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ir.pe (일반/밝은 화면)
최근 수정 시각 : 2024-10-18 13:10:37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Nobel_Prize.png 노벨 연구소 선정 최고의 책
{{{#!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word-break:normal"
2002년, 노르웨이 노벨연구소는 전 세계 54개국의 유명 작가들을 대상으로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훌륭하고 가장 중심적인 작품이라고 생각하는 책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했다. 1위는 50%의 이상의 표를 얻은 돈키호테이며 나머지 순위는 밝히지 않았다. 가장 많은 책을 올린 작가는 표도르 도스토옙스키(4권)이며, 프란츠 카프카, 윌리엄 셰익스피어, 레프 톨스토이는 각각 3개의 책을 올렸다.
1984
조지 오웰
인형의 집
헨리크 입센
감정 교육
귀스타브 플로베르
압살롬, 압살롬!
윌리엄 포크너
허클베리 핀의 모험
마크 트웨인
아이네이스
베르길리우스
안나 카레니나
레프 톨스토이
빌러비드
토니 모리슨
베를린 알렉산더 광장
알프레드 되블린
눈먼 자들의 도시
주제 사라마구
불안의 책
페르난두 페소아
욥기
작가 미상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부덴브로크가의 사람들
토마스 만
캔터베리 이야기
제프리 초서

프란츠 카프카
우리 동네 아이들
나기브 마푸즈
픽션들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시선집
자코모 레오파르디
단편집
프란츠 카프카
단편집
에드거 앨런 포
제노의 의식
이탈로 스베보
죄와 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죽은 혼
니콜라이 고골
이반 일리치의 죽음
레프 톨스토이
데카메론
조반니 보카치오
오지에서의 곤경
주앙 기마라에스 로사
광인일기
루쉰
신곡
단테 알리기에리
수상록
미셸 드 몽테뉴
동화집
한스 크리스티안 안데르센
파우스트
요한 볼프강 폰 괴테
가르강튀아와 팡타그뤼엘
프랑수아 라블레
길가메시 서사시
작가 미상
금색 공책
도리스 레싱
위대한 유산
찰스 디킨스
걸리버 여행기
조너선 스위프트
집시가집
페데리코 가르시아 로르카
햄릿
윌리엄 셰익스피어
이야기
엘자 모란테
굶주림
크누트 함순
백치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일리아스
호메로스
해방된 민중
할도르 락스네스
보이지 않는 인간
랠프 엘리슨
운명론자 자크와 그 주인
드니 디드로
밤의 끝으로의 여행
루이페르디낭 셀린
리어왕
윌리엄 셰익스피어
풀잎
월트 휘트먼
트리스트럼 샌디의 삶과 의견
로렌스 스턴
롤리타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콜레라 시대의 사랑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보바리 부인
귀스타브 플로베르
마의 산
토마스 만
마하바라타
브야사
특성 없는 남자
로베르트 무질
마스나위
잘랄 웃 딘 루미
메데이아
에우리피데스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회상록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
변신 이야기
오비디우스
미들마치
조지 엘리엇
한밤의 아이들
살만 루시디
모비 딕
허먼 멜빌
댈러웨이 부인
버지니아 울프
냘의 사가
작가 미상
노스트로모
조지프 콘래드
오디세이아
호메로스
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
고리오 영감
오노레 드 발자크
노인과 바다
어니스트 헤밍웨이
백년의 고독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
과수원
세이크 무스하리프 웃-딘 사디
오셀로
윌리엄 셰익스피어
뻬드로 빠라모
후안 룰포
내 이름은 삐삐 롱스타킹
아스트리드 린드그렌
시선집
파울 첼란
악령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오만과 편견
제인 오스틴
라마야나
발미키
샤쿤탈라
칼리다사
적과 흑
스탕달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마르셀 프루스트
북으로의 이주 시절
타옙 살리흐
단편집
안톤 체호프
아들과 연인
D. H. 로렌스
음향과 분노
윌리엄 포크너
산소리
가와바타 야스나리
이방인
알베르 카뮈
겐지모노가타리
무라사키 시키부
모든 것이 산산이 부서지다
치누아 아체베
천일야화
작가 미상
양철북
귄터 그라스
등대로
버지니아 울프
소송
프란츠 카프카
몰로이
말론 죽다
이름 붙일 수 없는 자
(3부작)
사뮈엘 베케트
율리시스
제임스 조이스
전쟁과 평화
레프 톨스토이
폭풍의 언덕
에밀리 브론테
그리스인 조르바
니코스 카잔차키스
출처1 출처2
}}}}}}}}} ||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Братья Карамазовы
The Brothers Karamazov
파일:Dostoevsky-Brothers_Karamazov.jpg
<colbgcolor=#dddddd,#010101><colcolor=#373a3c,#dddddd> 형식 대하소설
언어 러시아어
저자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최초 발행 1880년
연재 기간 1879년 ~ 1880년

1. 개요2. 등장인물3. 내용4. 영화5. 평가

[clearfix]

1. 개요

인생에 대해 알아야 할 것들은 모두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안에 있다.
커트 보니것

러시아의 대문호 표도르 도스토옙스키의 5대 장편 소설 중 하나로 도스토옙스키가 남긴 많은 명작들 중에서도 최고의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참고로 도스토옙스키는 이 작품을 출간한 지 3개월 후에 타계했기 때문에 유작에 해당한다.

본래 도스토옙스키는 이 작품을 3부 대장편으로 구상하고 있었는데,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는 분량이지만 일단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그 장편의 프롤로그에 해당하는 내용이다.[1]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스토옙스키 생전에 탈고된 제1부는 미완성작으로 보이지 않을 만큼 그 자체로서 훌륭한 완결성을 보이는데, 애초에 도스토옙스키 스스로도 1부를 출간한 직후 지인에게 보낸 편지에서 "모든 걸 쏟아냈다."라며 1부의 완결성을 자평했다고 한다.

어쨌든 1부 출간 이후 알렉세이가 주인공인 본편 2부를 쓰려고 했으나, 제대로 된 집필을 시작하기 전에 도스토옙스키가 사망함으로써 명목상 미완성작으로 남았다. 도스토옙스키가 남긴 2부의 초안 내용은 알렉세이가 혁명 세력에 가담하여 황제를 암살하고 처형당하는 줄거리였다고 한다.[2]

참고로 주인공 알렉세이의 이름은 1878년 요절한 표도르 본인의 어린 아들의 이름에서 따왔다. 아이러니하게도 요절한 어린 아들을 회상하며 쓴 작품이 본인의 유작이 된 셈.

