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나라 이웃나라의 문제점 | |||
네덜란드 | 프랑스 | 독일 | 영국 |
스위스 | 이탈리아 | 일본 | 한국 |
미국 | 중국 | 에스파냐 | |
발칸반도 / 동남아시아 / 중동 /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1 | |||
오스만 제국, 튀르키예 | 러시아 | 인도와 인도아대륙 | |
공정성 | 구성 | ||
윗첨자1: 舊 가로세로 세계사 1~4권. |
수정된 부분은 다음 표시.
21세기판 - (03)
전면개정판 - (12)
업그레이드판 - (18)
1. 소개(Introduction)
- 프랑스, 에스파냐 등 남유럽쪽의 인종인 라틴족이 검고 곱슬곱슬한 머리와 까무잡잡한 피부와 작은 키를 가진 인종으로 백인이 아니라 마치 무슨 멕시코, 브라질 등 중남미 라틴 아메리카의 인종이나 미국의 히스패닉과 비슷한 외형을 가진 것으로 묘사해놓았는데 [1] 과거 로마제국에서도 그러했고 현재도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등의 국민들을 보면 알겠지만 그들도 게르만, 슬라브 계열 유럽인들과 큰 차이는 나지 않는 백인들로 이는 완전히 틀린 설명이다. 물론 남부 이탈리아를 비롯해 유럽 남반부에는 비교적 짙은 색의 피부와 검은색, 흑갈색의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외모를 가진 유럽인들도 많고 북미에도 그런 서양인들은 많지만 그래도 그렇게 라티노와 히스패닉을 구분하지 못 하는 것에 가까운 설명은 분명히 잘못된 표현이다. 그 때문에 어린 시절에 먼나라 이웃나라를 본 사람이 프랑스에 백인들이 많은 것과 로마를 다룬 매체에서 백인들이 나오는 것을 보고 뒤늦게 사실을 알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 역시 심각한 오류임에도 개정판까지 계속 수정하지 않고 있는 부분인데 작가가 유럽에 오래 있었다는 것을 감안했을 때 매우 이상한 부분이다. 다만 상술했듯이 남유럽 쪽은 서양인 하면 떠오르는 금발벽안을 비롯해[2] 밝은 색의 머리카락과 피부를 가진 백인들보다는 흑발흑안이 많은 건 사실이긴 하다. 하지만 이 부분 이후로는 라틴족도 안 까무잡잡하게 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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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어와
핀란드어가 한국어와 비슷한 이유는
칭기즈 칸의
몽골 제국이 동유럽을 정복했기 때문이다.
☞ 마자르족과 핀족은 몽골 제국 이전에 이미 유럽에 정착했고 개정판에서는 수정되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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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은 유럽과 달리 한국, 일본처럼
공동체주의가 자리잡은 나라다.
☞ 당시 이원복이 내공이 부족했던 점이 보이는 오류다. 미국이 유럽에 비해서는 비교적 보수적인 성향이 있지만, 공동체적이라고 하는것은 곤란하며, 오히려 개인주의 성향은 미국이 유럽보다도 더욱 강하다. 게다가 미국은 주별로 법/행정체계/사법체계가 따로 있을 정도로 하나의 국가라기보단 "연방"에 가깝다. 실제로 미국인들은 "미국 출신이다"라고 하기보단 "~주 출신이다"라고 자연스럽게 말하는 경우가 많다. 심지어 다민족국가이다. 그런데 민족/국가 개념이 유독 강한 한국/일본과 비교하는 건 말도 안된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주류가 아니며 약 60%를 차지하는 백인도 몇백년 전에 이민 온 사람들인데다 여러 유럽 국가들이 섞여있다. 한 마디로 우리나라처럼 나라 전체를 포괄하는 "미국 민족"이라는 건 존재하지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스스로를 미국인이라는 아이덴티티는 있지만 더 파고 보면 출신 주에 대한 애착이 더 강하며, 민족 자체에 대한 애착은 그리 없다. 다만 이와 별개로 세계 최강국인 미국의 국민이라는 것에 대한 자부심은 굉장히 강한 편으로, 유럽 국가들은 스포츠 대회나 정말 중요한 행사에도 국기에 대한 경례나 국가 제창은 하지 않는 편이라는 점과 비교하면 이 점이 두드러진다. 대신 좀 시간이 지난 뒤에 그린 미국편에서는 미국은 하나의 나라가 아닌 개별 주로 살펴봐야 하며 대체로 개인주의가 자리잡았다고 제대로 나와 있다. 그리고 에스파냐 편 이후 나온 개정판에서 삭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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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일본, 한국은 잘 사는 것은 개인이 만든다고 생각하지만 유럽은 국민이 잘 사는 것은 국가가 도와준다고 생각하는데
존 F. 케네디 미국 대통령의 '국가가 국민을 위하여 뭘 할수있느냐고 묻지 말고 국민이 국가를 위하여 뭘 할수있느냐를 물으시오'는 개인이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한다는 뜻이므로 유럽인들은 분노하였다.
