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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나라 이웃나라/문제점/이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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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성 구성
윗첨자1: 舊 가로세로 세계사 1~4권.


1. 로마 왕정 및 그 이전 시대2. 로마 공화정 시대3. 로마 제정 시대4. 중세 시대5. 근대사6.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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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면개정판 - (12)
업그레이드판 - (18)

1. 로마 왕정 및 그 이전 시대

2. 로마 공화정 시대

3. 로마 제정 시대


서고트, 동고트 등과 가끔 연합해서 적어도 아이티우스 생존 때까지는 이런저런 게르만족들을 학살하고 다니던 일리리쿰 정예군도 실상은 그 조상 대부분은 게르만족이었으나 이들은 상술했듯 각자 개별적으로 로마군에 입대해서 로마화된 게르만인들의 후손이었기에 7세기에 아바르족 침공으로 완전 붕괴되기 전까지 끝까지 로마에 충성을 바쳤다. 로마화된 게르만족들 중 로마군을 장악한 권신들이 서로마 제국을 말아먹었다는 오해가 있고 그중 대표적인 자가 리키메르지만, 리키메르는 얼마든지 로마를 버릴 순간이 여럿 있었는데도 마요리아누스와 권력 투쟁하던 시기만 제외하면 그래도 자기 손해 안 보는 선에선 최대한 제국을 위해 충성했던 편이었다.[37]

