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39:47

발두어 폰 시라흐

발두어 폰 쉬라흐에서 넘어옴
파일:Document_Protect.svg   편집 보호된 문서입니다.
문서의
ACL 탭
을 확인하세요.

[[독일의 전쟁범죄|
파일:나치 독일 국기.svg 나치 독일의 전쟁범죄
]]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colbgcolor=#000> 전범과 재판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루돌프 헤스 | 마르틴 보어만궐석재판 | 발두어 폰 시라흐 | 발터 풍크 | 빌헬름 카이텔 | 빌헬름 프리크 |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 | 알베르트 슈페어 | 알프레트 로젠베르크 | 알프레트 요들 | 에른스트 칼텐브루너 | 에리히 레더 |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 | 율리우스 슈트라이허 | 카를 되니츠 | 콘스탄틴 폰 노이라트 | 프리츠 자우켈 | 한스 프랑크 | 헤르만 괴링자살

카를 브란트 | 카를 게프하르트 | 볼프람 지퍼스 | 루돌프 브란트 | 발데마르 호펜 | 카를 겐츠켄

에르하르트 밀히

오스발트 폴 | 아우구스트 프랑크 | 게오르크 뢰르너 | 한스 뢰르너 | 프란츠 아이렌슈말츠

빌헬름 리스트 | 로타르 렌둘릭 | 발터 쿤체

울리히 그라이펠트 | 베르너 로렌츠 | 리하르트 힐데브란트

오토 올렌도르프 | 에리히 나우만 | 파울 블로벨 | 베르너 브라우네 | 에두아르트 슈트라우흐 | 마르틴 잔트베르거 | 오이겐 슈타임레 | 발데마르 클링겔회퍼 | 하인츠 요스트 | 구스타프 아돌프 노스케 | 프란츠 직스

헤르만 호트 | 빌헬름 리터 폰 레프 | 게오르크 폰 퀴힐러 | 게오르크한스 라인하르트

에른스트 폰 바이츠제커 | 빌헬름 케플러 | 에른스트 빌헬름 볼레 | 리하르트 발터 다레 | 한스 라머스 | 빌헬름 슈투카르트 | 오토 디트리히 | 고틀로프 베르거 | 발터 셸렌베르크 | 루츠 그라프 슈베린 폰 크로지크
별개의 재판
미국 마우트하우젠 재판