☞ 케네디 대통령의 발언은 개인이 국가를 위해 희생하는게 아니라 개인이 국가를 좋은 쪽으로 변화시켜야 한다는 뜻으로 오히려 국가가 좋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유럽인의 사고와 일맥상통한다(...). 그런데 개인이 국가를 위해 희생해야한다고 오해한 유럽인들이 국가가 국민을 위해야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12권 미국 대통령편에서 그로버 클리블랜드가 국민이 국가를 도와야지 국가가 국민을 도와서는 안된다며 노동운동 지원 거부를 언급할 때 케네디의 발언이 일맥상통한 말이라고 인용되기도 했다. 애국가 4절의 괴즐나사가 정권이 아니라 국민 공동체를 의미하는데 정권으로 오해하는 것과 같다. 문맥을 무시한 인용 항목 참조.
- 미국 문화를 영국 문화와 동일시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한국인들이 흔히 생각하는 서양 문화가 미국 문화라는 점을 들어 미국이 곧 서양의 다가 아니라는 설명을 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영국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유로 미국 문화는 곧 영국 문화라고 언급하며 한국인들이 생각하는 서양 = 영국이라고 멋대로 판단해버린다. 하지만 미국은 영국으로부터 분리된지 200년이 넘게 지났으며, 영국 문화가 기반이 된 것은 사실이나 지리, 기후적 특성과 흑인과 원주민, 그리고 수많은 이민자들이 건너오며 섞인 문화까지 짬뽕되어 현재의 미국 문화는 결코 영국 문화가 흡사하다고 보기 어렵다. 굳이 따지자면 '서양 = 영국으로 오해'가 아니라 '서양 = 영미권으로 오해'정도로 해야 적절하다. 다만 신판에서는 영국의 크리켓과 미국의 야구를 예시로 들긴 했다. 덤으로 아메리칸 브렉퍼스트도 잉글리시 브렉퍼스트에서 유래했으니 이것도 영국의 흔적이라 할 수 있다.
- 오리엔트에서는 신을 인간과 다른모습으로 묘사하고 옥시덴트에서는 인간과 같은 모습으로 묘사한다는데 실제로는 그리스에서도 일부 신은 인간과 다르게 묘사했으며[3] 다른 문화권에서도 신을 인간형으로 묘사한 경우는 매우흔하다.오히려 이집트처럼 동물형이 많은 경우가 특이한 경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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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주의가 사실주의를 완전히 몰아냈다.
☞ 실제로는 그렇게까지 널리 퍼지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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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반적으로 북유럽의 출산율보다 남유럽의 출산율이 높고 또한 남유럽인의 평균 자녀수가 4~7명이라고 설명하였다.
☞ 2010년 기준으로 아일랜드와 아이슬란드의 경우 출산율이 2명대 초반정도다. 한편 영국과 스웨덴, 노르웨이의 경우 합계 출산율이 1.9명, 벨기에, 핀란드, 덴마크 1.8명대이다. 이는 주요 남유럽 국가들인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스, 포르투갈 등의 출산율 1.2-1.4명대 보다 상당히 높다. 다만 독일이나 스위스, 오스트리아의 출산율은 1.4-1.5명대로 여전히 낮은 편이다. 따라서 단정적으로 맞다고 보기 어려운 진술이다. 하지만 작가가 유럽에 유학하고 창작을 위해 체류했을 당시라면 1975~1984년 귀국시까지이다. 당시 주요 북유럽 국가의 출산율이 피임약의 보급과 여성 사회 활동 활성화로 출산율이 2명대 중반 수준에서 1명대 후반 정도로 떨어졌었다. 이는 동시기 소련과 호주, 미국, 캐나다에서도 피임약이 널리 보급되면서 벌어졌던 현상이기도 했다. 독일에서도 이와 비슷한 이유로 출산율이 2명대 중반에서 1명대 중반 수준으로 급속히 떨어졌었다. 그에 비하면 남유럽 국가들의 당시 출산율은 다소 높았다. 1970년 기준으로 스페인 2.8명 이탈리아 2.4명이다. 물론 70년대 말-80년대 중반을 거치면서 1명대로 떨어졌다. 