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이원복이 집필한 먼나라 이웃나라의 후속 시리즈이다. 초판은 별개 시리즈였지만 이후 먼나라 이웃나라 16~19권으로 통합되었다.2. 상세
현대 국가는 그 수가 너무 많아 한 권에 한 나라씩 일일이 설명할 수 없으며 같은 지역권은 같은 역사를 공유하고 있기에 지역으로 묶어 나오게 되었다고 도입부에서 설명하고 있다.[1] 오너캐 외에도 가로, 세로, 바로 등의 새로운 멤버[2]들이 추가된 것도 특징.먼나라 이웃나라 20권 오스만제국-터키편이 발간되면서 가로세로 세계사는 먼나라 이웃나라 시즌2 16~19권으로 편입되었다. 이에 따라 먼나라 이웃나라로 표지를 변경한 신판들이 인터넷서점에서 판매중이다. 통합된 비하인드가 있는데, 원래 먼나라 이웃나라랑 별개로 진행하려 했는데 출판사에서 번거롭게 그러지 말고 하나로 통합해서 내보자고 해서 그냥 통합했다고 EBS 초대석 인터뷰에서 밝혔다.
3. 특징
2014년까지 4권까지 출간되었으며, 각각 1권 발칸반도 편, 2권 동남아시아 편, 3권 중동 편, 4권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1권은 먼나라 이웃나라 네덜란드 편과 마찬가지로 책의 반절 정도를 시리즈 개괄에 할애했다.4권은 중유럽, 5권은 영연방을 다루려 했는데 출간이 계속 연기되다가 4권은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편으로 출간되었다.
중국 편은 원래 몽골과 함께 6권에서 중화권으로 다루려 했는데, 2009년 중앙일보에 연재했던 분량[3]을 먼나라 이웃나라 13, 14권으로 냈다. 가로세로 세계사 1권에서 이제 먼나라 이웃나라 끝내고 이걸 시작하겠다고 했는데 결과적으로 식언이 되어 버렸다.[4] 원래 이 시리즈에 들어갈 예정이었던 러시아도 먼나라 이웃나라로 나올 듯하였으나 생뚱맞게도 스페인(에스파냐)이 먼나라 이웃나라 마지막권으로 나왔다. 저자는 스페인편 머리말에서 가로세로 세계사 시리즈를 재개할 것이라고 했지만, 그 시기가 언제가 될 지도 불투명하다. 일단 2013년 시점까지는 3권 이후로는 베이퍼웨어가 된 상태였다. 중국 편 계획이 변경된 덕분에 4권 영연방(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편 이후로는 오스만 제국( 튀르키예) 편, 아프리카 편, 중남미 편을 예정으로 하고 있다고 한다. 아마도 오스트리아 등의 중부 유럽이나 러시아는 세상만사 유럽만사에서 다룬 것으로 넘어갈 것으로 보인다.[5] 결국 기존의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에 시즌 2로 편입되었고 후속작도 먼나라 이웃나라 타이틀을 달고 나오게 되었다.
그동안 우리 머릿속을 지배했던 서구 중심 사관에 얽매이지 않고 균형잡힌 이야기를 한다는 취지로 외국의 역사를 소개하는 서적으로서는 그다지 나쁘지 않은 서적이지만, 뒤집으면 간략한 역사 소개에 그칠 뿐이라는 것이 한계.
기본적으론 각 지역의 역사를 소개하는 구성을 취하는 책이지만, 4권인 캐나다·호주·뉴질랜드 편에서는 각 국가의 사회나 문화를 제법 자세하게 다루기도 했다.
4. 비판
여기서는 은근히 미국에 대한 두둔이 종종 보이는 것도 문제. 특히, 필리핀에서 대놓고 노골적이었는데 필리핀을 미국이 다른 제국주의 나라들과 다르게 손해보며 지배했다느니, 투자를 많이 해 줬다느니 헛소리들을 그리며 옹호한 것이다. 필리핀만 봐도 이게 얼마나 헛소리인지 알 수 있다.[6][7] 그나마 라오스에서는 '미국은 파테트라오 게릴라와 호찌민통로를 없애고자 라오스에 무차별 폭격을 가해서 75만명의 라오스 난민이 발생하는 참극이 벌어졌다.'라는 내용이 있고, 캄보디아에서는 '미군의 공산군 폭격은 민간인들에게도 엄청난 피해를 줘 국민들은 미국, 론놀정권을 증오하게 되었다.'라고 해 미군에 의한 피해도 많이 나와 있다. 더군다나 라오스 편에서는 아예 폭격당한 사진을 넣으면서 미군 폭격으로 달표면처럼 변해버린 라오스라고 했다.그리고 고대 제국주의와 근대 제국주의가 서로 다르다고 말하고 있는데 여기까지는 그렇다고 쳐도 고대 제국주의는 옳고 근대 제국주의는 나쁘다는 식으로 설명하고 있다. 한나 아렌트의 입으로. 특히 고대 로마에 해당하는 자가 창으로 한 지역을 정복하면서 그 지역에 있는 주민들이 왜 남의 땅을 쳐들어오냐고 반박하자 고대 로마가 "남의 땅 좋아하네. 어차피 너희들의 조상도 다른 데서 건너온 자들이잖아?" 이리 말하자 데꿀멍하며 그 지역 주민들이 무릎을 꿇고 엎드리고 고대 로마가 강한 자가 차지하는 게 당연하다는 식으로 말하고 있는데 이거 딱 전형적인 근대 서구 제국주의 국가들의 논리다.
4.1. ( 먼나라 이웃나라와 비교했을 때의) 문제점
먼나라 이웃나라나 다른 만화책에서 선보인 깔끔하고 완성도 있는 그림체가 망가졌다. 캐릭터의 신체 비례는 제각각이고, 실존 인물을 무리하게 현실적으로 그리려 하는 바람에 어색하게 다가온다. 얼굴의 홍조를 지나치게 많이 표현하여, 하나같이 얼굴이 다 빨간 컬러링 문제도 있다. 게다가 그 손발이 오그라드는 개그들은 정도가 더 심해졌고...[8]오너캐의 말이나 책 설명에 보면 이념적으로 편향되지 않는 역사만화를 그리기 위해 가로세로 세계사라는 이름을 지었는데 좌파적 역사관을 가졌다는 세로가 우파적 역사관을 가졌다는 가로보다 철없게 그려진 점과 뒷표지부터 모든걸 부정적으로 본다는 서술[9] 때문에 진짜 균형이 제대로 잡혀 있는 건지 의심하게 되는 점들도 종종 나온다. 뭐 어차피 1권에서만
4.2. 문제점 및 오류
먼나라 이웃나라의 문제점 | |||
네덜란드 | 프랑스 | 독일 | 영국 |
스위스 | 이탈리아 | 일본 | 한국 |
미국 | 중국 | 에스파냐 | |
발칸반도 / 동남아시아 / 중동 /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1 | |||
오스만 제국, 튀르키예 | 러시아 | 인도와 인도아대륙 | |
공정성 | 구성 | ||
윗첨자1: 舊 가로세로 세계사 1~4권. |
- 가로세로 세계사가 먼나라 이웃나라에 편입되었으므로, 먼나라 이웃나라의 문제점 틀을 첨부한다.