2. 등장인물

이 문서에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문서가 설명하는 작품이나 인물 등에 대한 줄거리, 결말, 반전 요소 등을 직·간접적으로 포함하고 있습니다.

3. 내용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는 방탕한 호색한이자 무책임한 가장이다. 그는 두 번의 결혼에서 세 명의 아들을 얻었으나 단 한 명도 자기 손으로 키우지 않았고[35], 소문에 의하면 그의 집에서 요리사로 일하는 스메르쟈코프도 사실은 표도르가 백치 여인을 겁탈하여 생긴 사생아라고도 한다.

그가 외면한 세 아들들은 뿔뿔이 흩어져서 성장하다가 장성해서야 아버지를 찾아온다. 퇴역 장교인 장남 드미트리(미챠)는 자신에게 어머니가 남긴 유산이 있으나 아버지의 술책에 모조리 빼앗기게 생겼다는 것을 알고 담판을 지으러 왔다가, 아버지가 탐내는 여인 아그라페나(그루셴카)에게 반하고 만다. 대학을 나온 지식인인 차남 이반은 형의 부탁을 받고 아버지와의 사이를 중재하러 왔다가, 형의 약혼녀인 카체리나(카챠)와 사랑에 빠지고 만다. 막내 알렉세이(알료샤)는 수도자가 되기 위해 수도원에서 수련 중인 신심 깊고 선량한 청년으로, 가족들의 갈등을 안타깝게 바라본다. 그의 스승인 조시마 장로가 환속을 권하여, 알료샤는 속세로 돌아온다.

드미트리는 아버지에게서 돈을 받아 카챠에게 진 빚을 갚고 결별한 뒤 그루셴카와 결혼하고 싶어하고, 표도르는 그 돈을 그루셴카에게 줄 것이라며 조롱한다. 이반은 내심 아버지에 대한 혐오를 키워 나가면서, 스메르쟈코프에게 자신의 무신론적 사상을 가르친다. 가족 간의 갈등이 점차 심하게 치닫던 어느 날 밤, 표도르가 살해당하고 그가 숨겨 두었던 돈이 도난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확실한 범행 동기가 있는 드미트리가 용의자로 지목되어 체포당한다. 그러나 드미트리는 자신이 죽이지 않았다며 결백을 호소하고, 알료샤는 미챠의 결백을 믿으며 스메르쟈코프가 범인이라고 주장한다. 이반은 사건의 진상을 알기 위해 스메르쟈코프를 여러 차례 찾아가 추궁하는데, 스메르쟈코프는 "내가 한 짓은 맞지만 이반이 원하던 일을 실현시켜 준 것뿐"이라고 주장하며 범행 증거로 사라졌던 돈을 내놓는다. 이반은 그의 자백에 충격을 받아, 자신이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는 마음을 품고 무의식적으로 스메르쟈코프를 교사한 것과 다름없다는 죄책감에 사로잡혀 섬망증에 걸리고 만다. 이반이 떠난 직후 스메르쟈코프는 목을 매어 자살했다.

법정에서는 수많은 증언과 갑론을박이 오가고, 미챠를 범인으로 지목할 수 있는 정황 증거는 있었으나 확실한 물증은 없었으며 미챠에게 유리한 증언도 여러 번 나왔다. 하지만 '형은 무고하고 진범은 스메르쟈코프이며 그를 교사한 것은 나다'라는 이반의 증언을 들은 사람들은 병에 걸려서까지 형을 변호하는 이반을 안타까워하기는 했으나, 망상에 사로잡힌 중환자의 헛소리로 치부하여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리고 흥분한 카챠가, 예전에 미챠가 이성을 잃고 보냈던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공개하면서 상황은 미챠에게 몹시 불리해지고, 결국 미챠는 누명을 벗지 못한 채 꼼짝없이 유죄 판결을 받는다.

공판 이후, 카챠는 열병으로 혼수 상태에 빠진 이반을 자신의 집으로 데려가 간호 중이었는데, 알료샤가 갑자기 방문한다. 카챠는 이반이 자신에게 미챠의 탈출을 도와달라고 부탁해 놓았다는 얘기를 한다. 또한, 자신이 여전히 드미트리를 사랑한다고 이반이 오해하고 있는 것에 화가 난 나머지 심하게 다투고는 원망스러운 마음에 충동적으로 편지를 공개했을 뿐, 지금은 후회하고 있으며 미챠가 살인범이라고 진심으로 믿지도 않는다고 고백한다. 알료샤는 카챠에게 현재 입원 중인 미챠를 방문해 달라 부탁하고 나서 미챠를 찾아간다. 미챠는 탈출해서 그루셴카와 함께 미국으로 갈 것이며, 그 곳에서 스스로 죄를 씻고[36] 성실히 일하고 영어를 공부해서 수 년 뒤에 미국인으로 신분 세탁을 하고 귀국하겠다는 뜻을 밝힌다. 이 때 카챠가 찾아오고, 그와 미챠는 각자의 잘못을 용서하고 서로를 영원히 사랑하자며 화해를 나눈다. 공교롭게도 그 때 그루셴카가 나타나자, 카챠는 자신을 용서해 달라 청하고 그루셴카는 미챠를 구해준다면 평생 카챠를 위해 기도하겠노라는 말로 답한다. 카챠가 떠나자 알료샤는 그를 뒤따라가 몇 마디 대화를 나누고, 자신과 가까이 지내던 소년 일류샤의 장례식을 주관하러 간다.

일류샤의 묘비 앞에서, 알료샤는 추모를 위해 모인 일류샤의 친구들에게 그와의 추억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는 자신이 두 형과 함께할 날이 얼마 남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만간 이 도시를 떠나 오랫동안 돌아오지 못할 수도 있지만, 그래도 자신과 소년들은 일류샤를 기억하고 서로를 결코 잊지 않기로 약속하자고 연설한다. 알료샤와 소년들은 추억을 간직하고 사후 부활하여 재회할 것을 약속하면서 손을 맞잡고 추도식에 간다.


