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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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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소련의 적통설 }}}}}}}}}

1. 개요2. 1991년 12월 1일 투표결과3. 전개
3.1. 1991년 8월 이전까지3.2. 소련 쿠데타의 실패와 우크라이나 독립운동가들의 추진력3.3.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독립 선언3.4. 소련 개혁을 끝까지 반대한 공산당 보수파의 독립 결정3.5. 소련 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한 옐친-고르바초프 세력의 지속적인 방해3.6. 1991년 12월 1일 국민투표3.7. 우크라이나의 독립 이후 소련 내 이슬람계의 수적 강세에 대한 옐친의 우려3.8. 소련 붕괴의 결정적인 원인
4. 독립과정의 누락과 왜곡5. 여담

1. 개요

1991년 우크라이나 시민들은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에 대거 참여해 강대국 소련 역사의 쓰레기통에 쳐박히도록 만들었다.
세르히 플로히,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 독립과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역사』, 허승철 역 , 2022, 33쪽.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는 소련으로부터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결정지은 국민투표였다. 내부와 외부의 참관인들은 이 투표가 일반적인 민주적인 관행에 따라 실시됐다는 사실에 동의했다. 투표 결과 우크라이나 전체 유권자 80% 이상이 투표에 참여해 90% 이상이 독립에 찬성했다.

투표결과가 독립을 확정할 것이라는 징후는 많았지만 그 한계에 대해 의구심이 있었기 때문에 많은 정치 분석가들은 무슨 결과가 기다리고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었다. 90%라는 압도적인 결과는 정치 분석가와 독립을 가장 열렬하게 믿은 사람들 모두에게 상당히 놀라운 결과였다.[1][2] 실제로, 투표 결과가 드러나기 전까진 러시아 공화국의 대통령인 보리스 옐친은 소련 대통령인 미하일 고르바초프와 함께 반독립 캠페인을 벌였다.[3] 우크라이나 국민투표 전까지 옐친은 소련을 유지하려고 했으나 우크라이나 국민투표로 우크라이나 내 여론이 완전 독립으로 전환된 후에야 소련 해체로 목표를 전환했다.[4][5]

2. 1991년 12월 1일 투표결과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여부 국민투표의 여론 조사와 실제 투표율 비교
여론 조사(1991년 10월~11월) 최종투표(1991년 12월 1일)
키이우시Kiev city 76.6%; 81.5% 92.8%
서부( 리비우, 이바노프란키우스크, 테르노필)West (L'viv, Ivano-Frankivs'ke, Ternopil') 87.8%; 86.4% 97.3%
북-서부( 흐멜니츠키, 리우네, 볼린주)North-West (Khmel'nyts'kyi, Rivne [Rovno], Volyn') 77.9%; 86.4% 96.1%
남-서부( 체르니우치, 자카르파탸)South-West (Chernivtsi, Zakarpattia) 76.3%; 75.0% 92.6%
중부( 체르카시, 키로보흐라드, 빈니차, 폴타바) Center (Cherkasy, Kirovohrad, Vinnytsia, Poltava) 74.8%; 72.9% 95.0%
북부( 키이우, 지토미르, 체르니히우) North (Kiev, Zhytomyr, Chemihiv) 72.1 %; 71.8% 94.7%
남부( 헤르손, 오데사, 미콜라이우) South (Kherson, Odesa [Odessa], Mykolaiv) 70.8%; 69.4% 88.3%
동부( 루한스크, 도네츠크,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자포리자) East (Luhans'ke, Donets'ke, Dnipropetrovs'ke, Zaporizhzhia) 65.8%; 66.6% 83.0%
북-동부( 수미, 하르키우)North-East (Sumy, Kharkiv) 61.4%; 66.6% 84.2%
크리미아Krym [the Crimea] 53.3%; 50.0% 54.1 %
출처: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4, DOI: 10.1080/00085006.1991.11091956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여부 국민투표의 유권자들의 투표수
Oblast' 유권자수Eligible to vote 투표자수Number who voted “찬성”에 투표 Voting "yes" “반대”에 투표 Voting "no" 무효표Spoiled ballots
빈니차Vinnytsia 1,424,110 1,301,765 1,242,244 39,387 20,134
볼린Volyn' 762,872 710,989 684,834 16,299 20,134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Dnipropetrovs'ke 2,877,974 2,354,169 2,127,089 181,529 104,058
도네츠크Donets'ke 3,854,440 2,957,372 2,481,157 372,157 104,058
지토미르Zhytomyr 1,105,023 1,000,425 950,976 35,798 13,651
자카르파탸Zakarpattia 856,687 710,286 657,678 31,891 20,717
자포리자Zaporizhzhia 1,553,858 1,252,225 1,135,271 91,929 25,025
이바노-프란키우스크Ivano-Frankivs'ke 1,019,145 975,655 960,281 10,028 5,346
키이우Kiev 1,430,507 1,259,129 1,202,773 36,086 20,270
키이우 시 Kiev City 1,913,378 1,537,278 1,427,715 81,234 28,329
키로보흐라드Kirovohrad 924,050 813,833 764,053 35,613 14,167
루한시크Luhans'ke 2,085,931 1,682,344 1,410,894 255,589 45,861
리비우L'viv 2,011,267 1,915,597 1,866,921 35,671 13,006
미콜라이우Mykolaiv 971,321 818,538 732,179 66,858 19,501
오데사Odesa [Odessa] 1,882,610 1,412,228 1,205,755 163,831 42,642
폴타바Poltava 1,313,588 1,206,801 1,145,639 44,368 16,854
리우네Rivne [Rovno] 814,246 757,151 726,575 19,369 11,207
수미Sumy 1,072,639 948,278 878,198 46,479 23,601
테르노필Ternopil' 861,647 836,667 825,526 6,565 4,576
하르키우Kharkiv 2,377,159 1,798,977 1,553,065 187,631 58,281
헤르손Kherson 903,891 753,843 679,451 54,248 26,144
흐멜니치키Khmel'nyts'kyi 1,133,350 1,059,021 1,019,813 27,743 11,465
체르카시Cherkasy 1,154,455 1,040,971 999,603 28,703 12,665
체르니우치Chernivtsi 668,781 586,377 544,022 24,226 18,129
체르니히우Chernihiv 1,068,152 969,638 908,904 39,776 20,960
세바스토폴 시Sevastopil' City 307,024 195,688 111,671 77,891 6,926
크리미아^^Krym [the Crimea] ^ 1,535,154 1,036,190 561,498 437,505 37,187
합계Total 31,891,435 28,803,785 2,417,544 670,108
출처: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9, DOI: 10.1080/00085006.1991.11091956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여부 국민투표의 유권자들의 투표율
Oblast' 유권자수Eligible to vote 투표율의 퍼센트Percent votillg “찬성”율의 퍼센트Percent "yes" “반대”율의 퍼센트Percent "no" 무효수의 퍼센트Percent spoiled
빈니차Vinnytsia 1,424,110 91.41 95.43 3.03 1.55
볼린Volyn' 762,872 93.20 96.32 2.29 1.39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Dnipropetrovs'ke 2,877,974 81.80 90.36 7.71 1.93
도네츠크Donets'ke 3,854,440 76.73 83.90 12.58 3.52
지토미르Zhytomyr 1,105,023 90.53 95.06 3.58 1.36
자카르파탸Zakarpattia 856,687 82.91 92.59 4.49 2.92
자포리자Zaporizhzhia 1,553,858 80.59 90.66 7.34 2.00
이바노-프란키우스크Ivano-Frankivs'ke 1,019,145 95.73 98.42 1.03 0.55
키이우Kiev 1,430,507 88.02 95.52 2.87 1.61
키이우 시 Kiev City 1,913,378 60.34 92.87 5.28 1.85
키로보흐라드Kirovohrad 924,050 88.07 93.88 4.38 1.74
루한시크Luhans'ke 2,085,931 80.65 63.86 13.41 2.73
리비우L'viv 2,011,267 95.24 97.45 1.86 0.68
미콜라이우Mykolaiv 971,321 84.27 89.45 8.17 2.38
오데사Odesa [Odessa] 1,882,610 75.01 85.38 11.60 3.02
폴타바Poltava 1,313,588 91.87 94.93 3.67 1.40
리우네Rivne 814,246 92.99 96.76 2.56 1.43
수미Sumy 1,072,639 88.41 92.81 4.90 2.49
테르노필Ternopil' 861,647 97.10 98.67 0.78 0.55
하르키우Kharkiv 2,377,159 75.68 86.33 10.43 3.24
헤르손Kherson 903,891 83.40 90.13 7.20 2.67
흐멜니치키Khmel'nyts'kyi 1,133,350 93.44 96.30 2.62 1.08
체르카시Cherkasy 1,154,455 90.17 96.03 2.76 1.22
체르니우치Chernivtsi 668,781 87.68 92.78 4.13 3.09
체르니히우Chernihiv 1,068,152 90.78 93.74 4.10 2.16
세바스토폴 시Sevastopil' City 307,024 63.74 57.07 39.39 3.54
크리미아Krym 1,535,154 67.50 54.19 42.22 3.59
합계Total 84.15 90.32 7.58 2.10
Black Sea Aeet 75.00
출처: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30, DOI: 10.1080/00085006.1991.11091956
1991년 12월 1일 독립여부의 국민투표에서 우크라이나 에스닉ethnic 비율과 투표비율 비교
Oblast' 총 인구Total population 우크라이나계 비율의 퍼센트 Percent Ukrainians 러시아계 비율의 퍼센트
Percent Russians
그 외 비율의 퍼센트 Percent Others “찬성”투표수의 퍼센트Percent "yes" vote “반대”투표수의 퍼센트Percent "no" vote
빈니차Vinnytsia 1,820,783 91.6 5.9 2.5 95.43 3.03
볼린Volyn' 1,058,438 94.6 4.4 1.0 96.32 2.29
드니프로페트로우시크Dnipropetrovs'ke 3,869,858 71.6 24.2 4.2 90.36 7.71
도네츠크Donets'ke 5,311,781 50.7 43.6 5.7 83.90 12.58
지토미르Zhytomyr 1,537,604 84.9 7.9 7.2 95.06 3.58
자카르파탸Zakarpattia 1,245,618 78.4 4.0 17.6 92.59 4.49
자포리자Zaporizhzhia 2,074,018 63.1 32.0 4.9 90.66 7.34
이바노-프란키우스크Ivano-Frankivs'ke 1,413,211 95.0 4.0 1.0 98.42 1.03
키이우 시 Kiev City 2,572,212 72.5 20.9 1.9 92.88 5.28
키이우Kiev 1,834,369 89.4 8.7 1.9 95.52 2.87
키로보흐라드Kirovohrad 1,228,093 85.3 12.0 3.0 93.88 4.38
크리미아Krym 2,430,495 28.5 67.0 4.5 54.19 42.22
루한시크Luhans'ke 2,857,031 51.9 44.8 3.3 83.86 13.41
리비우 시L'viv City 97.50
리비우L'viv 2,727,410 90.4 7.1 2.5 97.46 1.86
미콜라이우Mykolaiv 1,328,306 75.6 19.4 5.0 89.45 8.17
오데사 Odesa 2,624,245 54.6 27.4 18.0 85.38 11.60
폴타바Poltava 1,748,716 87.8 10.2 2.0 94.93 3.67
리우네Rivne 1,164,241 93.3 4.6 2.1 95.96 2.56
세바스토폴 시Sevastopil' City 57.07 39.39
수미Sumy 1,417,498 85.5 13.3 1.2 92.61 4.90
테르노필Ternopil' 1,163,974 96.8 2.3 0.9 98.67 0.78
하르키우Kharkiv 3,174,675 62.8 33.2 4.0 86.33 10.43
헤르손Kherson 1,236,970 75.8 20.2 4.0 90.13 7.20
흐멜니치키Khmel'nyts'kyi 1,521,564 90.4 5.8 3.8 96.30 2.62
체르카시Cherkasy 1,527,353 90.5 8.0 1.5 96.03 2.76
체르니우치Chernivtsi 940,801 70.8 6.8 22.5 92.78 4.13
체르니히우Chernihiv 1,412,770 91.4 6.8 1.8 93.74 4.10
출처: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31, DOI: 10.1080/00085006.1991.11091956

