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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15 13:02:15

수에즈 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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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 운하
Suez Canal
قناة السويس
파일:수에즈 운하.png
운하 지도와 NASA의 Landsat8 위성이 촬영한 사진[1]

1. 개요2. 역사
2.1. 고대 수에즈 운하2.2. 건설2.3. 영국의 운하 매입2.4. 제2차 중동전쟁 이집트로의 귀속2.5. 현재2.6. 확장
3. 영향4. 수에즈맥스 규격5. 레셉스 이주6. 사건·사고7. 등장 매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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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수에즈 운하(Suez Canal, قناة السويس)는 지중해 홍해를 잇는 이집트 운하 1869년에 완공되었다.

파나마 운하와 더불어 전 세계 해운업과 해양사에 매우 큰 영향력을 가지고 있으며,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의 경계 역할도 수행한다.[2]
파일:수에즈 운하 필요성.png
클리퍼 항로에서 수에즈 운하 개통으로 단축되는 거리

세계 지도를 보면 유럽에서 인도 아시아로 나아가 무역을 하기 위해선 배를 타고 유럽에서 출발 → 아프리카 서부 해안을 따라 항해 → 아프리카 대륙 남쪽 끄트머리 희망봉에 도착 → 인도양 도착 → 목적지 도착이라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데, 아프리카 대륙을 돌려면 요즘 컨테이너선으로도 한 달은 걸리며 옛날 배로는 몇 개월이 필요했다. 그런데 유라시아 대륙과 아프리카 대륙이 이어지는 자리의 폭은 굉장히 협소할 뿐더러 북으로는 지중해로 연결되고 남으로는 홍해를 지나 인도양으로 이어진다. 즉 아프리카 대륙을 빙 둘러 가지 않고 유럽에서 바로 인도양으로 갈 수 있는 운하만 있다면 엄청난 교통의 요지가 됨이 불을 보듯 뻔하였다.

2. 역사

2.1. 고대 수에즈 운하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445px-Canal_des_Pharaons.svg.png 파일:수에즈 이란.png
고대 파라오의 운하. 기원전 6세기 ~ 서기 8세기 간헐적으로 운용되었다 다리우스 1세가 세운 운하 개통 기념비

고대 이집트 때도 필요성은 있다보니 운하를 파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이집트에는 전 세계에서 최고의 건축 토목기술이 있었는데도 지금처럼 지중해에서 직접 연결되는 부분을 파기는 불가능했다. 대신 위 사진처럼 나일강의 하류의 최동단 지류에서 투밀라트 계곡, 대고호(大苦湖, Great Bitter Lakes)[3](거대한 쓴 호수) 등을 통해 동쪽으로 수에즈까지 연결하여 지중해와 간접적으로 잇는 방식으로 시도했다고 한다. 다만 바다을 완전히 연결하지는 않았고 중간에 육지에서 배를 끌어야 하는 구간이 있었다.[4]

가장 처음 도전한 사람은 이집트 제12왕조 세누스레트 3세(기원전 19세기)였지만 실패했고, 하트셉수트(기원전 15세기)와 람세스 2세(기원전 13세기) 역시 건설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한 듯하다.

헤로도토스의《역사》에 따르면 이집트 제26왕조의 네코 2세(Necho II)가 기원전 609년에 배 두 척이 동시에 지날 수 있는 너비로 나일강과 대고호와 홍해를 연결하는 공사를 시도했다. 그리하여 인명피해 12만 명을 내면서 완공을 눈 앞에 두었으나, 이 운하가 적에게 유리하게 이용되리란 신탁을 받고 포기하였다고 한다. 네코 2세는 또 지중해에서 직접 연결되는 걸 시도하다가 실패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얼마 후에 이집트를 정복한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의 왕 다리우스 1세 시대에는 완공해서 페르시아로부터 원활하게 운용됐다. 헤로도토스의 《역사》에 따르면 3단 갤리선(Trireme)들이 노를 펴고 서로 교차통행이 가능한 너비로 횡단하는 데 나흘이 걸렸다고 한다. 이를 기념하는 비석 5기를 남겼는데 지금도 4기가 남아 있다.

이후 홍해와 만나는 운하 종점에 남겨진 비석에 따르면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기원전 270~269년경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포스) 때 정비하고 재개통하였다. 이후로도 로마 제국 트라야누스 황제(2세기 초) 시기를 거쳐, 정통 칼리파 우마르 시기까지 홍수 침니(沈泥) 현상으로 운하가 막히거나 파괴되어 재개통하기를 반복했음을 기록으로 알 수 있다. 약 1000년 간, 운하는 이집트 농산물 등이 아랍 등지로 수송되는 주요 교통로로 활용되었다.

아바스 왕조 2대 칼리파 알 만수르 치세이던 767년, 그의 삼촌 압달라의 반란 방어과정에서 이 고대 운하는 완전히 막혀버렸으며, 오늘날 수에즈 운하를 팔 때 작업자들의 식수 공급과 물자 수송을 위한 운하(Sweet Water Canal: 가장 위의 지도의 서쪽에서 팀사호수로 연결된 수로)를 뚫을 당시에 이 고대 운하의 잔해들을 활용했다고 한다.