때문에 작가가 유럽에 유학할 당시의 기준으로는 작가의 설명이 아주 틀린 것은 아니다. 요약하면 연재 초기인 1970년대 후반만 해도 얼추 맞긴 했지만, 책이 단행본으로 발간된 1987년쯤엔 알바니아(1987년 기준 3.13명)를 제외한 거의 모든 남유럽 국가들의 출산율이 이미 1명대로 떨어졌을 때라는 것이다. 1987년 다시 남유럽 국가들의 출산율은 이탈리아 1.28명, 에스파냐 1.47명, 포르투갈 1.57명, 그리스 1.50명, 불가리아 1.96명, 몰타 1.98명이다. 즉, 시간의 간격 때문에 설명이 틀리는 경우가 발생한 것. 작가는 자신의 다른 책인 현대문명진단에서는 남유럽의 저출산 경향을 다루면서 여성의 사회 진출이 활발해져서 아이를 많이 낳는 건 옛날 얘기가 되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정작 먼나라 이웃나라에서는 그 내용을 여전히 반영하지 않고 있다. 다만 1편 네덜란드 편 개괄 파트에선 남유럽의 출산율이 북유럽보다 높았지만 세상이 변해 북유럽보다 낮아졌다식으로 작가가 깜빡하고 안 넣을 가능성이 높긴 하다. 아울러 먼나라 이웃나라 초판본 네덜란드 편에서도 네덜란드의 인구증가율이 타 유럽국가에 비해 높다라는 얘기를 서술해 놓은 적이 있다. 실제로 1950년대 네덜란드 출산율이 타 서유럽 국가에 비해서 괄목할 정도로 높은 편(3명대)이었던 영향이다. 개정판부터는 너무 오래된 정보라 판단해서인지 삭제했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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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유럽에서는 어머니가 중심적이고 북유럽에는 아버지가 중심적이다.
☞ 이건 옛날 풍습을 현대로 답습한 오류라고 볼 수 있는데 남유럽의 라틴 국가에서도 가부장적인 가정도 있고 북유럽 게르만 국가에서는 남녀 동등하게 있는 경우와 어머니 중심체계가 있다. 책처럼 절대적이지 않다. 남유럽에서는 어린이를 소중히 하고 북유럽에서는 어린이가 크면 담을 쌓는다 하였는데 그러면 왜 남유럽에서는 가족 갈등이 없어야 하는 게 옳은데 왜 있는가? 남유럽에서도 어린자녀와 담을 쌓는 경우도 있고 북유럽에서는 어린자녀와 성인이 돼서도 친근한 경우가 있다. 그 나라의 사회 습성을 일방적으로 보는 오류이다. 편견을 심어줄 여지가 있어서인지 개정판에서는 삭제되었다.(12)
- 유럽에서 나라가 기원전 6세기에야 세워졌다는데 실제로는 에게문명을 빼더라도 기원전 8세기부터 이미 폴리스 시대가 진행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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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리아 전쟁 당시 갈리아인들은 야만인이 아닌 상당한 문명을 가진 사람들이었으며,
바지나
전차 등의 로마인들이 모르는 문물까지 가지고 있어 로마인들이 이를 배워왔다.
☞ 갈리아인들이 야만적이지 않다는 서술은 틀리지 않았으나[4], 전차나 바지를 로마인들이 배워왔다는 서술은 문제가 있는 부분이며 전차는 이미 당대 기준으로 수천 년 전부터 중동 지방에서 쓰이기 시작했고, 당대에는 이미 정주민들이 기병을 체계적으로 육성할 수 있게 되면서 도태되어 가는 병기로, 로마인들은 갈리아 전쟁 훨씬 전에 중동 국가들과의 전쟁에서 전차를 여러 번 격파한 적이 있었다. 즉, 전차를 켈트족에게 배워 왔다는 서술은 틀린 것이다. 바지를 갈리아인들에게 배워왔다는 서술은 완전히 틀리지 않았으나, 초기에는 바지를 야만인의 상징으로 여겨 멸시하는 경향이 더 강했다. 결과적으로 로마인들 역시 바지를 복식문화로 받아들이게 되므로 틀린 서술은 아니지만. 초판에는 프랑스판에 있었고 그래서인지 예전에는 먼나라 이웃나라/문제점/프랑스 문서에 있었으나 김영사에서 새 먼나라 이웃나라가 나온 후 네덜란드로 옮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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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를 갈라먹겠다고 싸운 못난 카롤루스 대제의 후손들?
