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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1-09 13:32:44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관련 틀 파일:인도 국기.svg 파일:파키스탄 국기.svg 파일:방글라데시 국기.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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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파키스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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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냉전 시기 영토분쟁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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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글라데시 여성 의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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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카로 향하는 인도군 T-55 전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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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기를 든 채 수용소로 이송되는 파키스탄군 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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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 중인 파키스탄군 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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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군에 부역한 벵골인 시체를 묻는 방글라데시인들
날짜
1971년 3월 26일 ~ 12월 16일
장소
동파키스탄(현재의 방글라데시)
벵골만
서파키스탄(현재의 파키스탄)
아라비아 해
인도 북부 일부
교전국 [[틀:깃발|]][[틀:깃발|]][[방글라데시|]]
(12.3~)
[[틀:깃발|]][[틀:깃발|]][[소련|]]
지휘관 [[틀:깃발|]][[틀:깃발|]][[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
]]
[[틀:깃발|]][[틀:깃발|]][[지아우르 라흐만|]]
[[틀:깃발|]][[틀:깃발|]][[틀:깃발|]] 타주딘 아흐마드(초대 총리)
[[틀:깃발|]][[틀:깃발|]][[틀:깃발|]] 무하마드 아타울 가니 오스마니(총사령관)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카지 모하마드 샤피울라( 육군참모총장)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칼리드 모샤라프(벵골 4연대장)
[[틀:깃발|]][[틀:깃발|]][[인디라 간디|]] ( 총리)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샘 마넥샤우(육군참모총장)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자그지트 싱 오로라(동부사령관)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야콥 파즈 라파엘 야콥(동부사령부 참모장)
[[틀:깃발|]][[틀:깃발|]][[야히아 칸|]] ( 대통령)
[[틀:깃발|]][[틀:깃발|]][[틀:깃발|]] 아미르 압둘라 칸 니아치(총사령관)
[[틀:깃발|]][[틀:깃발|]][[틀:깃발|]] 라오 팔만 알리(군사고문)
[[틀:깃발|]][[틀:깃발|]][[틀:깃발|]] 모하마드 샤리프(해군사령관)
[[틀:깃발|]][[틀:깃발|]][[틀:깃발|]] 패트릭 데스먼드 캘러헌(공군사령관)
[[틀:깃발|]][[틀:깃발|]][[틀:깃발|]] 티카 칸(2군단장)[1][2]
병력 [[틀:깃발|]][[틀:깃발|]][[방글라데시군|]] 175,000명
[[틀:깃발|]][[틀:깃발|]][[인도군|]] 500,000명
[[틀:깃발|]][[틀:깃발|]][[파키스탄군|]] 365,000명
피해 [[틀:깃발|]][[틀:깃발|]][[방글라데시군|]]
30,000여 명 전사
[[틀:깃발|]][[틀:깃발|]][[인도군|]]
1,426명 전사
3,611명 부상
민간인 30~300만 명 사망
육군 7,000여 명 전사
해군 1,381명 전사
공군 833명 전사
부상 25,000명
포로 93,000명
결과
방글라데시-인도 연합군의 승리
영향
방글라데시의 독립
사진 모음
1. 개요2. 배경3. 발단4. 진행5. 편제
5.1. 방글라데시-인도 연합군5.2. 파키스탄군
6. 절정7.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의 확전
7.1. 해상 전역7.2. 항공 전역7.3. 지상전 전역
8. 결말9. 영향10. 독립유공자 대우11. 참고 자료12. 둘러보기

1. 개요

영어 : Bangladesh Liberation War, Bangladesh War of independence
벵골어 : মুক্তিযুদ্ধ (Muktijuddho)
힌디어 : बांग्लादेश मुक्ति युद्ध, बांग्लादेश का स्वतंत्रता संग्राम
جنگ آزادی بنگلہ دیش : 우르두어

1971년 방글라데시(당시 동파키스탄)의 독립을 놓고, 서파키스탄 중심의 파키스탄군 대 방글라데시의 묵티바히니 독립군과 이들을 지원하는 인도군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이다. 이 전쟁의 결과로 방글라데시가 독립국이 되었다.

2. 배경

1611년 영국 동인도 회사가 마술리파트남에 무역 거점을 세우면서 인도 아대륙에 발을 들인 영국 7년 전쟁의 승리로 인도 아대륙[3]의 주도권을 잡게 되었고 세포이 항쟁 직후인 1858년 식민지인 인도 제국을 세우면서 영국은 인도의 진정한 주인이 되었다. 이후 인도의 식민 종주국이었던 영국에서 윈스턴 처칠이 물러나고, 인도를 비롯한 영국의 해외 식민지와 해외 영토들의 자결권을 주장하던 클레멘트 애틀리가 총리가 되면서 인도의 독립이 가시화된다.

그러나 독립을 목전에 두고 영국의 식민지 지배 아래 눌려 있었던 이슬람에 의해 같이 탄압받던 처지의 힌두교- 시크교 비무슬림 세력과[4] 무슬림 세력 간의 종교 갈등이 수면 위로 떠올랐고, 무슬림 세력이 인도 내 무슬림 국가 수립을 요구하자 비무슬림 세력이 이를 억누르는 과정에서 급기야 인도 아대륙 전역에서 비무슬림과 무슬림 간의 충돌과 보복 학살이 일어나 수십만 명이 살해되는 등 인도는 종교 집단 간의 극심한 갈등 상태로 빠져들게 되었다.

이러한 인도 내부의 종교간 갈등과 유혈 분쟁이 더 이상 제어할 수 없게 된 영국은 결국 인도 아대륙 내 무슬림 국가와 비무슬림 국가의 별개 독립을 인정한다. 1947년 8월 14일에 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인더스강 유역과 동벵골 지역이 파키스탄 자치령으로, 그 다음날인 8월 15일에는 비무슬림이 다수를 차지하는 나머지 지역이 인도 자치령으로 각각 독립된다. . 이런 종교 갈등 속에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는 통일 인도와 종교간의 화합을 외치며 인도 대륙이 파키스탄과 인도로 갈라지는 것을 막으려 했지만 분열을 막는 데 실패했고, 간디는 1948년 나투람 고드세(Nathuram Godse)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그리고 별개로 독립한 파키스탄과 인도는 독립 직후부터 지금까지 카슈미르의 지배권을 두고 싸우며 철천지 원수 관계가 된다.

한편 종교적인 문제로 인도와 갈라서게 된 파키스탄은 인더스 강 일대의 서파키스탄과 갠지스 강 삼각주 일대의 동파키스탄 지역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시간이 지나며 두 지역 간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사실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은 종교 및 종파만 같은 이슬람 수니파를 믿었지 문화, 인종, 언어 등 모든 부분에서 공유하는 건 하나도 없었다(오히려 서로의 힌두교도 이웃들과의 공통점이 더 많았을 것이다). 거기에 지도만 봐도 알 수 있을 정도로 인도가 중간에 껴서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을 멀찍이 나누고 있었다. 두 국가 간 가장 가까운 거리는 약 1500㎞, 수도인 이슬라마바드와 다카 간의 거리는 약 2000㎞에 달했다.