4.2.1. 1권(발칸반도)
-
개괄 파트의 오류. 전반적으로 옥시덴탈리즘이 주를 이루는 본 책이 예시로 드는 대표적인 오류로, 고대 그리스 문명이 전성기에조차 이집트의 변방 수준에 불과했다고 나온다.[12] 현실은 그리스의 전성기에 이집트는 이미
아케메네스 왕조 페르시아에 정복당해 남보고 변방 운운할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고 오히려 동시기 아테네는 동지중해 전역을 아우르고 이집트까지 위협하는 제국으로 성장한 상태였다.[13] 게다가 좀 더 나아간 헬레니즘 제국 시기 이집트는 아예 그리스계의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를 받았다. 물론 이 시기의 이집트도 경제적으로는 부유한 지역이었지만 정치적으로는 패권을 잃어버린지 오래였다. 오히려 아케메네스 왕조로부터 독립하려고 아테네의 지원까지 받기도 했으니 만화에서 나온대로 이집트인이 "그리스? 아휴 이 촌뜨기 자식" 이라고 하면 그리스인은 "그 촌뜨기 힘 빌려서 독립하려고 한건 뭔데?" 라고 반박할 수 있을 상황이었다.
다만 그리스가 군사 및 정치, 철학적으로 많이 앞서나가긴 했어도 문화와 경제력 측면에선 동방에 많이 뒤졌던 것도 사실이다. 실제로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를 정복했을 당시 페르세폴리스 한 도시에서만 그리스 전체의 1년 세수를 뛰어넘는 막대한 재화를 획득했을 정도였다.[14][15] 이미 이전부터 그리스인들은 동방의 막대한 부를 몹시 탐냈고, 페르시아의 다릭 금화를 얻고자 페르시아에서 용병으로 활동하는 그리스인도 굉장히 많았던 만큼 그리스가 당시 동방에 비하면 다소 뒤쳐지는 지역이었다는 서술 자체는 틀리지 않았다. 즉, 옥시덴탈리즘에 빠져 그리스 문명을 과도하게 폄하하는 것이 문제일 뿐, 사실 관계가 완전히 틀린 것은 아닌 셈. 굳이 따지자면 이집트가 아닌 페르시아의 변방이라고 서술했다면 좀더 들어맞았을 것이다.
- 유럽의 식민지 수탈 통계 장면 각주에서 크리스 패튼이 1930년대 홍콩 총독이라고 나왔는데, 사실 패튼은 1992년부터 1997년 반환 때까지 홍콩 총독이었다.
- 정교회와 가톨릭의 차이를 설명하면서 가톨릭의 사제와는 달리 정교회의 사제는 결혼을 할 수 있다고 기술했다. 그러나 실제로는 정교회에서도 사제는 결혼금지다. 대신 기혼자가 사제로 임명될 수는 있다. 하지만 사제가 된 상태에서 재혼은 불가능하며, 결혼한 사제는 주교품도 받지 못한다[16]. 아마 『이름없는 순례자』라는 러시아 정교회 서적의 번역본 각주를 참고한 듯.
- 유고슬라비아의 성립 원인이 세르비아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질 것을 염려한 열강들의 음모라고 기술했는데, 정작 열강들은 미국 행정부가 1918년 6월 26일에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해체안을 받아들이기 전까지 유고슬라비아의 건에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으며, 오히려 영국이 세르비아에게 마케도니아의 대부분을 불가리아에게 양도하는 대신 보스니아와 달마티아[17] 남부, 알바니아의 일부 지역을 받는 것을 제안했다. 심지어 세르비아의 영향력이 커지는 것에 긍정적이었던 러시아도 가톨릭 지역들인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가 세르비아에 합병되는 것을 꺼림칙해했다. 오히려 유고슬라비아의 건설에 긍정적인 반응을 보였던 이들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의 지식인들과 세르비아 내의 급진적 민족주의자들이었다. 세르비아 정부는 일단 세르비아인들이 살고 있던 지역들을 먼저 합병하는 것을 우선으로 뒀으나, 이들도 궁극적 목표는 남슬라브 통일국가의 건설이었다. 그리고 제1차 세계 대전 직후 유고슬라비아 성립 당시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는 다른 타국과 통합하지 않고서는 독자 생존조차 하기도 어려운 별볼일없는 약소국이었다.
- 루마니아 공산 정권 시절 독재자였던 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부부가 1989년 민주 혁명 당시 북한으로 망명하다 체포되었다고 언급되었으나, 실제 망명하려던 국가가 어디였는지는 모른다.
4.2.2. 2권(동남아시아)
중요한 부분만 다루다 보니 설명이 부족해지거나 아예 빠진 내용이나 오류가 있다.- 미얀마의 ASEAN 가입 연도는 1997년인데, 1995년으로 잘못 나왔다.
- 태국 국왕 라마 5세의 업적이 < 왕과 나>란 영화로 나왔다고 하는데, 사실은 부친 라마 4세가 주인공이고, 그림도 틀렸다.
- 1828년 태국의 비엔티안 점령 후 란상왕국 영토를 태국과 베트남이 찢어놔서 나라 자체가 없어졌다고 설명됐는데, 라오족 계열의 또다른 국가인 루앙프라방 왕국이 그나마 주권을 유지하고 있어서 완전히 없어졌다고 보기는 어려웠다.
- 인물명을 영어식으로 표기하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쑤파누웡을 '수파누봉', 쑤완나 푸마를 '수바나 푸마', 폴 포트의 본명 '살롯 사'를 '샐로스 사르'로 각각 표기했다. 다만 이 점은 정상참작할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는 폴 포트 등 동남아시아 인물 관련 자료를 찾기가 워낙 힘든 편이라 별 수 없이 외국의 자료를 참고했을 것으로 보이는데, 그때 범한 번역의 오류일 가능성이 크다. 또한 '수파누봉' 등 라오스 인물들의 영어식 명칭은 언론 등지에서 관습적으로 쓰인 표기다.
- 베트남의 역사를 기술할 때 레 왕조 이전의 역사[18]는 짤막하게만 언급되어 있다.
- 1945년 일본의 패망 후 남베트남에 중화민국군이 주둔했다는 식으로 설명됐는데, 실제로는 베트남 이북에 중화민국군이, 이남엔 영국군이 각각 진주했다.