3. 전개

3.1. 1991년 8월 이전까지

고르바초프가 개방성과 건설적인 비판을 선언하자 그에 응답한 최초의 우크라이나인 그룹이 있었다. 그 그룹의 일부는 우크라이나 작가 연합으로 대표되는 우크라이나의 창조적인 지식인들이었다. 이 조직은 원래 소련 공산당의 지시를 따랐다. 그러나 1986년에 거의 1,100명에 달하는 회원이 참석한 회의를 개최한 이후부터는 정책이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그 때부터 작가 연합은 우크라이나 문화와 언어의 재탄생을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그 추진은 자국어 사회의 창설을 장려함으로써, 스탈린 브레즈네프 시대 이후에 억압되었던 작가들을 대중들에게 환호를 받으며 복권시켰다. 그리고 수십 년동안 공개 토론이 금지되었던 역사적 사건들을 공개적으로 말한 새로운 작품을 출판함으로써 이루어졌다.[6]

새로운 조직 중 가장 크고 영향력 있는 조직은 개혁을 위한 우크라이나 대중운동이었다. 개혁을 위한 우크라이나 대중운동Narodniy Rukh Ukrainy za perebudovy은 흔히 루흐(운동)Rukh (the Movement)라고 부른다. 루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글라스노스트 페레스트로이카에 대한 응답으로 우크라이나에서 발생한 광범위한 풀뿌리 시민-정치 연합체였다.[7][8]

루흐는 작가인 이반 드라치, 미하일로 호린, 볼로디미르 라보리우스키가 이끌었다. 루흐는 1989년 2월 '우크라이나 네이션nation 민족의 재탄생과 포괄적 발전'이라는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이 프로그램은 정치적 개혁, 경제적 개혁, 환경적 개혁, 문화적 개혁 그리고 인권 보장을 제도화의 필요성을 강조한 프로그램이었다. 루흐는 국가로서 우크라이나의 특성과 우크라이나어 보호에만 특별한 관심을 두지 않았다. 루흐는 소수 네이션national minorities[9]과 소수 종교의 권리도 옹호했다. 루흐는 '모든 형태의 반유대주의는 우크라이나에서 만들어지기를 바라는 자유민주주의 사회에 적대적인 것'이라고 비난했고, 전통적인 우크라이나- 유대인 관계와 관련된 부정적인 고정 관념에 대응하기 위해 특별한 노력을 기울었다.[10] 루흐의 의제에는 정치적인 문제와 모스크바와의 관계가 높은 비중을 했다. 그러나 루흐는 우크라이나의 독립은 요구하지 않았다. 오히려 소련이 진정한 주권국가연맹으로 전환하기를 원했다. 모스크바에게 간섭 받지 않고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문제를 결정할 수 있는 진정한 주권을 우크라이나에 보장해주는 주권국가연맹 체제의 소련을 원했다.[11]

루흐의 동기가 무엇인지는 다음과 같은 호소문에서 알 수 있다. 루흐는 1989년 8월에 전국에 있는 우크라이나 SSR의 인민들에게 4개 언어 ― 우크라이나어, 이디시어, 러시아어, 폴란드어―로 호소문을 발행하면서 다가오는 의회 선거에서 지지해달라고 호소했다.[12]
국제적인 정신을 지닌 루흐는 이 나라의 모든 언어와 문화의 부흥을 옹호하는 다문화 단체입니다. 루흐는 페레스트로이카를 위한 우크라이나의 모든 진보 세력의 통합을 지지합니다. 루흐는 네이션nations민족간의 진실한 우정과 네이션nations민족간의 깊은 이해를 위해 출마합니다.[13]
1989년 9월 8-10일,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이우에서 제1차 루흐 회의가 열렸다. 회의장에서 내셔널리티 평의회Council of Nationalities(Council)를 설립하는 결정이 승인됐다. 이 평의회의 목적은 더 많은 시민 참여와 개방 및 민주주의를 위해 우크라이나의 정치 생활 재건 과정 참여를 장려하면서 에스노-내셔널ethno-national종족민족문화와 언어를 되살리는 과정에서 100 종류가 넘는 네셔널 그룹과 에스닉 그룹national and ethnic groups민족 그룹과 종족 그룹을 참여시키는 것이었다. 이 평의회는 우크라이나 수도 키이우에 기반을 두었으며 최고 라다에서 적절한 법안과 에스노-내셔널ethno-national종족 민족적 이익을 지지하고 방어하는 법적 조치를 옹호했다.[14]루흐 초대 의장이었던 우크라이나 시인 이반 드라치는 다음과 같이 낙관적으로 발언했다. " 유대인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뉴욕시, 텔아비브, 예루살렘보다 우크라이나에서 더 잘 살고 편안함으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낙천적인 발언은 페레스트로이카의 마지막 몇년 동안과 우크라이나 초기 독립 기간동안 루흐가 실시할 모든 노력이 반영된 것이다.[15]

1987년부터 1991년까지의 기간은 소련, 결과적으로는 루흐에게 극적이고 급격한 변화를 일으킨 시기였다. 1980년대 중반에 모스크바에서 정체된 체제를 되살리기 위한 고르바초프의 정책이 발표되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에서는 1988-1989년까지 그 영향이 완전히 느껴지지 않았다. 우크라이나에서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는 자유주의적 공산주의자, 반체제인사, 지식인, 그리고 브레즈네프 시대의 소멸 직전의 상태에 지친 대다수 주민들에게 지지를 받았다.[16]

그와 동시에 모스크바의 소련 공산당(CPSU)과 우크라이나 공산당(CPU) 내의 보수주의자들은 이러한 개혁에 강력히 반대했고 고르바초프의 정책을 저지하기 위해 꾸준히 노력했다. 루흐 설립에 대한 최초의 반대 행동은 1989년 2월 16일 시작됐다. 이 날은 루흐 프로그램이 발표된 직후였다. 1989년 2월 18일, 우크라이나 공산당CPU의 공식 기관지 라디안스카 우크라이나는 한 서한을 게시했다. 그 서한은 루흐 프로그램을 가혹하게 비판하는 내용이었고, 우크라이나 과학 아카데미 회원 6명이 서명했었다. 그 다음주인 2월 27일, 우크라이나 공산당CPU 중앙위원회 정치국 위원이자 서기인 Yu.옐첸코는 우크라이나 공산당CPU 중앙위원회가 개최한 전체 회의―주제는 내셔널―에서 루흐의 프로그램을 비판했다. 1989년 5월 16일 우크라이나 공산당CPU 중앙 위원회의 일반 총회에서 제1서기 V.슈처비츠키는 루흐 프로그램을 극심하게 비난했다.[17]

이런 분위기에도 루흐는 후원자가 있었다. 키이우 공과대학교 총장은 루흐의 후원자였으며 1989년 9월 8-10일에 제1차 총회를 주최할 수 있게 대학 캠퍼스를 제공해주었다. 첫날 새벽에 대표단원들이 도착할 때 부터 마지막 저녁 늦게까지 지지자들이 캠퍼스를 가득 메우고 인도에 줄지어 서고 대표단이 지나가면 꽃을 건네고 격려를 외치며, 비탈길에서 손수 만든 팻말을 들고 노래를 부르며 행사에 열중했다. 280,000 명의 루흐 회원들을 대표하는 대표자들은 1109명이었고 그 중 85%는 우크라이나인이었고, 72%는 고등교육을 받았으며, 20%는 공산당원이었고, 11.6%는 과학박사candidates or doctors of science이었고, 10%는 노동자였고, 2.5%는 집단농장의 노동자였다.[18]

당시 1109명의 에스노-내셔널ethno-national 구성은 다음과 같았다: 우크라이나계(994); 러시아계(77); 유대계(9); 폴란드계(6); 벨라루스계(6); 아르메니아계(2); 한국계( 고려인) (1), 그리스계(1), 헝가리계(1), 독일계(1), 에스토니아계(1), 크림 타타르계(1)였다.[19]
키이우 공과대학교에서 개최된 1989년 9월 8-10일에 제1차 총회에 참여한 루흐 대표단원들의 에스노-내셔널ethno-national 구성
에스노-내셔널ethno-national
총합 1109
우크라이나 994
러시아계 77
유대계 9
폴란드계 6
벨라루스계 6
아르메이나계 2
한국계(고려인) 1
그리스계 1
헝가리계 1
독일계 1
에스토니아계 1
크림 타타르계 1
Aleksandr Burakovskiy (2015) In search of a liberal polity: the Rukh Council of Nationalities, the Jewish question, and Ukrainian independence, East European Jewish Affairs, 45:1, 112

같은 해 우크라이나 공산당CPU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선출된 대표자들의 에스노-내셔널ethno-national 구성과 비교하면 대조가 분명해진다. 루흐는 12개의 내셔널리티nationalities 대표를 포함했지만, 우크라이나 공산당이 소련 최고회의에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도록 선출한 250명명의 대표중 우크라이나계와 러시아계를 제외하면 5개의 내셔널리티nationalities를 대표하는 7명만 선출되었다:몰도바계 2명, 폴란드계 2명, 벨라루스계1명, 아르메이나계1명, 헝가리계1명, 우크라이나 공산당은 유대인을 한명도 선택하지 않았다.[20]

1차 대회가 있은 지 몇 달 후인 1990년 2월 11일에 작가 연합 건물에서 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설립되었다. 위원회는 26명으로 구성된 자문 위원회를 선출했으며, 그중에서 11명으로 구성된 상임위원회를 선출했다. 13개의 내셔널 및 에스닉 그룹national and ethnic groups을 대표하는 위원회의 첫번째 자문 위원회 구성원은 다음과 같다.
제1차 대회가 있은 지 몇 달 후인 1990년 2월 11일에 작가 연합 건물에서 위원회가 공식적으로 설립된 후 선출된 26명으로 구성된 자문 위원회(그중에서 11명으로 구성된 상임위원회 선출)에서 13개의 내셔널 및 에스닉 그룹national and ethnic groups을 대표하는 위원회의 첫번째 자문 위원회 구성원
이름 내셔널 및 에스닉 그룹national and ethnic groups
Ye. Varda 아시리아계Assyrian
A. Balsiavichus 리투아니아계Lithuanian
M. Bashinskiy and P. Hanovski 폴란드계Polish
K. Vasil 체코계(체코슬로바키아 협회)Czech [Czechoslovak Society]
V. Teritsanov 루마니아계Romanian
V. Gorbatko, F. Narichuk, and D. Pavlychko 우크라이나계 Ukrainian
I. Yali and I. Holoborotko 그리스계Greek
V. Kondratenko, M. Yefimenko, and V. Volohonovych 벨라루스계Belarusian
G. Sakharov, A. Belyaev, and N. Sergeev 러시아계Russian
N. Aloshov and Ye. Teimurov 아제르바이잔계Azerbaijaniani
A. Burakovskiy, B. Kotlik, and J. Zissels 유대계Jewish
S. Li 한국계(고려인)Korean
D. Geger, E. Riling, and M. Shaab 독일계German
Aleksandr Burakovskiy (2015) In search of a liberal polity: the Rukh Council of Nationalities, the Jewish question, and Ukrainian independence, East European Jewish Affairs, 45:1, 112-113
이후 3년동안 위원회는 사람들이 자국의 언어, 문화, 역사에 대해 학자로부터 배울 수 있는 공개 지역의 회의를 개최했다. 또한 소수 에스닉ethnic minorities에 대한 중요한 주제에 대해 전문가가 텔레비전에 출연해 연설하도록 주선하기, 에스닉 ethnic 문제에 대해 새로운 정당에 지시를 내리며, 소수 에스닉 내셔널ethno-national을 옹호하고 외국인 혐오에 대항하는 성명서를 발표하고, 우크라이나 정부에 내셔널nationa 소수자에 대한 교육 자료를 제공하도록 로비하고, 서로 다른 도시에 있는 에스닉ethnic 대표자들의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유지했다. 루흐의 설립자와 위원회는 개방성과 선의를 지향했다. 루흐 프로그램에는 "루흐의 주요 목표는 우크라이나에서 민주적이고 인도적인 사회를 발전시키는 것이다"라고 명시되어 있다. 반유대주의에 대한 비판은 1989년 루흐 제1차 대회부터 루흐에서는 일관된 주제였다. 루흐의 호소문과 결의안에는 "우리는 반유대주의에 반대한다"라는 제목의 결의안이 있는데 우크라이나 시민들에게 "모든 유형의 반유대주의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이고 ... 자신의 내셔널적national 존엄성뿐만 아니라 유대인의 존엄성을 위해 일어서야 한다"고 호소했다.[21]