파키스탄 독립을 이끈 모하마드 진나 루이 마운트배튼에게 제시받은 인도-파키스탄 분할 계획에 너무 큰 충격을 받아서 분리 독립을 포기하고 그냥 자와할랄 네루가 수상이 못 되게만 하는 계획을 고려하기도 하였고[5][6], 인도제국 총참모부 측에 파키스탄의 지정학적인 구도가 생존이 가능한 것인지를 계속 문의하기도 하였다. 이에 대한 인도제국군 총참모부 측은 캘커타가 파키스탄에 포함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할 것이며, 캘커타가 파키스탄 영토에 포함되도 소련의 침공으로부터 방어가 불가능하다고 답변했다. 하지만 정작 파키스탄 분리독립이 초읽기로 다가오자 진나는 문화적 정체성이 신앙에 우선한다는 이율배반적 논리를 내세워 (서)파키스탄의 영토를 최대한 확대하려 했으나, 마운트배튼은 이를 일언지하에 거절했고, 최소한 펀자브 주와 벵골 주 전체를 파키스탄에 포함시키려 했던 진나의 계획은 좌절되었다. 마운트배튼은 파키스탄이 당시와 같은 기형적인 형태로는 25년 이상 가지 못할 것이라고 예측하였고, 실제로 파키스탄 건국 24년 만에 동벵골이 파키스탄으로부터 독립을 선언하면서 그의 예측은 현실이 되었다.

일단 벵골 무슬림들은 파키스탄에 합류하는 것에 긍정적이었다. 우선 무굴 제국 붕괴 이후 그전까지 무슬림에게 탄압받던 힌두교도들이 영국 통치 하에서 신식 교육을 받고 변호사, 기술자, 의사가 되어 무슬림보다 부유해진 상황을 견딜 수가 없었으며, 벵골의 힌두교인 지주들의 착취로부터 벗어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독립 파키스탄 수뇌부는 진나를 비롯한 서파키스탄 출신들이 대거 장악해서 동파키스탄의 영향력이 약할 수 밖에 없었다. 파키스탄 중앙 정부는 철저히 서파키스탄 위주로 운영되었고, 심지어 동파키스탄에서조차 고위 공직은 서파키스탄 출신들이 차지하고 중간관리직으로는 인도에서 동파키스탄으로 피난온 무하지르를 우대하는 등, 토착 벵골인들은 거의 배제당하다시피 했다. 동파키스탄은 서파키스탄으로부터 공공연하게 머저리들, 검은 유인원 소굴이란 식으로 비하당했으며, , 소고기, 생선 등 모든 식량자원들을 서파키스탄에 수탈당했다. 그리고 동파키스탄에 배정되는 예산은 서파키스탄에 배정된 예산의 40%선에 불과하는 등 공공연한 차별을 받았다. 문제는 인구 자체는 동파키스탄이 더 많았다는 것이다. 독립전쟁 직전 파키스탄의 인구가 서파키스탄은 6000만, 동파키스탄은 6800만이었다. [7]

결국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서파키스탄 주도의 정부에 대한 불만은 점점 쌓여만 갔다.

3. 발단

이렇게 갈등이 심화되던 중인 1948년 3월 22일에 파키스탄의 국부가 된 무함마드 알리 진나 총독[8]이 동파키스탄을 방문했는데, 그곳 중심지 다카에서 모든 점에서 우월한 아리아인만이 파키스탄의 진정한 민족이라며 동파키스탄의 언어인 벵골어를 버리고 서파키스탄의 공용어인 우르두어만 쓰자고 연설해 벵골인들의 반발을 불러왔다.[9]

사실 이 발언은 단순히 벵골인들에게만 굽히라는 것은 아니었다. 서파키스탄에서조차 우르두어 화자는 독립 시점에서 7%에 불과했으며 그나마도 대부분이 토박이가 아니라 인도 땅에서 넘어온 실향민들인 무하지르들이었다. 파키스탄 2위 언어는 28.4%가 사용하던 펀자브어였고, 7.1%는 파슈토어, 5.8%는 신드어를 썼다. 즉 문화적 이질감으로 인한 분열을 우려한 진나[10]로서는 무굴 제국 시절부터 공용어로 쓰이던 우르두어로 대동단결해서 이질감을 줄여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이다. 연설의 전체 문맥은 통합을 강조하며 "한 나라가 되었으니 한 개의 언어를 쓰자"였다는 말도 있다. 기존 언어가 아니라 우르두어를 새로 공용어로 배워야 하는 것은 서파키스탄도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어찌보면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이 각각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로 갈라진 건, 우르두어를 국어로 삼는 정책이 성공한 쪽과 실패한 쪽으로 갈라진 거라고 볼 수도 있다. [11]

하지만 독립 시점에서 파키스탄 국민의 55%가 모국어로 벵골어를 사용하는 상황에서, 인도 제국 시절부터 벵골어를 애호하던 벵골인들에게 생짜 외국어인 우르두어를 강요하는 것은 어려웠다. 1948년 2월 25일, 벵골 지도자 디렌드라 나트 두타[12]는 벵골어를 공용어로 지정해줄 것을 파키스탄 국회에 요청하였으나, 파키스탄 총리 리아카트 알리를 비롯한 서파키스탄 지도자들은 무슬림의 언어는 우르두어라는 이유로 이를 단호히 거부했다. 3월 22일, 진나의 연설이 사태에 불을 지폈고 이 연설이 진나가 파키스탄의 총독으로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동파키스탄을 방문해서 한 연설이었다. 그리고 이 연설을 한 진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동년 9월 11일 지병으로 사망하면서 벵골인들의 분노만 키운 채 세상을 떠났다.

아무튼 진나 총독의 우르두어 단일화 연설을 계기로 서파키스탄이 주도하는 파키스탄 정부는 동파키스탄에 우르두어를 강요하고, 동시에 데바나가리 문자로 표기하던 벵골어를 우르두어와 똑같이 아랍 문자로 바꿀 것을 강요하는 정책을 실시했다. 그렇게 지독한 수준의 벵골어 박해가 이루어지자 동파키스탄 사람들은 수천 년 동안 사용해온 벵골어를 지키자며 벵골어 국어 운동(ভাষা আন্দোলন)을 벌였고, 1952년 2월 21일 다카 대학교의 대학생들을 중심으로 파키스탄 정부의 언어 정책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까지 벌어져 결국에는 시위대와 파키스탄군 사이에 유혈 사태가 벌어졌다. 독립 이후 방글라데시에서는 2월 21일을 국경일인 언어 운동 기념일(ভাষা আন্দোলন দিবস)로 기리고 있으며 유네스코에서도 벵골인들의 모국어를 지키기 위한 벵골어 국어 운동을 기념해 세계 모어의 날(International Mother Language Day)로 지정했다.

