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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정 시각 : 2024-12-11 15:34:56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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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 초대 대통령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Слободан Милошевић | Slobodan Milošević
파일:Слободан_Милошевић.jpg
출생 1941년 8월 20일
세르비아 위원정부 포자레바츠[1]
사망 2006년 3월 11일 (향년 64세)
네덜란드 자위트홀란트주 헤이그 유엔 구금시설
재임기간 제7대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위원회 위원장
1989년 5월 8일 ~ 1991년 1월 11일
초대 세르비아 대통령
1991년 1월 11일 ~ 1997년 7월 23일
제3대 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 대통령
1997년 7월 23일 ~ 2000년 10월 7일
서명
파일: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서명.sv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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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33d76><colcolor=#fff> 부모 아버지 스베토자르 밀로셰비치
어머니 스타니슬라바 밀로셰비치[2]
형제자매 보리슬라프 마르코비치
배우자 미르야나 마르코비치 (1971년 결혼)
자녀 2명
학력 베오그라드 대학교 ( 법학 / 학사)
종교 무종교 ( 무신론)
신체 180cm
최종 당적 }}}}}}}}}

1. 개요2. 생애
2.1. 어린 시절2.2. 공산당 경력2.3. 유고슬라비아 전쟁2.4. 체포 및 재판과 사망
3. 선거 이력4. 평가5. 여담6. 대중매체에서

[clearfix]

1. 개요

세르비아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재자.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주요 책임자 중 하나이다. 냉전 종식 이후 최악의 전쟁범죄자이자 학살자를 꼽을 때 다르푸르 학살 오마르 알 바시르, 라이베리아 내전 찰스 테일러, 북한 김정일- 김정은 부자와 더불어 항상 언급되는 인물로, 30년 가까이 지난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 전쟁범죄가 발생하자 다시금 밀로셰비치의 이름이 나올 정도로 전세계에서 학살의 대명사로 여겨진다.

집권 기간 동안 세르비아 민족주의와 소패권주의를 내세워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코소보 등 발칸반도 곳곳에서 전쟁을 벌이고 인종청소를 자행, 20만 명을 죽음으로 내몰고 300만 명을 난민 신세로 만들었으며 한때 제3세계의 주도국이던 유고슬라비아 경제를 파탄내고 7개 소국[3]으로 쪼개지는 데에 크게 일조했다. 물론 유고슬라비아 경제는 1980년대에 이미 외채 문제로 인해 어려운 상태였지만 이를 감안해도 유고슬라비아의 산업 기반을 절단내서 아주 나락으로 떨어뜨려 밑바닥부터 다시 시작하게 만든 건 밀로셰비치임에 틀림없다. 그가 개입한 범죄로는 유고슬라비아 전쟁과 보스니아 전쟁 당시의 스레브레니차 학살 사건, 그리고 코소보 전쟁 당시의 수많은 전쟁범죄 등이 있다.

2. 생애

2.1. 어린 시절

1941년 8월 20일, 세르비아 군정청 포자레바츠에서 태어났다. 아버지인 스베토자르 밀로셰비치는 정교회 사제였고 어머니인 스타니슬라바 밀로셰비치는 공산주의자 교사였다. 그는 아버지가 1962년에, 어머니가 1972년에 각각 자살하는 비극적인 가정 환경에서 자라났다. 그리고 밀로셰비치의 삼촌은 유고슬라비아군의 육군 장군이었는데, 그 역시 권총으로 자살했다고 한다. 학자들은 밀로셰비치의 악마적이고 잔인한 성격이 이런 불우한 가정 환경에서 탄생한 것이라고 본다.

2.2. 공산당 경력

밀로세비치는 법학을 공부하기 위해 베오그라드 대학교에 입학했다. 그곳에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이데올로기 위원회(SKJ)의 장으로 활동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 그는 훗날 그의 정치 경력에 중대한 영향을 미치는 인물 이반 스탐볼리치를 만난다. 스탐볼리치는 SKJ에서 밀로세비치의 지위를 상승시켜주는 등 정치적으로 후원했다. 밀로셰비치는 1964년에 베오그라드 대학교에서 법학 학위를 취득했다. 학위 취득 후 지방에 있는 공산당 산하 기관인 경제연구소에서 여러 직책을 맡아 일하며 공산주의자로 입지를 다져 나갔다.

파일:48322926_303.jpg
부인인 미라냐 마르코비치 밀로셰비치와 함께. 오른쪽이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1996년 찍은 사진이다.

밀로셰비치는 고등학교 때부터 교제했던 미랴냐 마르코비치(Mirjanja Marković, 1942~2019)와 결혼하게 되었다. 그녀는 세르비아 공산당 출신의 강경 노선파로, 베오그라드 대학교 사회학 박사 학위를 보유하고 있었다. 그녀는 밀로세비치가 권력을 얻기까지 그의 정치 성향에 큰 영향을 끼친다. 이들 부부 사이에는 두 자녀가 있는데, 딸인 마리야(Marija Milošević, 1965~)와 아들인 마르코[4]가 있다. 1960년 학교를 떠나면서 밀로셰비치는 베오그라드의 경제부 고문 역할을 담당했고, 1968년에 이르러 밀로세비치는 테크노가스 회사에 입사하게 된다. 테크노가스는 정부가 운영하는 가스 회사로 그의 대학 친구인 이반 스탐볼리치가 있는 곳이기도 했다.

