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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르-푸아티에 전투 Bataille de Poitiers Battle of Tours/Poitier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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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기 | <colcolor=#000,#ddd>732년 | |
장소 | 프랑스, 투르와 푸아티에 | |
원인 | 우마이야 왕조의 침공. | |
교전국 | 프랑크 왕국 | <colcolor=#000,#ddd> 우마이야 왕조 |
지휘관 | 카롤루스 마르텔 | 아브드 알 라만 이븐 아브드 압달라 알 가비키† |
병력 | 약 2만 명 | 2만에서 3만 명으로 추정 |
피해 | 사상자 약 1000명 |
사상자 약 1만 명 최고 지휘관 전사 |
결과 | 프랑크 왕국의 승리. | |
영향 |
이슬람 제국의 서유럽 진공 봉쇄. 카롤루스 마르텔, 카롤링거 왕조를 개창.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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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투르-푸아티에 전투(Battle of Tours/Poitiers)는 732년, 메로빙거 왕조 프랑크 왕국의 궁재(Mayor of the Palace)[1] 카롤루스 마르텔이 프랑스의 투르와 푸아티에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군대에 승리를 거둔 전투이다.2. 배경
메로빙거 왕조가 건국한 프랑크 왕국은 전통적으로 형제가 여러 명일 경우 균등하게 토지를 분배하는 균분상속제로 통치되었으므로 왕위 계승에서 밀려난 왕족은 토지를 분할받았는데 이는 곧 왕권의 약화를 의미했다. 왕권이 약화되는 것과 비례하게 왕 바로 아래의 재상들의 권력은 오히려 강해졌고 7세기 후반의 프랑크 왕국은 2개[2]로 나뉘어 각자의 재상들이 대립했다.아우스트라시아의 재상이던 카롤링거 가문의 피핀 2세가 687년 네우스트라 - 부르군트 연합군을 상대로 테르트리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써 프랑크 왕국의 권력을 사실상 점유하였으나 이 과정에서 프랑크 왕국이 혼란에 빠지는 것은 막을 수 없었다. 그 와중에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왕국을 정복한 우마이야 왕조의 이슬람 세력이 피레네 산맥을 넘어 프랑크 왕국으로 진입을 시작했고 720년에 이르러서는 대규모 침공이 이루어져 부르고뉴 지방이 우마이야 왕조의 수중으로 떨어졌다.
우마이야의 칼리프 히샴이 임명한 이베리아의 코르도바 총독 아브드 알 라만(Abd al-Rahman)은 피레네 산맥의 서쪽을 넘어 북상해 아키텐 공을 격파, 보르도를 약탈하고 군대를 동쪽으로 이끌었다. 알 라만은 투르의 상 마르탕 교회에 막대한 재보가 있음을 알고 르와르 강으로 진군했다.
이 사실을 알아낸 피핀 2세의 아들 카롤루스 마르텔은 병력을 모아 급히 파리에서 투르로 이동하였으나 이슬람 세력보다 한 발 먼저 도착한 관계로 그대로 진군하여 푸아티에로 나아갔다. 푸아티에 인근의 평원에서 우마이야 왕조의 병력과 조우한 프랑크 왕국군은 서로 진을 치고 대치하기 시작했다.
3. 전개
이슬람 군대의 공격이 포착되자 카롤루스 마르텔은 군대에게 팔랑크스 대형을 취하도록 하였으며 이슬람 기병대의 돌격을 대비해 언덕과 나무를 앞에 두고 포진하였다. 7일간의 작은 접전을 벌이며 아브드 알 라만은 병력이 모두 모이기를 기다렸으나 이는 프랑크 왕국 역시 병력을 집중 시킬 시간을 주었다. 카롤루스 마르텔은 팔랑크스 대형을 취함과 동시에 고지를 점령하고 있었기에 이슬람 기병의 돌격에 충분한 대비를 하고 있었다. 또한 방어전의 이점을 갖고 추위에 단단히 대비한 프랑크 군과 달리 이슬람 군은 추위에 전혀 대비를 하지 않았고 따라서 프랑크 군은 방어를 하면 할수록 승리에 가까워져 갔다.