☞ 루트비히 1세의 세 아들인 샤를 2세(서프랑크 왕), 로타리우스 1세(중프랑크 왕), 루트비히 2세(동프랑크 왕)이 서로 나라를 갈라먹은 이유는 프랑크 왕국의 전통적인 계승방식에 따랐기 때문이다. 이미 프랑크 왕국의 시조이자 메로비우스 왕조의 개창자인 클로비스 1세부터가 자신의 나라를 나눠서 물려주었기에[5] 루도비쿠스 1세 역시도 세 아들들에게 나라를 갈라서 물려준 것이다.[6] 이 외에도 여러 이유가 겹쳐져서[7] 나라를 셋으로 나눌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후에도 분할 상속제는 계속 되어서 유럽에서는 나라가 분열되었다 합쳐졌다를 반복했다. 단 작위는 한 명이 물려받아서 루트비히 1세의 아들들도 장남이 황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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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왕이 신성 로마제국 황제 자리를 힘으로 차지했다?
☞ 합스부르크 가문은 대공위 시대 이전까지는 왕이 아닌 백작이었으며, 세력도 극도로 미미한 편이었다. 오히려 황제 자리가 힘만 들고 권력은 없는 자리로 판단해 꺼린 영주들이 일부러 허수아비를 옹립한 것으로, 오스트리아가 강대국의 반열에 오른 것은 오랜 기간에 걸쳐 아주 약간의 특권과 결혼 동맹으로 서서히 세력을 확장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왕작위도 아니다.
2. 종교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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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에서 성상이 모두 파괴되고, 교회가 관광 자원으로서 가치를 잃어버리게 된 계기는
종교개혁 직후 전 국민이 개신교로 개종했기 때문이다.
☞ 시간 순서 묘사가 잘못되었다. 종교개혁과 성상 파괴사건이 독립전쟁으로 불리는 '80년 전쟁'의 발단 중 하나가 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네덜란드는 17세기까지 가톨릭 위주의 국가였고, 개신교도들도 처음에는 독립보다는 지배자의 선처를 더 원했다. 침묵공 빌럼도 전쟁 직전까지는 루터파였고, 처음에는 오히려 칼뱅파들의 성상파괴 소요를 진압하기도 했다. 개신교가 완전히 퍼진 건 휴전 후 독립된 공화국으로서 틀이 잡혀나간 17세기 중반 이후이며, 교회 건축이 볼품없어진 것도 이 때의 일이지, 독립전쟁 직전 성상 파괴사건 때문에 그리 된 게 아니다. 이 부분은 네덜란드/역사 문서의 4.3.1항목을 참조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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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신교는 성경 구절 풀이를 놓고 목사들끼리 다투다가 우연히 분열된 것이다.
☞ 반은 맞으나 반은 틀린 말이다. 후대 교파의 분열은 교리해석이나 예식 차이 등으로 갈라진 경우도 있으나. 초기 개신교는 종교개혁 시기부터 서로 다른 개혁가들에 의해 나온 다른 교파가 가톨릭에 함께 맞서기 위해 개신교라는 이름 앞에 합쳐진 것이지, 해당 페이지에 묘사된 것 마냥 최초에는 단일 조직이었다가 장로교 성결교 침례교... 식으로 나뉜 게 아니다.
- 가톨릭의 비율은 일정한데 비해 개신교 비율은 감소하는 이유 중에 "그들 모두가 기존의 것을 배신하고 개신교에 붙은 거라서 또 배신하지 않을 이유가 없다"라는 개신교 전체를 매도하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8]
- 이단으로 분류되는 여호와의 증인을 평범한 개신교 교파처럼 묘사해 놨다. 개정판에서는 한술 더 떠서 모르몬교까지 나왔다(...). 이들은 주류 교단에서는 이단 취급받는다. 명백한 오류.
3. 영란전쟁 및 네덜란드의 몰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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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경
올리버 크롬웰의
항해조례 발표로 일어난 영국-네덜란드 전쟁에서 네덜란드는 영국에게 패하고 제해권을 완전히 내준다.