아우구스트 아이그루버 | 에두아르트 크렙스바흐 | 아돌프 추터
미국 부헨발트 재판

요시아스 추 발데크피르몬트 | 일제 코흐
미국 말메디 재판

요제프 디트리히 | 헤르만 프리스 | 요아힘 파이퍼
영국 하멜른 재판

카를 에버하르트 쇤가르트 | 요제프 크라머 | 이르마 그레제
영국 아우리히 재판

쿠르트 마이어
영국 헤롤트 재판

빌리 파울 헤롤트
네덜란드 리페르트 재판

미하엘 리페르트
소련 리가 재판

프리드리히 예켈른
프랑스 님스 재판

빌헬름 비트리히
프랑스 보르도 재판

하인츠 라머딩결석재판

아르투어 그라이저 | 아몬 괴트 | 요제프 마이징거 | 루돌프 회스 | 요제프 뷜러 | 알베르트 포르스터
폴란드 슈트로프 재판

위르겐 슈트로프
폴란드 코흐 재판

에리히 코흐
체코슬로바키아 리디체 재판

쿠르트 달루게 | 카를 헤르만 프랑크
서독 만슈타인 재판

에리히 폰 만슈타인
서독 부흐 재판

발터 부흐
서독 모아빗 재판

에리히 바우어
이스라엘 아이히만 재판

아돌프 아이히만
동독 블뢰체 재판

요제프 블뢰체
서독 뒤셀도르프 재판

프란츠 슈탕글
서독 트레블링카 재판

쿠르트 프란츠 | 빌리 멘츠
서독 소비보르 재판

쿠르트 볼렌더자살
서독 볼프 재판

카를 볼프
이탈리아 프리프케 재판

에리히 프리프케
프랑스 바르비 재판

클라우스 바르비
21세기 이후 나치 전범 재판

요제프 쉬츠
학살 사건 홀로코스트 | 독일 국방군의 전쟁 범죄 | 바빈야르 학살 | 제2차 세계 대전 중 독일의 벨라루스 점령 |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 말메디 학살 | 그래뉴 학살 | 르 파라디 학살 | 바르샤바 봉기 진압
종전 전 사망한
전쟁범죄
혐의자
아돌프 히틀러 | 요제프 괴벨스 | 마르틴 보어만 | 하인리히 힘러 | 리하르트 글뤽스 | 오딜로 글로보츠닉 | 에른스트 로베르트 그라비츠 | 이름프리트 에베를 | 쿠르트 폰 고트베르크 | 에두아르트 바그너 | 프리드리히 크뤼거 | 필리프 보울러 | 한스-아돌프 프뤼츠만 | 헤르베르트 바케 | 베른하르트 루스트 | 헤닝 폰 트레슈코프 | 발터 모델 | 한스 크렙스 이상 자살
헤르만 페겔라인처형 | 아르투어 네베처형 | 카를 오토 코흐처형 | 에리히 회프너처형 | 빌헬름 카나리스처형 | 카를-하인리히 폰 슈튈프나겔처형 | 볼프 하인리히 그라프 폰 헬도르프처형 | 지크문트 라셔처형 |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암살 | 프란츠 발터 슈탈레커암살 | 테오도어 아이케전사 |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암살 | 페르디난트 폰 자메른 프랑케네크암살 | 오스카 디를레방어의문사 | 롤란트 프라이슬러폭사 | 프리츠 비트전사 | 카를 항케 | 에른스트 하인리히 슈마우저 | 프란츠 치라이스
실종된
전쟁범죄
혐의자
하인리히 뮐러
기소되지 않은
전쟁범죄
혐의자
하인츠 라이네파르트 | 쿠르트 발트하임 | 디트리히 폰 콜티츠
생체 실험 T4 작전
생체실험 관련인물
요제프 멩겔레 | 에른스트 로베르트 그라비츠 | 카를 브란트 | 카를 게프하르트 | 호르스트 슈만 | 아리베르트 하임 | 카를 클라우베르크 | 지크문트 라셔
강제수용소 틀:나치의 주요 절멸수용소 | 다하우 강제수용소
기타 라이헤나우 강조 명령 | 정치장교 명령 | 국방군 무오설 | 나치독일 피해자 만들기
나치 전쟁범죄 부역자 안테 파벨리치 | 요제프 티소 | 살러시 페렌츠 | 비드쿤 크비슬링 | 이온 안토네스쿠 | 호리아 시마 | 브로니슬라프 카민스키 | 스테판 반데라 | 안톤 뮈서르트 | 그러시 요제프 | 루돌프스 방게르스키스 | 페케테헐미-체이드네르 페렌츠 | 헹크 펠드메이어르 | 루스커이 예뇌 | 아민 알후세이니 | 프란시스코 프랑코중립국
※ 문서가 있는 경우에 한해서 서술. 기소 여부 및 판결에 대해서는 각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 문서를 참고
※ 둘러보기: 틀:파시즘, 틀:나치즘, 틀:뉘른베르크 군사법정 전범재판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0 0;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CC0000 0%, #DD0000 20%, #DD0000 80%, #CC0000); color: #ffffff; min-height: 31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ffffff> 초대 제2대
발두어 폰 시라흐 아르투어 악스만
}}}}}}}}} ||
국가지휘자 및 국가 유겐트 총책임자
발두어 폰 시라흐
Baldur von Schirach
파일:BaldurVonSchirach.jpg
출생 1907년 5월 9일
독일 제국, 베를린
사망 1974년 8월 8일 (향년 67세)
서독, 라인란트팔츠
재임기간 히틀러 유겐트 총책임자
1931년 10월 30일 ~ 1940년 8월 8일
국가지휘자
1933년 6월 2일 ~ 1945년 5월 8일
정당
서명
파일:발두어 폰 시라흐 서명.svg

1. 개요2. 생애
2.1. 대학생 시기2.2. 나치당 활동2.3. 최후
3. 평가4. 매체에서5. 여담

[clearfix]

1. 개요

나치 독일 돌격대 대장, 히틀러 유겐트의 총책임자.