테크노가스 입사 초기에 밀로셰비치는 상당히 권위적이고 까다로운 성격이었는데, 발칸반도에서 흔히 하듯이 그를 애칭인 보단으로 부르면 대답하기조차 거부했다. 애칭으로 그를 부르는 것이 그의 권위를 저해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그나마 조금 격식 있는 애칭인 슬로보라고 부르면 그제서야 대답했다. 또한 일선 노동자들을 상대하면서 노동자들처럼 입거나 넥타이를 느슨하고 매는 것으로 친근함을 표시하는 일반적인 관행도 거부하고 딱딱하게 대했다. 하지만 회사 중역으로 승진하면서 그의 태도에는 변화가 생기는데, 아랫사람들의 말을 경청하고 그들의 일에 간섭하지 않으면서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는 협치적 리더십을 보여주었고, 전문지식을 배우기 위해 매우 적극적으로 노력했다. 당시 그의 경제고문이었던 미하일로 츠르노브르냐(Mihailo Crnobrnja) 교수는 밀로셰비치의 지식에 대한 열정에 깊은 인상을 받았으며 이때의 인연으로 유럽연합 대사에 임명되는 1989년까지도 그를 경제고문으로 수행했다. 1973년에 그는 테크노가스의 사장이 되었고, 스탐볼리치의 후원에 힘입어서 1978년 베오그라드 연합은행의 총재가 되었다. 베오그라드 연합은행 총재에서도 전문 금융인이 아니라 당에서 꽂아넣은 낙하산임에도 그의 지식에 대한 열정과 경영 리더십은 유지되어 그는 은행 내부에서도 훌륭한 상사로 높은 평가를 받았다. 밀로셰비치는 이 곳에서 일하면서 외국으로 나갈 기회를 많이 얻게 되었고 파리와 뉴욕에 자주 갔는데, 이는 그의 영어 능력이 향상되는 데 큰 도움을 주었다. 1979년 베오그라드에서 열린 세계은행과 국제통화기금 연례회의에서 밀로셰비치를 만난 체이스맨해튼 은행의 데이비드 록펠러는 밀로셰비치가 보여준 식견과 그의 뛰어난 영어 실력에 감탄할 정도였다. 밀로셰비치는 은행 총재 자격으로 뉴욕을 자주 오가면서 미국 사회의 효율성과 기술적 섬세함에 감탄을 금치 못했으며, 주말마다 렌트카를 빌려서 뉴욕과 보스턴을 돌아보곤 했고 하버드 대학교를 견학하고는 특히 대단히 좋아했다고 한다.

요시프 브로즈 티토 대통령 시절부터 온건한 공산주의 사상을 체득한 그는 빠른 두뇌회전과 강한 추진력으로 베오그라드에서 정치적 기술을 익혔고, 1980년 티토 대통령의 죽음으로 생긴 권력 공백을 틈타 강력한 정치 지도자로 부상했다. 1983년 밀로셰비치는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최고 간부회의 일원으로 활약하게 되었고, 이듬해 1984년에 그는 세르비아 공산당 제1서기장을 역임했다. 그는 뭇 세르비아인이 그랬듯이 티토의 형제애와 일치 정책에 내심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며, 특히 코소보와 보이보디나 자치주에도 자치권을 준 1974년 헌법을 세르비아의 발목을 잡는 족쇄라고 생각하였다. 1984년 친구인 이반 스탐볼리치가 세르비아 공산당 새 지도자가 되자 공산당 베오그라드 지구당 위원장에 올랐고, 1987년 4월에는 코소보에서 소수인 세르비아계가 터뜨린 불만에 대해 세르비아계 편을 들어 알바니아계에 대한 진압을 지시하면서, 세르비아 내에서 거물 정치 인사가 되었고 세르비아인들 사이에서 열광적인 지지를 얻게 된다.

그 해 스탐볼리치를 당내 선거에서 축출한 후[5] 공산당 당수가 된 그는 1989년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되었다. 당시 세르비아인들 사이에서 발흥하던 민족주의와 경제난[6]을 이용해 세르비아계가 많이 사는 곳을 중심으로 반 관료혁명이라 불리는 대규모 시위를 진행시켜 세르비아 내부 자치주인 보이보디나와 코소보, 그리고 연방 구성국인 몬테네그로의 공산당 서기장을 친 세르비아계 인물로 바꾸며[7] 연방내 8개 행정구역 가운데 4개 행정구역을 통제할 수 있는 위치에 서게 되었고 1389년에 벌어진 코소보 플리에 전투 600주년 행사를 진행했으며 또한 코소보의 자치권을 사실상 박탈하는 조치를 취했다. 이는 과거 티토 시절에 전혀 상상할 수 없는 민족주의 행보였다. 이렇게 되자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과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 내에서 밀로셰비치와 그를 지지한 세르비아에 대한 반발이 대규모로 일어, 두 나라에서도 이전부터 밀로셰비치와 대결한 밀란 쿠찬 슬로베니아 공산당 서기장이 직선제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을 거두며 대통령이 되었고, 크로아티아에서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이 총선에서 승리하며[8] 민족주의 노선을 더욱 강경하게 띄었기에 갈등이 더욱 커지게 되었다. 결국 이후에 유고슬라비아 전쟁으로 이어진다.

이렇게 각 공화국의 공산당이 민족주의를 추구하면서, 사회민주주의와 좌파 민족주의를 내세우는 김에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세르비아 지부도 세르비아 사회당으로 재편되었는데 말이 사회민주주의지 실상은 그냥 세르비아 패권주의나 다름없었다. 어찌됐건 첫 자유총선에서 마침내 밀로셰비치는 65%의 득표를 얻어 세르비아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이래 세르비아에서 실시했던 선거 중 최초로 민주적인 선거방식에 의한 것이었다.

2.3. 유고슬라비아 전쟁

실제로도 밀로셰비치는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민간인 학살 등 전쟁범죄를 주도한 전쟁 범죄자였지만 한편으론 앞뒤가 안 맞는 모순된 행보를 보였다. 전쟁 당시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내부에 있는 세르비아계 공화국들을 처음에는 지원하다가 어느 순간 지원을 중단하여 최종적으로 크로아티아 전쟁에서 패배하고, 보스니아 전쟁에서도 얻은 게 없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파일:3ca6866cc7ec8067948f43878bca0dd4.jpg
보스니아 전쟁이 한창이던 1994년 4월 22일 베오그라드를 방문한 스릅스카 공화국 대통령 라도반 카라지치와 함께 찍은 사진.
파일:7997cdfd8b043d9ea44bd92d244467fd.jpg
라도반 카라지치 라트코 믈라디치와 같이 찍힌 사진. 정황상 위의 사진과 거의 같은 때에 찍힌 걸로 추정된다.