1989년말과 1990년 초에 소련 전역에 포그롬( 학살)이 임박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이러한 소문의 물결은 우크라이나에도 있었다. 1990년 2월 8일 리테라투리나 우크라이나에선 "우크라이나에 유대인 포그롬이 있을까?"라는 제목의 기사를 발표하며 선동적인 반유대주의의 증가를 우려했다.[22] 공산주의 강경파가 반유대주의에 대한 공포와 긴장을 조성하려는 시도를 하자, 루흐는 반유대주의를 비판하는 강력한 성명을 발표했다. 루흐는 유대인과 합류하여 유대인을 보호할 것을 약속하고 우크라이나 정부에게 우크라이나 유대인에 대한 다음과 호소를 하며 그러한 도발을 즉시 중단하기 위해 효과적인 조치를 취하라고 촉구했다: "유대인 자매, 형제 여러분! 루흐가 함께합니다! 루흐는 당신을 위한 것입니다! 당신들에 대한 어떠한 종류의 도발도 여러 내셔널리티nationalities의 우리 국민people에 대한 모욕입니다."[23]

위원회는 특히 반유대주의자들의 미끼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1990년 2월 11일, 위원회가 완전히 설립된 날, "이 나라에 에스닉적ethnic 적대감이 발생하는 것에 반대하며" 긴장과 공포를 조성하려는 당의 노력을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했다. 그것은 우크라이나의 유대인 공동체들 사이에서 빠르게 퍼졌고, 진정 효과를 가져왔다.[24]

베치르니 키이우는 1990년 2월 12일에 편지를 받고 그 편지에 대해 논평하는 기사를 출판했다: "오늘날 반유대주의 얼마나 강한가요? 편지를 읽은 후 답은 분명하다. 강력하고 매우 강력하다...반유대주의에 적극적인 지지자가 많다는 사실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사회의 도덕적 건강이 어떤지를 진지하게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사회의 모든 집단이 이 질병에 감염됐다. 무당 의원들, 공산주의자들도"[25]

1990년 2월 20일, 우익단체와 특정 공산당 관리의 미끼를 폭로하기 위해 두명의 상임위원인 Ye.바르다와 유대인 알렉산드르 부라코우스키Aleksandr Burakovskiy는 키이우에 당시에 있던 10월 혁명 광장(= 독립 광장)에 들어가 레닌 동상 앞 계단에 서서 메가폰을 들고 행인들에게 공포 조장을 강력하게 거부하며, 반유대주의와 포그롬의 위협을 강력하게 비판했다. 이들은 당시에 유대인들이 공포와 불신을 통해 정치적 불안정을 조장하는장기의 졸로 이용되고 있다는 점을 주목했다. 처음에는 사람들이 그 둘을 피했지만 시간이 흐르자 수백명이 모여 듣고 지지했다. 시위도중 야유꾼들이 나타났는데 사람들은 야유꾼들에게 고함을 치며 쫒아냈다. 이러한 유형의 공개 집회는 자발적이면서도 계획적이었다. 곧 키이우의 광장에서 일반적이게 되어 시민 활동이 전통을 확립하게 된다. "1990년 가을의 학생 단식 투쟁, 우크라이나 독립 선언 이후의 대중 집회, 그리고 더 최근에는 오렌지 혁명과 마이단의 대규모 집회"[26]

중요한 전환점은 1989년 9월에 찾아왔다. 고르바초프를 반대하는 브레즈네프 성향의 볼로디미르 슈처비츠키가 소련 공산당CPSU 중앙위원회와 우크라이나 공산당CPU 제1서기에서 해임되었다. 슈처비츠키의 몰락과 함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에서 정치적 변화의 속도가 빨라졌다 같은 달에 루흐는 키이우에서 첫번째 전국 대회를 개최하며 거의 30만명의 회원에게 지원을 받으며 선거 준비를 시작했다. 그 선거는 1990년 3월로 예정된 최고 라다(우크라이나 최고 소비에트) 선거였다. 1989년 페레스트로이카에 의해 선거법이 변화하여 우크라이나 공산당이 아닌 후보자가 출마할 수 있게되자, 루흐는 1990년 3월 선거를 위하 후보자 명단을 조직했다. 루흐가 이끄는 민주주의 블록은 최고 라다 450석중 111석을 차지했다. 나중에 우크라이나 공산당에서 92명이 떠나자 111명은 이들과 연합을 구성했다. 민주주의 블록은 최고 라다에서 1990년 7월 16일 "우크라이나 국가 주권 선언"을 채택하게 했다. [27][28]
1990년 10월 2일 키이우 중앙 광장에서 수백명의 학생들이 3주간 단식 투쟁을 했다. 민주주의 블록과 지역 주민들이 시위대를 적극적으로 지원했다. 단식투쟁 시위대는 천안문 광장 시위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단식투쟁은 우크라이나 공산당 강경파인 비탈리 마솔의 총리직 사임, 기타 정치적 요구에 대해 우크라이나 공산당이 동의하며 끝났다.[29]

이후 루흐는 조직 이름에서 "페레스트로이카를 위해"를 삭제하기로 결정했다. 국가 주권 선거에 기초하여, 우크라이나에 대한 완전히 독립을 위해 노력하기로한 목표는 공식적인 공약의 일부가 되었다. 두번째 임기로 재선된 루흐 의장 이반 드라치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객관적인 역사적,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 문화적 분석은 필연적으로 하나의 결론에 이르게 할 것입니다. 우크라이나 국민people의 완전한 주권, 완전히 독립된 우크라이나 국가라는 결과만이 세계 문명의 현대적 발전에 해당된다는 겁니다."[30]

기존 우크라이나 의회는 공산주의자가 지배했고 모스크바에 대한 충성도가 높았다. 1991년, 우크라이나 의회는 주권 국가를 위한 법적 기반 시설과 행정적 기반 시설을 만드는 과정의 최전선에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이 통합된 투표 블록을 중단하고, 일부 공산주의자들이 특정 문제를 지지하기 위해 야당에 합류하자 국회의 업무가 수월해졌다. 민주주의 블록은 라다에서―당시 최고 라다에서 일반적으로 불렀듯이―공산주의자 내부의 '민주주의'파와 힘을 합쳤다. 민주주의 블록과 공산주의 내의 '민주주의'파는 1990년 7월 16일에 우크라이나를 주권 국가로 선언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의회의 방향이 변할 수 있던 건 레오니드 크라우추크 덕분이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the people 민족주의자 성향의 분위기가 더욱 강해졌을 때 크라우추크는 그 분위기에 빠르게 적응한 공산주의자였다.[31]

3.2. 소련 쿠데타의 실패와 우크라이나 독립운동가들의 추진력

고르바초프 시대 대부분 우크라이나의 독립운동가들은 상대적으로 거의 진전을 이루지 못했다.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 유역과 체르보노흐라드의 광부들이 1989년 7월에 파업에 들어갔지만 고르바초프에게 반대하기보다는 함께 일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파업을 했다. 1990년 10월 키이우에서 학생들이 2주간의 시위를 벌였지만 우크라이나 총리가 교체되자마자 시위가 끝났다. 1980년대 후반과 1990년대 초반 소련의 다른 공화국과 비교하면 우크라이나는 전반전으로 "혼란의 바다에서 정말로 안정된 섬"이었다. 소비에트 정부가 1991년 3월에 연방 유지에 대한 지지를 측정하기 위해 소련에 전국적인 국민투표를 실시했다. 이 국민투표는 어떤 종류던 간에 소련에서 유일하게 대중들에게 국민투표가 실시된 유일한 경우였다. 우크라이나의 대다수 유권자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새로운 연방으로 유지" 찬성에 투표했다.[32]

1991년 3월, 당시 우크라이나의 투표에는 두가지 질문이 있었다. 소련 전역에서도 받은 첫번째 질문: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을 평등한 주권 공화국을 재개하여 새로운 연방으로 보존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믿으십니까? 그 안에서 모든 내셔널리티nationality는 개인의 권리와 자유가 완전히 보장됩니다." 우크라이나에서는 우크라이나 최고 소비에트의 주도로 특별히 제기된 두번째 질문: "우크라이나가 국가 주권 선언의 원칙에 따라 주권 국가 연방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데 동의하십니까?” 우크라이나 유권자 70%이 첫번째 질문에 "찬성"을 골랐고, 두번째 질문에는 80% 이상이 "찬성"을 골랐다. 우크라이나 서부의 3개 주에서만 "찬성"투표가 상대적으로 낮았고 이중 한 곳(이바노-프란키우스크Ivano-Frankivs’k)에서는 두번째 질문이 여전히 다수결로 통과되었다. 우크라이나의 다른 모든 지역에서 두 질문에 투표는 "찬성"이 압도적이었다.[33] 이 목표가 달성되었다면 우크라이나는 독립운동 세력이 추구하는 지위에는 한참 못 미쳤을 것이다.[34]

고르바초프는 중앙 기관과 연방의 공화국 사이에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서 소련을 함께 유리하려고 노력했다. 1990-1991년까지 이 목적을 위한 협상은 장기간동안 이루어졌고 난관에 봉착했었지만 결국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 중앙-공화국의 관계를 재구성 했을 연방 조약이 예정된 서명 전날에 KGB, 군대, 군사복합체, 소련 공산당의 강경파들이 8월 19일 쿠데타를 일으키기로 결정하지 않았다면 회담을 성과를 거둘 수 있었을 것이다.[35] 하지만 8월 쿠데타로 인해 고르바초프가 성공시킨 성과가 수포로 돌아갔다.