1951년 10월 16일, 진나의 후계자 알리 칸 총리가 암살된 후 벵골인 총리 카와자 나지무딘(Khwaja Nazimuddin)이 총리에 선출되었으나 그는 1953년 4월, 서파키스탄인 총독 굴람 무함마드(Ghulam Muhammad)에게 일방적으로 해임당했고 벵골인들은 또 큰 충격을 받았다.

벵골어 국어 운동은 1954년 헌법 개정으로 벵골어가 우르두어와 함께 국어로 지정되면서 일단락되었지만 1955년, 동벵골의 행정명칭이 동파키스탄으로 변경되면서 벵골인들은 발칵 뒤집혔다. 1961년에는 종교를 불문하고 벵골인들의 자랑으로 여겨졌던 라빈드라나트 타고르 탄생 100주년 행사를 서파키스탄에서 타고르는 반파키스탄적이라고 매도하면서 벵골은 또 난리가 났다. 1965년 인도-파키스탄 전쟁 이후 파키스탄 정부는 인도 프로파간다를 차단한다는 구실로 타고르의 작품을 금지처분하는 한편, 벵골어로 된 모든 도서의 수입을 금지하였다. 이 조치는 나중에 철회되었으나 1967년, 파키스탄 정부는 타고르 작품을 다시 금지하였고, 이에 분격한 19명의 동파키스탄 지식인들이 집단 항의한 것을 시작으로 시민저항이 벌어졌다.

이러한 벵골 문화 탄압이 이어진 것은, 벵골 문화에 대한 서파키스탄 측의 무슨 신념적인 증오나 적대감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좀 두들겨패고 깔아뭉개면 벵골 문화 따윈 없어지고 벵골인들이 고분고분해지지 않겠냐는 무척이나 한심하고 편의적인 망상에 기반한 것이었다. 미국은 서파키스탄 측이 벵골 문화에 심각할 정도로 무신경하고 무감각하다고 평가했다. 상황은 아유브 칸이 이끄는 군사독재가 수립되면서 더욱 악화되었는데, 파키스탄 군부의 주축인 펀자브인들은 벵골인들을 열등한 존재이며, 벵골의 가치는 오로지 해외 투자 유치 및 무역에만 있다고 보았다. 당시 방글라데시는 심각한 경제적 착취를 당했는데, 1950~1955년 사이에 파키스탄 정부가 지출한 개발비의 20%만 동파키스탄에 쓰였으며, 1965년에는 조금 늘었으나 그래도 35%에 불과했다. 그리고 서파키스탄은 생산품의 40~50%를 동파키스탄에 강매하면서 사실상 식민지 시장처럼 써먹었고, 동파키스탄의 무역 흑자는 모조리 중앙정부가 압수해서 서파키스탄의 무역 적자를 충당하는데 썼다. 1950년대까지 동파키스탄의 1인당 수입은 서파키스탄의 2배에 달했으나, 1969년에 이르러서 서파키스탄의 1인당 수입이 동파키스탄보다 61% 높을 정도로 동파키스탄은 철저히 착취당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태를 계기로 서파키스탄의 벵골인 차별에 분노한 동파키스탄의 벵골인들은 1949년 아와미 연맹(বাংলাদেশ আওয়ামী লীগ)이라는 정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아와미 연맹당의 당수로 1948년 벵골어 국어 운동을 주도하던 셰이크 무지부르 라흐만이 선출되었다. 아와미 연맹은 결성 초기에는 동파키스탄의 경제 개발과 파키스탄 중앙 정부의 동파키스탄 정책 개선을 요구하는 수준이었지만 1958년 아이유브 칸이 쿠데타를 통해 헌정을 뒤엎고 독재정권을 수립하면서 서파키스탄인이 권력을 독점해나가는 바람에 차별이 오히려 심화되고 서파키스탄과 동파키스탄 간의 격차도 더더욱 커지자 1964년에 들어서면서 동파키스탄의 완전 자치를 외치기 시작했고 1960년대 후반 아유브 칸 군사독재 정권에 저항하는 반정부 운동에까지 참여하면서 1969년 아유브 칸 대통령의 퇴진을 이끌어내는 성과를 거두었다.

그런데 1970년 11월 12일 동파키스탄 지역에 초대형 사이클론 볼라 호가 강타하면서 상황이 악화되었다. 최대 50만 명이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각계에서 구호 작업이 진행되었으나, 정작 파키스탄 중앙정부는 구호에 굉장히 무성의한 태도를 보였다. 사이클론 상륙 이전부터 경계령을 내렸던 인도와 달리 파키스탄에서는 당일에야 경계를 내려 피해가 커졌으며, 구호 작업에서도 경비행기, 수송기 정도만 동원할 뿐, 정작 필요한 헬리콥터는 보내지도 않았다. 게다가 그 핑계랍시고 댄 게 인도 정부가 영공 통과를 허가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는데, 인도 정부가 아니라고 반박하자 헬리콥터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고 보내지 않았다고 말을 바꾸었다. 자연히 동파키스탄 주민들의 불만은 쌓여갈 수밖에 없었다.

한편 물러난 아이유브 칸의 뒤를 이어 파키스탄의 대통령이 된 야히아 칸은 권력을 민간 정부로 이양할 뜻을 밝혔고 이듬해인 1970년 치러진 민정 이양 총선에서 동파키스탄의 완전한 자치 확대를 주장했던 아와미 연맹이 동파키스탄 지역 선거구를 거의 석권했다. 지역구 300석을 인구 비례에 따라 동파키스탄에 162석, 서파키스탄에 138석을 배정해 놓았는데 딱 2곳을 제외한 동파키스탄의 160개 선거구에서 아와미 연맹이 승리했고 여성 국회의원을 위해 추가로 둔 13석 또한 동파키스탄으로 배정한 7석을 전부 아와미 연맹이 차지했다. 그 결과 총 의석 313석 가운데 167석, 단독으로 과반 의석을 획득했고 이대로라면 단독집권이 가능했던 상황이었다. 이에 제2당으로 88석을 차지한 파키스탄 인민당 당수 줄피카르 알리 부토는 아와미 연맹과의 협상에 나섰는데 그는 파키스탄 인민당이 '정치적 핵심'인 펀자브와 신드에서 이겼으며 다수당인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주장함으로 아와미 연맹의 자존심을 건드렸다. 1971년 1월 5일에 부토는 자신이 아와미 연맹과 연립정권을 수립할 의사가 있음을 밝히면서 협상에 나서려 했으나, 동파키스탄에 대한 자치권 부여에 대해서 반대했다. 부토는 서파키스탄의 다수당인 파키스탄 인민당과 동파키스탄의 다수당인 아와미 연맹이 권력을 나눠가질 것을 제안했으나, 무지부르 라흐만은 제1당인 아와미 연맹이 권력을 독점해야 한다고 이를 거절했다. 그러자 부토와 야히야 칸은 아와미 연맹의 조각을 늦추기 위해서 3월 3일로 예정된 국회 개원을 3월 25일로 일방적으로 연기했다. 이에 동파키스탄 전체에서 항의와 총파업이 이어지는 등 정국은 극단적으로 치달았다.