밀로셰비치는 대통령 선거에서 압승한 김에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 대한 반감을 고조해 나가며 인기몰이를 했고, 1991년에 슬로베니아와의 전쟁에서 열흘만에 사실상 패배한 것은 물론 크로아티아와의 전쟁도 지리하게 늘어졌지만 1992년 5월 연방 총선에서 세르비아 사회당은 연립정당과 합쳐서 과반이 넘는 의석을 확보하는 데 성공했고, 12월에 치러진 세르비아 대선에서 밀로셰비치는 53%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했다. 그는 1980년대 초반에 지식인들 사이에서 조금씩 진행되던 티토 격하 운동에도 편승했다. 사실 티토 시절에 상상도 할 수 없는 일들을 거리낌없이 진행한지라 편승하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었다.

재미있는 건 그 밀로셰비치도 보스니아 전쟁에서는 전쟁 초기에는 스릅스카 공화국을 지원했으나, 1993년 5월 아테네에서 이뤄진 아테네 합의[9]를 적극 주장하여 스릅스카 공화국의 라도반 카라지치, 라트코 믈라디치와 엄청난 마찰을 빚기도 했다. # 밀로셰비치는 보스니아 전쟁은 명분이 없다며 크로아티아와의 전쟁에 올인할 것을 주문했으나 카라지치와 믈라디치는 이슬람 숙청이 먼저이고 영토 문제에 대해서 양보할 수 없다며 아테네 합의를 파기해버린다. 그러자 밀로셰비치는 1993년 말 스릅스카 공화국에 대한 지원을 최소화하기로 결정하고 이후 스릅스카 공화국은 보스니아 전쟁에서 수비 + 점령지 내 보슈냐크인 학살에만 집중하다가 미국에 의해 폭격을 맞고 사실상 전쟁에서 패배했다.

밀로셰비치가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에 대해서 보인 태도는 더 가관이었다. 1995년 5월과 8월 크로아티아의 전면 공세로 크라이나가 멸망 위기에 놓인 상황에서 밀로셰비치는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을 비난하기는 했지만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에 대한 지원 의사는 끝내 밝히지 않아 크라이나의 멸망을 방조했다. 밀로셰비치는 전쟁 기간 여러차례 전선을 늘리지 말고 크로아티아하고만 싸울 것을 주문했는데, 계속 보스니아의 무슬림만 공격하고 크로아티아 전선을 방치했던 밀란 마르티치 크라이나 대통령과 라도반 카라지치 스릅스카 공화국 대통령의 태도에 대한 밀로셰비치의 불만이 크라이나 멸망을 방치한 원인으로 추정된다.

사실 세르비아 총선과 연방 총선에서 세르비아 사회당은 과반의석의 확보에 실패했지만, 극우 정당인 세르비아 급진당[10]과 연립 정권을 수립하고 여론 조작을 통해 대세르비아주의를 고취했다. 당시 세르비아 국영 방송국 RTS는 밀로세비치의 측근인 듀산 미테비치가 장악했고 RTS는 이미 1980년대 후반부터 타 공화국을 비방하며 세르비아인을 선동하는 것은 물론, 영상을 조작하거나 타 공화국에서 벌어졌던 일을 의도적으로 과장 및 왜곡하여 보도하면서 타 공화국과의 화해를 주장하거나 과거의 유고슬라비아를 그리워하는 의견을 표하는 인사들을 반역자 또는 매국노로 몰아갔다. 물론 이러한 보도내용에 반발하는 기자들을 해고시킨 건 덤이었다. 듀산 미테비치는 1992년 시위발생으로 인한 경질차원에서 물러났지만 RTS는 2000년 불도저 혁명 직전까지 밀로셰비치의 입이 되던 방송사였던 것은 마찬가지였다. 신문사들은 상대적으로 TV에 비해 밀로세비치의 언론 장악에 자유로운 편이었으나 당시의 민족주의적 분위기에 어느 정도 편승하여서 세르비아인들을 상대로 자극적인 보도를 내보내는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리하여 밀로셰비치는 압도적인 지지를 얻었다.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등 다른 공화국에 거주하는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민족주의 의식을 고취한 뒤에 세르비아에 의한 유고 연방 통치 야심을 드러내며 결국 유고 전역에서 유혈사태를 초래했다. 그의 통치는 굉장히 억압적이고 폭력적이었으며, 또한 배타적이었다.

밀로셰비치는 1997년 세르비아 대통령으로써의 임기를 마친 후 연방 대통령으로 직책을 옮겼는데[11] 연방 대통령 자리에 오른 뒤에도 철권 통치를 휘둘렀으며, 결국 보스니아 전쟁과 코소보 전쟁 당시에 인종청소를 저질렀다. 악명 높은 절멸수용소를 세운 다음 수용소에 사람들을 투옥시킨 후 수많은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세르비아군은 이곳에 끌려온 사람들에게 무자비한 고문을 가하거나 살해했다. 살해 당시에 손톱을 뽑거나 눈알을 빼낸 후 죽였으며, 여성들에게 모욕을 줄 목적 또는 종교적 신념을 없애기 위해서 강간을 하는가 하면 피해자들에게 강제로 이물질을 먹이는 고문을 가했는데 이 때 인육을 먹이는 만행을 벌이기도 했다. 이뿐만 아니라 전국 각지에서 민간인들을 총살시키거나 생매장을 시키는 등 온갖 더러운 짓을 자행했는데 그 중 하나가 유럽 역사상 가장 잔인한 사건 중 하나로 꼽히는 스레브레니차 학살이다. 이 학살로 인해 8,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살해당해 땅에 매장당했다.