아바드 알 라만은 보병에 대한 기병의 우월함을 믿고 돌격을 반복했으나 이슬람 기병은 잘 방비한 프랑크 보병대에게 심한 피해를 입었다. 물론 프랑크 보병도 많은 피해를 입었으나 진형은 무너지지 않았고 아바드 알 라만은 분대를 나눠 카롤루스 마르텔을 노렸으나 근위대(?)에 막혀 실패한다. 이후 카롤루스 마르텔이 보낸 정찰병이 이슬람 군 본진의 노예를 풀어주고 보급선을 공격하여 이슬람 기마대는 본진으로 후퇴하였고 결국 아바드 알 라만은 공세를 취하던 이슬람 군대를 뒤로 물린다. 이슬람 전군이 퇴각하는 도중 아바드 알 라만은 프랑크 군에게 포위당해 죽임을 당했다.
이후 이슬람 군대는 큰 혼란을 겪게 된다. 아바드 알 라만에 견줄만한 결정권자가 없었고, 당시 이슬람 군대는 아랍인 뿐만 아니라 페르시아인이나 알 안달루스조 치하의 스페인 계열, 예멘인 등 여러 민족이 혼합되어 있는 혼성군의 성격이 매우 강해서[3] 아바드 알 라만 사후에 부사령관들은 전사한 사령관의 지휘 공백을 메꾸지 못했다. 결국 이슬람 군대는 패퇴하게 되었다.
4. 평가와 재평가
푸아티에에서의 접전은 기독교와 이슬람교 사이의 ‘종교 전쟁’이나 이른바 ‘문명 충돌’로 보기도 어려울 것이다. 샤를 마르텔의 프랑크군에게 사라센군은 알라만족이나 작센족 등 여느 ‘이교도(païen)’ 게르만족들과 마찬가지로 영토와 패권을 노리는 침입자일 뿐이었다. 아키타니아의 기독교 군주 외드 대공이 프랑크군의 침탈을 막기 위해 무슬림 세르다냐 왕국과 동맹을 맺기도 했으며, 사라센 격퇴를 명분으로 프로방스를 침공한 샤를 마르텔이 기독교 소공국을 침탈하고 교회를 불사르고 성유물을 약탈하기도 했다. 더구나 기독교세계든 무슬림세계든 신의 이름으로 살인을 정당화하는 이른바 ‘성전(guerre sainte, djihad)’의 개념은 8세기 갈리아의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하지만 중세 초의 어느 한 전투는 근대에 접어들어 서구와 기독교의 발흥과 더불어 프랑스와 유럽, 그리고 기독교의 관점에서 줄곧 덧칠되면서 오늘날의 ‘푸아티에 전투’가 되었다. ‘프랑스’가 탄생하기 훨씬 이전에 있었던 한 전투는 프랑스 역사의 ‘원천’ 중 하나로 승급되었으며, 유럽의 이슬람화를 막고 기독교세계를 지켜낸 최초의 승리로 거듭났다. ⋯ 19세기 이후 프랑스가 중동과 아프리카로 제국주의적 팽창을 시작하면서, 샤를의 신화는 이슬람세계에 대한 기독교 유럽의 선진성과 우월성의 상징이 되었다.
- 이용재, 「732년 10월, 푸아티에 전투 - ‘기독교’와 ‘이슬람’의 충돌(?) - 」, 『프랑스사 연구』, 제36호, 2017, pp.155-183, p.179.
- 이용재, 「732년 10월, 푸아티에 전투 - ‘기독교’와 ‘이슬람’의 충돌(?) - 」, 『프랑스사 연구』, 제36호, 2017, pp.155-183, p.179.
투르-푸아티에 전투의 전공으로 후일 카롤링거 왕조가 프랑크 왕위를 찬탈하는 기반이 닦였기 때문에 왕조의 정통성과 프로파간다를 위해 카롤링거 왕조는 이 전투를 적극적으로 띄워주었고 지금도 이슬람의 서유럽 진공을 막은 전투로 크게 평가하는 시각이 많다. 그러나 사실 이 한 번의 전투로 무슬림의 프랑스 침공이 끝난 것은 아니었다. 이후에도 우마이야 왕조는 프랑크 왕국 남부와 남서부 해안가를 약탈했고, 카를 마르텔과 우마이야 왕조 군은 737년까지 여러 차례 전투를 벌였다. 카를 마르텔 사후 카롤링거 왕조가 들어선 후에도 무슬림은 여전히 프랑스 남부 프로방스 해안 및 티레니아 해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었고, 759년 피핀 3세가 나르본을 수복하면서 프랑스에서 무슬림을 완전히 물리칠 수 있었다.