- 호찌민을 응오딘지엠과 대조시켜서 기술하다 보니 호찌민이 북베트남에서 항상 지지만 받았다는 식으로 긍정적으로 기술했는데, 이는 '역사상 승자'이자 현 실권자인 북베트남 쪽 관점이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토지개혁 삽질로 대규모 반발이 일어난 것은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반대로 응오딘지엠은 그저 미국 원조와 비밀경찰로만 정권을 유지했다는 식으로 부정적으로 그렸는데, 실제로는 초반기에는 무려 80만에 달하는 월남민들을 안정적으로 정착시키는 등 능력이 아주 없는 지도자는 절대로 아니었다.[19] 실제로 심지어 역대 남베트남 지도자들 중에서는 제일 유능하고 미국에 일방적으로 끌려다니지 않은 사람이 바로 응오딘지엠이었다.[20] 물론 얼마 안 가서 막장으로 타락하지만...[21]
- 캄보디아 파트에서는 프랑스가 캄보디아의 지원 요청을 흔쾌히 수락한 것처럼 되어있는데, 실제로는 첫 번째 요청은 태국에 의해 실패로 끝났다.
- 크메르 공화국 대통령 론 놀의 사망년도가 1985년이 아닌 1975년으로 나온다. 개정판에선 수정되었다.
- 말레이시아 파트에서는 말라카가 포르투갈의 대포를 생소해했고, 때문에 영락없이 무너졌다는 뉘앙스의 내용이 있는데, 엄연히 말라카에도 대포가 있었다. 아니, 그냥 있는 정도가 아니고 말라카 내에만 수천 문(門)의 대포[22]가 있어서 이걸로 2개월이나 버텼다. 포르투갈이 말라카를 함락시킬 수 있었던 것도 말라카가 당시 내분으로 인해 쇠락해가는 상황에서 말라카 내의 비무슬림들(가령 중국인이라든가)을 포섭했기 때문이다.
- 말레이인 우대 정책의 부작용으로 중국인의 경제적 입지만 공고해졌다고 썼는데, 어떻게 해서 이러한 부작용이 생긴 건지에 대해서는 제대로 된 설명이 없다. 개괄적인 내용만 서술하는 방식을 취해서 어쩔 수 없이 이런 것일 수도 있지만, 페이지 수를 맞추느라 설명을 생략한 부분이 있는 건 아쉬울 따름이다.
- 영국인들이 말레이시아에서 고무나무를 대량 발견했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말레이시아, 싱가포르, 인도네시아 등지의 고무나무는 사실은 토종 자생종이 아니라 영국을 포함한 열강들이 동남아에서도 고무를 생산하기 위해 남미 아마존 유역에서 옮겨다 심은 외래종이다.
- 필리핀 파트에서는 초반에 6.25 전쟁 당시 파병과 장충체육관 건설 얘기가 나왔는데, 전자는 사실이지만 후자는 사실이 아니다. 그리고 미국이 필리핀을 식민지배하면서 투자를 많이 해 줬다고 했는데, 실상은 미국의 필리핀 지배 방식도 유럽 열강들과 별 반 다를 바가 없었다. 당연히, 미국이 필리핀에서 저지른 전쟁범죄나 학살 또한 거론도 안한다. 또한 필리핀 역사의 최고 리즈 시절이라고 할 수가 있는 라몬 막사이사이 시절의 내용은 아예 빠졌다. 물론 간접적으로 페르디난드 마르코스 이전에는 그런대로 나았다고 두루뭉술하게 서술하였기는 하였지만... 또한 산 어거스틴 성당 사진이 아니라 다른 엉뚱한 성당 사진을 올려놨다.
- 필리핀의 경제에 대해서도 마르코스 집권 이전에는 제법 잘 나가는 국가였다가 마르코스 집권 이후 후진국으로 곤두박질쳤다고 서술되어 있는데 여기에 대해서는 필리핀/경제 항목 참고. 물론 마르코스의 독재와 부패가 어마어마했던 건 사실이지만 필리핀은 마르코스 집권 이전이나 이후나 못 사는 나라였다.
- 동티모르 초대 대통령 사나나 구스마오가 팔린틸 총사령관일 적인 1992년에 구속된 후 추방당했다고 나왔으나, 2018년 개정판에선 종신형 복역 후 1999년에 가택연금 형식으로 풀려났다고 바로잡혔다.
- 유엔 동티모르 임시정부 수립 연도가 1999년 10월이 아닌 2000년으로 나왔다.
4.2.3. 3권(중동)
- 석가모니가 코살라에서 태어난다고 하는데, 실제론 샤카이다.[23] 코살라는 오히려 석가모니의 고향을 멸망시킨 나라다.[24]
- 메카가 힌두교와 조로아스터교 등등 세계 각지 종교의 영향을 받은 종교의 백화점이라는 설명이 나온다. 그러나 당시 종교의 백화점 수준으로 힌두교, 불교, 기독교, 마니교, 마즈다크교 등이 번창했던 지역은 사산조 페르시아이지 메카가 아니다. 아랍 고대 신앙 관련한 기록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많이 남아있는데 여기서 불교나 힌두교 영향은 찾아보기 힘들고, 대신 아랍인들이 고대부터 아브라함과 이스라엘을 자신들의 시조로 삼았다는 내용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나디르 이븐 알 하리스의 조로아스터교 신화 이야기를 아랍인들이 우화로 여겼다는 기록도 남아있듯이 아랍인들은 조로아스터교를 민족 감정 때문에 배격하던 상황이었다.[25]
- 초대 칼리파 자리를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가 아부 바크르에게 적극적으로 양보를 하여 아부 바크르가 선출이 되었다고 했는데 이는 순니파의 해석이고 시아파의 해석은 다르다.[26][27] 시아파 측에서는 알리가 무함마드 사망 직후 무함마드 장례를 수습하느라 바쁜 사이 아부 바크르 측에서 기습적으로 회의를 열어 아부 바크르를 칼리파를 선출했다고 주장한다.[28] 시아파와 수니파의 분열은 이 때부터 조짐이 보였던 것이다. 아부 바크르가 칼리파로 인정을 받은 것은 아라비아 반도 전역에서 각자 무함마드의 후계자를 내세우면 독립하려는 반란이 터지자 알리 지지파 역시 일단 아부 바크르를 칼리파로 인정하고 반란부터 진압하자고 타협을 봤기 때문이다. 오히려 알리가 적극적으로 칼리파 자리를 양보했을 때는 아부 바크르 사후 2대 칼리파로 우마르가 선출됐을 때였다.