이후 15~16세기에 운하를 다시 개통하려는 시도가 있었다. 1488년 바르톨로뮤 디아스 희망봉에까지 다다르자 포르투갈 향신료 무역을 독점할까 우려하여 베네치아 공화국이 나섰지만, 맘루크 왕조와 협상이 벌어지는 단계에서 오스만 제국 셀림 1세가 이집트를 정복하면서 무위로 그쳤다. 그리고 1565~1579년 오스만의 재상을 지낸 소콜루 메흐메트 파샤가 다시 개통하려 했지만 계획 단계에서 불발됐다. 루이 14세 나폴레옹도 운하 개설 조사를 했지만 포기했다.

2.2. 건설

오늘날 존재하는 현대적인 운하의 역사는 1805년 메흐메트 알리 파샤가 오스만령 이집트의 대총독 자리에 오르면서부터 시작했다. 메흐메트 알리는 이집트의 맘루크 세력을 숙청하고 군 활동의 재량권을 얻은 뒤 서방과 적극적으로 접촉하며 근대화를 추진하여 군사력을 길러 1841년 사실상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독립했다.

이에 메흐메트 알리와 우호관계를 맺은 프랑스가 주도하여 운하 개통을 위한 주식을 공매하였다. 이를 주도한 인물은 페르디낭 M. 레셉스(Ferdinand M. Lesseps)인데, 프랑스 외교관으로서 이집트에 파견된 차에 메흐메트 알리 및 그 아들과 친분관계를 쌓았다. 메흐메트 알리 사후 그 아들 사이드 파샤가 이집트의 새 지도자가 되자 운하 건설을 적극적으로 권유하여, 이집트 법인 '만국 수에즈 해양운하회사'에 운하의 운영권을 양도하고 99년간 운영 후 운영권을 이집트에 양도하기로 합의하였다.

문제는 자금 조달이었다. 사막지대에서 땅을 파내는 난공사이므로 당연히 자금도 많이 소모되었다. 수에즈 운하회사는 주식 총 40만 주를 발행하여 자금을 조달하고자 했지만, 이른바 큰 손들이 움직이지 않았던 것이다. 운하 건설을 적극적으로 지지한 나폴레옹 3세 프랑스 정부 자금으로 주식을 매입하지는 않았고, 40만 주 중 20만 7,000 주에 달하는 프랑스 측 지분은 모두 프랑스 국내 개인 투자자들에게 나뉘어서 매각되었다. 그나마도 대규모로 사겠다는 고객이 없어서, 주주가 21,000명에 달해서 평균 구입 주식 수가 10주도 안 되었다. 100주 이상 구입한 사람이 199명밖에 없을 정도였다.

나머지 주식들은 운하에 관심이 있을 법한 주요 강대국 정부에 분할매각을 추진했으나 모두 거부당했다. 당시 제안 받은 나라들은 영국[5], 러시아, 미국[6], 오스트리아 등이었는데, 영국을 제외하면 수에즈 운하가 필요한지 의문이 드는 나라들이었다.[7] 프랑스가 이들 정부에 주식 매입을 타진한 이유는 당연히 영국의 방해에 맞서 우군을 확보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당시 자유무역이란 개념이 없어서 해군력으로 해로를 유지해야하는 당대 기준으로 수에즈 운하를 사용할 일이 없는 위치에 있는 국가들에 접근한 건 꽤나 어이없는 일이다.[8] 하지만 이들이 거부한 이유는 바로 영국이었다.

영국이 수에즈 운하에 반대하는 움직임을 보인 이유는 크게 둘이었다. 영국은 이미 전 세계 해양 패권을 쥐고 있었으므로 운하가 그다지 급하게 필요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 운하를 빌미로 프랑스가 이집트를 식민지로 만들고 이를 발판으로 인도를 노리는 게 아니냐고 의심하고 있었다. 그래서 운하 건설에 도움을 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여기에 프랑스 측이 책정한 이용료 문제가 기름을 끼얹었다. 지분의 과반수를 차지한 프랑스의 운하 운영 정책이 차별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규칙으로 최대 주주인 프랑스는 매우 저렴하게, 주식을 사면 조금 저렴하게, 안 사면 매우 비싸게 통행료를 매겼다. 이런 차별적인 요금정책으로 인해 다른 나라들은 이렇다할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영국은 프랑스보다 비싸게 물어야한다는 사실에 8만 주를 인수해 달라는 레셉스의 요청을 아예 보이콧해버렸다. 영국 상인들도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HMS 뉴포트의 불법 통행 행위가 옹호받은 것도 이 불만과 무관하지 않다.[9]

결국 이집트 정부는 운하를 통해 돈방석에 앉는 장미빛 꿈을 꾸었으나, 최종적으로는 16만 7천 주에 달하는 주식을 이집트 정부가 덤터기를 쓰게 되었다. 사실 망상에 가까운 자금 조달 계획에 가까웠던 것이, 그나마 팔아치운 프랑스 주식 조차도 프랑스의 로스차일드 가문의 도움으로 간신히 팔아치운 것이다. 그나마 로스차일드한테도 처음에는 퇴짜를 맞았는데, 주식 취급 수수료로 5%를 내라는 로스차일드 측의 요구를 레셉스가 거부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주식판매 및 자금조달 문제가 해결되었음에도 영국의 방해는 끝나지 않았다. 영국은 수에즈 인근 사막부족들에게 반란을 부추긴다거나, 수에즈 운하에 투입된 노동자들이 형편없는 임금을 받고 있다며 사실상의 노예노동이라고 비난하는 등 지속적으로 건설을 방해했다. 이로 인해 레셉스가 영국도 인도에서 똑같이 하지 않느냐고 항변하기도 하였다.