4. 진행

상황이 극단적으로 돌아가는 가운데 1971년 3월 7일 라흐만 당수는 동파키스탄의 최대 도시 다카에서 200만 명이 넘는 군중 앞에서 연설을 하며 벵골인들에게 대대적인 시민 불복종 운동에 나설 것을 촉구하였다. # 라흐만의 연설에 호응해 벵골들의 시민 불복종 운동이 벌어지면서 동파키스탄 전체가 마비가 되었고 이 시점부터 동파키스탄은 사실상 서파키스탄의 통제를 벗어났다. 벵골인의 불복종운동과 파키스탄군의 유혈진압으로 사태가 내전으로 흘러갈 조짐이 보이자 대응해 부토와 야히야 칸이 이끄는 서파키스탄 정부는 라흐만과 계속해서 협상을 이어감과 동시에 유사시를 대비해 군대를 동파키스탄으로 계속해서 증원하였다. 3월 24일에는 라흐만, 부토, 칸 사이에 3자 회담이 개최되었으나, 이 회담 역시 결렬되었다. 이에 대해서 일각에서는 라흐만이 비타협적으로 나왔기 때문이라고 비판하지만 야히야 칸은 애초에 협상할 생각이 없었고 그저 군대를 동원하기 위해서 시간을 번 것에 불과하단 주장도 있다. 야히야 칸은 라흐만이 반란을 준비하고 있어서 부득이하게 선빵을 때렸다고 주장했지만 사실 라흐만은 그냥 하루빨리 독립을 선언하자는 측근들의 주장을 제어하면서 협상에 임하고 있었다.

3월 25일에는 야히야 칸이 다카를 비밀리에 떠났고, 그는 다카를 떠나면서 동파키스탄 총독[13] 야쿠브 칸 장군을 티카 칸 중장으로 교체하는 한편 사태를 정리할 것을 지시하면서 "나는 벵골 땅을 원하지 벵골인을 원하지 않는다."라는 살벌한 명령을 내렸다. 티카 칸 중장은 다시 파르만 소장에게 군사진압을 지시했다. 파르만 소장은 녹색땅 방글라데시를 피로 물들이겠다고 호언장담했다. 3월 25일 밤, '서치라이트 작전'이 개시되어 파키스탄군이 방송국, 군부대, 다카 대학교, 라자바흐에 있는 방글라데시 경찰청 등 주요 시설을 총공격했고 수많은 벵골인들이 파키스탄군에 의해 학살당했다.

파키스탄군의 학살은 마지막 대화의 여지마저 끊어버렸고 결국 서치라이트 작전 개시 다음날인 3월 26일, 오전 0시 30분, 라흐만은 아침 치타공 방송국을 통해서 정식으로 방글라데시의 독립을 선언함으로써 동·서파키스탄의 대립은 결국 내전이 되고 말았다. 독립 선언 이후 불과 1시간 후인 오전 1시 30분, 파키스탄군이 라흐만을 체포하여 3일 후 서파키스탄으로 압송했다. 야히야 칸 대통령은 아와미 연맹의 해산을 선포하고 라흐만을 반역자로 선포했다. 이 서치라이트 작전은 원래 동파키스탄에서 발생하는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블리츠 작전'을 확대한 것이었는데, 블리츠 작전이 무력 사용을 최소화하는 온건한 것인 반면, 서치라이트 작전은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닥치는대로 죽이고 강간하고 파괴하는 대살육극 형태로 진행되었다. 이 공격은 대단히 갑작스러운 것으로 미국도 당황하였으며, 특히 야히야 칸이 직접 와서 라흐만과 협상한다는 말에 안심하고 일찍 잠자리에 들었던 방글라데시 시민들에겐 청천벽력과도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라흐만 당수의 방글라데시 독립 선언과 그의 체포는 서파키스탄의 지배와 차별에 쌓이고 쌓였던 동파키스탄인들의 감정에 불을 질렀고, 4월 10일, 방글라데시 임시 혁명정부가 수립되어 라흐만을 궐석 상태에서 대통령으로 추대했다. 정부 구성은 다음과 같다. 이에 동파키스탄의 파키스탄군 부대인 EBR(East Bengal Rifles)과 동파키스탄 경찰들은 서파키스탄 통제에서 집단으로 이탈하여 묵티 파우즈를 조직하였는데 이는 묵티바히니(মুক্তি বাহিনী, 자유군)라는 독립군으로 개편된다. 묵티바히니를 중심으로 방글라데시인들은 대대적인 반란을 일으켜 동파키스탄에 주둔하고 있던 서파키스탄 관리들과 군인, 경찰 등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해서 학살하기 시작했다. 한편 사태가 극한으로 치닫게 되자 놀란 중앙 파키스탄 정부는 즉시 군대를 동파키스탄에 파견해 진압에 나섰고, 사태는 묵티바히니 독립군과 서파키스탄 주도의 파키스탄군 간 전쟁으로 번졌다. 무엇보다 서파키스탄 측은 라흐만 체포에는 성공했지만 동파키스탄 독립세력 지도부 체포는 대부분 실패했고 결과적으로 벵골 독립세력 지도부 분쇄라는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5. 편제

5.1. 방글라데시-인도 연합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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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파키스탄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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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절정

제노사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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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세기 이후에 벌어진 사건만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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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 목록 <colcolor=#000,#ddd> 세부 사항
헤레로족과 나마족 학살
,1904 ~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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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기 오스만 인종 청소 아시리아인 대학살
,1914 ~ 19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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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스마일 엔베르
그리스인 대학살
,1914 ~ 19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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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슬리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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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첸인 및 인구시인 추방
,1944 ~ 1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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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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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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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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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초기 전세는 주요 도시 상당수를 장악한 묵티바히니가 우세했다. 그러나 화력과 장비에서 열세인 데다 파키스탄군이 강력한 진압 작전을 밀고 나가면서 결국 묵티바히니는 동파키스탄의 모든 거점을 잃고 인도로 후퇴하여 국경 지역에서 게릴라전으로 파키스탄군에게 저항하기 시작했다. 파키스탄군은 전차 기관총으로 무장하고 동파키스탄인들에게 총탄을 퍼부었으며 각종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이때 동파키스탄 전역의 대학교에서는 수백 명의 학생들이 살해당하고 파키스탄 군인들이 농촌으로 진입하여 촌락을 쑥대밭으로 만들고 수많은 농민들을 죽였다.

특히 독립 방글라데시 학생운동협의회(Independent Bangladesh Students Movement Council)가 결성된 다카 대학교에서는 파키스탄군이 여학생 기숙사에 방화한 후 빠져나오는 학생들과 교직원을 사격해 200여 명이 사망했으며, 1971년 12월 14일에는 또 다시 지식인을 대상으로 한 학살이 벌어졌다.