2. 생애

2.1. 대학생 시기

발두어 폰 시라흐는 나치의 주역 인물 가운데 가장 나이가 어린 막내였다. 그가 히틀러와 가까워졌을 때 나이는 고작 스무 살이었다. 귀족 출신의 그는 대학생일 때 아돌프 히틀러를 만나 나치의 활동범위를 대학으로 넓히라고 충고했지만, 지식인 계층을 혐오했던 히틀러는 그의 말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았다. 그러다가 히틀러의 연설을 듣고 열광하는 대학생들이 늘어나자, 히틀러는 생각을 바꾸었고, 그 바람에 두 사람은 가까워졌다. 훗날 그가 히틀러의 전용사진사 하인리히 호프만의 딸과 결혼할 때, 히틀러는 독일산 셰퍼드를 결혼선물로 주기까지 했다.

2.2. 나치당 활동

1930년대 초, 그는 기존의 모든 독일 청소년 조직을 하나로 통합하여 히틀러 유겐트를 의무화시켰다. 그는 거기서 나치의 미래가 젊은이들의 것이라는 감정을 강하게 심어주었으며. 그러한 미래를 위한 죽음은 가치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독일의 젊은이들을 히틀러에 열광했던 스무 살의 자신처럼 만들었으며, 이는 나치의 수괴라면 흡족할 수밖에 없는 결과였다. 이로써 나치는 시라흐의 이상이 뭐든 간에, 독일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수 있게 되었다.
파일:Baldur von Schirach.jpg
독일 국방군 군복을 입은 폰 시라흐.
이후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이 벌어지자, 입대해서 중위 계급으로 서부전선에서 종군했다. 특이하게 그가 속했던 유겐트 자체는 독일 국방군보다는 친위대에 더 연이 있음에도[1], 친위대가 아닌 국방군 소속이 되길 고집했다. 나치당 소속이라, 친위대에 가면 중위보다 높은 계급을 받을 수 있음에도 그랬다. 다만 돌격대에서는 상급집단지도자까지 승진했다. 후에 있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슈츠슈타펠 전체가 범죄조직으로 규정되었으므로 본의 아니지만 신의 한수였던 셈.

2.3. 최후

파일:Defendants_in_the_dock_at_the_Nuremberg_Trials.jpg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그는 할 말이라곤 오직 한 마디밖에 없으며, "나는 히틀러를 믿었다. 이 남자가 젊은이들을 행복하게 해주리라고 믿었다." 고 했다. 그는 슈페어처럼 재판에서 자신의 책임을 인정한 인물이었으며, 슈페어도 의사와의 면담에서 그가 가장 적극적으로 참회하고 있다고 진술한 바 있다. 그 점이 참작되어서 징역 20년을 선고받았고 슈판다우 교도소에 들어갔다.

슈판다우 교도소에서 20년간의 수형 생활을 마치고 석방되었을 때, 그는 더욱 볼품없고 허약한 남자로 변해 있었다. 게다가 눈의 한쪽은 실명한 상태였다고 한다. 그리고 부인은 그가 감옥에 있는 도중 1949년 7월에 이혼을 해 버렸다.[2] 1974년 8월 8일에 67세의 나이에 죽은 그의 묘비에는 자신의 선동을 따라서 죽음으로 헛되히 몸을 내던진 히틀러 유겐트 단원들을 추모하는 의미로 “나는 너희 가운데 하나이다“라고 적혀있다.

3. 평가

나치당의 주요 인물들이 본인들이 내세운 우월한 인물상과 상반되는 행보를 보였던 것처럼[3], 시라흐도 개인적으로 주장하는 바와 정반대 타입의 인물이었다. 그는 돌격대원 같이 저돌적인 인간과는 전혀 다른 인물이었다. 체격이나 외모도 볼품 없었고, 취미 역시 감성적이어서 예술에 관심이 많았으며 그 능력으로 히틀러를 사모하는 시를 쓰기도 했다.

그는 대단히 내성적인 성격의 사람이었고, 젊었을 때부터 이미 '가치 있는 죽음'을 깊이 동경할 정도의 인물이기도 했다. 그러한 '가치 있는 죽음'에 대한 동경이 히틀러의 선동과 당시 독일의 영웅주의적 분위기 등에 맞물리며, 그는 히틀러 유겐트 선전 활동을 행하여 수십 만 명의 청소년들을 유혹해 죽음으로 내몰기도 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자신이 오히려 유혹에 빠졌다며 진심으로 뉘우친 사람이었고, 선전 활동 이외에는 학살 작전 참여도 안 했고 해당 서류 작업 등도 맡은 바가 없기에 이렇다 할 악행도 별로 없었다. 그리고 자신의 선동 때문에 미치광이 어른들이 만든 전장에서 죽은 히틀러 유겐트들을 추모했다.