☞ 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 이후에도 네덜란드는 그동안 축적해온 막강한 부를 바탕으로 여전히 영국이 얕잡아 볼 수 없는 해군력을 가지고 있었다. 영국과 네덜란드는 이후로도 3차례에 걸친 전쟁을 벌였으며 2차 영란전쟁에서는 절치부심하며 힘을 기른 네덜란드 해군이 복수전에 나섰다. 이때 영국은 페스트와 런던 대화재 등으로 국력이 약간 약해진 시기였고 네덜란드의 뒤에는 프랑스가 버티고 있었다. 결국 네덜란드가 템즈 강을 봉쇄하는 설욕전을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루이 14세 때 프랑스-영국 연합군이 네덜란드를 침공하면서(만화에서는 프랑스 단독 침공처럼 묘사됨) 큰 타격을 입은 네덜란드는 이때 완전히 몰락하고 만다. 물론 이 만화에서도 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의 패배는 네덜란드의 몰락의 시발점이었고 프랑스의 침공 때 결정적인 타격을 입은 것으로 서술했기에 완전히 틀린 서술은 아니긴 하지만, 1차 전쟁이 영국의 우세로 끝을 맺긴 했어도 만화에서처럼 제해권을 그때 몽땅 다 넘겨준 건 아니었다. 말레이 지역을 놓고도 영국은 무조건적인 압력보다는 타협을 선택해 말레이 반도는 영국이 섬은 네덜란드가 차지한다는 조건을 달아서 말레이 반도를 차지했다. 이렇게 해서 탄생한 게 말레이시아와 인도네시아. 그쯤부터 영국과 프랑스에 밀리기 시작하여 결정타는 명예혁명 직후의 영국-네덜란드 연합군 VS 프랑스군의 영향이다. 영국-네덜란드가 이기기는 했는데 두 나라의 국가원수인 윌리엄 3세가 프랑스의 재침공에 대비하는 과정에서 영국은 해군, 네덜란드는 육군을 특화시켰는데 그 덕에 영국의 해군력이 네덜란드를 능가하기 시작하면서 네덜란드가 몰락하기 시작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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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보나파르트는 무능한 군주였으며 너무 무능한 나머지 네덜란드인들의 지지도 못 받고 왕위에서도 내려와야 했다?
사실과 다르다. 실제로 군사적 재능은 시원치 않았고 군주로서도 존재감이 없었지만 그래도 나폴레옹이 낙하산으로 꽂아준 친인척들이 죄다 무능하고 부패한 와중[9] 다행히 루이는 멀쩡해서 외려 네덜란드 사람들의 찬사를 받았고 나름대로 업적도 있었으며 무엇보다도 루이 자신이 비록 낙하산으로 왕이 된 외국인 왕이지만 1807년 화약선 운반선 폭발, 1808~1809년 대홍수 당시 네덜란드 국민들과 함께 추모하는 등 외국인 출신 왕치고는 드문 행보를 보여 네덜란드인들의 호감을 샀으며 국채 이자 발급을 중단하는 법안으로 마련된 자금 중 일부를 사회복지 자금으로 쓰기도 했다. 또한 박사들을 초빙해 네덜란드어를 배우려고 할 정도로 열의도 있었다. 퇴위 역시도 당연히 무능과는 상관이 없어서 강제로 쫓겨난건 사실이지만 루이가 물러나야 했던 이유는 대륙 봉쇄령에 회의적이었던 루이가 참여는 했어도 소극적으로 일관해서 이게 빌미가 되어 물러난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해 형 덕에 왕이 된 낙하산 인사는 맞지만 그렇다고 너무 무능하여 지지도 못 받고 자리를 못 지켰다는 평을 들을 정도로 무능한 것은 아니었고 퇴위 부분은 명백하게 잘못 서술되었다.
4. 식민지 관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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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는 영국에게 제해권을 내준 이후 다른 열강들과는 대조적으로 자신들의 식민지에게 우호적인 정책을 펼쳤으며 과거 식민지 출신 국가들에게도 더 우호적인 정책을 펴고 있다.
☞ 네덜란드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인도네시아에서 보인 식민지 독립운동 유혈 진압 등을 찾아 보면 그리 썩 양반은 아니라고 할 수 있다. 2000년 <주간조선>에 게재된 현대문명진단 - 안네 프랑크를 밀고한 사람들 편과 가로세로 세계사 동남아편에서 이 점을 짚고 넘어간다. 다만 말루쿠 군도의 경우 주민 대다수가 기독교에 친네덜란드 성향으로 인도네시아 독립에 반대했고 독립 직후에도 한동안 남말루쿠 공화국을 만들어서 인도네시아 중앙정부랑 대립하기도 했었다. 결국 인도네시아에 강제 병합되자 일부는 네덜란드에 집단으로 이주하기도 했었는데 이들이 바로 만화에서 설명하는 암보네제(Ambonese, Molukkers)다. 관련 기사 또한 네덜란드에서 인도네시아 요리가 대중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는 인도 요리나 중화요리처럼 다소 변형된 것에 가깝다. 가로세로 세계사에서는 이러한 인도네시아의 식민지 시절의 네덜란드의 악랄함을 실어 가령 인도네시아를 장악할 때 각 섬을 이간질해서 서로 다투게 했다든지, 발리 왕국이 1905년에야 붕괴했다든지, 수마트라 섬의 아체 왕국이 40년을 맞서다가 1904년에야 굴복했다는 내용이라든가 디파느가라의 입을 빌려 "기아, 콜레라로 죽은 자바인이 20만이다!" 라는 서술을 넣는다든지, 인도네시아가 독립하려고 네덜란드와 싸울 때 장면에서 네덜란드 역사의 오점이라 서술하면서 수카르노의 입을 빌려 "비인도적이고 잔인한 식민 통치자인 네덜란드가 계속 인도네시아를 지배하는 게 옳소?", "저런 잔혹한 살육자들에게 미국이 마셜 플랜이란 이름으로 전후 복구비를 대주는 게 과연 정당한 일인가?", "인도적 차원의 마셜 플랜 자금으로 네덜란드는 침략전쟁을 진행, 지금도 인도네시아인이 죽어가고 있지 않은가?" 라며 미국과 유엔에 압력을 넣는 장면을 넣는 등 확실하게 네덜란드의 인도네시아 지배는 다른 나라의 식민지 지배와 다를 바 없음을 보여 준다.