결국 협상 끝에 수에즈 법인이 이집트 소유의 이집트 회사이며, 프랑스 정부에는 어떠한 권리가 없다는 최종 합의가 이뤄진 끝에 공사 시작 10년 만인 1869년 11월 17일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었다. 이 과정에서 무려 9,000명이 넘는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비용은 처음 주식을 공모할 때의 예상치의 2배 이상으로 들었다.

운하를 처음으로 통과한 선박 영국 해군 연안 포함 HMS 뉴포트(Newport)였다. HMS 뉴포트는 운하 공식개통 전날인 11월 16일 밤에, 모든 조명을 끄고 몰래 운하를 통과하는 무모한 행동을 감행했다. 운하 회사 관계자들은 감히 영국의 비위를 거스를까 염려하여 항의도 하지 못했다. 이후 뉴포트의 함장은 공식적으로는 불필요한 긴장을 조성하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내부적으로는 프랑스 놈들에게 대영제국 해군 기상을 보여줬다며 칭송받았다고 한다.

이 공사를 지휘한 페르디낭 드 마리 레셉스는 운하 개통으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후 또 다른 대규모 운하 프로젝트인 파나마 운하 공사(문서 참고)에도 도전했다가 실패하고 몰락했다.

2.3. 영국의 운하 매입

그러나 운하 개통 불과 2년 후에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이 발발했다. 그리고 전쟁 결과, 프랑스가 참패하고 말았다. 단일개체로서 수에즈 운하회사 지분 최대보유자는 17만 주를 가진 이집트 정부였고, 이집트 정부의 가장 지지 세력은 바로 프랑스였다. 프랑스 정부가 직접적으로 보유한 지분은 없지만, 이집트의 자체적인 경제력이나 재정자립도가 낮은 상황에서 프랑스의 입김이 강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수에즈 운하를 적극적으로 지지하고 이집트의 스폰서를 자처한 프랑스의 나폴레옹 3세가 패전의 책임을 지고 퇴위했다. 뒤를 이은 프랑스 공화정부도 이집트를 포기할 생각은 없었지만 당장 패전상황을 추스르며 신생 독일 제국에 전쟁배상금을 지불하고 국방력을 재건하는 것이 중요했다. 이에 프랑스로부터의 지원이 현격히 줄어들 가능성이 생겼다.

그리고 수에즈 운하의 부족한 물동량도 문제였다. 앞서 언급했던 요금 정책 때문에 수에즈 운하의 이용량은 기대를 밑돌았다. 거기에 더해 건설 비용도 2배로 들었는데다 이런 비용 부족에 시달린 끝에 실제 운하의 완성은 2년 후인 1871년이었다. 결국 요금을 올리려 하였고, 1873년에 배의 배수량만이 아니라 화물의 톤수까지 따져서 운하의 이용 요금을 매기게 된다.[10]

이렇게 수에즈 운하는 충분한 수입이나 추가 비용 지원이 들어올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수에즈 운하 주식은 실질적으로는 공사비용을 조달하는 채권에 가까웠다. 즉, 이집트 정부는 17만주만큼의 부채를 지고 있던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런 상황에서 당장 주요 은행에 대한 채권 만기가 눈앞에 다가오자 1875년 11월, 사이드 파샤의 후계자인 이스마일 파샤는 눈앞에 닥친 빚폭탄을 피하고, 프랑스가 주도한 수에즈 운하에 사실 별로 관심 없었다는 제스처로서 전체 주식 물량의 44%인 보유 지분 17만 6,602주를 매물로 내놓았다.

이 수에즈 운하회사 지분 17만여주를 통째로 매입한 곳은 바로 영국 정부였다. 그 이유는 영국 입장에서도 수에즈 운하는 꼭 필요했기 때문이다. 당장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희망봉에 있는 케이프 식민지를 경유하지 않고 인도, 중국의 수입품을 유럽으로 운송할 수 있게 되어, 영국도 1875년에 경제 공황이 닥치는 매운 맛을 본 터였다. 또한 극동으로 확장중인 식민지를 관리하는데도 도움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11]

당시 총리였던 벤저민 디즈레일리가 수에즈 운하의 주식 구입을 주도했는데 이때의 일화가 유명하다. 제2차 중동전쟁 당시 영국 정부가 격앙된 반응을 보인 이유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디즈레일리 총리는 저녁 식사 도중[12]에 이스마일 파샤의 지분이 1억 프랑(=400만 파운드)[13]에 시장에 나왔다는 소식을 전해듣고는 바로 운하를 구입해야겠다고 결정한다. 그리고는 주식을 매입할 자금을 조달하기 위해 이전부터 친분이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14]에게 연락해서 저녁 약속을 잡았다. 엄청나게 부유하긴 했으나 신분제 국가인 영국에서 평민 유대인 가문에 불과했던 로스차일드 가의 수장 네이선 메이어 로스차일드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던 대영제국 총리의 제안을 거절할 수 없었고, 당일 약속 자리에 나와야 했다. 그 자리에서 총리로부터 400만 파운드의 자금 융통을 요청받았다. 로스차일드 측에서는 어떤 담보를 제시할 수 있는지 묻자, 디즈레일리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담보는 대영제국입니다." 총리는 남들보다 빠르게 주식을 사기 원했고, 세계최강국 영국을 담보로 내세운 것이다. 갑작스럽게 거액의 대출을 요청받아 다급해진 네이선 로스차일드가 급하게 자택으로 돌아가면서 저녁 식사는 일찍 끝났다.