파키스탄은 초반에 국제사회로부터 지지를 얻었다. 비록 동벵골 탄압에 대해서는 큰 비판을 받았으나, 기본적으로 동벵골 독립에 전세계적으로 대부분 부정적으로 반응했다는 이점도 있었고, 무엇보다 미국에서 고민 끝에 파키스탄을 제어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벵골의 현지 미국 외교관들은 파키스탄군의 살육에 경악을 금치 못하며 본국에 강력한 개입을 요청했지만 당시 대통령 닉슨과 국무장관 키신저는 이미 게임이 끝났다고 보고 불필요한 개입을 하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파키스탄 측은 이러한 국제적 지지를 스스로 무너트렸다. 파키스탄군의 살육행각으로 인해 동파키스탄인 100만 명이 학살당하고 600~1,000만 명의 벵골인 난민들이 인도로 도망치면서 인도의 심기를 건드리고 만 것이었다. 파키스탄과 사이가 나빴고, 자기들끼리 내전을 치르는 동안 국력도 약해질 것을 기대했지만, 인도 접경 지역에서 교전이 벌어지고 있으니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 사람 많다는 인도 입장에서도 수백만 명의 난민은 엄청난 부담이었다. 당시 인도 국방 연구소는 600만에 달하는 동파키스탄 출신 피난민을 먹여 살리는 것보다 차라리 단기간에 파키스탄을 공격하여 종전시키는 비용이 싸게 먹힐 것이라는 예측을 내놨다. 게다가 이 동파키스탄에서 온 피난민들은 대부분 힌두교도들이라 다시 동파키스탄으로 쫓아냈다간 학살당할 것이 뻔한 상황이었기에 섣불리 쫓아낼 수도 없었다. 실제로도 방글라데시 독립전쟁 당시 물론 무슬림들도 엄청나게 학살당했지만 학살의 주 타깃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는 힌두교도들이었다. 당시 서파키스탄은 동파키스탄에 거주하던 힌두교도들이 동파키스탄의 무슬림들을 선동해 독립을 획책했다고 여겨 대대적으로 힌두교도들을 학살했고, 결국 수많은 힌두교도들은 고향을 버리고 인도 땅으로 피난을 갔다.

한편 이러한 묵티바히니의 게릴라전에 당황한 파키스탄군은 묵티바히니를 토벌하고자 인도 국경에 있는 묵티바히니 기지에 대대적 폭격을 감행하였다. 그러나 파키스탄군의 인도 국경 폭격은 오히려 분노한 인도의 직접 개입을 초래하게 된다. 이전까지는 앙숙 파키스탄을 골탕먹이기 위해 '공식적으로는' 중립을 지키고 묵티바히니에 무기 및 보급 지원, 인도 영토 내 게릴라 기지 설치를 묵인하는 정도였지만 국경지대가 폭격당하자 자국에 대한 무력 사용으로 간주한 인도는 입장을 급선회한다. 묵티바히니 역시 폭격으로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해도 기죽지 않고 치열하게 저항했다.

7.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의 확전



인디라 간디 인도 총리는 묵티바히니와 방글라데시의 독립 운동 지원을 천명하면서 파키스탄과의 전쟁을 선포했고 전쟁은 인도군-묵티바히니 연합군 미트라 바히니(Mitra Bahini, মিত্রবাহিনী)와 파키스탄군 간의 국제적인 전쟁으로 발전하였다. 이때부터 종전까지 벌어진 전투는 '제3차 인도-파키스탄 전쟁'으로 본다. #

1971년 12월 3일 인도는 마침내 군대를 투입하여 벵골인들의 저항을 지원하였다.

7.1. 해상 전역


12월 4/5일 새벽, 인도 해군은 성공적인 기습 작전을 수행했는데 오사급 고속정들로 카라치를 급습해 파키스탄 해군 구축함 하일바와 소해함 무하피즈를 격침시키고 구축함 샤 자한을 대파시키는데 성공했다. 그 뒤 인도의 오사급은 남은 P-15 테르밋들을 항구를 향해 발사하였고 유조선 1척을 격침시키고 유류저장고를 격파하는데 성공하여 파키스탄의 전쟁수행 능력 전반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하는데 성공한다.

그 뒤에도 인도 해군의 오사급은 12월 8/9일에 추가적인 기습공격을 수행했고 파키스탄의 예비 연료창고까지 격파하고 상선 4척을 격침시켜 파키스탄의 물류망을 마비시키는 과업을 달성한다. 이때 파키스탄 공군이 대응하여 공격을 수행했으나 오히려 아군의 줄피카르 호위함을 오폭하는 바람에 장교 여러명이 사망하는 참사로 이어졌다.


분노한 파키스탄 해군은 프랑스제 다프네급 잠수함 한고르를 보내 인도 해군의 14형 호위함 쿠크리를 격침시켜 승조원 194명이 사망했다. 이는 인도 해군 최대의 인명 손실이었다.

한편 항공모함 비크란트가 이끄는 항모전단이 전개되어 호커 시호크 함재기들이 동파키스탄 해안의 군사거점들을 폭격하였다. 이로 인해 동파키스탄의 항구와 비행장을 비롯한 전략거점들이 모두 파괴되어 동파키스탄 주둔 파키스탄군에게 큰 패닉을 안겨주었다. 파키스탄 해군은 텐치급 잠수함 가지를 보내어 대응했지만 명확하지 않은 이유로 유폭이 되어 허무하게 침몰하고 말았다.

결국 파키스탄 해군은 인도 해군에게 치명상을 안겨주는 것도 실패한 채 해군 전력의 절반을 상실하면서 처참한 패배를 당해야만 했다. 이때의 성공적인 항모전단 사용법을 터득한 인도는 이후에도 꾸준하게 항공모함세력을 유지하면서 해군을 보강하게된다.

7.2. 항공 전역

먼저 선제공격을 가한 것은 파키스탄 공군이었다. 12월 3일 금요일 17시 30분 경, 파키스탄 공군은 칭기즈 칸 작전을 통해 국경 지대의 주요 인도 공군기지들을 선제공격 했다. 이는 6일 전쟁에서 이스라엘군이 선보였던 전술을 모방한 것이었다. 그러나 성공적이었던 이스라엘 공군과 달리 파키스탄 공군은 인도 공군에게 큰 피해를 입히지 못했다. 파키스탄 공군은 F-86 B-57을 동원했지만 인도 공군이 입은 피해는 활주로의 손상 정도였고 인도 공군은 큰 손실을 입지 않은 채 활주로를 복구하며 복수의 반격을 가했다.

12월 4일, 인도 공군의 MiG-21 전투기들은 다카에서의 공중전에서 F-86 2대를 격추하고 공습을 통해 다카 비행장의 기반시설들을 타격하는데 성공했다. 인도 공군의 호커 헌터 Su-7도 동파키스탄의 주요 군사적 거점과 CAS에 동원되었고 이로 인해 호커 헌터 6대와 Su-7 1대를 잃는다.