공모자들은 연방 조약이 소련을 "혼돈과 무정부"로 몰아넣을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국가가 "비극적인 운명"을 맞지하는 것을 막기 위해 행동하고 있다고 말했다. 쿠데타는 갑자기 일어나지 않았다. 이미 다음같은 징조가 있었다. 1990년 12월 셰바르드나제는 갑작스러운 사임에서 곧 임박한 강경파의 반발을 경고했다. 1991년 1월 리투아니아 라트비아에서 발생한 폭력적인 탄압, 1991년 6월 "헌법 쿠데타" 시도, 그리고 7월에 다양한 소비에트 기관과 의회에서 매우 강경한 반 고르바초프 인물에 의해 선언문 "인민들에게 말한다."“Word to the People”(Slovo k narodu)가 발표된 사건.[36] 고르바초프는 쿠데타를 거부했고, 쿠데타는 실패했다. 쿠데타의 실패는 4개월 후 소련의 붕괴를 예고했다. 실패한 쿠데타의 결과로 발생한 광범위한 결과는 소련에 종식을 가져오는 데 특히 중요했다. 그 특히 중요한 것 중 하나가 바로 우크라이나의 결정적인 변화였다.[37]

쿠데타 실패 이후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크게 바뀌었다. 공화국의 정치적 기회는 구조적으로 각계각층의 개인과 집단으로 확대됐다. 독립을 향한 열망을 거스를 수 없게 되었다. 우크라이나 의원들은 모스크바 쿠데타가 붕괴된 지 3일 후인 1991년 8월 24일에 독립 선언을 의회에서 압도적으로 채택하며 새로운 분위기에 빠르게 끼어들어갔다. 1991년 12월 1일에 우크라이나에서 공화국 전역에 국민투표가 실시되었을 때, 투표자 중 92%이상(유권자의 85% 이상)이 완전한 독립에 찬성했다. 러시아계가 주로 거주하는 우크라이나 지역, 특히 크리미아 반도와 돈바스에서도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지지하는 투표가 다수를 차지했다. 우크라이나의 이러한 결정적인 변화는 일주일 후 소련의 종말을 성문화한 벨로베즈스카야 푸쉬차Belovezhskaya Pushcha협정으로 이어졌다.[38]

3.3. 1991년 8월 24일 우크라이나 독립 선언

1991년 8월, 모스크바의 보수 정치 세력을 고르바초프 정부를 뒤엎기위해 쿠데타를 일으켰으나 실패했다. 소련과 우크라이나 간의 관계는 마침내 이 때 결정되었다. 크라우추크는 실패한 쿠데타에 대한 대응에 약간은 망설인 후 결정적인 행동을 실행했다. 1991년 8월 24일, 크라우추크는 우크라이나를 독립 국가로 선언하는 결의안을 주도했다. 선언문엔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독립에 관한 국민투표를 실시한다는 발표도 들어있었다. 같은 날, 대통령 선거도 실시하기로 했다.[39]
독립 선언DECLARATION OF INDEPENDENCE



우크라이나 독립 선언에 대한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 평의회 결의안Resolution of the Supreme Soviet of the Ukrainian SSR on the Declaration of Independence of Ukraine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 회의에서 내린 결정:

1991년 9월 24일에 우크라이나를 독립된 민주주의 국가로 선언한다.

독립을 선언한 순간부터 오직 우크라이나 헌법, 그 법률, 정부의 결의 및 이 공화국의 기타 입법 행위만이 이 국가의 영토에서 유효하다.

1991년 12월 1일에 독립 선언서 확정에 대한 공화국의 국민투표를 실시한다.



L. 크라우추크,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 평의회 의장

1991년 8월 24일 키이우Kiev





우크라이나 독립 선언의 법률 Act of Ukraine's Independence Declaration



1991년 8월 19일 소련USSR 쿠데타로 발생한, 우크라이나를 위협한 치명적인 위험에 대한 조치:

- 우크라이나 국가 형성의 수백년 정통을 발전시키는 것;

- 유엔 헌장 및 기타 국제 법률 문서에 의해 구상된 자결권으로 조치하는 것;

-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최고 소비에트는 우크라이나의 국가 주권 선언에 따라 행동하여 다음과 같이 선언한다:

우크라이나 독립 그리고 우크라이나인의 주권 국가―우크라이나를 형성한다.

우크라이나의 영토는 필수적이며 침범할 수 없다.

이제부터는 오직 이 헌법과 법률만이 우크라이나 영토에 적용된다.

이 법률은 승인된 순간부터 시행한다.



우크라이나 최고 평의회The Supreme Soviet of Ukraine

1991년 8월 24일



SOURCE: News from Ukraine (Kiev), September 1991, p. I.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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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1991년 우크라이나 독립선언문.jpg

3.4. 소련 개혁을 끝까지 반대한 공산당 보수파의 독립 결정

우크라이나의 여론이 극단적으로 바뀐 주요 원인은 공산당 보수파가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민주적 개혁을 극단적으로 반대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공산당 보수파에겐 공산당이 해체된 소련을 유지할 바에는 차라리 우크라이나를 독립시킨다(소련을 해체한다.)는 의도였던 것이다.

다른 소비에트 공화국에서 민족주의 세력의 행동으로 비슷한 사건이 발생했다면, 우크라이나에서는 고르바초프와 이후 옐친의 개혁으로부터 분리하려는 공산주의 보수 세력의 욕구가 결정적인 요인이었다. 민족주의 세력과의 동맹은 압도적인 독립 찬성이라는 국민투표 결과를 가능하게 했다. 1991년 12월 1일의 즉각적인 결과는 주로 소련 붕괴와 수많은 민족적 긴장으로 이어져 경제 불안정으로까지 이어졌다.
If other Soviet republics reached similar events through the actions of nationalist forces, in Ukraine the decisive factor was the communist conservative circles’ desire to separate themselves from Gorbachev’s and later on from Yeltsin’s reforms. The alliance with the nationalist forces made possible the referendum result which was overwhelmingly for independence. The immediate consequences of the act of 1 December 1991 were, primarily, the Soviet Union collapse, followed by numerous ethnic tensions that have even led to economic destabilization.
Laura Blaj, " Ukraine’s Independence and Its Geostrategic Impact in Eastern Europe", Debatte: Journal of Contemporary Central and Eastern Europe, Volume 21, 2013 - Issue 2-3, Abstract
이런 점을 봐도 소련 해체에서 옐친은 죄가 없다고 할 것이며, 결국 소련은 공산당 때문에 붕괴했다.

3.5. 소련 체제를 유지시키기 위한 옐친-고르바초프 세력의 지속적인 방해

우크라이나 라다의 독립 선언 이후 국민투표를 실시할 때 까지 대중의 마음을 얻기 위한 투쟁은 정말로 치열했다. 모스크바는 소련에서 우크라이나가 탈퇴해서 분리독립하려는 활동에 맞서기 위해 모든 수단을 동원했다. 8월 24일(독립 선언)에서 12월 1일(독립에 관한 국민투표)사이의 기간동안 소련 최고 지도부(자유주의와 보수주의 모두)와 많은 러시아 공화국 지도자들은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반대하기 위해 매우 강력한 캠페인을 벌였다. 중앙 TV, 라디오, 인쇄 매체, 러시아 미디어는 우크라이나의 소수민족(특히 러시아인)문제와 핵무기 문제에 관련하여 우크라이나 당국의 의도를 왜곡한 잘못된 정보를 퍼트리며 악랄한 캠페인을 실시했다. 레오니드 크라우추크는 중앙TV가 이러한 허위 사실 캠페인을 계속한다면 지불을 보류하겠다고 위협했다.[41]

종이 공급을 줄이는 것과 동시에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인이 아주 많이 정착한 지역에 반우크라이나 내용과 소련의 보존을 촉구하는 내용이 담긴 전단을 대량으로 배포했다. 모스코프스키에 노보스티와 같은 신문에서는 우크라이나 독립으로 인해 러시아와의 국경이 수정되고 심지어 핵무기 교환이 발생할 수 있다는 소문을 널리 퍼트렸다. 소련 국방부도 이 투쟁에 뛰어들었다. 투표 전날 소련 국방부는 "우크라이나에 배치된 군대는 전투 태세를 점검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마지막 순간, 시위 덕분에 점검은 현장의 대규모 군사 기동 훈련 없이 수행됐다.[42]

국민투표에 반대하는 강력한 캠페인은 크림반도에서도 조직되었다. 그 조직은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RSFSR 최고 소비에트의 대표를 포함한 다양한 러시아인 집단과 독일의 일부 정치 단체까지 포함한 세력이었다. 반면 크림 타타르족은 독립과 승인된 선거 참여를 강력하게 지지하며, 사람들에게 비아체슬라우 초르노빌과 레우코 루키아넨코에게 투표하도록 지시했다.[43]

이러한 활동은 보수나 중도 강경파에 국한되지 않았다. 상트페테르부르크 시장 A. 소브차크와 모스크바 시장인 G. 포포브도 각자의 방식으로 이 적대적인 캠페인에 크게 기여했다..[44] 고르바초프는 조지 부시에게 '우크라이나를 인정하겠다고 약속한 것'에 대해 짜증을 내며 '국민 투표에서 표현된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의지는 연방에서 탈퇴하는 행위로 간주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45] 옐친 고르바초프와 함께 반독립 캠페인을 벌였다.[46] 1991년 8월 쿠데타가 실패로 끝났을 때만 해도 옐친은 여전히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및 기타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을 연합하는 연방을 유지하기를 희망했었다.[47] 고르바초프와 옐친 모두 우크라이나는 독립국이 될 수 없다고 말하자 크라우추크가 비판했다. 옐친가 고르바초프가 실시한 반독립 캠페인은 중대한 내정간섭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아마도 독립 찬성 세력에게 도움이 됐을 것이라 추측된다.[48]

이러한 국면은 우크라이나 당국, 루흐 활동가, 소수 내셔널 세력의 다양한 대표, 심지어 우크라이나 디아스포라에게 독립을 위해 노력하도록 자극했다. 우크라이나 라디오와 TV는 독립을 지지하는 체계적인 캠페인을 시작했다. 디아스포라에서 온 우크라이나 그룹은 컴퓨터 장비, 소형 인쇄기, 심지어 종이까지 가져와서 특히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에서 체계적인 캠페인을 시작했다.[49]

투표에는 다음과 같은 배경도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의 경제 상황 특히 대도시의 식량 부족은, 우크라이나 주민들에게 강력한 영향을 끼쳤다. 그런 고통에서 최소한 부분적으로는 격리시킬 수 있다는 방법으로 강력하게 상기시킨 건 독립이었다. 또한 모든 후보들은 독립한 우크라이나만이 국민들의 삶을 보장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50]

3.6. 1991년 12월 1일 국민투표

1991년 12월 1일 국민투표가 실시됐다. 그 결과는 가장 열렬하게 독립을 믿은 사람들한테도 놀라웠다.[51]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유권자들은 8월 24일 베르호브나 라다(최고 평의회)가 선언한 독립에 대한 의사표명과 최초의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투표소에 갔다. 많은 정치분석가들은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확신하지 못했다. 물론 국민투표가 독립 선언을 승인할 것이라는 징후는 많았었다. 그러나 남부-동부, 부코비나, 자카르파탸에서 소수 집단이 많았기 때문에 지지의 한계에 대해 의구심이 남아있었다. 투표 결과로 유권자들 90% 이상이 독립을 선택했다는 사실이 드러나자, 모든 정치 분석가들은 상당히 놀라워했다.[52]

투표가 끝난지 하루지난 12월 2일, 베체르니 키이우는 다음과 같이 기사를 썼다.
"가장 큰 독립 지지자들은 키이우의 유대인들이다. 출구조사에 참여한 응답자의 93.6%가 법안에 찬성했다! 반면 우크라이나인은 87%에 불과하다."[53]

1991년 8월 24일은 20세기 동안 우크라이나 영토 전체 또는 일부에 대해 6번째로 독립이 선언된 날이었다.(키이우, 1918; 리비우, 1918; 키이우, 1919; 후스트, 1939; 리비우, 1941) 그러나 이전의 사례들은 1991년 사례와 달랐다. 이전의 사례들은 독립에 대한 견해를 우크라이나 주민들과 일부분만 또는 전혀 상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1991년은 라다 의원들에 의한 독립 선언은 유권자의 80%가 참여한 국민투표를 통해 정당화되었다. 외부와 내부의 참관인들도 일반적으로 인정되는 민주주의적인 관행에 따라 투표가 실시됐다는 사실에 동의했다.[54]