디즈레일리의 행보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저녁식사를 마치고 바로 마차를 타고 버킹엄 궁으로 직행해서, 한밤 중에 빅토리아 여왕의 알현을 요청했다. 그리고 자다 일어난 여왕에게 총리는 대영제국을 담보로 4백만 파운드를 로스차일드에게 빌렸으며, 이 돈으로 방금 시장에 나온 수에즈 운하의 이스마일 파샤 지분 전체를 매입하려 한다고 보고를 올린다. 즉 여왕에게 "폐하의 제국을 방금 유대인에게 담보로 잡았습니다."라고 말한 격이었다. 다행히 여왕은 수에즈 운하를 구입하려는 계획에 전적으로 찬성하며, 총리의 월권 행위를 책망하지 않았다.

영국 정부는 자국 공관을 통해서 주식을 전부 사겠다고 전달하고, 이스마일 파샤는 팔겠다고 말한 다음날 아침에 주식이 팔린 상황에 만족한다. 이후 로스차일드 측은 가문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이스마일 파샤에게 자금을 보냈고, 영국 정부를 대신하여 받아온 주식증서를 영국 정부에 넘겼다.

그리고 아침이 되자 디즈레일리는 영국 하원으로 와서 의원들에게 "방금 수에즈 운하의 주식을 영국 정부가 매입했다."고 보고한다. 누군가가 이 과정들을 꼬투리 잡으려 했다면, 총리 목도 날아갈 수도 있었다. 그러나 하원 의원들은 모두 기립해서 열렬한 박수갈채와 함께 주식 매입안을 통과시켰다. 의회 보고는 내각이 로스차일드 가문으로부터 빌린 돈을 갚기 위해 영란은행으로부터 400만 파운드를 대출받기 위한 선결 조건이기도 했다.[15] 의회 의결이 끝나자, 디즈레일리는 빅토리아 여왕에게 "합의가 됐습니다! 이제 폐하의 것입니다!(it is settled; you have it, madam!)"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프랑스의 지분은 전술했듯이 개개인들에게 흩어져 있었는데다가 로스차일드 가문의 입김에서 자유로운 주식들도 아니었다. 그렇게 수에즈 운하는 영국의 수중으로 넘어간다. 운영에 개입하기 시작한 영국은 글래드스턴 내각 시기인 1879년부터 1882년까지 이집트에서 운하가 외국 정부에 의한 운영되는 것에 반대하는 우라비 반란이 벌어지자 군대를 보내 진압한다. 그리고는 1888년에 콘스탄티노플 협약으로 이집트와 수단을 중립국으로 만든 다음 운하 보호를 명목으로 알렉산드리아에 군대를 진주시켰다. 이후 반란과 부패를 모조리 진압하고 운하를 운영한다.

통념과는 달리 영국은 수에즈 운하를 공정하게 운영했는데, 프랑스의 요금 차별정책에 반발한 점도 컸다. 덕분에 영국 못지 않게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도 운하의 혜택을 크게 누렸다.

러일전쟁 당시 러시아 발트 함대[16]의 수에즈 운하 통행을 영국이 거부함에 따라 희망봉을 돌아서 극동으로 향하는 수개월 대여정을 해야 했고 그 과정에서 진이 빠져 쓰시마 해전에서 참패하고 말았다는 설이 유명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영국이 러시아를 견제해서 거부한 것이 아니라, 먼저 러시아 해군 발트 함대에서 차출된 제1 및 제2태평양전단 소속 전함들의 실제 흘수선이 수에즈 운하의 당시 통항제한수심보다 깊었기 때문에, 이들과 더불어 호위에 동원된 순양함 등 보조함들까지 통과를 하지 못한 것이다.( 출처) 나중에 추가 편성된 보다 작은 함선들로 구성된 제3태평양전단은 수에즈를 잘만 통과했다. 그 무렵 영일동맹의 일환으로 영국에 주문한 일본 해군의 전함 공고 역시 선체 규격이 수에즈 운하의 규격보다 커서 일본으로 향할 때는 희망봉을 통과해야 했다.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오스만 제국 아랍 방면에서 시나이 반도를 거쳐 수에즈 운하를 위협하는 공세를 1915년에 단행했지만 영국군에 의해 저지당했다. 이후 1918년부터 1924년에 걸쳐서 이집트가 독립하게 된다. 그리고 1936년에, 영국은 이집트와 협약(Anglo-Egyptian Treaty of 1936)을 맺고 운하의 운영권을 다시 획득했다.

2차 대전이 발발하고 나서는 알렉산드리아 주둔 영국 해군[17]은 추축국 선박의 수에즈 운하 통행을 제한했다. 에르빈 롬멜이 지휘하는 독일 북아프리카 군단은 이탈리아군과 함께 이집트 점령 및 수에즈 운하 차단을 시도했으나 엘 알라메인 전투에서 패배하여 진격이 막히고 말았다.