5. 안네의 일기 관련
안네의 일기와 관련된 내용은 개정판에서는 삭제되었다.(12)-
안네 가족의 은신처는 원래 살던 집 바로 옆에 있는, 원래 집과 이어져 있는 집이었다.
☞ 실제로는 안네의 아버지 오토가 일하던 회사 건물 안에 숨겨진 공간이었다. 상식적으로 멀쩡한 집이라면 나치의 이목을 피해 몇년 간 은신해 있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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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네 가족 4명과 그의 신임하는 동료 페터네 가족 4명이 은둔지로 숨어들었다.
☞ 실제로 안네의 일기를 보면 페터네 가족은 모두 3명인데 마치 페터 말고 다른 딸 하나라도 있는 것처럼 그려놨다. 실제로 마지막 1명은 페터네 가족과 별 상관 없는 동네 치과의사 프리츠 페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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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네의 어머니와 언니는 가스실에서 숨을 거두었다.
☞ 실제로 안네의 어머니 에디트는 1945년 1월 6일에 아우슈비츠에서 식량 부족으로 인해 사망했고, (또는 독일 경비병이 큰딸 마르고를 강간하려 하자 몸을 던져 딸을 지키려다 그 병사에게 구타 당하고 끌려간 후 죽었다는 설도 있다) 언니 마르고는 같은 해 2~3월경 즈음에 동생처럼 티푸스로 사망했다. 8명의 은신처 일원 중 실제로 가스실에서 사망한 인물은 페터의 아버지 헤르만 판 펠스가 유일하다.
- 안네의 일기를 설명하면서 네덜란드어 표기랍시고 'Dagebuch'라고 써 놓았는데, 저건 독일어 표기다. 아니, 독일어 표기의 오타다. (정확한 독일어 표기는 'Tagebuch'이다.) 실제 네덜란드어로 일기는 Dagboek이라고 쓴다. 사전만 찾아봐도 쉽게 알 수 있는 부분에서 범한 황당한 오류.
- 안네의 일기를 발견한 경위 역시 여기서는 가족을 모두 잃고 홀로 살아남은 안네의 아버지 오토 프랑크가 은신처에서 버려진 채 나뒹굴던 안네의 일기를 발견한 것으로 되어있다. 실제로는 오토의 여비서 출신 회사 직원이던 미프 히스(Miep Gies)가 게슈타포가 은신처를 습격했을 때 안네가 쓴 일기를 서류철에 재빨리 쓸어담아 보관한 뒤 종전 이후 오토에게 넘겨준 것이다.
6. 기타
- 103페이지에서는 갈리아에서 루그두눔이 중심도시라고 하고 113페이지에서는 루테티아가 중심도시라고 한다.
- 163페이지에서는 말풍선 1개가 비어 있다.
- 166페이지에서 카롤루스가 816년에 사망한다고 하는데 실제로는 814년이다.
- 네덜란드 반이 간척지라고하는데 실제로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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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는 둑이 무너져도 물에 잠길 걱정이 없다.
☞ 물론 둑이 무너져서 물에 잠긴 적이 여러 번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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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에서는 전국의 운하가 모두 얼어붙으면 전국 일주 스케이트 대회가 열린다. 십년에 한번 열릴까 말까한 대회로 현재까지 마지막 대회인 1997년 대회의 우승자는 "어느 한 무명의 축산업자"다.
☞ 엘프스테덴토흐트(Elfstedentocht)라는 대회를 말하는 것인데 이 대회는 전국 일주가 아니라 프리슬란트 주만 일주하는 대회이다. 1997년 대회에서 "어느 한 무명의 축산업자"가 우승을 했다고 나왔었는데 실제로 헹크 앙에넌트는 이미 1995년에 프로로 "전향"한 선수이며 프로가 되기 전 직업도 축산업자는 아니었고 방울양배추(Brussels sprouts)를 기르는 채소 농부였다. 축산업자가 우승한 년도는 1981년도다.이 부분은 2012년 개정판에서 수정됐다.(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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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덴뿌라 과식으로 죽었다는 설을 정설로 써 놓았다.