국민 투표 결과는 공개적이고 민주주의적 방식으로 이루어졌고, 우크라이나 전체 주민의 의지를 표현하여 러시아와 세계 지도자들에게 소비에트 체제의 오래된 구조가 더 이상 실행 가능하거나 유지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했다.[55]

우크라이나 연구회(국제우크라이나학회 일본지부)의 구로카와 유지는 국민투표의 결과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12월 1일 우크라이나으 완전 독립의 시비를 가리는 국민투표와 초대 대통령을 결정하는 선거가 실시됐다. 국민투표에서는 90.2퍼센트가 독립을 찬성했다. 러시아인이 많은 하르키우, 도네츠크, 자포리자, 드니프로페트로우스크 각주에서도 80퍼센트 이상이 찬성했다. 러시아인이 과반수를 차지하는 크림에서도 54퍼센트가 찬성하여 과반수를 웃돌았다.(중략)이미 발트 3국은 소련에서 탈퇴했지만 우크라이나의 독립으로 소련은 사실상 해체됐다.[56]
이 국민 투표에 관해 우크라이나 출생 폴란드인 로만 투르스키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했다.
소련 시대에 우크라이나 독립에 대한 국민 투표가 실시됐는데, 투표 직전에 외국에 사는 젊은 우크라이나인들이 들어와 벽지의 마을과 촌락을 찾아다니며 독립에 찬성하도록 운동을 벌였다. 선거 결과는 90퍼센트의 국민이 독립에 표를 던진 것으로 나타났다. 이튿 날 젊은이들은 하루 종일 밤을 새우며 노래 부르고 춤추며 승리를 축하했는데, 이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던 현지인이 “지치지 않느냐”고 묻자 “우리만 춤을 추고 있는 것이 아니다. 선조들의 영혼도 함께 춤추고 있다”고 대답했다고 한다.[57]
이 국민 투표에 관해 국내언론 중앙일보는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키예프 AP·AFP·로이터=연합】 1일 소련 우크라이나공화국에서 실시된 대통령선거에서 레오니트 크라프추크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이 당선됐으며 함께 실시된 국민투표에서는 공식 초기 개표결과 총투표자중 80%이상이 우크라이나가 소 연방으로부터 독립하는 것을 지지한 것으로 2일 나타났다. 우크라이나공화국 선거위원회는 수도 키예프와 몇몇 다른 지역에서는 90%이상의 독립 찬성률을 기록했다고 전했다. 비공식 집계에 따르면 크라프추크 최고회의 의장이 총투표의 60%이상의 득표로 초대 대통령에 당선된 것으로 나타났다. 공산당 이론가 출신인 크라프추크(57)는 지난해부터 우크라이나공화국 최고회의 의장을 맡아왔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1일 국민투표결과가 발표되기전부터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축하하고 나섰다. 비공식 예비투표 분석결과는 전체 투표자 가운데 85%가 독립을 지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우크라이나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3천7백50만 유권자 가운데 최소 75%가 투표에 참가했다고 밝혔다. 민족주의 운동조직인 루흐관계자들은 독립을 지지한 사람이 80∼85%에 달했다고 밝혔다. 특히 수도 키예프와 서부지역에서는 지지도가 90%이상인 것으로 나타났으며,러시아인이 주민의 절반을 차지하는 동부탄광지역인 도네츠크에서도 80%의 찬성률을 보였다.(중략)

보리스 옐친 소련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은 2일 저녁 TV방송을 통해 성명을 발표,『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은 우크라이나공화국 국민의 민주적 의사표시에 따른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승인한다』고 말했다. 옐친 대통령은 『러시아공화국과 우크라이나 사이의 외교적 관계를 포함,새로운 두 국가의 관계가 신속히 정립되어야 한다』고 부연,러시아공화국이 우크라이나의 독립을 계기로 고르바초프 대통령의 신연방구성노력에 대한 종래의 지지를 철회할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을 강력하게 시사했다.

지난달 25일 국가회의가 신연방조약의 가조인에 실패했던 것은 러시아공화국이 우크라이나없는 연방은 무의미하다고 반발한 때문인 것으로 알려져있다.[58]

3.7. 우크라이나의 독립 이후 소련 내 이슬람계의 수적 강세에 대한 옐친의 우려

국민투표를 실시하기 전 고르바초프는 독립에 대한 지지가 절대 70%를 넘기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옐친은 국민투표의 결과를 확신하지 못해서 우크라이나에 압력을 가하며 위협하기 시작했다. 1991년 8월말 옐친은 공보비서를 통해 '우크라이나와 다른 공화국들이 독립을 선언하면 러시아는 이 공화국들과 국경문제를 논의할 권리를 갖는다'는 발표문을 준비시키고 ' 크림반도 돈바스 탄광 지역을 포함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이 분쟁 대상이 될 수 있다.'고 위협을 했다. '만일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주장하면 국토를 분할할 수도 있다'는 점을 암시하는 위협이었다.[59] 그리고 옐친은 부통령인 알렉산드르 루츠코이를 단장을 맡은 고위급 대표단을 우크라이나에 파견해서 우크라이나에 독립에 대한 입장을 바꾸라고 위협했다. 하지만 옐친의 위협은 우크라이나에게 통하지 않았다. 사실 당시 옐친은 자신이 우크라이나에게 경고한 위협을 실행할 수가 없었다. 위협을 실행할만한 정치적 의지도 없었고 위협이 가능한 자원이 없었다.[60]

옐친은 이후 소련의 신연방조약안에 서명하도록 설득하기 위해서 1991년 12월 8일 벨라루스 벨라베자의 사냥 휴양숲에서 크라프추크를 만났다. 이에 대해 크라프추크는 크림반도와 동부를 포함한 우크라이나 모든 주의 국민투표 결과를 언급하며 옐친의 설득을 거부했다. 이것은 옐친에게 영향을 끼쳤다. 옐친은 크라프추크에게 '만일 우크라이나가 연방조약안에 서명하지 않는다면, 러시아도 서명할 수 없다'고 말했다. 그리고 옐친은 부시 미국 대통령에게 자신이 우려하는 점이 무엇인지 몇 차례에 걸쳐서 말했다. 바로 '우크라이나가 없는 상태에서 연방에 러시아가 남아 있으면 이슬람계 주민들에 비해 수적 열세에 처한다'는 것이었다. 옐친은 우크라이나가 없는 소련에 수적으로 강세가 되는 이슬람계를 우려한 것이었다.[61]

3.8. 소련 붕괴의 결정적인 원인

1991년 12월 1일 국민 투표 운동과 투표 자체는 근본적인 정치 변화의 역학에서 내생적으로 주도된 파열을 구성했다. 1991년 8월 쿠데타가 실패로 끝났을 때만 해도 옐친은 처음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및 기타 중앙 아시아 공화국을 연결하는 연방을 유지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1991년 가을, 우크라이나 거주자가 12월 1일에 완전한 독립을 위해 투표할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지자 옐친은 국민투표가 되돌릴 수 없는 결과가 될 것임을 깨달아 목표를 강제로 변경해야 했다. 공식 투표 집계를 보기도 전에 옐친은 독립적인 러시아 국가(지금까지 구 소련의 가장 크고 강력한 구성 요소)에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고 새로 선출된 우크라이나 대통령인 레오니드 크라우추크와 벨라루스 의장이자 사실상 벨라루스 국가원수인 스타니슬라우 슈슈케비치와 합류하기로 결정했다.[62]
1985년 3월 이전에 근본적인 변화가 일어날 것인지를 측정하기 위해 다양한 종류의 데이터를 조사했던 학자나 정부분석가는 소련이 엄청난 도전에 직면해 있음을 알았겠지만, 그들은 데이터에서 소련이 시스템을 위협하는 위기에 처했음을 시사하는 것도 어떤 것도 찾지 못했을 것이다.

1985년 3월 이전에는 어떤 신뢰할 만한 학자도 소련이 1991년말까지 존재가 소멸할 것이라고 예측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소련 붕괴의 장기적인 전조 신호를 지적할 수 없다. 1985년 3월 현재 소련은 파국적인 분기점에 이르고 있지 않았다. 소련의 상황적 전환점은 고르바초프가 1991년까지 체제를 분열에 취약하게 만든 일련의 불안정한 쇼크를 시스템에 가했을 때 찾아왔다. 직접적인 티핑 포인트는 1991년 8월의 쿠데타와 우크라이나의 독립 국민투표였고, 연방이 해체되는 원인이 되었다.(which in combination caused the union to unravel.)
{{{#!folding [ 펼치기 · 접기 ]
Scholars or government analysts who had pored over various sorts of data before March 1985 to try to gauge whether fundamental change was about to happen would have seen that the Soviet Union was facing daunting challenges, but they would not have found anything in the data to suggest that the Soviet Union was in a system-threatening crisis.

Before March 1985, no credible scholar would have predicted that the Soviet Union would cease to exist by the end of 1991. In that sense, we cannot point to longer-term precursor signals of the Soviet collapse. The Soviet Union as of March 1985 was not approaching a catastrophic bifurcation. The contextual tipping point for the Soviet Union came only when Gorbachev dealt a rapid series of destabilizing shocks to the system that by 1991 left it vulnerable to fragmentation. The direct tipping points then came with the abortive August 1991 coup and the independence referendum in Ukraine, which in combination caused the union to unravel}}}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16

4. 독립과정의 누락과 왜곡

우크라이나 독립 과정에 대한 사실관계와 이에 대한 역사왜곡이 있다. 3월에 있던 소련 존속에 관한 전연방 국민투표를 가져와서 우크라이나 국민들은 소련 탈퇴에 반대했는데 옐친이 권력욕으로 우크라이나를 강제로 독립시키고 소련 해체를 강행했다'고 선동하는 행위가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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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펨코리아 포텐: 옐친이 소련 붕괴를 결정한 후에야 발트 3국이 독립을 요구했고 그 이후에 우크라이나가 독립을 요구하자 옐친이 순순히 승인했다는 식의 타임 라인을 왜곡한 내용
루리웹 인기글: 러시아가 감당을 못 해서 잔류파 소련연맹국인 우크라이나를 독립시켰다는 왜곡
루리웹 인기글: 소련 해체 당시에도 "소련 해체는 말도 안된다." "민주주의랑 부분적 자본주의만 들여오자" 라는 인식이었는데 옐친이 "그럼 해체할수밖에 없도록 조져버리면 되겠네!" 라며 해체를 단행했다는 왜곡
루리웹 인기글: 보리스 옐친. 잔존하고 싶어하는 우크라이나를 쫓아내고 소련 해체함. 바르샤바 조약기구 박살냄. 동유럽 경제 박살냄. 애초에 잔존하고자 하던 우크라이나를 러시아가 쫓아냈다
루리웹 인기글: 소련 해체도 "러시아가 소속국을 뱉어낸"게 아니라 우크라이나는 소련 해체 극렬 반대 여론 70%찍을정도로 소련 해체 반대, 민주화만 할것을 요구했는데 러시아에서만 인기있던 옐친이 대통령 하겠다고 사람들 배신하고 강제해체시킨거

옐친 때문에 우크라이나가 강제적으로 소련 탈퇴를 당했다는 주장은 한국의 일부 사학과 출신 학생들과 예시 사이트 사용자들, 소뽕, 반 옐친 러뽕들이 퍼트린 왜곡으로, 이들은 '옐친이 강제로 소련 소속국들을 독립시켜서 소련 해체가 발생됐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면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서 침략국인 러시아를 옹호하는 측에선 실제로 "옐친은 소련 대통령 고르바초프에게 정권을 넘겨주느니 차라리 작지만 보다 확실한 러시아공화국의 실권을 장악하려 했다"고 주장한다. 막심 아르테몌프 '서방은 1990년대 러시아의 취약함을 악용했고, 이에 따른 러시아인들의 트라우마를 이해하지 못한다(The West took advantage of Russian weakness in the 1990s and is unable to understand the trauma it unleashed)' ( 프레시안) 하지만 이는 거짓이다. 오히려 옐친은 소련을 유지해서 실권을 장악하길 원했지만 이후 전개에서 그것이 불가능했다. 오히려 옐친이 소련을 유지하려했으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유혈진압이 발생할 상황이었다!