- 이 외의 정통 칼리파 시대의 알리를 두고 일어난 칼리프 자리 분쟁도 사실 책에서는 간략하게 축소되었다. 책에서는 그저 자리 싸움 정도로 묘사하지만 실제로는 무함마드 사후 진행되기 시작한 이슬람의 세속화와 이에 대한 반대의 충돌로서 단적으로 무아위야 1세가 속한 쿠라이시 가문이 알리에게 대항한 이유도 전임 칼리프인 우스만이 속한 우마이야 가문이 바로 쿠라이시 가문의 일부였고 우스만은 자기 혈족 즉 쿠라이시 가문을 지나치게 싸고 돌았다. 당연히 우스만 시기에 쿠라이시 가문은 엄청난 세도를 누렸는데 이슬람의 순수성을 되찾아야 한다고 외치는 알리가 칼리프가 되면 그 세도가 없어질 것이니 알리에게 반대한 것이다.
- 카르발라 참극에 대한 묘사가 너무 단편적이다. 일단 책에서는 야지드 1세는 아버지인 무야위야 1세로부터 정당하게 자리를 물려받은 것처럼 나오지만 사실 이 때까지도 칼리프는 세습되지 않는다는 개념이 남아있어서 야지드의 정통성도 애매했다. 즉 책에서 후세인 일파를 향한 '반역자' 운운은 지나친 감이 있다. 또한 후세인이 자살했다고 했는데 후세인은 자살하지 않고 전투 중 전사했다.
그리고 이 사건에 대해서 너무 의미없이 넘어간 것도 있는데 카르발라 참극은
시아파가 본격적으로 발족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전부터도 알리 지지/반대에 따라 분열 조짐이 보이고 있었지만 이 사건에 이르러 알리 지지파는 시아파라는 세력으로 변모하였고 그 반대파인 수니파와 1400년 가까운 지금까지도 대립하는 계기가 된다. 구체적으론 시아파에서 중요한 종교축제인
아슈라 축제나
마흐디 사상이 모두 카르발라 참극에서 기원한다.
또한 이 사건은 갓 출범한
우마이야 왕조를 크게 위협했다. 안 그래도 칼리프는 세습되지 않는다는 개념을 박살내고 야지드 1세가 세습해서 문제가 안 생길 수 없는 상황에서[29] 무려 예언자의 외손자와 그 지지자이자 일족을 학살함으로서 우마이야 왕조에 대한 민심은 개박살이 나버려 이 사건이 알려지자 야지드의 등극을 인정했던
이븐 주바이르[30]는 입장을 바꿔 후세인의 죽음을
순교로 선포하고
야지드에 반기를 들었고
메디나가 이에 호응하였다. 거기다가 야지드가 이븐 주바이르를 잡겠다고 메카에 군대를 보냈다가 카바 신전에 불이 나서 민심이 더욱더 악화되었다. 결국 야지드 1세는 카르발라 참극 후 겨우 3년만에 세상을 떠났고 그 뒤를 이은
무아위야 2세때는 칼리프직을 포기하려다가 1년만에 죽었다. 이런 식으로 궁지에 몰린 우마이야 왕조는 한때는 가문의 본거지를 제외한 모든 영역을 상실하다시피 했고 결국 무야위야 2세가 죽고도 8년이 지나서야 우마이야 왕조는 최종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즉 야지드 1세의 삽질이 갓 성립된 우마이야 왕조를 끝장낼 뻔 했던 셈.[31]
* 아브드 알라흐만이 스페인으로 피신한 이후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라는 칭호에 대항에 스스로 에미르라 칭하니'라고 되어있는데, 에미르는 엄밀히 말해 장군, 사령관 정도로 칼리프보다 한참 낮은 직위로서 아바스 왕조의 심기를 건들지 않기 위해 선택한 것이지 대항하려고 선택한 직위는 아니다.
* 우마이야 왕조가 프랑크 왕국과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국력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는 서술이 나오는데, 우마이야 왕조가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손실한 병력의 수는 하자르 칸국 및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당시 손실한 병력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했고 제국의 변두리에서 일어난 일인만큼 그 중요성도 더 적었다. 다만 우마이야 왕조는 본디 우마르 2세 사후(720년)부터 쇠퇴하고 있긴 했다.
* 아바스 왕조가 몽골의 침략으로 완전히 멸망했다고 기술했는데 사실 단 3년만에 맘루크에 의해 카이로에서 다시 부활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맘루크에 의한 부활인 만큼 멸망때까지 아바스조의 칼리프들은 맘루크들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맘루크들이 칼리프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는 것도 옳지 않다. 맘루크 왕조 시기에도 칼리프 자리는 아바스조가 가지고 있었고 맘루크들은 술탄 자리만 놓고 싸웠다. 그래도 칼리프가 맘루크들의 꼭두각시라서 그런지 칼리프들도 260년 남짓한 기간동안 17명이 맡아 했는데 이 중에서 1명은 두 번을 재위했고 6명은 10년도 재위하지 못했다. 그래도 맘루크 왕조의 술탄 계보와 비교하면 이 정도는 양호한 편이다.
* 십자군 전쟁을 중동에선 변방에서 일어난 작은 소란정도로 취급한다고 서술한 것이 잘못된 내용이라고 지적되었는데 이는 틀린 내용이 아니다. 당시 십자군의 활동영역은 아나톨리아-시리아-팔레스타인-이집트같은 동지중해 권역이 중심이라 아라비아 반도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볼 일이 거의 없었으며 후대의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잊혔으나[32][33] 중동 지역의 식민지 지배가 본격화되고 유럽인들이 이를 제2의 십자군의 성공이라고 기념하면서 오히려 아랍 쪽에서도 십자군을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종합하자면 현대의 중동인들은 십자군을 변방의 사건으로 여기지 않지만 십자군 전쟁 당시의 이슬람 세계는 분명 아라비아, 메소포타미아가 중심지였던 만큼 십자군 전쟁 당시의 중동인들의 시각에선 변방의 싸움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34] 원래 서술에서도 십자군 전쟁 당시의 중동인들의 시각을 이야기하는 거지 현대의 시각은 현대 중동세계 파트에서 소개하고 있다. 다만 서술이 좀 불명확해 원래 의도를 오해할 여지는 있다.
* 아브드 알라흐만이 스페인으로 피신한 이후 '아바스 왕조의 칼리프라는 칭호에 대항에 스스로 에미르라 칭하니'라고 되어있는데, 에미르는 엄밀히 말해 장군, 사령관 정도로 칼리프보다 한참 낮은 직위로서 아바스 왕조의 심기를 건들지 않기 위해 선택한 것이지 대항하려고 선택한 직위는 아니다.
* 우마이야 왕조가 프랑크 왕국과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패배한 이후 국력에 심각한 타격을 받았다는 서술이 나오는데, 우마이야 왕조가 투르 푸아티에 전투에서 손실한 병력의 수는 하자르 칸국 및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플 공방전 당시 손실한 병력에 비하면 소수에 불과했고 제국의 변두리에서 일어난 일인만큼 그 중요성도 더 적었다. 다만 우마이야 왕조는 본디 우마르 2세 사후(720년)부터 쇠퇴하고 있긴 했다.