외국 민간인이 공중회랑을 통해 안전하게 출국할 수 있도록 해야한다는 UN의 압력에 의해 하루 동안 양측 공군은 휴전을 했지만 12월 6일에 공중전은 다시 격화된다. 인도 공군 MiG-21들은 파키스탄 공군 테즈가온 공군기지를 활주로 파괴폭탄으로 무력화시켰고 후속한 호커 헌터들이 네이팜탄으로 테즈가온 기지를 타격해 큰 피해를 발생시켰다. 이후에도 인도 공군은 파키스탄 공군기지를 지속적으로 맹폭했고 파키스탄 공군은 동파키스탄 전역에서 공군기를 띄워 대응하기가 어려워졌다.

공중전 전역에서 인도 공군은 17대의 항공기를 손실하고 동파키스탄 공군은 3대의 항공기를 손실했다. 즉, 동파키스탄 공군이 선전했고 초기에는 파키스탄군이 대응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숫적 열세를 동파키스탄 공군이 극복할 수 없었고 끝내 제공권은 인도 공군의 차지가 되었다.

7.3. 지상전 전역

12월 8-14일에 걸친 투르툭 전투 끝에 파키스탄령 길기트 발티스탄의 동남쪽 국경 마을이던 투르툭을 점령하였다. 투르툭은 이슬람계 주민들이 살고 있었고, 시아첸 빙하의 남쪽 외곽에 해당되기에 파키스탄에게는 뼈아픈 손실이었다. 그렇게 동부와 서부에서 인도와 약 2주일간 전쟁을 벌인 끝에, 1971년 12월 16일 파키스탄군 지도부가 항복 문서에 서명하면서 결국 방글라데시 독립전쟁은 막을 내렸다. 다만 인도와 파키스탄 양국의 갈등은 1972년 심라 협정 후에야 봉인되었다.

8. 결말

파일:external/www.awesomeindia.in/pakistani-army-surrender-to-bangladesh-16-dec-1971-1.jpg
▲ 1971년 12월 16일 다카에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파키스탄군 사령관 아미르 압둘라 칸 니아치 중장. 왼쪽부터 시계 방향으로 인도 육군 동부사령관 자그지트 싱 오로라 중장, 인도 해군 동부사령관 니라칸타 크리슈난 중장, 인도 공군 총사령관 하리 찬드 드완 중장, 제4군단장 사가트 싱 중장, 인도 육군 동부사령부 참모장 야콥 파즈 라파엘 야콥[14] 소장. 양군 사령관은 모두 샌드허스트 출신 동문으로 절친한 친구였다고 한다.

인도군이 개입하자마자 전쟁이 단기간에 끝난 이유는 보통 아래와 같이 정리된다. 따라서 인도군이 개입하자마자 서파키스탄에서 멀리 떨어진 파키스탄군은 현지 주민들도 파키스탄군의 잔혹한 진압(대학살)과 전쟁범죄에 분노한 상황이라서 전혀 협조하지 않는 상황이었으므로 쉽사리 붕괴되었으며, 서파키스탄 주둔군은 몰려드는 인도군을 결사적으로 막아야 하는 상황이 전개되고 만 것이다. 물론 서파키스탄의 군대도 무력하지는 않아서 몇몇 전투에서 인도군을 성공적으로 저지할 수 있었지만, 연합군이 워낙 압도적이라서 대세에 영향을 주긴 어려웠기 때문에 전쟁의 향방을 뒤집지는 못했다.

게다가 파키스탄이 벌인 학살과 전쟁범죄가 알려져 국제적으로도 방글라데시 독립에 대한 지지가 많았다. 파키스탄과 혈맹이자 인도와 국경분쟁을 벌이는 중국은 방글라데시 독립에 대해 반대 의견을 보이긴 했지만, 1972년 리처드 닉슨 마오쩌둥의 회담 성립에 집중하여 파키스탄을 지원하지 않았고 적극적인 반대 운동을 보이지 않았다. 게다가 파키스탄과 거리가 멀고, 무력으로 끼어들려고 해도 인도를 통과해야 하는 상황이니 아크사이친을 손쉽게 얻었던 것과 달리 전쟁 대비를 하던 인도와 더 큰 전쟁을 벌여야 할 터였고 1971년이면 문화대혁명이 한창일 때이기도 했다.

한편 독립하자마자 방글라데시 전역에선 친파키스탄 민병대 및 협조자를 찾아내 공개처형을 하면서 분풀이를 하게 된다. 파키스탄군에 협조한 사람들은 대개 인도 동북부 비하르 출신 무슬림들로 인도와 파키스탄이 분리되는 과정에서 동파키스탄으로 이주한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서파키스탄의 벵골인들과 특별한 연고는 없었지만, 힌디어 및 우르두어와는 방언 수준으로 가까운 비하르어를 모어로 구사한다는 이유로 동파키스탄 정부에서 우대를 받던 사람들이었다. 우연히 거리에서 이런 고문 및 처형을 목격한 프랑스 사진 작가 호르스트 파스, 미셀 로랑이 찍은 다카의 잔혹한 광경 (Savage Scene in Dacca)은 1972년 퓰리처상 사진부문 올해의 상을 받게 된다. 이 사진을 몰래 찍어서 공개하자 방글라데시 측은 불쾌한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후 프랑스 사진작가인 미셀 로랑은 1975년 베트남 전쟁을 취재하다가 살해당하고 만다. 같이 사진을 찍은 독일 사진작가 호르스트 파스는 2012년 79살로 천수를 누렸다.

동파키스탄 시절 및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을 거치며 방글라데시 내 비하르인들은 현재도 사회적 인식이 좋지 못하고 심한 차별을 당하는 편이다. # 그리고 로힝야 서파키스탄에 협조적이었는데 이때문에 방글라데시 세속주의, 민족주의 세력은 로힝야를 탐탁지 않게 생각한다.

9. 영향

한편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이 파키스탄군의 패배로 종결되자 파키스탄의 영토는 지금의 서파키스탄의 영토만이 남게 되었고 파키스탄 사회는 혼란에 휩싸였다. 1~2차 인도 파키스탄 전쟁의 경우 카슈미르의 무슬림들을 해방시킨다는 명분으로 다른 이슬람 국가들의 지지라도 일부 받았지만, 방글라데시 독립 전쟁에서는 무슬림들이 같은 무슬림 민간인들을 학살했다는 이유로 다른 이슬람계 국가들 사이에서도 비난을 받았다. 그리고 1971년 12월 20일 야히아 칸 대통령은 전쟁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대통령직에서 물러났고, 그 결과 줄피카르 알리 부토가 대통령이 되어 안정을 되찾는 듯 싶었으나 1977년 무함마드 지아울하크 장군 주도의 군사 쿠데타가 일어나고 1979년 줄피카르 부토가 처형당하면서 파키스탄 정국은 다시 혼란 상태에 빠진다. 더욱이 1979년 소련이 이웃한 아프가니스탄 침공하고 이어서 아프가니스탄이 내전 지옥의 수렁에 빠지면서 탈레반 등 아프가니스탄 내 급진 이슬람 근본주의 세력들이 파키스탄으로까지 영향력을 뻗었다. 지아울하크 장군은 이를 막기는커녕 오히려 이들을 후원한 사실이 들통나면서 미국과 국제 사회의 제재로 경제가 박살나 파키스탄은 아예 막장 국가 중 하나로 전락하였다.