위 이용자들의 선동은 당시 외교적 분위기와 맞지 않는데, 이미 그 당시부터 Chicken Kiev speech라며 조지 부시 마거릿 대처가 우크라이나 독립에 외교적으로 반대까지 할 정도로 우크라이나 독립은 소련 존속 여부에서 핵심이었고 오히려 주류 서구 진영에서 반대했었다. 다만 마가릿 대처는 이미 당시에 임기가 끝나서 총리가 아니었고, 부시 대통령은 결국 우크라이나의 여론을 받아들여 나중에 독립여론에 찬성했다.

8월 쿠데타 이후 많은 소련 소속의 국가들이 상징적인 의미의 독립을 선포했으나 여전히 협상은 가능했지만 90% 찬성율로 끝난 우크라이나의 독립 투표 이후엔 연방 유지를 위한 협상이 불가능해졌다. 왜냐면 우크라이나 없이 소련을 유지하는 것을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거기다 우크라이나는 90% 찬성율의 투표가 끝난 이후 군사권을 장악했다.

우크라이나 없이 소련 유지하는 것을 불가능했고, 이미 우크라이나는 군사권을 장악한 상태였다. 이 상황에서 소련을 유지하는 방법은 군사권을 접수한 우크라이나를 상대로 소련군을 파견해 우크라이나 정부를 무력진압하는 것 뿐이었다. 옐친은 결국 이런 무모한 방법을 사용하는 것을 포기했다.

옐친이 소련을 유지하려했지만 우크라이나의 독립 때문에 포기한 사실은 아래에서도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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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한 특정 세력들의 왜곡선전은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이후 John B.Dunlop, Mark Kramer, Brian D.Taylor, Taras Kuzio등 전문가들의 논문이 한국어로 번역되면서 허위임이 드러났다.

정작 옐친은 오히려 소련을 유지하려고 했다. 하지만 12월 1일에 실시한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에서 완전 독립 찬성에 90%라는 압도적인 결과가 나오게 되자 목표를 강제로 변경하고 소련 해체에 참여하게 된 것이다.

소련 해체에서 우크라이나의 독립이 얼마나 결정적이었는지는 Adrian Karatnycky가 1992년에 Foreign Affairs에 게재한 논문을 보라.
수 세기에 걸친 식민지 시대의 익명성 끝에 우크라이나가 마침내 세계 문제에 두각을 나타내고 있다. 서방에서는 부차적인 국가로 강등되었지만 우크라이나는 소비에트 이후 유럽의 윤곽을 규정하는 데 있어 강력하고 중요한 행위자로 빠르게 부상하고 있다. 1991년 8월의 쿠데타와 소련 공산당을 무너뜨린 것은 러시아와 보리스 옐친 대통령이 주도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소련 제국의 붕괴를 촉발한 것은 레오니드 크라브추크 대통령이 이끄는 우크라이나였다: 우크라이나가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연방 조약 서명을 거부하면서 소련이 붕괴하고 새로운 독립국가연합(EIS)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folding [ 원문 펼치기 · 접기 ]
After centuries of colonial anonymity Ukraine is finally making its mark on world affairs. Although relegated to secondary status by the West, Ukraine is rapidly emerging as a forceful and important actor in defining the contours of post-Soviet Europe. Russia and its President Boris Yeltsin may have taken the lead in defeating the August 1991 putsch and the Soviet Communist Party. But it was Ukraine, led by President Leonid Kravchuk, that ultimately provoked the unraveling of the Soviet empire: Ukraine's refusal to sign Mikhail Gorbachev's union treaty precipitated the collapse of the U.S.S.R. and the creation of the new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eis).}}}

Adrian Karatnycky, " The Ukrainian Factor", Foreign Affairs, Vol. 71, No. 3 (Summer, 1992), p.90.
Brian D Taylor이 2003년에 Journal of Cold War Studies에 게재한 논문을 보라.
소련에서 독립한 첫 번째 국가는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의 발트해 연안 국가들이었다. 1991년 9월 2일에는 소련이, 9월 6일에는 새로운 소련 국무위원회(고르바초프와 다른 공화국 수반들)가 이들 공화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쿠데타가 붕괴된 후 대부분의 공화국이 독립 선언을 채택했는데, 그 중 가장 중요한 선언은 8월 24일 우크라이나의 선언이었다. 9월 말까지 벨라루스, 몰도바, 아제르바이잔,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즈아, 조지아, 타지키스탄, 아르메니아 등 8개 공화국이 어떤 형태로든 독립을 선언했다.

이러한 독립 선언은 다소 상징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으며 소련 국가의 미래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 고르바초프는 발트 3국, 몰도바, 그루지야를 제외한 공화국 지도자들과 “주권 국가 연방”을 위한 새로운 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을 시작했다. 협상은 몇 달 동안 계속되었고 결국 12월 1일 국민투표에서 우크라이나 국민의 90% 이상이 독립에 투표한 후 막다른 골목에 이르렀다. 거의 모든 관측통들은 우크라이나의 참여 없이는 진지한 연방 논의가 불가능하다는 데 동의했다. 우크라이나 투표 직후인 12월 7~8일, 옐친은 벨라루스의 벨로베즈스카야 숲에서 새로 선출된 우크라이나 대통령 레오니드 크라브추크와 벨라루스 최고 소련 의장 스타니슬라스 슈슈케비치를 만나 소련의 종식과 독립국가연합(CIS) 창설을 선언했다. 다른 구소련 공화국들도 가입을 권유받았고, 12월 12일 중앙아시아 5개국이 가입을 요청하면서 협상이 타결되었다. 12월 22일 카자흐스탄의 수도 알마아타에서 11개 공화국(조지아 제외) 정상들이 연방 선언에 서명했습니 고르바초프는 12월 25일 소련 지도자 자리에서 사임했고, 일주일 후 소련은 공식적으로 소멸했다.

소련군의 운명은 8월 이후 협상의 주요 주제였다. 국무원은 11월에 미래 연방의 궁극적인 형태가 무엇이든 군대는 단일 지휘 하에 통합된 상태로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이 결정에 대해 많은 관측통들은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몇몇 공화국은 이미 자국 영토 내 소련군 부대를 '민영화'하는 작업을 열심히 진행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8월에 자국 내 군대에 대한 통제권을 주장하며 국방부 장관으로 콘스탄틴 모로조프 소장을 임명했던 우크라이나가 그 중심에 서 있었다. 10월까지 우크라이나 최고 소비에트는 우크라이나 자체 군대 설립을 위한 법적 근거의 대부분을 마련했다.

1991년 12월 군사 분야의 사건은 빠른 속도로 진행되었다. 우크라이나의 독립 국민투표 직후인 12월 6일, 우크라이나 최고 소비에트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는 새로운 군사 선서를 채택했고 모로조프는 이 선서를 한 첫 번째 인물이 되었다. 옐친, 크라브추크, 슈슈케비치의 CIS에 대한 합의는 단일 군대를 요구하지 않았고, 대신 연방의 '공동 군사 전략 공간'에 대한 '공동' 지휘를 통해 핵무기에 대한 단일 통제의 필요성만 언급했다. 12월 13일 크라브추크는 자신을 우크라이나 군 최고사령관으로 선포하고 우크라이나에 주둔한 소련군으로 우크라이나 군을 구성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모로조프는 12월 17일 우크라이나의 군대가 여전히 모스크바에 종속되어 있으며 통제권 이양은 “단계적으로” 이루어질 것이라고 말했지만, 우크라이나가 나아갈 방향은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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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first states to break free from the Soviet Union were the Baltic states of Estonia, Latvia, and Lithuania. Their independence was recognized by the mUnited States on 2 September 1991 and by the new Soviet State Council (Gorbachev plus the heads of the other republics) on 6 September. After the coup collapsed, most of the republics adopted independence declarations, the first and most significant of which was the declaration by Ukraine on 24 August. By the end of September, eight other republics—Belarus, Moldova, Azerbaijan, Uzbekistan, Kirghizia, Georgia, Tajikistan, and Armenia—had announced their independence in one form or another.

These independence declarations had a somewhat symbolic character, and the future of the Soviet state was still undetermined. Gorbachev entered into negotiations with the leaders of the republics (except the Baltic states, Moldova, and Georgia) on a new treaty for a “union of sovereign states.” The negotiations dragged on for several months and eventually reached a dead end after more than 90 percent of Ukrainians voted for independence in a referendum on 1 December. Almost all observers agreed that there could be no serious talk of a union without Ukraine’s participation. On 7–8 December, shortly after the Ukrainian vote, Yeltsin met with the newly elected Ukrainian president, Leonid Kravchuk, and the chair of the Belarusan Supreme Soviet, Stanislaus Shushkevich, in the Belovezhskaya Forest in Belarus and proclaimed the end of the Soviet Union and the founding of the Commonwealth of Independent States (CIS). Other former Soviet republics were invited to join, and the deal was clinched on 12 December when the ªve Central Asian states asked to join. The Commonwealth Declaration was signed by the leaders of eleven republics (all except Georgia) on 22 December in Alma-Ata, the capital of Kazakhstan. Gorbachev resigned as Soviet leader on 25 December, and the Soviet Union formally ceased to exist a week later.

The fate of the Soviet military was a major topic of the post-August negotiations. The State Council decided in November that, whatever the ultimate shape of the future union, the armed forces would remain uniªed and under a

single command. This decision, however, was greeted with skepticism by many observers. Several of the republics were already hard at work “privatizing” the Soviet military units on their territory. The key player, again, was Ukraine, which had asserted control over the military forces on its soil in August and had appointed its own defense minister, Major-General Konstyantin Morozov. By October the Ukrainian Supreme Soviet had established much of the legal basis for setting up Ukraine’s own armed forces.

Events in the military sphere moved at a breakneck pace in December 1991. On 6 December, just after Ukraine’s referendum on independence, the Ukrainian Supreme Soviet adopted a new military oath of allegiance to Ukraine, and Morozov became the ªrst ofªcer to take the oath. The agreement between Yeltsin, Kravchuk, and Shushkevich on the CIS did not call for a uniªed military; instead, it referred only to the need for uniªed control over nuclear weapons, with “joint” command over the “common military-strategic space” of the commonwealth. On 13 December Kravchuk declared himself commander in chief of the Ukrainian Armed Forces and decreed that the Ukrainian military would be formed from Soviet forces stationed in the country. Although Morozov said on 17 December that the forces in Ukraine were still subordinate to Moscow and that the transfer of control would take place “in stages,” the direction in which Ukraine was heading was clear.