19세기 후반 제정 러시아 시대, 시골 지주 집안인 카라마조프 가에서 일어난 존속살해 사건이 중심 서사를 이루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작품답게 카라마조프 가의 인간 탐구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사건의 중심이 되는 인물은 아버지 표도르와 장남 드미트리이지만, 사실 이 소설의 진짜 주제를 표상하는 인물은 차남 이반과 삼남 알렉세이이다.

이반은 냉철한 지식인으로 철저하게 합리론을 신봉하며 '신神은 없다, 그러므로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실존주의적 무신론을 주장한다. 이반은 이 말을 당시 지식인들이 그러했듯이 기존의 구 체제, 구 사상을 극복하자는 의미로서 사용했다.[37][38] 반대로 신실한 예비 수도자[39]인 알렉세이는 세상을 무조건적으로 사랑한다. 작중에선 그를 성적인 내용만 아니면 어지간한 모욕을 해도 그것을 모욕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오히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먼저 손을 내미는 인물로 묘사되며, 또한 그만큼 세상으로부터 사랑받는 인물이기도 하다. 둘의 차이는 다음 대목에서 잘 드러난다.
알렉세이: "나는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무엇보다도 삶을 사랑해야 한다고 생각해."[40]
이반: "삶을 그것의 의미보다도 더 많이 사랑해야 된다?"
알렉세이: "반드시 그래, 형 말대로 논리에 앞서, 반드시 논리에 앞서 삶을 사랑해야 하고, 그때야 비로소 나는 삶의 의미도 이해하게 될 거야. 바로 이런 생각이 이미 오래전부터 내 머릿속에 떠오르곤 해. 형의 일도 이제 절반은 다 된 거야. 이반, 성취된 거라고. 살고 싶어 하니까 말이야. 이제 형은 형의 나머지 절반을 두고 노력하면 돼, 그러면 형은 구원받은 거야.[41] 난 인간을 믿어. 형을 믿듯이."

작중 이반이 알렉세이에게 들려주는 극시 '대심문관'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종교와 하느님에 대한 관념을 집대성한 걸작이다. 알로샤와 이반이 대화를 나누면서, 마치 오래 전 그리스 수도자들이 성모신심에 의해 여러 전설과도 같이 내려오는 전승을 모티프 삼아 지은 신학적 이야기를, 자기도 하나 만들어 보았노라면서 알료샤에게 얘기해 주는 것이 그 내용이다. 이 내용을 간단히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이단심문이 한창이던 15세기 에스파냐 세비야에 예수가 강림한다. 그것도 1500년 전 자신이 이스라엘을 돌며 교리를 전파했을 때와 같은 복장, 같은 모습으로 말이다. 이에 사람들은 굳이 말하지 않았는데도 그가 재림한 메시아인 것을 깨닫고 그에게로 나아온다. 마침 이단심문을 위해 내려온 나이 90세 전후의 대심문관이 죽은 소녀를 다시 살리는 예수를 목격하게 된다.[42] 친위대로 하여금 예수를 가둔 대심문관은 예수와 홀로 지하에서 얘기를 나누게 된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예수는 광야에서 기적, 신비, 권위를 요구하는 악마의 유혹을 모두 거부하고 신앙의 자유를 선택하였지만, 자유를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은 소수일 뿐이다. 오히려 대부분의 평범한 사람들은 기적, 신비, 권위가 있어야만 믿음을 가질 수 있으며 자유보다는 빵을 원한다. 하지만 예수는 빵보다 자유를 선택함으로써 빵에 대한 욕구로부터 탈피하지 못하는 평범한 사람들이 믿음과 질서를 가질 기회를 박탈하였다. 따라서 가톨릭교회는 예수를 유혹한 악마와 손을 잡고 지상에서 기적, 신비, 권위를 제공함으로써 자유를 감당할 능력이 없는 다수를 위한 빵을 제공하게 되었다. 예수가 제시한 신앙의 자유를 이용하여 겨우 현실의 질서를 만들어낸 이제 와서야 예수가 재림하여 질서를 흐뜨러트린다면 지상은 지옥이 될 것이기에 대심문관은 예수를 화형하겠다고 선언한다. 참고로 대심문관 본인도 한 때 누구보다 성스러운 신심으로 하느님을 숭배하였으나, 결국 진리를 깨닫고는 오래 전부터 그 진리를 숭배한 무리에 편입, 신자들을 사목한 것이라 술회한다. 이 모든 말을 묵묵히 듣고 있던 예수는 대심문관의 말이 끝난 후 그에게 가볍게 키스하고 대심문관은 예수를 풀어주며 다시는 나타나지 말 것을 요청한다. 이후 대심문관은 다시 이전과 같은 삶을 살아간다.

도스토옙스키는 무신론자가 아니었다. 오히려 대심문관 이야기 자체는 무신론적 관점에서 그리스도교를 비판하는 것을 비판하는 이야기이고, 자신은 대심문관의 논리가 맘에 들지 않았다고. 젊은 시절에 과격한 사회주의와 무신론에 투신한 전적이 있던 도스토옙스키는 30살에 그리스도교적 극우주의자로 전향해서 죽을 때까지 신앙을 가졌으나, 도스토옙스키가 여전히 회의주의를 버리지 못했으며 자신의 그런 태도를 이반 카라마조프를 통해 그려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무신론과 종교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인간의 내적대립, 그 과정에서 하느님과 종교, 인간의 관계를 다룬 것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일지도 모르겠다.

작중 이반이 죄책감으로 인해 섬망에 빠져 조우하게 되는 '악마( 사탄)'의 개념도 흥미로운 부분. 중세시대 이래 줄곧 우리에게 선입견으로 박힌 꼬리가 있고, 삼지창을 들었으며, 뿔과 날개가 있는 전형적인 악마의 모습이 아닌, 말쑥한 사복에 중년이며[43] 예리한 통찰력으로 사람의 마음을 후벼파는 악마가 등장하게 된다.[44] 읽다보면 매우 흥미로운 부분. 주로 이반을 겁나게 깐다.