학살 뿐만 아니라 독재자답게 부정부패에도 열심이었는데, 유고슬라비아의 1인당 GDP가 절반으로 줄어드는 동안[12] 횡령한 돈이 무러 10억 달러나 되었다. 횡령한 양으로도 필리핀의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와 함께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갈 정도다.

그러나 이런 잔혹한 학살극을 주도한 것과는 별개로 정치인으로서는 꽤나 유능하기는 했다. 1995년 보스니아 전쟁 때는 서방이 경제 제재를 비롯한 여러 방법으로 압력을 가하자 협상에 나서 데이튼 협정에 서명하는가 하면 코소보 전쟁 때에도 몇 차례에 걸쳐 나토와의 협상에 응하는 등 현실적인 면모를 보여 주었다. 또한 보스니아 전쟁이나 크로아티아 내의 세르비아계 괴뢰 공화국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에 대한 지원에서도 민병대를 통해 간접적으로 지원하는 등 전쟁 범죄의 책임을 피하려는 모습도 보여 주었으며, 국내 정치에서도 1996년 세르비아 지방선거에서 야당에게 수도 베오그라드와 니시에서 패배한 것을 인정하는 등 실리적인 모습도 보였다.

파일:Signing_the_Dayton_Agreement_Milosevic_Tudjman_Izetbegovic.jpg
데이튼 협정 당시의 밀로셰비치. 옆에 어색하게 앉아서 박수를 치는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대통령과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보스니아 대통령이 인상적이다. 밀로셰비치 뒤에 서서 어색하게 박수를 치는 빌 클린턴과 다른 국가들의 지도자들은 덤. 클린턴을 중심으로 우측에 펠리페 곤살레스 스페인 총리, 좌측에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 헬무트 콜 독일 총리, 존 메이저 영국 총리,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러시아 총리가 보인다.

1999년에 코소보 지역에서 알바니아계 무장단체를 탄압하고 이 과정에서 학살을 벌였는데 학살 자체야 2000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재선을 염두에 둔 것이지만 나토가 유고슬라비아를 공습하면서 국민들의 저항이 거세지는 가운데, 결국 신 유고연방군은 코소보에서 철수했다. 하지만 코소보 공습에서 생각보다 선전하기는 했어도 그간의 경제난 때문에 국민들이 지쳐 있었기에 이듬해 치러진 선거에서 패배했으나 선거결과를 조작해 2차 결선투표를 강행하려 했다. 이 선거에서 코슈투니차 세르비아 민주연합 후보가 과반수를 조금 넘는 50.3%의 득표율로 결선 없이 당선될 예정이었지만, 밀로셰비치는 야당 후보가 얻은 표를 48.9%로 조작한 뒤 결선 투표에서 세르비아 급진당 등 극우 정당들과 연합하여 연방 대통령에 재선되려 했다. 이에 반발하여 세르비아 내 반정부 시위대가 중장비를 이용해 세르비아 국영 방송국 및 국회, 정부청사를 점거하는 일명 불도저 혁명이 일어났다. 이 때 무려 30만 명이 넘는 국민들이 밀로셰비치의 퇴진을 요구했다. 당시 세르비아의 대통령이자 밀로셰비치의 측근인사로 여겨졌던 밀로티노비치도 상황이 심상치않다는걸 깨닫고 강제진압을 거부했다.[13] 결국 2000년 10월 5일에 13년간 차지한 권좌에서 물러났다.[14]

세르비아 민족주의에 호응했던 세르비아인들이 밀로셰비치를 몰아낸 것은 시간이 지나면서 세르비아인들이 대세르비아주의를 추종한 결과가 경제 파탄과 국제위상의 추락, 국가의 전반적인 약체화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10년 동안 전쟁, 전쟁, 또 전쟁을 했는데 10년 동안 세르비아 땅은 계속 줄어들고, 세르비아 국민들의 삶은 더 피폐해지기만 했다. 전쟁에서 이기고 있다고 밀로셰비치가 선전을 해댔는데 왜 정작 세르비아 땅이 줄어든단 말인가? 이 점이 세르비아 국민들이 밀로셰비치의 지도력에 의문을 품게 된 결정적인 이유였다. 1990년대 세르비아 민족주의의 광풍 아래에서도 세르비아인이 모두 밀로셰비치 정권에 호의적인 것은 아니었다. 밀로셰비치에 비판적인 야당과 인사들도 존재했는데, 이들도 어느정도의 득표율과 의석을 차지했고 몬테네그로에서는 아예 몬테네그로 독립을 주창하는 밀로 주카노비치가 승리하기도 했다.[15] 사실 당시 밀로셰비치는 집권기 동안에도 선거에서 마냥 순탄한 길을 걸어온것은 아니었다. 이 당시 연방 선거와 세르비아의 선거결과를 보면 세르비아 사회당이 연방 1993년 총선과 1996년 총선에서 세르비아 1992년 총선때부터 과반을 달성하지못해서 급진당, 신민주당같은 정당들과 연합으로 정권을 유지하던 상황이었는데 이것이 2000년 총, 대선에서 터진것이었다.