☞ 정확히는 "덴뿌라를 너무 많이 먹어서 사망했대."라고 써 놓았다. 이 설은 신빙성이 낮다. 그가 덴뿌라를 먹은 때는 1615년 1월 중순쯤인데, 도쿠가와가 사망한 시기는 1615년 4월이기 때문. 무슨 맹독 같은 게 덴뿌라에 들지 않은 이상 4개월도 안 되어서 죽는 건 좀 무리다. 현재는 위암을 앓아서 그가 직접 약을 만들었다는 기록으로 봐서 위암 악화로 죽었다는 설이 신빙성을 얻고 있다.[10] 그리고 사실 죽을 때 75세였던지라 오히려 당대 관점서는 충분히 천수를 누리고 간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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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는 마약을 전면 허용한 이후로 마약 중독자 증가가 둔화되었다.
☞ 이 부분은 동성애 낙태 안락사 관련 사항과 함께 고려원 1987년판이 아닌, 김영사로 판권이 막 넘어간 1998년판부터 추가된 묘사이다. 엄밀히 말하면 작가도 당시 시류에 맞춰서 낙관적으로 묘사한 것에 가깝다지만, 실제로 2010년대에 들어 네덜란드의 마약 정책은 이미 당국에서도 실패를 인정한 상황이다. 클라스 브뢰인스마(Klaas Bruinsma) 같은 갱스터들이 네덜란드로 몰려들어와 마약 사업에 암약하여 치안이 악화되고 내외국인 중독자들이 증가하는 결과만을 불렀기 때문이다. 결국 2012년 이후로는 타 국가들과 거꾸로 마약 규제로 선회하게 되지만 이미 몇 십년 전부터 마약사범과 해당 사업에 뿌리깊게 박힌 갱스터들이 활보하고 있는 바람에 너무 늦은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네덜란드는 마약 완화 정책으로 인해서 유럽판 카르텔 국가라는 오명을 전략해버리고 말았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네덜란드/사회 문서의 마약 항목, 대마초를 참조하자. 게다가 아이들도 읽는 책에다가 학습만화인데도 마약에 관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런데도 개정판에서는 수정되지 않았다.
- 고증 오류는 아니지만, 문명의 형성을 설명할 때 인류가 농경을 이해하는 장면의 개정판에서는 원시인의 임신한 아내가 나오는데, 아내가 '우리 아이 생기는 거와 비슷하네요', '몰라이~! 당신 벌써 심었잖아!' 라고 말하고, 다음 컷에서 남편은 '밭에서도, 아내에게서도...!와 같은 섹드립을 날린다(...). 아이들 보는 책에 섹드립은 부적절하다고 판단되었는지 업그레이드판에서는 '내가 잘 먹어야 우리 아이도 쑥쑥 큰다.', '우리가 씨를 심으면 내년에 열매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남들보다 먼저 심어보자.', '이제 음식 걱정은 덜허게 됐어' 와 같은 나름 건전한 대사로 바뀌었다. 또한 개정판에서 남편이 배부르다고 말하는 장면에서 아내의 대사인 '난 원래 불러요!' 는 업그레이드판에서 '난 원래 불러!'라는 반말조로 바뀐다. (18)
- 덴푸라의 어원에 대한 설명이 틀렸다. 저서에서는 템포라를 포르투갈어 템포라가 열이라는 뜻이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하는데 잘못된 내용이다. 당시 일본에 있었던 포르투갈 선교사들이 사순 시기에 음식을 더 맛있게 먹으려고 고향을 생각하면서 해산물과 채소를 튀겨먹었고 그를 맛본 일본인들이 그가 무슨 음식이냐고 물었는데 당시 의사소통이 제대로 되지 않아 사제들은 그들이 사순시기가 외국어로 무엇이냐고 묻는 줄 알고 콰트로 템포라(Quatuor Tempora)라고 알려주었는데 이를 제대로 알아듣지 못 한 일본인들이 그 튀김음식을 들리는대로 텐푸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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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과 네덜란드 간 휴전은 예정된 12년 기간이 끝나기 전 10년만에 끝난다.
- 영국이 30년 전쟁에 참전했다고 잘못 나온다.스위스 편에서도 마찬가지다.