중간에 악마가 언급하는 '진리를 깨닫는 순간'에 대한 비유가 대단하다. 소설의 언급에 의하면, 이반은 젊은 시절, 한 사람이 무려 1,000조km를 걷게 되는 가정을 하였다. 그 시간은 너무나도 오랜 시간이어서, 손에 차고 있던 손목시계가 원소 단위로 분해될 정도로 정말 긴 영겁의 시간이었는데, 그 사람이 끝끝내 그 무한한 시간을 뚫고 1,000조km를 걸은 후에, 단 2초간 진리를 체험하게 된다. 이반은 이때 설사 그 딱 2초, 진리를 느낄 수 있다면 기꺼이 1,000조km, 아니 그 수제곱 만큼의 거리를 감내할 수 있겠노라 말하는데 상당히 후덜덜한 대목이 아닐 수 없다.[45]

그리고 형 드미트리의 존속살해 건으로, 마지막에서는 그 재판을 다루고 있는데, 상당히 흥미로운 부분. 당시 러시아 재판장의 분위기를 잘 살렸을 뿐더러, 치밀한 플롯 전개로 읽는 이로 하여금 흥미를 가지고 읽게끔 하는 대목이다. 상당히 많은 페이지를 차지하면서도 전혀 지루하지 않고 마치 현대 재판을 보는 듯한 묘사는 역시 도스토예프스키다운 필력이 드러나는 대목.[46]

4. 영화

1958년에 개봉한 미국 영화가 있다. 감독은 리처드 브룩스. 배급은 MGM. 주연은 율 브리너, 윌리엄 샤트너, 리 J. 콥, 조지 케네디 등으로 평은 극과 극이지만 그럭저럭 볼만하다는 평이다. MBC에서 1988년 5월 28일 주말의 명화 더빙 방영한 바 있다.

마릴린 먼로가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같은 영화에 출연하고 싶다며 그루센카역에 자신이 잘 어울릴 것 이라고 말한바 있다.

니콜라스 케이지는 드미트리 카라마조프가 자신이 문학에서 가장 좋아하는 캐릭터라고 말했다. #

5. 평가

지금까지 쓰인 가장 위대한 소설.
지그문트 프로이트
소설가로서 궁극적으로 쓰고 싶은 건 '종합 소설'이다. 이를 정의 내리기란 어렵지만, 도스토옙스키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바로 그 예다.
무라카미 하루키
한 인간이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을 창조해냈다는 것은 경이로운 일이다. 이제 이토록 경이로운 일은 일어났고, 여기에는 그 어떤 설명조차 필요치 않다.
헤르만 헤세
창작자의 내면에 이는 온갖 모순과 동요를 도스토옙스키보다 탁월하게 입증해낸 작가도 없을뿐더러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만큼 이를 경이롭게 구현해낸 작품 또한 없다.
조이스 캐럴 오츠
지그문트 프로이트는 이 소설을 극찬했는데, 원초적 아버지가 모든 여성을 자기 것으로 만들고 나서 마침내 그 아들들에 의해 살해된다는 『토템과 터부』에 기술한 자신의 이론을 확인시켜주었기 때문이다. (중략)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한 인물 중에는 정상적으로 규범을 따르는 인물이 거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이 되고자 하는 그 무엇인데 그들의 의지는 전혀 연관성이 없다. 도스토옙스키도 마찬가지다. 그가 주인공 이반을 대하는 편협함은 화가 날 정도다. 사실 도스토옙스키의 의도는 우리를 격분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는 에즈라 파운드[47]에 필적하는 고약한 반유대주의자였으므로 확실히 유대인 비평가들의 반응에 대해 민감했다.[48] 도스토옙스키는 반계몽주의자이며, 전제정치 러시아 정교회 제정일치를 지지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서구화에 대한 격렬한 패러디 작가로, 러시아 민족은 선택받은 민족이며 그리스도는 러시아인의 그리스도라고 굳게 믿었다.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성은 종교적 색채를 드러낼 때 그 빛을 잃고 만다. 이 점은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결점이기도 하다. 이는 도스토옙스키가 가지고 있는 러시아 정교회 신앙이 영적인 통찰력을 결여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그의 신앙은 민족주의적인 해독이자 지성인의 질병이었다. "신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신을 믿는 사람들마저 믿지 않을 것이다"라고 확신한 조시마 장로의 말에 감동할 수 있겠는가? 이것은 마치 미국 남부 침례교회가 "그리스도는 공화당을 좋아한다"라고 설득하는 소리처럼 불편하게 들린다. 미국에서는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가 떠돌이 개를 잡는 일에도 종사할 수 없다. 짜증나는 현실이지만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비평가들이 거의 언급하려 들지 않지만, 도스토옙스키의 반계몽주의적 신앙은 매우 진부하다.[49][50]
해럴드 블룸[51][52]