2.4. 제2차 중동전쟁 이집트로의 귀속

2차 세계대전 이후 이집트 정부는 주식을 일부 사들이고 수에즈 운하사와 협약을 체결하면서 운하 운영에 개입했지만, 최종적으로는 영국이 운하를 통제하였다. 하지만 1952년 반영 노선을 표방하는 자유장교단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국에 유화적이던 파루크 1세 왕정을 무너뜨렸고, 내부 권력투쟁 끝에 정권을 장악한 가말 압델 나세르는 1956년 전격적으로 수에즈 운하 국유화를 선언했다.[18]

이에 반발한 영국과 프랑스 이스라엘과 손을 잡고 전격적으로 수에즈 운하를 침공함으로서 제2차 중동전쟁(수에즈 전쟁)이 발발하게 된다. 영국, 프랑스는 자국이 막대한 돈을 들인 주식이 휴지조각이 된 셈이니 반발하는 건 당연했다. 이스라엘 입장에서는 반이스라엘 성향인 나세르가 힘을 얻는 것이 국가안보와 직결되는 사안이었다.

그리고, 지금은 의미가 많이 희석된 편이지만, 국유화는 냉전 시기에는 공산주의 정책으로 간주되었다. 수에즈 국유화를 선언했던 나세르는 쿠데타 이후 1세계와 2세계 양측에 양다리를 걸치며 경제적 지원을 요구했는데, 혁명 정부의 경제적 지원에 미온적인 1세계보다는 적극적으로 구애해온 소련에게 꽤 기울어져 있는 상태였다. 그런 상태에서 나세르는 중동에서의 권위를 획득하기 위해서 반이스라엘 선봉장의 이미지를 만들려했고, 이를 위해 홍해 아카바 만의 입구에 요새를 건설하고 해안포를 배치해 이스라엘의 아카바 항을 봉쇄하는 일을 저질렀는데, 나세르가 소련의 편을 들어서 수에즈 운하에 똑같은 일을 하지 말라는 법도 없었다.

결국 영국,프랑스 그리고 이스라엘은 전격적으로 이집트를 침공해 제2차 중동전쟁이 발발한다.그러자 이 사태를 계기로 아랍이 소련 편에 들 것을 우려한 미국도 압박을 놓아, 안보리를 소집해 철수를 요청하였으나 영국의 반대로 거부되었다. 미국이 안보리 철수 결의를 낸 다음에도 영국과 프랑스의 공습은 계속되었고, 미국이 제안한 철수를 요구하는 긴급특별총회는 찬성 64표, 반대 5표(영국,이스라엘,프랑스,뉴질랜드,호주)로 통과 되었고, 경제적 제재를 가하였다.

같은 시기에 영향력을 키우려고 노력하던 소련 흐루쇼프 역시 으름장을 놓았는데, 영국과 프랑스에 을 쓸 수도 있다고 대놓고 위협했다. 소련은 이미 핵개발에 성공했고, 1953년에는 전술핵(RDS-4)의 개발에도 성공했기 때문이다.[19]

당시 소련은 딱 반년쯤 전인 1956년 5월 21일에 탄도 미사일인 R-5 Pobeda(NATO 코드네임 SS-3 Shyster)의 핵미사일 버전인 R-5M을 실전 배치했다.[20] 이 미사일의 사정거리는 1200km였는데,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위성국이였던 동독[21]에 배치하면 런던까지 닿을 수 있었다. 그리고 57년도에 세계 최초의 ICBM인 R-7이 개발되었다. 사정거리는 8000km. 수에즈 사태 당시에는 흐루쇼프가 핵전력 공갈을 많이 치긴 하였는데, 미국 측에서도 내막을 완벽히 파악하기는 어려웠다.

폭격기의 경우, 장거리 항공 사령부에서 B-29를 카피한 Tu-4를 실전 배치했는데, 파생형 중 하나인 Tu-4A는 소련 최초로 '양산된' 핵폭탄인 RDS-3의 투발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Tu-4A는 양산기가 아니었고, 폭격기용 핵무기를 테스트하기 위한 실험용 개조 기체에 불과했다.[22] 이후 소련은 Tu-16A를 양산하면서 1955년 즈음에 전략핵무기 투발 능력을 얻는다. 그런데 1956년의 소련 장거리 항공 사령부는 스몰렌스크(러시아 서부, 벨라루스와의 국경 근처)와 비니차(우크라이나), 하바롭스크(블라디보스토크 북동쪽)의 세 도시에 주둔하면서 Tu-4와 Tu-16 폭격기를 운용하고 있었다. 최단거리인 스몰렌스크부터 런던까지는 2천 킬로미터나 되는 거리고, 1955년 기준 NATO의 가입국인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서독의 영공을 통과해야 했다. RDS-3와 RDS-37[23]는 폭탄창에서 중력낙하로 떨어뜨려야 하는 핵폭탄이었으므로, 투발하기 위해 영국과 프랑스 영공에 진입해야 하는 폭격기 투발 핵무기 한계상, 미국이 영공 통과를 허락하라고 강요하지 않는 이상 쏘지 못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아이젠하워도 소련의 위협을 진심으로 믿어 위축됐다는 점을 보좌관이 회고하고, 그와 국무부 차관인 허버트 후버와 비공개 대화에서 이 사태가 3차 세계대전의 발발 계기가 될 것을 진심으로 우려하였다. '소련은 어떤 무모한 모험도 감행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입니다. 그들은 히틀러가 말년에 그랬던 것처럼 두려워하고 분노했습니다. 독재체제에서 그런 마음만큼 위험한 것은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소련의 핵전력 정찰을 시작하였고, 59년도에 이르러서야 소련의 핵전력이 과장이였음을 확정하게 되었다. 즉 당시로서는 핵공갈에 대해 미국 측도 정확한 내막을 알 길이 없었다. 영프는 나토니까 방위조약에 의거하여 미국도 참전하여야 하더라도, 이스라엘은 방위가 보장되지 않아서 소련이 전쟁에 참전했다면 이스라엘과 했을 것이다. 3차대전의 위협은 미국이 동맹국이였던 영프에 압력을 넣는 데 강한 영향을 끼쳤다.