* 아바스 왕조가 몽골의 침략으로 완전히 멸망했다고 기술했는데 사실 단 3년만에 맘루크에 의해 카이로에서 다시 부활했다. 다만 어디까지나 맘루크에 의한 부활인 만큼 멸망때까지 아바스조의 칼리프들은 맘루크들의 허수아비에 불과했다. 마찬가지로 맘루크들이 칼리프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는 것도 옳지 않다. 맘루크 왕조 시기에도 칼리프 자리는 아바스조가 가지고 있었고 맘루크들은 술탄 자리만 놓고 싸웠다. 그래도 칼리프가 맘루크들의 꼭두각시라서 그런지 칼리프들도 260년 남짓한 기간동안 17명이 맡아 했는데 이 중에서 1명은 두 번을 재위했고 6명은 10년도 재위하지 못했다. 그래도 맘루크 왕조의 술탄 계보와 비교하면 이 정도는 양호한 편이다.
* 십자군 전쟁을 중동에선 변방에서 일어난 작은 소란정도로 취급한다고 서술한 것이 잘못된 내용이라고 지적되었는데 이는 틀린 내용이 아니다. 당시 십자군의 활동영역은 아나톨리아-시리아-팔레스타인-이집트같은 동지중해 권역이 중심이라 아라비아 반도나 메소포타미아 지역에서는 볼 일이 거의 없었으며 후대의 몽골의 침략으로 인해 잊혔으나[32][33] 중동 지역의 식민지 지배가 본격화되고 유럽인들이 이를 제2의 십자군의 성공이라고 기념하면서 오히려 아랍 쪽에서도 십자군을 중요한 역사적 사건으로 여기기 시작했다. 종합하자면 현대의 중동인들은 십자군을 변방의 사건으로 여기지 않지만 십자군 전쟁 당시의 이슬람 세계는 분명 아라비아, 메소포타미아가 중심지였던 만큼 십자군 전쟁 당시의 중동인들의 시각에선 변방의 싸움이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다.[34] 원래 서술에서도 십자군 전쟁 당시의 중동인들의 시각을 이야기하는 거지 현대의 시각은 현대 중동세계 파트에서 소개하고 있다. 다만 서술이 좀 불명확해 원래 의도를 오해할 여지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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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인들은 우주를 관념적으로만 다루었고 이슬람은 실제적인 연구를 했다고 하는데 이 역시도 오류, 정확히는 그리스인에 대한 말이 오류다.
물론 그리스인들이 관념적으로 다룬 편이기도 하지만 당시의 수준을 감안해야 한다. 고대 그리스는 기원전 8세기에 시작되었고 기원후 6세기까지 지속되었지만 기원전 2세기 중엽에 로마에게 정복당했다. 그리고 우리가 주로 다루는 시대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등장하기 이전인 기원전 4세기까지다. 정말 넓게 취급해줘서 기원후 6세기까지 넓혀도 이슬람이 등장하는 시기와도 1~2세기의 차이가 있고 어차피 로마에 의한 정복 후 그리스의 처지는 많이 굴러떨어졌고 이슬람의 황금기도 8~13세기이니 결국 기원전 8~2세기까지의 그리스와 8~13세기의 이슬람과 비교해야 하는데 이 시간차이가 최소 천년이다. 즉 시간차와 시대차를 감안해야 한다. 그 시간동안에 기술적, 학문적 발전의 수준이 있는데 이슬람의 연구를 놓고 고대 그리스인들의 연구를 비하하는 것은 옳지 않다. 정작 그 이슬람도 고대 그리스의 기술과 문화를 받아들이며 자신들의 성공을 이루어낸 것이다.
또한 철학이라는 것이 처음 등장한게 고대 그리스 시대라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우주나 자연 등에 대해서 그전까지는 신이 창조했다라는 정도로만 끝나던 시대에서 왜 어떻게 생겨났고 무엇으로 구성되어 있는지 등을 처음 연구하기 시작한 때가 이 때다. 허나 앞서 말했듯 당시 수준이 수준인 만큼 이럴거다 저럴거다 하는 가설 단계에서 크게 벗어나기 힘들었다. 당장 4원소설 같은게 16세기 같은 이슬람의 황금기가 지난 시점에서도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당시 방법으로는 원소를 발견할 수 없었다. 그도 그럴게 현미경은 16~17세기에 나왔고 19세기 초가 되어서야 비로소 돌턴에 의해 발견되어 입증할 수 있었다.
마지막으로 고대 그리스인이라고 말로만 우주를 다루거나 한건 아니다. 좋은 예시로 지구 지름을 구한 에라토스테네스는 태양의 각도를 이용해 지구의 지름을 쟀고 그 값이 완전히 맞는건 아니었지만 원리 자체는 맞다. 그리고 실제로 그 거리까지 가보기도 했고.
- 바이바르스가 현재 튀르키예 셀주크 제국의 군주로 소개되어 있으나 사실은 이집트 맘루크 왕조의 군주였다.[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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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주크 제국의 몰락이 몽골의
티무르 때문이라고 서술되었는데 셀주크 제국의 몰락은 칭기즈칸 시기보다도 앞이다. 셀주크 제국의 몰락의 시발점은
요나라 멸망 후 서쪽으로 이주한 잔당세력인 서요에 의해서가 컸다.
사실 이건 비단 먼나라 이웃나라 뿐만 아니라 WHY 시리즈를 비롯한 세계사 만화 등지에서도 몽골의 침략으로 셀주크 튀르크가 멸망했다는 식의 오류가 많이 나오는 편이다. - "~ 스탄은 이슬람 국가라는 뜻"이라는 잘못된 설명이 나오는데 스탄은 페르시아어로 땅이라는 뜻이다. 국가에만 사용되는 단어도 아닐 뿐더러 이슬람과 관계없는 지역 지명 접미사에도 흔하게 쓰인다. 중세 불교를 믿던 토하리스탄, 힌두교도들이 주로 거주하는 라자스탄, 스톡홀름의 구시가지 감라스탄, 남아공 아파르트헤이트 시절의 흑인 게토 반투스탄, 가톨릭교도가 대부분인 헝가리를 가리키는 터키어 마자리스탄, 역시 가톨릭교도가 대부분인 폴란드를 가리키는 오스만 투르크어 레히스탄 등등 다 셀 수가 없을 지경이다.