2.4. 체포 및 재판과 사망

하지만 밀로셰비치는 권좌에서 물러난 이후에도 강력한 야당을 만들어 다음 선거에서 승리하여 다시 재차 대통령이 되겠다며 국내에 남아 정치를 계속할 것을 표명했다. 또한 밀로셰비치의 뒤를 이어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이 된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16]는 선거기간 내내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는 미국의 정치도구에 불과하다며 밀로셰비치를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가 아닌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전 루마니아 대통령 같이 유고슬라비아 연방 대법원에서 재판하여 국내에서 처벌해야 한다고 주장하던 인물이었다.[17][18] 그래서 밀로셰비치가 극적으로 사임한 데에는 자신의 안전을 대가로 한 암묵적인 합의가 있었던 게 아니냐는 의혹도 제기되었다. 그러나 밀로셰비치 등 구 유고 전범 인사들에 대한 처벌을 주창한 새 총리이자 전 베오그라드 시장인 조란 진지치의 조치로 인하여 2001년에 권력남용 및 부정부패 혐의로 체포되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전쟁 범죄를 처벌하기 위해 구 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nternational Criminal Tribunal for the former Yugoslavia)가 설립되었다. 인종청소를 자행한 전범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앞서 언급한 대로 2000년에 권력남용 등의 혐의로 체포되었는데 이듬해인 2001년 6월 전범재판소 법정으로 인도되었다. 코슈투니차는 밀로셰비치의 처우를 놓고 유고슬라비아 내부에서 서방과의 관계개선과 밀로셰비치를 위시한 구유고 전범 인사들에 대한 국제사법재판소 인도를 주창하던 조란 진지치 전 총리와 심한 갈등을 빚었는데,[19] 유고 국내 처벌을 빌미로 밀로셰비치를 봐주는게 아니냐는 미국을 위시한 서방 강국들과 밀로셰비치 시기 내전을 치렀던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같은 구유고권 주변국가들의 의심과 불신마저 가중되자 결국 코슈투니차 대통령은 밀로셰비치에 대한 유고 국내 처벌 주장을 철회하고, 밀로셰비치의 헤이그 전범재판소 인도를 허락했다.

2002년부터 밀로셰비치는 재판을 받았으나, 그는 이를 승리자의 재판이라고 무시하며 "조국과 국민을 보호하기 위해 내가 했던 모든 일들이 자랑스럽다."는 발언과 함께 잘못을 인정하지 않았다. 참고로 그의 재판을 담당했던 영국 출신 변호사인 스티븐 케이는, "밀로셰비치는 재판을 회피하려 하지 않았으며 자포자기하지도 않았다면서, 그는 나에게 자신이 재판을 모두 치르고 감옥에서 나갈 것이라고 말했다."고 밀로셰비치가 살아 있을 상황을 말하기도 했다. 밀로셰비치는 발칸 반도에서 벌어진 66건의 전쟁 및 반인륜 범죄 혐의와 1995년 세르비아 내 UN 안전 지대에서 8,400여 명의 이슬람교도를 대량 학살한 혐의로 기소되어 지난 2002년 2월 이후 4년간 ICTY에서 재판을 받았다. 결국 투옥 뒤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재판을 받다가, 2006년 3월 11일 64세의 나이로 헤이그 감옥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었다. 이날 밀로셰비치가 그의 감방 침대 위에서 죽어 있는 것을 교도관이 발견한 뒤 상부와 의료진에게 보고했으며, 곧이어 사망 사실을 확인했다고 한다. 자연사한 것으로 추정되었고, 네덜란드 법의학 연구소로 시신을 이송해 사체 부검과 독극물 검사를 지시했지만 사인은 자연사인 것으로 최종 결정되었다. 2006년 3월 밀로셰비치는 교도소 안에서 죽기 전에 몬테네그로마저도 독립한다는 이야기를 듣자, "세계가 내 조국을 조각내는구나..."라고 중얼거렸다고 전해진다.

밀로셰비치는 그동안 고혈압과 심장질환 등의 증세로 수 차례 러시아에 가서 치료를 받겠다 요청했으나, ICTY는 그가 돌아오지 않을 가능성을 우려해 요구를 거절했다. 그의 지지자들과 유족들은 밀로셰비치의 죽음에 대한 책임이 전적으로 ICTY에 있다며 분노를 표했다. 밀로셰비치가 속했던 세르비아 사회당의 한 간부는 밀로셰비치는 죽은 것이 아니라 살해된 것이라고 비판했으며, 미하일 고르바초프 전 소련 서기장도 그의 러시아행을 막은 것은 실수였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밀로셰비치의 처벌을 주장했던 스티페 미시치 크로아티아 대통령은 그가 재판의 말미에 받아야 할 선고를 받지 못한 채 먼저 죽은 것은 유감이라 말했다. 또한 국제 인권단체인 휴먼라이츠워치의 한 간부는 희생자들에게는 좌절이고 정의에는 역행하였다는 말을 남겼으며, 희생자와 정치 지도자들은 밀로셰비치가 단죄할 기회가 없어졌다며 분노했다고 한다.

밀로셰비치에 대한 1심에서 한국의 권오곤 재판관이 선임재판관을 맡았다. 나토 국가나 이슬람 국가 출신의 인물이 선임재판관을 맡을 경우 중립성에 대한 논란이 발생할 수 있으므로 접점이 거의 없는 권오곤 재판관이 선택된 것으로 보인다. 권오곤 재판관의 퇴임 후 인터뷰에 따르면 밀로셰비치는 권오곤 재판관을 부를 때 존칭 없이 미스터 권이라고만 부르고 재판정에서 기립하라는 명령에 불응하는 등 재판정에서 예의를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장례식은 원래 국장으로 치르려고 했으나 세르비아 정부에서 거절했다. 그러자 세르비아 민족주의자들과 지지자 수만 명이 대거 몰려와 그의 고향 포자레바츠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 그리고 밀로셰비치의 부인이던 마르코비치도 2019년 4월에 사망하였다. ##

3. 선거 이력

연도 선거 선거구 소속 정당 득표수 (득표율) 당선 여부 비고
1989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대통령 선거 세르비아 사회주의 공화국 세르비아 공산주의자 연맹 4,452,312 (80.36%) 당선 (1위) 초선
1990 세르비아 사회당 3,285,799 (65.34%) 당선 (1위) 재선
1992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 선거 세르비아 공화국 2,515,047 (53.24%) 당선 (1위) 3선
2000 유고슬라비아 대통령 선거 유고슬라비아 1,826,799 (38.24%) 낙선 (2위)

4. 평가

세르비아에서의 평가는 50대 50. 집권 이후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인의 생존권을 내세우며 대세르비아주의를 내세웠는데 이것 자체는 요시프 브로즈 티토 사후인 1980년대부터 세르비아 내부에 이미 확산될 만큼 확산되어 있어서 밀로셰비치의 탓이라고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국가 체제에 대한 유지 및 전쟁 수행 과정에서 지도자로서의 역량은 한참 부족했다는 점이 문제였다. 그나마 세르비아 본토의 피해는 크지 않았으나[20] 연방 구성국들에 거주 중이었던 수만의 세르비아인들이 전쟁통에 사망한 것은 물론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와 벌인 전쟁에서 패배하였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도 학살극까지 벌일 만큼 우세를 보였지만 결과적으로 얻은 것이 전혀 없었다.