가말 압델 나세르는 서구의 침략을 물리친 영웅으로 급부상해서 아랍권 민중들이 열광적으로 지지하였고, 이집트는 사실상 중동 맹주가 되었다. 거꾸로 영국에게는 '이제 대영제국은 없다'는 걸 실감하게 한 굴욕이었다. 그래서 당시 살아있던 윈스턴 처칠은 이 결과에 격분하고 원통해했다고 한다.

1960년대 제3차 중동전쟁에서 이스라엘이 전격적인 기습으로 시나이 반도를 점령하면서 한때 수에즈 운하가 이스라엘과 이집트의 경계선이 되어 운하가 폐쇄[24]되기도 했다. 그러나 1973년 제4차 중동전쟁을 겪었고, 결국 1970년대 말 이스라엘과 이집트 사이의 국교 정상화로 시나이 반도 전체가 다시 이집트에 귀속되면서, 수에즈 운하는 비로소 이집트로 돌아갈 수 있었다.

이후 여러 차례 확장하였는데, 2015년에 마지막으로 확장공사를 하였다. 현재까지도 수에즈 운하의 통행은 이집트 정부에서 관리하고 있다.

2.5. 현재

2008년 이후, 수에즈 운하의 관문이나 다름없는 아덴 만 일대에 지나가는 상선을 노리는 소말리아 해적들이 들끓고 있지만 운하를 통과하는 배들이 줄어들 기미는 없다. 운하를 이용하지 않고 아프리카 희망봉을 돌아가는 루트는 워낙 거리와 시간 면에서 손해가 막심하기 때문이다. 다만, 해적들이 더욱 기승을 부려 보험료 할증이나 보안업체 고용비용 같은 부가비용이 급증한다면 수에즈 운하 통행을 포기하는 선주들이 나타날 가능성은 늘 있다. 그러나 정작 최근에는 소말리아 해적의 활동이 위축된 반면에 서사하라 일대의 해적질이 급증하여 희망봉 우회가 반드시 안전한 루트가 아니게 되었다.

제3차 중동전쟁 직후부터 1970년대 중반까지 수에즈 운하가 폐쇄된 일이 있었는데 이때 세계의 해운업계와 무역업계가 부담한 추가비용은 당시 미국 달러 기준으로 매년 수십억 달러에 달했다. 현재의 달러 가치로 하면 매년 수백억 달러를 추가로 지출해야 한다는 이야기이다. 그래도 2009년 한 해 동안 여기를 통과한 배만 해도 22,183척에 달했고 통과료로 받은 돈만 해도 54억 1,000만 달러에 이른다. 척당 평균 통과비는 대략 25만 달러이다. 이는 이집트의 2009년 GDP 4,531억 달러에서 1.3%에 이른다. 과거에나 현재나 여전히 이집트의 돈줄인 셈이다.

지구 온난화가 진행되어 북극해 얼음이 계속 줄어들자, 수에즈 운하나 말라카 해협을 거치지 않고 부산항에서 베링 해협 북극해를 통과해 유럽까지 가는 북극항로를 타진하는 목소리도 나온다. 만약 얼음이 충분히 녹아 바닷길이 열린다면 적어도 중국, 대만 이북에서는 남쪽을 통과하는 것보다 북극항로가 거리상 더 유리하다.

2016년에 들어서면서 운하이용을 포기하는 배들이 늘고 있다. 유가하락[25]과 운하 이용료 상승[26]으로 아프리카 희망봉 쪽으로 돌아가는 것. 그리고 수에즈 운하 직원들의 횡포가 심각한데, 기념품을 강매하거나 세금을 부과한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그동안 수에즈 운하를 이용하던 배들이 이를 견딜 수가 없어 운하이용을 포기하는 것이다. 머스크 그룹에 의하면 13.5노트 속도로 운항하면 열하루가 더 걸린다고 한다. 아이러니하게도 기껏 뚫은 운하 대신에 바스쿠 다 가마 시대의 항로로 복귀하게 된 것이다.

2021년 3월 23일 오전 7시(현지시각) 파나마 선적 에버그린 그룹 소속 2만 TEU급 초대형 컨테이너선 에버 기븐(EVER GIVEN)호가 운하 내에서 좌초되어 수에즈 운하가 차단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문서 참고.

2023년 1월 9일 화물선이 좌초 됐다고 9일(현지시간) 운하 서비스 업체가 밝혔다. 운하 교통이 영향을 받았는지 여부는 즉각 밝혀 지지 않았다.< MV글로리(MV Glory)호>가 이스마일리아주(州) 수에즈 운하 지역의 콴타라시 근처에서 좌초되었다.