- 튀르크족이 아나톨리아 반도로 들어와 세력권을 형성하는 것은 티무르에게 쫓겨나서 도망치듯 온 것이 아닌 셀주크 투르크 이후 지속적으로 동로마 영토였던 아나톨리아 반도에 침입, 그곳에 정착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이후 티무르가 아나톨리아 반도를 정복하러 나선 상황에서 충돌이 발생한 것이다. 오스만 제국이 티무르에게 크게 당한 전투가 이루어 진 곳도 앙카라, 즉 아나톨리아 반도 한 가운데였다. 작중 내부에서도 티무르에 쫓겨 아나톨리아 반도로 들어온 튀르크족이 아나톨리아에서 강성해진 후 티무르한테 당한다는 모순을 보인다.
- 오스만의 마지막 칼리프가 메메드 6세라고 나오는데, 1922~1924년까지 재위한 압뒬메지드 2세가 마지막 칼리프다. 20권인 오스만제국과 터키 편에서 수정되었다.
- 팔레스타인 제1차 인티파다 부분에서 1987년 12월 16일에 가자 지구에서 이스라엘인 사업가가 피습당하자, 며칠 후 팔레스타인 청년 4명이 이스라엘 군용지프에 치여 죽어서 생긴 계기라고 나왔는데,[36] 실제로는 1987년 12월 9일 이스라엘군 트럭과 팔레스타인 승용차가 충돌한 사건으로 인해 터진 것이다.
4.2.4. 4권(캐나다·호주·뉴질랜드)
- 캐나다의 원주민 정책이 제법 자비로운 것처럼 나오지만 이마저도 어디까지나 미국에 비교해서이다.[37] 캐나다도 개국 초기 호주와 비슷하게 원주민 문화 말살 정책을 자국내 북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자행했으며, 백인의 지배를 거부하며 저항하던 크리 족 등 일부 부족들은 영국에 의해 무력으로 토벌당하는가 하면, 땅을 뺏어 원주민들을 원주민 보호구역에 강제이주시키고, 뉴펀들랜드 섬과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섬 등 동부 대서양 섬 지역에서 살던 일부 원주민들은 영국계 백인 이주민들의 억압과 학살에 이전 태즈메이니아 섬 일대에서 살던 호주 원주민 부족들과 비슷하게 멸족되었다.[38] 단지 호주보다 빨리 철폐했을 뿐 때문에 여전히 다수의 캐나다 원주민들은 백인을 불구대천으로 여기고 있으며 여타 미주 국가의 아메리카 원주민들과 비슷하게 극빈층으로 생활하고 있다.[39]
- 빈란드는 포도를 뜻하는 빈을 붙여 포도가 나오는 곳이란 뜻에서 빈란드라고 하였다고 언급한다. 정작 포도가 자라기 힘든 환경인 캐나다 지역인 모순점에 대해 포도를 원해서 그런 이름을 지었다고 하였는데, 빈란드의 빈은 포도가 아니고 고대 바이킹어로 '풀'을 뜻하며 이는 1960년 캐나다 뉴펀들랜드에서 바이킹 유적을 발견하는데 결정적인 실마리 제공을 하였다.
- 27쪽에서 덴마크를 덴마트라고 썼다.
- 89쪽에서 유비무환의 한자가 잘못 나왔다. 有備無患(유비무환)인데 有有無患(유유무환)으로 잘못 써졌다.
- 호주와 뉴질랜드 파트에 오류가 있는데, 1849년에 사망한 와이라우의 마오리족 추장 테 라우파라하가 1852년에 영국을 방문했다고 나온 것이다(4권 230p에 나옴.). 사실은 테 라후파라하의 아들인 Tāmihana Te Rauparaha가 영국을 방문한 것이다.
- 앞뒤가 맞지 않는 부분이 존재하는데 22 페이지에서 뉴질랜드는 백인과 마오리족간에 맺어진 와이탕이 조약 덕분에 신대륙에서는 보기 드물게 평화롭게 공존하므로 서로 갈등은 없다고 나오지만 정작 뉴질랜드 파트에서는 와이탕이 조약의 불공정함을 지적하며[40] (앞에서 이미 몇차례 전쟁도 치렀다고 나오긴 하지만) 현실에서이 마오리족이 열악함 등을 계속 지적한다. 물론 미국, 캐나다, 호주 등과 비교하면 많이 나은 편이기는 하다.[41] 일례로 마오리족에게도 투표가 주어진건 1867년인데 이웃나라 호주가 1965년, 그러니까 약 100년 뒤에야 투표권을 준 거다. 캐나다, 미국 특히 미국은 말할 것도 없다. 흑인에게는 그래도 투표권이 19세기 중후반에 주긴 했는데 실질적으로는 꽤 오래 걸려서야 행사할 수 있었고, 그나마도 21세기 들어서조차 흑인이 투표하지 못하도록 방해하려는 공작이 많이 일어난다.
- 94페이지의 지도에서 북부 메릴랜드주와 남부 버지니아주가 수도를 워싱턴 D.C.로 정하는 것에 합의했다고 설명하는 부분에서 지도에 메릴랜드와 버지니아가 둘 다 북부라고 설명되어 혼란을 주고 있다. 개정판에서는 버지니아주가 남부라고 수정되었다.
- 119쪽에 캐나다 국기 디자인이 잘못되어 있다. Canadian Red Ensign이라고 불리는 캐나다의 옛날 국기로 원래는 빨간색 바탕 위에 유니언 잭이 왼쪽 상단에 있는 모양이지만, 책에 나와있는건 파란색 바탕의 깃발이다. 거기다 국기 사용연도 역시 1921년부터 1957년까지라고 나와있는데 사실 저 디자인은 1868년부터 1965년까지 긴 세월동안 사용되어 왔다.
[1]
먼나라 이웃나라 때 했던 대로 나머지 220개국(세계은행 추산)을 1년에 2권씩 다룰 경우 110년이 걸린다. 그런데 현장 답사 등까지 포함할 경우 몇 갑절은 걸릴 수 있다.
[2]
개정판
먼나라 이웃나라 네덜란드편에도 잠깐 나왔다(시민의식에 대해 질문하는 장면. 완결판 기준으로 180쪽 3번째 컷).
[3]
중국 근현대사이다.
[4]
사실 그 연재를 시작하게 된 계기가 중앙일보의 여러번의 간곡한 부탁을 받아들이게 되면서부터이다.
[5]
근데, 4권부터는 표지목차의 4권의 제목소개에 5권의 제목이 들어가야 할 자리부터 '시리즈는 계속됩니다'라고만 적혀있고, 5권부터 구체적으로 몇권에서 무슨 주제를 다룰지를 밝히지 않고 있는지라 뭐가 나올지를 예측하기가 더 어려워졌다. 아니, 나오는 걸 더 기대하기 어려워졌다는 느낌도 있다.
