람들도 적지 않았다. 잔류를 선택한 아르메니아인들은 크림 칸국의 그리스인, 유대인들이 크림 타타르어를 사용하며 우룸인, 카라임 유대인 등이 된 것과 마찬가지로 크림 타타르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이렇게 크림 타타르어를 사용하는 아르메니아인들은 근세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세금 특권 등을 제시하며 이주를 권장하면서 주로 리비우를 중심으로 이주정착하기 시작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는 아르메니아어는 구사하지 못하고 크림 타타르어를 모어로 구사했었다고 한다. 리비우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아르메니아어를 라틴어로 라틴어에서 다시 폴란드어로 폴란드어에서 다시 크림 타타르어로 번역을 거쳐서야 서로 의사소통이 가능할 수 있었다고 한다.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16세기부터는 리비우시 내에 아르메니아어 학교가 건설되어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의 자녀들을 교육하기 시작했고, 그 결과 1616년, 역사상 최초의 아르메니아어 서적 인쇄소가 리비우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리비우의 아르메니아어 인쇄소는 아르메니아어 외에도 아르메니아식 크림 타타르어 방언으로 된 기도서도 인쇄하였다고 한다. 리비우와 포돌리아의 아르메니아인들은 자체적인 도서관을 갖추고 상당한 수준의 자치권을 누렸다고 한다. 리비우에 정착한 아르메니아인들은 크림 반도-리비우- 실레시아- 드레스덴/ 뉘른베르크- 암스테르담을 잇는 내륙 교역로에서 통상을 하면서 상당한 부를 축적하였다.
우크라이나 서부 갈리치아 리비우시에 위치한 아르메니아 가톨릭 교회 내부, 내부구조가 마치 캅카스에서 일반적인 모스크를 개축한 형태의 성당 건물과 유사하다. |
2.2. 근현대
18세기 말 크림 반도가 러시아 제국에 합병된 이후 크림 반도에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들은 더 이상 크림 타타르어를 사용하지 않게 되고 아르메니아계 러시아인으로 흡수되었다.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은 크림 반도를 떠나 크라스노다르, 모스크바,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재정착하였고 이들은 다시 발트해 연안의 항구 도시 리가를 중심으로 공동체를 만들면서 아르메니아계 러시아인에 흡수된다. 크림 반도와 암스테르담을 잇는 아르메니아 상업 네트워크는 철도의 개발 이후 경쟁력을 상실했지만 러시아 제국에서는 아르메니아인 상인들이 큰 부를 쌓기 시작한 시점이었다.20세기 초 우크라이나 서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토에 속했었던 갈리치아 지역[1]에는 폴란드어를 사용하는 아르메니아 가톨릭 신자가 5,500여 명이 남아있었다. 아르메니아 가톨릭의 리비우 주교구는 교황청 직속이었으며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까지 존속했으나, 소련에서 폴란드 문화 그 중에서도 특히 동방 가톨릭을 일소하는 정책을[2] 벌여 심각한 탄압을 받았다고 한다. 1991년 아르메니아 가톨릭 교회는 우크라이나 내에서 공식적으로 복권되긴 했으나 소련 시절 사실상 뿌리가 뽑혔던 상황에다 신자들 상당수가 미국이나 프랑스로 이민한 상황이라 우크라이나 내 교세 복구는 요원해보인다.
3. 현재
우크라이나가 러시아 제국과 그 후신 소련의 영토가 되는 과정에서 아르메니아계 우크라이나인 및 아르메니아계 러시아인 사이의 경계가 상당히 희미해졌다. 오늘날 우크라이나 내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이 가장 많이 거주하는 지역들은 바로 러시아인들이 많이 거주하는 지역이기도 한 도네츠크, 하르키우 등등의 지역이며, 우크라이나 내 아르메니아인들은 대부분 아르메니아 사도 교회 신자이며 전통적인 아르메니아 가톨릭 신도는 극소수에 불과하다.오늘날 우크라이나의 경제 상황이 비교적 좋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아 본토 역시 경제적으로 빈곤한데다, 지하 경제까지 포함하면 우크라이나 내 상황이 좀 더 살만했던 이유로 상당수의 아르메니아인들이 소련 붕괴 이후 우크라이나로 이주한 상황이라고 한다. 2001년 통계 기준 우크라이나에 거주하는 아르메니아인 인구는 99,894명에 달한다.
4. 유명인
5. 외부 링크
[1]
상술한 리비우가 갈리치아 지역의 중심 도시이다.
[2]
근현대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에서 정교회를 믿는
우크라이나인,
벨라루스인 농노들에게 동방 가톨릭으로 개종하도록 강요한 적이 있었는데, 아르메니아 가톨릭은 이들과 전례나 기원이 달랐음에도 같은 종파로 몰려 심각한 탄압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