이 전쟁은 인도가 항공모함을 지속적으로 보유하는데도 명분을 제공해 주었다. 당시 인도는 비크란트를 가지고 있었다. 문제는 이 배가 원래 마제스틱급 항공모함인 허큘리스함이었다는 것으로 무려 1945년에 진수된 항모였다는 사실이다. 1971년이면 간단하게 계산해도 26년이 지난 구형인 데다가 탑재한 항공기도 18대의 씨 호크, 4대의 알리제 대잠초계기로 시대에 뒤쳐져도 한참 뒤쳐진 항공모함이었다. 막상 전쟁이 발발하자 동파키스탄의 콕스 바자르와 치타공을 공격하기 위해 투입했지만, 처음에는 무지 불안했다고 한다. 항공기들이 대공포에 우수수 떨어지는 게 아닌가 하고... 하지만 파키스탄군은 동파키스탄 후방에 적의 항공기가 뜨는 것을 "전혀 예상도 못해서" 대공미사일은 커녕 대공포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다고 한다. 결국 동파키스탄 후방은 비크란트의 함재기에 완벽하게 유린되어 48시간만에 해당 지역의 해군 함선과 항공기를 대부분 파괴하는 전과를 올린다. 전쟁 기간 동안 격추당한 항공기 0기에 동파키스탄의 제해권과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해버렸으니 그야말로 대박. 이전까지는 쓸데없이 돈만 엄청 먹고 써먹을 수 있는거냐고 회의적이었던 인도군은 이 전쟁을 계기로 더 확실한 항공모함 전력을 갖추고자 노력한다. 이 노력은 후일 비크라마디티야함 비크란트함을 정식 취역하게 한다.

한편, 독립전쟁으로 피해를 입은 방글라데시인들을 돕기 위해 비틀즈의 전 멤버이자 독실한 힌두교 신자로, 그의 음악 대다수가 인도 전통 음악에서 큰 영향을 받았을 정도로 인도권 문화를 좋아했던 조지 해리슨이 1971년 뉴욕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방글라데시를 위한 콘서트"를 진행했다. 여기에는 조지 해리슨의 스승 겸 친구였던 인도인 음악가 라비 샹카르가 공동으로 콘서트를 주최하였으며, 또 조지 해리슨과 친분이 있던 포크송 음악가 밥 딜런, 기타리스트 에릭 클랩튼, 드러머 키스 문 링고 스타 등이 참여했다. 이 공연은 음악사 최초의 자선공연으로 기록되고 있으며 이후 라이브 에이드 라이브 8을 비롯한 각종 자선 공연에 영향을 준, 음악사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으로 여겨지고 있다. 1973년 이 공연에서 연주된 곡들을 녹음한 라이브 앨범은 1973년 그래미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미국은 당시 인도는 친소국가, 파키스탄은 친미국가였기 때문에 인도의 개입을 소련의 인도양 진출 음모의 일환이라고 해석하고 즉각 견제 차원에서 인도양 베트남 전쟁에 참전중이던 미 해군 제7함대를 파견했다. 기함은 USS 엔터프라이즈. 하지만 소련이 당시에도 지역강국인 인도에게 자기네 인도양 전략을 위해서 참전하라 마라 명령을 내릴 수 있을리 만무했고, 브레즈네프를 비롯한 소련 지도부는 미국 측의 의혹 제기에 이해는 하겠지만 황당해 했다고 한다. 인도는 인도대로 미국의 개입에 무척이나 불쾌해했고, 어차피 베트남에서 빌빌거리고 있던 미국이 인도와 전쟁을 불사할리도 없다고 생각하여 출동하던 말던 관심을 접어버렸다.

그렇다고 소련이 관망만 하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소련은 벵골인들의 독립에 큰 비중을 두어 전쟁 내내 인도군과 묵티바히니 민병대를 지원하였다. 물론, 소련의 의도는 인도양 진출같은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자신들이 후원하는 인도와 벵골인들에게 힘을 실어줌으로서 라이벌인 중국과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 한 것이었다. 소련은 만약 미국이나 중국의 압력이 들어올 경우 확실히 지원해주겠다는 것을 보장해주었고, 이러한 보장은 1971년 8월 인도와 소련간에 맺어진 조약에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해 소련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했던 소련 태평양함대 제10전투단을 파견했다. 여기에는 핵탄두를 탑재한 탄도미사일을 탑재한 수상함과 원자력 잠수함이 포함되었다. 이 소련 태평양함대의 신속한 참전과 벵골만 선점으로 인해, 12월 16일 인도 해상을 봉쇄하려던 미 해군 제7함대와 영국 HMS 이글 해상전투단은 대놓고 부상해서 핵탄두 미사일의 해치를 열어재낀 채 기다리고 있던 소련 잠수함의 무력시위에 물러나고, 결국 3일뒤 독립전쟁은 방글라데시의 승리로 끝났다. 만약 거기서 미국이 강행돌파하려 했다면 3차대전이었다. 당시 상황 영상 첨부.

한편으로 파키스탄은 친중 국가이기도 해서 전쟁 당시 중국이 파키스탄에 많은 외교적 지원을 했다. 중국은 중인전쟁 이래로 인도와 사이가 매우 좋지 않았으며 1979년에야 재수교했을 정도로 외교 관계가 끊어져서 방글라데시가 인도의 지원을 얻어 독립했다는 사실, 그리고 자신들과 친한 파키스탄이 패배했다는 사실에 상당히 불편해했다. 이 때문에 중국은 1971년 10월, 대만을 축출하고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 자리를 차지한 이후 미국이 제출한 인도 비난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지면서 동조했으며, 보복성으로 방글라데시의 유엔 가입을 거부하였다. 중국은 상당한 시일이 지난 1974년 9월에야 방글라데시의 유엔 가입에 동의했고 1976년 1월에 방글라데시와 수교했다.

이 시기 중국과 관계 정상화를 하면서 사이가 다시 돈독해진 북한 역시 방글라데시 승인을 거부하였다. 반면 미국은 소련이 인도양으로 진출하는 것을 경계했지 방글라데시가 독립하건 말건 상관이 없었기 때문에 1972년에 바로 방글라데시를 승인하였고, 한국 역시 금방 뒤따라 방글라데시를 승인했다. 한국이 방글라데시를 승인하고 수교하려는 것을 포착한 북한은 재빨리 방글라데시와 수교하고 1973년 12월, 방글라데시는 남북한과 동시 수교하였다.