[6]
마크 트웨인만 봐도 필리핀 침공,
미서전쟁을 제국주의에 대한 미국의 해방으로 처음에는 찬양했다가 갈수록 미국이 저지르는
학살과 경제적 착취를 보고 다른 제국주의와 차이가 뭐냐고 분노하며 비난하고 책을 써서 풍자했다가 24년이나 책이 출판금지당하고 그가 죽고 나서야 간신히 출판된다.
[7]
사실 거기까지 갈 것도 없다. 당장 먼나라 이웃나라 3권인 도이칠란트 편에서 미국의 민족 자결주의를 설명할 때 '필리핀 국민도 민족 자결주의의 원칙에 따라 자신의 문제를 스스로 해결한다는 원칙에 따라 미국으로부터 독립하겠다면 인정하시겠습니까?'라고 필리핀 국민이 말하자 '그건 아니지! 그건 패전국 식민지에만 해당하는 거고, 우리 승전국 식민지에는 전혀 해당되는 것이 아니거든. 우리가 미쳤냐? 우리 식민지를 스스로 독립, 해방시켜 주게?'라고 하는 부분이 있는 걸 보면 그냥 일관성이 없다.
[8]
그나마 납득할 만한게 동남아편의 '세로'를 패러디한 후보인 '스에로' 정도.
[9]
당연히 우파라고 모든걸 긍정적으로, 좌파도 모든걸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10]
참고로 레귤러 캐릭터들 중 유일한 여성 캐릭터인 바로는 1권부터 비중이 없었다.
[11]
이름은 돌림자를 써서 형제자매간에 비슷하게 지었다는 설정을 넣어 가루, 제로, 바리라고 나온다. 별 뜻 없이 그냥 가로, 세로, 바로와 비슷하게 지은 것.
[12]
이집트인이 그리스인에게 스핑크스와 피라미드를 보여주며 자랑하고 파르테논 신전을 왕궁 화장실 만하다며 비웃는 모습이 나오는데, 스핑크스나 피라미드는 당대에도 이미 수천 년된 건축물로 이집트에서조차 고대 유적 취급받았지 실제로 사용하는 건물이 아니었다.
[13]
물론
로마 제국과 같은 거대 제국은 아니고 해상 무역을 기반으로 한 도시국가들의 연합체인 제국(諸國)이었다.
[14]
이랬던 만큼 페르시아 정복 후에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액수의 이익을 얻었다.
[15]
그리스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의 겨울수도인 수사를 점령했을 때는 5만 탈렌트 어치의 은괴를, 페르시아 제국의 의례적, 종교적 수도인 페르세폴리스를 점령하고 나서는 12만 탈렌트 어치의 금화를 차지했다. 12만 탈렌트는 기원전 5세기 무렵 그리스의 도시 국가인 아테네의 1년 재정보다 무려 300배나 많은 수치였다. 아테네가 고대 그리스 도시 국가들 중에서 가장 부유했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페르세폴리스가 갖고 있었던 경제력은 그리스 전체를 합친 규모보다 훨씬 거대했던 것이다. 여기서 1탈렌트의 가치가 얼마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설명하자면, 기원전 431년에서 404년까지 그리스인들끼리 싸운 펠로폰네소스 전쟁 무렵에 1탈렌트의 금화는 200명이 탑승하는 군함인 3단 노선 1척을 1개월 동안 유지할 수 있는 금액이었다.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페르시아 제국을 무너뜨린 시기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때보다 약 70년 이후라는 사실을 감안할 때, 물가의 가치가 달라졌다고 해도 12만 탈렌트라면 실로 어마어마한 액수가 아닐 수 없다. 실제로 페르시아 제국이 가진 부는 그리스인들의 상상을 뛰어넘었다. 페르시아 제국이 발행했던 다릭 금화의 위상은 오늘날 세계 최강대국인 미국이 발행하는 달러화와 같았다. 그처럼 다릭 금화는 그리스인들에게 선망의 대상이었고, 그리스인들은 다릭 금화를 갖기 위해 페르시아 제국 군대에 복무하는 용병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출처: 전장을 지배한 무기전 전세를 뒤바꾼 보급전/ 도현신 지음/ 시대의창
[16]
주교품과 관련된 부분은 가로세로 세계사 1권 내에서도 설명됨. 가로세로 세계사에서는 승진을 못한다고 설명됨.
[17]
크로아티아 해안 지역.
[18]
중국 지배 이전의 역사인 반랑·어우락·남비엣(물론 반랑과 어우락은 역사적 실체가 명확하지 않고, 남비엣은 창건자가 중국인인데다 중심지도 중국
광저우에 있었으니 제외시켰을 수 있다. 실제로 베트남인들은 남월을 중국인이 세운 왕조로 보아 자신들의 왕조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한다)은 아예 서술에서 제외시켰고, 중국 지배기의 역사는 쯩 자매의 반란 정도만 한 컷 정도로 언급되며, 중국 독립 이후부터 레 왕조 성립 이전까지의 역사는 응오 왕조를 제외하고는 생략되어있다. 베트남사에서 중요한 부분만 대략적으로 설명한 거니 마냥 비판할 수만은 없긴 하다. 하지만 오래 가지 못했던 전 레 왕조나 딘 왕조는 그렇다고 쳐도 베트남 최초의 장기 왕조로서, 베트남의 수도를 최초로
하노이로 정하고 북쪽의 송나라와 겨루기도 했던 리 왕조와,
원나라의 침략을 물리치고 대월사기를 편찬하고
쯔놈이 고안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쩐 왕조에 대한 설명이 빠진 것은 아쉬운 일. 특히나 리 왕조는 베트남에서는 드물게도 200년을 간 왕조이며 험난한 베트남사에서 그나마 안정적인 시대였다.
[19]
굳이 응오딘지엠과 호치민 정부의 차이를 얘기하자면, 비록 호치민의 토지개혁은 문제가 있었어도 그 시기 토지 문제를 해결했다. 반면 응오딘지엠은 토지개혁을 제대로 실행하지 않았고, 따라서 남베트남은 프랑스 식민지 시절 모순구조가 그대로 남아있게 됐다.
[20]
그러나 초기 응오딘지엠 정권은 미국의 허가 없이는 정책 하나 제대로 채택하지 못했다. 그런 점에서 미국에게 일방적으로 끌려다녔다고 볼 수 있다.
[21]
이 인간이 재임하던 시기
공무원 될 때 물어보던 게 두 가지였다. '인맥이 있는가'와 '가톨릭을 믿는가'였다.
[22]
이 대포들은 근처의
미얀마,
태국 혹은 중국에서 수입해 오거나, 자체적으로 제작했던 것들이었다.
[23]
정확히는 샤카 중에서도 카필라 성을 중심으로 한 나라다.