수많은 나치군 간부들과는 달리, 자신의 행동을 무엇 하나 부정하지 않고 죽는 날까지 반성하다 살아간 인물 중 한 명. 만약 나치에 가담하지 않았다면 그냥 평범하게 시인이나 문학인으로 살다 갔을지도 모른다.

4. 매체에서

영화 뉘른베르크에서 24명의 전범 피고인 중 한 명으로 등장. 20년형을 선고 받는다.

높은 성의 사나이 세계관에서는 나치가 승리했음에도 ' 나만 정상인' 포지션은 변치 않아서, 대대적으로 추진되던 러시아인 절멸 프로젝트를 기를 쓰고 막았다고 한다. 이후 차기 총통 후보로 거론되지만,[4] 안타깝게도 괴벨스에게 패하고 숙청당한다. 여주인공인 줄리아나 크레인이 진심으로 독일의 총통이 되길 바랬던 걸 보아, 추축국 치하의 식민지인들에겐 한줄기 희망이었던 듯. 아쉽게도 드라마판에선 별다른 언급이나 등장이 없다.

한국의 대체역사물 소설인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선 나치당과 민주주의 세력 간에 내전이 벌여지자, 히틀러의 명으로 유겐트를 전선으로 데리고 왔다가 발터 모델에게 미쳤냐며 멱살을 잡힌다. 다만 본인도 자신이 이건 아니라는 건 통감했는지, 내전이 끝나고 재판에서 반성하는 모습을 보이며 묵묵히 10년형을 받는다.

5. 여담

파일:external/s3.amazonaws.com/pnp290694.jpg

위 사진에선 꽤 마르게 나오지만 실제로 꽤 통통한 사람이였다. 누구세요

발두어 폰 시라흐는 20년 동안 감옥에서 살고 도중에 이혼도 당했지만, 적어도 말년에 참회한 덕에 의외로 자손들은 사회에서 성공한 사람이 꽤 있다. 자녀로는 안젤리카 베네딕타(1933~), 클라우스(1935~), 로베르트(1938~1980), 리하르트(1942~)가 있으며, 차남인 로베르트의 아들인 손자 페르디난트(1964~)는 변호사이자 작가이고, 삼남인 리하르트는 중국학을 전공한 학자이며, 리하르트의 딸 아리에데(1978~)는 철학자이자 작가, 저널리스트 및 비평가[5]이다. 역시 리하르트의 아들인 베네딕트(1984~)는 독일, 스위스 이중국적자로서 '베네딕트 웰스'라는 필명을 사용하는 소설가이다.

헨리 포드의 반유대주의에 영향을 받았다. 해당 문서 참조.

나치당의 주요 인물 중 한국인과 연이 있는 인물이다. 다름아닌 강세형. 독일 유학 당시 상당한 이념교류를 하고 히틀러 유겐트 소속으로 3년을 보냈다. 강세형은 해방 이후 이범석의 참모로 파시즘(나치즘에 가까운)의 이념을 개조 및 전파하였다.

[1] 무장친위대에는 아예 부대명이 히틀러 유겐트인 사단도 있었다! [2] 전 부인은 1992년 사망. [3] 괴벨스는 소아마비 환자였고, 힘러는 술조차 제대로 못 마실 만큼 병약했으며, 괴링은 비만에 마약 중독자였다. [4] 라이벌은 다름아닌 파울 요제프 괴벨스 헤르만 괴링이다! 명실상부 히틀러의 2인자였던 두 인물들과 겨룰 정도로 성장했다는 의미. [5] Deutschlandradio Kultur의 문학 비평가이며, 발트나 프랑크푸르터 알게마이네 자이퉁(FAZ) 등의 신문에 에세이나 칼럼을 싣기도 했다.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문서의 r374
, 번 문단
에서 가져왔습니다. 이전 역사 보러 가기
파일:CC-white.svg 이 문서의 내용 중 전체 또는 일부는 다른 문서에서 가져왔습니다.
[ 펼치기 · 접기 ]
문서의 r374 ( 이전 역사)
문서의 r ( 이전 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