[1] 실제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은 '알렉세이라는 인물의 어린 시절'을 동향인인 제3자가 회상하는 형식이다. [2] 이는 1866년 발생한 알렉산드르 2세 암살 미수 사건을 모티브로 한다. 처형당한 암살 미수범 이름은 드미트리 카라코조프이다. [3] 어찌나 무책임한지 아들들 중 어느 한 명도 직접 보살피지 않았으며, 나중에 아이를 데려다 기른 후견인이 연락을 했지만 징징대는 소리만 늘어놓으며 끝내 양육비를 한 푼도 대지 않았다고 한다. [4] 때리는 쪽은 아젤라이다였다고 한다. [5] 스페이드의 여왕의 여주인공 리자의 하위호환스러운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6] 당대에는 히스테리성 신경증이 부인과 질환의 일종이라고 믿었으며, 러시아에서는 이런 신경증을 앓는 여성을 가리키는 '클리쿠샤'(Кликуша)라는 용어가 있었다고 한다. 당대라고 할 것도 없이, 아주 오랜 기간 이는 일종의 사실로 여겨졌다. '히스테리'라는 말 자체가 고대 그리스어 휘스테라(ὑστέρα, 자궁)에서 유래한 말이다. [7] 출판사마다 다르다. [8] 최후반부 법정에서 마을 의사 게르첸슈투베가 드미트리의 성격과 행실에 대해 증언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처음 만났을 당시 어린 드미트리는 그리고리가 대충 돌보고 있었을 뿐 제대로 된 보살핌을 전혀 못 받고 있는 처지였다. 그래서 그가 가엾은 마음에 호두를 약간 사 주었더니 드미트리가 감사를 표했고, 며칠 뒤에 다시 마주치니 또 인사를 했고, 이후 드미트리가 다른 곳으로 가면서 오랫동안 못 만났는데 23년이나 지난 뒤 드미트리가 고향으로 돌아오자마자 가장 먼저 이 사람을 찾아와 다시 한 번 감사 인사를 하더란다. [9] 또한 자신을 키워준 그리고리에게도 나름의 정을 갖고 있어서, 집에 몰래 들어갔다가 나오려는 찰나 자신을 붙잡고 소리지르는 그리고리를 얼떨결에 공격했다가 죽인 줄 알고 경악해서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히기도 한다. 그런데 이날 표도르가 살해당하며 본의 아니게 드미트리가 부친살해 누명을 쓰게 된다. [10] 그루셴카를 사이에 두고 부자지간에 연적이 되었으며, 드미트리가 생모에게서 물려받은 거액의 유산이 있으나 표도르가 아들 몰래 차지했다고 한다. [11] 처벌받기가 싫어서 도망치려는 게 아니고, '자신이 짓지 않은 죄 때문에' 유형을 사는 건 받아들일 수 없기 때문이다. 대신 이국 땅에서 스스로를 단죄하고 정죄받기를 기도하겠다고. 러시아로 돌아오겠다는 건 본인보다도 그루셴카 때문이라 한다. 자기도 고국을 떠나기 싫지만, 자기를 위해 죄도 없으면서 고생길에 동행할 그루셴카도 고국을 그리워할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 [12] 도스토옙스키가 후속작을 계획은 했으나 끝내 쓰지 못하고 죽었으므로 이반의 운명은 열린 결말이 되어버린 셈이다. [13] 다만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의 스토리 자체는 드미트리와 표도르 간의 갈등과 드미트리의 재판이 주이며, 사상적인 부분에서는 이반의 고뇌가 더욱 두드러진다. 알렉세이는 극을 이끈다기보단 사건 주변에서 관찰하고 서술하는 역을 맡고 있는데, 그래도 나름대로 진 주인공 이름값인지 작중의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과 한 번 이상 대화를 하고 또 많은 사람들을 개심시키기도 했다. 머릿말에 보면, 도스토옙스키는 원래 알렉세이를 주인공으로 하는 최소 2부작 이상의 장편을 계획했었고 실제로 2부의 초안도 만들어 두었으나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출간된 지 얼마 안 돼서 세상을 떠났다. [14] 이반보다 몇 달 먼저 태어났고 나이는 같다고 한다. 이 작품을 원작으로 하는 국내 뮤지컬 브라더스 까라마조프에서는 알렉세이보다 한 살 어린 것으로 각색됐다. [스포일러] 표도르를 살해한 진범. 또한 표도르의 숨겨진 아들(동시에 드미트리, 이반, 알렉세이의 이복형제)이기도 하다. 그의 생모인 거지 리자베타는 백치였는데, 표도르가 그런 그녀를 겁탈해 임신시킨 사생아였던 것. 그녀는 후유증으로 아이를 낳자마자 곧 죽었다. 후일 진실을 알고는 자신을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는 표도르를 죽임으로써 어머니의 복수를 했다. 사건 현장과 정황을 절묘하게 계획해서 드미트리가 꼼짝없이 누명을 쓸 수밖에 없도록 꾸며놓았으며, 나중에 이반에게 자신의 범행을 자백하면서 "사실은 도련님도 아버지가 죽기를 바라서 나를 정신적으로 교사한 것 아닙니까? 나는 도련님이 원하던 대로 행동한 것뿐입니다" 하는 요지의 발언과 함께 "나에게도 당신과 같은 피가 흐르고 있습니다."라는 결정적 말을 하여, 이반에게 아버지의 죽음에 대한 깊은 죄책감을 안겼다. 이반은 그를 법정에 데려가 증언을 시켜 드미트리의 결백을 밝히려 했으나, 스메르쟈코프는 자신의 자백을 들은 이반이 떠난 직후 목을 매어 자살한 뒤였다. [16] 출생부터 죽음까지 비극으로 점철된데다, 박애주의자인 알료샤마저 이 자에게는 애정을 보이지 않고 거리를 둘 정도로 굉장히 고독했던 인물이기는 한데, 그 자신도 사람들과 친해지려 하지 않고 일부러 거리를 두는(시쳇말로 '자기가 세상을 왕따시키는') 타입이었다. 어릴 적부터 길고양이를 잡아 죽이며 놀았다거나, 양부 그리고리의 훈육에 제대로 따르지 않고 말대답을 일삼다가 호되게 얻어맞고 꾸중을 들었다거나, 자신에게 마음을 써 주었던 양모 마르파를 사랑하기는커녕 그의 다정함을 이용했을 뿐이라는 서술이 있다. 