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04-11 01:38:59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



1. 개요2. 역사3. 기타

1. 개요

파일:야세노바-기념비.jpg
야세노바츠 추모비
【언어별 명칭】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colbgcolor=#dcdcdc,#1f2023> 크로아티아어 Koncentracijski logor Jasenovac
Sabirni logor Jasenovac
보스니아어 Koncentracijski logor Jasenovac
세르비아어 Логор Јасеновац / Logor Jasenovac
독일어 Konzentrationslager Jasenovac
(KZ Jasenovac)
히브리어 מחנה יאסנובאץ
(Makhané Yasenovats)
영어 Jasenovac concentration camp }}}}}}}}}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는 나치 독일 괴뢰 정권 크로아티아 독립국에 의해 세워진 강제수용소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북부와 인접한 크로아티아 야세노바츠시에 위치했다.

2. 역사

1941년 8월에 설립됐다. 3개의 수용소가 여기 있었는데 제1수용소와 제2수용소는 1941년 사바강의 범람으로 물에 잠겼고 제3수용소는 1945년까지 존속했다. 1945년 4월 폐쇄될 때까지 약 75,159명의 유대인 세르비아인들이 이곳에서 학살당했다. 크로아티아 정부는 1942년 6월 집시 수천 명을 야세노바츠 수용소로 강제 송환하기도 했는데 이들은 대부분 수용소에서 죽었다.

명목상 강제 노동 수용소로, 절멸 수용소는 아니어서 비록 가스실과 같은 곳은 없었지만[1] '발칸의 아우슈비츠'라고 불릴 정도로 악명을 떨쳤다. 얼마나 끔찍했는지 이곳을 방문한 SS 병사들조차 경악했을 정도였다고 하면 말 다 한 셈이다. 특히 가톨릭 사제들이 우스타샤에 의해 수용소장이나 교도관으로 선출되어 학살을 적극적으로 지원했고 수용소 바깥에서도 우스타샤와 가톨릭 세력들이 영합해서 세르비아인, 유대인, 집시들에게 학살과 함께 공동체 파괴, 약탈, 강제 개종을 실행했다.

뿐만 아니라 야세노바츠의 부속 수용소인 스타라 그라디슈카(Stara Gradiška) 강제수용소는 세르비아/유대인/보스니아인 여성과 어린이 수감자들, 정권에 반대하던 야당 의원들을 수감하며 확인된 수치로만 도합 12,790명의 목숨을 앗아간 곳이었는데 이 곳도 '모든 것이 야세노바츠와 동일했다'고 표현할 수 있을 정도로 열악한 곳이었으며 당시 우스타샤들은 특히 어린이들을 유난히 잔인하게 죽였고 심지어 1942년 8월 29일 밤에는 교도관들이 누가 가장 많은 수감자를 '청산'할 수 있는지에 대해 내기를 걸기까지 했다.[2] 참고로 2차 대전뿐만 아니라 세계사 전체를 통틀어도 어린이를 위한 강제수용소를 운용한 곳은 오직 크로아티아 독립국 하나밖에 없었다고 한다. 스타라 그라디슈카의 실상을 다룬 글(열람 주의)[3]
파일: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jpg
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Miroslav Filipović, 1915–1946)
심지어 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는 가톨릭 신부임에도 우스탸샤에 동조해 야세노바츠의 수용소장으로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했고 본인이 직접 살인에 가담하기도 했다. 1945년 영국군에 잡혀 1946년 유고슬라비아의 베오그라드에서 전범으로 재판을 받았으며 사형을 선고받은 후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파일:스테파니츠 대주교.jpg
알로이지예 빅토르 스테피나츠(Alojzije Viktor Stepinac, 1898–1960)
알로이지예 빅토르 스테피나츠는 자그레브 대주교이자 야세노바츠를 포함한 크로아티아에서 자행된 학살, 파괴, 강제개종 등을 최초로 지시한 사람들 중 하나로 지목받고 있다. 전후 전범으로 체포되어 유고슬라비아의 감옥에서 복역했으나 바티칸의 구명운동으로 석방되었다. 그가 죽은 후 1993년 10월 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복자 시복돼 논란의 대상이 되었다.

전쟁이 끝난 후 학살을 저지른 우스타샤의 전범들은 나치 전범들과 달리 대부분 법의 심판을 받지 않고 빠져나갔다.[4] 그뿐만 아니라 이들은 세르비아인과 유대인들을 학살한 후 그들에게 갈취한 금품과 재산을 챙겨 아르헨티나와 칠레 등 남미 국가들로 탈출했다. 특히 야세노바츠의 간수 중 핵심적인 인물이던 딘코 사키치 & 나다 사키치 부부는 종전 후 아르헨티나로 도망쳐 1998년까지 부귀영화를 누리며 살다가 악행이 발각된 후 유고슬라비아로 인도되어 남편은 1999년 징역 20년을 선고받고 2008년 옥사했으며 아내는 파킨슨병을 이유로 자그레브의 1급 요양원에서 생활하다가 2011년에 사망했다.

야세노바츠 수용소의 참상에 대해 자세히 다룬 글. 혐오감을 유발할 정도로 잔혹한 사진들과 내용들이 많으니 주의 바람.

3. 기타



[1] 아우슈비츠가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로 치면 완전통제구역 같은 곳이라면 야세노바츠 수용소는 혁명화구역 같은 곳인 셈이다. 물론 야세노바츠 수용소의 대우는 완전통제구역만큼이나 극악했기 때문에 아무런 의미가 없다. [2] '우승자'인 페타르 브르지차(Petar Brzica, 1917~?) 중위는 단 하루 만에 단도로 1,360명(670~1,100명이라는 설도 있다)의 수감자의 목을 자르고 금시계, 실버 서비스, 구운 젖먹이 돼지 및 포도주를 보상으로 받았다. [3]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마른 아이들과 참수된 얼굴 부분 사진이 흑백으로 존재한다. [4] 그나마 초대 소장이었던 베코슬라브 루부리치(Vjekoslav Luburić, 1914–1969)처럼 해외에서 암살당해 죗값을 제대로 치른 경우도 있긴 하지만 이는 일부에 불과하다. [5] 아우슈비츠에는 4개의 밴드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