특히 반인륜 행위는 안 하느니만 못해서, 차라리 안 했으면 유고연방 해체를 막기 위해 불가피한 전쟁이었다는 명분이라도 내세울 수 있던 것을 제 발로 차버린 셈이 되어 버렸다. 밀로셰비치가 주도한 전쟁으로 인해 물가가 폭등했고, 유고슬라비아의 해체로 인한 내수 붕괴는 세르비아 경제의 급속한 악화를 초래했으며 거기에 NATO의 공습으로 인해 코소보마저 상실하게 되는 데 큰 원인을 제공했다. 게다가 코소보 공습의 주 원인 중 하나가 바로 학살이었는데, 보스니아 학살로 그렇게 당하고도 정신 못 차린 셈이다.

정상적인 국가라면 보스니아에서 그 난리를 치고도 패했을 때 바로 탄핵당해 쫓겨나거나 패전에 책임지고 하야했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었다. 2000년까지 정권을 잡고 있던 것도 기적이었다. 그나마 밀로셰비치의 폭정으로 인해 얻은 수확이라면 밀로셰비치 실권 이후에 집권한 코슈투니차나 진지치, 타디치, 니콜리치, 부치치 등 세르비아의 대통령이나 총리들은 밀로셰비치처럼 대놓고 전쟁이나 학살 등의 막장 행보를 걷지 않게 되었다는 점이었다.[21]

세르비아의 강경 민족주의자들 중에는 은근히 밀로셰비치를 추종하는 사람들도 있으며, 동정하는 여론도 있다고 한다. 아예 세르비아 일각에서는 밀로셰비치는 학살자가 아니라며 밀로셰비치가 잔인한 학살자였다기보다는 연방에서 분리독립하여 이탈하려던 다른 유고 연방내 공화국들의 독립을 저지하려고 일으킨 전쟁이 장기화되던 과정에서 학살이 발생했다고 말하며 밀로셰비치는 학살자가 절대 아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리고 크로아티아도 세르비아와 비슷한 취급을 받아야 하지만 왜 같이 취급을 안 하냐면서 억하심정으로 지지하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 대통령이었을 당시 유고 내전 발발 직전에 대세르비아주의를 대놓고 선동하여 알아서 각 유고 연방 소속국 내부의 분리주의 세력들에게 독립의 빌미를 제공한 것은 물론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계에 대해 무기와 군사훈련을 지원, 인종청소 등의 민족 대량 학살을 확대했다. 특히 독립 막겠다고 군대 보낸 건 그렇다 쳐도 제노사이드는 내전 중인 국가의 정부가 다 이런 짓 하는 것도 아니니 변명의 여지가 전혀 없다.

물론 밀로셰비치 정부 시절 세르비아 중심의 신 유고 연방과 전쟁 중에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았던 스릅스카 공화국, 크라이나-세르비아 공화국 등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 내부의 세르비아계 반란 정부들과 싸웠던 크로아티아의 프라뇨 투지만 전 대통령, 보스니아의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 전 대통령, 코소보의 하심 사치 총리 등도 많은 학살과 약탈 등 전쟁 범죄를 자행했다. 이 전쟁 자체가 국가지도부에 한정해서는 무고한 피해자가 없는 전쟁이라고 봐도 무방하고, 세르비아 측의 진압 자체에 대해서는 국제법적으로도 문제시되지 않고 있다.[22] 하지만 밀로셰비치가 가장 많이 거론되고 비난받는 이유는 자국내 소수민족인 세르비아계가 있는 국가 내부에서만 학살을 저질렀던 저 지도자들과 다르게 밀로셰비치는 대세르비아주의라는 명분 하에 저 모든 지역의 분쟁에 광범위하게 개입하고 세르비아계 민병대의 과격준동을 부추겨 이들을 통한 전쟁범죄를 자행하였기 때문이다.

결론을 내리자면 부패하고, 무능하며, 포퓰리즘적이고, 극단적인 민족주의를 자기 권력수단으로 이용한 기회주의자 지도자의 선동에 특정 사상 혹은 신념에 매몰된 국민이 짝짜꿍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말해준다고 볼 수 있는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상술한 대로 처음 밀로셰비치가 이 전쟁을 일으켰을 때 세르비아 본토의 세르비아인들은 아무런 피해가 없었기 때문에 밀로셰비치가 대단한 민족영웅인 것처럼 추켜세웠지만, 세르비아 공화국 밖의 유고연방 지역에서 소수민족이지만 유고연방 사람이라는 동질성을 가진 민족의식으로 살아가던 세르비아계 비세르비아공화국인들에게 밀로셰비치는 어느 날 갑자기 대세르비아주의를 외치면서 민족 우월주의를 부추겨놓고 정작 전쟁으로 피해를 입어 세르비아로 피난 오니 헌신짝처럼 자기를 내다버린 천하의 개쌍놈인 것이다. 그렇게 유고 땅에서 잘 살다가 강제로 쫓겨나 돌아오게 된 자기 민족의 땅에서조차 박해받은 이들이 밀로셰비치를 내쫓는데 결정적인 기여를 한 셈이다. 거기다 밀로세비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 극우들은 자신들에게 협조하지 않는 같은 세르비아인들도 학살하는 병크를 저지른다. 당연하지만 모든 세르비아인들이 밀로세비치의 전쟁범죄에 협조한 것은 아니며 이들은 수백년동안 공존한 이웃인 보스니아인과 크로아티아인들을 학살하는 것에 반대하고 보호하기도 하였는데 밀로세비치를 중심으로하는 세르비아 극우들은 학살에 동참하지 않는 이러한 세르비아인들도 학살하였다. 같은 세르비아인들에게 학살당한 것도 모자라서 고향 땅에서 추방당해 빈민층으로 전락했으니 밀로세비치에 대한 평가가 좋을 수가 없다.