[24]
여담으로 석가모니가 살아있을 때 모국이 멸망했는데 그래도 모국이 멸망하는건 못 보겠던지 3차례나 코살라를 설득해 3번을 성공했지만 4번째 때는 이것이 자기네 나라가 받아들여야 할 업이라고 여겨 막지 않았다. 참고로 당시 왕은 석가모니의 사촌이었는데 석가모니의 아버지인
정반왕의 자손들이 아들인 석가모니와 손자인 라훌라를 포함 일족 상당수가 출가해버려 직계자손중에 왕위를 이을 사람이 없었다. 이런 참사(?)에 석가모니도 부왕의 부탁을 받아들여 출가는 부모의 허락을 얻어야 한다는 계율을 세웠다.
[25]
무함마드 활동기의 사산 왕조의 샤한샤였던 호스로 2세는 아랍인 왕국인
라흠 왕국의 왕을 죽이기도 했다.
[26]
그리고 해석과는 별개로 이 결정에 문제가 있는 것도 사실이었는데 가장 큰 문제는 알리가 무함마드의 유해를 수습하는 사이에 기습적으로 후계자 선정 회의가 열렸다는 것이다. 당초에 무함마드 사후에 자리를 누가 이어받을지는
아랍인의 입장에서는 혼란스러울 수 밖에 없었는데 전통적인 관점에 따른다면 혈연에 따른 세습을 택해야 하므로 무함마드의 사위인 알리가 잇는 것이 당연하지만 종교적 관점으로 보면 선지자들이 혈연에 의한 세습을 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알리가 아니더라도 다른 사람이 이어도 된다.
[27]
사실 이것 뿐만이 아니라서 수니파와 시아파가 분열하는 무함마드 사망~우마이야 왕조 초기까지의 이슬람 역사에 대해서 수니와 시아의 시각차는 매우 뚜렷하다. 당연히 사람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라서 정통 칼리프 시대의 4명의 칼리프에 대해서도 수니파는 이들을 모두 칼리프로 인정하지만 시아파는 알리를 제외한 나머지 셋은 찬탈자 수준으로 저평가하며 당연히 관련된 인물들에 대한 평도 나빠서 예를 들어 아부 바크르의 딸이자 무함마드의 아내인 아이야에 대해서 수니파에서는 '믿는 자들의 어머니' 라고 극찬하지만 시아파에서는 무함마드를 독살했다고 말하는 이도 있을 정도로 극악한 인물로 평을 받는다.
[28]
단 순니파에서도 두 사람간에 불화가 있었다는 것을 인정한다. 다만 순니파는 그런 일이 있었다 정도로만 언급하지만 시아파에서는 아부 바크르가 알리에게 "네 집에 불을 지르겠다!" 라고 협박했다고 구체적으로 말한다.
[29]
애초에 알리 반대파의 논거는 딱 하나 예언자의 후계자는 세습되지 않는다인데 야지드는 이를 세습함으로서 명분을 깨먹었다. 시아파도 알리의 자리를 빼앗고 알리의 후계자에게 돌아가야 할 자리를 빼앗았다며 그런 우마이야 가문이 아바스조에게 멸족당하다시피 한 것은 당연한 응보라고 여긴다.
[30]
알리 생전에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알리와 대립했지만 아버지의 사후에는 알리의 아들인 후세인을 지지하였다.
[31]
이렇게 무아위야 1세와 야지드 1세 모두 이슬람의 분열에 기여했다 보니 알리 말고 무함마드 후계자는 없다는 시아파에서는 아부 바크르, 우마르, 우스만과 함께 평이 매우 좋지 않지만 수니파에서도 무아위야 1세는 이슬람을 왕정화시켰다고, 야지드 1세는 이슬람을 완전히 분열시켜버렸다고 좋지 않게 보는 사람이 있다. 특히 카르발라 참극에 있어서만큼은 수니파에서도 불행한 일이라는 것에는 동의한다.
[32]
토머스 매든도 자신의 책에서 이 설을 주장했다.
[33]
십자군 자체가 특이한 일이라 치부하기엔 이슬람 세계의 최전선에서 기독교 세력과 부딪히는 건 흔한 일이었다. 당장 그들의 최대 적수였던 동로마부터가 기독교 국가였고 이베리아 반도에서도 레콩키스타가 벌어지는 등 십자군 전쟁 당시 아나톨리아, 레반트와 북아프리카는 이슬람 입장에선 기독교 세력과의 최전선이었다. 당대 중세 이슬람에게 십자군은 그들의 입장에서는 최전방에 그냥 또 다른 기독교 세력이 침공한 것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34]
다만 종교적 관점에서는 변방의 소란으로 보긴 어려운데 십자군의 목표는 이슬람의 3대 성지중 하나인 예루살렘이며 십자군 전쟁 기간동안 이슬람은 2세기 가까이 예루살렘을 기독교 세력에게 빼앗겼다.
[35]
이 부분은 대한교과서주식회사 (現
미래엔)에서 나온 《중동사》나 《터키사》같은 기초적인 세계사 교양 도서만 봐도 알 수 있는 내용인데, 바이바르스 개인이 튀르크인이라는 것 하나만 보고 주화입마에 빠진 모양이다. 그러면서도 바이바르스가 지중해 일대의 십자군을 깡그리 몰아냈다는 보였다.
[36]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이건 미리 계획된 보복이다!"라고 분노했다.
[37]
그나마 이 정도인 이유도 미국과는 달리 대부분의 땅이 춥고 원주민 비율이 미국 본토보다 상대적으로 낮아 비교적 살기 좋은 영토만 차지하면 나머지 큰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미국은 자국 영토 중에서 살기 좋은 영토가 대부분이지만 캐나다는 그게 아니라서 지들 먹을 땅을 다 먹자 미국은 땅이 안 남은 반면 캐나다는 그래도 어느 정도 땅은 남은 것이다. 물론 둘 다 알짜배기땅이 아닌 황무지 같은 땅이지만...
[38]
게다가 뉴펀들랜드와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는 이때의 영향으로 그나마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소수 정도의 명맥을 유지하는 캐나다 본토 지역들과 달리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하나도 없고, 유럽계 백인들만이 인구 절대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물론 영토 면적이 방대한 북미 본토 지역에 비해 4면이 바다에 막혀 도주할 곳이 없는 좁은 도서 지역이라는 지정학적 위치도 고려해야겠지만..
[39]
그리고 또 한 가지,
호주의
빼앗긴 세대 같은 짓이
캐나다에서도 자행되었다.
[40]
애초에 조약을 맺은 동기의 불순함, 조약 내용의 단어 선택, 조약으로 인한 토지갈등 등등
[41]
그래서 뉴질랜드에서도 이를 자랑스러워하지만 앞서 말한대로 이것도 아무 분쟁없이 평화적으로 이뤄진 것이 아니라서 마오리족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