Taylor, Brian D. "The Soviet Military and the Disintegration of the USSR." Journal of Cold War Studies 5.1 (2003) 56-58. https://doi.org/10.1162/152039703320996713 번역
Mark Kramer가 2004년에 Slavic Review에 게재한 논문을 보라
실제로 1991년 8월 쿠데타가 실패한 후 옐친은 처음에는 고르바초프가 아닌 자신의 지도하에 소련 국가가 거의 그대로 유지되기를 바랐다. 옐친은 발트해 연안 국가, 조지아, 몰도바 같은 주변 공화국들의 독립을 받아들이겠다는 의지를 자주 표명했지만, 이 작은 공화국들의 이탈이 (어떤 새로운 이름과 구성으로든) 연방의 보존과 양립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옐친이 이 선택권을 박탈당한 것은 몇몇 변방 공화국의 (기꺼이 받아들인) '손실'이 아니라 쿠데타 실패 이후 우크라이나에서 독립 찬성 정서가 급증한 것이었다. 쿠데타가 시도되기 전부터 우크라이나에서는 독립을 지지하는 정서가 서서히 형성되고 있었지만, 쿠데타가 개입하지 않았다면 충분히 억제할 수 있었다. 쿠데타 계획이 무산된 후 우크라이나의 상황은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바뀌었다.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국민투표에서 독립에 대한 압도적인 찬성이 나오면서 상황이 정점으로 치달았다. 옐친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대규모 무력 사용을 통해 소비에트 국가를 유지하려 할 수도 있었지만, 1991년 12월 8일 벨로베즈키아 푸샤 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연방 해체를 명문화하는 대신 현명한 선택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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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deed, in the aftermath of the aborted August 1991 coup, El'tsin initially hoped to keep the Soviet state largely intact, albeit under his rather than Gorbachev's leader- ship. Although El'tsin made good on his oftexpressed willingness to accept the independence of peripheral republics like the Baltic states, Georgia, and Moldova, he believed that the departure of these small republics would be compatible with the preservation of the union (under whatever new name and configuration it might be given).

What deprived El'tsin of this option was not the "loss" of a few marginal republics (something he willingly accepted), but the surge of proindependence sentiment in Ukraine after the failed coup. Sentiment in favor of independence had gradually been building in Ukraine even be-fore the attempted coup, but it might well have been containable if the putsch had not intervened. After the coup plotters were rebuffed, the dynamic of the situation in Ukraine changed irrevocably. The overwhelming vote for independence in Ukraine's referendum on 1 December 1991 brought matters to a head. El'tsin could have tried to preserve the Soviet state through the massive use of force against Ukraine, but he wisely chose instead to codify the dissolution of the union by signing the Belovezhskaia Pushcha accords on 8 December 1991.

Kramer, Mark. "The reform of the Soviet system and the demise of the Soviet state." Slavic Review 63.3 (2004) 507. https://doi.org/10.2307/1520339 번역본
John B Dunlop이 2003년에 Journal of Cold War Studies에 게재한 논문을 보라
11월 14일 국무회의가 열릴 무렵, 고르바초프와 옐친의 입장 사이에는 하품이 나올 정도의 간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다음은 유리 바투린이 나중에 샤크나자로프(회의 당시 해외에 있던)에게 전달한 유리 바투린의 메모 중 일부다:

"나자르바예프: [카자흐스탄의]: 정확히 어떤 종류의 연합을 [만들려고 하는가]? 연방입니까, 아니면 연맹입니까?

고르바초프: 연방 국가입니다. 나는 단호하게 그것을 주장합니다.

옐친: 우리는 국가연방을 만들 것입니다.

고르바초프: 국가가 없다면 나는 참여하지 않겠소. 나는 지금 당장 당신을 떠날 수 있습니다. (일어서서 서류를 챙긴다).

옐친: 정확한 이름을 연맹이라고 짓자고요.

고르바초프: 당신이 결정하세요. 내가 강요할 순 없어요.

옐친: 우크라이나가 떠나지 않도록 만들어야 합니다.

슈슈케비치 [벨로루시의]: 나는 그들[우크라이나]이 연맹에 가입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보시다시피 옐친과 그의 동맹국들(특히 벨로루시의 슈슈케비치)에게 우크라이나는 아무리 느슨하게 구성되어 있더라도 어떤 중요한 단체에 계속 속하는 것이 정치적으로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고르바초프의 준단일 연방 국가 모델은 12월 1일로 다가온 국민투표(유권자의 84%가 투표에 참여하여 90%가 독립에 투표하고 62%가 다른 6명의 후보를 제치고 크라브추크를 우크라이나 대통령으로 선출)에서 완전한 독립을 이루고자 하는 우크라이나를 위한 여지를 남기지 못했다.
(...)
"옐친: 우크라이나 없이는 연방도 있을 수 없다는 또 다른 원칙의 문제가 있습니다.

고르바초프: 그리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연방을 거부한다면 그것은 [우크라이나] 분리주의자들에게 선물이 될 것입니다.

옐친: 12월 1일[우크라이나 국민투표일]까지 기다려 봅시다.

고르바초프: 나는 여러 공화국의 지도자들이 불필요한 작전을 벌이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옐친, 슈슈케비치, 카리모프는 이 발언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고르바초프: . . 보리스 니콜라에비치[옐친]는 분명히 입장을 바꿨습니다. 그와 나는 연방 국가에 합의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참모들을 데리고 홀 밖으로 걸어 나갔다. 잭 매트록이 쓴 것처럼, 고르바초프가 곧 회담장 복귀에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행동은 “우크라이나가 받아들일 수 있는 합의”를 기대했던 옐친과 슈슈케비치에게 “마지막 지푸라기”가 된 셈이었다. 12월 8일 두 공화당 지도자는 벨라루스에서 크라브추크와 만나 소련을 종식시키는 벨로베즈스카야 푸샤 협정에 서명했다. 이틀 후 고르바초프는 포기하지 않고 당과 민간인 통제에서 모두 벗어난 국방부로 가서 군 지도부에 자신의 주장을 제시했고, 그들의 결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다음 날 옐친은 같은 국방부를 찾아가 반론을 제기했다. 제임스 베이커 전 미국 국무장관은 “이러한 움직임은 지정학적으로 악몽 같은 일”이라며 “크렘린의 두 거물이 정치 권력을 놓고 다투고 군대를 부추기며 내전의 유령을 불러일으키고 핵무기를 던진 것”이라고 적절하게 논평했다. 군부는 러시아 대통령의 말을 강력히 선호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고르바초프는 실각했고, 12월 25일 소련은 갑작스럽게 종말을 맞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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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the time of the 14 November meeting of the State Council, a yawning gap was opening up between the positions of Gorbachev and of Yeltsin. The following is a section from notes taken by Yurii Baturin, which were later given to Shakhnazarov (who had been abroad at the time of the meeting):

"Nazarbaev: [of Kazakhstan]: What kind of Union precisely [are we seeking to create]? A federation or a confederation?

Gorbachev: A Union State. I categorically insist on it.

Yeltsin: We will create a Union of States.

Gorbachev: If there is no state, then I will not participate. I can leave you right now. (Stands up, gathers up his papers).

Yeltsin: Let’s give it a precise name: a confederation.

Gorbachev: You decide. I can’t force you.

Yeltsin: We have to make it so that Ukraine does not leave.

Shushkevich [of Belarus]: I think that they [the Ukrainians] will join a confederation."

As can be seen, for Yeltsin and his allies (especially Shushkevich of Belarus), it was deemed politically essential that Ukraine continue to belong to some overarching entity, no matter how loosely structured. Gorbachev’s quasi-unitary model of a Union State left no room for a Ukraine that was intent on achieving full independence during the fast-approaching 1 December referendum (in which 84 percent of eligible voters went to the polls, 90 percent voted for independence, and 62 percent elected Kravchuk as Ukrainian president against six other candidates.)

(...)

"Yeltsin: There is another issue of principle—without Ukraine there can be no Union.

Gorbachev: And the contrary is also true. If we repudiate the Union, it will be a gift to the [Ukrainian] separatists.

Yeltsin: Let’s wait until 1 December [the date of the Ukrainian referendum].

Gorbachev: I maintain that the leaders of several republics are engaging in un- necessary maneuvers.

(Yeltsin, Shushkevich, and Karimov express disagreement with this statement.)

Gorbachev: . . . Boris Nikolaevich has clearly changed his position. He and I agreed upon a Union State."

Gorbachev then stalked out of the hall, taking his staff with him. As Jack Matlock has written, this action—even though Gorbachev soon consented to return to the hall—constituted the “last straw” for Yeltsin and Shushkevich, who had been counting on reaching “an agreement that would be acceptable to Ukraine.” On 8 December the two republican leaders met with Kravchuk in Belarus and signed the Belovezhskaya Pushcha Accords, which put an end to the Soviet Union.124 Two days later Gorbachev, unwilling to give up, went to the Defense Ministry, which was now freed of both Party and effective civilian control, to present his case to the military leadership; their decision would prove decisive.

The following day Yeltsin went to the same Defense Ministry to present his counterarguments. “These moves,” former U.S. Secretary of State James Baker has aptly commented, “were the stuff of a geopolitical nightmare: two Kremlin heavyweights jockeying for political power, calling on the army to follow them, and raising the specter of civil war—with nuclear weapons thrown in the mix.” The military decided that it strongly preferred what the Russian president had to say. Gorbachev was out of a job, and on 25 Decem- ber the Soviet Union came to an abrupt end.

Dunlop, John B. "The August 1991 coup and its impact on Soviet politics." Journal of Cold War Studies 5.1 (2003) 125-127. https://doi.org/10.1162/152039703320996731 번역 출처
Peter J. Potichnyj이 1991년에 Canadian Slavonic Papers에 게재한 논문을 보라
고르바초프 옐친이 우크라이는 독립국이 될 수 없다고 말하자 크라우추크가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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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ravchuk criticized both Gorbachev and Yeltsin for saying that Ukraine could not be an independent state.}}}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7
옐친과 고르바초프에 의한 국민투표 전날의 반독립운동―무례한 내정간섭으로 인식된―또한 아마도 독립 찬성세력들에게 힘을 주는데 도움이 되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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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anti-independence campaign by Yeltsin and Gorbachev on the eve of the referendum-perceived as a gross interference in internal political affairs-also probably helped the pro-independence forces?}}}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8-129
Taras Kuzio가 1994년에 Journal of Area Studies[31]에 게재한 논문을 보라[63]
8월 독립 선언과 1991년 12월 대통령 선거와 독립 국민 투표 사이에 고르바초프와 옐친은 우크라이나를 구 소련 내에서 유지시키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국민 투표에서는 동부 우크라이나와 같이 러시아인이 많이 밀집한 지역에서조차 90%의 압도적인 찬성율로 독립에 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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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etween the August Declaration of Independence and the December 1991 presidential elections and independence referendum both Gorbachev and Yeltsin continued to try and maintain Ukraine within the former USSR. But the referendum produced an overwhelming majority of 90 per cent in favour of independence, even in regions with large concentrations of Russians, such as Eastern Ukraine.}}}

Taras Kuzio (1994) Ukrainian nationalism, Journal of Area Studies, 2:4, 91
1991년 12월 7-8일 벨라루스, 우크라이나, 러시아 민스크 정상 회담에서 옐친은 고르바초프로부터 제안을 받아 마침내 우크라이나를 소련내에 유지하는 유일한 방법이 주권국가연맹으로 전환하는 것이라는 점을 받아들였다. 이것은 8월 쿠데타 이전의 크라우추크에게는 호소력이 있을지 모르지만(그러나 민족주의자에게는 그렇지 않음) 독립 국민 투표 결과 90% 이후에는 시작할 수가 없는 계획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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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the Minsk summit of Belarus, Ukraine and Russia on 7-8 December 1991 Yeltsin brought a proposal from Gorbachev where he finally accepted that the only way of keeping Ukraine within the Soviet Union was by its conversion into a confederation of sovereign states. Although this may have been appealing to Kravchuk prior to the August coup d'etat (but not to the nationalists) it was a non-starter after the ninety per cent independence referendum results.}}}