이번에 문제가 된 <MV글로리호>는 그리스 선박업체인 프리메라가 소유한 길이 225m, 폭 32m 규모 화물선이다. 이 선박은 6만6000톤의 옥수수를 우크라이나에서 중국으로 나르기 위해 시속 8.5노트(약 16km)의 속도로 수에즈 운하를 이동하던 중 이날 오전 5시께 좌초됐다. 좌초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지만 당시 이집트 북부 지역은 악천후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2.6. 확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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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8월 6일(현지시각) 제2 수에즈 운하의 개통식이 열렸다. 이를 통해 수에즈 운하의 하루 통행량이 2배로 증가한다고 한다. 이집트 정부는 물동량 증가와 그에 따른 부수적인 효과로 제2의 부흥을 꿈꾸고 있다고 한다. 관련기사 다만 실제 사용은 2016년부터 했다. 2015년에는 준공식을 했지만 시범운행을 하고 2016년 9월 1일부터 제2 수에즈 운하에 외국 선박의 통항이 허가되었다.

3.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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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수에즈맥스 규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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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파나마 운하와 수에즈 운하 모두 확장공사를 통해 니미츠급 항공모함이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넓은 폭을 갖추었다. 하지만 파나마 운하는 2016년 확장공사 완료 전까지 운하 폭이 33m밖에 안 되어 통행 가능한 선박의 규격 제한이 있었던 반면 수에즈 운하는 그 전부터 갑문이 없고 폭이 상당히 넓어 규격이 다소 느슨하였다. 수에즈 운하를 통과할 수 있는 선박의 규격은 수에즈맥스(Suezmax)라고 하는데 길이는 400m, 수면 위 높이 68 m, 단면적 1,006m2( 흘수선 20.1 m-선체폭 50m 또는 흘수선 12.1m-선체폭 77.5m)로 넉넉한 수준이다.

이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선박은 물론 항공모함도 통행 가능하다. 그러나 모든 배가 수에즈맥스 이하인 것은 아니라 화물 적재량이 30만 톤을 넘어가는 초대형 유조선이나 흘수선이 깊은 대형 광석운반선은 통행이 불가능하다. 화물을 적재할 수 있는 최대 중량톤수는 약 16만 DWT 정도에 해당한다.

또 수에즈 운하 양안을 잇는 수에즈 운하교가 일본 카지마건설이 건설, 2001년에 개통되어 운하를 가로지르기 때문에 통과 높이 제한이 새로 설정되었다. 이 다리는 수에즈 운하를 건너는 유일한 다리로, 나머지 도로는 수에즈 운하 양안에서 끊겨 있고 끊긴 구간은 차를 실을 수 있는 페리선이 운하를 횡단한다. 수에즈 근처에는 하저 터널로 건너는 구간도 있다.

5. 레셉스 이주

이 운하가 개통되기 전에는 지중해 홍해 바다 생태계가 만날 가능성이 적었지만, 개통 후에는 홍해의 생태계가 운하를 따라 조금씩 북쪽으로 이동하고, 결국은 지중해까지 이르러서 운하 근처의 지중해 생태계를 파괴하고 있다고 한다. 수에즈 운하는 파나마 운하와는 다르게 수문이 없는데다, 경유하는 그레이트비터 호가 염호이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자유롭게 생물종이 이주할 수 있었다. 홍해 쪽이 수위와 염도가 높고, 생물종이 다양한 인도양과 연결되어 있기 때문에 주로 홍해에서 지중해로 이주가 일어나고 있다.

6. 사건·사고

6.1. 개통 축하 공연

원래는 운하 개통 축하 공연으로 아이다의 초연이 예정되어 있었지만, 작가 주세페 베르디는 작품을 제때 완성하지 못했다. 그래서 대신 리골레토가 상연되었다. 이후 아이다는 카이로에서 초연을 열었다.

6.2. 수에즈 운하 에버 기븐호 좌초 사고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수에즈 운하 에버 기븐호 좌초 사고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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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에즈 운하 개통 이후 최초로 배가 좌초되어 운하를 틀어 막아버린 사건이다. 이로 인해 청해부대의 작전지역이 변경되는 과정에서 청해부대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 집단 감염 사건을 터뜨리기도 했다.