10. 독립유공자 대우

독립전쟁 이후 방글라데시 정부는 참전용사들에게 연금을 지급하며 대우하고 있지만, 도중에 친파키스탄 매국노들이 득세한 적도 있는 데다가 이들의 지원을 위해 만든 신탁 직원들의 부패(...)로 인해 아직도 많은 참전용사들이 가난을 면치 못하고 있는 상황이며, 연금 지급을 시작한 것도 독립 25년 후인 1996년 셰이크 하시나 총리가 집권하면서부터였다. 셰이크 하시나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연금과 함께 공직 채용, 의료 혜택 등 갖가지 혜택을 주며 고국을 지킨 독립운동가들에게 걸맞은 예우를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독립운동가들이 받는 연금은 방글라데시의 경제사정에 비해서는 풍족한 편이지만, 2022년 기준 정부의 연금 지원을 받는 독립운동가 가정 수는 많아야 12,674개[15]에 불과한 만큼 아직도 갈 길은 멀다.

방글라데시 정부는 1980년부터 방글라데시 독립운동가들의 명단을 수집하려 하고 있으며, 2021년까지 총 177,200명[16]이 명단에 올랐다. 조사 초에는 진짜 유공자들이 제대로 잡히지 않은 반면 가짜 유공자들이 명단에 오르는 난맥을 겪기도 했으며,[17] 철저한 검증을 통해 많은 가짜 유공자들이 제거되었다. 덤으로 방글라데시 정부에서는 전시의 친파키스탄 부역자 명단도 작성하는 중이라고 한다.

[참고자료]

2024년 정부는 독립유공자 자녀들에게 공무원 자리의 30%를 할당해 준다는 계획을 발표했는데, 취업난에 시달리던 청년층들이 이에 항의하며 2024년 방글라데시 시위를 열었다. 결국 이 시위는 총리 사임 시위로까지 번져가며 무려 300명 이상의 인명이 목숨을 잃고 셰이크 하시나 총리도 사임 후 여동생과 함께 인도로 도피한 뒤에야 끝을 맺었다. 이렇게 과도한[19] 독립유공자 대우 때문에 일어난 반정부 시위로 공식 수치로만 300명 이상이 사망하고 하시나도 사임하자 독립유공자들이 기존보다 더 천대받을 위기에 처해 있다.[20]

11.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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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계엄사령관이기도 했으며, 방글라데시에서 벌인 잔혹한 학살 때문에 발루치스탄의 도살자라는 별명이 있다. 방글라데시 초토화작전으로 알려진 서치라이트 작전의 기획자이기도 하다. 최종 계급은 대장. [2] 추가적인 정보에 대해서는 프레시안 기사를 참조하기 바람. [3] 아대륙이라 하지 않고 그냥 대륙이라 할 경우 그 면적이 일반적으로 호주 이상일 경우다. 따라서 아시아, 유럽, 아프리카, 남북 아메리카와 호주를 대륙이라 하지만 개별 국가인 중국과 미국도 그 면적이 호주보다 크므로 종종 대륙이라 부른다. 인도나 아라비아 반도는 대륙은 아니지만 대륙에 준하는 면적이므로 아대륙이라 칭한다. [4] 지금은 힌두교가 인도 내의 우세 종교가 되어 시크교를 핍박하면서 두 종교의 관계가 매우 험악하고 시크교 분리주의 테러도 심심찮게 일어나지만, 당시에는 자한기르 시절 시크교 교주인 아르준이 힌두교 탄압 중단을 요청했다가 순교했을 정도로 상호 간의 연대의식을 가졌다. 이 사건을 들어 시크교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교주가 다른 종교를 위해 희생한 종교라고 주장한다. [5] 진나는 공개석상에서 강경하게 파키스탄의 독립을 주장했지만, 사적인 자리에서는 그냥 영국놈들을 못살게 굴어서 네루에게 권력을 주지 못하게 하면 그만이라는 식의 발언을 측근들에게 자주 했다고 한다. [6] 후반부에서 이 시기를 심도 있게 다룬 영화 < 간디>에서는, 아대륙 양 끝으로 떨어진 동서 파키스탄의 분리독립도 불사하는 진나에게 간디가 그러지 말고 그대가 총리가 되어 무슬림 내각을 꾸리라고 애원하는 (감동적이지만 역사적으로는 부정확한) 장면이 나온다. 진나는 거의 마음을 돌릴 뻔 하지만 힌두교도 진영의 반발로 결국 없던 일이 되는데, 당시 워낙 힌두-무슬림 갈등이 극심했던 탓에 새로 한 나라에서 살아가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을 것이다. [7] 21세기에는 파키스탄 인구가 방글라데시보다 훨씬 많다. 이유는 방글라데시는 독립 이후 인프라가 파키스탄에 의해 대부분 박살나서 인구 증가가 상대적으로 더뎠던 반면에 파키스탄은 상대적으로 살 만한데다 이슬람 극단주의 정권의 우민화 정책으로 인구증가가 줄지 않았기 때문이다. [8] 총독이라는 직함을 쓴 이유는, 이 때 파키스탄이 명목상 영국 자치령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 국왕을 왕으로 모실 뿐이지 내정에서의 자치권뿐만 아니라 군사권과 외교권도 독자적으로 가진 사실상 독립 국가였다. [9] 벵골인인 동파키스탄인들도 인종적으로 아리아인이다. 벵골인들이 당시 파키스탄의 다른 민족들보다 피부색이 짙다는 점에서 비롯된 차별의식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현대 인류학자들 상당수가 현대인들의 인종주의가 사실 인종 간의 이질성보다 피부색에 맞춰져있음을 밝히고 있다. [10] 심지어 진나 본인도 우르두어를 외국어로 배운 사람이다. 카라치 태생인 그는 이주민인 부모님으로부터 구자라트어를 모어로 익혔다. [11] 오늘날 파키스탄은 우르두어가 국어인 것과 별개로 펀자브어, 신드어, 파슈토어의 사용을 금지하지는 않는다. [12] 이 사람은 이름에서 짐작할 수 있듯 힌두교도임에도 동파키스탄에 잔류했는데, 결국 후일 서파키스탄군에 의해 살해된다. [13] 파키스탄 자치령 시절부터 동파키스탄에는 지역을 대표하는 총독(governor)이 있었고 이 자리는 파키스탄 중앙정부에서 임명하는 자리였다. 민정 시기에 이 자리는 실권이 없었고 실권은 동파키스탄 의회에서 선출된 총리가 보유하였으나, 1958년부터 파키스탄에서 군정이 시행되면서 총리직이 없어짐에 따라 총독이 실권까지 가졌고 파키스탄군 장성이 임명되기도 했다. [14] 이름이 묘하게 히브리적인데 바그다드 유대인 혈통이라 그렇다. [15] 방글라데시의 전체 독립운동가 수의 10%도 되지 않는 수준이다. [16] 상술한 표에 잡힌 방글라데시군 수보다도 많다. [17] 참고로 방글라데시의 가짜 독립유공자 중에는 장관들도 있었다고 한다. [참고자료] #1 #2 #3 #4 [19] 빈말이 아니라 독립유공자 대우가 열악해 독립유공자 대우 확대에 좌우 모두가 찬성하는 한국에서도 도를 넘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20] 일단 하시나 총리의 아버지 무지부르 라흐만의 동상과 기념관까지 파괴된 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