- 콜럼버스를 지원하며 이사벨 1세가 저 돈 버리는 셈 치자고 하고 옆에서 페르난도 2세가 "본전도 못 건지는거 아냐?"라고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 장면은 두 가지가 틀렸다. 우선 이사벨 1세는 자신의 보석과 왕관까지 팔아가며 지원해 줬으니 돈 버리는 셈 치고 콜럼버스를 보냈을 가능성은 낮다. 또한 콜럼버스가 항해를 떠나는 데에 꽤나 우여곡절이 많았는데, 이는 콜럼버스의 제안이 너무나도 터무니없었기 때문이다. 콜럼버스는 당대에 통설로 통하던, 그리고 지금 기준으로 봐도 상당히 말이 되던 지도를 무시하고 토스카넬리의 주장이 담긴 지도를 신뢰했고[11] 거기다가 콜럼버스의 요구가 너무 지나쳤다.[12] 또한 이렇게 전적으로 이사벨 1세가 지원해줬기 때문에 페르난도 2세는 그 항해가 망하든 말든 알 바 아니었다.[13] 물론 콜럼버스가 진짜 새 땅에 가긴 가서 카스티야는 큰 이득을 보았고 아라곤은 부러워 하는 신세가 되었지만.[14]
[1]
이들도 유럽인들이 건너가서 만들어지긴 했지만 원주민과의 혼혈인
메스티소가 인종적으로 주류라서 유럽인보다 훨씬 피부색이 어둡다.
[2]
특히 금발벽안의 하얀 피부를 가진 신비로운 외모는 열성유전자로 북유럽을 제외하면 서방 세계 전체를 통틀어 정말 보기 힘들며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와 같은 다른 곳들도 마찬가지이다.
[3]
당장 티탄의 핏줄에 속하는 퀴클롭스나 헤카톤케이레스 3형제를 보자. 인간형이긴 해도 눈이 하나라든가, 팔다리가 어마어마하게 많은 경우는 흔해빠졌다.
[4]
사실 이건 상대적인 관점이기 때문에 딱 어느 것이 맞다고 보기 어렵다. 어느 나라나 다 그렇듯, 갈리아인들 역시 고위층은 상당한 수준의 부와 문화를 누리고 학식도 제법 갖추고 있었지만, 평민층의 생활 수준은 낮은 편이었으며, 어찌되었건 로마인들 입장에서는 당연히 야만인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
[5]
사실 이 파트에서도 클로비스 1세의 아들들이 못나서라고 서술했지만 실제로는 어차피 클로비스 1세가 모두에게 나눠준 것이기에 못나고 말고로 얘기할 문제는 아니다.
[6]
그럼 루도비쿠스 1세는 왜 단독왕이냐 싶겠는데 사실 즉위할 때에 형제가 하나 있었지만 오래 못 가 사망해서 본인이 단독으로 통치했다.
[7]
행정적 어려움, 민족적 다양함, 지방 귀족, 성직자와 귀족의 대립 등이 있다.
[8]
21세기에 이르면 가톨릭도 비율이 꽤 줄어든다.
[9]
이들이 전부 막장인건 아니지만 막장인 이들이 꽤나 존재했고 심지어는 나폴레옹의 여동생이면서 자신과 남편(조아킴 뮈라)의 지위(나폴리의 왕과 왕후)를 위해 오빠를 배신하기도 했다. 나폴레옹 자신도 이에 대해 누가 들으면 우린 대대로 내려오는 명문가고 내가 그들의 지위를 빼앗은줄 알겠다고 투덜거렸을 정도.
[10]
물론 위암을 유발하는 가장 큰 환경적 요인은 예나 지금이나 식습관이고, 동물성 지방의 과다 섭취는 그 중에서도 최악이니 영향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11]
이 지도에 따르면 유럽과 아시아 간의 거리는 꽤나 가깝다. 당대 기준으로도 이 정도 거리는 충분히 항해가 가능했다. 왜냐면 이 거리가 대략 아메리카와 유럽 간의 거리와 비슷했기 때문. 반대로 말하자면 중간에 아메리카 대륙이 없었다면 콜럼버스는 아무것도 건지지 못했을 것이다.
[12]
발견한 땅의 수익 10%, 총독 자리 영구 보장 등. 마젤란이 수익의 5%와 기록에 대한 저작권 정도만 요구한 것에 비하면 지나쳤다.
[13]
이사벨 1세와 페르난도 2세의 치세 하의 스페인은 결코 한 왕국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엄밀히 카스티야 왕국의 여왕과 아라곤 왕국의 왕이었지 아라곤 왕국의 왕비나 카스티야 왕국의 국서 혹은 스페인의 왕과 왕비가 아니었다. 그래서 이사벨 1세가 지원해준 항해가 손해를 봐도 아라곤이 입을 피해는 없었다.
[14]
거기다가 아라곤은 이 당시 꽤나 어려운 상황에 놓였는데 지중해에서 오스만 투르크의 힘이 강해지고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과의 경쟁에서도 밀리며 이탈리아에 있던 아라곤의 거점을 빼앗기는 등 지중해에서의 영향력이 약해져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