7. 등장 매체



[1] 그림상 북쪽에 보이는 호수들은 현대 들어 상당 부분 간척했다. [2] 수에즈 지협을 최단거리로 관통하는 경로에 가깝고 근처에 다른 자연지형이 마땅치 않아 운하를 기준으로 대륙을 나누는 일이 많다. 지협의 가장 잘록한 부분은 운하보다 약간 동쪽이기는 하다. [3] 번역에 따라 대소태호수라고도 한다. [4] 단, 첨부된 사진은 현대의 해안선 자료로, 당시의 델타의 크기 및 해안선이 현재와 상당히 차이가 있으므로 그 부분은 고려해야 한다. [5] 8만 주를 제안했다. [6] 2만 주를 매입해달라고 요청했다. [7]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경우 영국이 운하를 손에 넣고 나서 극동 무역에 승차해 어느정도 이익을 봤다. [8] 그리스, 이탈리아 등 지중해 국가가 없는 것을 보고 이집트와 프랑스는 이 나라들에게는 애초에 조금 저렴한 요금조차 제공할 의지도 없었다고 보기도 하는데, 당시 그리스는 아직 독립한 지 얼마 안 된 소국이었고 이탈리아는 아직 통일도 안 된 상태였다. 그보다는 운하 경영에 참여할 여유조차 없을 것이라 판단했다고 보는 것이 옳다. [9] 다만 정작 운하가 뚫리자 가장 많이 운하를 이용한 것은 영국 배였다. 개설 후 1년 동안 운하를 통과한 배 중에 2/3가 영국 선박이었으며, 수에즈 운하를 영국이 구입할 당시에는 80%의 물동량이 영국 선박이었다고 한다. 대영제국 시절의 어마어마한 국제 교역량을 짐작할 수 있는 부분이다. [10] 이 규정은 오늘날에도 이어지고 있다. [11] 군사적으로는 제1차 아편전쟁, 세포이 항쟁, 제2차 아편전쟁을 연이어 치르면서 유사시 인도와 중국에 최대한 빨리 군사력을 투입할 수단이 필요해졌다. [12] 일찍 먹고 신문을 보다 알았다고 한다. [13] 구매력 가치설로 환산하면, 당시 4백만 파운드는 2022년 기준 2.5억 파운드(3억 달러)쯤 된다. 당시 영국 GDP는 현재 가치로 1천억 달러로 세계 1위였다. 4천억원이면 얼마 안되는 것처럼 느껴질 수 있으나, 당대의 영국 정부 총 지출액이 영국 GDP의 7% 정도였다. 즉 수에즈 운하 주식의 이집트 보유분이 그 해 영국 정부 예산의 5%쯤 되는 가격으로 나온 셈이다. [14] 프랑스의 수에즈 지분을 판 로스차일드와는 다른 분가다. 로스차일드 가문의 종가는 본래 빈에 있었고, 영국-프랑스-독일-이탈리아 등에 분가를 두어 서로 연계했다. 수에즈 운하를 둘러싼 세력 중 완전히 다른 곳에서 같은 성이 튀어나오니 음모론이 생길 법도 했다 [15] 영국 정부는 영란은행이 보유한 금으로 태환할 수 있는 400만 파운드 정도는 쉽게 빌릴 수 있었지만, 국고이기 때문에 절차가 오래 걸려서 로스차일드에게 제국을 담보로 잡게 된 것이다. [16] 제2태평양 함대라고도 한다. 제1태평양함대는 러시아의 조차지였던 뤼순에 주둔한 극동함대를 말한다. [17] 영국 해군의 지중해의 최대 거점이었으며, 2차 세계대전 당시의 영국 해군 지중해 함대는 알렉산드리아와 지브롤터에 주둔했다. [18] 나세르도 집권 초기에는 팔레스타인 난민 문제를 이스라엘과 협상하면서 경제개발 자금을 지원받기 위해서 미국에 접근하는 등 온건노선을 걸었지만, 미국 이스라엘이 시큰둥하게 나오자 급선회해서 수에즈운하 국유화를 선언하고 친소노선을 굳히게 된다. 특히 이집트 정부가 사활을 걸고 추진하던 아스완 댐 건설비용을 조달하기 위해서 막대한 수에즈 운하 통행료를 노렸다는 분석도 있다. [19] 1953년 8월 23일에 RDS-4의 핵실험이 성공한다. 이후 RDS-4가 R-5M의 탄두로 장착된다. [20] 미사일의 핵실험은 1956년 2월 5일이었다. [21] Vogelsang, Zehdenick과 Fürstenberg/Havel의 두 곳에 배치되었다. [22] RDS-3의 테스트는 지상 폭발이 아닌 공중 투발이었고, 이 기체가 투하했다. [23] 1955년에 Tu-16A로 핵실험에 성공한 수소폭탄이다. [24] 운하 양편에서 이집트군과 이스라엘군이 대치하면서 국지적 충돌도 있었기에 운하통행이 불가능했다. 이때 재수 나쁘게 운하에 갇혀버린 선박 15척은 1967년부터 1975년까지 장장 8년 동안 꼼짝도 못하고 갇혀서 분쟁이 종식되기만을 기다려야 했다. 관련 영상 일명 황색 선대(Yellow Fleet)라 부르는 사건이였는데 사막에서 불어오는 모래바람이 쌓이며 선체가 노랗게 변했기 때문. 1975년 상황이 종식되기까지 수에즈 운하 중앙의 그레이트 비터 호에서 갇혀 있었다. 사태가 길어지자 이집트 당국은 각 선박별 우편번호를 지정해주는 배려(?)를 제공하기도 했었다. [25] 2016년 3월 기준 싱가포르 현물시장가 400달러이던 벙커유가가 150달러까지 하락 [26] 머스크 그룹에 의하면 척당 무려 평균 35만 달러로 한화로 4억 정도다. [27] 중남미 동해안(각국 본거지)→동남아시아(캘리컷)→중남미 서해안(리우데자네이루)→파나마 운하(산티아고. 쿠바 남부 항구) [28] 수에즈, 바스라 모두 오스만 동맹항인 경우에만 가능 [29] 아라비아 해는 상시 역풍, 홍해는 계절 역풍이고 카이로에서 리스본까지 대부분 구간이 상시 역풍이다. [30] 에스파니아, 포르투갈, 네덜란드, 잉글랜드. [31] 문명 4 Earth1000AD의 경우 수에즈 운하를 놓는 타일이 카이로와 대각선 2타일 거리이기 때문에 도시를 세울 수 없다. 대신 요새를 건설하면 운하 역할이 가능하다. [32] 수에즈 운하와는 상관 없는 이야기이지만 이 두 모드는 형식상 이집트 왕국과 영국의 공동 통치령이었던 수단에 대해서도 다르게 구현했는데, 토탈워는 걍 영국 땅으로 나오고, 로드투는 이집트땅이나 비핵심 영토로 취급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