이런 점으로 미루어 보아 반사회성 성격장애가 있었을 수도 있는데, 그냥 타고난 사이코패스일 수도 있고, 제대로 된 애착 관계를 형성하지 못한 것이 원인일 수도 있다. [17] 자세한 정황을 보면 이 내용 역시 상당히 드라마틱하다. 카체리나의 아버지는 검열이 끝나면 자신이 지휘하는 부대에서 공금을 빼돌려 상인에게 빌려주었다가 다음 검열이 나오기 전에 이자와 선물을 붙여 되돌려받아 (당연히 이자와 선물은 자신이 챙기고) 원금은 다시 채워놓는 비리를 반복적으로 저지르고 있었다. 그런데 그가 은퇴할 시기가 다가오자 더이상 눈치볼 필요 없다고 생각한 상인이 곧 검열 시기이니 돈을 돌려달라는 요구에 '그런 돈 나는 모른다'고 잡아떼어버린 것. 이 때문에 은퇴를 앞두고 공금횡령범이 되어 처벌과 불명예를 피할 수 없게 된 카체리나의 아버지는 자살까지 시도하다 딸들의 만류로 겨우 살아남는 처지에 몰리게 된 것이다. 그런데 평소부터 친하게 지내던 상인의 아들을 통해 이러한 전말을 모두 알고 있었던 드미트리는 아가피야를 놀리기 위해 "아버님께서 공금을 잃어서 곤란한 처지에 빠지지 않으셨느냐, 만약 갚지 못하면 연로한 나이에 처벌을 받아 졸병으로 근무하셔야 할 것이다" 라며 "만약 돈이 필요하면 동생(카체리나)를 자신에게 보내라, 동생이 혼자서 온다면 돈을 주겠다"는 이야기를 한 것이다. 물론 이런 파렴치한 소리를 들은 아가피야는 드미트리에게 비열한 인간이라며 욕설을 퍼부었지만, 아버지가 자살을 시도할 정도로 극단적인 상황에 몰리게 되자 결국 카체리나에게 이 이야기를 전할 수 밖에 없었고, 카체리나 역시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나름의 각오를 하고 혼자서 드미트리에게 간 것이다. 그런데 드미트리는 그렇게 찾아온 카체리나를, (아가피야를 놀린 것과 마찬가지로) "농담으로 한 소리였는데 정말 믿었느냐"고 놀려먹는다거나, 돈을 주는 대신 다른 대가(예를 들어 결혼 약속 등)를 요구한다거나, 더 심하게는 (작가도 차마 작중에서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강압적인 성상납을 요구하는 등의 행동이 가능한 상황이었는데도 일순간의 변덕을 발휘하여 아무런 조건 없이 자신의 전재산이나 다름없는 5000루블짜리 수표를 내주고는 그저 정중하게 절을 한번 한 뒤 그대로 돌려보낸 것이다. 카체리나 역시 신세를 지고 모른척할 생각은 없어서 드미트리에게 "연락드릴테니 기다려 주세요" 라는 편지를 전하기는 하였으나, 이 시점까지만 해도 카체리나는 부유한 상속녀가 아니었고, 드미트리에게 받은 돈을 갚을 가망도 거의 없었으며 오히려 겨우 명예를 지키는데는 성공했지만 일련의 사건들로 인한 충격이 너무 큰 탓이었는지 수주일만에 아버지가 돌아가심으로써 고아가 된 처지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버지 사후 모스크바로 돌아간 카체리나는 마치 아라비안 나이트의 한 장면처럼 가까운 상속자를 모두 잃어 실의에 빠진 부유한 친척 노부인을 만나서 새로운 상속자로 지정됨으로써 처지가 완전히 바뀐 것. 결국 이 사건은 드미트리가 망나니 같은 행보를 보이는 것과는 별개로 본질은 순수하고 선한 인물임을 보여주는 장치이며, 동시에 카체리나가 이반을 좋아함에도 불구하고 드미트리와의 약혼을 결코 깨트리지 않으려는 이유가 단순히 '세상 사람들의 눈을 신경써서, 체면을 잃을까봐'뿐은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카체리나의 입장에서 드미트리는 자신이 가장 힘든 상황일 때 아무 조건 없이 기꺼이 전재산의 거의 대부분을 내주면서까지 자기 가족을 구해준 인물이기에 양심의 이유에서도 드미트리를 배신할 수 없는 것. [18] 어떤 여성이 약혼자의 동생(예비 시동생)과 눈이 맞아 파혼을 했다면(반대 성별로 바꾸자면 형의 약혼녀를 빼앗았다면) 요즘 세상에도 온갖 뒷말이 나올 것인데 당시에는 말할 것도 없었으며, 카체리나 본인 성격도 마치 순교자처럼 고결하게 미덕을 지키고 싶어하는 사람이다. 나쁘게 말하면 상류층 특유의 기만과 가식이 심한 인물이라고도 할 수 있다. 미챠도 말하길 "그 여자가 사랑하는 건 본인의 미덕이지 내가 아니다"라고. [19] "너나 나나 똑같이 못돼먹은 년들인데 누가 누굴 용서해? 저 사람(미챠)이나 구해주면 널 위해 평생 기도하겠어" 하는 식으로 좀 쌀쌀맞게 대꾸했다. 카체리나는 나중에 이에 대해 열을 내면서도 "그 여자는 끝내 날 용서한다고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여자가 더 좋다"고 평가했다. 두 여인 모두 츤데레 기질이 좀 있는지도. [20] 단순한 츤데레 이전에 일단 그루셴카와 카체리나 둘 다 본질적으로 선량하기는 해도 성격이 유순한 인물은 결코 아닌데다가 드미트리(미챠)를 사이에 둔 삼각관계이기 때문에 서로 사이좋게 지내면 그게 더 신기할법한 관계이다. 작중에서도 드미트리의 재판 한참 이전, 중반부에서 이미 정면으로 한판 붙은 적 있는 사이이기도 하다. 이 때 당시에도 일단 자신이 당연히 (신분상으로) 한참 위에 있다는 듯 오만한 태도로 그루셴카를 불러낸 것은 카체리나였지만 그루셴카 역시 호락호락하게 당하고만 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단 '자신은 미챠에게 아무런 연애감정도 없다'며 고분고분한 척 하다가 카체리나가 이를 화해할 뜻으로 받아들이고 우정의 키스까지 해 주자 갑자기 태도가 돌변하여 "생각해보니 나는 미챠가 무척 마음에 드는 것 같다, 꼬셔봐도 좋을 것 같다" 면서 "다음에 미챠를 만나면 아가씨는 자신에게 키스를 해주었지만 자신은 아가씨에게 키스를 해주지 않았다는 이야기를 해 주겠다, 아마 무척 재미있어 할 것" 이라고 카체리나를 웃음거리로 만들어버리기까지 했던 것. 이에 격분한 카체리나는 그루셴카를 화냥년이라고 욕하며 쫒아내지만 그루셴카 역시 (카체리나와 드미트리의 첫 만남을 트집잡아) '아가씨도 (지금은 그렇게 귀족연하고 있지만) 예전에는 돈이 탐나서 예쁜 얼굴을 팔러 간 적이 있지 않으냐, 자신과 뭐가 다르냐'고 막타를 한방 더 친 뒤 나가버린다. 