Taras Kuzio (1994) Ukrainian nationalism, Journal of Area Studies, 2:4, 92
Mark Kramer가 2022년에 Journal of Cold War Studies에 게재한 논문을 보라.
8월 21일 이후 두 사람은 모스크바에 본부를 둔 연방을 유지하기를 희망했지만, 등장해야 할 단체에 대한 개념은 양립할 수 없었다. 12월 투표 결과에 반영된 바와 같이 완전한 독립을 지지하는 우크라이나의 완전한 여론 변화는 결국 옐친의 목표를 바꾸도록 강요했고 그리고 벨로베즈스카야 숲Belovezhskaya Pushcha협정과 알마아타Alma-Ata 합의를 통해 소련의 종말을 촉진시켰다. 그러나 우크라이나의 상황이 그렇게 극적으로 바뀌자 않더라도 옐친과 고르바초프 둘 다를 만족시킬 수 있는 실행 가능한 구조가 고안될 수 있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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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lthough both men after 21 August hoped to preserve a union headquartered in Moscow, their conceptions of the entity that should emerge were incompatible. The resounding shift of public opinion in Ukraine in support of outright independence, as reflected in the voting results on 1 December, is what ultimately forced Yeltsin to change his goals and precipitate the demise of the USSR through the Belovezhskaya Pushcha agreements and Alma-Ata accords. But even if the situation in Ukraine had not changed so dramatically, it is questionable whether a viable union structure could ever have been devised that would have satisfied both Yeltsin and Gorbachev.}}}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6
그 마지막 위기에서 또 다른 티핑 포인트는 독립 국가로 귀결되는 결정적인 투표인 1991년 12월 1일 우크라이나 독립 국민투표와 함께 찾아왔다. 국민투표 캠페인과 투표 자체는 근본적인 정치 변화의 역학에 대한 게르슈프스키의 유형론에서 또 다른 내생적으로 주도된 파열(Type III Change)을 구성했다. 1991년 8월 쿠데타가 실패로 끝난 후에도 옐친은 처음엔 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 그리고 다른 중앙아시아 공화국들을 연결시키는 연방을 보존하기를 희망했었다. 그러나 1991년 가을 우크라이나 주민 대다수가 완전한 독립을 위하여 12월 1일에 투표할 것이라는 것이 명백해지자 옐친은 국민투표가 되돌아 갈 수 없는 포인트가 될 것을 깨달았다. 공식적인 투표 집계를 보기 전에 그는 독립 러시아 국가(구 소련에서 가장 크고 가장 강력한 구성 요소)에서 권력을 공고히하고, 그리고 새로 선출된 우크라이나 대통령 레오니드 크라우추크와 벨라루스 의장(사실상 국가 원수) 스타니슬라우 슈시케비치와 그 연방을 끝내는데 함께하기로 결정했다— 1991년 12월 8일 벨로베즈스카야숲에서 과업을 완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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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at final crisis, another direct tipping point came with the independence referendum in Ukraine on 1 December 1991, which resulted in a decisive vote for an independent state. The referendum campaign and the vote itself constituted another endogenously-driven rupture (Type III Change) in Gerschewski’s typology of the dynamics of fundamental political change. After the August 1991 coup ended in failure, Yeltsin had initially been hoping to preserve a union linking Russia with Ukraine, Belarus, Kazakhstan, and other Central Asian republics. But as it became clear in the fall of 1991 that the large majority of residents of Ukraine would be casting votes on 1 December for outright independence, Yeltsin realized that the referendum would be a point of no return. Even before seeing the official voting tally, he decided he would consolidate his power in an independent Russian state (by far the largest and strongest component of the former USSR) and join with the newly elected Ukrainian president, Leonid Kravchuk, and the chairman of the Belarusian parliament (and de facto head of state), Stanislau Shushkevich, in bringing an end to the union—a task they accomplished on 8 December 1991 in Belovezhskaya Pushcha}}}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14

5. 여담

한국에선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까진 사학과 학생조차 거의 모르는 사건이었다. 이는 인터넷 검색을 통해 알 수 있다. 조지 W. 부시 치킨 키예프( 치킨 키이우의 당시 표기법)사건으로 유명했었지만 역시 이에 대한 언급도 찾기 힘들다.


[1] Paul R. Magocsi (1996), A history of Ukrain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Incorporated, 674 [2]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3-4, DOI: 10.1080/00085006.1991.11091956 [3]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7, 128-129 [4] Taras Kuzio (1994) Ukrainian nationalism, Journal of Area Studies, 2:4, 91-92 [5]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6, 214 [6] Paul R. Magocsi (196), A history of Ukrain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Incorporated, 670. [7] Aleksandr Burakovskiy (2015) In search of a liberal polity: the Rukh Council of Nationalities, the Jewish question, and Ukrainian independence, East European Jewish Affairs, 45:1, 109, DOI: 10.1080/13501674.2015.990312 [8] Paul R. Magocsi (1996), A history of Ukrain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Incorporated, 670. [9] 한국에서 부르는 소수민족과 의미가 다름 [10] Paul R. Magocsi (1996), A history of Ukrain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Incorporated, 670. [11] Paul R. Magocsi (1996), A history of Ukrain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Incorporated, 670-671 [12] Aleksandr Burakovskiy (2015) In search of a liberal polity: the Rukh Council of Nationalities, the Jewish question, and Ukrainian independence, East European Jewish Affairs, 45:1, 109-110 [13] Aleksandr Burakovskiy (2015) In search of a liberal polity: the Rukh Council of Nationalities, the Jewish question, and Ukrainian independence, East European Jewish Affairs, 45:1, 110 [14] Aleksandr Burakovskiy (2015) In search of a liberal polity: the Rukh Council of Nationalities, the Jewish question, and Ukrainian independence, East European JewishAffairs, 45:1, 110 [15] Aleksandr Burakovskiy (2015) In search of a liberal polity: the Rukh Council of Nationalities, the Jewish question, and Ukrainian independence, East European Jewish Affairs, 45:1, 110. 그러나 루흐가 제안했던 이 메세지는 반유대주의적 도발, 광범위한 경제 불안정, 미래 복지에 대한 호의, 루흐에 대한 공산당 조직들의 적극적인 허위정보, 정치적 불확실성과 혼란과 "the strong beckoning of aliyah"을 견딜 수 없었다. 게다가 1992년 루흐는 다문화적 내셔널 우크라이나를 대표하는 야망을 가진 풀뿌리 연합에서 중도우파 정당으로 탈바꿈한다. Ibid. [16] Aleksandr Burakovskiy (2015) In search of a liberal polity: the Rukh Council of Nationalities, the Jewish question, and Ukrainian independence, East European JewishAffairs, 45:1, 112 [17] Aleksandr Burakovskiy (2015) In search of a liberal polity: the Rukh Council of Nationalities, the Jewish question, and Ukrainian independence, East European Jewish Affairs, 45:1, 112 [18] Aleksandr Burakovskiy (2015) In search of a liberal polity: the Rukh Council of Nationalities, the Jewish question, and Ukrainian independence, East European Jewish Affairs, 45:1, 112 [19] Aleksandr Burakovskiy (2015) In search of a liberal polity: the Rukh Council of Nationalities, the Jewish question, and Ukrainian independence, East European Jewish Affairs, 45:1, 112 [20] Aleksandr Burakovskiy (2015) In search of a liberal polity: the Rukh Council of Nationalities, the Jewish question, and Ukrainian independence, East European Jewish Affairs, 45:1, 112 [21] Aleksandr Burakovskiy (2015) In search of a liberal polity: the Rukh Council of Nationalities, the Jewish question, and Ukrainian independence, East European Jewish Affairs, 45:1, 119 [22] Aleksandr Burakovskiy (2015) In search of a liberal polity: the Rukh Council of Nationalities, the Jewish question, and Ukrainian independence, East European Jewish Affairs, 45:1, 119 [23] Aleksandr Burakovskiy (2015) In search of a liberal polity: the Rukh Council of Nationalities, the Jewish question, and Ukrainian independence, East European Jewish Affairs, 45:1, 119-120 [24] Aleksandr Burakovskiy (2015) In search of a liberal polity: the Rukh Council of Nationalities, the Jewish question, and Ukrainian independence, East European Jewish Affairs, 45:1, 120 [25] Aleksandr Burakovskiy (2015) In search of a liberal polity: the Rukh Council of Nationalities, the Jewish question, and Ukrainian independence, East European Jewish Affairs, 45:1, 120 [26] Aleksandr Burakovskiy (2015) In search of a liberal polity: the Rukh Council of Nationalities, the Jewish question, and Ukrainian independence, East European Jewish Affairs, 45:1, 120 [27] Paul R. Magocsi (1996), A history of Ukrain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Incorporated, 670-672. [28] Aleksandr Burakovskiy (2015) In search of a liberal polity: the Rukh Council of Nationalities, the Jewish question, and Ukrainian independence, East European Jewish Affairs, 45:1, 121 [29] Aleksandr Burakovskiy (2015) In search of a liberal polity: the Rukh Council of Nationalities, the Jewish question, and Ukrainian independence, East European Jewish Affairs, 45:1, 121 [30] Aleksandr Burakovskiy (2015) In search of a liberal polity: the Rukh Council of Nationalities, the Jewish question, and Ukrainian independence, East European Jewish Affairs, 45:1, 121 [31] Paul R. Magocsi (1996), A history of Ukrain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Incorporated, 672. [32]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3-204 [33]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4 [34]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4 [35]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1 [36]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2 [37]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2-203 [38]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4 [39] Paul R. Magocsi (1996), A history of Ukrain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Incorporated, 673-674 [40] Paul R. Magocsi (1996), A history of Ukrain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Incorporated, 673 [41]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4-125 [42]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6 [43]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7 [44]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6 [45]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6-127 [46] Peter J.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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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23-4 [53] Aleksandr Burakovskiy (2015) In search of a liberal polity: the Rukh Council of Nationalities, the Jewish question, and Ukrainian independence, East European Jewish Affairs, 45:1, 125 [54] Paul R. Magocsi (1996), A history of Ukraine, University of Toronto Press Incorporated, 674 [55] Peter J. Potichnyj (1991) The Referendum and Presidential Elections in Ukraine, Canadian Slavonic Papers, 33:2, 132 [56] 구로카와 유지,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 장대한 동슬라브 종가의 고난에 찬 대서사시』, 파주 : 글항아리, 2022. pp.276-277 [57] 로만 투르스키, 히루마 가츠코, 『몇 해 만에 고향에 가보니』, 구로카와 유지, 『유럽 최후의 대국, 우크라이나의 역사: 장대한 동슬라브 종가의 고난에 찬 대서사시』, 파주 : 글항아리, 2022. pp.276-277에서 재인용 [58] 중앙일보 1991.12.03 00:00 https://www.joongang.co.kr/article/2665043 [59] 이 때의 위협은 2014년 러시아가 크림반도를 합병한 것을 시작으로 점점 현실화되었고, 2022년, 마침내 양국의 전면전으로 확대되고 만다. [60] 세르히 플로히,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 독립과 생존을 위한 투쟁의 역사』, 허승철 역, (서울 : 한길사, 2022), p.548. [61] 세르히 플로히, 『유럽의 문 우크라이나 』, p.550. [62] Mark Kramer (2022) The Dissolution of the Soviet Union: A Case Study of Discontinuous Change, Journal of Cold War Studies, 24 (1):206, 214 [63] Journal of Area Studies는 Journal of Contemporary European Studies로 저널명을 개정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