20세기 이후 현대에 들어 역사학계에서는 이렇게 전투와 같은 특정적 사건으로 역사가 결정되었다는 식의 해석을 매우 껄끄러이 보고 지양하고 있다. 그간 이슬람의 유럽정복을 막아낸 전환점으로 평가된 투르 전투도 마찬가지로 사료들이 재발굴, 재해석되고 전투의 전말, 규모, 상징성 등이 재평가되면서 "투르 전투 때문에 이슬람이 서유럽에 침입하지 못했다"는 기존의 시각을 비판하는 목소리가 끊임없이 나오고 있다. 즉 투르 전투 자체는 장기간에 걸친 이슬람의 서유럽 침공 과정에서 일어난 사건에 불과했고, 이슬람이 서유럽에 침입하지 못한 것은 그 팽창 한계점에 도달했기 때문이지 투르 전투에서 저지된 게 아니라는 주장이다.
위 문단에 언급된대로 카를 마르텔이 나서기 이전부터 아키텐 공 외드와 같은 프랑스 남부의 세력가들이 지속적으로 이슬람의 침공을 막아내고 있었고, 아키텐 공 외드는 투르 전투가 있기 11년 전인 721년에 툴루즈에서 알-삼 이븐 말리크 알-카우라니가 이끄는 우마이야의 군대를 격퇴했었다. 현대에는 툴루즈 전투가 제대로 알려지지 않은 상황이지만, 당대에는 투르 - 푸아티에 전투 보다 훨씬 더 많이 언급되었고, 사가들의 기록에도 훨씬 더 많이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교황 그레고리오 2세는 아키텐 공 외드에게 '기독교 세계의 투사'라는 칭호도 선사했다.
또한 프랑스에서는 침공이 격퇴되었을지언정, 이슬람 세력의 유럽 침공은 계속되었다. 이들은 시칠리아를 점령하고 이탈리아 남부 지역을 침공해 거점을 구축했으며 8 ~ 10세기에 걸쳐 이탈리아를 침공했다. 이탈리아의 기독교 세력은 10세기까지 이슬람 세력의 침공을 격퇴하고 이들이 세운 거점을 공략하는 실정이었다. 심지어 846년에는 로마가 보이는 오스티아와 인근 지역이 약탈당했으며 로마가 포위당하는 일도 벌어졌다. 기독교 세계의 심장인 로마 교황청이 지속적인 위협을 받는 처지였는데, 과연 투르 - 푸아티에가 이슬람 세계의 서유럽 침공을 막았다고 봐야할까?
그러나 이 전투가 서유럽의 운명에 매우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는 점은 부정되지 않고 있다. 카롤루스 마르텔은 이 전투의 승리로 명예와 프랑크 왕국 내에서의 인기를 차지했으며, 아키텐 공 외드의 충성도 얻어냄으로써 실리도 얻었다. 이 명예와 실리를 기반으로 카를 마르텔의 아들 피핀이 메로빙거 왕조를 무너뜨리고 카롤링거 왕조를 열게 된다.
하인리히 브루너(Heinrich Brunner)에 따르면 본래 이전까지 프랑크 왕국의 주력은 보병으로 이 전투가 있기까지 프랑크 왕국은 보병을 운용했으나 투르-푸아티에 전투에서 기병 주력인 이슬람 군을 추격하면서 기병의 필요를 절실히 느낀 카를 마르텔은 이후 프랑크 왕국의 군제를 기병으로 개편했다. 이 과정에서 기병을 양성할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교회령을 몰수하고 이를 그에게 봉사하는 추종자들에게 나눠주면서 봉건제가 정착했다는 것이다. 다만 이 주장은 1. 당시 전투법이 결정적으로 바뀐 기록이 없음. 2. 중세 군대의 보병 중요성 유지. 3. 기사의 기원은 4c 혹은 그 이전의 게르만 기병으로 추정. 4. 푸아티에 전투는 733년, 교회령의 최초 몰수는 732년.5. 마르텔의 주적은 주변 게르만 왕국이었지, 이슬람 세력이 아니었음. 6. 마르텔의 기병 강화는 푸아티에 이전부터 이뤄졌으며, 기병 전력의 강화는 장기적으로 보면 로마 제국 말기의 군제 개혁에서부터 시작. 이라는 반론이 존재한다. 2023년 현재 기준으로는 깨진지 오래인 가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