그리고 이에 카체리나는 드미트리가 자신과의 첫 인연을 다른 사람도 아닌 그루셴카에게 이야기했다는데 충격을 받고 자신을 배신한 드미트리의 불성실함에 비통해했던 것. 결국 재판 이전부터 두 사람은 충분히 원수지간이었고, 재판 과정에서 카체리나가 돌발행동으로 드미트리에게 불리한 증거를 공개한 데는 이 갈등이 중요한 원인 중 하나였으며 결말에서 양쪽이 츤데레처럼 보이는 행동을 한 것은 그나마 상당히 화해한 결과라 보아야 할 것이다. [21] 두 사람의 어머니가 자매지간이라고 그루셴카가 스스로 밝혔다. 라키친은 마을에서 평판이 나쁜 그루셴카가 친척이라는 것이 수치스럽다는 이유로 두 사람이 사촌이라는 사실을 숨겨 왔으면서도, 정작 제가 아쉬울 때는 수시로 그루셴카에게 돈을 얻어다가 유흥비로 썼다고 한다. 그루셴카는 그래도 사촌이라고 자주 돈을 쥐어줬지만 재판에서 라키친이 드미트리에게 불리한 증언을 했을 뿐 아니라 그루셴카 자신까지 '상인 셈소노프의 첩'이라고 공공연히 모욕한 것을 눈치채고는 그가 자신의 친척일 뿐 아니라 자신을 공공연히 무시하면서도 뒤로는 돈을 얻어쓰는 표리부동한 인물임을 폭로함으로써 보복. [22] 요컨데 상당히 똑똑한 인물이고 그 재능으로 출세하려는 야심도 있는 인물이지만 문제는 자신이 가진 재능 이상으로 오만한데다 질투심이 강하고 비열한 성격에 그것을 제대로 숨기지도 못하여 타인의 호감을 얻지 못하는 인물이다. 몰락 역시 이러한 헛똑똑이형 인물들의 전형답게, 주변에서 조금 띄워주고 자신에게 유리한 상황이 만들어지자 방약무인하게 함부로 굴다가 응징당하는 형태였다. [23] 리자(Liza) 또는 리즈(Lise). 이 소녀의 본명은 리자베타(Lizaveta)이며, 러시아식 애칭은 리자가 맞으나 프랑스식 바리에이션인 리즈로도 불린다. 아버지의 이름이 언급되지 않아서 부칭은 알 수 없다. [24] 알료샤와의 대화에서 '조만간 14살이 된다'고 언급한 적 있으므로 작중 시점에선 아직 만 13세이다. [25] 일류샤가 쥬치카라는 개를 알고 지냈는데, 스메르쟈코프가 바늘을 숨긴 빵을 개에게 먹이는 장난을 가르쳐 주어서 그걸 쥬치카에게 시험했다가 쥬치카가 고통스럽게 울부짖으며 달아난 일이 있다고 한다. 이 일을 들은 콜랴가 일류샤를 크게 책망한 뒤 한동안 절교하다시피 했는데, 얼마 뒤 일류샤가 학우들과 싸우는 걸 콜랴가 목격했다. 일류샤는 콜랴가 자신을 비웃는다고 생각했는지 칼을 휘둘러 상처를 입혔지만 제가 한 짓에 놀란 나머지 금방 울면서 달아났고, 다행히 상처가 크지 않았던 콜랴는 일류샤를 감싸주기 위해 이 사건을 어른들에게 알리지 않았다. 나중에 일류샤는 중병에 걸려 앓아눕게 되는데, 자신이 아픈 건 그 때 쥬치카를 죽였기 때문에 벌을 받는 것이라고 말하며 양심의 가책으로 줄곧 괴로워했다고 한다. 이에 콜랴는 쥬치카를 어떻게 찾아내서 데리고 온 뒤(다행히 쥬치카는 그 빵을 완전히 삼키지 않고 뱉어냈기 때문에, 바늘에 혀를 찔리는 상처를 입긴 했으나 살아 있었던 것이다), 여러 가지 재주를 가르쳐서 일류샤에게 데려가 보여주었다. [26] 다만 콜랴는 쥬치카를 데리고 올 때 일종의 깜짝쇼를 꾸몄는데, 이는 물론 일류샤를 기쁘게 해 주기 위한 일이었지만 알료샤는 이런 행동이 안 그래도 쇠약해진 일류샤를 너무 놀라고 흥분하게 만들어 건강에 나쁜 영향을 줄 것을 염려한다. 즉 현명하고 선량한 인물이기는 하지만 아직 어린 나이이기 때문에 독단적이고 사려깊지 못한 면도 가진 것. [27] 바르바라라는 누나가 하나 더 있지만,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학교를 다니고 있어 비중이 많지 않다. 아버지인 니콜라이는 친딸인 바르바라를 '바르바라 니콜라예브나'라고 격식을 차려 부르며 존댓말을 하는데, 이 딸의 성격이 보통이 아니라 비위를 맞춰 주는 것이라고 한다. [28] 일류샤의 아버지인 니콜라이 일리치는 돈을 벌기 위해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대리인으로 일하고 있었는데, 아버지와의 소송 및 분쟁 과정에서 아버지의 대리인인 니콜라이가 속된말로 자신을 '엿먹이는데' 동참했다고 생각한 드미트리가 그 보복으로 니콜라이를 모욕한 것. 단순히 욕설이나 주먹질 정도의 모욕도 아니고 니콜라이의 수염을 잡아서 끌고다닐 정도의 심한 모욕이었다고 설명된다. 작중 다른 소년들이 일류샤를 놀릴 때 수세미 운운하는 것 역시 니콜라이의 수염이 수세미와 비슷한 모습인 것을 빗대어 놀리는 것. [29] 니콜라이 일리치는 공개적 모욕에 대하여 드미트리에게 결투를 신청할 수도 있었으나 하지 않았는데, 자기가 결투에서 패하고 죽기라도 하면 처자식을 부양할 사람이 없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작중 배경이 19세기다 보니, 일류샤의 학우들에게는 '너희 아버지는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욕 먹고 얻어맞고도 결투 신청도 못 한 겁쟁이라며?' 하는 식으로 놀릴 빌미가 되었던 것이다. [30] 콜랴에게 칼을 휘둘러 다치게 한 사건도 이 때 일이다. [31] '유로지비(юродивый, 러시아어 표기법에 맞게는 '유로디비')'의 여성형. 유로지비란 정교회적 금욕주의의 영향을 받아 러시아 문학에 흔히 나타나는 개념으로, 신의 뜻에 따르기 위하여 자신의 소유를 버리거나 고의로 관습을 무시하는 등 세속의 인간들의 눈에는 '바보스럽게' 비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말한다. # 작가의 다른 작품 죄와 벌의 여주인공 소냐(소피야 세묘노브나 마르멜라도바)와, 남주인공 라스콜니코프에게 살해당한 자매 중 동생 쪽인 리자베타 이바노브나 또한 이와 같은 인물상이다. 특히 소냐는 라스콜니코프가 직접적으로 유로지비라고 칭하기도 했다. [32] 작중에서 '리자베타의 아이의 생부(즉 정신이 온전치 못한 리자베타를 강간한 남자)가 표도르다'라고 딱 잘라 말하지는 않으나 아주 강력한 암시가 수 차례 나온다. 