5. 여담

6. 대중매체에서


[1] 세르비아 브라니체보구 포자레바츠. [2] 혼전성은 콜옌시치(Koljenšić). [3] 단, 미승인국가인 코소보를 제외한다면 6개국이 된다. [4] Marko Milošević, 1974~. 어릴 때부터 버릇이 없고 교활했고 하며, 학교 공부에도 관심을 주지 않아 최종 학력이 고등학교 중퇴이고, 복무에 부적합하다며 군 징집을 피하고는 담배, 석유, 도난 차량, 심지어 코카인 등의 마약을 밀수하면서 라이벌 갱단과 세르비안 언론을 폭력과 협박으로 위협하는 식으로 암시장의 크기를 키웠는데, 이렇게 번 돈이 2000년까지 무려 5억 파운드, 한화 약 7,805억 원에 달했다고 한다. 마르코는 동시에 라디오 방송국, 제과점, 컴퓨터 상점, 고급 향수 가게, 나이트클럽까지 운영하면서 밀수로 번 돈으로 17대 이상의 고급 자동차와 50만 독일 마르크, 한화 약 3억 6,400억 원의 요트를 구매하는 등 호화 생활을 했으며, 자동차 사고를 내 사람을 다치게 한 적도 많았다고 한다. 2000년에 일어난 젤리코 라즈나토비치의 살해에도 관여했다는 의혹까지 있으며, 같은 해에는 아버지의 독재에 반하는 반정부 시위가 일어나자 사람들을 이끌고 반정부 시위 참여자 2명을 직접 구타하기도 했으며, 전술한 시위의 영향으로 아버지가 물러나자 동년 10월 7일에 세르비아를 떠나 베이징에 가려고 했으나 위조 여권 보유 때문에 입국을 거절당했고, 이틀 뒤에 러시아로 추방되었다. 이후 마르코 밀로셰비치는 난민 지위를 부여받고 세르비아 정부의 수배 대상이 된 채 EU 여행 금지령까지 내려졌지만, 본인은 모스크바의 엘리트 지역에 살면서 여러 나이트클럽을 성황리에 운영하며 호화롭게 살고 있다고 한다.참고로 슬로보단 밀로셰비치는 퇴임 직후에 마르코가 "저는 제 아들 마르코가 자랑스럽습니다. 내 아들 마르코는 이 전쟁의 첫날부터 마지막 날까지 제복과 무기를 착용했습니다." 내 아들 마르코는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인생에서 한 모든 일을 했습니다."는 등 아들을 두둔하는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5] 이후 스탐볼리치는 유고슬라비아공산주의자 연맹이 해체되어 구 유고연방이 붕괴된 이후로 야당인사로 활동하였고, 2000년 대선에 출마하려다가 세르비아 사회당 인사의 사주를 받은 마피아에 의해 2000년에 암살당했다. [6] 1980년대 중반에 가격자유화를 실시한 이래로 물가상승률은 민족주의 세력의 발흥이라는 변수가 겹쳐 매년 올라 1989년에 유고슬라비아의 물가상승률은 1000%를 넘어섰으며 1990년에 중앙정부 차원에서 물가상승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화폐개혁 및 긴축정책을 단행하지만 이 때문에 기업들이 파산하고 실업자가 늘어나며 각 공화국에서 중앙정부의 경제정책에 반발하여 분열만 가중시켰고 결국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의 물가상승이 멈추게 된 것은 1994년의 일이었다. [7] 몬테네그로의 서기장을 밀로셰비치의 측근 정치인인 모미르 불라토비치로 바꾸었다. 모미르 불라토비치는 철저하게 밀로셰비치의 예스맨을 자처했지만, 1997년 몬테네그로 대선에서 같은 당이 분열돼 사민당에서 출마한 밀로 주카노비치한테 근소한 차이로 패배해 정권을 잃었다. [8] 크로아티아는 1970년대 초반에 티토에 의해 민족주의자들이 축출된 상태였던지라 크로아티아 공산당은 밀로셰비치에 대한 반발을 하며 민족주의 성향을 강화하기는 했으나 세르비아 공산당이나 슬로베니아 공산당과는 다르게 투지만 급의 거물급 대권주자를 보유하지는 못했고 사회민주당으로 이름을 바꾼 후에도 재집권하게 된 것은 2000년 총선이 되어서부터였다. [9] 보스니아 전쟁 이전의 상태로 돌아간 후 분리독립 국민투표를 인정하는 것. [10] 다만 밀로셰비치와 쭈욱 같이 행보를 같이 한 것은 아니었고 중간중간에 연립정권을 수립했다 안했다를 반복했으며 밀로셰비치가 축출되기 직전에는 이미 세르비아 사회당과의 관계를 청산하여 따로 대통령 후보를 낸 상태였다. [11] 신유고 연방 대통령 직위는 세르비아 대통령, 몬테네그로 대통령 등 구성국 대통령들을 후보로 하여 선출하는 직위로 이 당시에는 간선제로 선출되었다. 밀로셰비치는 본인이 연방 대통령 자리에 당선된 이후에 뭔가 쫄렸는지 민주화 조치를 단행하여 결선투표제를 채택한 직선제로 선출 규정을 바꿨다. [12] 물론 전쟁을 몇 년씩 해대고 경제 제재까지 받으니 당연히 생산 활동이 막혀서 줄어들 수밖에 없기는 했다. 그나마 물가 폭등은 1994년 유고슬라비아 디나르화를 독일 마르크화에 페그시키면서 겨우 진정되었지만 국제제재가 2000년까지 남아 있었기에 전후후유증으로 몸살을 앓은 것은 매한가지였다. [13] 그래서 볼도저 혁명 이후로 잔여임기를 수행했다. [14] 비슷한 시기에 밀로셰비치의 적수라 불러졌던 크로아티아의 투지만 대통령도 아시아발 경제위기로 인한 경기침체로 지지율이 하락하는 가운데서 암으로 숨을 거두었고 투지만의 정당인 크로아티아 민주연합도 2000년 대선에서 결선진출에 실패하고 총선에서도 사민당에게 대패해 정권을 내주었다. 