4. 중세 시대

4.1. 로마 관련

4.2. 이탈리아 관련

5. 근대사

6. 현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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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지역을 가리키던 '갈리아 키살피나'부터가 알프스 이쪽의 갈리아라는 뜻이다. [2] 제우스=유피테르만 해도 시도때도 없이 인간 여자와 관계를 맺는다. 물론 유피테르가 최고신이라 그런 것도 있지만. [3] 늑대 자체가 마르스를 상징하는 동물로 대접받은 동물이다. [4] 아래에서 로마 왕국 부분을 주권국 로마의 역사가 아닌 에트루리아에 점령당한 시기로 둔 것과 이어지는 오류다. [5] 처음에는 루크레치아는 그를 거부했지만 섹스투스는 거부하면 너를 강간한 후 남자 노예를 데려와 너와 함께 죽여 네가 남자 노예와 놀아나다 죽은 것으로 하겠다고 협박했다. [6] 책에서 로마의 독립을 이끌었다고 나온 그 브루투스이며 책에서 나온대로 본인이 나서서 로마 시민들을 선동하여 타르퀴니우스를 쫓아내는데 앞섰다. [7] 주 타겟이 아동~청소년인 만화에서 유부녀가 강간당하는 장면을 대놓고 넣긴 어려웠기에 반쯤 고의적으로 들어간 오류라고 할 수 있다. [8] 이 부분만큼은 수정되었다. [A] 물론 이는 위에 나왔듯 오류 [A] 물론 이는 위에 나왔듯 오류 [11] 이유는 이후 그들에 대한 기록이 없다. [12] 상술했듯 이것도 오류다. 실제론 아이가테스 해전. [13] 한니발은 교묘하게도 파비우스를 실각시키기 위해서 남부 이탈리아를 털어다니면서 파비우스의 재산은 일절 건드리지 않았는데 이러자 로마 내에서는 '파비우스 저 양반 한니발과 짝짜꿍하는거 아니야?' 라는 불만이 생겼고(이유는 파비우스의 재산은 온전한 동안 자기네들 재산은 거하게 털리고 있었기 때문) 결국 파비우스는 실각한다. [14] 한니발 편을 든 이탈리아 도시인 카푸아를 로마가 포위한 카푸아 공방전 당시 로마군이 알레시아 전투마냥 포위망 외부에도 방책을 둘러 저항하자 포위를 풀도록 하기 위해 로마 근처에 직접 간 적이 있다. 하지만 한니발군이 공성전을 벌일 준비가 되지 않았고 로마군 역시 그 의도를 꿰뚫어보고 카푸아 포위를 풀지 않아 실패했으며, 카푸아는 결국 함락당한다. [15] 애초 이 나라는 자국군을 용병으로도 보내던 국가다. 용병은 기본적인 실력은 어느정도 보장되어있다는 소리니 누미디아의 군사력이 결코 약하지만은 않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 누마디아의 군사력이 약했다면 카르타고한테 나라 방어한다고 전 군사력을 본토에 묶어놔야 하는데, 그 상황에서 자국군을 용병으로 보낸다는 사치에 가까운 뻘짓을 벌일 리가... 오늘날로 따지자면 대한민국 국군이 북한의 위협 때문에 해외 파병에 소극적인 것을 들 수 있을 것이다. [16] 카르타고는 이 문제를 용병을 고용하는 쪽으로 해결했고 로마 역시도 시민병만으로 국방을 담당하지는 않았다. 비단 로마와 카르타고 뿐만 아니라 용병은 19세기 초반까지 각 나라 국방력의 주축을 차지했다. 스위스 용병과 세포이를 예로 들 수 있으머, 오늘날도 형식적이긴 하지만 남아있는 용병이 있다. [17] 사실 이건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이라, 이원복 작가가 잘 모르고 이렇게 썼다기 보다는 주독자층인 어린이들을 위해 일부러 순화한 것일 수도 있다. 카르타고 점령 후에 스키피오 아이밀리아누스의 부관이 실제 역사대로 생존자를 노예로 팔거나 학살하자고 권하는 모습이 나오는 것이 이런 추측을 뒷받침한다. [18] 다만 여기선 브루투스, ...너도냐?이다. [19] 물론 작품에서도 폼페이에 대해서 '폼페이는 지중해에서 날뛰는 해적들을 뿌리뽑는 쟁쟁한 실력자' 라고 한 줄 정도지만 활약을 적긴 했다. [20] 삼두정치 이전 히스파니아에서 사령관으로 근무하면서 군사적 업적을 쌓기는 했다. [21] 오히려 폼페이우스가 이집트를 빼앗을까 두려워해서 폼페이우스를 암살했다. [22] 사실 이러한 오해는 셰익스피어가 쓴 비극 '줄리우스 시저'의 영향이 크다. 흔히 안토니우스가 암살자들을 비방하며 한 것으로 알려진 연설문은 전부 셰익스피어의 창작으로부터 따온 것이다. [23] 생전에만 공개하지 않으면 된다. 당연히 사후에는 공개해도 아무 문제 없으며,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 따르면 안토니우스는 민중들을 대상으로 암살자들에 대한 비난 연설을 할 때 카이사르의 유언장을 언급했으며 그 내용 또한 공개했다. [24] 파르티아 원정 후 개선식. 사실 파르티아와의 전쟁은 사실상 패배에 가까운 무승부였으나 이후 다른 나라를 쳐서 물리쳤기 때문에 이를 이유로 개선식을 연 것이다. 하지만... [25] 사실 이것도 큰 문제였는데 원래 개선식은 승리를 로마의 신들에게 바치는 행사였기 때문이었다. 즉, 알렉산드리아에서 개선식을 연다는 것은 곧 로마의 신이 아닌 다른 나라의 신에게 승리를 헌납하는 것이므로 이는 매우 큰 문제였다. [26] 더 웃긴 건 동지중해야 안토니우스 영역이니 그렇다고 쳐도 서지중해는 옥타비우누스의 영역이었다. 