리자베타가 임신하기 전 표도르가 그를 두고 음담패설을 한 적도 있고, 리자베타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숨어들어 아이를 낳은 곳이 공교롭게도 표도르의 집 정원이었으며, 표도르는 리자베타가 낳은 '아비 모를 사생아'에게 자신의 이름을 딴 부칭이 붙는 것을 굳이 반대하지도 않았고, 적자들도 제대로 돌본 적이 없으면서 이상할 정도로 스메르쟈코프에게는 신경을 써 주기도 했다. 물론 끝내 자식으로 인정하지는 않았지만. [33] 이 고집스러움이 드미트리에게 큰 불운이 되기도 하였는데, 재판 과정에서 드미트리에게 불리한 증거로 제시된 것 중 하나가 '울타리 문이 열려있었다'는 그리고리의 증언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문은 열려있지 않았고, 진범인 스메르쟈코프의 설명에 따르면 고집불통인 그리고리는 문이 열려있었다고 착각하여 증언한 뒤 자기 스스로 그 말을 믿어버렸기에 자신의 증언을 절대로 철회하지 않으려 했다는 것. 그런데 이 사람이 고집스러운 만큼 성실하고 충성스럽기도 하다보니, 다른 사람들은 그의 잘못된 증언까지도 '결코 거짓말은 아닐 것이다' 라고 단단히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34] 마르파와의 사이에서 낳은 친자식이 하나 있었으나 다지증을 가진 기형아였으며, 생후 2주만에 요절했다. 공교롭게도 죽은 아이를 묻고 돌아온 당일 밤에 리자베타가 표도르의 집 정원에 들어와 아이를 낳다가 그리고리에게 발견됐으며, 마르파가 보살폈지만 결국 산모는 새벽녘에 숨을 거뒀다. 이에 그리고리는 아이를 마르파에게 안겨주며 죽은 친자식 대신으로 삼으라고 권했고, 마르파는 나름대로 아이를 사랑했는지 나중에 스메르쟈코프도 마르파가 자신에게 늘 다정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 [35] 어느 정도였냐면, 첫 아내가 집을 나가고 나서 자기한테 세 살 먹은 아들 드미트리가 딸렸다는 사실 자체를 잊어버려서 하인이 드미트리를 데려다 보살폈다고 한다. 나중에 드미트리는 어머니의 친척에게 의탁했다가 또 다른 집으로 보내지는 등 불안정한 유년기를 보냈다. 둘째 아내가 낳은 이반과 알렉세이도 어머니가 죽고 나서 하인이 보살피다가, 어머니의 후견인이 데려가 다른 사람에게 맡겼다. [36] 아버지를 실제로 죽이지는 않았으나, 죽이고 싶다는 마음을 품은 것에 대한 죄를 말한다. [37] 그러나 이반에게 강한 영향을 받고 있던 사생아 스메르자코프는 이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인다. [38] 스메르쟈코프는 자신을 아끼고 좋아하는 사람들을 포함해서 거의 모든 사람을 비웃고 조롱하는 인물이지만 그가 존중하는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가 바로 이반이다. 그리고 표면적으로는 서구식 세속주의와 합리주의의 영향을 무척 흠모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상은 그 겉모습만 어설프게 받아들였을 뿐 의미는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이 때문에 이반의 이야기를 전혀 엉뚱한 의미로 이해하고도 자신은 그가 가르쳐준 대로, 그가 시키는 행동을 했다고 여기는 것. [39] 러시아 정교회 소속 [40] 원문은 "Я думаю, что все должны прежде всего на свете жизнь полюбить." 이 책의 가장 중요한 대사 중 하나로 뽑히며, 도스토예프스키의 명언으로도 자주 언급된다. 참고로 민음사의 도스토예프스키 소설 전집을 사면 특별 노트를 증정하는데 이 노트 표지에는 도스토예프스키의 초상화 스케치와 함께 이 대사가 러시아어로 쓰여 있다. [41] 또 이 부분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가 그의 여느 작품들에서 그랬듯 "삶에 대한 사랑"을 강조함을 알 수 있다. [42] 이는 루카 복음에 전해지는 내용을 본뜬 것이다. 그 유명한 아람어 탈리타 쿰. 즉 '소녀야 일어나라'의 원조 [43] 정확히 말하면 말쑥한 옷차림이지만 호화롭지는 않은, 남의 집 식객이나 하급관료들이 단정하게 차려입은듯한 소시민적인 옷차림의 중년처럼 묘사된다. 말 그대로 '평범한 이웃처럼' 보이는 외견. [44] 악마 자신도 이반에게 '니 자존심에 안 맞는 모습이라 좀 그렇지? ㅋ' 같은 식으로 반응한다. [45] 이는 시속 4km 도보로 걸을 경우 약 289억년 동안 걸어야 함을 의미한다. [46] 각 역자 별 드미트리에 대한 묘사 번역 비교. [47] Ezra Pound ㅡ 미국 태생의 시인이자 문학 비평가로, T.S. 엘리엇과 더불어 20세기 미국 문단을 대표하는 시인이자, 당대 유명한 반유대주의자였다. [48] 이 글을 쓴 해럴드 블룸이 유대인 비평가였다. 즉 자신의 정체성을 거론하여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에 명확한 반대의사를 표명하고 있는 것이다. [49] 블룸이 아니더라도, 도스토옙스키 작품 이면에 숨겨진 정치적 극우성은 일찍이 많은 비평가가 비판해 왔다. [50] 러시아의 기독교 극우 세력은 21세기에도 살아남아 알렉산드르 두긴과 같은 파시스트를 배출했으며, 개중 몇몇은 " 예수는 유대인이 아닌 러시아인이다!"라는 주장을 하는 지경까지 도달했다. [51] 「사람이 알아야 할 모든 것 : 세계문학의 천재들」, 손태수 역, 들녘, 2008, p.864~865 [52] 단, 블룸은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이 뒤틀렸을지언정, 그의 소설 자체는 흥미롭다는 의견을 여러 차례 내비친 바 있다.