비슷한 시기에 민족주의로 떴고 결국 몰락의 길을 걷다니 기묘한 운명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밀로셰비치의 정당인 세르비아 사회당은 세가 큰 것은 아니지만 2008년 이래로 연립정권에 창여하는 여당으로 장기 집권하고 있고, 크로아티아 민주연합도 후에 투지만에 대한 크로아티아인들의 평가가 올라가면서 사회민주당과 정권을 주고받는 거대양당으로 복귀하기는 했다. [15] 특히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 전 유고슬라비아 대통령과 조란 진지치 세르비아 총리. [16] 사실 이 사람도 티토 시절에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장해서 징계를 당한 적이 있었고, 1980년대 유고슬라비아가 외채위기와 물가상승에 허덕이던 시절에 세르비아 민족주의를 주창하며 세르비아 지식인층으로부터 명성을 얻었는데, 이 때문에 밀로셰비치한테 스카웃 제의를 받았다. 다만 연정에 합의한 세르비아 급진당과는 다르게 코슈투니차는 결국 야당의 길을 걸었다. 물론 세르비아가 지난 10년 동안 벌인 전쟁은 정당한 전쟁이라고 열심히 핑계대는 것은 밀로셰비치나 코슈투니차나 마찬가지였다. [17] 포악한 독재자였지만 루마니아 국내에서만 반대파 탄압과 고문, 살인, 인권유린을 저지르던 차우셰스쿠와 달리, 밀로셰비치는 세르비아 대통령 시절 과거 구 유고 연방에 속해 있다 연방 붕괴로 분리독립한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등 주변 발칸 반도 신생국들의 내전에 개입, 침범하여 제노사이드를 주도했던 전범이었기에 정권붕괴 이후 루마니아 신정부에 의해 자국내에서 사형당한 차우셰스쿠와는 그 수준이 달랐고, 구 유고 내전 당시 저지른 인종학살 등 유럽과 서방세계에 남긴 전쟁범죄의 규모와 경악성도 197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차우셰스쿠가 루마니아를 통치하면서 남긴 악영향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욱 거대했다. [18] 아이러니하게도 그 차우셰스쿠 부부를 총탄 세례로 총살시켜버려가며 독재정권을 무너뜨렸던 세르비아의 옆나라인 루마니아조차도 코슈투니차의 밀로셰비치 국내 처벌 주장에 대해 찬성, 지지했느냐면 훨씬 아니었다. 오히려 그들도 외교 성명 차원에서 밀로셰비치와 카라지치 등 유고 전쟁 전범 인사들에 대한 헤이그 국제사법재판소 인계를 주장했으며, 당시 밀로셰비치에 대한 세르비아 국내 처벌을 주장하던 코슈투니차 대통령 등 세르비아 지도층들의 태도를 비난했다. [19] 코슈투니차와 진지치는 밀로셰비치의 독재 정치에 맞서서 함께 유고슬라비아의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지만, 밀로셰비치 정권이 몰락하고 각각 유고슬라비아의 새 대통령과 총리가 되면서 이후 정치 노선의 차이로 갈라져 앙숙이 되었다. [20] 물론 경제파탄이 났지만 가장 문제가 되었던 물가상승은 1994년에 독일 마르크 페그제를 채택하면서 어느 정도는 땜빵했고, 세르비아 자체가 농업 비중이 높았던지라 식료품의 자급자족은 가능했기 때문에 경제제재에도 식량부족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다. 물론 석유는 아예 안나서 에너지 자원들은 죄다 수입해야 했지만 이것도 밀수로 대충 땜빵은 했다. 심지어 이 석유 밀수 상대방은 보리스 옐친이었다. 그래서 오래 버티는 것이 가능했으나 임금수준이 대폭 떨어지고 수출길이 막혀서 공장들이 문을 많이 닫으면서 실업률이 높았던 상황이었다. 결국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보리스 옐친 러시아 대통령에게 세르비아에 대한 석유, 천연가스 수출 제한을 압박하자 옐친은 밀로셰비치한테 연락을 하여 석유 공급 중단을 통보했고 결국 버틸 여력이 바닥난 밀로셰비치는 전쟁을 그만두었다. [21] 당장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와 보스니아의 한트샤르에게 자국민들이 학살당한 과거사와 별개로 유고슬라비아 전쟁에서 분리 독립을 시도하려던 연방 구성국들에게 무력을 사용하며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인들에게 벌인 인종 청소 등 학살 행위로 인해 가해자가 된 피해자의 처지로 변해 버린 데다 밀로셰비치의 치세 동안 전범국이라는 국제적인 지탄까지 받아야 했으니 밀로셰비치 정권 이후 세르비아의 지배층 인사들이 비교적 온건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던 것은 필연이었다. [22] 밀로셰비치가 기소된 원인은 전쟁범죄지, 전쟁 행위 자체가 아니다. [23] 실제로 밀로셰비치가 20만 명 가량을 죽게 했으니, 매우 적절한 드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