자기 영역이라면 모를까 뭔 베짱으로 남의 영역까지 멋대로 다른 남에게 넘겨준다는 말을 했는지는 의문. [27] 사실 엄밀히 말하면 옥타비아누스는 카이사르의 양자 자격으로 그의 유산을 물려받은 적법한 후계자이자 카이사르파의 수장이었으며, 아무리 안토니우스가 날고 기어도 그 자리를 자신이 차지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래서 안토니우스는 카이사리온을 카이사르의 사생아에서 친자식으로 승격시켜 옥타비아누스의 정통성을 깨뜨리려 한 것이다. 서지중해에 대해 카이사리온의 몫을 주장한 것는 이런 맥락도 있었던 것. 물론 카이사르는 카이사리온이 있는 것을 알면서도 철저히 사생아로만 취급했고 자신의 유언장에 카이사리온에 대해 단 한 마디도 적지 않았고 오직 옥타비아누스만을 자신의 후계자로 지명했다. [28] 여담으로 클레오파트라가 안토니우스에게 보내는 편지에 나일 강에 해가 지고 푸른 달이 피라미드에 걸리면...이런 내용이 나오는데 해는 서쪽에서 지고 달은 동쪽에서 뜨는데 앞부분에서 피라미드는 나일 강 서쪽에 지었다고 서술했기에 앞의 내용과 맞지 않는다. [29] 무려 2개 군단이 한꺼번에 없어졌기 때문에 힘과 치안의 공백이 생겨 게르만족을 통제할 수 없게 되었고 총독이었던 바루스 또한 게르만족의 사정에 무지해 실정을 저질렀기 때문에 게르만족의 반발이 심한 상태였다. [30] 둘이 동갑이라 후계자라는게 의아할 수 있는데 평소 병약했던 아우구스투스와 달리 강건했던 아그리파가 더 오래 살것이라 예상해 후계자로 내정했다. 그러나 정작 더 오래 산 쪽은 아우구스투스였다는 게 아이러니. [31] 가장 극단적인(?) 힌두교의 경우 타종교의 신들을 힌두교의 신들 중 하나로 취급해 절대 힌두교적 요소를 버리지 않는다. [32] 오죽하면 검투사 공급마저 어려워 이전에는 죽이는 일이 많았지만 말기쯤 되면 죽이는 대신 몸에 상처를 내는 것으로 완화했다. 검투사에 집어넣을 노예가 없어서 마냥 죽이기만 하면 사람이 줄어들 마당이니 죽이지 않게 된 것. [33] 단 로마는 속주민들을 어느 정도 포용하기는 했다. 속주 출신 황제나 이민족 피가 섞인 황제가 나오기도 했고.그리고 자민족 아니면 야만족이라고 무시한 건 비단 로마 제국 뿐만 아니라 웬만한 고대,근대 국가와 제국들도 마찬가지였다.당장 로마인들도 한때 그리스인들에게 바르바로이 취급을 당한 적이 있었다. [34] 실제로 이랬던 사람이 있는데 네 명의 황제의 해의 세 번째 황제인 비텔리우스로, 엄청난 식탐으로 온갖 만찬과 연회에 돈을 들이부었으며 심지어 음식을 먹어 배가 부르면 깃털로 목구멍을 간질여 게워낸 뒤 또 먹는 짓을 반복했다.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이걸 로마의 귀족들이 대개 그랬다고 부풀려 서술한 것. 당대 로마에서도 이 짓거리를 미친 짓으로 여겨 엄청난 욕을 먹었고 비텔리우스는 쫓겨나 죽었다. [35] 물론 이것과는 별개로 귀족들이 문제가 많았던 건 맞다. 어느나라건 기득권을 쥔 귀족들은 더 많은 기득권을 쥐기 위해서 분주했고 시대가 시대이니 더 많은 땅이 그들에게 더 많은 기득권이 되는 것이기에 어떻게든 땅을 더 얻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게 합법적인 방법만 썼다면 모를까 그러지는 않았다. 당장에 그라쿠스 형제도 이러한 상황에서 민중들이 너무 가난해지자 이를 개선해보기 위해 나온 개혁가였다. 그러나 원로원을 위시한 귀족들은 이런 '민중파'들을 가차없이 때려잡았고 결국 이렇다할 대책이 마련되지 못했다. 그래도 일단 로마의 귀족들이 먹고 놀기만 한건 오류. 이에 가까운 집단은 사실 중국 위진남북조시대 문벌귀족이나 일본 헤이안 시대의 귀족에 더 가깝다. [36] 이렇게 세워진 사산 왕조는 7세기까지 로마와 계속 충돌하는데 이 충돌은 해당 시기에 발흥한 이슬람에 의해 사산 왕조가 멸망하는 것으로 끝난다. 물론 동로마도 시리아, 이집트 등을 잃어 영토가 반쪽이 난다. [37] 리키메르는 로마 제국에게 충성을 바치던 스틸리코가 어떻게 버림 받았는지 익히 아는 세대였다는 점도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다. [38] 심지어 동로마는 1204년의 제4차 십자군 전쟁으로 한 번 멸망해서 니케아 제국이 그 명맥을 이어가다 1261년에 가까스로 부활한 전적이 있으며, 역사학자들은 이 사건이 동로마의 실질적인 쇠락을 초래했다고 보고 있다. 만약 1261년에서 1453년까지로 한정한다면 앞의 서술은 맞는 것이 된다. [39] 본인은 책에서도 나왔듯 무솔리니를 써줬다. 물론 그건 연합군이 이탈리아에 들이닥치자 무솔리니를 팽해버렸으니 실수했다 쳐도 [40] 심지어 살로 공화국 시기 북부에서는 파르티잔 운동이 활발이 벌어졌는데 이들 파르티잔은 좌파였다. 즉 왕실의 자폭으로 북부에서 좌파 지지를 강하게 만들었던 셈. [41] 물론 움베르토 2세도 순순히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았고 왕정 지지가 강하게 나온 남부 역시도 그러하였으나, 움베르토 2세는 대법원에서 그의 소송을 기각하자 받아들이고 남부는 움베르토 2세를 왕으로 모시고 북부에서 떨어져나가자는 주장까지 했지만 움베르토 2세가 나라를 반쪽낼 순 없다고 반대해서 무산되었다. 심지어 왕정 지지자들도 사실 내전까지 일으켜가며 왕정을 유지하려 했을 정도는 아니었다. 거기다 남부에서도 공화국 지지율은 20% 정도는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